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육군 -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호사카 마사야스 (지은이),정선태 (옮긴이)글항아리2016-08-15
원제 : 昭和陸軍の硏究 (1999년)
































미리보기
책소개
쇼와 천황이 재위하던 시대,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제국 육군을 다루고 있다. 거대한 '병리 현상'이라고밖에 달리 분석할 길이 없던 전쟁의 숱한 참상은 모두 '쇼와 육군'이라는 몸통을 관통해 벌어진 일이다. 그런 만큼 일본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무슨 까닭에 일본이 이처럼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가 철저히 일본 내부자의 시각에서, 그것도 오로지 육군만을 줄기 삼아 글을 쓴 이유다.
우선 건군建軍에서 시작해 육군의 전사戰史를 다루면서 그 최상위 지도부를 파헤친다.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대전에서 보였던 일본군의 병리적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이어붙여 나간다. 이런 역사가 쓰일 수 있었던 것은 A급 전범들과 장교,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참전인의 일기와 전후 증언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이 책이 처음 집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경. 그 시간대를 전후하여 수많은 관계자 인터뷰가 이뤄졌는데, 논픽션 작가답게, 호사카 마사야스는 메이지 말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 전후 켜켜이 쌓여온 시간들, 그리고 1990년경 일본 각지에서 참전 병사들이 남긴 회한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간의 격차와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전쟁을 기획한 인물들과 그것이 만들어낸 잔재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며, 그것이 어떻게 기억으로 퇴화되지 않고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참전한 이들은 쉬 열리지 않는 입을 열었다. 인터뷰 당시 이미 80~90세의 노인이었던 참전인들은 전쟁에서 저지르고 당했던 일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러한 증언들이 하나씩 모여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
목차
머리말
제1부 쇼와 육군의 전사: 건군에서 다이쇼 말기까지
제2부 쇼와 육군의 흥망
제1장 장쭤린 폭살 사건과 관동군의 음모
제2장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간지와 만주사변
제3장 만주국 건국과 육군의 착오
제4장 황도파와 통제파: 2·26 사건의 두 얼굴
제5장 2·26 사건 판결은 어떻게 유도되었는가
제6장 중국 국민당의 눈으로 본 ‘항일 전쟁’
제7장 팔로군에 가담한 일본 병사의 중일전쟁
제8장 일본 병사는 왜 만행으로 치달았는가
제9장 장고봉 사건과 일본인 포로의 인생
제10장 노몬한 사건, 어처구니없는 군사 행동
제11장 트라우트만 공작의 놀라운 이면
제12장 왕자오밍 추대 공작과 그 배경
제13장 일독이추축체제를 향한 무모한 길
제14장 위험한 도박,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제15장 미일 수뇌 회담은 왜 결렬되었는가
제16장 「헐 노트」가 도착한 날의 육군성
제17장 「쇼와 천황 독백록」에 나타난 도조 히데키
제18장 워싱턴 해군 주재무관의 회상
제19장 진주만 공격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제20장 싱가포르 공략과 그 뒤틀린 그림자
제21장 어느 사병이 체험한 전쟁의 내실
제22장 과달카날, 병사들의 통곡
제23장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한 미일 병사들의 현재
제24장 선박포병 제2연대의 끝나지 않은 비극
제25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와 육해군의 대립
제26장 정보 없는 전쟁 지도의 무책임 체제
제27장 레이센 조종사들의 싸움
제28장 제25군 적성국인 억류소의 나날
제29장 뉴기니 전선의 절망과 비극
제30장 참모본부 참모들의 체질과 그 결함
제31장 아직 기록되지 못한 전장 두 곳
제32장 육군대신이 참모총장까지 겸임하는 사태
제33장 사이판 함락과 병사들의 절규
제34장 임팔 작전, 고위급 지휘관과 생존 병사들의 분노
제35장 정보가 경시된 필리핀 결전의 내막
제36장 특공대원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제37장 오키나와 전투의 결전 태세와 그 의미
제38장 본토 결전과 최고전쟁지도회의
제39장 비밀리에 진행된 원자폭탄 개발 계획
제40장 시종무관의 일기가 들려주는 패전 전후
제41장 구소련의 자료가 말하는 ‘사실’의 내용
제42장 홋카이도 점령인가, 시베리아 억류인가
제43장 다이쇼 세대 예비역 장교의 눈에 비친 쇼와 육군
제44장 최후의 육군대신이 남긴 수기
제3부 쇼와 육군이 전후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제45장 패전 시에 지도자는 어떻게 처신했는가
제46장 참모들의 쇼와 육군 재건 움직임
제47장 스가모 형무소의 군사 지도자들
제48장 전우회라는 조직과 쇼와 육군의 체질
제49장 이상한 군인은급 조작
제50장 시베리아 억류자 보상 요구의 단면
제51장 남겨진 ‘전후 보상’ 문제를 주시하며
후기
문고판 후기
참고문헌
취재 대상 명단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P. 136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군사력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그 착각을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메이지 시기의 군인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심리를 낳았다. 결국 군사는 국가의 위신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을 식민지화하는 유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줄곧 중국을 선택했던 셈이다. 접기
P. 478 “마을을 불태운 다음 사살한 사람을 끌어내려고 할 때였습니다. 네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울면서 우리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울면서 곧장 다가오더군요. 장교가 ‘처리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여자아이를 처리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략 60년 전에 일어난 일을 지금도 꿈에서 보곤 한다. (…) 딸이 자식을 데리고 친정에 놀러 왔을 때 도저히 손자를 안을 수 없었다. 염주를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기억이 되살아나면 전차 안에서도 염주를 쥐고 묵도를 하곤 했다.
“나의 유일한 구원은 전우회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곳이 전우회입니다. 한번은 장교가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엘리트입니다. 그에게 그때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이 있었나요?’라고 하더군요. 나는 명령한 자는 잊어도 그것을 실행한 자는 평생 잊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접기
P. 1103~1104 하지만 일련의 전쟁을 치른 일본사회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그 일본 병사와 싸운 중국 병사나 미국 병사 또는 러시아 병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많은 증언을 들어왔다. 어림잡아 1년에 4000명이 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번이라도 말을 나눈 사람까지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과 만나면서 나는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리석은 짓임에도 그런 정책을 추진한 것은 왜인가”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꼬리를 물기도 했다. 병사들은 너나없이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대본영에서 호의호식하며 작전을 가지고 노는 참모들은 그들의 괴로움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전쟁에서 패한 것은 전장 장병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낙차는 전쟁이라는 정책을 선택하는 나라의 기본적인 모순이다. 접기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국제연합군과 공산군의 전투로 나아갔다. 그런데 국제연합군(실질적으로는 미군이 중심이었다)은 한반도와 압록강 근처 중국의 지도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형도 잘 몰랐다. 어떤 작전이 효과적일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전의 밑그림을 그린 이가 바로 이 지역을 잘 알고 있던 대본영의 옛 참모들이었다는 얘기다. 접기
- 송영섭
추천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조선일보
- 조선일보 2016년 8월 13일자 '새로나온 책'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6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6년 8월 13일자 '책의 향기'
중앙일보
- 중앙일보 2016년 8월 13일자 '책 속으로'
저자 및 역자소개
호사카 마사야스 (保阪正康)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A급 전범 등 일본 군부의 주요 인사 4000여 명을 독자적으로 취재하고 15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다치바나 다카시, 사노 신이치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저널리스트로 꼽힌다. 일본 근대사, 특히 쇼와사昭和史의 실증적 연구에 뜻을 두고, 각종 사건에 관계된 이들을 취재하면서 역사 속에 묻힌 사건과 인물에 관한 르포르타주를 썼다. 1939년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서 태어나 도시샤대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편집자로 일하다가 33세 때 논픽션 작가로 홀로서기를 시도해 그의 출세작이 된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가 나오기까지 6년간 방송작가, 카피라이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자성自省사관’이란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그의 저작은 일본 사회의 치부를 정면으로 파고들어간다. 거의 해마다 되풀이되는 우익 세력의 군국주의적인 망언이 나올 때면 이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철저히 비판하는 그의 코멘트가 유력 언론에 소개되는 등, 그는 일본 현대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개인 잡지『쇼와사 강좌』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쇼와사 연구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작으로『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지치부노미야』『요시다 시게루라는 역설』『쇼와사의 일곱 가지 수수께끼』『쇼와: 전쟁과 천황과 미시마 유키오』『저 전쟁은 무엇이었는가』『정치가와 회상록』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쇼와 육군> … 총 55종 (모두보기)
정선태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1963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는 국민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등이 있으며, 역서로《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속국 민주주의론》 《영속패전론》 《일본문학의 근대와 반근대》 《가네코 후미코》 《일본어의 근대》 《창씨개명》 《기타 잇키》(공역) 등이 있다.
최근작 :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백석 번역시 선집>,<1898, 문명의 전환> … 총 4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쇼와 연구의 일인자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연구 결정판
500여 명의 증언과 방대한 자료로 밝히는 전후사 연구의 집대성!
어째서 일본은 전 세계를 전화戰火로 몰아넣었는가?
“쇼와 육군은 결국 허술하게 쌓아올린 목재 더미였습니다.
그 광기에 이제까지 일본의 모든 역사와 제도가 함께 무너졌습니다.”
이 책은 쇼와 천황이 재위하던 시대,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제국 육군을 다루고 있다. 거대한 ‘병리 현상’이라고밖에 달리 분석할 길이 없는 전쟁의 숱한 참상은 모두 ‘쇼와 육군’이라는 몸통을 관통해 벌어진 일이다. 그런 만큼 일본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무슨 까닭에 일본이 이처럼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 책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가 철저히 일본 내부자의 시각에서, 그것도 육군만을 줄기 삼아 글을 쓴 이유다. 우선 건군建軍에서부터 육군의 전사戰史를 다루면서 그 최상위 지도부를 파헤친다.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대전에서 보였던 일본군의 병리적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이어붙여 나간다. 이런 역사가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일본 군부의 A급 전범들과 장교, 일반 병사뿐 아니라 중국과 대만의 군인, 외교관,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계자의 증언과 일기, 기록 등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집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경. 그때를 전후하여 수많은 관계자 인터뷰가 이뤄졌는데, 논픽션 작가답게, 호사카 마사야스는 메이지 말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 전후 쌓여온 시간들, 그리고 1990년경 일본 각지에서 참전 병사들이 남긴 회한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간 격차와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전쟁의 잔재를 하나씩 끄집어내며, 그것이 어떻게 기억으로 퇴화되지 않고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참전한 이들은 쉬 열리지 않는 입을 열었다. 인터뷰 당시 이미 70~80세의 노인이었던 참전인들은 전장에서 저지르고 당했던 일만큼은 또렷이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러한 증언들이 하나씩 모여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
쇼와 육군의 체질이라는 것
청년 장교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시베리아에서 5년간 포로생활, 중국으로 이송돼 전범재판을 받고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된 바 있는 우노 신타로. 전쟁 후 무역회사 회사원이 되어 처자식과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1945년 3월, 사사 신노스케 전 중장 휘하에서 후베이성 마을의 주민 90여 명을 살해하는 데 가담한 전력이 있다. 이들 부대는 또 난장 현 우안옌 부근에서는 부인, 어린이, 노인 등 20명을 잔혹하게 교살했다. 나아가 샹양 성 부근 왕자잉 촌에서는 주민 18명을 손바닥에 철사를 꿰어 줄줄이 묶은 다음 판청의 교회당 옆에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샹양 시에서도 주민 30여 명을 철사로 묶은 다음 강으로 밀어넣었다. 그 가운데 후자오샹 등 5명은 물에서 빠져나왔지만, 저우광짜오 등 20여 명은 전부 익사했다. 더욱이 샹양 시에서는 부하가 부인을 강간하는 것을 방임하고 심지어는 윤간 끝에 죽임에 이르게 했다. 1990년 도쿄에서의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사실을 털어놓은 우노는 당시 자신이 중국에서 저지른 것은 학살이나 만행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행위인 줄로만 알았다고 털어놓는다.
(저자) “일본군은 왜 중국 대륙에서 저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노 신타로) “하나는 일본 육군의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 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뭔지를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쇼와 육군의 지도부에 속한 고위급 군인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종종 ‘대선大善’과 ‘소선小善’으로 표현했다. 1882년 메이지 천황이 군에 하사한 「군인칙유」만 좇는 것은 ‘소선’이며, 천황을 위해서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군사적 기정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대선’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서없는 논리에 감춰져 있는 독선적 주관주의로 지탱되었던 조직이 바로 쇼와 육군이다. 그리하여 부녀자와 노인, 소년, 유아를 반쯤은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수단으로 살해할 만큼 망가졌던 쇼와 육군 지배하의 병사들 중 자신들의 퇴폐적인 경험을 고발하는 이가 많이 나오는 것은 “이 전쟁이 너무나 더러웠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은 대개 메이지 10년대(1877~1886) 중기부터 20년대 후기에 걸쳐 태어났다. 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등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다. 정원이 50명인 육군대학의 졸업생이라는 것만 해도 이미 엘리트임을 인정받은 것인데, 그중 상위 10퍼센트는 군 지도부에 들어가 행정과 작전 계획을 담당했다. 문제는 성적지상주의의 기관들에서 우등생이었던 이들은 실전 체험이 드물었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의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란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즉 근대 일본 부국강병 정책의 충실한 자식이었다. 여기서 태어난 인물들은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지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의 또 다른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 육군이 일본에 초청되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했다. 더욱이 육군유년학교에서는 독일어, 러시아어 등이 중심이 되고 영어 교육은 철저히 경시되었다. 나아가,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현저히 결여하고 있었다. 철학적·윤리적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기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모토 군은 심신이 모두 불가사의할 정도로 유연하고 강인하며 굴신자재屈伸自在할 뿐만 아니라 결코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지극히 소심하면서도 아주 대담하며, 세밀하게 생각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 운운.”
이 글의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라는 표현에 쇼와 초년대 군인의 성격이 응축되어 있다. ‘대의(천황의 뜻)를 내세우면 무슨 짓을 해도 관계없다는 심정과 패턴이야말로 쇼와 육군과 그 후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것은 병사를 무기질無機質의 병기로 육성하는 데 결사적이었다는 것, 보급과 병참 사상을 가볍게 여기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병사들에게 옥쇄玉碎(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충절이라는 명분 아래 죽음을 명령했던 것)를 명하고, 그것에 대한 자기반성도 없이 잇달아 그런 종류의 작전을 명한 것도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장교 중심으로 흘러간 것은 쇼와 육군의 체질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였다. 우노 신타로는 연대본부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의 소장을 겸한 바 있는데, 그는 이곳의 중국인 포로들이 죽어나갈 때 특별히 인간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만약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영광스런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다. 장교에게는 식사도 충분히 제공되었고 게다가 위안시설까지 있었다. 그곳에서 울적함을 풀었다. 반면 일반 병사에게는 조악한 식사에다 위안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토벌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종종 농촌을 습격했다. 장교가 병사들의 강간을 묵인하고 약탈을 눈감아준 것도 그러한 일본군의 ‘장교 주도의 체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군 관료들은 하급 병사를 동원하는 데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오로지 서로를 감싸는 체질만을 드러냈다. 노몬한 사건을 지도하여 2만 명에 가까운 부하를 죽음으로 내몰고 전상자나 전병자로 만든 관동군 참모인 쓰지 마사노부나 주임참모 핫토리 다쿠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요직에 복귀했고, 태평양전쟁 개전 때에는 가장 과격한 개전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때도 과달카날에 과도한 병력을 투입하고 싱가포르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등 그들은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든 책임을 지지 않고 전쟁의 과오를 계속해서 반복해갔다.
도조 히데키, 쇼와 육군 패망의 상징적 존재
쇼와 육군 붕괴의 원인이 된 태평양전쟁은 지도자의 체질이나 전략에 따라 수행되었다. 거기에는 붕괴하는 것이 당연한 조직 체계, 인간사상, 전쟁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태평양전쟁이 벌어진 3년 9개월 중 2년 9개월 동안 수상, 육군상, 참모총장까지 겸하고서 전쟁을 지도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이러한 공통점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었다. 가령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의 법정을 묘사하며 당시 일본 지도부의 무능함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헐 노트」에 관한 일본의 입장을 확인하며 도조 히데키를 신문했다. 「헐 노트」는 1941년 11월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이 작성한, 일본의 제안에 대한 미국의 답변이었다. 사실상 일본이 중국과 인도차이나 등지를 점령하며 벌인 정치 공작을 중단할 것과 삼국동맹의 백지화를 주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아울러 「헐 노트」에는 교섭의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일본 측은 이를 묵인했다. 도리어 승산이 낮더라도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하여 메이지 시대 이래 육군 선배들이 중시해온 ‘의義’를 지켜야 한다는 강경 노선을 택하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헐 노트」에 담긴 기본 방침을 무시하지 않고는 미국과 전쟁을 벌일 명분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취재 중 입수한 ‘도조 일기’를 바탕으로 당시 일본을 움직인 도조 히데키의 생각을 최초로 공개한다. 도조는 “「헐 노트」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게 전부였다. 한마디로, 쇼와 육군은 미국에 대하여 처음부터 ‘객관적인 사실’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관측’에 따라 대처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개전에 관해 쇼와 천황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당시 천황의 측근들은 구실을 만들어 천황의 면책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쇼와 천황 독백록」에 나타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측근들은 도조를 비롯한 쇼와 육군의 지도자에게 전쟁의 책임을 모두 떠넘기려고 생각했던 듯하다. 재미난 것은 도조에 관한 양가적인 평가인데, 그 결과 ‘도조는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지만, 인사 관리나 헌병의 장악 등에서 서툴렀다’와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저자가 취재 과정에서 입수하여 처음 공개하는 ‘도조 일기’ 앞부분에 나타난 자계自戒를 꼽을 수 있다. 자계의 첫 번째 항은 “전쟁의 모든 책임 앞에 설 것. 특히 성상 폐하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데 대해서는 전력을 다하고, 또 다른 각료 및 다른 사람의 책임을 극력 경감하는 데 노력할 것”라고 쓰여 있다. 도조 히데키는 전후 도쿄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진다.
1억 명의 옥쇄
쇼와 육군의 ‘정신주의’에는 오직 천황을 위한 군대가 있었을 뿐으로, 일반 병사 개개인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 중 하나가 바로 전쟁 때 군대의 소모품이 되어버린 병사들의 실태(이는 일반 국민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그런 정책의 배후에 있던 육군의 ‘정신’을 다루는 것이다.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오키나와에서 정치적 선택의 잘못된 지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죽음’으로 내몰린 병사(국민)가 있다. 그 대척점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책임하고 비인도적인 작전을 펼친 군 관료의 실체가 있다. 그 대비되는 각각의 국면을 세밀히 살펴나가다보면 분노와 놀라움, 슬픔에 사로잡히게 된다. 특히 필사적으로 육탄 공격 작전을 펼치며, 가미카제 특공대뿐만 아니라 보병들에게 병기가 되어 스스로 산산이 부서지라고 명령했던 육군 지도부의 명령은 2차 대전 때 일본군 병사들을 거대한 참상 안으로 밀어넣었다.
가령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가장 끔찍하고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곳 중 하나인 과달카날 전투의 상황을 보자. 군사과장 사나다 조이치로는 전쟁 당시의 일들을 일기로 남겼는데, 그 기록을 보면 사나다는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에게 “과달카날의 제17군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라지도록 항전하게 한다는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있다. 이마무라는 “절대 반대”라고 말하고, ‘그런 것이 제일선에 알려지면 즉석에서 전원이 할복하고 말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 내용을 보면 적어도 사나다의 마음속에는 과달카날 참전 병사들을 ‘옥쇄’시킬 방안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이어진다.
미군은 대동아회의 전후부터 일본이 절대 국방권이라고 명명한 요충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3년 타라와에서는 일본군 4800명 가운데 20명을 제외하곤 전원 옥쇄했다. 도조가 참모총장에 취임한 뒤 작전참모에 의한 일본군의 작전은 더욱더 옥쇄형玉碎型으로 바뀌었다. 1944년 7월 5일 사이판 전투에서 제43사단 사령부는 “우리는 옥쇄함으로써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고자 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대본영으로 보내고, 7월 7일 3000명의 생존 병사와 함께 옥쇄했다. 무기와 탄약은 남아 있지 않았고, 돌멩이를 갖고 싸운 병사도 있었다고 한다. 몇몇 병사는 산속에 틀어박혀 1945년 12월까지 게릴라전을 펼쳤다. 사이판 전투에서는 일본 병사 약 4만1000명이 전사했고, 2만5000명의 일본인 주민 가운데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판 섬이 미군에 제압당함으로써 ‘절대국방권’은 무너졌고, 실제로 서태평양은 모두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 후 일본군은 일본 본토로 쫓기는데, 각지에서 사이판에서와 같은 옥쇄전이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를 겹겹이 쌓아올려 본토 공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려는 것이었고, 군 관료들의 책임이 밝혀지는 날을 하루하루 미루는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일본군이 오로지 전쟁 지도라는 길을 일직선으로 걸었기 때문이다.
이오 섬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1250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섬이다. 보급도 끊어지고 장비도 부족했던 일본군은 우세한 물량을 앞세운 미군에 압도되어 2만1000명의 수비대가 고작 2천여 명을 남긴 채 궤멸하고 말았다. 약 한 달간 치러진 혹독한 전투로 인해 이오 섬은 그야말로 ‘옥쇄의 섬’으로서 태평양전쟁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무렵 몸이 약했기 때문에 이오 섬으로 가는 멤버에서 제외되었습니다만, 옥쇄한 동료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생환한 사람들이 이오 섬으로 유골을 모으러 갔는데, 캄캄한 동굴에 유골이 딱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병사는 부대가 전멸하고 난 후 혼자 동굴에 틀어박혀 저항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돌을 쌓아 방어벽을 만든 다음 그 뒤에 숨어 있다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 아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45년 3월 17일 전투의 막바지에는 전원이 옥쇄전법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살아남은 몇몇 병사에게 집합 장소와 시간이 통고되었다. 더 이상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병사는 청산가리가 든 주사를 맞고 죽어갔다. 굶어 죽은 병사 중에는 사망한 미군 병사의 군복을 입고 미군 속에 섞여서 식량을 얻으려 한 이도 있었다. 이오 섬의 전투는 그야말로 ‘지옥도’ 그 자체였다. 모든 부대가 “전원 적진으로 온몸을 던져 돌격을 결행하여 옥쇄”하거나 “총반격에 참가하여 옥쇄”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옥쇄는 물론 지구전을 도모하는 작전을 펼친다는 대본영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였다.
그리하여 이오 섬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좀처럼 당시 상황에 대해 입을 떼려 하지 않는다.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감춰져 있는 생각은 후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것이다.
1945년 8월에는 살아남은 1만여 명이 옥쇄 작전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종전 연락이 왔다. 남아 있는 무기는 기관총 몇 정, 소총 9500자루였고, 탄약은 총 한 자루당 20발 정도, 포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들
일본군이 아시아 전역에서 벌인 전쟁 중의 야만스런 행위들은 아직 그 추산이 집계되기 어려울 만큼 광범위하게 자행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안들이다. 이 책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참상을 고백하고 있는 참전 장교나 사병들은 전쟁 당시에는 거리낌이 없었고, 전후에도 일상으로 돌아와 평범한 삶을 이어가다가, 은퇴 후 노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만행을 털어놓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중일전쟁 때의 자기 경험을 털어놓은 우노 신타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중국 대륙에 40만 규모의 대군대를 보냈다. 이때 파송된 병사 중에는 결혼하여 아내가 있는 자가 많았다. 우노의 말에 따르면, 아내가 있는 자들은 독신인 병사보다 성적 만행에 적극적이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이윽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대륙의 정예 부대는 남방으로 파송되었고, 병사들의 질은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이와 함께 만행에 익숙해졌고 너나없이 즐기는 분위기였다.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참병 중에는 살인의 프로, 도둑질의 프로, 방화의 프로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났고, 그것을 제지하는 군의 규율은 이미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들 만행은 평상시라면 광기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군의관이 다음 전임지가 결정되었다면서 제39사단 제232연대 연대본부의 포로수용소장 겸 정보장교인 우노에게 온다. “오늘밤 한잔할까요?”라며 유혹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노는 알고 있다. 해골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이튿날 항일적 태도를 보인다는 이유로 포로 한 명이 참살된다. 머리를 자른다. 그것을 햇빛에 말린다. 중국인 포로에게 안면의 살을 벗겨내라고 한다. 물론 포로는 울면서 이 일을 한다. 그런 다음 며칠 동안 말렸다가 다시 포로에게 두골을 닦아 윤을 내라고 한다. 그 해골을 상자에 넣어 선물이라며 군의관의 짐 속에 넣는다. 이 해골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 빛이 난다. 인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헤이세이 시대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노는 당시 군의관이었던 사람과 45년 만에 만났다. “그것은 일본에 가지고 돌아와 어떻게 했습니까”라고 묻자, 그 군의관(이때는 개업의)은 “진료실에 진열되어 있지요”라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그런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서도 45년 동안 의료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니, 우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책에 던지는 몇 가지 질문
이 책은 철저히 일본 제국 육군이 저지른 오류를 밝히기 위해 집필된 책이기 때문에 일본 내 우익 세력들로부터는 ‘자학사관’이라는 딱지가 붙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역사관을 ‘자성自省사관’이라 하며, 일본이 잘못된 역사를 직시해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서 드러내는 전국전우회연합회 소속 참전 병사들의 증언은 특히 참전인들의 고통도 묻어 있지만 그들의 자성이 묻어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들은 지금도 전장에서 사망한 동료 군인들의 돌아오지 못한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유골수집단을 꾸려 필리핀 등지로 떠나곤 한다. 만주사변 이후 패전까지 일본에서 전화로 사망한 사람은 5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일본 국민 수 대비 6퍼센트가 넘는 수치다. 저자는 지역별 전사자 수, 부대별 생환자 수를 분석하면서 일본이 자국의 국민과 병사들을 끝까지 챙기지 않았음을 고발한다. 그리고 이후 치러진 전범 재판 과정을 공개하면서 전쟁을 망쳐놓은 고위급 군인들이 책임을 피하려 한 눈꼴사나운 언동을 그려간다. 게다가 패전 직후에는 옛 대본영 참모들이 모여 쇼와 육군을 재건할 움직임마저 보이기도 했다. 쇼와 육군이 소멸한 뒤, 그것을 지탱한 의식이나 행동의 핵심도 과연 진정으로 극복했는가? 호사카 마사야스는 『쇼와 육군』이라는 전사戰史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본영 참모의 자화자찬에 가까운 전쟁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은 병사들이 어렵사리 들려주는 괴로움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전사를 다시 쓸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나에게 부여된 역할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듣고 쓰기’가 없었다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교훈이다. 그러한 교훈을 얻고서 나는 정치적·사상적 측면에서 쇼와 전기 일련의 전쟁을 분석하는 것이 잘못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그러한 시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밝혀두고 싶다.
이 책은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좀 다른 대안을 내놓고자 한다. 다만 그러한 시각은 여전히 피해 당사국이나 피해 여성들의 입장과 일치하진 않는다. 이 현안이 단순히 현세대에서 다음 세대에게 빚지지 않기 위해 쉽게 화해하기 힘든 복합적인 면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접기
구매자 (6)
전체 (10)
공감순
이 책을 읽고 별 다섯개를 하지 않으면 저자에 대한 결례다. 내가 그 시대, 그 장소에 있었다면 나도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내자리는 버마 정글 어딘가..태평양 이오섬 어느 동굴의 백골로 세상과 이별했을것이다..그자리에 없었던 내가 얼마나 행운인지..간발의 차로 행운을 쥔나는 이 자리에서 안

군자란 2017-02-14 공감 (13) 댓글 (0)
Thanks to
공감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데 한국 근현대사와 쇼와육군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알게 됐다.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필독서다.

파블로네루다 2016-09-27 공감 (8) 댓글 (0)
Thanks to
공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왜 쇼와육군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하는 이유를 느끼게 해준다.

꿈꾸는사나이 2016-09-16 공감 (8) 댓글 (0)
Thanks to
공감
책은 좋다. 하지만 오탈자가 너무 많다. 분량이 분량이니 이해는 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주목 2021-02-14 공감 (3) 댓글 (0)
Thanks to
공감
愛憎의 시각으로 책을 읽다

쌍화탕 2018-08-05 공감 (2) 댓글 (0)
Thanks to
공감
더보기
마이리뷰
구매자 (4)
전체 (8)
리뷰쓰기
공감순
일본육군의 실체
1000페이지가 넘고 하드카피로 되어 있어 출,퇴근시 읽기가 불편한 이책을 고른 이유가 있다.
현재 한국군의 뿌리가 여기(쇼와육군)에 있기 때문이다.내 생각에 현재의 한국군의 80%는 일본육군의 모습이고,20%가 미군의 모습을 짬뽕해 놓았다 생각한다.나역시 높은분들이 그렇게나 신성(?)하다는 국방의 의무를 육군만기전역으로 다했고,다음달이면 최전방으로 입대하는 아들이 있기에 더더욱 현재 한국군의 원형이 된 "쇼와육군"이 관심을 끌었다.
한국현대사를 읽다보면 제주4,3항쟁,여순반란사건,지리산토벌,한국전쟁시 벌어졌던 무고한 양민학살등을 보며,어찌 자국군대가 자국국민에게 "빨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을 당연시 할수있단말인가?라고 기가찬 일이 있었다.심지어 여순반란사건때 백두산호랑이라 불린 김종원(대령)이란 놈은 일본도를 차고 포로들의 목을 치는걸 자랑삼아 했던 놈이고 군에서도 높이 추앙받던 놈이다.이놈은 만주 관동군에서 공비토벌(상당수 독립운동세력)이란 이름으로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 학살을 당연시 여겼던 일본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것뿐이다.이렇게 일본군의 하급장교와 부사관들이 해방뒤 남한에서 육군의 중추세력이 되었기에 그동안 한국군의 고질적인 병폐가 병영문화에 그대로 남았던 것이다.
일본육군은 아시아에서 근대화를 가장 먼저 이룬후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군사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후 서양세력마저 눌렀다는 자만심으로 거칠것이 없어졌다.엘리트위주의 군사교육으로 군사병기로만 키워져 일반상식이 결여된 군인들이 권력을 잡아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중국으로 동남아시아로 미국진주만으로 폭주해 나간것이다.
병사들을 하나의 전장의 소모품으로 여기는 장교엘리트주의,병참과 보급을 무시하고 정신력만을 강요하는 정신력 우선주의,현장의 의견을 제대로 참고하지 않고 대본영 책상머리에 앉아 전장의 구렁텅이로 수많은 젊음을 몰아넣은 탁상공론주의.전과를 부풀리고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비밀주의..,"국뻥부"라 불리는 현재 한국군의 모습과 대부분 일치한다.
어렸을적(박정희시대에 초등학교 다님) "육탄십용사"니"특공대"니 하면 엄청 용감한 군인의 모습으로 알았다.이게 다 생명을 경시한 일본군의 습속에서 나온것을.무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말도 안돼는 짓을 강요한것다.탱크에 수류탄을 들고 뛰어든다든지."옥쇄"라는 명목으로 적군을 향해 무조건 뛰어나가는 자살공격.고지를 탈환한다고 몸에 폭탄을 두르고 뛰어드는것이 당연하고 일상화된 군대는 정상이 아닌거다.적에게 "항복을 하느니 자살하라"는것도 말도 안돼는 명령이다.그리고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하나의 소모품이 된것을..,.조작된 신화인 "천황"과 정치군인들의 전쟁놀음에 바쳐진 하나의 전쟁도구인것을..,
"군사쿠테타""하나회"와 같은 군내파벌들도 일본육군에서 있던 나쁜 병폐들이다.그것역시 한국군은 그대로 받아들였고 일본육군의 쿠테타를 모델로 군사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장기독재군사병영국가를 건설했었고,그 향수를 못잊어하던 아스팔트보수는 그딸까지도 대통령으로 추대했으나 "머저리"에 가까운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멍청이였다는것이 증명되고 있다.
일제에서 해방된지 70년이 지나도록 이사회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들이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남한사회는 특히 "북한"이라는 가상적국을 빌미로 기생해온 한국군은 일본군대의 적폐와 병폐를 거울삼아 민주사회에 걸맞는 군대로 개혁되어야 한다.
이책의 저자는 전우회를 통해 2차세계대전당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을 인터뷰하고 진실을 알리기 우해 또한 후세들이 이런 참상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하기위해 기록을 남겼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고 준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 접기
유토피아 2017-02-11 공감(8) 댓글(0)
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쇼와 육군

구 황군시절 일본 육군의 모순점이 일본인 저자의 글로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저런 군대로 잘도 전쟁을 벌여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국가에서 문민통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할 수 있었다. 세삼 제복 군인들의 최종 커리어가 국방부 장관인 우리 나라의 현실이 우려되기도 하였다.
장님버드나무 2017-01-22 공감(8) 댓글(0)
Thanks to
공감
우에하라 료지

게이오대 경제학부 학생. 1943. 12월 입영, 1945. 5. 11. 육군특별공격대원으로서 오키나와 가데나만에서 미국 기동부대에 돌진. 전사 22세
출격하기 전 5. 10. 저녁 무렵 소감 출격 전야에 쓰다
나 역시 이러한 작전을 행하는 국가가 전쟁에서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조직이 오래 지속될 리가 없다.....
내일은 자유주의자 한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의 뒷모습은 쓸쓸하겠지만 마음은 만족감으로 가득합니다.
1945년 4월 우에하라는 제56신부대의특공조종사가 되었다. 그 사이에 어떤사연이 있었는지 유족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제11연성비행대에 속한 조종사들이 강당에 모였을때 "특공작전 지원자는 일보 앞으로"라는 지휘관의 말을 들었던 듯하다. 겉으로는 지원에 의해 특공작전 조종사를 뽑는모양새였지만, 실제로 지원하지 않는 자는 비겁한 놈으로 취급받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우에하라는 그 후 어떤친구에게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울음을 삼키면서" 앞으로 나섰노라고 몰래 털어 놓았다..제56신부대는 11명의 학도병 조종사로 편성되었다. 주로 와세다대와 게이오대 그리고 동경대에 다니던 학도병들이었다고 한다.
우에하라가 남긴 노트에서 연습기를 사용하여 어느정도의 훈련을 했는지 누계
95연습기 42.09시간, 99공중연습기 1.35시간, 2식비행기 25.59시간, 99군사연습기30시간
3식연습기 6.19시간....
우에하라가 탄 특공기(3식 전투기)로는 고작 6시간 남짓 밖에 훈련을 받지 않았다...
연습은 오로지 이륙과 착륙뿐....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하는 고민은 행복한 고민이다. 그럴수 있는 능력이 되니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까?
국가의 폭력앞에 누가 감히 아니라고 나설수 있을지....나 역시 30년전 해병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두번다시 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내가 너무 비겁한 걸까?
- 접기
군자란 2017-02-15 공감(6) 댓글(0)
Thanks to
공감
쇼와 육군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일본은 열강의 대열에 합류했다. 동시에 일본 내에서 청나라와 조선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여론은 일본군을 신뢰하게 되었다. 조선을 지원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조선에서 일본의 권익을 취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아울러 군사상 다양한 모순도 전승의 그늘에서 검증되지 않은 채 봉합되었다. (-33-)
"공격 정신은 충군 애국의 지성과 헌신순국의 대절에서 발현하는 정화다. 무기를 닦는 데 온 힘을 다하고, 교련을 통해 빛을 발하며, 전투에서 승리를 구가한다. 승패는 반드시 병력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잘 훈련되어 있고 또 공격 정신으로 다져진 군대는 늘 적은 수로 많은 적을 격파할 수 있다." (-49-)
1935년에 접어들면서 두 파벌의 투쟁은 점차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통제파는 육군 상충부에 많았고, 불법적인 활동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입장에 섰다. 그리고 전쟁에 대비해 국가 총동원 태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관료나 재계 사람들과도 연대하고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대소련전보다 오히려 중국 제압에 비중을 두는 실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이와 달리 황도파는 청년 장교가 많았고, 대부분 20대에서 30대로 지금처럼 부패한 일본은 천황의 뜻에 따르는 국가가 아니며,이상 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활동을 불사한다고 주장했다. 이 그룹의 지도자는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 같은 장군들이었는데,이 두 사람은 일이 있을 때마다 청년 장교들을 부추겼고, 그들의 순수무사 정신을 칭찬하며 부채질했다. 황도파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 대해 격심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145-)
내 물음에 대한 우노의 답변은 명료했다.
"하나는 일본 육군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무엇인지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219-)
"1941년 7월 28일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일본군이 미국으로부터 저처럼 즉각적으로 보복을 당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육군 내부에서 이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일본에 대해 석유 수출을 중단하거나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하는 사태는 루스벨트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육군만이 아니라 해군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이 전쟁을 각오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점에 관하여 우리는 예측을 잘못했던 셈입니다. 그 책임은 막중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도 국책을 담당하는 입장에 있었던 만큼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337-)
"일본은 그 무렵 미국을 알려고 하지 않앗습니다. 육군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일본은 미국인들에게 일본을 알리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뉴욕에 일본 라이브러리와 같은 코너를 만들었음에도 몇 명의 미국인이 다녀갔는지를 기록하는 일 밖에 하기 않았지요. 나는 진주만 공격 50주년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내는 작금의 정세를 보노라면 이상하게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일본은 저런 바보 같은 싸움을 했는지, 그것을 다시 물어야만 합니다." (-420-)
이때 병사들은 과달카날에서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까?
"우리 진지에서 앞쪽으로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미군 진지가 있었습니다. 미군 병사는 우리가 이쪽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진지 위에 올라와 걸어다녔습니다. 우리는 탄약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쏘면 맞힐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쏘지 않았지요. 만약 이 병사를 쓰러뜨리면 몇 배의 폭격이 퍼부어져 우리는 전원 사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미군 병사와 정국 속에서 총격을 주고받게 되면 실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우리가 이동한 지점에 반드시 총탄이 날아오는 겁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오토모가 그 이유를 상세히 알게 된 것은 50년이나 지난 1991년이었다. (-507-)
태평양전쟁의 개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가장 많이 부족했던 것은 후방사상이었다. 후방사상이란 병참, 보급에 관한 사고방식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는데, 병력무기,탄약, 식량, 의약품, 의복 등을 전선의 병사에게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과달카날이나 동부 뉴기니에서 벌어진 전투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일본군에는 이런 사상이 전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638-)
1944년 5월 2일, 공중에서 육해군이 한자리에 모인 통수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천황도 출석했다. 이 회의에서 육해군 통수부 대표가 현재의 전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 천황에게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도 양 통수부는 마리아나를 공략하는 데에는 큰 희생이 따를 것이고 그곳을 확보하는 일도 쉽지는 않을 터이므로 미군도 경솔하게 손을 뻗치지는 않으리라는 경해에 뜻을 함께했다. 특히 참모차장 우시로쿠 준은 설령 마리아나 제도가 공격을 당한다 해도 제43사단을 파견하여 "적의 공략 기도를 분쇄할 수 있다" 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704-)
오시로는 자신의 책 『오키나와 전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부전선에서는 전투원과 일반 주민이 같은 동굴에 뒤섞여 있어린 아이들이 울고 부상자는 신음한다. 그러자 적에게 진지가 발각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울어대는 아이를 살해하거나 부상자를 독약으로 처치하는 잔혹한 광경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패잔 심리까지 발동하여 약육강식의 극한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전장에서는 어린아이, 노인,부녀자, 부상자 등 약자부터 순서대로 희생되었다. 이처럼 인간성이 무너져 버린 현상이 전장의 진짜 비극을 초래했던 것이다." (-798-)
1945년 8월 15일 정오, 쇼와 천황은 옥음 방송을 통해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밝혔다. 국제법상의 문서에 조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 영국, 중국이 함께 발표한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의사 표시였다. 신징의 관동군총사령부에서는 참모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옥음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대본영으로부터 정전 명령이 있기까지는 "작전의 큰 틀을 바꿔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15일 오후 11시에 정전 명령이 떨어졌고, 관동군총사령관 야마다 오토조와 총참모장 하타 히코사부로 등 최고 간부는 이것을 받아들여 태도를 변경했다. (-887-)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도쿄전범재판에서 재판을 받은 것은 일본의 군벌이었는데 반론에 나선 28명의 A급 전범은 명확히 세 가지 유혀으로 나눌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은 극가의 선택으로 옳았다고 주장하는 피고가 첫번째 유형이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변호와 자신에 대한 변호를 동일시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은 모두 국가의 논리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국가의 정책과 자신의 신념 또는 정치 행동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며,자신의 역할에 한정해서만 반론을 펼쳤다. 이들은 국가를 변호하는 입장보다 개인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은 재판 자체에 전혀 관심 보이지 않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담담하게 처신한 피고들이다. (-1001-)
근대 일본의 군사 조직이 왜 독일 쪽으로 기울었는가?이와 관련하여 쇼와 초기 참모본부에 근무했던 어느 장교는 "독일에 가면 자동적으로 독일 육군은 여성을 메이드(하녀)라는 명목으로 삼아 동거하게 한다. 그래서 독일에 파견된 군인은 친독파가 된다는 이야기가 메이지 시기부터 은밀하게 전해져온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독일 같은 시스템을 요구한 일본군 군인이 있었다고 하는데,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의 군인으로부터 "우리나라에는 여성이 얼마든지 있다. 당신도 연애를 하면 되자 않겠는가"라는 야멸찬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암암리에 널리 알려져 있다. (1082-)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를 읽게 되면, 1900년초로 시간 여행을 떠나 제1차 세게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의 전쟁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뉴스와 미디어를 통해,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정보와 전황에 대해서 실시간으로 듣고 있는 것처럼, 이 한 권의 책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대동아 공영권을 손에 쥐고자 하였던 일본의 야욕으 실체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왜 저자는 쇼와 육군이라고 말하는가, 그건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이라는 국가가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군인이,1931년 9월 18일 ,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만주를 전쟁 거점으로 바꾼 뒤, 동아시아 전역을 상대로 식민지화하기 위한 출발은, 1894년 청일전쟁 승리, 1904년 러일전쟁, 1910년 조선 침략으로 이어졌으며,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한 태평양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일본 스스로 세계제 1위의 열강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다. 그건 일본이라는 국가가 아닌, 도조 히데키라는 군인이, 일본을 군국주의화하였고, 군벌이 지배하는 일본, 정치군인이 일본의 정치, 경제,문화,전쟁을 주도하게 된다.관동군을 중심으로,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였기에,군벌 일본 정치에 의한 전쟁, 쇼와육군이라 부르고 있다. 즉 군인이 전쟁을 주도하고, 전황을 이해하고, 군인이 전쟁의 흐름을 판단하기 전쟁전략을 만들기 때문이다.
즉 군인이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를 태평양전쟁으로 파악하고자 , 1900년 초에 태어나 전쟁을 몸으로 경험한 1990년대 후반에 사망한 이들을 대상으로 500 명의 일본인을 구술하고, 증언록을 확보하면서, 만들어진 책이 『쇼와 육군』의 본질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일본 사회를 이해하고, 한국 현대사회를 병행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박정희가 일본군 관동군 장교 출신이며,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가 한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책에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백선엽도 마찬가지다. 즉 한국 사회도 쇼와육군의 DNA를 물려받은 사회이며, 한국의 군대 운영방식, 병참기지 뿐만 아니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대본영과, 참모본부의 실체, 내무상 도조 히데키가 도쿄 전범재판에서 , 사형당한 것까지, 그리고 , 일본이 임팔 작전에서 참패하고, 전황이 일본 주도에서, 미국 주도로 바뀌게 된 이유, 일본이 점령했던 사이판을 빼앗김으로 인해 일본이 패망할 수 밖에 없는 빌미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가사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게 된 이유를 역사적인 증언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 즉 메이지 시대(1867년 2월 13일부터 1912년 7월 30일까지) 에 태어난 일본인이 전쟁 지휘자가 되었고, 다이쇼 시대( 1912년 7월 30일~ 1926년 12월 25일까지)에 태어난 병사들이 일으킨 전쟁이 바로 우리가 역사적으로 잔혹함과 가혹한 전쟁으로 기억되는 파쇼 일본이 만든 태평양 전쟁이며,미국의 원자폭탄으로 전재을 종식할 수 없었다면, 일본은 영국, 소련, 독일,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에 대해 이해하지 않은 채, 진주만 습격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미국 스스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할거라고 예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는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으로 전후 처리가 되었고, 28명의 A급 전범이 처형되었고, 미국이 세계 최강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 접기
깐도리 2023-02-26 공감(2) 댓글(0)
Thanks to
공감
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의 진행과 결과에 대한 역사에 더하여, 이른바 태평양전쟁사에 있어서 그 주된 역활로서 주목받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분명 그것은 (일본제국에 있어서도) 해군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육중한 군함과 항모가 가져다주는 존재감에 더하여, 무엇보다 전쟁의 흐름을 좌우한 중요한 전투의 모습 등을 생각해보아도 역시나 그 주인공은 바다를 주름잡았던 군대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굳이 태평양전쟁중의 육군의 모습에 주목했고, 특히 전후까지 생존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 '전장을 직접 마주한' 생생한 기억을 통해 이미 세상에 알려진 일본군의 잔혹함 또는 비이성적인 모습 등이 과연 어떠한 계기로 발현되었는가에 대한 나름의 진단을 내리고 있다. 결국 저자는 전쟁을 통해 발견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비참한 모습을 통하여 스스로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싶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흐름 가운데서, 육군이 보여주는 모습은 말 그대로 '육탄'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게 된다. 그야말로 당시 일본제국군은 근현대의 가치관 아래 정립된 가장 기본적인 군사적 지원 또는 가치관의 세례를 받지 못한 존재였다. 물론 군인으로서 승리를 추구하는 자세와 헌신은 나름 미덕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결과적으로 일본제국과 그 군대가 과거의 승리의 방식을 고수하고 또 보편화하여 끝끝내 병사 하나하나가 탄환처럼 소모되는 현상을 개선하지 못하며 종전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왜 일본에서는 구체적인 검증도 하지 않고 저 전쟁을 부정해버린 것일까? (...) 설령 역사적 보편성이라는 게 없다 하더라도, 그 어떤 역사적 사명감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온 나라가 들고일어나 싸웠던 것이리라. 여기에 포함된 오류를 정확하게 역사에 새겨넣어 둘 필요가 있다.
434쪽 / 진주만 공격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물론 그러한 현상을 진단하며, 제기된 주장은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아니... 애초부터 국가 스스로가 부족한 자원과 기술의 발전을 꾀하기 위하여 외교적 접근과 상호 무역이라는 선택지를 떠나, 전쟁을 통한 식민지의 확대, 또는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전략.전술적인 군사적 행동을 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현대적 감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비이성의 후유증은 전쟁의 진행과정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예를 들어 일본군의 '반자이 공격'과 '카미카제' 등은 단순히 당시 일본군의 절박한 상황과 희생정신의 발현이 아니라, 단순히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수송력을 만족스럽게 제공해주지 못한 수뇌부가 그 책임을 수 많은 병사들에게 돌려 희생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1944년 가을 이후 참모본부의 대응을 보면 (...)병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따위는 고려되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서야 참모본부의 내실에 관한 기본적인 문헌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납득되었고, 병사들이 뭘 먹고 살았는지에 대한 변변한 보고서 하나 남아 있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658~660 / 쇼와 육군의 흥망
그렇기에 냉정하게 판단해보면 일본제국의 패전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역사적으로 일본제국은 패전을 통하여 연합국의 지배를 받았고, 그 결과 자의와 타의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전후처리'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과정 속에서,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온전히 짊어졌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 대답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때 일본 국내의 문제점은 어떠한 것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을 겪으면서 생존한 수 많은 병사들이 남긴 전쟁에 대한 후회와 반성의 기록들은 어째서 '미화'의 단어 속에서 외면받고 변질되는 것인가?
쇼와 육군이 남긴 많은 잘못을 한시라도 빨리 청산하는 것은 (...) 그것은 정치 자세나 사상의 건전한 발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도의의 도달점이기도 하다.
1005쪽 / 남겨진 '전후 보상' 문제를 주시하며
이에 저자가 주목한 것은 단순히 국가와 군대의 폭주만이 아니다. 그에 더하여 전쟁 이후 '전후 처리'의 과정 있어서도 군인이 끝끝내 (개인적인) 용기와 희생의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이 그 무엇보다 나라에 큰 후유증을 남기지 않았나 한다. 실제로 오늘날 수 많은 논란과 갈등의 원인은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더더욱 그 문제의 이면에는 군인이였던 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입장과 그 오랜 기억이 점차 잊혀지거나 미화되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기억을 바탕으로 생존자들의 목소리와 그 모임(단체)의 성격이 변질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또 이를 국가의 빚이라 주장하여 '정치세력'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결과는... 그야말로 오늘날 우경화 속에서 비추어지는 일본의 모습 그대로다.
때문에 저자가 주장하는 진정한 의미의 청산, 그리고 전후의 시대를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쇼와시대의 제국군의 모습 그대로를 들여다보고, 또 이를 비판하기 위한 (올바른)현대적 가치를 내면에 세울 필요가 있다. 이에 단순히 일본제국군의 무능이 그저 '계란으로 바위를 친 어리석음'이라 생각된다면... 한번 그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이 책을 접해보기를 바란다.
이에 나는 이 내용을 통하여 우경화 속의 그림자... 그야말로 전쟁의 미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전 이후 세대들이 각각 어떠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할 수 있는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이는 전쟁의 기억과 참상을 이해하는 잣대가 서로 다름으로서, 생겨나는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 군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이를 오롯이 마주하지 않았던 일본제국과 그 속의 군인들 마저 어떤 의미에서 (서로) 진정한 화해?를 하지 못한 탓이 크다.
- 접기
루츠 2022-03-20 공감(2) 댓글(0)
Thanks to
공감
쇼와 육군 / 호사카 마사야스

제1부 쇼와 육군의 전사─건군에서 다이쇼 말기까지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육군대학교와 같은 육군의 교육기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적 지상주의가 팽배한 기관에서 기대에 상응하는 성적을 거두었지만, 실전 경험이 적다는 약점도 지니고 있었다. 이 세대는 1904년(메이지 37)과 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 당시에 육군사관학교 생도였거나 아직 육균유년학교 생도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 최초로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과 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라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결국 근대 일본의 부국강병책에 충실한 지식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가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내부를 지배하고 있던 '조슈벌長州閥'이 그들의 힘에 의해 타파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5-6)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일본 육군은 프랑스군을 모방하여 건군되었다. 그런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군이 패퇴하자 이후 독일군을 따랐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군을 일본에 초청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친영미 감정을 가진 자가 몹시 적었고 일반 중학교 출신은 줄곧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현저하게 결여돼 있었다. 인간을 철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 끝까지 보병을 중시하는 육탄 공격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병사를 '무기질의 병기'로 육성하려 했다는 것, 보급과 병참에 대한 중요성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 등에 잘 나타나 있다."(16)
"1882년 1월 4일, 메이지 천황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인훈계」를 간결하게 명문화한, 약 2700자에 이르는 「군인칙유」를 하사한다." "그리고 이 「군인칙유」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를 관통하는 일본 육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군인칙유」에서 〈군인은 충절을 다하는 것이 본분〉이라는 표현은 천황의 군대라는 점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의도이다. 반면 〈세론에 흔들리거나 정치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무렵의 반정부적 운동(예를 들면 자유민권운동과 같은 정치활동)에 장교가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군의 기강을 공고히 세우면서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처럼 본래는 정치적 중립을 의미하는 문구인데, 쇼와 초년대 국가 개조 운동을 추진한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정치나 세론이 어떠한 형태로든 육군 내부의 움직임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자가 많았다."(22-4)
"그 결과 육군이 일본제국 안에서 특별한 지위에 있고, 누구보다 우월한 사명을 천황에게서 부여받았다는 오만한 착각을 낳았다.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이 착각 속에서 국가 그 자체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더해 1875년 3월부터 약 3년 동안 공사관 소속 무관으로 독일에 주재했던 가쓰라 다로 소좌는 독일군을 예로 들며 육군성 내 부국 중 하나인 참모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야마가타에게 제안했다. 여기에는 군정軍政과 별도로 군사 작전이나 군사 행동에 관해 특별한 권한을 가진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야마가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878년 12월 참모본부를 독립시켰다. 1893년 5월에는 해군의 군령부가 독립했는데, 참모본부와 군령부 부장은 천황의 대권을 대리하는 책임자라는 의미를 지녔다. 군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넘어, 정신적 기반뿐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천황에 직결되는 특별한 기관이라는 우월의식이 이 무렵에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24-5)
"근대 일본의 군사 조직이 처음으로 국외에서 전투를 벌인 것은 1894~1895년에 걸친 청일전쟁이며, 이때 전쟁을 지도한 것이 대본영大本營이었다. 대본영은 1893년 5월 공포된 전시 대본영 조례에 기초하여 설치된 조직이다. 쇼와 육군도 이 조례를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실제로 전시 태세에 돌입했을 때 육해군이 작전 측면에서 통일된 방침을 갖고 행동한다는 목적에 따라 생겨났다. 물론 천황의 대권을 위임받은 육군의 참모본부와 해군의 군령부가 각각 대본영 육군부와 대본영 해군부로 일체화하여 천황에게 군사 작전과 행동의 내실을 알린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대본영에 문관은 참가할 수 없게 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결국 전쟁 지도에는 군인만이 관여하고 문관(국무대신 등)은 군사에 관해 일절 알아서는 안 된다는 제약이 따랐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쟁을 순전히 군사 행동만으로 파악하여 정치적인 배려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9-30)
"1907년 4월에 작성된 「제국 국방 방침」의 주안점은 우선 〈제국의 국방은 공세를 본령으로 한다〉는 데 있었고, 줄곧 공세 계획을 골자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 다음 〈장래의 적으로 상정해야 할 나라는 러시아를 제일로 하고 미국·독일·프랑스가 그 뒤를 잇는다〉고 명시했다. 〈국방에 요구되는 제국군 병비의 표준은 용병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러시아와 미국의 압력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정도로 한다〉라고 했듯이, 러시아와 미국에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수준의 군비를 갖추는 것을 국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방 방침에 따라 「제국군 용병 방침」 제1항에는 〈해군은 적에 대하여 힘써 기선을 제압하고 그 해상 세력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육군은 적보다 앞서 필요한 만큼의 병력을 속히 한 지방에 집합시킴으로써 선제공격의 이점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작전을 펼친다〉고 적혀 있다. 모두 선제공격에 중점을 둔 작전을 고려한다는 게 특징이었다."(47)
"다이쇼 시대에 들어서 육군이 지나치게 많은 군사비를 요구해오자, 국가 재정을 우려한 정부는 조금씩 반격하기 시작했다." "1927년 6월에 열린 의회에서 정당 측은 집요하게 '군부대신현역무관제'에 반대했다. 야마모토 내각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대신과 차관(당시는 총무장관)의 임용 자격이 적힌 비고란에 〈대신 및 총무장관에 임용되는 자는 현역 무관으로 한다〉고 쓰여 있던 문구를 삭제했다. 이리하여 예비역도 육해군 대신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육군상 구스노세 유키히코는 자신의 권한을 점차 참모본부로 넘기는 방법으로 그 효과를 무력화했고, 이를 통해 '통수권 독립'이라는 명분을 지키면서 정치 쪽에서의 개입을 막을 수 있었다." "쇼와 육군이 고압적인 자세로 '통수권 독립'을 외치게 된 것은 이러한 경위에서 비롯됐다. 1936년의 2·26 사건 때 '군부대신현역무관제'가 부활하는데, 참모총장에게 권한을 넘긴 사실만은 그대로 남아 쇼와 10년대 참모본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횡포를 부리게 되었다."(51-3)
"일본의 국가 재정이 두드러지게 피폐해진 원인은 물론 군사비 팽창에 있었다. 1919년에서 1921년까지 내리 3년 동안 국가 예산의 40~50퍼센트를 군사비로 할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시베리아 출병은 당연하게도 재정 압박의 요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증유의 호황을 누렸지만, 전쟁이 끝난 후 부풀어 올랐던 일본 경제는 순식간에 쪼그라들었고 그동안 쌓아놓았던 자금도 금세 써버리고 말았다. 1921년 11월 하라 다카시 수상이 암살되고, 이어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이 탄생했다. 다카하시 수상은 긴축 재정을 내걸었다. 그런데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진재로 다시 한번 크게 타격을 입었다. 군사비 팽창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외압에 대해 육군 내부에서 대응한 사람이 육군상 우가키 가즈시게다. 그래서 이 시기의 삭감을 우가키 군축이라 부른다."(62-3)
"감축 대상이 된 이들은 우카기를 원망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군 내부의 장교들도 우가키에게 불만을 품었다. 우가키가 육군의 입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게 좌관급 장교까지 내몰았다는 것이 불만의 이유였다. 육군의 막료는 우가키를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태도로 대하면서 그 원한을 이어나갔다. 쇼와 10년대에 우가키는 수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육군은 끝까지 육군대신을 추천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가키 내각은 유산되고 만다. 그 정도로 원한이 깊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이쇼 말기의 군축 분위기는 일본의 서민들 사이에서도 확산되었다. 군사에 대한 혐오, 군인에 대한 모멸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예를 들면 군인은 제복을 입고 거리에 나가지 못했다. 서민들로부터 냉혹한 눈길을 받거나 싫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 육군은 가장 뿌리 깊은 집단사회여서 그 특이한 가족주의적 성향이 도시의 인텔리 계층에서는 혐오감을 자아내기도 했던 것이다."(64-7)
"다이쇼 시기에 일본은 본격적인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군사 집단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었다. 우가키 군축은, 우가키의 진의가 어떻든 그러한 시도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육성된 메이지 10년대 중반부터 20년대 전반에 태어난 제2세대 군인은 그러한 심리를 배척하는 것이 오히려 군인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떻게 군 내부의 지도층에 들어갔을까? 먼저 지적할 것은 새로운 파벌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1921년 10월 27일 나가타 데쓰잔, 오카무라 야스지, 오바타 도시로 등이 바덴바덴에서 가진 회합이, 조슈벌의 횡행을 대체하여 육대벌陸大閥이 군 내부에서 주류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부터 전쟁은 국가총력전〉이라는 것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을 시찰한) 세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는 국가의 정치·경제·산업·문화·사회의 모든 것을 전시 체제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71-3)
제2부 쇼와 육군의 흥망
"쇼와 육군을 말할 때면 무엇보다 1928년 6월 4일에 일어난 '장쭤린 폭살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모토 다이사쿠는 이 사건의 중심인물이다. 동지들은 이 사건을 고모토의 애국적인 행위로 파악하고, 이전부터 중견 장교들이 활약했던 만몽 지역에 부동의 정치 권력을 수립한다는 계획이 육군 지도자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햇빛을 보지 못한 것에 분개했다." "고모토로부터 장쭤린 폭살 사건의 진상을 들은 후타바카이 회원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모토를 지킬 것을 맹세했고, 심정적으로는 '고모토를 따르리라'는 기개를 품었다. 어떤 장교는 고모토의 손을 잡고 〈우리가 당신의 뜻을 반드시 잇겠습니다〉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 중견 장교들은 시라카와 육군대신이 점차 관동군의 음모라는 것을 알아챈 듯한 발언을 하자 육군대신 집무실로 몰려가서는 〈관동군은 관련이 없다〉며 윽박질렀다. 쇼와 육군의 사실을 은폐하는 기질은 이미 이때부터 중견 장교들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102-3)
# 후타바카이二葉會 : 다이쇼 말기에 육사 15기부터 18기에 이르는 좌관급 장교가 중심이 되어, 전쟁론, 만몽 개발론, 군 개혁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모임
"장쭤린 폭살 사건을 쇼와 육군이 범한 오류의 제1막이라 한다면 만주사변은 제2막이었다." "1931년 10월 2일에 열린 관동군 막료 회의에서 이시하라 간지는 시종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개전 후 한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에 군사적으로는 지린 성을 진압하고 나아가 하얼빈까지 장악 영역을 넓혔으며, 각 지방의 유력자들도 관동군의 의향을 받아들여 일본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기득권의 옹호와 같은 낡은 표어가 아니라 신만몽국 건설이라는 표어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족협화五族協和·왕도낙토王道樂土의 국가로 정하는 게 우리 생각이다.〉 막료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동의했다. 모두가 〈이시와라의 말이 옳다〉며 맞장구쳤다. 군 중앙이나 정부가 이 방침에 반대하고 나설 경우 신만몽국을 독립시켜 대결 자세를 취해도 좋다는 것이 암묵적인 양해였다. 이때 이시와라 간지는 42세의 중좌로, 자신의 이념을 이 새로운 국가에 쏟아넣고 싶다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111-2)
"이시와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지구 전쟁의 시대라고 정의하고, 이 전쟁이 50년 정도 계속될 것이라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 전쟁의 시대에 들어섰다면서, 결국 1965년 무렵이면 지구 전쟁은 결말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 지구 전쟁에서 결말이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서양 문명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일본은 동양 문명의 축이 되었다. 두 문명의 대결이 바로 인류 최후의 결전 전쟁이며, 그것은 대략 1985년 무렵에 결말이 난다. 이 결전 전쟁에서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신병기도 개발되어 한 방으로 도시를 궤멸시킬 수 있는 파괴 병기를 생산하게 될 것이며, 착륙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지구를 돌 수 있는 비행기도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결전 전쟁을 마친 뒤에는 세계가 통일되어 민족 협화의 시대로 들어선다는 것이다. 민족협화民族協和야말로 결전 전쟁 후의 세계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이시와라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121)
"1936년 2월 26일의 이른바 2·26 사건은 육군 내부에서 국가 개조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20여 명의 청년 장교와 그들의 지휘 아래 있던 부사관 및 병사 15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쿠데타였다." "2·26 사건에 가담한 청년 장교들은 물론 자신들의 궐기 행동을 쿠데타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유신이나 혁신과 같은 표현을 썼으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무라나카 다카지가 교묘하게도 〈우리는 유신의 전위전前衛戰을 벌인 것〉이라고 했듯이, 그들이 행동을 계기로 육군 당국이 새롭게 국내 체제 개혁을 위해 궐기하는 것으로 참된 '쇼와 유신'이 시작될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란 국체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대원수인 천황 폐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질적일 만큼 쿠데타나 혁명이라는 말을 피했다. 하지만 청년 장교들의 주관적인 생각이 그랬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보면 이것은 쿠데타 이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137-9)
"1933~1934년 무렵 육군 내부에서는 천황기관설을 신봉하고, 합법적으로 군부가 권력을 손에 넣은 다음 국가 총동원 체제를 갖추도록 하자고 주장하는 그룹을 통제파라고 불렀다. 교육총감 와타나베 조타로, 육군성 군무국장 나가타 데쓰잔 등이 중심이었다. 이에 대해 국체 명징운동에 적극적이고, 불법적으로라도 권력을 장악한 다음 천황 친정에 의한 국가를 목표로 삼은 그룹을 황도파라고 불렀다. 이 그룹은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를 받들었는데, 황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황도파였다." "「군인칙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그들은, 천황이 살아 있는 신이며 나를 버리고 신을 모시는 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배워온 세대다. 그들은 일본의 현실에 대해 살아 있는 신의 뜻을 따르는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이렇게 된 것은 천황 주변에 있는 측근이 국민의 뜻을 왜곡하여 천황에게 전하고 있는 체제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그런 측근들이야말로 '임금 곁의 간신'이라는 것이다."(144-5)
"2·26 사건은 쇼와 초년대의 여느 국가 개조운동과 크게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청년 장교가 부사관이나 병사에게 명을 내려 다수를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동원된 병사 중에는 이해 1월에 갓 징용되어 아직 무기를 취급하는 데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까지 있었다. 쇼와 초년대의 국가 개조운동에서는 실제로 병력을 움직일 많나 규모의 사건이 없었다. 게다가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천황의 대권임에도, 청년 장교들은 천황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뜻을 무시했다. 자신들의 행위는 큰 의미에서 천황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천황의 대권을 거스르는 행위도 허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을 '대선大善'이라 칭했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청년 장교들과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이 요인을 습격하여 처참하게 살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임금 곁의 간신'에 대한 그들의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살해 방법은 쇼와 초년대의 테러 사건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잔혹했다."(147)
"2·26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성공'했다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청년 장교들의 궐기는 4일 만에 천황의 강한 반대와 그것을 지지한 육군 주류파(이를 통제파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들의 호소는 묵살되고 만다. 결국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2·26 사건 후의 정치 상황에서 육군 주류파는 〈이와 같은 불상사는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명분 아래 육군 내부의 청년 장교들이 맡고 있던 지도부의 일파(황도파라고 불러도 좋다)를 숙군인사肅軍人事라는 명목으로 몰아냈고, '군부대신현역무관제'라는 제도를 부활시켜 육군상을 경질하거나 후임 육군상을 추천하지 않는 방법을 동원하여 내각의 생사여탈권을 획득했다. 이리하여 언제라도 육군이 주도하는 내각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2·26 사건이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이유다. 물론 이 성공은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들의 주체적인 의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형태의 것이었다."(140)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소련군은 중국을 지원하면서 자국의 근대적 병기의 위력을 시험이라도 하듯 관동군을 견제했고, 관동군도 소련이 어느 정도 항일 의욕을 갖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도발하곤 했다. 그리하여 1937년에는 113회, 1938년에는 166회나 국경 분쟁이 일어난다. 그런 분쟁들은 점차 대규모 군사 충돌로 바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장고봉張鼓峯 산정에 소련군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관동군이 처음 알아차린 것도, 국경 침범에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의 보고를 받은 참모본부는 소련 측에 항의하는 게 좋겠다고 외무성에 제안했다. 외무성의 항의에 소련 측은 〈1886년 이후 이 지역은 소련 영토〉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이런 사태는 물론 참모본부의 막료들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오히려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소련군과 군사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했다."(234)
"그러나 일본군은 근대적 병기를 앞세운 소련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 제19사단의 참모장은 조선군 참모장 앞으로 전보를 보내 〈전선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전선의 지휘관과 병사는 오로지 수비를 하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는 바, 전황이 '돌파구'를 찾기까지 외교 교섭을 통해 정전으로 나아갔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장고봉 사건은 결국 외교 교섭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사단장의 독단과 참모본부의 중견 막료들의 책임을 따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제19사단의 장병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소련군 앞에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전사했다는 측면만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외교 교섭에서 소련이 뜻밖에도 일본군을 최종 단계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합의한 사실을 핑계로, 이것 역시 일본군의 철저한 저항 때문이라고 말하고, 소련군은 대일전에서 앞서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리는 자료로 삼았다. 장고봉 사건은 책임도 묻지 않고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일본군의 육탄 공격을 예찬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246-7)
"쓰지 마사노부는 노몬한 사건을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참모이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수석에 가까운 성적으로 졸업한 쓰지는 육군 내부에서 단연 주목받는 존재였다. 성적 지상주의의 조직 원리하에서 단지 육군대학의 성적이 좋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이나 언동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어디에 배속되든 강경론을 주장했고 때로는 상관의 눈에 띄는 화려한 언동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중론을 펼치는 상관을 험악하게 매도하기도 해서 군사령관이 일개 참모의 비위를 맞추느라 전전긍긍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전해온다. 1937년 11월 관동군 참모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줄곧 대소련전을 외쳤고, 그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마다 소련군이나 몽골군의 국경 침범을 지적하면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고봉 사건에서 조선군이 소련 측에 철저하게 패한 것을 두고 〈저들은 조선군이어서 그렇다. 관동군이라면 절대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쳤다."(263-4)
"노몬한 사건의 발단은 장고봉 사건으로부터 8개월이 지난 후인 1939년 4월 관동군이 정리한 「만소 국경 분쟁 처리 요강」이었다. 이 요강은 관동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시달되었는데, 실제로 이 요강을 기안한 사람은 쓰지였다. 일본의 판단만으로 국경선을 정하고 그곳에 소련군이나 몽골군이 들어오면 철저하게 응징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초원이나 강, 산 등에는 국경선이 명확하게 그어져 있지 않으므로 일방적으로 선을 긋고 상대방이 그곳에 진입해오면 〈주도면밀한 준비 아래 철저하게 응징하여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더욱이 이 요강에는 무시무시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방위사령관이 자주적으로 국경선을 인정하고 이를 제일선 부대에 명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제멋대로 국경선을 그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대소 군사 충돌 대망론'은 장고봉 사건의 교훈이 전혀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264)
"1940년 9월, 일본군은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주해 들어간다. 프랑스의 식민지 제독에게 억지스러운 요구를 들이밀고서 무력을 발동하여 진주한 것이었다. 이때 외무성은 프랑스 외무성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고, 하노이에 있는 육군의 장제스 원조 물자 저지를 위한 감시단 위원장 니시하라 잇사쿠 소장과 프랑스 측의 교섭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참모본부 작전부장 도미나가 교지와 남지나방면군 참모부장 사토 겐료는 제5사단을 움직여 무력 진주를 강행했다." "이에 대해 이시이는 이렇게 말한다. 〈쇼와 육군에는 세 가지 하극상 사건, 이른바 군기를 따르지 않았던 전투가 있습니다. 이시와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만주사변, 쓰지 마사노부와 핫토리 다쿠시로의 노몬한 사건 그리고 도미나가 교지와 사토 겐료의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입니다. 이것은 쇼와 육군의 불명예 사건이며, 특히 이시와라의 만주사변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341)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의 국책은 단숨에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기울었다. 일본이 이곳에 진주하는 것은 자존·자위를 위한 '정당방위'이고, 이것은 미국이 평소에 영국을 원조하는 것을 '정당방위'라고 말한 것과 같은 논리로 앞뒤를 맞추었다. 해군성에서도 군무국 제2과장 이시카와 신고가 중심이 되어 강력하게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주장하고, 이것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든지 받아주자며 자신감을 보였다. 주독 대사 오시마 히로시는, 독일은 단기간에 소련을 제압하고 우크라이나, 발틱(발트 해 연안부), 벨라루스, 캅카스 등을 소국으로 분할하여 소련을 실질적으로 해체할 작정이니, 일본도 이에 응하여 극동소련군을 제압하고 독일의 방침에 즉시 호응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호소했다." "마침내 6월 24일 조정된 「제국 국책 요강」에서는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가 중심으로 바뀌어 있었다."(346)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 대한 미국의 보복은 일본군 상륙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7월 25일 미국 내에 있는 일본 자산의 동결을 발령했고, 26일에는 영국, 27일에는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그 뒤를 따랐다. 28일에는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일본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했다. 8월 1일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일본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른 것이었다." "육군성과 참모본부 안에서 대미전의 목소리가 급속히 높아졌다. 전쟁지도반의 『기밀 전쟁 일지』 8월 2일자 기록을 보면, 〈대미 전쟁은 백 년 전쟁이다. 제국은 이미 이를 피할 방법이 없다〉고 적혀 있다." "전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국 측은 이미 이 단계에서 일본 외무성 전보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는 군사적으로는 '무혈 점령'이라는 점에서 성공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쇼와 육군의 예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를 보여주었고, 그 점에서 실패했던 것이다."(352-5)
"이치키 지대는 1942년 8월 12일 트루크 섬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과다카날 상륙 작전을 준비했다. 이치키 지대는 1942년 8월 하순부터 1943년 2월까지 약 6개월의 시간을 과다카날에서 보낸 유일한 부대였다." "미군의 병력이나 병기와 비교하면 이치키 지대의 제1진은 5000 대 1 이상 차이가 있었음에도 대본영과 제17군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일단 군을 투입했다가 패퇴하면 오기가 생겨 잇달아 병력을 쪼개서 보내는, 이른바 체면을 건 싸움을 벌이는 것이 쇼와 육군의 나쁜 전통인데, 그것이 여기서도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다. 1943년 2월 7일 최후의 부대가 철수하기까지 육군 약 3만 600명, 해군 약 4700명을 쏟아부었고, 이 가운데 육군 약 2만 800명, 해군 약 3800명이 전사했다.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보급 물자가 도착하지 않아 쇠약해져서 죽거나 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치키 지대에 한정하면, 2500명이 조금 못 되는 병사 가운데 살아서 귀환한 이는 고작 1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493-4)
"이치키 지대와 (제2진으로 출병한) 가와구치 지대의 패전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래 육상전에서는 처음으로 맛보는 굴욕이었다. 전후에 기록된 당시 참모들의 수기나 회상록에서는 본래대로라면 이 단계에서 과연 과달카날이 전략적으로 그만큼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재검토해야 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당시 참모본부와 제17군사령부의 분위기는 그다지 냉정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비행장을 탈환해야겠다는 체면 문제가 앞섰다. 군인들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재검토하자는 논의는 미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의견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참모본부 작전부장 다나카 신이치, 작전과장 핫토리 다쿠시로 그리고 작전과의 쓰지 마사노부 등에게 도조 히데키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과달카날을 포기하지 마라〉고 거듭 주의를 주었다. 참모본부는 그 말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작전과 자체가 개전 이래 연전연승이라는 '불패의 신화'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501-2)
"1943년 1월부터 2월까지 해군의 구축함이 라바울 기지에서 과달카날로 들어와 세 차례에 걸쳐 1만 명이 넘는 일본 병사를 철수시켰다." "2월 9일 오후 7시, 대본영 발표가 있었다. 1항과 2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2항 중반부터 과달카날에 대해 언급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서 작전 중인 부대는 작년 8월 이후 잇달아 상륙한 우세한 적군을 같은 섬 일각에서 압박하고 과감하게 격전을 치러 적의 전력을 분쇄해왔다. 이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2월 상순 이 섬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시종 적을 강하게 압박해 굴복시킨 결과 양 방면에서 엄호 부대의 전진轉進은 대단히 질서정연하고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적에게 입힌 손해는 인원 2만 5000명 이상(실제로는 전사 1000명, 부상 4200명), 우리 쪽 손해는 1만 6734명(실제로는 전사자와 아사자를 합쳐 2만 4600명)이라고 덧붙였다. 대본영 발표가 '과장'과 '허위'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525-6)
"쇼와 육군을 조사하다 보면 알 수 있지만, 참모본부 작전부에 배속되는 엘리트 관료에 관하여 은밀하게 내려오는 불문율이 있었다. 육군대학교 졸업자 50명(해마다 약간의 증감이 있다)은 쇼와 육군의 지도적인 지위를 보장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이 가운데 성적 우수자(상위 10퍼센트, 보통 5~6명)는 특히 군도쿠미軍刀組라 하여 참모본부 작전부에 배속되며, 그들의 집무실은 작전부원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벽에 걸린 남방 요역을 나타내는 대형 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현지로부터의 전투 보고를 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또는 국책의 핵심이 되는 전쟁 방침을 정하고 그것을 해군의 군령부 작전부와 조정하여 가끔은 정부에 대본영의 의향이라며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모본부 작전부에서 현지 파견군에 내려지는 명령은 통수권을 책임진 천황의 명령 그 자체였다. 현지 파견군은 그 어떤 명령도 어길 수 없었다."(572-3)
"작전부 참모들은 정보부를 포함해 다른 부문의 참모들에게 강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정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지도 않고, 정보부가 수집한 다양한 데이터도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이 생각하는 지식에 따라 작전 명령을 내렸다." "정보부의 엘리트 군인들이 전후에 펴낸 글에서 공통되게 드러나는 것은 태평양전쟁이 틀림없이 정보전이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전쟁을 계속했다는 자성自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전략폭격조사단은 일본이 왜 이렇게 정보를 경시했는지에 관하여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정밀한 정보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일본 침략군에 협력한 중국인이나 특수 기관〉에 의지하다 보니 정보 수집이나 해석을 시스템으로서 구축할 수 없었고, 수상한 정보원에게 기밀비를 지불하고 그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573)
"1943년 4월 18일 오전,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탄 일식육상공격기가 격추되었고, 야마모토는 부관 및 군의장 등과 함께 전사했다." "야마모토의 전사는 일본 해군의 굴욕이었음에도 이 사실을 오히려 담담하게 전함으로써 국민의 충격을 완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발표와 달리 야마모토의 최후를 본 육해군 수색대의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전선으로 보내졌고 결국 전사를 강요당했다." "야마모토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제6사단 제23연대의 하스나 미쓰요시 소위가 지휘하는 수색대였다. 하스나를 포함하여 수색대 소속 병사 약 20명은 목격한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금지당했고, 누설할 경우에는 〈군법 회의에 회부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이 병사들은 잇달아 전선으로 보내졌으며, 어떻게 해서든 살아 있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형태의 전속이 되풀이되었다."(580-1)
"태평양전쟁의 개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가장 많이 부족했던 것은 후방사상後方思想이었다. 후방사상이란 병참, 보급에 관한 사고방식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는데, 병력·무기·탄약·식량·의약품·의복 등을 전선의 병사에게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일본군 내부에서는 〈군수품을 나르는 이가 병사라면 나비와 잠자리도 새다〉라며, 치중輜重을 담당한 장교나 병사를 조롱하는 우스꽝스런 노래가 불리기도 했다. 러일전쟁 이전부터다. 치중이란 병참과 거의 같은 의미인데, 군대에 불가결한 식량·의복·무기·탄약 등을 총칭한다. 전투를 지원하는 후방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후방을 얕잡아보는 치명적인 결함은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의 교육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육군대학교에서도 병참이란 전선으로 식량과 무기, 탄약 등을 나르는 전술이라 하여 도상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심부름'과 같은 단계에 머물렀을 뿐 일관된 교육도, 그 이론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638-9)
"일본군 안에서도 보기 드문 육군대학 출신 병참참모였던 이도 마쓰아키에 따르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은 독일군을 모방하기는 했지만 병참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규율도 엄격해서 약탈 등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점차 후방사상을 경시하게 되었다. 이도는 쇼와 시대에 들어 〈만주사변에서는 병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중일전쟁에서는 더욱 소홀하게 취급되었으며, 결국 대동아전쟁에서는 병참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일거에 만연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병참 사상에는 전쟁 억지력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냉철하게 숫자를 분석하고 군사를 직시하면 병사를 인간으로 보게 됩니다. 그것이 일본에는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이도의 어조에는 병참을 작전이나 정보보다 상위에 두어야 한다는 확신이 배어 있었는데, 나는 태평양전쟁에서 그런 병참사상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했다."(639-40)
"「전진훈」은 1941년 1월 육군상 도조 히데키의 이름으로 군에 시달되었다. 원문을 작성한 사람은 시마자키 도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육군 막료들이 초안을 집요하게 손질하여 마무리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내용은 근대국가의 가치 기준을 모조리 부정한 것이었다. 「전진훈」의 '본훈 제1장 제1절 황국'은 〈대일본은 황국이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위에 계시며, 조국肇國의 황모皇謨를 계승하여 무궁하게 군림하신다. 황은皇恩은 만민에게 널리 미치며, 성덕聖德은 팔굉八紘에 고루 미친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사생관死生觀을 보면, 〈생사를 관통하는 것은 숭고한 헌신 봉공의 정신이다. 생사를 초월하여 오로지 임무를 완성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고, '이름을 아낀다'라는 항목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강하다. 늘 향당鄕黨과 가문의 면목을 생각하고 더욱 분려奮勵하여 그 기대에 응답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향토와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라는 것이다."(684)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에 의한 특공 작전이 처음으로 펼쳐진 것은 1944년 10월 25일이었다. '인간' 그 자체가 폭탄이 되는 이 작전은 태평양전쟁 기간을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또 비참했다. 이 작전을 채택한 육해군 지도부의 책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이 작전으로 사망한 병사들은 '신'으로 되살아나리라 강요받은 존재로, 오늘날에도 계속 거론되어야만 한다. 10월 25일은 필리핀 앞바다 해전이 시작된 다음 날이다. 레이테 결전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필리핀 앞바다 해전이 발동되었고, 다바오 기지를 출발한 해군특공대 소속 비행대가 미 해군 항공모함을 목표로 고도 3500미터 높이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이날 필리핀 앞바다를 돌아다니고 있던 미 기동부대를 향하여 특공대는 수차례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육해군 특공대 2367대가 출격하게 된다. 이는 그 숫자만큼의 생명이 사라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764)
"이 작전을 처음 생각해낸 것은 해군 내부의 항공 관련 막료들이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밀고 나간 사람은 제1항공함대사령관 오니시 다키지로였다. 당초 오니시는 이 작전을 '통솔의 외도外道'라고 자조했지만, 이미 전력이 바닥난 일본 해군으로서는 일시적으로나마 이러한 작전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전과가 예상 밖으로 컸기 때문에 이 작전이야말로 유효하다는 양해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특공 조종사의 양성, 특공기 개발 등에 힘을 쏟게 되었다." "1945년에 들어서면서 쇼와 육군은 전군이 똘똘 뭉쳐 특공 작전을 외쳤다. 이것에 걸려든 이들은 주로 학도병이나 갓 소집된 신병들이었다. 다시 말해 군사 요원으로서 전력상 지위가 낮은 순으로 특공 작전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특공기 조종사들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의사만으로 이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반드시 따져야만 하는 쇼와 육군의 체질이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체질이 충분히 밝혀졌다고는 할 수 없다."(766, 781-2)
"1945년 3월, 고이소 내각은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국민의용대 조직에 관한 건」을 결의했다. 국민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6월 13일에는 각료회의에서 법적인 틀을 마련했다. 의용병역법으로 명명된 이 법률은 15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성,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의용 병역을 부과한다는 내용으로, 말하자면 국민을 모조리 동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국민 전원이 병사가 되는 군사국가가 탄생했다. 이것이 국가총력전 구상의 귀결이었다." "이리하여 병사 수는 확보되었는데, 정부는 참모본부의 방침에 호응하여 본토 결전을 좀더 구체적으로 다지기 위해 국민의 사유재산에도 제한을 가하기로 했다. 3월 28일 공포된 「군사특별조치법」은 미군의 상륙에 대비해 진지를 구축할 때 국민의 모든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국민은 본토 결전에 대비해 어떤 항변도 허용되지 않았고, 참모본부나 군령부에서 명하는 대로 움직여야만 했다."(806)
제3부 쇼와 육군이 전후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GHQ 내부에서는 G2와 GS(민정국) 사이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G2는 군인이 중심이어서 철저한 반공 노선을 취했고, 여차하면 소련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추후 제정된 일본국헌법이 재군비를 금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가까운 시일 안에 재무장을 허용하여 반공의 보루로서 일본을 군사 대국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주도한 사람이 윌로비였다." "윌로비와 대립한 사람은 GS를 지휘하던 국장 휘트니였다. 그는 쇼와 육군의 완전한 해체를 주장했고, 일본에 민주적인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이 군사 조직을 최우선으로 배제해야 할 세력으로 간주했다. 윌로비와 휘트니는 맥아더를 지탱하는 두 축이었다. 윌로비는 휘트니 등의 민주적 개혁에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그가 (원칙대로라면 전범으로 간주되었어야 할) 핫토리를 비롯한 과거의 막료들을 감싸고 돈 것은 일본의 재군비가 진행될 경우 그들을 지도부에 포진시키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978-9)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들 군인의 변절이 왜 이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졌느냐는 점이다. 작전참모의 졸렬한 작전 때문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장병을 생각하면 이들의 재빠른 변신을 다시금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핫토리는 작전과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참모본부의 작전 전반을 관장했다. 그 책임은 대단히 무겁다. 그럼에도 이러한 입장에 선 것은 핫토리 자신의 윤리관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맥아더의 전사를 집필하는 작업은 과거 일본군 군인들에게는 물론 알려지지 않았고 GHQ 내부에서도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1947년 5월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2년 반 후인 1950년 12월에 마무리되었다. 개전부터 패전까지 일본 측의 핫토리 그룹이 작성한 원고는 방대한 분량이었던 듯하지만, 구성원 개개인에게는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핫토리와 윌로비가 암암리에 이들이 작성한 원고를 수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987)
"1953년에 간행된 『대동아전사』(저자명 핫토리 다쿠시로)에는 맥아더의 『태평양전쟁사』 편찬 그룹에 속한 멤버의 이름이 보인다. 이 10명의 면면을 보면 패전 시 대좌 3명, 중좌 6명, 소좌 1명이다. 그러니까 참모들이 전쟁사 편찬의 주체로 참가했던 셈이다." "패배한 군대의 장수(그들은 물론 좌관급이었다)는 전황에 대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전장에서 싸운 적이 없다. 단지 참모본부 깊숙이 자리한 방에서 지도를 보며 군대를 이리저리 움직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전시에 그들은 사이판의 방어진지가 맥없이 무너지자 이를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사단의 잘못으로 돌렸고, 레이테 섬에서 일본군이 패배했을 때도 일방적으로 전략을 변경한 뒤 작전이 실패하자 그것을 현지 군의 무능 탓으로 돌렸다. '절대 국방권' 구상이나 '첩호 작전' 등도 책상에서 마련하여 현장에 들이민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본영의 참모는 어떻게든 전사를 바꿔 쓸 수 있다는 것이 『대동아전사』를 관통하는 논조다."(988-9)
"1953년 간행된 논문 「차기 대전과 일본방위론」에서 핫토리는 미일 전쟁의 발발을 미국의 도발과 일본 '중추부'의 개전 의사가 만나 벌어진 결과라고 보는 듯히다. 뿐만 아니라 이 논문 곳곳에서는 그의 자기변명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참모의 명령에 따라 사지로 달려간 200만여 명의 일본군 병사는 얼마나 한스러웠을까. 패전 후 8년, 전시 지도를 담당했던 장관將官은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총살을 당하거나 자결을 하거나 스가모 형무소에 갇혔으며, 사회에 나와서도 생활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부사관이나 병사는 시베리아에 억류되거나 남방에서 얻은 병을 치유하는 데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거나, 생활고와 싸우고 있었다. 많은 병사는 가혹한 전장 체험에 가위눌리면서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작전참모는 GHQ로부터 급여를 받으면서 '일본군 부활안'이라는 두렵고도 무책임한 문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전후사회에서 가장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할 '쇼와 육군 작전참모'의 처세술이었다."(995)
"쇼와 육군의 위계질서는 엘리트 군인과 병사 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고 했거니와, 병사란 1전 5리(엽서 한 장 값, 즉 소집영장을 말한다)로 징용된 자이다. 일본은 징병령을 시행했기 때문에 만 20세가 되면 본적지에서 징병 검사를 받는다. 피검자는 신체 조건, 운동신경 등에 따라 갑을병정으로 등급이 나뉘는데, 평시라면 갑종은 2년에서 3년 동안 병역 의무를 져야 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시민의식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고, 자립적인 개인과 같은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그들이 싸우는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상관의 명령에 따라 싸우다 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윤리라고 배웠을 따름이다. 쇼와 10년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학교 교육이 확대되면서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신들린 듯 신민 교육이 실시되었다. 전후 쇼와 육군이라는 조직은 해체되지만 그와 같은 일본적 공동체의 잔재는 전우회라는 모임을 통해 이어졌다."(1018-9)
"다수의 전우회에서는 사상적으로 대동아전쟁이 긍정되었고, 전장에서 싸운 병사들의 감정을 반영한 형태로 쇼와 육군의 군사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이처럼 일본군의 행위는 모두 옳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쇼와사의 전승傳承은 옛 병사들의 감정을 기초로 한 것이다. 전우회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월보를 발행하는 곳일수록 이러한 감정론이 활개를 친다.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인식과 다른 인식(예를 들면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론 등)은 대부분 도쿄전범재판사관이라 결론짓고, 선두에 서서 깃발을 휘두르는 역할을 하는 것은 교육과 저널리즘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런 주장은 쇼와 육군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전우회의 단골 메뉴다." "'다른 사람은 나쁘다'라는 이런 주장은 태평양전쟁을 선택한 당시 지도자의 이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라고 말해도 좋다. 역사 인식이 그 단계에 멈춰 있다는 얘기다."(1023-4)
"'영령'에 대한 애도와 추도는 전우회의 중요한 역할이다. 전우회원들이 침략 전쟁의 첨병으로 낙인찍힌다면 전사한 동료들에게 미안한 노릇이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행하는 추도와 위령은 쇼와 육군이 중심이 된 태평양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는데, 전장에서 싸운 병사의 심정은 도미오카의 말로 대표되듯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만나자'는 표어 아래 죽어간 전우에게 미안하다는 것, 그 하나로 수렴된다. 이것은 더 이상 이론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죽은 자는 두번 다시 의사표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야스쿠니 신사에서 영령으로 모셔지는 것을 양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확인할 길이 없다. 전사 당시의 단계로 한정하여 추도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일본인의 '사생관'에 관련된 문제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전쟁으로 내몰린 세대의 사생관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는 그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1031)
# 전우회의 여러가지 활동
1. 쇼와 육군의 군사 행위 정당화
2. 전쟁사의 다양화에 대한 통제
3. 전장에서 있었던 행위의 공동 치유
4. 전후사회에서의 이해관계
5. '영령'에 대한 공양과 추도
6. 군인연금 지급 등의 명령서 전달
"1978년 3월 10일,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한 7명과 스가모 형무소 안에서 병사한 7명 등 총 14명을 합사했다. 이때 궁사였던 마쓰헤이 나가요시는 훗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완전히 전투를 멈춘 것은 국제법상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투 상태에 있을 때 열린 도쿄전범재판은 군사재판이고, 그 재판에 따라 처형된 사람들은 전투가 한창일 때 적에게 살해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전장에서 죽은 사람과 처형된 사람은 다르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 인식 형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태평양전쟁의 '전투'는 1945년 8월 15일에 끝났지만 '정치'는 1952년 4월 27일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이다. 이 전투와 정치를 아울러 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야스쿠니 신사는 GHQ의 방침에 대항하여 싸운 사람들(국제주의자부터 사회주의자까지)의 영혼도 함께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1033)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의 합사'는 국내에서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매년 문제가 되고, 〈개인이냐 공인이냐〉는 기자의 질문도 이 합사 사실이 밝혀진 이후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된다. 이 문제를 다시 꺼내는 까닭은 가해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지 고민해야 될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우회 중에서 도조가 합사되었다고 하여 야사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곳이 있다. 이 점에 관하여 나는 야스쿠니 신사는 과연 역사를 모두 팽개치고 성립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으며, 적어도 도조 등을 합사함으로써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인의 사생관이라는 영역을 넘어 이를 정치 문제화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사는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애매모호하게 하고, '영령을 국가적으로 총동원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역사적으로는 과거의 침략 행위 비판에 정색하고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1034)
- 접기
nana35 2022-06-06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
전쟁국가 일본..
'전후'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일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본격적으로 '제국 일본'이 치러냈던 전쟁의 실체-전쟁의 구조, 그리고 실제 전쟁을 치러냈던 사람들의 경험-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 썼던 것처럼..
메이지 이래 일본이라는 국가는 매 10년마다 전쟁을 치르면서, 사회체제를 바꿔갔다는 점에서..
근대 일본의 정수를 이해하는 중요한 하나의 틀이 '전쟁국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그런 틀을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참고도서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책들이 계속해서 발간되고, 문고판까지 만들어지는 것이야말로..
일본적 교양주의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일텐데..
실제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장르의 책인 것은 분명하다..
전문 역사가의 학문적 저작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일련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교양' 시리즈와는 격 자체가 다른..
굉장히 치밀하고 깊이 있는 논픽션, 르포 장르라고 해야 할 듯한데..
사실, 이런 장르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이런 책을 읽어낼 수 있는 일정 수의 독서대중..
그리고 이런 책을 기획하고 출판할 수 있는 견실한 출판자본이 존재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어느 것 하나 존재하지 않으니, 이런 책이 나오기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 같다..
하긴 일본 사회 역시 신간에서 이런 책들을 발견하는 건 점점 힘들어지고 있으니..
교양주의의 몰락은 공통적인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책의 장점은..
쇼와 욱군이라는 15년전쟁 혹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주도했던 한 집단의 내부를 최고 지휘층(작전참모를 포함하여)부터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해 생생하게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위로부터의 시점이 아닌, 실제 전장을 경험했던 일반 병사들의 시점에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왜 일본 사회가 그러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는가를 여러 사례들을 검토하면서 집요하게 되묻는 그의 자세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물론 아주 깊이 있는 이론적 분석이 제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이 책의 성격에도 맞지 않고, 또 저자의 의도도 아니었을 것이다..마루야마 마사오가 무책임의 구조라고 한 큐에 정리해버릴 이야기를 저자는 계속해서 자신이 발굴해낸 여러 텍스트들, 그리고 여러 증언자들을 통해 검증해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루야마와 같은 엘리트는 지나쳐버리는 당대 일본 사회의 많은 결들이 세세하게 복원된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이 시대에 정통한 독자라면, 굳이 처음부터 읽을 필요 없이, 관심이 가는 사건이나 인물부터 골라 읽어도 무방할 듯.. 모든 장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몇몇 장들은 논픽션의 정수를 보여줄 정도로 인상적이다..
- 접기
생쥐스뜨 2019-02-08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쇼와육군, 승자의 기록에 편승한 가벼움을 되짚다.
#쇼와육군 #글항아리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일본 #전쟁 #쇼와 #육군 #위안부 #박유하 #제국
저명한 르포르타주 작가이자 '자성사관'의 주창자인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시대, 그중에서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견인한 세력이 누구이며 어떤 관점과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에 천착한다. 그저 '일본이 나빴다'거나 도조히데키 개새기,라는 두루뭉술한 선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며, 여전히 피가 흐르는 동시대사를 갈무리된 역사로 넘기기 위해서도 구체적이고 자세한 검증이 필요하단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일본의 정치와 전쟁을 줄곧 주도해온 세력을 육군, 그중에서도 대본영 육군부(참모본부)의 엘리트 군관료집단이라 본다. 군대에 대한 통수권이 국민에 대한 통치권보다 우위를 점한 채 전혀 간섭받거나 통제되지 않던 시대. 육군은 오로지 천황의 재가에 따라 움직이는 황군이라지만, 천황이 허울뿐인 총괄을 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변과 사건들이 풍부하게 등장한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은 육군 엘리트들은 군대조직의 본능에 따라 계속해서 자존 자위를 말하며, 그에 따른 안보선은 넓어지기만 할 뿐이다. 내지를 보전하기 위한 중국 침략, 중국을 보전하기 위한 러시아 견제 혹은 동남아 침략, 급기야 미국에 대한 침략으로. 그렇지만 빈약한 정보와 준비되지 않은 병참, 무엇보다 국가총동원체제로 치뤄지는 전쟁에서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기엔 정신력과 충성심만으로는 중과부적.
책을 덮으며, 그간 우리는 승자의 기록에 손쉽게 편승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해방이라는 혜택을 입은 이해당사자로서(얼마나 다행인가, 일본이 폭주하여 스스로 자멸했단 건!), 엄밀하고 냉정한 분석을 필요로 한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41년말 진주만폭격으로 시작된 미일전쟁, 그리고 그전의 독이일 삼국동맹과 연합국간 다툼을 두고 단순히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나 제국주의 시대였고, 일본은 뒤늦게 시장쟁탈전쟁에 가담한 국가 중의 하나였을 뿐.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과 자유민주의 원칙들은 기실 타국의 대외정책을 견제하고 자국의 통상이익을 수호하는 국익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정의가 승리한다는 증거로 뒤늦게 제출되었지 않나.
책의 한계 하나, 저자는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데올로기가 허위적이고 가식적으로 쓰였음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그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혹은 호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와 서양을 대비시키며, 식민지 지배자와 해방자를 대비시키는 구도는 너무 단순하고 나이브하지 않나. 게다가 동남아 전선에 버려진 수천의 무명용사들이 각국의 해방전쟁에 자의로 가담했음을 근거로 대동아공영권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말하는 건 비약이다. 그들의 의도와 맥락에 대한 분석없는 점프의 결과는 보편적인 인류애나 가치관이 아닌, 인종과 지역을 근거로 한 대동아공영권 아이디어 자체가 복권될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두번째 한계를 굳이 더하자면, 천백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월간지에 연재된 원고를 근간으로 쓰여지다보니 압축적이지 못하다. 관련자에 대한 심층취재의 생생함을 더하려 했다 해도 겹치는 내용과 장면이 많아, 예컨대 위안부나 전후배상 문제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 부분이 아쉽다. 전시는 평시와는 다른 가치관과 결정을 필요로 하며 또 당대는 지금과 다른 감각으로 위안부 정책 등이 수행되었다, 는 다소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들이 뭉뚱그려졌다. 저자 말대로 이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철저한 연구조사가 선행되어야 그에 따른 진정한 반성과 사죄가 가능한 부분일 텐데, 1991년에 씌여진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후 그다지 계승되지 못한 듯 하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봐야겠다.
- 접기
ytzsche 2018-03-21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
https://www.amazon.co.jp/-/en/product-reviews/4022615001/ref=cm_cr_arp_d_paging_btm_2?_encoding=UTF8&ie=UTF8&reviewerType=all_reviews&pageNumber=2&nextPageToken=MjAyNi0wNy0xMVQwMjowNDowOC41MzA3ODg3NjFaADEw
































미리보기
책소개
쇼와 천황이 재위하던 시대,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제국 육군을 다루고 있다. 거대한 '병리 현상'이라고밖에 달리 분석할 길이 없던 전쟁의 숱한 참상은 모두 '쇼와 육군'이라는 몸통을 관통해 벌어진 일이다. 그런 만큼 일본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무슨 까닭에 일본이 이처럼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가 철저히 일본 내부자의 시각에서, 그것도 오로지 육군만을 줄기 삼아 글을 쓴 이유다.
우선 건군建軍에서 시작해 육군의 전사戰史를 다루면서 그 최상위 지도부를 파헤친다.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대전에서 보였던 일본군의 병리적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이어붙여 나간다. 이런 역사가 쓰일 수 있었던 것은 A급 전범들과 장교,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참전인의 일기와 전후 증언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이 책이 처음 집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경. 그 시간대를 전후하여 수많은 관계자 인터뷰가 이뤄졌는데, 논픽션 작가답게, 호사카 마사야스는 메이지 말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 전후 켜켜이 쌓여온 시간들, 그리고 1990년경 일본 각지에서 참전 병사들이 남긴 회한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간의 격차와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전쟁을 기획한 인물들과 그것이 만들어낸 잔재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며, 그것이 어떻게 기억으로 퇴화되지 않고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참전한 이들은 쉬 열리지 않는 입을 열었다. 인터뷰 당시 이미 80~90세의 노인이었던 참전인들은 전쟁에서 저지르고 당했던 일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러한 증언들이 하나씩 모여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
목차
머리말
제1부 쇼와 육군의 전사: 건군에서 다이쇼 말기까지
제2부 쇼와 육군의 흥망
제1장 장쭤린 폭살 사건과 관동군의 음모
제2장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간지와 만주사변
제3장 만주국 건국과 육군의 착오
제4장 황도파와 통제파: 2·26 사건의 두 얼굴
제5장 2·26 사건 판결은 어떻게 유도되었는가
제6장 중국 국민당의 눈으로 본 ‘항일 전쟁’
제7장 팔로군에 가담한 일본 병사의 중일전쟁
제8장 일본 병사는 왜 만행으로 치달았는가
제9장 장고봉 사건과 일본인 포로의 인생
제10장 노몬한 사건, 어처구니없는 군사 행동
제11장 트라우트만 공작의 놀라운 이면
제12장 왕자오밍 추대 공작과 그 배경
제13장 일독이추축체제를 향한 무모한 길
제14장 위험한 도박,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제15장 미일 수뇌 회담은 왜 결렬되었는가
제16장 「헐 노트」가 도착한 날의 육군성
제17장 「쇼와 천황 독백록」에 나타난 도조 히데키
제18장 워싱턴 해군 주재무관의 회상
제19장 진주만 공격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제20장 싱가포르 공략과 그 뒤틀린 그림자
제21장 어느 사병이 체험한 전쟁의 내실
제22장 과달카날, 병사들의 통곡
제23장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한 미일 병사들의 현재
제24장 선박포병 제2연대의 끝나지 않은 비극
제25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와 육해군의 대립
제26장 정보 없는 전쟁 지도의 무책임 체제
제27장 레이센 조종사들의 싸움
제28장 제25군 적성국인 억류소의 나날
제29장 뉴기니 전선의 절망과 비극
제30장 참모본부 참모들의 체질과 그 결함
제31장 아직 기록되지 못한 전장 두 곳
제32장 육군대신이 참모총장까지 겸임하는 사태
제33장 사이판 함락과 병사들의 절규
제34장 임팔 작전, 고위급 지휘관과 생존 병사들의 분노
제35장 정보가 경시된 필리핀 결전의 내막
제36장 특공대원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제37장 오키나와 전투의 결전 태세와 그 의미
제38장 본토 결전과 최고전쟁지도회의
제39장 비밀리에 진행된 원자폭탄 개발 계획
제40장 시종무관의 일기가 들려주는 패전 전후
제41장 구소련의 자료가 말하는 ‘사실’의 내용
제42장 홋카이도 점령인가, 시베리아 억류인가
제43장 다이쇼 세대 예비역 장교의 눈에 비친 쇼와 육군
제44장 최후의 육군대신이 남긴 수기
제3부 쇼와 육군이 전후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제45장 패전 시에 지도자는 어떻게 처신했는가
제46장 참모들의 쇼와 육군 재건 움직임
제47장 스가모 형무소의 군사 지도자들
제48장 전우회라는 조직과 쇼와 육군의 체질
제49장 이상한 군인은급 조작
제50장 시베리아 억류자 보상 요구의 단면
제51장 남겨진 ‘전후 보상’ 문제를 주시하며
후기
문고판 후기
참고문헌
취재 대상 명단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P. 136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군사력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그 착각을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메이지 시기의 군인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심리를 낳았다. 결국 군사는 국가의 위신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을 식민지화하는 유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줄곧 중국을 선택했던 셈이다. 접기
P. 478 “마을을 불태운 다음 사살한 사람을 끌어내려고 할 때였습니다. 네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울면서 우리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울면서 곧장 다가오더군요. 장교가 ‘처리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여자아이를 처리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략 60년 전에 일어난 일을 지금도 꿈에서 보곤 한다. (…) 딸이 자식을 데리고 친정에 놀러 왔을 때 도저히 손자를 안을 수 없었다. 염주를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기억이 되살아나면 전차 안에서도 염주를 쥐고 묵도를 하곤 했다.
“나의 유일한 구원은 전우회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곳이 전우회입니다. 한번은 장교가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엘리트입니다. 그에게 그때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이 있었나요?’라고 하더군요. 나는 명령한 자는 잊어도 그것을 실행한 자는 평생 잊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접기
P. 1103~1104 하지만 일련의 전쟁을 치른 일본사회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그 일본 병사와 싸운 중국 병사나 미국 병사 또는 러시아 병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많은 증언을 들어왔다. 어림잡아 1년에 4000명이 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번이라도 말을 나눈 사람까지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과 만나면서 나는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리석은 짓임에도 그런 정책을 추진한 것은 왜인가”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꼬리를 물기도 했다. 병사들은 너나없이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대본영에서 호의호식하며 작전을 가지고 노는 참모들은 그들의 괴로움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전쟁에서 패한 것은 전장 장병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낙차는 전쟁이라는 정책을 선택하는 나라의 기본적인 모순이다. 접기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국제연합군과 공산군의 전투로 나아갔다. 그런데 국제연합군(실질적으로는 미군이 중심이었다)은 한반도와 압록강 근처 중국의 지도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형도 잘 몰랐다. 어떤 작전이 효과적일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전의 밑그림을 그린 이가 바로 이 지역을 잘 알고 있던 대본영의 옛 참모들이었다는 얘기다. 접기
추천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조선일보
- 조선일보 2016년 8월 13일자 '새로나온 책'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6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6년 8월 13일자 '책의 향기'
중앙일보
- 중앙일보 2016년 8월 13일자 '책 속으로'
저자 및 역자소개
호사카 마사야스 (保阪正康)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A급 전범 등 일본 군부의 주요 인사 4000여 명을 독자적으로 취재하고 15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다치바나 다카시, 사노 신이치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저널리스트로 꼽힌다. 일본 근대사, 특히 쇼와사昭和史의 실증적 연구에 뜻을 두고, 각종 사건에 관계된 이들을 취재하면서 역사 속에 묻힌 사건과 인물에 관한 르포르타주를 썼다. 1939년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서 태어나 도시샤대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편집자로 일하다가 33세 때 논픽션 작가로 홀로서기를 시도해 그의 출세작이 된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가 나오기까지 6년간 방송작가, 카피라이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자성自省사관’이란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그의 저작은 일본 사회의 치부를 정면으로 파고들어간다. 거의 해마다 되풀이되는 우익 세력의 군국주의적인 망언이 나올 때면 이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철저히 비판하는 그의 코멘트가 유력 언론에 소개되는 등, 그는 일본 현대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개인 잡지『쇼와사 강좌』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쇼와사 연구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작으로『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지치부노미야』『요시다 시게루라는 역설』『쇼와사의 일곱 가지 수수께끼』『쇼와: 전쟁과 천황과 미시마 유키오』『저 전쟁은 무엇이었는가』『정치가와 회상록』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쇼와 육군> … 총 55종 (모두보기)
정선태 (옮긴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1963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으며, 현재는 국민대학교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 《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 《시작을 위한 에필로그》 등이 있으며, 역서로《쇼와 육군》 《도조 히데키와 제2차 세계대전》 《속국 민주주의론》 《영속패전론》 《일본문학의 근대와 반근대》 《가네코 후미코》 《일본어의 근대》 《창씨개명》 《기타 잇키》(공역) 등이 있다.
최근작 :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백석 번역시 선집>,<1898, 문명의 전환> … 총 4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쇼와 연구의 일인자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연구 결정판
500여 명의 증언과 방대한 자료로 밝히는 전후사 연구의 집대성!
어째서 일본은 전 세계를 전화戰火로 몰아넣었는가?
“쇼와 육군은 결국 허술하게 쌓아올린 목재 더미였습니다.
그 광기에 이제까지 일본의 모든 역사와 제도가 함께 무너졌습니다.”
이 책은 쇼와 천황이 재위하던 시대,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제국 육군을 다루고 있다. 거대한 ‘병리 현상’이라고밖에 달리 분석할 길이 없는 전쟁의 숱한 참상은 모두 ‘쇼와 육군’이라는 몸통을 관통해 벌어진 일이다. 그런 만큼 일본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무슨 까닭에 일본이 이처럼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 책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가 철저히 일본 내부자의 시각에서, 그것도 육군만을 줄기 삼아 글을 쓴 이유다. 우선 건군建軍에서부터 육군의 전사戰史를 다루면서 그 최상위 지도부를 파헤친다.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대전에서 보였던 일본군의 병리적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이어붙여 나간다. 이런 역사가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일본 군부의 A급 전범들과 장교, 일반 병사뿐 아니라 중국과 대만의 군인, 외교관,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계자의 증언과 일기, 기록 등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집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경. 그때를 전후하여 수많은 관계자 인터뷰가 이뤄졌는데, 논픽션 작가답게, 호사카 마사야스는 메이지 말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 전후 쌓여온 시간들, 그리고 1990년경 일본 각지에서 참전 병사들이 남긴 회한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간 격차와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전쟁의 잔재를 하나씩 끄집어내며, 그것이 어떻게 기억으로 퇴화되지 않고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참전한 이들은 쉬 열리지 않는 입을 열었다. 인터뷰 당시 이미 70~80세의 노인이었던 참전인들은 전장에서 저지르고 당했던 일만큼은 또렷이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러한 증언들이 하나씩 모여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
쇼와 육군의 체질이라는 것
청년 장교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시베리아에서 5년간 포로생활, 중국으로 이송돼 전범재판을 받고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된 바 있는 우노 신타로. 전쟁 후 무역회사 회사원이 되어 처자식과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1945년 3월, 사사 신노스케 전 중장 휘하에서 후베이성 마을의 주민 90여 명을 살해하는 데 가담한 전력이 있다. 이들 부대는 또 난장 현 우안옌 부근에서는 부인, 어린이, 노인 등 20명을 잔혹하게 교살했다. 나아가 샹양 성 부근 왕자잉 촌에서는 주민 18명을 손바닥에 철사를 꿰어 줄줄이 묶은 다음 판청의 교회당 옆에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샹양 시에서도 주민 30여 명을 철사로 묶은 다음 강으로 밀어넣었다. 그 가운데 후자오샹 등 5명은 물에서 빠져나왔지만, 저우광짜오 등 20여 명은 전부 익사했다. 더욱이 샹양 시에서는 부하가 부인을 강간하는 것을 방임하고 심지어는 윤간 끝에 죽임에 이르게 했다. 1990년 도쿄에서의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사실을 털어놓은 우노는 당시 자신이 중국에서 저지른 것은 학살이나 만행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행위인 줄로만 알았다고 털어놓는다.
(저자) “일본군은 왜 중국 대륙에서 저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노 신타로) “하나는 일본 육군의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 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뭔지를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쇼와 육군의 지도부에 속한 고위급 군인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종종 ‘대선大善’과 ‘소선小善’으로 표현했다. 1882년 메이지 천황이 군에 하사한 「군인칙유」만 좇는 것은 ‘소선’이며, 천황을 위해서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군사적 기정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대선’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서없는 논리에 감춰져 있는 독선적 주관주의로 지탱되었던 조직이 바로 쇼와 육군이다. 그리하여 부녀자와 노인, 소년, 유아를 반쯤은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수단으로 살해할 만큼 망가졌던 쇼와 육군 지배하의 병사들 중 자신들의 퇴폐적인 경험을 고발하는 이가 많이 나오는 것은 “이 전쟁이 너무나 더러웠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은 대개 메이지 10년대(1877~1886) 중기부터 20년대 후기에 걸쳐 태어났다. 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등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다. 정원이 50명인 육군대학의 졸업생이라는 것만 해도 이미 엘리트임을 인정받은 것인데, 그중 상위 10퍼센트는 군 지도부에 들어가 행정과 작전 계획을 담당했다. 문제는 성적지상주의의 기관들에서 우등생이었던 이들은 실전 체험이 드물었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의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란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즉 근대 일본 부국강병 정책의 충실한 자식이었다. 여기서 태어난 인물들은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지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의 또 다른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 육군이 일본에 초청되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했다. 더욱이 육군유년학교에서는 독일어, 러시아어 등이 중심이 되고 영어 교육은 철저히 경시되었다. 나아가,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현저히 결여하고 있었다. 철학적·윤리적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기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모토 군은 심신이 모두 불가사의할 정도로 유연하고 강인하며 굴신자재屈伸自在할 뿐만 아니라 결코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지극히 소심하면서도 아주 대담하며, 세밀하게 생각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 운운.”
이 글의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라는 표현에 쇼와 초년대 군인의 성격이 응축되어 있다. ‘대의(천황의 뜻)를 내세우면 무슨 짓을 해도 관계없다는 심정과 패턴이야말로 쇼와 육군과 그 후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것은 병사를 무기질無機質의 병기로 육성하는 데 결사적이었다는 것, 보급과 병참 사상을 가볍게 여기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병사들에게 옥쇄玉碎(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충절이라는 명분 아래 죽음을 명령했던 것)를 명하고, 그것에 대한 자기반성도 없이 잇달아 그런 종류의 작전을 명한 것도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장교 중심으로 흘러간 것은 쇼와 육군의 체질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였다. 우노 신타로는 연대본부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의 소장을 겸한 바 있는데, 그는 이곳의 중국인 포로들이 죽어나갈 때 특별히 인간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만약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영광스런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다. 장교에게는 식사도 충분히 제공되었고 게다가 위안시설까지 있었다. 그곳에서 울적함을 풀었다. 반면 일반 병사에게는 조악한 식사에다 위안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토벌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종종 농촌을 습격했다. 장교가 병사들의 강간을 묵인하고 약탈을 눈감아준 것도 그러한 일본군의 ‘장교 주도의 체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군 관료들은 하급 병사를 동원하는 데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오로지 서로를 감싸는 체질만을 드러냈다. 노몬한 사건을 지도하여 2만 명에 가까운 부하를 죽음으로 내몰고 전상자나 전병자로 만든 관동군 참모인 쓰지 마사노부나 주임참모 핫토리 다쿠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요직에 복귀했고, 태평양전쟁 개전 때에는 가장 과격한 개전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때도 과달카날에 과도한 병력을 투입하고 싱가포르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등 그들은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든 책임을 지지 않고 전쟁의 과오를 계속해서 반복해갔다.
도조 히데키, 쇼와 육군 패망의 상징적 존재
쇼와 육군 붕괴의 원인이 된 태평양전쟁은 지도자의 체질이나 전략에 따라 수행되었다. 거기에는 붕괴하는 것이 당연한 조직 체계, 인간사상, 전쟁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태평양전쟁이 벌어진 3년 9개월 중 2년 9개월 동안 수상, 육군상, 참모총장까지 겸하고서 전쟁을 지도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이러한 공통점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었다. 가령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의 법정을 묘사하며 당시 일본 지도부의 무능함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헐 노트」에 관한 일본의 입장을 확인하며 도조 히데키를 신문했다. 「헐 노트」는 1941년 11월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이 작성한, 일본의 제안에 대한 미국의 답변이었다. 사실상 일본이 중국과 인도차이나 등지를 점령하며 벌인 정치 공작을 중단할 것과 삼국동맹의 백지화를 주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아울러 「헐 노트」에는 교섭의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일본 측은 이를 묵인했다. 도리어 승산이 낮더라도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하여 메이지 시대 이래 육군 선배들이 중시해온 ‘의義’를 지켜야 한다는 강경 노선을 택하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헐 노트」에 담긴 기본 방침을 무시하지 않고는 미국과 전쟁을 벌일 명분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취재 중 입수한 ‘도조 일기’를 바탕으로 당시 일본을 움직인 도조 히데키의 생각을 최초로 공개한다. 도조는 “「헐 노트」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게 전부였다. 한마디로, 쇼와 육군은 미국에 대하여 처음부터 ‘객관적인 사실’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관측’에 따라 대처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개전에 관해 쇼와 천황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당시 천황의 측근들은 구실을 만들어 천황의 면책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쇼와 천황 독백록」에 나타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측근들은 도조를 비롯한 쇼와 육군의 지도자에게 전쟁의 책임을 모두 떠넘기려고 생각했던 듯하다. 재미난 것은 도조에 관한 양가적인 평가인데, 그 결과 ‘도조는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지만, 인사 관리나 헌병의 장악 등에서 서툴렀다’와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저자가 취재 과정에서 입수하여 처음 공개하는 ‘도조 일기’ 앞부분에 나타난 자계自戒를 꼽을 수 있다. 자계의 첫 번째 항은 “전쟁의 모든 책임 앞에 설 것. 특히 성상 폐하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데 대해서는 전력을 다하고, 또 다른 각료 및 다른 사람의 책임을 극력 경감하는 데 노력할 것”라고 쓰여 있다. 도조 히데키는 전후 도쿄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진다.
1억 명의 옥쇄
쇼와 육군의 ‘정신주의’에는 오직 천황을 위한 군대가 있었을 뿐으로, 일반 병사 개개인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 중 하나가 바로 전쟁 때 군대의 소모품이 되어버린 병사들의 실태(이는 일반 국민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그런 정책의 배후에 있던 육군의 ‘정신’을 다루는 것이다.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오키나와에서 정치적 선택의 잘못된 지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죽음’으로 내몰린 병사(국민)가 있다. 그 대척점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책임하고 비인도적인 작전을 펼친 군 관료의 실체가 있다. 그 대비되는 각각의 국면을 세밀히 살펴나가다보면 분노와 놀라움, 슬픔에 사로잡히게 된다. 특히 필사적으로 육탄 공격 작전을 펼치며, 가미카제 특공대뿐만 아니라 보병들에게 병기가 되어 스스로 산산이 부서지라고 명령했던 육군 지도부의 명령은 2차 대전 때 일본군 병사들을 거대한 참상 안으로 밀어넣었다.
가령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가장 끔찍하고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곳 중 하나인 과달카날 전투의 상황을 보자. 군사과장 사나다 조이치로는 전쟁 당시의 일들을 일기로 남겼는데, 그 기록을 보면 사나다는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에게 “과달카날의 제17군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라지도록 항전하게 한다는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있다. 이마무라는 “절대 반대”라고 말하고, ‘그런 것이 제일선에 알려지면 즉석에서 전원이 할복하고 말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 내용을 보면 적어도 사나다의 마음속에는 과달카날 참전 병사들을 ‘옥쇄’시킬 방안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이어진다.
미군은 대동아회의 전후부터 일본이 절대 국방권이라고 명명한 요충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3년 타라와에서는 일본군 4800명 가운데 20명을 제외하곤 전원 옥쇄했다. 도조가 참모총장에 취임한 뒤 작전참모에 의한 일본군의 작전은 더욱더 옥쇄형玉碎型으로 바뀌었다. 1944년 7월 5일 사이판 전투에서 제43사단 사령부는 “우리는 옥쇄함으로써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고자 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대본영으로 보내고, 7월 7일 3000명의 생존 병사와 함께 옥쇄했다. 무기와 탄약은 남아 있지 않았고, 돌멩이를 갖고 싸운 병사도 있었다고 한다. 몇몇 병사는 산속에 틀어박혀 1945년 12월까지 게릴라전을 펼쳤다. 사이판 전투에서는 일본 병사 약 4만1000명이 전사했고, 2만5000명의 일본인 주민 가운데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판 섬이 미군에 제압당함으로써 ‘절대국방권’은 무너졌고, 실제로 서태평양은 모두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 후 일본군은 일본 본토로 쫓기는데, 각지에서 사이판에서와 같은 옥쇄전이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를 겹겹이 쌓아올려 본토 공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려는 것이었고, 군 관료들의 책임이 밝혀지는 날을 하루하루 미루는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일본군이 오로지 전쟁 지도라는 길을 일직선으로 걸었기 때문이다.
이오 섬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1250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섬이다. 보급도 끊어지고 장비도 부족했던 일본군은 우세한 물량을 앞세운 미군에 압도되어 2만1000명의 수비대가 고작 2천여 명을 남긴 채 궤멸하고 말았다. 약 한 달간 치러진 혹독한 전투로 인해 이오 섬은 그야말로 ‘옥쇄의 섬’으로서 태평양전쟁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무렵 몸이 약했기 때문에 이오 섬으로 가는 멤버에서 제외되었습니다만, 옥쇄한 동료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생환한 사람들이 이오 섬으로 유골을 모으러 갔는데, 캄캄한 동굴에 유골이 딱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병사는 부대가 전멸하고 난 후 혼자 동굴에 틀어박혀 저항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돌을 쌓아 방어벽을 만든 다음 그 뒤에 숨어 있다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 아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45년 3월 17일 전투의 막바지에는 전원이 옥쇄전법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살아남은 몇몇 병사에게 집합 장소와 시간이 통고되었다. 더 이상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병사는 청산가리가 든 주사를 맞고 죽어갔다. 굶어 죽은 병사 중에는 사망한 미군 병사의 군복을 입고 미군 속에 섞여서 식량을 얻으려 한 이도 있었다. 이오 섬의 전투는 그야말로 ‘지옥도’ 그 자체였다. 모든 부대가 “전원 적진으로 온몸을 던져 돌격을 결행하여 옥쇄”하거나 “총반격에 참가하여 옥쇄”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옥쇄는 물론 지구전을 도모하는 작전을 펼친다는 대본영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였다.
그리하여 이오 섬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좀처럼 당시 상황에 대해 입을 떼려 하지 않는다.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감춰져 있는 생각은 후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것이다.
1945년 8월에는 살아남은 1만여 명이 옥쇄 작전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종전 연락이 왔다. 남아 있는 무기는 기관총 몇 정, 소총 9500자루였고, 탄약은 총 한 자루당 20발 정도, 포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들
일본군이 아시아 전역에서 벌인 전쟁 중의 야만스런 행위들은 아직 그 추산이 집계되기 어려울 만큼 광범위하게 자행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안들이다. 이 책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참상을 고백하고 있는 참전 장교나 사병들은 전쟁 당시에는 거리낌이 없었고, 전후에도 일상으로 돌아와 평범한 삶을 이어가다가, 은퇴 후 노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만행을 털어놓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중일전쟁 때의 자기 경험을 털어놓은 우노 신타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중국 대륙에 40만 규모의 대군대를 보냈다. 이때 파송된 병사 중에는 결혼하여 아내가 있는 자가 많았다. 우노의 말에 따르면, 아내가 있는 자들은 독신인 병사보다 성적 만행에 적극적이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이윽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대륙의 정예 부대는 남방으로 파송되었고, 병사들의 질은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이와 함께 만행에 익숙해졌고 너나없이 즐기는 분위기였다.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참병 중에는 살인의 프로, 도둑질의 프로, 방화의 프로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났고, 그것을 제지하는 군의 규율은 이미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들 만행은 평상시라면 광기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군의관이 다음 전임지가 결정되었다면서 제39사단 제232연대 연대본부의 포로수용소장 겸 정보장교인 우노에게 온다. “오늘밤 한잔할까요?”라며 유혹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노는 알고 있다. 해골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이튿날 항일적 태도를 보인다는 이유로 포로 한 명이 참살된다. 머리를 자른다. 그것을 햇빛에 말린다. 중국인 포로에게 안면의 살을 벗겨내라고 한다. 물론 포로는 울면서 이 일을 한다. 그런 다음 며칠 동안 말렸다가 다시 포로에게 두골을 닦아 윤을 내라고 한다. 그 해골을 상자에 넣어 선물이라며 군의관의 짐 속에 넣는다. 이 해골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 빛이 난다. 인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헤이세이 시대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노는 당시 군의관이었던 사람과 45년 만에 만났다. “그것은 일본에 가지고 돌아와 어떻게 했습니까”라고 묻자, 그 군의관(이때는 개업의)은 “진료실에 진열되어 있지요”라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그런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서도 45년 동안 의료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니, 우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책에 던지는 몇 가지 질문
이 책은 철저히 일본 제국 육군이 저지른 오류를 밝히기 위해 집필된 책이기 때문에 일본 내 우익 세력들로부터는 ‘자학사관’이라는 딱지가 붙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역사관을 ‘자성自省사관’이라 하며, 일본이 잘못된 역사를 직시해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서 드러내는 전국전우회연합회 소속 참전 병사들의 증언은 특히 참전인들의 고통도 묻어 있지만 그들의 자성이 묻어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들은 지금도 전장에서 사망한 동료 군인들의 돌아오지 못한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유골수집단을 꾸려 필리핀 등지로 떠나곤 한다. 만주사변 이후 패전까지 일본에서 전화로 사망한 사람은 5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일본 국민 수 대비 6퍼센트가 넘는 수치다. 저자는 지역별 전사자 수, 부대별 생환자 수를 분석하면서 일본이 자국의 국민과 병사들을 끝까지 챙기지 않았음을 고발한다. 그리고 이후 치러진 전범 재판 과정을 공개하면서 전쟁을 망쳐놓은 고위급 군인들이 책임을 피하려 한 눈꼴사나운 언동을 그려간다. 게다가 패전 직후에는 옛 대본영 참모들이 모여 쇼와 육군을 재건할 움직임마저 보이기도 했다. 쇼와 육군이 소멸한 뒤, 그것을 지탱한 의식이나 행동의 핵심도 과연 진정으로 극복했는가? 호사카 마사야스는 『쇼와 육군』이라는 전사戰史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본영 참모의 자화자찬에 가까운 전쟁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은 병사들이 어렵사리 들려주는 괴로움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전사를 다시 쓸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나에게 부여된 역할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듣고 쓰기’가 없었다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교훈이다. 그러한 교훈을 얻고서 나는 정치적·사상적 측면에서 쇼와 전기 일련의 전쟁을 분석하는 것이 잘못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그러한 시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밝혀두고 싶다.
이 책은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좀 다른 대안을 내놓고자 한다. 다만 그러한 시각은 여전히 피해 당사국이나 피해 여성들의 입장과 일치하진 않는다. 이 현안이 단순히 현세대에서 다음 세대에게 빚지지 않기 위해 쉽게 화해하기 힘든 복합적인 면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접기
구매자 (6)
전체 (10)
공감순

이 책을 읽고 별 다섯개를 하지 않으면 저자에 대한 결례다. 내가 그 시대, 그 장소에 있었다면 나도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내자리는 버마 정글 어딘가..태평양 이오섬 어느 동굴의 백골로 세상과 이별했을것이다..그자리에 없었던 내가 얼마나 행운인지..간발의 차로 행운을 쥔나는 이 자리에서 안
군자란 2017-02-14 공감 (13) 댓글 (0)
Thanks to
공감
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데 한국 근현대사와 쇼와육군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알게 됐다.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필독서다.
파블로네루다 2016-09-27 공감 (8) 댓글 (0)
Thanks to
공감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왜 쇼와육군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하는 이유를 느끼게 해준다.
꿈꾸는사나이 2016-09-16 공감 (8) 댓글 (0)
Thanks to
공감
책은 좋다. 하지만 오탈자가 너무 많다. 분량이 분량이니 이해는 하지만 조금만 더 신경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주목 2021-02-14 공감 (3) 댓글 (0)
Thanks to
공감
愛憎의 시각으로 책을 읽다
쌍화탕 2018-08-05 공감 (2) 댓글 (0)
Thanks to
공감
더보기
마이리뷰
구매자 (4)
전체 (8)
리뷰쓰기
공감순

일본육군의 실체
1000페이지가 넘고 하드카피로 되어 있어 출,퇴근시 읽기가 불편한 이책을 고른 이유가 있다.
현재 한국군의 뿌리가 여기(쇼와육군)에 있기 때문이다.내 생각에 현재의 한국군의 80%는 일본육군의 모습이고,20%가 미군의 모습을 짬뽕해 놓았다 생각한다.나역시 높은분들이 그렇게나 신성(?)하다는 국방의 의무를 육군만기전역으로 다했고,다음달이면 최전방으로 입대하는 아들이 있기에 더더욱 현재 한국군의 원형이 된 "쇼와육군"이 관심을 끌었다.
한국현대사를 읽다보면 제주4,3항쟁,여순반란사건,지리산토벌,한국전쟁시 벌어졌던 무고한 양민학살등을 보며,어찌 자국군대가 자국국민에게 "빨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을 당연시 할수있단말인가?라고 기가찬 일이 있었다.심지어 여순반란사건때 백두산호랑이라 불린 김종원(대령)이란 놈은 일본도를 차고 포로들의 목을 치는걸 자랑삼아 했던 놈이고 군에서도 높이 추앙받던 놈이다.이놈은 만주 관동군에서 공비토벌(상당수 독립운동세력)이란 이름으로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 학살을 당연시 여겼던 일본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것뿐이다.이렇게 일본군의 하급장교와 부사관들이 해방뒤 남한에서 육군의 중추세력이 되었기에 그동안 한국군의 고질적인 병폐가 병영문화에 그대로 남았던 것이다.
일본육군은 아시아에서 근대화를 가장 먼저 이룬후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군사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후 서양세력마저 눌렀다는 자만심으로 거칠것이 없어졌다.엘리트위주의 군사교육으로 군사병기로만 키워져 일반상식이 결여된 군인들이 권력을 잡아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중국으로 동남아시아로 미국진주만으로 폭주해 나간것이다.
병사들을 하나의 전장의 소모품으로 여기는 장교엘리트주의,병참과 보급을 무시하고 정신력만을 강요하는 정신력 우선주의,현장의 의견을 제대로 참고하지 않고 대본영 책상머리에 앉아 전장의 구렁텅이로 수많은 젊음을 몰아넣은 탁상공론주의.전과를 부풀리고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비밀주의..,"국뻥부"라 불리는 현재 한국군의 모습과 대부분 일치한다.
어렸을적(박정희시대에 초등학교 다님) "육탄십용사"니"특공대"니 하면 엄청 용감한 군인의 모습으로 알았다.이게 다 생명을 경시한 일본군의 습속에서 나온것을.무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말도 안돼는 짓을 강요한것다.탱크에 수류탄을 들고 뛰어든다든지."옥쇄"라는 명목으로 적군을 향해 무조건 뛰어나가는 자살공격.고지를 탈환한다고 몸에 폭탄을 두르고 뛰어드는것이 당연하고 일상화된 군대는 정상이 아닌거다.적에게 "항복을 하느니 자살하라"는것도 말도 안돼는 명령이다.그리고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하나의 소모품이 된것을..,.조작된 신화인 "천황"과 정치군인들의 전쟁놀음에 바쳐진 하나의 전쟁도구인것을..,
"군사쿠테타""하나회"와 같은 군내파벌들도 일본육군에서 있던 나쁜 병폐들이다.그것역시 한국군은 그대로 받아들였고 일본육군의 쿠테타를 모델로 군사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장기독재군사병영국가를 건설했었고,그 향수를 못잊어하던 아스팔트보수는 그딸까지도 대통령으로 추대했으나 "머저리"에 가까운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멍청이였다는것이 증명되고 있다.
일제에서 해방된지 70년이 지나도록 이사회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들이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남한사회는 특히 "북한"이라는 가상적국을 빌미로 기생해온 한국군은 일본군대의 적폐와 병폐를 거울삼아 민주사회에 걸맞는 군대로 개혁되어야 한다.
이책의 저자는 전우회를 통해 2차세계대전당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을 인터뷰하고 진실을 알리기 우해 또한 후세들이 이런 참상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하기위해 기록을 남겼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고 준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 접기
유토피아 2017-02-11 공감(8) 댓글(0)
Thanks to
공감
[마이리뷰] 쇼와 육군
구 황군시절 일본 육군의 모순점이 일본인 저자의 글로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저런 군대로 잘도 전쟁을 벌여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국가에서 문민통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할 수 있었다. 세삼 제복 군인들의 최종 커리어가 국방부 장관인 우리 나라의 현실이 우려되기도 하였다.
장님버드나무 2017-01-22 공감(8) 댓글(0)
Thanks to
공감
우에하라 료지
게이오대 경제학부 학생. 1943. 12월 입영, 1945. 5. 11. 육군특별공격대원으로서 오키나와 가데나만에서 미국 기동부대에 돌진. 전사 22세
출격하기 전 5. 10. 저녁 무렵 소감 출격 전야에 쓰다
나 역시 이러한 작전을 행하는 국가가 전쟁에서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조직이 오래 지속될 리가 없다.....
내일은 자유주의자 한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의 뒷모습은 쓸쓸하겠지만 마음은 만족감으로 가득합니다.
1945년 4월 우에하라는 제56신부대의특공조종사가 되었다. 그 사이에 어떤사연이 있었는지 유족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제11연성비행대에 속한 조종사들이 강당에 모였을때 "특공작전 지원자는 일보 앞으로"라는 지휘관의 말을 들었던 듯하다. 겉으로는 지원에 의해 특공작전 조종사를 뽑는모양새였지만, 실제로 지원하지 않는 자는 비겁한 놈으로 취급받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우에하라는 그 후 어떤친구에게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울음을 삼키면서" 앞으로 나섰노라고 몰래 털어 놓았다..제56신부대는 11명의 학도병 조종사로 편성되었다. 주로 와세다대와 게이오대 그리고 동경대에 다니던 학도병들이었다고 한다.
우에하라가 남긴 노트에서 연습기를 사용하여 어느정도의 훈련을 했는지 누계
95연습기 42.09시간, 99공중연습기 1.35시간, 2식비행기 25.59시간, 99군사연습기30시간
3식연습기 6.19시간....
우에하라가 탄 특공기(3식 전투기)로는 고작 6시간 남짓 밖에 훈련을 받지 않았다...
연습은 오로지 이륙과 착륙뿐....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하는 고민은 행복한 고민이다. 그럴수 있는 능력이 되니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까?
국가의 폭력앞에 누가 감히 아니라고 나설수 있을지....나 역시 30년전 해병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두번다시 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내가 너무 비겁한 걸까?
- 접기
군자란 2017-02-15 공감(6) 댓글(0)
Thanks to
공감
쇼와 육군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일본은 열강의 대열에 합류했다. 동시에 일본 내에서 청나라와 조선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여론은 일본군을 신뢰하게 되었다. 조선을 지원한다는 애초의 목적은 조선에서 일본의 권익을 취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아울러 군사상 다양한 모순도 전승의 그늘에서 검증되지 않은 채 봉합되었다. (-33-)
"공격 정신은 충군 애국의 지성과 헌신순국의 대절에서 발현하는 정화다. 무기를 닦는 데 온 힘을 다하고, 교련을 통해 빛을 발하며, 전투에서 승리를 구가한다. 승패는 반드시 병력의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잘 훈련되어 있고 또 공격 정신으로 다져진 군대는 늘 적은 수로 많은 적을 격파할 수 있다." (-49-)
1935년에 접어들면서 두 파벌의 투쟁은 점차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통제파는 육군 상충부에 많았고, 불법적인 활동을 철저하게 배제하는 입장에 섰다. 그리고 전쟁에 대비해 국가 총동원 태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관료나 재계 사람들과도 연대하고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대소련전보다 오히려 중국 제압에 비중을 두는 실리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이와 달리 황도파는 청년 장교가 많았고, 대부분 20대에서 30대로 지금처럼 부패한 일본은 천황의 뜻에 따르는 국가가 아니며,이상 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불법적인 활동을 불사한다고 주장했다. 이 그룹의 지도자는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 같은 장군들이었는데,이 두 사람은 일이 있을 때마다 청년 장교들을 부추겼고, 그들의 순수무사 정신을 칭찬하며 부채질했다. 황도파는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 대해 격심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다. (-145-)
내 물음에 대한 우노의 답변은 명료했다.
"하나는 일본 육군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무엇인지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219-)
"1941년 7월 28일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진주한 일본군이 미국으로부터 저처럼 즉각적으로 보복을 당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육군 내부에서 이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일본에 대해 석유 수출을 중단하거나 재미 일본 자산을 동결하는 사태는 루스벨트가 전쟁을 하기로 결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던 것입니다. 육군만이 아니라 해군 또한 무슨 일이 있어도 미국이 전쟁을 각오하지는 않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 점에 관하여 우리는 예측을 잘못했던 셈입니다. 그 책임은 막중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 자신도 국책을 담당하는 입장에 있었던 만큼 그 책임을 면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337-)
"일본은 그 무렵 미국을 알려고 하지 않앗습니다. 육군에서 특히 그런 경향이 강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일본은 미국인들에게 일본을 알리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뉴욕에 일본 라이브러리와 같은 코너를 만들었음에도 몇 명의 미국인이 다녀갔는지를 기록하는 일 밖에 하기 않았지요. 나는 진주만 공격 50주년이니 뭐니 하면서 떠들어내는 작금의 정세를 보노라면 이상하게도 참을 수가 없습니다. 왜 일본은 저런 바보 같은 싸움을 했는지, 그것을 다시 물어야만 합니다." (-420-)
이때 병사들은 과달카날에서 어떤 나날을 보내고 있었을까?
"우리 진지에서 앞쪽으로 3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미군 진지가 있었습니다. 미군 병사는 우리가 이쪽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별로 두려워하지 않고 진지 위에 올라와 걸어다녔습니다. 우리는 탄약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쏘면 맞힐 자신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쏘지 않았지요. 만약 이 병사를 쓰러뜨리면 몇 배의 폭격이 퍼부어져 우리는 전원 사망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끔 미군 병사와 정국 속에서 총격을 주고받게 되면 실로 이상한 일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우리가 이동한 지점에 반드시 총탄이 날아오는 겁니다.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었어요."
오토모가 그 이유를 상세히 알게 된 것은 50년이나 지난 1991년이었다. (-507-)
태평양전쟁의 개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가장 많이 부족했던 것은 후방사상이었다. 후방사상이란 병참, 보급에 관한 사고방식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는데, 병력무기,탄약, 식량, 의약품, 의복 등을 전선의 병사에게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과달카날이나 동부 뉴기니에서 벌어진 전투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일본군에는 이런 사상이 전혀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638-)
1944년 5월 2일, 공중에서 육해군이 한자리에 모인 통수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는 천황도 출석했다. 이 회의에서 육해군 통수부 대표가 현재의 전황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에 대해 천황에게 보고했다. 이 자리에서도 양 통수부는 마리아나를 공략하는 데에는 큰 희생이 따를 것이고 그곳을 확보하는 일도 쉽지는 않을 터이므로 미군도 경솔하게 손을 뻗치지는 않으리라는 경해에 뜻을 함께했다. 특히 참모차장 우시로쿠 준은 설령 마리아나 제도가 공격을 당한다 해도 제43사단을 파견하여 "적의 공략 기도를 분쇄할 수 있다" 며 자신감을 피력했다. (-704-)
오시로는 자신의 책 『오키나와 전투』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부전선에서는 전투원과 일반 주민이 같은 동굴에 뒤섞여 있어린 아이들이 울고 부상자는 신음한다. 그러자 적에게 진지가 발각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울어대는 아이를 살해하거나 부상자를 독약으로 처치하는 잔혹한 광경이 곳곳에서 펼쳐졌다. 패잔 심리까지 발동하여 약육강식의 극한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전장에서는 어린아이, 노인,부녀자, 부상자 등 약자부터 순서대로 희생되었다. 이처럼 인간성이 무너져 버린 현상이 전장의 진짜 비극을 초래했던 것이다." (-798-)
1945년 8월 15일 정오, 쇼와 천황은 옥음 방송을 통해 선언을 수락한다는 뜻을 밝혔다. 국제법상의 문서에 조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 영국, 중국이 함께 발표한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인다는 의사 표시였다. 신징의 관동군총사령부에서는 참모들이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옥음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대본영으로부터 정전 명령이 있기까지는 "작전의 큰 틀을 바꿔서는 안 된다"는 태도를 취했다. 15일 오후 11시에 정전 명령이 떨어졌고, 관동군총사령관 야마다 오토조와 총참모장 하타 히코사부로 등 최고 간부는 이것을 받아들여 태도를 변경했다. (-887-)
그리고 하나 덧붙이자면, 도쿄전범재판에서 재판을 받은 것은 일본의 군벌이었는데 반론에 나선 28명의 A급 전범은 명확히 세 가지 유혀으로 나눌 수 있다. 태평양 전쟁은 극가의 선택으로 옳았다고 주장하는 피고가 첫번째 유형이다. 그들은 국가에 대한 변호와 자신에 대한 변호를 동일시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은 모두 국가의 논리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유형에 속한 사람들은 국가의 정책과 자신의 신념 또는 정치 행동 사이의 차이를 강조하며,자신의 역할에 한정해서만 반론을 펼쳤다. 이들은 국가를 변호하는 입장보다 개인을 변호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 유형은 재판 자체에 전혀 관심 보이지 않고, 그 흐름에 몸을 맡긴 채 담담하게 처신한 피고들이다. (-1001-)
근대 일본의 군사 조직이 왜 독일 쪽으로 기울었는가?이와 관련하여 쇼와 초기 참모본부에 근무했던 어느 장교는 "독일에 가면 자동적으로 독일 육군은 여성을 메이드(하녀)라는 명목으로 삼아 동거하게 한다. 그래서 독일에 파견된 군인은 친독파가 된다는 이야기가 메이지 시기부터 은밀하게 전해져온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독일 같은 시스템을 요구한 일본군 군인이 있었다고 하는데,이에 대해 미국과 영국의 군인으로부터 "우리나라에는 여성이 얼마든지 있다. 당신도 연애를 하면 되자 않겠는가"라는 야멸찬 소리를 들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암암리에 널리 알려져 있다. (1082-)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를 읽게 되면, 1900년초로 시간 여행을 떠나 제1차 세게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의 전쟁 한복판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우리가 뉴스와 미디어를 통해,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 정보와 전황에 대해서 실시간으로 듣고 있는 것처럼, 이 한 권의 책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대동아 공영권을 손에 쥐고자 하였던 일본의 야욕으 실체를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왜 저자는 쇼와 육군이라고 말하는가, 그건 제2차 세계대전이 일본이라는 국가가 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메이지 시대에 태어난 군인이,1931년 9월 18일 , 만주사변(滿洲事變)으로, 만주를 전쟁 거점으로 바꾼 뒤, 동아시아 전역을 상대로 식민지화하기 위한 출발은, 1894년 청일전쟁 승리, 1904년 러일전쟁, 1910년 조선 침략으로 이어졌으며, 1941년 미국을 상대로 한 태평양 전쟁을 벌일 수 있었다. 일본 스스로 세계제 1위의 열강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벌어진 비극이다. 그건 일본이라는 국가가 아닌, 도조 히데키라는 군인이, 일본을 군국주의화하였고, 군벌이 지배하는 일본, 정치군인이 일본의 정치, 경제,문화,전쟁을 주도하게 된다.관동군을 중심으로,전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였기에,군벌 일본 정치에 의한 전쟁, 쇼와육군이라 부르고 있다. 즉 군인이 전쟁을 주도하고, 전황을 이해하고, 군인이 전쟁의 흐름을 판단하기 전쟁전략을 만들기 때문이다.
즉 군인이 나라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를 태평양전쟁으로 파악하고자 , 1900년 초에 태어나 전쟁을 몸으로 경험한 1990년대 후반에 사망한 이들을 대상으로 500 명의 일본인을 구술하고, 증언록을 확보하면서, 만들어진 책이 『쇼와 육군』의 본질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일본 사회를 이해하고, 한국 현대사회를 병행하여 이해할 수 있다. 한국의 경제발전을 이룩한 박정희가 일본군 관동군 장교 출신이며,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하나회가 한국을 지배할 수 있었던 이유도 이 책에도 도움을 얻을 수 있다. 백선엽도 마찬가지다. 즉 한국 사회도 쇼와육군의 DNA를 물려받은 사회이며, 한국의 군대 운영방식, 병참기지 뿐만 아니라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대본영과, 참모본부의 실체, 내무상 도조 히데키가 도쿄 전범재판에서 , 사형당한 것까지, 그리고 , 일본이 임팔 작전에서 참패하고, 전황이 일본 주도에서, 미국 주도로 바뀌게 된 이유, 일본이 점령했던 사이판을 빼앗김으로 인해 일본이 패망할 수 밖에 없는 빌미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가사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게 된 이유를 역사적인 증언에 의해 파악할 수 있다. 즉 메이지 시대(1867년 2월 13일부터 1912년 7월 30일까지) 에 태어난 일본인이 전쟁 지휘자가 되었고, 다이쇼 시대( 1912년 7월 30일~ 1926년 12월 25일까지)에 태어난 병사들이 일으킨 전쟁이 바로 우리가 역사적으로 잔혹함과 가혹한 전쟁으로 기억되는 파쇼 일본이 만든 태평양 전쟁이며,미국의 원자폭탄으로 전재을 종식할 수 없었다면, 일본은 영국, 소련, 독일,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미국에 대해 이해하지 않은 채, 진주만 습격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미국 스스로 일본을 상대로 전쟁을 할거라고 예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일본는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으로 전후 처리가 되었고, 28명의 A급 전범이 처형되었고, 미국이 세계 최강의 강대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 접기
깐도리 2023-02-26 공감(2) 댓글(0)
Thanks to
공감
쇼와 육군
제2차 세계대전의 진행과 결과에 대한 역사에 더하여, 이른바 태평양전쟁사에 있어서 그 주된 역활로서 주목받는 것이 있다고 한다면? 분명 그것은 (일본제국에 있어서도) 해군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육중한 군함과 항모가 가져다주는 존재감에 더하여, 무엇보다 전쟁의 흐름을 좌우한 중요한 전투의 모습 등을 생각해보아도 역시나 그 주인공은 바다를 주름잡았던 군대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저자는 굳이 태평양전쟁중의 육군의 모습에 주목했고, 특히 전후까지 생존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 '전장을 직접 마주한' 생생한 기억을 통해 이미 세상에 알려진 일본군의 잔혹함 또는 비이성적인 모습 등이 과연 어떠한 계기로 발현되었는가에 대한 나름의 진단을 내리고 있다. 결국 저자는 전쟁을 통해 발견 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비참한 모습을 통하여 스스로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싶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흐름 가운데서, 육군이 보여주는 모습은 말 그대로 '육탄'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르게 된다. 그야말로 당시 일본제국군은 근현대의 가치관 아래 정립된 가장 기본적인 군사적 지원 또는 가치관의 세례를 받지 못한 존재였다. 물론 군인으로서 승리를 추구하는 자세와 헌신은 나름 미덕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결과적으로 일본제국과 그 군대가 과거의 승리의 방식을 고수하고 또 보편화하여 끝끝내 병사 하나하나가 탄환처럼 소모되는 현상을 개선하지 못하며 종전을 맞이했다는 점이다.
왜 일본에서는 구체적인 검증도 하지 않고 저 전쟁을 부정해버린 것일까? (...) 설령 역사적 보편성이라는 게 없다 하더라도, 그 어떤 역사적 사명감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온 나라가 들고일어나 싸웠던 것이리라. 여기에 포함된 오류를 정확하게 역사에 새겨넣어 둘 필요가 있다.
434쪽 / 진주만 공격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물론 그러한 현상을 진단하며, 제기된 주장은 셀 수 없이 다양하다. 아니... 애초부터 국가 스스로가 부족한 자원과 기술의 발전을 꾀하기 위하여 외교적 접근과 상호 무역이라는 선택지를 떠나, 전쟁을 통한 식민지의 확대, 또는 경제적 이익을 위한 전략.전술적인 군사적 행동을 일으켰다는 것 자체가 현대적 감각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앞서 언급한 비이성의 후유증은 전쟁의 진행과정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예를 들어 일본군의 '반자이 공격'과 '카미카제' 등은 단순히 당시 일본군의 절박한 상황과 희생정신의 발현이 아니라, 단순히 전쟁에 필요한 물자와 수송력을 만족스럽게 제공해주지 못한 수뇌부가 그 책임을 수 많은 병사들에게 돌려 희생시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1944년 가을 이후 참모본부의 대응을 보면 (...)병사가 '인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따위는 고려되지 않았다(...) 이 말을 듣고서야 참모본부의 내실에 관한 기본적인 문헌조차 찾아볼 수 없는 이유가 납득되었고, 병사들이 뭘 먹고 살았는지에 대한 변변한 보고서 하나 남아 있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느껴졌다.
658~660 / 쇼와 육군의 흥망
그렇기에 냉정하게 판단해보면 일본제국의 패전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니... 역사적으로 일본제국은 패전을 통하여 연합국의 지배를 받았고, 그 결과 자의와 타의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전후처리'의 과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과정 속에서, 일본이 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온전히 짊어졌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면, 그 대답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때 일본 국내의 문제점은 어떠한 것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전쟁을 겪으면서 생존한 수 많은 병사들이 남긴 전쟁에 대한 후회와 반성의 기록들은 어째서 '미화'의 단어 속에서 외면받고 변질되는 것인가?
쇼와 육군이 남긴 많은 잘못을 한시라도 빨리 청산하는 것은 (...) 그것은 정치 자세나 사상의 건전한 발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역사적 도의의 도달점이기도 하다.
1005쪽 / 남겨진 '전후 보상' 문제를 주시하며
이에 저자가 주목한 것은 단순히 국가와 군대의 폭주만이 아니다. 그에 더하여 전쟁 이후 '전후 처리'의 과정 있어서도 군인이 끝끝내 (개인적인) 용기와 희생의 보답을 받지 못한 것이 그 무엇보다 나라에 큰 후유증을 남기지 않았나 한다. 실제로 오늘날 수 많은 논란과 갈등의 원인은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더더욱 그 문제의 이면에는 군인이였던 자들 스스로가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입장과 그 오랜 기억이 점차 잊혀지거나 미화되어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기억을 바탕으로 생존자들의 목소리와 그 모임(단체)의 성격이 변질되는 것은 물론, 더 나아가 또 이를 국가의 빚이라 주장하여 '정치세력'으로서의 입지를 다진 결과는... 그야말로 오늘날 우경화 속에서 비추어지는 일본의 모습 그대로다.
때문에 저자가 주장하는 진정한 의미의 청산, 그리고 전후의 시대를 위해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과거 쇼와시대의 제국군의 모습 그대로를 들여다보고, 또 이를 비판하기 위한 (올바른)현대적 가치를 내면에 세울 필요가 있다. 이에 단순히 일본제국군의 무능이 그저 '계란으로 바위를 친 어리석음'이라 생각된다면... 한번 그 인식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이 책을 접해보기를 바란다.
이에 나는 이 내용을 통하여 우경화 속의 그림자... 그야말로 전쟁의 미화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전 이후 세대들이 각각 어떠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가에 대한 나름의 이해를 할 수 있는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이는 전쟁의 기억과 참상을 이해하는 잣대가 서로 다름으로서, 생겨나는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 군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이를 오롯이 마주하지 않았던 일본제국과 그 속의 군인들 마저 어떤 의미에서 (서로) 진정한 화해?를 하지 못한 탓이 크다.
- 접기
루츠 2022-03-20 공감(2) 댓글(0)
Thanks to
공감
쇼와 육군 / 호사카 마사야스
제1부 쇼와 육군의 전사─건군에서 다이쇼 말기까지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중 하나는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그리고 육군대학교와 같은 육군의 교육기관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성적 지상주의가 팽배한 기관에서 기대에 상응하는 성적을 거두었지만, 실전 경험이 적다는 약점도 지니고 있었다. 이 세대는 1904년(메이지 37)과 1905년에 벌어진 러일전쟁 당시에 육군사관학교 생도였거나 아직 육균유년학교 생도에 지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 최초로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과 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라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다. 결국 근대 일본의 부국강병책에 충실한 지식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가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일본 육군내부를 지배하고 있던 '조슈벌長州閥'이 그들의 힘에 의해 타파되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15-6)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원래 일본 육군은 프랑스군을 모방하여 건군되었다. 그런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에서 프랑스군이 패퇴하자 이후 독일군을 따랐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군을 일본에 초청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그랬기 때문에 친영미 감정을 가진 자가 몹시 적었고 일반 중학교 출신은 줄곧 요직에서 배제되었다. 또 하나 덧붙이자면,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현저하게 결여돼 있었다. 인간을 철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 끝까지 보병을 중시하는 육탄 공격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 병사를 '무기질의 병기'로 육성하려 했다는 것, 보급과 병참에 대한 중요성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 등에 잘 나타나 있다."(16)
"1882년 1월 4일, 메이지 천황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군인훈계」를 간결하게 명문화한, 약 2700자에 이르는 「군인칙유」를 하사한다." "그리고 이 「군인칙유」는 메이지, 다이쇼, 쇼와를 관통하는 일본 육군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군인칙유」에서 〈군인은 충절을 다하는 것이 본분〉이라는 표현은 천황의 군대라는 점을 철저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의도이다. 반면 〈세론에 흔들리거나 정치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무렵의 반정부적 운동(예를 들면 자유민권운동과 같은 정치활동)에 장교가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었다. 군의 기강을 공고히 세우면서 그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말이기도 했다. 이처럼 본래는 정치적 중립을 의미하는 문구인데, 쇼와 초년대 국가 개조 운동을 추진한 청년 장교들 사이에서는 정치나 세론이 어떠한 형태로든 육군 내부의 움직임에 간섭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자가 많았다."(22-4)
"그 결과 육군이 일본제국 안에서 특별한 지위에 있고, 누구보다 우월한 사명을 천황에게서 부여받았다는 오만한 착각을 낳았다.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이 착각 속에서 국가 그 자체를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더해 1875년 3월부터 약 3년 동안 공사관 소속 무관으로 독일에 주재했던 가쓰라 다로 소좌는 독일군을 예로 들며 육군성 내 부국 중 하나인 참모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야마가타에게 제안했다. 여기에는 군정軍政과 별도로 군사 작전이나 군사 행동에 관해 특별한 권한을 가진 조직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야마가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878년 12월 참모본부를 독립시켰다. 1893년 5월에는 해군의 군령부가 독립했는데, 참모본부와 군령부 부장은 천황의 대권을 대리하는 책임자라는 의미를 지녔다. 군인이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넘어, 정신적 기반뿐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천황에 직결되는 특별한 기관이라는 우월의식이 이 무렵에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24-5)
"근대 일본의 군사 조직이 처음으로 국외에서 전투를 벌인 것은 1894~1895년에 걸친 청일전쟁이며, 이때 전쟁을 지도한 것이 대본영大本營이었다. 대본영은 1893년 5월 공포된 전시 대본영 조례에 기초하여 설치된 조직이다. 쇼와 육군도 이 조례를 그대로 이어받았는데, 실제로 전시 태세에 돌입했을 때 육해군이 작전 측면에서 통일된 방침을 갖고 행동한다는 목적에 따라 생겨났다. 물론 천황의 대권을 위임받은 육군의 참모본부와 해군의 군령부가 각각 대본영 육군부와 대본영 해군부로 일체화하여 천황에게 군사 작전과 행동의 내실을 알린다는 의미도 있었다." "또한 대본영에 문관은 참가할 수 없게 했다는 점도 문제였다. 결국 전쟁 지도에는 군인만이 관여하고 문관(국무대신 등)은 군사에 관해 일절 알아서는 안 된다는 제약이 따랐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전쟁을 순전히 군사 행동만으로 파악하여 정치적인 배려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29-30)
"1907년 4월에 작성된 「제국 국방 방침」의 주안점은 우선 〈제국의 국방은 공세를 본령으로 한다〉는 데 있었고, 줄곧 공세 계획을 골자로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런 다음 〈장래의 적으로 상정해야 할 나라는 러시아를 제일로 하고 미국·독일·프랑스가 그 뒤를 잇는다〉고 명시했다. 〈국방에 요구되는 제국군 병비의 표준은 용병에서 가장 중시해야 할 러시아와 미국의 압력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정도로 한다〉라고 했듯이, 러시아와 미국에 공세를 취할 수 있는 수준의 군비를 갖추는 것을 국시로 삼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방 방침에 따라 「제국군 용병 방침」 제1항에는 〈해군은 적에 대하여 힘써 기선을 제압하고 그 해상 세력을 섬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육군은 적보다 앞서 필요한 만큼의 병력을 속히 한 지방에 집합시킴으로써 선제공격의 이점을 차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작전을 펼친다〉고 적혀 있다. 모두 선제공격에 중점을 둔 작전을 고려한다는 게 특징이었다."(47)
"다이쇼 시대에 들어서 육군이 지나치게 많은 군사비를 요구해오자, 국가 재정을 우려한 정부는 조금씩 반격하기 시작했다." "1927년 6월에 열린 의회에서 정당 측은 집요하게 '군부대신현역무관제'에 반대했다. 야마모토 내각은 이 요구를 받아들여, 대신과 차관(당시는 총무장관)의 임용 자격이 적힌 비고란에 〈대신 및 총무장관에 임용되는 자는 현역 무관으로 한다〉고 쓰여 있던 문구를 삭제했다. 이리하여 예비역도 육해군 대신을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육군상 구스노세 유키히코는 자신의 권한을 점차 참모본부로 넘기는 방법으로 그 효과를 무력화했고, 이를 통해 '통수권 독립'이라는 명분을 지키면서 정치 쪽에서의 개입을 막을 수 있었다." "쇼와 육군이 고압적인 자세로 '통수권 독립'을 외치게 된 것은 이러한 경위에서 비롯됐다. 1936년의 2·26 사건 때 '군부대신현역무관제'가 부활하는데, 참모총장에게 권한을 넘긴 사실만은 그대로 남아 쇼와 10년대 참모본부에서는 이를 근거로 횡포를 부리게 되었다."(51-3)
"일본의 국가 재정이 두드러지게 피폐해진 원인은 물론 군사비 팽창에 있었다. 1919년에서 1921년까지 내리 3년 동안 국가 예산의 40~50퍼센트를 군사비로 할애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그리고 시베리아 출병은 당연하게도 재정 압박의 요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증유의 호황을 누렸지만, 전쟁이 끝난 후 부풀어 올랐던 일본 경제는 순식간에 쪼그라들었고 그동안 쌓아놓았던 자금도 금세 써버리고 말았다. 1921년 11월 하라 다카시 수상이 암살되고, 이어서 다카하시 고레키요 내각이 탄생했다. 다카하시 수상은 긴축 재정을 내걸었다. 그런데 1923년 9월 1일 발생한 관동대진재로 다시 한번 크게 타격을 입었다. 군사비 팽창에 제동을 걸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빠진 것이다." "이러한 외압에 대해 육군 내부에서 대응한 사람이 육군상 우가키 가즈시게다. 그래서 이 시기의 삭감을 우가키 군축이라 부른다."(62-3)
"감축 대상이 된 이들은 우카기를 원망했다. 그들만이 아니라 군 내부의 장교들도 우가키에게 불만을 품었다. 우가키가 육군의 입장을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무자비하게 좌관급 장교까지 내몰았다는 것이 불만의 이유였다. 육군의 막료는 우가키를 면종복배面從腹背하는 태도로 대하면서 그 원한을 이어나갔다. 쇼와 10년대에 우가키는 수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육군은 끝까지 육군대신을 추천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가키 내각은 유산되고 만다. 그 정도로 원한이 깊게 남아 있었던 것이다." "다이쇼 말기의 군축 분위기는 일본의 서민들 사이에서도 확산되었다. 군사에 대한 혐오, 군인에 대한 모멸감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예를 들면 군인은 제복을 입고 거리에 나가지 못했다. 서민들로부터 냉혹한 눈길을 받거나 싫은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일본 육군은 가장 뿌리 깊은 집단사회여서 그 특이한 가족주의적 성향이 도시의 인텔리 계층에서는 혐오감을 자아내기도 했던 것이다."(64-7)
"다이쇼 시기에 일본은 본격적인 전쟁을 체험하지 않았다. 따라서 새로운 군사 집단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었다. 우가키 군축은, 우가키의 진의가 어떻든 그러한 시도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그런데 그 뒤를 이어 육성된 메이지 10년대 중반부터 20년대 전반에 태어난 제2세대 군인은 그러한 심리를 배척하는 것이 오히려 군인의 책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어떻게 군 내부의 지도층에 들어갔을까? 먼저 지적할 것은 새로운 파벌이 생겨났다는 점이다." "1921년 10월 27일 나가타 데쓰잔, 오카무라 야스지, 오바타 도시로 등이 바덴바덴에서 가진 회합이, 조슈벌의 횡행을 대체하여 육대벌陸大閥이 군 내부에서 주류로 자리잡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부터 전쟁은 국가총력전〉이라는 것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을 시찰한) 세 사람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는 국가의 정치·경제·산업·문화·사회의 모든 것을 전시 체제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71-3)
제2부 쇼와 육군의 흥망
"쇼와 육군을 말할 때면 무엇보다 1928년 6월 4일에 일어난 '장쭤린 폭살 사건'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고모토 다이사쿠는 이 사건의 중심인물이다. 동지들은 이 사건을 고모토의 애국적인 행위로 파악하고, 이전부터 중견 장교들이 활약했던 만몽 지역에 부동의 정치 권력을 수립한다는 계획이 육군 지도자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햇빛을 보지 못한 것에 분개했다." "고모토로부터 장쭤린 폭살 사건의 진상을 들은 후타바카이 회원들은 어떤 식으로든 고모토를 지킬 것을 맹세했고, 심정적으로는 '고모토를 따르리라'는 기개를 품었다. 어떤 장교는 고모토의 손을 잡고 〈우리가 당신의 뜻을 반드시 잇겠습니다〉라고 약속하기도 했다. 이 중견 장교들은 시라카와 육군대신이 점차 관동군의 음모라는 것을 알아챈 듯한 발언을 하자 육군대신 집무실로 몰려가서는 〈관동군은 관련이 없다〉며 윽박질렀다. 쇼와 육군의 사실을 은폐하는 기질은 이미 이때부터 중견 장교들에 의해 시작되고 있었던 것이다."(102-3)
# 후타바카이二葉會 : 다이쇼 말기에 육사 15기부터 18기에 이르는 좌관급 장교가 중심이 되어, 전쟁론, 만몽 개발론, 군 개혁론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모임
"장쭤린 폭살 사건을 쇼와 육군이 범한 오류의 제1막이라 한다면 만주사변은 제2막이었다." "1931년 10월 2일에 열린 관동군 막료 회의에서 이시하라 간지는 시종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다. 개전 후 한 달이 채 안 되는 사이에 군사적으로는 지린 성을 진압하고 나아가 하얼빈까지 장악 영역을 넓혔으며, 각 지방의 유력자들도 관동군의 의향을 받아들여 일본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던 것이다." "〈기득권의 옹호와 같은 낡은 표어가 아니라 신만몽국 건설이라는 표어를 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족협화五族協和·왕도낙토王道樂土의 국가로 정하는 게 우리 생각이다.〉 막료 회의에 참석한 전원이 동의했다. 모두가 〈이시와라의 말이 옳다〉며 맞장구쳤다. 군 중앙이나 정부가 이 방침에 반대하고 나설 경우 신만몽국을 독립시켜 대결 자세를 취해도 좋다는 것이 암묵적인 양해였다. 이때 이시와라 간지는 42세의 중좌로, 자신의 이념을 이 새로운 국가에 쏟아넣고 싶다며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111-2)
"이시와라는 자신이 살고 있는 시대를 지구 전쟁의 시대라고 정의하고, 이 전쟁이 50년 정도 계속될 것이라 보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지구 전쟁의 시대에 들어섰다면서, 결국 1965년 무렵이면 지구 전쟁은 결말이 난다는 것이었다. 이 지구 전쟁에서 결말이 나면 어떻게 될 것인가?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서양 문명의 중심은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일본은 동양 문명의 축이 되었다. 두 문명의 대결이 바로 인류 최후의 결전 전쟁이며, 그것은 대략 1985년 무렵에 결말이 난다. 이 결전 전쟁에서는 과학기술의 진보에 따라 신병기도 개발되어 한 방으로 도시를 궤멸시킬 수 있는 파괴 병기를 생산하게 될 것이며, 착륙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지구를 돌 수 있는 비행기도 등장할 것이다." "이러한 결전 전쟁을 마친 뒤에는 세계가 통일되어 민족 협화의 시대로 들어선다는 것이다. 민족협화民族協和야말로 결전 전쟁 후의 세계를 의미하는 말이라고 이시와라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121)
"1936년 2월 26일의 이른바 2·26 사건은 육군 내부에서 국가 개조운동을 추진하고 있던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쿠데타 미수 사건이다. 20여 명의 청년 장교와 그들의 지휘 아래 있던 부사관 및 병사 1500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쿠데타였다." "2·26 사건에 가담한 청년 장교들은 물론 자신들의 궐기 행동을 쿠데타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유신이나 혁신과 같은 표현을 썼으며,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무라나카 다카지가 교묘하게도 〈우리는 유신의 전위전前衛戰을 벌인 것〉이라고 했듯이, 그들이 행동을 계기로 육군 당국이 새롭게 국내 체제 개혁을 위해 궐기하는 것으로 참된 '쇼와 유신'이 시작될 것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청년 장교들은, 쿠데타란 국체 파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대원수인 천황 폐하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질적일 만큼 쿠데타나 혁명이라는 말을 피했다. 하지만 청년 장교들의 주관적인 생각이 그랬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보면 이것은 쿠데타 이외에 달리 부를 말이 없다."(137-9)
"1933~1934년 무렵 육군 내부에서는 천황기관설을 신봉하고, 합법적으로 군부가 권력을 손에 넣은 다음 국가 총동원 체제를 갖추도록 하자고 주장하는 그룹을 통제파라고 불렀다. 교육총감 와타나베 조타로, 육군성 군무국장 나가타 데쓰잔 등이 중심이었다. 이에 대해 국체 명징운동에 적극적이고, 불법적으로라도 권력을 장악한 다음 천황 친정에 의한 국가를 목표로 삼은 그룹을 황도파라고 불렀다. 이 그룹은 아라키 사다오와 마사키 진자부로를 받들었는데, 황군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도 황도파였다." "「군인칙유」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그들은, 천황이 살아 있는 신이며 나를 버리고 신을 모시는 것이 절대적 진리라고 배워온 세대다. 그들은 일본의 현실에 대해 살아 있는 신의 뜻을 따르는 사회가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이렇게 된 것은 천황 주변에 있는 측근이 국민의 뜻을 왜곡하여 천황에게 전하고 있는 체제에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그런 측근들이야말로 '임금 곁의 간신'이라는 것이다."(144-5)
"2·26 사건은 쇼와 초년대의 여느 국가 개조운동과 크게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청년 장교가 부사관이나 병사에게 명을 내려 다수를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동원된 병사 중에는 이해 1월에 갓 징용되어 아직 무기를 취급하는 데조차 익숙하지 않은 이까지 있었다. 쇼와 초년대의 국가 개조운동에서는 실제로 병력을 움직일 많나 규모의 사건이 없었다. 게다가 병력을 움직이는 것은 천황의 대권임에도, 청년 장교들은 천황의 뜻을 따른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뜻을 무시했다. 자신들의 행위는 큰 의미에서 천황의 뜻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천황의 대권을 거스르는 행위도 허용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을 '대선大善'이라 칭했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청년 장교들과 그들의 지휘를 받는 병사들이 요인을 습격하여 처참하게 살해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임금 곁의 간신'에 대한 그들의 원한이 깊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살해 방법은 쇼와 초년대의 테러 사건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잔혹했다."(147)
"2·26 쿠데타는 '실패'했지만 '성공'했다는 두 가지 측면을 갖고 있다. 청년 장교들의 궐기는 4일 만에 천황의 강한 반대와 그것을 지지한 육군 주류파(이를 통제파라고 부를 수 있을 텐데)에 의해 진압되었고, 그들의 호소는 묵살되고 만다. 결국 '실패'한 것이다. 하지만 2·26 사건 후의 정치 상황에서 육군 주류파는 〈이와 같은 불상사는 두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명분 아래 육군 내부의 청년 장교들이 맡고 있던 지도부의 일파(황도파라고 불러도 좋다)를 숙군인사肅軍人事라는 명목으로 몰아냈고, '군부대신현역무관제'라는 제도를 부활시켜 육군상을 경질하거나 후임 육군상을 추천하지 않는 방법을 동원하여 내각의 생사여탈권을 획득했다. 이리하여 언제라도 육군이 주도하는 내각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2·26 사건이 '성공'했다고 일컬어지는 이유다. 물론 이 성공은 (쿠데타를 주도한) 청년 장교들의 주체적인 의사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형태의 것이었다."(140)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소련군은 중국을 지원하면서 자국의 근대적 병기의 위력을 시험이라도 하듯 관동군을 견제했고, 관동군도 소련이 어느 정도 항일 의욕을 갖고 있는지를 살피기 위해 도발하곤 했다. 그리하여 1937년에는 113회, 1938년에는 166회나 국경 분쟁이 일어난다. 그런 분쟁들은 점차 대규모 군사 충돌로 바뀔 위험성을 안고 있었다. 장고봉張鼓峯 산정에 소련군이 진지를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관동군이 처음 알아차린 것도, 국경 침범에 이상할 정도로 신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군의 보고를 받은 참모본부는 소련 측에 항의하는 게 좋겠다고 외무성에 제안했다. 외무성의 항의에 소련 측은 〈1886년 이후 이 지역은 소련 영토〉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이런 사태는 물론 참모본부의 막료들이 예상했던 대로였다. 오히려 그들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소련군과 군사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 득책이라고 생각했다."(234)
"그러나 일본군은 근대적 병기를 앞세운 소련군에게 일방적으로 당했다. 제19사단의 참모장은 조선군 참모장 앞으로 전보를 보내 〈전선은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전선의 지휘관과 병사는 오로지 수비를 하는 데 모든 힘을 쏟고 있는 바, 전황이 '돌파구'를 찾기까지 외교 교섭을 통해 정전으로 나아갔으면 한다〉고 호소했다. 장고봉 사건은 결국 외교 교섭으로 결말이 지어졌다." "사단장의 독단과 참모본부의 중견 막료들의 책임을 따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제19사단의 장병이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는 소련군 앞에서 진지를 고수하다가 전사했다는 측면만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외교 교섭에서 소련이 뜻밖에도 일본군을 최종 단계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합의한 사실을 핑계로, 이것 역시 일본군의 철저한 저항 때문이라고 말하고, 소련군은 대일전에서 앞서지 못했다는 판단을 내리는 자료로 삼았다. 장고봉 사건은 책임도 묻지 않고 교훈도 얻지 못한 채 일본군의 육탄 공격을 예찬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246-7)
"쓰지 마사노부는 노몬한 사건을 언급할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참모이다.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을 수석에 가까운 성적으로 졸업한 쓰지는 육군 내부에서 단연 주목받는 존재였다. 성적 지상주의의 조직 원리하에서 단지 육군대학의 성적이 좋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성격이나 언동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어디에 배속되든 강경론을 주장했고 때로는 상관의 눈에 띄는 화려한 언동을 선보이기도 했다. 신중론을 펼치는 상관을 험악하게 매도하기도 해서 군사령관이 일개 참모의 비위를 맞추느라 전전긍긍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전해온다. 1937년 11월 관동군 참모로 부임하자마자 그는 줄곧 대소련전을 외쳤고, 그 때문에 일이 있을 때마다 소련군이나 몽골군의 국경 침범을 지적하면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고봉 사건에서 조선군이 소련 측에 철저하게 패한 것을 두고 〈저들은 조선군이어서 그렇다. 관동군이라면 절대 그렇게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큰소리쳤다."(263-4)
"노몬한 사건의 발단은 장고봉 사건으로부터 8개월이 지난 후인 1939년 4월 관동군이 정리한 「만소 국경 분쟁 처리 요강」이었다. 이 요강은 관동군 사령관의 이름으로 시달되었는데, 실제로 이 요강을 기안한 사람은 쓰지였다. 일본의 판단만으로 국경선을 정하고 그곳에 소련군이나 몽골군이 들어오면 철저하게 응징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초원이나 강, 산 등에는 국경선이 명확하게 그어져 있지 않으므로 일방적으로 선을 긋고 상대방이 그곳에 진입해오면 〈주도면밀한 준비 아래 철저하게 응징하여 소련을 굴복〉시킨다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더욱이 이 요강에는 무시무시한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 〈국경선이 명확하지 않은 지역에서는 방위사령관이 자주적으로 국경선을 인정하고 이를 제일선 부대에 명시〉해도 좋다는 것이다. 제멋대로 국경선을 그어도 상관없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대소 군사 충돌 대망론'은 장고봉 사건의 교훈이 전혀 살아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264)
"1940년 9월, 일본군은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로 진주해 들어간다. 프랑스의 식민지 제독에게 억지스러운 요구를 들이밀고서 무력을 발동하여 진주한 것이었다. 이때 외무성은 프랑스 외무성과 교섭을 진행하고 있었고, 하노이에 있는 육군의 장제스 원조 물자 저지를 위한 감시단 위원장 니시하라 잇사쿠 소장과 프랑스 측의 교섭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참모본부 작전부장 도미나가 교지와 남지나방면군 참모부장 사토 겐료는 제5사단을 움직여 무력 진주를 강행했다." "이에 대해 이시이는 이렇게 말한다. 〈쇼와 육군에는 세 가지 하극상 사건, 이른바 군기를 따르지 않았던 전투가 있습니다. 이시와라 간지와 이타가키 세이시로의 만주사변, 쓰지 마사노부와 핫토리 다쿠시로의 노몬한 사건 그리고 도미나가 교지와 사토 겐료의 북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입니다. 이것은 쇼와 육군의 불명예 사건이며, 특히 이시와라의 만주사변은 문제라고 생각합니다.〉"(341)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이 사실이 밝혀지자 일본의 국책은 단숨에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로 기울었다. 일본이 이곳에 진주하는 것은 자존·자위를 위한 '정당방위'이고, 이것은 미국이 평소에 영국을 원조하는 것을 '정당방위'라고 말한 것과 같은 논리로 앞뒤를 맞추었다. 해군성에서도 군무국 제2과장 이시카와 신고가 중심이 되어 강력하게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를 주장하고, 이것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진다면 얼마든지 받아주자며 자신감을 보였다. 주독 대사 오시마 히로시는, 독일은 단기간에 소련을 제압하고 우크라이나, 발틱(발트 해 연안부), 벨라루스, 캅카스 등을 소국으로 분할하여 소련을 실질적으로 해체할 작정이니, 일본도 이에 응하여 극동소련군을 제압하고 독일의 방침에 즉시 호응할 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호소했다." "마침내 6월 24일 조정된 「제국 국책 요강」에서는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가 중심으로 바뀌어 있었다."(346)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 대한 미국의 보복은 일본군 상륙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7월 25일 미국 내에 있는 일본 자산의 동결을 발령했고, 26일에는 영국, 27일에는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그 뒤를 따랐다. 28일에는 네덜란드령 인도차이나가 일본에 대한 석유 공급을 중단했다. 8월 1일 미국 정부는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일본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른 것이었다." "육군성과 참모본부 안에서 대미전의 목소리가 급속히 높아졌다. 전쟁지도반의 『기밀 전쟁 일지』 8월 2일자 기록을 보면, 〈대미 전쟁은 백 년 전쟁이다. 제국은 이미 이를 피할 방법이 없다〉고 적혀 있다." "전후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미국 측은 이미 이 단계에서 일본 외무성 전보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 성공했다."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는 군사적으로는 '무혈 점령'이라는 점에서 성공적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쇼와 육군의 예상이 얼마나 안이했는지를 보여주었고, 그 점에서 실패했던 것이다."(352-5)
"이치키 지대는 1942년 8월 12일 트루크 섬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과다카날 상륙 작전을 준비했다. 이치키 지대는 1942년 8월 하순부터 1943년 2월까지 약 6개월의 시간을 과다카날에서 보낸 유일한 부대였다." "미군의 병력이나 병기와 비교하면 이치키 지대의 제1진은 5000 대 1 이상 차이가 있었음에도 대본영과 제17군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일단 군을 투입했다가 패퇴하면 오기가 생겨 잇달아 병력을 쪼개서 보내는, 이른바 체면을 건 싸움을 벌이는 것이 쇼와 육군의 나쁜 전통인데, 그것이 여기서도 고개를 쳐들었던 것이다. 1943년 2월 7일 최후의 부대가 철수하기까지 육군 약 3만 600명, 해군 약 4700명을 쏟아부었고, 이 가운데 육군 약 2만 800명, 해군 약 3800명이 전사했다. 전투에서 죽은 사람보다 보급 물자가 도착하지 않아 쇠약해져서 죽거나 병으로 사망한 사람이 더 많았다. 이치키 지대에 한정하면, 2500명이 조금 못 되는 병사 가운데 살아서 귀환한 이는 고작 15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493-4)
"이치키 지대와 (제2진으로 출병한) 가와구치 지대의 패전은 태평양전쟁이 시작된 이래 육상전에서는 처음으로 맛보는 굴욕이었다. 전후에 기록된 당시 참모들의 수기나 회상록에서는 본래대로라면 이 단계에서 과연 과달카날이 전략적으로 그만큼 가치가 있는지 여부를 재검토해야 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당시 참모본부와 제17군사령부의 분위기는 그다지 냉정하지 못했다. 어떻게든 비행장을 탈환해야겠다는 체면 문제가 앞섰다. 군인들 사이에서 전략적으로 재검토하자는 논의는 미약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한 의견을 꺼낼 수조차 없었다. 참모본부 작전부장 다나카 신이치, 작전과장 핫토리 다쿠시로 그리고 작전과의 쓰지 마사노부 등에게 도조 히데키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과달카날을 포기하지 마라〉고 거듭 주의를 주었다. 참모본부는 그 말을 외면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작전과 자체가 개전 이래 연전연승이라는 '불패의 신화'에 취해 있었기 때문이다."(501-2)
"1943년 1월부터 2월까지 해군의 구축함이 라바울 기지에서 과달카날로 들어와 세 차례에 걸쳐 1만 명이 넘는 일본 병사를 철수시켰다." "2월 9일 오후 7시, 대본영 발표가 있었다. 1항과 2항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2항 중반부터 과달카날에 대해 언급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솔로몬 군도의 과달카날 섬에서 작전 중인 부대는 작년 8월 이후 잇달아 상륙한 우세한 적군을 같은 섬 일각에서 압박하고 과감하게 격전을 치러 적의 전력을 분쇄해왔다. 이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2월 상순 이 섬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시종 적을 강하게 압박해 굴복시킨 결과 양 방면에서 엄호 부대의 전진轉進은 대단히 질서정연하고 확실하게 진행되고 있다.〉 적에게 입힌 손해는 인원 2만 5000명 이상(실제로는 전사 1000명, 부상 4200명), 우리 쪽 손해는 1만 6734명(실제로는 전사자와 아사자를 합쳐 2만 4600명)이라고 덧붙였다. 대본영 발표가 '과장'과 '허위'의 대명사가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525-6)
"쇼와 육군을 조사하다 보면 알 수 있지만, 참모본부 작전부에 배속되는 엘리트 관료에 관하여 은밀하게 내려오는 불문율이 있었다. 육군대학교 졸업자 50명(해마다 약간의 증감이 있다)은 쇼와 육군의 지도적인 지위를 보장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이 가운데 성적 우수자(상위 10퍼센트, 보통 5~6명)는 특히 군도쿠미軍刀組라 하여 참모본부 작전부에 배속되며, 그들의 집무실은 작전부원 외에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다. 벽에 걸린 남방 요역을 나타내는 대형 지도를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현지로부터의 전투 보고를 듣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또는 국책의 핵심이 되는 전쟁 방침을 정하고 그것을 해군의 군령부 작전부와 조정하여 가끔은 정부에 대본영의 의향이라며 전하기도 했다. 이러한 참모본부 작전부에서 현지 파견군에 내려지는 명령은 통수권을 책임진 천황의 명령 그 자체였다. 현지 파견군은 그 어떤 명령도 어길 수 없었다."(572-3)
"작전부 참모들은 정보부를 포함해 다른 부문의 참모들에게 강한 우월의식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정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지도 않고, 정보부가 수집한 다양한 데이터도 거의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들이 생각하는 지식에 따라 작전 명령을 내렸다." "정보부의 엘리트 군인들이 전후에 펴낸 글에서 공통되게 드러나는 것은 태평양전쟁이 틀림없이 정보전이었는데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전쟁을 계속했다는 자성自省이라 할 수 있다. 미국의 전략폭격조사단은 일본이 왜 이렇게 정보를 경시했는지에 관하여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그들의 분석에 따르면, 일본은 중국과의 전쟁에서 정밀한 정보 조직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일본 침략군에 협력한 중국인이나 특수 기관〉에 의지하다 보니 정보 수집이나 해석을 시스템으로서 구축할 수 없었고, 수상한 정보원에게 기밀비를 지불하고 그들이 가져오는 정보를 이용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573)
"1943년 4월 18일 오전,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탄 일식육상공격기가 격추되었고, 야마모토는 부관 및 군의장 등과 함께 전사했다." "야마모토의 전사는 일본 해군의 굴욕이었음에도 이 사실을 오히려 담담하게 전함으로써 국민의 충격을 완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표면적인 발표와 달리 야마모토의 최후를 본 육해군 수색대의 병사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을 누설하지 못하도록 전선으로 보내졌고 결국 전사를 강요당했다." "야마모토의 시체를 처음 발견한 사람은 제6사단 제23연대의 하스나 미쓰요시 소위가 지휘하는 수색대였다. 하스나를 포함하여 수색대 소속 병사 약 20명은 목격한 사실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을 금지당했고, 누설할 경우에는 〈군법 회의에 회부될 것〉이라는 위협을 받았다. 이 병사들은 잇달아 전선으로 보내졌으며, 어떻게 해서든 살아 있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형태의 전속이 되풀이되었다."(580-1)
"태평양전쟁의 개별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가장 많이 부족했던 것은 후방사상後方思想이었다. 후방사상이란 병참, 보급에 관한 사고방식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는데, 병력·무기·탄약·식량·의약품·의복 등을 전선의 병사에게 어떻게 공급할 것인지 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일본군 내부에서는 〈군수품을 나르는 이가 병사라면 나비와 잠자리도 새다〉라며, 치중輜重을 담당한 장교나 병사를 조롱하는 우스꽝스런 노래가 불리기도 했다. 러일전쟁 이전부터다. 치중이란 병참과 거의 같은 의미인데, 군대에 불가결한 식량·의복·무기·탄약 등을 총칭한다. 전투를 지원하는 후방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후방을 얕잡아보는 치명적인 결함은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의 교육에서도 여실하게 나타난다. 육군대학교에서도 병참이란 전선으로 식량과 무기, 탄약 등을 나르는 전술이라 하여 도상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심부름'과 같은 단계에 머물렀을 뿐 일관된 교육도, 그 이론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638-9)
"일본군 안에서도 보기 드문 육군대학 출신 병참참모였던 이도 마쓰아키에 따르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은 독일군을 모방하기는 했지만 병참이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규율도 엄격해서 약탈 등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점차 후방사상을 경시하게 되었다. 이도는 쇼와 시대에 들어 〈만주사변에서는 병참이 제 기능을 하지 못했고, 중일전쟁에서는 더욱 소홀하게 취급되었으며, 결국 대동아전쟁에서는 병참을 경시하는 분위기가 일거에 만연하게 되었다〉고 단언한다." "〈병참 사상에는 전쟁 억지력의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냉철하게 숫자를 분석하고 군사를 직시하면 병사를 인간으로 보게 됩니다. 그것이 일본에는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이도의 어조에는 병참을 작전이나 정보보다 상위에 두어야 한다는 확신이 배어 있었는데, 나는 태평양전쟁에서 그런 병참사상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했다."(639-40)
"「전진훈」은 1941년 1월 육군상 도조 히데키의 이름으로 군에 시달되었다. 원문을 작성한 사람은 시마자키 도손으로 알려져 있는데, 육군 막료들이 초안을 집요하게 손질하여 마무리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내용은 근대국가의 가치 기준을 모조리 부정한 것이었다. 「전진훈」의 '본훈 제1장 제1절 황국'은 〈대일본은 황국이다. 만세일계의 천황이 위에 계시며, 조국肇國의 황모皇謨를 계승하여 무궁하게 군림하신다. 황은皇恩은 만민에게 널리 미치며, 성덕聖德은 팔굉八紘에 고루 미친다〉라는 말로 시작한다. 사생관死生觀을 보면, 〈생사를 관통하는 것은 숭고한 헌신 봉공의 정신이다. 생사를 초월하여 오로지 임무를 완성하는 데 매진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고, '이름을 아낀다'라는 항목에는 〈부끄러움을 아는 자는 강하다. 늘 향당鄕黨과 가문의 면목을 생각하고 더욱 분려奮勵하여 그 기대에 응답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는 향토와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우라는 것이다."(684)
"가미카제 특별공격대에 의한 특공 작전이 처음으로 펼쳐진 것은 1944년 10월 25일이었다. '인간' 그 자체가 폭탄이 되는 이 작전은 태평양전쟁 기간을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또 비참했다. 이 작전을 채택한 육해군 지도부의 책임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이 작전으로 사망한 병사들은 '신'으로 되살아나리라 강요받은 존재로, 오늘날에도 계속 거론되어야만 한다. 10월 25일은 필리핀 앞바다 해전이 시작된 다음 날이다. 레이테 결전을 측면에서 지원하는 필리핀 앞바다 해전이 발동되었고, 다바오 기지를 출발한 해군특공대 소속 비행대가 미 해군 항공모함을 목표로 고도 3500미터 높이에서 수직으로 내리꽂혔다. 이날 필리핀 앞바다를 돌아다니고 있던 미 기동부대를 향하여 특공대는 수차례 육탄 공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날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육해군 특공대 2367대가 출격하게 된다. 이는 그 숫자만큼의 생명이 사라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764)
"이 작전을 처음 생각해낸 것은 해군 내부의 항공 관련 막료들이었고, 이를 구체적으로 밀고 나간 사람은 제1항공함대사령관 오니시 다키지로였다. 당초 오니시는 이 작전을 '통솔의 외도外道'라고 자조했지만, 이미 전력이 바닥난 일본 해군으로서는 일시적으로나마 이러한 작전을 취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전과가 예상 밖으로 컸기 때문에 이 작전이야말로 유효하다는 양해가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특공 조종사의 양성, 특공기 개발 등에 힘을 쏟게 되었다." "1945년에 들어서면서 쇼와 육군은 전군이 똘똘 뭉쳐 특공 작전을 외쳤다. 이것에 걸려든 이들은 주로 학도병이나 갓 소집된 신병들이었다. 다시 말해 군사 요원으로서 전력상 지위가 낮은 순으로 특공 작전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특공기 조종사들은 개개인의 능력이나 의사만으로 이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것이 반드시 따져야만 하는 쇼와 육군의 체질이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 그 체질이 충분히 밝혀졌다고는 할 수 없다."(766, 781-2)
"1945년 3월, 고이소 내각은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국민의용대 조직에 관한 건」을 결의했다. 국민은 어떤 형태로든 전쟁에 참가한다는 것이었다. 나아가 6월 13일에는 각료회의에서 법적인 틀을 마련했다. 의용병역법으로 명명된 이 법률은 15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성,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여성에게 의용 병역을 부과한다는 내용으로, 말하자면 국민을 모조리 동원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국민 전원이 병사가 되는 군사국가가 탄생했다. 이것이 국가총력전 구상의 귀결이었다." "이리하여 병사 수는 확보되었는데, 정부는 참모본부의 방침에 호응하여 본토 결전을 좀더 구체적으로 다지기 위해 국민의 사유재산에도 제한을 가하기로 했다. 3월 28일 공포된 「군사특별조치법」은 미군의 상륙에 대비해 진지를 구축할 때 국민의 모든 권리를 제한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국민은 본토 결전에 대비해 어떤 항변도 허용되지 않았고, 참모본부나 군령부에서 명하는 대로 움직여야만 했다."(806)
제3부 쇼와 육군이 전후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GHQ 내부에서는 G2와 GS(민정국) 사이의 대립이 끊이지 않았다. G2는 군인이 중심이어서 철저한 반공 노선을 취했고, 여차하면 소련과의 전쟁도 불사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추후 제정된 일본국헌법이 재군비를 금지한 것에 불만을 품었고, 가까운 시일 안에 재무장을 허용하여 반공의 보루로서 일본을 군사 대국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주도한 사람이 윌로비였다." "윌로비와 대립한 사람은 GS를 지휘하던 국장 휘트니였다. 그는 쇼와 육군의 완전한 해체를 주장했고, 일본에 민주적인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 이 군사 조직을 최우선으로 배제해야 할 세력으로 간주했다. 윌로비와 휘트니는 맥아더를 지탱하는 두 축이었다. 윌로비는 휘트니 등의 민주적 개혁에 사사건건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 그가 (원칙대로라면 전범으로 간주되었어야 할) 핫토리를 비롯한 과거의 막료들을 감싸고 돈 것은 일본의 재군비가 진행될 경우 그들을 지도부에 포진시키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978-9)
"여기서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들 군인의 변절이 왜 이렇게 신속하게 이루어졌느냐는 점이다. 작전참모의 졸렬한 작전 때문에 목숨을 잃은 수많은 장병을 생각하면 이들의 재빠른 변신을 다시금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핫토리는 작전과장으로서 실질적으로 참모본부의 작전 전반을 관장했다. 그 책임은 대단히 무겁다. 그럼에도 이러한 입장에 선 것은 핫토리 자신의 윤리관이 얼마나 엉성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맥아더의 전사를 집필하는 작업은 과거 일본군 군인들에게는 물론 알려지지 않았고 GHQ 내부에서도 은밀하게 진행되었다. 1947년 5월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2년 반 후인 1950년 12월에 마무리되었다. 개전부터 패전까지 일본 측의 핫토리 그룹이 작성한 원고는 방대한 분량이었던 듯하지만, 구성원 개개인에게는 그 내용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는 핫토리와 윌로비가 암암리에 이들이 작성한 원고를 수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987)
"1953년에 간행된 『대동아전사』(저자명 핫토리 다쿠시로)에는 맥아더의 『태평양전쟁사』 편찬 그룹에 속한 멤버의 이름이 보인다. 이 10명의 면면을 보면 패전 시 대좌 3명, 중좌 6명, 소좌 1명이다. 그러니까 참모들이 전쟁사 편찬의 주체로 참가했던 셈이다." "패배한 군대의 장수(그들은 물론 좌관급이었다)는 전황에 대해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실제로 전장에서 싸운 적이 없다. 단지 참모본부 깊숙이 자리한 방에서 지도를 보며 군대를 이리저리 움직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전시에 그들은 사이판의 방어진지가 맥없이 무너지자 이를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사단의 잘못으로 돌렸고, 레이테 섬에서 일본군이 패배했을 때도 일방적으로 전략을 변경한 뒤 작전이 실패하자 그것을 현지 군의 무능 탓으로 돌렸다. '절대 국방권' 구상이나 '첩호 작전' 등도 책상에서 마련하여 현장에 들이민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본영의 참모는 어떻게든 전사를 바꿔 쓸 수 있다는 것이 『대동아전사』를 관통하는 논조다."(988-9)
"1953년 간행된 논문 「차기 대전과 일본방위론」에서 핫토리는 미일 전쟁의 발발을 미국의 도발과 일본 '중추부'의 개전 의사가 만나 벌어진 결과라고 보는 듯히다. 뿐만 아니라 이 논문 곳곳에서는 그의 자기변명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참모의 명령에 따라 사지로 달려간 200만여 명의 일본군 병사는 얼마나 한스러웠을까. 패전 후 8년, 전시 지도를 담당했던 장관將官은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총살을 당하거나 자결을 하거나 스가모 형무소에 갇혔으며, 사회에 나와서도 생활 전선에서 싸워야 했다. 부사관이나 병사는 시베리아에 억류되거나 남방에서 얻은 병을 치유하는 데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거나, 생활고와 싸우고 있었다. 많은 병사는 가혹한 전장 체험에 가위눌리면서 살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작전참모는 GHQ로부터 급여를 받으면서 '일본군 부활안'이라는 두렵고도 무책임한 문안을 작성하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전후사회에서 가장 철저하게 비판받아야 할 '쇼와 육군 작전참모'의 처세술이었다."(995)
"쇼와 육군의 위계질서는 엘리트 군인과 병사 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고 했거니와, 병사란 1전 5리(엽서 한 장 값, 즉 소집영장을 말한다)로 징용된 자이다. 일본은 징병령을 시행했기 때문에 만 20세가 되면 본적지에서 징병 검사를 받는다. 피검자는 신체 조건, 운동신경 등에 따라 갑을병정으로 등급이 나뉘는데, 평시라면 갑종은 2년에서 3년 동안 병역 의무를 져야 한다." "현재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시민의식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고, 자립적인 개인과 같은 사고방식도 마찬가지였다. 병사들은 그들이 싸우는 이유를 물을 수 없었다. 그저 상관의 명령에 따라 싸우다 죽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윤리라고 배웠을 따름이다. 쇼와 10년대에 들어설 무렵에는 학교 교육이 확대되면서 국민을 억압하기 위해 신들린 듯 신민 교육이 실시되었다. 전후 쇼와 육군이라는 조직은 해체되지만 그와 같은 일본적 공동체의 잔재는 전우회라는 모임을 통해 이어졌다."(1018-9)
"다수의 전우회에서는 사상적으로 대동아전쟁이 긍정되었고, 전장에서 싸운 병사들의 감정을 반영한 형태로 쇼와 육군의 군사 행위가 정당하다는 주장이 있어왔다." "이처럼 일본군의 행위는 모두 옳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쇼와사의 전승傳承은 옛 병사들의 감정을 기초로 한 것이다. 전우회가 크면 클수록 그리고 어마어마하게 화려한 월보를 발행하는 곳일수록 이러한 감정론이 활개를 친다. 여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인식과 다른 인식(예를 들면 일본 군국주의의 침략론 등)은 대부분 도쿄전범재판사관이라 결론짓고, 선두에 서서 깃발을 휘두르는 역할을 하는 것은 교육과 저널리즘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런 주장은 쇼와 육군을 전면적으로 긍정하는 전우회의 단골 메뉴다." "'다른 사람은 나쁘다'라는 이런 주장은 태평양전쟁을 선택한 당시 지도자의 이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일 따름이라고 말해도 좋다. 역사 인식이 그 단계에 멈춰 있다는 얘기다."(1023-4)
"'영령'에 대한 애도와 추도는 전우회의 중요한 역할이다. 전우회원들이 침략 전쟁의 첨병으로 낙인찍힌다면 전사한 동료들에게 미안한 노릇이라고 덧붙이기도 한다." "야스쿠니 신사에서 행하는 추도와 위령은 쇼와 육군이 중심이 된 태평양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연결되는데, 전장에서 싸운 병사의 심정은 도미오카의 말로 대표되듯이, '야스쿠니 신사에서 만나자'는 표어 아래 죽어간 전우에게 미안하다는 것, 그 하나로 수렴된다. 이것은 더 이상 이론이나 이성의 문제가 아니다. 죽은 자는 두번 다시 의사표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설령 야스쿠니 신사에서 영령으로 모셔지는 것을 양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확인할 길이 없다. 전사 당시의 단계로 한정하여 추도를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는 일본인의 '사생관'에 관련된 문제다. 야스쿠니 신사 문제는 전쟁으로 내몰린 세대의 사생관으로 받아들이고, 다음 세대는 그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1031)
# 전우회의 여러가지 활동
1. 쇼와 육군의 군사 행위 정당화
2. 전쟁사의 다양화에 대한 통제
3. 전장에서 있었던 행위의 공동 치유
4. 전후사회에서의 이해관계
5. '영령'에 대한 공양과 추도
6. 군인연금 지급 등의 명령서 전달
"1978년 3월 10일, 야스쿠니 신사는 A급 전범으로 교수형을 당한 7명과 스가모 형무소 안에서 병사한 7명 등 총 14명을 합사했다. 이때 궁사였던 마쓰헤이 나가요시는 훗날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완전히 전투를 멈춘 것은 국제법상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발효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투 상태에 있을 때 열린 도쿄전범재판은 군사재판이고, 그 재판에 따라 처형된 사람들은 전투가 한창일 때 적에게 살해된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전장에서 죽은 사람과 처형된 사람은 다르지 않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 인식 형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결국 태평양전쟁의 '전투'는 1945년 8월 15일에 끝났지만 '정치'는 1952년 4월 27일까지 이어졌다는 생각이다. 이 전투와 정치를 아울러 전쟁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면 야스쿠니 신사는 GHQ의 방침에 대항하여 싸운 사람들(국제주의자부터 사회주의자까지)의 영혼도 함께 모시지 않으면 안 된다."(1033)
"'도조 히데키 등 A급 전범 14명의 합사'는 국내에서도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다. 각료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가 매년 문제가 되고, 〈개인이냐 공인이냐〉는 기자의 질문도 이 합사 사실이 밝혀진 이후 '연례행사'처럼 되풀이된다. 이 문제를 다시 꺼내는 까닭은 가해 책임을 어떻게 물을 것인지 고민해야 될 중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전우회 중에서 도조가 합사되었다고 하여 야사쿠니 신사 참배를 거부하는 곳이 있다. 이 점에 관하여 나는 야스쿠니 신사는 과연 역사를 모두 팽개치고 성립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갖고 있으며, 적어도 도조 등을 합사함으로써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인의 사생관이라는 영역을 넘어 이를 정치 문제화하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의사는 태평양전쟁의 책임을 애매모호하게 하고, '영령을 국가적으로 총동원하는' 것으로 이어지며, 역사적으로는 과거의 침략 행위 비판에 정색하고 맞서는 것을 의미한다."(1034)
- 접기
nana35 2022-06-06 공감(1) 댓글(0)
Thanks to
공감
전쟁국가 일본..
'전후'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일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본격적으로 '제국 일본'이 치러냈던 전쟁의 실체-전쟁의 구조, 그리고 실제 전쟁을 치러냈던 사람들의 경험-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 썼던 것처럼..
메이지 이래 일본이라는 국가는 매 10년마다 전쟁을 치르면서, 사회체제를 바꿔갔다는 점에서..
근대 일본의 정수를 이해하는 중요한 하나의 틀이 '전쟁국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그런 틀을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참고도서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책들이 계속해서 발간되고, 문고판까지 만들어지는 것이야말로..
일본적 교양주의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일텐데..
실제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장르의 책인 것은 분명하다..
전문 역사가의 학문적 저작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일련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교양' 시리즈와는 격 자체가 다른..
굉장히 치밀하고 깊이 있는 논픽션, 르포 장르라고 해야 할 듯한데..
사실, 이런 장르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이런 책을 읽어낼 수 있는 일정 수의 독서대중..
그리고 이런 책을 기획하고 출판할 수 있는 견실한 출판자본이 존재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어느 것 하나 존재하지 않으니, 이런 책이 나오기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 같다..
하긴 일본 사회 역시 신간에서 이런 책들을 발견하는 건 점점 힘들어지고 있으니..
교양주의의 몰락은 공통적인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책의 장점은..
쇼와 욱군이라는 15년전쟁 혹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주도했던 한 집단의 내부를 최고 지휘층(작전참모를 포함하여)부터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해 생생하게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위로부터의 시점이 아닌, 실제 전장을 경험했던 일반 병사들의 시점에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왜 일본 사회가 그러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는가를 여러 사례들을 검토하면서 집요하게 되묻는 그의 자세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물론 아주 깊이 있는 이론적 분석이 제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이 책의 성격에도 맞지 않고, 또 저자의 의도도 아니었을 것이다..마루야마 마사오가 무책임의 구조라고 한 큐에 정리해버릴 이야기를 저자는 계속해서 자신이 발굴해낸 여러 텍스트들, 그리고 여러 증언자들을 통해 검증해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루야마와 같은 엘리트는 지나쳐버리는 당대 일본 사회의 많은 결들이 세세하게 복원된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이 시대에 정통한 독자라면, 굳이 처음부터 읽을 필요 없이, 관심이 가는 사건이나 인물부터 골라 읽어도 무방할 듯.. 모든 장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몇몇 장들은 논픽션의 정수를 보여줄 정도로 인상적이다..
- 접기
생쥐스뜨 2019-02-08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쇼와육군, 승자의 기록에 편승한 가벼움을 되짚다.
#쇼와육군 #글항아리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일본 #전쟁 #쇼와 #육군 #위안부 #박유하 #제국
저명한 르포르타주 작가이자 '자성사관'의 주창자인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시대, 그중에서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견인한 세력이 누구이며 어떤 관점과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에 천착한다. 그저 '일본이 나빴다'거나 도조히데키 개새기,라는 두루뭉술한 선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며, 여전히 피가 흐르는 동시대사를 갈무리된 역사로 넘기기 위해서도 구체적이고 자세한 검증이 필요하단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일본의 정치와 전쟁을 줄곧 주도해온 세력을 육군, 그중에서도 대본영 육군부(참모본부)의 엘리트 군관료집단이라 본다. 군대에 대한 통수권이 국민에 대한 통치권보다 우위를 점한 채 전혀 간섭받거나 통제되지 않던 시대. 육군은 오로지 천황의 재가에 따라 움직이는 황군이라지만, 천황이 허울뿐인 총괄을 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변과 사건들이 풍부하게 등장한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은 육군 엘리트들은 군대조직의 본능에 따라 계속해서 자존 자위를 말하며, 그에 따른 안보선은 넓어지기만 할 뿐이다. 내지를 보전하기 위한 중국 침략, 중국을 보전하기 위한 러시아 견제 혹은 동남아 침략, 급기야 미국에 대한 침략으로. 그렇지만 빈약한 정보와 준비되지 않은 병참, 무엇보다 국가총동원체제로 치뤄지는 전쟁에서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기엔 정신력과 충성심만으로는 중과부적.
책을 덮으며, 그간 우리는 승자의 기록에 손쉽게 편승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해방이라는 혜택을 입은 이해당사자로서(얼마나 다행인가, 일본이 폭주하여 스스로 자멸했단 건!), 엄밀하고 냉정한 분석을 필요로 한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41년말 진주만폭격으로 시작된 미일전쟁, 그리고 그전의 독이일 삼국동맹과 연합국간 다툼을 두고 단순히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나 제국주의 시대였고, 일본은 뒤늦게 시장쟁탈전쟁에 가담한 국가 중의 하나였을 뿐.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과 자유민주의 원칙들은 기실 타국의 대외정책을 견제하고 자국의 통상이익을 수호하는 국익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정의가 승리한다는 증거로 뒤늦게 제출되었지 않나.
책의 한계 하나, 저자는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데올로기가 허위적이고 가식적으로 쓰였음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그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혹은 호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와 서양을 대비시키며, 식민지 지배자와 해방자를 대비시키는 구도는 너무 단순하고 나이브하지 않나. 게다가 동남아 전선에 버려진 수천의 무명용사들이 각국의 해방전쟁에 자의로 가담했음을 근거로 대동아공영권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말하는 건 비약이다. 그들의 의도와 맥락에 대한 분석없는 점프의 결과는 보편적인 인류애나 가치관이 아닌, 인종과 지역을 근거로 한 대동아공영권 아이디어 자체가 복권될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두번째 한계를 굳이 더하자면, 천백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월간지에 연재된 원고를 근간으로 쓰여지다보니 압축적이지 못하다. 관련자에 대한 심층취재의 생생함을 더하려 했다 해도 겹치는 내용과 장면이 많아, 예컨대 위안부나 전후배상 문제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 부분이 아쉽다. 전시는 평시와는 다른 가치관과 결정을 필요로 하며 또 당대는 지금과 다른 감각으로 위안부 정책 등이 수행되었다, 는 다소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들이 뭉뚱그려졌다. 저자 말대로 이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철저한 연구조사가 선행되어야 그에 따른 진정한 반성과 사죄가 가능한 부분일 텐데, 1991년에 씌여진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후 그다지 계승되지 못한 듯 하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봐야겠다.
- 접기
ytzsche 2018-03-21 공감(0) 댓글(0)
Thanks to
공감
====
https://www.amazon.co.jp/-/en/product-reviews/4022615001/ref=cm_cr_arp_d_paging_btm_2?_encoding=UTF8&ie=UTF8&reviewerType=all_reviews&pageNumber=2&nextPageToken=MjAyNi0wNy0xMVQwMjowNDowOC41MzA3ODg3NjFaADEw
From Japan
Amazon Customer
5.0 out of 5 stars 잘 연구되었습니다!
Reviewed in Japan on September 4, 2025
Format: PaperbackVerified Purchase
잘 연구되고 있어 매우 공부가 되었다. 제2차 대전을 아는데 꼭 읽어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군지 카오루
5.0 out of 5 stars 매우 깨끗한 책이었습니다.
Reviewed in Japan on March 20, 2021
Format: PaperbackVerified Purchase
곧 도착했습니다. 예쁜 책이었습니다. 고마워요.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KOKO123
4.0 out of 5 stars 일본인의 조직이 가진 병소
Reviewed in Japan on July 16, 2017
Format: Paperback BunkoVerified Purchase
이 책에 기술된 문제점은 구 육군에 한정된 것이 아니고, 조직을 통하는 상층부가 영원히 극복할 수 없는 문제라고 느꼈습니다. 기업이 파탄으로 향하는 프로세스도, 파탄에 이르지 않고도 조직을 흔드는 불상사의 발생 프로세스도, 원인이 되는 조직의 병소는 「지금도 옛날도」 「국가 레벨인가 한 기업 레벨인가」에 관계없이 변화는 없고, 또 국민(기업이라면 사원) 한사람 한사람에게 둥지게 하는 문제도 같다. 경제우선(나 자신에 있어서는 육아와 부모의 개호, 즉 경제적 안정풍이 최우선 용인)의 풍조는, 앞의 대전의 가혹한 전장을 실체험한 세대가 거의 죽은 지금이 되어서는, 멈추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라고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3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마츠노베 공평
5.0 out of 5 stars 싫어졌다.
Reviewed in Japan on September 13, 2018
Format: PaperbackVerified Purchase
일본 육군의 좋은 가감, 시야의 좁음, 독단적. 이런 놈들 일본인에 대해서 아무것도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것을 놓쳐 온 일본인의 민족성이 한심하다. 또 육군의 현지인에 대한 잔학 행위에는 눈을 덮을 뿐이었다.
5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역사 팬
3.0 out of 5 stars 신뢰감이 부족하다
Reviewed in Japan on June 20, 2009
Format: Paperback BunkoVerified Purchase
굉장한 양의 듣기나 독자 입수의 수기에 근거해, 쇼와의 전쟁의 실태를 그린 역작입니다. 독서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세한 실수와 논리적이지 않은 부분이 산책되어 책으로 신뢰감이 부족한 것은 감점입니다. 단지 일부를 예시하면 ・메이지 30년대에 일본은 아시아의 「식민지 해방에 전력을 담아야 한다」고 하고 있지만, 제국주의 전성기에 소국 일본이 식민지 해방은 있을 수 없다. (상 P38) ・이토 히로부미와 오야마 미노의 생각의 차이를 「세대의 단절」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2명의 연령차는 1세 밖에 없다. (상 P46) · 트라우만이 곰팡이가 된 것은, 진립 남편과 반죽한 (조금 공상적인) 외교 전략을 히틀러와 리펜 트롭에 주장해 분노를 샀다고 하는 「사실」이 「알았다」라고 하고 있지만, 첸의 증언만으로 트라우만과 리펜 트롭의 사이?・일본군의 희생자수의 표로, 중국 본토의 항목에 소련군 침입에 의한 사망자도 많았다고 하지만, 그것은 구만주의의 항목에 카운트되고 있을 것이다. (아래 P218)
27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Amazon 고객
5.0 out of 5 stars 남기고 싶은 작품!
Reviewed in Japan on April 10, 2015
Format: Paperback BunkoVerified Purchase
여기에 나오는 증언자들은 이제 더 이상 없다. 후세에 남기고 싶은 작품!
One person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포커스
5.0 out of 5 stars 당사자의 증언에 의한 귀중한 쇼와 육군의 다면적인 해석
Reviewed in Japan on October 5, 2011
Format: Paperback BunkoVerified Purchase
본서를 읽으면 다양한 사람이 등장해 와 증언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아픈 것은 노몬한의 전초전이라고도 할 장호봉 사건으로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18년 가까이 수용되고 있던 전 병사의 이야기이다.
신슈의 산 안쪽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고 있던 청년이 따라가는 수기적인 운명. 그리고 그 병사에게 나라가 실시한 무잔한 처치(전사 취급되고 있었으므로, 지급된 은급의 반환을 요구받았다)이다. 소련으로부터의 인양시에 러시아어로 인사하도록 그 병사에게 요구한 것이 전 육군 차관으로 적전 도망 같은 일을 한 토미나가 쿄지 중장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또 손문의 죽음을 만난 일본인 야마다 씨의 이야기도 마음을 잡는다. 어린 딸이 평생 남는 장애를 겪는 부상을 입어도 중국의 근대화 동지였던 야마다 씨는 딸을 '나라의 보물'과 다른 형제들에게 가르쳤다.
역사 속에서 운명을 농락당한 사람들의 말이 육성이 되어 전해져올 것 같다.
7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쓰쿠신보
5.0 out of 5 stars 「일본은 왜 졌는가?」에 대해서, 많은 증언이나 사료를 바탕으로, 실증적인 해답을 나타낸다
Reviewed in Japan on October 23, 2014
Format: Paperback Bunko
쇼와사를 둘러싼 최대의 의문은, 「일본은 왜 그와 같은 무모한 전쟁에 돌입했는가?」, 혹은 단적으로, 「일본은 왜 졌는가?」라고 하는 의문일 것이다. 이 책은 총 500명에 달하는 많은 증언과 사료를 바탕으로 상하권 합쳐서 850페이지에 이르는 내용으로 실증적인 해답을 제시한 것이다. 본서의 취재가 행해진 것은 1980년대부터 90년대이지만, 당시는 존명이었던 관계자의 대부분이 이미 죽은 현재에 있어서는, 이러한 책을 쓰는 것은 더 이상 불가능하고, 귀중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이끄는 "일본은 왜 졌는가?"에 대한 해답은 복합적이다. 저자의 다른 책도 참고로 평가자 나름대로 아래에 정리해 보았다.
(1)국가의 의사결정의 구조
·대일본제국헌법에 있어서는 천황주권과 통수권의 독립을 정하고 있다. 그러나 통수권의 실무는 참모본부와 군령부에 위탁되어 군정(육군성과 해군성)은 물론 정치인도 구출할 수 없는 구조가 쇼와 초기에는 완성되고 있었다. 특히 참모본부의 폭주를 멈추는 것은 천황이라도 어려웠다.
・군부는 일본 최대의 관료 조직이다. 세로 나누기, 엘리트주의, 파벌 등에 의해 참모본부 내에서도 체크기구가 작동하지 않고 작전부의 참모가 폭주하는 구조가 있었다.
・외교를 경시하는 국가적인 체질과 관념적인 역사관.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정치인과 외교관은 물러났고, 군부의 말이 되는 정치인과 외교관 밖에 마지막에는 남지 않았다.
・미국은, 개전시에 있어서 국력이 일본의 10배 이상 있어, 도저히 총력전을 행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이성적 판단에서 전쟁을 억제하는 과정이 관료조직으로서의 군부에는 기능하지 않았다(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군인은 추요의 포스트에서 제외되었다).
(2)일본의 군대의 조직과 성격
·육군, 해군 모두, 일본의 군대는 「성적 우수」인 엘리트 군인(육군대학교 졸등)이 조직을 지배하는 구조였다. 이들은 폭넓은 국제상식이 부족하여 관념적이고 전투 현장에 가서 현실적인 전략과 전술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부족했다. 그 중에서도 참모본부의 권위주의, 특권의식은 어긋나고 있어 젊은 참모에서도 전선에 시찰에 나서면 군사령관이나 참모장에게 명령을 내릴 정도였다.
・이런 엘리트 참모들이, 오전은 어쨌든, 미국의 반전 공세를 만나자, 근거가 없는 「정신주의」나, 잘못된 추억의 전략을 차례차례로 내세워, 많은 장병을 낭비 죽였다. 태평양 각지의 전선에서 겨우 살아남은 몇 명의 장병이 전후가 되어 이를 증언하고 있다.
・참모본부의 잘못된 작전의 극치가 특공작전이다. 이것이야말로 일본군 최대의 부끄러워야 할 것이다. 특공대원은 스스로 지원한 용맹과감으로 조국 생각의 젊은이들이라는 '신화'가 있지만, 실제로는 지원할 수밖에 없는 장소의 분위기를 일본군이 만들었던 결과라고 해야 한다. 이런 진실로 눈을 막은 '미담화'는 용서되는 것이 아니다. 특공작전은 전쟁 말기에 더 이상 이성을 잃은 참모들에 의한 광기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육군과 해군은 평시에도 전시에도 원적처럼 대립했다. 전시비의 분포 합전, 전시의 공명 다툼은 다반사이며, 양자가 협력해 성공했다고 하는 사례는, 쇼와기가 되고 나서 과연 있을까.
・정보(인텔리전스)의 경시. 호리에이 3저 『미군이 본 태평양 전쟁에 있어서의 일본의 5개의 패인』에 의하면, 전후, 점령군이 일본 제국 육군·해군의 정보 기능을 정사해, 그 빈약함에 어슬렁거렸다는 것이다. 야마모토 56의 전사도 정보전에 의한 패배이다.
・병준(로지스틱스)의 경시. '포중병이 병대라면 나비 잠자리도 새 가운데'라는 희곡대로 병참부문은 경시되고 있었다. 태평양전쟁 후기 과연 참모본부도 그 중요성을 깨달아도 일본에는 태평양의 섬들에 고립된 부대에 식량·의약품·무기 등을 공급하는 국력도 없고 수송하기 위한 선박도 없었다.
・「장관은 3류, 병사는 일류」라고 하는 것이, 태평양 전쟁을 경험한 미군이, 일본군에 준 평가이다. 일본군 장관, 특히 사관학교 졸업의 엘리트는 경직된 교육과 관료적인 조직체질로 인해 태평양전쟁에서 위기적인 상황에서의 지휘능력이 거의 없었다. 한편 천황에게 생명을 내보내는 것을 학교나 군대 내에서 교육받은 일반 병사들은 옥쇄 등 비참한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이 명령에 따라 전사해 갔다. 사이판전, 뉴기니전, 임팔작전 등 대량의 전사(그 대부분은 전투사가 아니라 아사)를 가져온 것은 정보와 병참의 경시의 결과이다.
・육군 최상층부의 인간적 결함. 전쟁 말기를 지휘한 군인들이 지극히 빈곤한 인간관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인물이 많았던 것은 전후의 스가모 프리즌 수감 중인 일기에서 밝혀졌다. 또, 안에는 전시중은 책임있는 입장이었지만, 전후에는 맥커서 점령군을 위해 기쁨으로 협력 활동한 인물도 존재한다. 이러한 인간적으로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불성실한 인간이 육군 최상층부에 적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전범으로서 도쿄 재판에 임한 사람 중에도 자기 변호에 시종한 전범도 적지 않다.
(3)미디어
·권력의 잘못된 의사결정을 지적할 수 없는 미디어(신문). 극히 일부 신문이나 기자(키류 유유)를 제외하고, 신문은 몰래 내셔널리즘을 부추겨 전쟁으로 국민을 이끌었다.
・「전쟁은 신문에 있어서 벌어진다」라고 하지만 러일전쟁으로 대폭적인 부수증가를 경험한 신문 각지의 원체험이다. 쇼와의 전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벌기」를 위해서 신문은 일제히 전쟁 찬미로 바뀌어, 대본영의 홍보 기관에 타락해 버렸다. 바로 '미디어는 권력의 최선의 파트너'인 것이다. (반토 이치리 호사카 마사야스 『그리고 미디어는 일본을 전쟁으로 이끌었다』에 의한
다
) 또한 철저한 국가주의적 교육도 있어 정부나 군부, 미디어를 의심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미디어에 부추겨 열광하기 쉬운 국민성. 러일전쟁의 종전처리에 불만을 가진 민중에 의한 히비야 야키사건이 그 원형이다.
이상 보았듯이 일본의 패전은 육군으로 대표되는 관료조직에 소 귀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관료주권국가'는 엘리트주의, 권위주의, 특권주의 아래에 정치가를 모욕하고, 국민을 멸시하고, 세금을 움켜잡고, 추억으로 국가를 움직이고, 실패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관료는 어디까지나 스스로의 이권밖에 생각하지 않고 국제감각이 부족하고 비대한 자기의식을 가진다.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승리해도 중장기적으로는 반드시 실패하는 것이다.
시라이 사토시 '영속 패전론'이 밝힌 것처럼 일본은 전후에도 패전을 이끌고 있어 관료 주권 국가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공해로 인한 대량사, 버블붕괴, 토덴후쿠시마 원전사고 등 '관료가 일으킨 국가적 실패'는 끊이지 않지만 누구 한 사람 책임을 지지 않았다. 우리는 쇼와사로부터 이 점을 깊이 배워 미래에 살려야 할 것이다.
11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별이 내리는 밤
5.0 out of 5 stars 반세기를 지나도
Reviewed in Japan on February 9, 2008
Format: Paperback BunkoVerified Purchase
태평양 전쟁 어렸을 때부터 무서운 전쟁이었다고 들려 어째서 그런 전쟁을 해 버렸는지 궁금해했습니다.
이 책에서는 쇼와 육군의 시점에서, 앞의 대전을 해설하고 있으므로, 쇼와 육군의 결함을 남기는 곳 없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다만, 쇼와 육군에게 앞의 대전의 책임을 부과하려고 하는 너무, 모든 책임이 쇼와 육군에 있도록(듯이) 쓰여져 있습니다. 육군의 폭주만으로 정말 일본은 지는 전쟁에 돌입해, 수많은 전장에서 많은 일본인을 희생한 것일까요?
일본의 제국을 조종한 진정한 흑막 제국을 멸망에 몰아넣은 일본의 흑막으로부터 세간의 눈을 돌려, 모든 책임을 육군에 밀어붙인다 그런 의도에 조종된 저자의 모습을 행간에 느꼈습니다.
5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아무래도
3.0 out of 5 stars 「수험수재+체력 발군」군인의 탄생
Reviewed in Japan on November 15, 2019
Format: Paperback
구판을 읽고, 본서에 그다지 접하지 않고, 나름대로 생각해 온 것을 써 봅니다.
①구군인은 불행히도 수험군인(군사관료)이었습니다. 사관학교, 육대 등의 교육을 보면, 매우 수험수재로 체력 발군인 인간이 평가되고 있습니다. (수험수재라고는 대답을 알고 있는 문제를 빨리 풀 수 있는 사람으로 관료에게 밟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장관도 수험 장군에 불과하기 때문에 전통적인 군사 교육으로 단련된 구미 장관에게는 그 전략성이 아니었습니다. 즉 군사적 교양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가난한 일본의 속성 군인 교육에서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② 그만큼 교양이 부족한 군부가 왜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유일하게 교양 있는 지도자를 육성하고 있던 구제 고등학교 제대가 군사면에서 직접 당사자가 되지 않는 체제였기 때문입니다. 만주·중국에서 일본군이 피를 흘리고 있었을 때, 사대생도 포함해 대학생은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한 나라 일본에서는 대학생이 전쟁에서 죽는 것이 아쉬웠거나 천황제 전복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군사를 군부로 격리해 둘 의도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몇몇 동창생이 전쟁으로 죽고 스스로도 전쟁에 종군 살아남은 대학생이 지도자가 되는 체제라면 단순한 무교양군인 때에 기박으로 지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막부 말기의 지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구미에서 대학생이 진행되어 전쟁에 지원한 것은 전쟁의 현실을 극복한 것만이 지도자에게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뿐입니다.
③쇼와 초기에 있어서의 기박이 부족한 정치 지도자와 무교양 군인의 출현은, 메이지 천황제 체제가 수험이라는 의사과거를 도입해, 정치 지도자와 군사 지도자를 분리해, 교양과 군사가 일체화한 새로운 정치(무사) 계급(천황제 정치 체제의 철탈자)를.
4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Translate all reviews to English
그림자
5.0 out of 5 stars 당사자의 인터뷰가 많이 흥미
Reviewed in Japan on November 5, 2016
Format: Paperback Bunko
당사자의 인터뷰가 많고 재미있지만 원호와 기원을 구분하여 기술이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죄송합니다.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薔薇★魑魅魍魎
5.0 out of 5 stars 일본 제국 육군은 추악한 사기·오등 조직이다
Reviewed in Japan on July 25, 2012
Format: Paperback Bunko
1999년에 나온 上下巻八千八百円也의 단행본은 읽고 싶지만 손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 문고화되어 염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현대를 잘 아는 것은 당연하고 올바른 인식 없이는 충실한 인생은 보낼 수 없는 것입니다만, 원래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과거입니다.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모르는 것은 게으름의 귀여움이므로 역사의 어둠 속으로 나뉘어 왔습니다.
문학에서는 오오카 승평의 『俘虜記』『노화』『레이테전기』, 노마히로의 『진공지대』에 오니시 거인의 『신성희극』 등 수당 점차 전쟁 문학을 읽는다 , 일본의 군대가 일으킨 일과 일본군 그 자체에 대해서는, 히라오카 마사아키의 「일본인은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가」에 도미유오의 「난징대학살」, 이노우에 키요시의 「 일본군은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지」 「천황제 군대의 형성」 「일본의 군국주의」, 데이비드 버가미니의 「천황의 음모」에 구마자와 쿄지로의 「천황의 군대」등을 읽어 왔고, 이제 읽어야 할 것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시대의 변화는 인식의 심화로 연속해.
호사카 마사야스의 이름은 잘 보이는데 읽지 않았고 이 책이 첫 체험이지만, 90%를 차지하는 전쟁 체험자로부터의 증언을 바탕으로 검증되는 사실은 매우 자극적이고 강렬한 독서 체험이었습니다.
그는 향후 일본인이 할 일을 5개 제언.
(1)쇼와 전기의 사변, 전쟁을 철저히 검증해, 쇼와 육군 속에 몰래 있던 침략 사상, 침략의 체질을 우선 명확하게 하는
것 얻는 것
(3)쇼와 육군의 최대의 문제였던 통수권의 독립을 재차 부정하고, 장래, 군사 조직을 갖추기에 있어서는 문민 지배의 시스템을 확립하기 위한 프로세스, 그 운용을 명확하게 해, 동남아시아의 나라들에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것
(4) 의 「천황의 군대」가 아니고, 국토 방위에 해당하는 최소한의 군사력인 것을 국내 법적으로도 제한해
, 그것이 사상면에서도 확립하고 있는 것의 납득을 얻는 것(5) 비롯한 군사조직의 잘못을 국민적 규모로 이해하는 것은
힘든 노작이지만, 군비유지론자인데 정치적 입장성의 애매함 때문에 명확한 논점을 흔들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에 보수반동의 측에 이용되는 스키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명확한 입장성을 빼고는 진짜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5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흰머리
5.0 out of 5 stars 저자의 주저가 마침내 문고화!
Reviewed in Japan on November 23, 2006
Format: Paperback Bunko
높고 손이 나오지 않은 저자의 주저가 마침내 문고화!
절대 구입입니다.
진심으로 일본인 전원이 마즈는 본서를 읽고 여러가지 느끼면 좋겠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진정한 명저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입장의 당사자들의 방대한 증언/메모를 베이스로, 각각이
상대한 상황이나 시선을 따라 교착시켜 동상을 맞이하는 역사의 모습은, 교과서
나 병사의 증언집, 참모 개인의 자전등과는 완전히 다른 박력을 띠고 있습니다.
상하권 합쳐 1300페이지 정도도 있는 대저입니다만, 읽어 마쳤을 때에 자신
의 태평양 전쟁관이 깊어지는 것을 느낀다고 생각합니다. 열심히 꼭 도전해 주었으면
한다. 특히 이미 부모나 할아버지로부터 전쟁 체험의 한척마저 느끼는 기회가
없는 젊은 분들에게는 색안경 없이 절대로 읽어 주었으면 한 권입니다.
15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타케류
5.0 out of 5 stars 훌륭합니다.
Reviewed in Japan on November 23, 2006
Format: Paperback Bunko
텔레비전에서 전함 야마토의 특집을 보고 있을 때에 「아ー, 나는 태평양 전쟁은
단편적이고 모호한 지식이 있는 것만으로 자세한 것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라고 알아채고
구입한 것이 이 책.
그 전쟁은, 육군이 폭주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는 잘 듣지만, 정말로 그런 것인가,
그런 단순한 이야기인가.
그 경위가 서남전쟁~만주사변~일중전쟁~태평양전쟁이라는 흐름으로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열중해 읽어 버렸다.
그 중에서도 같은 육군이라고 해도 소위 참모 본부의 작전 참모들과 현지 병사들의 입장의
격차에는 놀라움을 느꼈다.
꽤 두꺼운 책이지만, 내용적으로도 그만큼의 밀도와 무게를 수반한 훌륭한 작품을
만날 수 있었다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8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Nowhereman
5.0 out of 5 stars 방대한 자료에 뒷받침된 육군 연구(위)
Reviewed in Japan on April 15, 2006
Format: Paperback Bunko
태평양 전쟁에 대해 말한다면, 미내~야마모토~이노우에의 반전론이 해군에 있던 것은, 주지의 일이며, 그것과의 비교로 말하면, 중국에의 진출에 시작되는 태평양 전쟁에의 길은, 모두(라고는 말하지 않을 때까지 대부분이) 「육군」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는 것은, 「쇼와」의 전쟁은, 「육군」에 의한 전쟁이라고 하는 일단의 가설이 세우는 것이며, 그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왜 일본이 철저하게 태워지는 무모한 전쟁에 돌진했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쇼와’ 연구의 제일인자인 저자는 방대한 자료와 수백 명의 인터뷰를 통해 ‘육군’의 조직론, 파벌론, 거기에 따른 인간관계 등에서 설득하여 어째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져 갔는지를 지극히 상세히 논하고 있다.
여기서 느끼는 것은 '독재자'와 같은 존재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 강렬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인간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순서나 책임 회피가 겹쳐서 '무엇이든' 의사결정되었다고 생각되는 부분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여기는 현재 일본의 관료사회, 회사조직이기도 하고, 유사한 실수가 일어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경청할만한 책이다.
31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짱
3.0 out of 5 stars 내용은 좋지만 ....
Reviewed in Japan on August 14, 2006
Format: Paperback Bunko
좋은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잘 조사하고 있고 취재하고 있습니다. 구 군인을 만나고 있다. 여기까지 취재하고 있는 사람, 그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습니다. 장고봉 사건으로 포로가 된 병사가 17년간도 포로생활을 보낸 후, 일본에 귀국하면 은급을 지불받는 커녕 억류의 대상외로 되어, 나라에 냉우된 이야기. 「키케, 와다츠미노코에」에서의 유서가 유명한 우에하라 료지의 유족에의 취재. 육군의 전 고급 장교가 전후에는 미군의 주호가 된 이야기. 군인 은급의 카라크리 비판. 모르는 것뿐이었습니다.
필자의 시점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전쟁을 무책임하게 시작한 군인들의 분노로 가득 차 있고, 그 자세에 나는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문장이 치약이군요. 취재해 버렸다, 라고 하는 자부가 너무 강하겠지요, 곧 「나는 당시의 관계자를 전후 만났다」라고 써 버려, 이야기가 날고 있는 곳이 있습니다. 조금 수습이 붙지 않았다. 왜 이 사람의 이야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라고 하는 분석에는, 아무래도 납득할 수 없는 것도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좋은 곳에서는, 육군의 연구이니까 제로전에 1장 나누어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것은 해군이니까, 라고 하는 것도 있습니다만.
그렇기 때문에 내용적으로는 당당한 별 5개입니다만, 문장력을 마이너스하고 3개입니다.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읽고 손해는 하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해요, 추천합니다.
25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다섯 명소
5.0 out of 5 stars 현대인 필독
Reviewed in Japan on March 1, 2006
Format: Paperback Bunko
일본 육군이 구원하기 어려운 정신론에 범해져 합리적 사고가 부족한 조직이었던 것은 지금까지 산만하게 말해져 왔다. 그러나 그 본질은 정신론도 정서적 사고도 아니고, 조직으로서의 무책임 체질에 있는 것을 많은 인터뷰를 거듭해 밝힌다. 초출은 1999년 관계자 대부분이 물고 있는 빠듯한 단계에서 쓴 혼신의 한 권이다. 9천엔을 넘는 가격으로 발매되고 있던 대저가 문고가 되어 부담없이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기쁘다. 그러나 내용은 부담이 없고, 현대의 타락한 회사나 관공서 등의 「조직」의 분들에게도 통저하는 명저이다. (마츠모토 토시유키)
33 people found this helpful
Helpful
보고서
Translate review to English
====
==
==
==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