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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15

‘혼돈의 한국’ 가장 큰 문제는 교육… 타협할 줄 모르는 정치인 양산

‘혼돈의 한국’ 가장 큰 문제는 교육… 타협할 줄 모르는 정치인 양산

'혼돈의 한국' 가장 큰 문제는 교육… 타협할 줄 모르는 정치인 양산

[김윤덕이 만난 사람] '이미륵賞' 한국학자 베르너 사세
김윤덕 기자
입력 2024.12.09


베르너 사세 교수는 자신의 한자 이름이 ‘세상을 생각한다’는 뜻의 ‘思世(사세)’라며 웃었다. 헌책방이 많아 70년대부터 드나들었다는 인사동에서 그를 만났다. /김지호 기자

반세기 한국학 연구자로 살아온 베르너 사세 함부르크대 명예교수를 만난 건 그가 올해 ‘이미륵상’ 수상자였기 때문이다. “전생에 한국인이었고, 현생은 독일로 유배온 것”이라고 했을 만큼 한국을 사랑하는 그는 69세였던 2010년 무용가 홍신자와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상식을 위해 전남 담양에서 온 사세 교수를 인사동에서 만난 게 지난 3일. 그날 밤 늦게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해제되는 통에 사흘 뒤 다시 만난 사세는 “한국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논어’를 반드시 읽어야 한다”고 말했다.
◇ 尹은 마음이 아픈 사람

-’이미륵상’을 받은 날 계엄령이 선포됐다.

“누가 농담하는 줄 알았다(웃음). 처음엔 놀랐지만 몇 시간 만에 여야 의원들이 모여 계엄을 해제시키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국회도 국민도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을 따르지 않았다.”

-일반 국민은 패닉에 빠졌다.

“한국은 민주주의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스트롱맨들이 장악한 전 세계에 대통령은 제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그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다. 나는 대통령이 감옥이 아니라 병원에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볼 때 그는 마음이 아픈 사람이다. ”

-이재명의 민주당이 탄핵을 남발하고 예산을 삭감해 국정을 마비시킨 탓도 크다.

“대통령은 정치를 하는 사람이고,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타협이다. 그러나 윤 대통령은 정치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했다. 반대 혹은 비판적 의견을 가진 사람들과는 대화조차 하지 않았고, 만나지도 않았다. 대통령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심각한 문제다.”

-배려, 양보, 타협이 없는 경쟁사회라는 뜻인가?

“한국 사회에는 철학이 없다. 역사와 전통에 대한 관심도 없다. 오로지 경쟁만 부추기는 한국의 교육이 돈과 권력만 좇는 지식인, 정치인을 낳았다. 그들이 학벌 좋고 지식은 많은 엘리트인지는 몰라도 타인과 공동체를 생각하는 가슴(마음)은 없다. 나치도 전부 지식인들이었다.”

-’논어’를 새롭게 읽어야 한다고 했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 철학이며 윤리다. 공자의 사상은 17세기부터 라이프니츠, 칸트, 볼테르 등 철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선 유교를 구시대의 산물로 여기는 풍토가 있지만, 논어는 21세기에도 읽어야 할 통치 철학이다. 거기엔 현대 사회가 가장 필요로 하는 인간에 대한 예의, 호혜, 다름에 대한 존중이 모두 포함돼 있다.”

-현재의 정치 풍토에 어떤 메시지를 줄까?

“일례로 공자는 임금 섬기는 법을 묻는 자로에게 ‘비판적 충성’을 강조했다. ‘임금이 잘못된 길로 가면 기만하지 말고 굳세게 꾸짖고 경고하라’고 했다. 그것이 불가능하면 직을 버리고 떠나야 한다는 것이 논어의 가르침이다.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을 막지 못한 국무위원들이 명심했어야 할 ‘신하의 도리’ 아니었을까.”

-제왕적 대통령제의 근원적 문제일까?

“제도의 문제이기 전에 정치인 개개인의 양심과 행동이 그나라 정치의 수준과 미래를 좌우한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한국의 계엄 사태를 보며 ‘민주주의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했다.

“민주주의란 한번 시작했다고 해서 저절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과 자본에 맞서 날마다 싸우며 지켜나가야 한다. 끝이 아니라 매일이 새로운 시작이다.”

지난 3일 주한독일문화원에서 열린 이미륵상 시상식에서 베르너 사세 함부르크대 명예교수가 수상 소감을 발표하고 있다. /한독협회


◇ 월인천강지곡을 아십니까?

-’이미륵상’을 받았다.

“이미륵의 자전적 소설인 ‘압록강은 흐른다’는 독일에서 크게 유행했다. 한국이 어떤 나라냐고 묻는 독일인들에게 나는 항상 그 책을 선물한다. 이미륵은 매우 아름답고 고급스러운 독일어를 사용했다. 괴테, 헤르만 헤세, 토마스 만 등 대문호의 책을 읽으면서 독일어를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단편소설은 독일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수상 소감에서 한국인들이 자신들의 전통문화에 대해 너무 모르고 관심이 없다고 했더라.

“절에 가면 외국인이나 한국인이나 다같이 바보가 된다. 심지어 그곳에 적힌 한문이 무슨 뜻인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 1500년 동안 한국의 문화이자 언어였던 한문을 한국인이 모른다. 한국의 단편시 ‘시조’는 정말 아름다운 문학인데 한국인 스스로 고리타분하다며 외면한다. 전 세계로 퍼져나가며 유럽 시인들에게 영감을 준 일본 하이쿠와 대비된다.”

-그래도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한국인은 책 안 읽기로도 유명한데 노벨상을 받았다고 하니 갑자기 앞다퉈 읽는 것 아닌가?(웃음) 현대 문학도 좋지만 한국의 가사 문학 등 세계에 알려야 할 것이 많다.”

-K팝 등 한류가 융성하다.

“미안하지만, 유럽 지식인 사회에서 한류는 갑자기 부자가 된 한국이 막대한 돈을 투자해 집중적으로 만들어낸 일종의 ‘오락’으로 인식된다. 한류가 오락이 아니라 문화가 되려면 한국인이 자신의 오랜 역사와 문화부터 관심을 갖고 공부해야 한다.”


-한글 배우려는 세계인이 급증하는데.

“한글만 가르칠 게 아니라 세종대왕을 알려야 한다. 세종은 갈릴레오,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에 뒤지지 않는 르네상스인이었다. 세종을 ‘대왕’으로만 알리지 말고, 그가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세계에 알려야 한다.”

-’민낯이 예쁜 코리안’이란 책에서 한국인의 국수주의적 성향을 지적했다.

“자기 문화를 그리 좋아하지도, 깊이 관심 갖지도 않으면서 무작정 ‘한국이 최고’라고 우기기 때문이다(웃음). 이를테면 한글이 세계 모든 언어의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한국어의 발음만 제대로 표기할 수 있다.”

-한옥에 살고 개량 한복을 즐겨 입더라.

“한옥은 불편해서 좋고 한복은 편해서 좋다. 한국에선 개량 한복을 입으면 운동권이라고 하던데 한 외국인이라 그런지 입고 나가면 다들 칭찬한다(웃음).”

-서울 북촌은 놀이공원 같다고 했다.

“그곳의 한옥은 진짜 한옥이 아니다. 광택까지 내는 바람에 더욱 기괴해졌다. 미키 마우스 같다고 할까. 나는 현대 건축가들이 전통 한옥의 원리를 아파트 설계에 적용하면 어떨까 생각한다. 이를테면 모든 방의 층고를 용도에 따라 다르게 하는 것부터 시도해볼 수 있다.”

-한국의 가장 큰 문제는 교육이라고도 했다.

“한국에 ‘교육’은 없다. 시험 통과하는 방법만 가르칠 뿐이다. 학문의 기본 태도는 호기심과 의심인데, 한국 학생들은 교수의 주장을 의심하지 않는다. ‘월인천강지곡’이 뭔지는 알지만 세종이 쓴 이 아름다운 시를 읽어본 사람은 거의 없다.”

비상계엄 사태로 두 차례에 걸쳐 서울 인사동에서 만난 베르너 사세 교수는 "이번 사태가 한국 민주주의를 더욱더 도약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김윤덕 기자
◇ 조선의 선비처럼, 보헤미안처럼

-1966년부터 4년간 나주와 서울에서 살았다.

“호남 나주 비료공장 기술자로 파견된 장인이 가난한 학생들에게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학교를 세웠는데, 그곳 교사로 와 달라고 해서 처음 한국에 오게 됐다. 기술뿐 아니라 문학도 가르치는 학교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내려와 수업하는 장면을 보고 더 많은 아이가 이 학교에서 배울 수 있도록 지원하셨다.”

-가난한 시절이었을 텐데.

“달빛 아래 촛불을 켜고 살았지만 이웃 간에 믿음과 정이 돈독했다. 대문을 늘 열고 살았고 음식을 나눠 먹었다. 현대 한국 사회엔 그런 정이 남아 있지 않다. 모든 가치의 중심이 돈이 되어서 이웃보다 좋은 자동차, 좋은 집을 사기 위해 살벌하게 경쟁하는 사회가 됐다.”

-1970년 독일로 돌아가 한국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더라.

“샤머니즘, 풍습, 언어 등 한국에서 내가 보고 느낀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이해하고 싶었다. 나이 서른에 보훔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당시엔 한국학과가 없어 일본학과 교수 밑에서 문화인류학적 방법론으로 한국학을 연구했다.”
◇ 홍신자와 산다는 것

-정년퇴임 후 아예 한국으로 들어왔더라. 서울, 안성, 제주를 거쳐 담양에 정착했다.

“첫정을 들인 곳이 나주여서 그런지 호남의 음식, 풍경, 방언을 사랑한다. 특히 담양엔 소쇄원과 식영정이 있고, 대나무가 많아서 좋다.”

-묵은지를 ‘김치 샴페인’이라고 했더라.

“서울 김치는 배추 샐러드(겉절이) 같은데, 오래 숙성돼 깊은 맛이 우러나는 전라도 김치는 정말 환상적이다. 옛사람들이 달걀 꾸러미 들고 마실 가듯 친구들이 저마다 담근 김치를 갖다 줘서 호강하고 있다(웃음).”

-’아침이슬’, ‘가을편지’ 등 김민기 노래를 기타 치며 부르더라.

“한국학 자료를 수집하러 매년 여름 드나들 때 ‘술 친구’로 가끔 만났다.”

-술을 좋아하시나?

“한식엔 막걸리를 꼭 곁들여 먹지만 인삼주, 매실주도 좋아한다. 독일에선 술을 많이 마시되 취하지 않아야 영웅으로 친다(웃음).”

-수묵화가로 전시도 하던데.

“어릴 때 유화를 그렸는데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그러하듯 밥벌이가 안 된다며 반대하셨다. 한국학을 공부하면서 수묵화에 매료됐다. 나와 한지와 먹이 서로 스며들며 대화하는 시간이다.”

-조선의 선비를 보헤미안이라고 표현했더라.

“공부할 땐 열심히 읽고, 놀 때는 열심히 노는 사람들이 선비였다. 송강 정철의 작품을 읽어보라. 얼마나 지적이고도 풍류가 넘치는지.”

-홍신자와 사는 건 심심하지 않다고 했던데.

“홍 선생 자체가 심심할 틈이 없는 사람이다(웃음).”

-지금도 홍 선생을 보면 설레나?

“우리는 매우 다른 종류의 사람이고,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기 때문에 매일매일 스릴이 넘친다.”
69세에 현대무용가 홍신자와 결혼한 베르너 사세 교수. 그는 평소에도 한복을 즐겨 입는다고 했다.

☞베르너 사세

1941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출생. 1966년부터 2년간 호남 비료 공장의 기술학교 교사로 일했다. 1970년 독일 보훔대에 입학, ‘계림유사에 나타난 고려방언’으로 한국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보훔대와 함부르크대에 한국학과를 개설했고, 유럽한국학회장을 지냈다. ‘월인천강지곡’을 독일어로, ‘동국세시기’를 영어로 번역 출간했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석좌교수를 지냈다.






김윤덕 기자


2023-03-19

[스승을 말한다] 괴테 연구 세계적 권위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스승을 말한다] 괴테연구 세계적 권위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정진과 도약의 여정, 나의 스승을 말한다



치열한 정진의 과정 속에서 좋은 스승은 홀연히 나타난다. 스승은 제자에게 도약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스승은 또한 제자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 우리 시대 각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른 거장과 대가들이 털어놓는 스승의 이야기를 치밀한 취재와 심층 인터뷰를 통해 들어본다.

과거순
3화  라이너 쿤체와의 만남, 시와 학문을 아우르다

[스승을 말한다] 괴테 연구 세계적 권위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

☞이전기사 : 놀라운 후원자 알프리드 홀레, 학문 스승 헨드릭 비루스를 만나다 1986년 박사학위 논문을 끝내고부터 전영애는 동서독 분단과 독일문학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동독의 문학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 안...
22.06.28 11:24 ㅣ 한기홍(glutton4)




라이너 쿤체와의 만남, 시와 학문을 아우르다[스승을 말한다] 괴테 연구 세계적 권위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③
22.06.28 11:24l최종 업데이트 22.06.28 11:24l
한기홍(glutton4)


치열한 정진의 과정 속에서 좋은 스승은 홀연히 나타난다. 제자는 스승을 만나 도약의 결정적 계기를 맞고, 스승은 제자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 독보적인 괴테 연구가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두 스승의 이야기를 들어본다.[기자말]
☞이전기사 : 놀라운 후원자 알프리드 홀레, 학문 스승 헨드릭 비루스를 만나다


▲ 전영애2 전영애 교수는 1986년 박사학위 논문을 끝낸 이후부터 동서독 분단과 독일문학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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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박사학위 논문을 끝내고부터 전영애는 동서독 분단과 독일문학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동독의 문학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의 삶과 심성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의식이 싹튼 것이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독일 분단은 위험한 테마였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나오는 책은 다 금서로 지정돼 있었다. 서독에서 출간된 동독 작품만을 구해서 읽고 번역을 시작했다. 그때 가장 눈을 번쩍하게 만든 작가가 바로 '시의 스승' 라이너 쿤체다.

"동독 출신인 쿤체 선생님은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강의를 했어요.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 민주자유화 운동 무렵부터 선생님은 핍박을 받기 시작했죠. 1976년 동독작가동맹에서 제명당하여 결국 서독으로 넘어왔지요. 동독을 대표하는 저항시인이었지만 시는 전혀 전투적이지 않았습니다.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생명 윤리의 본질에 천착했습니다. 고요하고 정적인 저항시를 썼던 겁니다. 독일어는 명사의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는데, 쿤체 시인은 그런 명사마저 다 소문자로 표기했습니다. 마침표와 콤마도 가능하면 다 뺐습니다. 동독 사회는 강성의 프로퍼갠더가 난무하는 곳인데, 시인이 그 강도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었겠어요. 목소리를 낮춰 발언하는 전략적 고려를 했던 것 같은데, 거기서 좋은 저항시가 나왔습니다.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죠. 어떻게 보면 기막힌 타이밍이었습니다. 언론과 출판계의 시사적인 요구도 급증했습니다. 1989년에 제가 번역한 동독 작가의 책 다섯 권이 출판되었는데 그 중에 두 권이 쿤체 시인의 작품이었습니다."

전영애가 라이너 쿤체를 처음 만난 해는 1992년이다. 캐나다 뱅쿠버 대학에서 학회가 열렸는데 그 때 그는 라이너 쿤체의 시에 대해 주제 발표를 했다. 발표가 끝난 뒤 사람들이 쿤체 시인이 바로 건너편 방에 와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 여백재 동쪽 한실 여백서원 본관 여백재의 동쪽 한실. 서원 전체가 아름다운 균형과 조화로 보는 이의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서원 곳곳 전영애 교수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가 없다.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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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분을 처음 뵙고 너무 놀라서 사과부터 했습니다. 허락도 받지 않고 번역을 한 것에 대해서였죠. 그런데 이 분은 한 명의 번역가가 12명의 대사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었어요. 앉아서 5~6시간 대화를 나나눴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20세에 시를 쓰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39세까지 시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 마침 우연히도 현장에 있었던 탓에 250편이나 되는 우리 말 시가 쓰이게 됩니다. 시집을 내기도 했고 잠깐 문단을 기웃거리기도 했는데 곧 포기했습니다. 시인이 되려면 압도적인 재능이 있거나 문단에 얼굴도 내밀고 술도 좀 마실 줄 알아야 하는데 저는 그런 재능이 하나도 없었던 겁니다. 제가 또다시 시를 쓰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니까 시도 꾀를 부리더군요. 독일어 시가 마치 방언처럼 분출했습니다. 스스로 심리분석을 해봤습니다. 한국어로 쓰면 출판 욕심이 생길 것을 두려워해서 아예 독일어로 시작(詩作)을 하게 되었나 봅니다."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감성 넘실거리는 시편

그런 독일어 시조차 더욱 많이 쌓이자 고민을 하다 오래 전에 만났던 라이너 쿤체 시인이 떠올랐다. 2005년 1월 도나우 강변 쿤체 시인의 집을 찾아갔다. 오랜 만에 그와 해후했고, 자신이 쓴 독일어 시를 그에게 전했다.

"선생님이 우체통에 넣었던 저의 시를 밤새 보시고 다음날 저를 만났어요. '당신을 교수에서 나의 동료로 격하시키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시인의 반열에 저를 두겠다는 뜻이었습니다. 과분한 상찬이었죠. 6시간 30분 동안 저를 앉혀놓고 아주 꼼꼼하게 제 시를 고쳐주셨는데, 놀랍게도 제가 드린 시 전체를 연필로 필사해 놓으셨더라고요. 왜 여기는 마침표보다 쉼표가 나은가, 여기는 왜 어순을 바꾸는 것이 좋은가 등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뮌헨 제 숙소에 돌아온 후 전화를 받았어요.

그해 가을에 제 시집이 독일에서 출간될 것이란 소식과 함께 여기에, 즉 독일 안에 뿌리내리라는 제안을 하셨어요. 그건 바로 제가 차마 하지 못한 질문에 대한 답이었습니다. 두 언어 사이에서, 학문과 시 사이에서 몸 둘 바를 몰랐던 시기였어요. 제가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물어볼 사람을 찾아 간 것이었는데 그 질문을 차마 못했거든요. 선생님이 하루 사이 출판사에 원고를 보내 출간 교섭까지 해놓으셨던 거예요."


▲ 라이너 쿤체와 시공부 2005년 독일 라이너 쿤체 시인 자택에서 만나 자신이 쓴 독일어 시에 대해 시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전영애 교수.
ⓒ 전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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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 가을 쿤체 시인은 자비를 들여 한국을 방문했다. 한 단체의 초청을 두 번이나 거절했던 시인이 전영애의 초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서울대에서 열린 시 낭독회는 대성황이었다. 낭독회에 이어진 사인회가 세 시간이나 소요됐을 만큼 학생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오시기 직전 율곡의 '고산구곡가' 첫 곡에 화답하는 '메아리 시조'를 팩스로 보내셨습니다. 한국에 가기 위한 준비를 철저히 하신 거예요. 율곡과 황진이, 황지우의 시를 찾아서 화답시를 썼고 이듬해 한국시가 포함된 시집 '보리수의 밤'이 출간되었습니다."

'고산구곡가' 1곡을 화답한 '메아리 시조'를 쿤체 시인은 이렇게 썼다.

"술이어서가 아니라/단지 안에 든 단지여서가 아니라/숲 안에 든 숲이어서가 아니라/시 안에 든 무언가에 나 끌리네/이 나라로, 산이/그림에서처럼 펼쳐져 있다는,/기꺼이 시인의 세계 속/ 저 이가 되어 보려네/시로 인해/ 시인의 벗이 된다는"

라이너 쿤체는 2018년 마치 마지막 시집처럼 읽히는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출간했다. 출간된 즉시 바로 번역했다. 읽은 사람들이 다 좋아하고 그의 시를 더 읽고 싶어 하는데, 이전에 나온 번역본 네 권이 다 절판되었다. 그래서 번역자가 만든 책이 <은엉겅퀴>라는 제목의 쿤체 시인 선집이다. 두 시집 모두 전영애가 번역했음은 물론이다. 언제나 바늘 끝처럼 예리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이 넘실거리는 시편이다. 특유의 간결한 시어에 삶의 무게와 성찰이 더해졌다. 2006년의 시집 <보리수의 밤>에는 12편의 한국시가 실렸다. 모두 촌철살인의 기지가 엿보이는 시편들인데 그 중 하나 '서울의 거리 모습' 은 이렇게 썼다.

모든 사람들이 그래 보인다
길 위에 있다
젊다, 그리고
길 위에 있다
날씬하다, 그리고
길 위에 있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 서로에게 맹세하고 있는 듯하다
저마다 나는 너를 위해 창조되었노라고
하지만 길 위에 있다. 서로 반대 방향을 향하여


▲ 쿤체 시인 부부 지난 해 9월 전영애 교수는 쿤체 시인의 도나우 강변 자택을 방문해 인사했다.
ⓒ 전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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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방한했을 때 독일학술교류처 주최로 한국에 체류하는 독일인, 독일과 관련된 한국인을 위한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선생님은 '오늘 독일에서 아름다운 시집이 한 권 출간되었습니다. 저자는 올라오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저의 독일시집 탄생 소식을 그렇게 알려주셨던 겁니다. 한국 방문 중 독일에서 시집이 나왔다는 전갈을 들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해서 나온 저의 첫 독일어 시집이 '프란츠 카프카를 위한 무지개'입니다."

가히 하나의 범례적인 도서관

전영애는 독일에 감사한 일이 많아 시정(詩亭)이란 이름의 작은 한옥 정자를 세웠다. 쿤체 시인이 설립한 재단 부지 안이다. 시인은 처음 이 '과분한 선물'을 받기를 주저했다. 제자의 부담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장문의 편지를 보내와 '전영애 교수 부친의 유지를 기린다'는 팻말을 만드는 조건으로 이 선물을 받아들였다. 부친이 생전에 검약한 생활을 유지하며 모은 돈 1억 원이 정자 건립의 종자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시인의 자택이 마을의 끝이고 거기서 바이에른 숲이 시작되는데, 그 사이 빈터에 이 정자가 반듯하게 세워진 것이다.


▲ 쿤체 시인 한옥정자 전영애 교수는 독일에 감사할 일이 많아 쿤체 시인이 설립한 재단 부지 안에 시정(詩亭)이란 이름의 작은 한옥 정자를 세웠다.
ⓒ 전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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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옥 정자는 창덕궁의 가장 작은 건물인 서고 '운경고'의 모양을 본떴다. 한 칸은 전기온돌에 들창을 달고, 반 칸에는 마루를 들였다. 네 쪽 들창을 접어 들어 올리면 도나우강 물굽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여름이면 방과 마루를 터서 방에서도 도나우 강을 볼 수 있는 정자가 완성됐다. 국내에서 지어 해체해서 보냈지만, 작아도 들 건 다 들어야 해서 연인원 18명이 독일로 가서 세웠다.

전영애는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의 '괴테 금메달'을 받았다. 100년이 넘는 전통의 괴테 금메달은 관련 연구자 사이에서는 최고 영예의 상으로 꼽힌다. 수상자 대부분은 독일 출신 괴테 연구자로, 외국인은 소수에 불과하다. 동양인으로는 전영애의 수상에 앞서 일본 학자 한 명이 받은 일이 있을 뿐이다. 테렌스 제임스 리드 옥스퍼드대 교수의 시상식 축사는 지금까지도 자주 회자된다. 전영애의 학문 여정에 대한 압도적인 예찬으로, 그는 이렇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전영애 교수가 번역한 작품의 풍부한 양과 폭을 상상하자면, 그것은 가히 하나의 범례적인 도서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놀라서 자문하게 됩니다. 도대체 한국에서는 하루가 몇 시간인가요?"


세계적인 괴테 전문가인 스승 헨드릭 비루스가 2019년에 비로소 이 상을 받았으니 어떻게 보면 청출어람의 의미도 있다.

"비루스 선생님이 이 상을 받았을 때 제가 제일 기뻐했던 것 같습니다. 불경하게도 제가 먼저 그 큰 상을 받아 정말 송구했거든요. 상을 받은 것 자체로도 도무지 송구했고요. 수상 연설에서 '이제 비로소 이 상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갖춰야겠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간 제가 발표한 논문과 700편이 넘는 괴테 시 전부를 번역한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상이야말로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독문학 연구와 많은 저술의 결정적 동력이 되었습니다."

지난 5월 5일에는 라이너 쿤체 상도 수상했다. 이 상은 1933년 욀스니츠(Oelsnitz) 시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난 쿤체의 시적 성취를 기리기 위해 제정됐다. 욀스니츠 시가 주관해 격년으로 시상하는데, 전영애는 여덟 번째 수상자가 됐다. 학자가 아니라 시인 전영애의 진가를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번역가나 기타 공로자에게 주는 상은 아니다. '독일어로 시를 쓰는 뛰어난 시인'에게 주는 상인데, 그 방점이 '저항으로서의 문학'에 찍힌다. 그 저항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았을까. 그것은 쿤체 시인이 낮은 목소리로 수미일관 주창한 '민감한 길(노선)과 바른 걸음'에서였다. 전영애는 수상 소감을 통해 시인의 '바른 걸음' 안에서 자신에게 맞는 저항의 형식을, 심지어 삶의 원칙을 발견했다고 토로했다.

"통일 독일 이후에도 그는 언제나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비판만을 능사로 삼는 게 아니라, 매우 민감하고 따스하게 생명을 끌어안았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억누르는 것에 대한 비판과 고발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의 시는 날카로움과 섬세함, 그리고 '올곧음'을 늘 함께 지향합니다. 쿤체 시인은 여러 개의 중요한 상을 받았지만 제게 가장 감동적인 연설은 심사위원 7명이 모두 학생인 상의 수상소감이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을 요약하자면 '아름다운 것에 손대지 마라'는 것이었죠. 메르켈 총리가 대학 시절 좋아했던 시인이 바로 쿤체 선생님이었습니다. 몇 년 전 메르켈 총리 부부가 라이너 쿤체 시인의 댁을 다녀가며 제가 기증한 한옥 정자도 구경했습니다. 바쁜 총리가 오전 10시에서 오후 4시까지 6시간 동안이나 귀한 시간을 내어 시인의 말을 들었습니다. 6시에 베를린에서 푸틴 대통령과 통화 약속이 있다며 떠났다고 합니다. 놀랍도록 유능할 뿐만 아니라 시를 좋아하는 메르켈이 지금도 총리라면, 우크라이나 전쟁은 어쩌면 막을 수 있었을 것이란 생각도 하게 됩니다."

더 좋은 타인의 시를 전하는 일이 중요

독일에서 큰 상을 받으며 전영애는 독일 학계와 문화계가 시상식을 진행하는 형식에도 주목했다. 내용뿐만 아니라 그 형식도 시상의 취지를 정중하고 완벽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축사든 답사든 요식 행위는 일절 배제되는 것이 특징이다.

유서 깊은 전통인 라우다치오(Laudatio;축사)는 수상 이유를 깊게 평가, 분석하는 본격적인 강연이다. 수상자가 그 상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증명이기도 하다. 축하하는 사람은 오래 수상자를 연구하여 연설문을 쓴다. 수상자도 답사를 하기 위해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철저하게 준비한다. 수상자는 답사를 통해 수준 높은 학문과 예술론, 또는 시론을 개진한다. 그 밖의 행사도 세심하고 치밀하게 구성하여 시상식의 품격을 높인다.


▲ 전영애9 전영애 교수는 문학과 예술을 통해 전달되는 ‘내면의 힘’이 우리 시대의 삶을 감당할 것이란 믿음을 전영애는 갖고 있다.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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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수상자가 한국인이라는 점을 배려하더군요. 시장이 베를린 한국문화원을 통해 가야금 연주자를 섭외했지요. '한국과 독일을 잇는' 윤이상과 '한국의 전통과 현대를 잇는' 황병기 작품을 연주했습니다. 인근 드레스덴시의 시장 부인이 한국인으로 성악가였는데, 그도 초대받아 축가로 가곡 '동심초'를 들려주었습니다. 차려진 음식도 한식과 독일식이 절반씩이었습니다. 홀 한구석에서는 서점에서 나와 라이너 쿤체 시인의 시집과 제가 독일에서 펴낸 책을 나란히 전시, 판매도 하고요. 또 사전행사로 고교 1, 2학년 학생들과 대담도 이뤄졌는데, 놀랍게도 학생들은 독일어로 된 제 책을 다 읽고 왔습니다. '언어, 경계, 카프카' 를 제 저작의 3개 테마로 설정했더군요. 그 주제로 각자 미술 작품까지 만들어 왔습니다. 작품들은 나중에 행사장에 전시했고요. 질문의 수준도 굉장히 높았습니다. 답사에서 '저의 시는 더 좋은 타인의 시를 전하는 일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을 했는데, 취재했던 기자가 제 발언 취지를 정확하게 포착해 기사의 첫 머리에 올린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괴테는 스승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전영애는 이렇게 답했다. "살면서 여러 훌륭한 작가를 만났는데, 오랜 여정 끝에 가장 큰 인물인 괴테를 종착지로 삼게 된 것"이라고. 괴테는 스승이라기보다 문학 연구의 마지막 탐구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파우스트>에 나오는 두 개의 비문(非文)이 함축하는 바를 잘 살펴보라고 했다. 파우스트를 요약하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를 꼽았다. '천상의 서곡'에 등장하는 문장이다.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로 통상 번역되던 것을 전영애는 "지향이 있다"고 바꿨다.

실상 노력만 한다면 무슨 방황을 하겠는가. 지향이 있어야, 갈 곳을 찾느라 방황도 생기는 것이다. 더구나 독일어 동사 'streben'은 '일로매진'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지향이 있기에 이루어지는 것, 식물이 빛을 향하거나, 탑이 하늘로 치솟는 것도 'streben'이 포괄하는 의미가 된다.

새로운 번역이 훨씬 더 타당하게 느껴진다. 비문의 문제도 그렇다.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은 완벽한 비문으로 느껴지지만,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는 말은 비문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거꾸로 아무런 지향이 없는 사람에게 무슨 방황이 있겠는가. 또 방황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게 지향이 있기 때문이라니 또한 얼마나 위로를 주는가.

같은 맥락의 다른 문장,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선한 인간은 바른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 역시 비문이다. 역시 주님이 악마에게 파우스트에 관해 이야기할 때 나오는 문장이다. 심한 비문이어서 단박에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곱씹어 읽어보면 깊은 울림과 여운이 있다.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을 누가 '선한 인간'이라 부르는가. 어두운 충동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서까지 그 안에 있는 선(善)의 알맹이와 뿌리를 보고, "바른 길을 잘 의식하고 있다'며 큰 신뢰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가르치려는 자세는 전혀 없다. 이 비문의 함의와 그것이 주는 위로가 클 뿐이다. 그런데 이런 글들은 그걸 다듬기 위해 60여년을 공들인 사람의 손끝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전영애는 번역에 있어서도 원문에의 충실에 가장 큰 무게를 둔다. 원문만 들여다보며 번역한다. 더구나 '파우스트'의 경우는 1만2111행에 달하는 정교한 시다. 그 작품의 운율까지 살려보려고 애쓴다. 좋은 글을 충실하게 잘 전달하고 싶은 것이다. 그게 시인의 마음이다.


▲ 저녁무렵의 여백재 저녁 무렵의 여백서원 본관 여백재의 아름다운 모습. 전영애 교수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이 시작되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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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쉬운 지침서들이 횡행하고, 온갖 영상의 힘에 사람들이 휘둘리는 시대다. 문학과 예술을 통해 전달되는 '내면의 힘'이 우리 시대의 삶을 감당할 것이란 믿음을 전영애는 갖고 있다. 그가 괴테 전집의 완성을 추구한다거나, 여주에 괴테마을 조성한다거나, 여백서원을 찾아오는 '잘 모르는 사람'들을 반기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일 것이다. 전영애가 또한 청소년에게 "TV나 게임에만 몰두하지 말고 몸을 움직여서 노동을 하라"고 조언하는 것도, 저 '내면의 힘'을, 그리고 그것을 꾸준히 키워가는 근력을 강화하라는 메시지를 괴테를 빌려 전달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




2화  놀라운 후원자 알프리드 홀레, 학문 스승 헨드릭 비루스를 만나다

[스승을 말한다] 괴테 연구 세계적 권위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②
☞이전기사 : 고향을 등진 소녀, '읽기'를 시작하다 대학시절은 1969년 박정희의 집권 연장을 위한 3선 개헌과 더불어 시작됐다. 학생은 거리로 나갔고, 교정은 노상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다. 군인이 학교 안까지 들어와서 학생...
22.06.28 11:24 ㅣ 한기홍(glutton4)




놀라운 후원자 알프리드 홀레, 학문 스승 헨드릭 비루스를 만나다
[스승을 말한다] 괴테 연구 세계적 권위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②
22.06.28 11:24l최종 업데이트 22.06.28 11:24l
한기홍(glutton4)

치열한 정진의 과정 속에서 좋은 스승은 홀연히 나타난다. 제자는 스승을 만나 도약의 결정적 계기를 맞고, 스승은 제자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 독보적인 괴테 연구가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두 스승의 이야기를 들어본다.[기자말]
☞이전기사 : 고향을 등진 소녀, '읽기'를 시작하다


▲ 전영애 교수가 독일어로 쓴 평생의 연구성과는 독일에서 여러권의 단행본으로 출간됐다.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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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은 1969년 박정희의 집권 연장을 위한 3선 개헌과 더불어 시작됐다. 학생은 거리로 나갔고, 교정은 노상 최루탄 가스로 가득 찼다. 군인이 학교 안까지 들어와서 학생을 잡아갔던 시절이다.

친구는 감옥에 가 있었고, 그는 '더없이 착잡한 마음으로' 학교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공부도 조금 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는 투쟁이 절박한 시절에도, 그 다음의 시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아마도 많은 자문(自問)과 일말의 합리화 사이에서 전영애는 고민했을 것이다.

"대학교 2학년 때 생전 처음으로 독일어 원서(횔덜린의 '휘페리온')를 샀습니다. 그게 너무도 귀해 노상 안고 다녔지요. 읽기보다는 들고 다녀서 낡았던 책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받는 날이면 충무로에 있던 독일 책 전문 서점 '소피아'로 달려가 책을 샀습니다."

프리드리히 횔덜린(Johann Christian Friedrich Holderlin, 1770~1843)은 반평생을 정신 착란으로 불우한 생을 살았던 독일 시인이다. 20세기 초에 와서야 비로소 현대의 시인으로 그 역량을 인정받은 '진정한' 시인이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그를 '시인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 여백재 대들보에 쓴 글 여백서원 본관 여백재 천정 대들보에 전영애 교수가 쓴 글. "여백서원"과 후학, 시를 위하여"라는 뜻이다.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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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페리온'은 이 천재가 남긴 소설이다. '그리스의 은둔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리스인 히페리온이 주인공인데, 그는 그리스 해방전쟁에 참여했다가 '대의'(大義)에도 불구하고 야만적일 수밖에 없는 전쟁에의 환멸로 자연에 은둔했다.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친구에게 보낸 서간체 형식의 소설이다.

당시 서울대 독문과 학생들은 동숭동 문리대 캠퍼스에서 종로 5가를 지나 청계천으로 책방 순례를 나섰다. 헌책방과 LP레코드 가게들이 빼곡히 들어선 곳이다. 또 다른 특별한 외출은 서울 최고의 거리 명동과 충무로로 나가는 것이다. 옛 사보이호텔 옆 건물 3층에 자리했던 독일어원서 전문점 '소피아'로 가는 길이다. 책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높은 천정까지, 멋진 독일어 원서들이 가득 쌓여 있었다. 아마도 이 서점은 전영애의 '마음의 고향' 중 하나가 되어 있으리라.

1985년대 중반부터 동서독 분단문학에 주목

대학 시절 수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시국도 엄혹했지만 독문학과 수업의 수준은 함량 미달이었다. 비가 오는 날은 수업하지 않는 교수도 있었다. 전영애는 "비가 오는 날은 그렇다 치고, 그 선생님은 흐린 날에도 수업을 하지 않으셨다"며 파안대소했다.

<파우스트> 강독은 제2부 초반에 머물러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독일문학사 강의는 희곡 작가 한 명을 소개하는 데 그쳤다. "너희가 제 아무리 공부해도 독일 교수의 조교나 할 수 있느냐"라는 말까지 수업 시간에 들었던 시절이다. 여학생에 대한 편견도 심했다. 어떤 교수는 전영애의 맹렬한 공부가 "비극의 씨앗이 될 것"이라고도 했다. 나훈아의 유행가 '사랑은 눈물의 씨앗'을 빗대어 조롱한 것이다.


1974년 졸업할 때는 서울대 전체 수석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는 "막상 졸업을 하려니, 정말이지 배운 것이 너무도 없어서 부끄러웠다"고 말했다. 배움에의 갈증은 커지기만 했다. 그러나 석사과정을 마치고 난 후의 10여 년은 암울했다. 공부를 해야겠는데 길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전망이 없었습니다. 산적한 사회적, 개인적 문제를 감당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독일 유학의 길이 열리긴 했죠. 두 달밖에 안 된 아이를 두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독일에서 세 학기만을 마치고 돌아와야 했습니다. 유학시절 수업시간 외에는 도서관이 열려서 닫힐 때까지 거기 앉아 미친 듯이 자료를 모았습니다. 헌책을 닥치는 대로 사고, 산더미같이 복사를 했습니다."

그때는 유학을 떠나면 반드시 학위를 받아 '금의환향'해야 하는 것으로 인식됐다. 마무리하지 못한 유학에서 돌아오니 상황은 더 나빠졌다. 독일에서 겨우 시작한 공부를 이제는 막막하게 집에 혼자 쭈그리고 앉아 해야 했다. 볼 책은 자꾸 늘어나는데 책을 구할 수가 없었다.

​"어렵게 구한 책들은 식구들이 모두 잠든 한밤중에 일어나 읽었습니다. 집중해서 읽기 위해 늘 동시에 번역을 했습니다. 타이핑을 하도 많이 하니까 젓가락질을 못할 정도로 손가락에 무리가 갔어요. 그 때 타자기는 교정기능이 없어서 책 한 권 번역하려면 다섯 번 정도는 타이핑을 해야 했습니다."


▲ 여백서원 댓돌 여백서원 댓돌에 놓인 전영애 교수의 검정고무신. 평생 검약했고, 지금도 여백서원을 혼자 관리하기 위한 육체노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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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이 마무리 되면 책에 대한 분석 글도 썼다. 파울 첼란의 난해한 시도 전체를 다 번역했다. 번역 이후에 쓴 글이 모여서 <어두운 시대와 고통의 언어: 파울 첼란의 시>가 됐다.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을 다듬은 책이다.

파울 첼란(1920~1970)은 루마니아 태생의 유대계 독일인이다. 아우슈비츠 체험을 바탕으로 비극적인 서정시를 썼다. 첼란은 '죽음을 부른 나라의 언어(독일어)로' 그 아픔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첼란의 시 <죽음의 푸가>의 첫 연에는 비애와 절망이 가득하다. 그 주문(呪文) 같은 언어를 전영애는 거의 글자 그대로 옮겼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1985년대 중반부터 동서독 분단문학에 주목했습니다. 크리스타 볼프의 '나누어진 하늘', 라이너 쿤체의 '민감한 길'과 '참 아름다운 날들'을 번역했습니다. 동독에서 출간된 책들이었죠. 번역한 글은 대부분 서랍으로 들어갔는데, 나중에 어쩌다 기회를 만나 책이 되기도 했습니다. 번역 후 쓴 글들이 '독일의 현대문학: 분단과 통일의 성찰'과 같은 책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절의 버릇은 평생 지속됩니다. 남의 나라 문학이 본업인지라 책을 분석한 글은 저절로 독일어로도 쓰게 됐고, 그러다 보니 독일에서도 저서가 제법 여러 권 나오게 되었습니다."

좋은 도서관들에 제자리를 만든 일이 보람

2016년 퇴직하여 연구실을 떠날 때, 전영애는 250개 박스 분량의 책을 꾸렸다. 그 책들이 여백서원의 일부가 됐고, 이제는 여러 사람과 나누어 읽고 있다. 퇴임 후에는 서원을 혼자 돌보느라 그전보다 일이 훨씬 더 많아졌다. 읽고 옮기고 쓸 책도 더 늘어나, 주경야독의 생활이 더 깊어졌다.

가장 행복한 시간은 서원에서 해야 하는 일들을 어느 정도 마무리한 늦은 밤이다. 작은 등불을 들고 캄캄한 후원을 걸어 작은 단칸방 집의 불을 켤 때다.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시간인 것이다. 하긴 그가 책을 읽는 공간은 세계 도처에 널려 있다. 언젠가 그는 이런 글을 쓴 적이 있다.

"돌아보니 세상에서 한 가지는 야무지게 해낸 일이 있다. 좋은 도서관들에 제자리를 만든 일이다. 뮌헨에도, 베를린에도, 바이마르에도, 케임브리지에도, 잠시 들른 더블린과 시카고에까지도 괴테의 G자 어름쯤의 서가 가까운 창가, 한 그루쯤 나무가 가지를 드리운 곳에 내 자리가 있다. 아니, 세계는 내게 도서관 내 자리의 망(網)이다. 세상 어딘가에, 곳곳에, 나를 아끼는 사람들이 그리로 나를 찾아올 만큼, 때로는 우편물이 그리로 올 만큼의 내 자리가 있다는 건 얼마나 큰 부유함인지. 그런데 도서관에서야 어딜 가든지 그냥 앉아만 있으면 내 자리가 되니 쉬웠다. 달리 지상 어디에 그리 쉽게 한 자리가 생기겠는가."

전영애가 꼽는 잊을 수 없는 세 사람이 있다. 두 명의 스승, 한 명의 열렬한 학문적 후원자다. 세 사람 모두 독일인으로 그의 정진과 도약에 큰 힘이 되어 준 사람들이다. 몇 년 전 별세한 후원자는 바이마르 괴테학회 재정감사를 지낸 알프리드 홀레(Alfried Holle)씨다.


▲ 서동시집 초판본 독일 괴테학회 재무이사를 지냈던 알프리드 홀레가 전영애 교수에게 기증한 괴테 <서동시집>의 초판본. 1819년 간행된 것으로 희귀본 중의 희귀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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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두 사람은 '학문의 스승'과 '시의 스승'이다. '학문의 스승'은 독일 문학의 대가이며, 세계적인 비교문학 연구가 헨드릭 비루스(Hendrik Birus)다. 전영애는 그에게 괴테 <서·동시집>의 진수를 배웠다. '시의 스승'은 우리 시대 독일을 대표하는 한 시인 라이너 쿤체(Reiner Kunze)이다. 학문의 후원자 알프리드 홀레에 대해 전영애는 그의 책 <인생을 배우다>에 이렇게 썼다.

"(홀레 씨가 돌아가신 직후) 서울의 학교로 돌아오니, 책 200여 권이 담긴 상자들이 항공우편으로 도착해 연구실에 높이 쌓여 있었다. 나는 말을 잃었다. 홀레 씨가 임종을 앞두고 정리를 해서 보내신 것이다. 내가 괴테 공부를 한다고 괴테의 '서·동 시집' 초판본(1819년)과 '파우스트' 희귀본(1854년)을 전해 주셨는데, 이제 그 가치를 평가조차 할 수 없는 귀중본이 담긴 상자들이 또 온 것이었다. 다들 훌륭한 사회인인 당신 자녀들도 있는데, 홀레 씨는 가장 귀중한 책을 내게로 보내셨다. 그 책을 누구에게 보내야 가장 귀하게 읽히고 잘 보관될 것인가를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았다…. 그 집에 쌓인 수많은 편지를 보고 여러 일화를 들으면서 그의 생애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른다."


▲ 괴테 <서동시집> 에세이 독일에서 출간된 전영애 교수의 괴테 <서동시집>에 대한 7편의 소논문집. "영원한 생명을 간구하며"라는 제목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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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전에 잠깐 인연이 있었지만 1999년 괴테 탄생 250주년 때 독일 뒤셀도르프에서 열린 기념 학회에서 홀레씨 부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때 전영애는 괴테의 서·동시집에 대해 강연을 했는데, 홀레 부인은 끝난 후에 자신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제안을 했다.

"사양을 하고 호텔에 갔더니 과일 바구니를 보내셨더군요. 와서 하룻밤 자고 가라는 쪽지와 함께. 할 수 없이 갔는데, 그때 제가 관심 있을 만한 책과 기사들을 손님방 책상에 가득 늘어놓으셨어요. 그걸 다 읽고 오느라 무려 열하루가 걸렸어요. 괴테 '서·동시집' 초판본을 보고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죠. 나중에 그 책이 저에게 돌아올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홀레씨는 '문학이 사람을 만든다'고 믿는 분이었어요. 독일의 아주 건강한 교양시민입니다. 속물적 의미의 '교양인'이 아닌 진짜 '교양인'이죠. 독일의 괴테, 쉴러, 베토벤, 모차르트는 실상 두터운 교양시민 계급이 만든 겁니다. 언젠가 크리스마스 무렵 홀레씨 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어요. 괴테의 시 한 편으로 바이마르의 상징이 된 게 은행잎입니다. 아주 어린 손주들이 은행잎을 본뜬 쿠키를 직접 구워 제게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괴테의 아주 긴 시를 크리스마스 트리 앞에서 암송하였던 겁니다. 제가 쓴 독일어 책과 비교문학을 하는 제 딸의 논문까지 진열해놓으셨어요. 이런 분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는 게 제 인생의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 전영애 헨드릭 비루스 2011년 바이마르 괴테협회가 수여하는 "괴테 금메달" 상을 받고 스승 헨드릭 비루스 교수와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 전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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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석학에게 받은 놀라운 제안

'학문의 스승' 헨드릭 비루스를 만난 계기도 홀레씨가 다리를 놓았다. 두 사람은 전혀 교류가 없었다. 홀레씨 집에서 열하루를 묶고 떠나려 할 때, 그는 전영애에게 "지금 독일 남부에서 괴테 서·동시집 세미나가 열리는데, 참여할 생각이 없느냐"고 물었다. "헨드릭 비루스의 괴테 서·동시집 세미나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죠. 무거운 트렁크를 들고 세미나가 열리는 남부 독일로 향했습니다.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들어가는 아주 작은 마을이었어요. 맨 앞자리에 앉아 눈을 반짝거리며 강의를 듣던 작은 체구의 동양인 여성의 모습이 비루스 선생의 눈에 띄었겠죠. 선생님이 어떻게 오게 되었느냐고 묻길래 뒤셀도르프 박물관에서 괴테 서·동시집 강연을 하고, 홀레씨 집에 열하루를 묶은 후 세미나에 오게 된 사연을 설명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비루스 선생님이 '토요일 저녁 때 내 강연이 잡혀 있는데, 나 대신 강연을 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하셨습니다. 순간 정신이 혼미해졌죠. 세계적인 석학에게 이 놀라운 제안을 받았으니까요.

'품이 넓은 사람'이 아니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제안이었습니다. 다음날 서·동시집에 대한 강연을 와들와들 떨면서 했는데, 강연 내내 비루스 선생님이 눈을 반짝이면서 제 강연을 경청하셨습니다. 강연을 끝내자 선생은 놀랍게도 키스를 해도 되냐고 묻더니 장한 소년에게 하듯 이마에 키스를 해주셨어요. 그리고 선생님과 함께 근처의 들판을 산책하며 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때 제가 막 스물일곱 번째의 독문학 관련 책을 내고 왔다는 말을 듣고는 한 번 더 가볍게 키스를 해주시더군요. 살면서 세상에서 받아본 적이 없는 큰 격려였습니다. 비루스 선생님과 저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죠. 독일문학이나 독일 학회에 대한 그 어떤 질문에도 늘 명쾌한 답을 주셨습니다. 방대한 지식의 스케일, 유쾌하고 명확한 태도가 마치 괴테의 현현을 보는 것과 같았습니다. 덕분에 저는 독일학계의 중추적인 인물로 성장한 선생님의 제자들과도 아주 돈독한 관계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독일 학계 곳곳에 아주 든든한 거점을 확보하게 된 것이죠."


* 3부(라이너 쿤체와의 만남, 시와 학문을 아우르다)로 이어집니다.



1화  고향을 등진 소녀, '읽기'를 시작하다

[스승을 말한다] 괴테연구 세계적 권위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①
괴테연구의 대가, 독문학자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를 여백서원(如白書院)에서 만났다. 여백서원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에 있는 도서관이자, 연구공간이다.대중과 만나 토론하고 독서하며 휴식을 취하는 '만남의 광장'이기도 ...
22.06.28 11:19 ㅣ 한기홍(glutton4)


고향을 등진 소녀, '읽기'를 시작하다 - 오마이뉴스

정진과 도약의 여정, 나의 스승을 말한다 | 1화

고향을 등진 소녀, '읽기'를 시작하다[스승을 말한다] 괴테연구 세계적 권위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①
22.06.28
 
한기홍(glutton4)

치열한 정진의 과정 속에서 좋은 스승은 홀연히 나타난다. 스승은 제자에게 도약의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다. 스승은 또한 제자를 통해 자신의 삶을 완성한다. 독보적인 괴테 연구가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두 스승의 이야기를 들어본다.[기자말]


▲ 전영애 교수는 장시간 인터뷰를 통해 정진과 도약의 과정, 두 스승에 대한 이야기를 소상히 털어놨다.

괴테연구의 대가, 독문학자 전영애 서울대 명예교수를 여백서원(如白書院)에서 만났다. 여백서원은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걸은리에 있는 도서관이자, 연구공간이다. 대중과 만나 토론하고 독서하며 휴식을 취하는 '만남의 광장'이기도 하다. 2014년 첫 삽을 떠서 여백서원 조성은 일단락되었지만, 지금도 건축은 계속되고 있다.

여백서원과 가까운 동산 곳곳에 그는 '작은 괴테 마을'을 조성하고 있다. 이 큰 역사(役事)를 거의 혼자 힘으로 추진하고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6월 중순 화창하게 개인 날 여백서원은 고적하고 아름다웠다. 깨끗하고 푸르렀다.

그를 만나보니 걱정이 앞선다. 잔디밭 잡초를 일일이 손으로 김을 매는 일부터, 이 너른 공간의 관리를 거의 혼자 도맡고 있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1951년 생으로 이미 고희를 넘긴 나이다.

그것이 기적과 같은 이유는 여럿 있다. 우선 그는 향후 5년 안에 24권에 달하는 괴테 전집을 출간하겠다는 대담한 목표를 추진하고 있다. 얼마 전 10년 계획을 5년으로 줄여 잡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기발하다. "10년을 잡으면 20년이 걸릴 것 같고, 그나마 5년으로 바싹 당겨 놓아야 10년 안에 마무리 될 것 같다"는 것이다.


▲ 전영애 교수가 퇴임 후 경기도 여주에 지은 연구공간 여백서원의 입구.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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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집 24권 중 4권은 그의 괴테 연구서가 포함된다. 나머지 20권에 들어갈 괴테 작품을 선별하고 분류하여 번역하는 일은 '간난신고'의 대 작업일 수밖에 없다. 괴테의 시, 드라마, 소설, 서간집 등을 망라한다. 중국의 경우 괴테 전집 발간작업에 120명의 학자를 투입하고 있다는데, 혼자의 힘으로 어떻게 이 대역사를 마무리 할 것인가.


그러나 그는 '국책 사업'으로 추진되는 중국의 경우를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본다. "120명이 투입되어 남김없이 번역하겠다는 것은 거대한 기념물이야 되겠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한 단어가 120가지로 번역될 수도 있다는 의미"라는 생각이다. 그는 단호히 주장했다. "혼자 하는 일은 힘들지만, 그래도 혼자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한 일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지난 50년 간 괴테를 읽었던 공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마치 태산을 옮기는 일과 같이 거의 무한대의 집념 없이는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절반 정도는 번역을 마쳤다고 하니 '5년 내 완성'이 불가능한 목표는 아닐 수 있다.

가장 난해한 작업으로 꼽히는 <파우스트>는 지난 2019년 두 권으로 번역돼 이미 출간됐다. '도서출판 길'이라는 작은 출판사가 이 전집의 출간을 자청했다. 직원이 사장을 포함하여 세 사람에 불과한 출판사다.

사장이 서울대 독문학과 동기동창이란 걸 나중에 알았지만, 소개 받기 전에는 동창생이 그 출판사의 사장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전영애에게는 '도서출판 길'이 미스터리다. "꼭 망할 것 같은 좋은 책만 골라 출간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전영애의 독문학 독법은 특이했다. 어떤 작품이건 읽으면서 번역을 해둔다는 점이다. 출간 여부와 상관없이 번역을 한다.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그 누구보다도 치밀하고 꼼꼼하게 작품을 접하게 된다는 장점이 있다.


▲ 전영애 교수는 여백서원 근처 작은 동산에 "작은 괴테마을"을 건립 중이다. 사진은 괴테마을에 들어설 "젊은 괴테의 집"이다. 올 연말 경 완공 예정이다.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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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같은 계기, 예상치 못했던 '백기사'의 도움

그 사이 70여 권의 책이 묶였음에도 출간하지 않은 번역 원고가 아직도 제법 있다고 하니, 전영애의 자신감은 서랍에 넣어둔 그 미 출간 원고에서 나오는지 모른다.

여백서원 근처 동산에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괴테 마을도 전집 못지않은 대 역사다. 필생의 꿈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이마르 괴테 하우스, 프랑크푸르트 괴테 생가, 괴테가 설계한 벨베데레 정원까지 그의 흔적을 평생 관찰하고 궁구했던 전영애다.

그는 "나이 일흔이 넘으니 괴테의 전모가 한눈에 보이는 것 같고 알맹이만 가려낼 안목이 생긴 것 같다"고 말한다. 전집 작업 못지않은 의욕과 자신감을 내비친다. 그러나 그가 피력한 자신감의 근거는 소박함과 욕심 버리기다. 크게 지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전집 작업과 마찬가지로 에센스만 모으면 된다는 전략이다. 여주를 동양의 괴테마을로 조성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한 프로젝트로 본다. 괴테의 고향 바이마르가 인구 6만 명의 소도시임에도 세계적인 문화 도시가 된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괴테마을의 공공성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면 순조로운 건립은 장담할 수 없다. 여백서원 건립에만도 거의 기적과 같은 계기, 전혀 예상치 못했던 백기사의 도움이 작용했다. 괴테마을 본관 건축은 공사비 급등으로 예정된 계획이 보류된 상태다.


▲ 여백서원은 매년 5월 말에 오마토를, 10월 말에 시마토 행사를 갖는다. 각각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리는 이 행사에는 제자들과 일반인이 모여 독서와 토론회, 작은 공연을 갖는다. 지난 5월 28일 오마토 행사 때는 대안학교 학생들이 방문해 저글링 공연을 펼쳤다.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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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3200평 규모의 여백서원을 돌아본다. 시의 정자라는 의미로 시정(詩亭)을 먼저 세웠고, 서원 본관인 이곳 여백재(齋)를 지었다. 해외 학자 게스트하우스 우정(友亭), 작은 갤러리와 '스무 명을 위한 파우스트 극장'이 있는 예정(藝亭)이 있다. 또 차고를 개수하여 어린이도서관을 만들었다.

일반인에 공개하는 날은 매월 마지막 토요일이다. 5월과 10월에는 특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글을 읽고 강연과 토론을 한다. '오마토'(5월의 마지막 토요일), '시마토'(10월의 마지막 토요일)라고 부르는 날은 여백서원의 명절이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알아서' 먹고, 자고 간다. 서울대에서 강의를 들었던 제자들도 찾아오지만 대부분은 서로 친소,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사람들이다. 누구든 환영을 받는다.

"출발부터 '진짜' 작가를 만난 것이 축복"

전영애는 자수성가한 학자다. 사실상 혼자 힘으로 학문을 일궜다. 외롭게 공부했고, 지독한 끈기와 집념으로 도전했다. 그가 스승으로 꼽은 인물들도 40~50대에 만난 사람들이다. 그들을 만나기 전 그의 학문적 기반은 이미 확고했다. 무수한 독일 작가들에 대해 통찰 가득한 논문을 썼다. 그러나 그는 스승을 통해서도 도약했다. 그 과정이 드라마틱했다.

괴테만을 읽은 게 아니다. 최고의 독일어 작가들을 두루 섭렵했다. "출발부터 '진짜' 작가를 만난 것이 축복"이라고 그는 말했다. 프란츠 카프카와 파울 첼란, 라이너 쿤체를 깊이 연구했다. 그리고 크리스타 볼프, 폴커 브라운, 두어스 그륀바인 등 분단시대 작가들을 거쳐 최근에는 그림 형제와 니체로까지 나아갔다.

지난 5월 라이너 쿤체상을 받을 때 미하일 크노헤 박사가 축사를 했다. 25년간이나 바이마르 '안나 아말리아 대공비 도서관'의 관장을 맡았던 인물이다. 1995년 전영애가 괴테학회 장학생으로 바이마르에 왔을 때를 그는 이렇게 회상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도서관에서 공부했다. 도서관 문을 닫는 '마지막 1초'까지 공부했다. 대체로 그는 기숙사가 있는 벨베데레 성으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쳤다. 마지막 몇 분이라도 더 도서관에 있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걸어야 했다."


▲ 전영애 교수의 증조부가 남긴 책 <노재문집>. 목판본으로 전해오던 것을 1962년 후손들이 책으로 묶어냈다.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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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애의 부계와 모계는 학맥과 학풍이 깊었다. 증조부는 유서 깊은 안동 도산서원과 영주 소수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모계 쪽도 못지않았으나 6.25 전후 극심한 비극을 겪어 몰락했다고 한다. 증조부 상은 8일장으로 치렀다. 장례를 치르면서 60가마 분량의 쌀로 밥을 지었다고 한다.

조부는 일찍 돌아가셔서 기억이 없다. 전 교수의 부친 전우순은 그래서 당신의 조부(전영애의 증조부) 슬하에서 성장했다. 부친은 91세로 별세하기 몇 년 전부터 조부가 남긴 문집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전념했다.

"그 작업은 지난했습니다. 선친은 옥편 여러 권을 옆에 두고 문집을 번역했어요. 문집은 시·서·명·기(詩·書·銘·記) 4부분으로 이뤄졌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글을 남기지 않으려는 선비의 습벽 때문에 증조부가 당신의 시(詩)를 거의 남기지 않고 버렸다는 것이었어요. 타인에게 보낸 서간문(書)도 수집이 쉽지 않았겠지요. 묘비명(銘)과 공무기록(記)은 남아 있었겠지만요. 조부가 버린 시가 적힌 종이를 손자들이 모아둔 게 있었나 봅니다. 글을 남기지 않으려는 것은 선비로서 마지막 허영심까지 버리려는 태도인데, 그 정신이 자못 고고합니다.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고 경성에 오셨을 때 '남대문 앞에 풀이 무성하다'는 내용의 짧은 시를 한 수만 지으셨더군요. 담담한 표현에서 망국의 슬픔이 오히려 더 강하게 읽혔습니다."

신문지조각도 밟지 않았던 어머니

증조부는 1954년 무렵 돌아갔는데 1962년 후손들이 판각을 해서 문집을 냈다. 그 목판본은 아직도 증조부가 살던 영주의 옛집에 남아 있다. 그 집은 규모는 작지만 좋은 목재를 썼다. 튼튼하게 지어 그 원형이 잘 보존돼 있다는 것이다. 전영애는 영주의 이 고택을 여주 '여백서원'에 옮겨 복원하고 싶다.


▲ 부친이 한글로 번역한 전영애 교수의 증조부의 문집. 별세하기 몇년 전부터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완성한 책이다.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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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친은 당신 조부의 문집을 번역하면서 목판본의 한문을 한자 한자 모두 새로 쓰셨습니다. 한 글자만 틀려도 그 페이지 전체를 다시 써야 하는 고된 작업이었겠죠. 저기 보이는 것처럼 38자루의 붓의 끝이 모두 망가졌습니다. 우연히 서원에 들른 전문가 한 분이 그러시는데 붓 하나로 적어도 2만자 이상을 써야 그렇게 마모가 된다고 합니다. 최소한 80만자 이상을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죠."


▲ 전영애 교수의 부친이 생전에 사용한 붓. 마모된 정도로 보아 80만 자 이상의 글자를 썼던 것으로 추정된다.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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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인텔리로 성장했다. 일제시대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대 문리과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5·16 이후 잠깐 정치에도 뜻을 둔 적도 있기는 했으나, 대개는 고향 영주의 한 농업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부친은 장손이었다. 증조부에게 한학을 배우다가 12세에 학교에 들어갔다. 2학년 때 결혼을 하여 두루마기를 입고 학교에 다녔다. 16세에 시집에 온 모친은 큰 집안 살림을 꾸리느라 신고(辛苦)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결혼 18년 만에 전영애를 낳고, 8년 차이가 나는 동생이 생겼다. 어머니는 성정이 자상하고 배움에 대한 열망이 큰 사람이었다. 어린 딸 전영애가 서울에 유학할 때 붓으로 쓴 편지를 많이 보냈다고 한다. 그 편지들을 제대로 보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다.

"일을 하시다가 수업을 마치고 멀리서 아장아장 걸어오던 제가 보여도, 따뜻하게 한 번 기다려 맞아주지 못했던 것을 못내 슬퍼하셨죠. 2학년 말에 제 키가 128cm였는데, 학교까지 왕복 12km을 걸어서 다녔거든요. 어머니는 목화씨를 뿌려 그 무명실로 옷을 지으셨고, 탈곡기에서 껍데기 있는 벼를 받아 밥 짓기를 시작하셨어요."


▲ 글읽기를 좋아했던 전영애 교수의 모친은 생전에 한글 육전소설 등 수많은 책을 붓으로 필사했다. 여백서원 본관 천정에 가로로 길게 걸어 전시했다. 전 교수는 모친의 이 필사본을 바라보며 학자로서의 마음가짐을 여민다.
ⓒ 주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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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김이 잘 생기고 수축되기 쉬운 게 무명옷이다. 그 옷을 일일이 손질하고 간수하는 데에 또한 얼마나 많은 수고를 바쳐야 했을까. 모친은 학교 문턱에도 가본 적이 없었지만 홀로 독서에 매진했다. 글을 너무도 사랑했다. 신문지 조각이나, 광고전단지조차 함부로 밟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종이 위에는 글이 인쇄돼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생애를 사셨습니다. 그 와중에도 책만 보면 일일이 한지에 필사를 했습니다. 그것이 낱장이 되어 흩어지도록 읽었고, 읽은 책은 다 외우셨어요. 어릴 때 육전(六錢)소설을 어머니랑 같이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납니다."

중학생 때부터 시작된 '읽어야 할 운명'

그러면서 모친이 붓으로 필사한 글들을 보여준다. 책으로 묶인 것은 <강릉추월전> 한 권밖에 안 남아 있지만, 규방가사 두루말이들은 오동나무 함에 가득 들어 있다. 여백서원을 찾는 이에게 모친의 필사본을 자주 보여준다. 귀한 것과 간절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영주에서 초등학교 5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가게 됐죠. 선친이 저도 모르게 서울에 하숙집을 마련하셨어요. 미리 준비를 하고 계셨던 거죠. 영주에서 서울까지 기차를 여섯 시간 반을 타고 가는데, 코가 새까매졌던 기억이 납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전영애는 1963년 경기여중 시험에 합격했다. 시골 어린이가 홀로 서울에 유학을 온 것만도 대견한 일이다. 단 1년을 공부하고 경기여중에 입학했으니 놀라운 일이다. "영주에서 신동 소리를 들었느냐"는 질문에는 "그럴 리 없다"며 웃는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 명문학교 입학에는 치맛바람이 거셌다. 입학 시험장에는 학부모들이 구름처럼 몰려왔다. 6학년 때 담임교사는 은근히 전영애의 '수석입학'을 기대했다고 한다. 필기시험에서 거의 만점을 받았기 때문이다.

담임선생은 남대문 시장에 가서 체력고사용 바지를 사주기도 했다. 가벼운 저지 바지였는데 회색 바탕에 초록색 다이아몬드 문양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그런 '귀한 옷'을 입고도 체력장 결과가 시원치 않아 수석은 하지 못했다.


▲ 전영애교수의 망중한 전영애 교수의 망중한. 전 교수는 3200평 규모의 여백서원을 혼자 관리하면서 괴테전집 번역과 "작은 괴테마을" 건립에 진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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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전영애의 인생에 한 번도 개입하지 않았다. 경기여고를 거쳐 서울대 독문과에 진학했던 때가 1969년이다. 대학 진학할 때 "약학을 전공하면 어떻겠느냐"는 '의견'을 제시한 적이 있지만, 문학에 뜻을 뒀던 전영애는 부친의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 "그 이후 아버지는 한 번도 제 인생에 개입하지 않았다"는 것이 전영애의 회상이다. 어릴 때 부친의 모습은 전영애의 기억에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 정도로 부친은 바깥일에 분주했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남은 시간은 큰 집안의 대소사를 챙겨야 했다.

부친이 했던 말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신외무물'(身外無物)이다. "몸 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즉 몸이 가장 귀하고 소중하다는 말이다. 무슨 일을 하든 도무지 몸을 아낄 줄 모르는 딸이 염려되었던 것이다. 가끔 하나를 덧붙여서 "세상에 투기(妬忌)처럼 무서운 것은 없는데…."라며 말끝을 흐렸다고 한다. 그렇게 열심히 세상을 살아가며 겪게 될 어려움을 내다보신 아버지로서의 염려였을 것이다.

전영애의 독서욕은 대단했다. 문학작품을 좋아했다. 인문학이라는 것은 결국 읽는 것인데, '읽어야 하는 운명'은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시작됐다.

"경기여중고는 귀한 집 딸이 많았습니다. 촌에서 올라온 저는 '미운 오리새끼'였지요. 수업이 끝나면 도서실에 앉아 있거나, 학교 앞 작은 서점에 들렀다가 초라한 하숙방으로 돌아가곤 했습니다. 고향집에서는 매달 하숙비 외에 용돈도 조금 보내왔는데, 저는 돈을 쓸 줄 몰랐어요. 언젠가 붕어빵을 한 봉지 사본 기억밖에 없을 정도로…. 그때 마침 큰 출판사 두 곳에서 세계문학전집을 내고 있었습니다.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을 샀던 기억이 납니다. 한 권에 200원 남짓했던 그 책들이 문학공부의 첫 걸음이 됐죠. 풀빛 하드커버의 촉감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제인 에어> <개선문>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같이 쉬운 책도 있었지만, <백경> <신곡> <팡세> <파우스트>와 같은 어려운 책도 고생하며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시절 릴케와 헤세를 읽은 것이 나중에 독문학을 택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2부(놀라운 후원자 알프리드 홀레, 학문 스승 헨드릭 비루스를 만나다)로 이어집니다.

전영애는....
△1951년 경북 영주 출생 △1973년 서울대 독문과 졸업 △1985년 서울대 독문과 박사 취득 △1985년 경원대 독문과 부교수 △1996년 서울대 독문과 교수 △2006년 한국괴테학회장 △2008년 독일 프라이부르크 고등연구원 수석연구원 △2008년 독일 뮌헨대 강사 △2011년 독일 바이마르 괴테학회 수여 괴테 금메달 △2011년 서울대 교육상 △2011년 한국문학번역원 이사 △2014년 여백서원 건립 △2015년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대 초빙교원 △2016년 서울대 정년 퇴임 △2020년 삼성행복대상 △2020년 이미륵상 △2021년 라이너 쿤체상 △'괴테 시 전집' '괴테 자서전 시와 진실' '파우스트 I·II' '괴테 서·동 시집' '데미안' '변신·시골의사' 등 70여 권 번역 및 소개

2023-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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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 261쪽

2017-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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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출 (지은이) | 북랩 | 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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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70년대 독일로 간 2만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 '한강의 기적'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도 잊힌 그들. 경제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한 서린 50년을 밝힌다. 저자는 2년여에 걸친 현지 취재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또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는 새로운 사실들도 정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포착하여 저널리스트다운 관점에서 냉철하게 표현해냈다.





프롤로그 ‘한강의 기적’ 신화의 첫 주역을 찾아서 · 004

제1장 역사로 퇴장한 ‘신화神話’
아듀! 마지막 한국인 파독 광부 · 016
“마지막 파독 광부는 운명” · 022
‘하인리히의 아저씨’로 우뚝 서기까지 · 027
혼란스러움 또는 한국의 개발시대 · 032
태권도 은메달리스트의 꿈, 파독 광부 · 036

제2장 가슴 아픈 광부 파독의 진실
1963년 12월 한국인 광부 독일에 서다 · 042
“지급보증 없앨 테니 광부 5000명 보내라” · 047
독일, 한국의 우수 노동력에 주목 · 053
노동력과 ‘종잣돈’의 교환 · 058
‘오르도학파’의 우정 · 062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에 기여 · 068
가난한 국비 유학생, 기내식에 울다 · 073
보론: 서독 차관과 광부 파독 간의 관계 · 077

제3장 지하 1,000m에서의 사투(死鬪)
1964년 5월 한국인 광부 입갱 · 084
희망 또는 마지막 비상구 · 090
독일 광부 만들기 · 096
지하 1,000m에서 뿌린 눈물 · 103
“우린 매일 목숨 건 전투를 했다” · 108
한국인 광산 노동자들의 일상 · 113
“외국인 노동자라고 푸대접하지 마라” · 121

제4장 신화의 동반자(同伴者), 파독 간호사
‘물새’들의 비상 - 뮌헨에서 베를린까지 · 130
1966년 1월 한국인 간호사 대규모 파독 · 134
간호사 파독의 산파, 이수길 · 143
“월급 20마르크, 독일 수녀복 입어라” · 147
그들은 노동자 농민의 딸 · 151
모든 낯설음이 선善은 아니나니 · 155
내면과 문화의 깊이를 키운 사랑 · 159
가슴을 적시는 게 어디 땀뿐이랴 · 162

제5장 격동의 현대사 속에서
1964년 박정희 대통령의 방독 · 168
1967년 ‘동백림 사건’ 세계를 강타하다 · 173
‘간첩’으로 내몰린 파독 광부들 · 179
인천상륙작전 참여 해병1기도 ‘간첩’으로 · 184
간호사 파독의 대부大父도 고초 · 189
한·독 관계에도 큰 타격 · 196
황당하게 끝난 총체적 의혹 사건 · 200
결코 잊힐 수 없는 고문의 기억 · 205
68운동-짧은 만남, 긴 여운餘韻 · 212

제6장 남은 자와 떠나는 자, 그리고 돌아온 자
남은 자 - 한국 가발 신화를 쏴라1 · 218
남은 자 - 한국 가발 신화를 쏴라2 · 223
남은 자 - 한국 가발의 신화를 쏴라3 · 227
떠나는 자 - 바다를 가르거나 하늘을 나르라1 · 232
떠나는 자 - 바다를 가르거나 하늘을 나르라2 · 240
‘독일 정신’을 품고 돌아온 자1 - 한국 영화에 기여하라 · 244
‘독일 정신’을 품고 돌아온 자2 · 250

제7장 2차 파독과 재독 교민사회의 정착
1970년 광부 파독 재개 · 256
“우리는 돈을 벌기 위해 왔다” · 261
경험 차이에서 빚어진 ‘불법재판 사건’ · 265
“기쁨과 슬픔을 함께” 글뤽아우프회 창립 · 269
동포 사회에 상처 준 서류위조 사건 · 273
여행, 광부와 간호사의 다리가 되어 · 278
한글학교에서 배우는 한국 정신 · 283
함박눈과 함께 저문 광부 파독 · 288
간호사 강제귀국 반대운동 · 292
“광주여, 십자가여!” 힌츠페터에게 진 빚 · 297
베를린 장벽 붕괴에서 통일을 읽다 · 305

제8장 경제 초석 놓고 독일에는 한국혼
‘한강의 기적’ 씨앗이 된 광부 간호사의 송금 · 310
한·독 관계 발전에도 도움 · 319
서울올림픽 유치와 ‘차붐 신화’에도 힘 보태 · 324
독일에서 이미륵을 되살리다 · 330
바이엘제약의 문을 연 한국인 · 334
이미륵 되살린 연구자, 정규화와 전혜린 · 338
독일 사회에 핀 ‘이미륵 신화’ · 343

제9장 돌아오지 못한 영혼들
지하 1,000m의 첫 희생자 · 352
계속되는 광부들의 희생 · 357
사건사고 사망자도 속출 · 364
가정 파탄도 적지 않아 · 370
눈물로 피워낸 ‘Lotus-Blume(연꽃)’ · 374
파독 광부의 절규, “우리를 잊지 말라” · 379

제10장 ‘전도된 신화’의 진실을 찾아서
서독 차관, 한국 경제성장에 보탬 · 386
독일 기업에도 ‘특수’ 안겼다 · 391
‘일괄거래의 마술사’ 슐 아이젠버그 · 395
아이젠버그, 베일 속 역할을 찾아서 · 403
‘박정희 신화’와 파독 광부의 진실 · 409
지켜지지 못한 대통령의 약속約束 · 415

에필로그 눈물 젖은 역사와 우리의 무관심 · 420

참고문헌 · 425
시의 출처 · 434
Index · 436




P.5~6 :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1960, 70년대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성장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해야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1960, 70년대 한국 경제의 성장을 총체적 또는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역할만이 아니라 시민, 기업 등 다른 경제 주체의 역할과 대외환경 변화 등도 함께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특히 같은 시기 이름도 명예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민초들의 땀과 눈물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고선 결코 제대로 볼 수 없다고.
졸저 『독일 아리랑』은 바로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즉 파독 광부와 간호사를 중심으로 민중의 시각에서 1960, 70년대 한국 현대사를 기록하고 재해석해보고 싶었다.

P.108 : 더위는 살인적이었다. 지하 700-1,200m에 있는 독일 광산의 막장 온도는 섭씨 25-40도 사이로, 30도는 쉽게 넘는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나오는 이곳에서 안전을 위해 ‘중무장’을 한 채 하루 평균 80여 개의 쇠동발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권이종 등은 속옷만 입거나 아예 윗옷을 다 벗고 일하는 게 다반사였다. 땀에 젖은 팬티를 하루 다섯 번 이상을 짜 입어야 했고, 장화는 땀으로 젖어 열 번 이상 땀을 쏟아내야 했다. 김태원의 얘기다.

P.164~165 : 파독 간호사들은 독일 병원에서 처음에는 환자의 공동 화장실을 청소한 뒤 환자 침대 청소, 휴게실에서 간호사 아침상 차리기 등으로 업무가 바뀌어갔다. 쉬운 일이 없었다. 병실 청소를 하던 간호사에게 화장실 청소까지 주문하기도 했다. (중략) 환자를 목욕시키는 일도 많은 한국 간호사를 울렸다. 여자 환자는 전신 목욕을 시켜줘야 했고, 일부 근력이 떨어진 환자의 경우 두 다리를 간호사 어깨 위에 올리고 씻겨줘야 했다. 특히 덩치가 큰 남자 환자의 경우엔 더 힘들었다. 마치 파독 광부가 쇠동발을 붙잡고 울듯이, 그녀들은 남성 환자를 목욕沐浴시키며 펑펑 눈물을 쏟아야 했다.






저자 : 김용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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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비선 권력>,<독일 아리랑>,<독서경영> … 총 7종 (모두보기)
소개 :
신문기자 및 작가.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쪽으로 바다를 향해 가다 보면 닿는 곳, 전남 장흥에서 1969년에 태어났다. 나주 금성고를 거쳐 1995년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에는 ‘문학의 향연’에 취하기도. 1997년 8월 세계일보에 입사한 이래 정치부와 경제부, 사회부, 문화부 등에서 일했고, 2012년 4월부터 3년간 도쿄 특파원을 지냈다. 현재 탐사보도팀에서 근무 중. 쓴 책으로는 『시대를 울린 여자: 최옥란 평전』(2003), 『독서경영: 지속성장을 위한 강력한 경쟁력』(2006, 공저), 『독일 아리랑』(2015, 개정판) 등이 있다. 이달의 기자상(9회)과 한국신문상, 국제앰네스티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꿈은 1000년이 가는 잡지를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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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70년대 독일로 간 2만여 명의 광부와 간호사,
‘한강의 기적’에 커다란 공헌을 하고도 잊힌 그들.
경제성장의 이면에 가려진 한 서린 50년을 밝힌다!

파독 광부, 1963년부터 1977년까지 약 14년간 7,936명.
파독 간호사, 1966년부터 1976년까지 약 10년간 10,226명.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일반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이야기가 이제는 광복 70년을 기념해 편성된 KBS의 [뿌리 깊은 미래]에도 등장하며 소중한 역사의 한 장면이 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2년여에 걸친 현지 취재와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였다. 또 극히 일부만 알고 있는,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는 새로운 사실들도 정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파독 광부와 간호사가 우리의 근현대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도 날카로운 시각으로 포착하여 저널리스트다운 관점에서 냉철하게 표현해냈다.
결과의 역사를 알려면 교과서만 보면 되지만, 드러나지 않은 이면과 어쩌면 숨겨졌을지도 모를 사실까지 알려면 과정의 역사를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역사의 과정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서 그 전체상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더욱이 누군가가 그 사실들을 숨기려고 했다면 그 뚫린 구멍들을 메워 온전한 진실을 알아내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어쩌면 묻혔을지도 모를 사실들도 대면하게 되고, 저자의 통찰력이 아니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이면의 의미들도 음미하게 된다. 혹독했던 파독 광부, 간호사들의 당시 생활상이 그렇고, 그것으로 잔뜩 이익을 챙긴 정부가 그들에게 행한 어처구니없는 처우도 그렇고, 보상은커녕 늙고 병든 육체와 기대마저 포기한 가슴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그들의 오늘이 그렇다.
우리가 민요 ‘아리랑’의 구성진 가락을 듣거나 소리 죽여 혼자 읊조릴 땐 저 밑바닥에서 슬픔이 한 움큼 가슴 먹먹하게 치고 올라온다.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던 슬픔일까? 그리고 저자는 왜 하필 이 책의 제목을 ‘독일 아리랑’이라고 했을까? 독일로 파견된 광부·간호사와 저자가 부르는 아리랑에 독자는 추임새라도 넣어야 할 그런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