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0

2016 서경식, 와다 하루키 교수에게 공개서한

초심은 어디 가고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 : 외교 : 정치 : 뉴스 : 한겨레모바일

초심은 어디 가고 왜 반동의 물결에 발을 담그십니까

등록 2016-03-11 21:02
수정 2016-03-14 09:31
텍스트 크기 조정
지난해 9월 저서 출간에 맞춰 <한겨레21>과 대담하는 서경식 도쿄경제대 교수(왼쪽)와 2013년 8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한반도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류우종 <한겨레21> 기자,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토요판] 특집
서경식, 와다 하루키에게 묻다

서경식, 와다 하루키 교수에게 공개서한

와다 하루키(78) 도쿄대 명예교수. 북한과 옛 소련 사회주의체제 연구의 권위자요 평화운동가로, 1970년대 이래 한국 민주화운동을 적극 지원하면서 활발하게 연대해 온 일본의 이 저명한 진보 지식인에게, 재일 조선인 서경식(65) 도쿄경제대 교수가 매우 도발적인 공개편지를 썼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와다 교수의 생각을 총체적으로 비판하면서 아베 정권의 ‘반동적 우경화’에 침묵하거나 동조하고 있는 일본 진보지식계를 향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우고 있는 이 편지에서 그는 “‘일본인의 조선관’을 근저에서 다시 묻고 ‘사상혁명과 심리건설을 철저히 실행’하겠다고 했던 선생의 초심으로 돌아가라.”며 마지막에 3개항의 요구를 내걸었다. 1.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아시아 여성기금’이 실패로 끝난 것을 인정하고, 그 실패의 원인을 사상의 차원에서 깊이 고찰할 것. 2.한·일 정부가 공표한 ‘불가역적 최종합의’ 즉각 철회 요구 의사를 표명할 것. 3.위안부 문제에 관한 박유하 교수의 저작과 언동에 대한 견해를 명시해 줄 것.

아시아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의 암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일본국민에게 자기변혁의 필요성을 외쳐온 드문 일본인이요 ‘조선민족의 진정한 벗’으로 와댜 교수를 존경해왔다는 서 교수가 왜 자신의 그 ‘사상적 스승’에게 이런 도발적인 편지를 쓴 것일까?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 서경식(65) 도쿄경제대 교수는 교토 출신의 재일동포 2세로 와세다대에서 프랑스문학을 전공했다. 1992년 번역 출간된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디아스포라 기행>, <시대의 증언자 쁘리모 레비를 찾아서> 등을 통해 드러난 서경식의 생각과 작품세계는 독재정권에 항거한 두 형의 장기 구금으로 인한 기구하고 처절한 가족사, 경계인적인 한민족 디아스포라로서의 남다른 정체성, 차별적인 일본 사회가 강화시켜준 마이너리티(소수자) 의식 등이 섬세하고도 날카롭게 살아 있다.

맨 위 흑백사진은 1985년 2월 와다 하루키 교수(왼쪽)가 미국 망명에서 귀국을 강행하는 길에 잠시 일본 나리타공항의 호텔에 묵고 있던 한국의 재야인사 김대중씨를 방문한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와다 하루키 선생님, 달리 어찌해볼 수 없는 심정으로 이 편지를 올립니다. 사안의 성질상 공개서한 형식을 취한 점 이해해 주십시오.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외무장관회담으로 이른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최종합의’(이하 ‘합의’)가 발표됐습니다만, 피해자를 비롯해 한국이나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이를 비판하며 크게 반발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이 ‘합의’ 직후에 신문에 공표하신 견해 ‘피해자를 찾아가서 사죄의 말을’(<아사히신문> 2015년 12월 29일)은 이번 “합의 최종타결”은 “의외였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피해자에게 어떻게 사죄의 말을 전할 것인지, 이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고, 한국정부가 만드는 재단에 10억엔을 출연하겠다고 한 것은 “무책임한 태도라는 반발을 사지 않을까”라고 우려를 표명하셨습니다.



이번 ‘합의’를 비판하는 대표적인 글로, ‘위안부 문제’ 연구의 제일인자인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가 ‘진정한 해결에 역행하는 한일 합의’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습니다.(<세카이(世界)> 2016년 3월호) 그 글의 논지를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사실과 책임의 소재을 인정하는 부분이 애매하다. “(일본)군의 관여하에”라고 할 게 아니라, 왜 “군이”라고 할 수 없는가.

②‘위안부’제도가 ‘성노예제도’인 것을 부인하고 있다.

③배상하지 않는다는 ‘합의’다.

④진상규명 조치와 재발방지 조치가 실시되지 않았다.

⑤가해자 쪽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인 해결” 따위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말은 피해자 쪽만이 할 수 있다. “이번 합의는 한일 두 나라 정부가 피해자를 억압해서, 해결된 것으로 친다는 억지를 부린 것이다. (중략) 이것이 실시 과정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피해자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므로 ‘합의’의 실현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최종해결’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백지화하고 다시 해야 한다.”

나는 이 요시미 교수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만, 와다 선생님은 어떠하신지요?

와다 선생님은 <아사히신문> 기사에서 자신이 깊이 관여한 ‘아시아 여성기금’이 한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서, 그 가장 큰 이유는 “일본정부가 정말로 사죄할 생각이 있는지 의심을 산 점이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만, 나는 석연치 않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와다 선생님은 과연 ‘아시아 여성기금’이 받아들여질 수 없는 이유를 제대로 인식하고 계신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한다면, 와다 선생님에게는 조선민족(조선반도 남북의 주민 및 재일조선인을 포함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총칭)의 마음이 과연 보이는 것일까, 하는 의문입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아시아여성기금
이번 ‘합의’ 발표 이전부터 와다 선생님은 아시아 여성기금이 “객관적으로 보자면 한일간의 문제로서의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면서 “피해자와 운동단체가 받아들일 수 없는 안을 제시해서 사업에 실패하는 일을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쪽이 제시한 조건, 즉 “피해자가 수용하고, 한국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안이어야 한다는 것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의심받는 위안부 문제 해결안’ <세카이> 2016년 1월호)

결과적으로 보자면, 선생님의 이런 생각은 일본과 한국의 정권들로부터 배반당했다고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이 ‘합의’ 발표가 “의외였다”고 하셨는데, 그 말은 “피해자가 수용하고 한국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합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신다는 의미인지요?

일본정부는 벌써 이번 ‘합의’ 자체를 무효로 만들지도 모를 언동들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일례를 들자면, 지난 2월 16일,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의 일본에 대한 심사에서 일본의 스기야마 신스케杉山晋輔 외무 심의관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최종적이고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강조하면서 “일본군과 정부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은 확인할 수 없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그 발언 중에서 이 문제와 관련해 일본정부가 취해온 대응책의 사례로 ‘아시아 여성기금’의 활동을 들었다고 합니다. 즉 일본정부는 이제까지 그렇게 해왔듯이 이번 ‘합의’도 외교적인 자기방어 레토릭으로서만 활용하겠다는 자세를 명확하게 내보인 것입니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아베 총리와 박 대통령에게, 이제 한걸음 더 노력해 주기 바란다”고 한 와다 선생님의 견해는 요시미 교수의 견해에 비해 너무나 애매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와다 선생님이 우려한 ‘과오’는 어디까지나 국가책임을 부정하고 싶은 일본정부 입장에서 보면 ‘과오’가 아니라 오히려 외교적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시종일관합니다. 그리고 한국정부는 거기에 가담했습니다. 그것이 ‘과오’였다면 ‘아시아 여성기금’의 실패 원인을 성찰하지 못하고, 그것을 사상적으로 심화시켜 후대에 계승하지 못한 자들의 ‘과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참으로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이런 의미에서 와다 선생님 자신의 책임도 결코 작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종해결

‘위안부 문제의 최종해결’이라는 말은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이라는 나치의 행정용어를 연상시키고, 불길한 예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말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억지로 떠안기는 심리적 기능을 수행했고, 궁극적으로 공업적 대량학살로 귀결됐습니다. 마찬가지로 ‘위안부 문제’라는 말은, 그것이 본래 ‘일본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위안부’에게 문제가 있는 듯한 편견을 조성합니다. 이성적으로 사고할 수 없는 사람들은 눈에 거슬리는 문제는 제거하고, 시끄러운 존재는 입다물게 하고 싶은 반지성적인 충동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당사자들을 무시한 채 강행한 ‘위안부 문제의 최종해결’이라는 ‘합의’가 앞으로 어떤 참담한 사태를 부르게 될 것인지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피해자를 묵살하는 명분, 피해자를 침묵시키는 압력(상징적으로는 ‘소녀상’의 철거)이 되어 나타나겠지요. 어리석게도 이 합의를 승인한 한국정부는 이런 정의롭지 못한 기도에 협력하는 처지가 됐습니다.

그러나 역사가 얘기하고 있듯이, 피해자를 최종적으로 침묵시키는 건 불가능합니다. “다시 문제삼지 않겠다”는 약속은 양국 정부간에는 할 수 있었을지 몰라도 피해자들과는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위안부’ 문제의 진상은 피해자와 거기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부단히 ‘다시 문제 삼기’를 한 덕택에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그 ‘다시 문제 삼기’가 없었다면 은폐된 자료가 발굴되지도, 증인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면서 나서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정부간에 어떤 헛된 약속을 하든 앞으로 ‘다시 문제 삼기’가 없을 수 없으며, 필요하면 몇 번이라도 ‘다시 문제 삼는’ 일이야말로 피해자들만이 아니라 가해자들에게도 정의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일본국민 다수는 이 ‘다시 문제 삼기’(크게 보면 식민주의 비판)의 원인과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나아가 오히려 공격성을 강화하게 될 겁니다. 국민의 이런 공격성을 국가는 철저히 이용하려 들겠지요. 내 뇌리에 떠오르는 악몽은 가까운 장래에 ‘조선반도 유사’라는 (비상)사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미군과 함께 자위대라는 이름의 일본군이 조선반도를 침입하게 될 것입니다. 그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습니다. 일본국민 다수는 이미 내면화된 차별의식이나 공격성을 극복하지 못한 채 이 악몽을 방관하거나 적극적으로 지지하게 되겠지요.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우리 조선민족과 일본민족의 평화적인 공존, 더 나은 사회를 향한 연대에 최악의 위기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근대사를 통해 되풀이해서 제기돼 온 일본국민에 대한 사상적 의문, 와다 선생님 자신도 제기한 의문을 지금 다시 한번 심각하게 상기해볼 것을 우리들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내가 다른 누구도 아닌 와다 선생님에게 이 편지를 쓰게 된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유대인 문제의 최종해결’이라는 나치의 행정용어가 모든 문제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억지로 떠안기는 심리적 기능을 수행했듯이 ‘위안부 문제’라는 말은, 그것이 본래 ‘일본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위안부’에게 문제가 있는 듯한 편견을 조성한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해 8월14일 도쿄의 총리 관저에서 전후 70주년 담화를 낭독하고 있다. 연합뉴스
 

암울한 풍경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한 지 25년. 이른바 ‘위안부’ 문제는 전혀 해결의 가닥도 잡지 못한 채 세월만 흘렀습니다. 나는 그 동안 일본사회와 한국사회의 추이를 지켜본 자로서, 내 사견을 얘기하고 선생님의 비판을 듣고자 합니다.

최근 몇 년간 내 눈 앞에는 암울한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2012년 12월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대승하고 정권 정당(집권 여당)으로 복귀했습니다만, 그때의 가두 연설 광경이 눈에 선합니다. 아키하바라 역두에서 연설하던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를, 일장기를 휘날리며 환호하는 ‘시민’들이 에워싸고 반중·반한, 재일조선인 배척 구호를 외쳤습니다. 1930년대의 독일이나 이탈리아로 되돌아간 듯한 소름끼치는 광경이었습니다. 인터넷상에서, 도시의 거리에서, 극우 배외주의세력의 폭언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의 일본 정계는 아베 총리 자신을 비롯한 역사수정주의자들에게 완전히 점거당한 상태입니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도 한국의 운동단체에게는 ‘과격 민족주의’, 일본의 시민운동단체에게는 ‘반일주의’라는 저열한 욕설을 내뱉고, 한일 시민·연구자들이 오랜 세월 쌓아온 노력과 연구 축적, 심화된 논의를 완전히 뒤엎을 기세로 부정론이나 역사수정주의의 폭풍이 거세게 불고 있습니다. 통탄스러운 것은 저널리스트나 지식인들까지도 이런 폭풍에 그저 몸을 움츠리거나 자진해서 거기에 동조하고 있는 현실입니다.

지난해 여름에 발표된 아베 신조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는 총리 자신이 명백한 역사수정주의자임을 재확인시킨 것인데도 일본 언론이나 지식인들이 그 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베 담화는 시작부분에서 “러일전쟁이 식민지배 아래에 있던 많은 아시아·아프리카인들에게 용기를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인식은 오랜 세월에 걸쳐 일본 보수파에게 널리 공유돼온 것입니다만, 조선민중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러일전쟁은 조선반도와 중국 동북지방(만주)의 패권을 둘러싸고 벌인 전쟁이고, 조선은 일본군에 점령당해 ‘보호국’이 되고 그것이 나중에 ‘병합’으로 이어졌습니다. 식민지화에 저항한 ‘항일의병’ 등 조선민중이 일본군 손에 살육당한 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조선민족을 향해 아베 총리는 러일전쟁을 불러내서 자국을 미화한 것입니다. 그것은 ‘화해’와는 정반대의, 우롱이나 도발이라고도 할 수 있는 언동입니다.

여기서는 조선의 예만 들었습니다만, 아베 담화는 홋카이도, 류큐(오키나와), 대만에 대한 정복과 지배에 대해 한마디의 ‘사과’도 ‘반성’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베 총리가 그 담화에서 ‘반성’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 뒤 일본이 ‘세계의 대세’를 잘 못 읽고 전쟁의 길로 나아갔다고 한 것뿐입니다. 이는 구미제국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으며, 식민지배와 침략전쟁 피해자들에 대한 ‘반성’이라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베 담화에는 “전장의 그늘에는 명예와 존엄에 깊이 상처를 입은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한 대목도 있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왜 명시적으로 그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라니,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게다가 누가 상처를 입혔다는 것인지 주어는 모호하게 처리돼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국가로서의 책임을 부정 또는 회피하려는 의도가 거기에는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습니다.

일본정부는 지난해 여름 국회에서 헌법의 자의적인 해석 변경을 통해 미일간의 ‘집단적 자위권’을 허용하는 안보법제를 강행 채결했습니다. 올해 1월, “전후 레짐으로부터의 탈각”을 신조로 삼고 있는 아베 총리는 앞으로 개헌에 착수하겠다는 뜻을 공공연하게 표명했습니다.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는 조선민족을 포함한 막대한 아시아 민중의 희생을 대가로해서 주어진 것입니다. 평화의 과실은 주로 일본국민이 향유해왔습니다만, 일본국민만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지금 내던져버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평화국가’를 표방했고, 세계의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믿어 온 일본이 그 간판을 내리는 날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일본사회에서 태어나 거기서 65년을 살아 온 나입니다만, 이런 풍경을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인권’ ‘평화’ ‘민주주의’ 등 보편적 가치를 가르쳐준 것도, 전후 일본의 평화주의 교육과 문화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내 눈 앞에서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습니다.

  

초심

와다 하루키 선생님을 생각할 때마다 내 뇌리에는 낡은 사진과 같은 풍경이 떠오릅니다. 그것은 1980년대 초, 선생님은 40대 전반, 나는 갓 30대가 됐을 무렵입니다. 저녁 때 긴자 거리를 걷고 있던 나는 우연히 선생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여쭈었더니 “스키야바시 공원에”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지금부터 데모를 할 겁니다”라는 말씀과 함께.

그 당시 선생님은 ‘한일 연대운동’에 매진하셨습니다. 광주사건 뒤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군사재판이 진행중이었고, 사형판결이 예상되고 있던, 글자 그대로 절망적인 나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김대중을 죽이지 마라!”고 호소하는 그 정례 데모에는 많아야 수십명, 적을 때는 몇 명밖에 참가하지 않았던 적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고명한 선생님이 그처럼 세인들의 관심을 끌지도 못하는 활동을 묵묵히 계속하셨습니다. 번화한 긴자 거리를 지나다니는 일본국민 대다수는 무관심했지만, 여기에 우리 조선민족의 진정한 벗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있구나, 그렇게 느끼면서 나는 무거운 가방을 늘어뜨린 채 천천히 멀어져가는 선생님 뒷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선생님은 그 당시의 생각을 저서 <한국민중을 주목하라>(소주샤創樹社, 1981)에서 정리하셨습니다. 그 책 ‘머릿말’에 고교생 때 다케우치 요시미竹?好의 <현대 중국론>(1951년 초판)을 읽고 “역사와 사회에 눈을 떴다”고 썼습니다. 다케우치와의 만남은 인간 와다 하루키의 사상형성에 결정적인 의미를 지닌 듯한데, 그 뒤에도 오늘날까지 되풀이해서 선생님 저작에 그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와다 하루키 소년의 마음을 흔든 것은 필경 그 책에 수록된 ‘일본인의 중국관’이라는 논문이었을 것입니다. 1948년에 일본을 방문한 중국 국민당정부 고관인 장췬張群이 귀국할 때 ‘일본의 여러분에게’라는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그것은 “일본국민에 대해 사상혁명과 심리건설을 철저히 실행하기를 간절히 바란다”면서, “이 두 가지는 평화민주 일본을 보증할 뿐만 아니라 일본과 다른 민주국가가 합리적 관계를 재건하는 데에 필요한 보증이기도하다”고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고,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응답하고 싶다, 그것이 내 의무라고 느낀다, 선생님은 그렇게 썼습니다.

장췬의 메시지를 거의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원인에 대해, 다케우치 요시미는 상업신문에서부터 일본공산당에 이르기까지 중국혁명을 피상적인 이데올로기 대립 측면에서만 바라보고 “그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민족적인 혁명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그것을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지적하면서, 패전 직후인 그 당시에도 일본인의 중국관의 근저에는 ‘모멸감’이 있다고 갈파했습니다. 추측하기에 이 다케우치의 사상으로 촉발된 와다 소년은 그 뒤 이를 조선문제를 다룰 때의 자신의 사상적 참조 축으로 삼았을 겁니다. ‘일본인의 조선관’을 근저에서 다시 묻고 “사상혁명과 심리건설을 철저히 실행”하는 것이 선생의 초심이었겠지요.

선생님의 <한국민중을 주목하라>를 통해 젊었던 나는 그때까지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자민족의 고난의 역사와 그런 가운데서 싸움을 계속해온 존경할만한 사람들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은 또한 아시아에 대한 몰이해와 편견의 암굴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대다수 일본국민 중에서 진정한 연대를 위해 자기변혁의 필요성을 외치는 ‘드문 일본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에 받았던 감명이 35년이나 되는 세월이 지난 지금도 되살아납니다.

그 책 제1장의 ‘한국 민중을 주목하라-역사 속에서 끌어낸 반성’이라는 제목을 단 논고는 1974년, 유신독재가 최악의 탄압정책을 펴고 있던 시기에 발표된 것입니다.

선생님은 일본이 조선을 ‘병합’했을 때,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 등 겨우 몇 명을 빼고는 “얼마나 무서운 죄의 길로 일본국이 들어서려 하고 있는지”를 대다수 일본인들이 알지 못하거나 국가권력의 공포에 위축당해, 또는 어떤 자들은 ‘병합’에 취해버린 바람에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식민지배가 시작되고 말았다”고 지적하고, “일본인들이 이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부정하고, 조선반도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갈 기회”가 세 번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는 1945년의 일본 패전 때. 두 번째의 호기는 1964~65년 한일국교정상화 조약 교섭 타결 전후. 그러나 이 두 번의 기회에도 일본국민 대다수는 조선민족의 진의, 항일독립투쟁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조선민중과 연대하지 못한 채 호기를 날려버렸다고 지적한 다음, 선생님은 1973년 도쿄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 국가기관에 납치당한 사건과 그것을 계기로 해서 일어난 한국 민주화투쟁에 연대하는 운동 속에 ‘제3의 기회’가 있다고 역설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연대이다. 일본인과 조선반도 사람들간의 역사를 모든 면에서 다시 묻고 근저로부터 다시 만들어가기 위한 연대이다”라고.

일본국민은 이 ‘제3의 기회’를 붙잡았던가요? 희미한 서광이 비치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은 있었습니다. 한국 민주화투쟁의 전진에 고무받아 한일 민중간의 연대가 급속히 진척되는 것처럼 보였던 순간입니다. 그러나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 일본은 기나긴 반동의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국가주의적인 정치가들 단체의 중추로 등장한 소장 정치가 아베 신조가 지금은 총리대신입니다. 그의 내각에는 마찬가지로 1990년대 중반에 ‘위안부’ 문제에 대한 대항의식에서 촉발된 ‘일본회의’라는 국수주의조직 멤버들이 다수 참가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실로 참담한 세월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나는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와다 선생님을 비롯한 일본의 진보적 인사들도 과연 자신들에게 문제는 없었던가, 심각하게 되돌아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1980년대 도쿄 긴자거리에서 만난
당신은 데모하러 가는 길이었죠
김대중 구명운동에 매진하셨어요
저를 눈뜨게 한 글 쓰신 당신은
조선민중의 진정한 벗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초심을 의심합니다
그것은 일본 전후 진보세력 실패,
한일연대 파산과 밀접한 연관 있죠
‘불가역적 최종합의’도 그 연장
‘박유하 현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제4의 호기

1989년 1월 7일, 쇼와(昭和) 천황(히로히토)가 사망했을 때 나는 ‘제4의 호기-쇼와의 종언과 조선’이라는 제목의 짧은 글을 썼습니다.(<세카이> 1989년 4월호, ‘네 번째 호기’ <언어의 감옥에서>. 돌베개, 2011년/ <분단을 살아가다> 가게쇼보 수록)) 제목으로도 알 수 있듯이 와다 선생님한테서 받은 영향의 연장선상에 있는 논고입니다.

“일본의 조선식민지화 과정은 모두 통치권의 총람자인 천황의 ‘재가’를 받아서 추진됐다. 조선총독은 법적으로도 천황에게 ‘직예(直隷, 직속)’되는 천황의 대리인이었다.” “(조선 식민지배와 그에 따른 투옥, 고문, 살해 등의 행위)는 얼마전에 사망한 그 사람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중략) ‘쇼와’의 종언에 즈음해서 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을 상기하는 일본인은 실로 얼마 되지 않는다. (중략) 그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묵살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조선’을 직시하는 일은 그들의 자기긍정, 자기찬미 욕구와 부합하지 않기 때문에. 하지만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자기부정하는 것은 바로 일본인 자신의 도덕적 갱생과 영속적인 평화를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일본인은 앞으로도 계속 ‘항일 투쟁’에 직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쇼와 천황의 사망을 일본 매스미디어는 일제히 ‘붕어(崩御)’라는 용어로 전했습니다. 이것은 물론 일본국 헌법의 정신에 반하는 봉건적 신분제 용어입니다. 일본 언론들은 스스로 ‘신하’의 지위를 택한 셈입니다.

<아사히신문>(1월 7일 석간) ‘’쇼와‘를 보낸다’는 제목의 사설은 나를 더욱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의 진보적 리버럴파를 대표한다는 <아사히신문> 사설이 천황의 전쟁책임으로부터 눈을 돌리고 그를 일개 평화애호가적 인물로 묘사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 패전 뒤 미국이 “일본 재건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천황제를 옹호했는데, “그런 사고는 좋은 결과를 낳았다. 만일 천황제를 폐지했다면 패전의 혼란은 가속되고 부흥은 지연됐을 게 분명하다”고 단언했습니다.

천황제 긍정의 논거가 ‘부흥’이라니, 이 얼마나 허무하기까지 한 자기중심주의인가요. 일본 패전 뒤의 시점에서 조선을 비롯한 피해 민족들은 혼란과 빈궁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만, 가해국인 일본은 배상에 착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는커녕 일본경제는 조선전쟁과 베트남전쟁 특수로 막대한 이윤을 얻었습니다. 미국이 천황의 전쟁범죄 소추를 피해 전후 천황제를 온존시킨 것은 간접지배를 통해 일본통치를 원활하게 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는데, 그것을 “좋았다”고 평가는 정신에는 ‘노예근성’이라는 말 외에 달리 형용할 길이 없습니다.

이 짧은 글을 나는 다음과 같이 끝냈습니다. “이제 천황 사망을 ‘호기’로 삼아 천황의 전쟁책임을 면책함으로써 일본인 전체의 ‘1억 총면책’을 꾀하고 있으며, 전후의 ‘부흥’과 ‘번영’이라는 노골적인 자기긍정이 거대한 힘으로 추진되고 있다. (중략) ‘쇼와’ 천황의 사망이 일본인들에게 자신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할 호기를 제공하고, 일본인들이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민족들과의 진정한 우정을 쌓아올릴 호기를 제공할지도 모르겠다는 내 생각은 아마도 너무 순진할 것이리라. 일본인들은 이 ‘제4의 호기’를 뻔히 보면서도 떠나보내려 하는가.”

현시점에서 뒤돌아 보면 역시 나는 너무 순진했던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 일본인들은 그 뒤 지금까지 ‘항일투쟁’에 계속 직면하고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대립과 갈등도 크게 보면 이 문맥 위에 있습니다.

이처럼 제3, 제4의 기회도 놓쳐버렸습니다만, 그래도 내 마음 속에는 “일본인과 조선반도 사람들간의 역사를 모든 면에서 다시 묻고, 근저에서부터 다시 만들어가기 위한 연대”를 지향하는 와다 선생의 초심은 흔들릴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연대’는 그만틈 어려운 것이지만, 설령 아무리 어렵다 하더라도 포기하는 건 용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아시아 여성기금 발족 당시의 상황을 떠올려 볼까요. 1990년대에 들어 김학순 할머니를 비롯해 증인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고, 그때까지 은폐돼 있던 증거자료들도 발굴되기 시작했습니다.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관방장관 담화(1992년 1월),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의 사죄 표명(앞과 같은 시기),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 담화(1993년 8월),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 기자회견(앞과 같은 시기) 등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여전히 불충분했겠지만, 일본정부가 종래의 입장을 바꾸는 자세를 연속적으로 표명했습니다. 국제적인 관심도 커졌고, 그것은 베이징 세계여성회의(1995년 9월) 행동강령(성노예제 피해에 관해 진상 규명, 가해자 처벌, 충분한 보상을 요구한다)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흐름이 순조롭게 발전됐다면 국면은 지금과는 달라졌겠지요. 그러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일본의 진보적 시민과 한국의 (한국만이 아니라 전세계의) 반식민주의 세력이 연대를 유지하면서 일본정부에 맞서 싸우는 것이었겠지요. 물론 보수파의 완강한 저항은 있었겠지만, 그리고 쉽게 승리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진 않습니다마는 이런 싸움의 과정을 거쳐 연대가 강화됐을 겁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경악한 것은, 하필이면 와다 선생님이 아시아 여성기금을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일을 맡은 것입니다. 내가 아는 선생님의 ‘초심’과도, 저 1970년대, 80년대의 연대운동 경험과도 합치되지 않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선택이었습니다.

잡지 <세카이>(1995년 11월호)에 한일 지식인들간에 주고받은 왕복서간이 실렸습니다. 발신인 “왜 ‘국민기금’에 호소하는가”는 오오타카 요시코大鷹淑子、시모무라 미쓰코 下村滿子、노나카 구니코野中邦子、와다 하루키 네 사람의 연명 서한. 답신인 “역시 기금 제안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효재, 윤정옥, 지은희, 박원순 네 사람의 연명 서한이었습니다.

이 왕복서간에서 일본쪽(실질적인 집필자는 와다 선생님이겠지요)은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의 판단을 토대로 일본군의 요청과 관리 하에 조직적으로 만들어졌다”, “여성의 명예, 존엄, 인권을 유린한 그 죄는 중대”하다고 전제한 뒤 “문제는 일본정부로서는, ‘종군위안부’ 문제를 국가가 저지른 전쟁범죄라고 법적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로 가장 먼저 든 것은 “유감스럽게도 일본과 독일은 다릅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은 나치 국가와 단절한 국가이지만 일본은 전쟁 전과 연속된 국가이고, 과거의 전쟁범죄를 단 한 번도 스스로 재단하지 못했다, 이런 일본국가에게 지금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법적인 책임을 지라고 요구해봤자 어렵다,는 것입니다.

당시 이 대목을 믿을 수 없다는 생각에 몇 번이나 거듭 읽었던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일본과 독일이 다르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한국의 피해자나 지식인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얘기라도 하려던 것인가요. 여기서 얘기한 와다 선생님 등의 일본비판은 사실 자체는 그대로 맞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정부나 일본국민을 향해서 해야 할 얘기겠지요. 그것을 일본정부의 시책인 여성기금 구상을 받아들이라고 한국 쪽을 설득하는 논법으로 사용하는 것은 근본적인 착오가 아닌가요.

비근한 예지만, 예컨대 DV(Domestic Violence, 친밀한 파트너한테서 당하는 폭력. 가정폭력-역주)을 되풀이하면서 반성하지 못하는 인물이 있다고 하면, 그 인물의 가족이 피해자에게 “그에게 근본적인 반성을 하라고 압박해봤자 무리예요”라면서 설득하고 있는 거나 같습니다. 얼마나 터무니없는 착오인가요.

일찍이 “우리가 다시 태어나기 위한 연대”를 주장하면서 고독한 연대운동의 선두에 섰던 그 와다 선생님이 가장 ‘연대’가 요구되는 그 국면에서 그런 얘기를 하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한국 쪽 네 사람의 답신에는 “한일간에 가로놓인 심연의 깊이를 지켜보면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만, 나도 바로 그 ‘심연’을 엿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국 쪽 네 사람의 답신은 그 사정을 자세히 밝히고 있는데, 여기서 그 모두를 소개할 수 없어서 유감입니다.

“선생님들이 말씀하셨듯이 일본의 현실이 기금안 외에 달리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정직한 얘기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오히려 일본의 정치, 사회적 현실이 그런 분위기이기 때문에 더더욱 기금사업을 망설이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일본이 이토록 과거의 비인도적인 범죄를 은폐하고 호도하면서 옹호하려 하기 때문에, 얼마 되지 않는 돈이나 물질적 이익으로 모든 현안들을 결착지으려는 것은 우리 양심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일본과 유럽 사회가 다르다는 논점에 대해서는 이렇게 썼습니다.

“이런 차이가 있다고 해서 일본의 전후처리에서 미온적인 부분까지 인정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오히려 일본사회가 유럽과 달라서 확실히 파시즘을 청산할 수 없는 것이라면, 확실히 청산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쪽 네 사람의 답신은 다음과 같은 ‘연대’를 호소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일본정부의 전후처리 정책이 시대착오라고 해도 그것을 비판하고 견제하는 일본의 건전한 시민 그룹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그 사람들과 연대하면서 역사의 진전을 꾀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일본에 그런 양심적인 지식인과 시민그룹이 존재하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하며, 또한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중략) 선생님들과 우리가 이 어려운 문제를 놓고 벌인 논의가 작은 싹이 돼서 다음 세대에 꽃을 피울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여성기금은 당신의 경악스런 선택
일본과 독일 다르다며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 지라고 해봤자 어렵다니요
여성기금이 사실상의 보상이라며
위안부 피해자 설득하던 딜레마

저를 가장 실망시킨 것은 당신이
문제투성이인 박유하의 책 간행에
진력해준 사람으로 등장한 것
한일협정 뒤 배상요구가 무리라는
그의 주장에 정말 동의하십니까

균열 

와다 선생님의 “‘종군위안부’ 기금 호소인이 된 이유”(1995.7.5)라는 문서는 다음과 같은 삽화로 시작을 합니다.

1953년, 한일회담이 ‘구보타 망언’으로 중단됐을 때 당시 17살의 고교생이었던 와다 하루키 선생님은 이구동성으로 한국 쪽을 비난하는 일본정부, 야당, 큰 신문의 논조를 납득할 수 없어서 “옛날 일은 미안했다는 기분을 일본 쪽이 갖고 있는지의 여부는 회담의 기초이며, 이 점에 대해선 양보의 여지가 없다는 한국 쪽의 주장은 ‘조선민중의 소리’이며 경청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 이후 나는 일본국민의 생각이 바뀌기를” 바라왔다. -여기에는 앞서 얘기한 다케우치 요시미의 <현대 중국론>의 사상이 반영돼 있다는 걸 읽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어떻게 아시아 여성기금 추진 쪽으로 이어지는 것인지 논리적으로 연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구상에는 “불충분한 점은 있으나 전진이라고 보고 싶다”, “벽이 두껍다고 느꼈는데, 간신히 열린 틈새로 모두가 몸을 비집고 들어가 그것을 넓혀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하셨습니다만, 몇 번을 읽어도 석연치 않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이 기금구상에 대한 비판이 강했고, 윤정옥 선생님 등이 일본에 가서 “원칙적인 입장을 관철하도록” 와다 선생님께 촉구했지만 생각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기금 구상을 둘러싸고 노정된 한일간의 균열은 ‘보상금’ 지급으로 결정적인 위기를 맞게 됩니다. 한국 쪽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금 쪽이 1996년 8월부터 ‘보상금’ 지급에 착수했고, 1997년 1월에 7명의 피해자에 대해 지급을 강행했기 때문입니다. ‘보상금’ 전달식은 서울 시내의 호텔에서 비공개로 진행됐습니다. 이에 대해 한국 외무부는 “일본의 기금 쪽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한국정부 및 대다수 피해자의 요구를 거스른 채 일시금 지급 등을 강행한 것은 실로 유감”이라고 논평했습니다. 한국의 정대협과 시민연대는 “일본정부는 기금을 통한 매수공작을 백지화하고 공식적으로 사죄하라”, “7명의 할머니들 행동은 올바르지 않다”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나중에 7명은 ‘시민연대’의 국민성금 지급에서 제외됐고, 나머지 151명에게만 성금을 지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기금 쪽은 ‘보상금’을 받고 싶어하는 “할머니의 주체성을 존중하라”고 주장하며 “7명을 차별하지 마라”고 요구했습니다.

와다 하루키,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연명의 ‘한국의 벗들에게 보내는 편지’(1997. 5. 30. <창작과 비평> 1997년 여름호)는 “죄를 인정하지 않은 채 주는 동정금을 받는다면, 피해자는 자원해서 공창(公娼)에 들어간 셈이 된다”는 윤정옥 선생님의 발언과 관련해, “꾸지람을 들은 할머니들을 생각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라면서 시민연대 선언문의 “사죄 없는,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받아들인다면 일본정부에게 면죄부를 주고 우리 스스로 또다시 돈에 팔린 노예가 되는” 것이고 이는 용납할 수 없다는 대목을 두고, “놀라움을 넘어 슬픔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나는 이 편지를 읽고, 윤정옥 선생님의 ‘공창’ 관련 발언에는 문제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여기에는 기괴한 도착(倒錯)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보상금을 받은 7명의 피해자들이 비판당하는 처지에 놓인 것은 비극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을 만든 건 누구인가요? 한국 쪽의 이해를 얻지 못한 채 사업을 강행한 기금 쪽에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럼에도 일본 쪽이 한국 쪽에게 도덕적인 비난을 가하고 자신들을 도덕적 우위에 두는 것은 도착이 아닙니까?

이 와다·다카사키 서간에 대해 한국신학연구소의 김성재 선생님이 답신을 보냅니다.(1997. 6.25.) “(와다) 선생님은 도덕적 차원에서 ‘국민기금’ 지급의 정통성을 강변하고 있지만, ‘국민기금’은 일본정부가 공식 사죄와 법적 배상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설립한 것이기 때문에, ‘국민기금’ 자체에 도덕성이 없습니다. 만일 ‘국민기금’이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만든 순수한 시민단체라면 우리도 기꺼이 연대할 것이며, 또 순수하게 모금한 기금이라면 굳이 거기에 반대할 이유는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이 개인적인 차원에서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중략) ‘국민기금’이 할머니들에게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할머니들을 차별받게 함으로써 고통을 안겨주고 있습니다.”

와다 선생님은 근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하여>(2015년 5월 출간, 이하 <해결>)에서 한국의 피해자, 운동단체, 여론이 아시아 여성기금에 대한 거부 태도를 취한데 대하여 “지금은 이해하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예상을 넘은 강한 반발”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사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고도 썼습니다. 이 말은 당시 다소의 무리가 있더라도 일단 ‘보상금’을 지급해버리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얘기인가요? 그것을 강행하면 돌이킬 수 없는 대립에 빠져들게 된다, 오히려 원칙적 입장을 관철해 달라, 그것이 연대의 기초다, 라는 것이 윤정옥 선생님을 비롯해서 와다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던 한국 쪽 사람들의 진의였으리라고 생각(推察)합니다. 그때 와다 선생님은 왜 ‘조선민중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셨나요?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월13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한 대국민 담화 및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초기 설정의 오류

와다 선생님은 아시아 여성기금이 한국과 대만에서는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으나, 필리핀과 네덜란드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총괄하면서, 기금에 대한 비판은 이해할 수 있으나 그 사업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은 피해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고, 아시아 여성기금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셨습니다.(<해결>)

내가 여기서 다시 묻고 싶은 것은, 한국과 대만에서 이해를 얻을 수 없었던 것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이라고 할 때, 그 이해를 얻을 수 없었던 이유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시느냐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저서에서는 ‘위문금’ 보도에 즉각 반론을 펴지 못했기 때문에 진의가 왜곡됐다, ‘보상’이라는 말에 대한 설명이 불충분해서 한국어와 중국어로 번역할 때 “결정적인 오류”를 범했다는 것 등을 이유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이런 이유는 ‘결정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초기 설정(初期設定)의 오류”에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와다 선생님은 <아사히신문>(1994.8.19.)에 “전 위안부에게 ‘위문금’, 민간모금으로 기금 구상, 정부는 사무비만”이라는 기사가 실린 것과 관련해 “이 기사가 만들어낸 인상은 치명적이었습니다”라고 술회했습니다.(<해결>) “만들어낸 인상”이라는 표현은, 사실이 왜곡돼 전달된 것임을 시사하고 있습니다만, 정말 그런 걸까요? 오히려 이는 당시의 ((사회당을 포함한) (일본) 정권의 의도를 정직하게 전달하고 있다, 그 의도는 지금까지도 일관돼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와다 선생님은 “이가라시 고조五十嵐廣三 관방장관은 그때 곧바로 기자회견을 열어 ‘위문금’ 따위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단호하게 부정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위문금’이라는 딱지가 일찌감치 붙어버리는 바람에 그것을 떼어낼 수 없게 됐다”고 하셨습니다.(<해결>) 하지만 실제로는 관방장관이 “단호하게 부정하지 않았던” 것은 ‘위문금’이라고 부르든 다른 무엇이라 부르든 정식 배상금은 절대로 지출하지 않겠다는 것이 정권의 물러설 수 없는 의도였기 때문이 아닙니까? 와다 선생님은 야부나카 미토지藪中三十二 전 외무차관이 근저 (<일본의 침로> 2015년)에서 일본이 위안부에게 ‘위문금’을 주었다고 쓴 것은 분별없는 짓이라고 비판했습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일본정부 중추부의 일관된, 변함없는 입장이고, 그것을 와다 선생님처럼 “사실상의 보상금”이라고 편의적으로 읽고 받아들이도록 피해자들을 향해 주장하고 있는 쪽에 무리가 있어 보입니다. 거기에 반발한 피해자 쪽이나 운동단체야말로 사실을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1990년대에 들어 증인들이 계속 나타나고 소송이 제기돼 유엔 무대에서도 문제가 제기되는 등 일본정부로서는 대응에 부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습니다. 자민당 장기 정권체제가 동요하고 정당간 이합집산이 되풀이되고 있던 1993년부터 1995년까지의 시기에 일본정부 차원의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조치는 (호소카와 정권의 연립여당이었던 사회당도 포함해서) 체계적인 검토 없이 관료들 손에 맡겨져 있었습니다.

1994년 6월에 자민·사키가케·사회당 3당 연립정권이 탄생하고, 사회당 출신의 이가라시 관방장관이 중심이 돼 ‘기금방식’에 관한 협의를 시작했습니다. 아시아 여성기금은 잡다한 세력들이 모인 정권이 충분한 준비도 없이, 무엇보다 상대방(피해자와 지원단체)과의 신중한 사전협의도 없이 즉흥적으로 제안된 대응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국의 전쟁범죄를 마무리짓기(決着)에는 너무나도 허술한 것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번(2015년 12월)의 ‘합의’는 그것의 재연이었습니다.

집권 여당으로 참여한 사회당 세력이 보수파나 관료의 저항을 무너뜨릴 수 없다고 판단하고 국가 보상이나 입법 해결의 길을 포기하면서 애매모호한 대응책으로 기금안이 제시된 것이 무엇보다 큰 문제였습니다. 그 때문에 정부가 일관되게 국가 보상을 부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와다 선생님과 같은 분들이, 이것은 “사실상의 보상”이라고 피해자들을 설득해야만 하는 ‘딜레마’에 빠졌습니다. 와다 선생님이 “사실상의 보상”이라는 해석을 강조할 때마다 그 말은 정부에 의해 번복돼 왔습니다. 이번의 ‘합의’에 관한 10억엔의 자금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얘기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와다 선생님과 같은 분들은, 정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피해자들에 대처하는 방어벽이었던 셈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무라야마 내각이 퇴진하고 보수파가 강렬한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역방향의 벡터

좀 더 큰 역사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위안부 문제는 원래 세계적인 동서대립 구조의 종언과 함께 떠오른 사태입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의 권위주의체제가 동요하고 민주화가 진행된 결과 피해자들이 이름을 밝히며 나설 수 있게 됐고, 지원운동도 활발해졌습니다. 그때까지 봉인돼 있던 일본의 전쟁범죄 문제가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사자인 일본에서는 이 벡터가 역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동서대립 시대의 종언이 ‘탈이데올로기 시대’라는 천박한 구호와 함께 진보적 리버럴 세력의 자기해체라는 방향으로 진행됐습니다. 사회당·총평 블록 자체가 ‘55년체제’(자민당 장기집권을 가능하게 만든 보수합동 체제-역주)라 불린 구체제에 의존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사회 변화 속에서 새롭게 진보적 세력을 결집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기붕괴(自壞)의 길을 택한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사회당은 소선거구제를 수용하고, 자민당과의 연립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일관되게 국가주의에 저항해 온 일본교직원조합(일교조)은 방침을 전환해 학교 행사 때의 국기(히노마루) 게양, 국가(기미가요) 제창을 용인했습니다.

그때 항상 주고받은 상투어가 “시대는 변했다. 이젠 이데올로기 시대가 아니다”는 것이었습니다. 진보세력이 스스로 탈이데올로기라 칭하면서 이념이나 이상을 내버렸을 때 우파세력은 오히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성채를 강화하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당의 무라야마 위원장을 수반으로 하는 3당 연립정권이 탄생하자, 무라야마 총리는 취임 직후의 국회 연설에서 안보조약 긍정, 원자력발전소(원전) 긍정, 자위대 합헌 등 그때까지 지켜온 당 노선을 전면적으로 변경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무라야마 담화를 발표했을 때의 기자회견에서 기자로부터 천황의 전쟁책임에 대한 질문을 받자, “그것은 없다”고 즉답을 했습니다. 모두 어이가 없을 정도로 경박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안부 문제는 동서대립 시대의 종언 이후의 한국과 일본에서 이처럼 사회변동의 벡터가 역방향으로 교차하는 과정에서 부각된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말하자면, ‘원칙’을 끝까지 지키면서 민주화를 쟁취한 한국 쪽과, 살아남기 위해 하나 둘 ‘원칙’을 포기해 가고 있던 일본 진보세력 쪽이 위안부 문제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게 된 것입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구상은 일순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의 단기간에 집권 여당의 일각을 차지하고 있던 사회당 세력이 살아남기 위해 보수파 및 관료들과의 타협을 꾀하면서 자신들의 존재이유를 가까스로 드러내 보이려 한 프로젝트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만큼 출발 시점부터 자기모순을 배태하고 있었습니다.

  

현실주의

이런 아시아 여성기금 구상에 반대하는 사람은 일본에서도 물론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 중 한 사람이었던 와다 선생님은 내게도 깊은 추억으로 남아 있는 <세카이>의 전 편집장 야스에 료스케安江良介씨의 이름을 거론하셨습니다.(참조: ‘멋진 일본인’ <세카이> 1998년 3월호. <반난민의 위치에서> 가게쇼보 수록)

와다 선생님은 한국에서 열린 심포지움에서 다음과 같이 발언하셨습니다.(‘아시아 여성기금 문제와 지식인의 책임’, <동아시아 역사인식 논쟁의 메타 히스토리> 세이큐샤靑弓社、2008) “야스에 료스케 등 일본의 혁신게 인사들은 국가 보상을 요구하면서 아시아 여성기금을 부정적으로 봤다. 그러나 운동을 해봤자 정부가 새로운 조치를 취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이 사람들도 내심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일본에 있으면 (그런 사정을) 알 수 있었다.” “의미있는 절대야당주의는 이미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그러나 나는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내심 생각하고 있었던 것”, “일본에 있으면 알 수 있는 일”이라고 나중에야 한국에서 한국인들에게 이야기하는 게 과연 옳은 자세일까요. 이미 죽은 사람들은 반론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야스에 료스케씨는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정부 등이) 새로운 조치를 취하도록 만들기 위해 마지막까지 지혜와 노력을 아끼지 않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야당적인 입장에서 국가나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절대야당주의’이고, 무의미하다고 얘기하시는 건가요? 사회당 해체 과정에서 거듭 읊어댄 말이 ‘현실주의’이고, ‘만년 야당으로부터의 탈각’이었습니다. 그 세력이 정권 안으로 들어가 극우파·보수파와 타협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주장인가요? 그 결과가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원칙의 포기와 자기붕괴입니다. 와다 선생님도 저의 이런 발상을 공유하시는지요?

그리고 선생님은 “아시아 여성기금에 부정적인 사람들에게 정부가 국가 보상을 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지 물으면, ‘그럴 경우에는 피해자들에게 사죄하고, 모금을 해서 얼마간의 돈을 주는 수밖에 없다’고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아시아 여성기금과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

물론 ‘차이’가 분명히 있습니다. 국가에 대항해서 민간인들의 자발적인 지원금을 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국가와 함께 국가 책임회피 수단으로 지원금을 줄 것인가,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리고 희대의 로만티스트임과 동시에 냉철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던 야스에씨는 바로 이 ‘원칙’을 지적하지 않았던가요?

와다 선생님은 이런 발언도 하셨습니다. “일본 내 사죄파의 분열, 한일간 대립이 일본 우파가 대두할 여지를 주었다. 화해를 위해서는 각자의 내셔널리즘을 존중하고, 양국간의 연대를 통해 국제주의적인 것을 추구해 갈 필요가 있다. 상대가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싶어한다는 점을 서로 존중해야 한다. 그것은 일본인이 한국에 반성과 사죄를 표명하는 경우에도 필요하다.”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싶어한다는 점을 서로 존중”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의 어떤 ‘자부심’을 가리키는 것인가요? 자국의 역사적 책임을 분명히 한 뒤 새롭게 거듭나려는(갱생하려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자부심’은 당연히 존경받아야 하고 연대의 대상이 되겠지요. 하지만 자국의 역사적 범죄를 은폐 내지 미화하려는 역사수정주의적인 ‘자부심’은 단호히 거절당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와다 선생님은 ‘자부심’이라는 애매한 말로 무엇을 가리키려 한 것인지요?

“사죄파의 분열이 일본 우익이 대두할 여지를 주었다”고 한다면, 그 분열의 원인과 책임에 대해서도 더 깊이 고찰해볼 필요가 있을 겁니다. 나 자신은 앞서 얘기했듯이 초기설정을 잘못한 채 기금 구상을 강행하려 한 쪽에 더 무거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쪽의 지식인이나 지원단체와의 연대를 최대한 존중하면서 함께 국가와 대치했다면 국면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적어도 지금과 같은 소모적인 대립이 아니라 연대의 기풍이 자라났을 겁니다.

이제까지 얘기한 대로 아시아 여성기금이 성공하지 못한 원인은 그 초기설정의 오류 때문이며, 그것을 조기에 수정하지 않고 사업 수행을 고집한 것이 연대의 조건을 크게 훼손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와다 선생님의 ‘현실주의’는 진정한 목적에 비춰볼 때 전혀 ‘현실적’이지 못했습니다.

  

당사자를 위해?

기금의 ‘보상금’ 지급 사업을 정당화할 때 자주 동원한 레토릭이 “피해 당사자가 고령화하고 있어,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적으나마 보상금을 받게 해서 마음의 평안을 주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한 개인의 순수한 선의에서 나온 말이라면 이의를 달 이유가 없겠지만, 이 경우에는 와다 선생님은 ‘한 개인’이라 할 수 없고 일본정부가 추진하는 기금사업의 실행주체입니다. 어느 때는 민간, 또 어느 때는 국가사업, 또 어느 때는 개인의 선의, 또 다른 때는 국가의지, 이런 식의 애매한 이면성(二面性)이 아시아 여성기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국가를 비판하는 사람은 와다 선생님과 같은 사심없이 선의를 지닌 사람을 비난하자는 것인가, 라는 비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 비판을 각오하고 애기한다면, 이 이면성은 상호보완적인 구조를 갖고 있어서, 국가 책임회피 장치인 아시아 여성기금에 ‘도덕성’이라는 분칠을 해주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와다 선생님 자신에게 그런 의도가 없다면 선생님은 철두철미 국가에게 이용당했다고 해야겠지요.

애당초 “피해 당사자를 위해”라는 레토릭이 지닌 절대성을 다시한번 허심탄회하게 검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만일 당사자 그 누구도 이름을 밝히고 나서지 않았다면, 또는 당사자 전원이 ‘보상금’을 받았다면, 즉 가시적인 피해자가 없었다면 이 사업의 의의는 어떻게 될까요? 이 사업은 ‘피해 당사자’의 존재 때문에 추진되는 것인가요? 내 생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업은 ‘가해 당사자’의 ‘도덕적 갱생’을 위한 것이 아닌지요? 위안부 제도라는 전대미분의 악행이 저질러졌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피해 당사자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또는 “용서한다”고 했다 하더라도, 자율적인 윤리관에 따라 해야만 하는 행동이 아닌가요?

한국의 피해자와 지원단체가 처음부터 제시해 온 요구는 진상규명, 진실한 사죄, 개인 배상, 책임자 처벌, 올바른 역사교육, 추모비 건립 등 6개 항목입니다.

와다 선생님은 ‘사죄’에 대해서는 총리의 편지를 통해 이미 했다, ‘보상금’은 배상은 아니지만 그것과 같은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그렇게 간주해야 한다), 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피해자들에게 건네진 돈은 금액보다는 명분이 문제입니다. 오해의 여지 없는 명확한 보상금이 아닌 이상 피해자가 진정으로 위로받을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그밖의 4개 항목은 전혀 실행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 25년간의 반동기를 거쳐 점점 실현되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 6개 항목은 각각 독립돼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밀접히 연관돼 있다는 것입니다. 진상규명이나 진실한 사죄 없이는 처벌도 역사교육도 위령비도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 6개 항목을 실현하는 것은, 다시 한 번 얘기하자면, 피해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가해자를 위해서 필요합니다. 피해자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은 경우에도 그것은 가해자가 자율적으로 수행해야만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피해자는 오히려 큰 희생을 무릅쓰고 그것을 지원해 주는 존재로 봐야 합니다.

아시아 여성기금 사업은 네덜란드와 필리핀에서는 성공했다고 와다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우에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피해자 중에서 가장 용감하게 이름을 밝히고 나서서, 끊임없이 일본 국가가 저지른 일을 비판한 얀 루프 오헤른Jan Ruff O‘Herne은 기금 쪽에 신청하는 것을 거절했습니다.”(<해결>) 이 한 사람의 여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금이 ‘성공’했다고는 할 수 없으며, 적어도 ‘성공’을 자찬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녀야말로 일본 국가가 가장 진지하게 용서를 구해야 할 대상이고, 그녀가 용서를 해야만 용서를 받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필리핀의 경우도 ‘보상금’ 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있는 한편으로, 마리아 헨슨씨를 비롯해서 최종적으로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헨슨씨는 ‘보상금’을 받은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쟁 중에 일본군의 집단 강간을 당했고, 1990년대에 마침내 소송을 제기했으나 기각당해 국가 배상을 받지도 못한 채 사망한 것입니다. 철두철미 일본 국가에게 유린당한 그 분이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보상금’을 받은 것을 두고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설령 가난과 고령 때문에 ‘보상금’을 받은 사람이 속출한다고 하더라도, 설사 한국을 비롯한 모든 지역의 피해자들이 ‘보상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국가가 명확하고 오해의 여지가 없는 사죄와 보상을 하지 않는 한 일본인들은 스스로를 위로해서는 안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아시아 여성기금의 활동은 피해자 구제를 위해서가 아니었고, 일본 국가의 책임을 분명히 하고 새로운 연대의 지평을 열기 위해서도 아니었으며, 일본인이 자신들의 ‘양심’을 위로하기 위해서 한 것은 아니었던가. 그것은 겸허라는 옷을 입은 자기중심주의는 아니었던가. 그런 심성을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일본인들이 직면해 있는 과제가 아닌가. 그런 심성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이미 돈을 주었다거니 피해자의 목적은 결국 돈이라거니 하는 따위의 일본사회에 편재하는 최악의 차별의식과 싸우는 건 불가능합니다.

박유하 저서가 일본서 인기 끄는 건
일본 리버럴파 요구와 일치하기 때문
우파 노골적인 국가주의 반대하고
자신을 이성적 민주주의자로 자임
국민적 특권 위협받는 데엔 불안

여성기금 실패 원인 고찰하시고
위안부 합의 철회를 위해 싸우는
한일 시민들 편에 서겠다 해주세요
박유하 교수 저작과 언동에 대해
견해를 명시해주시기 바랍니다

박유하 현상

박유하 교수가 전에 쓴 <화해를 위하여>(일본어판, 2006)에 대해 나는 이미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이라는 글에서 비판했습니다.(‘화해라는 이름의 폭력’, <언어의 감옥에서> 돌베개, 2011/ <식민지주의의 폭록>고분켄 수록) 따라서 여기서 자세히 그것을 되풀이하진 않겠습니다. 다만 나를 놀라게 만들고 실망시킨 것은 이 책의 ‘일본어판 후기’에, 이 책 간행에 진력해 준 사람으로 와다 선생님의 이름이 나와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외에 우에노 치즈코上野千鶴子, 나리타 류이치成田龍一, 다카사키 소지라는 이름이 열거돼 있습니다. 선생님, 이게 정말입니까?

이 책의 내용은 문제 투성이입니다만, 여기에서는 두 가지만 들어보겠습니다.

“전후 일본의 행보를 고려한다면, 고이즈미 총리가 과거 식민지화와 전쟁에 대해 ‘참회’하고 ‘사죄’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 자체는 신뢰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 ‘그런 전쟁을 두 번 다시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언명하고 있으므로, 전쟁을 ‘미화’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와다 선생님도 박 교수의 이런 인식을 공유하고 계십니까?

하시모토 류타로 일본 총리의 방한을 앞둔 1996년 6월21일 오전 서울 탑골공원에서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회원 30여명이 한일협정의 폐기와 군대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1905년의 조약(‘을사조약’)이 ‘불법’이라는 주장(이태진 등)에는 자국이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책임’의식이 결여돼 있듯이, 한일협정의 불성실을 이유로 또다시 협정 체결이나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일방적이며, 스스로에 대해 무책임한 일이 되겠지요. 일본의 지식인이 스스로에 대해 물어 온 것만큼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을 일찍이 한국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

이런 인식에도 동의하십니까?

내가 믿고 있는 바로는, 이런 얘기는 와다 선생님의 견해와는 합치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선생님은 일찍이 한일조약 교섭 때 한국인들의 반대운동에 공감했던 분이니까요. 당시 선생님이 공감한 한국의 지식인들은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까? 자신의 학문적 견해에 반하는 책의 간행에 진력한다는 것은 학자로서의 양심에 위배되지 않는가요? 그렇지 않으면 양심에 반하더라도 추천하고 싶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가요?

“일본의 지식인들이 스스로에 대해 물어 온만큼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을 일찍이 한국은 가져본 적이 없었다.”(이 문장은 이 책 일본어판에만 있다)

혐한론 그 자체라고나 해야 할 이 놀라운 기술내용을 마주했을 때 선생님은 그것을 부정하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요? 아니면 (상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만) “그래, 그대로야”라며 만족하셨나요?

이런 기술내용은 사실 자체가 잘 못돼 있습니다. 1970년대부터 한일 연대운동을 해왔고, 한국 지식인들과도 긴밀히 교류해 오신 와다 선생님이라면 그런 것쯤은 잘 알고 계시리라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아시아 여성기금 사업을 하면서 한국의 지식인을 상대로 어려운 대화를 계속해 온 선생님이 한편으로 이런 인식에 동의하고 있었다면 그것은 대화의 거절, 상대에 대한 우롱을 의미하는 게 아닌가요?

무엇보다도 내 마음 속에 있는 와다 선생님은, 이런 일본인 귀에 듣기 좋은 기술은 한눈에 알아보고 단호하게 거절할 분이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 ‘초심’을 이미 내버리신 겁니까?

박 교수의 새 책 <제국의 위안부>가 일본과 한국에서 소동을 불러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도 나는 여기서 자세히 논할 생각이 없습니다. 많은 논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이 책도 논증이 부정확하고 자의적이며, 논리 진행에 일관성이 없어서 비판해봤자 생산적인 논의가 되리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예만 들어보겠습니다. 위안부와 일본 병사가 “동지적 관계”에 있었다고 박 교수는 주장하고 있습니다만, “동지적”이라는 말을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동지’라는 말은 자발적으로 뜻을 함께하는 이들의 관계를 가리킵니다. 식민지배 자체가 조선민족의 “자발적 의사”에 반하는 지배였습니다. 침략전쟁에의 동원도 그렇습니다. 그 지배자 쪽의 남성인 일본군 병사와 피지배자 쪽 가운데서도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하고 가부장제의 차별을 받은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가장 하층에 속한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뜻을 함께 하는 대등한 관계에 있었다고 하는 것은 어지간히 말을 할 줄 모르든가, 식민지배라는 현실에 대한 근본적 몰이해 탓이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굳이 쓴다면, 당사자들 중에는 ‘동지적 관계’라고 생각한 경우도 있었다는 식으로 써야 했겠지만, 그런 경우에도 논증을 토대로 써야 합니다. 설사 그런 예외적인 경우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전체적인 차별구조를 부정하는 논거는 될 수 없습니다. 철두철미 자발성을 짓밟히는 경험을 한 전 위안부 할머니들이 이런 기술내용에 분노하고 자신들의 인격권을 침해당했다고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위안부 제도에 말단직으로 가담한 ‘업자’에게는 물론 응분의 가해성과 책임이 있고, 그 진상구명과 책임추급을 해야 한다는 것도 자명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논자들이 이미 지적해 온 것이며, 박 교수가 이번에 처음으로 지적한 것이 아닙니다.

박유하 교수는 먼저 쓴 책에서도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친화감을 감추려 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번에는 그것을 더욱 명확히 했습니다. 물론 군사정권 시절에도 그랬듯이, 식민지 시절에도 그 나름으로 “좋은 일”을 본 특권층은 존재했고, 그런 사람들의 관점으로 보면 그 시절도 그다지 나쁘진 않았을 테지요. 하지만 그런 사람들이, ‘위안부’ 피해자든 강제연행·강제노동 피해자든 정치탄압 피해자든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고통과 굴욕을 경험한 피해자들을 대변할 수는 없습니다.

<제국의 위안부>에는 (종종 서로 모순되는) 여러 가지 일들이 씌어져 있습니다만, 집요하게 되풀이되는 핵심적 주장은 위안부 연행에 책임이 있는 주체는 ‘업자’이지 ‘군’이 아니며, ‘군’의 법적인 책임은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일본과 세계의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이미 논파된 지 오래된 주장이므로, 내가 여기서 옥상 옥의 군더더기를 만드는 일은 그만두기로 하지요.

이 주장은 실제로 오랜 세월에 걸쳐 거듭돼 온 일본정부의 주장과 보기좋게 일치합니다. 위안부 문제가 크게 사회화된 계기는 1990년 국회에서 일본정부의 한 위원이 위안부는 “민간업자들이 데려갔다”고 답변해 피해자들의 격분을 산 사건입니다. 그 이후 많은 연구들이 일본정부의 이런 견해를 논파했습니다. 일본정부는 ‘강제연행’이라는 용어의 개념을 직접적인 연행으로 좁혀 해석하고 그것을 입증하는 문서자료가 없다는 부정론의 진지에 틀어박혀서 꼭같은 주장을 되풀이해 왔습니다. 앞서 얘기했듯이 아베 총리가 “인신매매 희생자”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업자’에게 책임을 전가해서 국가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저의를 나타낸 것이었습니다.

통탄스러운 것은, 이런 박 교수의 저서가 일본에서는 몇 개의 상까지 받고 인기를 얻고 있는 현상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나는 일찍이 ‘화해라는 이름의 폭력’에서 내 나름의 추론을 해봤습니다.

“박유하의 언설이 일본 리버럴파의 숨겨진 욕구와 정확하게 합치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우파의 노골적인 국가주의에는 반대하면서, 자신들을 비합리적이고 광신적인 우파와는 구별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로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근대사의 전 과정을 통해서 홋카이도, 오키나와, 대만, 조선, 그리고 만주국으로 식민지배를 확대함으로써 획득한 일본국민의 국민적 특권이 위협받는 데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중략) 우파와 일선을 긋는 일본 리버럴파 다수는 이성적인 민주주의자를 자임하는 명예감정과 옛 종주국 국민으로서의 국민적 특권 모두를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박 교수의 불가사의하기까지 한 정열의 원천은 정대협 등 한국 민주세력과 그들과 연대하려는 일본 시민에 대한 적개심에 있다는 것이 이번 책에서는 명백히 표명돼 있습니다. 2012년 정대협 심포지움 자료집에 북한으로부터 받은 ‘축사’가 실려 있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박 교수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냉전 붕괴, 그리고 1990년대 후반부터 한국에서 좌파 정권이 10년간 이어지면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국과 북한의 교류는 깊어졌다. 그것은 조선인 위안부 문제가 처음에는 ‘식민 지배’에 의한 조선민족 문제로 인식된 필연적 결과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뒤 운동은 세계와의 연대 과정에서 문제를 ‘보편적인 여성 인권문제’로 다루면서, 식민지배 문제로서의 인식을 강조하지 않게 됐다.” “한국의 정대협이나 일본의 일부 인사들이 북한과 연대해서 일본의 ‘군국주의’만 비판해 온 것은 운동이 ‘냉전적 사고’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이 책 일본어판에서 인용)

먼저 위안부 문제는 식민지배하에서 일어난 전쟁범죄이기 때문에 ‘식민지배’에서 기인하는 민족문제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보편적인 여성인권문제’는 서로 배제하는 대립적인 범주가 아닙니다. 위안부 문제는 이 두 가지 범주가 겹쳐진 영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민족 해방’과 ‘여성 해방’이라는 이중의 과제입니다. ‘여성인권 문제’와 ‘민족 문제’라는 두 가지 범주는 그 한쪽을 부정하기 위해 또 한쪽을 이용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많은 논자들이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그것을 지적해 왔습니다.(졸고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둘러싸고’, <언어의 감옥에서>)

“정대협이나 일본의 일부 인사들”에게 그런 인식이 없다고 박 교수가 말하는 것은 그런 과거 20년간의 논의를 통해 축적된 것을 무시한 근거없는 주장입니다.

‘식민지배’라는 남북 공통의 민족적 경험, 그리고 ‘보편적인 여성인권 문제’라는 공통항, 이들을 기반으로 해서 위안부 문제라는 영역에서 남북으로 분단돼 있던 이들이 만나는 국면이 만들어졌습니다. 1990년대 초 일본과 한국의 운동단체들이 협력한 결과, 북의 위안부 피해자들이 초청을 받아 일본을 방문하고, 도쿄에서 남쪽 피해자들과 얼싸안던 장면을 감격스럽게 상기합니다. 냉전시대의 얼어붙은 벽에 자그마한 구멍이 뚫려 빛이 비쳐든 순간이었습니다. 그것이 나중의 2000년 국제여성전범법정으로 발전했습니다. 피해자와 운동단체들이 이룩한 멋진 성과입니다. 한국의 ‘좌파 정권’ 10년간 남북 교류가 진전되고 화해적 분위기가 생겨난 것은 바로 탈냉전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을 ‘북한’과 엮어서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냉전적 사고’에 갇혀버린 이데올로기적 공격이라고 해야겠지요.

박 교수의 저작 그 자체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그것이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현상입니다.

이 현상은 3가지 레벨의 반동이 서로 겹쳐진 곳에서 일어났다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즉 한국에서 보자면, 민주화 투쟁의 달성에 따른 김대중·노무현 정권 시절에 대한 반동, 특히 그 과거사 청산, 친일파 청산 움직임에 대한 보수파와 식민지 근대화론 쪽에서의 반동입니다. 앞서 얘기한 박 교수의 언설은 이 반동의 전형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일본쪽을 보자면, 1990년대 이후 오래 이어진 우경화. 이것은 전후 민주주의(아베 총리가 얘기하는 ‘전후 레짐’)에 대한 반동이며, 여기에 혐한론·반중론(嫌韓論·反中論)의 만연이라는 배외주의 풍조가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동요하는 사람들, 국가 책임을 철저히 추궁하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동시에 자기를 도덕적인 우위에 두고 싶다는 모순된 바람을 지닌 ‘국민주의’적인 사람들에게 박 교수의 언설이 환영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적인 규모에서 보자면, 반식민주의의 고양에 대한 반동입니다. 2001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유엔이 추죄한 ‘인종주의, 인종차별, 배외주의, 그리고 그와 관련된 불관용에 반대하는 국제회의’가 열렸습니다. 이 회의는 구미제국이 저질러 온 노예무역, 노예제, 식민지배에 ‘인도(人道)에 반하는 죄’라는 개념을 적용할 가능성을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차별) 체제로부터의 해방을 쟁취한 남아공에서 이 회의가 열린 것 자체가 희망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의는 ‘법적 책임’을 부정하는 선진제국(옛 식민지 종주국)의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난항을 겪게 되고 미국과 이스라엘 대표는 철수했습니다.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에 대한 보상 요구가 카리브해 국가들과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제기되자 옛 식민지 종주국 쪽은 이에 격렬히 반발하면서 겨우 ‘도의적 책임’은 인정했으나 ‘법적 책임’은 단호히 부인했습니다. 그 결과 더반회의 선언에는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이 ‘인도에 반하는 죄’라는 사실은 명기됐지만 이에 대한 ‘보상의 의무’는 선언문에 담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전 세계적인 반식민주의의 싸움은 1990년대에 크게 진전을 이루었으나 옛 식민지 종주국 쪽의 반동에 의해 정체되고 있습니다.

이런 3가지 레벨에 걸친 반동의 집약적인 표현으로서 박 교수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박 교수의 저작은 한 사람의 별난 인물에 의한 비논리적인 주장이며, 단적으로 얘기하면 국가 책임 부정론의 한 형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웃어 넘기기에는 너무나도 심각한 상처를 피해자들과 운동단체에 주었고, 반동의 물결을 탄 일본의 역사수정주의자와 한국의 보수파를 응원해주는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박 교수를 칭찬하는 일본과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나는 묻고 싶습니다. 이 부정론을 당신은 지지합니까? 라고. 이 엄혹한 반동의 시대에 지식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제대로 각성해서 누구와 연대하고 누구와 맞서싸워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엄중하게 물어보는 일일 것입니다.

  

사악한 길

와다 선생님, 이상으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게, 생각하는 바를 얘기했습니다. 내 마음 속에는 저 암흑시대에 우리 조선민중 편에 서서 온몸으로 힘든 연대 가능성을 보여주신 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살아 있습니다. 내 육친까지 포함해서 고난을 당한 이들이 보기에, 선생님은 은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 만큼 이런 비판적인 글을 쓰면 “은혜를 모른다”는 생각들을 하지 않을까 하고 망설였습니다만, 그런 주저야말로 실례가 될 것이라고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역사학자로서의 선생님은 진리에만 충실한 분일 것입니다. 시민운동가로서의 선생님은 무엇보다도 연대의 의미를 자각하고 계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연대의 정신에 비춰보건대, 내가 쓴 이 편지도 성실하게 받아주실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나는 선생님의 논문 ‘비폭력 혁명과 억압민족’(<한국민중을 주목하라>)을 통해 눈을 뜬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나는 자각하지 못한 가운데 자민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억압민족의 몰이해와 편견을 내면화하고 있었습니다만, 선생님 덕분에 그 잘못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3·1독립선언은 “용맹, 과감으로써 지난 잘못을 확정(廓正)하고, 진정한 이해와 동정(同情)을 기본으로 하는 우호적 신국면을 타개하는 것이 피아(彼我)간에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오는 첩경임을 명지(明知)하라”면서 조선의 독립을 꾀하는 것은 조선인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일본에 대해서는 사악한 길에서 나와 동양의 지지자로서의 중책을 다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썼습니다. 이것을 내게 가르쳐 준 것은 다름아닌 와다 선생님이었습니다.

선생님, 조선민족의 힘든 싸움(苦鬪)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오래 계속되리라는 것을 각오해야겠지요. 그런데 일본은 이미 ‘사악한 길’에서 벗어난 걸까요?

선생님은 “가까스로 열린 틈새에 몸을 밀어넣겠다는 생각”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진력하셨고, 그 개인적인 성실성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유감스런 것은 그것이 헛돌면서 결과적으로 ‘연대’의 기운을 손상시킨 것입니다. 선생님과 같은 분에게는 피해자 구제를 위해 개인적 열의를 쏟아붓는 한편으로, 국가에 대해서는 가장 원칙적인 비판의 기치를 계속 내걸어 주시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그것은 ‘만년 야당’적인 무책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피아간에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오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저 험난했던 1970년대, 암흑 속에 ‘연대’의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선생님 자신이 말씀하신 “일본인이 이 침략과 수탈의 역사를 부정하고 조선반도 사람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창조해 갈” 가능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긴자 거리의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져 가는 선생님의 뒷모습에서 나는 그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지금 그 가능성이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만, 부디 저 ‘초심’으로 돌아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구체적인 소망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선생님은 ‘아시아 여성기금’이 실패로 끝난 것을 인정하십시오. 그리하여 실패의 원인을 단지 운동론 차원에서 논할 것이 아니라, 실패의 경험을 사상의 차원에서 깊이 파내려가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일찍이 다케우치 요시미의 <현대 중국론>에서 촉발된 선생님이 다케우치의 사상을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거기에 잠재돼 있던 한계성도 넘어서서 일본인과 아시아 민중의 연대로 나아가는 사상적 작업을 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2. 지난해 12월 28일의 ‘합의’는 선생님이 사전에 제시하신 “피해자가 받아들이고, 한국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기준에 역행하는 것임이 분명해졌습니다. 그런 만큼 와다 선생님은 이 ‘합의’가 즉각 철회돼야 한다는 취지의 의사를 표명하시고, 합의 철회를 위해 싸우고 있는 한일 시민들 편에 서겠다는 점을 밝혀주십시오.

3. 박유하 교수가 자신의 책에서 되풀이하고 있는 견해는 와다 선생님이 보기에도 동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명확하게 비판하지 않는 것은 학문적 성실에 반하는 것일 겁니다. 또 만일 선생님이 박 교수의 견해에 동의하신다면 지금까지의 자신의 견해와 어긋나는 부분에 대해 설명을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박 교수의 저작과 언동에 대해 선생님 자신의 견해를 명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끝으로, 선생님의 건강을 빕니다.

2016년 3월 1일 ‘3·1독립운동’ 기념일에

 

이 글 원문은 일본에서 곧 간행될 예정인 <‘위안부’문제의 현재>(마에다 아키라 엮음, 31서방)에 수록될 예정이다.

번역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