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26

加藤陽子「日清戦争研究の現在」(2013年度学術俯瞰講義 この国のかたち−日本の自己イメージ 第7回) - YouTube

加藤陽子「日清戦争研究の現在」(2013年度学術俯瞰講義 この国のかたち−日本の自己イメージ 第7回) - YouTube


加藤陽子「日清戦争研究の現在」(2013年度学術俯瞰講義 この国のかたち−日本の自己イメージ 第7回)
OCW UTokyo
29,264 views  Apr 24, 2020  東京大学駒場キャンパス
UTokyo OpenCourseWare( https://ocw.u-tokyo.ac.jp/ )で公開中の一部のコンテンツをこちらのYouTubeチャンネルでもご覧いただけま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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コース名:この国のかたち−日本の自己イメージ
開講年度:2013年(学術俯瞰講義)
タイトル:日清戦争研究の現在
講師名:加藤陽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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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대학 카토 요코(加藤陽子) 교수의 학술강연 <청일전쟁 연구의 현재(日清戦争研究の現在)> (2013년 도쿄대 학술부감강의)에 대한 요약 및 평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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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_요코_청일전쟁_연구의_현재_요약_및_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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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토 요코 「청일전쟁 연구의 현재」 강연 요약 및 평론 >

1. 서론: 근대 일본의 전쟁 기억과 청일전쟁 재해석

도쿄대학 문학부 카토 요코(加藤陽子) 교수의 2013년 도쿄대 학술부감강의 <이 나라의 형상 - 일본의 자아 이미지> 제7회 강연 <청일전쟁 연구의 현재>는 근대 일본이 치른 전쟁들의 서사와 기억이 일본의 국가적 정체성 형성 및 대외 인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다각도로 조명한다. 강연은 전쟁 기억의 재구성 방식, 학도병의 지성사적 고뇌, 그리고 청일전쟁 개전 과정을 둘러싼 정치·외교적 실상을 사료에 근거하여 입체적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2. 강연 핵심 내용 요약

가. 전쟁의 정의와 기억·증언의 구조

카토 교수는 전쟁 기억의 재현 및 증언 방식에 대한 민족학·역사학적 연구(세키자와 마유미 등의 연구)를 제시한다. 프랑스 오라두르 마을 학살 사건의 기억 방식과 일본 히로시마 원폭 피해 기억 방식을 비교·분석한다. 프랑스는 사실 증언과 사료에 근거해 객관적 사실만을 냉정하게 기록·전달하는 반면, 일본의 히로시마 원폭 기억(추모비 문구 "과오는 되풀이하지 않겠습니다")은 전쟁과 비극을 인위적 폭력이 아닌 마치 '태풍'이나 '진도'와 같은 불가항력적 '자연현상(비극)'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존재함을 지적한다. 더불어 패전 직후 전사자의 유골이나 정확한 전사 통지를 유족에게 전달하지 못했던 일본 국가의 체제적 한계와, 유족들이 느낀 상실감이 '자연현상적 침묵'으로 수용되는 과정의 구조적 원인을 분석한다.

나. 학도병의 눈으로 본 전쟁과 역사적 자의식

1943년 학도출진 정지로 전장에 투입된 고등교육 엘리트 학도병들(사사키 하치로, 마츠나가 시게오)의 손기·문헌 분석을 통해 그들의 내면 고뇌를 재조명한다. 사사키 하치로는 군부와 정부가 내건 '귀축미영'이나 '10억 아시아의 해방'이라는 구호를 단순한 민중 선동용 공념불로 간주하면서, 국가적 진영 논리를 넘어선 인간적 이성과 가치를 고민했다. 후대의 편집 과정에서 이들의 글이 국가주의적 혹은 반군부적 프레임에 맞춰 일부 윤색·개작된 실상을 검증한다. 또한 마츠나가 시게오는 나장여난과 백촌강(백강구) 전투 등 고대 일본의 패전 역사를 모티브로 소설을 쓰며, 당시 일본이 추진하던 대륙 침략의 무모함과 종말을 예견하는 지적 자의식을 보여주었다.

다. 청일전쟁 개전의 실상: 정형화된 역사관에 대한 반론

기존 통설이나 교과서적 설명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봉기 이후 천진조약에 의거해 청일 양국이 파병하고 자연스럽게 전쟁으로 돌입했다고 기술하지만, 카토 교수는 사료 실증을 통해 내부 정치가 침략 외교를 추동한 복잡성을 밝혀낸다. 당시 무츠 무네미츠 외무대신의 <건건록(蹇蹇錄)>은 개전 이후 삼국간섭 등을 경험한 뒤 후일 다듬어진 회고적 성격이 강하며, 개전 초기 일본 정부(이토 히로부미 내각) 내부에는 외교적 타협론과 강경론, 그리고 국내 의회 해산이라는 심각한 내정 위기가 얽혀 있었다. 일본은 영국과의 조약 개정 협상 등 국제 정세를 고려하면서도, 내부의 정치적 위기를 돌파하고 한반도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 궁궐(경복궁)을 기습 점령하는 쿠데타적 군사 행동을 감행하고 청일전쟁을 촉발시켰음을 입증한다.

3. 강연 평론 및 학술적 시사점

가. 결정론적 역사관 탈피와 사료 비판의 엄밀성

카토 교수의 분석은 청일전쟁이 사전에 일관되고 완벽하게 계획된 자국 주도의 정해진 수순이었다는 단선적 획일론을 경계한다. 무츠 무네미츠의 <건건록>에 대한 엄밀한 사료 비판을 통해 1차 사료가 작성된 시점과 맥락을 구분하고, 일본 조정·군부·외교 라인 간의 갈등과 불확실성을 복원해 냈다. 이는 사료의 텍스트성에 가려진 외교사적 실상을 재구성하는 뛰어난 사료 비판의 모범을 보여준다.

나. 근대 일본의 자아 이미지와 대외 인식의 원형 규명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조선 궁궐을 기습 점령하고도 '청국을 동양의 문명화 과정에서 배제'하기 위해 청국만을 '비문명국'으로 명시하여 선전포고를 작성한 지점은, 근대 일본이 형성한 탈아입구(脫亞入歐)적 자아 이미지의 왜곡된 단면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자신들의 침략적 도발과 폭력성을 '문명 전달'의 명분으로 포장하던 구조가 이후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연속되었음을 지적한다.

다. 전쟁 기억의 탈신화화와 현대적 경각심

학도병들의 사유나 원폭 피해의 기억 방식을 추적하며 역사적 사건을 가공된 영웅주의나 일방적 피해자 의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을 경계한다. 전쟁을 마치 자연재해처럼 관념화함으로써 책임 소재와 폭력의 본질을 회피해 온 일본 사회의 심리적 기제를 짚어내고, 근대 일본의 국가 형태(이 나라의 형상)를 객관적으로 직시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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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요코 「청일전쟁 연구의 현재」 1,000단어 요약·평론>

가토 요코(加藤陽子)의 「청일전쟁 연구의 현재」는 청일전쟁을 단순히 1894~1895년에 일본과 청나라가 조선을 둘러싸고 벌인 군사충돌로 설명하지 않는다. 이 강의의 핵심은 청일전쟁이 일본이라는 근대국가의 자기 이미지, 헌법과 의회, 국제법, 언론, 군사동원, 국민의식이 한꺼번에 시험된 최초의 대외전쟁이었다는 데 있다. 또한 전쟁이 발생한 직접 원인보다 일본 사회가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당화했으며, 그 기억을 어떻게 재구성했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핀다.

강의는 먼저 전쟁을 바라보는 방법론의 문제에서 출발한다. 역사가는 단순히 “왜 전쟁이 일어났는가”라고 묻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전쟁 당시 사람들에게 어떤 선택지가 보였는가, 어떤 정보가 공개되거나 감춰졌는가, 정부와 군대는 국민에게 무엇을 설명했는가, 국민은 왜 전쟁을 지지했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가토는 전쟁의 원인을 승전국이 사후적으로 만든 서사에 맡기지 않고, 당시의 문서, 의회 기록, 신문, 개인 일기, 외교자료를 통해 재구성하려 한다.

  1. 청일전쟁과 근대 일본의 자기 이미지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자신을 서구 열강과 동등한 “문명국”으로 만들려 했다.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하며, 근대적 군대와 관료제를 정비했다. 그러나 제도만 갖추었다고 해서 서구가 일본을 동등한 국가로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불평등조약이 유지되었고, 일본은 여전히 서구 국제질서의 주변부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일전쟁은 일본이 스스로를 문명국으로 증명할 기회가 되었다. 일본 정부와 언론은 전쟁을 문명과 야만의 싸움처럼 묘사했다. 일본은 근대적 군대, 국제법, 적십자 활동, 포로 대우를 강조했고, 청나라는 낡고 무질서한 국가로 표현했다.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아시아의 후진국이 아니라 서구와 나란히 설 수 있는 근대국가”라는 자기 이미지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가토는 이 자기 이미지가 현실과 일치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일본은 국제법을 존중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조선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또한 전쟁 과정에서 여순 학살과 같은 대규모 폭력이 발생했다. 즉 일본의 문명국 담론은 침략과 폭력을 감추는 정치적 언어이기도 했다.

  1. 전쟁을 가능하게 한 헌법과 의회

가토가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청일전쟁이 메이지헌법 시행 이후 처음 벌어진 대외전쟁이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는 전쟁이 천황과 군부만의 결정이었는지, 의회와 국민도 책임을 나누어야 하는지를 살펴야 한다.

메이지헌법에서 군 통수권은 천황에게 속했고, 군대는 의회의 통제를 제한적으로만 받았다. 그러나 실제 전쟁 수행에는 막대한 예산과 군수물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의회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전쟁 전까지 정부와 대립하던 정당들도 전쟁이 시작되자 군사예산을 승인하고 정부를 지지했다. 국내의 정쟁은 일시적으로 중단되었고 “국가적 단결”이 강조되었다.

이것은 전쟁 책임을 군부와 정부에만 돌릴 수 없다는 뜻이다. 정당과 언론, 지식인, 국민 역시 전쟁에 동의하고 열광했다. 전쟁은 위에서 일방적으로 강요된 사건이 아니라, 여러 사회세력이 참여하여 만든 국민적 사업이었다.

이 점은 일본 근대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훗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설명할 때 흔히 군부가 국가를 장악하고 국민을 속였다고 말한다. 그러나 청일전쟁 연구는 훨씬 이른 시기부터 의회정치와 대중사회가 전쟁 동원에 협력했음을 보여준다.

  1. 국민은 어떻게 전쟁을 알았는가

강의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언론과 정보의 문제다. 청일전쟁은 일본 국민이 신문과 그림, 전쟁통신을 통해 전황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한 최초의 전쟁이었다. 신문은 전투의 승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고, 전쟁화를 통해 일본군의 용맹함과 청군의 패배를 시각화했다.

그러나 국민에게 제공된 정보는 선택되고 편집된 것이었다. 패배와 군 내부의 혼란, 전염병과 보급 실패, 민간인 피해는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다. 반대로 승리와 영웅담은 반복적으로 강조되었다. 전쟁은 언론이 만들어낸 이야기이기도 했다.

특히 일본군의 실제 전사자보다 질병으로 죽은 병사가 훨씬 많았다는 점은 근대전쟁의 이면을 보여준다. 강의는 일본군이 전장에서 승리했지만 위생과 보급, 의료체계에서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승리의 기억 속에서는 이러한 죽음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전사자의 가족과 지역사회는 신문 보도와 전몰자 추도식을 통해 전쟁과 연결되었다. 전쟁은 전선에 있는 군인만의 사건이 아니라, 국민 전체가 군인과 유족을 통해 경험하는 국가적 사건이 되었다. 전몰자의 죽음은 개인적 비극에서 국가를 위한 희생으로 바뀌었다.

  1. 천황과 국민 통합

청일전쟁은 천황제 국가가 국민을 통합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전쟁 지도자의 이미지로 국민 앞에 등장했다. 천황은 대본영에 머물며 군을 지휘하는 존재로 묘사되었고, 병사와 국민은 천황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다.

전쟁 이전의 일본 사회에는 정부와 의회의 갈등, 지역적 이해관계, 계층 간 대립이 존재했다. 그러나 외부의 적이 만들어지면서 이러한 갈등은 뒤로 밀렸다. 국민은 천황 아래 결집했고, 국가에 대한 충성이 시민의 덕목으로 강조되었다.

가토의 분석에서 중요한 점은 이러한 통합이 단순한 강압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많은 국민이 실제로 승리를 기뻐했고, 전쟁채권을 사고, 군인 가족을 지원하며, 전몰자를 추모했다. 국민은 국가에 동원된 동시에 전쟁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였다.

이 경험은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형성된 천황 중심의 국민 통합, 전쟁 승리에 대한 집단적 감격, 희생의 미화는 러일전쟁과 이후의 전쟁에서도 반복되었다.

  1. 조선은 어떻게 다루어졌는가

청일전쟁은 조선을 둘러싼 전쟁이었지만 일본의 공식 서사에서 조선인은 주체가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청나라와 싸운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를 강압적으로 개편했으며, 동학농민군을 진압했다.

가토의 강의에서 조선 문제는 일본의 전쟁 논리를 해체하는 중요한 열쇠다. 일본은 청나라가 조선의 독립을 침해한다고 비판했지만, 자신 역시 조선의 주권을 존중하지 않았다. “조선의 독립”이라는 말은 일본이 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조선을 자국의 세력권에 넣기 위한 명분이었다.

이 점에서 청일전쟁은 일본이 서구 제국주의의 피해자 위치에서 가해자 위치로 이동한 사건이다. 일본은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요구하면서 서구의 인종적 차별을 비판했지만, 동시에 조선과 중국을 열등한 국가로 규정하고 지배하려 했다.

다만 이 강의는 일본의 제도와 국민의식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조선 민중의 경험은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동학농민군과 조선 주민이 겪은 강제동원, 식량 약탈, 전투와 학살을 함께 보아야 청일전쟁의 전체상이 드러난다.

  1. 승리와 제국의 탄생

1895년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타이완과 펑후제도, 요동반도를 일본에 할양하며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이 배상금은 일본의 군비확장과 산업화에 사용되었다. 전쟁 승리는 일본 경제와 군사국가의 성장을 촉진했다.

그러나 러시아·독일·프랑스의 삼국간섭으로 일본은 요동반도를 반환해야 했다. 일본 국민은 이를 굴욕으로 받아들였다. 청나라에는 승리했지만 서구 열강 앞에서는 여전히 약하다는 인식이 생겨났다. 이 감정은 러시아에 대한 적대감과 군비확장으로 이어졌다.

따라서 청일전쟁은 한 번의 승리로 끝난 사건이 아니다. 승리는 일본 국민에게 자신감을 주었지만 동시에 더 강한 군사력을 가져야 한다는 욕망을 키웠다. 청일전쟁은 러일전쟁, 한국 병합, 만주 침략으로 이어지는 팽창의 출발점이었다.

  1. 강의의 강점

이 강의의 가장 큰 강점은 청일전쟁을 외교사나 군사사에 한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헌법, 의회, 언론, 국민감정, 전몰자 추모, 천황제, 국제법을 하나의 구조로 연결한다. 이를 통해 근대전쟁은 군대만이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제도와 사회 전체가 만드는 것임을 보여준다.

또한 “국민은 군부에 속았다”는 단순한 설명을 비판한다. 국민은 정보통제의 피해자였지만 동시에 승리를 원하고 전쟁을 지지한 행위자였다. 이 분석은 전쟁 책임을 더 넓고 깊게 생각하게 한다.

가토는 역사적 판단에서 현재의 도덕적 우월감을 경계한다. 당시 사람들도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제한된 정보 속에서 선택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선택을 무조건 정죄하거나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도와 언어가 전쟁을 자연스럽고 정당한 것으로 보이게 했는지를 밝히는 일이다.

  1. 강의의 한계

첫째, 강의는 일본의 자기 이미지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조선과 중국의 시각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일본 국민이 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잘 설명하지만,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이 무엇을 경험했는지는 주변화된다.

둘째, 일본 국민의 전쟁 지지를 강조하다 보면 국가의 정보통제와 강압을 상대적으로 약하게 평가할 위험이 있다. 국민이 자발적으로 전쟁을 지지했다 해도, 그 판단은 정부와 언론이 제공한 제한된 정보 위에서 이루어졌다. 자발성과 조작은 서로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셋째, 일본의 근대국가 형성과 전쟁의 관계를 잘 보여주지만, 자본주의와 군수산업, 식민지 획득의 경제적 동기를 더 깊이 다루지는 않는다. 배상금과 영토 획득은 국가적 위신뿐 아니라 산업과 자본 축적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 종합 평론

가토 요코의 강의는 청일전쟁을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이 쇠퇴한 청나라를 이긴 전쟁”이라는 통상적 서술에서 구해낸다. 일본의 승리는 단지 군사기술의 결과가 아니었다. 헌법국가, 의회, 언론, 천황제, 국민동원이 결합하여 만들어낸 총력적 국가 운영의 결과였다.

그러나 바로 그 근대성이 식민주의와 결합했다. 법과 의회, 언론과 교육은 전쟁을 막지 못했다. 오히려 전쟁을 합법화하고 국민을 동원하는 수단이 되었다. 근대적 제도가 존재한다고 해서 평화와 민주주의가 자동으로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이 강의가 오늘날에도 중요한 이유는 전쟁이 시작되는 방식보다 전쟁이 정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부가 안보를 강조하고, 언론이 적을 단순화하며, 의회가 비판을 멈추고, 국민이 승리에 열광할 때 전쟁은 특별한 비상사태가 아니라 국가적 상식으로 변한다.

  1. 결론

청일전쟁은 일본이 처음으로 국민국가 전체를 동원하여 수행한 대외전쟁이었다. 이 전쟁을 통해 일본은 자신을 문명국, 헌법국가, 군사강국으로 상상하게 되었다. 동시에 조선과 중국을 지배할 수 있는 제국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가토 요코의 핵심 통찰은 일본 제국주의가 어느 날 군부의 쿠데타로 갑자기 출현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 뿌리는 청일전쟁 당시 이미 형성되고 있었다. 의회는 예산을 승인했고, 언론은 전쟁을 미화했으며, 국민은 승리를 축하했고, 천황은 국가통합의 상징이 되었다.

따라서 청일전쟁을 이해한다는 것은 일본 군대의 승리를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다. 근대국가와 민주적 제도가 어떻게 전쟁에 협력할 수 있는지, 국민의 애국심이 어떻게 제국주의로 전환되는지, 국제법과 문명 담론이 어떻게 침략을 정당화하는지를 이해하는 일이다. 이것이 오늘날 가토 요코의 청일전쟁 연구가 던지는 가장 중요한 경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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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学術俯瞰講義この国のかたち日本の自己イメージで今回で第7回目となりました
今回から2回分を担当されるあの加藤陽子先生についてあの私会の福岡から冒頭にあの
初回を短くさせていただきます 加藤先生はですね埼玉県さいたま市
昔の大宮市の大間れで桜蔭高校経て東大へ進まれました1994年よりあの東京本学の
文学部で教鞭をとられています ご専門はですね特にですね
あの1930年代の外交と軍事に精力的に取り組まれています皆さん1930年代と
いうのはあの世界史を勉強した人はあのもちろんが勝てますように例えばあのさん
1933年にはドイツでヒトラーが政権を掌握 しそして日本でもですね1932年にはあの前々回の佐伯先生のところで私たちはの
チャーリーチャップリンの数奇な運命と一緒にピン等しました515事件それから
1936年には226試験 いうふうにですね んあの軍事的なクーデターが起こってだんだんとあの戦争へと向かっていくそうした
時代であります 加藤先生は繰り返しになりますがその1930年代の外交と軍事を中心にしかしそれに
とどまらず広い あの子やからあの日本史そして世界の中での日本史
いうことを研究されています ですね今回あの先生非常に勝者がジョジョが多いんですがその中で特にあの何を学生
さんにお勧めしましょうかということですね あのところにですね真相ば模索する1930年代
陸軍中堅外日米関係という本を先生あみんな ていますこちらですね1993年に初版で2012年に山川出版
皮膚パン者からですね新装版が出ています皆さんあの盛況であるいはあの街の本屋さん
で手に取ってみられてみてください 加藤先生どうぞよろしくお願い致します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あのやはり法学系の先生は大教室に慣れ
ていますので ザワザワってきた時に我々文学部ですとあの一番少ない人数ですと15人くらいまあ
多くても80人くらいなんですねですから ザワザワってされるとこう動揺して面白い花
足を言わなければとか声を大きく張り上げたりしてやるんですけどむしろあの
静かに静かになるまで待つと待ってる間に寝てしまうのではないとみたい
まあそういうような跡は非常にテクニックがある話し方で 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で最後に10分ぐらいはし次になりそうです
すので16時10分ぐらいまでにこの a 3判のうん裏表ですね
まああのやはり固有名詞が多い時代だったりいたしますのでこういう風にプリント
アウトしましたこのようなあの立派なお部屋でこのお部屋はサンデル先生あたりが講演
したい 公平なんですかなんかこう歩き回って刺さなきゃいけないようなそういう気持ちにさせ
られますが まぁ基本はこちらの 裏表にデータなどを載せておりますがこの
これ以外にも随分いろいろなことは申し上げますただ例えば 聞き取れなかったものなどはカタカナ形で書いておいて後でインターネットなどで検索
してみていただくということもできますですからまあ貴方はこれを見ながらやり
ましょう をだいたい大きなお話は3つからなりますひとつ目に
まあこの国のかたちというこの連続講義に際しましてまぁ戦争ということをどう絡ま
せるか もちろん長谷部先生が戦争する国家 1月16日に抗議
用意されておりますし a か軽部先生なども皇室国体の問題で戦争と不可分なお話も
されていると思いますで私が文学部として何らかの形でこの国のかたち戦争って言い
ますと 戦争体験 記憶というような問題からお話を始めてそれが一番のところです
で2番目はちょうど今11月の20
8日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があのと巨大額で70年前に11月12日
まあここにもイチョウ並木がありますが本郷の a 1桜並木のところを
これは東京大学の学徒出陣を得1943年にあの12月に入営入団する学生に行く
反して壮行会がありましたその走行会が11月12日だということもありまして
まああの全体の政府がやりました gackt マーコートを昔の高等専門学校以上大学私立大学
まぁそういう人たちの出陣式は雨で への東条首相がですね10月21日の
a q あのジグ外苑のパロもう 運動場でやったわけですね競技場でやりましたそれとは別に投打で行ったのは11月
12日ですですから11月ということでまぁ学徒兵の目に映じた戦争ということを
でそこからマーセ添えの味方後は日中戦争など
にやはり絡め取られていく学徒兵も降りました 彼らが彼らの知性でどういうふうに戦争を眺めてたのか
それを2番目に見ますそれからまあ我々今あの 中国との関係でない架空の調査などでも中国に親しみを感じないというする国民が正
あの統計がある五時以降最大になったということもあり そして私の本の先ほどの模索する1930年代で言いますと
まああの本の中の陸軍とかいう部分を中国とか読み替えると比較的祖父流れがわかるん
ではないかというようなあのきな臭さがまあ国際関係でしょ 応じている中で
はいその東アジアの中の日本というものについて
西戦争というこの体験 ですね実態等その語られかたま教科書レベルも含めて
まあこの体験1894年95年 この記憶というものがどの程度我々のそのこの国のかたちというものを縛るのか
まあこの国のかたちというのは島りょうた the law さんの花 を使った言葉でありますしまあ彼は日露戦争に関して一つの一大叙事詩を書き
まああの nhk のテレビにもなりましたがその内に設定
時代設定をしまして日清戦争から見ていくこれが3つ目ですですから まぁだいたい20分20分20分ぐらいの予定なんですけれどもたく車道
をも頭でっかちで最初の方だけ なんか長くやってで先生は最後のほうやるのを嫌がっ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かいう鋭い
ミニコメントがありましてそれはそうですね最後の方のまとめ
レジメを作りながらまとめというところに何を言うかを考えて作り終わったことがない
ということもありましていろいろ考えながら話をする本ですからつい長くダラダラし ますただ今日はあのチャントキチっとしたお話を広い教室で聞き慣れてる皆さんですの
できちっとやりたいと思います 素ですからまあ20分ぐらいで一番のところでしょうかねはいまずあのあの戦争につい
て再定義することの難しさについてつぶやいたといいますか書いてくださったのは福岡
ついすらご存知かもしれませんし 長谷で先生の弟れっしにあたるんでしょうかねちょっと変わった形で3年準備
さんというあの憲法学しかしあの様々なことでご発言もありますのでお暇な時に何年純
ちっと引けばいろいろな原発問題でのご発言も出てくるかと思うただ私はこの長谷部
先生が編纂されました 岩波講座憲法減俸と時間という
これは 読みようによってはすごくあの簡単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見える
性も多いんですねその中に私は何と戦争という形で
一生を書いておりますに真一郎などの大法会の設置の話とか天皇の塔推定な話とか
まあそれを書いておりまして同じ共編者共著者の一人として安念さんのこの論文をまあ
非常に興味深く読んが ものとしてご紹介しておきます皆さんのところにある書いてございませんが
あの今から一番きもの処ちょっと読み上げてみますね 我々は結局あの巨大な戦争がなぜこれはまああの日中戦争以降太平洋戦争についての
ことを巨大な戦争と彼を言ってると思いますが何のために戦われたのか答えを見いだせ
ずじまいであったのである ある事項を憲法に規定するとは
当該事項について通常の意味での討論つまりは多数決によって決着をつけるという
スタイルの討論を行わないことを意味する 日本人は私の立場から見れば懸命にも得体の知れない問題は多数決で決着させる技代表
の中から削除する決断をしたのであると まあ光っ 不能なというようなキーワードの hey 馳先生
スタートを切った事業ですからウナのことを言っているのやら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
んがあんねんさんとしては憲法第9条というものをあの掲げる
ながらしかし自衛隊というものについての最も 支持率が高い時代我々は生きてるわけですね
良いことだ9条と自衛隊込みでこれは存在していいものだと言う
まあそういうようなことで有権解釈的にはどうかということなどを含めですね
なぜこれが共存可能なのかだから憲法に実は書くべきでもいちいちか かないことのほうがいい
ことがあるまあそれを日本国憲法の時になぜ 絵馬 ghq に言われたからとはいえしかし金森徳次郎がですね線何回も答弁して
まあ彼は非常に面白い答弁ですねまぁ川は流れ 水は流れても川は流れないとかいう言い方をして死刑は変わったん
のかとか国民なのか天皇なるかとか言って野党から来ます利根川という位置は変わら
ないですよね神田川の位置は流れないですよね でもそこに流れている水は流れてるんですとか言いながら
あの全文のところには天皇も入るんですとか言いながら まああのごまかすということもありますがそういうその国
日本国憲法というものがなかなかこう書かないで理性を保った
それはなぜかといった時に憲法ができるきっかけとなった まあ戦争っていうのは究極的には相手国の憲法が着替えるところまで行くというのは
あの長谷部理論でる層からのお話だということは知ってるかもしれん
ませんがそうするとその姉あの戦争自体は 何なんだ
ね石油が700倍とかねえ glp 10倍とか
です練り性合理性があったら回線はし得ないで例えば abcd 包囲陣にあの囲まれ
て a 持たざる国なんだって叫んでいますけれども じゃあなんで持たざる国を脱する一番最初一番早い方法はなぜかというと
abcd 包囲陣の方にするよることなんですよねまぁこれを喝破したのは異例 あきら先生という幅る大学の西洋史の先生ですけれども
まあそれをすりよっからこれは あの秀吉豊臣家がへ滅ん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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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れを考えるときに あの安念さんはまぁちょっと曖昧に聞こえている再定義することの難しさ
まあ1957年代生まれの人がそれを放棄してどうすると皆さん起こるかもしれません
がまあとりあえず格好にくくっているんじゃないかな日本人はっていうことを正直に
書かれた論文だと思いました で2番目に行きましょうで今 からお話しすることはですね
えっとマルイチからマルヨンの下のところの 関沢まゆみさんという先生のご本などに学びながら私が帰っていることで
関澤まゆみさんという方はこの方はあの皆さんは千葉県に住んでいらっしゃる方は日か
9的便利なんですけどそれ部屋の方はなかなか不便ですが桜の国立歴史民俗博物館と
いうものがございますが皆さんは高校の時ムリヤリにとかもしくは 近現代の展示室ができたから初めて国が作った戦争天地だから見に行こうとかですね
そう ちょっと行った事がある方いますか桜の国立歴史民俗博物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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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国はですね もう色々歴史認識のうるさいだけあってあの
近現代の博物館はエンターテイメスト生も含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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たころはやはり戦友が小指などを切ってですね
ちゃんと その現地で供養してまー白木の箱鳴り入れてきます
だけれども44年のまあ7月以降ですねもうこれはま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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だから例えばある舞台では彼のガダルカナルですが土を入れ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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汚いはがきでそのかかりんが殴り書きで帰って何何彼に来てくださ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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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なたの舞台は健全な舞台だから1ヶ月後に帰ってきますなんて言って
つまり帳面見て調べるのがめんどくさいわけです ですからそうやって追い出されてだけど帰ってみたら次の日にはその戦友さんからその
最後の4の 詳しいことについてのハガキが登録とかですから本当に言われない思いをしながらと
いうのはあの丸6番のところでお話しますけれども まあし兵士がどこで死んだのか際遺族に教えられなかった国が日本であるということの
十戒はちょっと後でお話しますがまあそういう歴史民俗学農家 だがですねじゃあフランスはどうかなっていうことで行ったんですね
でこれはあのフランスと日本を比べる まあドイツと日本を比べるっていうやり方はあのどんだけ反省してるかっていうの
競い合いの時によく言われヤラれるんですけれども まあ彼女はフランスを選んだ積山さんは
一つは何でしょうねその日本の場合 侵略と原爆というのがある種罪と犠牲の総裁のようになっている
だからドイツの場合例えばまあ侵略のある ドレスデンという焼かれたのもあるだけど原爆ほどの衝撃はないとなったときにその
ある種のヴィシー政権などでドイツに加担したというフランスだけれども何の罪もない
人々が ss などによって焼かれたことがあるフランスそれをマージ0にすることであの
犠牲となんてやった罪というそのバランスという点で少し比較が可能かなということな
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これについてはのコメントなど をでぜひあの書いてください比較するのにどういうことがいい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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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り組み方を調査に行くんですね彼女はこれは請求136年で1500人くらいの
小さな村です で1944年という時に事件は起きますですから44年6月ですから
ドイツももうかなり苦しくなってくるその時にフランスに中東している ss が基本
的にその なんでしょ待ち伏せ攻撃をレジスタンスから受けたりする
そうしますと ss は一人の ss 隊員殺すと役人だぞって事を言ってるわけだ
からこそ治安が維持できる ですから必ずもし ss が殺されたら
かける100とヒューの音を殺していこうというようなことがあったものか1946年
6月乃亜 44年6号 月10日に事件が起きましてナチスの親衛隊によってこの
ちょうど蛭間町に入った1574人のまあ 居住者のうち642に昼間いたということですから
だいたいこれはあの年寄りとか子供とか女性が多かったんでしょう まぁそういう人達が
はまああの いわゆる属性の調査ですね 戸籍とか言語とかそういうのを調査するから積まれと言われて教会とか
あの広場に連れて行かれるまぁそこでまぁ基本的には銃殺されて焼かれるわけです
けれども 街自体も焼かれてしまうほとんど生存者が昼間いた人が前夜彼
てしまうのでこの街はいないしかしその亡くなった方のし 裏側にこう潜んでて生き残った人がいるこの生存者6名による証言によって戦後裁判が
なされるわけです マルニばフランス政府はこれは1945年もちろんこれは戦勝国として
a ドイツに望みますねでボルドーれ裁判がある でこの犯人はドイツ人は7人だとわかってるこれは ss 証拠ですしかしそれに協力
しました アルサス出身のフランス人ですですからあのう
アルザスロレーヌの問題が分かってれば分かるようにフランスとしても まあいうはとつまりフランス人だって苦労した苦労したフランス時
占領下でやったことだということで基本的には最初は死刑 強制労働の判決を下していました
しかしこれはすぐ勢に特赦ということで14人余りのフランス人は
者コース れてしまうわけですですからまああの東京裁判 横浜裁判 bc 9裁判が1952年以降
やはりまが巣鴨に入った戦犯たちがまあ釈放運動っていうものが起こるわけですね日本
が独立したい子それとある守護獣これはさんということを でまぁ時間的にも
非常にあのを一致しているところじゃないです消化 しかしまるさんのところですしかしこの村はですね
もう許さんと1974年まで遺族たちはフランス絵図と断交状態にありましてようやく
ミッテラン大統領の時に記憶のための資料館というこ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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記憶なための資料館が開館されていますですからフランスでさえ
やはり四十何年の年月がかかっているということになるんじゃないでしょうか
デココ の記念館はあのみんな訪れますとどういうことをやってくれるかと言いますとさあ
何時何分ですとここで ss 将校が ように皆さんたちに声をかけたんですってことで事実上再現体験です
でこの教会に連れて行かれましたここで銃殺されましたということ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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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 の平和のメッセージとかヴィシー政権がどうのとか ドイツに協力したフランス人がということを言いません
6人の証言者が見たことで何人がどの場所でどのように殺されたかで殺された人と製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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受けているようで 忘れないゲット我々ここで起きたことを覚えておいてという言葉が遺跡の入り口や
掲げられているという風に書いてありますが4者から性処そしてもう一つ今申し上げた
ように a に何て言うんでしょうか 語り部は一切感情を交えず起こったことじゃ
海はない見てれば一番わかるでしょうというそこに
a 信頼を置いている一方で丸4番に行きましょうそれでは我々の国はどうだろう
広島市の平和記念公園にある厳罰死没 原爆死没者慰霊機であります
これはあの慰霊碑 の言葉遣い自体があのかなり特徴のある日本語だということもありなんとか聞いたこと
があ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安らかに眠って下さい過ちは繰返しませぬからです過ちは繰り返しませんからという
ことで で事実これはか たりべという形で
なりあの頑丈移入しながら聴いてる人に まあ涙をん
なんて言うんでしょうかを喚起するような形で 生者が死者に語りかけですから聖書がっ者に語りかけるもう過ちは犯しませんですから
日米安保条約第2条の経済の条項で平和裏にと同じあに行きますよ
9条があるからもう戦争し ませんというその誓いとしてあの
生者が死者にお約束するというちょっとここはやはり違うだろう
ここで私たちは あの私の頭の中まああのぐるぐるに汚れてしまってあったぞ中で皆さんの気持ちを忖度
するのは申し訳ないんですけれども例えばね皆さんは じゅぐや不可とかあとその戦時徴用工ですね住友金属はまだ多少をどうするか迷ってる
と思うんですね韓国経済との関係があまりにも密接すぎるから しかし三菱重工などはあの戦時徴用工などに関しては1965年の日韓
基本条約で完全に妥結済みであるということでまぁ政府の判断もあり
まああのこそしているわけですねそういうことを聞いた時にあれ韓国の人はやっぱり
なんでこだわるんだろうという気持ちで見る目はないでしょうかこだわるんだろう
日本人は例えば ああああああ アメリカにもちろん日本が1941年に日米戦争を始めた
37年日中戦争始めただけれども非戦闘員を10万15万のオーダーで殺すようなあの
原子爆弾これを受けてもアメリカへの今のあの して
シミ覚えるのデータを見てもやっぱり 戦争には負けたんだ負けた馬は仕方がないぐらいに思っちゃっているんではない
でしょうかその忖度からあのなぜ 忘れられない気持ちを抱いているんでしょうねっていう気持ちで東アジアの人を見た
ことはないでしょうか で私はこの広島の問題原爆の問題って言うところでは確かにマルゴのようなあの要素は
ある しかしまる録のような要素もあるということで今のあのしつこいなっていうような考え
を持ってしまうこともある我々ということ
をちょっと眺めてみたいんですねこれは1958年のことであります
ギュンターアンダースといってもピンとくる人はあまりいないかもしれませんが
ハンナああ レントの歳夫と言ったら大丈夫ですよ 何でいいの夫とかいうのはどうでしょうかね私はの自慢ひろいきの妻だったりして
でも加藤陽子さんの夫とか言われるとあの配偶者は予備校の教師をしていますけどやる
かもしれません皆さんの中にもちょっと 彼の講義で害悪を受けた してもいるかも知れませんのでちょっと文貼っておきますがちょっとに c 戦争中に
私が危惧するような その解釈を述べているのでないか怪しいんですけれども
まあこの牛タンダンスはそのハンナアーレントハンナアーレントと言われて 最近新聞や渋谷なんかの映画館の具合を見たりしてちょっ
を覚えてませんかアイヒマン裁判などを傍聴に行ってアメリカをベースにあの
ものを書いた人ですけれどもやっぱり普通のおじさん普通の市民が起こした
600万の由良人虐殺というそれを書いたことで右からも左右からも左からもといい
ますかユダヤ人団体からも あのドイツ側からも様々に批判された女性ですがその花アーレントの映画があのあり
ますはいで母との関係などもあの暗示されているのでしょう まあこのジュギュターンダースが広島長崎を訪れてですね
第4回の原水爆大会か何かに来たんですその時に の日記があると私はこの日記自体はあの津波の形而上学という
歳父が起こっていこうまた注目されて2009年にあの出た本ですがそちらのフランス
人の哲学者の本を読んでて このアンダースのことを知りましたがこのアンダースは公開
ています 被爆者にあったんですね彼らは一様に咎めるべきものについて語らず
出来事が人間に男されたという点について沈黙する つまりアメリカの考古こういう兵士がまあ
パッドなんとかリトルボーイとかその乗せてきた b 29にあの
字をつけてたりするんじゃなくて b 29に乗せた核弾頭にあたらをつけてたりする
わけですが そういう人間としてはあの人間によって起こされたという点については沈黙するそして
一応にこの上ない犯罪の被害者となったにも関わらず ほんの少しの塩さあも抱いていない
これは私からすればあまりに行き過ぎていて理解を通り越してしまう あの曲について彼らは一様にそれが自身や隕石の落下
あるいは津波でもあるかのように語るのだと まぁ最近地震やいい席出神と裏すべて地球を襲ってくれているので
あの本当に理解不能なほど残虐な問題を我々が想像する時津波だとかやりユダヤの虐殺
について生き残った人たちに語らせた映画のショアーというのあれはやはり津波という
含意がある言葉なんだそうですね ですからあのいわゆる静 円減少に還元してなんか持ってかれちゃったとか
戦死者の奥様がよく言うのはガダルカナルに持ってかれて死んだんまあ死んだとは言う
けど持ってかれたっていうのは何かね台風か何かで巻き込まれて亡くなったかのような
物言いですねですから自然現象のように感じてしまう
日本というので やっぱり同一陣としてははたから見てそう思う
だから先ほどの安らかに眠ってくださいという誓いも込めて まああっさりした民族がなんかこう
絶望自分たちが始めたという犠牲と
罪の総裁という観念がそれほどいつも皆さんに
喚起されているわけではないのにあっさり アメリカに対してはん
親しみを感じる落とした人というふうには思わないというそこは何故だろうっていう
ことを釜問われているわけですね でまぁ日本人の気質かなとか言うがあっさりしていてちょっとその血で血を洗う抗争が
あって半島や大陸とは違うなどという痛さになるとまあそれは学問 がなくなるわけですがでそうするとねもうちょっと考えていくとそのあっさりって何
だろうっていうことなんですね 6番目です戦死者遺族にっていうことで我々は例えば
あの8月15日の戦没者追悼式典 閣僚や首相は靖国神社に参拝すべきなのはやはりあの
倒れた来なく倒れた人が祀られているからであるという物言いは大変ありますですか
戦没者というものいたのにはあれが正式の痛み肩であるからやはりあの
参拝すべきだという議論ですからアメリカの銃規制と同じぐらい安くに no
or の閣僚の参拝問題はいろんな論じ方がされると思うんですが私はやはりこの
一ノ瀬さんという方はここに上げておきました一ノ瀬さんという方は先ほどの関沢先生
とともに歴博でこの戦争経験の
を体験の記憶と語りのプロジェクトであの助教さんの時に関わった方です
今彼は埼玉大学にあの先生になっておられますけれど彼は本当の執念で歴史学者的な
執念で遺族会が 様々にあの今年遺族会解散になりましたけれどもあまりに高齢化が進んだということ
ですねその遺族会が私家版として編纂したような書物を
まあ悉皆集めましてこれはあの歴歴史民俗博物館に行けば全部あの収集がか
のな限りされていると思いますがそれをこう呼んで行くと我々は例えば1945年
ぐらいまで戦争が終わるまでは確かに 遺族扶助料とか恩給とかそれから戦争で亡くなった人へ村デー
正式のお葬式をする構想ですから村で最下級のたとえ
おうちであったとしてもそれこそ蝶々さんが来る 代議士が来るまあそういうような園村前
第で誉之 曹丕がなされていたしかし基本的にはその1944年の後半からの1年間はこれは
your て県のデータですけれどもその戦没地は岩手県全体の戦没者これは第2師団
などですからやはり南方で死ぬんですが1945年まで30
17年以降の戦没者を岩手県でデータ取りますとあの44年後半からの死者が9割です
だから遺族としては あのちゃんと賑々しく
纏ってもらえなかった遺骨がちゃんとした白木の箱に入ってこない
戦死公報が役場から来ない取りに来いと言われた それ ghq が来たら1952年まであの軍人恩給とかそんな止められると大変な
踏んだり蹴ったりなものがありますただ彼が この一ノ瀬さんが明らかにしたのは役場の役人が冷たかったということだけじゃなくて
その人々も冷たかったっていうことについて議場なその語りですね遺族たちのこの怨念
にも当たる語り が語られていますつまりどこでしょう
死んだのか骨はどこなのかで結局あの
第1副印象というまああの書きませんがこれ陸軍省のことですが咲き145年8月に
終わって9月に陸軍がなくなってもそのまま第1副印象という
d モビライゼーションということ てその戦時体制を解くその役所が残りますとだんだん皆外から帰ってくる
第1副印象の書類の中に残された手紙がありましてこれはあの吉田豊先生という
一橋大学の方が 岩波新書のシリーズ日本近現代史のあれ私が互換ですが6巻の対応戦争アジア太平洋
戦争の中でいいよーされていますけれども まあ自分の愛する我が息子がどこで死んだのかが分からない
骨が明らかにされるまではその自分の戦争は終わらないでその文章はやはり
後ろの方ではその陛下の命でまぁここをの神と言われて軍事所宮です
ねいった人間の骨が シュシュされていないってことの怒りが第二復員省に手紙で言ってますですから昨日
あたりの新聞でもフィリピンのあの自衛隊などが今
大風で救いに入ってますがある層も含めまた の遺骨収集のまあ復活というんでしょうかそういうものがなされているように遺骨が
帰って来ないどこで死んだのか 政府は1953年ぐらいに打ち切りま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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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車まあ非常に少ないそういう時の戦死者
日中戦争37年の選手車まだまだ少ない そういう地域に地域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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あんな風に 例えば南京で死んだっていうのを歩いている人が村人全員しを分かってい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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起きてしまったというそこでありますそれであ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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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ありますが 非常に a reit 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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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ィリピンのマニラに新聞だ設定って言われて 40歳で戦争があった次の図4福音するんですがその子と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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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の大使としてアメリカから来てた人ですそのジョセフグルーの対日10年というあ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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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を訳したことで非常に著名な医師かあさんは 40でフィリピンのルソン島から船で帰ってくるんです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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ですから別にあの ghq ではなくフィリピンにアメリカが進駐してきた時この1年間はまあ比較て
木大事に扱われた人でしょ通訳ということもあるしね だけど46年に日本にこう上陸する直前に彼はなくんですね
船の中ででこれが私はちょっとあの いってりのなく瞬間体はこっちなのかと思ってまあ私は今53ですか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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船員さんがですね今から上陸させるでお前たちの中にしあの
白木の箱遺骨を持ってる奴はいえ何個持ってる買えって言った時に彼はもう滂沱の涙が
出たやはりナンパ白っていう形とか やはりそのルソンっていうところで
てその帰ってくる前に直前に病死した人もいるわけですね そういったときにやはりその船にを運行する人っていうのは陶磁器上げ戦なんかの人
から見ればもう神様ぐらい有難い人ですよねあの安全に運行して魚雷の残りなんかに
接触せずに日本 に連れてきてくれたその立派な繊維さんがお前たちの中でその遺骨を何個持っている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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それから今申し上げたような石か禁治産のあの人を投光器投稿というのは
へほ糧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ねそういうものなどを見ながら 集めていくまたようなええっ
戦争の語り口をあの見ていかなきゃいけないと思いますそれではずいぶん長くなで2番
に行きますが区東平ですこれは皆さんに を誓いお話になるでしょうか佐々木八郎さんという典型的なエリートのレート
松永茂雄さんという少し浮くつを抱えた人の2つの例を挙げながらお話をいたします
みなさんの中でいろいろ 分店から理転したとかどっか留学してたとこで24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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ちょっと言いますねで4-3とかもう私とかも何十倍なんですがあの
24歳と聞いたのは今申し上げる佐々木八郎さん24であの死んでると言うかことです
先八郎さんというのは1922年東京生まれで第一高等学校の文化甲類これは英語
先週ですでもちろんドイツ語なども1週間中何時間やるような旧制高校の勉強ですね
それで経済学部です これは1919年に経済学部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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決意して済んでるだろうということはちょっと細かいことを言いますが 1941年の10月16日に近衛内閣が退陣するとき第3次近衛
で東条内閣ができるその日に だから法律っていうのはできちゃうと大変なんですがその日に併記法改正というものが
議会ではなくて緊急勅令で つまり憲法第8条の緊急勅令を使いながらこのケーキ法附則をとりますっていう決定が
なされます その取りますという決定は何かというと
24歳に達するまでま24歳に達するまで
その併記法に定める高等教育機関に在学している学生は徴兵猶予を認める
認めることについては法律でこれを定めるつまり何か改正があるとき法律で改正される
ということは議会の審議で チェックができるその安心感が併記法の付則にはあったんで1941年10月16日
までは しかし東条内閣は2年後の 下級証拠ですね少尉さんです30人くらいの部隊を率いて指揮する
その下級将校の不足が2年後に予想されるとして帝国議会外観機を待たずに
ぺこ議会開会機というのは12月ですからか一戦になっちゃうわけで またずにこれを
の不足を取っちゃっただからピンと来る人は無理やり分店とかであり点とかですね
無理やりこの頃増え始めた私立学校法かとかねそういうところに行く道もありました
しかしこの人はやはり まあそれがやはりなんて言うんでしょうかね あの当時の海軍兵学校なんかの棋風とか
あと一項の棋風とか吉田満というあの線栢山頭を妻を書いた人か言っていますが
って言うんでしたっけなぁあの その晩からとかそういうことではなくて
8大きなこと自分に関わる大きなことなんだけれどもそれをあたかも何のことでもない
かのようにする寄付で次回1月9日にいますすいませんそういう寄付っていうのがある
わけであの相手スアの選んだじゃないでしょうか であの43年
長袖 u を停止で東京大学から学徒出陣します それで彼は飛行予備学生となりで何度もこの過程では長男であるかとかいろいろまあ
チェックもあり後技量があまり優れていないとですね
例えば6週間で双発機 を飛行機ゴウちゃんと霞ケ浦形でできないとケッチンとかして地上勤務にまあされると
だからもちろん 学生上がりの予備将校について海軍が非常に不当な扱いをしたという語りもあります
しかしやはり国がもうどうせもない子になりますという主婦なしとあ
戦ってねということになると思いますねその元格闘がよく皆さんも英語とか他の外国語
で いろいろ会議なんか出たときに自分は下手だと思ってもでもその中でいる中で一番でも
できるかなと思ったらやっぱり通訳が役割果たすじゃないですかそれと同じような期間
で行ったんじゃないでしょうかね でんっ 彼は45年4月中4日ですでまぁ今日帰りましたら帰りがけなどの電車などでさっき
八郎というのを今行かないでくださいね 違うのに女が一番辛い真姫ちゃダメですよ今引くとこれ画像が出ます
であの14apr にあのまさに昭和たいとしてあの大和室
激鳴り沖縄防衛の時を援護するというので一例のとこうですがその特攻に行く時のまあ
こういう話すると本当にかわいそうになりますがねあの まあ一項の安倍能成と東大の早朝その二人が高
なんて言うんですよね揮毫したへ 日の丸の波止ですよ彼の理性からすればそれはすごく問題だと思うんですが日の丸の旗
をたたんで鉢巻きにして出撃する前の写真があります
ですからこれはなかなかあの日所がありますけれども まあ彼はそのなんで有名かといいますと
その遥かなる山だにという これは遥かなる山なりというのは a
皆さんの方のレジメには書いてないですね遥かなる山がにというのは東大の中の戦没
学生だけの手記を集めたものです きけわだつみの声は私立学校含め
あの戦没学生の手記なんですけれどもその彼の中の最初に
あのでてますやなやら先生じゃなくナンバラ茂早朝の後の会言葉でこの言葉が書いて
あるんですね つまり宮沢賢治のカラスの北斗七星を読んだ感想で自分の気持ちがこのカラスのおくと
姿勢のカラス艦隊のトップである第3 大尉さんですねにあの硬くされるって言うようなもので書いてあってつまり
カラスの北斗七星っていうのはこれは小森陽一先生あたりが国語の授業かなんかでやっ
てるんでしょうかね 面白いんですよねえっと注文の料理店という1924年に作られた賢治の小説集
の中に出されたものでおそらくこれは1921年から22年のワシントン海軍軍縮会議
っていうものを意識して 書かれたものですカラスの北斗七星で簡単なんですだからまあこういう話をしていると
また横に逸れますがその空母とかその戦艦とかそういうものを擬人化してで女の子
ちゃんもちゃんと 戦いの位メンバーなんですねでその
から 二艦隊富山ガラス管体が戦って出会いて敵を殺すのは嬉しいんだけれども
だけれども嬉しくないっていうその想いって言うからカラスの身としては敵の数が止ま
ガラスの数が減るのはうれし だけれどもなんか褒められた気持ちにはならないって言う
まあそういうことを書いた小説ですがそれを使いながら彼は丸に2位をしてありますよ
こう書いてあります 正直なところ某米防衛
撃滅とか10億の神の解放とかということは単なる民主主扇動のためのカラー念仏とし
てしか響かないのだ そして正しいものには常に見方をしたい
コード感情すべて僕にとっては10戦に人間的なものであって 国籍の異なるというだけで人を愛し憎む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ことです
で私が引用しましたこのカラー先生の本はこの方は昭和6年ぐらい1931年までです
から額等 8していかないで済んだ形で東大法あの経済学棒でてあの法政大学で経済学の教鞭を
執った岡田先生ですが何が偉いかというと私下線を引いておきました
防衛防衛某米防衛撃滅とか10億のためのか
方とかでこのアンダーラインの部分はですね 1951年に刊行された
遥かなる山がにの中ではえーっとね違う風に回
修正が施されちゃってるんですね例えばこうです 軍の指導者たちのっていうふうに書かれていますですから
これ登壇出版界の生協があの1951年2回出したということは独立も
前に戦没学生の手記をこう集めて出した
準備してただからアメリカに対する抗厳しい言葉っていうのが分以上この方全然
アメリカに対する あの反米色はない方だけれども言葉ヅラでやり直されているだから同様に心から敵を
憎み あの子 文が喜んで死んでいくということを書いている衣装などもこれはあのね振られると言い
ますか 排除される編集がなされたりしたという事につきこの岡田先生はきちっと調べて戦没
学生のいっしょそのものの実態を調べながら5調査をなさった方 ですつまり軍の指導者たちの言うことは単なる民主扇動のための空念仏というのと当時
政府がいろいろスローがにあげてた言葉これを載せることではちょっと迫力が違います
よね 反軍的なというよりは政府が用いて言った言葉について
チッと書いてあると言うやはり私はこの改ざんと言うな どういう立場であれ全くいけないことだと思いますそれからまあ2番目に行きましょう
松永修行さんですこの 方はどちらかというと先ほどのは本当のエリートの本当の秀才がすべてを分かった上で
あの死んでいったという感じの部分ですねでまぁ本当の秀才がというのはちょっと
佐々木八郎さんがどんなものを中学時代に読んでたか言います府立第八中学で中学と
いうのは当時あの15から 16歳ぐらいのですね高校が17歳からでしょうか
中学で読んでた全集が武者小路実篤有島武郎そして宮沢賢治徳冨蘆花国木田独歩泉鏡花
谷崎潤一郎 森鴎外田山花袋徳田秋声志賀直哉 川端康成倉田百三そう
れからを中学で読んでるそしてここになりますと ツルゲーネフトルストイ度不貞スキー値 f 二名女0時服をスキ
スタンダール g ドモーパッサンロマンロランそしてパールバッグなども読んでいる それで大学に入りましてからはヘーゲルの歴史哲学の二役事
分で約し始めているでマルクスの資本論も自分で訳し始めていて
で1945年のあの4月 2月に最後にお家に帰るのかなその時に自分がもうこれは完成させられないけれどもと
いうので あの卒論とが卒論という形ではないですが自分の考えをまとめたノートあの遺族に残し
ていますねまあこういう人が去った後 はいそれから2番目ですこの人は
まあこの年食ってますね13年までです で途中はいえー31年にコート第一高等学校の理科コール位に入っているんですが32
年にふと止めて児童文学とかになりますそれでや自分はじゃああの
そうか國學院大学などで a ちょっとやろうかっていうことで日本思想
古事記日本書紀なんかも読み始めるということをやります ただしこの方はもうあの24歳という年齢自体をその際学年で特例もない
前にもう達者ってるので入隊しちゃってるわけですね 中退しているときですから彼はまあイレギュラーな形で学徒出陣した形ですがそれだけ
に成熟したことをやってます1931年9月に勃発した満州人を横目に見ながら
あの自分は34年から室グァの中国に行くわけですが
あその前に書いた白村江の高い2台を取った際を取った歴史小説
みな草を執筆してまーす医師と書いて それを33年に冊子として製本しています
で狩ればこの後が気にこれも先ほどのから先生の本などにちゃんと異様されているので
残されていますね あとがきにこういう風に書いていますこれよこれは遠い昔の物語である伝説である
けれども 一成 300年の後の今日本の描きつつある歴史はあまりにもこの物語と似ているのではない
かというようなことを書いてそれで戦病死38年で大変な激戦です
戦病死していますまあこの38年11月ぐらいというのは
あの次にお話しする日清戦争をなど以降の日本の中国観と言うんでしょうかね
中国はおそらく まああの玄翁に怒られた杉山元参謀総長が半年で中国は
って言っちゃった人ですよね で この11月の兎すんのってい陸軍病院でしなきゃいけなかったのもある種見誤ってた
ことで中国は36年ぐらいから上海とか南京とかの三角形をなすあのクリーク地帯を
含む場所に非常に 深里陣地を築いていましたこれはドイツなんかノアの軍事顧問団はる兄ハウゼンとか
ですね そういうドイツ中国関係っていうのはすごく関係が良かった
ドイツも1920年代軍縮しなきゃいけなかったときにじゃあ軍人たちどこ行こう武器
の使い方はどこ おり教えに行こうと言ったときにあのマニュアル付きでちゃんと中国に行ってたわけ
です だから高松宮は彼は海軍で 情報の場所2930
7年10位 1月ぐらいからこの翌年ぐらいまで
いましたですから高松宮日記という天皇の弟の日記が
中興 ジョー口論から出てますがその日記には
とに息を詰めるように日本の航空機の損害のあの数と後と苦情って言うんですけれども
中国がのあの飛行機なり の あの暗号解読ですねそれをやった結果などが書かれてますねその中に書いてあった言葉
が非常に重要で つまり日本軍は陸軍は1937年11月ぐらいまでその薄んクリークなり
10新人値というものを中国側が気づいているということをつかんでいなかったとそれ
がちゃんとその海軍側のある種かなり正確な情報に接することができる人の日記なり
業務日誌に出て来ですからあの砂丘という ドイツ軍顧問きている蒋介石がちゃんとや通っている
これ1933年くらいからわかっていることです だけど日本が高をくくってて蒋介石が準備しているのは共産党軍との戦争準備だ
ですから今日蒋介石もカス非常に賢いです つまり 1934年から36年くらいまでの間はこれは国共内戦が一番大変な時です
だからもう少しで共産党の息の根を止められるのにということを
蒋介石が書いているのも事実です しかしその作戦の 装備や様子庫などを重慶ぐらいまでさかのぼれるようなあの
ガンボートですよねそういうものをイタリアなんかからたくさん輸入してるって言うの
はやっぱりこれはなんていうんですよねなんか輸入してるでもそれは共産党に使うもの
だろう 何か 情報が入ってくるものと分析というところがずれていくそれがつまり
見下している気持ちとか様々なものが邪魔するんですね ですからこの a ず松永さんが死んだ
激戦というのもまざか日本が日中戦争の戦線で20万人も
しるんだっていうことはあの日本側としてはもう本当に考えてなかったようなことだと
思うんですね それではこの方がその100走行の戦いっていうようなことでわかりますよねえと唐や
新羅の連合軍に 倭国は大半してそれ以降
40年間ぐらい日本は頭から襲われるのが怖くてこうしかも怒られるのが怖くて検討
知っていけないんですね しかも日本側が遣唐使って言っているだけで
遣唐使というのは同等の国が送る施設ですね
中国側としてはこれはあの 違う久利町行に来ているたら
挑戦など新羅などと違って定期的に長考に来ているんではない
だから月桃紙というのは本当は調香師なんですけど日本側は検討しという
それともう一つ天皇というのは天皇と読ませてたんですけれどもその天皇という名の
リオ日本側で なろるときは これは立浪の規定があるんですけれどもその対外的に名乗るということと自らが支配し
ている兆候国を率いている 君主であるというその
設定があるんですデフォルトとしてそうなんだから だから新羅は日本に朝貢している国であるという虚構が必要なんです天皇という天皇と
いう言葉は ですか発生した頃からやはりそのある種の神はこれは建国神話っていうのはどこ
の民族も所国家も必要ですけれども ですからこのなくす甲からその何十年か経って702年ですか
頭にまた使い遅れる時までの間の日本の緊張っていうのは凄いことなんです
負けた負けて頭が何をしてくるか分からない 出そう 緊張感っていうことを使いながら彼はそんなことするなら
開戦しなきゃいいのにということでまぁ 物語として書いたんですねこの人ははいでまるさんに行きますで私はくそーゆーあのお
気を張られした話をしているわけですけれども でも 皇紀2600年+というような時間が戦前期には流れていたことを考えれば
アクス甲の戦いと今度の戦争を比べた人の一人に昭和天皇はいるわけです
これは知っててもいい話ですが1946年8月中4日というとこれは間違いないで
いただきたいんですが 1年後ですねポツダム宣言受諾を鈴木貫太郎使用とともに行った1年後でありまして
この受諾1周年の茶話会で えっと商店のはこういうことを言ってますで資料としてはイナダ修一備忘録というので
稲田修一は当時10時長ですえっと今国立公文書間にはこのイナダ修一のあの官僚時代
のさまざまな記憶がありますね ですからあの公文書管理法とかそう
いうものをあの特定秘密保護法などが60年後解除された後にはぜひこういう国立後部
紹介に入れていただきたいものだと思います ただあの軸ということを言うと国体が変わらないとそんなぶりにあるかなぁと思ったり
この位なら修一さんの白明らかになったのもやはり国体が変わったということ とがあるんではないでしょうかねつまりかなり詳細に書いてますつまりステン動画
首相を対戦時の主将鈴木貫太郎 そして今の首相46年段階の主将の吉田茂
それからあの閣僚などを招いて茶話会をやってるわけですそこで天皇はこう言ってます
戦争に負けたのは誠に申し訳ないと しかし日本が負けたら今度だけではない昔調整に兵を出したく好きへの日の一戦で
一敗地にまみれたので半島から兵を聞いた そこでいろいろ会心が行われた
これが日本の文化な発展に大きな転機となった このことを考えるとこの際日本の進むべき道も
をの巣から分かると思うというようなことのまとめ方で つまり章天皇は日本にとっての敗戦は白村江そして
にここだって捉えて わけですねですから海の向こうの体温日アメリカっていうのではなくてやはりとうとう
と まあ中国アメリカソビエトに負けたっていうその比喩ですねだから歴史を考えるときに
あの 時空を越えてね国民国家ある時期の話じゃない 白村江のを昭和期に否定するのはどうか比べるのはどうか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が
国民の 式を縛っているもしくは剣道の意識を縛っている
考え方っていうのを知るのはすごく大事だと思いますね 柏村公ですからその柏村こうっていうのを掲げながら今の戦争31年以降の
マーシュ事変はやっぱりおかしいってことを書き残した この変わり種の松永修行さんという方も私はひどく引かれる想いがありますね
ですからあの当時のが区東平魔女へ猶予があったのは5万人と言いますねですから
8当時のその超英雄がある中で青年って言うな
の2%ぐらいですかそういうのは中で特に市勾当台となったら本当のトップであります
ですから市向東来星のあの所得調査みたいものが実は文部省にありましてえーっとで
だいたい皆さんも豊かな学生さんだと思いますけど 一番平均値が書籍人が僚一か
食費を除いて自分がどれだけ自由にお金を使えるかっていう答えが1940年段階
ぐらいで80円です80円っていうのは a リートとして銀行などに努めた人の初任
給ですね だからすごいと思うのだから彼がこれだけの本をまあ嫁ているということなど
洋書などがもういくらでも読めるって事があるんじゃないでしょうか それではじゃあにシーセンスおきますねどうしてある種の皇
何かゆがんだ形での考え方というものが日本になるのかっていうことを
ざっくりとあの言いますねあと2枚部を10分でやるなんていうのは大変なことなので
もうざっくり産業とかなっちゃいそうですがまぁでも大体どういう意味で日清戦争を
振り返るか分かっていただいた 思いますからは一番に行きますみなさんは理系もいるでしょうし
あの日本史を後期で使ってない方もいると思いますから教科書的な説明はどうだろうを
振り返っておきました まずあこんな感じで書かれてます大学制度ができたこの年
伊藤撮り交渉というあでとりあえず 朝鮮などに次の事変が起きた時に日本と中国が
者出兵しましょうねお互い良いあってという条約できた あそこに
水は流れ川は流れず9点たって でこの教科書はここはずるいんですよね9年間になったんだ
でまぁ94年になって突然頭が区の浸透を中心とした飲み氾濫
これは挑戦中韓国側では東岳農民運動と言いますが起こった
でバーあの政府にターン してはい日と減税要求でソウル感情にをそそられるんじゃないかというので
まあ兵を 朝鮮政府は深刻に要求する でそれを知った日本があの6月2日に1894年6月2日に兵を出して
a 回戦は2か月後というようなプロセスを踏んだっていうそのお話です
だから朝鮮の 問題で日本は朝鮮がその米の輸出にうるさく言う
あと日本側の綿布湯質なんかをなかなか 中国商人と基礎やって勝てないどうしようっていう不満が募るでその実業家の不満を
背景に2ヶ月ぐらい いい絵を置いたまま交渉して
戦争に 誘ったこれが1960年ぐらいのあのあるいわゆる唯物史観的な帝国主義日本が日清
戦争を起こしたというそういう説明の仕方になるんですね ただこれもあのゆがんだということではなくて理由はあります
例えばうんこ この丸2番ご覧ください6月2日の朝鮮出兵閣議決定の会社ここなんですねこれで
例えば角池って後でみますけれども我々この閣議決定見る前に閣議決定にもってた外務
大臣である 陸奥宗光という人間の県兼六というこれ g 難しいですよ
寒いという子の間ぶりにしたは足と友情か県兼六
私の拙い書き物というような意味ですがその県兼六の期日にパラレルんだ
つまりこの鍵権力の記述はよく皆さん分かるように歴史はいつ書いたかが大事です
だから 1894年6月2日の夜に書いたならばそれはその閣議決定の木墓地を外務大臣が示す
のには重要ですしかしこの陸奥は1895年10月に書いてますですからもう5月の
三国干渉 猛虎は場 よく決まった三を鑑賞を屈服的にも優れた
それが見えた後に病気を抱えながら書いたんです6つ
だからここでもつは 自分は回戦に向けて弱着と
戦争やっただからつまり6月2日の閣議決定もこうなんですね
8皆さんのページでは6月2日の閣議決定というのはえーっと兄のとこの真ん中へんあ
後ろのほうの真ん中にですね 3ページ裏面開けてください
カッコ4のところではい閣議決定の文章を書いておきました
頃いカッコ4のところですね裏側さんというレジメのナンバーがあるところですけれど
もこう書いておきました各位げって我が兵を持ってはが国民を保護するを怠るべから
ざるがために深刻と連合反映するを待たず 条約の名文これ
天津条約です公文したたちに出兵するを適当とする つまり居留民を守るために出兵まあこれはいつも同じことですが形状駐在講師杉村書記
官よりの雷電によれば朝鮮政府はすでに 応援を深刻に求めたりと云へり
申告のこれに応じたるやいない 家は未だ方超越といえども将来申告もその兵員を
派遣しまぁなんに派遣するからこれからですが 両国の軍隊はこの両国は日本と清国の軍隊です
あるいは連合の旗力気同じあるいは朝鮮政府の要求により臨機に応援
防護するの必要を生ずるのもまた図るべからずこれまた
あらかじめ三角の中に置かざるべからずというので 両国軍隊が強調して頑張るような働きをするから気をつけようというのがこの文章で
どっちともとれますよねで州兵を見てみると丸にをご覧下さい
これはしようとしてまさに6月7日その晴れ書かれた 群に関して大山巌陸軍大臣と西郷従道海軍大臣が
で先に行く感情そうリング 出かける陸海軍のトップにもてげって言って持ってがせた訓令です
このたびの出兵は全くはが公使館領事館及び 帝国臣民保護のために出したるものにして決して
申告と事を成すがためにあらざるは断言し奥成 断言し置くところ形でつまり
とにかく 波形はする だけど深刻との軋轢は
やるつもりじゃないんだぞとメール でこれを例えばイトーの手紙などでも周辺をあたっていきますと走路に入る時には憲兵
mp ですね憲兵ではなくて 巡査を入れてソウルに入れよう上陸させを別にあのソウルの人々と戦うんじゃなくて
農民兵 反乱兵を抑えるためそれを
混乱に巻き込まれないようになんだよってことを一刀は言ってますだからここで
伊藤が だしていることその意を受けて軍が出してる抑えと陸奥言ってること陸奥はこの県警の
国こう書いてます 受注のハックまではが提案に同意せざるべしと考え
改革を要求するも格別重きを置かずつまり わかりますか陸奥はこう言っているわけです
6月スカ出兵するときにえっと日新共同で
朝鮮の改革をやろうじゃないか だけど申告は絶対調整は自分の族王だと思ってるから
属国だと思ってるから断ってくる 断ってくるから回戦になる
だから 日同社っていう言葉見たことありますか
被害の日に動くでもの好むつの6月2日もしくは6月15日ぐらいまでの
県兼六の中に書かれた陸奥自分の行動の説明は
一応申告に 共同出兵野郎その理由は朝鮮政府に対して改革を進めよう
そういうことを朝鮮政府はあごめんさあ清国政府はあの絶対に受け取らない
だからこれは開戦なんだって回線を誘うため ただ向こうからを
怒らせて改正させるためなんだっていうことを言います でなんで陸奥は向こうから改正させなきゃいけないかっていうことについては
まぁ次回ゆっくりお話しますけれどもカッコ5番とかの後ろにありますようにイギリス
と上映会成功主やってます だから1894年の7月の21日にイギリスは憤懣やるかたないっていうの日本に
怒鳴り込むんですね なぜなら7月19日にちゃんとイギリスは日本と通商航海条約という条約改正をじま
すってことはを します だけど21日日本に怒鳴り込んでお前は深刻と前走を始めるつもりかとイギリスが一番
大事なのは申告を中心としその貿易であると だから戦争をもしやるならばこのまま開戦すれば日本政府は開戦の責任をとらるべしと
いうなことで7月21日にイギリスはと目に掛かりますですから6月の2日
7月の21日あたりまで やっぱりこれは日本政府は揺れてるんです
が降らしてるんですで伊藤博文や特に 李鴻章さんがいれば
日清の共同改革をやってくれるだろう だから伊藤主将というもちろん分菅首相です
このあと声優界というものを作りますつまりもうやめますがものすごく楽観的な気持ち
で交渉やる人は逆に強硬なんです受けてくれるだろうそうなそうだ日中の共同出兵
調整 塩改革提案鉄道敷設際してねっていう 電信引いてねっでそういうことを養成することを中国は朝鮮に促すだろう
だけど陸奥的な開戦論のアレだと日本は6月から断固として
決然たる愛受領決して戦争の準備をし 陸海軍は1890年の3月ぐらいあっあからちゃんと合同演習やってて訓練バッチリ
勝ちましたップであの戦線の象徴 うなんていうのは分野の戦争ですね文明っていうものを中国が理解しない
だから続国として挑戦を支配するそのような深刻に対してどうですかっていう当選そう
だっていうことが聖戦の 詔勅ですけれどもこの先生の詔勅も実は2日間で書かれています
で先生の詔勅も最初の詔勅にはもうやめますね あの韓国も入って朝鮮と中国に対して日本は線征服しようとしてますそれを申告だけに
で帰国 名指しすることのメリットデメリット走行
で深刻に対して8番の国という レッテルがより貼られるようになる
理由はわかりますよねつまり朝鮮日本は7月23日に朝鮮王宮を襲撃して王様を捕まえ
て退院君という王様のお父さんに政権を支えますだから日本はに神戦争を始める前に
最初に戦ってるのは張世平 を戦っていますだから自分がクーデタを成功させちゃって首根っこ捕まえたからもう
朝鮮に宣戦布告する必要はないで挑戦は自分の言うことを聞いてるからその国を批判
する必要はない その調整が言うこと聞いてるのにを後ろにいる中国があってこの理論になるわけです
だけれども今申し上げたように日本は1月9日にあり ますが議会でめちゃくちゃです伊藤の後ろ
物が後ろにはもう憲法停止しなきゃ この議会は乗り切れないってぐらいの危機
きゃっ発ぐらいの自体が無いせいで起こってます だからもう6月の2日の決定も議会
第3と同じ日です海鮮あゴメス6月2日にとにかく 6000名を苦労っていう決定は議会を2回目解散する決定と同じです
2回目解散は半年前に行ったそれをもう1回解散するんですよ
これはひどいでしょですからそのようなご加護 他の日本史が本当はあ
て日清戦争なんですだけれどもこう綺麗な形のに c 戦争観
それはやはり教科書にもどうしてもあの引き継がれているところがあると思いまして
これは後ろちょっと急いでしまいましたので1月9日にもう1回ちゃんと国内の問題を
抱えた 6つの苦悩と伊藤の プランですねそのあたりの食い違い
あと軍部のプランそれをちょっとお話しながら まあなぜあのような形で中国を
分野版の国だと名指しする必要ができたのかという話を
じゃあいたします以上で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何かご質問があったらどうぞ エイ じゃあと質問なんですけどもえっと日清戦争の時にあのやっぱり日本があまり
政権として統一したいしか取れずに戦争に入っていったということはやっぱりあの太平
洋戦争の時にもえっと 似たような状況だったと思うんですがそういったねえ日本の
その憲法とあのそういったものに由来するものでしょうか8お考えになりますが非常に
質問であのまさにそうですね日本はこの後やる日露戦争の時にも
81904年の a 2月から開戦ですけれども12月まで元老とあの閣議の間で1点がないんですね
ですからその朝鮮問題で除染までは出るけれどもロシアと満州問題で戦争するかどうか
これは2か月前までないです ただ逆に言うとそのこういうことが起こるんです郡
の方はどうせ閣議なり言動がリーダーシップ取る後明治天皇の後ろ向きさ加減からする
とギリギリまで決定ができないとなると制海権を握りんなくても済むような戦争プラン
を立てるんです ということはさっきもより残虐なと言うんですが調整に
なんでにし清掃戦う時にソウルのお灸をちゃんと占領しなきゃいけないかというと挑戦
すべてをあの電信通して道路通して戦争しないと効果以上は深刻艦隊の方が優勢だっ
たりしますから 日本兵をこう呼ん越田運ぶっていうこと を海軍がはもうちょっと予期し得ないが
雷の状況がありましただからある集その西軍関係っていうところが3つに行くのが一番
いいんですが政府のガーが慎重であればあるほど軍はどちらの側でもできるように
しかもどちらの側で持って行った時にかなり無理をしながら
回戦もしてない国大きいを襲う てクーデタ起こすというところからの回戦をやらざるを得ないというようなことになり
ますので 憲法という点で言いますとその回戦決定の決意とか
その問題は今後起こってくると思う日論時にも再現されますのでその点忘れずに
ちゃんと憲法と絡めてお話しできるようにしたしますドア がとうございました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
じゃあどうも加藤先生ありがとうございました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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