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리얼 유토피아
에릭 올린 라이트 (지은이),
권화현 (옮긴이)들녘2014-06-10
원제 : Envisioning Real Utopias
종이책 페이지수 516쪽
책소개
위험한 자본주의를 버려라. 이 책은 “리얼 유토피아” 개념을 구현하는 대안들을 체계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일반 틀을 정교화하고, 현대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냉소적으로 비웃는 다양한 사고와 현실을 반박하고자 했던 진지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세계적인 석학 에릭 올린 라이트 박사는 해방적 사회변화를 위한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그는 작금의 문제가 우리에게 “좋은 사회에 관한 생각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자본주의 속에서의 삶을 개선시킬 건설적 정책 개혁에 관한 생각이 결여”되었기에 발생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변혁에 관한 전반적인 전망”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해서 그것을 선뜻 제시할 수 없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생각을 탐구하면서 자본주의 체제 아래 존재해온 권력·특권·불평등 구조가 낳은 문제점을 파헤치고, 그 대안을 심도 있게 논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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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한국의 독자들에게
들어가는 글
1. 서론: 왜 현실 유토피아인가
2. 해방적 사회과학의 과제
진단과 비판
실행 가능한 대안들
변혁
PART I DIAGNOSIS AND CRITIQUE 진단과 비판
3. 자본주의의 무엇이 그렇게 나쁜가
자본주의의 정의: 간결한 설명
자본주의에 대한 열한 가지 비판
PART II ALTERNATIVES 대 안
4. 자본주의의 대안을 생각함
자본주의의 대안에 관한 마르크스의 이론: 역사적 궤도의 이론
자본주의의 미래에 관한 마르크스 이론의 부적절함
5. 사회주의 나침반
사회주의의 “사회적”을 진지하게 취급함
개념적 어휘의 명료화
사회주의 나침반: 사회권력 강화의 경로
결론: 세 가지 회의적인 주석
6. 리얼 유토피아 I: 사회권력의 강화와 국가
민주주의의 세 가지 제도적 형태
직접민주주의: 새로운 형태의 권력 강화된 참여적 통치
대의민주주의: 두 가지 제안의 스케치
결사체민주주의
민주주의와 사회권력의 심화
7. 리얼 유토피아 II: 사회권력의 강화와 경제
사회적 경제
무조건적 기초소득
사회적 자본주의
협동조합적 시장경제
포괄적 체제 대안의 두 모델
결론: 사회권력 강화의 확장적 의제
PART III TRANSFORMATION 변혁
8. 변혁이론의 요소들
사회적 재생산
한계, 틈, 모순
의도되지 않은 사회 변화의 기초적 동학과 궤도
변혁 전략
9. 단절적 변혁
핵심적인 질문과 기본적인 가정들
단절적 변혁과 이행의 저점
대답
10. 틈새적 변혁
틈새적 ‘전략’이란 무엇인가
틈새적 전략은 어떻게 해방적 사회 변혁에 기여할 수 있는가
단절로 가는 경로를 닦기
자본주의의 엄격한 한계를 침식시키기
틈새적 전략과 국가
11. 공생적 변혁
계급타협
공생적 전략의 논리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공생적 변혁
12. 결론: 유토피아를 현실로 만들기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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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이상과 같은 내용이 내가 말하는 “현실 유토피아”의 예들이다. 이것은 용어상 모순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유토피아는 공상이며,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 실행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고려하지 않은 채 평화와 조화의 인간적 세계를 그리는 도덕적 설계이다. 현실주의자들은 이와 같은 공상을 피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의 제도를 실용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아주 실제적인 제안이다. 우리는 유토피아적 꿈에 탐닉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를 실제 현실에 맞추어야 한다.
“현실 유토피아”라는 개념은 꿈과 실천 사이의 이 긴장을 받아들인다. 이 개념의 기초를 이루는 것, 그리고 실천적으로 가능한 것은 우리의 상상력과 무관하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의 전망에 의해 형성된다는 믿음이다. 자기달성적인 예언은 역사에서 강력한 힘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순진한 낙관주의일지 몰라도, “뜻”이 없이는 많은 “길”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 억압이 없는 사회제도를 창조하는 데 무엇이 필요한가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은 억압을 줄이는 급진적 사회변화에 필요한 정치적 의지를 창조해 나가는 과정의 일부이다. 사람들에게 현 상태에서 탈출하는 여행을 떠나라고 권유하려면 유토피아적 이상에 대한 생명력 있는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비록 실제로 도달하는 목적지가 유토피아적 이상에 못 미칠 수 있다고 해도 말이다. 하지만 모호한 유토피아적 공상은 우리를 미혹시킬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의 여행이 실질적인 목적지가 전혀 없는 여행이 될 수도 있고, 더 나쁘게는 어떤 예상되지 않은 나락에 빠지는 여행이 될 수도 있다. 해방을 위한 인간의 투쟁은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와 마주칠 수도 있지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와 마주칠 수도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현실 유토피아”가 필요한 것이다. 인류의 현실적 잠재력에 기초해 있는 유토피아적 이상이 필요하며, 중간역이 있는 유토피아적 목적지가 필요하며, 우리의 실천적 과제―사회변화의 조건을 다 갖추지 못한 세계를 항해해 나가야 하는 과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유토피아적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_ “왜 리얼 유토피아인가” 중에서
평등한 접근권의 개념부터 확실히 하자. 이것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소득을 얻거나 동일한 물질적 생활수준을 누려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번영에 “필요한 수단”은 사람들마다 다르다. 일정 정도의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이 모든 사람이 양질의 삶을 사는 데 ‘필요한’ 수단에 접근할 때 반드시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원칙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또 급진 평등주의적 견해가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번영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회적?물질적 자원에 평등하게 접근하지 못해서 사람들이 번영하지 못하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제안하는 번영 개념은 특정한 방식의 번영이 더 우월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좋은 삶”에 대한 다양한 문화적 관념 가운데 어떤 범주의 사람들은 번영의 조건들에 원천적으로 평등한 접근권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 반대한다. 어떤 문화가 특정한 소수민족집단, 인종집단, 계급집단에 대해 그들은 자신의 인간적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한 물질적 사회적 수단에 접근할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 문화는 부정의하다. 여성에 대한 최고 형태의 번영이 남편의 욕구에 봉사하는 세심한 아내가 되고, 아이들을 잘 키우는 헌신적인 어머니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문화 역시 이 사회정의관을 위반한다. 여성들은 분명 헌신적인 어머니이자 세심한 아내로서 번영할 수 있다. 하지만 여성들에게 이러한 역할을 강요하고 소녀들이 다른 능력과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을 제한하는 문화는, 번영하는 삶을 살기 위한 물질적 사회적 수단에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원칙을 위반한다. 이러한 문화는 여기서 제안하는 기준에 따르면 부정의를 지지한다.
자유에 대한 이 평등주의적 이해는 개인적 권리와 자율이라는 핵심적인 자유주의적 이상들을 인정한다. 즉 개인들이 외적 강제에 종속되는 정도를 최소화하고자 하는 이상들을 인정한다. 이 이해가 표준적인 자유주의적 정신과 다른 이유는,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데 필요한 힘에 대해 평등하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평등주의적 원칙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이는 타인에 의한 강제로부터 평등하게 보호되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는 필리페 반 파리스가 말하는 “만인을 위한 ‘참된’ 자유”와 상응한다. 참된 자유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중요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그들이 자신의 인생계획에 따라 행동하는 데 필요한 기본 자원들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_ “해방적 사회과학” 중에서 접기
예비적으로 언급해야 할 다른 두 가지 사항이 있다. 첫째, 자본주의 비판자들은 때로 동시대 세계의 모든 심각한 문제와 해악―인종주의, 성 차별, 전쟁, 종교적 근본주의, 동성애 혐오 등등―을 자본주의의 결과물로 다루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다. 이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오늘날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악의 뿌리가 아니다. 다른 인과적 과정들도 인종주의, 종족적 민족주의, 남성 지배, 대량학살, 전쟁, 그리고 기타 중요한 형태의 억압을 부추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에 의해 발생되지 않은 억압의 경우에도, 자본주의는 여전히 그것과 관련되기도 한다. 문제를 극복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예컨대 자본주의는 성 차별의 근원적 원인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양질의 공공 육아 서비스에 충분한 자원을 배분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성 차별을 극복하기 더 어렵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비판에서 결정적인 과제는 자본주의 특유의 메커니즘에 의해 직접적으로 발생되는 해악들을 확인하고, 자본주의가 간접적으로 억압의 축소를 방해하는 방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 자본주의에 대한 이 열한 가지 비판 가운데 다수는 흔히 “사회주의적”이라고 불렸던 20세기의 경제체계, 혹은 내가 제5장에서 “국가주의적”이라 부르게 될 경제체계에도 적용된다. 예컨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하나(명제 6)는 자본주의가 환경에 해를 입힌다는 것이지만, 우리는 소련 국가주의 경제의 권위주의적 중앙계획체제 역시 환경에 대한 부정적 영향에 거의 주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자본주의의 유일한 대안이 국가주의―생산수단이 국가에 의해 소유 통제되고 중앙집권적 관료주의를 통해 조정되는 경제구조―라면, 환경 측면에서의 자본주의 비판은 힘을 약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제5장에서 주장하겠지만 다른 대안이 있다. 이는 곧 국가와 경제 모두에 대한 유의미한 민주적 통제라는 생각에 근거한 사회주의 개념이다. 이 책의 핵심 주장은, 이러한 구조를 가진 경제는 아래의 열한 개 명제들에서 논의되는 해악을 완화할 수 있는 우리의 집단적 능력을 향상시킨다는 것이다._“무엇이 그리 나쁜가?” 중에서 접기
자본주의에서 자본 소유자는 사람들을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의존적인 처지에 묶어 두는 데 적극적인 경제적 이해를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는 이 자본 소유자에게 경제적 권력을 부여한다. 다음이 이에 대한 논증이다.
자본주의는 끊임없는 이윤 추구 욕망에 의해 움직이는 경제체제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개별 자본가들이 엄청난 개인적 탐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물론 이윤 극대화 문화로 인해 자본가들이 자기이익을 점점 더 외골수로 추구하고, 이는 “탐욕”과 아주 닮아 보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오히려 이것은 자본주의적 경쟁의 동학이 낳은 결과이자, 기업들이 이윤의 개선을 끊임없이 시도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쇠퇴를 감수해야 하는 압력의 결과이다.
자본주의 기업들의 이윤 추구는 피고용자의 노동활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자본주의 기업은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그들로 하여금 생산수단을 사용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게 한 다음 이것을 판다. 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는 총비용과 이것들이 팔리는 가격의 차이가 이 기업의 이윤이다.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업은 노동과 관련해 이중의 문제에 직면한다. 한편으로 노동의 고용은 임금 형태를 취하는 비용이며, 자본가들은 이 비용을 (모든 생산비용처럼) 가능한 한 낮추고 싶어 한다. 다른 모든 조건이 같다면, 임금 비용이 낮으면 낮을수록 이윤은 더 높다. 다른 한편,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가능한 한 열심히, 가능한 한 부지런히 일하기를 원한다. 노동자들이 더 많은 노력을 지출하면 할수록, 일정한 수준의 임금에 대해 더 많은 것이 생산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정한 수준의 비용에 대해 더 많이 생산되면 될수록 이윤은 더 높다. 따라서 자본가들의 경제적 이익―그들이 통할統轄하는 이윤―은 노동자들로부터 가능한 한 적은 비용으로 가능한 한 많은 노동을 추출하는 데 달려 있다. 이것이 대체로 “착취”가 뜻하는 바이다.
물론 개별 자본가들이 일방적으로 임금을 책정할 수 없고, 노동의 강도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노동시장의 조건에 제약되고, 또 노동자들의 다양한 저항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 자기에게 유리한 노동시장 조건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어떤 노동시장인가 하면, 노동의 풍부한 공급을 보장하는 동시에 노동 강도 강화 압력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능력은 약화시키는 노동시장이다. 특히 다수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바람에 임금이 낮추어지거나, 실업률이 높아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지 않을지 근심하게 되면, 자본가들에게 이익이 된다. 바꾸어 말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취약성을 증가시키는 데 집착한다._“착취” 중에서 접기
생산과정에서의 기술 변화는 자본주의적 경쟁의 내재적 결과이다. 왜냐하면 기술 변화는 자본가들이 이윤을 유지하기 위해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핵심적인 방식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생산성 향상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정한 수준의 산출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투입이 더 적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주의의 큰 성취들 가운데 하나로, 이러한 경제활동 조직 방식을 옹호하는 모든 사람들이 강조하는 것이다.
자본주의 자체는 낡은 기술을 가지고 있고 일자리 기회가 적은 사람들을 새로운 기술이 필요한 신흥 일자리로 이동시키는 메커니즘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쫓겨난 노동자들에게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는 과제는 아주 힘겨운 과제이다. 이러한 노동자들 다수는 비교적 나이가 많고, 자본주의 기업들은 나이 많은 노동자들의 인간자본에 투자할 인센티브를 가지기 힘들다. 대개 새로운 일자리 기회는 쫓겨난 노동자들의 거주지와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이러한 일자리로 이동하는 데 따른 사회적 혼란의 비용은 상당하다. 그리고 자본주의 기업들은 부적절한 기술을 가진 노동자들에게는 연령에 관계없이 효과적인 훈련을 제공하는 데 주저하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이렇게 새로 훈련된 노동자들은 자유롭게 그들의 인간자본을 다른 기업들로 옮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의 기술 변화가 종종 새로운 기술을 요하는 고생산성 일자리를 창출하고, 또 적어도 이 새로운 일자리의 일부는 파괴된 일자리보다 더 나은 보수를 주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일자리 파괴?창조 과정 속에서 쫓겨난 사람들의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이들 가운데 다수는 어떤 새로운 기회도 활용할 수 없다. 기술 변화는 새로운 기회뿐만 아니라 주변화도 낳으며, ‘이를 상쇄하는 비자본주의적 과정이 부재할 때’ 주변화는 빈곤을 낳는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논리 속에 내재해 있는 현실이다. 그리고 비자본주의적 제도들이 부재할 때 이 같은 주변화는 인간의 고통을 영구화한다._“기술 변화” 중에서 접기
경쟁과 인간의 번영 사이의 관계는 매우 복잡하다. 한편으로, 경쟁―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과정 때문에 사람들은 시간, 정력, 자원을 투자해 자신의 재능을 발전시킨다. 물론 다른 사람들보다 나아지려는 욕망이 재능을 발전시키는 유일한 동인은 아니다. 사람들은 기술의 숙달에서 나오는 성취감과 충만감, 그리고 그 기술을 발전시킨 후 이를 발휘하는 데서 나오는 성취감과 충만감에서도 동기를 얻는다. 그렇다 해도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성공적으로 발전시킬 때 이를 보상해 주는 것은 경쟁이라는 강력한 힘이다. 따라서 일정 정도의 경쟁은 의심의 여지없이 인간의 번영을 자극한다. 다른 한편, 경쟁은 사람들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상대적’ 지위의 관점에서만 평가하는 성취 문화를 강조한다. 성취는 한 사람의 잠재력 실현으로 정의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것,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것으로 정의된다. 가장 치열한 경쟁―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이 말하는 “승자독식” 경쟁―에서는 꼭대기에 단 한 명의 승자만이 있고, 그가 사실상 모든 상을 독차지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은 패한다. 이와 같은 치열한 경쟁은 인간의 번영에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가장 명백한 사실이지만, 승자독식 경쟁에서는 일단 한 사람이 현실적으로 이길 확률이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 낙담하고 아예 포기해 버리기가 아주 쉽다. 더 일반적으로 말해, 치열한 경쟁체제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자”가 될 것이다. 이에 따른 자존심과 자신감의 상실은 번영의 심리적 조건을 와해시킨다. 더욱이 자본주의에서 재능의 발전을 촉진하기 위한 자원의 배분은 일차적으로 경제적 투자로 간주되고, 투자는 예상되는 경제적 수익에 의해 평가된다. 이 때문에, 재능 육성 자원은 가장 재능 있는 사람들에게 심하게 편중될 것이다. 시장에서는 결국, 재능이 덜한 사람들의 재능을 발전시키는 데 많은 자원을 할애하는 것은 나쁜 투자일 것이며, 따라서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재능을 발전시키는 수단에 접근할 기회가 대체로 더 적어진다. 이 역시 인간 번영의 보편화를 가로막는다.
따라서 경쟁 그 자체는 인간 번영의 조건이 보편화되는 데 긍정적인 효과와 동시에 부정적인 효과를 낸다. 긍정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인지, 부정적인 효과가 더 클 것인지는 경쟁의 강도에 좌우된다. 또 번영을 촉진하는 다른 메커니즘들이 경쟁과 균형을 이루는 정도에 의해서도 좌우된다. 경제가 순전히 자본주의적 기초 위에서 조직되면 될수록, 즉 시장 경쟁과 사적 소유가 자원의 배분을 좌우하면 할수록, 이 균형이 성취될 확률은 더 적다._“파괴적 경쟁” 중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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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에릭 올린 라이트 (Erik Olin Wright) (지은이)
사회학자. 마르크스주의자. 미국 캘리포니아 주 버클리에서 태어나 하버드 대학교를 졸업했다. 1976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버클리 캠퍼스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위스콘신 주립대학교 매디슨 캠퍼스에서 22년 동안 사회학을 가르쳤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 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로 인정받았고, 2012년에 미국사회학회 회장을 맡았다. 분석마르크스주의 세미나 그룹과 《뉴레프트 리뷰(New Left Review)》에서 활동하면서 계급 분석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내고, ‘현실적 유토피아 프로젝트(Real Utopia Project)’를 이끌며 대안적 정치경제 체제를 연구했다. 2019년 1월 13일, 열 달 동안 급성 골수성 백혈병에 맞서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낙관주의자이자 현실적인 유토피아주의자였다. 접기
최근작 : <계급론>,<21세기를 살아가는 반자본주의자를 위한 안내서>,<사회주의 ABC> … 총 48종 (모두보기)
권화현 (옮긴이)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위스콘신-매디슨 대학(University of Wisconsin-Madison)에서 사회학을 전공, 박사학위를 받았다. 『군주론』, 『자유론』, 『공산당 선언』 등 다수의 사회학, 역사학, 철학 서적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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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을 주축으로 했던 사회주의가 와해되자 푸른 별 지구는 몇몇 정치경제 독재의 징후를 외면한 채 자유와 자본의 향기에 취했다. 글로벌화와 신자유주의 바람이 개인의 일상까지 잠식했고 사람들은 어느 새 불평등한 노동환경, 열악한 삶의 조건, 불공정한 사회구조 따위를 잊은 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1%의 간증을 따르게 되었다. 그리고 “창의성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 뭔가 될 것이다”는 환상 아래 자본주의 경제구조 아래 “살아남기” 위해 몸을 바쳤다. 그러나 지구별에 사는 사람들은 더 이상 자신을 “선택받은 생명체”라고 느끼지 않는다. 현존하는 위치가 아메리카이든 유럽이든 아시아이든 “열심히 일하면 잘살 수 있어, 자 힘을 내고 더 해봐”라고 말하는 1%의 누군가를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버림받았다”고 느낀다. 좋은 사회, 정직하고 공평한 삶을 향해 달리던 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혀 쓰러졌다. 물론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줄곧 그들만의 성취를 축하하던 ‘다보스포럼’조차 2012년 벽두부터 그동안 누적되어온 소득 분배의 불공평과 불공정한 금융구조 때문에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에 심각한 경고등이 켜졌다고 지적했다. 글로벌화와 신자유주의를 지지했던 전 세계 저명한 기업가와 경제학자들이 이런 경고를 한 까닭은 대체 무엇일까? 세계적인 석학 에릭 올린 라이트 박사는 십 수 년에 걸친 프로젝트의 결과물인 『리얼 유토피아Envisioning Real Utopias』를 통해 이 같은 문제 제기에 답하고자 한다. 이 책은 자신의 지적·정치적 좌표와 관계없이 “현재 사회구조에 절망하거나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 그러면서 “정당하고 인간적인 삶의 가능성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진정한 제도적 변화의 필요성과 국가의 활발하고 적극적인 역할에 관한 깊고 뜨거운 논의를 원하는 모든 이에게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친절하고 정교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
왜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인가?
시대의 끝자락에 이르면 늘 충돌이 생긴다. 희망과 절망, 작용과 반작용, 몰락과 부흥 같은 상반되는 개념들이 서로 입지를 굳히기 위해 아우성을 치게 마련이다. 하지만 유사 이래로 인간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분석과 예견에 의존할 뿐이다.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시도와 도전은 불가능하다.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것은 없다”는 명제를 차치해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좌파든 우파든, 진보이든 보수이든―많은 지식인들이 ‘자본주의’라는 거인의 쓰러짐을 응시하면서 고민에 빠졌다. 사회주의의 몰락보다 더 처참한 결과를 예견하는 자본주의의 끝에 세울 마땅한 대안과 전망, 그리고 새로운 사고방식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에릭 올린 라이트 박사의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는 이 같은 고민에 대한 진지한 응답이다. 그는 작금의 문제가 우리에게 “좋은 사회에 관한 생각이 결여”되어 있다거나 “자본주의 속에서의 삶을 개선시킬 건설적 정책 개혁에 관한 생각이 결여”되었기에 발생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변혁에 관한 전반적인 전망”을 우리가 가지고 있지 못해서 그것을 선뜻 제시할 수 없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한 광범위한 생각을 탐구하면서 자본주의 체제 아래 존재해온 권력·특권·불평등 구조가 낳은 문제점을 파헤치고, 그 대안을 심도 있게 논의한다. 하지만 거대하고 공정한 체제를 설계하자면서 보편적이고 추상적인 정식을 제시하거나, 현행 관행을 살짝 고치면 금방이라도 낙원이 성취될 것 같은 섣부른 기대를 조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의 여러 가지 핵심들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중심축은 “좋은 사회를 향한 열망”, 그리고 “민주주의”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리고 사회제도의 여러 영역들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위험한 자본주의를 버려라
각종 수수료 수입 등 불공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독점한 금융기관의 횡포, 자만과 독선으로 시장을 장악한 대기업의 탐욕, 부와 권력을 세습하는 교육제도, 편 가르기와 편들기에 바쁜 정치권의 행태는 전 세계 젊은이들로 하여금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street)’와 같은 시위를 일으키게 만들었고, 전통을 자랑하는 유럽인들에게 ‘국가부도’라는 굴욕을 안겨주었다. 시선을 국내로 돌려도 절망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크고 작은 정치권의 비리, 특권과 특혜 의혹을 둘러싼 지난한 논쟁, 저축은행 사건 등 금융권에 대한 가중된 분노, 88만원 세대로 일컬어지는 청년실업, 1~2인 빈곤층 가구 확대와 같은 불균형한 사회구조적 문제는 이제 더 이상 방관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위기론”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뾰족한 대안이 없다. 자본주의의 근본 원리를 통째로 바꿀 수도 없다. 다만 현재의 자본주의가 타고난 의미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인간 삶의 번영에 기여하기는커녕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으니 이제 대대적인 정비와 수선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할 따름이다. 오랫동안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저자는 이 같은 내용을 근거로 공정한 인간의 삶과 행복한 삶을 위한 사회적 실행 가능성을 현실적으로 고려한 평화와 조화의 세계를 그린다. “유토피아”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그런데도 저자가 굳이 유토피아라는 단어 앞에 “리얼”을 붙인 것은 그만큼 현실 세계의 심각성을 강조하고 싶었거나 이상과 현실 간의 메울 수 없는 간극을 강조하고 싶었던 때문일 터이다. 이제 우리에게 시급한 일은 수많은 제도―불공정하고 불필요한―들을 실용적으로 개선하기 위한 아주 실제적인 제안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유토피아적 “꿈”에 탐닉하게 만들었던 자본주의의 불완전함을 과감하게 버리고, 스스로 실재하는 “현실”에 맞춘 이상적인 제도들을 말이다. 따라서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순진한 낙관주의일지 몰라도 뜻이 없이는 많은 길이 불가능해진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저자의 말은 우리에게 크나큰 일침이 된다.
“리얼 유토피아 구상”은 간극을 뛰어넘기 위한 노력이다
이 책은 “리얼 유토피아” 개념을 구현하는 대안들을 체계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일반 틀을 정교화하고, 현대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냉소적으로 비웃는 다양한 사고思考와 현실을 반박하고자 했던 진지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해방적 사회변화를 위한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저자는 먼저 제1장에서 ‘포르토 알레그레 시를 통한 참여적 시예산 편성의 가능성, 위키피디아와 같은 자발적 무보수 지식공유, 기업과 노동자의 함의를 담아낸 몬드라곤, 인간 삶의 번영에 기초가 되는 무조건적 기초소득’ 을 예시한다. 그리고 제2장에서 리얼 유토피아 구상 문제를 “해방적 사회과학”이라는 더 넓은 틀 안에 자리매김 하면서 논의한다. 이 틀은 세 가지 과제들, 즉 진단과 비판, 대안의 정식화, 그리고 변혁 전략의 정식화를 중심으로 구축된다. 이 세 과제들은 이 책의 세 가지 주요부의 의제를 규정한다. 이 책의 제1부(제3장)는 자본주의에 대한 기본 진단과 비판으로, 이는 현실 유토피아적 대안의 탐색을 고무한다. 다음 제2부는 대안의 문제를 논의한다. 제4장은 대안에 대한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을 재검토하며, 왜 이 접근법이 불만족스러운지를 보여주고, 제5장은 대안적 분석 전략을 정교화한다. 이때 근거가 되는 개념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국가와 경제에 대한 사회의 권력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6장과 제7장은 “사회 권력화”라는 개념에 비추어 제도적 설계를 위한 일련의 구체적인 제안들을 탐구한다. 마지막 제3부는 변혁의 문제―이 현실 유토피아적 대안들이 실현될 수 있는 과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로 전환한다. 따라서 제8장에서 사회변혁 이론의 중심적 요소들을 펼쳐낸 다음 제9장~제11장에 걸쳐 세 가지 다른 전반적인 해방적 변혁 전략―단절적 변혁(제9장), 틈새적 변혁(제10장), 공생적 변혁(제11장)―을 검토한다. 그리고 제12장에서 핵심적인 주장들을 일곱 가지 교훈으로 추출함으로써 그동안 현실과 이상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진행되었던 일련의 논의를 매듭짓는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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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한 번쯤은 들어본 이야기들. 그러나 이런 평범한 구슬을 꿰어 보배로 만드는게 에릭 올린 라이트의 재주인듯 하다. 구매
wolf1000 2012-12-03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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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놀라운 책! 하이브리드 사유로 현재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극복할 현실적인 대안들을 제시한다. 나아가 민주적인 사회 권력을 강화하여 날뛰는 자본을 통제할 수 있는 대안 엮음의 종합판이라고 할 수 있다. 구매
서재필 2016-02-0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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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까닭에 이탈한 탓이겠지요
밥을 위해 정의를 팔았습니까? /그걸 어찌 알겠어요. 밥은 보이지만 정의는 보이지 않는데요./ 당신이 침묵하고 방관하고 있는 사이 이 사회는 더 병들고, 사람들은 죽어갑니다. 아시잖습니까! /그런가요, 방금 먹은 밥과 김치 몇 조각, 된장국이 훔쳐 먹은 것이었다는 거군요./ 그런 말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중의 각성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말입니다! 계몽이 다시 필요한 시대가 왔습니다!!
누가 사회정의를 바랍니까, 누가 사회변화를 이끌어 갑니까?/ 병든 세상을 낫게 한다는 거군요./ 못 믿겠지만 낫기도 합니다. 역사가 그걸 증명하잖습니까!/ 글쎄요, 두 번째 기회를 찾다 목숨을 잃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 것은 아는데요./ 이래서 계몽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노예 근성을 버리세요. 저주를 막는 유일한 방법은 희망입니다! / 희생이라구요? 해가 기우는군요. 저녁밥을 어떻게 해결할지도 아직 모르는지라. 그건 제겐 너무 먼 이야기라오./ 당신은 채찍이 골수를 뚫을 때까지 움직이지 않는 말과 똑같아 보입니다! 더 이상 대화가 무의미할 것 같군요./ 종국에는 … 도착한 그곳이 천국이길 바랄 뿐이라오.
수천년 역사에 이름만으로도 혀를 찰 독재자들은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최소한의 생존마저도 보장받지 못하면서도 폭력에 저항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비겁한 자들이었습니까. 권력에 아부하며 독재에 가담한 자들은 또 뭐라고 불러야 하겠습니까? 약자와 무고한 자들은 또 누구입니까? 어느 누구도 완전하지 않았으며, 영원하지도 못했습니다. 영원한 것이 있었나요. 당신은 어떤 삶을 원하는지요. 또 우리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을까요. 무고한 자의 유토피아는 대중의 유토피아와 얼마쯤 같을까요.
비참한 최후는 부귀영화를 누리던 독재자에게도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악이 쓰러지고 스러진 그 자리에 강제와 폭력은 교묘하게 부활하고, 비겁한 자, 악한 자, 약한 자, 무고한 자들이 강박적으로 출현합니다. 모든 것은 반복과 각인으로 역사라는 기계에 새겨지지만, 고통은 떠돌고 있습니다. 굴욕스러운 글자를 새긴 채로 역사 너머로 너울거립니다. 불행의 본질이 생존의 위협이었는지, 오명의 굴레였는지 밝히지 못하도록 만드는 역사에 실눈을 뜨면서 말입니다.
폭군을 저지하고 유토피아를 꿈꾸게 하는 동력의 정체는 무엇인가요? 어쩌면 말입니다. 억압과 폭력을 저지하는 힘은 그것을 만든 힘과 비슷한 것일수도 있겠습니다. 저항하는 일, 예방하는 힘, 대안을 수립하는 힘은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 주는 동력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다는 말이지요. 산업자본이 권좌를 금융자본에 내준 지난 시절을 돌아보십시오, 마냥 헛소리만은 아닐 겁니다.
금융위기는 불패를 모르던 자본주의에 위기로, 파괴 내지 해체의 신호로도 해석되었습니다. 제도적 변화가 필요했고, 혁명적 형태의 경제체제가 요구되었습니다. 신문은 날마다 위기를 크게크게 부각시키기 바빴고, 새로운 제안들은 제각각의 이상을 머금고 위기에 빠진 경제주체들을 현혹했습니다. 그러나 곧 그 자리는 국가의 옷을 입은 자본이 다시 자리잡았습니다. 무엇보다 개인은 이런 상황에 더 무력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습니다. 강력하고 번드르한 칼날을 휘두를 빅브라더가 늘 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안정과 평화라는 이데올로기적 패러다임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유토피아는 그냥 오지 않습니다. 먼저 혼란과 불확실성을 견디고 수용해야 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모든 수확물들이 썩어갈 때까지 건들지 않아야 가능할 것 같다는 말입니다.
『리얼 유토피아』의 저자 에릭 올린 라이트는 효과적인 투쟁 방법을 권고하지도 않고, 정치적 호소력을 가질 의제를 조언하지도 않을 거라고 말합니다. 다만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성격을 명료히 하고, 진보세력들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여행하는 법을 이해할 수 있도록 일종의 “분석틀”을 창조하겠다고 합니다.
나는 내 연구의 이론적 좌표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전통”이라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마르스크주의”라는 용어는 지속적으로 재구성되고 전진하는 과학적 이론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교의를 암시한다. ~ 다른 전통들—게임이론, 분석철학, 페미니즘, 신고전파 경제학, 그리고 사회학의 다양한 조류들—에서 나온 요소들이 내 경험적 • 이론적 연구의 특정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경우, 나는 이 요소들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수입이 마르크스주의 전통을 희석시키기보다는 풍부하게 만들었다고 나는 믿는다.
라이트는 소련이 해체되고 “역사의 종말”이 선언되던 1990년대 초에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라이트의 관심사는 ‘착취’에서 ‘계급’, 그리고 ‘사회주의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변화하는데요. 사회권력과 급진민주주의를 그 중심에 놓고 대안을 탐구합니다. 자본주의를 작동하는데 착취가 작동하지만 자본주의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가 축이라는 라이트의 주장은 중앙집권적 사회주의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부정적/ 적대적 현실세계에 대한 적절한 반응이라고도 보여집니다.
마르크스주의자 라이트가 “꿈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받아들이고 유토피아적 꿈에 탐닉하는 대신 우리 스스로 실제 현실에 맞추어야” 한다면서, 민주정치를 중요하게 배치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라이트는 마르크스주의를 포괄적으로 해석하며 그 ‘전통’ 안에 묶어둘 몇 가지 기준을 덧붙입니다.
1. 사람들에게 해악을 가하는 한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한 진단과 비판
2. 계급적 지배 • 착취 관계들의 체계로서의 자본주의에 관한 이론
3. 자본주의의 대안들에 관한 이론을 발전시키려는 노력
4. 자본주의를 재생산하고 자본주의의 변혁을 가로막는 메커니즘들에 대한 관심
5. 의식적 투쟁이 의도되지 않은 사회변화의 누적 효과들과 상호 작용해서 변혁이 일어난다는 이해
라이트는 국가와 경제에 대한 사회권력 강화 과정이야말로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사회주의라고 주장합니다. 제대로 된 민주화 과정이 계급구조의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라이트의 주장은 노동계급이 더이상 종속되지 않을 유일한 길인것도 같습니다.
급진 민주평등주의적 사회정의와 정치정의를 실현할 가능성을 힘차게 확대하며 자본주의를 초월하기 위해서는 경제에 대한 사회권력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를 대단히 진지하게 취급한다는 것을 뜻한다. 넓고 깊은 사회권력 강화는 우선 국가권력을 시민사회에 근거한 사회권력에 종속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민주주의” 개념의 통상적인 의미이다. 민중에 의한 지배는 시민사회의 자발적 결사에서 나오는 권력이 국가에 근거한 권력을 통제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권력 강화는 국가에 대한 의미 있는 민주적 통제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또한 경제권력이 사회권력에 종속됨을 뜻하기도 한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이 더 이상 생산적 자원이 배분과 사용을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아마 가장 파악하기 힘든 것이겠지만, 사회권력 강화는 시민사회 자체를 민주화한다는 것을 뜻한다. 폭이 좁은 결사체와 폭이 넓은 결사체들이 민주평등주의적 원칙들에 따라 조직되고 이러한 결사체들이 두터게 형성된 시민사회가 창조된다는 것이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권을 통제하는 노동계급의 탄생이라니! 멋지지 않습니까. 라이트가 발견한 네 종류의 틈새에서 급진적 사회변화를 유도할 수 있을만큼 강력한 정치적 의지가 읽혀지기도 합니다.
1. 낙후된 도시였던 브라질의 포르토 알레그레 시티는 부패와 정치적 후견 관행에서 벗어나, 사회적 자원을 재배치 하는 시민권력을 탄생시킵니다. 참여적 시 예산을 편성하고 집행합니다.
2. 反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지식을 생산하고 전파하는 위키피디아는 위계적 통계가 아닌 수평적 호혜성의 기초 위에 서 있습니다.
3. 몬드리안은 스페인 바스크 지역의 복합기업으로 노동자 소유 협동조합입니다. 위계적 권력관계와 자본주의적 재산관계가 필요하지 않으며, 비노동자 소유자 없이 광범위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합니다.
4. 합법적 시민권을 가진 거주자는 무조건적 기초소득을 보장받아야 합니다. “빈곤선” 이상으로 살기 충분한 월간 생계비를 지급받습니다. 노동의 수행 여부나 기타 형태의 기여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보편적 기초 소득의 적용은 反빈곤 소득 지원 프로그램, 복지 정책을 제거함으로써 그 재원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기여 소득을 허용합니다. 모든 사람은 얼마 간은 순 수혜자로, 얼마 간은 순 기여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라이트는 4년 동안 18개국을 여행하면서 대학에서 학술회의, 세미나와 워크숍에 참여합니다. 동료 학자나 아내와도 자전거 여행이나 도보 여행, 산책 등을 통해 끊임없이 토론했다고도 합니다. 잘 듣는 사람은 많이 본다고 할까요. 리얼유토피아를 주장하는 라이트는 현실 사회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 훌륭하게 적응할 수 있는 사회주의자입니다.
그의 주장이 힘을 얻으려면 일단 의심을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시민권력은 부정의를 제거할 단일한 힘을 보일 수 있을 것이라는 것, 위키피디아가 기부금으로 운용되는 지식의 유통 채널만은 아니라는 것, 소유자가 된 노동자가 자본주의적 경영을 배격할 것이라는 것, 복지 대신 기초 소득의 보장이 소외와 차별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모호한 유토피아적 공상 대신 실질적인 이상을 보여주는 라이트의 연구가 계속되길 바랍니다. 이 모든 미혹이 걷힌다면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만.
상당한 사회학자 라이트의 저작을 읽고 난 리뷰의 시작치고는 감상적이며 남루합니다. 너덜거리는 일상에서 자신에게 “중요한 선택을 할 수 있는 실제적 능력”을 참된 자유라고 강조하며, 인간해방을 위한 투쟁으로 다원적 모델을 제안하는 그에게서 영감을 받지 못하다니요. 멈춰 버린 까닭에 이탈한 탓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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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13-09-21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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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권력이야말로 리얼 유토피아 새창으로 보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소련의 붕괴로 마르크스의 사상을 몰락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최근 영국인의 여론 조사에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마르크스가 꼽혔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마르크스 사상은 세계를 보는 눈이라 볼 수 있다. 황광우 박사는 <철학콘서트>에서 마르크시즘에 대하여 21세기는 자본주의의 강 언덕에서 사회주의의 강 언덕으로 건너는 뗏목을 띄울 시기라는 말을 했었다. 그만큼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잉여가치론은 21세기를 사는 현재의 새로운 해방으로서의 대안을 제시해 줄 수 있는 사상으로 주목하고 있다. <리얼 유토피아> 역시 자본주의의 한계시점에서 새로운 대안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궁극적으로는 마르크스의 이론이 적절한 대안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귀결인 것 같다.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이론은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스스로의 모순 때문에 자본주의의 가능성의 조건을 파괴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는 불가능한 사회질서가 될 것이며, 따라서 '어떤' 대안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리라는 것이다. 이런 탁월한 그의 안목의 요체는 민주평등주의적 경제. 사회조직이 바로 그 대안임을 설득력 있게 주장하기에 현시점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은 더욱 주목 되고 있는 것이다.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꿈꾸었다. 그가 말하는 이상세계는
"유토피아에서는 하루에 6시간 일을 합니다. 오전에 3시간 일하고 점심을 먹고 2시간 휴식을 취한 후, 오후에 3시간 일하고 저녁을 먹습니다. 그들은 8시간 잡니다. 그 나머지 시간은 취미에 따라 자유롭게 보냅니다. 사람들은 교육을 받는 데 여가를 이용합니다.."
유토피아가 하고자 하는 모든 사업의 목적은 생존을 위해 투여해야 하는 노동시간을 줄이고, 자유시간을 늘리는 데 있다.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정치사상사에서 획기적 의의를 갖는 것은 대중을 사회의 주체로 내세운 것이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가 지향했던 유토피아는 실현 불가능한 꿈으로 남아있어 이후 유토피아가 주는 의미는 '이상향'이라는 공상을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그런 유토피아 앞에 이 책은 리얼이 들어갔다. <리얼 유토피아>의 저자는 꿈과 현실의 간극을 좁혀 인류가 꿈꾸는 유토피아적 이상에 근접한 유토피아적 제도 설계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탄생하게 된 것이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이다.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에서는 현존하는 세계의 해방적 대안에 기초가 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제도적 원칙들을 명확하고 정교하게 다듬는 것이다.
"우리의 진짜 과제는 스스로 역동적으로 변할 수 있는 제도, 사람들의 욕구에 반응하고 그에 따라 진화할 수 있는 제도를 생각해 내는 것이지, 너무 완벽해서 더 이상 변할 필요가 없는 제도를 생각해 내는 것은 아닙니다." -p12
따라서 맨 첫장의 시작에서는 자본주의에 대한 열한가지 비판을 통하여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해악 그 자체와 이 해악들이 발생되는 구체적인 메커니즘을 진단한다. 이 열 한 개의 명제는 급진적인 평등주의적 민주적 규범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에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지를 명백하게 규정하며, 여기서 우리는 자본주의에 대안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에 이어지는 장들은 이런 자본주의의 해악에 관하여 두가지 관점에서 의문을 제가하게 된다.
첫째, 자본주의의 대안은 무엇인가?
둘째, 이 대안을 창조하기 위해 현존하는 사회의 권력관계와 제도들에 어떻게 도전해야 하는가? 이다.
자본주의의 대안에 관한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자본주의 궤도의 핵심적 속성들에 관한 결정적인 이론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파괴할 것이며, 따라서 사회주의가 대안이다. 이때 근거가 되는 개념은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서 국가와 경제에 대한 사회의 권력화 과정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회권력이란 쉽게 말해 주권과 권력이 시민에게 있다는 뜻이다. 사회권력의 강화 과정의 중요한 구성요소는 국가사회주의나 참여 민주주의의 형태로 나타난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우리는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도 그럴것이 심각한 경제위기는 물론이고 소득 불균형으로 인해 잘사는 사람만 잘살고 가난한 사람은 그 가난을 벗어날 길이 없어 허우적대는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세계적으로 청년실업은 증가하지만 딱히 대안은 없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미래, 불확실한 시대에 접어들었다. 현재 겪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속에서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서 <리얼 유토피아>를 읽어본 것은 행운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진단, 그에 따른 대안은 시기적절 할 뿐만아니라 한번 쯤은 진지하게 모색해 보아야할 사안들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시민이 사회권력의 주체로서 민주주의 근간이 되는 것이야말로 리얼 유토피아 세상이 아닐까? 머지 않은 미래에 리얼 유토피아에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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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림모노로그 2012-03-22 공감(8)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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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민주평등주의로 가는 길 새창으로 보기
이번주 주간경향(966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에린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들녘, 2012)가 서평감이다. 전작인 <계급론>(한울, 2005)과 마찬가지로 학술적인 성격이 강한 책이긴 하지만, 문제의식과 제안은 '진지하게' 공유할 만하다.
주간경향(12. 03. 13)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를 꿈꾼다
미국의 사회학자 에릭 올린 라이트의 <리얼 유토피아>는 이매뉴얼 월러스틴의 <유토피스틱스>(창비)를 떠올리게 한다. ‘유토피아’란 말 때문인데 ‘유토피스틱스’는 유토피아를 모색하는 학문 활동을 가리키는 월러스틴의 신조어였다. 지난 세기말에 나온 이 책에서 월러스틴은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더 이상 정상적인 작동을 지속할 수 없는 시점에 와 있으며, 이에 따라 다른 사회체제, 진정으로 민주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가라앉아 있던 유토피아적 상상력을 다시금 가동해야 한다는 제안이기도 했다.
아니 굳이 월러스틴의 제안이라고 한정할 필요는 없겠다. 소련의 몰락 이후 전향하지 않은 좌파에게는 자본주의의 대안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필요했다. 그리고 1970년대부터 줄곧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분석을 진행해온 라이트는 이미 1990년대초부터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를 지휘하며 사회변혁의 이론을 모색해왔다. 역사적 사회주의는 실패하고 자본주의 또한 더 이상 지속가능한 체제가 아니라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는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까. 라이트가 지향하는 사회, 그가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고자 하는 사회는 한마디로 ‘급진 민주평등주의적 대안사회’다. 기본 발상은 사회주의에서 ‘사회적’이란 말을 진지하게 취급해보자는 것이었다. 거기서 ‘진지하게’란 말은 ‘실제 현실에 맞게’란 뜻을 함축한다.
라이트가 구상하는 해방이론으로서 급진 민주평등주의는 사회정의와 정치정의라는 두 가지 조건의 충족을 지향한다. 모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물질적·사회적 수단에 대해 대체로 평등한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는 게 사회정의의 조건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결정에 유의미하게 참여하는 데 필요한 수단에 대해 대체로 평등한 접근권을 가져야 한다는 게 정치정의의 조건이다. 핵심은 ‘평등한 접근권’에 있다. 그것은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가령 똑같은 승리의 확률을 갖는 공정한 추첨은 평등한 기회는 보장하겠지만 평등한 접근권이란 기준에는 미달한다. 우리의 대학입시제도 같은 걸 떠올려보면 되겠다. 똑같은 시험을 치른다는 점에선 공정하지만 입시성적만으로 서열화된 대학에 입학하고 학벌사회에서 평생 차별적 대우를 받는다면 정의로운 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번영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평생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급진 평등주의적 사회정의관이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물질적 생활수준을 누리고 같이 번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그런 접근이 차단돼서는 안 된다는 것뿐이다.
정치정의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은 정치 참여수단에 대해 평등한 법률적 접근권을 가져야 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운명을 집단적으로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민주주의의 권력이 강화되어야 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이런 확장적 이해가 급진 민주주의의 요체다. 이 두 가지, 곧 급진 평등주의적 사회정의관과 급진 민주적 정치권력관을 합친 말이 ‘민주평등주의’다. 자본주의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것은 그것을 떠받치고 있는 계급관계와 경제조정 메커니즘이 이 급진적 민주평등주의 사회 실현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트는 국가와 경제, 시민사회라는 사회적 상호작용의 세 영역에서 사회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리얼 유토피아’의 밑그림이다. 중요한 것은 이 밑그림이 책상머리에서만 그려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브라질 남동부의 도시 포르토 알레그레 시의 시민참여형 예산 입안제도는 직접 민주주의의 진일보한 사례이며, 위키피디아는 인터넷의 반자본주의적 잠재력을 극대화한 예이다. 사회권력이 자본주의 경제권력을 통제하는 ‘사회적 자본주의’의 다양한 사례도 ‘현실 유토피아’의 유효한 수단이다. 거기에 더 보태져야 하는 것은 물론 우리의 의지이고 결단이다.
12. 03.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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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2-03-06 공감 (5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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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정치신학세미나_현실 유토피아 연구_복지국가로 복지국가 넘기 새창으로 보기
연구집단 CAIROS 정치신학세미나 시즌2현실 유토피아 연구_복지국가로 복지국가 넘기* 세미나의 기본 취지지난 겨울부터 봄까지 진행되었던 연구집단 CAIROS의 정치신학세미나 시즌1을 다시 이어가는 정치신학세미나 시즌2를 5월 23일(수)부터 시작합니다. 이번 시즌2에서는 "현실 유토피아 연구"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자본주의의 대안에 관한 새로운 전망, 새로운 사고방식의 일환으로 모색되고 있는 국가 및 사회체제들을 심도있게 공부해보고자 합니다. 자본주의의 대안에 관한 모색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위시하여 그와 연관된 여... + 더보기
흔적을 찾아서 2012-04-30 공감 (8)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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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를 잃어 버리다 새창으로 보기
책을 잃어 버리다.
민중의 집과 유토피아와 안철수의 생각을 생각하다 모두 붉은 비닐봉투에 담겨있던 책들을 잃어버리다. 술을 마시다가 기억의 끝이 중동난 기억도 오랜만이기도 한데 그리 기분이 나쁘지 않다. 민중의 집의 변죽을 울리는 이야기들이나 속내에 무척이나 솔깃하다. 함께 나눌 이웃이 누구인가? 세미나, 앎만 찾아헤매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세미나와 토론모임을 나눌까? 받는 것이 아니라 나눠야 할 이웃, 주어야할 무엇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는 말에 떨림이 전해진다.
메모를 잃어 버리다.
그 빨간봉투 속, 민중의 집 책갈피 사이에 메모도 잃어버렸다. 녹취의 근거를 찾아가면 있으련만 부산스럽기도 하고,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조금 더 위의 레토릭의 메모를 확장시키고 싶은 맘이 있어서인데 잘 생각이 나질 않는다. 책을 보면서 동*미와 아***가 불쑥 불쑥 떠올랐다는 이들. 다락방이나 비밀스런 공간이어서 아는 사람에게 소개시켜주고 싶지 않다는 그(녀)들. 공동체주의 자유의 경계에 대해 논하다. 공동체로 치자면 교회공동체가 탄탄하지만, 그 역시 어떤 정치적 지향에 무색무취해서, 세상일을 연결시키는 능력이 없어 허하다고 결론을 짓는다. 공동체 역시 끊임없이 개인을 간섭해서 싫지만, 마음이나 생각이 전달되기 위해서는 마음의 끈을 이어놓는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한다.
쪽지를 잃어 버리다.
그 책갈피사이에는 얇은 편지봉투가 있다. 따로 보라고 준 것인데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때문에 미안함이 솟아 오른다. 책갈피인지 무엇인지 준 샘에게 미안스럽다. 샘은 이탈리아에 6년정도 체류한 경험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곳엔 10여년이 지난 뒤에 갔는데, 장터에서 옹기종기 사람맛을 느낄 수 있던 거리가, 대형할인매장의 파고처럼 썰렁한 바람이 부는 곳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고 있는 문화적자산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모른다고 한다. 남의 떡이 커보인다고, 그것만 쳐다보는 것이 그들이 아니었나 하고 말이다. 세상의 파고는 저자가 말한대로 스페인, 스웨덴, 이탈리아를 가리지 않고 더 험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또 다른 샘은 10년전이라면 유럽에 가고 싶었지만, 지금여기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발 디딘 곳에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고,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목소리에 힘은 준다. 다른 나라의 경험을 이식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핀란드식은 핀란드식대로 스웨덴은 스웨덴식으로 접목하기가 어렵다. 한국형이라는 것은 새롭게 시도되어야 하는 것이지 여행이나, 복지국가를 투어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라고 한다.
은행잎이 술기운에 더 노랗다. 툭툭 떨어지는데 그(녀)가 손을 빌린다.
손을 잡아준다.
민중의 집 책 뒤편을 보면 스페인의 마니넬레나란 도시가 있다. 4만명의 인구, 공산당원인 시장이 30년째 하고 있다. 그곳의 한달 집세가 우리돈으로 25,000원 정도 한다고 한다. 가장 가난한 이웃의 생활비를 기준으로 정하는 원칙이 있는 셈이다. 당원이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3천명정도라고 한다. 누구라도 그곳에 가서 살 수 있다.
이런 질문이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임대주택에 당신보고 살라고 하면 이사갈 수 있겠느냐구. 말로만 진보는 아니냐구. 도발적인 질문이기도 한데, 받는 이들의 마음이 곱다. 이사는 못간다. 하지만 지금 사는 아파트에 임대주택의 이웃이 층별로 섞여있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라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겠느냐? 해야되느냐?는 선택과 결단을 요구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고민들이 개인으로 해결해야되는 당위만 있다면 너무 팍팍할 것이다. 마니넬레라같은 도시의 오아시스는 만들 수 없는 것인가? 제도적 해결은 요원한 일인가?
은퇴뒤에 사람들은 모여서 살고 싶어한다. 1층에 식당, 2층에 카페, 3층에 도서관 겸 공용공간. 책에 밑줄을 그으면서 읽은 샘은 나름 공간에 대한 고민과 기본설계를 해보았다고 한다. 진보가 이념이 아니라 몸을 섞는 일에 얼마나 인색한 것인지?
함께 살아갈 이웃을 고민한다는 일.
함께 살아갈 세상을 설계한다는 일.
함께 나눌 꺼리를 생각한다는 일은 설레인다. 조금 더 디테일로 향해야 한다.
김수영은 말한다. 민주주의에는 그림자가 없다. 민주주의는 불편한 것이다. 불편을 자청하려면 뻔뻔해야 한다. 논쟁도 즐겨야하고, 제대로 싸우는 법을 일찍 가르쳐야 한다. 싸우는 횟수만큼, 싸우는 근력만큼 민주주의는 단련되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진보라는 것은 쿨하지도 않고 산뜻하지도 않다. 늘 곁에 있는 것이기도 한데, 불편을 감내하면 너무도 보이는 것이 많다. 그 숲의 나무에는 기댈만 할 것이다. 아마. 무척이나. 함께할 이웃이 늘 곁에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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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12-11-11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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