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준
| 김재준 목사 金在俊 | |
|---|---|
1981년 당시 미국 평화의교회에서 강의를 하는 김재준 | |
| 당교회 | 한신대학교 교목 |
| 기타 |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
| 개인정보 | |
| 출생 | 1901년 9월 26일 대한제국 함경북도 경흥 |
| 사망 | 1987년 1월 27일(85세) 대한민국 서울 |
| 교파 |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 |
| 거주지 | 대한민국 서울 |
| 재직 | 한신대학교 명예교수 |
| 전직 | 신민당 당무위원 겸 대표전임고문 |
| 학력 | 미국 웨스턴 신학대학원 |
김재준(金在俊, 1901년 9월 26일 ~ 1987년 1월 27일)은 한국기독교장로회(약칭 '기장') 형성과 조선신학원(현재 한신대학교) 설립에 공헌한 장로교 목사이며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진보적인 신학자이다. 호는 장공(長空)이다. 그는 개혁신학의 관점에서는 완전히 반대하는 성서 비평학을 추구했다.
생애
개신교 입교와 조선신학원 설립 참여
1901년 함경북도 경흥에서 태어났으며, 청년기에 부흥사 김익두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본인의 고백으로는 "성령의불길에 사로잡혔다"고 본인의 장공전집 1에 고백하고 있다. 그 후 유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자의 품세를 지녔던 청년 김재준은 개신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그는 유학자 아버지에게 사서삼경과 동양고전을 배웠으며,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 학원 신학부에서 공부하였다. 일본에서는 카가와 토요히코의 영향을 받았다. 이후 미국 프린스턴신학교, 웨스턴신학교(현재 피츠버그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여 구약성서학으로 학위(S.T.M.)를 받았다.
1933년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서 성서를 가르쳤다. 김재준은 1940년 조선신학원(현재 한신대학교)를 세우는 실무책임을 맡는다. 이는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 때문에, 서양선교사들이 평양에 세운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가 폐쇄되자, 서양 선교사가 아닌 순수한 조선 사람이 교육하고 교육받는 장을 세우려고 계획한 선각자 김대현 장로의 부름을 받고 김재준은 조선신학원을 설립하는 일에 앞장선다. 하지만 성서비평학 수용여부로 조선예수교장로회와 갈등을 겪게 되면서 1935년 '어빙던(Abingdon) 단권성경주석(單券聖經註釋)사건'어빙던주석은 미국 감리교출판사에서 발간된 주석이었지만 한국에서는 많은 유학신학생들이 참고를 하며 공부를 하였다. 어빙던성서주석사건이 일어났을 때 송창근(宋昌根)·한경직(韓景職) 목사와 함께 신학자들로부터 성서의 문자적 무오설(축자영감설)을 부정한다며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았다. 이후, 1953년 대한예수교장로회에 의해 장로교 목사직을 제명당했다. 1953년 대한장로회 제38회 총회에서는 "목사 김재준씨는 제 36회 총회결의 위반급 성경유오설을 주장하였으므로 권징조례 제 6장 42조에 의하여 예수의 이름과 그 직권으로 목사직을 파면하고 또 그 직분행함을 금하노라 선언"하였다. 하지만 박형룡목사를 중심으로한 교권파에 대항하여 대구에서는 호헌총회를 개최 호헌총회란 장로교헌법을 수호하겠다는 총회로 이에 대구에서 모인 80여명의 목사들을 중심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를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출범하게 되었다.[1] 이에 장로교회에서 목사직을 박탈하려했지만 총회는 목사의 파면권이 없고, 당시 김재준목사가 속해있던 경기노회에서는 김재준목사를 파면하지 않았다. 김재준을 중심으로 한 호헌총회는 대한기독교장로회를 출범하고 당시 한국신학대학(우리나라최초의신학대학- 초대학장은 함태웅부통령이었다.) 이후 대한기독교장로회는 한국기독교장로회를 명칭을 변경하며 김재준의 신학을 기반으로 세상의 화살촉으로 살고자 고백하며 한국의 민주화 통일운동에 매진하게 된다. 한국기독교장로회의 교단신학교인 한국신학대학(조선신학교)의 이후 한신대학교로 종합화가 되었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196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보수적인 교계의 원로목사들은 목사가 왜 정치에 관여하냐며 비난했다. 하지만 교계원로목사들이 교회의 민주화운동참여를 반대한 진짜 이유는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보수적인 대다수의 개신교계에서는 5.16 군사정변을 하나님의 뜻으로 미화하며, 군사반란을 지지하는 설교를 할 정도로 반공주의 성격의 군사정권을 지지하고 있었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나 진보인사들을 정치목사취급하거나 공산주의자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한국대학생선교회(KCCC)의 총재인 김준곤 목사는 대학생선교회 설립으로 학원선교에 기여했지만,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대해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한국과 세계의 기독교인들이 지지해야 할 반공주의적인 정권'이라고 찬양하는 과오를 범하였으며,[2], 구약성서 출애굽기에 근거, 민중을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이루는 주체로 해석하여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던 민중신학자들을 한국교회에서는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자 취급하는 경우도 있었다.[3]
하지만 그는 개신교 목사의 양심상 성직자의 의무인 예언자 역할을 버릴수는 없었다. 그래서, 기독교 단체에 다니며, 군사정권의 연장을 뜻하는 삼선개헌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에 그리스도인들이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이러한 국민들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1969년 9월 14일 새벽, 개헌안은 기습적으로 통과 되어 군사정권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김재준은 자신의 예언자적인 양심실천을 중단하지 않았고, 그의 제자인 문익환 목사, 서남동, 안병무 등의 민중신학자들은 이를 계승한다. 참고로 김재준 목사는 찬송가 '어둔 밤 마음에 잠겨'를 1966년 작사하였는데 1절과 2절은 장공 김재준목사가 3절은 늦봄 문익환목사가 작사하였다. 개신교 찬송가에는 582장(통 261장)에, 성공회 성가에는 568장에 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장공 김재준은 민주화운동과 성서비평학을 통한 한국교회 신학발전에 기여한 업적이 인정되어 2002년 12월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4]
같이 보기
참조
- 《대한장로회 총회 제38회 총회록》p238
- "한국교회의 과거사 고백,군사정권하의 한국교회",기독교 사상,대한 기독교서회)
- 죽재 서남동 목사 기념사업회 발족 기념설교문에서 발췌
- [역사를 바꾼 크리스천] 장공 김재준 목사… 교회개혁 비전 제시한 선각자 2002년 12월 30일자 국민일보
외부 링크
- KBS 인물현대사,지상에 천국을 꿈꾸다-김재준 편 보관됨 2005-11-20 - 웨이백 머신
- 사상계 1966년 4월호의 김재준 목사 평전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및 휘호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 본 내용은 김경재 교수가 집필한 『김재준 평전』(2001)에 수록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1901년 9월 26일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김호병 씨와 채성녀 씨의 2남 4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남
1905년 ~ 1910년
서당 훈장이셨던 부친으로부터 『천자문』, 『통감』,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읽고 몸에 익히면서 가풍을 따라 유교의 세계에서 소년 시기를 자람
1910년 ~ 1915년
9살 때 경원 향동소학교 3학년에 편입, 고건원보통학교를 마치고, 회령 간이농업학교를 졸업(13~16세)
1915년 ~ 1917년
회령군청 간접세과 고원으로 취업
1917년
18세 때 장석연 씨의 맏딸 장분여와 결혼. 이후 일생을 해로하면서 3남 3녀를 낳고 기름
1917년 ~ 1920년
회령군청에서 웅기 금융조합 직원으로 전직. 웅기에서 만주,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 지사들을 수시로 보며 가냘픈 민족 의식이 싹트기 시작
1920년
웅상 출신 청년 전도사로 서울 남대문교회 송창근 전도사의 방문을 받고, 나라와 교회를 생각하고 뜻을 품음. 웅기금융조합 사직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남
1920년 ~ 1923년
중동학교 고등과에 편입. 서울 YMCA 영어 전수과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이상재ㆍ윤치호ㆍ신흥우 등의 강연을 듣고 신문화 흡수에 전력함. 톨스토이와 성 프란시스 전기 등을 탐독하고 청빈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음
1924년
승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연합 사경부흥회 때,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기로 결심하고 회심을 경험함. 믿은 지 3년 후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1924년 ~ 1926년
함북 경흥에 귀향하여 용현소학교, 귀낙동소학교 신아산소학교에서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침
1926년 ~ 1928년
일본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에서 고학하면서 자유로운 학풍에서 신학 공부. 1928년 아오야마 신학부 졸업.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것을 설계함. 졸업반 때 귀향하여 두만강 유역 교회를 순방 강연함
1928년 9월 ~ 1932년 5월
미국에 유학함. 1928년 9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업하고, 1929년 9월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 편입학. 같은 학교에서 1932년 5월 신학사(S.T.B), 1932년 5월 신학석사(S.T.M) 학위를 받음. 미국 경제 공황에 직면하여 귀국함. 미국 유학 시절 송창근, 한경직과 특별한 신앙 동지로서의 우의를 굳건히 함
종교 및 신앙
1933년 4월 ~ 1936년 4월
귀국 후 평양에서 3년을 지냄. 1933년 4월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고, 평양 산정현교회 집사직으로 봉사하다가 1933년 8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講道師) 인허를 받음. 1936년 4월 신사 참배 문제와 민족 교육 금지 문제로 숭인상업학교 교유직을 사임함. 이 무렵 순교자 열전 연구에 몰두함. 평양 3년 머무는 기간 동안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등 젊은 소장 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신학 연구지 『신학지남』에 기고자로 관계를 맺게 되고, 유형기 박사의 『단권 성경 주석』 번역자로서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세 사람 연서로 성명서를 냄
1936년 8월 ~ 1939년 9월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 봉직하면서 3년을 간도에서 청년 교육에 힘씀. 1936년 8월, 은진중학교 교유에 취임. 1937년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받음. 1937년 5월부터 1938년 2월까지 월간 『십자군』을 발간함
1939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평양신학교가 폐쇄됨
1939년 9월 ~ 1940년 2월
서울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의 재정을 기반으로, 조선신학원 설립 기성회가 발족(김대현, 송창근, 김영주, 차재명 중심) 설립 사무 실무 책임자로 김재준 목사가 간도 은진중학을 사임하고 설립 사무를 전담하여 추진
기독교
1940년 3월
조선신학원이 경기도 도지사 인가로서 승동교회에서 개교. 설립자 겸 원장에 김대현 장로, 이사장에 함태영 목사, 교수로서 윤인구, 김재준 임명
1941년 ~ 1944년
일제 말기 조선신학원 끝까지 지킴. 일제에 의한 관제 『조선 혁신 교단』 시절(1942)과 조선신학원과 감신의 『합동 강의』 기간 동안에도 조선신학교 교장으로서(1943~46) 학교를 지킴
1945년
해방의 기쁨과 함께 8월에 「기독교 건국 이념」 집필 발표. 9월에 천리교 본부 건물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 불하받아 동자동 교사 시대 교수로 일함. 12월에 경동교회를 설립함
1946년 3월
송창근 박사가 제4대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김재준은 한경직과 함께 교수가 됨. 6월 장로교 남부 총회에 의해 총회 직영 신학교로 지정
1950년 1월
『십자군』을 속간하여 1951년 8월까지 속간 30호 발간함
1950년 ~ 1951년
6ㆍ25 동란으로 같은 해 8월 송창근 학장 북으로 피랍. 1951년 3월 부산 피난 전시 대학 개강. 부산 항서교회당 및 남부민동 임시 천막 교사에서 수업.
1951년 4월
학교명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변경, 김재준 목사 학장 서리에 취임
1953년
장로교가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분열. 장로회 37회 대구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직 파면 선언, 한국신학대학 총회 인준 취소, 한신 출신 교회 취임 거부, 이미 위임된 한신 출신 목사들의 노회 재심 등을 불법적으로 결의. 대구 37차 총회의 불법성에 저항하여, 같은 해 6월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장로회 38회 호헌총회를 개최. 기독교장로회 탄생
예배 장소
1953년 ~ 1957년
서울 환도 후 동자동 교사에서 학장 서리 겸 교수로서 봉직
1958년 ~ 1959년
1957년 12월,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새 캠퍼스로 입주. 김재준 목사 제6대 학장으로 취임. 캐나다 연합교회 초청으로 순회 답방(1958.8~1959.9)
1959년 5월
밴쿠버에 소재한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립대학교 유니온 칼리지에서 명예신학박사 수여받음
1961년
5ㆍ16 군사정변으로 군사 정권에 의해 60세 정년제 강행으로 동년 9월 한국신학대학 학장직 및 교수직에서 강제 퇴임. 쌍문동 국민주택으로 이주함
1961년 8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이 됨
1965년 4월
한국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추대됨. 9월에 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으로 추대됨. 한신학원 제7대 이사장으로 피선(1966.9~1970.9)
1965년
한ㆍ일 굴욕 외교 반대 국민 운동을 한경직 목사와 주도하여 영락교회에서 대중 강연, 교회의 대사회 참여 운동 시작
1970년 9월
월간지 『제3일』 창간. 박형규, 현영학, 서광선, 이문영,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등이 동인으로 참여
1972년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장이 됨. 12월에 유신헌법이 발포됨
1973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장으로 추대됨.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지학순, 이병린)
1974년 3월
캐나다로 출국. 11월에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직 수임(2회 연임)
1974년 10월
캐나다에서 『제3일』 속간. 1981년 6월호까지 속간 60호 발간
1975년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됨
1983년 9월
귀국
1983년 ~ 1985년
전국 국토 순례. 『재야 원로 모임』에 참여하여 민주화 운동과 평화 통일 운동을 지속함
1987년 1월
고문으로 살해당한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이 됨.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유언으로 남김
1987년 1월 27일
서울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87세로 별세
김재준론
전경연 박사
한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사상계 1966년 4월호. 전문인용. |
學은 지식의 蓄積축적이 아니라 決斷결단이요, 眞實의 追求추구이다. 또 自由없는 곳엔 學도 서지 않는다. 그는 眞實을 追求하고 自由를 애타게 찾아 歷史的 現實에서 決斷결단을 내렸다. 이같이 하여 그는 이 땅에 神學의 礎石초석을 놓은 것이다.
1. 序서
한 인물을 논평하고 그의 업적을 云謂운위한다는 것은 그의 활동이 완결된 다음에 될 일이며, 그것을 말할 수 있는 사람도 그의 사상과 고민과 의도를 해독할 만한 정신력과 체험과 정서의 소유자가 아니면 안 된다. 이 같은 조건들을 무시하고 이렇게 붓을 드는 것을 미안스럽게 생각한다.
우리의 주인공 長空 金在俊 博士, 목사요 문필가인 그는, 그리 멀리에 있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그를 뻐스 안에서나 그의 온돌방에서나, 길거리나 어느 회합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그는 무슨 人의 장막 속에 갇힌 분도 아니요, 신비로운 역사의 안개 속에서 후배들의 추억의 대상이 된 분도 아니다. 그는 무슨 힘과 돈으로 자기의 찬양자를 동원할 필요를 가진 사람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대체 왜 그를 말하려고 하며 또 꼭 말해두어야 한다고 생각할까? 이러한 질문이 이 글을 쓰게 하는 원인이 된다.
學은 역사적 理性의 자기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의 雜沓잡답과 傳統들의 交叉교차 가운데서 개성은 진실을 찾고 유구히 흐르는 정신의 흐름을 붙잡아 그 속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려고 한다. 역사적 實存실존은 과거의 흐름에 조건 지어지고 未來를 호흡하므로 자란다. 學은 이루어지려면 진실에 대한 추구와 자유의 획득을 위한 역사적 현실에서의 결단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실로 決然하게 이 결단을 지은이다. 나비가 번데기의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이 오늘의 젊은이들이 信仰과 神學의 자유를 얻기까지 어떠한 代價가 치루어져야 했는가를 모르고 있다. [성경에도 오류가 있다], [성서는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을 자유스럽게 말할 수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력과 시간과 거짓된 평화의 희생이 요청되었는지 다 말할 수 없다. 그가 저러한 告白고백을 閉塞的폐색적인 한국 교회의 正統분위기 속에서 토론하고 가르쳤을 때, 異端이단이란 선고를 받고 심문과 논박, 비난과 저주를 받았다. 그 말과 더불어 교회는 분열되어 불행한 역사는 아직도 흘러간다. 이것이 바로 17, 18년 전의 일이다(1966년 시점에서). 1947년 4월 장로교회 경기도 (노)회에는 다음과 같은 진정서가 날아 들어왔다.
[개혁교회는 성경에 절대 권위를 두고 그 위에 건설된 교회입니다. 성경은 天啓천계와 영감으로 기록되었다는 초자연적 성경관을 우리는 견지합니다.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니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법칙이니라}라는 신조 위에 조선 장로교회는 섰고 이 신조는 조선 교회 안에 영원히 보수되어야 할 우리들의 가장 순수하고 복음적인 신앙고백입니다….
근대주의 신학사상과 성경의 고등비평을 항거합니다. 자유주의 신학과 합리주의 신학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조로 인하여 현 세계는 점점 비신앙 상태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다 이 자유주의 新神學 사조에 흘러간대도 우리는 單身단신 순 복음의 영토가 되어 전 세계를 항해 도전하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기지 않습니다….
1947년 4월
서울 조선신학교 정통을 사랑하는 학생 일동 근백(기독교장로회 44회 총회 회의록 및 호헌사. p. 57,1959)
이 진정서에 조선 신학교 교수들의 자유주의 신학 사상이라 하여 공박한 부록이 길게 붙여 있다. 구약 모세 五經 또는 六經의 文書設, 제2이사야說, 聖書가 가나안,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샤 등의 외래 사상에 영향받았다는 說, 정통교리를 비난했다는 것, 豫定論예정론에 대한 애매한 주장 따위가 열거되어 있었다. 사실로 이들이 반격한 것은 19세기에 있던 자유주의 신학이 아리라, 정통주의와 자유주의를 함께 극복한 新正統主義였다.
이같이 단신으로 전세계의 신학적 추세를 막아내겠다는 氣械기개에 대결하여 우리의 주인공은 단신으로 새 시대의 세계적 神學 사조가 이 나라에 밀려들 수 있는 海峽해협이 되어서 철통같던 그 防波堤방파제에 구멍을 뚫었다. 장로회 특별위원이 묻기를 [김교수 진술서에 의하면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하셨는데요?]하는데 대하여 [있는 것을 없다고 하겠습니까?]라고 그는 대답하였다.
이 역사적 사건 배후에는 묵묵히 쌓은 그의 학업이 있었고, 그의 良心의 증언, 生의 起伏기복, 쉬지 않고 써 남긴 문필들이 있다. 이 모든 것을 카메라에 담는 것 같이 遠近影원근영에 의한 어떤 그림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너무 平面的이 될까 두렵다. 이것이 한 역사적 증언이 되기를 바라며, 사라진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2. 開拓者개척자
심는 자와 거두는 자는 다르다고 한다. 개척자들은, 식구들에게 음식을 나눠주고 자기는 먹지 않아도 만족해하는 主婦와 같이, 그 노력의 열매는 남이 취하는 것이 常例상례이다. 맛있는 것들은 모두 남에게 떨어지고 그의 입에는 성기고 쓴 것만이 배정된다. 30년 전 한국의 기독교의 出版과 讀書界는 傳單時代를 면치 못하였다. 천로역정, 예수 전, 칼빈 전, 어린이 說敎, 主日工課책, 說敎集 몇 개 以上의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한국 사람의 손으로 쓰여진 神學書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오늘날 基督敎書會나 기타 출판을 통하여 쏟아져 나오는 神學書들을 볼 때 참으로 今昔금석의 差차를 느낄 뿐이다. 그때 平壤神學校에서 출간되는 잡지 [神學指南]도 있었지만 독자의 수가 한정되었고, 일반은 月刊 아이생활, 週刊 基督申報쯤으로 기독교 언론에 접하였다. 그때 崔仁化라는 出版에 대한 독지가가 있어서, 몇 몇 목사님들의 설교를 손수 필기해서, 작은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그도 자금이 없어서 친구의 힘을 빌어 교문사라는 출판사를 이름만으로 세워서 [朴亨龍 목사 설교집] [蔡弼近 목사 설교집] [吉善宙 목사 설교집] [金益斗 목사 설교집]등을 내었다. 거기에 金在俊 목사님께 부탁하여 번역물로서 [무우디 설교집 至上의 은혜]를 첨가하였다. 이것이 金목사님 첫 출판이며 널리 애독되었다고 한다. 얼마 있다가, 崔仁化 씨는 다시 金목사의 단편적인 글들을 [神學指南], 기타 잡지나 신문에서 필기해 내다가 책으로 출판하겠다고 졸랐던 모양이다. 그런데 電車간에서 그 원고를 모조리 잃었다고 한다. 그는 不屈의 정신으로 다시 필기하였다. 이렇게 하여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이 金목사의 첫 창작집이라고 할 수 있는 논문, 설교, 수필의 집성 [落穗]이다. 그것이 1941년 2월의 일이다. 위에 말한 설교집들의 광고가 이 책 뒷장에 남아 있다. 이 책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昭和八年(1933년-필자주)]이래 일부러 문서로 발표하려는 욕구나 계획이 있은 것은 아니나, 간행에 책임이 계신 친구들의 때때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워서 임시임시 붓을 들어 지상에 발표한 것이 있었는데, 애독해주시는 분들이 계시단 말씀을 들을 때마다 悚懼송구와 감사를 不禁하였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다시 모아 單行本으로 낼 생각은 물론 추호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敎文社의 崔仁化씨가 이 發表된 글들 중 얼마를 다시 淨寫정사하여 가지고 와서 간행을 권하기에 처음 몇 번 거절하였었으나, 그래도 다시 유익을 끼칠는가 하여 권하는 대로 다시 세상에 보내기로 한 것이다. 너무 큰 기대를 가지지 마시고 잡지 읽으시는 셈치고 읽어주시면 신앙에 뜻 두시는 청년 제군께는 다소의 도움이 있을까 한다. 寂寥적요한 조선기독교계의 출판사업을 위하여 銳意精進예의정진하는 교문사 몇 [敎文] 주필 崔仁化씨의 성의를 감사한다. 이것이 진실로 추수 밭에 떨어진 이삭이요, 五餠二魚의 남은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지만 버리지 말라는 것이 主의 命令이시니 그대로 上梓하기로 하는 것이다].
[落穗]라는 題號의 뜻도 이것으로써 약간 드러나 있는데, 이렇게 하여 오늘날 신문이나 잡지에 특별한 설명도 없이 [낙수]라는 말이 오르게 된 기인이 되었다. 神學에 관한 글로서는 너무 낭만적이고 또 겸허하다. 우리 主人公은 적막하고 숨막히는 한국의 사회, 개화를 동경하면서도 내재적으로나 精神的으로 자유를 잃은 閉塞的 들판을 향하여 [소리]의 역할을 하려고 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광양에서 외치는 세례 요한을 동경하였다.
[만국의 예언자]가 뒤를 이어 외치던 선민(選民)의 나라 이스라엘에도 그 [소리]가 그친 지 벌써 世紀를 거듭하였다. 위대한 애국자 戰士들이 오고 또 갔으나 예언자의 발걸음을 멈춘 지 오래였다. 전통과 교권만 알고 공의와 사랑을 모르는 제사장들, 성경의 文字만 알고 정신을 모르는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굳어진 마음과 좀된 솜씨로 예언자의 위대한 종교를 농락하고 있었다.
[네가 그리스도냐?]
[아니다.]
[그러면 너는 무엇이냐?]
[나는 광야에 웨(외)치는 소리다]하고(요한 1:21).
<광야에 외치는 소리!> 얼마나 파격적인 命名인가! 그는 자기 자신을 [소리]로 化해 버린 것이었다. 하나님 公義의 말씀이 요한에게 임하시매 요한은 그 [소리]가 되어 들어줄 사람도 없는 광야에서 외치고 있는 것이었다(落穗以後 p. 3,7).
세례요한에 대한 예찬의 말은 그의 글에 거듭나오며, [선지자적 心情]이란 글에서나, 예언자와 학자가 의좋게 서로 어울려서 서로의 부족을 보충해 가는 학원을 동경한 글들에서 그 여음들을 듣는다(하늘과 땅의 邂逅해후,p. 31참조). 그러나 그가 동경하고 경험한 이런 [소리]의 직책은 가혹한 운명에 짓밟히는 것밖에 없다고 본 것 같다. [갑자기 서리가 내린 무덤가에 그런 줄도 모르고 작은 꽃을 피우려던 민들레가 대지의 젖꼭지를 문 채 고스란히 쓰러진 가련한 모습이 우리 世記末에 태어난 젊은 예언자들의 운명이 아닐까](하늘과 땅의 邂逅 p. 50).
아직까지 여운을 남기고 우리 가운데 메아리치는 그의 말들이 있다. 그것들은 사실 [소리]의 역할을 다한 것들일 것이다. [落穗], [새 良心의 創造], [人間建築], [學의 自由], [埃及애급의 건장된 屍體시체](미이라의 뜻), [生活의 福音] 따위다. 이런 말들이 사전에 없는 것이 아니지만, 적당한 자리와 때에 우리의 피와 살이 되어 울려 나오게 한 것은 그의 노고에 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성서의 '축자영감설'을 주장하며 번역의 하나 하나까지 성령의 감동으로 되었다고 가르치던 그 시대 교회 안에서 성서의 自由譯을 버젓이 활자로 내어놓은 일도 개척자의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에도 성서의 개역을 반대하는 교회 지도자들이 있는 데야 더 말할 것도 없다. 殿堂建築전당건축엔 무척 힘을 들이면서 인물 기르기에 인색한 교계를 슬책 하는 그 마음씨도 새로운 [소리]의 하나이다.
[有僞한 청년남녀 중 조금만 성의 있게 붙들어 주고 도와주면 주안에서 큰 일을 맡아 할 수 있을 것을 짐작하면서도 다들 보는 체 안 하므로 마침내는 곁길로 나아가 타락의 구렁텅이에 떨어져 泯滅민멸해지고 마는 참극을 얼마나 많이 보고 있는가?](落穗p.157). [꿈꾸는 자, 위대한 동경과 약속에 사는 자- 그의 이름은 <젊은 이>다. 티끌 속에 묻히면서도 <새 하늘 새 땅>의 약속에 기뻐하며, 병과 죽음에 시달리면서도 영광의 몸을 덧입고 환상(vision)에 사는 자, 그 불굴의 젊은 꿈이 이 강산에 타올라야 하겠다](하늘과 땅의 邂逅 p. 67).
3. 巡禮者의 學
끝없는 순례의 길을 떠나 아직도 낙착할 곳을 얻지 못한 이 순례자에게 학이란 것이 있을 수 있을까? 學이란 것은 한 분야나 여러 영역에 대한 학문적 인식의 총체와 거기에 이르는 방법이라고 정의한다(Religion in Geschichte und Gegenwart, 2版 V. P. 1986). 學은 방법에 의한 체계화이며, 금자탑이다, 상아탑이다 하는 이름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인공은 즐겨 순례자가 되었고 아직도 그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그에게 學이 있었다면 어떠한 것이었는지 알고 싶다. 그래야 [碩學]이란 論壇에 끼일 것이 아닌가?
그는 결코 일찌감치 집 짓고 자기의 사색을 정비하고 제자들을 양성한 것이 아니다. 그는 십대의 소년으로서 자연을 즐겼다. 푸른 언덕, 맑은 시내, 숲과 새와 나비와 반딧불, 봄의 노을, 여름의 비와 무지개, 가을의 단풍, 겨울의 백설을 유달리 좋아하며 시인이나 된 듯 감격에 잠겼다. 소년기를 넘으니 지식이 내적인 분열을 일으켰다고 한다. 과학을 배우는데 따라 그 세계관에 끌려, 하늘을 쳐다보며 천문학에 정신을 쏟고 무한대의 하늘로부터 무한소의 전자 원자의 세계까지 파헤치려고 하였다고 한다. 중학을 지나 스스로 [文化人]의 말석에 참여한 기분으로 인류 문화의 [박물관]을 거닐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매력이 이 모든 것을 능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쉽사리 믿음에의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누님의 죽음이란 큰 타격에 영혼의 겸손을 배우고 있을 즈음, 서울에서의 金益斗 목사의 부흥회에 성경 찬송을 사 가지고 계속 참석하고 믿음의 결단을 했다고 한다. 그것이 1920년, 20세 때다.
그는 이것으로 모든 은혜를 소유한 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이것이 사실은 번연(Bunyan)의 [천로역정](Pilgrims Piogress)의 기독도가 성경을 읽다가 불안에 몰려 순례의 길을 재촉한 것과 같이, [새로워진 마음]을 가지고 방향이 뚜렷한 순례의 길을 힘차게 걸어간 시작이 된다.
{요새 주택난이 너무 심해서 [어디 집 한 칸 없나 - ]하고 갈급해 돌아다닙니다. 그러나 집은 들어앉아 먹고 쉬고 자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상징적으로 바란다면 순례자에게는 인연이 먼 것이 아닌가 합니다. 순례자란 집을 떠난 [길손]인 까닭입니다. 길은 어떤 목표를 향하여 가고 걷고 때로는 달음질치는 곳입니다. 동양에서도 사람의 본성을 찾고 하늘의 근본을 더듬는 것을 [道] 즉 [길]이라 하였습니다. 曾子증자의 말씀에 [天命之謂性천명지위성 率性之爲道율성지위도 授道之謂敎수도지위교]라고 하였으며 孔子도 [길]이 너무나 근본적인 것이기 때문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조문도면 夕死라도 可也)라고 하였습니다. 요컨대 우리는 다 이루었다 하는 자들이 아니외다. 목표를 향하여 다름질치는 [길]위의 사람들입니다.
우리 크리스챤 지도자들을 보아도 平生을 길에서 마친 이가 가장 위대한 분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모세도 애급에서 미디안으로, 다시 미디안에서 애급으로, 그리고 홍해로….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집은 어디 있습니까? 그의 집은 가고 오며 복음을 선포하던 그의 다니던 [길]이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 드릴 곳이 있으나 人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바울도 그의 평생을 길에서 마치었습니다…. 褐衣憎帶갈의증대로 -所不在의 平生을 지낸 聖 프란체스코, 아프리카의 암흑을 더듬어 평생을 걸어다닌 리빙스톤. 견해는 다소 다르다 할지라도 위대한 크리스챤은 평생을 길에서 걸어간 사람들이라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落穗以後 p.263-4),[巡禮순례의 길]의 한 절).
『나도 커 가면서 내 어머니를 내 집에 한번 모셔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간절하여졌다. 그랬지만 그럴 기회는 종시 오질 않았다. 회령서 3년, 웅기서 3년, 서울서 3년, 동경서 3년, 미국서 4년 그리고, 평양으로, 간도로 다시 서울로, 평생을 순례자처럼 지냈으니까!』(하늘과 땅의 邂逅 p.237, [흰카아네이션의 얼]에서).
그의 巡禮순례는 끝없는 流浪유랑의 길은 아니고 그가 만난 확고한 시발점에서부터의 巡禮이며 목표도 역시 뚜렷한 것이다. 그는 믿음의 결심과 더불어 성서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말하는 인격자에게 사실로 發見되고 붙잡혀서 이 순례를 하고 있다.
[聖經! 求道者구도자는 이 이상한 책, 언제나 새로운 책, 가리우면서도 드러난 책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문학을 잃는 것 같이 상상의 세계도 아니었으며, 철학을 읽는 것 같이 사색의 세계도 아니었으며, 역사를 읽는 것 같이 돌맹이 삶는 [것] 같은 사실만이 세계도 아니었으며, 과학을 읽는 것 같이 실험과 분석의 기록도 아니었고, 동양 종교에서와 같이 음침. 신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친히 찾아 온, 말하자면 살아 계신 하나님 자신이 계시하신 사실이었습니다(落穗以後. p. 274).
神學硏鑽신학연찬에 있어서도 그는 여러 인물들의 사상을 편력하였다. 구약 성서의 욥기, 전도서 연구,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 연구를 비롯하여 감추인 교부들이나 성자들의 생애와 사상(순교자 저스틴, 로마의 감독 씩스터스와 집사 라우렌스, 聖 켈라시어스, 民謠민요의 盲聖子 허-베, 哀話애화, 施惠시혜의 聖子 알렉산드리아의 요한)에 대해 짧은 글들을 남겼고 중국에 갔던 선교사 하드슨·테일러, 농촌 지도자 오벌린, 덴마크 부흥의 원동력이된 그룬트비의 傳記들을 쓰면서, 그 정신에 깊이 잠겼었다. 그의 神學의 순례는 칼빈, 와필드, 하-지, 바르트, 브르너, 라인홀드 니-버, 리챠드 니버, 벨쟈에프, 베넷트, 틸릭히, 하크니스, 많은 實存主義 사상가들, 그가 영향을 받지 않은 현대의 사상가들이 적지만, 그 어느 하나에 낙착하여 거기에 큰 체계의 건축을 시도하지 않고, 변천하는 시대와 함께 걸어가며 그 가운데서 시대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그 시대가 필요로 하는 증언을 한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내가 어느 분의 무슨 책에 가장 많은 감화를 받았을까 하고 생각해 봐도 도무지 석연치 않다. 물론 발트에게, 브루너에게 많은 감회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저서를 읽었다는 데 있어서도 一種 [走馬看山]격이었고 파고들어 [연구]한 것이 아니니 뭐라하기 죄송하다(月刊基督敎思想, 1964,7,p. 42, [내가 영향받은 신학자와 그 저서])}.
우리의 주인공은 계속적인 신학의 순례에 있어서, 學의 體系化란 것을 두려워하고 반항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日本 請山學院에서의 자유주의 물결과 미국 프린스톤의 보수주의적 분위기에 ?이면서, 새로운 방향에로의 충동을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기독교의 가장 근본적인 것을 확실히 보유하면서 자유하는 복음을 천명한다. 그 근본적인 것과 시대적인 것, 계시와 문화와의 분간을 혼동하지 않고 언제나 시대에 앞서면서 시대를 포섭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이해하고, 성서를 다시 보자는 노력- 무슨 그 비슷한 방향이었다. 웨스틴에서의 3년은 그런 방향 설정 안에서 이른바 [學]을 한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게 소위 [學]을 한다면서 동시에 [學]에 대한 반발, 또는 [學]을 경멸하는 이상한 마음씨가 있었기 때문에 종시 [學]에 몰두 할 수가 없었다. [學]보다도 [想像]이 앞서고 [記錄]이나 [글자]보다도 [人間]자체의 신비한 세계가 나를 유혹했다.』同上 p. 25).
루터와 改革者개혁자들은 그들의 神學을 [나그네의 神學](theologia viatorum)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스콜라 신학의 체계에 반대하고, 귀착점을 땅에 갖지 않는, 영원히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복종과 증언을 과업으로 한, 나그네의 神學을 하였다. 말씀은 거듭 새롭게 문제를 던져 준다. 그것을 역사적 情況에서 풀며, 다시 경고와 책망을 바로 말해주는 증언의 신학이 그것이다. 당시의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기반이 근본주의의 교회 체계였고, 이것이 믿음을 부자유하게 억압하는 한, 김박사의 신학은 [순례자의 學]이 될 수밖에 없었다.
4. 神學의 礎石
파스테르나크의 主人公 의사 [지바고]가 모스크바의 電車 안 탁한 공기 속에서 느낀 것 같은 탁하고 숨막히는 한국의 前近代的 분위기에서 김박사는 批判學을 정직하게 소개하고 가르쳤다. 그는 구약 강의를 담당했다. 이 강의에 충실하려면 구약의 문학적 역사적 비판을 소개 안 할 수 없었다. 그것이 한국 장로교 안에서는 禁斷의 학문이었다. 近代는 인간의 자기발견에서 시작되고, 기독교의 신기원은 복음이 믿는 자를 自由하게 하는 체험에서 동텄고, 近代的 學文은 비판정신에서 땅에 머물도록 형틀을 받게 되었다. 敎理나 신비까지도 이성의 전당에서 심판을 받고, 종교의 절대성도 한번 역사의 상대성 안에 자리를 얻지 않으면 영구히 인간을 지배할 힘을 갖지 않았다. 神學도 이 같은 비판의 세례를 받지 않고는 그 眞實性을 과시하여 현대인간을 휘어잡는 힘으로 군림할 수 없었다. 批判學은 진실의 추구이며 양심의 자유의 試金石이었고, 관념론적인 정통 신학과 數와 敎權의 자기 기만을 폭로할 직책을 가진 것이었다. 우리의 주인공은 이 비판정신의 배격을 우매요, 자유의 침해라고 하여 한사코 반격하였다. [十字軍]이란 잡지를 季刊으로, 있는 힘을 다하여 간행해서 민중의 정신적 훈련을 위해 분투하였다. 그는 수시로 論說로서 [聖書批判의 意義와 結果](낙수이후 p. 224-)든지, 새 정신의 앙양에 힘썼다. [十字軍]대한 [봐르트부륵의 기왓장과 같이] 많은 그때의 반박과 敵意는 바로 새 에온의 빛을 꺼리는 박쥐의 무리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 잡지는 진실로 새 時代의 旗手로서 애독되고 젊은 기개의 좋은 영양제가 되었다. 이것이 없었던들 이땅은 [소돔]땅과 같이 되고 무지라는 폭군의 왕국이 되었을 것이다.
5. 人生의 책
이태리의 사상가 로마노 과르디니(R. guardini)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 책을 주셨는데 그것은 성경과 인생이란 책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읽어야 하고 또한 人生이란 책을 함께 읽어야 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20대에 성경에게 붙잡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하는 질문을 들으며, 그것을 읽었다. 동시에 그는 인생이란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자기가 걸어온 길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내 청춘이란 것은 요새 사람들 같이 甘美한 로맨스로 [꽃다발]을 꾸미는 식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광야]라고 할까, 사막이라고 할까, 하여튼 긴장한 고투의 계속이었다』(하늘과 땅의 해후(邂逅) p. 243).
그는 또 자기의 유학생활을 회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 동안 무슨 학비를 순조롭게 얻어 쓰는 [행운아]로 공부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고학]을 한 셈이다. 일본 있을 동안에는 건축장에 가서 지하실 흙 파내는 노동도 해 보고, [낫도]장사를 하면서, 고학생 합숙소에서 뒹굴기도 하였다. 학교 구내에서도 무슨 노동이고 시키는 대로했고 기숙사 식당 주인이 무척 고마운 사람이어서 식비를 두달 석달 못내면 방과후에 장작도 패우게 하고 곳간 소제도 시키고 하고서는 그 식비를 면제해 주었다. 어떤 때에는 굶기도 하고 하루에 두끼 안 먹는 것쯤은 예사롭게 여겼고, [식빵]한 덩어리로 사흘 사는 연습도 몇 날 계속해 보았다. 한번은 사람이 [먹는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까지 짓밟혀서야 소위 [인간성]의 존엄을 운위할 면목이 있겠느냐고 근본적으로 도전한다는 의미에서 하루에 쌀 한줌씩 생식을 하면서 아흐레를 지냈다. 그러다가 동무 집에서 국수를 삶아 놓고 먹으라는 바람에 [정조]를 깨뜨리고 다시 세상으로 떨어진 일도 있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도 그것이 나에게 소위 [열등감]을 준 일은 없었다…』(하늘과 땅의 해후, p240).
또 回甲때에는 다음과 같은 회고담을 하였다.
{일제 말기에 나는 뚝섬에 살았다. 식구는 부쩍 늘어 어떤 때는 열 하나, 둘까지 됐었다. 쌀은 구할 수 없고, 어찌다 콩 몇 가마를 얻어 세끼를 콩죽 한 사발씩으로 연명했다. 아마 거의 이년 계속됐을 것이다. 아내는 자기 몫을 아이들에게 붙여놓고는 두서너 모금 마시고 만다. 그러지 말래도 막무가내다. 그때 우리 막내아들이 났었는데 어미가 그 모양이니 젖이 날 리가 없다. 어미는 그래도 장창 빨리노라면 젖이 단 몇 모금이라도 들어가겠지 하고 종일 애기를 앞가슴에 붙이고 다닌다. 하루는 애기가 눈을 못 뜨고 울기도 못하고 아주 맥이 없어졌다. 마침 동리 부인이 밥 끓을 때 떠낸 뽀얀 물을 갔다 주기에 거기 사탕을 타서 숟가락으로 떠 넣었더니 얼마 후에 눈을 뜨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 [비결]로 길러 낼 수 있었다. 아내는 뼈만 남을 정도로 말랐다. 할 수 없이 짐을 걷어 싣고 도농이란 농촌으로 이사했다. 그래도 농사 짓는 데가 좀 나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해방 때까지 지냈다』(同上 p. 289-290).
이러한 생활의 경험이 디오게네스의 경우와 같은 절조나 인내의 상징이 아니라, 죽음과의 대결이란 형태를 띄었다. 生의 의미는 죽음에서 드러나게 마련이다. [孤獨. 死. 信仰]이란 글에서 이론적으로 이 죽음의 문제를 다루었다.『여기서 나는 [죽음]을 응시한다. 죽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엄숙하고도 신성한 [결단]의 기회다. 그것은 가장 무서운 심판임과 동시에 가장 존엄한 은혜다. 예수께서 자기 죽음을 그렇게까지 중요시하고 그것이 영원한 승부를 결하는 [아마게돈]이라 생각하여 단호히 [十字架]로 나아간 것은 죽음이 상례적인 비극이래서가 아니라 그것이 가장 영웅적인 결전장이래서였던 것이다』(하늘과 땅의 해후, p.59).
그의 入院記의 한토막으로 쓴 [꿈같은 이야기들](同上 p. 249-)에 죽음의 고개에 다달은 엄숙한 순간의 광경이 잘 나타나 있고, 죽음의 女神은 단 번 그를 찾아 왔다가는 키스만을 남기고 가 버렸다.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남겨둔 모양이다. 지금은 예순 다섯의 年齒로서, 건강하게 쉬지 않고 원고를 쓰고 계신다. 자주 설교도 하신다.
6. 文筆의 사람
『배고플 때에는 [성경]보다도 에피테터스 語錄이나 마커스·오렐리우스의 명상록을 읽으면서 스토익(stoic)의 철학적 프라이드를 가지고 참아 가는 것이 오히려 내 기분에 맞았다}(하늘과 땅, p. 240-). 1935년 즈음 間島에서 눈에 파묻힌 무덤 같은 초가집들을 보면서 읊은 것이었다. 그의 詩才의 한 본보기라고 여기 싣는다.
눈속에 一點黃色 무덤인가 하였더니
굴뚝에 연기나니 집일세 分明하이
그래도 내 겨레 저기 있다니 찾아보고 가리라.
그는 말하기 전에 먼저 생각으로 다듬고 글로 표현하였다. 한학자이신 선친에게서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우며 아홉 살까지에 [동몽선습] [사략] [四書三經]을 다 떼고 여름철에는 [당시]니 [득율]이니 [방옹집]이니 하는 한문 시집까지 떼도록 하였다고 한다. 일본 유학 시절에는 도스또에프스키니 톨스토이니 하는 문학서를 탐독하고 쓸데없는 공상에 젖어 자기도 그런 것을 쓸 수 있으리라는 충동을 느껴 없는 돈에 원고지를 사다가는 열심으로 무엇을 구상해서 몇 장이고 써 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곧 불살라 버렸었다. 그가 그리스도에게 자기를 奉獻봉헌하고부터는, 자기의 뜻을 표현해 보겠다는 충동에서가 아니라, 청탁에 몰려서, 시대의 감각이 암시해 주는 것을 글에 담고 활자에 옮기게 되었다. 그의 많은 글은 斷片이다. 키엘케에골은 그의 철학을 [단편](Brockenstück)의 철학으로 이름 지어 헤겔의 체계적 철학에 대립시켰다. 우리의 주인공의 神學은 斷片의 神學이다. 신문 잡지에 실었던 많은 隨筆, 斷章들은 필요에 몰려 기록한 것들이다. 그의 저서라고 할 때, 거의 단편의 수집이다. [落穗](1941), [落穗以後](1952), [啓示]와 [證言](1954), [하늘과 땅의 邂逅](1962)가 다 그렇다. [聖書解說]만이 연속된 신학적 저술인데, 그것도 어떤 체계적인 것은 아니다. 그의 문장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은 그의 번역서들을 즐겨 읽는다. 그가 이룬 많은 번역서들이 있다. 이런 번역서 중에서 그가 첫째로 꼽는 것은 R. H, 매킨토쉬의 [현대 신학의 諸型(1953)]이다.
7. 畢生(필생)의 關心 - [길]의 學
우리의 주인공이 인생의 첫 길에서 心醉한 학문이 동양의 고전이다.『독서라면 내 나이 다섯 살 되던 때에까지 소급된다. 다섯 살때 [千字文]을 하루 네자씩 배워 가지고 [하늘천 따지 가물현 누루황]하고 앵무새 처럼 읽던 것이 생각난다. 여섯 살 때부터라고 생각되지만 [童蒙先習동몽선습]으로 진급되어 [天地之間 萬物之中] 惟人이 最貴하니...]하면서 그걸 또 외이던 생각이 난다. 그때 이후 史略 초권, 通監 2권부터 그리고 大學, 中庸, 論語, 孟子 등을 아홉 살까지에 읽고 여름철에는 唐詩, 杜律, 放益集, 唐宋八大家文 등도 읽었다. 열살 때엔가 詩傳을 읽고 書傳을 좀 보는체 하다가 하도 재미없어서 안 읽는다고 떼를 쓰고 그때 마침 서울 백부께서 보내 주신 小學校 敎科書들만 들고 다니던 것이 생각난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집에서 약 30리 떨어진 고장에 있는 외갓집 동리 소학교 3학년에 입학하게 되었다』(하늘과 땅, p. 279).
이 漢學에의 접촉이 단순히 글자의 습득이란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은연중에 동양의 윤리 사상에 잠겨 드는 기회가 되었다. 그의 순례의 길은 사실은 인생 수업의 길이었고, 다시 [길이요,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길을 걷는 일이었다. 여기서, 신학의 순례의 終章에는 윤리라는 관문이 그에게 열려졌다. 에픽크테터스나 말쿠스·아우렐리우스의 윤리사상도 心裡에 남아 있겠지만, 동양의 성현들의 가르침이 새로운 빛 아래서 그에게 비친 것 같다. 그의 윤리에 대한 관심은 50대에 들어와 더욱 강하여 진 것 같다. 그것은 正統神學과의 투쟁에서, 바리새주의에 대한 혐오에서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직 이 문제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은 없을지라도 여러 곳에서 단편적으로 나타나며, 유교적 동양 윤리의 재해석이란 것으로 표현된다. 그는 자기의 견해를 책에 옮기기 전에, 먼저 저명한 윤리적인 서적의 번역을 통하여, 준비적 지반을 민중에게 이룩해 보려고 하였다. 투루뿔러드의 [家庭生活]의 再建](1956), 부르너의 [그리스도교와 文明](1958), 리챠드 니버의 [그리스도와 文化](1958), 베넷의 [크리스찬과 국가](1959), 또 하크니스의 [基督敎倫理學](1963)의 번역을 내었다.
한국의 유교 학자들은 유교를 性理學으로 받아 관념론에, 또 그 철학화에 변질시켜 윤리성을 타락시켰다고 그는 본다. 우리의 주인공은 유교의 핵심은 天에 대한 종교적 감회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孔子의 종교 사상의 인격화 기반이라고 본다. 이 같은 견해는 그의 독단이 아니고 現 成均館學의 유교수의 견해와 일치한다고 한다. 이러한 종교성의 박탈에서 유교 해석이 바리새주의에 전락하였다. 주자학은 네오·콘푸시안니즘으로서 禮樂射?書數라는 六藝를 풀고 生의 訓練의 방법으로 권장했는데, 이것을 한국 학자들이 전수할 때에도 그 처음에 있는 예악禮樂같은 것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武藝인 射, ?(말타는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고 書와 數에 치중한 느낌이 있다고 한다. 禮가 곧 으뜸인데 그것이 宗敎性이라고 한다. 小學에서도 교육의 중심이 禮요, 정치에도 禮를 법 위에 두었는데, 한국에서는, 禮를 제사의 절차 같은 것으로만 풀이하고, 그 핵심에 있는 神에 대한 경외심, 타부나 신뢰심 같은 것을 빼고 가르쳐, 결국 바리새이즘에 시종하였다고 한다(思想界,1966년 2월호 [信念] 참조).
8. 結語결어
우리의 주인공의 가는 길은 아직 계속된다. 그의 문필생활은 아직도 정력적으로 진행된다. 그의 순례의 종장인 윤리가 성숙하여 글과 책으로 나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이상의 것으로서 우리는 종합적인 평가를 내려야 하겠다. 만일 그가 일찍이 그의 체계적인, 신학적인 이론을 정리해 두었더라면 그것은 歷史의 키에 이미 불려간지 오랬을 것이다. 무슨 개론, 무슨 원론 같은 것을 쓰지 않았다. 오직 단신 빛의 붓끝으로 울어나오는 정직한 고백을 적어서 내 던짐으로써 어둠의 물결을 막아내는 사명을 다 하였다. [영원한 신학]을 찬란하게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길]의 사람으로서 비판하고, 증언하고, 항의하고, 재해석을 내렸을 뿐이다. 그는 [時代의 限界]안에 있었다. 더욱이 그 한계 안에 머무르는 것을 좋게 생각하고, 시대와 함께 끝없이 걸어가기를 원하였다. 칼 바르트는 칸트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과 이 作品(純粹理性批判)에서 18세기는 스스로를 자신의 한계에서 보았고 이해하고 긍정하였다. 곧 그 한계 안에서](Barth. Die protestantische theologie im 19 Jahrh. 1947, S. 237).
우리의 주인공은 시대의 전환점에 서 있다. 그의 시대적 제한성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소리]로서의 사명을 다하였다. 그 [소리]는 듣는 사람이 없는 [광야]나 [사막]에서 울려 왔을지라도 황무지에 새 싹들을 돋힐 수 있는 씨를 심고, 가꾸었다. 그 위의 금자탑은 다음 세대에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의 땅이 거듭되는 폭풍으로 여전히 광야로 머무르는 데야, 이 같은 희망은 꿈으로 남지나 않을까? 아무래도 아직도 우리에겐 [소리]가 있어야 하는 모양이다. [소리]로써 萬里 長空에 활이라도 그리는 일이 우리의 차지같이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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