가와다 후미코 (지은이) | 오근영 (옮긴이) | 꿈교출판사 | 2014-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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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 배봉기 할머니(1914~1991)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주인공이다.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남의집살이를 전전하던 중에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데',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저절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데'가 있다는 '여자 소개꾼'의 말에 속아 자신도 모르는 새 위안부의 길에 들어섰다.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1944년 가을 도카시키 섬으로 끌려가 '빨간 기와집'이던 위안소에서 성노예가 되었으며 패전 후 일본에서 잘려 나간 오키나와에서 아메리카 세상이라 불리던 시대를 살았는데, 1972년에 오키나와가 일본 땅으로 복귀되자 불법체류자 취급을 받고 강제퇴거 대상이 되었다.
3년의 유예기간 안에 신청하면 특별 체류 허가를 내주는 조치가 취해져 배봉기 할머니는 그것을 신청했다. 그래서 출입국관리사무소 담당관의 취조를 받았다. 그 과정에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말하자면, 특별 체류 허가를 받는 대가로 '전 위안부'의 증언자로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배봉기 할머니는 '칼로 목을 콱 찌르고 싶은 심정'을 참고 살았다. 때로 언론을 기피했다. 뼈저리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면 몇 년에 걸쳐 반복된 취재 작업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는 70여 시간분의 테이프로 남았다. <빨간 기와집>은 과장 없이, 꾸밈도 없이 배봉기 할머니의 고지식할 정도로 솔직한 증언에 힘입어 만든 작품이다.
머리말 과장도, 꾸밈도 없는 최초의 증언 … 5
1. 방랑의 세월
만남 … 14
소녀 시절 … 23
흥남에서 오키나와로 … 49
빨간 기와집 … 71
전쟁 … 94
황군皇軍의 신발 … 124
도카시키 섬으로 … 141
2. 세 섬에 설치된 위안소
도카시키 섬 … 156
하츠코의 체험.징용병의 도망.가즈코의 그 후
자마미 섬 … 219
아카 섬 … 253
3. 신례원으로
신례원으로 … 274
해설 근대화의 미로 속으로 …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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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6-7 : 많은 피해자가 봉기 씨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고통을 전쟁 중에 겪었다. 그리고 현재 가난하게 혼자 살고 있다. 이들이 홀로 살아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위안소가 낳은 피해의 결과였다. 어떤 사람은 결혼 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자궁이 파괴되었고, 어떤 사람은 무수한 일본군 장병에게 유린당한 몸으로 결혼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못할 짓이라며 독신을 고집했다. 결혼을 해도, 위안소에 있었던 사실을 남편이 언제 알게 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그러면서 과거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견디다 못해 진실을 밝힌 뒤 부부 관계가 어그러지기 시작해 이혼에 이른 사람도 있었다. 봉기 씨처럼 전쟁이 끝난 뒤에도 무서운 고통의 세월을 살아온 것이다.
P.171 : 수류탄으로 자결한 사람, 수류탄이 터지지 않자 갖고 있던 톱이나 쇠스랑.칼 등을 사용한 사람, 그것조차 없어 나무토막으로 서로를 때린 사람, A고지에서 날아온 박격포를 맞고 폭사한 사람 등 그리 넓지도 않은 계곡 기슭에 약 300명의 시체가 첩첩이 쌓여 있었다.
P.302-303 : 아버지 최부기 씨는 지주로부터 소작지조차 얻지 못하고 농가에 고용되어 일했다. 어머니 이정순 씨는 친정에서 세 아이를 키우다 친정 부모가 돌아가신 뒤 가족이 모여 살 형편도 안 되는 빈곤을 견디지 못해 마을을 떠났다. 봉기 씨는 열일곱 살에 신례원에서 나온 뒤 방랑의 세월을 살았다. 남동생 용갑은 행방불명. 신례원 부근 마을에서 농사꾼으로 살면서 노쇠한 언니 봉선 씨도 지금은 안주할 곳이 없다. 50여 년 전에 뿔뿔이 흩어진 봉기 씨의 가족은 지금까지도 서로 행방을 모르는 채 긴 세월을 살아왔다.
윤미향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상임대표)
: 배봉기 할머니의 삶에서는 식민지 한국 사회, 전쟁, 딸들의 굴레가 보인다. 식민지 한국의 여성들이 일본이 저지른 전쟁 속으로 어떻게 끌려 들어갔으며 그 전쟁 속에서 인권을 유린당한 그들의 고통이 얼마나 깊었는지를 가슴으로 알 수 있다. 전쟁이 끝나고 70년 가까이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일본군 ‘위안부’ 생존자들의 절규가 배봉기 할머니의 삶에 절절하게 스며 꿈틀거리고 있다.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4년 8월 16일자 '새로나온 책'
조선일보
- 조선일보 북스 2014년 8월 15일자 '한줄읽기'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4년 8월 17일자
저자 : 가와타 후미코 (川田文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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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몇 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빨간 기와집>,<빨간 기와집> … 총 5종 (모두보기)
소개 :
저널리스트. 1966년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출판사 근무를 거쳐 전업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에서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오키나와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배봉기 할머니에 관한 기록 《빨간 기와집―일본군 위안부가 된 한국 여성 이야기》(1987)는 장기간의 인터뷰를 통해 닫혔던 마음의 상처와 기억들을 올곧이 드러낸 작품이다. 이후 《황군위안소의 여자들》(1993), 《전쟁과 성―근대 공창제도.위안소제도를 둘러싸고》(1995), 《인도네시아의 ‘위안부’》(1997), 《수업 ‘종군위...
역자 : 오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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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살아있는 112가지 원소에 얽힌 재미있는 화학상식>,<안경을 쓴 용,중국> … 총 152종 (모두보기)
소개 :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소설과 에세이 등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여러 작품들을 번역해왔다. 《포르투나의 눈동자》 《랫맨》 《생명의 릴레이》 《명탐견 마사의 사건 일지》 《유레루》 등 다양한 장르의 소설을 번역하였으며, 특히 《밤은 가득하다》 《욕망》 《소문》 《유리정원》 《아내의 여자 친구》 등 고이케 마리코의 작품들 중 다수를 한국에 소개했다. 그 밖에 옮긴 책으로는 《남들처럼 결혼하지 않습니다》 《나답게 살 용기》 《내가 공부하는 이유》 등이 있다.
과장도, 꾸밈도 없는 최초의 증언
배봉기 할머니(1914~1991)는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주인공이다. 가난한 집의 딸로 태어나 남의집살이를 전전하던 중에 ‘일하지 않고 돈을 벌 수 있는 데’,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고 있으면 저절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데’가 있다는 ‘여자 소개꾼’의 말에 속아 자신도 모르는 새 위안부의 길에 들어섰다.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1944년 가을 도카시키 섬으로 끌려가 ‘빨간 기와집’이던 위안소에서 성노예가 되었으며 패전 후 일본에서 잘려 나간 오키나와에서 아메리카 세상이라 불리던 시대를 살았는데, 1972년에 오키나와가 일본 땅으로 복귀되자 불법체류자 취급을 받고 강제퇴거 대상이 되었다. 3년의 유예기간 안에 신청하면 특별 체류 허가를 내주는 조치가 취해져 배봉기 할머니는 그것을 신청했다. 그래서 출입국관리사무소 담당관의 취조를 받았다. 그 과정에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말하자면, 특별 체류 허가를 받는 대가로 ‘전 위안부’의 증언자로서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이다.
배봉기 할머니는 ‘칼로 목을 콱 찌르고 싶은 심정’을 참고 살았다. 때로 언론을 기피했다. 뼈저리게 호소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면 몇 년에 걸쳐 반복된 취재 작업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는 70여 시간분의 테이프로 남았다.
《빨간 기와집》은 과장 없이, 꾸밈도 없이 배봉기 할머니의 고지식할 정도로 솔직한 증언에 힘입어 만든 작품이다.
기억해야 하는 삶, 끝나지 않은 이야기
눈 밝은 독자라면 《빨간 기와집》에서 이상한 점이 보일 것이다. 언론을 통해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로 ‘배’봉기 할머니가 알려졌는데, 저자가 할머니의 고향을 찾아가서 확인한 호적에는 할머니 부친의 이름이 ‘최’부기로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이 의도적인 오기에는 그간 말하지 못한 사정이 있다. 일본이라는 국가가 저지른 범죄 행위를 세상에 드러낸 배봉기 할머니는 바로 일본 땅에 살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위안부 할머니들이 당당히 고개를 들고 산 지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배봉기 할머니가 느꼈을 불안과 두려움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어 사실대로 밝히지만, 《빨간 기와집》을 처음 출간할 무렵 저자는 배봉기 할머니와 그 가족에 대한 보호 장치로 ‘성姓’을 감출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책이 처음 나온 1987년 이래 세상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위안부 할머니들이 일본대사관 앞에서 여는 수요집회는 1992년에 시작되어 1100회를 훌쩍 넘긴 지금까지 끝을 보지 못하고 있다.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이 살아 있는데도 일본은 사죄와 배상은커녕 역사를 부정하는 억지를 쓰고 있다. 전쟁이 끝나고 70년 가까이 흘렀지만 할머니들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배봉기 할머니의 삶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힘없는 이들에게 강요된 전쟁: 오키나와 집단 자살 사건과 군 위안부
배봉기 할머니가 끌려간 오키나와는 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지상전을 겪은 곳이다. 미군이 상륙한 1945년 3월부터 약 3개월 동안 벌어진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이 약 20만 명이고, 그중 오키나와 주민이 15만 명이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의 3분의 1이 희생된 것이다. 이 어마어마한 희생 중에는 ‘집단 자살’이라는 믿지 못할 사건도 있다.
명예나 충절을 위한 죽음을 뜻하는 ‘옥쇄玉碎’를 완수하라는 군 사령부의 명령, 미군에게 잡히면 능욕과 잔혹하게 죽임을 당할 거라는 불안이 수많은 사람을 자살로 이끈 것이다. 섬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위안부가 필요하다는 말에 군 위안소의 설치를 받아들이고 집과 땅과 농작물과 노동력을 내준 오키나와 사람들 중 수백 명이 목숨까지 바친 사정을 보면, 배고픔이라도 면하고 싶다는 바람밖에 없이 순종하며 살다 전쟁의 참혹함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던 위안부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배봉기 할머니를 비롯해 군 위안소과 관련된 사람들의 목소리가 차곡차곡 담긴 《빨간 기와집》은 단순히 ‘일본으로 끌려간 한국인 위안부’의 이야기만 들려주는 것이 아니다. 전쟁의 상처가 국경을 넘어, 힘없는 사람들에게 더 참혹하게 남는다고 말하고 있다. 군 위안부 문제에 우리가, 전 인류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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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 2편
오끼나와에서(2)- 배봉기 할머니를 생각하며 rosa ㅣ 2015-12-13 ㅣ 공감(7) ㅣ 댓글 (2)
나하시 토마리항에서 페리를 타고 도카시키섬으로 떠났다. 도카시키섬에 살았던 분들을 떠올리며, 그곳에 있는 특별한 위령비를 찾아가보기 위해서였다.
1943년, 29살의 배봉기는 "과일이 지천이어서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면 절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서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에, '돈 많이 벌면 뭐할거냐'는 말에 괜히 설레어하며 모집인을 따라나섰다. 그가 도착한 곳은 도카시키섬.
선착장에서 천천히 걸어도 3~4분이면 도착하는 빨간 기와집. 그곳에서 그녀보다 어린 다섯 명의 한국인 여성들과 일본군 '위안부'의 삶을 강요당했다.
도카시키섬 관광 안내도에는 물론 이 집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우연히 본 한겨레 기사를 근거로 구글지도를 클릭해가며 대략의 위치를 찾아갔다. <빨간기와집(가와다 후미코, 꿈교출판사)>을 보면, 미군 공습 때 원래 집은 파괴되었고 전쟁 후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다시 집을 지었다고 한다. 혹시라도 그곳에 사는 분께 폐가 될까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과거' 때문인지 한때는 누군가에게 임대해줬었다는 집이 잡초만 무성한채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줬다.
한국어로 된 관광안내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위령비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처음 여기를 가려고 하자, 내 일본인 동료는 더운 날씨에 걸어가기엔 너무 오르막이라며 걱정했다. 그곳으로 가는 버스가 없기 때문이다. 도카시키섬의 버스는 선착장과 아하렌비치 사이를 운행하는데 이마저도 배 운행시각에 맞춰서 타야 한다.
도카시키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딱 두 가지였다. 빨간 기와집과 아리랑 위령비. 그리고 시간은 넉넉했다.
아하렌비치로 가는 차도 왼편으로 구불구불한 도로가 펼쳐진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 위에는 내 거친 숨소리와 까마귀 소리만 들렸다.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면 오히려 무서웠을 것이다. 관광포인트와 멀어서인지 차량도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 위를 30분 넘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걷고 또 걸었다. 조금만 더 힘내서 가자고 생각했을 때, 오른 편에 나타난 아리랑 위령비.
위령비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리랑 위령비는 1997년 마을 주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끌려온 한국인 위안부들을 추모하는 뜻에서였다고. 안타깝게도 돌보는 이가 없는 탓인지 잡초가 무성하고 비문은 군데군데 읽을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다. 비도 오고 바람이 불고 마음은 쓸쓸하고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이 위령비가 만들어질 때 도카시키섬 어린이들도 직접 그림을 그려 동참했었다고 한다. 그때의 마음과 뜻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금방 내려가버리면 할머니들이 서운해하실까봐 가만히 앉아서 한참을 책을 읽다 내려왔다.
배봉기 할머니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힌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할머니가 위안부였음을 스스로 밝힐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1972년 오끼나와가 일본정부에 반환될 때, 할머니의 체류자격이 문제가 되었고,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했다.
아리랑 위령비에서 내려오다 전망대에 올랐다. 선착장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마을 한복판에 빨간기와집이 있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식민지 조선의 여인들이 이 먼 외딴 섬까지 끌려와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았다. 세월이 아무리 흐른대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700명 정도 밖에 살지 않는 도카시키섬에 1000명의 일본군이 들어왔을 때, 마을 주민들은 감격했다고 한다. "우리 같은 작은 섬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군대를 보내줬다"고. 물론 이런 감격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초등학생 아이들까지 강제노역에 동원당하고 식량을 빼앗기고 마지막 순간에는 '옥쇄'를 위해 자결할 것을 명령받는다. 도카시키섬 주민 가운데 300명 이상이 일본군의 집단자결 명령/강요로 사망했다고 한다.
오끼나와 사람들은 지금도 오끼나와 전투때 일본군이 주민의 집단 자결을 강제했다는 내용을 교과서에 기술하라고 일본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여행 혹은 방랑 - 오끼나와로 떠나기 전전날 rosa ㅣ 2015-11-17 ㅣ 공감(4) ㅣ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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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다 가는 휴가를 일이 밀려 못 가고 뒤늦게 휴가를 가겠다고 덤비고 있다.
망설이다 조금 더 가격이 올라버린 항공권을 손에 쥐고, 여행일정을 짜고,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고, 책도 두 권을 사고, 일정을 다시 조정하고, 그리고 또 야근에 야근...
휴가라고 떠나야 근 7주만에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을 듯......
휴양지에서 띵가띵가 보내는 건 내 체질에 안맞나 보다.
렌트카는 필수라는 오끼나와를 버스와 배, 도보로 움직여보기로 한다.
오랫동안 가보고 싶었던 곳, 오끼나와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다.
어느새 하루하루 일정을 잡아가며(꼭 해야하는, 가장 중요한 일을 매일 하나씩 정해놨다. 사실 제일 중요한 밑그림은 완성된 셈.) 오끼나와로 떠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그 전에 베트남에 발송할 공문도 준비하고, 예약도 진행하고... 숨가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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