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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3-24

증산도 공식 홈페이지 - 노론사관은 식민사관의 원조

게시판 - 증산도(Jeung San Do) 공식 홈페이지

노론사관은 식민사관의 원조

신상구 | 2014.12.23 02:43 | 조회 4383 | 추천 7

노론사관은 식민사관의 원조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향토사학자, 시인, 칼럼니스트) 신상구(辛相龜) 


   '노론사관'이라는 용어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인 이덕일 박사가 저술한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주한 연구위원도『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이라는 책에서 노론 음모론을 주장했다.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76명의 친일파 인사들이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후작, 자작, 은사금을 받았다. 76명 중 64명이 당파가 확실한데, 그들 중에서 56명이 노론에 속한다.

   친명사대주의와 성리학 유일주의로 똘똘 뭉친 노론사관은 식민사관의 원조이다. 노론사관은 조선 후기사를 왜곡하고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전락했다.

   식민사관은 일제가 한국침략과 식민지배의 학문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조작해낸 역사관이다. 

   식민사관에 기초를 둔 한국사 연구는 19세기 말 도쿄제국대학에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신공왕후의 신라정복설과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한국역사를 만주에 종속된 것으로 보는 만선사(滿鮮史) 이론, 당시의 한국 경제를 일본 고대의 촌락경제수준으로 보는 이론 등을 내세웠는데, 이러한 논리는 20세기 초 조선침략이 본격화되자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정체성론, 타율성론으로 대표되는 식민사관의 토대가 되었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은 한국의 주체성을 상실한 사관으로 한국사의 시공간을 축소시켰다. 시간적으로는 한국사를 1,500-1,600으로 축소시켰고, 공간적으로는 한반도로 축소시켰다. 이는 만선사관과 동북공정과 맥을 같이 한다. 

   만선사관(滿鮮史觀)은, 20세기초에 일본 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한국사에 대한 관점으로, 만주와 조선의 역사는 하나이며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는 만주에 종속적임을 그 내용으로 한다. 만선사(滿鮮史)는 중국의 만주에 대한 영향을 제한하였고, 한국 문화의 독자성과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한반도와 만주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지적이 있다.만선사관을 주장했던 대표적인 학자로는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 도리야마 기이치(鳥山喜一) 등이 있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리되었다. 노론은 경종 시기의 잠시를 제외하면 조선 말기까지 조선을 장악하였으며 조선의 발전에 심각한 폐해를 끼쳤다.

   노론 음모론에 따르면, 노론은 사도세자 시대에 시파와 벽파로 분리되는데 벽파가 개혁군주 정조를 독살하고 정권을 잡는다. 그 후 지속적으로 정권을 잡은 노론 벽파는 세도정치를 펼치면서 조선을 썩게 만들다가 일제강점기에 나라를 팔아먹고 친일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환언하면, 노론 음모론자들은 기존 사학계와 적대적인 민족사학자들과 결합하여 주류 사학 = 노론사관 = 식민사관이라는 도식화된 주장을 한다.

   순조 대부터 정권을 장악한 안동 김씨 및 풍양 조씨 등의 세도정치 가문들은 모두 노론 시파에 속하며, 오히려 노론 벽파는 정조가 사망한 직후 잠시 정권을 잡았다가 시파의 역공에 거의 숙청당했다. 게다가 붕당정치가 끝나고 세도정치가 들어서게 된 책임은 오히려 탕평책을 빌미로 왕권 강화에 지나치게 힘써서 신권의 견제 기능을 무너뜨린 영조와 정조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정조와 대립했다는 이유만으로 세도정치의 책임을 노론 벽파에게 전가하고 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벽파는 反정조 세력이라 부르기도 뭣하다. 정조의 대리청정과 즉위를 지원사격한 김종수, 김귀주 등이 벽파였고 뒤의 행보를 보면 오히려 정조는 벽파를 보호했다. 벽파 수장 김종수를 일컬어 정조는 "내가 그의 목숨을 몇번이나 살려준지 모르겠다."라고 할 정도로 그의 뒤를 봐주었다. 그래서 김종수는 정조 즉위 후의 최측근 그룹이라 할 수 있는 동덕회 4인방 중 한 명으로 꼽히는데, 나머지 세 명이 정민시, 서명선, 그리고 홍국영이라는 점을 보면 김종수가 차지하는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심환지만 해도 심환지 어찰이니 뭐니 해서 反정조라는 공식은 거의 깨졌다.

   굳이 지역적으로 당파를 구분하자면 노론은 경기-충청도 기반이고, 영남은 남인과 가까웠다. 당장 남인에서 추앙받은 이황과 류성룡이 어디 출신인지 생각해보자. 경상도 지방에도 노론 집안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나 정말로 손에 꼽힐 정도로 드물다. 무엇보다도 경종 이후 이인좌의 난 등으로 인해 경상도는 반역향이라 하여 정 2품 이상의 벼슬을 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현대 경상도 지역에서 양반 문화가 잘 남아 있는 이유로 조선 후기에 중앙 진출의 길이 완전히 막힌 영남 지역의 양반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올 정도이다. 참고로 안동 김씨 가문은 어디까지나 본관이 경상도 안동일 뿐이지 실제 정치적 기반으로서의 경상도와는 관련이 없는 가문이다.

   그리고 위에서 잠시 언급한 영호남 지역감정 문제의 경우에도 말이 안 되는 것이, 조선시대의 호남 지역의 사대부들은 영남과 마찬가지로 동인/남인에 가까웠다. 단지 정여립의 난 때 서인인 정철의 주도로 호남 유림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받아 그 세력을 잃은 것이며, 시기적으로 좀 차이가 날 뿐이지 영남 유림과 똑같은 취급을 받았다.

   십만양병설의 경우 의도적인 역사왜곡 보다는, 서인 측에서 양병설을 포함하는 이이의 개혁/경장의 주장들을 언급하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다가 생긴 착오에 가깝다. 불행히도 2014년 현재 노론 음모론은 주로 대중적인 서점들의 판촉을 기반으로 한국 대중들에게 널리 전파되고 있는 실정이며 이덕일 소장의 주 레퍼토리인 조선왕 독살설을 차용한 방송 매체들과 영화들이 우후죽순 제작되면서 이러한 상황에 기름을 붓고 있다. 전술했듯 허점이 많은 이론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지만 현대 주류 학계를 각종 부패와 음모의 온상으로 묘사하는 걸 절대 빼먹지 않는 노론 음모론의 특성상 학계 차원의 반박만으로는 상황을 진정시키는 데에 무리가 있다. 오히려 조선사 및 근대사를 노론 음모론 계열의 서적으로 처음 입문한 이들에 한해서는 학계 차원의 반박이 주류 학계에 대한 더 큰 불신, 그리고 그에 따라 결국 더 심한 역효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대중들에게 널리 퍼진 잘못된 노론사관의 적절한 예시글. 일단 사도세자 노론 흑막설을 대놓고 쓴 글쓴이의 글 내용뿐만 아니라 밑에 댓글들 또한 노론사관 운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무튼 300년 전 노론사관이 100년 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식민사관으로 이어지고, 지금까지도 학문 권력을 독점하고 있어, 우리 역사는 계속 왜곡되고 있다. 그런데 민족사학은 세력이 약해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의 우리 역사 왜곡을 막을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참고문헌>


   1. 이덕일,『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역사의아침, 2009.

   2. 이주환,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역사의아침, 2011.9.30.   

                                                    <필자 신상구 약력>

   .1950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락리 63번지 담안 출

   .백봉초, 청천중, 청주고, 청주대학 상학부 경제학과를 거쳐 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과에서 “한국 인플레이션 연구(1980)”로 사회교육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UBE) 국학과에서 “태안지역 무속문화 연구(2011)"로 국학박사학위 취득

   .한국상업은행에 잠시 근무하다가 교직으로 전직하여 충남의 중등교육계에서 35년 4개월 동안 수많은 제자 양성

   .주요 저서 : 『대천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아우내 단오축제』,『흔들리는 영상』(공저시집, 1993),『저 달 속에 슬픔이 있을 줄야』(공저시집, 997) 등 4권.

   .주요 논문 : “천안시 토지이용계획 고찰”, “천안 연극의 역사적 고찰”, “천안시 문화예술의 현황과 활성화 방안”, “항일독립투사 조인원과 이백하 선생의 생애와 업적”, “한국 여성교육의 기수 임숙재 여사의 생애와 업적”, “민속학자 남강 김태곤 선생의 생애와 업적”, “태안지역 무속문화의 현장조사 연구”, “태안승언리상여 소고”, “조선 영정조시대의 실학자 홍양호 선생의 생애와 업적”, “대전시 상여제조업의 현황과 과제”, “천안지역 상여제조업체의 현황과 과제” 등 58편

   .수상 실적 : 천안교육장상, 충남교육감상 2회, 통일문학상(충남도지사상), 국사편찬위원장상, 한국학중앙연구원장상, 자연보호협의회장상 2회, 교육부장관상,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문학 21> 신인작품상, 국무총리상, 홍조근정훈장 등 다수

   .한국지역개발학회 회원, 천안향토문화연구회 회원, 대전 <시도(詩圖)> 동인, 천안교육사 집필위원, 태안군지 집필위원, 천안개국기념관 유치위원회 홍보위원, 대전문화역사진흥회 이사 겸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 보문산세계평화탑유지보수추진위원회 홍보위원

 

"노론·친일파·뉴라이트는 한뿌리...서울대 탓도" - 오마이뉴스

"노론·친일파·뉴라이트는 한뿌리...서울대 탓도" - 오마이뉴스



"노론·친일파·뉴라이트는 한뿌리...서울대 탓도"
[인터뷰]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저자 이주한
11.10.14
 
최진섭(dream4s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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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당파싸움, 망국 같은 말들일 것이다. 노론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이미지를 풍기지만 흘러간 과거의 일로 여기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에 대해 무지하거나 무관심 한 것 또한 사실이다. 나 역시 고등학교 졸업 이후 노론이라는 단어에 대해 특별한 의미부여를 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최근 들어 역사교양서를 몇 권 읽은 뒤 노론 소론의 문제가 과거완료가 아닌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깜짝 놀랐다.

내게 충격을 안겨 준 책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시원하게 나를 죽여라> 등과 같은 이덕일의 역사교양서였다.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사도세자의 고백>,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와 같은 대중역사서 저자 이덕일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조선 후반기 집권세력 노론 후예들이 친일파로 살아남고, 그들 영향력이 아직도 한국역사학계를 지배한다며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이덕일은 노론 후예, 즉 친일파 후예들이 정설로 만든 '고조선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다'는 주장을 정면 반박한다. 또한 노론후예학자들은 단군조선을 부인하고 독립운동사를 말살해왔다고 말한다.


"해방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대부분의 역사학도들에게 현대사는 일종의 금기 영역이었다. 이른바 국사학계 태두가 만들었다는 현대사 연구 금지 원칙은 표면상 현대사는 객관성을 갖기 어렵다는 명분을 들고 있었다. 청동기시대가 되어야 고대 국가가 시작된다는 국사 교과서의 공식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한국에만 있는 현대사 연구 금지 원칙 또한 독립운동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후였다."

이덕일의 이 같은 주장은 노론소론 문제를 지나간 역사의 무의미한 퇴적층 정도로 여겼던 내게 큰 의문을 던져주었다. 도대체 해방된 지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이른바 국사학계 태두'로 불리는 이병도를 필두로 하는 식민사관이 건재한 이유가 무엇일까?

아직도 식민사관이 건재한 이유



▲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 표지. 저자 이주한은 조선 시대 노론이 식민사관으로 이어졌고, 이들이 청산되지 않은 채 한국의 역사학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덕일과 함께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활동하는 이주한(47)은 최근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을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덕일과 주류 사학계의 논쟁을 추적하면서 우암 송시열(1607~1689년)을 영수로 하는 노론 세력 후예들과 식민사관이 여전히 한국 역사학계를 지배하고 있음을 속속들이 파헤치고 있다. 10일 서울 마포구에 있는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에서 이주한 연구위원을 만나 역사계를 지배하고 있다는 노론 권력의 비밀에 대해 들어 보았다.
- 일반인들은 노론이라는 말은 역사책에나 나오는 죽은 단어로 여긴다. 어째서 노론이 살아있는 권력이라는 것인가?
"조선 후기 집권 세력인 노론 후예들은 친일파로 살아 남았고, 이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이기 때문이다. 특히 강단 역사학계를 지배하는 것은 조선총독부가 심어놓은 식민사관이다."

- 노론 후예들이 대부분 친일파가 됐나?
"친일파가 해방 후에 청산되지 않고 기득권층이 됐듯이 조선의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노론의 대다수가 나라 팔아먹는데 조직적으로 가담하고 일제 앞잡이 노릇을 했다."

- 구체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에게 작위와 막대한 은사금을 받은 76명의 수작자를 분석해보면 잘 알 수 있다. 수작자는 사실상 '노론당인 명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집권 노론 일색이다. 76명 중 80퍼센트에 가까운 57명이 노론 계열이다."

- 우리나라 역사학계에 식민사관이 건재하게 뿌리내린 이유는 무엇인가?

"일제는 조선의 얼인 조선어와 조선사를 치밀하게 통제하고 조작했다. 일제는 조선사의 시간과 공간을 축소하고, 조선은 예로부터 중국과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논리를 조선사편수회와 경성제국대학을 통해 창조했다. 조선사편수회 출신 이병도가 국사학계 태두로 서울대에 있으면서 식민사관을 정설로 굳혔다. 그가 주장하는 실증사학의 미명을 거둬내면 황국사관이다. 경성제국대학 후신인 서울대학교가 학문권력을 장악하고 민족사관이 단절되면서 식민사관은 견고하게 한국사를 틀어쥐었다."

서울대에서 왕따 당한 민족주의 역사학자의 증언



▲ 안중근 의사가 사형 당한 여순감옥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형장으로 가면서 마지막으로 사진을 찍었던 장소에서 기념촬영을 한 이주한 연구위원(2006년 겨울).
ⓒ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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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시대 노론과 한국 주류역사학계를 연결하는 숨은 고리가 바로 친일파, 친일사학자란 말인가?
"바로 그 점이 주류 사학계의 아킬레스건이다. 얼마 전 연세대 교수직을 정년퇴임하면서 서울대 국사학과의 식민지성을 비판했던 김용섭 선생은 회고록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지식산업사, 2011년)를 통해 식민주의 역사학을 청산하지 못한 한국 주류사학계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김용섭 교수 회고록을 보면 '6·25전쟁 이래로 남에서 제기되는 통사의 편찬 문제는, 아직은 깊은 연구에 기초한 식민주의 역사학의 청산 없이, 우선은 기성의 일제하 세대 역사학자들에게 일임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기성학자들은 일제하 일본인 학자들에게서 역사학을 배우고, 그들과 더불어 학문 활동을 같이해 온, 이른바 실증주의 역사학 계열의 학자들이 중심이었다'는 증언이 있다."

-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런 사실을 역사 연구자들은 다 알고 있나?
"이는 역사학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김용섭 교수는 한 일간지 인터뷰를 통해 식민사학을 비판하는 민족주의 성향 때문에 서울대 교수 재직 시 왕따를 당했다는 어처구니없는 경험을 고백하기도 했다. 주류역사학계가 노론 후예로서 식민사관을 확대재생산해온 생생한 증언과 증거가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어서 다행이고 무척 고무적이다. <역사의 오솔길을 가면서>를 읽으면서 새삼 충격을 받고 전율했다. 김용섭 선생에게 존경심을 표한다. 말이 쉽지 실천은 간단치 않다."

- 일반적으로 역사학자들은 진보적인 경향으로 알려져 있다. 교과서가 너무 좌편향으로 쓰였다고 보수단체나 뉴라이트 계열에서 문제 제기하는 경우도 많지 않나?
"한국사는 한마디로 누더기라고 보면 된다. 일제가 조선사를 날조할 때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분야는 고대사였다. 조선의 뿌리, 조선의 정체성을 근원에서 뒤집는 침략주의 정책으로 일제는 조선사를 다뤘다. 일제가 왜 조선사를 연구하고 그 결과를 정설로 만들겠나?"

- 근현대사는 진보이면서, 고대사는 식민사관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렇다.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 비틀어진 한국고대사의 원형을 밝히려는 노력을 국수주의로 매도하는 경우가 많다. 고대사에 대해 식민사관의 텍스트만을 인정한다. 주류역사학계는 새로운 팩트가 발견되면 무시하거나 팩트 자체를 자의적으로 조작하는데도 말이다. 민초를 고통으로 내몬 노론을 긍정적으로 보면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말하는 것도 모순이다.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다음 책에서 이 부분을 상세하게 다룰 계획이다."

- <노론 300년 권력의 비밀>의 부제들을 보면 '정별설, 노론 수호의 총대를 메다' '안대희의 정조 독살설 비판' '오향녕의 극우 파시즘' '노론사관의 적통 유봉학' 등 실명을 거론하며 비판했다. 명예훼손의 소지는 없나?
"나는 있는 것을 있다 하고 없는 것을 없다 해서 걸릴 것이 없다. 출판사에서 법률적 검토를 거친 것으로 알고 있다."

- 현직 대학교수를 극우 파시즘이라는 원색적 용어를 사용해 비판했는데 너무 심한 독설 아닌가? 왜 극우파시즘이라고 말하는가?
"단지 정치권력 문제만으로 한정해서 쓴 개념은 아니다. 노론의 가치는 조선후기에서 일제강점기, 해방을 거치며 극우파시즘으로 연결된다. 나와 다른 견해, 다양한 상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고 획일적인 정설로 상대를 지배하려 한다. 강한 권력 독점과 지배욕, 통제욕, 대중 위에 군림하는 엘리트주의를 극우파시즘이라 표현했다. 노론이즘은 한국판 메카시즘이고 극우파시즘과 맥을 같이 한다."

노론에서 친일파, 다시 뉴라이트로



▲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의 이덕일 소장(앞)과 이주한 연구위원(뒤)이 회원들과 함께 강화도 정제두 묘를 답사했다. 정제두는 주자학만이 유일사상으로 자리 잡은 조선 후기에 목숨 걸고 양명학을 연구했다.
ⓒ 최진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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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 전 민주당 김유정 의원이 국정감사를 통해 밝힌 바에 따르면 일부 학자들이 '식민지 근대화론을 교과서에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 역시 식민사관의 잔재라 할 수 있나?"뉴라이트 아니 올드라이트의 뿌리도 결국은 청산하지 못한 식민사관이고 노론사관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민족의 이해보다 자신의 이해를 앞세우는 사대주의자들이라는 점이다. 신문 보도를 보면 뉴라이트 계열의 한국현대사학회가 정부에 낸 건의서에서, '대한민국은 3·1 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내용을 지우자고 요구했다고 한다."

- <한겨레>는 '반국가, 반민주 맨얼굴 드러낸 한국현대사학회'라는 9월 27일자 사설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을 합리화시키는 한국현대사학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이들의 행위는 "대한민국 정통성의 원천인 3·1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투쟁을 기억에서 없애려는 것이다. 이것은 일제의 병탄을 정당화하고 친일을 합리화하기 위한 식민지 근대화론의 밑돌 구실을 한다"고 쓰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이 여전히 역사학계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나? 극소수의 견해 아닌가?
"식민사관이 역사학계 주류이듯 일제청산을 제대로 못한 현대사는 식민지근대화론의 좋은 토양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을 그저 한 이론이라는 편협한 시각으로 봐서는 안 된다. 이승만 친미독재, 박정희 개발독재, 천민자본주의, 신자유주의의 역사적 맥락은 식민지근대화론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겉으로는 식민지근대화론과 식민사관을 비판하지만 각론과 구체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

- 몇몇의 노론 후예들, 식민사관의 후예들이 남아 있다고 어떻게 식민사관이 주류 사학계를 지배할 수 있을까.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로 놀라운 일이다.
"그리 놀랄 것도 없다. 지금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들을 인구구성으로 보면 몇 퍼센트나 될 것으로 보는가.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 문제는 시스템과 사회를 이끄는 지배이데올로기이다. 송자학 연구소, 우암학 연구소 등은 모두 국고로 운영되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문화재청 주요 요직도 노론후예학자들이 주로 맡아 왔다. 이번 책에서 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체된 뒤 어느 한 분야도 친일잔재가 제대로 청산된 곳이 없는 것 같다. 독립운동가의 얼굴이 새겨진 화폐 하나 없는 나라이고, 친일파의 동상이 여러 대학에 버젓이 세워진 나라 아닌가. 상해임시정부 정통성마저 부정하려는 '자유 민주' 국가 아닌가?"

- 헝클어진 역사의 실을 어디에서부터 풀어야 한다고 보나?
"우리 모두 큰바위 얼굴이다. 헝클어진 역사의 실은 나부터 풀어야 한다. 식민사관을 청산하는 문제는 우리 사회의 제1과제다. 모든 권력은 역사를 통제하고 조작한다. 조지 오웰의 말처럼 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현재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렇다. 나는 내 삶을 걸고 노론의 후예들, 식민사관의 후예들과 맞서 싸우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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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노론, #노론권력 300년의 비밀, #이주한, #이덕일

2022-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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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 지성사를 꾸준히 연구해온 천정환, 정종현 두 저자는 책, 출판, 저자, 독자, 공간, 매체, 계급, 욕망 등 다양한 요소를 입체적으로 엮어 ‘대한민국 독서사’를 구성한다. 그리하여 책의 인기도나 내용만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의미를 찾아내고, 반대로 커다란 정치사회의 변화 속에서 책과 독서의 의미가 퇴색되어버리는 지점을 피해가며, 솜씨 좋게 '지(知)의 현대사'를 그려낸다. 여전히 책의 사회적 역할이나 효용이 있다고 믿는다면, 혹은 그런 때가 있었다고 추억한다면, 아니면 그런 때가 올 거라고 기대한다면, 이 책이 반가운 마중물이 되어줄 것이다.
- 인문 MD 박태근 (2018.10.05)


종이책 페이지수 336쪽

책소개
해방 이후 지난 70년간의 ‘한국 현대 독서문화사’다. 즉, 책 읽기 문화를 통해 돌아본 우리의 ‘知의 현대사’이자, 상식과 교양의 역사다. 지난 70년간 방방곡곡의 학교와 도서관과 서점들, 대학과 교회와 노동조합 사무실에서 열렸던 독서회들, 때로는 버스와 지하철 그리고 저마다의 내밀한 방과 마음속에 펼쳐진 독서의 풍경을 되돌아본다.

또한 그동안 우리가 사랑한 책들, 이를테면 《청춘극장》(김내성, 1954)에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조세희, 1978)을 거쳐 《칼의 노래》(김훈, 2001)에 이르렀던 한국문학, 《조선역사》(김성칠, 1946)에서 출발하여 함석헌.리영희.강만길.김현.김윤식.백낙청 등을 거쳐 오늘에 이른 인문/사회과학 서적, 그리고 《자본론》 《코스모스》 《데미안》 《어린 왕자》처럼 외국에서 들여온 아름다운 책들과 그 수용의 역사를 다시 들춰본다.

특히 이 책은, 지난 2003년 출간돼 근대사의 외연을 확장하고 문학/문화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며 극찬을 받은 《근대의 책 읽기》의 저자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와, 동아시아 비교문학과 지성사, 냉전문화사에 깊이 천착해온 정종현 인하대 교수의 긴밀한 협업으로 탄생한 책이라 그 의의가 더욱 크다. 2000년대 이래 역동적으로 발전해온 문학/문화 연구의 새로운 기운을 담아, 독서사뿐 아니라 지성사, 대중문화사, 냉전문화, 젠더사, 문화제도사까지 아우르는 최초의 인문교양서라 할 만하다.


Jung-hwan Cheon 한국 현대 문화사를 ‘문화민족주의’와 ‘지성ㆍ지식사’의 두 관점에서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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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hwan Ch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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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말부터 인권연대와 성균관대 국문과 BK교육연구단이 합력하여 한달에 한번씩 <한국 현대 문화사> 시리즈 강좌를 하게 됐습니다. 개별 강좌마다 신청할 수 있고, 학생과 인권연대 회원들은 수강료 혜택이 있다 합니다.
한국 현대 문화사를 ‘문화민족주의’와 ‘지성ㆍ지식사’의 두 관점에서 읽고 
토론하는 모임입니다. 일반 시민과 대학생은 물론 한국문학ㆍ문화사, 한국사, 지성사 등의 분야를 연구할 대학원생도 같이 할 수 있는 모임입니다.
이제껏 이야기돼 온 거 보다는, 아직 개척되지 않은 관련 한국 문화사 연구의 주제에 대해서 더 이야기하고 공유하렵니다.
아이디어와 소재를 파 가십시오.ㅎ)
한 달에 한번씩 여유롭게 모입니다. (1980-90년대나 자살 같은 주제는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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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문화사 - 방법, 소재, 논제
□ 프로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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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문화민족주의로 읽는 대한민국사
 
1강. 100년 ‘국뽕’과 ‘국까’의 정신사 (4월 28일)
: 문화민족주의의 원형들
: ’60ers(박정희 함석헌 이어령 등)의 민족주의
: 21세기형 ‘국뽕’ ‘국까’ 등

2강. ‘운동’과 민족주의(5월 26일)
: 80-90년대 운동에 대한 이해
: 백기완 사상
: 백낙청ㆍ주체사상ㆍ김영환
: NL과 ‘한총련 세대’
 
3강. 위대한(?!) ‘K-culture’의 시대 (6월23일)
: 한류의 역사?
: 냉전문화와 한미일동맹
: 신자유주의와 한류
교재) 
  • 천정환, <조선의 사나이라면 풋뽈을 차라>, 
  • 권보드래ㆍ 천정환, <1960년을 묻다> 등
참고) 
  • 윤태진ㆍ나보라 외, <한류 : 역사, 이론, 사례>; 
  • 박태웅, <눈떠보니 선진국> 
  • 박찬수, <NL 현대사>, 
  • 강준만, <한류의 역사>; 
  • 신희주, <응답하라 한총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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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부. 한국인의 지식ㆍ지성

4강. 대한민국 독서사
: ‘책 (안) 읽는 국민’은 어떻게 형성되었나?(8월 25일)
(주요 내용) 독자의 형성, 미디어스케이프의 변화, 여성독자ㆍ여성지성의 형성, 우리는 왜 책을 안(못) 읽을까?
 
5강. 출판ㆍ서점의 역사 : 참치, 부동산 그리고 책 + 종로서적, 교보문고(9월 22일)
: 한국 출판자본주의의 성격(feat. 참치, 부동산)
: 출판ㆍ언론 ‘의병장’들
: 출판의 ‘세계화’와 (자유)민주화
: 서점문화(feat.종로서적, 교보문고)
 
6강. 한국 지식인과 대중 : 3.1운동에서 ‘조국사태’까지(10월 20일)
: 대중지성의 형성
: 음모론과 반지성주의의 시대?
: 한국 지식인의 병폐
: ‘조국사태’의 의미

= 읽어볼 책 : 
천정환ㆍ정종현 <대한민국 독서사>, 
천정환,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천정환, <근대의 책 읽기>
 
= 참고할 자료 : 
이두영, <한국 출판문화사>, 
조상호, <언론 의병장의 꿈>, 
박맹호, <책>, 
김건우 <대한민국의 설계자>, 
김원, <여공 1970>, 
정종현, <제국대학의 조센징>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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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강좌] 천정환의 현대문화사한국 현대 문화사를 ‘문화민족주의’와 ‘지성ㆍ지식사’의 두 관점에서 읽고 토론하는 모임입니다. 일반 시민과 대학생은 물론 한국문학ㆍ문화사, 한국사, 지성사 등의 분야를 연구할 대학원생도 같이 할 수 있는 모임입니.....

[기획강좌] 천정환의 현대문화사
한국 현대 문화사를 ‘문화민족주의’와 ‘지성ㆍ지식사’의 두 관점에서 읽고 토론하는 모임입니다. 일반 시민과 대학생은 물론 한국문학ㆍ문화사, 한국사, 지성사 등의 분야를 연구할 대학원생도 같이 할 수 있는 모임입니다. 아직 개척되지 않은 한국 문화사 연구의 주제와 소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입니다. 한 달에 한번씩 여유롭게 모입니다.

<프로그램>
I. 문화민족주의로 읽는 대한민국사
- 1강: 100년 ‘국뽕’과 ‘국까’의 정신사 (4/28)
- 2강: ‘운동’과 민족주의 (5월 26일)
- 3강: 위대한(?!) ‘K-culture’의 시대 (6월23일)

II. 한국인의 지식ㆍ지성
- 4강: 대한민국 독서사 (‘책 (안) 읽는 국민’은 어떻게 형성되었나?) (8월 25일)
- 5강: 출판ㆍ서점의 역사 : 참치, 부동산 그리고 책 + 종로서적, 교보문고 (9월 22일)
- 6강: 한국 지식인과 대중 : 3.1운동에서 ‘조국사태’까지 (10월 20일)


▶ 공동주최 : 성균관대학교 BK21 혁신·공유·정의 지향의 한국어문학 교육연구단

▶ 일 정 : 2022년 4월 28일(목) ~ 10월 20일(목)
저녁 7~9시(2시간)/ 매월 넷째 주 목요일
▶ 장 소 : 인권연대 교육장(서울 용산구 효창동 소재)
▶ 진행방식 : 오프라인, 온라인 동시 진행(오프라인 선착순 마감)
▶ 수 강 료 : 전체 수강 9만원(회원·학생 7만원) / 개별 수강 가능(회당 2만원)
신한은행 100-025-481614 예금주 : 인권연대

▶ 신 청 : 인권연대 교육센터 홈페이지에 게재된 수강신청 양식 작성
▶ 문 의 : 인권연대 사무국 02-749-9004 또는 메일 (rights1999@naver.com)
성균관대 BK21 한국어문학연구단 760-0231 또는 메일(koreandept@skku.edu)

※환불규정 : 개강 1주일 전-전액 환불/ 개강 2일 전~ 6일 전까지-50% 환불/ 개강 당일 ~ 1일 전까지-환불 불가

강사소개 - 천정환(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 현대 문화사와 문학사 연구자)
 
「‘문화론적 연구’의 현실 인식과 전망」(2007),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2013) 『근대의 책 읽기』(2003) 등을 발표하여 한국 현대문학사 연구의 폭을 넓히고, 『대중지성의 시대』(2008), 『조선의 사나이거든 풋뽈을 차라―스포츠민족주의와 식민지 근대』(2010), 『자살론―고통과 해석 사이에서』(2013),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2014) 등을 썼다. 『혁명과 웃음―김승옥의 시사만화 <파고다영감>을 통해 본 4·19 혁명의 가을』(공저, 2005), 『1960년을 묻다―박정희 시대의 문화정치와 지성』(공저, 2012) 등을 통해서도 역사적 문화연구, 또는 문화정치사 연구의 지평을 개척해왔다. [역사비평], [문화/과학] 편집위원. [경향신문], [한겨레] 등에 칼럼이나 기획 연재물을 실어왔고, 인문학협동조합, 민교협, 지식공유연대 등을 통해 학술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2022-02-23

[책과 삶]출세의 길을 택한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

[책과 삶]출세의 길을 택한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

출세의 길을 택한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

2019.06.28 20:51 입력
제국대학의 조센징
정종현 지음
휴머니스트 | 392쪽 | 2만원

1916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조선인 유학생 모임. 가운데서 태극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이 경성방직을 운영한 김연수이다. 김연수의 사업이 번창할 수 있었던 데는 제국대학 인맥을 통해 쌓은 일본 고위 인사들과의 네트워크와 물산장려운동의 힘이 컸다.  휴머니스트 제공

1916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조선인 유학생 모임. 가운데서 태극문양이 그려진 깃발을 들고 있는 사람이 경성방직을 운영한 김연수이다. 김연수의 사업이 번창할 수 있었던 데는 제국대학 인맥을 통해 쌓은 일본 고위 인사들과의 네트워크와 물산장려운동의 힘이 컸다. 휴머니스트 제공

200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은 제국대학으로 유학 갔던 식민지 엘리트 집안의 사회적 자본이 어떻게 세습돼왔는지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다. 그는 “본가·외가·처가가 획득한 제국대학, 고등문관시험,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의 종합적 구현체”이다. 충남 예산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검사서기를 거쳐 해방 이후 검사가 된 이홍규이고, 백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였던 이태규이다. 외삼촌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일본 군수성 관료를 지낸 김성용이며, 이모는 홋카이도제국대학 출신의 농학박사 김삼순이다. 그리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를 통과하고 해방 이후 대법관을 지낸 한성수가 바로 그의 장인이다.

이처럼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는 인물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제국대학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이다. 도쿄, 교토, 홋카이도, 규슈 등 7개 제국대학은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기관이었다. 1924년 식민지 조선에도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지만, 본토 제국대학 출신들이 사회적으로 더 높은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내로라하는 조선의 수재들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들
당시 졸업생명록·동창회보 등
1000여명 전수조사 최초 기록

 

‘일본인화 과정’ 거쳐 귀국 후
총독부 관료·판검사·경찰 등
식민지 통치 첨병 역할 수행

‘지식인 책무’ 반일운동 뛰어든
박영출·박화영·송몽규 등
소수 애국 지사들 공적도 소개

식민지 조선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던 제국대학 유학생들은 좋든 싫든 한국 사회의 모든 부문에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영향을 남겼다. 1948년 개원한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한 전문위원 10명 중 6명이 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일 정도다. 그런데 경성제국대학 출신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꽤 이뤄진 반면, 정작 본토 제국대학 유학생들에 대한 연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인 정종현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가 9년 전 여름부터 매일같이 교토대 자료실에 앉아 먼지 쌓인 학생 명부를 한 장씩 넘겨보기 시작하게 된 이유다.

2010년 교토대로 박사후 해외연수를 간 저자는 <교토대학졸업생씨명록> <동창회보> 등을 샅샅이 뒤진 끝에 교토제국대학을 거쳐간 조선인 유학생 명단 전체를 추출해냈다. 혹여 하나라도 놓치면 그 이름이 영원히 어둠에 묻힐 것 같은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면서 각종 명부를 하나씩 손으로 짚어가며 대조한 결과였다. 일본 본토의 7개 제국대학에서 유학한 식민지 조선 학생은 1000명이 훌쩍 넘는다. 전수조사는 아직 끝내지 못한 탓에 저자는 제국대학의 역사를 양분하다시피 하는 도쿄와 교토, 두 제국대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 시절, 제국대학 유학생들은 어떤 마음으로 현해탄을 건넜을까. 그들은 누구보다 똑똑한 엘리트였지만, 동시에 멸시받는 ‘조센징’에 불과한 이중적인 존재였다. 시인 임화는 ‘해협의 로맨티시즘’이라는 시에서 현해탄을 건너는 식민지 유학생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이렇게 읊은 바 있다. “꿈꾸는 사상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도쿄/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많은 청년들이 자기 한 몸의 출세를 넘어 ‘슬픈 고향의 한밤’을 환히 밝히는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어 돌아올 것을 다짐했다. 실제 적지 않은 청년들이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는 삶을 살다 스러져갔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많은 청년들이 첫 다짐을 잊었다. “푸른 꿈을 안고 현해탄을 건넌 소년들은 군수 ‘나리’가 되어 돌아왔다.”

한종건은 그 단적인 예다. 중앙고등보통학교 2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전력이 있는 그는 이후 동족을 위한 새로운 지식을 염원하며 현해탄을 건넜다. 그때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그는 한동안 지역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1930년 현해탄을 되짚어 돌아온 그는 학생 시절 자신이 열렬히 비판했던 조선총독부의 관료가 됐고, 나중에는 동족의 저항운동을 탄압하는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변신했다.

제국대학 입학시험 문제집. 출세길이 보장되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입학을 선망했다.  휴머니스트 제공

제국대학 입학시험 문제집. 출세길이 보장되기 때문에 일본인들도 입학을 선망했다. 휴머니스트 제공

식민지 엘리트의 유학은 “일본인화의 과정”이었다. 긴 유학생활 동안 그들은 일본의 언어와 문화, 습관 등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제국대학에 입학하려면 중·고등학교부터 유학을 해야 하므로, 졸업할 때쯤엔 “조선어 실력이 일본어 실력만 못”한 경우도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시절을 식민 본국에서 소수자로 지낸 이들은 ‘제국(엘리트)’과 ‘식민지(인)’, ‘출세’와 ‘지사’ 사이에서 분열했다.

그들이 한 인간의 내면에서 반목하는 두 요소를 억지로 화해시킨 방법은 ‘동족을 위한 출세’였다. 자본주의 근대 문명을 식민지에 이식하는 것이야말로 “슬픈 고향의 밤”을 밝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한 것이다.

경성방직과 삼양사 등을 운영하며 식민지 조선 최고의 사업가로 인정받았던 김연수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인촌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는 민족자본으로 근대적인 공업을 육성하는 것만이 조선의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경성방직을 도운 것이 품질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조선 기업이 생산한 토산품을 쓰자는 ‘물산장려운동’이었다. 그 덕에 경성방직은 성장했지만 “그 이득은 민족의 상층 엘리트인 김연수 일가에게 집중”됐다. 서민들은 “토산품 가격의 급등으로 도리어 손해”를 봤다.

물론 그의 사업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 기업인인 그는 일본 제국의 차별을 어떻게 비켜갈 수 있었을까. 답은 그가 교토제국대학 졸업생이기 때문에 쌓을 수 있었던 일본 고위 정·재계 인사들과의 네트워크였다. 같은 제국대학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를 매개로 유·무형의 도움을 받았던 미쓰비시카세이 부사장과의 인연은 그의 손자가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돈독히 이어져오고 있다. 삼양은 2012년 미쓰비시와 합작으로 전북 군산에 비스페놀-A 생산공장을 설립했다. 영민한 김연수는 “자기 집안의 이익과 민족의 이익을 합치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제국의 이익과도 조화시킨” 셈이다.

조선총독부나 만주국의 관료가 돼 일제에 부역한 제국대학 졸업생도 많았다. 도쿄제국대학 졸업생인 박석윤을 위시한 수십명의 제국대학 출신들은 만주로 진출해 일제 대륙침략의 첨병이 됐다. “제국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환각” 속에서 이들은 만주에서 활동하는 항일 조선인을 토벌하는 관동군을 적극 지원했다. 특히 총독부 관료 중에서도 판검사는 더욱 특별한 존재였다. 판검사는 단순히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상검열을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의 후손이자, 이수성 전 국무총리의 아버지 이충영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판사가 돼 독립운동가인 김한동·진상국을 감옥에 가두고 학병 지원을 격려했다.

물론 제국대학을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책은 출세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려 목숨까지 버린 수많은 제국대학 출신들도 소개한다.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해 노동운동을 이끌다 검거돼 옥사한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출신 박영출, 조선인학우회를 결성해 반일운동을 펼치다 고문으로 사망한 도쿄제국대학 전기공학과 출신 박화영, 영화 <동주>로 잘 알려진 교토제국대학 서양사학과 출신 송몽규 등이 그 예다. 제국대학 교수진에는 마르크스주의나 유럽사회주의의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도 여럿 포함돼 있었고, 이들은 조선인 유학생들과 친분을 나누며 이들의 항일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단순히 식민지 시절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떠나, 지식인과 엘리트의 책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출세’와 ‘지사’ 사이에서 출세의 길을 택한 식민지 엘리트들은 해방 이후 벌어진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 속에서도 비슷한 선택을 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종신집권 길을 열어준 개헌안을 사사오입으로 통과시킨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도쿄제국대학 출신이다.

“자연인을 정수 아닌 소수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의 수학적 원리에 따라야 한다. 최윤식 등 수학계의 최고 권위자들도 같은 의견”이라는 최순주의 연설에 등장한 한국인 ‘최초’의 수학박사 최윤식 역시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했다. 저자는 “이명박 정권 당시 4대강 사업을 뒷받침한 과학자들이 논란이 될 때마다 그 원조격인 최윤식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한다.

출세의 길을 택한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

책에는 소설가 박완서가 쓴 <오만과 몽상>의 한 구절이 소개된다.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기업인을 낳고…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실제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의 행정·사법관을 거쳐 해방 이후에도 승승장구한 이들 대다수는 자신의 경력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그들이 축적한 사회자본은 다시 그 후손들의 사회적 신분으로 상속됐다.

저자는 “총독부 판사 이충영의 과오를 아들 이수성 전 총리가 책임질 일은 아니고, 2002년 대선 당시 장인의 빨치산 경력을 이유로 노무현을 ‘빨갱이’라고 공격했던 것이 잘못이듯 이회창 친·인척들의 식민지 관료 이력을 가지고 ‘연좌제’적 비난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충영의 판결로 감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이수성의 사회적 성공을 그 개인의 성취로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며 “본가·외가·처가의 네트워크 속에서 이회창의 성공을 도왔을 사회자본의 성격과 의미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성격이 다른 이야기”이다.

저자는 “제국대학이라는 지식제도와 관련된 근대 한국의 경험을 도덕적 이분법으로 모두 ‘악’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적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면서 “일본 식민주의의 진정한 ‘청산’을 위해서라도 제국대학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의 실상을 ‘역사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Jin Kaneko 任文桓임문환 愛と民族-ある韓国人の提言 日本帝国と大韓民国に仕えた官僚の回想

(3) Facebook:
 日本統治時代、李承晩政権時代に官僚として生きた韓国人は、韓国と日本の過去をどのように振り返っているか?
 光復期の熾烈な政治闘争(権力闘争)の勝者は李承晩だった。
 旧ソ連の占領下にあった北朝鮮との国家統合も失敗。1948年5月10日には国連監視下で初代総選挙が行われたが、金九や中道派の金奎植らは朝鮮半島の南北分断を固定化するとの理由で大反対、各地で総選挙阻止の武装闘争が展開が展開された。「済州島四・三事件」もその過程で起ったものだった。
 この北との分断は韓国国民を混乱させ、悩ませ国民分断も招いた。李承晩は確固とした国家建設のため国民統合も成功させ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わけだが、この「済州島四・三事件」後も、この李承晩路線に承服しない韓国国民に対して、強硬な国民統合政策による血生臭い事件が続くことになったのは、戦後韓国史の通り。韓国の国民統合は朝鮮戦争で一区切りついたが(朝鮮戦争が韓国国民の国民意識を高めた)、その後も、さまざまな形で、今日に至るまでこの国民統合の問題(国民分断の問題)が断続的に繰り返されてきてる。
 それはともかく、この初代総選挙に勝利したのが李承晩と韓民党(韓国民主党)である。金九らの政敵、あるいは南朝鮮労働党の政治勢力などとの光復期以来の権力闘争も、憤懣を内包しながらも、李承晩らの権力掌握ということで一区切りついた。
 李承晩は日本統治時代のほとんど朝鮮半島にいたことがなく、光復後南朝鮮に戻ったわけだが、そういうことで、彼には、いわゆる「三バン」のうち、ジバン(地盤)、カンバン(看板)がない。そういう李承晩を支えたのが全羅道を本拠としていた金性洙の湖南財閥だった。
 この金性洙を中心に結成されたのが韓民党であった。
 この初代総選挙によって韓民党が多数派を占める制憲議会で制定されたのが「第一共和国憲法」だ。
 この憲法では、この議会が大統領を選出すると定めていた。
 この結果、李承晩が1948年7月20日に大韓民国の初代大統領に就任。同年8月15日に朝鮮半島南部だけを実効支配する大韓民国政府樹立が宣言された。
 これによって、在朝鮮アメリカ陸軍司令部軍政庁(USAMGIK、日本で言えばGHQのような軍政当局)による韓国の軍政(占領)統治は終わった。この大韓民国建国は、同年9月9日の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建国につながり、南北分断はされに固定されたことは、皆さんのご理解の通り。
 この南北分断は、今日の韓国においても、歴史における、あるいは政治のおける争点の一つになっている。
 この韓国建国(政府樹立)の翌月(9月)に制定された法律に「反民族行為処罰法」(1948年9月22日、法律第3号)がある。
 この法律によって1949年1月に反民族行為特別調査委員会が創設されて「親日反民族行為者」が法的に認定された。
 国内の親日派を糾弾・排斥する動きは、アメリカ軍政庁統治下の南朝鮮過渡立法議院時代にすでに活発化していたが、「反民族行為処罰法」は、これを韓国の主権回復によって国内法として正式に定めたものである。
 同法では、①韓国併合に加担した者は死刑か無期懲役、財産は全部または50%以上を没収、②朝鮮貴族に叙爵、または帝国議会議員だった者は5年以上の懲役。財産は全部または50%以上を没収、③独立運動家やその家族を迫害した者は死刑、無期懲役または5年以上の懲役。財産は全部または一部を没収--が規定されたほか、勅任官以上の旧朝鮮総督府の高等官3等以上、勲五等以上の官公吏も10年以下の懲役、または15年以下の公民権停止。財産は全部または一部を没収とされることになった。
 同法に基づいて設置された反民族行為特別調査委員会は、日本統治時代に朝鮮発展に貢献した主要人物、有名人、知識人が多く親日反民族行為者に認定し、彼らへの糾弾も始まった。
 任文桓さんは、日本統治時代、朝鮮総督府の高級官僚(キャリア官僚)だった。この「反民族行為処罰法」による親日派糾弾・排斥の矢面に立たされた人物の一人である。
 彼は1907年、全羅北道の錦山に生まれた。日本統治時代初期に学齢期を過ごしたが、教育機会に恵まれないことから、1923年に故郷の友人とともに日本へ渡航した経験を持つ。
 彼は当時、在朝鮮の日本人と朝鮮人の教育機会をめぐる不平等・差別に落胆。勉強がしたくて日本渡航を決意したそうだ。
 日本渡航後、任文桓さんは新聞配達夫、人力車夫、牛乳配達夫と職を転々としながら予備校に通い、同志社中学への編入学試験に合格。さらに東京帝国大学に進学。
 そういうことなので、任さんは日本渡航後、関東大震災を経験した。震災はまさに、任さんが日本にやってきた直後の1923年(大正12年)9月初めに起った。
 東京帝大在学中に高等文官試験に合格して、東京帝大を卒業した1935年に母国朝鮮に赴任。1923年(大正12年)から1935年(昭和10年)までの12年間を日本で過ごしたわけだ。
 彼は京畿道内務省学務課勤務を皮切りに彼の官僚人生が始まり、1938年には京畿道の龍仁(용인)郡守に就任したという経歴を持つ。今で言えば龍仁市(용인시)の市長のようなものだ。
 1945年(昭和20年)8月15日の光復時、彼は朝鮮総督府交通局の書記官を務めていた。
 李承晩政権は、任文桓さんのような官僚を多数追放したわけだが、当時の韓国政府は人材難。政府行政は滞り、経験豊富な日本統治時代の官僚を登用せざるを得なくなった。
 韓国の政治的実権を掌握した中枢の政治家は、行政に関して素人であまりにも稚拙だった。さらに官僚も経験者を排除してしまったので素人。
 政府機構がまともに動くはずはなく、北との緊張が高まり、また国内も政治的・経済的に疲弊・混乱が収まらない中、政府として機能しないという状況に陥ったわけだ。
 そういうことで、任文桓さんら公職を追放した元官僚らに助けを求めざるを得なくな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
 任文桓さんも1948年、制憲国会法基礎専門委員・商工部次官として韓国政府に加わった。韓国政府中枢で、韓国の建国に関わったということである。
 1950年には金融通貨運営委員会委員、保健部次官を務め、翌1951年には農林部長官に就任した。
 その後彼は実業界に転じ、朝鮮商船社長、韓国貿易協会会長、海運組合連合会会長、全国経済人連合会理事・副会長、三洋観光社長、釜山プラザホテル社長・同会長を歴任。1993年6月19日に他界した。
 こういう経歴の人物なので、盧武鉉政権期の2008年に発表された民族問題研究所の親日人名辞典収録予定者名簿の中の官僚部門にリストアップされている。
 任文桓さんが初めて朝鮮総督府の官僚として京畿道内務省学務課で勤務を始めた1935年(昭和10年)時の朝鮮総督は第6代の宇垣一成である。
 翌1936年8月5日には南次郎に変わった。南は第2次若槻内閣で陸軍大臣であった人物で、朝鮮総督就任後、内鮮一体を唱え、朝鮮人の皇民化政策を推進した人物として知られる。朝鮮総督府が創氏改名を行ったのも南次郎総督の時期だ。韓国の日帝強占期の歴史叙述におけるヤマ場の一つではある。
 任文桓さんが朝鮮総督府の官僚を務めたのは、こういう時期から戦時期である。
 そして、彼は韓国建国草創期の大韓民国官僚として、朝鮮戦争期まで、韓国政府の内情をつぶさに見てきた。
 こういう人物が韓国で1975年に『愛と民族-ある韓国人の提言』(同成社)という自叙伝を刊行している。
 その邦訳が『日本帝国と大韓民国に仕えた官僚の回想』(草思社、 2011年6月25日刊)として日本でも出版され、2015年にはちくま文庫版が刊行されている。
 鄭大均さんは同書を「植民地世代が残したもっとも劇的ですぐれた自叙伝」と高く評価している。
 近く、この自叙伝を手に入れて読んでみようと思っている。
 当時の政治家・官僚の自叙伝・回顧録というと、私が読んでとても感心したのは、 『思想界』(韓国の雑誌)1966年2月号・3月号に掲載された 兪鎮午(유진오)さん の「韓日会談が開かれるまで」という寄稿記事。
 東亜日報は1974年5月に「秘話 第一共和国」という特集記事を掲載したが、これにも兪鎮午の「韓日会談が開かれるまで」が引用された。
 同様の関連図書として朴實(박실)の『韓國外交秘史』(麒麟苑、1979年12⽉)がある。
 兪鎮午さんは光復後、法学者として大韓民国憲法(第一共和国憲法)の起草に関与したほか、韓国政府樹立後は、政治家として李承晩政権中枢で活躍した。高麗大学校の総長にも就任した。
 任文桓さんと同様、民族問題研究所と親日人名辞典編さん委員会の「親日人物名簿」(2005年)にリストアップされた人物だが、彼の回顧も、渦中の当事者・関係者の振り返りとして、韓国樹立後の草創期の政府内部を生々しく知ることのできる手がかりの一つになっている。
 韓国では、任さんや兪さんは親日派に再認定されているから、彼の自叙伝はあまり顧みられないのかな?
 しかし、日本統治時代や建国草創期の韓国の状況を多様な視点から理解しようとすることは、とても大切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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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환씨는 일본 통치 시대 조선총독부의 고급관료(커리어 관료)였다. 이 '반민족행위처벌법'에 의한 친일파 규탄·배척의 화살에 섰던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1907년 전라북도의 금산으로 태어났다. 일본 통치 시대 초기에 학령기를 보냈지만, 교육 기회에 좋지 않기 때문에, 1923년에 고향의 친구와 함께 일본에 도항한 경험을 가진다. 그는 당시 재조선의 일본인과 조선인의 교육 기회를 둘러싼 불평등·차별에 낙담. 공부를 하고 싶어서 일본 도항을 결의했다고 한다. 일본 도항 후, 임분환씨는 신문 배달 남편, 인력거 남편, 우유 배달 남편과 직업을 전전하면서 예비 학교에 다니고, 동지사 중학에의 편입학 시험에 합격. 또한 도쿄 제국 대학에 진학. 그렇기 때문에, 임씨는 일본 도항 후, 관동 대지진을 경험했다. 지진 재해는 바로 임씨가 일본에 온 직후인 1923년(다이쇼 12년) 9월 초에 일어났다.

 도쿄 제대 재학 중에 고등 문관 시험에 합격하여 도쿄 제대를 졸업한 1935년에 모국 조선에 부임. 1923년(다이쇼 12년)부터 1935년(쇼와 10년)까지의 12년간을 일본에서 보냈던 셈이다. 그는 경기도 내무성 학무과 근무를 시작으로 그의 관료 인생이 시작되어 1938년에는 경기도 용인군수에 취임했다는 경력을 가진다. 지금 말하면 용인시의 시장과 같은 것이다.

 1945년(쇼와 20년) 8월 15일 광복시 그는 조선총독부 교통국의 서기관을 맡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은 임문환씨와 같은 관료를 다수 추방한 것이지만 당시 한국 정부는 인재난. 정부 행정은 정체되어 경험 풍부한 일본 통치 시대의 관료를 등용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중추의 정치가는 행정에 관해서 아마추어로 너무 치열했다. 게다가 관료도 경험자를 배제해 버렸기 때문에 아마추어. 정부기구가 제대로 움직일 리는 없고, 북과의 긴장이 높아지고, 또 국내도 정치적·경제적으로 피폐·혼란이 맞지 않는 가운데, 정부로서 기능하지 않는다는 상황에 빠진 셈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임문환씨 등 공직을 추방한 전 관료들에게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임문환씨도 1948년 제헌국회법 기초전문위원·상공부 차관으로 한국 정부에 합류했다. 한국 정부 중추에서 한국의 건국에 관여했다는 것이다. 1950년에는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 보건부 차관을 맡았고, 다음 1951년에는 농림부장관으로 취임했다. 그 후 그는 실업계로 돌아가 조선상선 사장, 한국무역협회 회장, 해운조합연합회 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부회장, 산요관광사장, 부산플라자호텔 사장·동 회장을 역임. 1993년 6월 19일에 타계했다. 이런 경력의 인물이기 때문에 노무현 정권기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사 사전 수록 예정자 명부 속 관료부문에 리스트업되고 있다. 

임문환씨가 처음으로 조선총독부의 관료로서 경기도 내무성 학무과에서 근무를 시작한 1935년(쇼와 10년) 때의 조선총독은 제6대 우가키 일성이다. 다음 1936년 8월 5일에는 난지로로 바뀌었다. 남쪽은 제2차 와카츠키 내각에서 육군대신이었던 인물로 조선총독 취임 후 내선일체를 창창하고 조선인의 황민화 정책을 추진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조선총독부가 창씨 개명을 한 것도 난지로 총독의 시기다. 한국의 일제강점기의 역사 서술에 있어서의 야마장의 하나이다. 임문환씨가 조선총독부의 관료를 맡은 것은 이런 시기부터 전시기이다. 그리고 그는 한국 건국초창기 대한민국 관료로서 조선전쟁기까지 한국 정부의 내정을 중얼거렸다.

 이런 인물이 한국에서 1975년에 '사랑과 민족-한 한국인의 제언'(동성사)이라는 자서전을 간행하고 있다. 그 국역이 '일본 제국과 대한민국을 섬긴 관료의 회상'(초사사, 2011년 6월 25일 간)으로 일본에서도 출판되어 2015년에는 치쿠마 문고판이 간행되고 있다. 정대균은 이 책을 “식민지 세대가 남긴 가장 극적이고 뛰어난 자서전”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가까이, 이 자서전을 손에 넣어 읽어 보려고 하고 있다. 

당시의 정치가·관료의 자서전·회고록이라고 하면, 내가 읽고 매우 감탄한 것은, 「사상계」(한국의 잡지) 1966년 2월호・3월호에 게재된 유진오(유진오) )씨의 「한일 회담이 열릴 때까지」라고 하는 기고 기사. 

동아일보는 1974년 5월에 '비화제일공화국'이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는데, 이것에도 유진오의 '한일회담이 열릴 때까지'가 인용됐다. 같은 관련 도서로서 朴實(박실)의 『한국외교비사』(麒麟苑, 1979년 12위)가 있다. 천진오씨는 광복 후 법학자로서 대한민국 헌법(제1공화국 헌법)의 기초에 관여한 것 외에 한국 정부 수립 후에는 정치인으로서 이승만 정권 중추에서 활약했다. 

고려대학교 총장에도 취임했다. 임문환씨와 마찬가지로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씨위원회의 '친일인물명부'(2005년)에 리스트업된 인물이지만

그의 회고도 와중 당사자·관계자의 되돌아 보면서 한국 수립 후 초창기 정부 내부를 생생하게 알 수 있는 단서 중 하나가 되고 있다. https:
、「任 文 はは ム 恒 官大日 国 月に 僚 韓 の民帝 心 国 回 想にと 仕 え た ちくま文庫」というテキストの画像のよう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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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Yeongmook Choi
    才能があった人でした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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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n Kaneko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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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akashi Wakaomi
    是非とも是非とも手に入れられて何回も読まれてくださいま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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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Kaneko
    大韓民国政府樹立国民祝賀式は1948年8月15日に行われ、韓国の人々は熱狂したわけだが、韓国に内情はとても深刻だった。
    No photo description avail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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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in Kaneko repli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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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in Kaneko
     まあ、今日の韓国建国期の評価は、混乱、分裂・対立していますよね。別の言い方をすると、現在の政治的立場が入り込んで、とても偏ったものになっている。
     さらに、この偏りが文在寅政権の積弊清算・親日派清算で増大した。このため、日本との間の歴史認識をめぐる確執も大きくなったが、それ以上に、韓国国内の対立と分断を大きくした。
     歴史の政治利用、政治介入は、ろくな結果を招かないということを文在寅政権からも、ぜひ学んでいただき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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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承晩は親日派か、評価めぐり進歩と保守が論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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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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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문환(任文桓, 일본식 이름: 豊川文夫, 1907년 6월 11일[1] ~ 1993년 6월 19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관료이다.

일제 강점기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조선총독부 관리로 근무했다. 제1공화국에서 장관을 역임하였고, 이후 경제인으로 활동하며 전경련 부회장을 지냈다. 박용곤의 처가와 사돈을 맺어 두산그룹과 혼맥이 연결된다.[2] 정치인 홍사덕의 장인이기도 하다.

2008년에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관료 부문에 선정되었다.

회고록인 ‘일본제국과 대한민국을 섬긴 관료의 회상’(한국어판 1974년, 일본어판 2011년)을 남겼다.

1960년대 초 출생지인 금산의 어려운 중고교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을 희사하기도 했다. 어려웠던 학창 시절 본인이 독지가들로부터 받았던 도움에 대한 보답이었다.

약력[편집]

  • 1907년 : 전라북도 금산(현 충청남도 금산) 출생
  • 1932년 : 오카야마현 제6고등학교 졸업
  • 1935년 :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졸업
  • 1934년 : 고등문관시험 행정과 합격
  • 1935년 : 경기도 내무부 학무과
  • 1937년 : 경기도 용인군 군수
  • 1938년 : 녹기연맹 가입
  • 1940년 : 조선총독부 식산국 사무관
  • 1944년 : 조선총독부 광공국 서기관 겸 교통국 서기관
  • 1945년 : 강원도 관광부 광고업마저 겸 민정관
  • 1948년 : 제헌국회법 기초전문위원 및 상공부 차관
  • 1950년 : 금융통화운영위원회 위원
  • 1950년 : 보건부 차관
  • 1951년 : 농림부 장관
  • 1952년 : 조선상선 사장
  • 1953년 : 한국무역협회 회장
  • 1954년 : 해운조합연합회회장
  • 1958년 : 동화제지 사장
  • 1966년 :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부회장
  • 1966년 : 삼양관광 사장
  • 1972년 : 부산프라자호텔 사장
  • 1977년 : 부산프라자호텔 회장

각주


===

여섯 번 國籍을 바꾼 한 엘리트 관료의 回想
농림부 장관을 지낸 任文桓 회고록을 독파중.

趙甲濟    
 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_IDX=45129&C_CC=AZ
==

李承晩 정부 초기 농림부장관을 지냈던 任文桓(임문환) 선생은 1907년 출생에 1994년 별세이다. 그의 회고록이 작년에 일본어판으로 나왔는데, 제목은 ‘일본제국과 대한민국을 섬긴 관료의 回想’(草思社)이다. 1974년 한국어판으로 쓴 것을 번역했다. 해설을 쓴 鄭大均씨(수도대학 동경인문과학 연구과 교수)는 ‘식민지 시대가 남긴 가장 뛰어난 회상록’이라고 평했다.
  
  任씨는 책에서 자신을 ‘여섯 번 국적을 바꾼 사람’이라고 했다. 대한제국-일본-미군정-대한민국-敵治下(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다시 대한민국을 거치면서 生死를 오고간 이야기가 파란만장하다.
  
  그는 식민지 엘리트이자 독립한 조국의 건설 엘리트였다. 1907년 충남 錦山 출생, 16세에 일본에 건너가, 同志社 중학, 舊制제6고등학교(오카야마), 동경제대 법학부를 거쳐 1934년에 고등문관 시헙 행정과에 합격하였다. 拓務省(탁무성)에 채용된 그는 조선총독부로 부임, 경기도 학무과, 지방과를 거쳐 1938년 고등관이 된 뒤 용인군수를 역임하고, 총독부 殖産局産金課에서 근무하다가 1944년에 서기관으로 승진, 鑛工局 기계과에서 근무중 해방 될 때는 강원도 광공부장으로 발령된 상태였다.
  
  해방 후엔 美군정 때 한국임시정부행정연구위원을 지냈고, 헌법기초에 참여하였으며, 李承晩 정부 출범 이후 상공부차관, 보건부차관, 농림부장관을 역임하였다. 장관 사임 후엔 조선상선 사장, 한국무역협회 회장 등을 지냈다.
  
  이 책의 後記에서 任文桓씨는 이렇게 썼다.
  <나는 勉學의 全기간을 통하여 힘 있는 일본인의 助力과 學友들의 우정을 받았으며, 이는 나의 인간형성에 귀중한 도움이 되었다. 반면 체제로서의 일본에 대하여 식민지 민족으로서 고통스러운 생각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조국이 독립한 현재, 지리적 위치상 밀접한 관계를 끊을 수 없는 兩國 민족에 대한 요망사항을 쓰고 싶었다.>
  출판사는 이렇게 소개한다.
  <戰前엔 일본의 체제 안에서 동포의 이익을 지키기 위하여 마음고생을 많이 하였지만 戰後엔 ‘친일반역자’의 레테르가 붙었다. 그럼에도 그는 일본 시절에 습득한 ‘청렴과 양심’의 규범을 잃지 않고 직무를 다하였다. 이 책엔 자신의 체험을 가해자나 피해자의 史觀으로 처리하려는 태도가 일체 보이지 않는다.>
  
  任文桓 씨는 자신의 생애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도전에 대한 그(주: 회고록에서 필자는 자신을 3인칭으로 서술)의 생애에 걸친 應戰은 늘 혼자서였다. 일본체제의 走狗였던 인간으로서, 즉 일본인의 엘리트코스를 올라간 인간으로서의 더렵혀진 이력서와 절개 없는 남자라는 烙印만은 끝내 끊어버릴 수 없어 오늘까지 그의 삶을 점점 더 괴롭히고 있다. 바우덕(어릴 때 별명)의 인생은 잡초인생이었다. 國籍이 여섯 번이나 바뀌는 가운데, 異민족과 동포의 발에 번갈아 가며 짓밟혔다. 그럼에도 살아서 번성한 삶이었다. 제국주의에 의한 弱肉强食이 美德으로 치부되었던 20세기의 지구상에는 이런 인생이 수억인에 이를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방대한 불평등 가운데 극히 일부를 기술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1984년 월간조선 8월호에 필자가 썼던 ‘조선총독부 高官들의 그 뒤’라는 기사 중 일부를 소개한다.
  
  <총독부 관료 출신들이 만든 (도표의) 日韓협회 안에는 고등 문관 시험 합격자들의 모임인「십일회」(十日會)가 따로 조직되어 있다. 매달 10일에 만나 점심을 같이한다고 그런 이름이 붙었다. 모두 39명. 敗戰 때는 대부분 총독부 과장이나 도청 부장이었던 70대, 80대 노인들이다. 39명 가운데 약 60%인 24명은 도쿄제국대학 출신, 약 20%인 8명은 경성제대 출신이다. 이 비율은 당시의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學脈(학맥) 분포와 비슷할 것이다.
   
    1980년대까지는 일본의 上流사회가 도쿄대학 출신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다. 역대 수상은 거의가 도쿄帝大 출신이었고 大藏省(대장성)의 과장급 이상 간부 중 도쿄 대학 출신이 62%. 통산성에선 63%, 운수성에선 53%, 건설성에선 58%, 문부성에선 66%나 됐다. 대기업체 사장의 약 26%가 도쿄 대학 출신이란 통계도 있었다.
   
    조선 총독부도 총독(전부 군인출신)밑에서 실무를 장악했던 고급 관료들은 거의가 도쿄제국대학 출신이었다. 「십일회」의 한 사람인 요코야마 고세이(橫山莘生)씨는 경북 경찰부장 출신인데 귀환 후 동북관구 행정감찰국장(한국의 감사원에 해당)을 지냈고 당시는 회사 사장이었다. 이 사람의 세 딸은 모두 도쿄대학 출신에게 시집갔다. 도쿄대학 출신이 같은 대학출신을 사위로 맞는 풍습은 일반화되어 새로운 귀족 사회가 이뤄지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었다.  
    「十日會」의 주요 회원들을 보면 야스다 무네쓰구(총독부 철강과장·前 대장성 동경 재무국 차장·변호사), 야마모토 야노스케(황해도 경찰부장·모리오카 시장·변호사), 미야사카 간코(총독부 사무관·전 참의원 사무총장), 아마기 이사오(전북 경무과장·전문부성 사무차관·방송 교육개발센터 소장), 와카바야시 마사다케(감포항 경비대장·전 임야청 장관), 무라카미 마사니(총독부 지방과 사무관·전 시즈오카縣 경찰본부장·회사 사장) 등등. 이들 十日會 회원의 경력을 살펴 보면 공통점이 있다. 패전 때 총독부 중간 간부, 귀환 후 복직, 관료사회의 頂上部까지 승진, 퇴임 후 유관단체나 기업체로의 轉職이란 공식적인 코스를 밟았던 것이다. 고급 관리들이 퇴임 후 관련기업체나 협회 임원으로 나가는 것은 일본도 한국과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東大 출신 한국인 10명의 운명
   
    「十日會」회원들의 순탄한 人生 역정과 퍽 대조적인 그룹이 있다. 任文桓씨가 쓴「도쿄 제국 대학 법학부 졸업자 10명의 운명」(80년 9월1일치 「友邦」)에 따르면 1932~1935년 사이 任씨와 함께 법학부에서 공부했던 한국인은 모두 10명이었고 전부가 고등문관시험에 합격, 한 사람을 제외하곤 모두 관리가 되었다. 이들 중 가장 먼저 죽은 것은 진염종씨. 신익희는 상해에서 귀국 직후 고등문관시험 합격자 출신들을 끌어 모아 신생 국가의 기본 정책을 입안토록 했다. 진 씨는 추운 사무실에서 과로하다가 40세에 병들어 죽었다.
   
    任文桓씨가 임시수도 부산에서 보사부 차관으로 있을 때 동창생 김희덕의 부인(총독부 학무국장의 딸)을 만났다. 남편이 신장병으로 死境을 헤매고 있다는 것이었다. 찾아가 보니 낡은 상점 건물 2층에 20명의 환자들이 의사도 없이 눕혀져 있었고 그 가운데 과거의 도쿄제국대학 엘리트가 누워 있었다. 『일본에 가서 좋은 약을 써 봤으면…』하고 김희덕은 말했다. 이틀 뒤 그는 숨졌다. 장수철은 고문(高文) 외교관 시험에 합격한 뒤 일본 외교관으로 해외 근무를 했다. 거기서 망명 독립 운동가들로부터 협박을 많이 당했다. 성격이 비뚤어져 친구도 의심하게 되더니 대구 어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가 병을 얻었다. 입원중 세례를 받았다. 간호원만 혼자서 臨終하는 가운데 죽었다. 未婚이었다.
   
    박성대는 한국 전쟁 중 부산에서 검사장을 지낸 뒤 변호사를 개업, 활동하다가 곧 숨졌다. 강명옥도 비슷한 시기에 죽었다. 장, 박, 강씨는 모두 전쟁 중에 얻은 병으로 不惑의 나이를 넘기지도 못했다. 이충영은 정치가적인 소질이 있는 사람으로 촉망받던 터였다. 해방 전에 이미 사법관을 그만두고 변호사가 되었다. 한국 전쟁 때 서울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 납북되어 生死를 모른다. 장수길은 한국 전쟁 중 식산은행장이 되었다가 자진 越北했다.
   
    그는 총독부 재무국의 사무관이었는데 총독부 고등경찰도 그의 사상을 알지 못했다. 60세를 넘어 他界한 사람은 장경근과 고병국 둘뿐이다. 장경근은 일본 망명 생활에서 돌아와 곧 죽었다. 지금 살아남아 있는 것은 任文桓씨 뿐이다. 任씨는 『나의 중·고·대학 동창생은 전부 일본인이지만 8할 이상이 지금도 원기왕성하게 유복한 생활을 보내고 있다.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 오래 사는 게 좋은 건지,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十日會」와 도쿄대학 출신 한국인 10명의 운명을 비교해보면 총독부 출신들이 패전으로 손해를 보았다고 하지만 同시대의 한국인이 겪은 고난에는 도저히 비교가 안 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한국인 10명, 그것도 가장 우수한 知能을 가진 엘리트들이 겪은 질병, 갈등, 전쟁, 망명은 日帝 식민통치가 남긴 분단과 분열의 유산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
   
    그런 점에서 「십일회」회원들은 가해자이고 한국인 10명은 피해자이다. 문제는 일본에서 내가 만난 총독부 후예들 중 어느 누구도 총독부의 이 제도적, 역사적 책임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개인 책임만 있을 뿐, 총독부의 책임이나 국가의 책임 같은 건 자신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별개의 문제로 존재하고 있는 듯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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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초 李承晩 대통령은 日帝 총독부 관료 출신인 任文桓(임문환) 씨를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任씨는 차관엔 일본 고등문관 시험 同期인 李泰鎔씨를 임명하였다. 任씨는 국회에 인사차 갔다. 국회는 그가 親日派라고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국회에서 돌아온 그를 李 대통령이 불렀다.
  
  任씨는 회고록에서 가까이서 본 李 대통령을 이렇게 평하였다.

  <老志士라기보다는 百獸(백수)를 호령하는 老獅子(노사자)의 인상이었다. 위엄이 몸에 붙은, 鐵의 의지를 가진 達人이었다. 가까이 가면 나보다 키가 작아 보였는데, 떨어져서 보면 뼈대가 굵어 백발의 몸이 나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악수를 해보니 굵은 손아귀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듯하였다.>
  
  대통령이 물었다.
  "君은 오늘 국회에 갔다가 인사를 거절당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친일파라고 거절 당하였습니다."
  "그런 걸 알면서 차관까지 친일파를 임명, 世風을 거스르겠다는 건 신중하지 못해. 다른 사람으로 바꾸세요. 李泰鎔은, 姓名을 보니 우리 집안인 듯한데, 그건 별개 문제요."
  
  그런 말을 하는 대통령의 표정은 손자를 타이르는 자상한 할아버지 같았다. 자존심이 강한 任 장관도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격한 얼굴로 돌아온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 정부는 하와이에 있는 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건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일본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듯해. 그러나 그런 개인문제는 옛날에 잊었어요. 지금 내가 일본과 러시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그러나, 공산당이기 때문에 어떻든 민주주의에 지게 되어 있어요. 그 정도로 알고 주의만 하면 되어요. 일본은 다릅니다. 미국에 밀착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할 것입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 본 일본은 산 꼭대기까지 저수지를 만들고, 비탈도 논이었습니다. 밤에 지날 때 내려다 보니 전등불이 끊어지지 않고 산과 평야에 이어졌어. 저렇게 좁은 땅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가 없어. 머지 않아 장사나 무엇이든 이름을 빌려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로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일본을 잘 알고 있는 당신들 親日派가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일단 自重하시고, 시험대에 오른 君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는 데 전념하셔야 해요."
  
  任 장관은 '놀라운 술회였다'고 썼다.
  <그때 謹嚴(근엄)하기 짝이 없던 노인의 자세와, 저 멀리 바라보던 노인의 眼光은 지금도 나의 기억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일본인과의 대결에 親日派의 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日帝시절 그들이 맡았던 곡예사로서의 努苦를 알아준 부탁이 아닌가? 친일파를 일본의 개(犬)라고 보았다면 일본인이 다시 올 때 그들이 原주인을 보고 꼬리를 흔들 것이 분명하므로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길 리가 없다.>
  
  滿軍 장교 출신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 日帝 관료-군인 출신들을 요직에 등용, 경제개발과 국가 근대화 사업을 맡긴다. 이들이 일본을 잘 다루고 일본도 이들을 믿고 한국을 도왔다. 李 대통령의 예언대로 知日派로 변신한 親日派 출신들이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키지 않고 주체적 발전을 성공시키는 데 중심이 되었다. 앞으로 5년이면 한국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능가한다고 한다(IMF 예측). 식민지였던 나라가 식민지 종주국을 따라 잡는 것이다.
  
  任文桓 씨처럼 식민지 관료 생활을 하면서 日帝와 동포 사이에서 곡예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勞苦를 기억함과 동시에 이들이 그때 익힌 기술을 국가 발전에 쓸 수 있도록 도와준 이승만과 박정희의 안목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 2012-05-20, 16:05 ]







愛と民族 (ある韓國人の提言) 사랑과 민족 (어느 한국인의 제언) / 임문환 회고록 / 일어 원본
任文桓 | 同成社

[중고] 愛と民族 (ある韓國人の提言) 사랑과 민족 (어느 한국인의 제언) / 임문환 회고록 / 일어 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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