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세의 길을 택한 식민지 조선의 엘리트들
정종현 지음
휴머니스트 | 392쪽 | 2만원
200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였던 이회창은 제국대학으로 유학 갔던 식민지 엘리트 집안의 사회적 자본이 어떻게 세습돼왔는지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다. 그는 “본가·외가·처가가 획득한 제국대학, 고등문관시험, 식민지 관료라는 사회자본의 종합적 구현체”이다. 충남 예산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그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 검사서기를 거쳐 해방 이후 검사가 된 이홍규이고, 백부는 교토제국대학 교수였던 이태규이다. 외삼촌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해 일본 군수성 관료를 지낸 김성용이며, 이모는 홋카이도제국대학 출신의 농학박사 김삼순이다. 그리고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를 통과하고 해방 이후 대법관을 지낸 한성수가 바로 그의 장인이다.
이처럼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최고 엘리트로 대접받는 인물들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제국대학이 등장한다. 그래서 이 책의 부제는 ‘대한민국 엘리트의 기원…’이다. 도쿄, 교토, 홋카이도, 규슈 등 7개 제국대학은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기관이었다. 1924년 식민지 조선에도 경성제국대학이 세워지지만, 본토 제국대학 출신들이 사회적으로 더 높은 대접을 받았기 때문에 내로라하는 조선의 수재들은 현해탄을 건너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 제국대학 조선인 유학생들
당시 졸업생명록·동창회보 등
1000여명 전수조사 최초 기록
‘일본인화 과정’ 거쳐 귀국 후
총독부 관료·판검사·경찰 등
식민지 통치 첨병 역할 수행
‘지식인 책무’ 반일운동 뛰어든
박영출·박화영·송몽규 등
소수 애국 지사들 공적도 소개
식민지 조선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었던 제국대학 유학생들은 좋든 싫든 한국 사회의 모든 부문에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영향을 남겼다. 1948년 개원한 제헌국회에서 헌법을 기초한 전문위원 10명 중 6명이 제국대학 법학부 출신일 정도다. 그런데 경성제국대학 출신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꽤 이뤄진 반면, 정작 본토 제국대학 유학생들에 대한 연구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이 책의 저자인 정종현 인하대 한국어문학과 교수가 9년 전 여름부터 매일같이 교토대 자료실에 앉아 먼지 쌓인 학생 명부를 한 장씩 넘겨보기 시작하게 된 이유다.
2010년 교토대로 박사후 해외연수를 간 저자는 <교토대학졸업생씨명록> <동창회보> 등을 샅샅이 뒤진 끝에 교토제국대학을 거쳐간 조선인 유학생 명단 전체를 추출해냈다. 혹여 하나라도 놓치면 그 이름이 영원히 어둠에 묻힐 것 같은 두려움에 전전긍긍하면서 각종 명부를 하나씩 손으로 짚어가며 대조한 결과였다. 일본 본토의 7개 제국대학에서 유학한 식민지 조선 학생은 1000명이 훌쩍 넘는다. 전수조사는 아직 끝내지 못한 탓에 저자는 제국대학의 역사를 양분하다시피 하는 도쿄와 교토, 두 제국대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 시절, 제국대학 유학생들은 어떤 마음으로 현해탄을 건넜을까. 그들은 누구보다 똑똑한 엘리트였지만, 동시에 멸시받는 ‘조센징’에 불과한 이중적인 존재였다. 시인 임화는 ‘해협의 로맨티시즘’이라는 시에서 현해탄을 건너는 식민지 유학생들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이렇게 읊은 바 있다. “꿈꾸는 사상이 높다랗게 굽이치는 도쿄/ 모든 것을 배워 모든 것을 익혀/ 다시 이 바다 물결 위에 올랐을 때,/ 나는 슬픈 고향의 한밤,/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리라”
많은 청년들이 자기 한 몸의 출세를 넘어 ‘슬픈 고향의 한밤’을 환히 밝히는 ‘홰보다도 밝게 타는 별’이 되어 돌아올 것을 다짐했다. 실제 적지 않은 청년들이 제국주의 일본에 저항하는 삶을 살다 스러져갔다. 그렇지만 그보다 더 많은 청년들이 첫 다짐을 잊었다. “푸른 꿈을 안고 현해탄을 건넌 소년들은 군수 ‘나리’가 되어 돌아왔다.”
한종건은 그 단적인 예다. 중앙고등보통학교 2학년 재학 중 3·1운동에 참가했다가 체포된 전력이 있는 그는 이후 동족을 위한 새로운 지식을 염원하며 현해탄을 건넜다. 그때의 마음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교토제국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그는 한동안 지역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하지만 1930년 현해탄을 되짚어 돌아온 그는 학생 시절 자신이 열렬히 비판했던 조선총독부의 관료가 됐고, 나중에는 동족의 저항운동을 탄압하는 경찰부 보안과장으로 변신했다.
식민지 엘리트의 유학은 “일본인화의 과정”이었다. 긴 유학생활 동안 그들은 일본의 언어와 문화, 습관 등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제국대학에 입학하려면 중·고등학교부터 유학을 해야 하므로, 졸업할 때쯤엔 “조선어 실력이 일본어 실력만 못”한 경우도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10대 시절을 식민 본국에서 소수자로 지낸 이들은 ‘제국(엘리트)’과 ‘식민지(인)’, ‘출세’와 ‘지사’ 사이에서 분열했다.
그들이 한 인간의 내면에서 반목하는 두 요소를 억지로 화해시킨 방법은 ‘동족을 위한 출세’였다. 자본주의 근대 문명을 식민지에 이식하는 것이야말로 “슬픈 고향의 밤”을 밝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자신을 합리화한 것이다.
경성방직과 삼양사 등을 운영하며 식민지 조선 최고의 사업가로 인정받았던 김연수의 사례가 이를 잘 보여준다. 인촌 김성수의 동생인 김연수는 민족자본으로 근대적인 공업을 육성하는 것만이 조선의 살길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경성방직을 도운 것이 품질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조선 기업이 생산한 토산품을 쓰자는 ‘물산장려운동’이었다. 그 덕에 경성방직은 성장했지만 “그 이득은 민족의 상층 엘리트인 김연수 일가에게 집중”됐다. 서민들은 “토산품 가격의 급등으로 도리어 손해”를 봤다.
물론 그의 사업이 늘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식민지 조선 기업인인 그는 일본 제국의 차별을 어떻게 비켜갈 수 있었을까. 답은 그가 교토제국대학 졸업생이기 때문에 쌓을 수 있었던 일본 고위 정·재계 인사들과의 네트워크였다. 같은 제국대학 출신이라는 공통분모를 매개로 유·무형의 도움을 받았던 미쓰비시카세이 부사장과의 인연은 그의 손자가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지금까지도 돈독히 이어져오고 있다. 삼양은 2012년 미쓰비시와 합작으로 전북 군산에 비스페놀-A 생산공장을 설립했다. 영민한 김연수는 “자기 집안의 이익과 민족의 이익을 합치시켰으며, 결과적으로 제국의 이익과도 조화시킨” 셈이다.
조선총독부나 만주국의 관료가 돼 일제에 부역한 제국대학 졸업생도 많았다. 도쿄제국대학 졸업생인 박석윤을 위시한 수십명의 제국대학 출신들은 만주로 진출해 일제 대륙침략의 첨병이 됐다. “제국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환각” 속에서 이들은 만주에서 활동하는 항일 조선인을 토벌하는 관동군을 적극 지원했다. 특히 총독부 관료 중에서도 판검사는 더욱 특별한 존재였다. 판검사는 단순히 고등문관시험을 합격한다고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상검열을 통과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오성과 한음’으로 유명한 이덕형의 후손이자, 이수성 전 국무총리의 아버지 이충영은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판사가 돼 독립운동가인 김한동·진상국을 감옥에 가두고 학병 지원을 격려했다.
물론 제국대학을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비난의 대상이 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 책은 출세가 보장된 길을 버리고 지식인의 책무를 다하려 목숨까지 버린 수많은 제국대학 출신들도 소개한다. 경성 트로이카를 조직해 노동운동을 이끌다 검거돼 옥사한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출신 박영출, 조선인학우회를 결성해 반일운동을 펼치다 고문으로 사망한 도쿄제국대학 전기공학과 출신 박화영, 영화 <동주>로 잘 알려진 교토제국대학 서양사학과 출신 송몽규 등이 그 예다. 제국대학 교수진에는 마르크스주의나 유럽사회주의의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도 여럿 포함돼 있었고, 이들은 조선인 유학생들과 친분을 나누며 이들의 항일운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단순히 식민지 시절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떠나, 지식인과 엘리트의 책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출세’와 ‘지사’ 사이에서 출세의 길을 택한 식민지 엘리트들은 해방 이후 벌어진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 속에서도 비슷한 선택을 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종신집권 길을 열어준 개헌안을 사사오입으로 통과시킨 국회부의장 최순주는 도쿄제국대학 출신이다.
“자연인을 정수 아닌 소수점 이하까지 나눌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의 수학적 원리에 따라야 한다. 최윤식 등 수학계의 최고 권위자들도 같은 의견”이라는 최순주의 연설에 등장한 한국인 ‘최초’의 수학박사 최윤식 역시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했다. 저자는 “이명박 정권 당시 4대강 사업을 뒷받침한 과학자들이 논란이 될 때마다 그 원조격인 최윤식을 떠올리게 된다”고 말한다.
책에는 소설가 박완서가 쓴 <오만과 몽상>의 한 구절이 소개된다. “매국노는 친일파를 낳고, 친일파는 탐관오리를 낳고, 탐관오리는 악덕기업인을 낳고… 동학군은 애국투사를 낳고, 애국투사는 수위를 낳고, 수위는 도배장이를 낳고….” 실제 제국대학을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의 행정·사법관을 거쳐 해방 이후에도 승승장구한 이들 대다수는 자신의 경력을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그들이 축적한 사회자본은 다시 그 후손들의 사회적 신분으로 상속됐다.
저자는 “총독부 판사 이충영의 과오를 아들 이수성 전 총리가 책임질 일은 아니고, 2002년 대선 당시 장인의 빨치산 경력을 이유로 노무현을 ‘빨갱이’라고 공격했던 것이 잘못이듯 이회창 친·인척들의 식민지 관료 이력을 가지고 ‘연좌제’적 비난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충영의 판결로 감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이수성의 사회적 성공을 그 개인의 성취로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며 “본가·외가·처가의 네트워크 속에서 이회창의 성공을 도왔을 사회자본의 성격과 의미를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성격이 다른 이야기”이다.
저자는 “제국대학이라는 지식제도와 관련된 근대 한국의 경험을 도덕적 이분법으로 모두 ‘악’이라 규정하고 그것을 ‘적출’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면서 “일본 식민주의의 진정한 ‘청산’을 위해서라도 제국대학이 한국 사회에 끼친 영향의 실상을 ‘역사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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