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2

진공묘유(眞空妙有)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공묘유(眞空妙有)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진공묘유(眞空妙有)   불교개념용어

참된 공이 별도로 분리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존재 양상, 곧 다양한 인연의 조합인 연기(緣起)라는 불교교리.
               

정의

            참된 공이 별도로 분리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 사물 그 자체의 존재 양상, 곧 다양한 인연의 조합인 연기(緣起)라는 불교교리.내용불교의 근본 교리 가운데 하나인 공(空)은 이 세계의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음을 표방하는 개념이다. 대승불교 중관학파의 용수(龍樹)는 초기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緣起)가 바로 공의 뜻임을 천명하였다. 연기는 이 세계의 만물이 다양한 인(因)과 연(緣)의 조합에 의해 생기하는 것이지, 고정 불변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뜻한다.이와 같은 공에 대해 예부터 몇 가지 잘못된 이해 방식이 있었는데, 중국 화엄종의 승려 법장(法藏: 643~712)은 『반야심경(般若心經)』의 주석서인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에서 이를 세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공이 사물과 다르다는 견해이다. 이는 공을 사물과 다르다고 보기 때문에 구체적인 사물을 떠나 별도의 공을 구하는 것이다. 법장에 따르면, 이런 견해에 대처하기 위해 『반야심경』에서 ‘색이 공과 다르지 않다[色不異空]’라고 하였다. 둘째는 공이 사물을 소멸시킨 것이라는 견해이다. 이는 이 세계의 구체적인 사물을 소멸시킨 뒤 남는 빈 공간을 공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대처하기 위해 『반야심경』에서 ‘색이 곧 공이다[色卽是空]’라고 하였다. 셋째는 공을 어떤 특정한 사물로 여기는 견해이다. 이는 공을 이 세계의 다양한 사물들과 마찬가지로 있는 존재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런 견해에 대처하기 위해 『반야심경』에서 ‘공이 곧 색이다[空卽是色]’라고 하였다. 공에 대한 이런 잘못된 견해들을 타파하기 위해 불교도들은 진공(眞空), 곧 참된 공이란 이 세계의 사물 그 자체의 존재 양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았다.또한 이 세계에 있는 만물의 관점에서 볼 때, 만물은 고정 불변의 실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생성과 변화가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만물이 공(空)하므로 비로소 생동감 있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세계의 만물과 공의 원리가 서로 장애함이 없는 관계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파악할 때, 진공 그대로 묘유가 된다는 관점이 성립한다.이는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관점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부파불교 시기 설일체유부(說一切有部)와 같은 부파는 무상(無常)한 현실을 벗어나 무상하지 않은 열반의 세계에 도달하려는 사유 체계를 세웠다. 이에 따르면 열반은 무상한 현실과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공묘유의 관점에 따르면, 진정한 열반이란 이 세계의 현실 속에서만이 실현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계의 만물 자체에 공의 이치가 온전히 구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생사즉열반(生死卽涅槃)’과 같이 대승불교에서 제창된 내용 역시 이러한 진공묘유의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의의와 평가대승불교의 영향이 강한 동아시아 불교에는 진공묘유의 관점이 보편적으로 수용되었다. 이를 통해 대승의 불교도들은 기존의 염세적이고 소극적인 세계관으로부터 이 세계를 보다 긍정하는 적극적인 세계관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중국의 다양한 불교 종파들, 가령 화엄종, 천태종, 선종 등은 모두 일상을 떠나지 않고 불교의 진리를 구현하고자 시도하였고, 이러한 경향은 우리나라에 전래된 불교 종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참고문헌

        중론(中論)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般若波羅蜜多心經略疏)

집필자집필
            (2016년)박인석(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진공묘유(眞空妙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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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공묘유

 승인 2006.03.25 09:05 호수 152 댓글 0페이스북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모든 존재는 인연 따라 오가나

분명히 현상으로 작용하나니

자비 베풀며 세상을 살아가야

불교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변화한다. 그 속에 변화하지 않는 고정된 실체는 따로 없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고 있는 존재의 어느 순간을 잡아내어 ‘이것’이라고 잡아낼 수 있을 것인가.

예컨대, 섬진강을 들어보자. 섬진강은 시시각각으로 흘러가고 있다. 계절에 따라 다르고, 나날이 다르며, 아침저녁으로도 달라진다. 그런데, 어느 순간의 섬진강을 딱 잘라내어 ‘이것이 섬진강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순간만을 섬진강이라고 규정한다면, 그 순간이외의 섬진강은 섬진강이 아닌 것이 된다. 따라서 고정된 실체로서의 섬진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이 섬진강일 뿐이다.

그렇다면, 섬진강은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섬진강은 분명히 존재한다. 고정된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는 현상으로서의 섬진강은 분명 존재한다. 존재하면서 분명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물고기를 갈무리하고 있으며, 토사를 운반하면서 흘러내려가고 있다. 이것을 찰나생멸(刹那生滅)한다고 한다. 〈금강경〉의 마지막 게송은 다음과 같다.

“조건 지워진 것은 모두다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할지니라.”

여기서의 꿈.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 그리고 이슬과 번갯불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일순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순간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고정된 실체가 없이 찰나생멸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섬진강이라고 하는 것도 고정된 실체는 없지만, 현상으로서는 분명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불교용어로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한다. 진공은 ‘참다운 공’을 말하며 묘유는 ‘묘하게 존재함’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서 선가(禪家)에 전해 내려오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몹시 더운 어느 여름날, 마곡보철 선사가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어떤 스님이 와서 물었다. ‘바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고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데, 스님은 어째서 부채질을 하고 계십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대는 바람의 본질이 변함이 없다는 것은 아는지 몰라도,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다는 이치는 모르고 있구만.’

‘그것이 무엇입니까.’

선사는 아무 말 없이 부채질을 계속했다.

바람의 본질은 변함이 없고, 두루 작용하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에 부채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空)에 떨어진 것이다. 더위는 본래 없다. 그러나 더운 현상은 실존한다. 그러므로 부채질을 해야 바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아니, 부채질을 떠나서 바람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존재는 찰나생멸한다. 그 안에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는 없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 따라 갈 뿐이다. 하지만 분명히 현상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그러니 사랑을 베풀며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결국 무아(無我)이며 연기(緣起)이고 중도(中道)이자 공(空)인 불교적 지혜는, 자비로써 실천된다고 하는 것이다.

쌍계사 승가대학 강사



[불교신문 2215호/ 3월2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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