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7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가토 요코 2018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가토 요코 | 알라딘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가토 요코 (지은이),윤현명,이승혁 (옮긴이)서해문집2018-01-05


































미리보기




책소개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이 벌인 대테러 전쟁, 1937년 중국을 상대로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 두 전쟁의 공통점은 전쟁을 벌인 국가가 전쟁 상대국을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 특히 전쟁의 역사를 살펴볼 때는 시대와 배경, 그리고 세계사의 여러 사건과 관련지어 함께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도쿄대학 가토 요코 교수는 이런 의도에 따라, 일본의 역사를 세계사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방식으로 중고생 대상 특강을 진행했다. 그는 강의에서 근대 일본의 침략전쟁이라 불리는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시기를 중심으로, 거의 10년마다 벌어진 큰 전쟁들의 근본 특징, 전쟁이 지역과 국가·사회에 미친 영향과 변화 등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했다.

특히 침략이냐 아니냐를 넘어 당시의 국제관계, 일본의 국내사정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또한 일본의 특수한 사정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여러 사건과 관련지어 설명하기 때문에 더욱 폭넓은 이해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는 그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결과물이다. 한편 2010년 제9회 고바야시 히데오상(저명한 비평가인 고바야시 히데오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일본 내 상당한 권위를 가진 학술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은 책이기도 하다.


목차


머리말

서장 일본 근현대사를 생각하다
전쟁으로 보는 근대
9·11테러의 의미/역사는 외우면 된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남북전쟁의 와중에서/무엇이 일본국헌법을 만들었는가

전쟁과 사회계약
국민의 힘을 총동원하기 위해/전쟁 상대국의 헌법을 바꾸다/일본의 헌법 원리는 무엇인가

왜 20년밖에 평화가 지속되지 못했을까
이상한 연구자 카/세계대전 직전에 쓴 책/잘못한 쪽은 국제연맹이다!/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을 보다/과거의 역사가 현재에 영향을 미친 사례

역사의 오용
왜 가장 우수하고 똑똑한 인재가 오판하는가/무조건 항복을 요구한 이유/전쟁을 막지 못한 이유

1 청일전쟁_ ‘침략?피침략’을 넘어 봐야 할 것
열강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중국과 일본의 경쟁/무역을 지탱하는 제도/화이질서의 안전보장

청일전쟁까지
중국의 변화/야마가타 아리토모의 경계심/후쿠자와 유키치의 등장/슈타인의 등장

민권론자는 세계를 어떻게 보았을까
일단 나라의 독립이 중요하다/그렇다면 국회의 의미는 무엇인가/“무기력한 노예근성!”/번벌정치에 대항하기 위해/전비를 조달한 것은 우리다

청일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외무대신의 강경한 태도/중국의 반론은 무엇일까/청일전쟁 시기의 국제 환경/보통선거운동이 일어난 이유

2 러일전쟁_ 조선이냐 만주냐, 그것이 문제로다
청일전쟁 이후
전쟁의 ‘효용’/러일전쟁의 새로운 점/2 ‘0억 엔의 자재와2 0만 명의 영령’/슈타인의 예언이 현실로

영일동맹과 청의 변화
러시아의 만주 정책과 중국의 변화/개전에 대한 신중론/러시아의 사료에서무엇을 알 수 있는가

전쟁 발발의 이유
러일협상의 쟁점/일본의 입장

러일전쟁이 초래한 것
미국과 일본의 공조/중국의 협조/전쟁은 무엇을 변화시켰나

3 제1차 세계대전_ 일본이 느꼈던 주관적인 좌절감
식민지가 허용되는 시대, 허용되지 않는 시대
총력전에 직면한 세계/일본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것/미국과 일본의 전쟁 공포/서태평양의 군도/산둥반도의 전략적 의미

왜 국가개조론이 등장했을까
변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한다/미래의 전쟁/위기감의 세 가지 요인

개전 과정과 미국·영국과의 조율
가토 다카아키와 에드워드 그레이/영국이 우려했던 것/미국의 각서

파리강화회의에서 비판받은 일본
마쓰오카 요스케의 편지/분개한 고노에 후미마로/3·1운동

참가자의 면면과 일본이 입은 상처
유례없는 외교전/젊은 학자 케인스/로이드 조지/거듭 비판받은 일본

4 만주사변과 중일전쟁_ 일본의 자멸과 중국의 역할
당시 사람들의 의식
모략으로 시작된 작전과 우발적 사건/만주사변에 대한 도쿄대학 학생의 생각/전쟁이 아니라 ‘혁명’

만주사변은 왜 일어났을까
만몽은 우리 나라의 생명선/조약의 회색 지대/육군과 외무성 그리고 상商사社/만몽에 대한 투자와 국가의 역할

사건을 계획한 주체
이시와라 간지의 최종전쟁론/엇갈린 의도/독단전행을 추인하는 각의/장제스의 선택/리턴 조사단과 그 보고서의 내용/요시노 사쿠조의 한탄

국제연맹 탈퇴에 이르기까지
제국의회에서의 강경론과 그 속내/마쓰오카 요스케 전권의 한탄/국제연맹, 국가 모두의 적!

전쟁의 시대로
육군의 슬로건에 매료된 국민/독일의 패전 이유에서/암담한 각오/왕자오밍의 선택

5 태평양전쟁_ 전사한 장소를 알려줄 수 없었던 나라
태평양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시각
‘역사는 만들어졌다’는 생각/천황의 우려/그릇된 통계 수치

전쟁이 확대된 이유
치열한 상하이전투/남진의 주관적 이유/중국의 요구/처칠의 불만/7월 2일 어전회의 결정의 이면

왜 서전에 승부수를 걸었을까
임시군사비특별회계/기습을 통한 선제공격/왜 진주만은 무방비 상태였나/속전속결 외의 길은 없었는가/일본은 전쟁할 자격이 없는 국가

전쟁의 양상
필사적인 싸움/그런데도 일본인은 반드시 이길 것을 믿었는가/전사한 장소를 알려줄 수 없었던 나라/만주의 기억/포로의 대우/그때의 전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후기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접기


책속에서


첫문장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의 종주권을 놓고 다투었던 청일전쟁 시대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



혐한 혐중서를 비판하는 작자의 후기가 본문의 내용만큼이나 인상적이고, 통찰력을 갖춘 사람이 되자는 취지의 마지막 문장만으로도 이 책은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梨谷書生
P. 98 1880년대에 이홍장은 중국군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합니다. 또1881년에는 신장평정에 힘썼습니다. 중국의 서부 신장에지역의이리伊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권이지만 청의 지배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야쿠브 베그가 새로운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러자 청 정부는 신속하게 군대를 보내 이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질서 회복을 도모하는한편, 러시아와는 영토 일부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이리조약‘을 맺었습니다. 이홍장의 무력 대응이 효과를 거둔 셈입니다. 접기 - puttyclay
P. 100 임오군란에.....적극 관여했습니다. 그 결과 조선에서는 친청파가 힘을 얻게 됐습니다. 애당초 대원군을 연행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청이 강하다는 증거였습니다.
1884년 12월 김옥균 등의 개혁파는 청의 후원을 받는 민씨 정권을타도하기 위해 일본공사관의 도움을 받아 갑신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일본공사관 측은 청이 프랑스와의 전쟁, 즉 청프전쟁에 정신을 빼앗긴틈을 타 거사를 추진한 것입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청에 의해 진압됐고, 조선 정부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결정적으로 약해졌습니다. 접기 - puttyclay
P. 101 게다가 청은 안남과의 관계에서도 대응책을 바꾸었습니다. 조선의갑신정변과 비슷한 시기에 일어난 청프전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프랑스는 영국이 중국의 창장강長江(양쯔강 유역, 화중 지방을 세력권으로 하는 것에 대응해, 그 남쪽으로 진출하고자 했습니다. 중국의 화난지방과 안남으로 말이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1884년 프랑스가 베트남의 항구를 독점적으로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청은 프랑스와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이것이 청프전쟁입니다. 청은 초기의 함대 결전에서는 대패하지만, 그 후 육상 전투에서는 상당히 선전했습니다. 그결과 강화조약은 비교적 청에 유리하게 맺어졌습니다. 여기서 열강은다시 한 번 놀랐습니다. 청은 무력을 써서라도 화이질서 (조공체제) 아래에 있는 안남을 지키려고 했던 것입니다. 접기 - puttyclay
P. 101 러시아·프랑스 · 일본이 각각 청의 화이질서에 도전하는 분쟁을 일으켰는데, 이들을 상대로 청이 제대로 대응한 셈입니다. 이것은 청에그만한 힘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1880년대 중반시점에서는 일본식 발전, 중국식 발전 둘 다 가능성이 있는 선택이었습니다. 중국식 발전은 중국 스스로 화이질서를 근대국가에 적응할 수있도록 조금씩 바꾸어가며 힘을 키우는 방식입니다. 접기 - puttyclay
P. 247 1918년 1월 윌슨은 미국 의회에서 ‘14개조 평화원칙‘을 발표하며 전후 세계의 이상을 제시했습니다. ‘14개조평화원칙‘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단연 민족자결주의입니다. 그런데 윌슨이 민족자결을 이야기했을 때 염두에 두었던 지역은 상당히 제한된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요.

윌슨이 염두에 둔 곳은 러시아가 독일과 강화조약(브레스트리토프스크조약)을 맺으며 양도했던 폴란드, 그리고 중립을 침해받은 벨기에, 그외에 루마니아와 세르비아 등이었습니다. 윌슨은 이들 지역에 민족자결이 인정돼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들 지역이 다시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영국이나 프랑스 등의 광대한 식민지는 민족자결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윌슨 자신도 ‘이 선언은 권리를 가진 정부의 정당한 요구‘를 무시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접기 - puttyclay
P. 248 커다란 희망을 품은 지역 중 한 곳이 바로 일본 통치하의 한국이었습니다. 윌슨은 한국에 민족자결의 원칙이 적용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랜싱의 우려는 현실이 됐습니다. 한국에서 독립운동이일어난 것입니다. 1910년,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됐습니다. 그런데당시 한국에서는 윌슨의 의도를 확대 해석하며 독립에 대한 희망을 가졌습니다. 접기 - puttyclay
P. 265 앞에서 언급했듯이, 일본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대단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에서 채택된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제156조부터 제158조를 보면 ˝산둥의 권익은 일본의 것이 된다˝라고 규정돼있습니다. 일본의 요구가 전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외교가 실패했고 다른 연합국이 일본을 따돌렸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객관적으로 당시의 일본은 권익을 챙겼습니다. 접기 - puttyclay
P. 266 하지만 때로는 정치·경제 문제보다 의식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가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느낀 위기감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자! 그럼 이제 앞에서 언급했던 3·1운동에 대해 다시 이야기해봅시다. 여러분은 세계사 시간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어보지 않았나요?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탄생한 국제연맹에 의회의 반대로 참여하지 않았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파리강화회의 기간 중 윌슨 대통령은 미국에 돌아와 먼로주의 사고방식으로 가득한 의회를 향해 ˝이제부터 탄생하게 될 국제연맹은 의회가 경계할 만한 것이 아니다. 국제연맹은 결코 선전·강화의 권한 등 미국의 주권에 관련된 문제에 대해 미의회의 권한을 저해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국제연맹의 필요성을 설득했습니다.

그러나 미국 의회는 미국이 유럽 제국주의 국가 간의 싸움에 이용당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윌슨의 설득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국제연맹과 보조를 맞추는 윌슨을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미국 의회는 윌슨을 비판하기 위해 여론에 호소했습니다. 여기서 돌연 일본과 3·1운동이 등장합니다. 의회는 상당히 선동적으로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윌슨 대통령은 파리강화회의에서 독일이 베르사유강화조약을 받아들이도록 열심히 노력했다. 그러나 그 베르사유강화조약이라는 것은 중국을 희생시켜서 산둥반도에 대한 일본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인 부당한 조약이다. 접기 - puttyclay
P. 267 일본은 산둥을 식민지로 지배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식민 지배라는것은 한국의 3·1운동에서 나타났듯이 상당히 가혹한 것이다. 이처럼가혹한 식민 지배를 중국 본토에까지 시도하려는 일본과 윌슨은 타협했다. 일본을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조인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대략 이런 주장이었습니다.

미국 의회의 이러한 비판을 듣고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의 식민 지배가 가혹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단지 윌슨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남의 나라인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이상의 문제에 대해 미국 주재의 일본 해군 무관이 작성한보고서가 오늘날에도 남아 있습니다. 어쨌든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은 감정의 상처가 돼, 깊고 무겁게 남았습니다. 1930년대 이후 그 상처는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접기 - puttyclay
P. 145 ˝청일전쟁에서 이겼는데 러시아·독일·프랑스가 불만을 표출하자 일본은 중국에 랴오둥반도를 돌려주어야 했다. 이것은 일본이 전쟁에는 강해도 외교가 약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태도가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국민이 피를 흘려 얻은 것을 제멋대로 돌려주었다. 정부의 그런 결정은 국민에게 선거권이 충분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대일본제국헌법에 따르면, 선전과 강화의 권리는 내각 또는 국무대신의 보필을 받는 천황이 행사한다. 그래서 의회에서는 외교에 관한 논의를 별로 하지 않고, 외교에 관한 정부의 결정을 법률과 예산으로 막지도 못한다. 그러나 국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수단은 의회밖에 없기 때문에 국민에게 널리 선거권을 갖도록 해서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게 해야 한다˝라고도생각한 것입니다.

그렇게 삼국간섭에 대한 강한 불만 속에서 보통선거운동이 시작됐습니다. 접기 - puttyclay
P. 333 조금 세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931년 9월 일본 육군은 만주사변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1932년 1월에는 해군이 상하이변을 일으켜 중국군과 전투를 개시했습니다. 중국은 만주사변 당시에는 국제연맹 규약 제11조에 따라 일본을 제소했습니다. 그런데 상하이사변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국제연맹 규약 제15조 위반으로 일본을 제소했습니다. 제11조보다 강도 높은 것이 제15조에 따른 제소입니다. 접기 - puttyclay
P. 334 국제연맹은 만주국을 인정하지 않고 중국의 영토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일본이 아무리 만주국 내에서 군대를 움직인다 해도, 국제연맹으로서는 그것이 중국에 대한 침략이겠네요.
그렇습니다. 1933년 2월, 국제연맹은 중재안을 제시하며 일본에 마지막 타협을 촉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군이 어엿한 중국 영토인 러허 지역을 침공한다면, 이는 국제연맹 규약 제16조 제15조에 의한 약속을 무시하고 전쟁에 호소한 연맹국은 마땅히 다른 모든 연맹국에 대한 전쟁을 한 것으로 간주한다에 해당합니다. 국제연맹이 분쟁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와중에 새로운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국제연맹 소속 국가 모두의 적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국제연맹규약 제 16 조가 정하는 통상 금융상의 경제 제재를 받게 되고 국제연맹에서도 제명 됩니다. 접기 - puttyclay
P. 338 드디어 중일전쟁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만주사변은 1931년에 발발했고, 중일전쟁은 1937년에 시작됐습니다. 이 6년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큰 흐름을 살펴봅시다. 먼저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사회가 군부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실 입헌제를 채택한 국가에서는 군대의 정치 개입을 금합니다. 특히 물리적인 힘으로 정치에 개입하는 것은 부당한 것, 옳지 않은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원래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되는 집단(군대)이 많은 사람이 요구하지만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 정책, 그러니까 정치권에서는 좀처럼 제시되지 않는 정책(농민 구제 및 노동정책)을 실현하려고 한다면 어떨까요? 그런 일이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 사이에 6년 동안 벌어졌습니다. 접기 - puttyclay
P. 339 예를 들어 소작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소작법 같은 법률은 모든 농민의 바람이었지만 제국의회를 통과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1929년에 시작된 세계대공황이 일본에도 영향을 미쳐 농촌을 덮쳤습니다. 하지만 정우회도, 민정당도 농민의 부채에는 냉담했습니다. - puttycl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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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가토 요코 (加藤陽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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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일본 사이타마현 오미야시(현 사이타마시)에서 태어났다. 도쿄대학 문학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인문사회계연구과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하였다. 1989년부터 야마나시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스탠퍼드대학 후버연구소 방문연구원을 거쳐 1994년부터 도쿄대학 문학부에 부임하여 현재에 이른다. 현재 도쿄대학 문학부 교수이다.
주요 저서로는 《모색하는 1930년대—미·일 관계와 육군 중견층 模索する1930年代—日米関係と陸軍中堅層》(1993), 《만주사변에서 중일전쟁으로 満州事変から日中戦争へ》(2007),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それでも、日本人は「戦争」を選んだ》(2009), 《천황과 군대의 근대사 天皇と軍隊の近代史》(2019)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징병제와 근대 일본>,<일본은 왜 점점 더 큰 전쟁으로 나아갔을까>,<왜 전쟁까지> … 총 34종 (모두보기)

윤현명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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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으며, 히토쓰바시대학 사회학 연구과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전공은 일본 근현대사의 정치사로, 현재 원광대학교 동북아시아인문사회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역서로 『일본, 군비확장의 역사』(2014), 『폭격의 역사』(2015),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2018), 『일본은 왜 점점 더 큰 전쟁으로 나아갔을까』(2022) 등이 있다.

최근작 : <동북아 인물전>,<남자는 여행> … 총 18종 (모두보기)

이승혁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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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외국어대학교 국제대학원 일본학과에서 일본 사회문화를 전공했으며, 히토쓰바시대학 사회학 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역서로 <폭격의 역사>(공역),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공역)가 있다.




출판사 소개
서해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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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조선 소녀 탐정, 비야의 사건일지>,<[큰글자도서] 이병한의 대한민국 탐문>,<살>등 총 559종
대표분야 : 역사 8위 (브랜드 지수 479,748점), 청소년 인문/사회 13위 (브랜드 지수 90,105점), 고전 17위 (브랜드 지수 253,87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살펴본 일본의 선택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제국 일본은 왜 전쟁의 길로 나아갔나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이 벌인 대테러 전쟁, 1937년 중국을 상대로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 두 전쟁의 공통점은 전쟁을 벌인 국가가 전쟁 상대국을 ‘처벌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 특히 전쟁의 역사를 살펴볼 때는 시대와 배경, 그리고 세계사의 여러 사건과 관련지어 함께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도쿄대학 가토 요코 교수는 이런 의도에 따라, 일본의 역사를 세계사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방식으로 중고생 대상 특강을 진행했다. 그는 강의에서 근대 일본의 침략전쟁이라 불리는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시기를 중심으로, 거의 10년마다 벌어진 큰 전쟁들의 근본 특징, 전쟁이 지역과 국가·사회에 미친 영향과 변화 등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리했다. 특히 침략이냐 아니냐를 넘어 당시의 국제관계, 일본의 국내사정에 대한 설명이 흥미롭다. 또한 일본의 특수한 사정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여러 사건과 관련지어 설명하기 때문에 더욱 폭넓은 이해가 가능하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는 그 강의를 책으로 엮은 결과물이다. 한편 2010년 제9회 고바야시 히데오상(저명한 비평가인 고바야시 히데오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일본 내 상당한 권위를 가진 학술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가치를 인정받은 책이기도 하다.

잘 정리된 참고서와 정반대의 책이다. 꽤 과격한 책이기도 하다. 나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그 과격함에 끌렸다. _호리에 도시유키(소설가, 고바야시 히데오상 심사위원)

강의가 (…) 용의주도한 편집 끝에, 마치 이야기하는 것처럼 집필되었고, 역동적이며 비평적인 책으로 완성되었다. _세키가와 나쓰오(소설가, 논픽션 작가, 고바야시 히데오상 심사위원)

이 책은 역사학의 묘미를 절묘하게 가르쳐준다. (…) 선입관에 좌우되지 않고, 독립된 자신의 판단을 공적으로 주장하는 용기가 그것이다. 그런 사람이 그에 어울리는 상을 받았다. 진심으로 기쁘다. _가토 노리히로(평론가, 와세다대학 명예교수, 고단샤 논픽션상·고바야시 히데오상 심사위원)

수상작은 출판 당시부터 화제가 되었고, 나도 이미 한 번 읽은 바 있다. 이번에 다시 정독하면서 내용이 훌륭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_요로 다케시(해부학자, 도쿄대학 명예교수, 고바야시 히데오상 심사위원)

청일전쟁, ‘침략·피침략’을 넘어 바라보다
청일전쟁은 근대 시기 일본이 강대국과 벌인 첫 전쟁이다. 전쟁 이전 동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에 의해 유지되었다. 하지만 화이질서가 붕괴하고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중국과 일본은 조선을 두고 경쟁하게 되었고, 그 결과가 청일전쟁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청일전쟁은 러시아의 대리자 청, 영국의 대리자 일본이라는 구도로 이뤄진 제국주의 전쟁의 대리전이기도 하다. 청일전쟁으로 일본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청일전쟁 후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영토 중 랴오둥반도를 다시 중국에 반환하라고 일본에 압력을 넣었다(삼국간섭). 이에 일본 지식인과 정치권에선 “전쟁에서 얻은 것을 외교의 실패로 빼앗겼다. 더 이상 정부가 국정을 마음대로 하게 해서는 안 된다”라는 실망감이 싹트게 됐고, 이는 참정권 확대를 요구하는 ‘보통선거운동’으로 이어졌다. 청일전쟁이 가져온 가장 큰 변화다.
러일전쟁, 조선이냐 만주냐 그것이 문제로다
삼국간섭 이후 러시아는 만주와 조선으로 진출하며 세력을 뻗쳤다. 이에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으며 러시아를 견제하는 한편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물론 전쟁에 대한 신중론도 있었지만 결국 군부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러일전쟁을 벌인다.
러일전쟁 후 일본은 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을 수정하며 대등한 지위를 인정받는다. 즉 일본은 청일전쟁의 결과 화이절서에서 벗어났고, 러일전쟁의 결과 서구의 식민지 질서로부터 벗어난 셈이다. 더 나아가 한국을 합병하고 남만주의 이권을 차지함으로써 대륙 세력의 일부가 된다. 러일전쟁은 상당한 규모의 전쟁이어서 일본과 러시아가 각각 2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러일전쟁 후 획득한 만주의 영토를 가리켜 ‘20억 엔의 자재와 20만 명의 영령’의 희생을 치루고 얻은 곳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남았다. 이러한 인식은 훗날 만주사변으로까지 이어진다.

제1차 세계대전, 좌절한 일본
제1차 세계대전은 주로 유럽에서 벌어졌다. 일본은 영국의 의뢰를 받아들이는 형태로 산둥반도의 독일 영역을 공격함으로써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 이후 세계적으로 민주주의의 요구가 높아지고 식민지를 보유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일어났다. 물론 그렇다고 열강의 영토 점령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식민지’가 아닌 ‘위임통치령’으로 영토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일본도 남양군도와 중국 산둥반도의 이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일본은 산둥반도 이권, 조선 통치 등에 대해 중국·미국·영국으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이에 서구 열강으로부터 깊은 고립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서구 열강과의 협조 대신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더 넓은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일본의 자멸과 중국의 역할
만주사변은 1931년, 중일전쟁은 1937년에 일어났다. 식민지 지배를 조금씩 느슨하게 하는 국제적 분위기와 달리 일본은 대륙 진출, 즉 중국에 대한 침략을 꾀했다. 특히 만주와 몽골에 대한 이권을 확대해 가면서 그 책임을 중국에 전가했다. 이후 남만주에 주둔하는 일본 관동군은 모략을 일으켜 만주를 힘으로 점령했다. 일본의 돌출 행동은 서구 열강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이에 일본은 강경한 태도를 취했고 급기야 국제연맹을 탈퇴하기에 이른다. 국제사회로부터의 고립, 중국과의 긴장감 속에서 일본의 분위기는 점점 어두워졌다. 그러다가 일본은 1937년에 루거우차오에서 벌어진 중일 양국 간의 군사 충돌(루거우차오사건)을 계기로 중국과의 전쟁(중일전쟁)을 시작했다. 그런데 중국은 홀로 일본과 맞서지 않았다. 바로 세계 2대 강국인 미국과 소련의 협조를 얻은 것이다.

태평양전쟁, 일본은 전쟁을 할 자격이 없는 국가
중일전쟁 후 미국은 아시아에서 중국과 협조를 유지하며 일본을 견제했다. 일본은 미국이 중국 문제에서 손을 떼기 원했지만 미국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고, 결국 일본 정부는 힘으로 미국 세력을 몰아내기로 결정했다. 여기에는 중일전쟁의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설치된 임시군사비특별회계가 큰 역할을 했다. 중국과의 전비를 이유로 조성된 임시군사비를 전용해 육해군이 급격히 군비를 확장했고, 이는 아시아·태평양 방면에서 일본의 군사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일본 정부 수뇌부가 단기전이라면 승산이 있다는 오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다. 전투는 치열했고 전쟁의 양상은 비참했다. 많은 사람이 전사했지만 일본 정부에서도 이들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 전사했는지 몰랐기 때문에 유족들은 시신도 없이 전사 통보를 받았다. 또한 만주에 소련군이 진주함으로써 그곳에 거주하던 수십만 명이 소련군에 의해 끌려가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더구나 식량이 부족한 전선에서는 많은 군인이 기아로 죽었다. 자기들도 식량이 부족한 일본군이 포로의 대우를 좋게 해줄 리 없었고, 그 결과 중국인, 한국인, 그 외 연합군 전쟁 포로들은 식량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강제노동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전후 미국은 승전국이 되었고 중국은 강대국으로 회복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 내에서는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 아니라 전쟁 책임에 대한 인식도 부족하다. 그 책임을 묻고, 그때의 역사를 생각해 보는 일이 필요하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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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를 읽는 데 흥미로운 내용이 보인다. 대학원에서 보수적인 교수의 지도를 받았지만, 교수의 성향과는 정반대로 진보적인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는 부분. 학계라는 게 학맥과 인맥 등으로 촘촘히 얽혀 있곤 해서, 다른 소리를, 그것도 자신의 은사의 주장에 반대해 그렇게 활동하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아마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일 텐데, 용기 있는 결단이다.






책은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정도 되는 역사 동아리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중간 중간 질문과 답변도 섞어 가면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간다. 여기에서 다뤄지고 있는 건 근대 일본이 참여한 다섯 번의 전쟁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그 사이에 있었던 중일전쟁이 그것.










저자는 각각의 전쟁들의 단순한 경과가 아니라, 그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후의 배경을 중심으로 인과적 서술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일본이라는 나라가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조금씩 주변국들을 침략, 공격해 가며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했다는 점과, 이 과정 내내 철저하게 자국중심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강경파가 득세했다는 점이다.


사실 근대 일본은 서양세력에 의해 강제 개항과 개화가 이루어지면서, 종래의 쇼군에 의해 이루어지던 정치체제가 무너지면서 일종의 아노미 현상을 맞게 된다. 일부는 텐노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서양식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고, 미약하게나마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은 전자였고, 이들이 태생적으로 힘에 호소하기를 좋아했다는 게 모든 사건의 근원이었다.

시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대표되지 않은 채, 소수의 정치가들과 군인에 의해 좌우된 일본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주변국은 물론 자기 자신의 엄청난 손해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전쟁을 거듭할수록 피해가 누적되었고, 다시 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또 다른 전쟁에 나서는 느낌이 진작부터 들었지만, 일단 그 안에 들어가 버리고 나면 이 뻔한 그림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

보통 사람들은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똑똑하고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어 현명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반대 의견에 귀를 막고, 좀 더 큰 시야에서 상황을 볼 줄 모르는 소견이 좁은 인간들이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질 때 얼마나 파괴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저자는 담담하게, 일본이 주변국에 입힌 피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서 사안을 다룬다. 이렇게 깔끔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앞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거다. 그저 무조건 과거를 덮고 잊자고 우긴다고 해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사실 이건 유치원 다니는 애들도 알 수 있는 너무 단순한 진리다)






부디 이런 양심적인 학자들과 시민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자국이 일으킨 전쟁을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꾸며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내가 보기에 한일 양국이 제대로 된 우호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노란가방 2023-05-15 공감 (1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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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왜 일본이 그 때 전쟁이란 선택지를 계속 해왔는지 잘 설명한 책. 당시 국제관계나 일본 내부 사정등의 여러 부분을 정말로 쉽게 잘 설명해주고 역사의 연결성 같은걸 잘 집어주는 좋은 책이다. 아쉬운 것은 역시 너무 교양서...
로리! 2018-04-15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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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초계기로 인해 발생한 대한민국과의 경직된 관계를 만든 일본의 내심을 알게 해주는 일본사람의 눈으로 바라본 역사서여서 현일본정부의 대한민국과의 외교 의식을 돌아보고 되새기게 하는 좋은 지침서였습니다.
적극 추천합니다!!!
종로뮤직 2019-01-27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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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다
shuita 2022-03-16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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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입장에서만 서술하고, 침략당한 조선의 입장은 별로 고려하지 않은 저자의 태도가 유감이다.
바우 2021-01-08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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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근현대 전쟁사에 이만한 책이 없다. 청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배경설명이나 당시의 사람들 생각까지 나열하고 일본이 한일에 그리 감추는 것도 없다.강좌를 책으로 옮긴거라 책이 쉽게 읽혀진다. 만주전쟁 직전 사람들의 설문조사 결과까지 실려있다.3.1운동 당시 제암리 학살 내용도 있다.
하늘나무숲 2026-06-1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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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일본은 계획적 전쟁으로 성장했다






저자 소개를 읽는 데 흥미로운 내용이 보인다. 대학원에서 보수적인 교수의 지도를 받았지만, 교수의 성향과는 정반대로 진보적인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는 부분. 학계라는 게 학맥과 인맥 등으로 촘촘히 얽혀 있곤 해서, 다른 소리를, 그것도 자신의 은사의 주장에 반대해 그렇게 활동하는 게 쉽지 않다. 그리고 아마 이건 일본도 마찬가지일 텐데, 용기 있는 결단이다.






책은 고등학생에서 대학생 정도 되는 역사 동아리 회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중간 중간 질문과 답변도 섞어 가면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 나간다. 여기에서 다뤄지고 있는 건 근대 일본이 참여한 다섯 번의 전쟁이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그 사이에 있었던 중일전쟁이 그것.


















저자는 각각의 전쟁들의 단순한 경과가 아니라, 그 사건들이 일어나기 전후의 배경을 중심으로 인과적 서술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건, 일본이라는 나라가 장기적인 계획에 따라 조금씩 주변국들을 침략, 공격해 가며 자국의 안전을 도모하려고 했다는 점과, 이 과정 내내 철저하게 자국중심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강경파가 득세했다는 점이다.






사실 근대 일본은 서양세력에 의해 강제 개항과 개화가 이루어지면서, 종래의 쇼군에 의해 이루어지던 정치체제가 무너지면서 일종의 아노미 현상을 맞게 된다. 일부는 텐노를 중심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서양식 개혁을 추진하려고 했고, 미약하게나마 사회민주주의적 개혁을 추진하려는 이들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성공한 것은 전자였고, 이들이 태생적으로 힘에 호소하기를 좋아했다는 게 모든 사건의 근원이었다.






시민들의 의사가 제대로 대표되지 않은 채, 소수의 정치가들과 군인에 의해 좌우된 일본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주변국은 물론 자기 자신의 엄청난 손해로 끝나고 말았다. 사실 전쟁을 거듭할수록 피해가 누적되었고, 다시 그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또 다른 전쟁에 나서는 느낌이 진작부터 들었지만, 일단 그 안에 들어가 버리고 나면 이 뻔한 그림이 보이지 않았던 걸까.






보통 사람들은 저 위에 있는 사람들이 다들 똑똑하고 자신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어 현명한 판단과 결정을 내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도 적지 않다. 반대 의견에 귀를 막고, 좀 더 큰 시야에서 상황을 볼 줄 모르는 소견이 좁은 인간들이 너무 많은 권한을 가질 때 얼마나 파괴적인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지...


















저자는 담담하게, 일본이 주변국에 입힌 피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서 사안을 다룬다. 이렇게 깔끔하게 인정할 때 비로소 앞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거다. 그저 무조건 과거를 덮고 잊자고 우긴다고 해서 동반자가 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사실 이건 유치원 다니는 애들도 알 수 있는 너무 단순한 진리다)






부디 이런 양심적인 학자들과 시민들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자국이 일으킨 전쟁을 영광을 위한 것이라고 꾸며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내가 보기에 한일 양국이 제대로 된 우호관계를 만들어 가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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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가방 2023-05-15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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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의 길을 걸은 근대 일본



근대국가를 수립한 일본은 청일전쟁에서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50여 년간 전쟁에 몰두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거쳐 만주로, 만주를 거쳐 중국으로, 중국을 거쳐 동아시아 전체로 점점 더 큰 전쟁으로 나아갔다. 이 전쟁은 일련의 과정에서 주된 행위자로 등장한 군부, 군부를 제어하지 못한 천황과 내각, 군부를 지지한 국민이 선택한 것이었다.




전쟁으로 나아갈 때 일본은 어떤 생각을 했던 것일까?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주권국가로 도약하고 싶어 했다. 정부에 반대해온 민권론자와 반정부파조차도 불평등조약을 폐지하고 국권을 확립해야한다는 데 동의하며 전쟁에 찬성하였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의 심성구조에 각인된 ‘20억 엔의 자재와 20만 명의 영령’이라는 구호는 이후 중국에 대한 분노를 가중시켰다.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 시기까지 군부는 주된 행위자로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정부로부터 외면 받아온 농산어촌 국민들의 지지가 있었다.




각각의 전쟁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자. 청일전쟁은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하여 일본이 ‘이익선’으로서의 조선을 확보하고자 일으킨 전쟁이었다. 전쟁 이전에 일본은 영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의 지지도 받은 상황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와 직접적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일본의 제1 목표는 조선이었음에도 일본은 열강의 도움을 얻어내고자 의도적으로 만주를 앞에 내걸며 영국과 미국의 도움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서구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조선을 식민지배하였다. 1차세계대전 때에는 중국의 산둥반도를 점령하여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중국을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하게 된다. 여기서 나타나는 일본의 침략 행위의 특징은 전략적 이익에 따라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만주사변 이후로는 사태가 변화한다. 만주사변은 이시와라를 중심으로 하는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일으킨 전쟁이다. 당시 와카쓰키 내각은 관동군의 독자 행위에 대해 유효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사태는 악화되어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린다. 중일전쟁을 개진할 때 군부는 염려하는 쇼와 천황에게 3개월 만에 전쟁을 끝낼 것을 장담하였다. 태평양전쟁을 개진할 때에는 희망적인 관측으로 일관하였다. 미즈노 히로노리는 일본은 군수 원료의 대부분을 외국에 의지하는 나라로서 지구전에는 이길 수 없는, 그러므로 전쟁할 자격이 없는 나라라고 평가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묵살되었다.









청일전쟁에서부터 태평양전쟁까지 50여 년간 제국주의의 길을 걸은 일본은 결국 파멸적인 결과를 맞이하였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일본인들 사이에서 '왜 일본은 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을 선택했을까'하는 물음이 제기되어왔다고 한다. 나는 그보다도 근대 일본의 '무엇' 때문에 '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하는 지경에 이르렀는가? 묻게 된다. 이 물음은 당시 일본의 '체제', 그 체제 속에서 일본 국민의 심성구조에 대한 물음이다. 이 주제를 붙잡고 전쟁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근대 일본의 '천황제'에 대한 탐구로 독서가 이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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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료샤 2023-04-27 공감(1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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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라 생각하는 가해자 일본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일본에 대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한국에게 있어서 일본만큼 가까운 나라가 어디있겠는가? 지리적으로 가깝다. 날이 맑은 날에는 부상에서 대마도가 보인다고 하니까 일본이 얼마나 가까운지 잘 알것이다. 게다가 일본에서 일어난 일은 한국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줄 정도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를 떠올려 보라. 역사적으로는 어떤가? 중국과 더불어서 일본만큼 한국의 역사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가 어디있는가? 또한 오늘날 우리나라가 겪고 있는 모든 일의 뿌리를 찾아가면 일본에 귀결되지 않는가? 한국의 모든 문제가 일제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주장은 일본이 우리나라와 얼마나 가까운 나라인지를 대변하는 말이다.




그런데 일본만큼 먼 나라도 없다. 일본의 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을 모아 놓으면 중국 역사에 대한 지식과 비교하여 1%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도 거의 근현대사에 집중되어 있다. 일본에서 어떤 사건이 일어나도 그것은 일반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다. 한국 사람의 심리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일 것이다. 모든 나라에 다 져도 일본에게만은 지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들의 정서. 그래서 비인기 종목이라도 한일전만 벌어지면 피가 튄다. 한일 축구경기를 생각해 보라. 우리가 얼마나 목청을 높이면서 응원을 하는가? 노회찬 의언이 했던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외계인이 침공하면 우리나라가 일본과 손을 잡고 싸우지 않겠느냐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최후에 손을 잡는 나라가 일본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다.




이렇게 일본은 가깝지만 정말 먼 나라이다. 그런데 일본이 왜 태평양 전쟁을 택했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일본은 과거를 진정으로 반성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실제로 일본에서 그 시절을 어떻게 이해하려고 하는지에 대해서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이다. 이 책은 이런 나에게 꽤나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본이 왜 전쟁을 택했는가? 일본은 정말 이길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쟁을 했는가?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렇게 많은 나라에 못된 짓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왜 이것을 알지 못하는가? 이 책은 나에게 여기에 대한 답을 제시해 준다.




일본이 전쟁을 택한 이유는 아주 명쾌하다.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구 영강에 의해, 중국에 의해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가 위협을 받았고, 침해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구 열강에 의해서 식민지가 침탈되던 시절 자신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것을 만회하기 위하여 똑같이 식민지를 획득하려고 했다. 그리고 이렇게 획득한 식민지를 당연한 권리로 생각했다. 그것이 한국의 독립을 무시하는 것이 되든, 중국의 통치를 무시하는 것이 되든 상관없다. 이미 지금 그것을 획득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내가 가진 것인데 원래대로 돌려주라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고, 이것은 국가의 안보에 위해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방어해야 한단다는 논리, 이상한 정당방위의 논리가 청일전쟁에서부터 태평양 전쟁의 기저에 흐르고 있다. 즉 누가봐도 가해자인데 스스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전쟁의 근본 원인이라는 말이다.




또한 자기 중심적인 판단과 근거없는 희망에 기댄 판단 또한 전쟁을 일으킨 원인이다. 폭주하는 군대를 멈추지 못한 정치인들의 비겁함, 혹은 이에 부화뇌동한 정치인들의 무능력이 전쟁을 일으키고 더 키운 원인이 되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이것은 일본의 이야기이지만 단순히 일본만의 이야기는 아니며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생각말이다. 가해자가 된 모 정치인들이 자신을 피해자라고 말한다. 그들이 한 일은 생각지 못하고, 이것은 정치 보복이라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과 전횡을 직시하지 못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려던 기무사, 군대여 일어나라고 외치는 극우 정당들의 모습을 보면서 가해자가 자기 반성 없이 피해자라고 생각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해서 상상해 보게 된다.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이 책에서 본 것 같아서 씁쓸하다. 모든 것을 자기를 중심으로 놓고 나는 피해자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떤 역사를 만들어 갈까? 나중에 우리 사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은 분열을 택했다."라고 평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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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8-08-02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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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은 자세하지만, 굳이 몰라도 되는 사실은 스킵하자.



이 책을 읽은 이유는 항상 피해자로서의 목소리만 내는 한국과 가해자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데 인색한 일본인의 심리를 한 번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다.



일본의 학자가 쓴 이책의 논조는 일차적으로 잘못된 침략전쟁에 따른 그 피해당사국에 대한 사과가 깔려있으나. 그도 역시 일본인이므로, 전쟁의 선택의 불가피한 상황에 대해 설명했다.



책은 청일전쟁 조선병합 러일전쟁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챕터 별로 구성되어있다.



간단히 줄여보면, 조선병합은 기존 제국주의 국가(영국,미국,프랑스 등)에게 일본은 이 정도로 힘이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고, 그로 말미암아 기존의 불평등 조약을 대등한 관계의 조약으로 바꿀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기 위함이였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조선의 영향력 강화를 위한 힘 겨루기였고, 결국 중국대륙으로 진출하기 위함이고, 섬나라 일본은 자원과 상품이 없는 나라이므로 대륙으로 진출하지 못하면 죽는다는 결연한 결정이였다. 그 전쟁의 승리로 중국대륙의 지배력이 강화되었다.



서구 제국주의세력이 봤을때 거대한 중국시장을 일본이 먹는 것에 대한 경계를 넘어서 반대로 인해, 일본은 태평양 전쟁으로 까지 발전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이후에 아시아와는 다른, 탈아입구를 외치며, 서구 유럽을 따라가지만 결코 뒤따라가지만은 않고, 대등하게 맞서려는 의지로 국력을 키웠고, 내부적인 정지적 혼란을 군부가 일단락지으면서 안정화를 이룬다.



미국과의 전쟁을 앞두고 초기 전력차가 얼마 나지 않더라도, 전쟁이 진행되면 그 국력차가 월등히 차이 날 것을 알면서도, 전쟁을 선택한 이유가 반드시 이길 수 있어서 전쟁을 한 것이 아니라 이기기 위해서 전쟁을 한 것으로 설명된다. 일본 지식인의 진주만 공습의 찬양은 동남아, 청나라 러시아 같은 약한 나라와의 전쟁이 아니라 초강대국을 상대하는 전쟁임을 의기롭게 표현 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전체적으로 시대의 인물 평가라던가, 그 인물의 설명은 자국민이 아니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서 스킵했다. 그저 그 분위기 정도나 느꼈을까? 하지만 그 인물 설명이 너무 자세하여, 조금 지루한 면도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일본 군부의 마인드는 여느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의 정치인과 같았을 것이다. 제국주의에서 민족자결주의로 넘어가는 시대에 손에 쥔 떡을 내려놓으라고 옥신각신하는 외교전쟁에, 우리는 왜 그 시대에 변방으로 지낼 수 밖에 없었나 조상에 대한 안타까움도 느껴진다.



똑같은 과정을 겪은 나라들이지만, 패전국이 된 일본은 여느 승전국인 미국 영국과는 달리 독일과 같이 사과를 입에 달고 살아야 하는 국가가 되지만. 1,2차 세계대전을 진 독일과 중국대륙의 지배력 다툼으로 태평양전쟁을 한 일본은 주변국에 대한 다른 입장을 보인다. 최소한 독일은 유럽 각나라들과 전쟁을 했지만, 일본은 미국과 전쟁을 했다. 우리가 전쟁에 참여했더라면, 일본의 태도는 이렇게 소극적이지 않았을텐데, 저항 세력이 없는 동남아 국가와 인도,조선과 같은 나라에 대한 제국주의 국가의 태도는 근대화론으로 사과를 대신한다.



이 책을 읽고 사과에 인색한 일본의 내부 사정을 어느 정도 이해도 하고, 당시 국제관계에서 일자무식과 같았던 조선 정치인들의 몽매함을 탓하기도 하지만, 국제화 시대에 더이상 사과에 얽메이지 않고 국력을 먼저 키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언변과 돈으로 하는 사과와 보상은 현재의 감상이고, 불확실한 미래의 담보는 아닐 것이다.



19C 호전적인 일본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화보다는 산업화를 생각한 일본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대륙으로 뻣어가는 호기어린 의지가 부러운 것이 아니라,



19C 조선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성리학만 바라보던 집권층 세력이 바보스러웠고, 일본을 따라 민주화보다 산업화를 택해 물질적 성공을 이뤘으면서도, 당시의 선택을 잘못된 단추를 닫는 것이라 여기는 분위기, 이념적인 갈등을 계속 일으키는 정치상황을 볼때, 우리의 생각은 조선말기 보다 얼마나 변화가 되었나 돌이켜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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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 2019-01-09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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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 가토 요코



서장 일본 근현대사를 생각하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서 주권·사회계약에 대한 공격, 다시 말해 상대국의 헌법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행해진다." - 〈전쟁 및 전쟁상태론〉, 루소




"통수권 독립이라는 발상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머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야마가타는 세이난전쟁 이듬해인 1878년 8월 근위포병대가 급료에 대한 불만을 품고 폭동을 일으킨 것을 보았고, 당시 자유민권운동이 사회에 퍼지고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야마가타는 1897년 스스로 참모본부장에 취임해 군령軍令에 관한 사항은 오로지 참모본부장이 관리한다는 규칙을 제정했습니다. 야마가타는 자유민권운동의 영향이 군대에 미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세이난전쟁의 교훈을 살려 군대 명령권자와 정치 지도자를 분리하는 것이 국가의 안전을 위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특히 대규모 반란을 막기 위해 그러한 분리가 더욱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통수권 독립은 결과적으로 인류의 역사를 불행하게 만들었는데, "통수권 독립으로 일본 군부는 정치 지도자의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할 수 있었고, 이것이 더욱 전쟁을 부추겼기 때문입니다."(70-1)




1장 청일전쟁 - '침략·피침략'을 넘어 봐야 할 것




"1880년대에 이홍장은 중국군의 근대적 개혁을 추진합니다. 또 1881년에는 신장 지역의 평정에 힘썼습니다. 중국의 서부 신장에 이리伊犁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은 종교적으로는 이슬람교권이지만 청의 지배 영역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야쿠브 베그가 새로운 국가를 세웠습니다. 그러자 청 정부는 신속하게 군대를 보내 이를 멸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질서 회복을 도모하는 한편, 러시아와는 영토 일부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이리조약'을 맺었습니다. 이홍장의 무력 대응이 효과를 거둔 셈입니다. 이홍장의 단호한 결단력을 본 열강은 '오! 중국이 변했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중국이 만만찮은 상대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청은 조선을 대하는 태도마저 바꾸었습니다. 그때까지 청의 조선 관련 정책은 '예부禮部'가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이홍장은 1881년 조선과 안남을 자신이 직접 담당할 수 있게 제도를 고쳤습니다."(98-9)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脫亞論'은 톈진조약(1885.4) 이전에 쓰였습니다. 역사가 반노 준지는 후쿠자와가 "우리 나라는 이웃 나라의 개명을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흥하게 할 만한 여유가 없다"라고 한 것은 '개화파에 대한 지원을 통해 조선에 진출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는 일종의 패배 선언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웃 나라는 조선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지나와 조선을 대하는 방법도 이웃 나라임을 고려해 특별히 대하는 것이 아닌, 서양인이 그들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면 된다"라고 한 것은 '이제는 전쟁으로 청을 친 다음 조선 진출을 달성하는 수밖에 없다'고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요컨대 후쿠자와의 '탈아론'은 서구 열강의 아시아 분할이 임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대를 포기하고 조선과 중국을 저버린다는 뜻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 진출은 조선 내부의 개혁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중국을 친 다음 무력을 통해 실행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05-6)




"빈 대학 정치경제학 교수였던 슈타인은 이토 히로부미가 유럽을 방문했을 때 이토에게 메이지헌법의 기둥이 되는 권력분립의 기본 구조, 국가가 행하는 사회정책의 필요성 등을 가르쳐주었습니다."(107) "슈타인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는 주권선과 이익선의 개념을 설명했습니다. 주권이 미치는 국토의 범위가 '주권선'이고 그 국토의 존망에 관계되는 외국의 상태가 '이익선'인데, 조선을 중립국으로 두는 것이 일본의 이익선이 된다고 했습니다. 즉 '조선을 즉시 점령할 필요는 없다. 스위스나 벨기에 또는 수에즈운하처럼 조선을 중립국으로 두는 것에 대해 영국·러시아·청·독일·프랑스 등의 승인을 받으면 된다.' 이것이 슈타인의 조언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논의에는 '중국 대신 일본이 조선의 중립을 보장한다. 담보擔保한다'는 논리가 등장합니다. 담보는 무력과 같은 실력으로 특정한 상태를 계속 유지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두 사람의 만남에서 그런 분위기가 형성된 것입니다. 1889년 6월의 일입니다."(111-2)




"요시노 사쿠조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교수로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이념적 기초를 만든 사람입니다." "요시노의 제자 오카 요시타케는 요시노 못지않게 뛰어난 인물로,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부 해군과 함께 미국을 통한 화평을 극비리에 추진하던 도쿄대학 법학부 교수 그룹 중의 한 명입니다." "오카는 일본의 민권파가 개인주의·자유주의 사상이 약한 것은 메이지 초기부터 국권을 최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만약 자유주의의 사상적 기반이 없다면 상황에 따라 사람은 국가가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근대 일본에서는 민권파나 반정부세력이라 할지라도 외교·군사에 관해서는 후쿠자와나 야마가타와 비슷한 생각을 공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불평등조약 아래 근대 국가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민주의 이상 이전에 '먼저 국권을 확립하자'는 '합리주의'가 부각됐던 것입니다."(116-7)




"후쿠자와 유키치는 '민당은 의회에서 중의원 의원의 8할을 차지하기 때문에 정부의 법률안, 예산안 통과를 좌지우지할 수 있다. 그럼에도 민당은 정부에 대해서 번벌정부, 전제정부라는 비판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시 정부에는 조슈·사쓰마·도사·히젠이라는 네 개의 번 세력이 있었고, 이들이 정부 요직을 독점했습니다. 그 때문에 민당인 자유당이나 개진당 소속 사람은 아무리 돈이 있고 우수해도 번벌정부의 내부로 파고들 수 없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타이완을 식민지로 획득했습니다. 태평양전쟁 종결 시점을 기준으로 타이완 총독부에는 4만 3870명의 일본인 관료가 있었습니다.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그래서 후쿠자와가 "지금이야말로 민당은 새로운 식민지를 획득하고, 거기서 지금껏 얻지 못했던 관료직을 얻어라"라고 했던 것이지요. 이것이 자유당을 포함한 민당이 청일전쟁을 그다지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입니다."(124-6)




2장 러일전쟁 - 조선이냐 만주냐, 그것이 문제로다




"먼저 제국주의 시대의 전쟁의 '효용'에 대해 생각해보려 합니다. 러일전쟁의 효용은 무엇이었을까요?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해서 간신히 이겼습니다. 그 결과 서구 열강에 대사관을 둘 수 있는 나라가 됐습니다. 당시에는 강대국과 불평등조약을 맺은 나라는 대사관을 둘 수 없었습니다. 대사관 대신 공사관만을 두었지요. 영국 주재 일본공사관이 대사관으로 승격된 것은 1905년 12월의 일입니다. 러일전쟁의 강화조약이 같은 해 9월에 맺어졌으니 국가의 격이 확 달라진 셈입니다. 이처럼 당시의 국제 관계는 실로 엄격한 상하 관계였습니다." "일본은 러일전쟁 이후 불평등조약 개정 등 당면의 국가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러일전쟁 5년 뒤에 이루어진 1910년의 한일합병입니다. 이는 섬나라 일본이 유라시아 대륙과 연결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일본이 청일전쟁으로 획득한 타이완과 펑후제도가 섬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것은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149-51)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커다란 희생을 치렀습니다. 뤼순전투에서만도 다수의 전사자와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 사회에는 '일본은 20만 명의 희생과 20억 엔의 돈으로 만주를 획득했다'는 말이 널리 퍼졌습니다. 실제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등은 러일전쟁 4년 뒤인 1909년 〈제2대청정책淸政策〉이라는 의견서에서 '20억 엔의 자재와 20만 명의 사상자'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 후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났을 때도 "20억 엔의 자재와 20만 명의 영령으로 획득한 만주의 권익을 지켜라"와 같은 슬로건이 등장합니다. 만주의 권익을 둘러싸고 중국과 대립했던 쇼와 시기에도 일본인은 러일전쟁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주사변의 근저에는 러일전쟁을 둘러싼 중국과 일본 간의 기억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1930년대에 본격화된 일본의 침략전쟁의 뿌리는 러일전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156-7)




# 1898년 러시아가 시모노세키조약의 배상금을 지원하는 담보로 중국에게 뤼순과 다롄을 얻으면서 랴오둥반도 남쪽에 부동항 확보 → 극동 지역의 군사력 운용폭 확대 : 일본에게는 악몽 같은 상황




"러시아가 만주를 잠식해 들어가던 1903년 10월경, 극동 총독에 임명된 베조브라조프는 황제를 잘 설득했습니다. '철도를 만드는 것보다 좀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한국을 차지하면 돈이 들지 않습니다. 일본은 별 것 아닙니다'라는 식이었지요. 그는 '한국 또는 한반도를 차지하면 랴오둥반도의 뤼순·다례 항구를 지킬 수도 있다. 중둥 철도 남쪽 지선의 끝자락에 있는 뤼순·다롄을 방위하기 위해 육지에서 철도를 부설해 마을을 건설하는 것은 돈이 많이 든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들이지 않고 뤼순·다롄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바다 쪽, 즉 한반도를 잡아두는 편이 비용이 싸다. 일본이 진짜로 전쟁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청일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일전쟁에는 여기에 또 다른 문제가 추가됐군요. '철도 부설과 도시 건설에 필요한 비용을 싸게 하는 것'과 '극동의 바다에 해군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각각 경제 및 안전보장 문제와 연결됩니다."(173-4)




"어째서 일본은 러시아에 대항할 때 한국 문제를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을까요? 일본은 러일전쟁을 하기 위해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돈을 빌리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문제로 전쟁을 하려고 합니다. 돈을 빌려주십시오"라고 말한다면 "어? 이미 한국 문제로 청일전쟁 때 싸우지 않았나요?"라고 하면서 시큰둥한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한국 확보는 미국과 영국에 관심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뭐라고 말하는 게 좋을까요? "남부의 목화로 만든 무명(면)을 수출하고 싶지요? 콩을 세계적으로 상품화하고 싶지 않나요?"라고 말하면 됩니다. 이렇게 수출 시장으로서 만주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결국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러시아에 맞서면서도, 서구 열강을 향해서는 만주의 문호 개방을 위해 러시아와 맞서고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래야 서구 열강의 지지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구 열강에 비해 늦게 '제국'이 된 일본으로서는 주변의 지원이 절실했습니다."(181-2)




"8만 4000명이라는 엄청난 전사자를 낳았지만, 러일전쟁 승리 덕분에 일본은 러일협상에서 요구했던 것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의 '우세한 이익'이 포츠머스조약에서 '탁월한 이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청일전쟁 때의 '완전무결한 자주독립의 나라'라는 표현이 이제는 '정치·군사 및 경제적인 탁월한 이익'으로 바뀌었습니다." "〈제3조 : 러시아제국 정부는 청의 주권을 침해하거나 또는 기회균등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일체의 영토상 이익 또는 우선적·전속적인 양여를 만주에서 얻을 수 없음을 선언한다.〉 그전까지는 러시아가 중국의 헤이룽장성·지린성·랴오닝성을 점령함으로써 다른 나라는 만주에서 배제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각국이 평등하게 만주로 들어오게 됐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미국, 영국 그리고 전쟁 중 러시아를 원조했던 독일, 프랑스도 포함됩니다. "자, 제국주의 국가 여러분! 어서 오세요"하고 중국 동북부의 문을 활짝 연 셈입니다. 이것이 러일전쟁이었습니다."(188)




3장 제1차 세계대전 - 일본이 느꼈던 주관적인 좌절감




러일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이 호전적인 국가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미일관계가 어색할 즈음 일본은 독일이 서태평양의 섬을 지배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마리아나, 팔라우, 캐롤라인, 마셜 등의 미크로네시아 지역은 미국이 태평양을 횡단해 동양으로 올 때의 길목에 있습니다. 일본은 이런 섬에 주목했습니다. 그리고 가토 다카아키 외상은 영일동맹을 내세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려고 했습니다. 동맹국을 돕는다는 명분이었지요. 당시 영국은 일본의 개입에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가토 외상은 영일동맹 협약 전반의 이익을 방호한다는 명목으로 참전을 강행했습니다. 영국이 대서양에서 안심하고 싸우는 동안 일본 해군은 1914년 9월부터 10월 사이에 독일령 섬, 즉 남양군도를 차례로 점령했습니다. 당시 독일은 마셜제도의 잴루잇, 캐롤라인제도의 포나페·트루크·야프, 마리아나제도의 사이판 등지에 해군기지를 갖고 있었는데, 이것을 일본이 점령한 것입니다."(210-1)




남양군도 다음으로 일본이 노린 곳은 중국 산둥성의 권익입니다. "칭다오와 자오지 철도를 차지하면 일본은 유사시에 산둥반도의 자오저우만·칭다오에 상륙한 다음, 철도를 통해 서쪽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난까지 손쉽게 진격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철도를 따라 톈진, 베이징까지 금방 북상이 가능합니다. 그전에는 베이징에 도달하려면 우선 한반도의 인천에 상륙하고, 거기서 다시 철도로 만주의 안둥까지 가야 했습니다. 그런 다음 펑톈·진저우·산하이관을 넘어서 톈진·베이징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중국의 심장부를 달리는 가장 좋은 철도는 영국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독일령을 빼앗음으로써 영국 이외에는 누구도 가지지 못했던 중요한 철도를 손에 넣은 것입니다. 사실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베이징을 공략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나라는 그때까지 없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은 육해군 공동 작전을 수행했는데, 이제는 중국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능해졌습니다."(216-7)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과 미국·영국·프랑스 간에 벌어진 격론은 일본이 차지한 독일령 산둥반도의 권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격론의 핵심은 산둥반도를 바로 중국에 돌려줘야 하느냐, 아니면 일본이 패전국 독일로부터 정식으로 수령한 다음 적절한 시기에 중국에 반환해야 하느냐의 문제였습니다." "하라 내각과 정우회는 파리에서 있었던 외교상의 문제를 전부 이전 정권인 제2차 오쿠마 내각과 헌정회, 그리고 가토 외상의 책임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이후에도 계속 조명되어 왜곡된 기억을 낳게 했습니다. 이전 정권의 잘못으로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부당하게 비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특히 서구 국가가 중국에 동조해서 일본을 부당하게 비난했다는 이미지는 일본의 우익에 의해 확대되고 재생산됐습니다. 민간 우익으로 유명한 기타 잇키는 산둥 문제를 둘러싼 격론에 대해 일본이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완전히 배척됐다고 평가했습니다."(238-9)




"파리강화회의에서 채택된 베르사유강화조약의 제156조부터 제158조를 보면 "산둥의 권익은 일본의 것이 된다"라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요구가 전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의 외교가 실패했고 다른 연합국이 일본을 따돌렸다는 것은 상당히 주관적인 해석에 불과합니다. 객관적으로 당시의 일본은 권익을 챙겼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정치·경제 문제보다 의식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가 더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일본이 파리강화회의에서 느낀 위기감은 바로 그런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 의회가 한국의 3·1운동을 언급하면서 일본의 가혹한 식민 지배를 비판하고 그런 일본과 타협한 윌슨 대통령을 비난하자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파리강화회의에서 일본은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은 감정의 상처가 되어, 깊고 무겁게 남았습니다. 1930년대 이후 그 상처는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265-7)




4장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 일본의 자멸과 중국의 역할




"만주사변 발발 이전에 도쿄제국대학 학생들이 만몽 문제에 대해 무력행사를 해야 한다고 답했던 것을 되새겨봅시다. 무려 9할에 가까운 사람이 무력행사에 찬성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일본인이 만몽 문제를 일본의 주권에 대한 위협 혹은 일본 사회의 기본 원리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중의원 의원인 마쓰오카는 1930년 12월에 개회한 통상회의에서 의원으로서 첫 연설을 했습니다. 이때 그 유명한 "만몽은 우리 나라의 생명선이다"라는 말을 했지요. 이때는 만주사변 발발 9개월 전으로, 당시 하마구치 오사치 내각의 외상 시데하라 기주로가 미국·영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협조 외교를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협조 외교를 비판하는 마쓰오카의 주장은 "첫째 경제적·군사적으로 만몽은 일본의 생명선이라는 것, 둘째 일본 국민의 요구는 "생물로서의 최소한의 생존권"이라는 것이었습니다."(286-7)




"일본에서는 '생명선'·'생존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그렇다면 그 특수 권익의 실태는 어땠을까요?" "1926년의 통계에서, 만철과 일본 정부의 투자를 합하면 61퍼센트입니다. 좀 더 자세히 살펴봅시다. 법인 기업이 31퍼센트인데, 여기에는 만철로부터 유입된 자본 약 3억 700만 엔이 포함돼 있습니다. 따라서 약 3억 700만 엔을 만철의 것으로 계산하면 만철과 일본 정부의 대만몽 투자 비율은 무려 약 85퍼센트가 됩니다." 남만주철도주식회사는 운수업 외에도 정부로부터 광업 및 철도 부속지 사업을 넘겨받아 관리하는 회사입니다. "결국 만몽에 대한 투자는 대부분 국가 관련 투자였습니다. 따라서 국민으로부터 비판이 제기되기 어려운 구조였지요. 미국이나 영국처럼 사기업의 투자가 활발했다면 기업인의 비판이 정책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 관련 지분이 85퍼센트에 달하는 상황에서 만몽에 대한 정책은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습니다."(300-1)




"만주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은 양자 간 논의를 주장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영국·프랑스'와 '독일'의 대립이 뚜렷해지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으로 독일 정부의 배상금 지불이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만으로도 영국은 충분히 바빴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관동군과 일본이 아주 심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일본을 통해서 동아시아의 질서를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대일 융화'라는 말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에 대해서는 "타인만을 상대하지 말고 자기 본분을 다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자체적으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잔혹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연맹은 조사단을 파견합니다. 그 유명한 '리튼 조사단'입니다. 관동군과 일본이 아주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는 한, 일본에 유리한 보고서를 작성할 준비가 된 조사단이었습니다."(316-7)




"리튼 조사단은 일본이 '(장쉐량 정권에 의한 동북 3성의) 무법 상태로 인해 다른 어떤 국가보다 더 많이 힘들었다'고 인정했습니다. 또 중국이 국민당의 지시 아래 일본 상품을 불법적으로 '보이콧'했다고 했습니다." "만약 일본이 만주에서 경제적 권익만을 노렸다면 리튼 조사단의 결론에 만족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 특히 일본 군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일단 보고서는 일본의 행동을 국제연맹 규약 위반 또는 부전조약 위반이라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9월 18일의 군사행동을 합법적인 자위 조치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또 만주사변 이후 1932년 3월에 독립을 선언한 '만주국'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습니다. 만주국이 국민의 독립 요구에 따라, 즉 민족자결의 결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일본 관동군의 힘을 배경에 두고 만들어진 국가라고 명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일본이 만주 지역의 '중국적 특성'을 인정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만주가 중국 땅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말입니다."(318-9)




강경 발언을 거듭하면서도 내심 중국의 타협 요청을 기다리던 "우치다 외상의 계획을 망친 것은 쇼와 전전기에 항상 말썽을 일으켰던 문제아, 바로 육군이었습니다. 1933년 2월 육군은 만주국의 남쪽, 만리장성의 북쪽에 있는 중국의 러허성을 침공했습니다. 사실 작전은 현지군의 독단이나 폭주가 아니었습니다. 각의를 거쳐 결정된 작전을 천황 자신이 1개월 전에 재가裁可한 것입니다." "일본은 만주국을 국가로 승인하면서 1932년 9월 15일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일만의정서日滿議定書'가 그것입니다. 일만의정서는 일본과 만주국 쌍방은 한쪽의 영토·치안에 대한 위협을 다른 한쪽에 대한 안녕·존립의 위협으로 간주하고, 공동으로 방위에 임한다고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일본군의 개입은 조약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만주국 내에 일본군이 주둔한다'는 이런 엉터리 조문을 강요한 것 자체가 만주국이 일본의 괴뢰국가임을 잘 보여줍니다."(331-2)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를 만들고 북만주까지 만주국의 영토로 편입했지만 육군은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소련이 다시 일어서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떤 대비책이 있었을까요? 육군은 만주국과 소련이 국경 지대에서 소련군을 효율적으로 격퇴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만주국의 서쪽이며 만리장성 이남인 화베이 지역에 주목했습니다. 그곳에 안전한 장소를 만들려는 생각이었습니다. 쉽게 말해서 육군은 엄연한 중국 영토인 화베이 지역을 일본의 영향 아래 둔 다음, 그곳 비행장에 일본군 전투기를 배치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꼭두각시 정권을 세운 다음, 별도의 정치·경제권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육군이 1935년 무렵에 추진했던 '화베이 분리 공작'입니다. 이것으로 일본은 중국과 결정적으로 대립하게 됐습니다. 중국 정부 내도 대일유화파가 있었지만, 화베이 지역을 분리하려는 일본 육군을 보고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343-4)




# 중국 정치가들의 예견

1. 후스 : 2~3년 간 중국이 일본의 공세를 홀로 버텨내면 소련과 미국의 개입을 이끌어 낼 수 있다.

2. 왕자오밍 : 그렇게 일본을 상대로 힘을 소진하면 중국은 공산화될 것이다.




5장 태평양전쟁 - 전사한 장소를 알려줄 수 없었던 나라




"일본은 미국과 일본의 절대적인 격차를 국민에게 숨기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질적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야마토 정신이라고 하면서 국력 차이를 강조하기까지 했습니다. 국민을 하나로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위기를 강조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361) "당시의 중국통 다케우치는 중일전쟁은 내키지 않는 전쟁이었지만, 태평양전쟁은 강대국인 미국·영국을 상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약자를 괴롭히는 전쟁이 아니라 밝은 전쟁이라는 감회를 말했습니다. 다케우치의 글에는 전쟁을 '상쾌한 기분'으로 받아들였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요코하마 시내 다카시마역의 역무원 고하세 사부로는 개전 당일 일기에 "역장에게서 이 소식을 듣는 순간 이미 우리는 어제까지의 나태한 기분에서 벗어났다. 있어야 할 곳에 안착된 것 같은 기분이다"라고 썼습니다. 전쟁이 시작됐다는 말을 듣고 어제까지의 느긋한 기분이 아니라, 안착된 기분이 들었다는 내용입니다."(364-5)




"육군성과 해군은 (독소전쟁 발발 이후 두드러진) 외무성과 참모본부의 북진론을 견제하기 위해 움직였고, 그 방책으로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주장하였습니다. 그 결과 1941년 7월 2일의 어전회의에서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결정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미국의 반응입니다. 육군성과 해군은 일본이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에 진주를 한다고 해도 미국이 강력한 보복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그곳은 프랑스령이기 때문에 미국의 권익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참모본부 전쟁반에서 기록한 일지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에서 멈춘다면, 미국의 금수禁輸는 없다고 확신한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이 프랑스령 남부 인도차이나 진주를 단행하자 미국은 신속하게 대응했습니다. 7월 25일에는 미국 내 자산을 동결했고, 8월 1일에는 대일 석유 수출을 전면 금지했습니다."(392-3)




"왜 미국은 그토록 신속하게 반응했을까요? 미국은 독일군 300만 명의 공격을 받고 있는 소련이 10월까지 전선을 유지하고 버티면 이듬해 봄까지는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련에는 동장군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초 모스크바까지 진격한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무너뜨릴 수 없었던 이유도 혹독한 겨울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은 1942년 봄까지 소련이 버텨낸다면 소련에 무기를 제공할 수 있을 만큼 미국의 무기 생산량이 증가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1941년 9월 28일 미국과 영국은 소련과 협정을 맺고 소련에 군수물자를 보내기로 했습니다. 두 나라는 어쨌든 소련이 1942년 봄까지 전선을 지탱해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미국은 1941년 여름, 소련의 힘을 북돋울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 했던 것입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의 남진에 강력한 보복 조치를 취함으로써 소련에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일본을 걱정하지 말고 독일과의 싸움에 전념하라고 말입니다."(393-4)




국가의 안전에 대해 고심한 미즈노 히로노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일본에 가장 중요한 것은 경제다. 우리 나라는 주요 물자의 8할을 외국에 의존하기 때문에 통상 관계의 유지는 생명줄과도 같다. 외국과의 통상 관계는 일본이 비리와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한 유지될 것이다. 현대의 전쟁은 반드시 지구전·경제전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물자가 부족하고 기술이 저열하며, 주요 수출 품목은 생필품이 아닌 생사다. 전쟁에서 일본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셈이다. 따라서 일본은 무력전에는 이겨도 지구전·경제전에는 절대로 이길 수 없다. 그러므로 일본은 전쟁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탄압받았고, 국민도 그의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일본의 관심사는 지구전은 불가능하니 독일과 함께 소련을 협공할 것인가, 아니면 어떤 방법으로 상대를 선제공격할 것인가 하는 문제로 옮겨갔습니다. 이 양자택일의 문제에서 일본이 선택한 것은 후자였습니다."(411-3)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대개 수동형으로 표현합니다. 즉 죽은 일본인도 '피해자'라는 뉘앙스인데, 이것은 많은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거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와테현에서처럼 전체 전사자의 9할이 1944년부터 패전까지의 1년 반 동안에 발생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그 9할의 전사자는 머나먼 전장에서 죽은 셈입니다. 그런데 일본이라는 나라는 유족에게 그 병사가 언제,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려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위령慰靈에 관한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감안할 때 대단히 고통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즉 레이테든, 과다카날이든 정글에서 죽은 사랑하는 아들의 뼈를 수습하지 않으면 부모로서 마음이 편치 않고, 또 하늘의 도리에도 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정서는 엄청난 수의 전사자와 어우러져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끼도록 만들었습니다."(421-4)




일본인이 태평양전쟁을 피해의 이미지로 느끼는 두 번째 이유는 바로 만주에 얽힌 국민적인 기억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해외에 있던 일본인 민간인은 321만 명이었습니다. 여기에 육해군 군인이 대략 367만 명이었는데, 이 둘을 합치면 688만 명의 일본인이 해외에 있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688만 명 중에 200만 명이 만주에 있었습니다. 그 200만 명 중에 소련 침공 후 사망한 사람이 모두 24만 5400명이라고 합니다. 상당히 많은 수입니다. 사망자와 귀국하지 못한 고아나 부인 등을 제외하고 많은 일본인이 만주에서 철수했습니다. 패전 당시 일본은 총인구의 8.7퍼센트가 철수를 경험했습니다." "확실히 만주로부터의 철수 체험은 가혹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피해와 고통이 강조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화를 낳은 근본 원인은 일본 정부의 정책에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4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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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9-08-12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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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읽을 만한 책

한 주 늦어지긴 했지만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고른다. 아직 해가 바뀌었구나란 실감을 갖게 해주는 책은 눈에 띄지 않지만(우리도 아직 설을 남겨놓고 있으니 해가 바뀐 것인지 안 바뀐 것인지 모호한 시간을 살고 있다) 정중동의 분위기는 읽힌다. 아마도 이번주부터는 좀더 강력한 책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된다. 1. 문학예술 문학 쪽에서는 우선 2014년 맨부커상 수상작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문학동네)을 고른다. 처음 소개되는 작가 리처드 플래너건의 소설로 <굴드의 물고기 책>과 동시에 ... + 더보기
로쟈 2018-01-07 공감 (6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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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괜히 한번 더 살펴보기는 하지만 실제 덥석 책을 구입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국내 문학상 수상 작품이라면 좀 더 관심을 갖지만 외국의 문학상 수상작품은 이러나 저러나 관심이 가는 책만 읽곤 했는데.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은 그 내용을 알고 난 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그에 한 몫을 더했는지는 나도 알수없다. 이 책을 광고하는데는 분명 한몫을 크게 했겠지만.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역시 그런 의미에서 그냥 스치고 넘겨버렸을지 모르는 작품을 한번 들춰보게는 하고... + 더보기
chika 2018-01-22 공감 (3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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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평화 사이

오후에도 다시 잠을 자고 저녁이 다 돼서야 연휴 일정을 가늠해보았다. 연휴라고는 하지만 다음주 목요일부터는 정상적인 강의일정이 잡혀 있으므로 생각만큼 길지는 않다. 연휴 독서계획도 늘 그렇듯 계획에서 끝나기 십상이겠다. 그런 무망한 계획 가운데 하나는 전쟁 관련서들을 읽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대한 강의로 한해를 시작하기도 해서 자연스레 ‘전쟁과 평화‘가 올해의 화두가 되었다. 관심을 갖는 주제는 그것이 어떤 조건하에서 선택이 되는가이다. 전쟁의 가능성은 거꾸로 평화의 가능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 차례... + 더보기
로쟈 2018-09-22 공감 (3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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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일본은 전쟁을 선택했다

ㅡ 오늘 도착한 책 F ㅡ

#그럼에도일본은전쟁을선택했다
#가토요코_지음
#윤현명_이승혁_옮김
#서해문집
#파란자전거_출판사
#청일전쟁부터태평양전쟁까지
#2010년제9회_고바야시히데오상수상
#아마존재팬역사분야스테디셀러



우리 나라 안에서 바라보는 전쟁사가 아닌 일본의 근현대사 전공
교수의 시선이라 읽어보고 싶었다 . 교과서에서 주입식으로 배우
고 역사의 흐름처럼 조금씩 관점이 달리 보이는 것 같던 논평 속
이야기만이 아닌 정말 가깝고도 먼 나라 이웃인의 목소리와 시선
속 전쟁사는 어떠한지 ... 아마 다들 호기심이 생길거라고 본다 .

어느 한 시대만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서 지루한 역사 눈높이 교육
이 되면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 역사학의 묘미를 절묘하게
가르쳐준다 ‘ 는 띠지에 끌려버렸다 . 직접 체험해보겠다 . ‘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 ‘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재미있다 ‘ 는 그 유혹의
부름을 .

1장 ㅡ 청일전쟁
2장 ㅡ 러일전쟁
3장 ㅡ 제 1 차 세계대전
4장 ㅡ 만주사변 , 중일전쟁
5장 ㅡ 태평양전쟁

개인적으론 3 장 , 4 장의 챕터가 가장 궁금한 전쟁지대이다 . 전쟁
사이기에 흥미진진하다는 표현은 차마 못하겠지만 ...어쨌든 ,
시작하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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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8-01-04 공감 (2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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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쟁사학자가 본 일본의 전쟁 결정

도쿄대에서 전쟁사와 외교사를 가르치는 가토 요코 교수가 지은 전쟁사 책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세계대전,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행한 5번의 역사강연을 기반으로 쓰여진 책으로 일본의 시각이지만 비교적 객관적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이 책은 흔한 전쟁사 책들처럼 전투과정이나 전투 전략을 서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전쟁을 정치와 외교의 연장으로 보면서 전쟁의 당사국들과 주변국들이 어떻게 하면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하는지 국익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리고 어느 국가와 무슨 내용으로 외교협상울 진행했는지, 그리고 당시 일본이 처한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이 어떠했는지를 설명합니다.

따라서 전쟁의 정치사 또는 전쟁의 사회사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한 평가일 것 같습니다.

본문이 430여쪽이니까 두께로는 중간정도라고 볼 수 있고, 일본에서는 문고판이 2016년 출판되었습니다. 한국어판 출판이 2018년이니 2년의 시차가 존재합니다.

원래의 강연은 2007년 5일간 행해졌고 2009년에 초판이 나왔습니다.

일본학자들의 책들이 그렇듯 대부분 이 책에서 인용되는 책들은 일본학자가 쓴 일본문헌들이 대부분이고 미국을 비롯한 서구인들의 글은 아주 적게 인용됩니다.

이 책을 보면서 한국의 일제강점기을 좀 더 거시적으로 봐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단순히 일본이 조선을 1910년 병합했고 조선이 제2차세계대전 후 연합국의 결정에 따라 해방되었다는 서술로는 20세기 전반기 한반도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후 세계열강의 일원으로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으며 조선을 식민화 하기 이전에 이미 타이완과 홋카이도 그리고 오키나와를 식민지로 병합했습니다.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청의 조선에 대한 영향력과 속국에 대한 독점적 권한을 무력화시켰고 부동항을 찿아 시베리아와 연해주로 진출하려는 러시아를 러일전쟁에서 이기고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가지게 됩니다. 해양세력인 영국과 미국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동의합니다.

러일전쟁이후 러시아가 계속 연해주에서 이권을 챙기고 동북 3성에 영향력을 강화하자 남만주와 몽골을 대륙세력에 대한 일본의 이익선으로 인식한 일본은 이후 남만주철도의 이권을 중국으로 부터 받고 요동반도에 대한 경제적 독점권을 향휴하면서 산동반도와 화중 지방으로 영향력을 강화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령 산동 반도를 장학했으며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이권을 챙기려고 합니다.

일본은 영국과 미국이 중국에서 과도한 이익을 누린다고 생각하고 이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즉 일본제국주의는 후발주자로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누려온 경제적 이익을 빼앗아 누리기 위해 조선을 비롯한 남만주와 산동 반도를 복속시켰으며 영국과 프랑스의 이권이 걸린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하였고 중국에서도 이권을 되도록 많이 획득하도록 했습니다.

소련은 연해주애서 일본과 마주하고 있는 대륙세력으로 일본은 안보상의 이유로 소련의 연해주와 동죽3성 진출을 극도로 경계한 것입니다.

일본은 공산주자들이 중국의 이권을 독점하지 못하도록하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얻은 경제적 이권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외국인 중국땅애서 제멋대로 전쟁을 일으키고 민간인을 학살하며 호전적인 전쟁국가라는 인상을 주변국들에게 심어줍니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 발발이후 객관적인 경제력과 잠재력에서 상대가 될 수 없었던 미국과 전쟁을 벌여 결국 전쟁에서 패전하고 맙니다.

제2차세계대전은 기계화된 총력전으로 기본적으로 한국가의 생산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전쟁을 지속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은 미국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했고 이후 패전이라는 대가를 치룹니다.

아무튼 이와같은 총력전에 따른 군수물자조달에 대해서는 별도의 논의가 필요합니다.

독일과 미국의 전쟁물자동원(mobilization)에 대해서는 두권의 연구서가 있는데 전쟁의 경제적 측면을 다룬 드문 연구서입니다.

아래의 두 책을 참조바랍니다.

Wage of Destruction (Penguin Books,2008)

Destructive Creation ( University of Pennsylvania Press; 2018)

이 두책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은 재국주의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자국의 이익을 챙기려 끊임없이 전쟁을 벌이고 식민지 주민들을 동원하고 쥐어짰으며 포로로 잡힌 군인들에게도 가혹행위를 일삼았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인들은 아직도 스스로를 일본군국주의의 희생자 원폭의 희생자라는 이미지만을 강조하려 합니다.

적어도 일본인들이 가해자로서 저지른 전쟁범죄와 함께 그들의 피해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가해자로서의 행위에 대해 반성이 없다면 그건 아시아 태평양 지역 전체를 전쟁으로 몰아넣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 밖에 안되는겁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조선이 제2차세계대전 이후 미군에 의해 점령당했을 때 일본도 미군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한국의 미군정기를 이야기하면서 일본의 점령기를 같이 이야기 하지 않는 건 미국의 아시아정책과 공산주의 봉쇄정책이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졌는지 전체적인 구도를 보지 못하게 합니다.

미국의 맥아더 장군이 일본을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사실상 통치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미국은 일본에 민주주의를 이식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하고 같은 맥락에서 한국도 바라봅니다. 하지만 과연 일본의 정치가 민주주의 정치인지는 다시 따져 볼 문제입니다.

일본과 한국에 대해 앨리트들은 어느정도 이해할 지 몰라도 이해의 한계가 존재하고 서양의 정치제도 이식이 아시아에서 그렇게 만만하지 않기 때문에 이 역시 별도로 고려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변국이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사항은 아무래도 관심이 가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역사적인 애증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웃국가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그런 면에서 일제 패망 후 70여년이 지났는데도 한국 정부가 일본에 대한 제대로된 정책이 없는 것 같아 매우 우려가 됩니다.
특히 일본의 전쟁범죄에 대한 손해배상은 반드시 관철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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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nis Kim 2022-09-15 공감 (1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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