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1

호치민 평전 | 윌리엄 J. 듀이커 | 알라딘

호치민 평전 | 윌리엄 J. 듀이커 | 알라딘
호치민 평전
윌리엄 J. 듀이커 (지은이),정영목 (옮긴이)푸른숲2003-04-01
원제 : Ho Chi Min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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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리뷰
"반은 레닌, 반은 간디"
책을 쓰기 위해서 이십여 년이 걸린 셈이라고 서문에 밝혔는데, 틀린 말은 아닌 듯싶다. 중국, 러시아, 미국 등의 문서 보관함 속에 잊혀졌던 기억들을 꺼내고, 당시의 사진들, 호치민이 남기거나 호치민을 평했던 많은 글과 편지들을 책에 담아냈다.

치우침이 없이, 이념적인 색깔을 들어내지 않고 담담하게 서술해 가는 글 속에서 우리가 떠올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호치민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열렬한 투쟁자로만 기억한다면, 아마 우리는 그의 반쪽을 놓치게 될 것이다.

물론, 호치민은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그에게 이념보다 우선이었던 것은 '베트남' 조국이었다. 베트남 사람 누구나 평등하게 대접받고,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내는 일이 그에게 중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독립을 지켜내기 위해 평생을 싸웠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그들은 창조주로부터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그러한 권리이다. 지상의 모든 민족들은 날 때부터 평등하며, 모든 민족은 생존의 권리, 행복과 자유의 권리를 가지고 있다."

하나된 베트남, 모든 베트남 민중이 인간답게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대화와 설득으로, 때로는 강대국간의 힘의 논리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며, 그래도 안될 때는 직접 무기를 손에 들고 투쟁을 하는 방법으로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투쟁했다.

프랑스로부터의 허울뿐인 독립, 실질적인 독립을 얻어내기 위한 프랑스와의 전쟁, 이념에 따른 남과 북의 분단, 미국의 침공과 끈질긴 전쟁. 그 험난한 세월을 보내지만, 끝내 베트남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호치민은 눈을 감는다.

나이가 들어서 호치민은 '호 아저씨'라고 불렸다고 한다. 노인부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에게 사랑받았고, 그 자신도 누구보다 베트남을 사랑했던, 온화한 미소의 호치민을 발견해본다.

"평화가 회복되면 농업세를 1년 간 면제하여 베트남 인민이 전쟁 동안 겪은 곤경에 보답하고, 피로 얼룩진 기나긴 전쟁 동안 인민이 보여준 노력과 희생에 당이 직접 감사해주기를 바란다..."
- 윤성화 (2003-03-26)


목차


서문
머리말
조직 일람표

1장 빼앗긴 땅에서 (1890 ~ 1911)
2장 성난 말 (1911 ~ 1923)
3장 견습 혁명가 (1923 ~ 1924)
4장 용의 아들 (1924 ~ 1927)
5장 마법의 검 (1927 ~ 1930)
6장 붉은 응에 틴 (1930 ~ 1931)
7장 광야로 (1931 ~ 1938)
8장 곽보의 동굴 (1938 ~ 1941)
9장 불어오른 강물 (1941 ~ 1945)
10장 격동의 8월 (1945)
11장 재건과 저항 (1945 ~ 1946)
12장 호랑이와 코끼리 (1945 ~ 1950)
13장 디엔 비엔 푸 (1951 ~ 1954)
14장 두 전쟁 사이 (1954 ~ 1957)
15장 모두 전선으로 (1959 ~ 1969)

에필로그 - 신화에서 인간으로
역자후기
호치민 연보
주석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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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아니,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어렵고 절망적이겠지만,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최신식 대포만큼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민족주의입니다! 그힘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 lonefox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이 보기에 아시아인들은 서구인들이 보기에는 후진적이지만, 현대 사회의 전면적 개혁의 필요성을 서구인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p133) - 겨울호랑이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부양하고, 여러분과 싸우는데, 여러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p174) - 겨울호랑이
˝여러분이 이 작은 그룹 내에서도 단결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조국으로 돌아간 뒤에 어떻게 대중을 단결시켜 식민주의자들과 싸우게 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나서게 할 수 있겠는가?˝(p333) - 겨울호랑이



저자 및 역자소개
윌리엄 J. 듀이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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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현대사와 호치민의 생애를 깊이 있게 연구해온 예외적인 역사학자이다. 1997년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 역사학과 교수직에서 퇴임했다. 저서로 <성스러운 전쟁 Sacred War : Nationalism and Revolution In A Divided Vietnam>, <베트남 Vietnam : Nation in Revolution>, <베트남에서의 승리 Victory in Vietnam : The Official History of the People's Army of Vietnam>등 베트남 관련 연구서 10여 권이 있다.

최근작 : <호치민 평전> … 총 204종 (모두보기)

정영목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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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옮긴 책으로 《성스러운 자연》 《신의 전쟁》 《축의 시대》 《프로이트》 《왜 쓰는가》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비극》 《미국의 목가》 《로드》 《제5도살장》 《눈먼 자들의 도시》 《불안》 《마르크스 평전》 등이 있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등이 있다. 《로드》로 제3회 유영번역상을, 《유럽 문화사》(공역)로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번역 부분)을 수상했다.

최근작 : <교유서가 10주년 기념 작품집 세트 - 전2권>,<판타스틱 북월드>,<소설이 국경을 건너는 방법> … 총 373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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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큰글자도서] 산곡미풍>,<나의 통역사>,<다시 만난 세계>등 총 268종
대표분야 : 한국사회비평/칼럼 3위 (브랜드 지수 178,057점), 음식 이야기 11위 (브랜드 지수 11,302점)






북플 bookple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탄생하는 것일까? 호치민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을 찌라도, 호치민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을 떠올리며, 호치민은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왜? 그 과업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며 베트남을 부러워했다. 호치민에 대한 제대로된 서적을 서가에서 찾아보았다. 900페이지라는 묵직한 벽돌책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내가 구할 수 있는 제대로된 호치민 평전은 미국인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이 유일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벽돌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호치민은 어떻게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그는 만들어진 존재일까? 탄생한 존재일까?



1. 호치민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까?

이 책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공을 상대로 싸웠던 사람이다. 베트남의 적국 출신인 그는 역사학자가 되어 호치민을 연구했다. 아무리 객관적인 시선으로 호치민을 바라본다하더라도, 그가 베트남의 적극 출신이며,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책을 읽으며, 강대국의 시선으로 쓰여진 구절들이 못내 아쉬웠다.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에필로그는 '신화에서 인간으로'라는 주제로 쓰여 있다.

윌리엄 J. 듀이커의 한계를 느끼게 만든 구절들은 여러 곳이 있었다. 윌리엄 J. 듀이커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하다보니, 정작 호치민을 1인칭 시점에서 살펴보는 서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객관성을 강조하다보니, 호치민의 내면을 서술하지 못한 셈이다. 호치민이 쓴 자서전 또한 1차 사료로서 비중있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윌리엄 J. 듀이커의 거리두기의 결과였다.

그래, 역사학자로서 객관성을 유지하고 픈, 그의 노력이라고 넘어가자며 위안을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 투쟁한 베트남의 애국자 판보이차우를 "반역자"로 지칭한 것은 나의 심기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했다. 그는 호치민이 바쁜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조국 독립을 위한 글들을 저술하는 것조차 비아냥 거리기까지 했다.



"응우옌 아이 쿠옥은 사진 손질을 하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던 모양이다."-121쪽



생계를 위해서 사진 손질을 하고, 시간을 쪼개서 조국 독립을 위한 글을 쓰는 응우예나 아이 쿠옥(호치민)을 "시간이 많이 남았던 모양"이라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은 나로하여금 윌리엄 J. 듀이커의 인격을 의심케했다. 아니, 세계 초강대국 미국 출신의 역사학자로서는 조국 독립 투쟁이라는 거룩한 가시밭길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윌리엄 J. 듀이커는 '객관성'이라는 매쓰를 사용해서,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을 마음껏 해부했다. 그리고 ‘그 해부는 응우예나 아이 쿠옥을 흠집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갖게한다. 베트남인들이 존경한 판보이챠우가 베트남인의 밀고로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베트남으로 압송되었다. 판보이차우를 밀고한 사람을 그의 비서 응우옌 투옹 후옌으로 볼 것인가, 응우옌 아이 쿠옥의 동료 람둑 투로 볼 것인가를 두고, 윌리엄 J. 듀이커는 세심하게 검증의 매쓰를 들이댔다. 어쩌면 응우예나 아이 쿠옥이 범인일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풍기기도 했다. 다행히 윌리엄 J. 듀이커는 판보이차우를 밀고한 인물은 응우옌 투옹 후옌으로 결론 내렸다. 객관성, 실증성, 논리성이라는 명목으로 응우옌 아이 쿠옥을 해부했다. 애국이라는 뜻의 응우옌 아이 쿠옥으로 이름을 바꾼 호치민이 독립운동의 선배를 내부 권력투쟁을 위해서 밀고했을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상세히 서술한 윌리엄 J. 듀이커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독립전쟁이라봐야 방임적 통치를한 영국에게서 전쟁한 것이 고작인 미국! 그러한 미국인으로서 가혹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베트남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희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불가능함을 응우옌 아이 쿠옥에게 들이대는 '객관성'이라는 매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에게 덧씌워진 '호 아저씨'라는 신화를 깨고 싶었나보다. 이 책의 곳곳에 "호는 인자한 호 아저씨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742쪽)라는 글이 난무하고 있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이라는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야망과 탐욕을 숨기고 '호 아저씨'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전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 평생을 인자하고 검소하게 살았다면, 그것은 배우로서의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의 본모습이아닐까? 설령 저자의 말대로 "호 아저씨 역할"을 했을지라도, 평생을 "호 아저씨 역할"을 하며 살았다면, 호치민은 호 아저씨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의 신화를 깨기 위해서 매쓰를 호치민의 여자문제에 들이댔다. 여기에 주석의 개인 간호사인 수안이라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1955년 국경의 카오 방 성 출신의 한여자가 하노이에 도착했다. 예쁘장한 수안은 곧 나이가 들어가는 주석의 눈길을 끌었으며, 그는 그녀에게 개인 간호사 일을 맡겼다. 결국 수안은 주석의 아들을 낳았으며, 훗날 이 아들은 호의 개인 비서인 부키가 양자로 데려갔다. 1957년 어느 날 수안의 주검이 교외의 한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중략).... "처음에 이 사건은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뒤 죽은 여자들 가운데 한 여자의 약혼자가 국회에 진정서를 보내, 수안 양은 찬 쿠옥 호안에게 강간당했으며, 호안이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다른 두 여자 역시 진상 공개를 막기 위해 비슷한 방법으로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진정서 사건은 금방 흐지부지되고 호안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으나......(중략).... 호치민이 이 애처로운 이야기를 상세하게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않지만, 어쨌든 그는 이 일을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738쪽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부분을 서술하면서 "주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호" 혹은 "호치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될텐데, 굳이 "주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호치민이 수안을 정식 아내로 등록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말대로, 호치민이 "호 아저씨"라는 배역을 강요받았기에 평생을 혼자서 살아야만 했던 것일까? 호치민은 왜? 억울하게 죽은 수안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했을까? 수안 사건은 박정희 정권시기에 있었던 정인숙 사건과 비슷한 사건일까? 숱한 의문이 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윌리엄 J. 듀이커의 검증의 칼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남자의 가장 약한 급소는 배꼽아랫일이다. 유력 대선후보가 여자문제로 감옥에 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청렴결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진보 개혁진영에서 여자문제는 치명상을 입힌다.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의 급소를 직접 건드린다.

70대의 할아버지가 된 호치민은 중국의 당 지도자 타오 주가 하노이를 공식 방문했을 때, 벗을 삼으려하니 중국 광둥성의 젊은 여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타오가 베트남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구하지 않느냐고 묻자, 호치민은 "모두 나를 호 아저씨라고 부른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평생을 혼자 살아야했던 호치민! 그는 너무도 외로웠을 것이다. 조국과 결혼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그런데, 호치민은 그의 아우라 때문인지, 윌리엄 J. 듀이커의 말대로 호 아저씨의 역할을 강요받아서인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여성을 가까이할 수 없었다. 윌리엄 J. 듀이커가 들이댄 검증의 칼날을 보며,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호치민을 위선자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여인을 사랑하고 싶고 한여인을 사랑하고 싶은 평범한 남성의 바램을 느낄 수도있다. 나는 그를 후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호치민은 여러차례 유언장을 수정했다. 전쟁 이후,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며,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서 베트남의 북부, 중부, 남부에 흩어 뿌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를 뿌린 장소를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정치가들은 호치민의 바램을 짓밟았다. 권력을 잡은 레 두안은 호치민의 시신을 방부처리했다. 유언장에서 세금 감면과 소박한 장례식을 요청한 부분을 삭제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호치민을 신격화했다. 그렇게 그는 신화가 되었다.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책에서 끈질기게 호치민의 신화를 해체하려했다. 그러나, 그도 결론에서는 "호는 전세계의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주기 위해 강력하게 투쟁했던 혁명적 영웅의 한 사람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다."(840쪽)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호치민의 신화는 지구상의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화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호치민이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2. 그는 가능했고, 우리는 불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베트남은 독립과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것도 국제 정세를 기민하게 이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이뤄냈다. 우리는 강대국들에 의해서 독립을 했고, 그들에 의해서 분단이 되었다. 베트남은 이루었고, 우리는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김구와 여운형이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호치민이 있었다. 베트남 독립과 통일의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호치민을 탐구하는 것이 유용한 방법이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 일생을 살았던 판보이 차우와 판쭈친의 영향을 받으로 성장했다. 독립 정신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호치민이라는 거목이 자라났다. 호치민의 형 응우옌 신키엠과 누나 응우옌 티 타인 또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반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한그루의 거목이 자연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듯이, 베트남 식민지배라는 상황속에서 수많은 애국지사의 영향을 받으며 그는 혁명가로 자라났다.

예수가 광야를 헤매고,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을 달련했듯이, 호치민은 프랑스로 가는 배의 주방보조역할을 하며 세계를 탐방한다. 인도차이나를 비롯해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는 프랑스와 세계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미국, 식민지배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프리가 등지를 전전하며 견문을 넓힌다. 이 시기가 그에게 국제 정세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게했다. 호랑이가 사냥감을 기다리며 엎드려있듯이, 그는 조국 독립을 준비하며 조용히 세계를 여행했다.

어떤이는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이 분열되었기에 우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20년대 베트남에는 3개의 공산당이 존재할 정도로 공산주의 세력은 분열되어있었다. 또한 이들은 민족주의 세력과도 대립했다. 독립운동세력의 분열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베트남은 이루었고, 우리는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 이유는 호치민이 공산주의 보다는 민족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 처럼 민족을 우선시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권력의 핵심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에 반해서 호치민은 코민테른에서 활동하면서도 소련에게 그의 공산주의 사상을 의심받을 정도로 민족을 계급투쟁보다 중시했다. 그가 소련과 친밀했던 이유는 베트남의 독립을 도와줄 나라가 소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1924년 1월 레닌의 죽음과 1925년 쑨원의 죽음, 1920년데 판보이 처우와 판쭈친의 죽음, 그리고 그후, 베트남 국내에서 활동하던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가 죽음으로써, 사실상 베트남 독립을 이끌 수 있는 리더가 호치민밖에 없었다. 1940년 봄 베트남으로 귀환한 그는 "아시아 혁명은 자기 나름의 역할이 있으며, 볼셰비키 모델을 따를 필요가 없다."(392쪽)라고 말하며 자신의 독립운동 전략을 실현해 나갈 수 있어다. 그랬다.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았기에 민족을 우선시한 그의 독립운동 전략을 실현할 수 있었다.

둘째, 기민하게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하려했다. 몽양 여운형이 국내에서 다양한 세력을 끌여들여 조선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백범 김구가 광복군과 미 OSS와 손을 잡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지만, 일본의 빠른 패망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호치민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베트남으로 잠입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다가오는 조국독립의 때를 준비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고 프랑스가 아직 베트남에 들어오지 않은 절묘한 기회를 틈타서 전국적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달성한다. 다른 민족주의자들이 중국 남부에 그대로 남아 연합군이 일본을 물리쳐주기를 기다린 반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서 도전했다. 그리고 다가온 기회를 이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했다. 피를 흘리며 댓가를 당당히 요구한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독립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었지만, 남이 대신 피를 흘리기를 기다린 그의 경쟁자들은 결실을 얻을 자격이 없었다.

셋째,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떤이는 베트남의 상황보다 한국의 상황이 매우 나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5년의 상황은 베트남이 더 나빴다. 북부는 중국군과 프랑스군이 군침을 흘리고 있었으며, 남부는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때, 미약하게나마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미국은 베트남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호치민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악조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파리에서 베트남으로 돌아모며 신생국 베트남에 대해서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우리한테는 기계도 없고, 원료도 없고, 심지어 숙련된 노동자도 없다. 우리 재정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 조국에는 산과 숲, 강과 바다가 풍부하다. 그리고 우리 동포는 결의, 용기, 창의성이 강하다."-565쪽



빈약한 무기로 프랑스와 다시 전쟁을 시작해야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볼 수 있는 자가 바로 호치민이었다. 인간의 가장 큰 무기는 희망이다. 호치민은 베트남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었다. 이를 통해서 베트남인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이라는 3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물리쳤고,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물러나게했다.

세계적 초능력자 유리겔러에게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의 통일을 이룰방법을 묻자. "한국사람 모두가 한마음으로 통일을 외친다면, 그때 통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에게는 호치민이라는 탁월한 리더가 있었고, 그 리더를 믿고 한마음으로 독립과 통일을 외쳤다. 우리에게는 탁월한 리더가 많았다. 몽양 여운형을 비롯해서, 백범 김구 등등... 수많은 탁월한 리더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중심으로 한마음으로 외치지 못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아직도 분단체제를 이용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려는 세력이 존재하는한, 우리의 소원은 쉽게 이뤄지지 못할 것이다.



900페이지의 벽돌책을 내려 놓으며 새해를 맞이했다.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배라는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봄이 오기를 기다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한 베트남인들은 호치민을 만들었다. 그들의 영웅을 만들었다. 베트남인들이 호치민이라는 리더를 믿고 희생하지 않았다면,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리더십보다 팔오우십이 약했다. 많은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되려했지, 현명한 팔로우가 되려하지 않았다. 프랑스와의 전쟁(1차 인도차이나전쟁), 미국과의 전쟁(2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국과의 전쟁(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리더 호치민이 죽었으나 베트남이 쓰러지지 않은 것도, 베트남인들의 탁월한 팔로우십 때문이다. 호치민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며, 호치민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윌리엄 J. 듀이커는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에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호치민 신화는 베트남인들에 의해서만들어진 것이기에, 베트남이 다시 위기에 빠진다면, 그들은 호치민 신화를 소환하거나, 새로운 신화를 만들것이다. 신화는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 신화는 다시 한번 베트남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강나루 2022-01-02 공감 (35) 댓글 (3)









필자가 개인적으로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공익으로 근무하기 전인 제작년 부터였다. 당시 체게바라의 매력에 푹 빠져있던 필자는 체게바라 관련 책들 부터 해서 여러가지를 읽고 봤다. 당시 필자가 봤던 어떤 체게바라 관련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그 다큐멘터리 초반에 68혁명 당시 서방의 학생들이 호치민과 체게베라의 사진을 들고 시위를 하는 장면이 나왔었다. 그 학생들은 "Ho Ho Ho Chi Minh!! Che Che Che Guevara!!"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다. 그 장면이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베트남 전쟁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그 전 까지만 해도 필자는 호치민이나 베트남 전쟁에 대해 잘 몰랐다. 당시 필자가 알던 베트남 전쟁은 "돈을 벌고, 많은 한국인들의 희생이 있었던 전쟁"정도였다. 호차민과 베트남 전쟁에 대해 공부하며 지금까지 왜곡된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알면 알수록 베트남을 침략한 미국에 대해 더더욱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그 나라를 침략하여 수백만의 베트남인을 공중폭격과 고엽제로 학살했던 것이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최근 박항서 감독이 스즈키컵을 우승으로 이끌면서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돈독해지고 있다. 즉 우리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할 때인 것 같다. 즉 과거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반공주의적인 도그마에서 벗어나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을 바라봐야 한다. 따라서 오늘은 지금까지 필자가 읽거나 감상한 책이나 영상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베트남 10000일의 전쟁



캐나다 종군기자인 마이클 매클리어가 쓴 베트남 전쟁 서적이다. 1945년 미국의 OSS요원들이 베트남에 들어가 베트민 조직을 훈련시키는 과정부터 1946년 프랑스의 재침략과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분단된 베트남과 응오딘지엠 정권의 부정부패상,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 미국의 참전과 북폭, 1968년 구정공세와 미국내에서 일어난 반전운동 호치민의 사망과 전환점, 그리고 1972년 크리스마스 폭격과 파리평화협정 1975년 월남패망까지 약 30년전쟁을 서술한 책이다.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수많은 사람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통히여 이 책을 썻다.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일반 병사들과 장교들부터, 미국내에서 반전운동을 했던 반전운동가들, 응우옌 까오 끼와 같은 남베트남 지도자들 그리고 팜반동과 같은 북베트남 지도자들 까지 저자 마이클 매클리어는 수많은 사람들을 인터뷰 했기에 객관성이 보장된다. 베트남 전쟁의 원인과 결과 그리고 전개양상을 아는데 있어서 매우 좋은 책이다. 참고로 이 책은 1980년대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 졌다.



































2. 베트남 전쟁



한국전쟁의 저자 박태균 교수가 쓴 베트남 전쟁 관련 서적이다.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 50주년이자 베트남 전쟁 종결 40주년인 2015년에 출간되었다. 한국군의 파병,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 한강의 기적에 감춰진 이야기, 미국의 패배한 이유, 베트남 전쟁 당시 참전했던 병사들의 기록을 비롯한 얘기들을 책에서 다뤘다.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분석한 책이다.

































3. 미국의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과 서방세계에서 일어났던 반전 운동과 시민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한 책이다. 반전운동에 참가했던 군인들과 대학생 지식인들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베트남 전에 반대했는지 알 수 있다. 베트남 전쟁 시기 남녀평등 문제와 인종문제를 심도 있게 다뤘고, 전후 베트남과 캄보디아 상황 그리고 중월전쟁과 도이머이에 대한 내용도 다룬다. 이 책은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지만, 전쟁 이후 등장한 베트남의 정치 체제를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가 주도하는 자본주의로 규정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은 좀 걸러볼 필요가 있다 본다. 이 책은 비단 베트남 전쟁 뿐만 아니라 냉전 이후 미국의 제국주의 침략과 중동개입 문제까지 심도있게 고찰했다. 미국과 서방세계에서 일어난 베트남 전 반전운동을 알기위해선 읽어볼 가치가 있다.

































4. 전환시대의 논리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언론인인 리영희 선생께서 쓰신 책이다.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 또한 베트남 전쟁에 대해 아주 심도있게 다루고 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출판된 전환시대의 논리의 분량은 대략 500페이지 정도 되는데 그중에 1/5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다루고 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내용은 1부와 2부로 나누어져 있는데, 1부는 19세기 프랑스의 식민지 지배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까지의 내용을 다뤘고, 2부는 남북분단 이후 1975년 북베트남의 통일까지의 내용을 다뤘다. 박정희 정권 시기 국가가 국민에게 강요했던 반공주의라는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국내 최초로 베트남 전쟁을 민족해방세력 대 제국주의 세력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였다. 즉 박정희 군사독재 시기 리영희 선생은 이 책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물론 그런 관점을 싫어하는 보수세력의 경우 이 책의 관점을 매우 싫어하겠지만 군사독재 정권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각에서 베트남 전쟁을 해석했다는 점에서 분명 읽어볼 만한 책이자 명저다.

































5. 왜 호찌민인가



치과의사이자 한베평화재단 이사역을 맡고 있는 저자 송필경 선생께서 쓴 책이다. 베트남 여행을 통해서 저자가 알게 된 호찌민과 베트남 역사와, 문화 그리고 한국군 문제에 대해 알 수 있다. 사실상 저자의 여행기이도 하다.책을 통해서 한국과 베트남의 역사가 의외로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과 호찌민을 직접만났던 베트남 사람들에 대한 스토리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저자는 호치민 정신이 현재 베트남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호치민이라는 인물을 반공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편협한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지 세삼 느끼게 해주는 책이다.































6.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



어린이 위인전이다. 2012년 12월 28일 초판을 발행했다. 어린이용 도서이긴 한데 호찌민에 대한 내용과 베트남 전쟁 관련한 내용이 굉장히 탄탄하다. 호찌민의 일대기와 베트남 전쟁 관련해서 있을 내용은 거의다 있다. 심지어 호치민의 최대 실책이라 할 수 있는 토지개혁도 응오딘지엠의 탄압과 더불어 이 책에서 균형있게 다루고 있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얘기도 어린이용 만화치고는 생각보다 탄탄하다. 즉 호치민에 대한 내용은 거의다 있다. 두꺼운 평전이 읽기 힘들다면 강력추천하는 책이다.































7. Who? 호치민



어린이용 위인전으로 유명한 Who 시리즈 위인전 중 하나인 책이다. 비록 내용은 위에 있는 '호찌민과 베트남 전쟁'보다는 부실한 측면이 있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이 어떠한 인물인지 알게 해주는 데에는 필요한 책이다.



































8. 호치민-혁명과 애국의 길에서



시공사 출판사 디스커버리 시리즈중 하나인 책이다. 인물 평전보다는 내용이 좀 적다. 호치민의 생애를 잘 요약해냈다. 즉 다이제스트 용으로 읽어볼만 하다.



































9. 호치민 평전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 OSS로 근무하며 호찌민을 직접 만났던 찰스 스펜이 쓴 호치민 평전이다. 저자 찰스 스펜은 호치민을 직접 만났던 인물이기에 책을 읽으며 호치민의 채취를 느끼기에는 충분하다. 300페이지 정도 되는 분량의 호찌민 평전이기에 듀이커의 호찌민 평전이 읽기 버거우면 이 책을 읽는것도 나쁘지 않다.



































10. 호치민 평전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대사관에서 해외파견 장교로 근무했던 윌리엄J듀이커가 쓴 호치민 평전이다. 저자는 베트남 전쟁 당시 밀림에서 싸우던 베트콩들이 미국의 동맹국이던 남베트남군 보다 사기가 압도적인 이유를 찾다가 그들의 사기엔 호치민이라는 인물의 영향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호치민이라는 인물에 매료되어 30년간 중국, 베트남, 프랑스, 러시아에 있는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고 비교하여 쓴 호치민 평전이다. 신화로서의 호치민의 아닌 인간으로서의 호치민을 재조명했다. 호찌민의 초기 성장과정부터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까지의 내용이 매우 탄탄하다. 특히 호치민의 전반 생애에 대한 내용이 아주 탄탄하다. 다만 이 책은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호찌민에 대해선 책의 두께에 비해 깊이 다루지 않는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베트남 전쟁 당시의 호찌민의 말년 행적보다 베트남 전쟁이 일어나기 까지의 그 과정이 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베트남 전쟁 파트는 평전에서 깊게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976페이지라는 압도적인 분량을 자랑하는 책이기에 읽는이를 좀 버겁게 만들 수 있다. 확실한건 호치민의 생애를 아는 데 있어서 국내에 출판된 책 중에 이보다 더 좋은 책은 없다.































11.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미국의 양심적인 학자 하워드 진의 자전적인 에세이 형식의 자서전이다. 이 책의 주된 내용은 흑인인권운동과 미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내용이 전반적이기는 하나 저자는 베트남 전쟁 시기 반전운동에 적극 나섰던 인물이기에 이 책에서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당시 미국이 벌인 희대의 자작극 통킹만 사건과 미국의 무차별 폭격 그리고 제국주의 침략과 무차별 살상에 맞서 평화와 평등을 요구했던 반전운동에 대해 알 수 있고, 구정 공세 이후 북베트남으로가 협상하여 몇몇 포로들을 구출했던 저자 스토리도 알 수 있다.

































12. 전쟁의 슬픔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베트남의 문학작가 바오닌이 쓴 소설이다. 저자 바오닌은 북베트남군으로 참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비극을 고발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다. 베트남 전에 대한 참전용사들의 책들 대부분은 미국측에서 쓴 것들이 많이 알려졌지만, 북베트남군이나 해방전선 측에서 쓴 책들은 한국이나 서방세계에 그리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은 미군 참전용사들이 전쟁으로부터 느꼈던 감정을 북베트남군이나 해방전선 또한 느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3. 디어헌터



베트남 전 반전영화의 첫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다. 비록 이 영화는 베트콩을 악마화 하고, 베트남 전쟁시기 그 어디에서도 행해지지 않았던 러시안 룰렛 하는 장면을 등장시킴으로써 현실을 왜곡하고, 오리엔탈리즘적인 측면이 있지만, 당시 베트남 전쟁이 미국인들에게 어떻게 다가왔을지, 참전용사들이 어떤 트라우마를 겪었을지를 보여줌으로써, 전쟁의 비극을 고발한다. 베트남 전쟁 반전영화의 시작점인 작품이기에 볼 필요가 있다.

































14. 지옥의 묵시록



디어헌터를 이어가는 또 다른 베트남 전 반전 영화다. 전쟁의 광기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 작품이다. 헬기에서 미사일을 쏘고, 미니건(개틀링건)을 발사하며 최고의 화력을 동원하며 민간인이 사는 지역을 공격했던 미군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당시 기술력의 한계를 뛰어넘은 작품이다. 진짜 네이팜 폭탄을 터뜨리고, 살아있는 생소의 목을 도끼로 자르는 등 전쟁의 광기를 아주 충격적으로 잘 묘사한 작품이다. 다만 영화 후반부로 갈수록 멘탈붕괴가 될 수 있으니 유의하자.

































15. 플래툰



미국의 진보적 성향의 영화 감독인 올리버 스톤의 작품이다. 베트남 전 당시 미군들 사이에서 자주 일어나던 프레깅(일반 병사가 자신의 상관을 사살하는 하극상)을 아주 잘 묘사했고, 게릴라전에 지쳐 마을 하나를 몰살시키려고 시도하는 미군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베트남 전쟁이 왜 잘못된 전쟁인지를 아주 잘 보여주는 영화다.































16. 풀 메탈 자켓



영화계의 천재라 알려진 감독 스텐리 큐브릭이 만든 작품이다. 이 영화는 2부로 나누어져 있다. 1부는 훈련소 생활을 다루고 있고, 2부는 베트남 전쟁 장면을 다루고 있다. 감독은 오로지 살인과 복종을 강요하고 세뇌시키는 군대문화를 아주 적나라하게 비판했다. 특히 부하들을 스파르타식으로 갈구며 오로지 살인 병기로 만들고자 하는 하트먼 상사를 통해서 군대문화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2부인 베트남 씬에선 자신들이 빡세게 훈련 받으면서 가야했던 전쟁터 베트남이 지옥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민간인을 향해 기관총을 쏘며 즐거워 하는 병사를 보여줌으로써 이 작품 또한 베트남에서 미군이 벌인 짓을 고발한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영화 7월 4일 생과 더불어 손꼽는 작품이다. 보기를 강력추천하는 영화다.































17. 굿모닝 베트남



박물관이 살아있다에서 루즈벨트 대통령과 영화 쥬만지에서 주인공 엘런을 맡았던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다. 미군 방송국에서 근무하는 주인공을 통해서 한편으로는 유쾌하고 한편으로는 비극적인 베트남의 상황을 보여줌으로써 미국이 참전한 베트남 전쟁의 현실은 시궁창이었다는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특히나 닐 암스트롱의 What a wonderful world를 틀어주면서 보여주는 장면은 점알 소름이 돋을 정도.

































18. 7월 4일 생



우리에게 영화탑건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톰 크루즈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다. 실제 베트남 전에 참전했던 론 코빅이 자신의 스토리를 소설로 쓴 것을 다시 영화화한 작품이다. 하워드 진이 아주 좋아하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필자가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영화 중 필자가 풀 메탈 자켓과 더불어 가장 손꼽는 작품이다. 2차대전 이후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베트남 전쟁과 변화하는 미국의 상황을 몸소 겪고, 자신 스스로 변해가는 과정을 아주 잘 그렸다. 전쟁의 고통이 한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아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이다. 영화 풀 메탈 자켓과 더불어 보기를 강력추천하는 영화다.































19. 위 워 솔져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시작되기 1년전인 2002년에 나온 베트남 전 영화다. 감독과 배우로서 성공한 멜 깁슨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처럼 화려한 전쟁씬을 보여줌으로써 전쟁영화 촬영 기술의 발전을 제대로 보여준 영화이기는 하나 매우 비판적으로 보아야할 영화다. 특히나 이 영화는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행위에 대한 비판과 베트남 전에 대한 반전성향을 희석시키려고 만들어진 느낌이 아주 강하다. 극중에선 애국심이 아닌 전우들을 위해 싸웠다고 하지만, 그런 식의 논리는 미국의 노골적인 침략행위를 옹호하려는 수작이 아주 잘 보인다.





































20. 알포인트



베트남 전쟁에 대해 반성적으로 고찰한 영화는 한국에도 있다. 그 대표적인 영화가 알포인트라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베트남 전쟁이 끝나가던 1972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베트남 사람들이 피해다니는 알포인트에 들어갔던 한국군이 겪는 유령에 대한 공포를 통해 베트남 전쟁의 참전을 반성하고자 하는 작품이다.

































21. 더 포스트



작년 12월 말에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작품이다. 미국이 자국민을 속여왔다는 사실을 아주 잘 입증한 펜타곤 페이퍼가 어떻게 해서 공개되고, 왜 중요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영화다. 즉 가망이 없는 게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몰아넣었던, 미국 정부의 행동을 비판적으로 보게되는 영화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영화다.



























22. 베트남 전쟁 PBS 다큐



2017년 미국 PBS에서 만든 10부작 짜리 베트남 전쟁 다큐멘터리다. 1편당 1시간 40분 이상의 엄청난 러닝타임을 자랑하는 다큐멘터리다. 거의 책 한권 분량에 가까운 아주 긴 다큐멘터리다. 필자가 보기에 베트남 전쟁을 알기위해 꼭 읽어야할 책이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이면 베트남 전쟁을 알기위해 감상해야할 다큐멘터리는 바로 PBS에서 만든 베트남 전쟁이다. 이 다큐멘터리도 마이클 매클리어의 베트남 10000일의 전쟁처럼, 수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토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객관성이 보장된다. 비록 끝까지 보는데 지루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지만, 베트남 전쟁을 제대로 알기위해선 꼭 봐야할 것이다.



































23. 최고의 인재들



한국전쟁 관련 서적 콜디스트 윈터의 저자 데이비드 핼버스템이 쓴 책이다. 이 책은 왜 미국에 있는 최고의 인재들이 베트남 전쟁이라는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분석했다. 즉 베트남 전쟁이라는 최악의 실수를 미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저질렀고, 그 대가를 어떻게 치렀는지를 알려준다. 그러나 1104페이지라는 책의 분량이 읽는이를 부담스럽게 할 것이다. 베트남 전쟁으로 부터 아무런 교훈없이 2003년 이라크 전쟁을 베트남 전쟁에 비유하며 경제성장을 운운하던 대한민국의 모 정당 사람들이 읽어야할 책이다.
NamGiKim 2018-12-28 공감 (22) 댓글 (0)





(이제는 반공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1945년 9월 2일 하노이의 바딘광장에서 50대 중년 남성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빛을 바랜 카키색 양복과 고무 슬리퍼 차림이었지만 대중 앞에서 자신이 준비한 독립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가 읽은 베트남 독립선언문의 시작은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의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시작과 같았다. 소수를 제외한 일반 대중들은 그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 그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한 애국자 응우옌 아이 쿠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연설을 통해 자신이 베트남의 전설의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응우옌 아이 쿠옥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바로 호치민이다.



68혁명 당시 베트남의 독립영웅 호치민은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체게바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과 더불어 신좌파들의 우상이었다.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의 젊은이들은 호치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고 서독, 영국, 이탈리아, 미국의 깨어있는 젊은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호치민은 한때 서구의 젊은이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68혁명시기 체게바라 마오쩌둥과 더불어 신좌파들의 우상이었던 호치민은 과연 어떠한 인물일까?



1.호치민 일대기



호치민은 1890년 5월 19일 킴리엔에서 응우옌 신 삭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1살이 되던 해인 1901년 어머니는 병으로 사망했다. 1907년 호치민은 프랑스의 국립학교인 국학에 들어가 공부했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기에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착취당했다. 이에 부조리를 느끼게 된 호치민은 1908년 조세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국학에서 퇴학당했다. 국학에서 퇴학당한 이후 호치민은 베트남을 돌아다니다가 1911년 6월 사이공에서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를 타고 베트남을 떠나 2년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1911년에는 프랑스에서 정원사로 일하기도 했었고 1912년에는 미국에 머물면서 노동자로 일하며 흑인 활동 조직에 참가했다. 1914년 호치민은 런던에 거주하면서 청소부 요리사 보조 등 온갖 일을 하며 노동조합 활동에 관여했다. 그러다 1917년 파리로 돌아와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일을 하기도 했었다. 1919년 호치민은 파리강화회의 때부터 베트남 독립을 청원했고 안남애국자연합을 결성하여 1919년 6월 베르사유 회의 당시 베트남 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호치민의 청원을 무시했고 이는 호치민이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호치민은 코민테른에 가입했고 1922년에는 <르 파리아>를 창간 한 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했다. 그러던 1923년 6월 모스크바로 넘어가 코민테른 극동국에서 근무했고 12월부터 스탈린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924년 11월 호치민은 중국 광저우로가 1925년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한 뒤 교사로 활동했다. 1926년에는 <혁명의 길>을 집필했다. 1927년 5월에는 중국국민당의 공산주의자 숙청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했다가 11월 파리 베를린에서 머물며 12월 반제국주의 동맹 집행위원회에 참석했다. 1928년에는 태국 방콕에서도 활동했다. 1930년 호치민은 베트남의 사회주의 조직을 합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다. 1930년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착취에 반대하여 통킹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통킹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독립운동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심지어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는 비행기까지 동원했다. 1931년 호치민은 홍콩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코민테른 요원의 도움으로 1932년에 석방되었다. 1934년 호치민은 다시 모스크바로 건너갔다. 모스크바 레닌 대학에 입학했고 1935년 스탈린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중국 팔로군 지역본부에서 기자 일을 하면서 보건 담당 간부로 일하기도 했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에는 프랑스가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했다.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다. 1940년 호치민은 운남성에서 팜 반동과 보 응우옌 지압을 만났다. 1941년 호치민은 30년 만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비엣 박에 베트민 사령부를 만들었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하자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 세계적으로 반파시즘 전선이 형성되었다. 호치민은 1942년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스파이로 오인 받아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감옥생활을 하면서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오인으로 인한 체포였기에 호치민은 1943년 9월에 석방됐다. 1944년 호치민은 중국 남부에 혁명 운동 기지를 만들었고 12월에는 베트남 해방군을 창설하여 일본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45년 호치민은 미국의 OSS와도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일본과의 전면전을 준비했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 한 뒤 호치민은 전국적으로 총봉기를 일으켰고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한다는 명분으로 북에는 중국 국민당군이 들어왔고 남에는 영국군이 들어왔다. 중국군은 그냥 철수 했지만 영국군은 프랑스를 앞세운 뒤 철수 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고 했다. 1946년 호치민은 평화회담을 통해 프랑스를 몰아내려 했지만 1946년 11월 하이퐁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이 충돌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군이 유리했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비엣 박을 공격함으로써 베트민 본부를 점령했으나 호치민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49년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 중국이 베트민군을 도우면서 전세는 베트민군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군을 공격했고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 1951년 베트민군은 프랑스 군에게 총공격을 가했지만 프랑스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탄을 동원하여 총공격을 막아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프랑스군이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 비엔 푸에서 보 응우옌 지압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대패하면서 호치민의 승리로 끝났다.



디엔 비엔 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2년 이내 통일을 위한 선거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안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통일을 불발로 끝내버렸다. 결국 호치민과 공산당은 1956년 토지개혁이 마무리한 뒤 1959년 남부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1960년 남베트남에서 응오딘지엠의 독재에 맞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자신이 가톨릭이라는 이유로 가톨릭만 우대하며 민중의90%라 할 수 있는 불교도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63년 6월 사이공에서 틱광둑이라는 스님이 소신공양을 했다. 이를 계기로 응오딘지엠 정권은 전 세계적으로 비난 받았고 결국 CIA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무너졌다. 아이젠하위 정부 때부터 남베트남을 지원해오던 미국은 케네디 정부에 와서는 군사고문단을 파견했고 1964년 린든존슨 정부시기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했다.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남베트남에 더 많은 군대를 파견했고 1968년이 되어서는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숫자가 50만을 넘었다. 1965년부터 67년까지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약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현재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런 미국의 거짓말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1968년에 발생했다. 구정공세가 바로 그것이다. 1968년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총공세를 가했다. 구정공세 당시 사이공의 미 대사관 1층이 공병과 자살특공대에게 점령당했고 구정공세 1달 동안 미군 2천명 이상이 사망했다. 구정공세 이후 미국 내에서 반전 분위기가 높아졌고 결국 그해 11월 북폭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파리에서 평화회담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9월 2일 호치민이 사망했다. 미국은 1969년부터 베트남에서 군대를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1970년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1971년에는 라오스를 침공했으며 1972년 마지막 수단으로 크리스마스 폭격이라 하여 대규모의 폭탄공세를 퍼부은 뒤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1975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3월부터 남베트남을 공격했고 4월 30일 사이공을 함락시키면서 통일을 이룩했다.



2.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스탈린이 물었다. “호치민 동지, 여기 의자 두 개가 있소. 하나는 민족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요. 동지는 어디에 앉고 싶소?” 그러자 호치민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스탈린 동지, 나는 두 의자에 다 앉고 싶습니다.” (p621)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부양하고, 여러분과 싸우는데, 여러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 (p174)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



호치민에 대한 평가 중에 가장 논란이 많은 평가는 그가 민족주의자냐 혹은 사회주의자냐 하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의 견해를 얘기하자면 호치민은 사회주의자성향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호치민이 과거 프랑스 공산당과 모스크바 극동국 그리고 공산당을 이끌었던 이유는 “베트남 독립” 오직 그거 하나였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라면 자본주의 국가와 협력할 생각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과 베트민이 미국의 OSS와 협력하여 대일전을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거기다 2차 대전 당시 호치민을 만난 미군들(찰스 스펜, 아키메데스 패티, 토마스)은 처음에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의심했다가 그를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자로 평가했다.



호치민은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할 당시에도 공산주의 사상보다는 식민지해방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마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조선독립의 방향을 사회주의에서 찾았듯이 말이다. 즉 호치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식민지해방운동에 기반을 두었던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호치민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호치민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건 베트남 독립과 통일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지 일부의 주장대로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J듀이커는 호치민을 반은 간디 반은 레닌이라 했다. 책의 저자 말대로 호치민은 간디처럼 민족주의 성향도 있었고 레닌처럼 사회주의 성향도 있기에 반은 간디 반은 레닌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호치민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에 맞서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지 그가 민족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하는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호치민이 민족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하는 논쟁은 그다지 의미 없는 논쟁이다.



3.호치민의 한계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나 성인군자라 해도 사람은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다. 호치민 또한 마찬가지다. 호치민도 한계가 있었다. 그의 한계를 얘기하자면 하나는 1954년부터 56년까지 북베트남에서 진행되었던 토지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일 것이다.



호치민이 토지개혁에 대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던 건 1950년대 부터였다. 호치민과 공산당이 토지개혁을 실행에 옮긴 것은 1954년 부터였고 1954년부터 56년까지 토지개혁의 여파로 북베트남에 거주하던 80만 명(이들 중 60만 명은 가톨릭 교도였다)이 월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토지개혁을 너무 급진적으로 추진한 결과 대략 1만5천에서 2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부르주아로 몰려 처형당했다. 물론 이런 상황을 호치민이 바랬던 건 아니었기에 호치민은 1956년 당내에서 철저한 자아비판을 했다. 분명한 사실은 월남한 60만 명의 가톨릭교도들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가 내세운 꼭두각시 바오다이 정권과의 커넥션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그렇지 않은 가톨릭들도 적잖게 있었으나 토지개혁시기 그들도 북베트남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도 토지개혁시기 월남하지 않고 북베트남에 남아있던 90만의 가톨릭교도들은 토지개혁 이후 신앙의 자유를 북베트남 공산당으로부터 보호받았다.



어쨌든 1950년대 북베트남에서 진행되었던 호치민의 토지개혁은 무자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월남했으며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래도 호치민은 자신의 실책을 자아비판을 통해 철저히 인정했다. 따라서 높은 지휘에 있음에도 자신의 실책을 인정한 호치민은 훌륭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은 호치민의 최대 실수인 토지개혁을 가지고 그를 악랄한 인물로 평가하는데 이는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설사 호치민이 토지개혁이라는 실책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호치민의 또 다른 한계인 트로츠키주의자 탄압 밑 숙청은 또 하나의 비판의 대상의 될 수 있다. 베트남 내에서 트로츠키파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곳은 사이공을 비롯한 코친차이나 지대였지만 베트남 독립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었다. 1930년대는 소련에서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단취급을 받게 되던 시기였다. 호치민도 공산당이나 베트민을 이끌면서 베트남 내에 있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탄압했지만 스탈린이 소련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하던 방식(대숙청)대로 아주 비열하고 무자비하게 했던 건 아니다. 1930년대 호치민과 공산당은 일국사회주의를 천명하는 스탈린과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호치민 또한 소련의 눈치를 어느 정도 봐야했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배척했던 것이다. 물론 탄압과 배척 숙청 그 자체는 옳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930년대의 상황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호치민이 토지개혁과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비롯한 한계가 있었지만 그 한계가 호치민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될 수는 없다. 즉 이런 한계가 있더라도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영웅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다.



4.한국과 베트남전쟁 그리고 월남패망



호치민 하면 우리나라 얘기도 빼 놓을 수가 없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전면전에 돌입한 미국을 따라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보냈다. 총32만 명이 참전했고 전쟁기간 동안 한국은 남베트남에 항상 5만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한국의 경제성장은 어마어마했다. 좋든 싫든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엄청난 외화를 벌 수 있었고 그 대가로 엄청난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시기 프랑스에 부역하여 민족을 배반한 민족반역자 정권이었고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정권이었다. 심지어 남베트남의 관료들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장비와 무기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게 팔아먹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했다. 남베트남은 정통성에서도 북베트남에게 밀렸다. 그에 비해 미군의 적이었던 호치민을 비롯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지도자들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항불 애국지사들이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은 빈호아, 퐁니 퐁넛, 하이마을과 같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고 약 1만 명에서 3만 명이나 되는 라이따이한들이 전쟁기간 동안 태어났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 혹은 반공성전”으로 미화했다. 사실상 국회에서도 여야 할 거 없이 베트남 전쟁의 참전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의 승리는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긴급초지 9호를 발동했고 민주주의를 탄압했다. 따라서 한국군의 만행과 한국군이 상대했던 적이 “자유와 독립 그리고 민족해방이라는 기치아래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세력이자 민족해방 세력이었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동안 철저히 감춰졌다.



당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리영희 선생은 1976년 반공법에 의해 구속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정부가 제시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관점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오랜 시간동안 대한민국에서는 호치민을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인식해 왔고 베트남 전쟁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 혹은 돈이 되는 전쟁”으로 인식되어 왔다. 2003년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이라크 전쟁을 제2의 베트남 전쟁”으로 인식하며 이라크전 한국군 참전을 강하게 주장했던 한나라당의 의원들만 봐도 한국사회가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에 대한 수준이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베트남 전쟁>을 집필하여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리영희 선생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한국인들이 베트남전쟁을 이해할 때 허심탄회한 심정으로 대해야 할 일이에요. 미국과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라며 어떤 동질감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사이 공정권의 모든 분야의 지배세력과 개인들은, 100년에 걸쳤던 불란서 식민지 시기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지배 아래에 있던 4년 동안, 그리고 그 후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시기에, 거의 예외 없이 불란서 식민당국과 일본 식민당국에 빌붙었던,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이었어. 실례로 200만 사이공정권의 소위 ‘자유반공 군대’의 장교단에서, 과거 불란서와 일본 식민지시대에 민족독립해방운동을 한 사람은 육군 중령 한사람이 있었을 뿐이야. 이 중령에 관한 얘기를 미국 극비문서 속에서 봤는데, 지금 그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구먼. 어쨌거나 남베트남 군대는 실질적으로 외세의 용병이나 괴뢰 군대였어.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흔히 남베트남의 저항세력을 ‘베트콩’이라고 부르는 ‘민족해방전선’(FLN)군과 호지명 휘하 베트공 세력의 중추 지휘부인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 31명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항불·항일 그리고 물론 현재의 항미 독립투사였어! 그 인적 구성을 보면, 정통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교수, 여성운동가, 간호사, 각급학교 교사 등 지난날의 민족해방투사들뿐이에요. 그들 31명의 경력을 보면 한 사람도 식민지시대에 형무소를 가지 않은 사람이 없어!



이 사실 하나만을 두고 보더라도, 베트남 인민이 소위 외세의존, 반공주의 사이공정권과 민족해방세력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민족적 동질감을 느끼며, 어느 쪽에 더 충성을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어요?"



글을 마치며



호치민은 프랑스 독립운동, 사회주의 운동, 항일투쟁, 제1차인도차이나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까지 20세기 역사의 격동의 현장 속에서 베트남 민중들을 위해 그리고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사회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다. 비록 토지개혁에서의 숙청과 트로츠키주의자 탄압이라는 한계도 존재하지만 호치민은 사심 없이 한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바쳐왔다. 무엇보다 호치민은 자신이 높은 위치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독재자로 흑화하지 않았다. 이것이야 말로 호치민의 가장 위대한 점일 것이다.



필자는 윌리엄J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인 작년 추석 때 읽었었다. 그리고 이번 달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었다. 호치민 평전을 읽으면서 한국의 역사와 베트남의 역사가 굉장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에 맞서 싸웠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이끄는 사람들이 프랑스 식민지 시기부터 꾸준히 독립운동을 해온 애국지사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살아온 호치민의 일대기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필자가 위에서 쓴 “한국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월남패망”에서도 얘기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한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호치민에 대한 중립적인 평가가 이단 취급 받았었다. 최근 태극기 집회에서는 “박원순 서울 시장이 호치민을 좋아하는 종북좌파 빨갱이”라는 근거 없는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다. 이런 태극기 집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 사람들이 내리는 호치민에 대한 평가는 반공이데올로기적인 색채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필자는 이런 이데올로기적 관점이야 말로 “호치민에 대해 전반적인 평가를 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매우 잘못된 관점이자 편향된 관점”이라 얘기하고 싶다.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묘와 호치민 주석 집무실을 들리며 “호치민 주석은 전 인류를 통틀어서도 위대한 인물”이라며 매우 극찬했고 베트남 방문에서 한국군의 만행에 대해 유감의 표시를 밝혔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은 정말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이 더 와 닿았던 것 같기도 하다. 무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정말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호치민을 아는데 있어서 이 책은 필수일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앞으로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더 좋아져 호치민에 대한 양심적인 평가가 국내에서 전반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반공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NamGiKim 2018-04-10 공감 (33)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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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과 호아저씨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일까? 탄생하는 것일까? 호치민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을 찌라도, 호치민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을 떠올리며, 호치민은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이루었는데, 우리는 왜? 그 과업을 온전히 이루지 못했는지를 생각하며 베트남을 부러워했다. 호치민에 대한 제대로된 서적을 서가에서 찾아보았다. 900페이지라는 묵직한 벽돌책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내가 구할 수 있는 제대로된 호치민 평전은 미국인 역사학자 윌리엄 J.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이 유일했다. 선택의 여지 없이 벽돌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호치민은 어떻게 조국의 통일과 독립을 이뤄낼 수 있었을까? 그는 만들어진 존재일까? 탄생한 존재일까?



1. 호치민의 신화는 만들어진 것일까?

이 책의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베트남 전쟁에서 베트공을 상대로 싸웠던 사람이다. 베트남의 적국 출신인 그는 역사학자가 되어 호치민을 연구했다. 아무리 객관적인 시선으로 호치민을 바라본다하더라도, 그가 베트남의 적극 출신이며, 미국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의 책을 읽으며, 강대국의 시선으로 쓰여진 구절들이 못내 아쉬웠다.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그의 에필로그는 '신화에서 인간으로'라는 주제로 쓰여 있다.

윌리엄 J. 듀이커의 한계를 느끼게 만든 구절들은 여러 곳이 있었다. 윌리엄 J. 듀이커는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그러하다보니, 정작 호치민을 1인칭 시점에서 살펴보는 서술은 찾아보기 힘들다. 객관성을 강조하다보니, 호치민의 내면을 서술하지 못한 셈이다. 호치민이 쓴 자서전 또한 1차 사료로서 비중있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윌리엄 J. 듀이커의 거리두기의 결과였다.

그래, 역사학자로서 객관성을 유지하고 픈, 그의 노력이라고 넘어가자며 위안을 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나려 투쟁한 베트남의 애국자 판보이차우를 "반역자"로 지칭한 것은 나의 심기를 무척이나 불편하게 했다. 그는 호치민이 바쁜 시간을 쪼개면서까지 조국 독립을 위한 글들을 저술하는 것조차 비아냥 거리기까지 했다.



"응우옌 아이 쿠옥은 사진 손질을 하고도 시간이 많이 남았던 모양이다."-121쪽



생계를 위해서 사진 손질을 하고, 시간을 쪼개서 조국 독립을 위한 글을 쓰는 응우예나 아이 쿠옥(호치민)을 "시간이 많이 남았던 모양"이라는 비아냥거리는 표현은 나로하여금 윌리엄 J. 듀이커의 인격을 의심케했다. 아니, 세계 초강대국 미국 출신의 역사학자로서는 조국 독립 투쟁이라는 거룩한 가시밭길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일까?

윌리엄 J. 듀이커는 '객관성'이라는 매쓰를 사용해서,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을 마음껏 해부했다. 그리고 ‘그 해부는 응우예나 아이 쿠옥을 흠집내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갖게한다. 베트남인들이 존경한 판보이챠우가 베트남인의 밀고로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어 베트남으로 압송되었다. 판보이차우를 밀고한 사람을 그의 비서 응우옌 투옹 후옌으로 볼 것인가, 응우옌 아이 쿠옥의 동료 람둑 투로 볼 것인가를 두고, 윌리엄 J. 듀이커는 세심하게 검증의 매쓰를 들이댔다. 어쩌면 응우예나 아이 쿠옥이 범인일수도 있다는 뉘앙스가 풍기기도 했다. 다행히 윌리엄 J. 듀이커는 판보이차우를 밀고한 인물은 응우옌 투옹 후옌으로 결론 내렸다. 객관성, 실증성, 논리성이라는 명목으로 응우옌 아이 쿠옥을 해부했다. 애국이라는 뜻의 응우옌 아이 쿠옥으로 이름을 바꾼 호치민이 독립운동의 선배를 내부 권력투쟁을 위해서 밀고했을 수도 있다고 전제하고, 이를 상세히 서술한 윌리엄 J. 듀이커를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독립전쟁이라봐야 방임적 통치를한 영국에게서 전쟁한 것이 고작인 미국! 그러한 미국인으로서 가혹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아야했던 베트남인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희생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불가능함을 응우옌 아이 쿠옥에게 들이대는 '객관성'이라는 매쓰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에게 덧씌워진 '호 아저씨'라는 신화를 깨고 싶었나보다. 이 책의 곳곳에 "호는 인자한 호 아저씨 역할을 완벽하게 해냈다."(742쪽)라는 글이 난무하고 있다. 조국의 독립과 통일이라는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야망과 탐욕을 숨기고 '호 아저씨'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전제 자체에 동의할 수 없다. 평생을 인자하고 검소하게 살았다면, 그것은 배우로서의 가면을 쓴 것이 아니라, 그의 본모습이아닐까? 설령 저자의 말대로 "호 아저씨 역할"을 했을지라도, 평생을 "호 아저씨 역할"을 하며 살았다면, 호치민은 호 아저씨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저자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의 신화를 깨기 위해서 매쓰를 호치민의 여자문제에 들이댔다. 여기에 주석의 개인 간호사인 수안이라는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1955년 국경의 카오 방 성 출신의 한여자가 하노이에 도착했다. 예쁘장한 수안은 곧 나이가 들어가는 주석의 눈길을 끌었으며, 그는 그녀에게 개인 간호사 일을 맡겼다. 결국 수안은 주석의 아들을 낳았으며, 훗날 이 아들은 호의 개인 비서인 부키가 양자로 데려갔다. 1957년 어느 날 수안의 주검이 교외의 한 도로변에서 발견되었다. ......(중략).... "처음에 이 사건은 거의 공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년 뒤 죽은 여자들 가운데 한 여자의 약혼자가 국회에 진정서를 보내, 수안 양은 찬 쿠옥 호안에게 강간당했으며, 호안이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그녀를 죽이라고 명령했고, 다른 두 여자 역시 진상 공개를 막기 위해 비슷한 방법으로 처리했다고 주장했다. 진정서 사건은 금방 흐지부지되고 호안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으나......(중략).... 호치민이 이 애처로운 이야기를 상세하게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않지만, 어쨌든 그는 이 일을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738쪽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부분을 서술하면서 "주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호" 혹은 "호치민"이라는 단어를 사용해도 될텐데, 굳이 "주석"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호치민이 수안을 정식 아내로 등록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의 말대로, 호치민이 "호 아저씨"라는 배역을 강요받았기에 평생을 혼자서 살아야만 했던 것일까? 호치민은 왜? 억울하게 죽은 수안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했을까? 수안 사건은 박정희 정권시기에 있었던 정인숙 사건과 비슷한 사건일까? 숱한 의문이 나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윌리엄 J. 듀이커의 검증의 칼날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남자의 가장 약한 급소는 배꼽아랫일이다. 유력 대선후보가 여자문제로 감옥에 가는 일이 있을 정도로, 청렴결백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진보 개혁진영에서 여자문제는 치명상을 입힌다. 윌리엄 J. 듀이커는 호치민의 급소를 직접 건드린다.

70대의 할아버지가 된 호치민은 중국의 당 지도자 타오 주가 하노이를 공식 방문했을 때, 벗을 삼으려하니 중국 광둥성의 젊은 여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타오가 베트남에서 시중드는 사람을 구하지 않느냐고 묻자, 호치민은 "모두 나를 호 아저씨라고 부른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평생을 혼자 살아야했던 호치민! 그는 너무도 외로웠을 것이다. 조국과 결혼했다고 생각해도 되겠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가정을 이루며 살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능이 아닌가! 그런데, 호치민은 그의 아우라 때문인지, 윌리엄 J. 듀이커의 말대로 호 아저씨의 역할을 강요받아서인지 몰라도 공식적으로는 여성을 가까이할 수 없었다. 윌리엄 J. 듀이커가 들이댄 검증의 칼날을 보며, 이것이 만약 사실이라면, 호치민을 위선자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한여인을 사랑하고 싶고 한여인을 사랑하고 싶은 평범한 남성의 바램을 느낄 수도있다. 나는 그를 후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다.

호치민은 여러차례 유언장을 수정했다. 전쟁 이후, 국민들을 위한 정책을 제시하며,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서 베트남의 북부, 중부, 남부에 흩어 뿌리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자신의 재를 뿌린 장소를 알리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정치가들은 호치민의 바램을 짓밟았다. 권력을 잡은 레 두안은 호치민의 시신을 방부처리했다. 유언장에서 세금 감면과 소박한 장례식을 요청한 부분을 삭제했다. 베트남 공산당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호치민을 신격화했다. 그렇게 그는 신화가 되었다.

윌리엄 J. 듀이커는 이 책에서 끈질기게 호치민의 신화를 해체하려했다. 그러나, 그도 결론에서는 "호는 전세계의 추방당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진정한 목소리를 찾아주기 위해 강력하게 투쟁했던 혁명적 영웅의 한 사람으로 확실하게 자리잡고 있다."(840쪽)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호치민의 신화는 지구상의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신화로 남을 수밖에 없다. 호치민이 그러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2. 그는 가능했고, 우리는 불가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베트남은 독립과 통일을 이루어냈다. 그것도 국제 정세를 기민하게 이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이뤄냈다. 우리는 강대국들에 의해서 독립을 했고, 그들에 의해서 분단이 되었다. 베트남은 이루었고, 우리는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에게 김구와 여운형이 있었다면, 그들에게는 호치민이 있었다. 베트남 독립과 통일의 비결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호치민을 탐구하는 것이 유용한 방법이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 일생을 살았던 판보이 차우와 판쭈친의 영향을 받으로 성장했다. 독립 정신을 가지고 계신 아버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영향을 받으며 호치민이라는 거목이 자라났다. 호치민의 형 응우옌 신키엠과 누나 응우옌 티 타인 또한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반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다. 한그루의 거목이 자연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듯이, 베트남 식민지배라는 상황속에서 수많은 애국지사의 영향을 받으며 그는 혁명가로 자라났다.

예수가 광야를 헤매고, 공자가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을 달련했듯이, 호치민은 프랑스로 가는 배의 주방보조역할을 하며 세계를 탐방한다. 인도차이나를 비롯해서, 베트남을 식민지배하는 프랑스와 세계 초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미국, 식민지배의 고통을 당하고 있는 아프리가 등지를 전전하며 견문을 넓힌다. 이 시기가 그에게 국제 정세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갖게했다. 호랑이가 사냥감을 기다리며 엎드려있듯이, 그는 조국 독립을 준비하며 조용히 세계를 여행했다.

어떤이는 우리의 독립운동 세력이 분열되었기에 우리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20년대 베트남에는 3개의 공산당이 존재할 정도로 공산주의 세력은 분열되어있었다. 또한 이들은 민족주의 세력과도 대립했다. 독립운동세력의 분열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베트남은 이루었고, 우리는 이루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 이유는 호치민이 공산주의 보다는 민족을 먼저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백범 김구와 몽양 여운형 처럼 민족을 우선시하는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분들은 권력의 핵심을 잡아내지 못했다. 그에 반해서 호치민은 코민테른에서 활동하면서도 소련에게 그의 공산주의 사상을 의심받을 정도로 민족을 계급투쟁보다 중시했다. 그가 소련과 친밀했던 이유는 베트남의 독립을 도와줄 나라가 소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1924년 1월 레닌의 죽음과 1925년 쑨원의 죽음, 1920년데 판보이 처우와 판쭈친의 죽음, 그리고 그후, 베트남 국내에서 활동하던 기라성 같은 독립운동가가 죽음으로써, 사실상 베트남 독립을 이끌 수 있는 리더가 호치민밖에 없었다. 1940년 봄 베트남으로 귀환한 그는 "아시아 혁명은 자기 나름의 역할이 있으며, 볼셰비키 모델을 따를 필요가 없다."(392쪽)라고 말하며 자신의 독립운동 전략을 실현해 나갈 수 있어다. 그랬다. 그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다. 생존투쟁에서 살아남았기에 민족을 우선시한 그의 독립운동 전략을 실현할 수 있었다.

둘째, 기민하게 국제 정세를 파악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하려했다. 몽양 여운형이 국내에서 다양한 세력을 끌여들여 조선 건국동맹을 조직하고, 백범 김구가 광복군과 미 OSS와 손을 잡고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했지만, 일본의 빠른 패망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호치민은 일제가 패망하기 전에 베트남으로 잠입하여 조직을 정비하고 다가오는 조국독립의 때를 준비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고 프랑스가 아직 베트남에 들어오지 않은 절묘한 기회를 틈타서 전국적 봉기를 일으켜 독립을 달성한다. 다른 민족주의자들이 중국 남부에 그대로 남아 연합군이 일본을 물리쳐주기를 기다린 반면,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서 도전했다. 그리고 다가온 기회를 이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했다. 피를 흘리며 댓가를 당당히 요구한 호치민과 그의 동료들은 독립이라는 결실을 얻을 수 있었지만, 남이 대신 피를 흘리기를 기다린 그의 경쟁자들은 결실을 얻을 자격이 없었다.

셋째,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떤이는 베트남의 상황보다 한국의 상황이 매우 나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45년의 상황은 베트남이 더 나빴다. 북부는 중국군과 프랑스군이 군침을 흘리고 있었으며, 남부는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때, 미약하게나마 베트남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미국은 베트남 편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호치민은 희망을 잃지 않았다. 악조건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파리에서 베트남으로 돌아모며 신생국 베트남에 대해서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부족하다. 우리한테는 기계도 없고, 원료도 없고, 심지어 숙련된 노동자도 없다. 우리 재정은 거의 바닥이 난 상태이다. 그러나 우리 조국에는 산과 숲, 강과 바다가 풍부하다. 그리고 우리 동포는 결의, 용기, 창의성이 강하다."-565쪽



빈약한 무기로 프랑스와 다시 전쟁을 시작해야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칠흑같은 암흑 속에서 한줄기 빛을 볼 수 있는 자가 바로 호치민이었다. 인간의 가장 큰 무기는 희망이다. 호치민은 베트남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었다. 이를 통해서 베트남인들은 인도차이나 전쟁이라는 30년 전쟁에서, 프랑스를 물리쳤고, 세계 초강대국 미국을 물러나게했다.

세계적 초능력자 유리겔러에게 고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의 통일을 이룰방법을 묻자. "한국사람 모두가 한마음으로 통일을 외친다면, 그때 통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베트남인들에게는 호치민이라는 탁월한 리더가 있었고, 그 리더를 믿고 한마음으로 독립과 통일을 외쳤다. 우리에게는 탁월한 리더가 많았다. 몽양 여운형을 비롯해서, 백범 김구 등등... 수많은 탁월한 리더가 있었지만, 우리는 그들을 중심으로 한마음으로 외치지 못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아직도 분단체제를 이용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누리려는 세력이 존재하는한, 우리의 소원은 쉽게 이뤄지지 못할 것이다.



900페이지의 벽돌책을 내려 놓으며 새해를 맞이했다.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프랑스 식민지배라는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봄이 오기를 기다려 스스로의 힘으로 독립을 달성한 베트남인들은 호치민을 만들었다. 그들의 영웅을 만들었다. 베트남인들이 호치민이라는 리더를 믿고 희생하지 않았다면,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리더십보다 팔오우십이 약했다. 많은 사람이 좋은 리더가 되려했지, 현명한 팔로우가 되려하지 않았다. 프랑스와의 전쟁(1차 인도차이나전쟁), 미국과의 전쟁(2차 인도차이나 전쟁), 중국과의 전쟁(3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리더 호치민이 죽었으나 베트남이 쓰러지지 않은 것도, 베트남인들의 탁월한 팔로우십 때문이다. 호치민의 신화가 만들어진 것이며, 호치민은 평범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윌리엄 J. 듀이커는 증명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인들에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호치민 신화는 베트남인들에 의해서만들어진 것이기에, 베트남이 다시 위기에 빠진다면, 그들은 호치민 신화를 소환하거나, 새로운 신화를 만들것이다. 신화는 그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 신화는 다시 한번 베트남을 일으켜 세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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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22-01-02 공감(35)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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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胡志明)에게 공산주의는 무엇이었을까?






"많은 동료들이 그가 죽은 뒤에도 기억하는 것은 그의 개인적인 품성, 선량하고 소박한 이미지, 불굴의 낙관주의, 대의에 대한 진지하고 헌신적인 태도였다."(p225)




본문에 나오는 호치민에 대한 그의 동료들 평가다.




어린 시절 반공(反共)교육을 받고 자란 나에게 호치민은 북한의 김일성, 중공의 모택동, 캄보디아의 폴 포트와 더불어 공산주의 시대의 독재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12년 정도 전까지도 이러한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었다.




2004년 정도의 일이었던 것 같다. 성당 후배 중에서 운동권 출신의 똑부러진 후배가 있었다. 평소 에는 다소 맹한 구석도 있지만, 사회문제에 있어서는 눈을 반짝이며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그런 똑똑한 후배였다. 어느 날인가 이 후배가 무슨 어이없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나는 가볍게 이 후배에게 "이런 호치민 같은..." 이라고 농담삼아 말했다. 별 생각없이 던진 농담에 후배는 정색을 하면서 칭찬을 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호치민에게 별 관심이 없었지만, 그 후배의 뜻밖의 반응에 호치민이 어떤 인물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호치민 평전>은 베트남의 민족 지도자 호치민에 대해 미국인 윌리엄 J. 듀이커가 저술한 평전이다. 베트남전의 적국이었던 미국인의 시점에서 서술된 책이기에 한계점이 있다. 만약, 일본인이 <안중근 평전>을 썼다면 그 내용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책에서도 그런 한계가 존재한다. 프랑스와 일본, 중국의 베트남 지배 야욕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분석을 하면서, 호치민을 민족해방을 위해 노력하는 투사의 모습이 비춰지는 것에 반해, 미국과의 전쟁 시기 호치민의 모습에는 독재자의 그림자가 나타난다. 또한, 이미 날조된 것으로 알려진 "통킹 만 사건" 등에 대해서도 명확한 설명이 없이 넘어가는 등 저자의 미국인으로서의 한계가 나타난다. 이러한 편향된 저자의 시선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아쉬운 부분이라 생각된다.




호치민이 유학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 소련에 가서 공산주의 사상을 공부하고 이후 반(反)제국주의 투쟁을 했으며, 검소한 생활 등으로 유명한 베트남 지도자라는 사실은 이미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을 다시 알고자 950페이지에 달하는 평전을 읽는다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나는 평전을 읽으면서 '호치민에게 공산주의는 목적이었을까, 아니면 수단이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아마도 이에 대한 답이 그가 '베트남의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기도 하리라.




이러한 질문과 관련해서 그가 1922년 프랑스 장관과 나눈 대화가 답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내 삶에서 중요한 것,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우리 동포의 자유입니다. 이제 가도 됩니까?"(p146)




그의 이러한 사상은 당시 공산혁명의 맏형이었던 소비에트 연방 주도하의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제3인터내셔널)의 지침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레닌은 당대의 도덕률이 혁명적 행동 규약과 거의 관계가 없고, 실제로 둘 사이에 화해 불가능한 모순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가정했다. 반면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의 행동규범 목록은 전통적인 유교 도덕을 연상시키는 면이 강했다. 검소해야 한다, 다정하면서도 공정해야 한다, 잘못은 단호하게 고쳐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 배움을 존중해야 한다, 공부하고 관찰해야 한다, 오만과 자만을 피해야 한다, 관대해야 한다."(p224)




호치민은 베트남의 전통사상에 기반하여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려 했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주위에서 코민테른의 지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는 오해를 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반 대중의 눈높이에 맞춰 '베트남 해방'이라는 목표를 향해 간다.




"개인적으로 볼 때 그토록 매력있고 성격이 미묘한 사람이 어떻게 글에서는 그렇게 단조롭고 단순한 모습을 보여주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그의 인격과 그가 오랜 세월에 걸쳐 유지한 정치적 영향력의 비밀이 숨어 있다.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은 다른 많은 마르크스주의 지도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청중이 지식인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노동자, 농민, 병사, 사무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지적인 총명함으로 독자에게 감명을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대신 그는 단순하지만 생생한 말로 그들을 설득하여 자신의 세계관과 변화를 성취하는 방식을 공유하고자 했다."(p140)




마오쩌둥과 마찬가지로 그는 폭력 투쟁가보다는 교육을 통해 전사들을 양성하고, 일반 대중에게 다가가는 그의 노력은 적에게는 '위험한 선동가'로서, 일반 대중에게는 따뜻한 '호 아저씨'의 모습으로 비춰지게 되었다. 그는 대중에게만 따뜻하게 대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포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945년 베트남을 지배하던 일본의 패망 이후, 호치민은 응오 딘 디엠(훗날 남베트남의 대통령, 고딘 디엠)의 석방을 명령하는 등 공산주의 혁명과 배치되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등 해방 이후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다.(p520)




평전에 서술된 이러한 기록을 통해서 호치민에게 공산주의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에게 진정한 목적은 '독립'과 '해방'이었다. 호치민에게 식민지를 통해 유지되는 제국주의에 맞서는 길은 식민지 제국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원조를 해주는 공산주의 세력과의 연대였으리라.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그는 공산주의자라기 보다는 독립투사였고, 민족주의자였다.




사상, 이데올로기보다 조국의 해방을 우선시 하는 그의 모습 속에서 우리 나라의 독립투사들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독립투사들이 항일(抗日) 투쟁에서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현실속에서 살고 있다. 한국전쟁이라는 후대의 사상적 대립의 기준으로 당연히 인정해야할 그들의 공훈이 묻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잠시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 호치민이라는 개인에 대한 관심으로 책을 읽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베트남의 역사'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두 나라가 가지고 있는 공통된 분모 때문인 것 같다.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오랜 시간 중국(中國)과의 대립, 공통된 유교(儒敎)문화의 영향, 제국주의 시대의 식민지 경험, 해방 후 분단되었던 조국 등 공통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반면, 지금도 분단된 우리의 현실과 통일된 베트남은 다른 역사를 가진다.

어떤 것이 우리에게는 분단을, 그들에게는 통일을 가져왔을까? 호치민이라는 한 사람에 대해 조금 알게 된 지금 더 많은 생각할 과제를 부여받은 느낌이 든다.




<호치민 평전>은 저자의 편향된 시각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왜 호치민이 지금도 베트남 사람들에게 '호(胡)아저씨'로 불리는지를 알려주고, 갈수록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베트남'의 역사, 관계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있는 책이라 생각된다.







"응우옌 아이 쿠옥(호치민)이 보기에 아시아인들은 서구인들이 보기에는 후진적이지만, 현대 사회의 전면적 개혁의 필요성을 서구인들보다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p133)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부양하고, 여러분과 싸우는데, 여러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p174)



"여러분이 이 작은 그룹 내에서도 단결을 유지하지 못한다면, 조국으로 돌아간 뒤에 어떻게 대중을 단결시켜 식민주의자들과 싸우게 하고 나라를 구하는 일에 나서게 할 수 있겠는가?"(p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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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08-08 공감(33) 댓글(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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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치민 평전 서평



(이제는 반공 이데올로기적인 시각에서 벗어나야!)



1945년 9월 2일 하노이의 바딘광장에서 50대 중년 남성이 베트남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빛을 바랜 카키색 양복과 고무 슬리퍼 차림이었지만 대중 앞에서 자신이 준비한 독립선언문을 읽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가 읽은 베트남 독립선언문의 시작은 1776년 토마스 제퍼슨의 작성한 미국의 독립선언문의 시작과 같았다. 소수를 제외한 일반 대중들은 그의 연설을 듣기 전까지 그가 1930년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한 애국자 응우옌 아이 쿠옥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연설을 통해 자신이 베트남의 전설의 독립운동가이자 애국자인 응우옌 아이 쿠옥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그가 바로 호치민이다.



68혁명 당시 베트남의 독립영웅 호치민은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체게바라,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과 더불어 신좌파들의 우상이었다.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의 젊은이들은 호치민의 사진을 들고 거리로 나왔고 서독, 영국, 이탈리아, 미국의 깨어있는 젊은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렇듯 호치민은 한때 서구의 젊은이들의 우상이기도 했다.



68혁명시기 체게바라 마오쩌둥과 더불어 신좌파들의 우상이었던 호치민은 과연 어떠한 인물일까?



1.호치민 일대기



호치민은 1890년 5월 19일 킴리엔에서 응우옌 신 삭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11살이 되던 해인 1901년 어머니는 병으로 사망했다. 1907년 호치민은 프랑스의 국립학교인 국학에 들어가 공부했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의 식민지였기에 수많은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착취당했다. 이에 부조리를 느끼게 된 호치민은 1908년 조세반대 시위에 나섰다가 국학에서 퇴학당했다. 국학에서 퇴학당한 이후 호치민은 베트남을 돌아다니다가 1911년 6월 사이공에서 프랑스의 기선 아미랄 라투셰 트레빌 호를 타고 베트남을 떠나 2년간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1911년에는 프랑스에서 정원사로 일하기도 했었고 1912년에는 미국에 머물면서 노동자로 일하며 흑인 활동 조직에 참가했다. 1914년 호치민은 런던에 거주하면서 청소부 요리사 보조 등 온갖 일을 하며 노동조합 활동에 관여했다. 그러다 1917년 파리로 돌아와 노동자들을 선동하는 일을 하기도 했었다. 1919년 호치민은 파리강화회의 때부터 베트남 독립을 청원했고 안남애국자연합을 결성하여 1919년 6월 베르사유 회의 당시 베트남 대표로 참가했다. 그러나 강대국들은 호치민의 청원을 무시했고 이는 호치민이 프랑스 사회당에 가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20년 프랑스 공산당 당원이었던 호치민은 코민테른에 가입했고 1922년에는 <르 파리아>를 창간 한 뒤 프랑스의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활동을 했다. 그러던 1923년 6월 모스크바로 넘어가 코민테른 극동국에서 근무했고 12월부터 스탈린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1924년 11월 호치민은 중국 광저우로가 1925년 베트남 혁명 청년회를 결성한 뒤 교사로 활동했다. 1926년에는 <혁명의 길>을 집필했다. 1927년 5월에는 중국국민당의 공산주의자 숙청을 피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도피했다가 11월 파리 베를린에서 머물며 12월 반제국주의 동맹 집행위원회에 참석했다. 1928년에는 태국 방콕에서도 활동했다. 1930년 호치민은 베트남의 사회주의 조직을 합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했다. 1930년 베트남에서 프랑스의 착취에 반대하여 통킹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프랑스 제국주의자들은 통킹 반란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독립운동세력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심지어 그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는 비행기까지 동원했다. 1931년 호치민은 홍콩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코민테른 요원의 도움으로 1932년에 석방되었다. 1934년 호치민은 다시 모스크바로 건너갔다. 모스크바 레닌 대학에 입학했고 1935년 스탈린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했다. 1938년에는 중국 팔로군 지역본부에서 기자 일을 하면서 보건 담당 간부로 일하기도 했었다.



1939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다. 1940년에는 프랑스가 나치독일에게 점령당했다. 나치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했다. 1940년 호치민은 운남성에서 팜 반동과 보 응우옌 지압을 만났다. 1941년 호치민은 30년 만에 베트남으로 돌아와 비엣 박에 베트민 사령부를 만들었다. 1941년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 하자 미국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전 세계적으로 반파시즘 전선이 형성되었다. 호치민은 1942년 중국의 도움을 얻기 위해 중국으로 갔다가 스파이로 오인 받아 중국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감옥생활을 하면서 <옥중일기>를 집필했다. 오인으로 인한 체포였기에 호치민은 1943년 9월에 석방됐다. 1944년 호치민은 중국 남부에 혁명 운동 기지를 만들었고 12월에는 베트남 해방군을 창설하여 일본군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1945년 호치민은 미국의 OSS와도 협력관계를 형성하여 일본과의 전면전을 준비했었다.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 한 뒤 호치민은 전국적으로 총봉기를 일으켰고 9월 2일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독립을 선언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남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한다는 명분으로 북에는 중국 국민당군이 들어왔고 남에는 영국군이 들어왔다. 중국군은 그냥 철수 했지만 영국군은 프랑스를 앞세운 뒤 철수 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식민지화 하려고 했다. 1946년 호치민은 평화회담을 통해 프랑스를 몰아내려 했지만 1946년 11월 하이퐁에서 프랑스군과 베트민군이 충돌하면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초반에는 프랑스군이 유리했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비엣 박을 공격함으로써 베트민 본부를 점령했으나 호치민을 체포하지는 못했다. 1949년 국공내전이 모택동이 이끄는 공산당의 승리로 끝났다. 중국이 베트민군을 도우면서 전세는 베트민군에게 유리해지기 시작했다. 1950년 9월 베트민 부대들은 국경지역 전체에 걸쳐 프랑스군을 공격했고 홍 강 삼각주 지역 전체를 손에 넣었다. 1951년 베트민군은 프랑스 군에게 총공격을 가했지만 프랑스군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네이팜탄을 동원하여 총공격을 막아냈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 프랑스군이 라오스 국경지대에 있는 디엔 비엔 푸에서 보 응우옌 지압이 이끄는 베트민군에게 대패하면서 호치민의 승리로 끝났다.



디엔 비엔 푸 전투 이후 제네바 협약에 따라 베트남은 북위17도선을 기점으로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2년 이내 통일을 위한 선거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민중의 80%가 호치민을 지지한다는 사실은 안 미국은 도미노 이론을 내세워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며 통일을 불발로 끝내버렸다. 결국 호치민과 공산당은 1956년 토지개혁이 마무리한 뒤 1959년 남부통일을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1960년 남베트남에서 응오딘지엠의 독재에 맞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은 자신이 가톨릭이라는 이유로 가톨릭만 우대하며 민중의90%라 할 수 있는 불교도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1963년 6월 사이공에서 틱광둑이라는 스님이 소신공양을 했다. 이를 계기로 응오딘지엠 정권은 전 세계적으로 비난 받았고 결국 CIA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로 무너졌다. 아이젠하위 정부 때부터 남베트남을 지원해오던 미국은 케네디 정부에 와서는 군사고문단을 파견했고 1964년 린든존슨 정부시기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 전에 전면적으로 개입했다.



베트남 전쟁에 개입한 미국은 남베트남에 더 많은 군대를 파견했고 1968년이 되어서는 남베트남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숫자가 50만을 넘었다. 1965년부터 67년까지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약 2만 명이나 되는 병사들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에게 “현재 베트남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라고 거짓말을 했다. 이런 미국의 거짓말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1968년에 발생했다. 구정공세가 바로 그것이다. 1968년1월 31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총공세를 가했다. 구정공세 당시 사이공의 미 대사관 1층이 공병과 자살특공대에게 점령당했고 구정공세 1달 동안 미군 2천명 이상이 사망했다. 구정공세 이후 미국 내에서 반전 분위기가 높아졌고 결국 그해 11월 북폭을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파리에서 평화회담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9년 9월 2일 호치민이 사망했다. 미국은 1969년부터 베트남에서 군대를 단계적으로 철수하기 시작했지만 1970년에는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1971년에는 라오스를 침공했으며 1972년 마지막 수단으로 크리스마스 폭격이라 하여 대규모의 폭탄공세를 퍼부은 뒤 1973년 1월 파리평화협정을 맺고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1975년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3월부터 남베트남을 공격했고 4월 30일 사이공을 함락시키면서 통일을 이룩했다.



2.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스탈린이 물었다. “호치민 동지, 여기 의자 두 개가 있소. 하나는 민족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국제주의자들을 위한 의자요. 동지는 어디에 앉고 싶소?” 그러자 호치민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스탈린 동지, 나는 두 의자에 다 앉고 싶습니다.” (p621)



“자본주의는 식민지를 통해 자신을 부양하고, 여러분과 싸우는데, 여러 동지들은 왜 식민지를 무시합니까?” (p174)



“자유와 독립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나를 이끈 원동력은 공산주의가 아닌 애국심이었다.”



호치민에 대한 평가 중에 가장 논란이 많은 평가는 그가 민족주의자냐 혹은 사회주의자냐 하는 것이다. 필자의 개인적의 견해를 얘기하자면 호치민은 사회주의자성향이 있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한다. 호치민이 과거 프랑스 공산당과 모스크바 극동국 그리고 공산당을 이끌었던 이유는 “베트남 독립” 오직 그거 하나였다. 호치민은 베트남 독립을 위해서라면 자본주의 국가와 협력할 생각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호치민과 베트민이 미국의 OSS와 협력하여 대일전을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거기다 2차 대전 당시 호치민을 만난 미군들(찰스 스펜, 아키메데스 패티, 토마스)은 처음에는 그를 공산주의자로 의심했다가 그를 민족주의자이자 애국자로 평가했다.



호치민은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할 당시에도 공산주의 사상보다는 식민지해방운동에 관심을 가졌다. 마치 한국의 독립운동가들이 조선독립의 방향을 사회주의에서 찾았듯이 말이다. 즉 호치민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식민지해방운동에 기반을 두었던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호치민이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다는 이유 때문에 호치민을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과 소련의 지원을 받았던 건 베트남 독립과 통일을 위한 한 가지 방법이었지 일부의 주장대로 그가 철저한 공산주의자여서가 아니다.



호치민 평전의 저자 윌리엄J듀이커는 호치민을 반은 간디 반은 레닌이라 했다. 책의 저자 말대로 호치민은 간디처럼 민족주의 성향도 있었고 레닌처럼 사회주의 성향도 있기에 반은 간디 반은 레닌이라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호치민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적절하게 사용하여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프랑스와 미국의 침략에 맞서 이길 수 있었다는 사실이지 그가 민족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하는 사실이 아니다. 따라서 호치민이 민족주의자냐 사회주의자냐 하는 논쟁은 그다지 의미 없는 논쟁이다.



3.호치민의 한계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나 성인군자라 해도 사람은 누구에게나 한계가 있다. 호치민 또한 마찬가지다. 호치민도 한계가 있었다. 그의 한계를 얘기하자면 하나는 1954년부터 56년까지 북베트남에서 진행되었던 토지개혁이고 다른 하나는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일 것이다.



호치민이 토지개혁에 대한 계획을 생각하고 있던 건 1950년대 부터였다. 호치민과 공산당이 토지개혁을 실행에 옮긴 것은 1954년 부터였고 1954년부터 56년까지 토지개혁의 여파로 북베트남에 거주하던 80만 명(이들 중 60만 명은 가톨릭 교도였다)이 월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토지개혁을 너무 급진적으로 추진한 결과 대략 1만5천에서 2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부르주아로 몰려 처형당했다. 물론 이런 상황을 호치민이 바랬던 건 아니었기에 호치민은 1956년 당내에서 철저한 자아비판을 했다. 분명한 사실은 월남한 60만 명의 가톨릭교도들은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가 내세운 꼭두각시 바오다이 정권과의 커넥션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다. 그렇지 않은 가톨릭들도 적잖게 있었으나 토지개혁시기 그들도 북베트남 정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도 토지개혁시기 월남하지 않고 북베트남에 남아있던 90만의 가톨릭교도들은 토지개혁 이후 신앙의 자유를 북베트남 공산당으로부터 보호받았다.



어쨌든 1950년대 북베트남에서 진행되었던 호치민의 토지개혁은 무자비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월남했으며 목숨을 잃기도 했다. 그래도 호치민은 자신의 실책을 자아비판을 통해 철저히 인정했다. 따라서 높은 지휘에 있음에도 자신의 실책을 인정한 호치민은 훌륭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사람들은 호치민의 최대 실수인 토지개혁을 가지고 그를 악랄한 인물로 평가하는데 이는 올바른 평가가 아니다. 설사 호치민이 토지개혁이라는 실책이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호치민의 또 다른 한계인 트로츠키주의자 탄압 밑 숙청은 또 하나의 비판의 대상의 될 수 있다. 베트남 내에서 트로츠키파의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곳은 사이공을 비롯한 코친차이나 지대였지만 베트남 독립운동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었다. 1930년대는 소련에서 스탈린이 정권을 잡으면서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단취급을 받게 되던 시기였다. 호치민도 공산당이나 베트민을 이끌면서 베트남 내에 있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탄압했지만 스탈린이 소련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을 숙청하던 방식(대숙청)대로 아주 비열하고 무자비하게 했던 건 아니다. 1930년대 호치민과 공산당은 일국사회주의를 천명하는 스탈린과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했다. 따라서 호치민 또한 소련의 눈치를 어느 정도 봐야했기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배척했던 것이다. 물론 탄압과 배척 숙청 그 자체는 옳은 일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1930년대의 상황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호치민이 토지개혁과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비롯한 한계가 있었지만 그 한계가 호치민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가 될 수는 없다. 즉 이런 한계가 있더라도 호치민은 베트남의 독립영웅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을 수 있다.



4.한국과 베트남전쟁 그리고 월남패망



호치민 하면 우리나라 얘기도 빼 놓을 수가 없다. 베트남 전쟁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1964년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전면전에 돌입한 미국을 따라 한국의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보냈다. 총32만 명이 참전했고 전쟁기간 동안 한국은 남베트남에 항상 5만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한국의 경제성장은 어마어마했다. 좋든 싫든 한국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엄청난 외화를 벌 수 있었고 그 대가로 엄청난 경제 성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의 지원한 남베트남 정권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시기 프랑스에 부역하여 민족을 배반한 민족반역자 정권이었고 부정부패가 극에 달한 정권이었다. 심지어 남베트남의 관료들은 미국으로부터 지원받은 장비와 무기를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에게 팔아먹을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했다. 남베트남은 정통성에서도 북베트남에게 밀렸다. 그에 비해 미군의 적이었던 호치민을 비롯한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지도자들은 과거 프랑스 식민지 시기 프랑스 제국주의에 맞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항불 애국지사들이었다.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은 빈호아, 퐁니 퐁넛, 하이마을과 같은 민간인 학살을 저질렀고 약 1만 명에서 3만 명이나 되는 라이따이한들이 전쟁기간 동안 태어났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을 당시 한국은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기에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베트남 전쟁을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 혹은 반공성전”으로 미화했다. 사실상 국회에서도 여야 할 거 없이 베트남 전쟁의 참전을 크게 반대하지 않았었다. 1975년 4월 30일 사이공이 함락함으로써 베트남 전쟁의 승리는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이 났다. 박정희 정권은 이 사건을 빌미로 삼아 긴급초지 9호를 발동했고 민주주의를 탄압했다. 따라서 한국군의 만행과 한국군이 상대했던 적이 “자유와 독립 그리고 민족해방이라는 기치아래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세력이자 민족해방 세력이었다.”는 사실은 오랜 시간 동안 철저히 감춰졌다.



당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리영희 선생은 1976년 반공법에 의해 구속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정부가 제시한 베트남 전쟁에 대한 관점과 다른 생각을 하는 이들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오랜 시간동안 대한민국에서는 호치민을 “공산주의자 혹은 빨갱이”로 인식해 왔고 베트남 전쟁은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 혹은 돈이 되는 전쟁”으로 인식되어 왔다. 2003년 부시가 이라크를 침공했을 때 “이라크 전쟁을 제2의 베트남 전쟁”으로 인식하며 이라크전 한국군 참전을 강하게 주장했던 한나라당의 의원들만 봐도 한국사회가 인식하는 베트남 전쟁과 호치민에 대한 수준이 어느 정도 인지 알 수 있다.



<전환시대의 논리>와 <베트남 전쟁>을 집필하여 한국에서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고자 했던 리영희 선생은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한국인들이 베트남전쟁을 이해할 때 허심탄회한 심정으로 대해야 할 일이에요. 미국과 한국정부나 국민들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라며 어떤 동질감으로 군대를 파견했던 사이 공정권의 모든 분야의 지배세력과 개인들은, 100년에 걸쳤던 불란서 식민지 시기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지배 아래에 있던 4년 동안, 그리고 그 후 미국의 반식민지가 된 시기에, 거의 예외 없이 불란서 식민당국과 일본 식민당국에 빌붙었던, 한국식으로 말하면 ‘친일파 반민족행위자’들이었어. 실례로 200만 사이공정권의 소위 ‘자유반공 군대’의 장교단에서, 과거 불란서와 일본 식민지시대에 민족독립해방운동을 한 사람은 육군 중령 한사람이 있었을 뿐이야. 이 중령에 관한 얘기를 미국 극비문서 속에서 봤는데, 지금 그 이름은 기억이 안 나는구먼. 어쨌거나 남베트남 군대는 실질적으로 외세의 용병이나 괴뢰 군대였어.



이와는 반대로 우리가 흔히 남베트남의 저항세력을 ‘베트콩’이라고 부르는 ‘민족해방전선’(FLN)군과 호지명 휘하 베트공 세력의 중추 지휘부인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회 31명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항불·항일 그리고 물론 현재의 항미 독립투사였어! 그 인적 구성을 보면, 정통적인 독립운동가들이 있는가 하면, 대학교수, 여성운동가, 간호사, 각급학교 교사 등 지난날의 민족해방투사들뿐이에요. 그들 31명의 경력을 보면 한 사람도 식민지시대에 형무소를 가지 않은 사람이 없어!



이 사실 하나만을 두고 보더라도, 베트남 인민이 소위 외세의존, 반공주의 사이공정권과 민족해방세력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민족적 동질감을 느끼며, 어느 쪽에 더 충성을 보낼 것인가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어요?"



글을 마치며



호치민은 프랑스 독립운동, 사회주의 운동, 항일투쟁, 제1차인도차이나 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까지 20세기 역사의 격동의 현장 속에서 베트남 민중들을 위해 그리고 독립을 위해 투쟁해온 사회주의자이자 민족주의자다. 비록 토지개혁에서의 숙청과 트로츠키주의자 탄압이라는 한계도 존재하지만 호치민은 사심 없이 한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바쳐왔다. 무엇보다 호치민은 자신이 높은 위치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사악한 독재자로 흑화하지 않았다. 이것이야 말로 호치민의 가장 위대한 점일 것이다.



필자는 윌리엄J듀이커의 호치민 평전을 지금으로부터 6개월 전인 작년 추석 때 읽었었다. 그리고 이번 달에 처음부터 끝까지 이 책을 다시 한 번 읽었다. 호치민 평전을 읽으면서 한국의 역사와 베트남의 역사가 굉장히 유사한 부분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에 맞서 싸웠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을 이끄는 사람들이 프랑스 식민지 시기부터 꾸준히 독립운동을 해온 애국지사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평생을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살아온 호치민의 일대기가 너무나도 감동적이었다.



필자가 위에서 쓴 “한국과 베트남 전쟁 그리고 월남패망”에서도 얘기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한국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단순히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쟁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호치민에 대한 중립적인 평가가 이단 취급 받았었다. 최근 태극기 집회에서는 “박원순 서울 시장이 호치민을 좋아하는 종북좌파 빨갱이”라는 근거 없는 인신공격을 하기도 했다. 이런 태극기 집회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대한민국 사람들이 내리는 호치민에 대한 평가는 반공이데올로기적인 색채가 아직까지도 남아있다. 필자는 이런 이데올로기적 관점이야 말로 “호치민에 대해 전반적인 평가를 하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매우 잘못된 관점이자 편향된 관점”이라 얘기하고 싶다.



지난 3월 문재인 대통령은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묘와 호치민 주석 집무실을 들리며 “호치민 주석은 전 인류를 통틀어서도 위대한 인물”이라며 매우 극찬했고 베트남 방문에서 한국군의 만행에 대해 유감의 표시를 밝혔다.



이번 문재인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은 정말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을 읽으면서 책의 내용이 더 와 닿았던 것 같기도 하다. 무튼 내 주변 사람들에게 정말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호치민을 아는데 있어서 이 책은 필수일 것이다. 이 책을 읽어보기를 추천하고 앞으로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가 더 좋아져 호치민에 대한 양심적인 평가가 국내에서 전반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반공이데올로기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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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iKim 2018-04-10 공감(33) 댓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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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지 앞에서는 높은 산도 몸을 낮춘다

900 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읽고 난 뒤에도 선뜻 책소개가 망설여지는 건 단순히 그 부피가 주는 중압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베트남에 대해, 호치민에 대해 권위를 내세울 만한 1차 자료가 별로 없는 우리 현실에서 윌리엄 듀이커의 책 <호치민 평전>은 분명 그 없음을 보충해주는 훌륭한 사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지은이가 '30년에 걸쳐 '호치민이 한 식구로 느껴질 정도로' 그 인물과 베트남을 연구해온 동기 자체가 '객관적'이지는 않으며, 미국인의 입장을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 자체도 의식하는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는 옮긴이의 말처럼 책의 군데군데 덧칠되어 있는 미국인의 시각을 만나는 일은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특히 1965년 통킹만 사건 이후의 대미항전의 시기에 대한 서술은 900여 쪽의 방대한 분량임에도 불과 30쪽도 채 되지 않는다. 미국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게 두려웠던 것일까? 꺼내보이고 싶지 않은 상처입은 자존심의 발로? 이 '의도된' 통킹만 사건으로 인해 미국이 본격적으로 베트남 전쟁에 개입했고, 북베트남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을 퍼부었던 도발적 행위를 생각한다면 이는 분명 지은이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장점은 없는 것일까? 아니다. 미국인이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에서 오는 이런 시각의 왜곡을 읽어낼 수 있다면 이 책은 그 어떤 호치민에 관한 전기보다 풍부하고 방대한 자료를 제공한다. 20년에 걸친 방대한 자료수집이라는 지은이의 말에 진실이라는 힘을 실어줄 정도로 오랜 비밀 활동으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았던 1945년 이전 호치민의 삶을 정교하게 복원한 것만 해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호치민. 19세기의 막바지에 태어나 유학과 신학문을 고루 접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유교적 교양을 쌓은 인문주의자이자 공산주의 혁명가이며, 베트남 독립을 설계하고 프랑스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과 대항한 투쟁에서 승리한 민족주의자.

듀이커는 이런 호치민의 이력의 이면에 있는 모습을 비교적 담담하게 그려낸다. 유교적 소양을 쌓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호치민은 스물한 살 때 프랑스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활동으로 수배된다. 그는 할 수 없이 조국 인도차이나를 떠나 여객선의 요리사 보조 노릇을 하며 유럽,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등 세계 곳곳을 떠돈다. 호치민의 혁명적 삶의 초석은 바로 이 시기에 마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호치민이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부각되는 과정, 쉰 번이나 이름을 바꿔가며 혁명을 배우고 선전하던 시절, 수감과 탈출, 베트남의 초대 주석에 올라 분열을 일삼던 동지들을 화해시키고 모습.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된 뒤에도 '아저씨'라 불릴 정도로 검소한 옷차림과 소박한 말투와 따뜻한 미소를 잃지 않았던 베트남 인민들의 '호 아저씨'.

이제 그가 죽은 지 30여 년이 지났고, 조국 베트남도 새로운 사회체제의 시험 속에 있지만 <호치민 평전>을 읽고 있노라면 그의 갸날픈 몸매와 긴 턱수염이 오늘의 세계정치 상황과 자꾸만 '오버랩'되는 것은 필자만의 감상일까?

'천년고도' 바그다드의 점령군으로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맘껏 누리고 있는 미국의 현재의 모습은 혹 30년 전 인도차이나 반도의 한 모퉁이에서 상처받았던 지난날의 역사에 대한 보복은 아닐까?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는 다소 '진부한' 역사의 교훈을 무시한다면 말이다.

아마도 미국이나 미국인들에게 비친 호치민의 모습은 이 책의 지은이인 듀이커의 시선 만큼이나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 당혹스러움이 다음과 같은 그들의 헌사로 나타나는 것이리라.

1969년 9월 호치민이 죽었을 때 <타임>지가 '민족지도자 가운데 그만큼 오래 적의 총구 앞에서 버틴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쓴 것은 헌사일까 자기위안일까? 호치민에 관한 또다른 전기를 쓴 바 있는 미국인 찰스 펜 또한 리비우스가 영웅 한니발에게 바친 묘비명을 다시 호치민에게 바치고 있다. '그의 강철의지 앞에서는 높은 산도 몸을 낮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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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오랜꿈 2003-04-18 공감(1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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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독립의 아버지, 호치민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특정 개인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늠해보고 싶다면, 어쩌면 호치민 평전을 읽어보는 것이 유익이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영웅에 대한 맹목적 숭배나 신격화가 역사를 왜곡하고 퇴보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이 걸어온 인생을 읽다보면, 집념으로 뭉친 인간의 끝없는 전진 앞에서 전율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의 지배에서 벗어나 베트남의 독립을 쟁취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젊은 청년이 소련에서 열린 코민테른에서 식민지가 된 아시아 국가들의 독립을 의제화시키려는 노력은 가히 눈물겹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문제를 앞에 두고 절차와 순서를 뛰어넘어 의제화해나가는 과정은 사명감이 아니면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 같다. 동조하고 뭉쳐가며 세를 확장해야하는 조직의 틈바구니에서 그는 가야할 길을 결코 잊지 않았다.



숱한 위장과 탈출, 극한 긴장과 도망이 연속된 삶이었지만, 경직된 사고가 아니라 유연하고 실용적인 태도를 견지한 점은 호치민의 반대편에 선 이들에게도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되었다.



책을 읽으며 베트남 전쟁의 이면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중국과 소련의 공산주의 두령을 향한 경쟁과 경계, 사이공 정권의 무능, 아이젠하워, 케네디, 린든 B 존슨, 닉슨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미국의 실책, 호치민과 레두안 등 북베트남의 차세대 권력 지형의 변동, 한국전쟁과 분단 등이 얽히고 섥히며 만들어낸 사안들을 읽으면서, 단견으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의 위험성을 다시 한번 각성하기도 했다.



호치민을 공산주의자로 볼 것인가, 민족주의자로 볼 것인가는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실현하기 위해 베트남의 독립을 지향했다기보다는 베트남 독립을 위해 공산주의를 이용한 측면이 있는데다, 단순한 민족주의자로 치부하기에도 뭔가 아쉬움이 남는다. 애국심을 고취하거나 베트남 민족의 우월성을 드러내는 데도 일부 열중했지만, 국제적 공산주의 연대를 구상하는데도 상당히 열심을 냈기 때문이다.



호치민에게 배울 것은 '베트남 독립'이라는 목표 앞에서, 끊임없이 현장과 현실을 돌아보는 한편 국외적으로는 냉정한 평정심을 바탕으로 유려한 외교를 펼쳤으며, 안으로는 소탈한 지도자로서 국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내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균형감각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 책의 미덕은 사료를 바탕으로 호치민을 영웅화하거나 윤색하는 대신 그의 행적을 쫓으며 인간과 역사의 관계를 덤덤히 그려냈다는 점일테다. 사심 없이 민족을 위해 일평생을 바친 호치민 같은 지도자가 우리에게도 있었더라면 한반도의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읽는 내내 가슴에 묵직한 돌을 얹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가능성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어렵고 절망적이겠지만,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최신식 대포만큼 강한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민족주의입니다! 그힘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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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efox 2015-10-19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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