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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5

한겨레:온 모바일 사이트, 영암 사람 (1) 김반아

한겨레:온 모바일 사이트, 영암 사람 (1)

http://m.hani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779



영암 사람 (1)

작성 김반아 주주통신원 | 승인 2020.10.24 10:27:50



장기간의 이민 생활 중에 해 온 것이 무엇인가를 되짚어 보니, 모두가 한국에 돌아가서 할 일을 준비하는 작업이었다. 반세기에 걸쳐 준비한 내용은 아래와 같다.

<비전 세우기>: 최고로 가치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뜻 맞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실력 키우기>: 가슴의 언어 실력, 국제적 통찰력, 남북과 소통하기, ‘함께-창조 영성예술’ 만들기

<자리잡기>: 한국 내에 적절한 장소에 안착하기,


나의 ‘비전 세우기‘는 지구촌 경험과 맞물려 있고, 특히 ’미국 체험’과 직결되어 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후, 노르웨이/스코트랜드계 환경공학가였던 미국인 남편과 두 번째 결혼을 하여 미주리 주 Mark Twain National Forest 남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는 Seymour 숲속 집에서 십년을 살며, 마차를 몰고 다니는 아미쉬 식구들과 길을 공유하며, 그 들 집에 가서 양유를 사다 먹었다,

남편 에릭과의 만남은 위대한 미국을 만든 저력의 정체를 알게 된 소중한 기회였다. 성실한 미국사람들에 대한 감동적인 체험을 했고, 한국에 돌아와서 태평양 너머로 붕괴해 가는 패권주의 미국을 지켜보면서 새로운 미국이 떠오를 날을 고대하고 있다.

에릭은 피부암이 뼈와 뇌로 번져 2011년에 사망했다. 그 직전에 제주도에서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신 후, 뇌수술을 받으셨다. 2012년부터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기 위하여 제주에서 체류하면서 <사단법인 생명모성>을 세우려고 했는데, 그 때 이미 ‘생명모성’이란 남성에도 해당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인류사회가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는데 일생을 바친 에릭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2013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하와이의 크리스틴 안의 요청으로 2015 Women Cross DMZ 공동 조직 일을 맡고, 어려움 끝에 드디어 2015년 5월 27일에 30명의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이 평양에 가서 5천명, 개성에서 2천명의 여성들과 평화시위를 하고 휴전선을 넘어서 임진각으로 내려왔다.

그해 후반기에는 샹하이에 살 던 딸 식구가 캘리포니아주의 헐리우드 부근으로 이사하게 되어 함께 지내면서, 아이들의 활동 관련으로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세계를 가까이 들여다 보게 되었다. 그로부터 5년 후에 영암으로 돌아와 자리잡게 되었는데, 환상과 허상의 세계인 헐리우드에서 무엇인가 심한 결핍을 느꼈던 바로 그 '기운'을 품고 있는 곳이라는 사실에 입각해서 선택된 곳이다.

결국은 깊은 샘과 같은 한국적인 정서에 대한 이야기로 초점이 모인다. 영암에서 최근 일어난 극적인 경험이 있는데, 내가 사는 군서면 5일장에서 만나게 된 한 여성과 관련된 일이다. 내 집에서 걸어 나오면 보이는 곳에 (매달) 2일, 7일에 '군서 5일장'이 서고, 야채 파는 한 여성과 눈이 마주치며 가슴의 연결이 생겼다. 그녀는 내가 장터에 나갈 때마다 뭔가를 좀 더 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이번 추석 직후 7일에 선 5일장에 나가보니까 장마당이 텅 비어 있었다. 5일장을 좋아하는 나는 버스를 타고 15분 거리에 있는 곳에 (매달) 5일과 10일에 서는 '영암 5일장'에 갔다. 모든 식재료를 5천원 단위로 팔고 있어서 혼자 살면서 한 달에 2주간은 서울에서 보내는 내게는 너무 양이 많았다. 한 곳에 연한 부추를 팔고 있는 자리가 보여서 다가가서 “부추 천원어치도 팔아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마스크를 쓰고 머리에 햇빛 가리개를 하여 얼굴이 거의 다 가려진 여성이 나를 힐끗 보더니 앞뒤를 돌면서 살펴보다가 “아니 어떻게 여기까지 왔오?” 한다. 나도 그녀를 자세히 보니까 바로 내 친구 그 여성이었다.

생각 밖의 만남에 기쁨이 터져 나오면서 “군서 오일장에 가니까 아무도 없어서 오늘은 마음먹고 버스타고 영암 5일장에 왔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부추를 천원어치 산다고? 전 부쳐먹을라고 하나...” 하더니 검은 봉지에 빨간 고추 네 개와 연한 부추를 수북이 담는다. “아니 그건 너무 많아요. 혼자 다 못 먹으면 상해 버릴 텐데...” “아니 이거 연하고 맛있어서 다 먹을 수 있어. 여기 배추도 한 개 가져가고...” 그래서 “아, 제일 작은 걸로, 나 내일 서울 올라가요.”라고 말하니까, 그녀는 내 말은 무시하고 “냉장고에 넣어 놓고 가.” 하더니 '돈은 안 받겠다'고 한다. ('하 참, 이게 영암이구나!')



▲ 행자씨는 배추를 하나 집어 들더니 껍질을 벗기고 초장에 찍어 먹으라고 속만 주었다.


이틀 후에 군서 5일장이 또 섰다. 나는 산책을 나가다 보고 잽싸게 집으로 돌아가서 준비해 놓았던 건포도 한 봉지를 들고 장마당으로 돌아갔다. 그 여성은 멀찍이서 나를 알아보고 손짓을 하며 또 반긴다. 건포도 봉지를 건네주면서 이름을 물었더니, “최자, 행자, 자자. 최행자” 라고 한다. “내 이름은 김반아에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앞으로 그녀는 나를 “언니”라고 부르겠다고 하며, 자기를 “행자씨”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이 해프닝은 내 가슴에 큰 진동을 울리며 다가왔다. 이렇게 해서 최행자는 구림마을의 정서를 대표하는 중심인물로 나의 영암 이야기 속에 등장했다, '최고로 가치로운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하여 뜻 맞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라는 나의 꿈이 영암에서 실현되는 데 있어 핵심적인 인물로 등장한 최행자...

이런 희귀한 인간관계가 지금과 같은 각박한 세상에 가능하다니... 우주가 보내주는 선물이고 좋은 징조다.


이런 과정으로 해서 월출산의 영험한 기운이 실체가 되어 우리 두 여성의 혼을 연결하며 흐르게 되었다. 영암을 근거로 앞으로 일어날 “함께-창조“ 사건들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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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 허익배 편집위원



김반아 주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2020-09-08

김삼규(金三奎) 중립화통일론

김삼규(金三奎)

정치인물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김삼규
출생일1908년사망일1989년경력서울대학교 교수, 동아일보 편집국장
정의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교수, 동아일보 편집국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내용
전라남도 영암 출신. 1931년 일본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문학부 독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45년 동아일보 조사부장이 되었으며,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문학과 주임교수를 역임하기도 하였다. 다시 언론계로 돌아와 194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1949년 취체역 주필로서 활동하였다.
특히, 6ㆍ25 기간중에 일어난 국민방위군부정사건과 거창양민학살사건을 비판, 이승만(李承晩)정권의 미움을 사 결국 1952년 동아일보를 퇴사하고 일본에서 민족문제연구소를 개설, 소장으로 취임하고 조국의 평화통일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의 통일방안은 중립화통일(中立化統一)이었다. 무력통일을 내세웠던 자유당정권 하에서 중립화 평화통일론을 제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의 통일론의 요지는 4+2의 6자 회담이다. 우리나라의 분단은 강대국의 이해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런만큼 통일도 그들의 이해에 맞아야 한다는 전제 아래 한반도를 에워싼 미·소·중·일 등 4대강국의 이해가 맞는 통일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4자와 남북한이 참가하는 6자회담을 열어 관계국의 안보와 평화에 기여하는 통일방안을 논의한 뒤에 남북한이 자주적으로 통일하는 중립론을 제창하였다.

그의 중립론은 1954년 제네바회담 때 미국과 영국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으나 이승만정권에 의하여 즉각 거부되었다. 1957년 일본 동경에서 월간 『코리아평론』을 창간, 주간을 맡아 일본을 무대로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집필자
개정 (1995년)송효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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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시대의 중립화통일론과 21세기의 한반도통일: 맨스필드,김삼규,김용중의 논리분석을 중심으로
Articles : Analysis on the Suggestions of One Korea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by Mike Mansfield, Kim Sam-Kyu, and Kim Yong-Jeung under the 2nd Republic of Korea

엄상윤 ( Eom Sang Yun )
발행기관 : 한국국제정치학회
간행물 : 국제정치논총 43권2호
발행년월 : 2003년 06월
페이지 : 97-121(25pages)

키워드 보기
한반도통일 중립화 통일론 김삼규 김용중 Mans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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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 보기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도 한반도통일은 여전히 한민족이 해결해야 할 지난한 난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실정에 적합한 통일논리와 정책대안 개발에 부단한 노력이 요청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 연구는 한반도지역의 양극적 국제체제하에서 한반도통일론의 적실성을 판별할 수 있는 객관적 분석틀을 개발·제시하고, 이에 의거하여 제2공화국시대에 활발히 제기되었던 중립화통일론들중 맨스필드, 김삼규, 김용중의 논리와 내용 분석을 통해 그 해답의 일단을 찾아 보고자 했다. 

국내외적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당시는 물론 통일환경이 크게 변화한 오늘날에도 중립화가 한반도의 통일·독립을 모색하는 이상적 모델로 간주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은 심각한 의문으로 남는다. 물론 당시 제기되었던 중립화통일론들의 이론적·현실적 결함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과정에서의 평화·민주원칙 견지, 주변외세들의 이해관계와 역할 인정, 탈이념적 통일문제 접근과 이념적 승리에 대한 집착 탈피, 통일한국의 극단적 진영편중 지양 등 한반도지역의 양극적 국제체 하에서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 면도 적지 않았다. 또한, 중립화통일의 실현과정·절차 및 이의 유지를 위해 이들이 제시한 구체적 대안들도 향후의 통일논리나 정책개발에 유용한 참고자로로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당시 개진되었던 다양한 중립화통일론들중 통일준비단계와 통일단계를 구분하여 외세와의 헙조하에 자주적·점진적 선중립·후통일을 역설한 김용중의 중립화통일론은 논리와 내용 면에서 가장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 시대의 중립화통일론이 가지는 이론적·정책적·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How to realize Korean unification may be very difficult problem even in the 21st century. But we should fii suitable solutions to Korean situation in order to get out of headstall from divided Korea. In this purpose, this article developed a new framework for estimating the suitability of Korean unification suggestions under bi-polar international system in Northeast Asia and analyzed one Korea suggestions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by Mike Mansfield, Kim Sam-Kyu, and Kim Yong-Jeung under the 2nd Republic of Korea. Today one Korea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itself cannot be come true because a unified Korea will be too strong to neutralize. And these suggestions have not a few weaknesses. Nevertheless, some of these suggestions would be very useful in search of Korean unification solutions even in the 21st century. Especially, Kim Yong-Jeung`s suggestion can be estimated the best meaningful among them.
UCI(KEPA)
I410-ECN-0102-2009-340-003519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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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영세중립화론자 김삼규(金三奎)
Posted by 신이 On 6월 - 14 - 2017

http://dongne.donga.com/2017/06/14/7-%EA%B9%80%EC%82%BC%EA%B7%9C%EF%A4%8A%E4%B8%89%E5%A5%8E/

“▲ 45.12 조사부장, 편집국장, 주필, 취체역 주필, 편집국장 겸, 취체역, 도쿄특파원, 53.11 퇴사.〔민족문제연구소장(재도쿄)〕”

(동아일보사사 2권, 인명록)



“망명 아닌 망명

김삼규는 현역언론인들에게는 거의 전설상의 선배가 되어가고 있다. 그가 급서한 뒤 일본 아사히신문 사우들이 중심이 되어 ‘언론인 김삼규’간행이 계획되었다. 필자에게도 집필의뢰가 있어 ‘망명 아닌 망명’이란 제목아래 추도사를 기고한 바 있다. 언론인 김삼규하면 누구나 왜 조국을 떠나 일본에서 활동하다 급서했는가? 가장 의문스러운 점으로 제기된다. 그 해답을 얻기위해 ‘망명 아닌 망명’을 그대로 옮기기로 하고 뒷부분에 그의 생애를 연보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작년(88년) 서울에서 1주일쯤 선생과 함께 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는데 지금 선생 추도사를 쓰게 되다니 기가 막힐 노릇입니다. 서울에서의 선생은 배탈로 죽으로 보내시는 나날이었지만 그래도 노령답지 않은 건장한 모습이셨는데….

선생의 생전에는 ‘왜 조국을 버리고 외국에서 생활하고 계시느냐’고 비난하는 소리도 적지않았습니다. 40년도 지난일, 더구나 선생은 유명을 달리하고 계십니다. 선생의 훈도를 받은 후학의 한사람으로서 선생을 대신하여 ‘망명 아닌 망명’의 진상을 밝히는 것도 조금은 선생의 공양이 되지 않을까하고 감히 펜을 들었습니다.

선생을 뵌 것은 필자가 동아일보에 입사한 49년 6월이었습니다. 역산해보니까 선생이 꼭 40의 언덕에 도달한 즈음이었습니다. 부드럽기 이를 데 없던 만년의 선생의 모습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정의감에 불타는 무서운 주필 겸 편집국장이었습니다. <그 전해(1948년) 이승만 김구 양 민족지도 자가 회견도 하지 않았는데 마치 덕수궁에서 회견한 것처럼 사진(몽타즈)까지 곁들여 보도한 책임을 지고 고재욱 주필이 고문으로 물러섰기 때문에 선생이 겸임하고 있었다.>

더구나 필자가 병아리 정리부기자(사회면 담당)여서 매일처럼 ‘이게 제목이야!’고 고함치시기가 일쑤였습니다.

선생은 연일처럼 사설을 통해 민주주의 궤도를 벗어나기 시작한 이승만 정권을 정면 질타하여 정부여당을 전율케 하였습니다.

그렇다고 정부 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습니다. 음으로 양으로 이손저손으로 언론탄압을 하기 시작해 언제부터인가 선생 주머니 속에는 사직원이 간직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수일 후 서울이 북괴군의 수중에 떨어져 신문은 자연휴간.
그 후 동년 9월 28일의 서울탈환 후 10월에는 신문도 다동뒷골목의 조그마한 인쇄소에서 속간하게 되었지만 그것도 눈 깜빡할 사이, 공군의 개입으로 서울을 다시 내주게 되었습니다.

그해 12월 중순부터 다음해(51년) 1월 3일의 서울철수까지의 약 2주간, 선생은 겨우 다섯명의 편집진과 수명의 문선(文選), 식자공과 가까운 수표동 소재 조인상 당시 취재부장 댁에서 합숙하면서 유일한 중역-49년 11월 외부로부터 편집국장으로 영입된 장인갑은 전쟁 발발직후 북괴군에 납북되어 선생은 또다시 편집국장을 겸하고 있었습니다. 고재욱 고문을 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 낙선 후 퇴사상태-으로 잔류하여 ‘신문이 휴간해서는 안된다’는 신념아래 독자도 없는 신문제작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51년 1월 3일 영하 10여도의 혹한 속 수명의 사원과 쓰다 남은 신문용지 30수련을 가지고 입추의 여지도 없는 화물차에 몸을 싣고 피난수도 부산으로 향했습니다.

그 동안의 고난은 필설을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부산에서는 그곳 지방지 민주신보의 호의로 석간지인 동지가 인쇄를 끝난 다음 그 공장에서 조간으로 발행하게 되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셋방살이였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동아일보의 성가는 날로 늘어나 철야로 인쇄해도 모자라는 놀라운 발전상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국민방위군사건을 비롯하여 수많은 정부 측의 실정이 선생의 예리한 필봉에 의해서 파헤쳐져 동아일보의 사설은 피난 수도의 화제를 독점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음날 조간제작을 끝낸 뒤 합숙소(영도)에 있던 선생 친지의 공장 한 구석에 돌아가 몇시간 가면(假眠)후 아침 일찍 일어나 받아 든 신문을 보니 사설란이 삭제된 채 인쇄되어 있지 않습니까.

주필, 편집국장은 고사하고 편집자도 모르는 사이 사설란이 없어지다니….
언론사상 전대미문의 일대춘사에 선생은 격노했습니다. 물론 사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누구의 압력에 의한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명명백백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설은 당시의 백재정(백두진 재무장관-부완혁 이재국장-황호영 이재과장)을 신랄히 규탄한 내용의 것이었습니다.

이들 중 누군가가 어느 선인가를 교묘히 움직여 이뤄놓은 간계임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후일담이 되지만 그때 선생은 ‘이젠 안되겠다’고 단념하셨다는 것입니다. 통한 이를 데 없는 선생의 자태는 패군지장 그대로였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조금전에 선생의 가족은 일본인이었던 부인의 향리에 기거하고 있었으므로 선생도 잠시 가족과 상봉하기 위해 일본도항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51년 9월 ‘두 달쯤 후에 돌아올께’하며 선생은 현해탄을 건너가셨는데 이때 선생 흉중에는 깊이 간지하는 바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이것이 선생의 망명 아닌 망명의 진상이다.

김삼규의 일본망명(?)의 시비는 고사하고 지금 되돌아보면 동아일보 70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활기찬 시대는 그가 진두지휘했던 그 시대였는 것 같다.

 

 

일본 쓰루가 시에서 숨진 ‘중립통한론자’

 

김삼규는 1908년 6월 16일, 전남 영암군 영암면 서남리에서 김주찬의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21년 일본에 유학중인 둘째형 민규를 의지하여 도쿄 유학길에 올라 가이조(海城) 중학에 입학한다.

그 후 김삼규는 22년 4월 신설된 7년제 도쿄고등학교 심상과 2년에 편입, 고등과정을 마치고 28년 당시 조선인으로서는 좀처럼 힘들었던 수재들의 동경의 표적이던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독문과에 입학하게 된다.

이때부터 김삼규의 무정부주의는 싹트기 시작한다. 그가 무정부주의에 심취하여 무산자사 동인이 되어 반제동맹에 가입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이러던 중 광주학생사건이 일어난다. 도쿄에서 궐기한 김삼규는 영암 도쿄유학생회 위원장 명의로 격려문을 보낸 것이 경찰에 발각되어 현지에서 체포되어 유치되고 만다.

얼마 후 풀려나온 김삼규는 이 무렵인 30년, 무산자사 위원장이 되면서 일본인 고노(河野依子)와 결혼, 다음해인 31년 도쿄대학을 졸업한다.

그러나 신혼의 즐거움도 잠시, 김삼규는 그해 8월 체포되어 서울로 호송되고 만다.

34년 8월 석방된 김삼규는 그 해 10월 다시 도쿄로 되돌아가 가네코(金子和)라는 필명으로 레뷘 슈킹의 ‘문학과 취미’를 번역, 출간하면서 본격적인 문필생활을 시작한다. 그러고 그의 형극의 길은 다시 시작된다. 36년 그는 조선예술좌와 관계, 다시 체포되어 1년간의 옥고를 치른 뒤 석방된 후 38년부터는 헌책방 아오바라(靑原)서방을 경영한 일도 있다. 김삼규는 40년 1월,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목포에 정착, 장형 봉규의 사업에 참여한다.

김삼규의 신문사 생활은 해방된 45년 12월 동아일보에 입사, 조사부장이 되면서 시작된다. 이 때 그는 서울 돈암동에 살고 있었다.

48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으로 주필을 겸했던 그는 7월에는 취체역이 되었는데 50년 6.25가 터지자 부산에 내려가 신문을 내다가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에 유엔군 종군기자로 참가했다.

51년 김삼규는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폭정을 탄핵하는 논조로 독재정권과 맞서다가 정부의 언론탄압이 극에 달하자 “일본에 잠깐 다녀온다”는 말을 남긴 채 조국을 떠나고 만다.

일본에 간 김삼규는 53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중립화 통일론을 제창, 일본의 유력지인 에코노미스트를 비롯 가이조(改造), 주오코롱(中央公論)등에 조국의 중립화에 관한 논문을 게재하기 시작한다.

김삼규는 57년 조선중립화운동 위원회를 설립하고 이해 10월에는 ‘코리아평론’을 창간, 논평을 펴다가 60년 6월 9년만에 귀국한다. 조국으로 돌아온 김삼규는 서울에서 각 신문과 잡지에 중립화 통일론을 기고하는 한편 서울대학에도 출강, 주목을 받는다. 이때 김삼규는 영구 귀국을 희망했으나 이승만 정부의 여권교부 거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망명 아닌 망명길을 떠나고 만 것이다.

김삼규는 일본에서 63년 ‘조선현대사’를 출간했다.

김삼규는 89년 4월 23일 재일교포 자제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쓰루가(敦賀)에 가 결혼피로연에서 축사를 하다가 쓰러져 급서했다.

형석 김삼규, 흔히들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졌던 대논객 김삼규, 전후 일본 언론계에서 더욱 유명했던 아카몬(도코제국대학)의 수재 김삼규는 파란만장의 그 생애를 이렇게 마쳤다.”


(권오철 출판사 삼천리 회장, 한국언론인물사화 3권, 1993)

 
김 삼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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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공화국시대의 중립화통일론과 21세기의 한반도통일
맨스필드ㆍ김삼규ㆍ김용중의 논리분석을 중심으로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0997797

Analysis on the Suggestions of One Korea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by Mike Mansfield, Kim Sam-Kyu, and Kim Yong-Jeung under the 2nd Republic of Korea

엄상윤
한국국제정치학회국제정치논총國際政治論叢 제43집 2호2003.0697 - 121 (25 pages)


초록
21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에도 한반도통일은 여전히 한민족이 해결해야 할 지난한 난제로 남아 있다. 따라서 한반도의 실정에 적합한 통일논리와 정책대안 개발에 부단한 노력이 요청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본 연구는 한반도지역의 양극적 국제체제하에서 한반도통일론의 적실성을 판별할 수 있는 객관적 분석틀을 개발ㆍ제시하고, 이에 의거하여 제2공화국시대에 활발히 제기되었던 중립화통일론들 중 맨스필드, 김삼규, 김용중의 논리와 내용 분석을 통해 그 해답의 일단을 찾아보고자 했다. 

국내외적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당시는 물론 통일환경이 크게 변화한 오늘날에도 중립화가 한반도의 통일ㆍ독립을 모색하는 이상적 모델로 간주될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은 심각한 의문으로 남는다. 물론 당시 제기되었던 중립화통일론들의 이론적ㆍ현실적 결함도 적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과정에서의 평화ㆍ민주원칙 견지, 주변외세들의 이해관계와 역할 인정, 탈이념적 통일문제 접근과 이념적 승리에 대한 집착 탈피, 통일한국의 극단적 진영편중 지양 등 한반도지역의 양극적 국제체 하에서 적실성을 가질 수 있는 면도 적지 않았다. 또한, 중립화통일의 실현과정ㆍ절차 및 이의 유지를 위해 이들이 제시한 구체적 대안들도 향후의 통일논리나 정책개발에 유용한 참고자료로 활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당시 개진되었던 다양한 중립화통일론들 중 통일준비단계와 통일단계를 구분하여 외세와의 협조하에 자주적ㆍ점진적 선중립ㆍ후통일을 역설한 김용중의 중립화통일론은 논리와 내용 면에서 가장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이 시대의 중립화통일론이 가지는 이론적ㆍ정책적ㆍ역사적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될 수 없다.

How to realize Korean unification may be very difficult problem even in the 21st century. But we should find suitable solutions to Korean situation in order to get out of headstall from divided Korea. In this purpose, this article developed a new framework for estimating the suitability of Korean unification suggestions under bi-polar international system in Northeast Asia and analyzed one Korea suggestions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by Mike Mansfield, Kim Sam-Kyu, and Kim Yong-Jeung under the 2nd Republic of Korea. Today one Korea via permanent neutralization itself cannot be come true because a unified Korea will be too strong to neutralize. And these suggestions have not a few weaknesses. Nevertheless, some of these suggestions would be very useful in search of Korean unification solutions even in the 21st century. Especially, Kim Yong-Jeung's suggestion can be estimated the best meaningful among them.

목차
【한글초록】
Ⅰ. 서론
Ⅱ. 한반도통일론 분석틀
Ⅲ. 중립화통일론의 종류와 내용
Ⅳ. 결론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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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만들기
평화연구(이론)-평화학/중립화, 영세중립 | Posted by 김승국2011. 8. 19. 22:50
영세중립ㆍ중립화 통일의 길 (39) --- 1945년 이후의 중립화 통일론
https://peacemaking.tistory.com/473

김승국


제2차 대전 이후에 제기된 중립화론은 단순한 중립화론이 아니라 중립화 통일론이라는 점에서 구한말의 경우와는 뚜렷하게 다른 특성을 갖는다. 중립화와 더불어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키는 이중의 과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중립화론을 검토할 때에는 이와 같은 복합적 성격에 유의하여 일반적 중립화론의 경우와는 다른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중립화 통일론은 그것이 제기된 국제정치적 배경에 비추어 크게 세 단계로 대별될 수 있다. 첫 단계는 미ㆍ소 군정 말기에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 대체방안의 하나로 제기된 것인데, 미국 관변에서 검토된 것과 국내 중도파 인사들 간에 논의된 것 등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둘째 단계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서 냉전체제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인데, 직접적으로는 휴전협정 체결 전후에 종전처리 방안의 일환으로 미국 관변에서 검토된 것과 오스트리아 중립화 사례(1955)를 염두에 두고 국내외에서 제기된 중립화 통일론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로는 1970년대 이후 닉슨 독트린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 정책을 전제로 미국 조야에서 다각적으로 연구ㆍ검토된 것인데, 여기서는 대체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대체방안의 일환으로 중립화론이 제기되었다.(강광식, 189)


위와 같은 3단계별로 나누어 중립화론을 소개한다. 중립화론을 제기한 사람에 따라 미국인과 한국인으로 구분하여 소개한다.


1. 첫 번째 단계(분단 고정화 직전)의 중립화론


1) 한국인의 중립화론


① 국내 중도파 인사들의 중립화론


김규식 등의 중도파 인사들은 1947년 8월 2일의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에 대응하여, 그들이 전개하던 좌우합작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중립화를 논의했다. 그들은 ‘한국이 미ㆍ소의 완충지대로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외국군대 철수 및 외국에 군사기지 제공 금지’를 주장했다. 신탁통치 대신에 미ㆍ소 점령군의 동시 철수를 전제로 한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② 미국인의 중립화론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한 극동시찰 보고서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영구적인 무장 중립화를 보장해야한다’고 건의했다. 웨드마이어의 제안은 조건부적인 무장 영세중립화로서, 소련 점령군이 철수하면 미국 점령군 역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지만,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철군의 대안으로 한반도를 무장 중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2. 두 번째 단계(한국전쟁 이후~1960년대)의 중립화론


1) 미국인


① 노울랜드(William F. Knowland) 상원의원


노울랜드는 ‘유엔의 신탁통치가 아닌 자유ㆍ독립국가로서 모든 강대국에 의해 중립화가 보장 된다면 한반도 통일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② 미 국무부


미 국무부는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 문서를 통해 ‘공산 측이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자유ㆍ독립의 한국을 창설하는 데 동의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중립화를 위한 국제적 보장에 참가할 준비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③ 맨스필드(Mike Mansfield) 상원의원


맨스필드는 극동시찰을 마치고 1960년 10월 상원 외교분과 위원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방안과 같은 형태로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2) 한국인


맨스필드의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론은 국내에 큰 파문을 던졌다. 중립화론을 주장해 왔던 해외교포와 국내 혁신계 인사들이 이에 적극 호응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중립화 통일론을 제기한 재미교포 김용중(金龍中)은 남과 북의 정권 당국자에게 공개적으로 통일방안을 제시하기도 했고 유엔에 제의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중립화 통일론으로 일관했다. 그는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나라들과 유엔의 보호하에 영원히 중립되어야 하며 자체로서는 엄격한 중립정책을 유지해 나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중립에 국제적인 보장이 뒤따라야 된다’면서「한국통일을 위한 제언」을 했다.
김삼규(金三奎)는 1951년 동아일보 주필로 재직할 당시 일본에 망명한 이후 줄곧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해 왔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한반도의 모든 정당과 지역의 한국인들로 구성된 한국중립화 위원회를 구성한다, 둘째, 통일한국은 모든 나라들의 일반적인 협정에 의해 중립화할 것을 선언한다. 셋째, 남북을 통해 국제관리에 의한 자유총선 실시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넷째, 통일한국은 미ㆍ소 양대 진영의 완충지대로서 중립화하고 중립한국의 주권과 영토의 국제적 보장, 다섯째, 한국통일에 관한 유엔결의는 통일한국의 중립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여섯째 초당적 범국민적 중립화운동 전개 등이었다.
1960년 민주당 정권 시기의 사회 대중당은 통일방안에 관한 기본원칙으로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통한 영세중립화 통일을 주창했다. 영세중립은 국제회의에서 합의되고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중립화 통일은 자주통일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김낙중ㆍ노중선, 35~36)


한반도 중립통일론을 원천적으로 규제한 이승만 정권이 4ㆍ19 혁명으로 붕괴되고, 장면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정당ㆍ사회단체가 연계된 혁신 단체들은 중립통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60년 11월 미국 맨스필드 상원의원의 한반도 중립화 필요성 발언으로 고무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조직은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민자통)와 ‘중립화 조국통일운동 총연맹’(중통연) 등이었다. ‘민자통’은 1961년 2월 ‘민족통일 건국 최고위원회’를 조직하고 남북협상을 진행할 것을 촉구하면서, 통일방안으로 ‘영세중립 통일안’을 채택했다. 광복회 등이 중심이 된 ‘중통연’은 1961년 2월 한반도 통일방안으로 국제적 보장 아래의 한반도 영세중립 통일안을 채택하고 국민운동을 전개했다.(강종일, 54)


일본에 머물던 김삼규 씨가 4ㆍ19 직후 귀국하여 중립화 통일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오면서 중립화 통일에 관한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노중선, 189~206) 그런데 이러한 논쟁도 잠시일 뿐이었다. 1961년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중립화 통일론을 탄압하고, 중립화 통일론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얽어매어 투옥했기 때문이다.


3. 세 번째 단계(1970년대 이후)의 중립화 통일론


1) 한국인


재미동포 황인관은 1970년대부터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에 관한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중립통일의 방법으로 남북한의 입장과 외세의 입장에서 접근한다. 남북한 입장의 접근방법으로 남북은 ‘공동통일 연구위원회’를 제3국에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동 위원회는 영세중립 통일의 전제조건과 중립화에 기초를 둔 통일이념을 창안하고, 중립화를 위한 남북 연방을 수립한다. 외세 입장의 접근방법으로 미국 주도하에 한반도 중립화 협정을 보장케하고,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 미국의 지원 하에 주한 다국적군을 일시적으로 주둔시킬 것을 제의하고 있다.(강종일, 54~55)


김일성은 1980년 10월 10일 조선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고려 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을 발표하면서 한반도의 중립화 필요성을 주장했다.


2) 미국인


1971년 6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의 청문회에서 포터(William Porter) 주한 미국대사가 중립화에 관하여 언급했다.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한반도 중립화론을 제기한 사람은 맨스필드 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헨더슨(Gregory Henderson) 교수, 해리슨(Selig S. Harrison) 기자, 라이샤워(Edwin Reishauer) 교수, 바네트(Doak A. Barnett) 교수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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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자료>
* 강광식『중립화와 한반도 통일』(서울, 백산서당, 2010)
* 강종일「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영세중립화 방안 연구」『시민정치학회보』제3권 (2000년)
* 김낙중ㆍ노중선 편저『現段階 諸統一 方案』(서울, 한백사, 1989)
* 노중선『4ㆍ19와 통일논의』(서울, 사계절,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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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는 평화 활동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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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식, 김삼규, 셀리그, 영세중립,

출처: https://peacemaking.tistory.com/473 [평화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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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을 넘어 중립화 통일로
[한반도 중립화 통일의 길]<40> 1945년 이후의 중립화 통일론



김승국 평화운동가 | 기사입력 2011.08.15. 11:44:00
http://www.pressian.com/pages/articles/4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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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대전 이후에 제기된 중립화론은 단순한 중립화론이 아니라 중립화 통일론이라는 점에서 구한말의 경우와는 뚜렷하게 다른 특성을 갖는다. 중립화와 더불어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키는 이중의 과제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중립화론을 검토할 때에는 이와 같은 복합적 성격에 유의하여 일반적 중립화론의 경우와는 다른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한다고 할 수 있다.


중립화 통일론은 그것이 제기된 국제정치적 배경에 비추어 크게 세 단계로 대별될 수 있다. 첫 단계는 미ㆍ소 군정 말기에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 대체방안의 하나로 제기된 것인데, 미국 관변에서 검토된 것과 국내 중도파 인사들 간에 논의된 것 등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둘째 단계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동서 냉전체제를 재조정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것인데, 직접적으로는 휴전협정 체결 전후에 종전처리 방안의 일환으로 미국 관변에서 검토된 것과 오스트리아 중립화 사례(1955)를 염두에 두고 국내외에서 제기된 중립화 통일론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세 번째 단계로는 1970년대 이후 닉슨 독트린에 의한 '한반도 문제의 한반도화' 정책을 전제로 미국 조야에서 다각적으로 연구ㆍ검토된 것인데, 여기서는 대체로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대체방안의 일환으로 중립화론이 제기되었다.(강광식, 189)


위와 같은 3단계별로 나누어 중립화론을 소개한다. 중립화론을 제기한 사람에 따라 미국인과 한국인으로 구분하여 소개한다.


1. 첫 번째 단계(분단 고정화 직전)의 중립화론


1) 한국인의 중립화론


① 국내 중도파 인사들의 중립화론


김규식 등의 중도파 인사들은 1947년 8월 2일의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결렬에 대응하여, 그들이 전개하던 좌우합작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중립화를 논의했다. 그들은 '한국이 미ㆍ소의 완충지대로 되어야 한다'고 말하며 '외국군대 철수 및 외국에 군사기지 제공 금지'를 주장했다. 신탁통치 대신에 미ㆍ소 점령군의 동시 철수를 전제로 한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② 미국인의 중립화론


웨드마이어(Albert C. Wedemeyer) 장군은 트루먼 대통령에게 제출한 극동시찰 보고서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영구적인 무장 중립화를 보장해야한다'고 건의했다. 웨드마이어의 제안은 조건부적인 무장 영세중립화로서, 소련 점령군이 철수하면 미국 점령군 역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지만, 소련의 팽창주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철군의 대안으로 한반도를 무장 중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2. 두 번째 단계(한국전쟁 이후~1960년대)의 중립화론


1) 미국인


① 노울랜드(William F. Knowland) 상원의원


노울랜드는 '유엔의 신탁통치가 아닌 자유ㆍ독립국가로서 모든 강대국에 의해 중립화가 보장 된다면 한반도 통일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② 미 국무부


미 국무부는 국가안보회의에 제출한 문서를 통해 '공산 측이 모든 외국군의 철수와 자유ㆍ독립의 한국을 창설하는 데 동의한다면, 미국은 한국의 중립화를 위한 국제적 보장에 참가할 준비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③ 맨스필드(Mike Mansfield) 상원의원


맨스필드는 극동시찰을 마치고 1960년 10월 상원 외교분과 위원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통일방안과 같은 형태로 분단된 한반도를 통일시킬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신중하게 검토해야 한다'고 제의하였다.


2) 한국인


맨스필드의 오스트리아식 중립화론은 국내에 큰 파문을 던졌다. 중립화론을 주장해 왔던 해외교포와 국내 혁신계 인사들이 이에 적극 호응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한국인으로서 최초로 중립화 통일론을 제기한 재미교포 김용중(金龍中)은 남과 북의 정권 당국자에게 공개적으로 통일방안을 제시하기도 했고 유엔에 제의하기도 했는데, 그 내용은 중립화 통일론으로 일관했다. 그는 '한국을 둘러싸고 있는 이웃나라들과 유엔의 보호하에 영원히 중립되어야 하며 자체로서는 엄격한 중립정책을 유지해 나아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중립에 국제적인 보장이 뒤따라야 된다'면서「한국통일을 위한 제언」을 했다.
김삼규(金三奎)는 1951년 동아일보 주필로 재직할 당시 일본에 망명한 이후 줄곧 중립화 통일론을 주장해 왔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한반도의 모든 정당과 지역의 한국인들로 구성된 한국중립화 위원회를 구성한다, 둘째, 통일한국은 모든 나라들의 일반적인 협정에 의해 중립화할 것을 선언한다. 셋째, 남북을 통해 국제관리에 의한 자유총선 실시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넷째, 통일한국은 미ㆍ소 양대 진영의 완충지대로서 중립화하고 중립한국의 주권과 영토의 국제적 보장, 다섯째, 한국통일에 관한 유엔결의는 통일한국의 중립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여섯째 초당적 범국민적 중립화운동 전개 등이었다.
1960년 민주당 정권 시기의 사회 대중당은 통일방안에 관한 기본원칙으로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통한 영세중립화 통일을 주창했다. 영세중립은 국제회의에서 합의되고 보장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중립화 통일은 자주통일을 쟁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했다.(김낙중ㆍ노중선, 35~36)


한반도 중립통일론을 원천적으로 규제한 이승만 정권이 4ㆍ19 혁명으로 붕괴되고, 장면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정당ㆍ사회단체가 연계된 혁신 단체들은 중립통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60년 11월 미국 맨스필드 상원의원의 한반도 중립화 필요성 발언으로 고무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조직은 '민족자주통일 중앙협의회'(민자통)와 '중립화 조국통일운동 총연맹'(중통연) 등이었다. '민자통'은 1961년 2월 '민족통일 건국 최고위원회'를 조직하고 남북협상을 진행할 것을 촉구하면서, 통일방안으로 '영세중립 통일안'을 채택했다. 광복회 등이 중심이 된 '중통연'은 1961년 2월 한반도 통일방안으로 국제적 보장 아래의 한반도 영세중립 통일안을 채택하고 국민운동을 전개했다.(강종일, 54)


일본에 머물던 김삼규 씨가 4ㆍ19 직후 귀국하여 중립화 통일론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자, 이에 대한 비판이 쏟아져 나오면서 중립화 통일에 관한 논쟁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노중선, 189~206) 그런데 이러한 논쟁도 잠시일 뿐이었다. 1961년의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중립화 통일론을 탄압하고, 중립화 통일론자들을 국가보안법으로 얽어매어 투옥했기 때문이다.


3. 세 번째 단계(1970년대 이후)의 중립화 통일론


1) 한국인


재미동포 황인관은 1970년대부터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에 관한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중립통일의 방법으로 남북한의 입장과 외세의 입장에서 접근한다. 남북한 입장의 접근방법으로 남북은 '공동통일 연구위원회'를 제3국에 설치할 것을 제안한다. 동 위원회는 영세중립 통일의 전제조건과 중립화에 기초를 둔 통일이념을 창안하고, 중립화를 위한 남북 연방을 수립한다. 외세 입장의 접근방법으로 미국 주도하에 한반도 중립화 협정을 보장케하고,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 미국의 지원 하에 주한 다국적군을 일시적으로 주둔시킬 것을 제의하고 있다.(강종일, 54~55)


김일성은 1980년 10월 10일 조선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고려 민주연방공화국 창설안'을 발표하면서 한반도의 중립화 필요성을 주장했다.


2) 미국인


1971년 6월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의 청문회에서 포터(William Porter) 주한 미국대사가 중립화에 관하여 언급했다. 이 시기에 개인적으로 한반도 중립화론을 제기한 사람은 맨스필드 상원 민주당 원내총무, 헨더슨(Gregory Henderson) 교수, 해리슨(Selig S. Harrison) 기자, 라이샤워(Edwin Reishauer) 교수, 바네트(Doak A. Barnett) 교수 등이다.


<인용 자료>
* 강광식『중립화와 한반도 통일』(서울, 백산서당, 2010)
* 강종일「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남북 영세중립화 방안 연구」『시민정치학회보』제3권 (2000년)
* 김낙중ㆍ노중선 편저『現段階 諸統一 方案』(서울, 한백사, 1989)
* 노중선『4ㆍ19와 통일논의』(서울, 사계절, 1989)

출처: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035#0DKU 프레시안(http://www.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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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사회의 ‘제3의 민족통일운동’ 고찰
A Study on the ‘Third National Unification Movement’ of Korean Residents’ Community in Japan PDF icon

한국동북아논총

약어 : 동북아논총

2013, vol.18, no.4, 통권 69호 pp. 121-144 (24 pages)

UCI : G704-001454.2013.18.4.018

발행기관 : 한국동북아학회

연구분야 : 사회과학 > 사회과학일반
지충남 /Ji, Choong-Nam 1
1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KCI등재
초록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민단과 조총련의 통일운동은 남북한 정부와 연계하여 반공과 사회주의라는 틀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러나 ‘제3의 민족통일운동’은 민족단체 간 대립을 불식시켜 공존의 장을 형성하고 화합과 교류를 도모하면서 조국통일을 모색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유신체제의 수립 이후 남한의 민주화가 쟁점으로 부상하자, 재일동포 사회의 민족통일운동을 남한의 민주화운동과 연동시켜 추진하였다. 1980년대는 이념에서 탈피하여 생활과 연계된 실용적인 운동, 즉 한반도의 통일을 위한 노력뿐만 아니라 재일동포들의 화합이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었다. 1990년대 이후, 제3의 민족통일운동은 한반도 통일문제를 남북한의 정치적 통일에서 나아가 재일동포 사회의 통합, 일본사회의 다문화공생의 장 형성, 아시아 평화와 연대를 위한 운동으로 추진하였다.
제3의 민족통일운동의 사례로서 김삼규의 중립화 통일론, 한통련의 통일운동, 원코리아페스티벌 등 3개를 분석하였다. 중립화 통일론은 타협과 인정을 통한 점진적 통일 방향의 제시, 재일동포 사회를 비롯하여 국내에서 통일 논의의 확산 측면에서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한통련이 민족과 이념 중심의 통일운동을 주도했다면, 코리아NGO센터는 생활중심의 민족통일운동을 실행하여 새로운 통일운동의 모델을 제시하였다


Korean Residents Union in Japan (Mindan) and The North Korean Communists Party in Japan (Chochongryon) respectively initiated national unification movements in the frame of anti-Communism and socialism associated with South and North Korean governments after the liberation. The 'third national unification movement', however, is significant that it opened a new chapter for the relationship of the conflicting national groups and thereby served to ensure their coexistence and accelerate mutual unity and interchange in pursuit of national unification.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Yushin regime in the 1970s, the democratization of South Korea was emerged as the main issue and Korean residents’ community in Japan carried forward their unification movement in association with South Korean democratization movement. In 1980s, Korean residents’ community in Japan carried out practical movement to get out of the ideology not only effort for the Korea unification but also Korean residents’ community unity. According to the third unification movement, the characteristic of Korea unification movement was modified to harmonize Korea residents, develop multicultural coexistence society, and build peace solidarity.
The cases of the third unification movement are Kim Sam-gyu's neutralized unification theory, Korean Democratic Unification Union in Japan (Hantongryon)'s unification movement and One Korea Festival. The neutralized unification theory suggested some of the directions for gradual national unification through mutual compromise and recognition, and also contributed to expand discussions of unification in Korean society as well as among Korean residents in Japan. Hantongryon could be said to take the initiative in a national and ideological unification movement, whereas Korea NGO Center conducted a life-centered unification movement and thereby introduced a new model of unification movement into Korean residents in Jap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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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한반도 중립화(통일) 주장 일지 -주종환 교수님 글
  안진걸  Jan 18, 2005
http://www.peoplepower21.org/Mplaza/1269616


안녕하세요. 안진걸입니다.

참여연대 산하에 참여사회연구소 이사장으로 활동하시고, 민족화합운동연합 대표로도 일하시는 주종환 교수님(경제학, 동국대 명예교수)께서 작성하신 글입니다.

참여연대의 의견은 아니지만, 민족의 화해와 통일 과정에서 검토해볼만한 의견이고 역사가 오래된 주장이기에 소개해드립니다. 아래 바로 붙였습니다.

[한반도 중립화 주장 일지] - 주종환 강종일 공동 정리 ; 2005년 1월 6일

1. 구 한말시대 한반도 중립화 주장

1882년 2월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조선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강화되자 조선과 중국의 전통적 유대관계를 단절하기 위하여 중국,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등 6개국이 조선의 중립화를 논의하자고 중국에 제의했다. 그러나 중국이 이를 거절했다 (진단학회 편, 『한국사 최근세 편』 서울: 진단학회 1961), pp. 697-698.

1884년 3월 서울주재 독일 부영사 허만 부들러(Hermann Budler)는 벨기에와 같은 조선의 영세중립 방안을 주장했다 (김갑철, 『강대국과 한반도: 4강 체제와 한국통일』 서울: 일신사 1979), p. 272.

1884년 12월 유길준(兪吉濬)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벨기에와 같은 조선의 영세중립 방안을 조선정부에 건의했다. (유길준전서편찬위원회 편, 『유길준전서』 제6권 서울: 일조각 1971), pp. 319-328.

1889년 8월 던켄(Chesney Duncan)은 그의 저서 Corea and the Power에서 조선의 엄정한 영세중립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Shanghai: Mercury Office 1889), pp. iii-iv.

1891년 6월 고종(高宗)은 일본, 러시아, 영국, 미국에 스위스와 같이 조선의 영세중립국 문제를 제의했으나, 중국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Jongsuk Chay, Dplolmacy of Asymmetry: Korean-American Relations to 1910, Honolulu: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0), p. 89.

1900년 1월 샌드(William F. Sands)는 조선의 영세중립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강광식, 『중립화 정치론: 한반도 적용 가능성 탐색』서울: 인간사랑 1989), p. 147.

1900년 8월과 1903년 9월 고종은 일본이 조선을 대신해서 조선의 영세중립을 실현시켜 줄 것을 요구하는 외교문서를 일본정부에 제출했다. 그러나 일본은 내치는 조선이 맡고, 외치는 일본에 맡기라고 접수를 거절했다. (상계서)

1901년 1월 러시아는 일본주재 러시아 공사 이스볼스키(Alexander P. Isvolski)를 통해 일본정부에 조선의 중립화방안을 제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절했다. (상계서).

1902년 9월 러시아는 미국을 중재자로 하여 러시아, 미국, 일본의 3국의 보장 하에 한반도의 중립화방안을 일본에 다시 제의했다. 그러나 일본은 영-일동맹의 성공으로 이를 거절했다. (강광식 상계서), p. 149.

1904년 1월 고종은 일방적으로 조선의 영세중립을 선포했다. (홍현익, "통일한국과 한미동맹," 이태환 편, 『통일한국의 외교안보: 전망과 대책』 서울: 세종연구소 1999), p. 202.

1904년 9월 조선의 조병식 특사는 주일 미국공사 버크(Alfred E. Buck)에게 조선의 영세중립 방안을 제출하고 협조를 요구했으나, 버크는 사안의 중대함을 이유로, 조선이 워싱턴에 직접 제출하라고 접수를 거절했다. (Jongsuk Chay, op. cit.), p. 126.

2. 해방 후 한반도 중립화 주장

1952년 재미교포 김용중은 한반도의 영세중립통일방안을 발표했다. (김학준, "제2공화국 시대의 통일논의,"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제15호 서울: 한국국제정치학회 1975), p. 331.

1956년 7월 2일 납북인사들의 단체인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대표 조소앙)’는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시국선언대회를 갖고, 행동강령에서 남북한의 중립화통일과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할 것을 골자로 한 7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태호, “압록강변의 겨울-납북요인들의 삶과 통일의 한,” 『현대사 실록』서울: 다섯수레 1991), pp. 374-376.

1953년 이승만에 의해 일본으로 추방된 김삼규는 남북한의 영세중립통일을 주장했다. (김갑철, 전계서), pp. 275-280.

1960년 8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는 남북의 영세중립통일을 주장했다. (전계서), pp. 282-284.

1961년 2월 ‘중립화조국통일운동총연맹(중통연)’은 남북한의 영세중립통일을 주장했다. (상계서).

1961년 4월 언론인 김석길은 한반도의 오스트리아 식 중립화 통일방안을 제시했다. (김석길, 『민주 중립화 통한의 신 방안』 서울 : 국제정경연구소 1961), pp. 137-204.

1971년 2월 김철은 “국민에게 드리는 글”에서 한반도는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과 국제적 조약을 통하여 한반도의 영세중립통일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당산 김철전집간행위원회 편,『당산김철전집』서울: 해냄 2000), p. 101.

1980년 10월 김일성은 고려민주공화국 창설안을 발표하면서 남한에 중립통일을 제안했으며, 1985년 10월과 1993년 4월에도 중립통일을 제의했다. (노중선, 『연표: 남북한 통일정책과 통일운동 50년』 서울: 사계절 1996), pp. 218 & 518; (최보식, “장세동 - 김일성 비밀회담의 생생한 대화록,” 『월간 조선』 제19권 9호, 1998), pp. 148-224.

1987년 황인관(In K. Hwang)은 그의 저서 One Korea via Permanent Neutrality: Peaceful Management of Korean Unification Cambridge, MA 1987)에서 한반도가 영세중립통일이 되어야 하는 이유를 제시했다. (홍정표 역, 『평화통일을 위한 남북한 공영방안: 중립화통일론』서울: 신구문화사 1988).

1989년 6월 김대중은 광주(光州) 시국강연에서 “장차 한국은 오스트리아 식 영세중립국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대중, 『나의 길 나의 사상』 서울: 한길사 1994), p. 362.

1990년 8월 권두영은 일본 오사카 국제학술회의에서 “여운형의 정치노선과 민족통일의 역사적 방향 - 미군철수문제해결과 한반도평화유지에 있어서 UN의 역할을 중심으로” 주제의 논문에서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강종일,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은 가능한가』 서울: 들녘 2001), pp. 32-63.

1999년 12월 강종일은 한국정치학회가 외교안보연구원에서 개최하는 학술회의에서 한반도 영세중립통일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강종일, “한반도영세중립통일방안 연구,” 한국국제정치학회, 『국제정치논총』 제41집 1호, 2001), pp. 93-116.

2001년 김명철은 미국 브라운 대학교 저널에, 북한의 김정일은 “한반도의 지정학, 남북의 냉전체제종식과 전쟁방지, 한민족의 평화애호 사상, 남북한의 군사잠재력 등을 고려하여 한반도의 ‘스위스 식 무장중립 (Swiss like armed neutrality)’ 통일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기고했다. (Kim, Myong Chol, "Kim Jong Ils Perspectives on the Korean Question," The Brown Journal of World Affairs, Winter/Spring 2001 Vol. VIII, Issue 1), pp. 103-113.

2004년 6월 주종환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에서 “영세중립만이 진정한 안보와 자주국방의 길” 이라는 한반도 영세중립통일의 중요성을 주장했다. (www.hwahap.org 참조)

2004년 10월 주종환은 “한반도 자주적 무장 중립화 통일 방안에 관하여” 라는 논문을 발표 했다. (www.hwahap.org 참조)

2004년 12월 국가원로회의 강영훈 공동의장은 “장차 한국의 외교정책은 영세중립을 희구해야 할 것”이라는 결의문을 대통령, 국회의장, 양당대표에게 전달했다. (동아일보 2004년 12월 9일).

3. 외국인의 한반도 중립화 주장

1947년 7월 미국의 웨드마이어(Albert Wedemyer) 장군은 “한반도에서 소련군과 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국의 영세중립을 보장할 것”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투르만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In Kwan Hwang, “The 1953 U.S. Initiative for Korean Neutralization,” Korean and World Affairs: A Quarterly Review, vol. 10 no 4, Winter 1986), pp. 798-801.

1953년 6월 미국 국무성 덜레스(John F. Dulles) 장관은 7월 27일 한국전쟁의 휴전에 대비하여 한국의 중립화 정책방안에 서명했다. 그의 중립화 방안은 NSC에 회부했으나, 합동참모본부의 반대로 무산됐다. (상계서)

1960년 11월 미국 맨스필드(Mike Mansfield) 상원의원은 “미국은 한국통일문제를 오스트리아 식의 중립화 조건으로 해결하는 가능성을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상계서).

1961년 3월 스칼라피노(Robert A. Scalapino) 교수는 "한반도에서 외국군대를 철수시키고 한반도의 중립화를 모색할 가치는 충분히 있다"고 말했다. (상계서).

1972년 브레진스키(Zbigniew Brezinski) 교수는 주한 미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남북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국가로 지목되고 있는 만큼, 남북통일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4강이 한반도의 중립화 보장을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상계서).

1976년 카터(James E. Carter) 대통령은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 한반도의 중립화가 필요할 지 모른다”고 언급하면서 정책검토를 지시했다. (상계서).

1976년 라이샤워(Edwin Reischauer) 교수는 주한 미군의 철수문제와 관련하여 “한국으로부터 미군철수는 보다 더 긍정적이며 미국이 철수할 경우, 한국정부가 외부의 압력에 대한 두려움 없이 그들의 통일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4강이 한국중립화에 대핸 협정을 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계서)

1989년 갈퉁(Johan Galtung) 교수는 “한국은 4강과 협력하고, UN의 지원을 받아 중립화 통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Johan Galtung, "The Neutralization Approach to Korean Reunification,") in Michael Haas, ed. Korean Reunification. New York: Praeger 1989), pp. 14-15.

2003년 4월 해리슨(Selig S. Harrison)은 그의 저서 Korean Endgame: A Strategy for Reunification and U.S. Disengagement 에서 한반도의 영세중립통일을 건의했다. (이홍동 외 역, 『코리안 엔드게임』 서울: 삼인 2003), pp. 526-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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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종환 : 동국대 명예교수, (사) 민족화합운동연합 이사장
강종일 : 영세중립통일협의회 상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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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삼규씨 별세|<코리아평론 발행인>
[중앙일보] 입력 1989.04.24 
【동경=연합】「코리아평론」발행인 김삼규씨가 23일 오후2시 심근경색으로 별세했다. 81세.

해방직후 동아일보 조사부장으로 입사,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김씨는 편집국장을 거쳐 49년 동아일보주필이 됐으며 부산피난시절 이승만정권을 비판하는 논조를 전개해 정권의 미움을 사 51년도일, 64년부터 한반도문제 전문지 「코리아평론」을 발행하면서 일본을 무대로 평화적 통일운동을 전개해 왔으며 생전에 남북한과 미·일·중·소 등 관계국 교차승인에 의한 6자회담개최를 주장해왔다.

[출처: 중앙일보] 김삼규씨 별세|<코리아평론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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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칼럼]시대유감과 중립화
정지웅 교수(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통일미래사회연구소장, 평통연대 운영위원)
2017/10/12
http://www.newspower.co.kr/sub_read.html?uid=35819
정지웅 

요즘 한반도의 운명이 우리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아 많은 분들이 답답해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중립화는 이 지역의 평화보장을 위한 하나의 방안으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 열강들의 각축 가운데 구한말 유길준과 조선 주재 독일 부영사 부들러(Hermann Budder)는 1885년 한반도의 영세중립국 방안을 최초로 주장하였다. 조선에서 관세업무자문으로 근무한 바 있는 던캔(Chesney Duncan)은 1889년 그의 저서 Corea and the Power 에서 조선정부에 영세중립정책을 건의했고, 궁내부 고문이었던 샌드(William F. Sands)도 조선이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열강의 동의를 받을 것을 주장하였다.

 

해방 후에도 재미교포 김용중, 일본으로 추방된 김삼규, 언론인 김석길, 재미동포 황인관, 통일사회당 김철 위원장, 1989년 광주교대에서의 시국강연에서 김대중 등이 한반도 중립화 통일과 그 가능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1953년 미국의 덜레스 국무장관은 국가안보회의에, 웨드마이어 장군은 1947년 트루먼 대통령에게, 맨스필드 상원위원은 1960년 상원 외교위원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한반도 중립을 각각 건의하였다. 스칼라피노 교수는 1961년, 브레진스키 교수는 1972년, 하버드대 동아시아 전문가 라이샤워 교수는 1976년 한반도 중립 문제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피력한 바 있다.한편 세계 평화학회 회장인 갈퉁(Johan Galtung) 교수는 한국은 스위스로부터 영세중립과정을, 스웨덴으로부터 비동맹국방정책을, 핀란드로부터 폐쇄적 사회와의 우호관계 유지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이처럼 한반도 중립화 통일방안은 하나의 대안으로 끊임없이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오로지 국방을 위해 한미동맹에만 함몰되어 한 번도 진지하게 이 방안을 논의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같이 꽉 막힌 시기에는 이 방안에 대해 저절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중립화에 대한 주변 4강의 입장은 어떠할까? 미국에 경도된 한반도의 통일을 원치 않는 중국은 한반도 중립화를 찬성할 것이고, 러시아와 일본은 한반도가 자유시장경제에 바탕을 두고, 무장은 제대로 하지만 스위스식 영세중립국으로 된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문제는 미국의 입장이다. 이 지역에서 헤게모니를 가지기 위해 중립화는 자살이라고 늘 주장하는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하는 한반도의 중립화 통일을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소규모의 평화유지군으로서의 주한미군 주둔을 허용하고 자유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는 한반도 완충지대화가 미국과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그리고 이것이 미국의 역량을 축적하는 것이라고 설득해 나갈 필요가 있다. 어려울 것이라고 판단하여 미리 포기할 이유는 없다.

동북아의 평화를 보장하는 획기적인 방안인 한반도의 중립화 내지 완충지대화 통일은 남북 내부 문제이고 동시에 국제적 문제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한 것은 한반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의지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이 방안이 매력적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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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광식, 『중립화 정치론: 한반도 적용 가능성 탐색』(서울: 인간사랑, 1989), p. 147.

강종일,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중립화 통일방안,” 『비살생정치학과 지구평화운동』(서울: 집문당, 2004), pp. 177-178.

강종일, 앞의 글, pp. 180-181.

John Galtung, :The Neutralization Approach to Korean Reunification," Michael Haas, ed. Korean Reunification(New York: Praeger), pp.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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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아 나의 귀국 목적과 한반도 중립화 - 한겨레:온

나의 귀국 목적과 한반도 중립화 - 한겨레:온

나의 귀국 목적과 한반도 중립화
김반아 시민통신원l
승인2020.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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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나는 사실상 한국에 영구 귀국을 한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미국을 가더라도 일시적으로 머문 후 곧 귀국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영암에 살면서 통일 코리아를 꿈꾸며 한반도 중립화 운동을 하는 것이다

56년동안 서양에서 이민생활을 해 온 내게 전라남도 영암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2015년 30명의 국제평화여성운동가들과 함께 평양에서 판문점까지 통과한 Women Cross DMZ 행사를 마치고, 영암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하늘이 내게 점지해 준 곳이 영암군 군서면 한 귀퉁이에 보석같이 반짝이는 구림마을이었다. 그런 곳에 도자기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구림마을 2,200년의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영암에 집을 마련하였고, 지척에 왕인 박사의 출생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연고가 전혀 없는 그 곳에 집을 마련하게 된 이유는 월출산의 산세와 그 아래 펼쳐져 있는 구림마을을 감싸고 있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후에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구림마을은 월출산의 주지봉에서 흘러내린 두 줄기의 낮은 구릉이 마을을 감싸 안고 있었다. 예로부터 ‘두 마리의 용이 품은 마을’이라 불리 우는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영암은 삼한시대(기원전 4~2세기)에 마한의 세력 안에 있었고, 삼국시대에 백제의 대외무역항이었다. 일본에 학문을 전한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출항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상대포에서 해마다 4월에 벚꽃 축제가 있어 일본의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황톳빛 돌담길과 하천을 따라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잘 살려놓은 군서면은 멀리 미국에 있을 때에도 항상 내 마음을 그곳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만일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국가가 없어지는 것이다. (영암 군서면, 이순신 장군 어록비)


군서면 군립하정웅미술관 옆에는 ‘약무호남 시무국가, 즉 만약에 호남이 없으면 그대로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다’라고 적혀 있는 이순신 장군의 어록비 국보 제76호와 더불어 임진왜란 중 이순신 장군이 1596년 9월 1일 영암을 방문하여 국난극복을 위한 민정활동을 전개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당시 영암군민의 호국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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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2020년) 미국에서 귀국 후 코로나 때문에 2주간 자가격리를 구림마을에서 한 후 서울에 있는 한반도중립화통일협의회 사무실을 방문하게 되면서, 나는 또 한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영암에 대한 얘기를 나누던 중, 회장 강종일 박사로부터 김삼규 선생에 대해 듣게 된 것이다. 김삼규 선생은 제1공화국부터 시작하여 1989년 사망할 때까지 국내외(일본)에서 동지 없이 독보적으로 활약한 중립화 통일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1908년 영암군 영암면에서 태어난 그는 영암에서 <독립만세운동>를 주동한 혐의로 투옥되어 감옥살이를 한 그의 형 김만규가 출소 후 함께 일본으로 갔다.

김삼규 선생은 21세 당시 1929년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을 때 동경유학생회 위원장으로 <식민지교육반대> 삐라를 만들어 광주에 보냈고,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2주간 구금되었다. 그 후에도 계속 좌익운동에 관여하다가 동경대학교에서 독문학을 전공하는 동안 ‘무산자사’ 조직에 가담하여 위원장이 되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하여>라는 문서를 출판하여 유학생 편으로 한국에 보낸 사실이 탄로되어 1931년 8월 서울의 치안당국이 보낸 종로경찰서 요원들에 의해 동경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연행되어 심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형무소에서 3년간 많은 책을 읽었고 출소 후, 가족이 있는 동경으로 다시 돌아갔다. 김삼규 선생은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죽자 “Neutralization of Korea”(한국의 중립화)라는 제목의 글을 Japan Times에 투고했으며, 1953년 6월 11일 “대외적으로는 중립화, 대내적으로는 민주화가 조선 문제 해결의 길”이라는 글을 조일신문 논단에 기고했다.

김삼규 선생의 중립화 통일론을 요약하면,

“영세중립국이란 전시나 평시에 있어서, 언제라도 중립을 지키는 나라이며 스위스와 오스트리아가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4대강국에게는 한반도가 국제적으로 보장된 중립국이라야 안심할 수가 있다. 두개의 세력권으로 분단되어있는 조국을 하나의 조국으로 환원하는 길은 통일조국의 중립화를 전제로 한다.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의 말기부터 표면화된 미.소의 패권싸움이 우리민족 내부의 갈등과 대립에 편승하여 표현된 것이며, 6.25전쟁을 통해 중국과 일본이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게 됨으로써 우리나라를 둘러싼 4대 강국이 모두 이 분단에 관여하게 되었다. 4대 강국이 납득할 수 있는 통일조국의 모습은 4대 강국이 두려워하지 않는 통일 코리아, 즉 어느 나라와도 동맹하지 않는 것이 국제적으로 약속되어 있는 존재 양상이다”고 설명된다.

영세중립국의 실현은 사실상 국민 전반의 고차원의 영성지능과 개인의 독자적인 통찰력과 의지력을 요하는 일이다. 일신의 성공과 명예를 생각하는 사대주의 사고방식에 비해, 통일을 위한 민족적 입장과 국제평화 존중의 입장을 통합적으로 표현한 것이 한반도의 중립화이다. 그것은 남북이 타협하고 4대 강국이 타협하도록 국민들의 소망을 모으는 유일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한반도의 중립화야말로 통일운동의 대 전제가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영세중립국이 이뤄지고 평화가 보장되게 되면 지금까지 분단이 빚어 온 국내외의 코리안 들의 생명 에너지를 고갈 시켜 온 모든 갈등 구조가 사라지게 된다. 그때부터는 한국인들의 창의력과 생명력은 전적으로 국내의 사회복지와 인류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발상과 발명에 모아질 것이다.

나는 3대째 한반도의 영구평화를 위한 중립화 운동에 관여하고 있다. 1948년에 외조부 이종만 선생이 북으로 가시고, 우리는 이산가족이 된 채, 해외로 이민을 나가서 3대양 4개국에 흩어져 자유로이 만나지 못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60년 전 외조부로부터 시작된 남북의 영세중립 평화통일에 대한 우리 집안의 헌신은 2013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역이민 하여 제주에서 살다가 돌아가신 어머니 일선님을 거쳐서 이제 나에게 와 있다. 해외 여러 나라에 살면서 나는 한국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나 무슨 일이든지 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은 내게 주는 사명감과 더불어 뿌리 깊은 확신을 갖게 해주었다. 나는 방역 일등국이 된 한국은 앞으로 영성 일등국, 도덕 일등국, 창의성 일등국으로 세계를 이끌어 가는 모범을 보일 것이라 예측한다.

현재 한반도의 중립화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닫힌 마음 때문에 코앞에까지 와있는 수많은 정보를 놓치고 있다. 한반도 중립화에 대한 인식은 세상사를 입체적이고 넓게 보는데 있다. 열린 마음으로 평양을 한 번만 방문하게 되면 순식간에 의식의 전환이 오게 된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을 너무도 모르고 있다. 현재 한국인들은 미국적 개인주의나 물질주의적인 자본주의 가치관에 깊이 물들어 있는데 자신들은 그런 줄을 모르고 있다. 미국이 혈맹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자국의 국가이익을 위해 북한의 비핵화를 원치 않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미국화 된 한국 사람들의 사고체계는 자신의 혼 줄을 자진해서 빼놓고 있다. 분단이 초래한 친미반공정신의 늪 속에 깊이 빠져있는 것이다.

우리는 조국을 되찾기 위해 목숨을 바친 독립 운동가들의 비전을 되살리고, 현재 자기의 앞길도 헤아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미국으로부터 정신적으로 해방되어야 한다. 모든 강대국의 영향권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주권국가가 되어야 한다. 꼬레아 영세중립 연합국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눈앞에 와있다. 촛불 시민들의 각성으로 우리는 한반도의 평화와 동북아의 평화, 그리고 세계의 평화를 위한 반석을 세울 수 있게 될 것이다.



편집 : 심창식 편집위원

김반아 시민통신원  vanakim777@gmail.com


2020-08-25

06 개판치는 목사가 왜 이리 많은가? (고은광순님칼럼) 데일리서프라이즈

 



사랑채 - 개판치는 목사가 왜 이리 많은가? (고은광순님칼럼) 데일리서프라이즈에서펌




개판치는 목사가 왜 이리 많은가? (고은광순님칼럼) 데일리서프라이즈에서펌

조회 수 1927 추천 수 6 2006.03.24 02:26:54
정정희*.120.203.176http://dabia.net/xe/153462

총추련 대표 고은광순


2003년 기독교 신자들이 뽑은 10대 뉴스 중에는 불륜에 관한 것이 여섯 항목이나 된다. 김홍도(현 한기총 고문/ 대한기독교감리회), 곽선희(현 한기총 원로위원), 이복렬(성결교회) 석원태, 조용기(현 한기총 명예회장), 장효희(당시 한기총 공동회장/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정통 증경총회장)목사가 ‘불륜 6걸’로 불리워지는 그 주인공이다. 

교회 돈 27억 이상을 횡령한 것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김홍도 목사는 횡령액 중 일부로 불륜관계에 있던 배 모씨에게 합의금을 지급하고 그 돈에서 아들명의 교회에 8억을 주기도 했다. 

특출난 설교가로 이름난 곽선희 목사는 5명의 여신도와 맺은 불륜관계가 문제가 되었는데 곽씨 역시 아들에게 200억이 넘는 초호화판 교회를 자기가 맡고 있는 교회의 헌금으로 지어주는 과정에서 신도들과 분쟁을 일으켰다. 

이복렬 목사는 전도사와 불륜을 저지른 후 그녀의 남편에게 5억을 합의금으로 건네고 시치미를 뗐다가 녹음내용이 폭로되자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 파직되었다. 몇 달 후 강남구 대치동의 금식원에서 활동 재개. 

대한예수교장로회 고려총회 석원태 목사의 교단에서의 전횡을 문제 삼았던 조 모 목사는 오래전 여사무원 이 모씨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폭로하기도 했는데 석원태 목사는 깔끔하게 조 목사를 제명하고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해 주었다. 

조용기 목사는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오페라가수 정 모씨와 뜨거운 관계를 지속했던 모양이다.(“목사님이 나를 위해 준비해 온 반지를 나에게 끼워주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다. 나를 영의 아내로 삼고, 나도 그를 남편으로 생각하고 자기를 나의 마지막 남자로 죽을 때까지 사랑해 달라는 기도... 우리만의 비밀결혼식이었다. 그 분은 나에게 용돈을 두둑하게 주며...(빠리의 나비부인/도서출판 띠앗)“ 소문이 돌자 교단에서는 그에게 ‘혐의가 없다’는 면죄부를 주었으나 2003년 조용기 목사에게 배신감을 느낀 정씨가 책을 펴내는 바람에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순복음교회의 일 년 예산은 천칠백억. 순복음 재단의 운영과 교회 헌금은 주로 조 목사 측근이 주먹구구식으로 운영하고 있다는데, 엄청난 액수일 것이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 어떤 변칙적인 방법으로 어떻게 자식들에게 지원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조 목사의 아들 3형제가 운영하는 기업들은 넥스트 미디어 훌딩스, 넥스트 미디어 코퍼레이션, 스포츠 투데이 미디어, 디지털 스포츠 투데이, 삼우통신공영, 엔쿠르트닷컴, 스포츠 투데이 Japan(이상 조희준), 국민지루, 국민일보, 국민 CTS, 국민인체, 국민 DB, 디지웨이브(이상 조민제), CCMN 빌딩 관리, 서울 시티클럽, 카페 포토(이상 조승제) 등. 

가장 엽기적인 사건은 한기총 공동회장이었던 장효희 목사 경우다. 그의 사망은 애당초 심방 등 과다업무로 인한 과로사로 발표되었으나 유부녀와의 간통현장을 남편에게 들키자 9층 오피스텔 난간에 매달려 있다가 추락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각각의 교단에서 왕(王)목사로 불리는 위의 여섯 명의 ‘불륜’ 이외에도 소녀가장을 성폭행해서 강간치상혐의로 체포된 강서구 S교회 하모 목사(42), 신도의 딸 김모양(11살)을 성폭행한 예천군의 김모 목사(55), 새벽기도 온 교인을 성폭행하고 돈까지 갈취한 양주군 교현리의 인 모 목사(41), 고아를 양녀 삼은 뒤 13년간 성폭행을 한 인천시 서구 E교회의 우모 목사(42), 피를 섞어 천국가자고 여신도들과 간음한 고덕동의 허모 목사(62), 중학생 딸 친구 5명을 성폭행한 목포시 대성동 박모 목사(40), 집에 태워준다고 유인해 차안에서 성폭행한 원주 S교회 홍모 목사(33), 정신박약 모녀에게 집안일을 시키며 성폭행한 마산 용담리의 백모 목사(60), 수면제를 탄 커피를 주고 성폭행 후 나체사진 찍고 협박한 독산동 B교회의 김모 목사(36), 여신도와의 불륜을 소문냈다고 아내를 죽인 완주군 봉동읍의 최모 목사(58), 친딸을 성폭행한 로스엔젤레스 전 한인회장 조모 목사(53)와 마산시 내서읍의 강모 목사(46), 귀가하는 부녀자를 흉기로 위협하고 성폭행한 부천의 이모 목사(32), 원생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한 강원도의 김모 목사(37) 6살짜리를 성추행한 시흥의 장모 목사(51), 병을 낫게 해준다며 성폭행하고 비디오를 찍어 협박한 구로동의 오모 목사(60), 고아에게 지급되는 생활보호자금을 가로채고 성폭행한 강북구 S목사(44), 하나님의 계시라며 10대 소녀를 성폭행한 김모 목사(60), 여자화장실에서 몰카를 촬영하다 구속된 홍모 목사(32)... 

공주의 박모 목사(51), 천원군 성환리의 김모 목사(41), 인천 J교회 천모 목사(58), 경북 의성읍 최모 목사(55), 부산 부곡동의 최모 목사(48) 정읍의 김모 목사(37), 수원의 박모 목사(32), 김해의 이모 목사(43), 부천시 상동 김모 목사(50), 대구의 정모 목사(47), 전남 영암군 김모 목사(35), 성남 분당의 이모 목사(46), 여수시 상암동 진모 목사(42), 광주 운남동 박모 목사(42), 대전소년원 신모 지도목사(47), 시흥동의 장모 목사(55), 강원도 인제 수양원의 이모 목사(58), 부산 대저동의 박모 목사(61),...끝이 없다. 성폭행과 성추행을 저지르는 단일직종으로는 아마도 목사가 최고인 듯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필리핀에서 10대 소녀들을 성폭행했다는 문제로 김성국 목사(50 예장통합)의 이야기가 화제다. 필리핀 바콜로드 지역에서 선교활동을 한다는 그는 교회에 나오는 예쁜 10대 소녀들만 골라 수면제를 먹여 모텔로 끌고 가는 등 성폭행과 성추행을 하고 사건을 무마하려는 시도로 총잡이들을 고용해서 필리핀 사회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고 한국에 피신(?)해 있다. 

그는 혐의를 극구 부인하고 있지만, ‘키스와 포옹은 필리핀에서는 일상적인 것, 단지 그것을 차 안에서 했다는 것이 오해를 받을 수는 있는 일, 자기들(성폭행, 성희롱으로 고소한 소녀들)끼리 질투를 해서 문제로 불거진 것, 한국선교사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한 음모’ 등으로 사건을 해석하는 그의 말은 그동안 너무나 많이 보아왔던 파렴치범들의 변명과 닮아 있다. 그가 자기 말대로 음모에 휩싸인 것이라면 하루빨리 사건 현장인 필리핀에 가서 조사를 받으면 될 것이다. 

서두에 언급한 ‘불륜6공자’에게는 유사한 점이 여럿 발견되는데 주로 한기총에서도 꽤 영향력 있는 위치에 있는 한국 교계의 실력자(?)들이라는 점, 국가보안법에 목을 매어달고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여 사학의 이익을 지키려 애를 쓰는 등 친한나라당 성향이라는 점, 주변의 눈총을 무릅쓰고 아들(사위)에게 교회를 물려주거나 지어주거나 사업토대를 마련해 준다는 점, 제왕적 특권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 동성애자나 양심적병역기피자등 소수자의 의견에 부정적이라는 점 등이다. (벤츠를 타고 다니며 최근 1200억 짜리 새 교회당 기공식을 치른 성락교회의 김기동 목사 역시 성추문과 아들 세습문제로 시끄러웠다.) 

한국 사회는 빠른 속도로 권위주의의 타파와 부패정치의 개혁, 그리고 양성평등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한기총을 비롯한 일부 기독교 수구세력은 과거 한국사회의 추악한 모습들을 그대로 간직한 채 정화될 줄을 모른다.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그들은 기독교의 교리에 유교적 남성우월주의, 가부장적 위계의식을 접목시켰고 일제와 군사독재시절에 기회주의적으로 살아남은 경험을 가지고 있다.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하다. 

부자들의 주머니를 열자니 기복신앙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밖으로 힘을 과시하자니 물량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으며 군사독재에 아부하자니 냉전시스템에 스스로를 길들일 수밖에 없었다. 

‘기저귀 차는 여성’에게는 목사직도 맡길 수 없다고 말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임태득 목사나 여성회원에게는 총회원 자격도 주지 않는 서울YMCA이사회처럼 양성평등의식은 애당초 그들의 머리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있어 여성신도는 기쁨조이거나 헌금을 바쳐가며 궂은일을 도맡아 담당하는 하녀에 불과하다. 

사정이 그러하니 그들의 유일한 관심사는 교회의 규모를 키우고 신도(특히 부자)의 숫자를 늘려 주변에 과시하면서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되었으며 약자에 대한 구원은 그 다음 문제가 되었다. 그들은 ‘수지맞는 직종’으로 목사직을 택했으니 기득권에 매달릴 밖에. 현재 한국 기독교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그들은 한나라당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신의 아들, 신의 대리인이라는 착각에 빠져있기 때문에 자기에 대한 어떠한 비난이나 비판도 견딜 수 없어하며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음모를 조작하는 사탄이라고 몰아붙일 준비가 되어있다. 주변의 맹신도들과 함께라면 절대권력을 마음껏 휘두를 수 있으므로 ‘사탄의 무리’는 손쉽게 제압된다. 

그들은 간음을 하고 법정에서 유죄를 인정받고 나서도, 목사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을 진리라고 단단히 믿고 있는 맹신도들 앞에 보무도 당당하게 다시 나선다. (박정희, 전두환을 영남사람들이 무찔렀다고 자랑하다가, 박정희 전두환에 저항했던 민주화 세력이 청와대에 들어간 것을 두고는 빨갱이들이 청와대에 있으니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구해야 한다고 말하는 김홍도 목사는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런 설교에 아멘과 할렐루야를 외치는 신도들이 동원명령만 떨어지면 시청 앞에 수만 명씩 모이는 것이 한국 기독교의 현 주소다.) 


시대에 뒤떨어진 자들이 ‘주류’를 자처하며 목청을 높이는 이 한심한 한국 기독교에 희망이 있다면 1987년 창립한 (사)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나 2002년 창립한 교회개혁실천연대, 그리고 서울YMCA이사회에 대항하는 여성신도들 정도일 것이다. 모조리 쓸어버리고 다시 세워야 한다는 자조의 말을 내뱉는 기독교인들도 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우선 가능한 일부터 해보자. 현재로서는 어느 교단이나 이런 문제를 다룰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목사들의 파렴치한 성폭행이나 성추행문제를 근절하기 위해서 우선 각 교회나 교단마다 성문제에 관해서는 성폭력금지특별규정을 만들어 기준을 분명히 하고, 어느 성(性)도 60%를 넘지 않게 윤리위원회를 만들도록 한다. 성폭력이나 성추행으로 교단에 고소를 할 때에는 고소자가 내도록 되어있는 적지 않은 금액의 공탁금(500만 원 정도)도 면제해야 한다. 

일단 사건이 나면 목사의 부인이나 동료 교인들이 나서서 피해자에게 주님의 종(가해자)을 어렵게 만들었다며 괴롭히는 등 2차 가해자로 등장하게 되므로 기독교의 개혁적 기구들은 연대하여 피해여성들을 지지하고 보호해줄 수 있는 기구를 만들고 가해자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범죄를 반복하지 않도록 엄중한 징계를 내려야 한다. 

신학교에서는 양성평등교육(여성학 강좌)을 필수과목으로 하고 남녀 성직자가 고루 배출되도록 하며 품성이 갖추어진 자에게만 목사안수를 받도록 한다. 목사를 신격화하여 절대권력을 부여하지 말고 평신도와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노력한다.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가장 빠른 방법은 각성한 여성신도들이 모여 개혁주체가 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기독교인들이여, 손잡고 일어서라!

 

2020-07-26

호남의 역사와 문화 - 전남대학교 | KOCW 공개 강의

호남의 역사와 문화 - 전남대학교 | KOCW 공개 강의








호남의 역사와 문화

전남대학교
김병인






주제분류인문과학 >인문과학기타 >사학
강의학기2015년 2학기
조회수5,731
평점3.3/5.0 (3)강의계획서
호남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이 있는 탐구를 함으로써 이 고장의 역사와 문화의 내용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고, 아울러 지역의 문화유산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안목과 식견을 기르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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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의 자연, 인문환경




차시별 강의

1. 호남의 자연, 인문환경
호남의 선사문화와 고인돌
독무덤과 장고분
2. 마한(馬韓)과 왜(倭)

왕인(王仁)과 ‘영암출생설’-1
왕인(王仁)과 ‘영암출생설’-2

3. 장보고(張保皐)와 해상왕국-1
장보고(張保皐)와 해상왕국-2

도선(道詵)과 풍수사상-1
4. 도선(道詵)과 풍수사상-2

호남과 훈요십조(訓要十條)-1
남과 훈요십조(訓要十條)-2

5. 운주사(雲住寺)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이해-1
운주사(雲住寺)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이해-2

호남의 불교문화-신라하대 선종
6. 호남의 불교문화-고려후기 결사운동

호남 士林의 형성과 특징-1
호남 士林의 형성과 특징-2

7. 호남 가단과 누정 문화-1
호남 가단과 누정 문화-2

호남 예술의 특징-1
8. 호남 예술의 특징-2

임진왜란과 호남의병-1
임진왜란과 호남의병-2

9. 호남 실학사상의 특징-1
호남 실학사상의 특징-2
호남 실학사상의 특징-3

10. 호남과 동학농민전쟁, 의병운동-1
호남과 동학농민전쟁, 의병운동-2
호남과 동학농민전쟁, 의병운동-3

11. 광주학생독립운동-1
광주학생독립운동-2
광주학생독립운동-3

12. 5ㆍ18광주민주항쟁-1
5ㆍ18광주민주항쟁-2
5ㆍ18광주민주항쟁-3

13. 호남문화론 재검토-호남소외론, 유배문화론-1
호남문화론 재검토-호남소외론, 유배문화론-2
호남문화론 재검토-호남소외론, 유배문화론-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