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1

어머니사, 가족사의 미스테리 제 3, 이민 전사

[어머니사][가족사][한국현대사] 어머니사, 가족사의 미스테리 제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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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즘 어머니 관계의 오래된 가족 사진을 처음으로 유심히 드려다 보면서 발견하는 것이 많다. 그 발견이 새로운 질문을 낳는다. 나에게는 미스테리이다. 이번에는 제 3의 미스테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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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편은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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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를 하자면 첫째로는 

1] 22년 생 어머니의 50년대 후반 - 60년대 초반, 그러니 나이 30대의 신여성식 직업 활동에 대해서 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다. 

- 어머니가 일제 시대에 드믄 일본 유학을 한 여성이라는 것은 지난 번에 이야기했다. 어머니는 대학을 졸업하고 나고 얼마 되지 않은 1944년에 결혼했는데 첫번 째의 직업 생활은 출신교 였던 동덕여고의 교사로서 였다. 교사로서의 어머니의 삶에는 우리 식구가 모두 잘 알고 있는 하나의 기가 맊힐 만 한 드라마가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에 북한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어머니가 교사로서 학교에 출근하러 나간 것이 북한군이 물러간 후에는 공산당에 협력했다는 사상범죄로 취급되어 인민군이 물러났을 때는 감옥에 가게되고, 나중에는 사형언도까지 받았다고, 우연 곡절로 풀려나게 되는 여기서는 메인 스토리가 아니라서 다 하지 못할 드라마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 그런데 지금 다시 생각해보니, 그것도 큰 이야기 꺼리이지만, 직업 여성으로서는 어떻게 아이를 셋을 가지고 교사직을 했는지가 더 궁금하다. 1945년과 1946년에 누나들이 태어나고, 1948년에는 내가 태어났으니 지금에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보통 엄마 같으면 직업을 포기하는 것이 흔한 상식이었을 것 같다. 이 점이 궁금해서 어머니의 자서전 <나는 이렇게 평화가 되었다>를 다시 드려다 보니, 아이가 셋이 되자 (1948년에는) 일단 교사직을 그만 두었다가, 남편이 미국으로 파견되는 1949년에는 다시 복직을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친척 도우미가 있었서 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직을 계속하려고 했다는 점을 남편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아버지도 동의했겠지만, 어머니의 의지와 주장이 강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자서전을 다시 읽어보니 남편이 아내가 직업을 가지는 것을 장려했다고 나온다. 내가 잘 모르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2] 직업 여성으로서의 두번째의 스토리는 기업 경영자로서의 어머니 스토리이다. 이 스토리가 여기서는 거의 메인 스토리가 된다.

- 3년 간의 전쟁이 끝나고 우리 식구는 부산의 피난 생활에서 서울로 돌아가게 된다.  1949년에 한국 정부에 의해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한국전쟁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동경에 머믈게 된 아버지는 1954년에서야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아이들은 5년 만에 아버지를 보게된다 (!!!). 그건 다른 이야기이니 여기서 계속하지 않고 어머니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기계과 엔지니어인 남편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작은 공장을 차렸는데, 어머니는 경험이 없이 공장장이 된다. 제품은 재생 타이어와 산업용 펌프와 모터 제작이다. 아버지는 명목상 사장이나, 새로 시작한 한양공대의 교수로도 일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기술적인 고문이지만 실제의 회사 경영은 어머니가 하는 식이었다. 사람과 돈을 다루는 일에는 언제나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탈렌트가 있었다. 

사진 1: 공장장으로의 어머니 모습

- 1950년대에는 어머니 만이 아니라 많은 작은 사업가들이 경영을 체험적으로 배워가려고 했겠지만, 기업 경영자가 되기위한 훈련이란 것을 한국에서 처음 시작한 곳은 1957년에 생긴 한국생산성본부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1961년에 제 5회 째로 6개월간의 경영자훈련을 받게되었다. 강사들은 대학교수들이 많았으나, 기업의 실무자들도 있었다. 미국인으로서 위신톤 대학 교환교수도 3명 있었다. 교육의 내용은 제 5회에 훈련을 받은 약 70명은 대부분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큰 기업의 경우에는 과장급 사람들이고, 작은 기업의 경우에는 공장장, 사장들이다.  그 중에 여자는 둘 뿐이었는데 어머니가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아직도 생산성본부의 경영자훈련 제 5회의 수료기념 알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기서 뽑은 사진들을 한국현대사의 기록으로 여러분과 나눈다. 


- 훗날에는 경영학과목을 하나 공부했다고 공부한 사람에게 큰 영향은 없게 되지만, 1961년의 생산성본부의 경영자훈련의 임팩트는 당시의 어머니의 삶에는 컫던 것 같다.  

3] 1950년대 후반에 시작한 공장 지배인으로서의 어머니 생활은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던 것 같다. 공장의 규모는 종업원 10인 정도에서 시작하여 1960년대 초에는 20인 정도 규모까지 간 것 같은데, 1957년에는 공장에서 멀지 않은 돈암동 로타리에서 얼마 안되는 곳에 복합 목적의 3층 건물을 새워, 1,2 층을 빌려주고, 우리 가족은 그 3층에 살게 된다. 우리 가족의 수입 수준은 어머니의 공장 운영과 아버지 교수직 봉급의 다블 인컴으로 중상층이었다고 기억하고 말해왔다. 때로는 경제적인 불황도, 정치적인 불안도 격지만 그 정도는 누구나 같이 격는 것이고, 장래의 대한 전망은 특별히 다른 기업이나, 다른 가족보다 나빴다고 말할 수는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다. 경제적으로는 그리 나쁘지 않았던 우리 가족은 1964년에 브라질로 이민을 하게 된다. 언제, 왜 이민을 하는 결정을 하게된 것일까? 실제의 이민은 1964년에 했지만, 이민 신청과 준비는 2년 전인 1962년 부터 했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생산성본부의 경영자훈련 수료기념 사진알범을 보고, 그 년도가 1961년이라는 점이 처음으로 눈에 띄였다. 1961년에는 경영자로서의 훈련을 받고, 그 다음 해인 1962년에는 이민을 생각하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민가는 구상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닌가? 그 이유는 뭘까? 하는 것이 새로운 미스테리였다. 다음에 더 이야기 하겠지만 브라질에서의 이민 생활은 경제적으로는 하층의 수준의 생활이 된다. 이제까지의 어머니의 패션너블한 복장은 사라진다. 어머니의 직장생활이라는 것은 블루칼라의 노동이 된다. 그러니 만큼 미스테리는 더 크다. 일반적으로 우리 자식들은 부모로 부터 이민은 자식들을 위해서라는 상당히 일반론적이 이유를 들어왔고, 그대로 수긍하는 편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당시에 상상도 안되는 브라질이라는 나라로 이민 간다는 것을 모험같이 받아들여, 비교적 긍정적으로 흥분해있었던 기억이 있다. 결국 부모는 자식들에게 <더 깊은 이유>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 그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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