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신자들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에릭 호퍼 (지은이),이민아 (옮긴이)궁리2011-09-27
원제 : The True Believer: Thoughts On The Nature Of Mass Movements (195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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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나치즘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광풍이 휩쓸고 간 194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부두 노동자 에릭 호퍼는 일하는 틈틈이 철학 논문을 썼다. 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모두 벗어던지고, 국가ㆍ교회ㆍ정당 따위의 집단에 광적으로 매달리는가? 호퍼의 첫 번째 저서이자 대표작인 <맹신자들>은 종교운동, 사회혁명운동, 민족운동 등 여러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속성을 밝히기 위한 시도이다.
호퍼는 초기 기독교에서 현대의 공산주의, 나치즘, 민족주의까지를 아우르며 광신 현상과 대중운동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개인이 광신자가 되는 과정을 추적한 그의 책은 이후 종교적ㆍ이념적 근본주의자, 테러리스트,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규명한 고전이 되었으며,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논의거리를 던지고 있다.
목차
서문
1부 대중운동의 매력
1장 변화를 향한 갈망
2장 자기부정을 향한 갈망
3장 대중운동의 호환성
2부 잠재적 전향자
4장 인간사에서 불명예스러운 자들의 역할
5장 가난한 사람
신생 빈민
극빈자
자유를 얻은 빈민
창조적인 빈민 똘똘 뭉치는 빈민
6장 부적응자
7장 이기적인 사람
8장 무한한 기회를 눈앞에 둔 야심가
9장 소수자
10장 권태에 빠진 사람
11장 죄인 더보기
책속에서
오늘날에는 우리 대부분이 맹신자의 동기와 반응에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신을 믿지 않은 시대라지만 대중의 경향이 반종교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기 대문이다. 맹신자는 도처에서 행군하면서 전향하고 저항함으로써 자기 형상대로 세계를 빚고 있다. (13) - 不二
입에 풀칠하기 위해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노동하는 사람들은 불평불만도, 꿈도 키우지 못한다. 중국의 대중이 반항적이지 않은 한 가지 이유는 죽자 살자 노력해야 간신히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사투는 ˝역동적이기는커녕 정적이다.˝ (51) - 不二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재능이 없는 한, 자유란 따분하고 번거로운 부담이다. 능력 없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는 있어 무엇하겠는가? 사람들이 대중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열렬한 나치 젊은이의 말마따나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55) - 不二
유대인의 경우도 비슷한데, 유럽의 유대인들이 보여준 행동으로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행동을 미루어 짐작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던 영국 식민성의 정책은 논리적으로는 타당했으나 통찰이 부족했다. 그들은 히틀러가 6백만 유대인을 심각한 저항 없이 멸할 수 있었으니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60만 정도는 그다지 어렵지 않... 더보기
- 不二
죽음과 죽임이 어떤 의례나 의식, 연극 공연이나 놀이의 일부일 때는 쉽게 느껴진다. 죽음 앞에서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는 가상의 장치 같은 것이 필요하다. 현실을 살아가는 불완전한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 자기 목숨과 바꿔도 될 것은 없다. 오직 자신을 무대 위의... 배우로 여길 때 죽음은 공포와 최후라는 의미를 잃고 가상... 더보기
- 不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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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얼음 같은 기지로 빛나며 …… 지독할 정도로 정확한 분석이 빼곡한 『맹신자들』은 이성을 깨우는 강력한 책이다.”
- 뉴욕 타임스 (미국 일간지)
“호퍼의 저작은 우리 시대 가장 도발적인 책의 반열에 든다.”
-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대중운동의 본질을 독창적이고 명석하게 탐구한 이 책은 우리 시대 사회사상에 이바지한다.”
- 아서M.슐레진저 2세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조선일보
- 조선일보 Books 북Zine 2011년 10월 01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1년 10월 01일 새로나온 책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1년 10월 14일
저자 및 역자소개
에릭 호퍼 (Eric Hoffer)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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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철학자. 1902년 뉴욕 브롱크스의 독일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가구 제작 일에 종사했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갑자기 시력을 잃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열다섯 살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뒤 미친 듯이 독서에 몰두했다. 열여덟 살에 아버지마저 여의고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금 시굴자, 레스토랑 웨이터, 떠돌이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며 보냈다. 샌프란시스코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집필한 첫 번째 저서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을 1951년에 발... 더보기
최근작 : <맹신자들>,<영혼의 연금술>,<길 위의 철학자> … 총 43종 (모두보기)
이민아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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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여자 대학교에서 중문학을 공부했고, 영문책과 중문책을 번역한다. 옮긴 책으로 『HIIT의 과학』, 『창문 너머로』, 『웃음이 닮았다』, 『온더무브』, 『색맹의 섬』 등을 비롯해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해석에 반대한다』, 『즉흥연기』, 『맹신자들』, 『어셴든』 등 다수가 있다.
9.11 테러에서 노르웨이 테러까지, 무엇이 인간을 극단주의로 몰고 가는가?
예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고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신념에 주린 대중은 그렇지 않다. 어떤 주의(ism)나 이념(ideology)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인생과 우주는 하나의 단순한 공식과 같다. 자신이 절대적 진리를 소유했다는 확신은 누군가를 배타적으로 규정하면서 극악무도한 폭력을 낳기도 한다. 어떤 신념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바치거나 수많은 무고한 시민을 살생한다. 9?11 테러나 얼마 전 발생한 노르웨이의 테러는 신념이 광기를 낳은 나쁜 예에 속한다. 이 외에도 역사 속에는 다양한 종교적?이념적 근본주의자, 극단적 테러리스트, 자살폭탄자 등이 있어왔다. 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가 믿음이 너무나 두터워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자, 맹신자(숭고한 대의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광신적 신념가)의 마음을 낱낱이 해부한다.
눈이 멀고 귀가 먼 믿음, 맹신 현상을 낱낱이 해부하다!
독학한 부두 노동자의 아포리즘
194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부두 노동자 에릭 호퍼는 일하는 틈틈이 글을 썼다. 대공황의 반작용으로 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 등 전체주의 체제가 발흥하는 시기를 보내며 써내려간 아포리즘이었다. 1951년 ‘독학한 부두 노동자’의 첫 책은 발표되었고, 그는 이 저서로 큰 명성을 얻었다. 책이 출간된 당시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 스탈린의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냉전의 물결이 막 일어나던 차였다.
나치와 스탈린의 추종자에게는 어떠한 심리적 동기가 있을까? 나아가 어떤 이들은 왜 자기 자신을 벗어던지고 국가나 교회, 정당 따위의 집단에 광적으로 몰두할까? 호퍼는 도발적인 분석으로 광신 현상의 심리적 요인과 대중운동의 본질을 추적한다.
이 책은 여러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다룬다. 호퍼는 모든 유형의 헌신과 신념, 권력 의지, 단결과 자기희생에는 어떤 획일적인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광신적 기독교 신자, 광신적 이슬람교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광신’이라는 점에서 한 부류로 취급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중운동’은 반체제 저항운동뿐만 아니라 인간이 집단을 만들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운동을 아우른다. 초기 기독교 운동, 종교개혁 운동,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나치즘, 일본의 근대화, 시오니즘 운동 등을 포괄하는 의미다.
태동기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극적으로 변한다는 전망에 이끌리기 쉽다. 대중운동의 지도자도 이러한 대중의 열망을 꿰뚫어보고 보잘것없는 현재를 극복하면 영광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대중을 선동한다. 이러한 장밋빛 미래에 이끌리는 이는 주로 좌절한 사람이다. 현재의 자신을 경멸하는 좌절한 사람은 자기의 삶이 통째로 바뀌는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
변화를 갈망하는 이러한 좌절한 이들의 심리 상태 때문에 모든 초기의(태동기) 대중운동은 좌절한 사람들한테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호퍼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쓸모없다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자신에게서 벗어나 좀 더 완전하고 숭고해 보이는 무언가를 추종하기가 쉽다. 숭고한 대의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자신의 하찮은 삶, 망가진 인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실로 좌절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어떤 대상이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이 종교든 사회혁명운동이든 민족운동이든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호퍼에 따르면 광신적 공산주의자가 광신적 애국주의자나 광신적 가톨릭 신도로 바뀌는 일은 이치에 맞다. 맹신자에게는 대의명분이나 이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 여부에 있다.
따라서 사람이 어떤 신념이나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거부하고 하나의 조직에 완전하게 하나된다. 그는 교회나 국가, 정당 같은 신성한 조직의 품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열정과 힘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조직이나 대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일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다. 조직이 그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폭력을 동원해야 한다면 더 없이 무자비해질 수도 있다. 이렇듯 개인이 광신자가 되는 과정을 영리하게 추적한 호퍼의 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극단적 테러리스트,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지침서가 되고 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호퍼의 목소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책은 단순히 대중운동론을 다루는 책이 아니다. 인간 내면과 행동을 명석하고 압축적으로 분석해낸 심리서이자,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동기와 심리, 참여자의 유형과 내면 등을 추적한 사회철학서이기도 하다. 특히 군대, 증오, 설득과 강압, 지식인, 소수자 등을 논하는 호퍼의 혜안은 아주 빛난다. 호퍼는 마지막 장에서 대중운동의 발단과 성숙기까지를 살피며, 대중운동이 제대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세 유형의 사람이 발전 단계에 따라 각각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중운동의 토대를 닦는 것은 지식인, 대중운동을 실현하는 것은 광신자, 대중운동을 굳건히 다지는 것은 실천적인 행동가라야 한다고. 나치즘이 재앙으로 끝난 것은 히틀러라는 광신적 지도자가 성숙기까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호퍼는 좋은 지도자의 예로 링컨, 간디, F. D. 루스벨트, 처칠 같은 지도자를 꼽는다. 이들은 히틀러, 스탈린, 루터, 칼뱅과는 달리, 좌절한 영혼을 대중운동의 재료로 삼지 않았다. 이들 “지도자의 자신감은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며, 자신이 인류를 명예롭게 대하지 않는 한, 아무도 명예로울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초기(역동기 혹은 활성기) 대중운동을 촉발하고 주도하는 맹신자들에게 호퍼는 일종의 혐오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듯하지만, 대중운동이 정체된 사회를 각성하고 혁신하는 요인이 된다고 강조한다. 역동기 대중운동은 본래의 목적이 얼마나 숭고했건 간에 크든 작든 해악을 남긴다. 호퍼는 역동기 대중운동이 지나치게 긴 것은 좋지 않으며 바람직한 지도자는 간디와 같이 역동기를 언제 끝내야 하는지 간파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대중운동의 목표는 숭고할 필요가 없다. “신사의 나라라는 잉글랜드의 이상”, “은퇴자의 연금 생활이라는 프랑스의 이상”은 구체적이고 제한적이다. 모호한 목표는 극단주의가 탄생하는 여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자로 일하며 평생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쉬지 않았던 호퍼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이 역사를 만든다”고 믿었다. 자신의 독자적인 개성과 정체성을 포기하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호퍼는 경계했다. 그는 “자신의 귀보다는 눈을 더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정해진 행동 강령을 맹종하는 것이 아닌 자기의 판단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삶의 기획하는 이였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절대 진리’나 ‘기적’을 찾고 있다. 격렬한 변화의 시대에 호퍼의 목소리가 여전히 의미 있는 까닭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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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도 허투루 넘어갈 수 없다. 좋은 책은 50페이지 내에서 결판난다고 하던데, 나는 지금 30 페이지에 있다.

sumoverpath 2014-11-04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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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5개 줬고 호퍼의 다른 책도 찾아서 읽게 만들더군요

문사철 2015-05-03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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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운동의 광신적인 힘을 낱낱이 해부했다. 종교적, 민족주의적, 공산주자등을 통하여 맹신자들의 광신의 여러가지를 볼수 있다.

거북이 2016-02-2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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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며, 감성이 없는 이성은 공허하다-Kant

nautes 2011-09-29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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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들의 글은 행간에 힘이있고 자신감이있고, 철학이존재하여 날 이끈다. 호퍼의 글은 마치 한판 붙어보자는 식이다.

systemofadown 2011-12-2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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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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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맹신자들
˝공동의 증오는 아무리 이질적인 구성원이라도 하나로 결집시킨다.˝ 는 구절이 강하게 와닿는다. 지금 우리 사회 대부분 구성원 (여기서의 구성원은 좌절한 패배자들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올바른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다수라는 의미로 해석해 봤다)들이 갖고 있는 공동된 증오심은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줬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하길 염원하면서 그 증오가 무모한 맹신이 아닌 올바른 결집력을 만들어 가기를 기대해 본다. ˝펑~~˝ 제대로 터져주길...
munsun09 2017-04-18 공감(27)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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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과 예수.

전갈과 예수.
영화 < 크라잉게임 / 닐 조던, 1993 > 에는 " 개구리와 전갈 " 에 대한 우화가 나온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전갈은 헤엄치는 개구리에게 등에 업혀서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한다. 그러자 개구리는 성질 고약한 전갈이 자신을 물까봐 거절한다. 이에 전갈은 어이없다는 듯 한 마디 한다. " 이봐, 개구리 양반 ! 내가 자네를 물면 우린 둘 다 강물에 빠져 죽는다네. 내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거라 생각하는가 ? " 가만 생각해 보니, 전갈이 한 말이 옳은 듯하여 개구리는 그를 태우고 강을 건넌다. 그런데 전갈은 약속을 져버리고 강 한가운데에서 개구리'를 문다. 전갈이 말한다. " 미안해 ! 이게 나의 천성인걸. " 그래서 개구리와 전갈 모두 강물에 빠져 죽는다는 우화.
이 우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순수했던 한때'를 기억하는데 사실 그것은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는다. 어릴 때'는 순수했으나 사회 생활 하면서 타락했다는 변명은 우리가 흔히 범하게 되는 거짓말'이다. 같은 이유로 과거로 돌아가면 개과천선해서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겠다는 말도 뻥이다. 개망나니'가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해서 그 천성'을 버리기는 힘들다. 인간이란 어차피 생긴데로 노는 법이다. < 천성 > 을 두고 < 성선설 > 이나 < 성악설 > 중 한쪽을 선택해야 된다면 < 성악설 > 에 한 표'를 던지겠다.
왜냐하면 < 성선설 > 은 인간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판단에 의한 논리적 비약'을 허용한다면, 병아리도 아니면서 비약, 비약, 비약 한 번 나열하련다 : < 성악설 > 은 지나치게 비관적인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서 희망'을 읽는 자세'이다.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는 문장들은 대부분 종교에 기댄 힐링 서적과 자기계발서'가 팔 할'이다. 하지만 이러한 서적들은 겉으로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빈 껍데기'이다. 당근과 채찍뿐이다. 반면 인문학은 " 인간은 본질적으로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자세 " 에서 출발한다. 인문학은 인간이라는 괴물'을 탐구하는 영역이다. 역설적이지만 희망이란 이러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열매'다.
불교 사상'은 성악설에 가까운 듯하다. 불교용어인 " 교화 " 란 부처의 진리로 사람을 가르쳐 착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천성이 < 선 > 도 아니요 < 악 > 도 아닌 < 무 > 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교화'를 통해서 후천적으로 선'을 얻는 과정이라면 불교는 적어도 성선설은 아니지 않은가 ? 기독교의 세계관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운명이니깐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성악설'을 주장하면 나를 사회 불만 세력'으로 간주한다. 그리고는 늘 이런 주장을 한다. " 이봐, 곰곰생각하는발 ! 그렇다면 이토록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악의 씨'란 말이오 ?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말씀하시구랴 ! 가족이란 신성한 겁니다. 부르르르르르. " 그럴 때마다 나는 늘 당당하게 말한다. " 아이들은 < 악의 씨' > 가 아니라 < 아기 씨' > 에서 태어난 존재죠. "
신성한 가족 이데올로기'라는 주제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가족 신화'는 해체되어야 된다고 믿는다. 가족 신화 대신 모성 신화'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된다. 현대 혈연 중심 사회인 가족주의'는 부패하기 가장 좋은 구조'다. " 우리가 남이가 ? " 는 대표적인 유사 혈맹자들이 즐겨 쓰는 해병전우회用 혈서 같다. 차, 카, 게, 살, 장 ! 가족 중심 사회인 가톨릭 국가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북유럽 국가보다 부정부패 지수'가 월등하게 높은 이유는 가족주의'가 부정 부패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가족주의를 버리고 개인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만약에 이러한 가족 해체 주장'이 과격한 북조선 빨갱이들이 한 소리'라고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에 대한 반격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 그런 놈이다.
대중운동에 대한 125가지 단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 맹신자들 / 에릭 호퍼, 1951 > 은 얼핏 보면 대중운동'에 대해 빅엿'을 날리는 것 같다. 할 일 없는 눈먼 놈들이 지랄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학창시절에 최루탄 좀 던져봤다고 비분강개'하여 울분을 토해내는 리뷰'가 몇몇 있던데 과연 그런 식으로 읽을 필요가 있을까 ? 이 책이 쓰여진 시점에서 보면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니다. 1,2차 세계대전이 막 지난, 대중의 집단적 광기가 휩쓴 시절에 쓰여졌다는 점을 고려해야 되지 않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 대중 운동 > 은 사실 < 대중 선동 > 으로 바뀌어야 의미가 명확해진다. 에릭 호퍼의 지나치게 보수적 시각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무릎을 탁 치며 아, 할 정도'로 예리한 부분도 많다. 그는 가족주의와 기독교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어떤 대중운동도 초기 기독교만큼 가족에 대해 적개심을 거리낌없이 표출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
- 맹신자들, 63
에릭 호퍼의 지적은 옳다. 예수는 십자가를 든 혁명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사랑을 가르쳤지만 동시에 정당하게 분노하는 방법도 설파했다. 예수는 썩어빠진 이교도 사회를 혁명을 통해서 개혁하기를 원했다. 혁명이란 본질적으로 기존의 견고한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일이다. 이 공동체를 이루는 근간이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예수는 가족 해체'를 주장한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는 그,그그그그급진주의자'였다. 예수는 현대적 의미의 가족 울타리'를 확대할 것을 당부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 이웃, 나아가 인류 모두의 가족화를 설파하지 않았던가 ? 예수는 혈연이라는 가족'를 해체하고 더 큰 대안 가족을 받아들이라고 말한 청년이었다. 그렇다면 부처는 ? 부처야말로 가족의 탄생을 경멸했던 사람이었다. 가족이란 욕망이 탄생되는 무간지옥'이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와 부처는 성악설을 근간으로 해서 가족의 해체'를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 여기서 해체란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지 말 그대로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그런데 대한민국 기독교는 가족의 의미'를 완전히 오해했다. 성선설과 가족 신화가 기독교 기복신앙과 서로 뒤엉키면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한국형 가족주의는 장점은 적고 단점이 많은 불치병이 되었다. 가족이 가문'으로 확대되어서 가문의 일원'으로써 책무를 다 하라고 요구하면 그때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시부모는 사사건건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된 아들을 여전히 지시하고 통제하려 든다. < 가족의 심리학 > 이라는 책을 쓴 임상심리학자 토니 험프러스'는 시원하게 내뱉는다. " 시부랄, 그런 부모라면 의절해버리쇼 ! 가족의 중심은 부부가 되어야지 외부 가족이 간섭하면 엉망진창이 된다오. "
누누이 주장하는 바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핵가족 문제'보다 심각한 것은 대가족 문화'다. 한국 사회는 대가족화'를 건강한 가족 문화'라고 치부하면서 핵가족화'를 불안한 가족 형태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거없는 뻥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가족 해체가 아니라 가족 축소'다. 가족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최시중이 여자는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아야 한다고 주접을 떨 때 이미 이 사회를 지랄같은 사회'가 된 것이다. 비혼자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고쳐야 할 것 가운데 하나다. 결혼은 선택이지 필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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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8-24 공감(11) 댓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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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주의, 영혼의 질병인가? 사회 부흥의 도구인가?
꽤나 발칙한 인간 정신, 그리고 사회심리에 대한 해체이다. 어떤 지배 질서에 반목하는 존재들의 광신적인 몰입이 없다면 진보도 발전도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주류의 무능과 무력함이 노정될 때 자기모멸과 자기 책임회피를 도모하는 좌절한 인간들의 결집이 대중운동의 본성이며, 바로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는 맹신적 믿음에 포획되는 인간의 심리를 역사적 통찰을 통해 분석해 내고 있다. 또한 교활한 언어로 말한다면 민중봉기를 위한 심리교본이자 대중운동 지도자의 지침서라고 해도 될 듯하다.
인간의 역사 이래 이러한 대중운동의 유형은 종교적 맹신, 민족주의적 맹신, 체제와 이념에 대한 맹신이라는 종교화된 광신적 현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무릇 인류의 역사는 기존의 질서를 전복함으로써 새로이 열리는 과정의 반복이다. 이러한 전복, 혁명은 대중이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우며 쾌적한 세상에서 실현 된 적은 없다. 현실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무력감에 젖어들며, “창조적 물줄기가 메말라버려” 좌절하게 되는 시대를 토양으로 한다. 설혹 이와 같은 환경이 무르익어 민심이 이반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운동할 적정의 대지를 조성하고, 대중을 설득하여 운동의 대열에 참여케 하는 종교화된 열정을 주입하고 유지하며 혁명을 도모 할 수도 있다. 실제 역사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준다.
맹신자들은 대체누구인가?
그렇다면 운동에 참여할 대상인 대중이란 누가 적절한가? 지배 질서에 냉소적이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에릭 호퍼’는 그들을 ‘좌절한’ 사람들이라고 답한다. 현재의 삶에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좋은 곳으로 인식하는데 굳이 현실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결국 변화를 선호하는 것은 좌절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좌절의 원인이야 재산이기도 하며, 창조력이기도 할 것이고, 사회의 지위 등 계급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해소되지 못한 권태에 만연한 자이기도 할 것이며, 이기심으로 뼈저린 실망에 사로잡힌 자일수도 있고, 죄의식에 휩싸인 인간일 수도 있다.
한편 이 좌절한 사람들은 결코 중산층의 대중에서 출현하지 않는다. 역사란 놀이는 항상 최상과 최하위층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평균적인 인간들인 중산층은 타성적이어서 현재의 삶을 파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최하층의 사람들이 두드러진 영향을 발휘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현재 상태를 털끝만치도 존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언제든 현재의 인생을 내버리고 파괴할 준비가 되어있는”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상층의 혁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17세기 영국의 지주와 귀족이 사회질서를 전복한 부자들이 일으킨‘종획운동’이나, 19세기 초‘산업혁명’은 현재를 파괴함으로써 혁명을 완수한 불만세력의 대표적 봉기이다.
그렇다면 이들 좌절한 사람들의 열정적 헌신에 의해 결집된 대중운동을 성숙, 유지시키고, 성공적 혁명 완수를 위한 요소와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좌절한 사람들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에 해답이 있다.
이들에게 대중운동이란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부정이란 열망을 충족시켜준다는 데 있는 것이다. 즉 대중운동의 숭고한 대의에 대한 신념이 잃어버린 자신의 믿음을 대신한, 개인적 희망을 대체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몰입한다.
맹신자들을 계속 맹신자로 이끄는 법
숭고한 대의, 국가나 세계를 변혁하려는 운동에 나섰다면 이들 맹신자들을 변함없이 대중운동에 붙들어 매야한다. 그들에게 부푼 희망의 불을 지피고 일으키는 방법을, 그리고 유지하여 마침내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이 좌절한 맹신자들 중 가장 강경한 맹신자들, 뛰어난 광신자들을 추려내야 할 것이다. 절망적 열정에 사로잡혀 숭고한 대의에 헌신할 자들 말이다. 아마 글쓰기, 그림, 작곡 따위의 창조활동을 향한 열망에서 가차 없이 실패한 자들만큼 영구적 부적응자도 없을 것이다. 이들 지식인층의 무리는 대중운동의 끈끈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잊음으로써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레바퀴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니, 그 어떤 좌절자보다 열정적인 광신자들이 된다.
이처럼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고 지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좌절한 사람들의 심리 고유의 경향과 대응 방식을 고취하도록 도야하는 필수불가결의 기술”이다. 효과적 대중운동을 위해서 죄의식을 키우는 것 만한 것도 없다. 개인의 개성과 독립성을 벗겨내어 도덕적으로 저열하다고 가르치는 것, 구원은 자신을 잊고 전체와 하나 되는 행위이다. 유대 기독교가 그러했고, 프랑스혁명, 독일민족주의, 모든 대중운동이 그러했다. ‘나’라는 개인이 깨어나서는 안 된다. 또한 현재를 비열하고 비참한 것으로 끊임없이 묘사해야 한다. 울적하고 고단하며 억압적이고 생기 없는 개인의 삶이라는 원형을 빚어내어 현재는 단지 영광된 미래의 연결고리에 불과하다고 금욕적 설교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를 증오하고 증명 할 수 없는 미래의 환상에 맹목적인 믿음을 헌신케 해야 한다. 강력하고 영광스러우며 파괴되지 않는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는 환상,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시온주의는 바로 이러한 불멸의 민족이란 웅원한 이상의 일원이 된 존재임을 강력하게 주입한 대표적 예이다. 이것은 그 대의가 신성하거나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자신들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성립했기 때문인 것이다. 믿음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불신이 필요할 뿐이다. 의식과 이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난해하면서 모호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증명 할 수 없는 이상이어야 안전하다. 광적인 신념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은 오직 전체의 일부로서 불멸의 존재라고 느끼게 하여야 한다. 맹신자는 영원히 불안한 존재이다. 개인이 자신의 지성을 믿고 의지하는 순간 운동은 실패한다.
대중 운동의 시작과 성공
평화 시(時)의 민주주의 국가, 다소 자유로운 개인으로 구성된 체제에서 대중운동이 시작될 가능성은 없다. 더구나 자기희생을 덕목으로 하는 맹신의 환상이 확산되기에는 더없이 열악한 환경이다. 더구나 권력층과 지식층의 유대가 돈독하고, 교육 받은 자가 전부 관료이거나 이들에게 높은 지위가 인정되는 곳에서는 저항운동이 들어서기 어렵다. 조선의 양반사대부 사회가 그렇고 유럽의 중세가 그러했다. 교육 받은 자가 모두 성직자였던 시대, 양반귀족이었던 시대는 저항세력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교육이 이들의 전유물에서 풀려나는 순간 종교개혁이,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민족주의 광풍을 타고 일어난 프랑스 혁명, 독일 지식인들에 의한 민족주의 창시가 그러했다.
지식인이 끊임없이 지배질서를 소용돌이치게 하여야한다. 무능하고 무력하며 부정하고 부패하여 환멸만을 낳는 기성 권력에 대해 증오를 발산하여야 한다. 그러나 창조적 지식인은 현재에 애착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결코 현재의 파괴에 나서지 않는다. 창조의 장벽에 막혀 좌절한 지식인이어야 한다. 그들은 막힌 자신들의 열정을 강렬한 증오로 뿜어 낼 것이다. 그리곤 좌절한 사람들 - 빈민, 부적응자, 부랑자, 소수자, 청소년, 야심가들, 따분한 자, 실업자, 신빈곤층, 불평분자 - 의 운동 참여를 통해 그들의 부담스런 자유를 구제해 주어야 한다. 운동의 대열이란 “소속되고자 하는 열망, 다수의 결집에 대한 열망, 강력한 전체라는 위엄 넘치는 장관 속에서 저주 받은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해체하고자 하는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대중운동
에릭 호퍼가 이 책을 썼던 1960년대와 오늘의 시대적 환경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대중의 심리적 근인(根因)은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답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이익만 좇는 무차별적 금융자본을 앞세운 시장자유주의는 양극화의 고착화로 점차 엘리트 관료사회화 하며, 지배계급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양질의 교육받은 자가 모두 엘리트관료가 되려는 사회, 유럽의 중세와 조선 사대부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진정한 정신의 변화가 멈추고 정체되어 썩어 문드러지는 암흑의 시대, 과거로의 복귀라는 수구의 시대로 회귀하려 한다.
이는 진정한 민중봉기의 씨앗을 밟아 인류사회의 진보와 발전, 문명의 지속적 부흥을 봉쇄할 수 있다. 더구나 역사를 보는 인식조차 사대주의와 수구적 태도로 인하여 민족학적 지능이 위축되어 시민정신이 제대로 발육하지 못하고 있다. 이젠 미국을 유럽을 모방하는 자세로는 한없는 추락의 길만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새롭게 미치기 위해 우린 이러한 지배체제와 불화하여야 한다. 눌려있는 대중의 잠재적 역량은 깨어나야 하며 고인 물을 퍼내고 그래서 새로운 수로를 만들어 내야 한다. 맹신, 광신주의는 영혼의 질병이기도 하지만 이 질병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부활한다. 대중운동의 발동은 사회부흥이라는 과업을 성취하는 대중의 가장 유용한 도구이다. 무함마드, 루터, 칼뱅, 히틀러, 레닌, 스탈린 같은 광신자들도 있지만 이들 못지않게 대중운동의 생리를 터득해 인류의 혁명적 진보를 완수한 링컨, 간디, 처칠 같은 이들도 있다. 대중운동의 선동책이란 비루함이나 교활함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자칫 부패하기 쉬운 인간 사회를 교정하는 안내서로서, 사회 지도자의 대중 리더십을 위한 지침서로서 읽는다면 호퍼는 진심의 환한 미소 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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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2011-10-26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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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의 다른 이름, '희망'
박원순과 민주당이 붙었다.
박원순이 이겼다.
바보 민주당은 박원순한테, 민주당에 들어올래? 그랬다. 븅딱들.
박원순은 당연히 메롱, 했다. 당연하다.
안철수가 대통령 후보 나오면 박근혜는 쨉도 안 된단다.
한날당이 광분했다.
쟤는 컴터나 알지, 정치는 모른다구~(뭐, 그거야 닭그네 처녀가 더한 거 아님?)
안철수는 서울 시장 따위, 안 나간다고 했다. ㅋ
그런데도 그들의 인기는 최고다.
박빠~와 안빠들이 SNS에 바글바글하고,
그들의 책이 서점에서 인기리에 팔린다.
박경철까지 세트루다가...
왜 [조직]은 이런 '~빠'에게 지는 것일까?
에릭 호퍼의 통찰력 넘치는 '맹신자들'을 읽어보면 조금은 고개를 주억일 수 있다.
황우석이 '불치병, 고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했을 때, 황빠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부산에서 국회의원도, 시장도 떨어졌던 바보 노무현이 대선에 참여했을 때, 노빠가 생겼던 배경.
이런 것들을 제대로 공부한다면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수도 있을 터인데,
[조직] 사람들은 조직 외의 생각을 못하는 게 아쉽다.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의 '맹신'은 말이 맹신이지, '희망'의 다른 말이다.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는 기폭제의 역할을 하는 사상.
지도자의 품성에 기대를 걸게 해주는 사상을 만나면 사람들은 '희망'을 넘어 '맹신'에 가까운 지지를 보낸다는 것.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1940년대 미국에서 이런 통찰을 보여준 부두 노동자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책에서 맹신자들은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 의도로 쓰이기도 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역사를 바꿔나간 인물들에게도 쓰인다.
한 가지 이데올로기에 조롱당하지 않고,
세계 각지의 여러 상황을 통해 일반화를 시도하는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맹신의 시작은 '증오, 불만'에서 시작하지만,
그들은 '전망'에 매료되기 쉬워서 본격적 <맹신>에 투신한다.
그러나 대중 운동이 흔히 여러 가지 이유로 퇴조기를 맞기 때문에 '희망'만을 남겨둔 판도라의 상자처럼 보이기 쉽다.
대중의 열망을 꿰뚫어 보고 그들을 이끌 올바른 지도자를 만난다면,
희망적인 대중운동이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정당'이 가진 한계,
한날당, 민주당 등 부르조아 정당이 보여주었던 <가진자 중심의 당파성>과,
민주노동당 등이 보여주었던 <이데올로기 공세에 의한 편파성>을 이겨낼 희망을 <박원순과 안철수>라는 기표를 통해 표출하는 것이 작금의 정치 상황이다.
서울시 시장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박원순에게 상처를 내려고 난도질을 하면 할수록,
박원순에게는 <박빠>들이 똘똘 뭉치게 될 것이 당연하다.
과연 이 바람이 찻잔 속에서 돌지 않고 내년 가을까지 폭풍으로 발전할지는
<박원순과 안철수>가 가지고 있는 '올바른 정파성'의 컨텐츠가 담보해야 할 내용물이 관건인 바.
박원순의 명랑한 사회운동이 가진 힘이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천 가지 직업 등의 다양성에서 추출된 힘이
사람들에게 <맹신>의 <희망과 전망>을 제시하기를 나도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 책은 왜 사람들은 특정한 현상에 매료되는가에 대하여
딱딱한 사회학 책 말고, 아포리즘으로 가득한 수필집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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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10-09 공감(9)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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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맹신자들

왜 가난한 사람들이 진보를 지지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 이 책 읽고 다소 해소되었다. 잘 살면 잘사는 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지금의 상황보다 더 나빠질까봐 두려워하며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해한다는 사실. 그러기에 변화를 외치는 사람들을 불신한다는 것.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책. 추천.
여름 2015-07-11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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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하고 위험한 책 『맹신자들』

불온하고 위험한 책 『맹신자들』-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 + 더보기
더불어숲 2011-11-23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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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적대의 시대.
구태의연한 방식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인 에릭 호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책날개에 적혀 있는 저자 소개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일곱 살 때 갑자기 시력을 잃었다가 열다섯 살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후 미친 듯이 독서에 몰두했다는 설명이다. 한참 세상의 신기함을 맛볼 어린 나이에 자그마치 8년 동안이나 암흑기를 겪고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선택한 것이 독서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막 글자를 읽기 시작했을 때 시력을 잃게 되었기에 그 무엇보다도 글자에 대한 욕구가 커졌던 것일까. 어쨌건 수많은 새로운 이미지들을 뒤로하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은 그가 타고난 학자임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목했을 사실인 떠돌이 노동자로서의 저자의 이력이다. 에릭 호퍼는 열여덟 살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이후 “금 시굴자, 레스토랑 웨이터, 떠돌이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며 보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이 책 <맹신자들>을 발표하여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상상을 해본다. 변변한 학력도 직업도 없는 49세의 중년 노동자가 자신의 글을 출판하고 싶다고 출판사를 찾아왔을 때, 그의 원고를 진지하게 검토할 편집자는 얼마나 될까. 게다가 흥미 위주의 폭로물도 아닌 ‘대중운동의 본질에 대한 생각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사회철학서를 읽어 줄 독자는 또 얼마나 될까. 여기서 이 책에 대한 한 가지 의문이 시작된다.
“이 책은 종교운동이 되었건 사회혁명이 되었건 민족운동이 되었건 모든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특징을 다룬다.” 그는 아무리 구체적 형태가 다양할지라도 모든 대중운동에는 본질적으로 가족유사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모든 대중운동은 지지자들에게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는 의지와 단결된 행동 성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며,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대중운동이 “좌절한 사람들”과 이들을 추동하는 “효과적인 전향 기술”, 즉 선동 기술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를 입증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대상은 “광신적 기독교 신자와 광신적 이슬람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 등이다.
이 목록이 한 가지 힌트가 될 수 있을까.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광신적’이란 형용사가 붙는 것은 모두 소위 ‘미국적 가치’라 불리는 것과 대립하는 사상들이다. 더구나 책이 출판된 해가 1951년이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다시 말해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새로이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는 시기였음을 상기한다면, 호퍼가 다루고 있는 대중운동이란 것이 결국 당시의 미국과 적대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될 수 있음을, 그럼으로써 미국적 가치에 대한 옹호와 국가적 단결을 촉구하는 하나의 선전이 될 수 있음을 편집자가 눈치 챘던 것은 아닐까. 호퍼는 자신의 책이 “일절 시비를 가름하지 않으며 일절 호오를 밝히지 않는다.”고 선을 긋고 있긴 하지만, 흑인민권운동과 같이 자신이 현재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막 태동하고 있던 대중운동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나치나 공산주의와 같은 적대자들을 주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대중적 성공에 대한 음모론적 의심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찌됐건 이와 같은 자신의 집필 의도를 보여주는 서문 이후 4장 125항으로 이루어진 대중운동에 대한 호퍼의 단상이 펼쳐진다. 사회철학적 저서라고 하지만 대중운동에 대한 엄밀하고 꼼꼼한 자료조사나 치밀한 논리적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이러한 책이 출간되었다면 아마도 저자가 사용하는 ‘대중운동’이라는 개념의 애매모호함이라든지 자신의 주장에 맞는 역사적 사례만을 선별적으로 골라내어 제시하고 있다든지 하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듯싶다. 저자 스스로는 각 항 간의 유기적 연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도 하지만, 니체나 벤야민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선언적인 아포리즘의 형식으로 펼쳐놓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아포리즘 형식을 띤 글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6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순간순간 빛나는 통찰을 보여주는 구절 또한 다수 존재한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사회의 대표적 대중운동인 반MB운동과 그 최전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는 꼼수다>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MB정부가 들어선 후 3년 동안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여긴다. 이전의 두 정부가 10년 동안 쌓아왔던 많은 물질적 정신적 가치들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가 IMF의 구조조정을 받아들인 시기였으며 참여 정부가 비정규직 법안의 통과와 한미 FTA 체결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적극 도입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최하층의 삶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크레인에 올라가 300일 넘는 투쟁을 해야만 했으며, 누군가는 여전히 정리해고의 고통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 운동에 열성적으로 뛰어드는가. “불만으로 인한 소란에 맥박이 뛰는 것은 대개 상대적으로 최근에 가난해진, ‘신빈곤층’이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가 최근 3년 동안 그것을 읽어버린 이들이다. 여기서 ‘가난’을 단지 물질적 차원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꼼수다>의 4인방이 MB정부 이후 자신들의 사회적 발언권을 축소당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또한 여기에 열광하는 이들이 대부분 아이폰이나 컴퓨터를 능숙하게 사용하며 일주일에 한두 시간 정도 수다에 귀 기울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호퍼가 지적하는 ‘신빈곤층’과 이들이 묘하게 중첩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게다가 이들로부터 촉발되어 이제 사회적 구호로 자리 잡고 있는 ‘쫄지마 씨바’라는 말에서 호퍼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과도한 유추일까. “대중운동이 사무치도록 좌절한 이를 치유하는 것은 절대 진리를 설파하거나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곤경이나 학대로부터 구제해줘서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반MB운동을 국민의 지상 명령이라 여기며 ‘닥치고 통합’을 주장하는 이들과 “공동의 증오는 아무리 이질적인 구성원들이라도 하나로 결합시킨다.”는 구절이 등치되는 것도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이처럼 호퍼의 글은 전혀 다른 시간, 전혀 다른 사회에서도 하나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논증적 형태의 글이 아니라 아포리즘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속담은 수천 년이 지나도 적용가능한 사례를 찾아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호퍼의 분석을 단순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라고 폄하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떤 속담이 수천 년이 지나도 계속 언급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삶이란 것이 수천 년 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로부터 무언가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호퍼의 통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호퍼의 아포리즘 전면에 흐르는 주된 정서는 대중에 대한 ‘냉소’다. “대중운동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권력은 개인을 신뢰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그런 자들이 득세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을 경시하는 태도로 인해서 얼마든지 무자비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태도가 대중의 주된 정서와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대중운동이 광신과 같은 형태로 귀결되는 것은 결국 대중들이 가진 본질적 속성 때문이라는 비관적 인식이 그에게 깔려있다. 이러한 전제가 옳은지 그른지는 보다 깊이 있게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지금과 같이 ‘집단 지성’이라는 혹은 ‘국민의 명령’이라는 그 실체가 불분명한 이름이 어떤 절대성을 획득하고 있는 시기에 일종의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나 박원순 시장의 당선 후, 많은 지지자들이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감시할 것’이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감시보다는 적대자들에 대한 증오에만 집착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호퍼의 말처럼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대중이 운집한 장관에는 넋을 일게 마련”이기에, 대중이 만들어 내는 장관에 휩쓸리지 않고 항상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맹신자들>이 2012년 정치의 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된다.
덧붙여 <맹신자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오늘날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광신’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며칠 전 한미 FTA에 찬성표를 던진 151명의 국회의원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새로운 종류의 광신이 현대 사회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호퍼가 말한 “좌절한 사람들”의 광신이 아닌 ‘가진 자들’ 혹은 ‘상위 1%’에 의해 추동되는 광신이라는 점에서, 또한 맑스가 말한 단순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넘어 맹신적 추종자들을 양산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맹신자들>이 담아내고 있지 못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맹신자들의 증오와 적대가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는 지금, 그 내용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맹신자들>이 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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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nc 2011-11-24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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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운동의 다른 이름이 혹시 전체주의?
그는 위대하기를 원하지만, 불행한 자신을 본다.
그는 완전하기를 원하지만 불완전으로 가득 찬 자신을 본다.
그는 뭇사람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결함이 그들의 혐오와 경멸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
이렇듯 궁지에 빠진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의롭지 못하고 가장 죄악적인 정념이 태어난다.
왜냐하면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인정하게 하는 이 진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파스칼[팡세]
에릭 호퍼는 대중운동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 것일까? 그 본질을 파헤치고자 125가지 단상을 적고 있다. 대중운동의 생성과 체계를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과 선전과 구호를 도구로 삼아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게 하며 그들을 조종하고 행동하게 하는 지식인들의 행태를 보여준다. 일단 대중운동이 인간의 자유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상당히 냉소적이고 부정적이다. 나치즘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황폐화 된 직후에 나온 책이라 그 당시로는 시기적절하고도 매우 중요한 책이었으리라 보아진다. 조직되지도 않고 절망과 증오로 가득찬 대중, 특히 어떤 숭고한 대의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광신적 신념을 갖춘 맹신자들과 대중운동이 갖는 매력에 이끌린 잠재적 전향자들과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요구되며 행해졌는지 그들의 시작과 끝이 어땠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정말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분명 에릭 호퍼도 인간에 대한 불가해성과 환멸로 이 단상들을 적어나갔으리라 짐작된다.
모든 대중운동이 갖추어야 할 강령 중에 하나가 희망과 미래를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면 나치즘이나 파시즘, 공산주의 혁명 같은 대중운동은 성공한 셈인 것일까?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지적을 덧대어 볼 만 하다.
' 대중을 통솔하고 그 지지에 힘입어 대중을 움직이는 운동에는 항상 전체주의적 요소가 숨어 있다. 전체주의 정권은 이들에게 개인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역사적 운동의 주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준다. 거대한 운동에 기여한다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희생한다. 대중은 하나의 개인인 것처럼 움직인다.'
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충성심과 자기희생을 기꺼이 이끌어내고 현재를 거부하고 장미및 미래만을 바라보게 하는 힘은 조금의 의문도 의심도 없이 지속적인 힘을 발휘한다. 맹목적 신념과 모방, 자부심, 자신감, 목적의식, 숭고한 의무감, 희망과 보상 등 효과적인 대중운동은 사람들 마음 속에 죄의식을 키운다고 하였다. 대중운동은 추종자들에게 죄를 짓고 뉘우치는 범죄자의 심리와 정신 구조를 심어주는 기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 하다.
그렇다면 모든 대중운동의 다른 이름으로 '전체주의적 요소가 숨어 있는 것'으로 불리우는 것은 곤란하다. 에릭 호퍼가 바라보던 시대하고 지금 현재의 대중운동과는 분명 구별되거나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모든 대중운동 속에서 개별성과 자유를 보장받고 인간의 본성을 잃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존재라는 것을 되새겨 볼 때, 에릭 호퍼가 바라보던 시대를 반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불안한 시대에는 불안한 사람들의 출현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양성의 존중과 소통과 열려 있는 공간 속에 놓여 있을 때에만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연대와 인권과 개성을 존중 받을 곳에서만 가장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만 주어진다면 인간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과 무자비하고 집요한 박해는 광적인 신념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문을 품지 않으며 망설이지 않는 것 또한 맹신자의 악습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 배워둬야 할 것이다.
'자기에 대한 불만과 너무 쉽게 믿는 경향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자신의 참모습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치에 맞는 것과 분명한 것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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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1-16 공감(6)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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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에릭호퍼)

이 책은 모든 형식의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참가자들(주로 맹신자들)의 일련의 심리적 특성을 다룬다. ‘좌절한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일정한 가설을 세우고, 이 책의 ‘현재’인 1951년을 기준으로 대중운동을 분석, 나름대로의 맹신자들의 심리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좌절’은 임상학적 용어가 아니라 ‘인생을 낭비하거나 망쳤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뒤의 주에서 밝히고 있다.(243쪽)
‘신을 믿지 않는 시대’에 그들이 만들어 내는 ‘신들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며, 덧붙여 몽테뉴의 말을 빌어, 단순히 자신의 견해에 불과할 뿐임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논의를 제안하는 것임(14쪽)을 밝히고 있다. 저자 ‘에릭 호퍼’는 이 책을 서술할 당시는 부두노동자로서 살았으며, 평생을 길 위의 노동자로 떠돌면서 남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연구한 사회철학자였다고 한다.
대중운동의 참여자들은 그 ‘운동’을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며, 그 방법으로 ‘종교화’ 기술-현실적 목표를 숭고한 대의로 바꿔놓는 기술-을 강조(20쪽)하면서, 변화를 향해 그들의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게 만드는 ‘갈망’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대중운동의 역동기-맹신자들이 형성하고 압도하는 단계-를 다룬다.(222쪽) 달리 말하자면 일종의 ‘위기사회이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로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현 상태를 보존하고 싶어하지만, ‘좌절한 사람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고 한다.(21쪽) 그러나 ‘충만’과 ‘좌절’이라는 외적인 요소와는 상관없이 순수한 ‘의지’적인 요소만으로, 단순히 맹신하는 차원이 아니라 합리적 수준의 ‘희망을 신뢰’하는 ‘양호한’ 사람들은 여기서의 주된 논의의 관심사는 아닌 듯하다. 또한 ‘맹신자’니 ‘광신자’란 어떤 도덕적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는 것 아니라, 단순히 사실적인 ‘믿음의 정도’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빈곤층의 보수성’(23쪽), 경험은 변화의 ‘장애’가 되며, ‘경험자’들은 대개 늦게 개입한다(28쪽)는 등의 의견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빈곤층의 보수성’으로 인하여 현대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라는 것도 효율적인 기득권 유지를 위해 어쩌면 의욕적으로 ‘의도’된 결과이거나 최소한 고의적으로 ‘방치’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역사라는 놀이는 흔히 중간자의 다수자들은 제쳐 놓고 최상위와 최하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46쪽)
어찌보면 역사의 일반적 보편성이란 개별 특수성들의 사후평가 작업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중운동의 개별 참여자들과 그들의 맹신성조차도 되돌아 보면, 그들의 좌절에 대한 ‘상황적 분노’의 표현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개개인의 삶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무엇보다 간절한 막다른 길 위의 ‘전부인 삶’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있었던 것인가? 위기의 사회는 그들을 얼마나 포용했을까?
그러나 상대적으로 최근에 우리 사회의 가난해진 ‘신빈곤층’(49쪽)의 확대는, 그들의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중산층의 기억’을 보상받지 못하는 한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대중운동에 적극적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그와 관련하여서는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반항을 자극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경험이다.”(52쪽)
그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재능이 없는 한, 자유란 따분하고 번거로운 부담이다.”(55쪽)라면서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책임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능력없는 사람들이 운동에 가담한다고 한다. 나아가 “인생을 허비하고 망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유보다 평등과 우애를 더 갈망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자유는 “평등과 획일성을 세우기 위한 자유일 뿐”(57쪽)이라고 폄훼하고 있다.
‘자유’의 역사 속에서 ‘자유로부터의 소외’를 위한 투쟁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를 쟁취한 다음에는 그 ‘자유로부터의 자유’를 찾고 있는 대중들의 불안한 심리를 발견하고 있다. 살아있는 대중은 늘 불안하다. 그 중 ‘좌절한 사람들’은 자유를 찾고 있었던 것이며, ’도피의 대상인 자유‘는 더 이상의 자유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자유’의 개념이란 획일성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리적인 평등’ 정도는 아우를 수 있는 ‘부조리하지 않은 자유’이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대중이 갈망하는 자유는 자율적인 삶이라는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부터의 자유”(206쪽)이므로 “대중운동이 사무치도록 좌절한 이를 치유하는 것은 절대 진리를 설파하거나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곤경이나 학대로부터 구제해줘서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67쪽)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소수일지라도 ‘순수한 의지적 측면’을 지나치게 소홀히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은 여기서 논외로 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개인주의가 널리 퍼진 우리 시대에 연극적 주문(呪文)과 불꽃놀이 없이 자기희생이 널리 퍼질 수 있을지 의문(103쪽)이라며, 서로 나누고 협력하는 행위에 담긴 자기희생은 희망없이는 불가능하다(108쪽)고 한다. ‘희망’이란 ‘운동의 기술’로서 보다는 그 자체로서 ‘인간에 대한 믿음’의 바탕이 되는 것이리라. 또한 현재와 미래, 과거를 바라보는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회의주의자, 급진주의자, 수구주의자들의 태도비교는 상당히 흥미롭다.(52)
“대중운동이 시작되고 전파되려면 신에 대한 믿음은 없어도 가능하지만, 악마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137쪽)고 한다. 그러나 형식을 불문하고 대중운동은 그 자체로써 대부분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므로, 그 삶이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희망’를 창조해나가는 ‘자전거타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악마’이든, ‘신’이든 간에 계속하여 페달을 밟지 않으면 그 순간 바로 넘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뻔뻔한 어휘와 행동 뒤에는, 그리고 자기만 옳다는 큰소리 뒤에는 죄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142쪽)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그런 뻔뻔함 뒤에도 그러한 일말의 죄의식이라도 남아 있다면, “자신과 화해한 자만이 세계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126쪽)고 한 말처럼, 그나마 화해의 희망이라는 불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대중운동에 있어서 ‘지식인 선구자’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열광하는 대중, 신념에 주린 대중들이 그러한 주장들에 확신을 부여하여 새로운 믿음의 근원으로 삼는다.”(204쪽)고 한다. 즉 일종의 새로운 우상을 창조하여 스스로 신을 만드는 종교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운동을 개척하는 것은 지식인, 실현하는 것은 광신자, 굳건히 다지는 것은 행동가다.”(214쪽)라고 한다. “행동가는 대중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분쟁과 광신자들의 무모함으로부터 지켜낸다.”(216쪽)고 한다. 그래서 ‘좌절한 영혼’을 은밀하게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명예롭게 대함으로써 명예로운, 지도자들의 예를 들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행동가는 신념가가 아니라 법률가이며, 행동가는 새 체제의 안정과 지속성을 꾀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절충적으로 동원하므로(218쪽), “행동가의 손에서 다듬어지는 체제는 일종의 조각보”(219쪽)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자본주의니, 공산주의, 사회주의라는 체제의 논쟁도 ‘자유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안식과는 무관하게, 어찌보면 잘 짜맞춰진 ‘조각보들의 색깔논쟁’에 치우친 감이 있다. ‘조각보의 색깔’이 뭐 그리 대수인가?
“격정적인 시기가 지난 운동은 성공한 자들에게는 권력의 수단이요, 좌절한 이들에게는 아편이 된다.”(221쪽)고 한다. 대중운동이 아무리 ‘정체된 사회를 각성시키고 혁신하는 요인’(237쪽)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무기한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위기사회의 소통구조를 만드는 것이 운동의 왜곡을 방지하고, 그들을 치유하여 동행하게 하는 예방적 조치들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비록 극히 소수의 예외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좌절되지 않은, 양호한 명예로운 사람들’의 대중운동 참여 심리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지금도 진행되고 있을 모든 형식의 대중운동(삶)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특히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일부 사람들(절박한 삶)의 일면적 심리인 ‘좌절’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참고가 된다고 본다.
“한 국가의 잠재적 역량은 갈망들의 저수지와 같다.”(236쪽)는 점과, ‘광신주의’라는 ‘영혼의 질병’이 부활이라는 ‘기적의 도구’로도 작용하는 것을 발견(241쪽)하면서, 그것이 명백하든, 명백하지 않든 간에 자신의 어떤 분노와 좌절, 그리고 ‘갈망’들이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잠재적 동인이 되고 있음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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踰城 2011-10-14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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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 신념과 일편단심 충성심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10일 한미FTA 비준안 처리 촉구 기자회견을 하는 과정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관을 동원한 퍼포먼스를 했다. 어버이연합은 크고 작은 여러 시민운동 현장이나, 노동운동 현장, 또는 선거국면에서 자주 등장해 도를 넘는 행동으로 많은 이들을 어이없게 하는 장면을 연출하곤 한다. 달밤에도 현장에서는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않는다는 이 어르신들은 노구를 이끌고 도대체 무엇때문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이땅의 어른으로서 듣지 않아도 좋을 비난듣기를 자청하는 걸까. 이들을 맹신자로 보아도 좋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들이 맹신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트위터에서 자주 만나곤하는 자칭 타칭 '노빠'로 일컫어지는 이들은 전후좌우를 무시하고, 무조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욕되게 하는 장면은 용서치 않겠노라고 분노하곤 한다. 엄연히 한미 FTA의 시작은 노 전 대통령이었것만, 노 대통령의 FTA와 MB의 FTA는 다르다며 열을 올리고, 이에 대에 토를 다는 이에게는 트윗상의 뭇매도 불사하곤 한다. 이들에게 노무현이란 함부로 넘을 수 없는 성역이다. 이들 또한 맹신자로 보아도 좋을 것인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맹신자, 광신자는 먼저 종교인을 들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중에서도 타종교에 배타적인 개신교 신자들을 들 수 있겠는데, 개신교 신자라고 100% 타종교에 배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지만, 그들에게조차도 하느님은 유일신이며, 타종교는 존중되어서는 안되는 사이비이다. 이들은 자신이 믿는 유일신인 하느님을 전도해 만세계가 하느님의 자식임을 증거하는 일을 종교인 스스로 최고의 가치라고 여긴다. 이들은 과연 맹신자일까?
위의 세가지 경우의 맹신자들은 자신이 추종하는 것은 다르지만, '맹신'이라는 의미에 있어서 그들은 한가지 이다. 그것은 맹목적 신념과 일편단심의 충성심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내가 믿는 어떤 것의 상대편에 서있는 것은 모두 사이비이며, 절대 악이다. 그렇기에 나의 신념인 그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무엇이다.
이책은 한마디로 맹신자들의 심리를 해석하는 책인데, 나는 이 책을 통해 어버이연합의 말도 안되는 보수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쉽게 어버이연합의 노인들은 알바비 때문에 모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이 책에 의해 내 나름으로 해석해 보자면, 그들을 이끄는 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며, 변화를 두려워한다. 또한, 자신들의 쓸모에 대해 깊은 고민을 갖은 사람들이다. 퇴역군인 처럼 인생의 뒤안길에 선 어버이들은 이땅의 불안한 젊은이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옳지않아. 너희들이 뭘 알아, 전쟁을 겪은 우리들은 알아, 그것은 빨갱이 짓이야!."
나름의 맹신, 자신은 언제고 옳다는 믿음. 그 믿음이 끝나는 날 자신의 목숨이 끝나는 것이다.
나는 가끔 내 자신이 맹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 역시 '노빠'의 한 사람으로 이제는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어떻든 욕되게 하고 싶지 않다. 그의 올바름, 그의 신념, 그가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 그분을 욕되게 하는 것은 일부러라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어진다. 또 나는 카톨릭 신자로 하느님이 유일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나의 이 믿음들이 주입되고, 허황된 어떤 근거없는 맹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맹신은 빈약한 내 자신을 우회해 다른 대상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표현되곤 한다. 나는 약하지만, 내가 믿는 그것은 옳다는 신념, 대상에 대한 동일시가 맹신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된 것, 나름의 신념은 지키되 탄력성 또한 놓지 않을 것. 무책임한 집단에 숨기보다는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 행동하기 전에 생각할 것. 나는 맹신자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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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1-11-1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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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길 위'에서 '길 위의 철학자'를 읽다.
맹신자들.
'맹신자들' 은 에릭 호퍼가 지은 여러 권의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책이며, 또한 상대적으로 그의 다른 저서들에 비해서 많이 알려진 책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 우리나라에서의 에릭 호퍼는 그리 인지도가 높은 학자는 아니지만 말이지요. 고백하자면 저는 저자 에릭 호퍼에 대해서 그리 많은 사실을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이 책을 접하기 전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은 그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 정도였는데, 그는 사실 이 책의 책날개에도 소개되어 있는 것처럼 시력을 잃었지만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이 된 후 세상의 모든 텍스트를 읽어버리겠다는 듯이 책들을 읽어내려갔던 대단한 독서광이었으며 마지막으로 길 위의 철학자, 라는 이명(異名)이 붙을 정도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조금만 더 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아본다면, 그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머무를 기색을 보이면 주저없이 자신의 짐을 챙겨서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애초에 그가 처음 길을 떠나서 도착한 곳이 '노숙할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온화했고, 길가에 오렌지가 열린' 캘리포니아였으니 말 다했지요. 경제적인 이익도 그를 붙잡지 못했고 사랑도 그를 붙잡지 못하였으나 단 하나 그를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학문에 대한 열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보면, 물론 저도 조금 들쳐본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제 1권의 그 첫머리에 이렇게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앎의 즐거움을 원한다. 인간의 지능은 감각에서 ... 지혜로 나아간다. 지혜란 그 어떤 원인이나 원리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이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에릭 호퍼의 경우가 위의 저 말에 특히 잘 들어맞는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평생을 일을 하면서 책을 읽고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단순히 무학(無學)노동자가 자격지심에서 공부를 한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나 뜨거웠으며, 그 열정의 결과물도 너무나 사유의 폭이 깊었었지요. 즉, 그의 열정은 순수한 앎에 대한 욕구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릭 호퍼가 지혜로 나아갔을까요? 네, 지혜의 정의가 위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원인과 원리를 파헤치는 학문이라면 에릭 호퍼는 충분히 나아갔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사유와 연구의 결과물로 바로 이 책 '맹신자들' 을 발표할 수 있었으니 말이지요.
이 책에서 에릭 호퍼는 대중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유감없이 풀어헤쳐놓습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그의 사유의 흐름은 우리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쓰인 사유의 방법은 저자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육하원칙의 그것과 닮아있습니다. 대중운동이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까요? 네, 먼저 이 대중운동이라는 현상은 누가 일으키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 던질 만한 질문은 언제 이런 현상이 발발하는가, 가 되겠군요. 육하원칙에 따라서 큰 질문을 던지고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다시 세분화해서 들어가면서 질문을 던져나가면 됩니다. 이런 작업은 마치 의사가 환자를 접하여 무슨 질병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을 질문을 던져가면서 이끌어내는 것과도 흡사합니다. 아니 유사할 수 밖에 없겠지요. 의사가 한 개인을 고친다면 사회철학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사회가 어떤 질병을 앓고 있으며 그 치료법은 무엇인가, 를 모색하는 것이 될테니깐요. 그래서 저자는 대중운동은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 잘 일어나는가를 고찰한 뒤, 그것이 누구에 일어나는지를 알아봅니다. 그 후에 어떻게 대중운동이 그 힘을 가지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책의 제목에서 쓰인 맹신자들은 이 대중운동에 기꺼히 협력하여 한 팔을 거드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집단의 일이라면 눈 코 뜰새 없이 뛰어들며 자신의 집단이 가장 고귀한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 그런 광신자들과 크게 다른 의미로 쓰이지는 않았지요. 그래서 이런 맹신자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들은 좌절하고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특히 현실에 대한 좌절이 매우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지요.
좌절한 사람들에게 대중 운동은 자기의 삶을 통째로 대체하는 무언가, 혹은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그러나 자기 혼자 힘으로는 이끌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에릭 호퍼, 맹신자들, 30p.
그런데 이런 에릭호퍼의 대중운동에 대한 주장이 모두 적합한 것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오늘날의 대중운동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기전들을 따라서 해석하면 그 발단과 결말을 모두 예측할 수 있는 것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학교 시험문제에서도 '모두' 라는 말이 쓰이면 답이 아니라고 했었던가요, 굳이 대중운동의 양상이 다양하므로 단일화된 해석으로 모두 우겨넣을 수 없다, 라는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다른 문제점들이 몇 가지 발견됩니다. 가장 먼저 보이는 문제점으로는 이미 하나의 결론을 내려놓고 그 결론에 적합한 역사적 예들을 드는 경향입니다. 저자가 '소수자들', 특히 '주류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소수자'들이 '맹신자들'로의 '잠재적 전향' 가능성이 있는 무리 중 하나라는 주장을 하면서 그 예로 정통파 유대인과 해방 유대인의 예, 남부의 격리된 흑인과 북부의 격리되지 않은 흑인의 예를 드는 것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지요. 저자는 이미 저런 예를 들기 전에 확고한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례들은 그저 자신의 생각을 강화해주는 그런 기제로 작용할 뿐입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또는 실제로 주류에 속하고자 노력하는 소수자들이 그들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주류에 대한 대중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방법상의 문제입니다. 이미 마음속에서 결론이 내려져있다면 이후에 반증되는 사례가 도출되었을때 유연하게 넘어가기가 어렵겠지요. 설령 이러한 것이 그저 선후관계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다고 하여, 현상을 관찰후 도출한 결론을 먼저 적었을 뿐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내린 결론에 대한 검증이 필요할터인데 책에서는 각 챕터의 결론에 대한 검증은 '최근 러시아에서는..', '최근 미국에서는...' 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문제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심리학적인 해석이 조금 지나치지 않는가, 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뼈저리게 실망한다. 따라서 바로 이 과도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이 이타적 태도를 가장 설득력 있게 옹호하곤 한다.
같은 책, 77p.
위의 인용한 부분은 '이기적인 사람'이 '맹신자들'이 되기 쉽다는 부분의 첫머리에 나온 글이지요. 사실 크게 문제될 것 없이 술술 읽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뼈저리게 실망한다' 라는 문장과 '이타적 태도를 설득력있게 옹호하곤 한다' 라는 문장은 그다지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기적인 인간이 뼈저리게 실망하면 이타적 태도를 설득력 있게 옹호하게 되는건가요? 굳이 해석하자면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의) 이기적 태도에 실망하여 이타적 태도의 옹호자로 변하게 된다, 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이 문장 또한 근거가 마땅히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기대는 곳은 바로 심리학적인 해석입니다. '이러 이러하니깐 (심리학적으로)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지요. 근거가 명확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 문잔들이 거부감없이 읽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에서 연유합니다. 이미 여기에 대해서는 '반동형성'이라는 심리학적인 방어 기제의 지나친 남용, 이라는 이야기로 이 책에 대한 다른 서평들에서도 지적되어왔지요. 그리고 하나만 더 지적을 하자면, 책을 여는 이야기에서는 저자는 분명 '이 책은 일절 시비를 가름하지 않고 호오를 밝히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대중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더 많이 드러난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애초에 대중운동에 대해서 나는 반대한다, 라는 입장이거나, 혹은 나는 찬성한다, 라는 입장이라면 이러한 호오를 드러내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겠습니다만 처음에 나는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고 싶다, 라는 선언을 하였음에도 광신자, 등과 같은 어구로 반감을 조금씩 넣어두게 되면 아무래도 주장의 객관성이 의심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는 원문을 살펴보아야하겠습니다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모두 적합하지는 않다, 라고 해서 모두 쓸모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겠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쓰일 수 있는 기준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중운동에 대해 깊이 연구한 책은 이 책 이전에는 그리 많지 않았었지요. 이런 책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탑을 쌓듯이 하나 둘 높여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릭 호퍼는 이 책을 통하여 대중 운동에 대한 여러 예를 바탕으로 그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날카로운 사유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쉬운 말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평생을 길 위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살았던 그 자신의 삶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려운 말로만 점철되고 남에게 자신의 전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 글은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유가 아닌 남의 사유를 계속 빌려오는 것 또한 무분별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몇 번 참조는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앵무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에릭 호퍼는 늘 독자의 생각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생각을 주고 받으며 논의해보자는 것이니' 그러니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말대로, '한 번 생각해'보는 겁니다. 대중운동이 어떤 것인지, 저자가 말한 것이 옳은지, 얼마나 적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의 생각은 어떠한지, 라고. 그래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모두가 대중운동에 대한 각자의 사유를 발전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연 2011-11-1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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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새삼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책은 의심하라.
(네줄 요약)
객관을 빙자한 '반공주의자', '극렬 개인주의자'의 악의적인 프로파간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진영에 대항하는 자유세계(1세계) 예찬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에 더해 사회 비판의 목소리들에 '니 마음이 병들어서 그래'라고 묵살할 수 있는 그럴 듯한 근거와 '단상'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중 운동' 자체를 냉소적이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만 보고 있으니, 이 책이 갖고 있는 날카로움은 대체로 (변화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의) 반공보수세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될 거다.
사람들의 불만, 현실을 타파하려는 열정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구체적인 불편함과 고단함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에, 멘토를 자처한 자들의 성공담과 정서적인 위무에 녹아내리거나 혹은 앞장선 누군가의 손가락질과 돌팔매질을 따라 피아식별 따위 없이 만만한 마녀를 사냥하며 '자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은 지금도 그런 모습들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맹신자들'이란 제목이 뭔가 힌트를 줄 거 같은 기대감을 던졌다.
사실 에릭 호퍼의 이 책은 그런 내 나름의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저자는 이른바 '대중운동의 역동기', 맹신자들이 형성되고 사태를 압도하는 시기의 동학을 살피고 그들 내부의 심리를 분석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의 전제는 간명하다 못해 저열해 보이기까지 한다.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에는 맹신자들이 위세를 떨치며, 그들은 주로 좌절한 채 증오와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는 대중 운동의 비전이나 내용엔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일반적인 양태와 동력원를 분석하려 한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일견 굉장히 야심차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어느 순간 사회를 들썩이는 무정향의 대중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원천에 대해 설명을 해보려는 거다. 무엇을 주장하고 요구하던 간에, 어느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간에 중요한 것은 그런 움직임 뒤에 숨어있는 에너지 덩어리이며, 그건 시공간을 초월한 일종의 규칙과 단계를 따른다는 가설. 촛불집회가 되었건, 황우석 사태가 되었건, 87년 민주화항쟁이건 아니면 광주항쟁이던 간에 그 기저엔 같은 게 있단 이야기다.
문제는 여러가지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왜 새삼 '맹신자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헤친 이시대의 고전'이란 카피를 달고 나왔는지, 그리고 조선이니 동아 따위 보수언론에서 이 책을 화제의 신간으로 내세웠는지 의심하고 있을 정도다. 그들이 이 책을 앞세워 말하려는 맹신자들은 누구일까,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을 강조함에도 종내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득 드러내는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에릭 호퍼의 반세기전 저작이 새삼 고전으로 떠받들릴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저자가 '대중 운동'의 정의조차 없이 글을 열며 '좌절한', '광신', '맹신' 따위 모호하고 무책임한 용어를 남발하는 건 참는다 치자. 우선 개인의 병리적 심리에 대한 통찰은 제법 날카로우나 이를 사회의 동학에 그대로 이입하고 충분한 근거없이 일반적인 동력으로 단정짓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또 하나, 저자가 살던 냉전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채 반공 이데올로기와 오리엔탈리즘 따위의 편향된 사고 프레임에 기반한 편견들을 근거라고 제시하고 있단 점이다. 근거박약한, 응집력없는 조각난 '단상'들일 뿐이다.
결국 그는 '대중 운동'을 암묵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자율적이고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자주적인 사람'은 대중 운동을 조장하고 독려하는 일부 음모가, 불평분자에 넘어가지 않으나 심리적으로 공허하거나 불안정한 사람, 소위 좌절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 운동이 촉발되고 진행된다는 식이다. 개인적인 차원의 심리 문제와 트라우마, 불만족스러움이 어떤 식으로던 현실을 타파하고 조직적 가치와 지향에 스스로를 투신하려는 자기 희생 의지를 낳는다는 거다.
저자는 사회 변화 혹은 소란의 원인과 에너지원을 개인에서 찾고 있지만, 정말 그런가. 그들이 어떻게 양산되고 있는지, 개인의 도덕성이나 참을성 이전에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지 않을까. 예외적으로 생겨난 불평분자가 아니라 특정 계층과 그룹에서 공통된 지반을 갖춘 불만과 좌절이 형성되고 있다면, 역시 구조적인 문제 혹은 모순이 있다고 봐야 한다. 저자는 그들을 그저 문제 해결의 의지나 탐색 노력은 없이 어떤 방향으로던 불만을 터뜨려 버리겠다는 마음만 가득한 '맹신자', 혹은 '광신자'라 일컫지만 말이다.
저자의 성찰 역시 견고하진 않으며, 그의 단호한 어조를 뒷받침할 사례들 역시 빈약하긴 매한가지다. 냉전기 전형적인 체제경쟁과 상호비방의 '자유진영' 논리와 어투를 그대로 가져다 쓴 소련 공산주의 비판에서는 레드 콤플렉스의 시대적 한계와 이에 편승한 저자의 몰역사적 인식이 드러나고, 중국이나 아시아에 대한 언급들은 이들 지역이 오랜 기간 역사적 저발전 단계에 있었던 것처럼 보는 오리엔탈리즘이 묻어난다. 그가 드는 사례들 역시, 단편적이고 편의적인 취사선택을 거쳐 주워섬길 뿐이다.
그저 당대의 믿음과 당대의 '상식'에 기댄 한계가 너무도 뚜렷하다. 아무래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승전국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진영'이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 세력에 대한 냉전을 새롭게 시작한 시점에 인간의 자유와 개인주의를 지켜내겠다는 자유세계 이데올로그의 냄새가 너무 난다. 저자도 수차례 '악마'라 지칭하고 있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그리고 '광신자'로 싸잡아 묘사되는 '대중운동가', '사회 불평분자'에 대한 혐오는 왠지 2010년대 가스통을 들고 있는 '어버이연합'과 같은 냄새를 풍긴다.
그럼에도 어떤 점에서 그의 책은 니체의 관점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목적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가족과 부족과 국가와 종교와 같은 특정 조직이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필연적으로 제약하고 억압하게 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라는 점에서 니체가 떠오르는 거다. 그러나 니체가 보통 일반인과 초인(ubermensch) 사이의 간극을 말하며 인간의 고양을 말했다면, 이 책의 구도는 굉장히 협소하고 불편하다. 지독한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버전이랄까.
아마도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애초 저자의 의도와도 같이 사회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거나 '대중 운동' 일반에 대한 해명을 위한 참고 자료로 인용되기보다는, 주로 종교적 광신자나 폭탄테러범의 내면 심리를 읽는데 제한적으로 참조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 책을 지금 한국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역시 마찬가지 맥락을 짚어야 하지 않을까. 이른바 '개독인'들이 왜 '개독인'이 되고 말았는지, 라거나 '어버이연합'이 왜 '어버이연합'이 되었는지라거나.
물론 중간에 말했던 내 의심이 유효하다면, 이 책의 얼개를 손쉽게 뒤집어 씌운다면 '멍청하고 좌절한 대중'이 몇몇 선동가의 외침에 놀아나며 '미국산 소고기가 위험하다'느니, '4대강이 무너진다'느니, 'FTA하면 나라 망한다'느니 따위의 선전선동을 '맹신'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가 더욱 간편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금 이런 책을 '고전'이라 상찬하며 서점 책꽂이에 진열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행간을 의심하게 되는 거다. 이 책에 시공간을 넘어설만한 통찰과 혜안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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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zsche 2018-03-2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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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대중운동의 본질을 호도한 거리의 철학자 < 맹신자들 >
[서평] 에릭 호퍼(Eric Hoffer) 저, 이민아 역 < 맹신자들 The True Believer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을 읽고 / 2011. 09., 255쪽, 궁리출판사
공부모임 교재로 채택되어 읽게 된 에릭 호퍼의 대표 저서. 이 책은 '거리 위의 철학자'로 유명했던 에릭 호퍼를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책을 읽은 소감은 서구의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이 20세기 초중반 대중(민중)의 광범위한 저항운동을 폄하하고 비난하기 위해 반갑게 맞이하였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호퍼가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운영방식을 바꾸고자 나섰던 이들을 줄곧 개인적으로 무능하고 이기적이며 자기부정과 권태에서 출발한 광신도라 규정하기 때문이다.
1951년에 첫 출간된 이 책을 1990년 대한교육공사가 한국에 처음 번역 출간했던 제목은 <대중운동의 실상>이었다. ‘실상’이라는 단어에서 뭔가 ‘불온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책은 “민주화와 노동운동 등 사회 운동'을 억누르려는 정부와 저항적 대중운동을 삐딱하게 보고자 하는 권위주의적 관변학계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복음이 되었던 책”(장정일의 독서일기, 한겨레 2011. 10. 14.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00866.html)이기도 했다.
물론 장정일은 이 책의 순기능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적 통찰로 충만한 이 책은, 딱 소리와 함께 야구장을 가로지르는 ‘빨랫줄 타구’처럼, 대중운동을 좌우·선악 양단으로 구획하지 않는다. 호퍼는 수구나 진보 공히 대중 동원이나 선동에 취약하다고 보며, 대중운동을 무조건 악으로 타매하기보다 “정체된 사회를 각성시키고 혁신하는 요인”으로 긍정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맹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을 돌보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오늘의 주체가 일망감시와 통치성에 속속들이 식민화된 지금, 지은이의 채근은 성공한 예외자의 순진한 해결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번에 출간된 제목은 'The True Believer'에 맞는 번역인 '독실한 신자'가 아니라 '맹신자'다. 이 제목 또한 출판사와 역자의 의도와 편견이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신념이나 사상 따위를 다른 것으로 바꿈"이라는 뜻을 가진 '전향'이라는 단어를, 좌절하거나 현실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대중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지칭하는 데서도 출판사와 번역자의 수준 또는 악의가 느껴진다.
에릭 호퍼는 서문에서 여러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책을 발간했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유형의 헌신과 신념, 권력 의지, 단결과 자기희생에는 어떤 획일적인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광신적 기독교 신자, 광신적 이슬람교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광신'이라는 점에서 한 부류로 취급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중운동'은 반체제 저항운동뿐만 아니라 인간이 집단을 만들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운동을 아우른다. 초기 기독교 운동, 종교개혁 운동,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나치즘, 일본의 근대화, 시오니즘 운동 등을 포괄하는 의미다.
호퍼는 태동기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극적으로 변한다는 전망에 이끌리기 쉽다고 주장한다. 대중운동의 지도자도 이러한 대중의 열망을 꿰뚫어보고 보잘것없는 현재를 극복하면 영광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대중을 선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밋빛 미래에 이끌리는 이는 주로 좌절한 사람이며, 현재의 자신을 경멸하는 좌절한 사람은 자기의 삶이 통째로 바뀌는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변화를 갈망하는 이러한 좌절한 이들의 심리 상태 때문에 모든 초기의(태동기) 대중운동은 좌절한 사람들한테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호퍼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쓸모없다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자신에게서 벗어나 좀 더 완전하고 숭고해 보이는 무언가를 추종하기가 쉽다. 숭고한 대의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자신의 하찮은 삶, 망가진 인생으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이다. 실로 좌절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어떤 대상이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이 종교든 사회혁명운동이든 민족운동이든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호퍼에 따르면 광신적 공산주의자가 광신적 애국주의자나 광신적 가톨릭 신도로 바뀌는 일은 이치에 맞다. 맹신자에게는 대의명분이나 이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 여부에 있다.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거부하고 하나의 조직에 완전하게 하나된다는 호퍼의 주장은, 조직이나 대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일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고 조직이 그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폭력을 동원해야 한다면 더 없이 무자비해질 수 있다는 논리로 비약된다.
따라서 호퍼의 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극단적 테러리스트,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광신도'로 해석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호퍼는 결론을 대신하여 좋은 지도자의 예로 링컨, 간디, F.D. 루스벨트, 처칠 같은 지도자를 꼽는다. 이들은 히틀러, 스탈린, 루터, 칼뱅과는 달리, 좌절한 영혼을 대중운동의 재료로 삼지 않았다. 이들 "지도자의 자신감은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며, 자신이 인류를 명예롭게 대하지 않는 한, 아무도 명예로울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에릭 호퍼가 대중운동의 본질에 대한 단상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다분히 선험적이고 단정적이다. 특히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자신이 쓸모없다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자신에게서 벗어나 좀 더 완전하고 숭고해 보이는 무언가를 추종하기" 쉽고 "숭고한 대의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자신의 하찮은 삶, 망가진 인생으로부터 도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압과 세뇌에 의해 노예같은 삶을 살던 개인들, 민중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나서기 위해 각성하고 자립하는 운동을 심하게 폄하하고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호퍼가 대중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속성을 규정하는 방식에는 대부분 합리성이나 논리적인 연관은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좌절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생겨난다거나 쉽게 남을 믿는 사람이 남에게 사기치는 경향이 강하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는 상식적으로도 이론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사람이 좌절하게 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를 좌절하게 하는 요인이 내부나 외부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고립적인 환경인지 집단적인 환경인지에 따라, 교육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따라 당사자나 집단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자는 외부에서 맹종할 대상을 찾을 수도 있지만, 역으로 삶을 포기하면서 움직임 자체를 거부할 가능성이 있기도 하다. 호퍼는 사람들의 특정한 처지와 심리상태에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신의 의도에만 한정시키는 오류를 범한 셈이다.
독일의 경우에도,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심각한 좌절에 빠진 독일 민중들이 히틀러를 선택한 것은 히틀러의 대중 선동이 크게 작용하였으나 그 이전에 민중들이 지지하고 참여했던 독일 사회민주당 등 진보좌파 진영이 노선과 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이탈리아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호퍼의 주장에 타당성과 시사점이 있는 부분도 있다. 대중운동의 대오 속에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뛰어 들었거나 광신적, 맹신적 속성을 가진 개인이 일부 존재할 수 있으며,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 모두에게 맹신적 속성이 내재해 있을 수 있다. 그런 불완전한 개인이나 개인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그런 맹신적 개인이 대중운동 내에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대중운동이 애초 목적에서 변질될 수 있음을 잊지 않도록 호퍼가 경고해주는 셈이다.
특정 최근 논란이 된 '일베(일간베스트)'의 일부의 경우 극단적인 자기 혐오에서 비롯된 가능성이 있으며, 정치인 지지자 중에서 명백히 '빠' 성향을 보이거나 극단적인 이념성향, 공격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경계할 일이다.
광신적 대중운동이나 이념운동에 빠진 사람은 '광신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또 다른 광신적 운동으로 변질된다는 지적은 크게 공감이 된다. 1980년대에 이념적으로 과격하고 광신적이었던 김영환 씨 등의 뉴라이트 세력이 친일을 찬양하고 사회운동에 적대적인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라는 말이 근거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선전 선동만으로 내키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움직이지는 못하며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주입시키지도 못하고 이미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못한다"(p.156)는 호퍼의 주장 역시 시사점이 크다. 희망이 없는 선전선동만으로는 대중운동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2008년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지금까지 시민의식을 가진 이들과 민주당 등 정치권이 정권과 기득권에 반대하는 선전선동만으로 대중과 유권자에게 지지를 구하다가 2012년 총선, 대선에서 연거푸 패배한 것이 호퍼의 그런 주장을 입증한 셈이다.
한국의 사회운동 진영과 진보정당 진영이 선전선동 이외에 '희망'과 '대안'을 꾸준히 모색해야 함을 경고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운동에 대거 참여한 대중들이 "자기희생을 각오하는 열정"을 쏟아 붓는 반면 이런 주체가 만들어놓은 그 대중운동의 열매를 가져가는 이들은 "개인의 성공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는 호퍼의 주장은 선견지명이 있다.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과를 야당 정치인이 독식하고, 그 이후의 대중운동 역시 일부 출세주의적 운동가들이 보수 정치권에 몸담으면서 사회운동과 진보정당을 약화시켜온 것이 한국의 대중운동, 진보정당 운동사였기 때문이다.
[ 2013년 6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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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구름 2013-06-0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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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운동의 본질에 대한 심리/철학적 아포리즘
광신적 기독교 신자와 광신적 이슬람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광신적 성향은 서로 같아 보일뿐더러 서로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그들에게 팽창과 세계 지배 의지를 불어넣는 힘도 마찬가지다. 모든 유형의 헌신과 신념, 권력 의지, 단결과 자기희생에는 어떤 획일적인 속성이 있다. 숭고한 대의와 교조의 내용은 서로 크게 다르지만, 그것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획일적인 요소들이다. 파스칼처럼 기독교 교리로부터 효과적이고 정확한 근거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공산주의와 나치즘, 민족주의에서도 효과적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운동이 목숨을 거는 숭고한 대의가 아무리 다를지라도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에 목숨을 건다. - p12, 서문
'좌절한 사람들의 자기 부정을 향한 갈망', 간단하게 표현하면 저자가 말하는 광신자들의 본질을 이리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는 광신현상이 관찰되는 여러 대중 운동에 대해서 긍정적하거나 부정하는 식의 가치판단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독자들에게 자신은 여러 대중 운동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을 나누고 논의하자고 초대할 뿐입니다. 겸손한 자세이기는 하지만, 독자들에게는 상당한 도전감을 안겨주는 모양새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좌절한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갈 수 있는, 사회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는 불평분자들을 가장 흔히 관찰할 수 있는 곳의 범주로 빈민, 부적응자, 부랑자, 소수자, 청소년, 야심가들, 일련의 악덕이나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들, 무능한 사람들, 과도하게 이기적인 사람들, 따분한 사람들, 죄인들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저자가 말하는 여러 성공적인 대중운동과 그 지도자들, 열성적인 지지자들의 본질이 상당히 어두워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달갑지 않은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미국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오직 그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저자가 말하는 '사회의 쓰레기 같은 존재와 불평분자'들은 순전히 기존의 구체제의 관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변화된 신체제의 관점에서는 위험을 무릎 쓴 선구자, 목숨을 바친 혁명가, 숭고한 대의에 자신을 희생한 운동가 등으로 충분히 표현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은 여러 대중 운동에 짙게 배여있는 광신현상에 대한 125개의 단상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광신의 본질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시작하여, 대중 운동의 처음 지도자와 지지자들의 본질에 대한 고찰,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중 운동이 싹트고, 단결과 희생이라는 동력을 통해 성장하고, 창조적으로 또는 파괴적으로 그 결말을 맺는 과정에 대해서까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아마도 책의 처음을 대하다 보면 저자가 대중운동에 대해서 일종의 혐오감마저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광신적인 대중운동의 본질이나 지지자들의 본질에 대한 저자의 단상들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러한 대중운동이 결국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각성시키며 혁신하는 역할을 한다고 인정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이미지는 저자가 자신의 연구결과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저술해 나가는 과정의 산물일 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마지막장에서 언급하는 대중운동의 시작에서 성숙기까지를 각 단계를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지도자 유형으로 지식인, 광신자, 실천적인 행동가 등을 들고 있는 것이나 좋은 지도자는 링컨이나 간디 같은 대중운동의 역동기를 언제 끝내줄 아는 지혜로운 이들 이었다고 표명하는 것을 보면, 결국 저자도 사회의 변화와 각성을 위한 대중운동의 가치에 대해서 숙고하고 긍정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 자체보다는 이 책이 현재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저자의 통찰이 지금의 나 자신과 우리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많이 다를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관심사인 FTA를 두고 대립하고 있는 두 진영을 들 수도 있겠습니다.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그리고 그 사이에는 칼끝같은 단절면만 있을 뿐, 서로를 인정하고 상대편의 말에 귀기울여 타협하지 못하고 결국 한쪽에서는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체루탄이라는 극단으로 기억되는 폭력(?)으로 반항하는 모습을 배경으로 서로가 옳다고 국민을 팔면서 대립하는 모습을 보면, 말없이 지켜보는 국민의 반정도는 찬성하고 나머지 반정도는 반대한다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과거의 개방 사례들을 예로 들며 누군가는 FTA가 우리에게 또다른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우리나라를 미국의 속국으로 만드는 지극히 불평등한 조약이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디까지가 득이 되고 어디부터가 문제이고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정성 담긴 설명을 듣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 두 무리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진정으로 FTA 조항들에 대해서 낱낱이 뜯어보면서 그 내용들이 의미하는 바를 따져보고 숙고해 보았는지,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제대로 알기 위해 전문가들에게 자문이라도 구하며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해 보았는지에 대해서 냉정하게 물어본다면 그들은 무어라고 할는지..... 결국 한 쪽은 자유시장경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는 맹신에, 또 다른 한 쪽은 진보라는 자신들이 정파적 이념에 매몰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아닐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들이 간디나 링컨같은 좋은 지도자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을 끝까지 지속시키며 자신들의 권력이나 영향력을 유지하고하 했던 나쁜 지도자들이었을뿐이라는 씁쓸함만 남기고 마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서로를 원수같이 대하며 모욕하기에 바쁜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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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heaven 2011-11-2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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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시각들

미국의 에릭호퍼란 작가가 쓴책인데. 지은이 소개를 보면 어렵게 살다가 이책을 1951년도에 발표했다.이책은 나치즘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황폐화된후 직후에 나와 집단 동일시에 관한 연구서로 그에게 엄청난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오늘날에도 테러리스트와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지침서가 되고 있다라고 쓰여져 있다.
며칠전 읽은 [불가능한것의 가능성]이 나온 출판사가 궁리인데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좀 일관성이 없는것 같다.조선일보는 아니더라도 중앙일보 정도의 출판사가 기획해서 나올 성향의 책인것 같다.쭉 읽다 보면 테러리스트의 심리라던지 부랑자,사회불만자,뭐기타...심리를 잘 묘사한 느낌도 없지않아 있어 보인다.
히틀러=스탈린 뭐 이정도는 그렇게 등치시킬수 있지 않나 싶다가 나중에는 레닌마저도 광신자 취급한다.히틀러와 레닌이 별반 차이없어 보인다.도대체 대중운동을 모두 그런식으로 치부해 버리면 모두 또라이들만 이사회에 존재하는 꼴이다.
그리고 이 책이 좀 더 수상하고 이상한건 옮긴이가 책을 옮기면서 서론이나 후기 뭐 이런 해설도 없어 이책에서 뭘 전달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이책에서 대중운동을하는 모든이는 맹신자라는 건지?뭐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집단심리를 이해할수 있다지만 그보단 우리 한국사회에 더 많은 대중운동에대한 우파들의 편협된 시각을 대변해 주는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좀 씁슬하다.
개정판이 나오면 좀 알차게 기획의도 라던지, 뭐 이책에서 얻을게 뭔지 설명이나 좀 해 줬으면 싶다.출판사 '궁리'가 좀 괜찮은줄 알았는데,좀 성의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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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2012-04-2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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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나치즘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광풍이 휩쓸고 간 194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부두 노동자 에릭 호퍼는 일하는 틈틈이 철학 논문을 썼다. 왜 어떤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모두 벗어던지고, 국가ㆍ교회ㆍ정당 따위의 집단에 광적으로 매달리는가? 호퍼의 첫 번째 저서이자 대표작인 <맹신자들>은 종교운동, 사회혁명운동, 민족운동 등 여러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속성을 밝히기 위한 시도이다.
호퍼는 초기 기독교에서 현대의 공산주의, 나치즘, 민족주의까지를 아우르며 광신 현상과 대중운동을 철저하게 연구했다. 개인이 광신자가 되는 과정을 추적한 그의 책은 이후 종교적ㆍ이념적 근본주의자, 테러리스트,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규명한 고전이 되었으며, 오늘날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논의거리를 던지고 있다.
목차
서문
1부 대중운동의 매력
1장 변화를 향한 갈망
2장 자기부정을 향한 갈망
3장 대중운동의 호환성
2부 잠재적 전향자
4장 인간사에서 불명예스러운 자들의 역할
5장 가난한 사람
신생 빈민
극빈자
자유를 얻은 빈민
창조적인 빈민 똘똘 뭉치는 빈민
6장 부적응자
7장 이기적인 사람
8장 무한한 기회를 눈앞에 둔 야심가
9장 소수자
10장 권태에 빠진 사람
11장 죄인 더보기
책속에서
오늘날에는 우리 대부분이 맹신자의 동기와 반응에 어느 정도 식견을 갖추어야 할 필요가 있다. 신을 믿지 않은 시대라지만 대중의 경향이 반종교적이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의 양상을 보이기 대문이다. 맹신자는 도처에서 행군하면서 전향하고 저항함으로써 자기 형상대로 세계를 빚고 있다. (13) - 不二
입에 풀칠하기 위해 해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노동하는 사람들은 불평불만도, 꿈도 키우지 못한다. 중국의 대중이 반항적이지 않은 한 가지 이유는 죽자 살자 노력해야 간신히 먹고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을 위한 사투는 ˝역동적이기는커녕 정적이다.˝ (51) - 不二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재능이 없는 한, 자유란 따분하고 번거로운 부담이다. 능력 없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는 있어 무엇하겠는가? 사람들이 대중운동에 가담하는 것은 개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자면, 열렬한 나치 젊은이의 말마따나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다. (55) - 不二
유대인의 경우도 비슷한데, 유럽의 유대인들이 보여준 행동으로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의 행동을 미루어 짐작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하던 영국 식민성의 정책은 논리적으로는 타당했으나 통찰이 부족했다. 그들은 히틀러가 6백만 유대인을 심각한 저항 없이 멸할 수 있었으니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60만 정도는 그다지 어렵지 않... 더보기
죽음과 죽임이 어떤 의례나 의식, 연극 공연이나 놀이의 일부일 때는 쉽게 느껴진다. 죽음 앞에서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는 가상의 장치 같은 것이 필요하다. 현실을 살아가는 불완전한 우리에게 이 세상이나 저 세상에 자기 목숨과 바꿔도 될 것은 없다. 오직 자신을 무대 위의... 배우로 여길 때 죽음은 공포와 최후라는 의미를 잃고 가상...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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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글
“얼음 같은 기지로 빛나며 …… 지독할 정도로 정확한 분석이 빼곡한 『맹신자들』은 이성을 깨우는 강력한 책이다.”
- 뉴욕 타임스 (미국 일간지)
“호퍼의 저작은 우리 시대 가장 도발적인 책의 반열에 든다.”
-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
“대중운동의 본질을 독창적이고 명석하게 탐구한 이 책은 우리 시대 사회사상에 이바지한다.”
- 아서M.슐레진저 2세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조선일보
- 조선일보 Books 북Zine 2011년 10월 01일자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1년 10월 01일 새로나온 책
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1년 10월 14일
저자 및 역자소개
에릭 호퍼 (Eric Hoffer)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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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사회철학자. 1902년 뉴욕 브롱크스의 독일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가구 제작 일에 종사했다.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갑자기 시력을 잃어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열다섯 살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뒤 미친 듯이 독서에 몰두했다. 열여덟 살에 아버지마저 여의고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금 시굴자, 레스토랑 웨이터, 떠돌이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며 보냈다. 샌프란시스코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집필한 첫 번째 저서 『맹신자들The True Believer』을 1951년에 발... 더보기
최근작 : <맹신자들>,<영혼의 연금술>,<길 위의 철학자> … 총 43종 (모두보기)
이민아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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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여자 대학교에서 중문학을 공부했고, 영문책과 중문책을 번역한다. 옮긴 책으로 『HIIT의 과학』, 『창문 너머로』, 『웃음이 닮았다』, 『온더무브』, 『색맹의 섬』 등을 비롯해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해석에 반대한다』, 『즉흥연기』, 『맹신자들』, 『어셴든』 등 다수가 있다.
9.11 테러에서 노르웨이 테러까지, 무엇이 인간을 극단주의로 몰고 가는가?
예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니었고 마르크스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지만, 신념에 주린 대중은 그렇지 않다. 어떤 주의(ism)나 이념(ideology)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인생과 우주는 하나의 단순한 공식과 같다. 자신이 절대적 진리를 소유했다는 확신은 누군가를 배타적으로 규정하면서 극악무도한 폭력을 낳기도 한다. 어떤 신념을 위해 기꺼이 자기 목숨을 바치거나 수많은 무고한 시민을 살생한다. 9?11 테러나 얼마 전 발생한 노르웨이의 테러는 신념이 광기를 낳은 나쁜 예에 속한다. 이 외에도 역사 속에는 다양한 종교적?이념적 근본주의자, 극단적 테러리스트, 자살폭탄자 등이 있어왔다. 미국의 사회철학자 에릭 호퍼가 믿음이 너무나 두터워 더 이상 의심하지 않는 자, 맹신자(숭고한 대의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광신적 신념가)의 마음을 낱낱이 해부한다.
눈이 멀고 귀가 먼 믿음, 맹신 현상을 낱낱이 해부하다!
독학한 부두 노동자의 아포리즘
1940년대 샌프란시스코의 부두 노동자 에릭 호퍼는 일하는 틈틈이 글을 썼다. 대공황의 반작용으로 파시즘, 나치즘, 공산주의 등 전체주의 체제가 발흥하는 시기를 보내며 써내려간 아포리즘이었다. 1951년 ‘독학한 부두 노동자’의 첫 책은 발표되었고, 그는 이 저서로 큰 명성을 얻었다. 책이 출간된 당시 전 세계는 제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 스탈린의 충격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냉전의 물결이 막 일어나던 차였다.
나치와 스탈린의 추종자에게는 어떠한 심리적 동기가 있을까? 나아가 어떤 이들은 왜 자기 자신을 벗어던지고 국가나 교회, 정당 따위의 집단에 광적으로 몰두할까? 호퍼는 도발적인 분석으로 광신 현상의 심리적 요인과 대중운동의 본질을 추적한다.
이 책은 여러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다룬다. 호퍼는 모든 유형의 헌신과 신념, 권력 의지, 단결과 자기희생에는 어떤 획일적인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광신적 기독교 신자, 광신적 이슬람교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광신’이라는 점에서 한 부류로 취급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중운동’은 반체제 저항운동뿐만 아니라 인간이 집단을 만들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운동을 아우른다. 초기 기독교 운동, 종교개혁 운동,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나치즘, 일본의 근대화, 시오니즘 운동 등을 포괄하는 의미다.
태동기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극적으로 변한다는 전망에 이끌리기 쉽다. 대중운동의 지도자도 이러한 대중의 열망을 꿰뚫어보고 보잘것없는 현재를 극복하면 영광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대중을 선동한다. 이러한 장밋빛 미래에 이끌리는 이는 주로 좌절한 사람이다. 현재의 자신을 경멸하는 좌절한 사람은 자기의 삶이 통째로 바뀌는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
변화를 갈망하는 이러한 좌절한 이들의 심리 상태 때문에 모든 초기의(태동기) 대중운동은 좌절한 사람들한테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호퍼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쓸모없다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자신에게서 벗어나 좀 더 완전하고 숭고해 보이는 무언가를 추종하기가 쉽다. 숭고한 대의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자신의 하찮은 삶, 망가진 인생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다. 실로 좌절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어떤 대상이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이 종교든 사회혁명운동이든 민족운동이든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호퍼에 따르면 광신적 공산주의자가 광신적 애국주의자나 광신적 가톨릭 신도로 바뀌는 일은 이치에 맞다. 맹신자에게는 대의명분이나 이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 여부에 있다.
따라서 사람이 어떤 신념이나 대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일이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거부하고 하나의 조직에 완전하게 하나된다. 그는 교회나 국가, 정당 같은 신성한 조직의 품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열정과 힘을 경험한다. 그러므로 조직이나 대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일은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다. 조직이 그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폭력을 동원해야 한다면 더 없이 무자비해질 수도 있다. 이렇듯 개인이 광신자가 되는 과정을 영리하게 추적한 호퍼의 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극단적 테러리스트,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지침서가 되고 있다.
불확실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호퍼의 목소리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 책은 단순히 대중운동론을 다루는 책이 아니다. 인간 내면과 행동을 명석하고 압축적으로 분석해낸 심리서이자,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동기와 심리, 참여자의 유형과 내면 등을 추적한 사회철학서이기도 하다. 특히 군대, 증오, 설득과 강압, 지식인, 소수자 등을 논하는 호퍼의 혜안은 아주 빛난다. 호퍼는 마지막 장에서 대중운동의 발단과 성숙기까지를 살피며, 대중운동이 제대로 지속되기 위해서는 세 유형의 사람이 발전 단계에 따라 각각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중운동의 토대를 닦는 것은 지식인, 대중운동을 실현하는 것은 광신자, 대중운동을 굳건히 다지는 것은 실천적인 행동가라야 한다고. 나치즘이 재앙으로 끝난 것은 히틀러라는 광신적 지도자가 성숙기까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호퍼는 좋은 지도자의 예로 링컨, 간디, F. D. 루스벨트, 처칠 같은 지도자를 꼽는다. 이들은 히틀러, 스탈린, 루터, 칼뱅과는 달리, 좌절한 영혼을 대중운동의 재료로 삼지 않았다. 이들 “지도자의 자신감은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며, 자신이 인류를 명예롭게 대하지 않는 한, 아무도 명예로울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초기(역동기 혹은 활성기) 대중운동을 촉발하고 주도하는 맹신자들에게 호퍼는 일종의 혐오감을 가지고 접근하는 듯하지만, 대중운동이 정체된 사회를 각성하고 혁신하는 요인이 된다고 강조한다. 역동기 대중운동은 본래의 목적이 얼마나 숭고했건 간에 크든 작든 해악을 남긴다. 호퍼는 역동기 대중운동이 지나치게 긴 것은 좋지 않으며 바람직한 지도자는 간디와 같이 역동기를 언제 끝내야 하는지 간파해야 한다고 제언한다. 대중운동의 목표는 숭고할 필요가 없다. “신사의 나라라는 잉글랜드의 이상”, “은퇴자의 연금 생활이라는 프랑스의 이상”은 구체적이고 제한적이다. 모호한 목표는 극단주의가 탄생하는 여지를 만들기 때문이다.
육체노동자로 일하며 평생 책 읽고 글 쓰는 일을 쉬지 않았던 호퍼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사건이 역사를 만든다”고 믿었다. 자신의 독자적인 개성과 정체성을 포기하고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호퍼는 경계했다. 그는 “자신의 귀보다는 눈을 더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이미 정해진 행동 강령을 맹종하는 것이 아닌 자기의 판단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기만의 삶의 기획하는 이였다. 불확실한 세상에서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절대 진리’나 ‘기적’을 찾고 있다. 격렬한 변화의 시대에 호퍼의 목소리가 여전히 의미 있는 까닭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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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도 허투루 넘어갈 수 없다. 좋은 책은 50페이지 내에서 결판난다고 하던데, 나는 지금 30 페이지에 있다.
sumoverpath 2014-11-04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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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5개 줬고 호퍼의 다른 책도 찾아서 읽게 만들더군요
문사철 2015-05-03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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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운동의 광신적인 힘을 낱낱이 해부했다. 종교적, 민족주의적, 공산주자등을 통하여 맹신자들의 광신의 여러가지를 볼수 있다.
거북이 2016-02-2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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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이 없는 감성은 맹목적이며, 감성이 없는 이성은 공허하다-Kant
nautes 2011-09-29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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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가들의 글은 행간에 힘이있고 자신감이있고, 철학이존재하여 날 이끈다. 호퍼의 글은 마치 한판 붙어보자는 식이다.
systemofadown 2011-12-22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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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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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맹신자들
˝공동의 증오는 아무리 이질적인 구성원이라도 하나로 결집시킨다.˝ 는 구절이 강하게 와닿는다. 지금 우리 사회 대부분 구성원 (여기서의 구성원은 좌절한 패배자들을 의미하는게 아니라, 올바른 정의를 구현하고자 하는 다수라는 의미로 해석해 봤다)들이 갖고 있는 공동된 증오심은 그들을 하나로 만들어줬다.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가 도래하길 염원하면서 그 증오가 무모한 맹신이 아닌 올바른 결집력을 만들어 가기를 기대해 본다. ˝펑~~˝ 제대로 터져주길...
munsun09 2017-04-18 공감(27)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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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갈과 예수.
전갈과 예수.
영화 < 크라잉게임 / 닐 조던, 1993 > 에는 " 개구리와 전갈 " 에 대한 우화가 나온다. 수영을 하지 못하는 전갈은 헤엄치는 개구리에게 등에 업혀서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정을 한다. 그러자 개구리는 성질 고약한 전갈이 자신을 물까봐 거절한다. 이에 전갈은 어이없다는 듯 한 마디 한다. " 이봐, 개구리 양반 ! 내가 자네를 물면 우린 둘 다 강물에 빠져 죽는다네. 내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거라 생각하는가 ? " 가만 생각해 보니, 전갈이 한 말이 옳은 듯하여 개구리는 그를 태우고 강을 건넌다. 그런데 전갈은 약속을 져버리고 강 한가운데에서 개구리'를 문다. 전갈이 말한다. " 미안해 ! 이게 나의 천성인걸. " 그래서 개구리와 전갈 모두 강물에 빠져 죽는다는 우화.
이 우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하다. 천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순수했던 한때'를 기억하는데 사실 그것은 자아도취'에 지나지 않는다. 어릴 때'는 순수했으나 사회 생활 하면서 타락했다는 변명은 우리가 흔히 범하게 되는 거짓말'이다. 같은 이유로 과거로 돌아가면 개과천선해서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겠다는 말도 뻥이다. 개망나니'가 과거로 돌아가 새로운 삶을 산다고 해서 그 천성'을 버리기는 힘들다. 인간이란 어차피 생긴데로 노는 법이다. < 천성 > 을 두고 < 성선설 > 이나 < 성악설 > 중 한쪽을 선택해야 된다면 < 성악설 > 에 한 표'를 던지겠다.
왜냐하면 < 성선설 > 은 인간을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는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개인적 판단에 의한 논리적 비약'을 허용한다면, 병아리도 아니면서 비약, 비약, 비약 한 번 나열하련다 : < 성악설 > 은 지나치게 비관적인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에게서 희망'을 읽는 자세'이다. 인간을 긍정적으로 보는 문장들은 대부분 종교에 기댄 힐링 서적과 자기계발서'가 팔 할'이다. 하지만 이러한 서적들은 겉으로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빈 껍데기'이다. 당근과 채찍뿐이다. 반면 인문학은 " 인간은 본질적으로 괴물이 될 수 있다는 자세 " 에서 출발한다. 인문학은 인간이라는 괴물'을 탐구하는 영역이다. 역설적이지만 희망이란 이러한 반성과 성찰'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열매'다.
불교 사상'은 성악설에 가까운 듯하다. 불교용어인 " 교화 " 란 부처의 진리로 사람을 가르쳐 착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천성이 < 선 > 도 아니요 < 악 > 도 아닌 < 무 > 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인간이란 기본적으로 교화'를 통해서 후천적으로 선'을 얻는 과정이라면 불교는 적어도 성선설은 아니지 않은가 ? 기독교의 세계관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원죄'를 가지고 태어난 운명이니깐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성악설'을 주장하면 나를 사회 불만 세력'으로 간주한다. 그리고는 늘 이런 주장을 한다. " 이봐, 곰곰생각하는발 ! 그렇다면 이토록 순진무구한 아이들이 악의 씨'란 말이오 ?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보고 말씀하시구랴 ! 가족이란 신성한 겁니다. 부르르르르르. " 그럴 때마다 나는 늘 당당하게 말한다. " 아이들은 < 악의 씨' > 가 아니라 < 아기 씨' > 에서 태어난 존재죠. "
신성한 가족 이데올로기'라는 주제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나는 가족 신화'는 해체되어야 된다고 믿는다. 가족 신화 대신 모성 신화'가 그 자리를 차지해야 된다. 현대 혈연 중심 사회인 가족주의'는 부패하기 가장 좋은 구조'다. " 우리가 남이가 ? " 는 대표적인 유사 혈맹자들이 즐겨 쓰는 해병전우회用 혈서 같다. 차, 카, 게, 살, 장 ! 가족 중심 사회인 가톨릭 국가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북유럽 국가보다 부정부패 지수'가 월등하게 높은 이유는 가족주의'가 부정 부패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가족주의를 버리고 개인주의'가 이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만약에 이러한 가족 해체 주장'이 과격한 북조선 빨갱이들이 한 소리'라고 한다면, 나는 얼마든지 그에 대한 반격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 나..... 그런 놈이다.
대중운동에 대한 125가지 단상'이라는 부제가 붙은 < 맹신자들 / 에릭 호퍼, 1951 > 은 얼핏 보면 대중운동'에 대해 빅엿'을 날리는 것 같다. 할 일 없는 눈먼 놈들이 지랄하는 것'으로 읽힐 수도 있다. 학창시절에 최루탄 좀 던져봤다고 비분강개'하여 울분을 토해내는 리뷰'가 몇몇 있던데 과연 그런 식으로 읽을 필요가 있을까 ? 이 책이 쓰여진 시점에서 보면 이해 못할 부분은 아니다. 1,2차 세계대전이 막 지난, 대중의 집단적 광기가 휩쓴 시절에 쓰여졌다는 점을 고려해야 되지 않을까. 이 책에서 말하는 < 대중 운동 > 은 사실 < 대중 선동 > 으로 바뀌어야 의미가 명확해진다. 에릭 호퍼의 지나치게 보수적 시각이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몇몇 부분에서는 무릎을 탁 치며 아, 할 정도'로 예리한 부분도 많다. 그는 가족주의와 기독교에 대해 말하는 대목이다.
그렇지만 우리 시대의 어떤 대중운동도 초기 기독교만큼 가족에 대해 적개심을 거리낌없이 표출하지는 않았다. 예수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
- 맹신자들, 63
에릭 호퍼의 지적은 옳다. 예수는 십자가를 든 혁명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사랑을 가르쳤지만 동시에 정당하게 분노하는 방법도 설파했다. 예수는 썩어빠진 이교도 사회를 혁명을 통해서 개혁하기를 원했다. 혁명이란 본질적으로 기존의 견고한 공동체'를 해체시키는 일이다. 이 공동체를 이루는 근간이 바로 가족'이다. 그래서 예수는 가족 해체'를 주장한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는 그,그그그그급진주의자'였다. 예수는 현대적 의미의 가족 울타리'를 확대할 것을 당부했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의 범위를 넘어서 이웃, 나아가 인류 모두의 가족화를 설파하지 않았던가 ? 예수는 혈연이라는 가족'를 해체하고 더 큰 대안 가족을 받아들이라고 말한 청년이었다. 그렇다면 부처는 ? 부처야말로 가족의 탄생을 경멸했던 사람이었다. 가족이란 욕망이 탄생되는 무간지옥'이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와 부처는 성악설을 근간으로 해서 가족의 해체'를 주장한 사람'들이었다. ( 여기서 해체란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지 말 그대로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 그런데 대한민국 기독교는 가족의 의미'를 완전히 오해했다. 성선설과 가족 신화가 기독교 기복신앙과 서로 뒤엉키면서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한국형 가족주의는 장점은 적고 단점이 많은 불치병이 되었다. 가족이 가문'으로 확대되어서 가문의 일원'으로써 책무를 다 하라고 요구하면 그때부터 갈등은 시작된다. 시부모는 사사건건 다른 여자의 남자가 된 아들을 여전히 지시하고 통제하려 든다. < 가족의 심리학 > 이라는 책을 쓴 임상심리학자 토니 험프러스'는 시원하게 내뱉는다. " 시부랄, 그런 부모라면 의절해버리쇼 ! 가족의 중심은 부부가 되어야지 외부 가족이 간섭하면 엉망진창이 된다오. "
누누이 주장하는 바이지만 한국 사회'에서 핵가족 문제'보다 심각한 것은 대가족 문화'다. 한국 사회는 대가족화'를 건강한 가족 문화'라고 치부하면서 핵가족화'를 불안한 가족 형태라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근거없는 뻥이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가족 해체가 아니라 가족 축소'다. 가족은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최시중이 여자는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아야 한다고 주접을 떨 때 이미 이 사회를 지랄같은 사회'가 된 것이다. 비혼자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것은 고쳐야 할 것 가운데 하나다. 결혼은 선택이지 필수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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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3-08-24 공감(11) 댓글(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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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주의, 영혼의 질병인가? 사회 부흥의 도구인가?
꽤나 발칙한 인간 정신, 그리고 사회심리에 대한 해체이다. 어떤 지배 질서에 반목하는 존재들의 광신적인 몰입이 없다면 진보도 발전도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주류의 무능과 무력함이 노정될 때 자기모멸과 자기 책임회피를 도모하는 좌절한 인간들의 결집이 대중운동의 본성이며, 바로 이러한 운동에 참여하는 맹신적 믿음에 포획되는 인간의 심리를 역사적 통찰을 통해 분석해 내고 있다. 또한 교활한 언어로 말한다면 민중봉기를 위한 심리교본이자 대중운동 지도자의 지침서라고 해도 될 듯하다.
인간의 역사 이래 이러한 대중운동의 유형은 종교적 맹신, 민족주의적 맹신, 체제와 이념에 대한 맹신이라는 종교화된 광신적 현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무릇 인류의 역사는 기존의 질서를 전복함으로써 새로이 열리는 과정의 반복이다. 이러한 전복, 혁명은 대중이 질서정연하고 평화로우며 쾌적한 세상에서 실현 된 적은 없다. 현실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무력감에 젖어들며, “창조적 물줄기가 메말라버려” 좌절하게 되는 시대를 토양으로 한다. 설혹 이와 같은 환경이 무르익어 민심이 이반되어 있지 않을지라도 운동할 적정의 대지를 조성하고, 대중을 설득하여 운동의 대열에 참여케 하는 종교화된 열정을 주입하고 유지하며 혁명을 도모 할 수도 있다. 실제 역사는 그런 모습들을 보여준다.
맹신자들은 대체누구인가?
그렇다면 운동에 참여할 대상인 대중이란 누가 적절한가? 지배 질서에 냉소적이고 저항하는 사람들은 누구란 말인가? ‘에릭 호퍼’는 그들을 ‘좌절한’ 사람들이라고 답한다. 현재의 삶에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세계를 좋은 곳으로 인식하는데 굳이 현실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결국 변화를 선호하는 것은 좌절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좌절의 원인이야 재산이기도 하며, 창조력이기도 할 것이고, 사회의 지위 등 계급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해소되지 못한 권태에 만연한 자이기도 할 것이며, 이기심으로 뼈저린 실망에 사로잡힌 자일수도 있고, 죄의식에 휩싸인 인간일 수도 있다.
한편 이 좌절한 사람들은 결코 중산층의 대중에서 출현하지 않는다. 역사란 놀이는 항상 최상과 최하위층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평균적인 인간들인 중산층은 타성적이어서 현재의 삶을 파괴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최하층의 사람들이 두드러진 영향을 발휘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현재 상태를 털끝만치도 존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언제든 현재의 인생을 내버리고 파괴할 준비가 되어있는”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상층의 혁명도 이와 다르지 않다. 17세기 영국의 지주와 귀족이 사회질서를 전복한 부자들이 일으킨‘종획운동’이나, 19세기 초‘산업혁명’은 현재를 파괴함으로써 혁명을 완수한 불만세력의 대표적 봉기이다.
그렇다면 이들 좌절한 사람들의 열정적 헌신에 의해 결집된 대중운동을 성숙, 유지시키고, 성공적 혁명 완수를 위한 요소와 조건들은 무엇일까? 이 좌절한 사람들의 속성을 이해하는 것에 해답이 있다.
이들에게 대중운동이란 자기발전 욕구를 충족시켜서가 아니라 자기부정이란 열망을 충족시켜준다는 데 있는 것이다. 즉 대중운동의 숭고한 대의에 대한 신념이 잃어버린 자신의 믿음을 대신한, 개인적 희망을 대체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여 몰입한다.
맹신자들을 계속 맹신자로 이끄는 법
이 좌절한 맹신자들 중 가장 강경한 맹신자들, 뛰어난 광신자들을 추려내야 할 것이다. 절망적 열정에 사로잡혀 숭고한 대의에 헌신할 자들 말이다. 아마 글쓰기, 그림, 작곡 따위의 창조활동을 향한 열망에서 가차 없이 실패한 자들만큼 영구적 부적응자도 없을 것이다. 이들 지식인층의 무리는 대중운동의 끈끈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을 잊음으로써 영원히 끝나지 않을 수레바퀴에서 헤어 나오는 것이니, 그 어떤 좌절자보다 열정적인 광신자들이 된다.
이처럼 “지지자들을 끌어들이고 지키는 것은 본질적으로 좌절한 사람들의 심리 고유의 경향과 대응 방식을 고취하도록 도야하는 필수불가결의 기술”이다. 효과적 대중운동을 위해서 죄의식을 키우는 것 만한 것도 없다. 개인의 개성과 독립성을 벗겨내어 도덕적으로 저열하다고 가르치는 것, 구원은 자신을 잊고 전체와 하나 되는 행위이다. 유대 기독교가 그러했고, 프랑스혁명, 독일민족주의, 모든 대중운동이 그러했다. ‘나’라는 개인이 깨어나서는 안 된다. 또한 현재를 비열하고 비참한 것으로 끊임없이 묘사해야 한다. 울적하고 고단하며 억압적이고 생기 없는 개인의 삶이라는 원형을 빚어내어 현재는 단지 영광된 미래의 연결고리에 불과하다고 금욕적 설교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를 증오하고 증명 할 수 없는 미래의 환상에 맹목적인 믿음을 헌신케 해야 한다. 강력하고 영광스러우며 파괴되지 않는 무언가의 일부가 된다는 환상, 팔레스타인 유대인의 시온주의는 바로 이러한 불멸의 민족이란 웅원한 이상의 일원이 된 존재임을 강력하게 주입한 대표적 예이다. 이것은 그 대의가 신성하거나 정의로워서가 아니다. 자신들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무언가가 성립했기 때문인 것이다. 믿음을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불신이 필요할 뿐이다. 의식과 이성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절대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난해하면서 모호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증명 할 수 없는 이상이어야 안전하다. 광적인 신념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은 오직 전체의 일부로서 불멸의 존재라고 느끼게 하여야 한다. 맹신자는 영원히 불안한 존재이다. 개인이 자신의 지성을 믿고 의지하는 순간 운동은 실패한다.
대중 운동의 시작과 성공
평화 시(時)의 민주주의 국가, 다소 자유로운 개인으로 구성된 체제에서 대중운동이 시작될 가능성은 없다. 더구나 자기희생을 덕목으로 하는 맹신의 환상이 확산되기에는 더없이 열악한 환경이다. 더구나 권력층과 지식층의 유대가 돈독하고, 교육 받은 자가 전부 관료이거나 이들에게 높은 지위가 인정되는 곳에서는 저항운동이 들어서기 어렵다. 조선의 양반사대부 사회가 그렇고 유럽의 중세가 그러했다. 교육 받은 자가 모두 성직자였던 시대, 양반귀족이었던 시대는 저항세력이 자리 잡을 여지가 없다. 그러나 교육이 이들의 전유물에서 풀려나는 순간 종교개혁이,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민족주의 광풍을 타고 일어난 프랑스 혁명, 독일 지식인들에 의한 민족주의 창시가 그러했다.
지식인이 끊임없이 지배질서를 소용돌이치게 하여야한다. 무능하고 무력하며 부정하고 부패하여 환멸만을 낳는 기성 권력에 대해 증오를 발산하여야 한다. 그러나 창조적 지식인은 현재에 애착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결코 현재의 파괴에 나서지 않는다. 창조의 장벽에 막혀 좌절한 지식인이어야 한다. 그들은 막힌 자신들의 열정을 강렬한 증오로 뿜어 낼 것이다. 그리곤 좌절한 사람들 - 빈민, 부적응자, 부랑자, 소수자, 청소년, 야심가들, 따분한 자, 실업자, 신빈곤층, 불평분자 - 의 운동 참여를 통해 그들의 부담스런 자유를 구제해 주어야 한다. 운동의 대열이란 “소속되고자 하는 열망, 다수의 결집에 대한 열망, 강력한 전체라는 위엄 넘치는 장관 속에서 저주 받은 개인으로서의 존재를 해체하고자 하는 열망”을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대중운동
에릭 호퍼가 이 책을 썼던 1960년대와 오늘의 시대적 환경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대중의 심리적 근인(根因)은 바뀌기는커녕 오히려 더더욱 답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이익만 좇는 무차별적 금융자본을 앞세운 시장자유주의는 양극화의 고착화로 점차 엘리트 관료사회화 하며, 지배계급을 고착화시키고 있다. 양질의 교육받은 자가 모두 엘리트관료가 되려는 사회, 유럽의 중세와 조선 사대부사회와 다를 것이 없다. 진정한 정신의 변화가 멈추고 정체되어 썩어 문드러지는 암흑의 시대, 과거로의 복귀라는 수구의 시대로 회귀하려 한다.
이는 진정한 민중봉기의 씨앗을 밟아 인류사회의 진보와 발전, 문명의 지속적 부흥을 봉쇄할 수 있다. 더구나 역사를 보는 인식조차 사대주의와 수구적 태도로 인하여 민족학적 지능이 위축되어 시민정신이 제대로 발육하지 못하고 있다. 이젠 미국을 유럽을 모방하는 자세로는 한없는 추락의 길만을 마주할지도 모른다. 새롭게 미치기 위해 우린 이러한 지배체제와 불화하여야 한다. 눌려있는 대중의 잠재적 역량은 깨어나야 하며 고인 물을 퍼내고 그래서 새로운 수로를 만들어 내야 한다. 맹신, 광신주의는 영혼의 질병이기도 하지만 이 질병을 통해서 우리 인간은 부활한다. 대중운동의 발동은 사회부흥이라는 과업을 성취하는 대중의 가장 유용한 도구이다. 무함마드, 루터, 칼뱅, 히틀러, 레닌, 스탈린 같은 광신자들도 있지만 이들 못지않게 대중운동의 생리를 터득해 인류의 혁명적 진보를 완수한 링컨, 간디, 처칠 같은 이들도 있다. 대중운동의 선동책이란 비루함이나 교활함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자칫 부패하기 쉬운 인간 사회를 교정하는 안내서로서, 사회 지도자의 대중 리더십을 위한 지침서로서 읽는다면 호퍼는 진심의 환한 미소 지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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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식 2011-10-26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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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의 다른 이름, '희망'
박원순과 민주당이 붙었다.
박원순이 이겼다.
바보 민주당은 박원순한테, 민주당에 들어올래? 그랬다. 븅딱들.
박원순은 당연히 메롱, 했다. 당연하다.
안철수가 대통령 후보 나오면 박근혜는 쨉도 안 된단다.
한날당이 광분했다.
쟤는 컴터나 알지, 정치는 모른다구~(뭐, 그거야 닭그네 처녀가 더한 거 아님?)
안철수는 서울 시장 따위, 안 나간다고 했다. ㅋ
그런데도 그들의 인기는 최고다.
박빠~와 안빠들이 SNS에 바글바글하고,
그들의 책이 서점에서 인기리에 팔린다.
박경철까지 세트루다가...
왜 [조직]은 이런 '~빠'에게 지는 것일까?
에릭 호퍼의 통찰력 넘치는 '맹신자들'을 읽어보면 조금은 고개를 주억일 수 있다.
황우석이 '불치병, 고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했을 때, 황빠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배경과,
부산에서 국회의원도, 시장도 떨어졌던 바보 노무현이 대선에 참여했을 때, 노빠가 생겼던 배경.
이런 것들을 제대로 공부한다면 다음 대선에서 승리할 수도 있을 터인데,
[조직] 사람들은 조직 외의 생각을 못하는 게 아쉽다.
에릭 호퍼의 맹신자들의 '맹신'은 말이 맹신이지, '희망'의 다른 말이다.
민중들에게 <희망>을 주는 기폭제의 역할을 하는 사상.
지도자의 품성에 기대를 걸게 해주는 사상을 만나면 사람들은 '희망'을 넘어 '맹신'에 가까운 지지를 보낸다는 것.
민족주의와 제국주의가 횡행하던 1940년대 미국에서 이런 통찰을 보여준 부두 노동자가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 책에서 맹신자들은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적 의도로 쓰이기도 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역사를 바꿔나간 인물들에게도 쓰인다.
한 가지 이데올로기에 조롱당하지 않고,
세계 각지의 여러 상황을 통해 일반화를 시도하는 작가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책이다.
맹신의 시작은 '증오, 불만'에서 시작하지만,
그들은 '전망'에 매료되기 쉬워서 본격적 <맹신>에 투신한다.
그러나 대중 운동이 흔히 여러 가지 이유로 퇴조기를 맞기 때문에 '희망'만을 남겨둔 판도라의 상자처럼 보이기 쉽다.
대중의 열망을 꿰뚫어 보고 그들을 이끌 올바른 지도자를 만난다면,
희망적인 대중운동이 불가능한 것도 아닐 것이다.
내가 보기에, 한국의 '정당'이 가진 한계,
한날당, 민주당 등 부르조아 정당이 보여주었던 <가진자 중심의 당파성>과,
민주노동당 등이 보여주었던 <이데올로기 공세에 의한 편파성>을 이겨낼 희망을 <박원순과 안철수>라는 기표를 통해 표출하는 것이 작금의 정치 상황이다.
서울시 시장선거에서 한나라당이 박원순에게 상처를 내려고 난도질을 하면 할수록,
박원순에게는 <박빠>들이 똘똘 뭉치게 될 것이 당연하다.
과연 이 바람이 찻잔 속에서 돌지 않고 내년 가을까지 폭풍으로 발전할지는
<박원순과 안철수>가 가지고 있는 '올바른 정파성'의 컨텐츠가 담보해야 할 내용물이 관건인 바.
박원순의 명랑한 사회운동이 가진 힘이
그리고 그가 제시하는 천 가지 직업 등의 다양성에서 추출된 힘이
사람들에게 <맹신>의 <희망과 전망>을 제시하기를 나도 간절히 바라게 된다.
이 책은 왜 사람들은 특정한 현상에 매료되는가에 대하여
딱딱한 사회학 책 말고, 아포리즘으로 가득한 수필집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읽으면 좋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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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1-10-09 공감(9)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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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맹신자들
왜 가난한 사람들이 진보를 지지 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 이 책 읽고 다소 해소되었다. 잘 살면 잘사는 대로 힘들면 힘든대로 지금의 상황보다 더 나빠질까봐 두려워하며 지금의 상황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해한다는 사실. 그러기에 변화를 외치는 사람들을 불신한다는 것. 읽고 공부할 수 있는 책. 추천.
여름 2015-07-11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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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하고 위험한 책 『맹신자들』
불온하고 위험한 책 『맹신자들』-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 + 더보기
더불어숲 2011-11-23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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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와 적대의 시대.
구태의연한 방식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 책의 저자인 에릭 호퍼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책날개에 적혀 있는 저자 소개는 두 가지 점에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하나는 일곱 살 때 갑자기 시력을 잃었다가 열다섯 살에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한 후 미친 듯이 독서에 몰두했다는 설명이다. 한참 세상의 신기함을 맛볼 어린 나이에 자그마치 8년 동안이나 암흑기를 겪고 다시 세상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가 선택한 것이 독서라는 사실이 놀라웠다. 막 글자를 읽기 시작했을 때 시력을 잃게 되었기에 그 무엇보다도 글자에 대한 욕구가 커졌던 것일까. 어쨌건 수많은 새로운 이미지들을 뒤로하고 책 속으로 빠져들었다는 것은 그가 타고난 학자임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책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목했을 사실인 떠돌이 노동자로서의 저자의 이력이다. 에릭 호퍼는 열여덟 살에 양친을 모두 여의고 이후 “금 시굴자, 레스토랑 웨이터, 떠돌이 노동자 등으로 일하면서,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고 글쓰기를 하며 보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부두 노동자로 일하면서 이 책 <맹신자들>을 발표하여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상상을 해본다. 변변한 학력도 직업도 없는 49세의 중년 노동자가 자신의 글을 출판하고 싶다고 출판사를 찾아왔을 때, 그의 원고를 진지하게 검토할 편집자는 얼마나 될까. 게다가 흥미 위주의 폭로물도 아닌 ‘대중운동의 본질에 대한 생각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사회철학서를 읽어 줄 독자는 또 얼마나 될까. 여기서 이 책에 대한 한 가지 의문이 시작된다.
“이 책은 종교운동이 되었건 사회혁명이 되었건 민족운동이 되었건 모든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련의 특징을 다룬다.” 그는 아무리 구체적 형태가 다양할지라도 모든 대중운동에는 본질적으로 가족유사성이 존재한다고 본다. 그것은 바로 “모든 대중운동은 지지자들에게 기꺼이 목숨을 바치려는 의지와 단결된 행동 성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며,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대중운동이 “좌절한 사람들”과 이들을 추동하는 “효과적인 전향 기술”, 즉 선동 기술이 결합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를 입증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검토하는 대상은 “광신적 기독교 신자와 광신적 이슬람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 등이다.
이 목록이 한 가지 힌트가 될 수 있을까. 기독교를 제외하고는 ‘광신적’이란 형용사가 붙는 것은 모두 소위 ‘미국적 가치’라 불리는 것과 대립하는 사상들이다. 더구나 책이 출판된 해가 1951년이라는 것을 떠올린다면, 다시 말해 2차 세계대전이 막 끝나고 새로이 공산주의와 대치하고 있는 시기였음을 상기한다면, 호퍼가 다루고 있는 대중운동이란 것이 결국 당시의 미국과 적대하고 있는 이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될 수 있음을, 그럼으로써 미국적 가치에 대한 옹호와 국가적 단결을 촉구하는 하나의 선전이 될 수 있음을 편집자가 눈치 챘던 것은 아닐까. 호퍼는 자신의 책이 “일절 시비를 가름하지 않으며 일절 호오를 밝히지 않는다.”고 선을 긋고 있긴 하지만, 흑인민권운동과 같이 자신이 현재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막 태동하고 있던 대중운동은 언급하지 않으면서 나치나 공산주의와 같은 적대자들을 주 분석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대중적 성공에 대한 음모론적 의심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어찌됐건 이와 같은 자신의 집필 의도를 보여주는 서문 이후 4장 125항으로 이루어진 대중운동에 대한 호퍼의 단상이 펼쳐진다. 사회철학적 저서라고 하지만 대중운동에 대한 엄밀하고 꼼꼼한 자료조사나 치밀한 논리적 분석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이러한 책이 출간되었다면 아마도 저자가 사용하는 ‘대중운동’이라는 개념의 애매모호함이라든지 자신의 주장에 맞는 역사적 사례만을 선별적으로 골라내어 제시하고 있다든지 하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듯싶다. 저자 스스로는 각 항 간의 유기적 연계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도 하지만, 니체나 벤야민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선언적인 아포리즘의 형식으로 펼쳐놓고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아포리즘 형식을 띤 글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60년이라는 시간의 격차를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순간순간 빛나는 통찰을 보여주는 구절 또한 다수 존재한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사회의 대표적 대중운동인 반MB운동과 그 최전선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는 꼼수다>를 생각해보자. 이들은 MB정부가 들어선 후 3년 동안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고 여긴다. 이전의 두 정부가 10년 동안 쌓아왔던 많은 물질적 정신적 가치들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가 IMF의 구조조정을 받아들인 시기였으며 참여 정부가 비정규직 법안의 통과와 한미 FTA 체결 등을 통해 신자유주의적 질서를 적극 도입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비정규직 노동자를 비롯한 최하층의 삶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여전히 크레인에 올라가 300일 넘는 투쟁을 해야만 했으며, 누군가는 여전히 정리해고의 고통을 참지 못해 자살하는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누가 이 운동에 열성적으로 뛰어드는가. “불만으로 인한 소란에 맥박이 뛰는 것은 대개 상대적으로 최근에 가난해진, ‘신빈곤층’이다.” 다시 말해 이전에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가 최근 3년 동안 그것을 읽어버린 이들이다. 여기서 ‘가난’을 단지 물질적 차원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나는 꼼수다>의 4인방이 MB정부 이후 자신들의 사회적 발언권을 축소당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또한 여기에 열광하는 이들이 대부분 아이폰이나 컴퓨터를 능숙하게 사용하며 일주일에 한두 시간 정도 수다에 귀 기울일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호퍼가 지적하는 ‘신빈곤층’과 이들이 묘하게 중첩되고 있음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게다가 이들로부터 촉발되어 이제 사회적 구호로 자리 잡고 있는 ‘쫄지마 씨바’라는 말에서 호퍼의 다음과 같은 지적을 떠올리는 것은 너무 과도한 유추일까. “대중운동이 사무치도록 좌절한 이를 치유하는 것은 절대 진리를 설파하거나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곤경이나 학대로부터 구제해줘서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반MB운동을 국민의 지상 명령이라 여기며 ‘닥치고 통합’을 주장하는 이들과 “공동의 증오는 아무리 이질적인 구성원들이라도 하나로 결합시킨다.”는 구절이 등치되는 것도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이처럼 호퍼의 글은 전혀 다른 시간, 전혀 다른 사회에서도 하나의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러한 것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논증적 형태의 글이 아니라 아포리즘의 형태를 띠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속담은 수천 년이 지나도 적용가능한 사례를 찾아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호퍼의 분석을 단순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라고 폄하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어떤 속담이 수천 년이 지나도 계속 언급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의 삶이란 것이 수천 년 전과 그다지 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로부터 무언가 배울 것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호퍼의 통찰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호퍼의 아포리즘 전면에 흐르는 주된 정서는 대중에 대한 ‘냉소’다. “대중운동이 굴러가기 시작하면 권력은 개인을 신뢰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는 자들의 손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그런 자들이 득세할 수 있는 것은 개인을 경시하는 태도로 인해서 얼마든지 무자비해질 수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런 태도가 대중의 주된 정서와 전적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대중운동이 광신과 같은 형태로 귀결되는 것은 결국 대중들이 가진 본질적 속성 때문이라는 비관적 인식이 그에게 깔려있다. 이러한 전제가 옳은지 그른지는 보다 깊이 있게 따져보아야 할 문제이긴 하지만, 지금과 같이 ‘집단 지성’이라는 혹은 ‘국민의 명령’이라는 그 실체가 불분명한 이름이 어떤 절대성을 획득하고 있는 시기에 일종의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나 박원순 시장의 당선 후, 많은 지지자들이 ‘이제는 우리가 당신을 감시할 것’이라고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감시보다는 적대자들에 대한 증오에만 집착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이다. 다시 말해 호퍼의 말처럼 “아무리 냉정한 사람이라도 대중이 운집한 장관에는 넋을 일게 마련”이기에, 대중이 만들어 내는 장관에 휩쓸리지 않고 항상 비판적이고 이성적인 거리를 유지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맹신자들>이 2012년 정치의 해를 맞이하는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된다.
덧붙여 <맹신자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오늘날 쉽게 목격할 수 있는 새로운 종류의 ‘광신’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며칠 전 한미 FTA에 찬성표를 던진 151명의 국회의원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듯이,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는 새로운 종류의 광신이 현대 사회에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호퍼가 말한 “좌절한 사람들”의 광신이 아닌 ‘가진 자들’ 혹은 ‘상위 1%’에 의해 추동되는 광신이라는 점에서, 또한 맑스가 말한 단순한 지배 이데올로기를 넘어 맹신적 추종자들을 양산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맹신자들>이 담아내고 있지 못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맹신자들의 증오와 적대가 점점 고조되어 가고 있는 지금, 그 내용에 동의하건 동의하지 않건 <맹신자들>이 전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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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unc 2011-11-24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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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운동의 다른 이름이 혹시 전체주의?
그는 위대하기를 원하지만, 불행한 자신을 본다.
그는 완전하기를 원하지만 불완전으로 가득 찬 자신을 본다.
그는 뭇사람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지만
자신의 결함이 그들의 혐오와 경멸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을 안다.
이렇듯 궁지에 빠진 인간의 마음속에서는 상상할 수 있는 한
가장 의롭지 못하고 가장 죄악적인 정념이 태어난다.
왜냐하면 자기를 책망하고 자기의 결함을 인정하게 하는 이 진실에 대해
극도의 증오심을 품게 되기 때문이다.
-파스칼[팡세]
에릭 호퍼는 대중운동을 어떠한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 것일까? 그 본질을 파헤치고자 125가지 단상을 적고 있다. 대중운동의 생성과 체계를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과 선전과 구호를 도구로 삼아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게 하며 그들을 조종하고 행동하게 하는 지식인들의 행태를 보여준다. 일단 대중운동이 인간의 자유나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중운동을 바라보는 관점은 상당히 냉소적이고 부정적이다. 나치즘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황폐화 된 직후에 나온 책이라 그 당시로는 시기적절하고도 매우 중요한 책이었으리라 보아진다. 조직되지도 않고 절망과 증오로 가득찬 대중, 특히 어떤 숭고한 대의에 기꺼이 목숨을 바치고자 하는 광신적 신념을 갖춘 맹신자들과 대중운동이 갖는 매력에 이끌린 잠재적 전향자들과 그 안에서 어떤 일들이 요구되며 행해졌는지 그들의 시작과 끝이 어땠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정말 인간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 분명 에릭 호퍼도 인간에 대한 불가해성과 환멸로 이 단상들을 적어나갔으리라 짐작된다.
모든 대중운동이 갖추어야 할 강령 중에 하나가 희망과 미래를 설득할 줄 알아야 한다면 나치즘이나 파시즘, 공산주의 혁명 같은 대중운동은 성공한 셈인 것일까?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지적을 덧대어 볼 만 하다.
' 대중을 통솔하고 그 지지에 힘입어 대중을 움직이는 운동에는 항상 전체주의적 요소가 숨어 있다. 전체주의 정권은 이들에게 개인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대신에 역사적 운동의 주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준다. 거대한 운동에 기여한다는 목적을 위해 자신의 인격과 개성을 희생한다. 대중은 하나의 개인인 것처럼 움직인다.'
그들의 상상력에 불을 지피고 충성심과 자기희생을 기꺼이 이끌어내고 현재를 거부하고 장미및 미래만을 바라보게 하는 힘은 조금의 의문도 의심도 없이 지속적인 힘을 발휘한다. 맹목적 신념과 모방, 자부심, 자신감, 목적의식, 숭고한 의무감, 희망과 보상 등 효과적인 대중운동은 사람들 마음 속에 죄의식을 키운다고 하였다. 대중운동은 추종자들에게 죄를 짓고 뉘우치는 범죄자의 심리와 정신 구조를 심어주는 기법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눈여겨 볼 만 하다.
그렇다면 모든 대중운동의 다른 이름으로 '전체주의적 요소가 숨어 있는 것'으로 불리우는 것은 곤란하다. 에릭 호퍼가 바라보던 시대하고 지금 현재의 대중운동과는 분명 구별되거나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모든 대중운동 속에서 개별성과 자유를 보장받고 인간의 본성을 잃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든 변할 수 있는 가변적인 존재라는 것을 되새겨 볼 때, 에릭 호퍼가 바라보던 시대를 반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라는 것을 우리는 역사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불안한 시대에는 불안한 사람들의 출현은 당연한 결과일 것이다. 인간을 괴물로 만드는 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양성의 존중과 소통과 열려 있는 공간 속에 놓여 있을 때에만 건강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연대와 인권과 개성을 존중 받을 곳에서만 가장 인간적인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상황만 주어진다면 인간은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과 무자비하고 집요한 박해는 광적인 신념에서 나온다는 것을, 의문을 품지 않으며 망설이지 않는 것 또한 맹신자의 악습이라는 것을 이 책에서 배워둬야 할 것이다.
'자기에 대한 불만과 너무 쉽게 믿는 경향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는 듯하다. 자신의 참모습으로부터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치에 맞는 것과 분명한 것에서 도피하고자 하는 욕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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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1-16 공감(6)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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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에릭호퍼)
이 책은 모든 형식의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참가자들(주로 맹신자들)의 일련의 심리적 특성을 다룬다. ‘좌절한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일정한 가설을 세우고, 이 책의 ‘현재’인 1951년을 기준으로 대중운동을 분석, 나름대로의 맹신자들의 심리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의 ‘좌절’은 임상학적 용어가 아니라 ‘인생을 낭비하거나 망쳤다고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뒤의 주에서 밝히고 있다.(243쪽)
‘신을 믿지 않는 시대’에 그들이 만들어 내는 ‘신들의 세계’에 대한 설명이며, 덧붙여 몽테뉴의 말을 빌어, 단순히 자신의 견해에 불과할 뿐임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논의를 제안하는 것임(14쪽)을 밝히고 있다. 저자 ‘에릭 호퍼’는 이 책을 서술할 당시는 부두노동자로서 살았으며, 평생을 길 위의 노동자로 떠돌면서 남는 시간에 틈틈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연구한 사회철학자였다고 한다.
대중운동의 참여자들은 그 ‘운동’을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삼으며, 그 방법으로 ‘종교화’ 기술-현실적 목표를 숭고한 대의로 바꿔놓는 기술-을 강조(20쪽)하면서, 변화를 향해 그들의 자신을 아낌없이 바치게 만드는 ‘갈망’의 본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주로 대중운동의 역동기-맹신자들이 형성하고 압도하는 단계-를 다룬다.(222쪽) 달리 말하자면 일종의 ‘위기사회이론’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주로 ‘충만감을 느끼는 사람들’은 현 상태를 보존하고 싶어하지만, ‘좌절한 사람들’은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고 한다.(21쪽) 그러나 ‘충만’과 ‘좌절’이라는 외적인 요소와는 상관없이 순수한 ‘의지’적인 요소만으로, 단순히 맹신하는 차원이 아니라 합리적 수준의 ‘희망을 신뢰’하는 ‘양호한’ 사람들은 여기서의 주된 논의의 관심사는 아닌 듯하다. 또한 ‘맹신자’니 ‘광신자’란 어떤 도덕적 가치판단을 전제로 하는 것 아니라, 단순히 사실적인 ‘믿음의 정도’를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빈곤층의 보수성’(23쪽), 경험은 변화의 ‘장애’가 되며, ‘경험자’들은 대개 늦게 개입한다(28쪽)는 등의 의견은 일견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특히 ‘빈곤층의 보수성’으로 인하여 현대 사회의 양극화 현상이라는 것도 효율적인 기득권 유지를 위해 어쩌면 의욕적으로 ‘의도’된 결과이거나 최소한 고의적으로 ‘방치’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관련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역사라는 놀이는 흔히 중간자의 다수자들은 제쳐 놓고 최상위와 최하위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46쪽)
어찌보면 역사의 일반적 보편성이란 개별 특수성들의 사후평가 작업의 산물이 아닌가 생각한다. 대중운동의 개별 참여자들과 그들의 맹신성조차도 되돌아 보면, 그들의 좌절에 대한 ‘상황적 분노’의 표현으로 일반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개개인의 삶의 측면에서 보면, 그들이 누구이든 상관없이 무엇보다 간절한 막다른 길 위의 ‘전부인 삶’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있었던 것인가? 위기의 사회는 그들을 얼마나 포용했을까?
그러나 상대적으로 최근에 우리 사회의 가난해진 ‘신빈곤층’(49쪽)의 확대는, 그들의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중산층의 기억’을 보상받지 못하는 한 앞으로 일어나는 모든 대중운동에 적극적일 확률이 높다고 본다. 그와 관련하여서는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반항을 자극하는 것은 현실의 고통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의 경험이다.”(52쪽)
그는 “스스로 무언가를 해낼 재능이 없는 한, 자유란 따분하고 번거로운 부담이다.”(55쪽)라면서 ‘자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책임에서 자유롭기 위해서’ 능력없는 사람들이 운동에 가담한다고 한다. 나아가 “인생을 허비하고 망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유보다 평등과 우애를 더 갈망한다.”고 하면서, 그들의 자유는 “평등과 획일성을 세우기 위한 자유일 뿐”(57쪽)이라고 폄훼하고 있다.
‘자유’의 역사 속에서 ‘자유로부터의 소외’를 위한 투쟁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를 쟁취한 다음에는 그 ‘자유로부터의 자유’를 찾고 있는 대중들의 불안한 심리를 발견하고 있다. 살아있는 대중은 늘 불안하다. 그 중 ‘좌절한 사람들’은 자유를 찾고 있었던 것이며, ’도피의 대상인 자유‘는 더 이상의 자유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에서 ‘자유’의 개념이란 획일성까지는 아니더라도 ‘합리적인 평등’ 정도는 아우를 수 있는 ‘부조리하지 않은 자유’이어야하지 않을까 싶다.
“대중이 갈망하는 자유는 자율적인 삶이라는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부터의 자유”(206쪽)이므로 “대중운동이 사무치도록 좌절한 이를 치유하는 것은 절대 진리를 설파하거나 그의 인생을 비참하게 만든 곤경이나 학대로부터 구제해줘서가 아니라, 쓸모없는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때문이다.”(67쪽)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소수일지라도 ‘순수한 의지적 측면’을 지나치게 소홀히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그것은 여기서 논외로 하고 있기때문일 것이다.
개인주의가 널리 퍼진 우리 시대에 연극적 주문(呪文)과 불꽃놀이 없이 자기희생이 널리 퍼질 수 있을지 의문(103쪽)이라며, 서로 나누고 협력하는 행위에 담긴 자기희생은 희망없이는 불가능하다(108쪽)고 한다. ‘희망’이란 ‘운동의 기술’로서 보다는 그 자체로서 ‘인간에 대한 믿음’의 바탕이 되는 것이리라. 또한 현재와 미래, 과거를 바라보는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회의주의자, 급진주의자, 수구주의자들의 태도비교는 상당히 흥미롭다.(52)
“대중운동이 시작되고 전파되려면 신에 대한 믿음은 없어도 가능하지만, 악마에 대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137쪽)고 한다. 그러나 형식을 불문하고 대중운동은 그 자체로써 대부분 사람들의 ‘삶 그 자체’이므로, 그 삶이 존재하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희망’를 창조해나가는 ‘자전거타기’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악마’이든, ‘신’이든 간에 계속하여 페달을 밟지 않으면 그 순간 바로 넘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뻔뻔한 어휘와 행동 뒤에는, 그리고 자기만 옳다는 큰소리 뒤에는 죄의식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142쪽) 지금 현재 우리 사회의 그런 뻔뻔함 뒤에도 그러한 일말의 죄의식이라도 남아 있다면, “자신과 화해한 자만이 세계에 대한 공정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126쪽)고 한 말처럼, 그나마 화해의 희망이라는 불씨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대중운동에 있어서 ‘지식인 선구자’들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열광하는 대중, 신념에 주린 대중들이 그러한 주장들에 확신을 부여하여 새로운 믿음의 근원으로 삼는다.”(204쪽)고 한다. 즉 일종의 새로운 우상을 창조하여 스스로 신을 만드는 종교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운동을 개척하는 것은 지식인, 실현하는 것은 광신자, 굳건히 다지는 것은 행동가다.”(214쪽)라고 한다. “행동가는 대중을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분쟁과 광신자들의 무모함으로부터 지켜낸다.”(216쪽)고 한다. 그래서 ‘좌절한 영혼’을 은밀하게 이용하려고만 하지 않고,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명예롭게 대함으로써 명예로운, 지도자들의 예를 들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행동가는 신념가가 아니라 법률가이며, 행동가는 새 체제의 안정과 지속성을 꾀하기 위해서 다양한 방법을 절충적으로 동원하므로(218쪽), “행동가의 손에서 다듬어지는 체제는 일종의 조각보”(219쪽)라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자본주의니, 공산주의, 사회주의라는 체제의 논쟁도 ‘자유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안식과는 무관하게, 어찌보면 잘 짜맞춰진 ‘조각보들의 색깔논쟁’에 치우친 감이 있다. ‘조각보의 색깔’이 뭐 그리 대수인가?
“격정적인 시기가 지난 운동은 성공한 자들에게는 권력의 수단이요, 좌절한 이들에게는 아편이 된다.”(221쪽)고 한다. 대중운동이 아무리 ‘정체된 사회를 각성시키고 혁신하는 요인’(237쪽)이 된다고 하더라도 이를 무기한 방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위기사회의 소통구조를 만드는 것이 운동의 왜곡을 방지하고, 그들을 치유하여 동행하게 하는 예방적 조치들이 될 수 있을 듯하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비록 극히 소수의 예외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좌절되지 않은, 양호한 명예로운 사람들’의 대중운동 참여 심리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지금도 진행되고 있을 모든 형식의 대중운동(삶)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특히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일부 사람들(절박한 삶)의 일면적 심리인 ‘좌절’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는 참고가 된다고 본다.
“한 국가의 잠재적 역량은 갈망들의 저수지와 같다.”(236쪽)는 점과, ‘광신주의’라는 ‘영혼의 질병’이 부활이라는 ‘기적의 도구’로도 작용하는 것을 발견(241쪽)하면서, 그것이 명백하든, 명백하지 않든 간에 자신의 어떤 분노와 좌절, 그리고 ‘갈망’들이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잠재적 동인이 되고 있음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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踰城 2011-10-14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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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목적 신념과 일편단심 충성심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이 10일 한미FTA 비준안 처리 촉구 기자회견을 하는 과정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관을 동원한 퍼포먼스를 했다. 어버이연합은 크고 작은 여러 시민운동 현장이나, 노동운동 현장, 또는 선거국면에서 자주 등장해 도를 넘는 행동으로 많은 이들을 어이없게 하는 장면을 연출하곤 한다. 달밤에도 현장에서는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않는다는 이 어르신들은 노구를 이끌고 도대체 무엇때문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면서 이땅의 어른으로서 듣지 않아도 좋을 비난듣기를 자청하는 걸까. 이들을 맹신자로 보아도 좋을 것인가. 그렇다면 이들이 맹신하고 있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트위터에서 자주 만나곤하는 자칭 타칭 '노빠'로 일컫어지는 이들은 전후좌우를 무시하고, 무조건 고 노무현 대통령을 욕되게 하는 장면은 용서치 않겠노라고 분노하곤 한다. 엄연히 한미 FTA의 시작은 노 전 대통령이었것만, 노 대통령의 FTA와 MB의 FTA는 다르다며 열을 올리고, 이에 대에 토를 다는 이에게는 트윗상의 뭇매도 불사하곤 한다. 이들에게 노무현이란 함부로 넘을 수 없는 성역이다. 이들 또한 맹신자로 보아도 좋을 것인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맹신자, 광신자는 먼저 종교인을 들 수 있겠다. 우리나라에서는 그중에서도 타종교에 배타적인 개신교 신자들을 들 수 있겠는데, 개신교 신자라고 100% 타종교에 배타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지만, 그들에게조차도 하느님은 유일신이며, 타종교는 존중되어서는 안되는 사이비이다. 이들은 자신이 믿는 유일신인 하느님을 전도해 만세계가 하느님의 자식임을 증거하는 일을 종교인 스스로 최고의 가치라고 여긴다. 이들은 과연 맹신자일까?
위의 세가지 경우의 맹신자들은 자신이 추종하는 것은 다르지만, '맹신'이라는 의미에 있어서 그들은 한가지 이다. 그것은 맹목적 신념과 일편단심의 충성심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내가 믿는 어떤 것의 상대편에 서있는 것은 모두 사이비이며, 절대 악이다. 그렇기에 나의 신념인 그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할 무엇이다.
이책은 한마디로 맹신자들의 심리를 해석하는 책인데, 나는 이 책을 통해 어버이연합의 말도 안되는 보수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쉽게 어버이연합의 노인들은 알바비 때문에 모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곤 하지만, 이 책에 의해 내 나름으로 해석해 보자면, 그들을 이끄는 것은 몇 푼의 돈이 아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며, 변화를 두려워한다. 또한, 자신들의 쓸모에 대해 깊은 고민을 갖은 사람들이다. 퇴역군인 처럼 인생의 뒤안길에 선 어버이들은 이땅의 불안한 젊은이들에게 어떤 교훈을 주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옳지않아. 너희들이 뭘 알아, 전쟁을 겪은 우리들은 알아, 그것은 빨갱이 짓이야!."
나름의 맹신, 자신은 언제고 옳다는 믿음. 그 믿음이 끝나는 날 자신의 목숨이 끝나는 것이다.
나는 가끔 내 자신이 맹신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나 역시 '노빠'의 한 사람으로 이제는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을 어떻든 욕되게 하고 싶지 않다. 그의 올바름, 그의 신념, 그가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그의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 그분을 욕되게 하는 것은 일부러라도 모르는 척 외면하고 싶어진다. 또 나는 카톨릭 신자로 하느님이 유일신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주, 나의 이 믿음들이 주입되고, 허황된 어떤 근거없는 맹신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맹신은 빈약한 내 자신을 우회해 다른 대상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표현되곤 한다. 나는 약하지만, 내가 믿는 그것은 옳다는 신념, 대상에 대한 동일시가 맹신인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깨닫게 된 것, 나름의 신념은 지키되 탄력성 또한 놓지 않을 것. 무책임한 집단에 숨기보다는 독자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것. 행동하기 전에 생각할 것. 나는 맹신자 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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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1-11-1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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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길 위'에서 '길 위의 철학자'를 읽다.
맹신자들.
'맹신자들' 은 에릭 호퍼가 지은 여러 권의 책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책이며, 또한 상대적으로 그의 다른 저서들에 비해서 많이 알려진 책이기도 합니다. 물론 아직 우리나라에서의 에릭 호퍼는 그리 인지도가 높은 학자는 아니지만 말이지요. 고백하자면 저는 저자 에릭 호퍼에 대해서 그리 많은 사실을 알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이 책을 접하기 전 단편적으로 알고 있던 사실은 그는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는 것 정도였는데, 그는 사실 이 책의 책날개에도 소개되어 있는 것처럼 시력을 잃었지만 기적적으로 시력을 회복이 된 후 세상의 모든 텍스트를 읽어버리겠다는 듯이 책들을 읽어내려갔던 대단한 독서광이었으며 마지막으로 길 위의 철학자, 라는 이명(異名)이 붙을 정도로 한 곳에 머무르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조금만 더 그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늘어놓아본다면, 그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머무를 기색을 보이면 주저없이 자신의 짐을 챙겨서 다른 곳으로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애초에 그가 처음 길을 떠나서 도착한 곳이 '노숙할 수 있을 정도로 날씨가 온화했고, 길가에 오렌지가 열린' 캘리포니아였으니 말 다했지요. 경제적인 이익도 그를 붙잡지 못했고 사랑도 그를 붙잡지 못하였으나 단 하나 그를 사로잡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학문에 대한 열정'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보면, 물론 저도 조금 들쳐본 수준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제 1권의 그 첫머리에 이렇게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앎의 즐거움을 원한다. 인간의 지능은 감각에서 ... 지혜로 나아간다. 지혜란 그 어떤 원인이나 원리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이 분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 1권.
에릭 호퍼의 경우가 위의 저 말에 특히 잘 들어맞는다고 여겨집니다. 그는 평생을 일을 하면서 책을 읽고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단순히 무학(無學)노동자가 자격지심에서 공부를 한다고 치부해버리기에는 너무나 뜨거웠으며, 그 열정의 결과물도 너무나 사유의 폭이 깊었었지요. 즉, 그의 열정은 순수한 앎에 대한 욕구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릭 호퍼가 지혜로 나아갔을까요? 네, 지혜의 정의가 위의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원인과 원리를 파헤치는 학문이라면 에릭 호퍼는 충분히 나아갔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사유와 연구의 결과물로 바로 이 책 '맹신자들' 을 발표할 수 있었으니 말이지요.
이 책에서 에릭 호퍼는 대중운동에 대한 그의 생각을 유감없이 풀어헤쳐놓습니다. 그런데 사실 생각해보면 그의 사유의 흐름은 우리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쓰인 사유의 방법은 저자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육하원칙의 그것과 닮아있습니다. 대중운동이라는 현상이 있습니다. 이 현상에 대해서 무언가 알고 싶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까요? 네, 먼저 이 대중운동이라는 현상은 누가 일으키는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겠습니다. 그 다음 던질 만한 질문은 언제 이런 현상이 발발하는가, 가 되겠군요. 육하원칙에 따라서 큰 질문을 던지고 각각의 질문에 대해서 다시 세분화해서 들어가면서 질문을 던져나가면 됩니다. 이런 작업은 마치 의사가 환자를 접하여 무슨 질병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것을 질문을 던져가면서 이끌어내는 것과도 흡사합니다. 아니 유사할 수 밖에 없겠지요. 의사가 한 개인을 고친다면 사회철학자들과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은 사회가 어떤 질병을 앓고 있으며 그 치료법은 무엇인가, 를 모색하는 것이 될테니깐요. 그래서 저자는 대중운동은 어떤 사회적 상황에서 잘 일어나는가를 고찰한 뒤, 그것이 누구에 일어나는지를 알아봅니다. 그 후에 어떻게 대중운동이 그 힘을 가지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책의 제목에서 쓰인 맹신자들은 이 대중운동에 기꺼히 협력하여 한 팔을 거드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집단의 일이라면 눈 코 뜰새 없이 뛰어들며 자신의 집단이 가장 고귀한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 그런 광신자들과 크게 다른 의미로 쓰이지는 않았지요. 그래서 이런 맹신자가 되기에 적합한 사람들은 좌절하고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한 갈망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특히 현실에 대한 좌절이 매우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지요.
좌절한 사람들에게 대중 운동은 자기의 삶을 통째로 대체하는 무언가, 혹은 삶을 견딜 만하게 만들어주는, 그러나 자기 혼자 힘으로는 이끌어낼 수 없는 무언가가 된다
에릭 호퍼, 맹신자들, 30p.
그런데 이런 에릭호퍼의 대중운동에 대한 주장이 모두 적합한 것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오늘날의 대중운동은 이 책에서 주장하는 기전들을 따라서 해석하면 그 발단과 결말을 모두 예측할 수 있는 것일까요?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학교 시험문제에서도 '모두' 라는 말이 쓰이면 답이 아니라고 했었던가요, 굳이 대중운동의 양상이 다양하므로 단일화된 해석으로 모두 우겨넣을 수 없다, 라는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더라도 다른 문제점들이 몇 가지 발견됩니다. 가장 먼저 보이는 문제점으로는 이미 하나의 결론을 내려놓고 그 결론에 적합한 역사적 예들을 드는 경향입니다. 저자가 '소수자들', 특히 '주류집단에 속하고자 하는 소수자'들이 '맹신자들'로의 '잠재적 전향' 가능성이 있는 무리 중 하나라는 주장을 하면서 그 예로 정통파 유대인과 해방 유대인의 예, 남부의 격리된 흑인과 북부의 격리되지 않은 흑인의 예를 드는 것 등이 바로 그러한 것들이지요. 저자는 이미 저런 예를 들기 전에 확고한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례들은 그저 자신의 생각을 강화해주는 그런 기제로 작용할 뿐입니다. 물론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또는 실제로 주류에 속하고자 노력하는 소수자들이 그들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서 주류에 대한 대중운동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겠지요. 하지만 이것은 방법상의 문제입니다. 이미 마음속에서 결론이 내려져있다면 이후에 반증되는 사례가 도출되었을때 유연하게 넘어가기가 어렵겠지요. 설령 이러한 것이 그저 선후관계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다고 하여, 현상을 관찰후 도출한 결론을 먼저 적었을 뿐이라고 하더라도 만약 그렇다면 그렇게 내린 결론에 대한 검증이 필요할터인데 책에서는 각 챕터의 결론에 대한 검증은 '최근 러시아에서는..', '최근 미국에서는...' 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 문제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심리학적인 해석이 조금 지나치지 않는가, 입니다.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뼈저리게 실망한다. 따라서 바로 이 과도하게 이기적인 사람들이 이타적 태도를 가장 설득력 있게 옹호하곤 한다.
같은 책, 77p.
위의 인용한 부분은 '이기적인 사람'이 '맹신자들'이 되기 쉽다는 부분의 첫머리에 나온 글이지요. 사실 크게 문제될 것 없이 술술 읽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뼈저리게 실망한다' 라는 문장과 '이타적 태도를 설득력있게 옹호하곤 한다' 라는 문장은 그다지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 이기적인 인간이 뼈저리게 실망하면 이타적 태도를 설득력 있게 옹호하게 되는건가요? 굳이 해석하자면 이기적인 사람은 (자신의) 이기적 태도에 실망하여 이타적 태도의 옹호자로 변하게 된다, 라는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이 문장 또한 근거가 마땅히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저자가 기대는 곳은 바로 심리학적인 해석입니다. '이러 이러하니깐 (심리학적으로) 이렇게 될 것이다' 라는 것이지요. 근거가 명확히 없음에도 불구하고 저 문잔들이 거부감없이 읽히는 이유도 바로 그것에서 연유합니다. 이미 여기에 대해서는 '반동형성'이라는 심리학적인 방어 기제의 지나친 남용, 이라는 이야기로 이 책에 대한 다른 서평들에서도 지적되어왔지요. 그리고 하나만 더 지적을 하자면, 책을 여는 이야기에서는 저자는 분명 '이 책은 일절 시비를 가름하지 않고 호오를 밝히지 않는다'고 주장했습니다만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대중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더 많이 드러난다는 점을 들 수 있겠습니다. 애초에 대중운동에 대해서 나는 반대한다, 라는 입장이거나, 혹은 나는 찬성한다, 라는 입장이라면 이러한 호오를 드러내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이 없겠습니다만 처음에 나는 균형잡힌 시각으로 보고 싶다, 라는 선언을 하였음에도 광신자, 등과 같은 어구로 반감을 조금씩 넣어두게 되면 아무래도 주장의 객관성이 의심되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는 원문을 살펴보아야하겠습니다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모두 적합하지는 않다, 라고 해서 모두 쓸모없다, 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되겠습니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오늘날에도 여전히 쓰일 수 있는 기준들이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대중운동에 대해 깊이 연구한 책은 이 책 이전에는 그리 많지 않았었지요. 이런 책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탑을 쌓듯이 하나 둘 높여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릭 호퍼는 이 책을 통하여 대중 운동에 대한 여러 예를 바탕으로 그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날카로운 사유를 잘 드러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쉬운 말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이해를 돕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는 평생을 길 위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살았던 그 자신의 삶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어려운 말로만 점철되고 남에게 자신의 전하고자 하는 바가 명확히 전해지지 않는 글은 자기 위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자신의 사유가 아닌 남의 사유를 계속 빌려오는 것 또한 무분별한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몇 번 참조는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앵무새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에릭 호퍼는 늘 독자의 생각을 열어두고 있습니다. '나는 그저 생각을 주고 받으며 논의해보자는 것이니' 그러니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말대로, '한 번 생각해'보는 겁니다. 대중운동이 어떤 것인지, 저자가 말한 것이 옳은지, 얼마나 적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의 생각은 어떠한지, 라고. 그래서 이 책을 읽은 독자들 모두가 대중운동에 대한 각자의 사유를 발전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가연 2011-11-1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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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신자들, 새삼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책은 의심하라.
(네줄 요약)
객관을 빙자한 '반공주의자', '극렬 개인주의자'의 악의적인 프로파간다, 사회주의와 전체주의 진영에 대항하는 자유세계(1세계) 예찬론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에 더해 사회 비판의 목소리들에 '니 마음이 병들어서 그래'라고 묵살할 수 있는 그럴 듯한 근거와 '단상'들을 제공하고 있으며, '대중 운동' 자체를 냉소적이고 경계심이 가득한 눈으로만 보고 있으니, 이 책이 갖고 있는 날카로움은 대체로 (변화를 거부한다는 의미에서의) 반공보수세력을 지키기 위한 것이 될 거다.
사람들의 불만, 현실을 타파하려는 열정이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삶의 구체적인 불편함과 고단함으로 드러나는 문제들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아야 할 시기에, 멘토를 자처한 자들의 성공담과 정서적인 위무에 녹아내리거나 혹은 앞장선 누군가의 손가락질과 돌팔매질을 따라 피아식별 따위 없이 만만한 마녀를 사냥하며 '자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실은 지금도 그런 모습들은 여전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럴까, '맹신자들'이란 제목이 뭔가 힌트를 줄 거 같은 기대감을 던졌다.
사실 에릭 호퍼의 이 책은 그런 내 나름의 문제의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저자는 이른바 '대중운동의 역동기', 맹신자들이 형성되고 사태를 압도하는 시기의 동학을 살피고 그들 내부의 심리를 분석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그의 전제는 간명하다 못해 저열해 보이기까지 한다. 대중운동의 역동적 단계에는 맹신자들이 위세를 떨치며, 그들은 주로 좌절한 채 증오와 자기 비하에 빠진 사람들이라는 거다. 그는 대중 운동의 비전이나 내용엔 관심을 두지 않고, 그 일반적인 양태와 동력원를 분석하려 한다.
그의 이러한 시도는 일견 굉장히 야심차 보인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어느 순간 사회를 들썩이는 무정향의 대중 에너지가 만들어지는 원천에 대해 설명을 해보려는 거다. 무엇을 주장하고 요구하던 간에, 어느 방향으로 우르르 몰려가던 간에 중요한 것은 그런 움직임 뒤에 숨어있는 에너지 덩어리이며, 그건 시공간을 초월한 일종의 규칙과 단계를 따른다는 가설. 촛불집회가 되었건, 황우석 사태가 되었건, 87년 민주화항쟁이건 아니면 광주항쟁이던 간에 그 기저엔 같은 게 있단 이야기다.
문제는 여러가지다. 사실 나는 이 책이 왜 새삼 '맹신자의 심리를 날카롭게 파헤친 이시대의 고전'이란 카피를 달고 나왔는지, 그리고 조선이니 동아 따위 보수언론에서 이 책을 화제의 신간으로 내세웠는지 의심하고 있을 정도다. 그들이 이 책을 앞세워 말하려는 맹신자들은 누구일까,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불편부당한 인식을 강조함에도 종내 '대중 운동' 자체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득 드러내는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에릭 호퍼의 반세기전 저작이 새삼 고전으로 떠받들릴 이유는 무엇일까 하고.
저자가 '대중 운동'의 정의조차 없이 글을 열며 '좌절한', '광신', '맹신' 따위 모호하고 무책임한 용어를 남발하는 건 참는다 치자. 우선 개인의 병리적 심리에 대한 통찰은 제법 날카로우나 이를 사회의 동학에 그대로 이입하고 충분한 근거없이 일반적인 동력으로 단정짓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떨어졌다. 또 하나, 저자가 살던 냉전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채 반공 이데올로기와 오리엔탈리즘 따위의 편향된 사고 프레임에 기반한 편견들을 근거라고 제시하고 있단 점이다. 근거박약한, 응집력없는 조각난 '단상'들일 뿐이다.
결국 그는 '대중 운동'을 암묵적으로 위험한 것으로 간주한다. '자율적이고 스스로에게 만족할 줄 아는 사람, 자주적인 사람'은 대중 운동을 조장하고 독려하는 일부 음모가, 불평분자에 넘어가지 않으나 심리적으로 공허하거나 불안정한 사람, 소위 좌절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대중 운동이 촉발되고 진행된다는 식이다. 개인적인 차원의 심리 문제와 트라우마, 불만족스러움이 어떤 식으로던 현실을 타파하고 조직적 가치와 지향에 스스로를 투신하려는 자기 희생 의지를 낳는다는 거다.
저자는 사회 변화 혹은 소란의 원인과 에너지원을 개인에서 찾고 있지만, 정말 그런가. 그들이 어떻게 양산되고 있는지, 개인의 도덕성이나 참을성 이전에 따져봐야 할 것들이 많지 않을까. 예외적으로 생겨난 불평분자가 아니라 특정 계층과 그룹에서 공통된 지반을 갖춘 불만과 좌절이 형성되고 있다면, 역시 구조적인 문제 혹은 모순이 있다고 봐야 한다. 저자는 그들을 그저 문제 해결의 의지나 탐색 노력은 없이 어떤 방향으로던 불만을 터뜨려 버리겠다는 마음만 가득한 '맹신자', 혹은 '광신자'라 일컫지만 말이다.
저자의 성찰 역시 견고하진 않으며, 그의 단호한 어조를 뒷받침할 사례들 역시 빈약하긴 매한가지다. 냉전기 전형적인 체제경쟁과 상호비방의 '자유진영' 논리와 어투를 그대로 가져다 쓴 소련 공산주의 비판에서는 레드 콤플렉스의 시대적 한계와 이에 편승한 저자의 몰역사적 인식이 드러나고, 중국이나 아시아에 대한 언급들은 이들 지역이 오랜 기간 역사적 저발전 단계에 있었던 것처럼 보는 오리엔탈리즘이 묻어난다. 그가 드는 사례들 역시, 단편적이고 편의적인 취사선택을 거쳐 주워섬길 뿐이다.
그저 당대의 믿음과 당대의 '상식'에 기댄 한계가 너무도 뚜렷하다. 아무래도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후 승전국 미국을 중심으로 '자유진영'이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 세력에 대한 냉전을 새롭게 시작한 시점에 인간의 자유와 개인주의를 지켜내겠다는 자유세계 이데올로그의 냄새가 너무 난다. 저자도 수차례 '악마'라 지칭하고 있는 히틀러와 나치에 대한, 그리고 '광신자'로 싸잡아 묘사되는 '대중운동가', '사회 불평분자'에 대한 혐오는 왠지 2010년대 가스통을 들고 있는 '어버이연합'과 같은 냄새를 풍긴다.
그럼에도 어떤 점에서 그의 책은 니체의 관점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인간을 병들게 만드는 목적론과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가족과 부족과 국가와 종교와 같은 특정 조직이 개인의 자유와 창의를 필연적으로 제약하고 억압하게 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라는 점에서 니체가 떠오르는 거다. 그러나 니체가 보통 일반인과 초인(ubermensch) 사이의 간극을 말하며 인간의 고양을 말했다면, 이 책의 구도는 굉장히 협소하고 불편하다. 지독한 개인주의적 반공주의자 버전이랄까.
아마도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애초 저자의 의도와도 같이 사회 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거나 '대중 운동' 일반에 대한 해명을 위한 참고 자료로 인용되기보다는, 주로 종교적 광신자나 폭탄테러범의 내면 심리를 읽는데 제한적으로 참조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어쩌면 이 책을 지금 한국에서 읽어야 하는 이유를 찾는다면 역시 마찬가지 맥락을 짚어야 하지 않을까. 이른바 '개독인'들이 왜 '개독인'이 되고 말았는지, 라거나 '어버이연합'이 왜 '어버이연합'이 되었는지라거나.
물론 중간에 말했던 내 의심이 유효하다면, 이 책의 얼개를 손쉽게 뒤집어 씌운다면 '멍청하고 좌절한 대중'이 몇몇 선동가의 외침에 놀아나며 '미국산 소고기가 위험하다'느니, '4대강이 무너진다'느니, 'FTA하면 나라 망한다'느니 따위의 선전선동을 '맹신'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기가 더욱 간편한 건 사실이다. 그래서 다시금 이런 책을 '고전'이라 상찬하며 서점 책꽂이에 진열하는 사람들의 의도와 행간을 의심하게 되는 거다. 이 책에 시공간을 넘어설만한 통찰과 혜안이 있어 보이진 않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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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zsche 2018-03-23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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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대중운동의 본질을 호도한 거리의 철학자 < 맹신자들 >
[서평] 에릭 호퍼(Eric Hoffer) 저, 이민아 역 < 맹신자들 The True Believer : 대중운동의 본질에 관한 125가지 단상 >을 읽고 / 2011. 09., 255쪽, 궁리출판사
공부모임 교재로 채택되어 읽게 된 에릭 호퍼의 대표 저서. 이 책은 '거리 위의 철학자'로 유명했던 에릭 호퍼를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책을 읽은 소감은 서구의 권력자들과 자본가들이 20세기 초중반 대중(민중)의 광범위한 저항운동을 폄하하고 비난하기 위해 반갑게 맞이하였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호퍼가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운영방식을 바꾸고자 나섰던 이들을 줄곧 개인적으로 무능하고 이기적이며 자기부정과 권태에서 출발한 광신도라 규정하기 때문이다.
1951년에 첫 출간된 이 책을 1990년 대한교육공사가 한국에 처음 번역 출간했던 제목은 <대중운동의 실상>이었다. ‘실상’이라는 단어에서 뭔가 ‘불온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 책은 “민주화와 노동운동 등 사회 운동'을 억누르려는 정부와 저항적 대중운동을 삐딱하게 보고자 하는 권위주의적 관변학계 지식인들에게 일종의 복음이 되었던 책”(장정일의 독서일기, 한겨레 2011. 10. 14.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00866.html)이기도 했다.
물론 장정일은 이 책의 순기능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적 통찰로 충만한 이 책은, 딱 소리와 함께 야구장을 가로지르는 ‘빨랫줄 타구’처럼, 대중운동을 좌우·선악 양단으로 구획하지 않는다. 호퍼는 수구나 진보 공히 대중 동원이나 선동에 취약하다고 보며, 대중운동을 무조건 악으로 타매하기보다 “정체된 사회를 각성시키고 혁신하는 요인”으로 긍정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는 맹신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개성과 주체성을 돌보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오늘의 주체가 일망감시와 통치성에 속속들이 식민화된 지금, 지은이의 채근은 성공한 예외자의 순진한 해결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번에 출간된 제목은 'The True Believer'에 맞는 번역인 '독실한 신자'가 아니라 '맹신자'다. 이 제목 또한 출판사와 역자의 의도와 편견이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신념이나 사상 따위를 다른 것으로 바꿈"이라는 뜻을 가진 '전향'이라는 단어를, 좌절하거나 현실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대중운동에 뛰어드는 것을 지칭하는 데서도 출판사와 번역자의 수준 또는 악의가 느껴진다.
에릭 호퍼는 서문에서 여러 대중운동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을 독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책을 발간했다고 말한다. 그는 모든 유형의 헌신과 신념, 권력 의지, 단결과 자기희생에는 어떤 획일적인 속성이 있다고 말한다. 광신적 기독교 신자, 광신적 이슬람교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광신'이라는 점에서 한 부류로 취급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 책에서 다루는 '대중운동'은 반체제 저항운동뿐만 아니라 인간이 집단을 만들어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운동을 아우른다. 초기 기독교 운동, 종교개혁 운동, 프랑스 혁명, 러시아 혁명, 나치즘, 일본의 근대화, 시오니즘 운동 등을 포괄하는 의미다.
호퍼는 태동기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이 순식간에 극적으로 변한다는 전망에 이끌리기 쉽다고 주장한다. 대중운동의 지도자도 이러한 대중의 열망을 꿰뚫어보고 보잘것없는 현재를 극복하면 영광스러운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고 대중을 선동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장밋빛 미래에 이끌리는 이는 주로 좌절한 사람이며, 현재의 자신을 경멸하는 좌절한 사람은 자기의 삶이 통째로 바뀌는 급진적인 변화를 선호한다는 것이다.
변화를 갈망하는 이러한 좌절한 이들의 심리 상태 때문에 모든 초기의(태동기) 대중운동은 좌절한 사람들한테 호소하는 경향이 있다고 호퍼는 말한다. 그에 따르면 자신이 쓸모없다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자신에게서 벗어나 좀 더 완전하고 숭고해 보이는 무언가를 추종하기가 쉽다. 숭고한 대의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자신의 하찮은 삶, 망가진 인생으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이다. 실로 좌절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매달릴 어떤 대상이 필요한 것이므로 그것이 종교든 사회혁명운동이든 민족운동이든 가리지 않는다. 따라서 호퍼에 따르면 광신적 공산주의자가 광신적 애국주의자나 광신적 가톨릭 신도로 바뀌는 일은 이치에 맞다. 맹신자에게는 대의명분이나 이상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매달릴 수 있느냐 여부에 있다.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거부하고 하나의 조직에 완전하게 하나된다는 호퍼의 주장은, 조직이나 대의를 위해 목숨을 희생하는 일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고 조직이 그리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위해 폭력을 동원해야 한다면 더 없이 무자비해질 수 있다는 논리로 비약된다.
따라서 호퍼의 책은 시공을 초월하여 극단적 테러리스트,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광신도'로 해석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호퍼는 결론을 대신하여 좋은 지도자의 예로 링컨, 간디, F.D. 루스벨트, 처칠 같은 지도자를 꼽는다. 이들은 히틀러, 스탈린, 루터, 칼뱅과는 달리, 좌절한 영혼을 대중운동의 재료로 삼지 않았다. 이들 "지도자의 자신감은 인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며, 자신이 인류를 명예롭게 대하지 않는 한, 아무도 명예로울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에릭 호퍼가 대중운동의 본질에 대한 단상이라고 주장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다분히 선험적이고 단정적이다. 특히 대중운동에 참여하는 개인들이 "자신이 쓸모없다는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사람일수록 자신에게서 벗어나 좀 더 완전하고 숭고해 보이는 무언가를 추종하기" 쉽고 "숭고한 대의에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자신의 하찮은 삶, 망가진 인생으로부터 도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억압과 세뇌에 의해 노예같은 삶을 살던 개인들, 민중들이 자신의 삶의 주인으로 나서기 위해 각성하고 자립하는 운동을 심하게 폄하하고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처럼 호퍼가 대중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속성을 규정하는 방식에는 대부분 합리성이나 논리적인 연관은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는 좌절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불만과 증오가 생겨난다거나 쉽게 남을 믿는 사람이 남에게 사기치는 경향이 강하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이는 상식적으로도 이론적으로 적절하지 않다. 사람이 좌절하게 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으며, 또한 그를 좌절하게 하는 요인이 내부나 외부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고립적인 환경인지 집단적인 환경인지에 따라, 교육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따라 당사자나 집단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부정하는 자는 외부에서 맹종할 대상을 찾을 수도 있지만, 역으로 삶을 포기하면서 움직임 자체를 거부할 가능성이 있기도 하다. 호퍼는 사람들의 특정한 처지와 심리상태에서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신의 의도에만 한정시키는 오류를 범한 셈이다.
독일의 경우에도,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심각한 좌절에 빠진 독일 민중들이 히틀러를 선택한 것은 히틀러의 대중 선동이 크게 작용하였으나 그 이전에 민중들이 지지하고 참여했던 독일 사회민주당 등 진보좌파 진영이 노선과 정책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이탈리아 공산당도 마찬가지였다.
호퍼의 주장에 타당성과 시사점이 있는 부분도 있다. 대중운동의 대오 속에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 뛰어 들었거나 광신적, 맹신적 속성을 가진 개인이 일부 존재할 수 있으며, 어쩌면 인간이란 존재 모두에게 맹신적 속성이 내재해 있을 수 있다. 그런 불완전한 개인이나 개인의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그리고 그런 맹신적 개인이 대중운동 내에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대중운동이 애초 목적에서 변질될 수 있음을 잊지 않도록 호퍼가 경고해주는 셈이다.
특정 최근 논란이 된 '일베(일간베스트)'의 일부의 경우 극단적인 자기 혐오에서 비롯된 가능성이 있으며, 정치인 지지자 중에서 명백히 '빠' 성향을 보이거나 극단적인 이념성향, 공격성향을 보이는 경우도 경계할 일이다.
광신적 대중운동이나 이념운동에 빠진 사람은 '광신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또 다른 광신적 운동으로 변질된다는 지적은 크게 공감이 된다. 1980년대에 이념적으로 과격하고 광신적이었던 김영환 씨 등의 뉴라이트 세력이 친일을 찬양하고 사회운동에 적대적인 사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극좌와 극우는 통한다"라는 말이 근거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니다.
"선전 선동만으로 내키지 않는 마음을 억지로 움직이지는 못하며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주입시키지도 못하고 이미 믿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설득하지도 못한다"(p.156)는 호퍼의 주장 역시 시사점이 크다. 희망이 없는 선전선동만으로는 대중운동을 일으키지 못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지적이다. 2008년 이명박 정권 등장 이후 지금까지 시민의식을 가진 이들과 민주당 등 정치권이 정권과 기득권에 반대하는 선전선동만으로 대중과 유권자에게 지지를 구하다가 2012년 총선, 대선에서 연거푸 패배한 것이 호퍼의 그런 주장을 입증한 셈이다.
한국의 사회운동 진영과 진보정당 진영이 선전선동 이외에 '희망'과 '대안'을 꾸준히 모색해야 함을 경고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대중운동에 대거 참여한 대중들이 "자기희생을 각오하는 열정"을 쏟아 붓는 반면 이런 주체가 만들어놓은 그 대중운동의 열매를 가져가는 이들은 "개인의 성공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는 호퍼의 주장은 선견지명이 있다. 1980년대 사회운동의 성과를 야당 정치인이 독식하고, 그 이후의 대중운동 역시 일부 출세주의적 운동가들이 보수 정치권에 몸담으면서 사회운동과 진보정당을 약화시켜온 것이 한국의 대중운동, 진보정당 운동사였기 때문이다.
[ 2013년 6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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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구름 2013-06-0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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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운동의 본질에 대한 심리/철학적 아포리즘
광신적 기독교 신자와 광신적 이슬람 신자, 광신적 민족주의자, 광신적 공산주의자, 광신적 나치가 서로 다른 것은 분명하지만, 그들을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광신적 성향은 서로 같아 보일뿐더러 서로 같은 것으로 취급된다. 그들에게 팽창과 세계 지배 의지를 불어넣는 힘도 마찬가지다. 모든 유형의 헌신과 신념, 권력 의지, 단결과 자기희생에는 어떤 획일적인 속성이 있다. 숭고한 대의와 교조의 내용은 서로 크게 다르지만, 그것을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그러한 획일적인 요소들이다. 파스칼처럼 기독교 교리로부터 효과적이고 정확한 근거를 탐구하는 사람이라면 공산주의와 나치즘, 민족주의에서도 효과적인 근거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각각의 운동이 목숨을 거는 숭고한 대의가 아무리 다를지라도 그들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에 목숨을 건다. - p12, 서문
'좌절한 사람들의 자기 부정을 향한 갈망', 간단하게 표현하면 저자가 말하는 광신자들의 본질을 이리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저자는 광신현상이 관찰되는 여러 대중 운동에 대해서 긍정적하거나 부정하는 식의 가치판단을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독자들에게 자신은 여러 대중 운동에 대해서 이렇게 이해하게 되었는데,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을 나누고 논의하자고 초대할 뿐입니다. 겸손한 자세이기는 하지만, 독자들에게는 상당한 도전감을 안겨주는 모양새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좌절한 사람들의 부류에 들어갈 수 있는, 사회 변화의 씨앗이 될 수 있는 불평분자들을 가장 흔히 관찰할 수 있는 곳의 범주로 빈민, 부적응자, 부랑자, 소수자, 청소년, 야심가들, 일련의 악덕이나 강박에 사로잡힌 사람들, 무능한 사람들, 과도하게 이기적인 사람들, 따분한 사람들, 죄인들을 들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저자가 말하는 여러 성공적인 대중운동과 그 지도자들, 열성적인 지지자들의 본질이 상당히 어두워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달갑지 않은 취급을 받았던 사람들이 대양을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 미국을 건설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오직 그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저자가 말하는 '사회의 쓰레기 같은 존재와 불평분자'들은 순전히 기존의 구체제의 관점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변화된 신체제의 관점에서는 위험을 무릎 쓴 선구자, 목숨을 바친 혁명가, 숭고한 대의에 자신을 희생한 운동가 등으로 충분히 표현될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 책은 여러 대중 운동에 짙게 배여있는 광신현상에 대한 125개의 단상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광신의 본질에 대한 생각에서부터 시작하여, 대중 운동의 처음 지도자와 지지자들의 본질에 대한 고찰,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대중 운동이 싹트고, 단결과 희생이라는 동력을 통해 성장하고, 창조적으로 또는 파괴적으로 그 결말을 맺는 과정에 대해서까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것입니다. 아마도 책의 처음을 대하다 보면 저자가 대중운동에 대해서 일종의 혐오감마저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광신적인 대중운동의 본질이나 지지자들의 본질에 대한 저자의 단상들은 부정적인 이미지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그러한 대중운동이 결국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각성시키며 혁신하는 역할을 한다고 인정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이미지는 저자가 자신의 연구결과들에 대해서 솔직하게 저술해 나가는 과정의 산물일 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마지막장에서 언급하는 대중운동의 시작에서 성숙기까지를 각 단계를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지도자 유형으로 지식인, 광신자, 실천적인 행동가 등을 들고 있는 것이나 좋은 지도자는 링컨이나 간디 같은 대중운동의 역동기를 언제 끝내줄 아는 지혜로운 이들 이었다고 표명하는 것을 보면, 결국 저자도 사회의 변화와 각성을 위한 대중운동의 가치에 대해서 숙고하고 긍정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내비치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 책의 내용 자체보다는 이 책이 현재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가질 것 같습니다. 저자의 통찰이 지금의 나 자신과 우리 사회에 던지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사람마다 많이 다를 수 있겠지만, 현재 우리 사회의 가장 큰 관심사인 FTA를 두고 대립하고 있는 두 진영을 들 수도 있겠습니다.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그리고 그 사이에는 칼끝같은 단절면만 있을 뿐, 서로를 인정하고 상대편의 말에 귀기울여 타협하지 못하고 결국 한쪽에서는 다수의 힘으로 밀어붙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체루탄이라는 극단으로 기억되는 폭력(?)으로 반항하는 모습을 배경으로 서로가 옳다고 국민을 팔면서 대립하는 모습을 보면, 말없이 지켜보는 국민의 반정도는 찬성하고 나머지 반정도는 반대한다는 것을 그들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의아할 뿐입니다. 과거의 개방 사례들을 예로 들며 누군가는 FTA가 우리에게 또다른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다른 누군가는 우리나라를 미국의 속국으로 만드는 지극히 불평등한 조약이며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 행위라고 말하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디까지가 득이 되고 어디부터가 문제이고 개선해야 하는지에 대한 진정성 담긴 설명을 듣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이 두 무리의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이들이 진정으로 FTA 조항들에 대해서 낱낱이 뜯어보면서 그 내용들이 의미하는 바를 따져보고 숙고해 보았는지, 자신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제대로 알기 위해 전문가들에게 자문이라도 구하며 균형을 잡으려고 노력해 보았는지에 대해서 냉정하게 물어본다면 그들은 무어라고 할는지..... 결국 한 쪽은 자유시장경제가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는 맹신에, 또 다른 한 쪽은 진보라는 자신들이 정파적 이념에 매몰된 모습만 보여주는 것은 아닐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들이 간디나 링컨같은 좋은 지도자가 아니라 이러한 상황을 끝까지 지속시키며 자신들의 권력이나 영향력을 유지하고하 했던 나쁜 지도자들이었을뿐이라는 씁쓸함만 남기고 마는 것은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서로를 원수같이 대하며 모욕하기에 바쁜 지금까지의 모습을 보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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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heaven 2011-11-25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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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시각들
미국의 에릭호퍼란 작가가 쓴책인데. 지은이 소개를 보면 어렵게 살다가 이책을 1951년도에 발표했다.이책은 나치즘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유럽이 황폐화된후 직후에 나와 집단 동일시에 관한 연구서로 그에게 엄청난 명성을 안겨주었으며, 오늘날에도 테러리스트와 자살폭탄자의 심리를 이해하는 지침서가 되고 있다라고 쓰여져 있다.
며칠전 읽은 [불가능한것의 가능성]이 나온 출판사가 궁리인데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인데 좀 일관성이 없는것 같다.조선일보는 아니더라도 중앙일보 정도의 출판사가 기획해서 나올 성향의 책인것 같다.쭉 읽다 보면 테러리스트의 심리라던지 부랑자,사회불만자,뭐기타...심리를 잘 묘사한 느낌도 없지않아 있어 보인다.
히틀러=스탈린 뭐 이정도는 그렇게 등치시킬수 있지 않나 싶다가 나중에는 레닌마저도 광신자 취급한다.히틀러와 레닌이 별반 차이없어 보인다.도대체 대중운동을 모두 그런식으로 치부해 버리면 모두 또라이들만 이사회에 존재하는 꼴이다.
그리고 이 책이 좀 더 수상하고 이상한건 옮긴이가 책을 옮기면서 서론이나 후기 뭐 이런 해설도 없어 이책에서 뭘 전달하고자 하는지 모르겠다.
이책에서 대중운동을하는 모든이는 맹신자라는 건지?뭐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집단심리를 이해할수 있다지만 그보단 우리 한국사회에 더 많은 대중운동에대한 우파들의 편협된 시각을 대변해 주는것 같은 느낌이 들어 좀 씁슬하다.
개정판이 나오면 좀 알차게 기획의도 라던지, 뭐 이책에서 얻을게 뭔지 설명이나 좀 해 줬으면 싶다.출판사 '궁리'가 좀 괜찮은줄 알았는데,좀 성의가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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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쿠로스 2012-04-2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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