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혁명
| 동학 농민 운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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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전국 | ||||||||
| 지휘관 | ||||||||
| 천도교 |
|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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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제우 · 최시형 · 손병희 · 박인호 전봉준 |
| 경전 |
| 동경대전 · 용담유사 해월신사 법설 의암성사 법설 |
| 교리 |
| 시천주 · 사인여천 · 인내천 · 후천개벽 |
| 역사 |
| 동학 · 동학 농민 혁명 |
| 관련 단체 |
| 천도교 중앙총부 천도교 연원회 천도교유지재단 천도교청우당 |
| 문화유산 |
| 천도교 중앙대교당 · 천도교 임실교당 |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1], 동학 혁명(東學革命), 동학 운동(東學運動), 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 또는 동학 농민 전쟁(東學農民戰爭)으로 불리기 시작한 동학난(東學亂)은 1894년에 동학 지도자와 동학교도 및 농민이 일으킨 무장 봉기를 가리킨다. 크게 1894년 음력 1월의 고부 봉기(1차)와 음력 4월의 전주성 봉기(2차)와 음력 9월의 전주·광주 궐기(3차)로 나뉜다.
교조 최제우의 신원 외에도 조선 양반 관리의 탐학과 부패, 사회 혼란에 불만이 쌓이다가 1892년(고종 19년) 전라도 고부군에 부임된 조병갑의 비리와 학정이 도화선이 되었다. 부패 척결과 내정 개혁, 교조 신원 등의 기치로 일어선 농민군은 흥선대원군, 이준용과 결탁했다. 전봉준은 대원군을 반신 반의하면서 민씨 세력의 축출을 위해 대원군과 손을 잡았다. 대원군 역시 민비의 제거를 위한 무력 집단이 필요하였고 농민군과 제휴하였다. 농민군 일부는 탐관오리 처벌과 개혁 외에 대원군의 섭정[2]까지 거병 명분으로 삼았다.
한편 흥선대원군과의 연대를 못마땅히 여긴 김개남은 수시로 전봉준과 충돌하다가 독자적인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방언은 농민운동 진압 직후 흥선대원군이 특별히 사면을 청하여 석방되었으나 민씨 계열의 관군에 살해당한다. 그밖에 최시형, 손병희 등 북접의 지도자는 남접의 거병에 쉽게 호응하지 않다가 그해 9월의 3차 봉기 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한편 개화파 지도자이자 망명정객인 윤치호는 동학 농민 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었다.[3]
초기에는 동학난, 동비의 난[4]으로 불리다가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농민운동, 농민혁명으로 격상되었다.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으로도 불리며, 갑오년에 일어났기 때문에 갑오농민운동(甲午農民運動),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이라고도 한다.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씨 정권에서는 청나라군과 일본군을 번갈아 끌어들여 결국, 농민 운동 진압 후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배경


1882년 이후의 각종 사회 혼란과 정부의 부패로 민심이 동요하던 가운데 고부군 군수 조병갑의 횡포가 도화선이 되어 농민운동을 일으켰다. 1882년 구식 군대 폐지와 관련하여 5군영에 소속되었던 군인들에 의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이어 1884년에는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일어난다.[5]
임오군란(壬午軍亂) 때는 흥선대원군이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궁중에 들어와 대권을 장악했다가 곧 청군에 의해 납치되었고, 1884년 갑신정변 때 궁중을 습격한 개화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청나라군에 의해 밀려남으로써 왕권은 크게 실추되었다. 뿐만 아니라 청나라와 일본이 이 변란을 계기로 조선에 진주해 세력 다툼을 벌여 조선의 자주권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었다.[5] (톈진 조약을 파기시킬만큼) 민씨 정권에서 청나라 군을 끌어들여 개화파를 진압하자, 일본은 일본대로 청나라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에 병력을 대대적으로 파견하였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甲申政變) 이후 민씨 정권과 고종은 친청 정책을 펼치면서 새로운 국면을 모색했지만 급격하게 변화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해 혼란은 점차 가중화되었고 전국 곳곳에서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건 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다.[5] 급기야 그것은 1894년 3월 동학혁명으로 폭발되어 관군과 농민 사이의 전면전으로 발전하였다.[5]
개요
고부 봉기와 자진 해산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 탐학한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고부군의 동학도들과 농민군들이 쟁기와 낫 등 농기구를 들고 집단으로 무장 시위를 벌였다. 이들의 움직임은 곧 중앙정부의 탐관오리들에 대한 분노로 향했다. '보국안민'과 '폐정개혁'을 기치로 내건 농민들의 기세가 걷잡을 수 없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5] 대원군은 이 기회를 이용, 동학농민군과 접선하여 손자인 이준용을 추대할 계획을 세운다.
1886년 흥선대원군은 민씨 정권이 조약을 체결하자 불만을 품은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결탁하여 장남 이재면(李載晃, 고종의 형,완흥군/흥친왕)을 옹립하고 재집권하려다 실패하고, 1894년 동학군과도 연합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 실현되지 못하였다.[6] 동학군 중에는 전봉준과 같이 대원군의 문하에 출입하던 인물들도 있었고, 폐정개혁과 대원군 추대, 민씨 외척세력 척결과 개화파 척결을 외치는 목소리도 강력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은 민씨 정권의 부패정치와 지방에 파견된 탐관오리에 대한 반발을 주목했다.
한편 정부에서 안핵사(按覈使) 이용태를 보내 이들을 위로하고 탐관오리 처벌을 약속하자 고부군의 동학군은 해산하였다.
2차 봉기(전주성 점령)
그러나 안핵사 이용태는 첫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들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처벌하였다. 이용태의 강경책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태인 대접주 김개남, 무장(茂長) 대접주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로 불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시작이다. 전봉준을 총대장으로, 김개남및 손화중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서 궐기하여 전주성을 점령한다.
한편 동학농민군은 고부의 황토현(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에서 4월 7일(양력 5월 11일) 전주감영군을 격파했다. 이에 크게 놀란 조정에서는 전라도병마절도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동학농민군은 4월 23일(양력 5월 27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4월 27일(양력 5월 31일)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7]
1894년 3월 21일 고부에서 봉기한 지 석 달 후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청과 일본에게 군사 주둔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 갑오개혁의 시발점인 〈전주화약〉을 맺고 해산했다.[8]
전주화약과 청일 양국군의 주둔
사태가 확산되자 고종과 왕비는 당황하였다. 고종과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였고, 청이 이에 응하자 일본 역시 톈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동원하였다. 이처럼 외세가 개입하자 농민군과 관군은 회담을 통해 화의를 약속하고 싸움을 중단하였다.[9]
하지만 조선에 진주한 청, 일 양국군은 돌아가지 않았다.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 개혁을 함께 실시하자고 제의하였지만 청은 이 제의를 거절했다. 그러자 일본은 불법으로 조선 궁궐 경복궁을 침범(갑오왜란) 명성황후 민씨 정권을 몰아내고 흥선대원군을 앉혀 꼭두각시 정권을 탄생시켰다.[9]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 서광범 등을 중심으로 한 제1차 김홍집내각, 즉 친일 내각은 일본공사 오토리의 입김 아래 일련의 개혁조치를 취했다. 이것이 조선정부와 동학농민군과 맺은 자주적인 개혁 전주화약을 간섭한 친일내각의 갑오개혁이다.[8]
그 뒤 개혁 추진 기구로서 전주화약 당시에 설치된 교정청을 폐지 이후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교정청 출신인 김홍집이 중심이 되어 내정 개혁이 단행되었다.[9]
3차 봉기와 실패
일본은 이처럼 단독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을 단행함과 동시에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나라군을 공격하여 승리한 뒤 정식으로 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7월에 시작된 청일전쟁은 두 달 만에 구미 열강의 지지를 등에 업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9]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정복을 위해 내정 간섭을 실시하였다.[9] 이 때문에 해산되었던 동학농민군이 외세배격에 기치를 내걸고 다시 소집되어 대일 농민전쟁을 감행했다.[9]
봉기한 농민군 제1대는 전봉준의 지휘를 받아 공주성으로 몰려들었고, 제2대인 김개남의 지휘하에 청주병영으로 진격했다. 농민군의 최종 목표는 서울로 쳐들어가 부패한 정치가와 외세를 몰아내고 나라를 바로잡는 데 있었다. 교조신원운동에서 고부 봉기, 제2차 봉기까지 전봉준과 농민군은 오직 그 날을 위해 달려갔다.[8] 하지만 관군과 일본군의 화력에 밀린 농민군은 그해 12월에 패배하여 봉기가 실패하였다.[9]
교조 신원운동과 대원군의 개입
1864년 교조 최제우를 처형하여 군문 효수하였다. 동학도는 매년 교조의 무죄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교조 신원 운동을 벌였다. 동학도는 매년 한성으로 상경하여 교조 신원과 포교 허용을 청원하는 상소를 올렸다.
한편 1893년 초 흥선대원군은 동학도가 상경하여 경복궁 앞에서 복합상소운동을 벌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10] 정교는 1893년 2월 11일부터 2월 13일까지 3일간 박광호를 소두로 하는 약 50명의 동학교도들이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교조 신원을 탄원하며 연좌시위를 벌인 사건을 대원군이 시킨 일이라고 주장하였다.[10] 이때 정교는 대원군이 은밀히 동학당 수만 명을 서울로 불러 모임을 갖고 장차 불궤를 도모하여 그의 손자 이준용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고 진술하였다.[10]
고부 봉기 배경
1892년 전봉준이 살던 고부군에 조병갑이 군수로 영전하여 왔다. 그는 농민에게 과중한 세금을 부과하는 것은 물론 무고한 사람의 재물을 빼앗아 갈취하고 이에 대항하는 사람에게 가차없이 형벌을 가하였다.[11] 고부는 본디 비옥한 땅으로 저수지 하나로 충분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농민에게 억지로 저수지를 짓게 해 물값을 받았다. 음란한 죄, 화목하지 못한 죄 등 여러 죄명을 만들어 벌금을 타냈고, 부친의 비석을 만든다는 핑계로 돈을 걷기도 하였다.
고부군수 조병갑은 아버지의 선정비 또는 신도비를 세우는데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자신의 임지인 고부군 주민에게 세금액수를 인상하여 거둬들였다. 조병갑은 자신의 아버지 비각을 세우기 위해 농민으로부터 천 냥의 돈을 거둬들이고, 주민에게 갖가지 죄를 뒤집어 씌워 2만 냥을 벌금으로 긁어냈다. 게다가 대동미를 대신하여 돈을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만든다고 쌀 700석을 착복하기도 했다.[11] 한편 조병갑은 중앙 조정에도 뇌물을 바쳤다. 중앙 조정에 바치는 뇌물은 의례적인 것으로 뇌물을 바치지 못하는 군수나 현감, 부사, 관찰사는 얼마 못가 파직되거나, 정부에 막대한 돈을 헌납하는 자를 군수나 현감, 부사, 감사로 임명하면 자리를 내놓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세금이 인상되자 주민의 불만은 가속화되었다. 여기에 조병갑의 학정이 심해지자 고부 주민을 대신하여 전봉준의 아버지이자 당시 훈장이던 전창혁은 농민의 요청에 따라 관청에 면세를 신청하는 탄원서를 제출했고, 이로 인해 심하게 매를 맞고는 귀가한지 한 달 만에 장독으로 죽게 된다.[11]
학정에 시달리다 못한 고부 주민은 1893년 11월과 12월 두 번에 걸쳐 군수에게 감세 탄원서를 제출하였다. 하지만 조병갑은 진정서를 제출하려고 온 농민 대표를 붙잡아 하옥시키고 고문을 가하는 것으로 탄원서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11] 이어 전라북도관찰사에게도 탄원서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탄원과 진정으로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 농민들은 결국 힘으로 군수를 내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11] 이어 일부 농민과 동학도들은 무기와 화약을 준비한다.
이에 분한 농민은 훈장인 전봉준을 선두로 1893년(고종 30) 음력 12월과 이듬해 음력 1월, 2회에 걸쳐 군수에게 시정을 진정하였으나 체포 또는 축출되었다. 이후 농민의 일부가 동학교도들과 함께 한성으로 입경하여 탐관오리 처벌과 부패 정치인 파직, 민생 구휼을 청하는 상소를 올린다.

1893년 12월부터 1894년 1월에 올린 동학도 및 농민군의 상소 중 최시형의 탄핵 상소에 의해 경상도 관찰사 조병식(趙秉式), 영장(營將) 윤영기(尹泳璣) 등이 파직되었으나 이후 고관은 농민의 상소문을 검열하였고, 사태는 나아지진 않았다. 도리어 조병갑은 전봉준과 그의 일가를 잡아들이고, 전봉준의 부친에게 형문을 가하여 죽인다.
대원군 세력의 개입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발발하고, 청군과 일본군이 개입하자 대원군의 귀에는 농민들이 대원군을 부르짖는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대원군은 밀사를 파견하여 농민군 지도부와 접촉했다.[12] 1894년 2월 흥선대원군은 이들을 이용하기로 하고 교섭을 시도한다.
개혁 운동
동학농민운동은 1894년의 제1차 농민봉기는 기존 정부에 대한 불만을 가진 농민들이 주도한 무장개혁 운동으로서 기존의 민씨 척족 정권을 무너뜨리고 개혁하자는 운동이다.
동학의 분열
동학교조 최제우가 잡혀 죽은 후 동학은 크게 두 파로 갈라졌다. 하나는 최시형 계열이고 또 하나는 서장옥 계열이었다.[13] 그러나 이 두 파벌 모두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게 된다. 법포는 다시 최시형, 손병희 직계인 북접과 다시 전봉준, 김개남을 지도자로 하는 남접으로 나뉘게 된다. 서장옥은 불교의 승려였다가 동학의 초기 제자의 한 사람이 되었던 인물이다. 서장옥이 불교 승려였던 인연으로 동학 농민군이 거병할 때는 산사의 승려들 동원이 가능하였다.
매천야록을 쓴 황현의 《오하기문 梧下記聞》에 따르면 "처음 동학에서는 그 무리를 포(布)라고 불렀는데 법포(法布)와 서포(徐布 또는 西布)로 나뉘었다. 법포는 최시형을 받드는데 법헌이라는 최시형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포는 호서 혹은 서장옥(서인주)의 성을 따서 서포라 불렀다. 서장옥은 수원 사람으로 최시형과 함께 교조 최제우를 따라 배웠다. 최제우가 죽자 각기 자기 도당을 세워 서로 전수하면서 이를 포덕이라 하였다.[13] 이들은 동학이 궐기할 때 서포가 먼저 일어나고 법포가 뒤에 일어나기로 약속하였기 때문에 서포는 또 기포(起布)라 하고 법포는 좌포(坐布)라 불렀다. 전봉준이 주동하여 일어날 적에는 모두 서포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14] 남접은 서포의 한 갈래였다.
동학농민전쟁 후 살아남은 손병희는 최시형의 둘째 사위이자 후계자로, 최시형 사후 동학은 다시 내분을 거듭하다가 천도교와 일진회로 분열되기에 이른다.
동학 농민군의 파벌
동학 농민군은 남접과 북접, 서포(또는 호서남접)의 세 갈래의 파벌이 있었다.
남접
남접은 전라도 지역에서 일어났던 동학농민군으로 처음 거병한 집단을 말한다. 남접은 접주인 전봉준, 무장 대접주인 손화중 및 태인 대접주인 김개남을 최고 지도자로 나뉘어 있었다.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영향을 미쳤으며 지도자들은 현지 출신 접주들 보다는 주로 고창, 태인, 전주, 옥구, 금구 등 전라북도 북부와 서부 출신들이 많았다. 경상북도의 성주군, 칠곡군, 경상남도 하동군 지역도 남접의 세력권이었다.

온건파인 무장 대접주 손화중은 같은 온건파인 전봉준에게 자신의 조직을 통솔하도록 맡겼고, 강경한 혁명파인 김개남은 혁명을 함께 하면서도 때론 독자적으로 움직인다. 전주화약 이후에는 전봉준이 금구에 대도소를 두고 전라우도를 호령하고, 김개남은 남원에 대도소를 두고, 전라좌도를 호령하면서 전봉준과 달리 독자적 행동을 하였다.[15]
| “ | 김개남은 내가 왕사(王事)에 협력하자고 권고했지만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처음에는 상의한 바가 있었지만 끝에는 결단코 상관하지 않았다.[16] | ” |
— 전봉준,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
김개남은 전봉준에게 호응하면서도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올리는 것과, 근왕주의적인 사상을 가졌던 점을 못마땅히 여겨, 전봉준과 수시로 충돌하였다. 이는 전봉준이 체포된 뒤 일본 영사관 형문장에서 진술한 공소장에도 일부 언급되고 있다.
북접
북접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충북 이북 지방의 파벌로 법포 또는 좌포라고도 불렸다. 최제우의 정통 직계를 자처하는 집단으로 대도주인 최시형과 손병희, 손천민 등이 속했다. 충청북도 보은군, 논산군 일대에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에 동학의 주요 지도자였던 오지영의 진술에 따르면, 최시형은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나라의 역적이고 사문난적이다 라 규정하고, 동시에 남접의 농민군을 칠 예정이었다.[17] 당시 남접의 지도자인 김개남 등은 조선 정부를 부정하고 스스로 개남국왕(開南國王)이라 칭하였다.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18] 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18] 북접의 목적은 최제우의 명예 회복과 동학의 포덕 자유 허용이 목적이었다. 북접은 최대한 정치적 문제에서 회피하려 했고, 흥선대원군과의 연결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다. 남접이 3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18] 그러다가 그해 9월 최시형이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을 하면서 참여하게 되었다.
서포 또는 호서남접
최제우 사후 동학은 법포와 서포로 나뉘었다. 법포는 최시형을 받드는데 법헌이라는 최시형의 호에서 이름을 따왔다. 서포는 서장옥을 받든다.[13] 서포는 다른 이름으로 호서남접으로 불렸다.[19] 충청북도 청주와 충청남도 지역에 위력을 떨쳤다.
서포에는 북접에서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파면당한 이들 일부가 가담해 왔는데, 남접의 근거지인 전라도 보다는 서포가 활동하는 충청남도 아산, 보령 지역이 더 가까운 데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밖에 동학 농민군의 영향력은 황해도 일대, 경상북도 성주군과 칠곡군, 고령군, 경상남도 하동군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구호와 거사 목적
동학 농민군이 거병한 대의는 부패관리 축출과 탐관오리 처벌이 목적이었다. 동학농민군의 구호는 '보국안민', '제폭구민' 등으로 유교적인 충군, 애민 사상을 담고 있었다.[20]
1894년 가을에 이르러 동학 농민군은 항일의병적인 성격으로 변화한다. 이를 두고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은 그해 가을의 동학 봉기를 "일본군을 쫓아낼 목적으로 궐기한 구한말 최초의 본격적인 항일 의병운동이었다.[20]"라고 하였다. 부패한 집권층 타도, 민씨 정권 축출을 목적으로 시작된 동학농민혁명은 항일 의병전쟁, 독립운동적인 성격으로 변모하였다.
봉기 직전
1893년 말부터 1894년 1월 초, 거사를 앞두고도 남접 내부에서도 거사를 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쉽게 단안을 내리지 못했다. 남접의 실력자인 손화중 역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전봉준은 '이런 저런 부패가 있는데 어찌 우리가 이렇게 가만히 있어서 되겠습니까? 우리 국민으로써 어차피 피해다니면서 교를 형성하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차에 이 기회에 나서서 정치를 바로잡도록 해주는 것이 좋은 것 아니요. 취지가 맞다고 생각하면 다같이 동참해서 힘이 되어 주시고, 접주님이 주관을 해주시요.[21]'라고 하였다.
그런데 손화중은 쉽게 승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직은 시기 상조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니까 더 있으면 자연히 그럴 때가 닥칠 수 있다. 그때를 맞춰서 해야지 지금 해서는 안된다'하고 전봉준을 설득하였다.[21] 농민 운동 직전에 거사에 동학 내 강경파였던 남접 내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북접을 이끌던 최시형은 김개남 등의 개남국왕설 소문이나 전봉준 일파가 흥선대원군과 결탁한 것을 상당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나 일본군이 관군과 함께 농민군을 압박하자, 최시형 등은 처음에는 협상론인 화전론(和戰論)을 펼치다가, 마침내 현실상황의 급박함을 인식하여 스스로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북접을 전봉준의 무장투쟁 노선에 동참시켰다.[17] "인심이 즉 천심이고 이는 천운이 이르는 바이다. 고로 너희들은 도중(道衆)을 동원하여 전봉준과 협력, 이로써 교주의 원한을 풀어 드리고 나아가 우리 도의 큰 뜻을 실현시키라!" 이로써 손병희 등이 이끄는 북접이 남접과 힘을 합쳐 봉기[17] 에 가담했다.
결과와 전개 과정
제1차 봉기
1차 봉기 창의와 사발 통문 살포

동학 농민군의 봉기는 1894년 2월 15일(음력 1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새벽 1천여 명의 농민군은 이마에 흰 띠를 두르고 죽창과 농기구를 무기로 삼아 말목장터에 집결하였다.[22] 마침내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20명의 농민 지도부는 동학교도들에게 사발통문을 돌렸다. 사발통문의 내용은 고부군수 조병갑을 처단하는 것은 물론이고 전주영까지 함락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이는 바로 농민과 관의 대대적인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22]
전봉준은 그 전날 밤에 태인의 최경선과 함께 3백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야음을 틈타 40리 길을 행군하여 말목장터에 미리 당도해 있었다.[22] 대열을 가다듬은 농민군은 가장 먼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리고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한 후 그 동안 억울하게 빼앗겼던 세곡들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나눠주었다.[22]
첫 전투의 최고 지도자는 전봉준 외에도 남접에는 손화중이 최고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고, 서포에는 서장옥이 최고 지도자였다. 무장 기포에서 황토현 전투까지는 손화중 등 각 접주들이 연합해서 싸웠는데, 황토현 전투 이후 손화중은 전봉준을 대장군으로 임명한다. "전투에서는 당신이 다 관장을 하고, 그 자문은 나한테 얻어서 시행만 하시오.[23]"라고 했다.
고부군청 점령과 안핵사 파견
이리하여 농민군은 전봉준을 선두로 수백 명이 1894년(고종 31) 2월 15일 만석보를 파괴하고 고부 관아로 갔다. 이에 놀란 군수 조병갑은 도망을 갔고, 농민군은 관아를 습격·점령하여 무기를 탈취한 후 수탈에 앞장선 아전을 처단하였다. 더 나아가, 불법으로 징수한 세곡을 탈취하여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농민들은 사후의 계획을 세워놓지 않아 곧 신임 군수 박원명의 온건한 무마책에 해산하였다. 또한 무력 봉기와 정치적 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는 최시형을 비롯한 지도부의 거병 반대와, 농민군에 대한 초기의 방관적 대응도 작용했다.
고부군수 조병갑을 생포하는 일은 실패하였다. 조병갑은 농민군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전주감영으로 피신했기 때문이다.[22] 고부 관아를 농민군이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은 조정은, 조병갑을 처벌하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안핵사로 삼고 용산현감 박원명을 신임 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다.[22]
조선 말기 민란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대개는 조정에서 안핵사(按覈使)를 보내면 평정되는 것이 상례였다. 안핵사 이용태가 내려와 화약을 청했고 동학 농민군 대표들과 면담 후, 동학 농민군의 요구사항을 들어주기로 하고 동학 농민군은 자진해서 해산한다. 이것이 '제1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고부 봉기, 1차 봉기, 정월 봉기 등으로 부른다.
제2차 봉기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과 재궐기
그러나 머지 않아 안핵사 이용태는 위 사건을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동비들의 뿌리를 뽑겠다고' 선언, 반란 관련자들을 동비(東匪)라 하여 동학도로 취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동학과는 상관 없는 일반 전라북도와 충청남도 지역의 농민도 동학도로 몰아 역적죄로 혹독히 탄압하였다. 이에 고부의 상황은 바뀌게 된다. 이용태의 탄압에 분개한 전봉준과 농민들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총기류와 농기구 등으로 무장한 뒤, 무장(茂長)의 김개남, 손화중 등과 함께 봉기하였다. 이것이 2차 봉기, 백산 봉기, 삼월 봉기 등으도 불리는 '제2차 동학 농민 운동'이다.
이때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은 세를 확대하여 백산으로 이동하여 그곳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동학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하자, 그 해 3월 전봉준은 인근 각지의 동학교도들에게 통문을 보내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농민군은 일시에 1만으로 불어났다.[22] 집결한 교도들에 의해 농민군의 동도대장으로 추대된 전봉준은 손화중과 김개남을 총관령, 김덕명과 오시영을 동도대 총참모, 최경선을 총솔장, 송희옥과 정백현을 비서로 삼고 조직적인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22] 그는 싸움에 앞서 살인과 재물 탈취를 금지하고, 일본군과 권력 귀족들을 몰아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4대 강령을 발표하고, 규범 12조로 농민군의 규율을 바로 잡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22]
전봉준을 총대장, 김개남(金開男)·손화중(孫和中)을 장령(將領)으로 삼은 농민군은 1894년 음력 3월 하순에 백산에 모여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4대 명의(四大名義)[24]와 봉기를 알리는 격문을 발표하고, 민중의 궐기를 호소했다.
- 사람을 죽이지 말고 물건을 해치지 말라. [사람을 함부로 죽이지 말고 가축을 잡아먹지 말라.]
- 충효를 온전히 하여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히 하라. [충효를 다하여 세상을 구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라.]
- 왜양(倭洋)을 축멸하고 성군의 도를 깨끗이 하라.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는다.]
- 병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여 권귀(權貴)를 멸하라.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들어가 권세가와 귀족을 모두 제거한다.]
이에 정읍시 태인·김제시 금구(金溝)·부안 등지에서 농민이 합세하여 그 수가 수천에 달했다. 그러나 전봉준이 창의할 때의 강령 중 부패한 외척을 내쫓는다는 것과 흥선대원군을 섭정으로 다시 추대한다는 조항에 일부 농민군은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고종과 왕비를 축출할 것을 기대한 자들도 당황했다. 전봉준은 오늘의 이 사태를 불러온 것은 민씨 척족과 탐관오리지 임금이 아니므로, 그들만 몰아내면 되는 것이라며 이들을 안심시켰다.
각지의 궐기
전투 태세를 갖춘 농민군은 5월 8일(음력 4월 4일) 부안을 점령하고, 5월 11일(음력 4월 7일) 황토현에서 관군을 대파하는 한편 정읍, 흥덕, 고창 지역을 습권하였다. 그리고 영광, 함평, 무안 일대를 거쳐 마침내 5월 31일(음력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하였다.[25]
동학군은 전라도에만 국한되지 않고 외부로 확산되었다. 충청도의 회덕, 논산 일부 지역과 경상도의 성주, 칠곡, 대구, 하동에서도 동학교도들이 궐기하였다. 다만 농민군의 세력이 보은군 이북으로는 상륙하지 못했는데, 이들과 달리 동학교주 최시형 등은 민란에 다소 소극적이고,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민란을 일으키다가 잘못하면 교조 최제우의 명예회복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고, 자칫하면 역도로 몰려 교세에 탄압을 가져올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이었다.
금구 원평 전투와 전주성 입성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 함락을 목표로 음력 4월 초 금구 원평에 진을 쳤다. 실제로는 농민군의 구성원은 대부분 일반 농민이었고, 동학교도는 비교적 적었다. 농민군은 탐관오리의 제거와 조세 수탈 시정을 주장하였으며, 균전사(均田使)의 폐지를 촉구하였다.
고부의 황토현에서 감영 군대를 물리쳐 황토현 전투를 승리로 이끈 농민군은,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유인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였다. 여기에 자극을 받은 조정에서는 당시 전라병사 홍계훈을 초토사로 임명하여 봉기를 진압하도록 하였다.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한 농민군은 5월 27일(음력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승리하였다. 5월 31일(음력 4월 27일), 이 기세를 몰아 농민군은 전주성으로 입성하였다.
동학군의 힘이 점차 강성해지자 조정은 청국군을 요청하였고, 청국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텐진 조약을 빙자하여 일본군도 조선에 진출하였다. 이렇듯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동학군과 관군은 화의를 약속하고 교섭에 들어갔다.[25]
그러나 정부군은 완산에 머물면서 포격을 계속했고, 동학군은 여기에 대항할 만한 병기가 없어 500명의 전사자를 내는 참패를 당했다. 홍계훈은 이미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던 고부군수, 전라감사, 안핵사 등이 징계를 당했으며 앞으로도 관리의 수탈을 감시하여 징계하겠다는 것을 밝혔고,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 정부의 요청으로 도착하였으며 일본의 군대도 조선 내 자국민 보호를 핑계로 청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출병하기로 했음을 알렸다. 6월 8일 청나라의 원군이 아산만에 도착하고, 뒤따라 일본 정부는 톈진 조약(1885년)에 따라 거류민 보호를 구실로 6월 7일 출병할 것을 결정하였다.
전주 화약과 정치 개혁안 상정
동학군은 여러 차례의 통문(通文)과 원정(原情)[26], 폐정개혁 요구안을 제시하면서 삼정(三政)의 개혁을 촉구하였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최소한 다음과 같은 농민군의 개혁 요구를 확인할 수 있다. 4월 4일 부안을 점령한 농민군은 법성포 이향에게 '동학군통문' 9개조를 보냈다.
1894년 5월 22일(음력 4월 18일) 전봉준은 비협조적이던 나주 관아의 호장, 이방, 서리 등에게 공문을 발송하였다.
| “ | 전하께 아뢰어 국태공(흥선대원군)을 모셔다가 나라일을 보도록 하려 함으로써 아첨하고 비루한 자들을 모조리 파면시켜 내쫓으려는 것이니, 우리의 본의는 여기에 그칠 뿐이다. | ” |
— 나주 감영에 보낸 사발통문의 일부 |
이보다 앞선 5월 20일(음력 4월 16일) 영광군에서 창의소 명의로 완영유진소에 보낸 통문에서도 '국태공께 감국케 하여 위로는 공사를 보전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한다'고 하였다.
5월 23일(음력 4월 19일) 전봉준은 중앙군을 이끌고 내려온 초토사 홍계훈에게 정장을 보냈는데 '억조(億兆)가 마음을 같이 하고 온 나라가 의논을 모아 국태공을 모시고 부자 사이의 윤리와 군신 사이의 의리를 온전히 하여 아래로는 여민을 편안히 하고, 위로는 종묘사직을 보전하는 것이 우리의 지극한 소원입니다. 장차 죽음으로써 맹세하고 변치않을 것이오니 엎드려 비옵건대 굽어 살피소서'라는 내용이었다.
홍계훈은 동학 농민군을 일망타진하려 내려왔다가 정장의 내용을 보고 놀라 멈칫하였다. 홍계훈은 이들과 면담을 추진했고 바로 전봉준외 농민군 지도부는 초토사 홍계훈에게 '호남유생원정' 8개조를 제시하였으며, 5월 초 전주화약 직전 전주화약의 조건으로 초토사 홍계훈에게 27개조를 추가로 제시하였다.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철수한 후 5월 11일경 순변사 이원회에게 '전라도유생등원정' 14개조와 5월 17일경 '원정열록추도자' 24개조, 그리고 5월 20일경 장성에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개혁안' 13개조 등을 제시하였다.[27]
-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 탐관오리 숙청
- 횡포한 부호 처벌
- 불량한 유림과 양반 처벌
- 노비문서 소각
- 7종의 천인에 대한 대우 개선, 백정이 쓰는 평량갓(平凉笠)을 없앤다.
- 과부 재가 허락
- 이름 없는 잡세 폐지
- 인재 등용, 문벌 타파
-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 공사채(公社債) 면제
- 토지 평균 분작
— 폐정개혁 12개조
그런데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에 의하면 이 때의 폐정개혁 12조는 허구라 한다. 유영익은 자신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동학농민운동을 다룸에 있어서 다른 한 명의 공동집필자와 함께 이른바 '동학 12개조 폐정개혁안'이란 것이 허구라고 밝혀냈다고 주장하였다.[28]
전주성에서 철병했으나 이미 청군과 일본군은 조선 내에 진입한 상태였다. 한편 홍계훈은 전주화약 이후에도 이들을 역적으로 취급했다. 이에 전봉준은 6월 7일(음력 5월 4일)에 항의문을 보내는데, '태공을 받들어 나라를 감독토록 함은 그 이치가 심히 마땅하거늘 왜 이를 불궤라고 하느냐?'라고 하였다.
12조 개혁안의 진위 문제
한편 이때 제출된 12개조 개혁안은 진위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이견이 제기되었다. 서울대학교 교수 유영익은 "내가 국사교과서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 계기는 2002년 어느 날 나의 한 제자가 내 연구실로 찾아와 자기가 고등학교 검인정 근현대 교과서를 집필했다고 자랑하면서 교과서 집필 과정에서 겪은 실화 한 토막을 털어놓았을 때이다."라고 고백하였다.[20]
유영익에 의하면 "그 제자는 동학농민운동을 다룸에 있어 다른 한 명의 공동 집필자[20]와 함께 이른바 '동학 12개조 폐정개혁안'이란 것이 허구임을 알기 때문에 애당초 그 개혁안을 교과서에 싣지 않기로 작정했는데 당시 교육인적자원부에서 집필자들에게 시달한 '국사 교육내용 전개의 준거안'에 그 개혁안을 의무적으로 인용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부득이 교과서에 실었다고 고백했다.[28]' 한다.
유영익에 의하면 폐정 12개조 개혁안은 출처가 불확실하다 한다. 그에 의하면 '나는 12개조 개혁안이란 것이 1940년에 어느 무명의 역사가(오지영)가 역사소설 동학사라는 책에 임의로 삽입한, 역사상 존재하지 않는 자료임을 논문을 통해 입증했기 때문에 이 고백을 듣고 깜짝 놀랐다.[28]'고 한다.
교육부가 '국사 교육내용 전개의 준거안'이라는 것을 내세워 사실에 어긋나는 비진리를 국사교과서에 싣도록 강요한 사실에 분개하였다. 이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 나는 우리나라 교육부가 일본 문부성 못지 않게 역사 왜곡을 자행한다고 생각했고 그 후로 일본 정부의 역사 왜곡에 대해 입을 다물게 되었다[28]'고 고백하였다. 반면,이러한 주장에 대해 동학농민운동사를 전공한 박맹수 원광대 교수는 "오지영의 '역사소설 동학사'는 픽션으로서 소설이 아닌 회고록 성격의 글"이라며 유 교수 의견을 정면 반박했다.
박 교수는 "오지영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 지도자 출신으로 갑오년에 체험했던 바를 회고록 형식으로 글을 쓴 것"이라며 "확인되는 사료들로 봐서 동학농민운동 당시 이미 27개 조항 요구안이 있었음이 확인된다"고 설명하였다.
집강소 설치
6월 11일(음력 5월 8일) 관군과 2차 강화를 맺은 뒤 대부분의 농민은 철수했으나 동학군은 교세 확장을 구호로 그들의 조직을 각지에 침투시키고 전라도 53군에는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 개혁에 착수하였다.
교섭에 들어간 전봉준은 폐정 개혁을 골자로 하는 27개조에 달하는 조건을 내놓았고 이에 관군 대표인 홍계훈이 무조건 수용함으로써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동학군은 각 지방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잘못된 정치의 개혁을 위한 지방 의회 겸 행정 관청으로 삼았다.[25] 특히 김개남은 5~6만의 농민군을 이끌고 집강소 설치에 반대하던 남원 부사 이용헌과 나주의 현령을 살해하고, 그곳에도 집강소를 설치했다.
집강소의 행동 강령은 12개조이다. 양반 중심 사회를 혁파하고, 신분 차별을 폐지하며, 인습에 갇혀 사는 여성을 해방하여 농민 생활을 풍족하게 만드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와 같은 강령은 17세기 이래 진보적인 실학자가 내걸었던 개혁안과 1884년 김옥균 등의 개화파가 주장했던 정책보다 진보한 내용이었다.[25] 시대를 멀리 내다본 전봉준의 개혁 사상은 성리학 국가인 조선 왕조에서 수용할 수 없는 혁명적 기치를 내걸고 있었다.[25] 그러나 전봉준은 이번 기회에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하자는 일부 강경파의 견해에는 동조하지 않았다.
제2차 봉기의 성격
이 중 제2차 봉기는 흥선대원군이 전봉준을 사주했거나, 적당한 때를 알렸다는 주장도 있다. 이상백에 의하면 '대원군은 전봉준의 처족 8촌이자 전주대도소 도집장 송희옥을 선공주사로 임명하고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과 정인덕은 이 송희옥과 접선하여, 전봉준에게 밀지(密旨)를 보내 대원군의 뜻에 따라 재봉기할 것을 주문하였던 것이다.[29] 김개남에게는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을 통하여 전 승지 이건영과 접촉하고 이건영은 김개남을 만났다.[29]'는 것이다.
일본군의 개입
톈진 조약이 파기됨에 따라 청군과 함께 조선에 진주한 일본은 힘으로 내정 개혁을 단행하려 했고, 이 때문에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에 불만을 품었던 개화파 정치인들은 일본을 적극 지지하였다. 또한 일부 개화파는 일본을 이용하여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서 빨리 개화, 변혁을 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동학 농민군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경계심을 느낀 고종은 신하에게 직접 "청에 도움을 요청, 청군을 이용해서 이들을 진압하게 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러나 청나라군의 유입을 경계한 일본 역시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킨다.
동학군의 세력 형성을 경계한 고종과 민씨 척족은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때 안경수는 일본, 민영준은 청나라와의 외교 교섭을 통한 동학난의 수습에 적극 앞장섰다.[30] 민씨 정권은 청나라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조선에 들어온 일본군은 관군과 함께 '동비 색출'에 나선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 조정을 장악하였다. 보국안민과 외세배격을 기치로 내걸었던 동학은 일본의 국권 침탈 행위에 분개하며 다시 한 번 봉기했다. 그러나 동학 농민군의 궐기 목적에 폐정개혁과 민씨 척신세력 처벌, 대원군 옹립이라는 조항이 들어있음을 접한 민비는 동학군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을 계획한다. 또한 양반 사대부들은 최제우가 사이비 종교를 만들다가 혹세무민죄로 처형당한 것을 근거로 들어 동비를 탄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동학농민군의 세력은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 그리고 경상북도 일부 지역에서 맹위를 떨쳤다. 충청도의 노론 위정척사파 계열 양반들과 보수적인 영남 남인들은 자체적으로 의병을 창의하여 동학군과 교전을 벌였다.
대원군의 접촉 시도
대원군과 전봉준의 연합


전봉준을 비롯한 동학 농민군의 온건파와 비밀리에 연락한 흥선대원군은 동학군 내의 온건파가 대원군을 받들 것을 주장한다는 점을 주목했다.[2] 1894년 6월 흥선대원군은 손자 이준용과 함께 동학 농민군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계획을 수립한다. 대원군파가 농민군을 상경시키고, 청국군을 끌어들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개화파를 제거하여 정권을 장악하려는 계획은 당초 이준용, 이태용, 박준양의 시국대처 논의 속에서 그 윤곽이 짜여졌다.[2][31]
당시 박준양은 이준용에게 관직을 쉬고 외국으로 나가 10년 동안 견문을 넓혀 명망을 얻은 이후에 돌아올 것을 권하였다. 그 동안 고종은 노쇠하게 되고 왕세자(순종)도 그다지 큰 덕이 없으니 그때에 외국 명망과 국내의 관심은 자연히 이준용에게 쏠릴 것이고, 그러면 그다지 노력하지 않고도 권력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2]
그러나 이태용은 큰일을 도모할 경우에는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의 기대가 모두 대원군을 향하고 있고, 더욱이 동학군이 대원군을 받들겠다는 주장을 펴면서 봉기하고 있는 지금, 그들로 하여금 수십만 대중을 동원하여 올라오게 한다면 진실로 사람의 무리가 하늘을 이긴다고 하듯이 일본군이 비록 움직인다고 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2] 이어 이태용은 이준용에게 한편으로 일본군을 만류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 밤을 재촉하여 군중을 올라오게 한다면 손바닥을 뒤집듯이 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제안하였다.[2] 두 사람의 제안을 이준용은 대원군에게 알렸고, 대원군은 이태용의 안을 지지하여 박동진과 박세강에게 수십만 대중을 규합하여 속히 올라오게 하였다.[2] 한편 전봉준 등은 일본군의 유입으로 농민군이 분기탱천해 있음을 대원군에게 알려왔다.
손화중 등 타 지도자들 포섭
흥선대원군이 포섭한 동학 농민군 지도자 중에는 손화중도 있었다. 손화중의 부인인 유씨가 임종 직전에 남긴 증언에 의하면 손화중도 대원군을 만나고[23], 그의 서신도 받았다고 한다.[23]
손화중의 부인 유씨에 의하면 손화중은 '봉기 중 서울을 다녔는데, 대원군과 직접 상면을 했다[23]'고 한다. '그때 대원군의 서신도 받아 갖고 있었는데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23]'는 증언을 했다.
남접의 분열
그러나 남접 내에서도 이견을 보인다. 대원군 가문의 식객 출신이었던 전봉준을 비롯해서 폐정개혁과 외척 세도가의 퇴출, 대원군 옹립을 목적으로 하던 남접의 온건파와 왕조 자체를 부정한 김개남 일파는 갈등한다. 이는 농민군 내부의 파벌 갈등, 알력으로 발전한다.
대원군 일파와 모의
이에 따라 대원군과 함께 대원군파의 중심이었던 이준용은 관직을 내무협판에서 통위사로 옮겨 병권을 장악, 불시의 병력 사용에 대비하고 다수의 장정들을 모아 대궐 내에 은닉하여 일본군대가 북진하여 병력이 허약해진 틈을 노려 농민군과도 내외 상응하여 거사하려고 하였다. 농민군이 금강에 이르러 그 기세가 놀랄 만하면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32] 병력을 일으켜 한성을 점령한다는 계획이었다.
동학농민군과 사전에 계획을 짠 뒤, 이준용이 토벌을 명분으로 부대를 구성하면 동학농민군은 빠진다는 계획이었다. 이준용은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출진명령을 얻어, 군병과 수백 명의 역사(力士)를 대동하고 과천, 수원 사이에 개부하여 오히려 일을 꾸며 합세 회군하여 서울로 들어와 사람들이 놀라고 왕이 피난할 때를 타서 한편으로는 그 부하인 통위영 병대[32]를 동원하려 했다.
대원군과 이준용의 계획은 "농민군이 재기하면 그 토벌을 핑계로 군사를 일으켜서 개화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잡으려던 것으로 재기병을 촉구하는 밀사를 보냈던 것[33]"이었으며, 또 만일 일본군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러 내려가게 되면 즉각 해산하였다가 그 해 11~12월 경에 강이 결빙하기를 기다려 청국병이 오게 될 형편이 되면 협력하여 일본군을 격퇴하고 정부를 갱신하고 새로운 왕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이준용은 농민군에게 거병하여 한성에 오면 자신은 동학군을 진압하는 척할 것이니 적절히 싸우는 척하다 해산하라고 자신을 찾아온 일부 동학군 지도자에게 알렸다.
이준용이 이끄는 통위병 영대로서 왕실을 장악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수인들을 지휘하여 김홍집, 조희연, 김가진, 김학우, 안경수, 유길준, 이윤용 등을 죽이고 정부를 전복하여 정권을 장악한 뒤 고종을 상왕으로 추대하고, 왕비와 태자를 폐하여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기로 결정하였다.[32] 한편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의 거사에는 위정척사 계열 유학자도 동의하고 있었으므로 이준용은 전봉준과 동학군 지도자에게 이 점을 설명했다.
대원군, 이준용의 음모 탄로
흥선대원군과 이준용 등은 동학 농민군이 궐기하여 비상사태를 만든 후, 사람들을 동원, 올라온 대중을 한편으로는 서울 근방에 배치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로 들여보내 종로에 도회시켜 만인소청을 설치하고 서찰을 정부에 투여하여 각국 공관에 조회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34] 그러면 한두 사람의 일이 아니고 수십만 명의 일이고 또 외국에 어떠한 해를 끼치는[32] 일도 아니기 때문에 외국에서도 아무 말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34] 일이 이루어지면 사신을 밀파하여 청국군에게 알려 앞으로의 시비에 대비하게 하고, 만일 일본군이 먼저 움직이면 일단 사방으로 흩어졌다가 1894년 10월 중에 청국군이 나오는 것을 기다려 힘을 합쳐 협공하면 일본군을 격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34]
그리고 대원군파의 사람을 중심으로 신정부를 구성하여 박준양을 영의정에, 이태용과 김모를 각각 좌의정, 우의정에 앉히려고 하였으며, 고운정을 충청감사나 영남감사에, 그리고 고종주를 전라감사에 임명하려고 하였다.[34]
8월 24일 청·일의 평양성 전투에서 기대했던 청나라의 패배소식이 알려진 후 대원군측의 일부 인사가 '정변계획'을 유보하자고 주장하자[33], 이준용은 머뭇거렸다. 이에 대원군의 측근인 박동진은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33]
| “ | 대사는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하는데 오늘날의 물망이 모두 노대감(대원군)을 따르고 하물며 또 동학당은 상봉국태공(上奉國太公)의 설로 창의한 자들이다. 만약 몇십만 명을 이끌고 권토중래한다면 실로 소위 인중승천(人衆勝天)[35] 인바 일본군이 움직인다 한들 어쩌겠는가.[33] | ” |
동학농민군의 주장 중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섭정)도 요구하고 있었다.[33]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사전모의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농민군이 폐정개혁을 요구하는 가운데 대원군의 감국도 요구하고 있었음을 주목한 대원군측이 농민군을 이용하여 일본군과 친일개화파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음을 시사해준다.[33]
그러나 대원군과 이준용의 정변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걸려 실패로 돌아간다.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은 일본 공사관에 소환되었고 청나라와 손잡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의도를 추궁당한다. 위기의식을 느낀 일본 공사관은 1894년 9월 일본 본국에 연락하여, 일본군 병력을 증원하여 경상남도 동래군과 부산항을 통해 파견한다.
제3차 봉기
제3차 봉기 궐기
1894년 9월 전봉준, 김개남 등은 다시 사발통문을 띄워 궐기를 호소하였다. 전라도, 충청남도 등지에서는 남접과 서포 소속 동학군과 농민군이 궐기하였다.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남접은 교주 최시형의 북접에 도움을 청해 연합 전선을 폈다. 제2차 봉기에 동원된 농민군은 남접 10만과 북접 10만을 합해 약 20만 병력이었다.
동학 농민군의 일부가 흥선대원군과도 내통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민씨 내각의 조선 조정은 농민군을 제거할 계획으로 일본과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이에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손병희, 최경선, 김덕명, 최시형, 성두환, 김낙삼, 김두행, 손천민, 김봉득, 김봉년, 유한필 등이 전라북도 전주부 삼례역 역촌에서 다시 새로운 봉기를 일으켰다. 일본군의 왕궁 점령에 분격한 농민군은 이 해 음력 9월 척왜(斥倭)를 구호로 내걸고 재기하였다. 이제는 내정 개혁을 목표로 하지 않고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였다. 이를 '제3차 동학 농민 운동'으로, 9월 봉기 또는 제3차 봉기, 삼례봉기로도 부른다.
타협론과 결사항전론의 대립

제1차, 제2차 봉기의 휴전은 동학군에 불리하여 정부는 강화 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한편, 청군은 물론 일본군도 6월 9일(음력 5월 6일)부터 1만의 군대로 인천에 상륙하였다. 1894년 7월 23일(음력 6월 21일) 새 내각이 친일 인사들이 있자, 일본은 외교통인 이노우에 가오루를 새 주일 조선 공사로 임명했다. 7월 25일(음력 6월 23일) 드디어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등 험악한 정세를 조정하였다.
이에 동학군은 10월 12일(음력 9월 14일) 삼례에서 회의를 연 결과 전봉준·김개남 등의 과격파는 최시형·이용구(李容九) 등 온건파의 타협론을 거부한다. 그 뒤 전봉준이 4천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삼례에서 일본군을 몰아낸 뒤 남접과 북접의 연합을 시도했다. 전봉준은 공주-수원-서울 북상로를 선택하고 남원에 주둔한 김개남은 금산- 청주 -서울로 진격로를 정한다. 그동안 전봉준의 봉기에 반대 입장을 보였던 손병희는 교주 최시형의 승인 하에 충청도 농민군(북접)을 이끌고 청산(靑山)에 집결하여 논산(論山)에 합류했다.[36] 그로써 김개남 대신 음력 10월에 북접의 손병희가 논산에서 합류하여, 남접 1만과 북접 1만을 합해 총 2만여 군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들 남북연합 농민군은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일본군의 병참기지를 습격하고 전신줄을 절단하면서 서울을 향해 북상하다가 공주를 총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조선 조정과 일본군은 신정희, 허진, 이규태, 이두황 등에게 3,200명의 관군과, 일본군 미나미 고시로가 이끄는 2,000명의 일본군을 이끌고 맞섰다.
공주성 진입 지연
6월 말, 일본은 이 기회에 조선에서 청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려고 전쟁을 시작했다. 청일전쟁은 일본도 청나라도 아닌 조선 땅에서 벌어졌다. 9월 16일(음력 8월 17일), 평양 전투에서 일본은 승리를 거두었다. 평양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외세가 판을 치는데도 무기력한 정부를 본 전봉준과 농민군 지도부는 9월 12일, 마침내 2차 기병을 결정했다.[18] 농민군은 공주를 손에 넣고 곧장 서울로 진격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의외로 출발이 늦어지는 바람에 정부군과 일본군 연합군이 먼저 공주에 입성했다.[18]
농민군이 늦어진 이유는 전쟁을 원치 않는 동학 북접 교단의 비협조 때문이었다.[18] 최시형 이하 북접 지도부는 포교의 자유를 얻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 1차 봉기 때에도 북접은 참가하지 않았다.[18] 전주성을 함락시키고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두어 한국 최초의 농민자치를 실행한 것은 전적으로 남접 농민군의 힘이었다. 남접과 달리 북접은 중농 이상이 많아 그만큼 개혁에 관심이 없었다.[18] 남접이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18] 9월 하순, 제자들의 간곡한 설득에 최시형은 마지 못해 합류를 허락했다.[18] 논산에서 북접군과 남접군이 합류한 것이 10월 9일이니 봉기 결정 후 한 달을 끈 셈이었다.[18]
일본군과의 전투
농민군과 조일 연합군은 11월 20일(음력 10월 23일)부터 23일(26일)까지 공주 이인과 포효 등지에서 제1차 접전을 벌였고, 농민군은 크게 패배해 후퇴했다.농민군은 곰티와 검상 마을, 곰내, 하고개, 주미산 방면을 공격했다. 홍성 농민군은 금강 건너편의 유구 쪽에서 맞섰으나 세성산 전투에서 패배해 후퇴했다. 농민군은 다시 진열을 정비하고, 12월 5일(음력 11월 9일) 남접과 북접 연합군 1만여 명이 공주 우금치를 향해 돌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동학 농민군은 숫적으로만 우세할 뿐 훈련을 받은 군인도 아니었고, 병기도 원시적이어서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10월 중순 10만 부대로 공주성을 포위하고 대공격전을 전개하였으나 패퇴하였고, 11월 다시 공주 부근의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하여 후퇴하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 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관군에 진압되어 전봉준은 쫓기는 신세가 된다.
우금치, 공주 전투, 청주 전투 패전과 퇴각
12월 5일(음력 11월 9일) 전봉준은 드디어 총공격을 명령했다. 농민군 주력 부대가 우금치를 목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금치는 견준산과 주미산이 만나 만든 가파른 고개로 개금티라고도 부른다. 물밀 듯 올라오는 농민군에게 정부군과 일본군의 최신 무기가 불을 뿜었다.[37] 시간이 갈수록 농민군의 패색이 짙어갔다.[37]
수만이나 되는 비도(匪徒)가 4,50리에 걸쳐 길을 쟁탈하고 산봉우리를 점거하여 성동추서(聲東趨西), 섬좌홀우(閃左忽右)하면서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고 죽음을 무릅쓰고 앞을 다투어 올라오니 저들은 무슨 의리이고 무슨 담략인가. 그 정황을 말하고 생각하면 뼈가 덜리고 가슴이 서늘하다. 만약 병력이 전후좌우에서 방비하지 못해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다면 맹렬히 밀어붙이는 기세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을 것이고, 결국 그들을 막아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37]
정부군의 좌선봉장 이규태는 나중에 이렇게 실토했다.[37] 주력부대가 우금치에서 결사 항전하는 동안 농민군 일대는 공주로 향했다.[37] 들은 공주 감영을 배후에서 치기 위해 봉황산을 공격했다. 조를 짜서 조별로 공격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감영을 눈앞에 두고 수없이 많은 동학 농민군이 눈을 부릅뜬 채 쓰러져갔다. 시체가 산같이 쌓이고 이루어 금강으로 흘러들어갔다.[15]
한편 김개남의 동학농민군은 전주를 거쳐 금산을 점령하고, 신탄진을 거쳐 청주로 진격하였으나 청주전투에서 일본군에 패하고 후퇴하였다.
패전과 실패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 새벽,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농민군은 논산으로, 다시 전주로 후퇴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원평, 태인에서 결전을 벌였지만 역시 패했다. 전봉준은 직속부대만 남기고 농민군에게 해산명령을 내렸다.[15]
곧이어 정부군 측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죄없는 양민까지 마구잡이로 체포, 학살하고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부녀자를 능욕했다. 그동안 쌓아 올린 농민적 사회경제의 기반은 여지없이 무너져나갔다.[15] 백양사에 숨어 동정을 살피던 전봉준은 정부군이 살육에 정신 없는 틈을 타서 직속부대를 서울로 잠입케 하고 세 명의 부하와 함께 순창으로 갔다.[15]
동학군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은 전봉준을 생포하면 막대한 상금을 준다는 포고문을 내걸었다. 전봉준은 정읍과 순창 등지를 전전하며 몸을 숨겼다. 그러나 과거 자신의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어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한양으로 압송되었다.[38]
체포와 최후
김개남은 12월 27일(음력 12월 1일) 태인에서 친구인 임명찬의 밀고로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된 후 처형된다. 1894년 12월 28일(음력 12월 2일) 순창에서 전봉준은 상금에 눈 먼 옛 동지김경천의 배신으로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일본군에 의해 서울의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 그 후 법무아문으로 넘겨져 1895년 3월 5일(음력 2월 9일)부터 4월 4일(음력 3월 10일)까지 5차례 심문을 받았다.[15] 법무아문에서는 고문을 가하며 대원군과 전봉준의 관계를 캤지만 그는 일절 대원군을 언급하지 않았다. 체포된 전봉준은 심문을 받으면서 자신의 정치적 구상을 이렇게 밝혔다.
전봉준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완강하게 부인하였다. 그러나 김개남 등은 대원군과의 관계를 진술하였고 즉각 처형된다. 결국 1895년 4월 23일(고종 32년 음력 3월 29일) 재판장은 전봉준 외 체포된 동학농민군 지도부에게 부대시참을 선고했다. 전봉준은 무릎을 치고 일어나면서 외쳤다.[15] 전봉준은 자신이 역적이 아님을 들어 역적의 누명을 쓰는 것은 억울하다고 호소하였다.
| “ | 정도를 위해 죽는 것은 조금도 원통할 바 없으나 오직 역적의 이름을 받고 죽는 것이 원통하다.[15] | ” |
1895년 4월 23일(음력 3월 29일) 손화중, 최경선, 김덕명, 성두한 등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이로써 동학 농민봉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된다.[38] 한편 일부 농민군 지도자는 흥선대원군의 특별 사면 탄원으로 석방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공에 눈이 먼 고향 사람의 손에 의해 민씨 정권 인사들에게 넘겨져 대부분 처형당했다. 죽기 전, 전봉준은 시 한 수를 지어 자신의 회한을 읊었다.
| “ | 때를 만나서는 천하도 힘을 합하더니 / 時來天地 皆同力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쩔 수 없구나 / 運去英雄 不自謨 백성을 사랑하고 정의를 위한 길이 무슨 허물이야 / 愛民正義 我無失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 愛國丹心 誰有知[15] | ” |
한편 김개남 등 일부는 태인 산내면 종송리에 있는 매부 서영기의 집에 숨어 있다가 친구 임병찬의 고발로 전주에 있는 강화영의 중군인 황헌주에게 잡혀 불법으로 전주 서교장에서 처형당했다.[40] 나머지 인사들은 시골에 숨어살거나 술주정꾼 행세를 하면서 겨우 의심을 피해 생존하였다. 농민전쟁의 실패와 함께 동학 농민군을 이용하여 명성황후를 타도하고 이준용을 추대하려던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기도도 수포로 돌아갔다.
주요 전투
황토현 전투
농민군이 전북 정읍 황토현 일대에서 관군을 무찌르고 첫 승리를 거둔 전투로 후에 황룡촌 전투에서도 승리하게 되었다. 농민군이 봉기하고 태인과 부안 관아를 잇따라 점령하자 조정에서 전라감사 김문현, 영관 이경호 등이 영내 잡색군 등 총 1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와 정읍 황토현에서 격돌했다. 4월 7일 새벽 농민군은 관군에게 포를 쏘아 혼란에 빠뜨린 뒤 미처 대처하지 못한 관군을 추격해 패전시켰고 이 과정에서 영관 이경호가 농민군들에게 체포되어 전사했다. 이 전투의 승리로 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게 되었고 전주로도 진격할 수 있었다.
황룡천 전투
전주성 전투
이인 전투
태인 전투
우금치 전투
1894년 음력 11월 공주 남쪽의 우금치(牛禁峙)에서 관군 및 일본군과 큰 격전을 벌였다. 약 1주일 간 50여 회의 공방전을 벌인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병력을 잃고, 500여 명의 생존자가 전주 남쪽의 금구 원평(院坪)으로 후퇴하였다.
농민군은 무너미 고개와 이인 쪽에서 맞서 관군을 밀어붙이고 조일 연합군은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관군을 우금치 옆 뱁새울 앞산에 주둔하고 우금치, 금학동, 곰티, 효포 봉수대에 관군을 배치했다. 농민군은 이 곳을 집중 공격했으나 고갯마루 150미터 앞까지 조일 연합군의 우세한 무기의 포탄과 총탄이 비오듯 쏟아져 내려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기동과 조병완이 농민군의 좌측과 우측을 공격해 농민군은 큰 사상자를 내고 공주 동남쪽 봉우리로 후퇴했다. 농민군 1대가 봉황산으로 진격해 공주감영을 공격하려 했으나 하고개와 금학골 골짜기에서 관군의 공격으로 실패했다. 이로써 농민군은 4일 간의 제2차 접전에서도 패배했고, 전봉준은 군인, 이서, 상인들에게 지지를 크게 얻지 못했다. 조일 연합군은 12월 10일(음력 11월 14일)에 노성 주둔 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촌 뒷산과 소토산으로 계속 후퇴해 사기까지 떨어졌다. 12월 23일(음력 11월 27일) 최후의 전투인 태인전투에서도 전봉준 장군의 주력부대로서는 일본의 신식 무기에 다수의 전사자를 낳고 패배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지역 각지에서 많은 접주들이 항거하여 봉기하였으나 그 규모는 소수였고, 전봉준의 부대만이 대규모로서 호남의 5천명을 이끌고 일본군 수만 명을 상대로 항전을 벌였으나 전략 미숙과 병기류를 충분히 갖추지 못하여 마침내 일본군을 끌어들인 조선 조정의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의해 패하고 말았다. 마침내 음력 11월에 전봉준 등은 순창에서 체포되어 한성부로 압송된 후 일본 공사 또는 조선 의금부의 재판을 받고 이듬해 사형되었으며(1895년 음력 3월), 이후 조일 연합군의 호남 일대의 농민군 대학살전이 일어났다.[41] 이로써 동학농민전쟁은 거병한 지 1년 만에 실패로 끝났다.
조선군의 전쟁 범죄
동학농민운동 당시 조선군이 백성들을 상대로 전쟁범죄를 저지른 적도 있었는데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하러 전주로 내려온 경군 병사들은 3달 전부터 월급을 못 받은 상태라 군기고 뭐고 없이 백성들을 상대로 잔인하게 약탈과 강간을 저지르는 것이 도적떼보다 더 심했기 때문에 민중이 일본군의 주둔을 희망한 적이 있을 지경이었으며 진위대 역시 임무에는 관심이 없고 국왕의 군대라는 것을 앞세우면서 민중에게 강도질과 폭행을 일삼았다. 여자에게는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모자라 민중에게 부당한 세금을 거두는 탐관오리의 사냥개가 되어 자신들이 지켜야 할 시민의 집에 밤에 몰래 쳐들어가서 총으로 쏘아 죽이기까지 했다. 이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가 진위대의 해산 명령을 내리자 조선인이 손을 들고 경축한 일도 있었다.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승려
불교 승려들도 참여하였다. 여기에는 농민군의 주요 파벌 중 하나인 서포의 지도자 서장옥이 불교 승려 출신인 점이 작용하였다.
농민군 지도자 중에는 승려 출신의 접주도 있었다. 충청남도에서 활동한 남접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서장옥(서인주)은 승려 출신으로, 최시형과 함께 최제우의 제자가 되었다. 최시형과 동문인 일반 접주였지만, 최시형의 제자들에 비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42]
서장옥은 일찍이 승려로 30여 년을 수행하다가 동학에 투신하여 1894년 전봉준과 함께 창의하니, 호서남접 혹은 서포라고 불렸다.[19]
1893년 2월의 집회 때 남접에서는 북접이 주최하는 보은 집회의 동정을 살피려고 긍엽(亘葉)이라는 승려를 파견하였다. 농민전쟁에는 서장옥과 수많은 승려가 참여하였다. 즉 원평의 남접 호남세력과 서포의 연합 집회에 불갑사의 인원(仁原), 선운사의 우엽(愚葉), 백양사의 수연(水演) 등 호남 지방 승려가 가담하였다.[43] 그밖에 충청남도 산사의 일부 승려도 서포에 가담하였다.
진압 이후
1907년 고종의 특지로 북접의 최시형 등 일부는 신원되었다. 그러나 전봉준과 김개남 등은 1910년(융희 4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복권되지 못하였다. 일부 농민군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산중에 은신하거나 항일 의병 전쟁에 흡수되기도 했다.
기타 활동
대원군파와 연결
대원군파는 1894년 7월경부터 일본 세력을 퇴치하기 위해 청지방의 사회세력과 평양의 청나라군의 협력을 받으려 하였다.[44] 이때 동학 농민군에게도 사람을 보내 협력을 요청했다.
구체적으로 대원군은 동학농민군, 지방의 토호세력, 양반유림, 공신의 자손들, 보부상 등에게 밀사를 파견하여 의병보익와 군수지원을 촉구하였다.[45]
개화파 제거 기도에 참여
서울에서 동학 농민군 일부와 대원군파는 은밀히 자객을 동원하여 개화파의 중진인물인 김홍집, 김학우, 김가진, 안경수, 조희연, 유길준, 김종한, 이윤용 등을 암살하려 하였다.[45] 농민군은 이 계획에 협조한다.
이 암살계획은 동학농민군이 이준용 휘하의 통위영과 협력하여 서울을 공격하기로 하였던 1894년 8월 중순경에 실천에 옮겨질 예정이었다. 그러나 군국기무처 내에서 대원군과 이준용의 반란 모의를 조사하자고 주장했던 김학우를 암살하는데 그침으로서 제한적인 결실만을 거두었다.[45] 이후 농민군은 감쪽같이 빠져나갔고 흥선대원군을 체포할 수 없었던 내부에서는 이준용을 체포하여 의금부에 감금하였다.
평가
동학농민운동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에 기초를 두고 농민이 주축이 된 “반봉건·반외세 농민항쟁”이다. 동학은 신분제 혁파를 주장했기에 혼란한 구한말에 가난한 농민이 의지할 수 있는 종교였다.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결국 실패했으나, 3.1운동으로 계승되었다.
동학농민전쟁은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의 지도로 일어난 농민 항거라는 점과, 외세 배척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기존 민란과 다르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에서 동학농민운동은 몇 가지 한계도 가지고 있다.[46]
첫째, 농민군은 관군과 외세에 맞설 효과적 무기와 병력이 부족하였다. 둘째, 기득권을 가진 향촌사회의 지주·부호·양반이 구성한 민보단(民堡團)등의 저항을 과소 평가하였다. 셋째, 사회 개혁을 위한 혁명을 수행하면서도 대원군에 의지하였다.[47]
더구나 동학군 내 과격파는 왕조를 부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려 시도한 반면, 온건파의 전봉준 등은 흥선대원군과 협력하는 등, 내부에서도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봉준이 백산에서 전라감사에게 내놓은 개혁요구서와 전주화약을 맺기 직전 관군 최고사령관 홍계훈에게 보낸 탄원서에는 대원군이 다시 권좌에 복귀하기를 바라는 내용이 들어 있다.[47]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오 동학 농민 운동은 애국적이고 애민적인 동기에서 일어난 구한말 최대의 농민 중심의 항쟁이었다. 한편, 농민군이 근대적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회혁명이나 계급전쟁을 꿈꾸었다는 역사가의 견해도 있다.[46]
결국, 동학농민전쟁은 순박하고 애국적인 농민층의 자기생존을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때의 실패경험을 바탕으로 농민의 반일애국주의가 다음 시기의 의병운동에 양반유생과 더불어 참여하는 저력을 발휘하였다. 내정 개혁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 반영되었다. 과부의 재가 허용과 신분제 폐지 등이 있다.[46] 그러나 이 개혁은 농민의 소망이었던 토지 개혁을 누락했기 때문에 많은 호응을 얻지 못했다.[46] 또한 김개남 등 과격파가 국왕을 참칭한 점과 전봉준 등 온건파가 흥선대원군과 내통한 점 때문에 대중의 전폭적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더욱이 유럽의 시민혁명과 달리 농민 항쟁 운동의 주 발생지가 특정 지역이다 보니 현대에 와서도 지역 혐오 세력이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특히 뉴라이트가 동학 농민군 내부에서 성행한 방탄 부적과 같은 비과학적 부분을 들추며, 과학 시대인 현대의 관점을 반영하여 폄하하는 중이다.
관련 인물
대원군과 전봉준
1888년(고종 25) 무렵 전봉준은 손화중(孫和中)과 접촉했다.[48] 그리고 그의 인도로 동학에 입도한다. 1890년 무렵 전봉준 자신의 표현에 의하면 "그의 용무지지(用武之地)로서 동학 교문이 있음을 발견하고", 서장옥(徐璋玉)의 막료인 황하일(黃河一)의 소개로 동학에 입교했다. 뒷날 동학 농민 운동의 실패로 관군에 체포된 뒤 1895년 일본 영사관에서 있었던 제2차 재판에서 "동학은 수심(守心)하여 충효(忠孝)로써 근본을 삼고 보국안민(輔國安民)하려는 것이었다. 동학은 수심경천(守心敬天)의 도(道)였다. 때문에 나는 동학을 극히 좋아했다"고 하여 스스로 동학에 입교하게 된 경위를 밝혔다.
그러나 전봉준은 1890년 운현궁을 찾아갔다. 이후 1890년대 초반 전봉준은 운현궁에서 흥선대원군의 문객 생활을 하였다.[49] 1892년 초 전봉준은 운현궁 문객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고향인 전라북도 고부군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동리 서당의 훈장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1893년 2월 전봉준은 한성부로 올라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였다.[48] 대원군은 잠시 식객으로 있었던 전봉준을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때 전봉준은 흥선대원군에게 "나의 뜻은 나라와 인민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바"라고 말했다고 한다.[48] 이로부터 세간에는 전봉준과 대원군 사이에 무슨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48]
전봉준과 천우협
한편 기요후지 고시치로(清藤幸七郞)의 저서 《천우협》(千佑俠, 덴유쿄)에서는 1894년 6월 27일에 부산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일본의 정치 폭력 조직 천우협 회원 일부가 전봉준을 만나 동학 동민 운동을 지원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천우협》에 나타난 만난 곳과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 나타난 장소가 다르며, 〈동도(東徒)의 죄인 전봉준 공초〉에서는 당시 전봉준을 따른 군세는 고작 20여 명이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5백여 명으로 기술하여 그 수치가 매우 차이가 크다. 결정적으로 《천우협》에 나타난 시기인 6월부터 8월 말까지는 전혀 전투가 없었음에도 《천우협》에서는 천우협 회원들과 전봉준 일동이 협조하여 관군을 격파했다고 하였다.[50] 전봉준은 흥선대원군 계열 외에도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청나라 세력을 몰아낼 목적으로 천우협의 회원들로부터도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폭력 조직 천우협은 팔굉일우를 바탕으로 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바닥에 깔고 있는 조직으로 다른 나라의 독립이나 부국 강병을 도울 만한 조직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천우협》이 전봉준이나 동학군을 도우려 했다는 주장은 신빙성이 낮다는 시각도 있다.[출처 필요]
한편 동학측 자료에서도 전봉준과 천우협(天佑俠)의 접촉을 확인해주고 있는데 『천도교 창건사』에 의하면 "일본인 다케다 한시(武田範之)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마노(瑪瑙)[51]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52]'하여 전봉준과 천우협 측의 면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민씨 세력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일 때만 해도 천우협은 동학 농민 운동에 호의적이었지만, 일본군까지 진압에 끌어들이게 되자 다소 애매한 입장을 표명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이 완전히 진압되어 사태 수습이 어렵다고 여겨지자 천우협은 동학과의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동학 농민 운동이 진압된 뒤 천우협은 다시 동학측과 사람을 주고받으며 교류를 한다.
흥선대원군의 농민운동 사주
한편 흥선대원군이 동학 농민군에게 거병을 사주했다는 것은 러시아의 외교관의 비밀 편지에도 나타난다.
| “ | 나는 나의 정보원을 통해 다음과 같은 첩보를 받았다. 임금의 아버지(대원군)가 주모자로 나서서 중대한 폭동을 조성하고 있으며, 이 폭동은 오는 여름 혹은 아무리 늦어도 가을 이전에 폭발할 것이며, 공모자와 대리인들이 일본과 중국에서 무기를 구입하고 있으며 이미 4천여정의 소총이 구매되었는바, 그 중 일부는 일본에서 나왔고 소수의 일본인이 이에 가담하여 일을 같이 꾸미고 있으며, 이 음모에 대해 일본 정부는 전혀 모르고 있다.[53] | ” |
한편 흥선대원군은 동학 농민운동이 진압된 뒤, 농민군의 한 사람인 이방언이 처형당하기 전에 살려주었다. 그러나 이방언은 고향으로 내려다가다 전라도관찰사가 잡아다가 그 아들과 함께 불에 태워 죽였다.
그 증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대원군과 접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증거로서 석대전이 끝나고 그 양반이 잽혀서 나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자기조 사형 아니면 무죄 방면, 지금 나온 재판 기록에 엊그저께가지도 총무처 기록보관소에서 재판기록 책을 보냈습디다. 그 양반은 무죄 방면이 되지 않았습니까? 무죄 방면이 될 수가 없는 분이었는데. 그렇게 된 것은 대원군이 주선을 해서 무죄 방면을 받았다.[54]'고 한다. 이어 이방언의 증손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래가지고 (이방언이) 고종 앞에까지 가서 귀화초식이란 말이 뭔 말인지는 모르지만, 돌아올 때[54] 귀자, 될 화자, 풀 초자, 먹을 식자, 귀화초식의 승봉을 받고, 나락 평정이 되면 다시 부를 테니 집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때 국가에 공을 세워라 하는 크나큰 은전을 입고 내려왔는데[55]'라는 것이다.
이방언과 흥선대원군과의 관련설은 송기숙이 녹두장군에도 썼듯이 꾸준히 이야기꺼리가 되고 있다. 이런 관계로 하여 이방언은 무죄 방면되었다는 것이다.(총무처 기록보관소 발행의, 동학관련판결문집 참고). 그러나 이방언은 놓여 나와도 곧바로 고향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55]
이방언의 증손의 증언에 의하면 '동학은 피차가 출혈이 많고 사상자가 많이 나서 여기로 바로 못 오시고 회천면에 있는 보성 군수에게로 갔대. 보성 군수가 이상한 것이 그 말이 맞어들어가. 거시기를 보면 보성 군수가 재판을 받았어요. 군수도 동학에 협조했다고 해가지고. 근데 보성 군수도 무죄 방면을 했어. 그 사람도 동학에 협조한 사람이여. 보성 군수의 협조로 보성군 회천면 쇳대에 은신해 있다가 전라 감사의 재체포령에 의해서 잽혀가지고 장흥 장대에서 자기 외아들 성호와 같이 동참을 당하셨어요. 지금 성운고등학교 자리라고 그럽디다. 그러니까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총살도 아니고 효수도 아니고 산 사람을 묶어놓고 그 위에다.[55]' 흥선대원군의 탄원으로 살아난 이방언은 전라도 관찰사에 의해 처형당한다. 이방언은 짚을 씌워 불에 태워죽이는 분살형을 당했던 것이다. 그래도 시신을 집안 어른들이 수습해서 묘를 쓴 것은 여느 농민군 지도자들의 경우보다 나은 편이었다.[55]
김구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김구는 동학군을 지휘했다. 지도자 최시형의 지시를 받고 황해도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습격하였으나 끝내는 관군에게 패퇴하고 몸을 숨겼다.
기타


동학농민운동 당시 사헌부감찰인 윤치소(尹致昭)는 아산 출신 조중양과 함께 300명 정도를 모아서 의병[56]을 조직하고 창의통문을 천안, 아산, 온양 지역에 돌리고 천안 지역에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그는 일제하 대지주이자 사업가로서 친일로 변신, 해평 윤씨 일족인 윤웅렬, 사촌인 윤치호 등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57] 윤치소는 후일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이 되는 윤보선, 경기도지사를 지낸 윤원선의 아버지였다. 한편 동학농민군 고령, 성주 지역의 접주로 활동하다 체포, 사형을 모면한 박성빈은 대한민국의 5~9대 대통령을 지낸 군인 출신 정치인 박정희의 아버지이자 총리 김종필의 처조부가 된다.
1894년 10월 토포사 윤영렬은 아산(牙山)에 사는 조중석(趙重錫)과 함께 장정 300명을 모아 천안군 목천면에 출몰한 도적을 토벌하였다. 이후 동학 농민 운동의 토벌에 참여한다. 윤영렬은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조중양과 함께 토벌군에 별군관으로 차출되었다.[57] 별군관으로 차출된 그는 관군 외에도 격문을 돌려 의병을 모집하였다. 이어 관군과 의병 병력을 이끌고 충청남도 아산과 천안 일대의 동학 농민군토벌에 참여하였다. 윤영렬은 윤보선 대통령의 할아버지였다. 그런데 상하이에 망명중이던 윤치호는 동학 농민운동을 적극 지지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실패 원인
민씨는 2차 봉기 때는 청나라군을 끌어들였고, 3차 봉기 때는 일본군을 끌어들여 교전케 하였다. 2차 봉기 때에는 전주 화약을 체결하였지만 3차 봉기때는 일본군과 조선 관군, 청나라군과 관군 연합군의 화력을 당해내지 못하였다.
또한 정권 전복을 원치 않는 북접의 반발과 왕실을 부정하는 남접 내 급진파의 존재 역시 농민군의 내분을 불러왔다. 동학군 남접이 2차 봉기를 준비하자, 북접은 남접 농민군을 공격하려고까지 했다.[18] 남접과 서포의 군사에 대한 북접의 비협조 역시 농민군의 활동을 어렵게 했다. 논산에서 북접군과 남접군이 합류한 것이 10월 9일이니 봉기 결정 후 한 달을 끌었다.[18] 북접과의 연합에 너무 시간을 소비했고, 또 남원의 김개남 부대가 독자 행동을 한[15] 것 역시 세력 약화의 한 원인이었다.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이 문단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2012년 7월) |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는 전봉준이 체포된 후 다섯 차례 진행된 전봉준에 대한 법정 심문 기록이다. 법부아문의 재판관과 일본 영사가 배석한 가운데 1894년 2월 9일부터 3월 10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심문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부나 일본측에서 가장 중점을 두고 추궁한 것이 농민운동과 흥선대원군과의 관계였다. 그러나 전봉준은 대원군과 동학혁명과의 관련성을 부정하고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는 등 혁명가로서의 의연한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갑오동학혁명의 원인 및 경과, 농민군의 인적 구성, 전봉준과 동학의 관계, 동학의 교리 ·조직 ·교세 및 농민운동에 미친 영향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두 책 모두 원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돼 있다.
서광범: 네 이름이 무엇이냐?
전봉준: 전봉준(全琫準)이다.
서: 전명숙(全明淑)이라는 자는 누구냐?
전: 명숙은 나의 자(字)다.
서: 전녹두는 누구냐?
전: 사람들이 나를 그리 부른다.
서: 왜 난을 일으켰으냐?
전: 어찌하여 날보고 난을 일으켰다 하느냐? 작란(作亂)을 하는 것은 바로 왜놈에게 나라를 팔아먹고도 끄떡없는 부패한 너희 고관들이 아니냐?
서: 관아를 부수고 민병을 일으켜 죄없는 양민을 죽게한 것이 난이 아니고 무엇인가?
전: 일어난 것은 난이 아니라 백성의 원성이다. 민병을 일으킨 것은 기울어져가는 나라를 구하고자 함이요 백성의 삶에서 폭력을 제거코자 했을 따름이다.
서: 그리하면 지방의 방백수령을 혼내주면 됐지 왜 서울에 입성코저 했는가?
전: 국체를 무시하고 궁궐을 침범한 왜놈들을 응징코저 한 것이다.
서: 그럼 서울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다 내쫓고자 했는가?
전: 아니다. 외국인은 통상만 하면 되는 것이다. 헌데 왜놈들은 군대를 주둔시켜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은 아직도 모르고 있단 말이냐? 어찌 뿌리가 썩었는데 가지를 친다함이 의미가 있을손가?
서: 너는 동학의 괴수(魁首)냐?
전: 나는 의를 펴고자 일어났을 뿐이다. 동학의 괴수라 함은 가당치 않다.
서: 동학엔 언제 입당하였느냐?
전: 삼년전이다.
서: 왜 입당하였는냐?
전: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守心)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敬天)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서: 동학의 주의(主意)가 무엇이냐?
전: 보국안민(輔國安民)이다.
서: 그렇대면 그대는 하늘님을 공경하는 것 보다는 보국안민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학이라는 조직을 이용한 것밖에 더 되느냐?
전: 동학은 본시 우리 해동 조선땅에서 일어난 것이며 그 도학(道學)에 종교와 정치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서: 송희옥(宋喜玉)을 아는가?
전: 면식은 있을지 모르나 나는 그 자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이 전라일도 도집강(都執綱)이요 너의 가까운 친척이라는데도 알지 못한단 말이냐?
전: 그는 본시 부랑자로 홀왕홀래했을 뿐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
서: 송희옥의 기서(奇書)에 의하면 너의 재차 기포는 국태공(國太公) 대원군과의 밀약에 의한 것이라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전: 어찌 척양척왜가 대원군 한사람의 주장일까보냐? 그것은 만백성이 원하는 바이다. 내 창의문에 써있는 몇구절로써 그런 억측을 일삼는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대원군은 우리의 의거가 해산되기만을 효유했을 뿐이다. 우리의 의거는 대원군과 하등의 관련도 없다.
서: 너는 대원군을 서울 운현궁에서 만난 적이 있다는데?
전: 유언비어일 뿐이다. 나는 대원군을 만난 적이 없다.
서: 동학에 남접 북접이 있다는데 그 구별은 무엇이뇨?
전: 그것은 호남과 호서의 지역적 구별일뿐 동학이 두개인 것은 아니다. 동학은 삼십년전 경주에 살던 최제우(崔濟愚)로부터 시작하였고 동학의 모든 접주는 최법헌(崔法軒)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최법헌이 팔도(八道)의 접주의 직책을 총괄한다.
서: 최법헌이 누구인가?
전: 해월 최시형이다. 이름은 최경상이다.
서: 그럼 너도 기포의 허락을 최법헌으로부터 받았는가?
전: 진리를 펴는데 무슨 허락이 필요한가? 충의(忠義)란 본심(本心)이다. 그대 발 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그대는 그것을 허락을 받고 치우겠는가?
—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갤러리
- 전주한옥마을에 위치한 동학혁명기념관
같이 보기
- 기타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 대한민국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 마에다 겐지 - 다큐 '동학농민혁명' 제작 중
- 나카쓰카 아키라(ja:中塚明) - 나라 여자 대학 명예교수, 한일관계사 및 동학농민혁명 연구가
- 장성 황룡 전적 - 사적 제406호
-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 전라북도 기념물 제129호
관련 서적
- 부산예술문화대학동학연구소, 《해월 최시형과 동학 사상》 (예문서원, 1999)
- 조광환, 《소통하는 우리역사》 (살림터, 2008)
- 임종국,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돌베개, 1991)
-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경인문화사, 2007)
- 김중현·이희근 외 공저, 《불멸의 15인 시공 초월 맞장 인터뷰》 (서해문집, 2008)
-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7년 겨울호 (역사비평사, 1997)
- 배항섭, 《조선후기 민중운동과 동학농민전쟁의 발발》 (경인문화사, 2002)
- 신복룡, 《한국사 새로 보기》 (도서출판 풀빛, 2001)
- 장영민, 《동학의 정치 사회운동》 (경인문화사, 2004)
- 이돈화, 《천도교 창건사》 (천도교중앙종리원, 1950)
참고 자료
- "전봉준-대원군 밀약 있었다", 경남도민일보, 2006.12.15.
- 서울로 끌려간 녹두장군 전봉준 끝까지 대원군 감싸다 처형돼, 중앙일보, 2009.05.06.
- 보관됨 2005-01-29 - 웨이백 머신, 동아일보, 2001년 6월 1일자
각주
- 본 사건과 동학의 관련성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는 의견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1894(갑오) 농민전쟁(또는 혁명이나 운동)' 등이 적합하다는 의견도 있음. 왕현종, 동학농민전쟁 용어 및 성격 토론: 1894 농민봉기 어떻게 부를 것인가, 1990년 8월, 가을호(통권 12호), 357-364면 참고
-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1페이지
- 윤치호의 삼촌 윤영렬과 사촌 동생 윤치소는 의병을 일으켜 동학농민군과 교전하였다.
- 동학 농민군은 동비(東匪), 동학 비적으로 비하해서 불렀다.
-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36페이지
-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42페이지
- 역사학연구소 <강좌 한국근현대사> 풀빛 1996.8.29 p56
-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8페이지
-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37페이지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5~316쪽.
-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48페이지
- 임용한, 《난세에 길을 찾다》(시공사, 2009) 306페이지
-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65페이지
-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66페이지
-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61페이지
- 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441b
- 양필승, 세계사 속에서 전봉준:한국민족주의의 형성과 문명사적 위기, 중앙일보 WIN, 1996년 7월호
-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59페이지
-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67페이지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7) 272페이지
- 역사문제연구소, 《다시 피는 녹두꽃》 (역사비평사, 1994) 13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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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군의 강령에 해당
-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50페이지
- 사정을 하소연함 네이버 한자사전 2011년 6월 22일 확인
- 김광재, 동학농민운동의 역사적 의의, 2002년 2월, 동학연구 제11집, 99-126면 중 104면
- 강준만, 《한국 근대사 산책 2:개신교 입국에서 을미사변까지》 (인물과 사상사, 2007) 27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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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박광희 역, 다산초당, 2010) 397페이지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8 58~60쪽
-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5》 (역사비평사, 2003) 242페이지
- 역사문제연구소, 역사비평:1997년 겨울호 (역사비평사, 1997)16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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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대중이 하늘을 이긴다.
- 제1차 봉기 때에는 최시형도 반대 입장을 보였다. 신복룡 (2001년 12월 20일). 《한국사 새로 보기》, 초판 2쇄, 서울: 도서출판 풀빛, 168~179쪽. ISBN 89-7474-870-3.
-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60페이지
- 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도서출판 들녘, 1996) 452페이지
- 박은봉, 《한국사 100장면》 (가람기획, 1993) 262페이지
- 역사문제연구소, 《다시 피는 녹두꽃》 (역사비평사, 1994) 175페이지
- “일본군 동학농민 학살 '진중일지' 공개”. 2001년 5월 31일. 2023년 4월 7일에 확인함.
- 부산예술문화대학동학연구소, 《해월 최시형과 동학 사상》 (예문서원, 1999) 246
- 임혜봉, 《한권으로 보는 불교사 100 장면》 (가람기획, 1994) 268페이지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8쪽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2007.4, 경인문화사) 319쪽
-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동학혁명〉
- 서울로 끌려간 녹두장군 전봉준 끝까지 대원군 감싸다 처형돼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중앙일보
- Daum백과사전 중 전봉준의 출신 및 배경[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230쪽
- 임종국 (1991년 2월 1일). 《실록 친일파》. 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 서울: 돌베개. 23~24쪽쪽. ISBN 89-7199-036-8.
- 보석의 일종
- 한상일, 「동학과 일본 우익:천우협(天佑俠)과의 제휴에 관한 고찰
- 유영익, 「갑오농민봉기의 보수적 성격
- 역사문제연구소, 《다시 피는 녹두꽃》 (역사비평사, 1994) 249페이지
- 역사문제연구소, 《다시 피는 녹두꽃》 (역사비평사, 1994) 250페이지
- 동학농민운동 토벌군
- 한국역사연구회, 《1894년 농민전쟁연구 4》 (역사비평사, 1995) 268페이지
외부 링크
甲午農民戦争
| 甲午農民戦争 | ||||||||
|---|---|---|---|---|---|---|---|---|
甲午農民戦争の始まりとともに広まった全琫準の檄文 | ||||||||
| ||||||||
| 衝突した勢力 | ||||||||
| 指揮官 | ||||||||
| 戦力 | ||||||||
| 朝鮮軍 3,000人-50,000人 | 南部15,000人-300,000人 北部10,000人-300,000人 | 500人-3,000人 | ||||||
| 被害者数 | ||||||||
| 6,000人戦死 | 数万人死亡 | 200人戦死 | ||||||
| 東學農民革命 | |
|---|---|
| 各種表記 | |
| ハングル: | 동학농민혁명 |
| 漢字: | 東學農民革命 |
| 発音: | トンハンノンミヌンドン |
| 日本語読み: | とうがくのうみんうんどう |
| ローマ字: | Donghak nongmin undong |
| 英語表記: | Donghak Peasant Revolution |
甲午農民戦争(こうごのうみんせんそう)は1894年(甲午)に李氏朝鮮で起きた李氏朝鮮王朝に対する農民暴動、内乱である。主要な関与者に東学の信者がいたことから東学党の乱(とうがくとうのらん)とも呼ばれる。
李朝の統治理念である儒教(朱子学)思想を揺るがす、身分差別を否定する内容が含まれる新興宗教「東学」を1860年から布教しだした第1世教主崔済愚が、1863年に李氏朝鮮王族や支配層である士族(両班)の怒りを買って捕らえられ、翌1864年に「邪道亂正」の罪で処刑された[1]。そして、第2世教主崔時亨は東学の公認を求めたが、同様に李朝から強く弾圧された。そして、彼らの取締りを口実にした朝鮮官吏の収奪が更に横行するようになると、李氏朝鮮の虐政が甲午農民戦争へ発展する火種となった。東学党は困窮する朝鮮農民に布教された反西学(反キリスト教)の新興宗教一派であり、彼らによる李氏朝鮮の上位層による収奪への反発・経済改革要求から朝鮮南部で大きな運動に発展し、暴動は南部を中心に全土に波及した[1][2]。蜂起した農民軍の相手は主に朝鮮官軍、守城軍、民堡軍(両班の持つ民兵・自衛組織)だった。この暴動への対処として、朝鮮王朝は清に救援を要請した。すると大日本帝国も済物浦条約による自国民保護を理由に清朝との天津条約の手続きをふんで、共同で農民反乱を鎮圧することを名目とし、清の参戦と同時に朝鮮に出兵した。これに危機感を強めた朝鮮の招討使である洪啓薫は農民軍の幣政制改革案を受け入れるフリをして農民軍を解散させた(全州和約)。しかし、大日本帝国は乱民が起きるは朝鮮内政に問題あるとし、朝鮮の内政改革を清と合同で行うことを提案するも、清は拒否。日本軍は単独で朝鮮を自国の影響下におくことを狙い、村田銃を装備する歩兵を中心に王宮(景福宮)に侵攻し短時間で占領。清との対立は激化し、後に日清戦争に発展する。
なお、日本軍が朝鮮の内乱自体に介入したのは日清戦争中の清軍大敗後からとなる[3]。農民軍は戦う相手を「圧制者である朝鮮王朝」から「侵略者である日本軍」へと変えて再蜂起し、日本軍と戦うこととなった[4]。そのため、大韓民国では東学農民運動や東学農民革命(동학농민혁명)と呼ばれ、日本への民衆独立運動の始まりと評する声もある[5][6]。通説では、「斥倭洋」といったスローガンの中心化等を基に第一次蜂起から二次蜂起にかけて李朝朝鮮の圧制に対する反封建運動から抗日運動に転換していったとされている[7]。ただし、朴孟洙は「斥倭洋」「逐滅洋倭」といった反侵略の言葉と思想が初期からあり、抗日・排西洋の姿勢は一貫していて非暴力的抗議活動から日本軍の武力進出により武力蜂起に発展したとものとしている[8]。
第一次蜂起
1860年代から朝鮮は変革の時代を迎えていた。これに1880年代以降、国内の動乱期を乗り越えた日本やアメリカ合衆国、西欧の列強が加わり、次の時代に向けた模索の中で混乱の時期を迎えていた。
閔氏政権(高宗の妃とその一族による政権)の重税政策、両班たちの間での賄賂と不正収奪の横行、そして1876年の日朝修好条規(江華島条約)をはじめとした閔氏政権の開国政策により外国資本が進出してくる等、当時の朝鮮の民衆の生活は苦しい状況であった。朝鮮政府の暴政に対し次のような詩が朝鮮国内に広く伝昌されていた。
金樽美酒千人血 | 金の樽に入った美酒は、千人の血からできており |

朝鮮の改革を巡っては、壬午事変や甲申政変のような政変があったが、いずれも蜂起は失敗に終わった。こうした中で政権を手にしていた閔氏は、自らの手で改革を行うことができずにいた[9]。このつけは全て民衆に振り向けられ、民衆の不満は高まり、1883年から各地で農民の蜂起(民乱)が起きていた。そのような中、1894年に全羅道古阜郡で、郡守の趙秉甲が水税の横領を起こし、その横領に対して全羅道観察使に哀願を行った農民が逆に逮捕される事件が起きた[10]。この事件により、同年春に、崔済愚の高弟で東学党の二代目教祖となった崔時亨が武力蜂起し、甲午農民戦争に発展した。反乱軍は全琫準という知将を得て5月には全州一帯を支配下に置いた。全琫準とその同志20人は、以下の4か条を決議し、「沙鉢通文」[注 1]に署名した[11]。
一、古阜郡庁を襲撃し、趙秉甲を梟首すること。
一、軍器倉と火薬庫を占領すること。
一、郡守に諂い人民の財物を収奪した強欲な役人を懲罰すること。
一、金州城を陥落させソウルに進撃すること。
古阜郡の民乱も当初は他の民乱と変わるところはなく、自分達の生活を守ろうとするものでしかなかった。しかし、この民乱の指導者に成長した全琫準を含め農民の多くが東学に帰依していたことから、この東学の信者を通じて民乱が全国的な内乱に発展してゆく。
全琫準は下層の役人であった。しかし、17世紀から普及し始めた平民教育で、全琫準のような非両班知識人が形成されていた。この全琫準が発した呼びかけ文が東学信者の手で全道に撒かれ、呼びかけに応じた農民で、数万の軍勢が形成された。彼らは全羅道に配備されていた地方軍や中央から派遣された政府軍を各地で破り、5月末には道都全州を占領するまでに至った。
これに驚いた閔氏政権は、5月30日に清国に援軍を要請。これに脅威を感じた日本は6月2日に朝鮮出兵を決定し、同月4日に清国に対し即時撤兵を要求したが拒否される[2]。天津条約にもとづき、日清互いに朝鮮出兵を通告。日本は6月6日に出兵を発動し清国軍の朝鮮撤兵を再度要求、翌7日に清駐韓国公使が清国の属領保護のための派兵であるとその正当性を主張し、8日に清国軍が朝鮮牙山に上陸、12日に日本軍が在留邦人保護を名目に仁川に上陸、7月16日には漢城近郊に布陣して清国軍と対峙することになった[2]。朝鮮の魚大蔵大臣[12]によれば「朝鮮ノ人ハ、ソラ大変ガ起タ、此東学党ハ一時起ッタガ早ヤ治ッタ、何トモナイ、ト言イ触ラシテ支那兵モ早ク返エサナケレバナラヌ。日本兵モ返エサナケレバナラヌ」としたことにより、逆に状況を悪化させてしまったという。これに対し、招討使の洪啓薫は全琫準は幣政改革条目を受け取り、農民軍を解散させたという全州和約を結ぶが、それによって改革させた形跡はなく、全琫準は騙されたと証言している[13][14]。全州和約によって、改革されたとする一次史料は発見されていないが、閔氏政権が農民の提案を基に全州和約を作成し締結したとし[15]、和約で従来の地方政府が復活、同時に農民側のお目付け役「執綱所」が設けられ、全羅道に農民権力による自治が確立したとする説がある。
日清戦争

反乱が収束し、朝鮮は日清両軍の撤兵を申し入れるが、両国は受け入れずに対峙を続けた。日本は清に対し朝鮮の独立援助と内政改革を共同でおこなうことを提案し、イギリスも調停案を清へ出すが、清は「日本の撤兵が条件」として拒否[16][17]。
日本は朝鮮に対して、「朝鮮の自主独立を侵害」する清軍の撤退と清・朝間の条約廃棄(宗主・藩属関係の解消)について3日以内に回答するよう申入れた。この申入れには、朝鮮が清軍を退けられないのであれば、日本が代わって駆逐する、との意味も含まれていた[18]。これに朝鮮政府は「改革は自主的に行う」「乱が治まったので日清両軍の撤兵を要請」と回答。
7月23日午前2時、日本軍混成第九旅団(歩兵四箇大隊など)が郊外の駐屯地龍山から漢城(現在のソウル)に向かい、うち一箇連隊が漢城に入り、午前4時半過ぎ頃には国王高宗が居住し政府が置かれる王宮を包囲、やがて門を破壊して侵入を開始、警備の朝鮮兵と数時間の銃撃戦の末、王宮を占領、国王を捕えた[19]。日本軍は大院君を擁して入闕し、国王高宗に迫って大鳥公使立会いの下に国政と改革を大院君に委任しその全てを大鳥公使と協議することを約束させた[19]。そして新政権は朝鮮政府に代わって牙山の清軍を撤退させるよう日本に要請することとなった。25日、豊島沖海戦、29日に成歓の戦いが行われ交戦状態となる。31日に清国政府が駐北京日本公使小村寿太郎に国交断絶を通告[2]、8月1日に日清両国が宣戦布告をし、日清戦争が勃発した。
第二次蜂起
全琫準(ぜんほうじゅん、チョン・ボンジュン)は日清両国が軍を派遣して間もない7月には既に第二次蜂起を起こそうとしていた。しかし、全琫準供草[20]によれば、全琫準が病気だったこと、多くの民を一時に動かせなかったこと、新穀が未収穫だったため、自然に蜂起が10月になったとある。他に、平和的な解決を望む東学の上層部の説得に時間が掛かったとする説もあるが出展不明。この時期には日本は李氏朝鮮の閔氏政権下の新政府と友好関係となっており、日清戦争は既に日本勝利という大勢を決していた。李氏朝鮮政府の依頼を受け、ここから初めて日本側は東学勢力へ目を向けた。農民軍もこれ以前の相手は主に朝鮮官軍、守城軍、民堡軍(両班の士族)だった[3]。1894年11月末に忠清道公州の牛金峙(ウグムチ、우금치)で農民軍は日本軍・朝鮮軍と初衝突するが、近代的な訓練を受けた日本軍に全琫準等はあえなく敗北する。日本軍・朝鮮官軍の圧倒的勝利で終ったこの戦闘を牛金峙の戦い[21]という。牛金峙で日本に敗北した農民軍等は全羅道に逃げた。全琫準と同志達は淳昌で再起の機会をうかがっていたが、1895年初頭に捕えられ、漢城で処刑された。なお、この乱鎮圧で、川上操六参謀本部次長は「東学党に対する処置は 厳烈なるを要す、向後悉く殺戮すべし」との電文を朝鮮兵站線の日本軍司令部に送り、日本軍は3万人とも5万人ともいわれる農民を殺戮したとする説もある[22][23]。
ある大隊長は「多く殺すの策」「探し出して殺す」作戦を展開したと講話し、日本軍のある従軍日誌には、負傷の生捕り十名を「帰舎後、生捕りは、拷問の上、焼殺せり」、捕えた7名を「城外の畑中に一列に並べ、銃に剣を着け(略)軍曹の号令にて一斉の動作、これを突き殺せり」との記録がある[24]。
東學黨征討略記[25]によれば、東学党には信奉者、脅迫されて一時的に参加している者、偽東学党の3種類あり、偽東学党が頗る多いとの調査報告がある。偽東学党の大半は砂金鉱夫で、田畑、道路、橋梁など、そこかしこに穴をほって荒らすので農民の損害が出たので禁止されたため、東学党を称して剽掠をするようになったのだという。また、別の東學黨征討略記[26]によれば、「通譯官ヲシテ問ハシムレハ皆曰ク東匪ノ爲メ家ハ燒カレ財貨ハ奪ハレ兒女ハ殺サレ妻ハ掠取サレテ死處ヲ知ラス願クハ我々ヲ救濟セヨト(通訳官に尋ねさせると、皆が口をそろえてこう言った。"東学党によって家は焼かれ、財産は奪われ、子や娘は殺され、妻は連れ去られて生死もわからない。どうか我々を救ってほしい"」と、剽掠の様子が記録されている。
大院君は対立する閔氏政権によって投獄されていた東学の幹部2名を釈放し、1人を内務衙門主事に1人を議政府主事に採用し、忠清道に居る名士豪族に密使を送って、東学の扇動を命じた。また密使は、忠清道の東学幹部箕準、徐長玉に、全羅道の東学幹部全琫準、宋喜玉に、それぞれ会って東徒の召集を促し、慶尚道においては直接に東徒の糾合を呼びかけた。呼びかけにより10、11月に相次いで蜂起する。そして大院君は、東学には数十万で大挙して漢城に来るように命じ、平壌の清軍と共に南北から挟み撃ちにして日本人を駆逐する策を実行するように指示した。これらの事実が、日本の平壌攻略によって得た多数の書類から発見された(東学党事件ニ付会審ノ顛末具報 明治28年9月20日の別紙第二号)。その後も大院君と李埈鎔の扇動教唆の手紙を発見し、また後に逮捕された部下たちの供述によって発覚し、日本公使の追及によって、大院君、李埈鎔が認め謝罪した[27][注 2]。これらはあくまで日本側資料であるが、このように第二次蜂起は、全くの純粋な民衆反乱ではなく、日本を清と東学の力で放逐せんとした大院君の思惑も働いている可能性がある。
一方で、本来の反乱側との和約では全羅道においては反乱側の要求を容れたはずであった[15]。しかし既に、日本の漢城における公館費用は朝鮮側負担となり日本が朝鮮に要求する改革のためにも費用がかかり、また、日清戦争は朝鮮の要請に日本が応じたという建付けであるため当面の日本軍費用は日本が負担するとしてもその他にも様々な費用を日朝どちらがどれだけ負担するのかという問題が生じ、朝鮮側は反乱側に対する約定を守ろうとしなくなっていた。また、日本軍より陸奥外相に届いた連絡では、全羅道で東学党のために朝鮮政府側の租税の徴収が出来なくなっていること、これでは結局は日本の利益を害し日本の目的を達成できなくなるとして、鎮定のために追加の兵を出すことを要請している[28]。民衆反乱は、日清戦争の戦費調達のための重税が朝鮮民衆に新たな負担としてのしかかり、その必然的結果であった可能性もある。
戦後
1906年、全羅南道珍島郡で処刑された無名の反乱指導者とみられる遺骨が韓国統監府技師の佐藤政次郎により、母校の札幌農学校に搬出された[29]。「韓国東学党の頭領」と記された頭骨は長らく北海道大学古河記念講堂で段ボール箱に放置され、1995年に発見された。
韓勝憲弁護士らの「東学農民革命記念事業会」が返還運動を展開し、1996年5月31日に韓国に戻り全州歴史博物館に収蔵された[30]。2019年時点では、東学革命記念緑豆館の敷地内に埋葬する計画が立てられている[31]。
世界の記憶
脚注
注釈
出典
- 糟谷憲一(著)、武田幸男(編)「朝鮮近代社会の形成と展開」『朝鮮史』、山川出版社、2000年8月、223-227頁、ISBN 4-634-413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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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コラム】東学が抗日闘争だって?=韓国(1)”. 中央日報 - 韓国の最新ニュースを日本語でサービスします. 2023年10月4日閲覧。
- “歴史は生きている 日清戦争は景福宮で始まった”. 朝日新聞DIGITAL. 朝日新聞社. 2023年12月16日閲覧。
- “韓国高校歴史教科書における東学農民運動の叙述の変遷”. 立命館学術成果リポジトリ. 立命館大学. 2023年12月16日閲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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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朴孟洙. “日本近代と韓国の関係 ―東学思想,甲午農民戦争,日清戦争を中心に一”. 北海道大学. p. 30. 2023年12月19日閲覧。
- 朴孟洙. “近代 日本 と韓国(北朝鮮)に おける東学思想及び甲午農民戦争に関する先行研究の到達点 と問題点”. 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 2023年12月19日閲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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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東学農民戦争と日本, p. 176
- “東学農民革命軍指導者の遺骨をめぐる訴訟の理由とは?”. ハンギョレ (2019年5月24日). 2019年5月24日閲覧。
- “UNESCO Memory of the World Register”. UNESCO. 2023年5月27日閲覧。
参考文献
- 梶村秀樹『朝鮮史 新書東洋史10』〈講談社現代新書〉。
- 池田敬正、佐々木隆爾『教養人の日本史(4) 江戸末期から明治時代まで』社会思想社〈教養文庫〉。
- 『クロニック世界全史』講談社。
- 『ジャパン・クロニック 日本全史』講談社。
- 武田幸男、宮嶋博史、馬渕貞利『朝鮮 地域からの世界史1』朝日新聞社。
- 『錦絵の中の朝鮮と中国』岩波書店。
- 『日本近現代史3 日清・日露戦争』岩波書店。
- 中塚明、井上勝生、朴孟洙『東学農民戦争と日本』高文研、2013年。ISBN 978-4-87498-516-8。
- 中塚明、井上勝生、朴孟洙『新版 東学農民戦争と日本』高文研、2024年。ISBN 978-4-87498-877-0。
- 愼蒼宇『朝鮮植民地戦争 甲午農民戦争から関東大震災まで』有志舎、2024年。
関連項目
- 李氏朝鮮
- 東学/西学(キリスト教)
- 独立協会
- 李容九
- 東学農民革命参与者名誉回復審議委員会
- 日本が関与した戦争一覧
- 土地は併呑す可らず国事は改革す可し-緩衝国家
- 竹槍歌 - 東学党の乱で歌われた
- 緑豆の花 - この闘争をベースとした2019年のテレビドラマ。
갑오농민전쟁
| 갑오농민전쟁 | ||||||||
|---|---|---|---|---|---|---|---|---|
갑오농민전쟁의 시작과 함께 퍼진 전금준의 분문 | ||||||||
| ||||||||
| 충돌한 세력 | ||||||||
| 지휘관 | ||||||||
| 전력 | ||||||||
| 조선군 3,000명-50,000명 | 남부 15,000명-300,000명 북부 10,000명-300,000명 | 500명 - 3,000명 | ||||||
| 피해자 수 | ||||||||
| 6,000명 전사 | 수만명 사망 | 200명 전사 | ||||||
| 동학농민혁명 | |
|---|---|
| 각종 표기 | |
| 한글 : | 동학농민혁명 |
| 한자 : | 동학농민혁명 |
| 발음 : | 통한논 미눈동 |
| 일본어 읽기: | 도쿠 쿠노 우민 돈도 |
| 로마자 : | 동학 농민 둥동 |
| 영어 표기: | 동해피아산 혁명 |
갑오농민전쟁 (고고우민선소)은 1894년 ( 갑오 )에 이씨 조선 에서 일어난 이씨 조선왕조에 대한 농민폭동, 내란 이다. 주요 관여자에게 동학 의 신자가 있었기 때문에 동학당의 난 (도가쿠토우노란)이라고도 불린다.
이조의 통치이념인 유교 ( 주자학 ) 사상을 뒤흔드는 신분차별을 부정하는 내용이 포함된 신흥종교 ‘동학’을 1860년부터 포교한 제1세 교주 최제우 가 1863년 이씨 조선왕족과 지배층인 사족( 양반 )의 분노를 사서 잡히고 다음 1864년 '사도양정'의 죄로 처형 되었다 1 ] . 그리고 제2세 교주 최시부는 동학의 공인을 요구했지만 마찬가지로 이조에서 강하게 탄압됐다. 그리고 그들의 단속을 구실로 한 조선 관수의 수탈이 더욱 횡행하게 되면 이씨 조선의 학정이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하는 화종이 되었다. 동학당은 곤궁한 조선농민에게 포교된 반서학(반기독교)의 신흥종교 일파이며, 그들에 의한 이씨 조선의 상위층에 의한 수탈에 대한 반발·경제개혁 요구로부터 조선남부에서 큰 운동으로 발전해 폭동은 남부를 중심으로 전토에 파급되었다 [ 1 ] [ 2 ] . 봉기한 농민군의 상대는 주로 조선관군, 수성군, 민보군 (양반이 가진 민병·자위조직)이었다. 이 폭동에 대한 대처로서 조선왕조는 청나라 에게 구호를 요청했다. 그러자 대일본제국 도 제물포조약 에 의한 자국민보호를 이유로 청조와 천진조약 의 절차를 거쳐 공동으로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것을 명목으로 삼아 청전참전과 동시에 조선에 출병했다. 이에 위기감을 강화한 조선의 초토사인 홍계훈은 농민군의 폐정제 개혁안을 받아들이는 척하고 농민군을 해산시켰다( 전주화약 ). 그러나 대일본제국은 난민이 일어나는 것은 조선 내정에 문제가 있다고 하며 조선의 내정개혁을 청과 합동으로 실시할 것을 제안하지만 청은 거부했다. 일본군은 단독으로 조선을 자국의 영향하에 두는 것을 노리고, 무라타 총 을 장비하는 보병을 중심으로 왕궁( 경복궁 )에 침공해 단시간에 점령. 청과의 대립은 격화하고 나중에 닛신 전쟁 으로 발전한다.
덧붙여 일본군이 조선의 내란 자체에 개입한 것은 일청 전쟁중의 청군 대패 후로부터가 된다 [ 3 ] . 농민군은 싸우는 상대를 '압제자인 조선왕조'에서 '침략자인 일본군'으로 바꿔 재봉기하여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다 [ 4 ] . 따라서 대한민국에서는 동학농민운동 이나 동학농민혁명 ( 동학농민혁명 )이라 불리며 일본에 대한 민중독립운동의 시작이라고 평가하는 목소리도 있다 [ 5 ] [ 6 ] . 통설에서는 ‘척왜양’과 같은 슬로건의 중심화 등을 바탕으로 제1차 봉기에서 2차 봉기에 걸쳐 이조선의 압제에 대한 반봉건운동에서 항일운동으로 전환해 갔다고 한다 [ 7 ] . 다만, 박효수는 '척왜양', '축멸양왜'라는 반침략의 말과 사상이 초기부터 있었고, 항일·배서양의 자세는 일관되고 있어 비폭력적 항의활동으로부터 일본군의 무력진출에 의해 무력봉기에 발전했다고 한다 [ 8 ] .
제1차 봉기
1860년대 부터 조선은 변혁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에 1880년대 이후 국내의 동란기를 넘은 일본과 미국 , 서구 의 열강이 더해져 다음 시대를 향한 모색 속에서 혼란의 시기를 맞이했다.
민씨 정권( 고종 의 비와 그 일족에 의한 정권)의 중세 정책, 양반들 사이의 뇌물 과 부정 수탈의 횡행, 그리고 1876년 의 일조 수호 조규 (강도조약)을 비롯한 민씨 정권의 개국 정책에 따라 외국자본이 진출해 오는 등 당시 조선 민중의 생활은 어려운 상황이었다. 조선 정부의 폭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가 조선 국내에 널리 전창되고 있었다.
가타루 미술 천인혈 | 금통에 들어간 미술은 천명의 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

조선의 개혁을 둘러보면 임오변 이나 갑신정변 과 같은 정변이 있었지만 모두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이런 가운데 정권을 갖고 있던 민씨는 스스로 손으로 개혁을 할 수 없었다 [ 9 ] . 이 붙임은 모두 민중에게 돌이켜져 민중의 불만은 높아져, 1883년 부터 각지에서 농민의 봉기(민란)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1894년 에 전라도 고후군 에서 군수의 조조갑 이 수세의 횡령을 일으켜 그 횡령에 대해 전라도 관찰사에 애원을 한 농민이 거꾸로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 10 ] . 이 사건으로 같은 해 봄에 최제우의 동생으로 동학당 의 2대째 교조가 된 최시형이 무력봉기하여 갑오농민전쟁으로 발전했다. 반란군은 전금준 이라는 지장을 얻어 5월에는 전주 일대를 지배하에 두었다. 전금준과 그 동지 20명은 이하의 4개조를 결의하여 '사발통문' [ 주1 ] 에 서명했다 [ 11 ] .
1. 고후군청을 습격하고 조조갑을 추수하는 것.
1,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하는 것.
1, 군수에게 꿰뚫어 인민의 재물을 수탈한 강욕한 관리를 징벌하는 것.
첫째, 김주성을 함락시켜 서울로 진격하는 것.
고후군의 민란도 당초는 다른 민란과 바뀌는 곳은 없고, 자신들의 생활을 지키려고 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민란의 지도자로 성장한 전금준을 포함하여 농민의 대부분이 동학에 귀의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동학의 신자를 통해 민란이 전국적인 내란으로 발전해 간다.
전호준은 하층의 장교였다. 그러나 17세기 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평민교육에서 전금준과 같은 비양반 지식인이 형성되었다. 이 전금준이 발한 호소문이 동학신자의 손으로 전도에 뿌려져 호소에 응한 농민으로 수만의 군세가 형성되었다. 이들은 전라도에 배치되어 있던 지방군과 중앙에서 파견된 정부군을 각지에서 깨고 5월 말에는 도도 전주를 점령하기까지 이르렀다.
이에 놀란 민씨 정권은 5월 30일 청국에 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은 6월 2일 조선 출병을 결정하고 같은 달 4일 청국에 즉각 철병을 요구했으나 거부된다 [ 2 ] . 천진조약 에 따라 닛신 서로 조선출병을 통고. 일본은 6월 6일 출병을 발동해 청국군 의 조선철병을 다시 요구, 다음 7일 청주한국공사가 청국의 속령보호를 위한 파병이라고 그 정당성을 주장하며 8일 에 청국군이 조선 아산 에 상륙, 12일 일본군 이 재류방인 보호를 명목으로 인천 에 상륙, 7월 16일에는 한성 근교에 포진하여 청국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2 ] . 조선의 물고기 대장 대신 [ 12 ] 에 따르면 "조선 노인 하, 소라 몹시 가기타, 이토 학당 하일시 기타가 하야 야치타, 몇 토모나이, 토언 이촉 라시테 지나병 모하야 쿠반 에사나케 레바나라누. 일본병 모반 에사나케 레바나라누" 했습니다. 이에 대해 초토사의 홍계훈은 전금준은 폐정개혁 조목을 받고 농민군을 해산시켰다는 전주화약 을 맺지만 그에 따라 개혁시킨 형적은 없고 전금준은 속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 13 ] [ 14 ] . 전주 화약에 의해 개혁되었다고 하는 1차 사료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민씨 정권이 농민의 제안을 바탕으로 전주 화약을 작성하고 체결했다고 하며, 화약 으로 기존 지방정부가 부활, 동시에 농민 측의 주역인 ‘ 집강소 ’가 설치되어 전라도에 농민.
닛신 전쟁

반란이 수렴하고 조선은 닛신 양군의 철병을 신청했지만 양국은 받아들이지 않고 대치를 계속했다. 일본은 청에 대해 조선의 독립원조와 내정개혁을 공동으로 행하는 것을 제안하고 영국도 조정안을 청에 내놓지만, 청은 「일본의 철병이 조건」으로서 거부 [ 16 ] [ 17 ] .
일본은 조선에 대해 ‘조선의 자주독립을 침해’하는 청군의 철수와 청·조간 조약폐기(종주·번속관계 해소)에 대해 3일 이내에 응답하도록 신청했다. 이 신청에는 조선이 청군을 물리칠 수 없다면 일본이 대신하여 구축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 18 ] . 이에 조선정부는 “개혁은 자주적으로 한다” “난이 다스렸기 때문에 닛신 양군의 철병을 요청”이라고 응답했다.
7월 23일 오전 2시, 일본군 혼성 제9여단(보병 4개 대대 등)이 교외의 주둔지 용산 에서 한성 (현재 서울 )로 향해, 그 중 1개 연대가 한성에 들어가 오전 4시 반 무렵에는 국왕 고종이 거주하고 정부가 놓여진 왕궁을 포위, 이윽고 문을 파괴하고 침입을 개시, 경비의 조선병과 몇 시간의 총격전 끝, 왕궁을 점령, 국왕을 잡았다 19 ] . 일본군은 대원군을 옹호하고 입둔하고, 국왕 고종 에 다가가 대조공사 입회하에 국정과 개혁을 대원군에게 위임하고 그 모두를 대조공사와 협의할 것을 약속시켰다 [ 19 ] . 그리고 신정권은 조선정부를 대신하여 아산 의 청군을 철수하도록 일본에 요청하게 됐다. 25일, 토시마 오키해전 , 29일에 성환의 싸움이 행해져 교전 상태가 된다. 31일 청국정부가 주북경 일본공사 고무라 슈타 로에게 국교단절을 통고 [ 2 ] , 8월 1일 닛신 양국이 선전포고를 하고 닛신전쟁 이 발발했다.
제2차 봉기
전호준 (전호준, 정봉준)은 닛신 양국이 군을 파견해 곧 7월에는 이미 제2차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전금준공초 [ 20 ] 에 따르면 전금준이 병이었던 것, 많은 백성을 일시적으로 움직일 수 없었던 것, 신곡이 미수확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봉기가 10월이 되었다고 한다. 그 밖에, 평화적인 해결을 바라는 동학의 상층부의 설득에 시간이 걸렸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출전 불명. 이 시기에는 일본은 이씨 조선의 민씨 정권하의 신정부와 우호관계가 되어 있어 일청전쟁은 이미 일본 승리라는 대세를 결코 하고 있었다. 이씨 조선정부의 의뢰를 받아 여기부터 처음으로 일본 측은 동학세력으로 눈을 돌렸다. 농민군도 이 이전의 상대는 주로 조선관군, 수성군, 민보군(양반의 사족)이었다 [ 3 ] . 1894년 11 월 말 충청도 공주 의 우금치(우금치, 우금치)에서 농민군은 일본군·조선군과 첫 충돌하지만 근대적인 훈련을 받은 일본군에 전금준 등은 굳이 패배한다. 일본군·조선관군의 압도적 승리로 끝난 이 전투를 우금봉의 싸움 [ 21 ] 이라고 한다. 우금봉으로 일본에 패배한 농민군 등은 전라도로 도망쳤다. 전금준과 동지들은 준창으로 재기의 기회를 보고 있었지만, 1895 년 초에 잡혀 한성에서 처형되었다. 덧붙여 이 난진압에서, 카와카미 조 육 참모 본부 차장은 “동학당에 대한 처치는 엄격하게 되는, 향후 깨달은 살육 미소” 라는 전문을 조선 병준선의 일본군 사령부에 보내, 일본군은 3만명 모두 5 만명 이라고 하는 농민 2 설 .
한 대대장은 “많게 죽이는 책” “찾아내 죽이기” 작전을 전개했다고 강화해, 일본군이 있는 종군 일지에는, 부상의 생포 십명을 “귀사 후, 생 포착은, 고문 질문 위, 소살 세리, 붙잡은 7명을 「성외의 밭 안에 일렬로 늘어놓고, 총에 검을 착용(약) 군조의 호령에서 일제의 동작, 이것을 찔러 죽일 수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24 ] .
동학정정토략기 [ 25 ] 에 따르면 동학당에는 신봉자, 협박되어 일시적으로 참가하고 있는 자, 위동학당의 3종류가 있으며, 위동학당이 늘어난다는 조사보고가 있다. 위동학당의 대부분은 사금광부로, 논밭, 도로, 교량 등, 곳곳에 구멍을 뚫고 거칠어지기 때문에 농민의 손해가 나왔기 때문에 금지되었기 때문에, 동학당을 칭해 가시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동학 정정 토론 [ 26 ] 에 의하면, 「통담관 ヲ시테문 하심레하 모두 曰ク東匪ノ爲メ家ハ燒カレ財貨ハ奪ハレ兒女ハ殺サレ妻녹아 이렇게 말했다. “동학당에 의해 집은 구워지고, 재산은 빼앗겨, 아이나 딸은 죽이고, 아내는 꺼내져 생사도 모른다.
대원군 은 대립하는 민씨 정권에 의해 투옥된 동학의 간부 2명을 석방 하고, 1명을 내무 衙門 주사로 1명을 의정부 주사로 채용하고, 충청도에 있는 명사 호족 에게 밀사를 보내 동학의 선동을 명했다. 또 밀사는 충청도의 동학간부 미준, 서장옥에 전라도의 동학간부 전금준, 송희옥을 각각 만나 동도 소집을 촉구했고 경상도 에서는 직접 동도의 규합을 호소했다. 호소에 의해 10, 11월에 잇따라 봉기한다. 그리고 대원군은 동학에는 수십만으로 대거하여 한성에 오라고 명령하고 평양의 청군과 함께 남북에서 끼워 쏘아 일본인을 구축하는 책을 실행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사실이 일본의 평양공략 에 의해 얻은 다수의 서류로부터 발견되었다(동학당 사건 니부회 심노 참말구보 메이지 28년 9월 20일의 별지 제2호). 그 후도 대원군과 이부진 의 선동교사 의 편지를 발견하고 또 나중에 체포 된 부하들의 진술에 의해 발각되어 일본공사의 추궁에 의해 대원군 이이진이 인정해 사과했다 [ 27 ] [ 주2 ] . 이들은 어디까지나 일본측 자료이지만, 이처럼 제2차 봉기는 완전히 순수한 민중반란이 아니라 일본을 청나라와 동학의 힘으로 방어하지 않은 대원군의 의혹도 일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본래의 반란측과의 화약에서는 전라도에 있어서는 반란측의 요구를 용납했을 것이다 [ 15 ] . 그러나 이미 일본의 한성에 있어서의 공관 비용은 조선측 부담이 되어 일본이 조선에 요구하는 개혁을 위해서도 비용이 들고, 또, 일청 전쟁은 조선의 요청에 일본이 응했다는 건부이기 때문에 당분간의 일본군 비용은 일본이 부담한다고 해도 그 밖에도 다양한 비용을 일조 어느 쪽이 얼마나 부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겨, 조선측은 반란측에 대한 약정을 지키려고 하지 않고 있었다. 또 일본군보다 육안외상에 도착한 연락에서는 전라도에서 동학당을 위해 조선정부 측 조세 징수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것, 이로써 결국은 일본의 이익을 해치고 일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된다고 진정을 위해 추가 병사를 낼 것을 요청하고 있다 [ 28 ] . 민중반란은 일청전쟁의 전비조달을 위한 중세가 조선민중에게 새로운 부담으로 섰고 그 필연적 결과였을 가능성도 있다.
전후
1906년 전라남도 진도군 에서 처형된 무명의 반란 지도자로 보이는 유골이 한국통감부기사 인 사토 마사지로에 의해 모교의 삿포로 농학교 에 반출되었다 [ 29 ] . '한국동학당의 두령'으로 기록된 두개골은 오랫동안 홋카이도대학 후루카와 기념강당 에서 골판지 상자에 방치되어 1995년에 발견됐다.
한승헌 변호사들의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가 반환운동을 전개하고, 1996년 5월 31일 한국으로 돌아와 전주역사박물관 에 수장됐다 [ 30 ] . 2019년 시점에서는 동학혁명기념 녹두관 부지 내에 매장할 계획이 세워지고 있다 [ 31 ] .
세계의 기억
각주
주석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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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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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근현대사 3 닛신·일러전쟁』 이와나미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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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愼蒼宇『조선 식민지 전쟁 갑오농민 전쟁부터 관동 대지진까지』유시사, 2024년.
관련 항목
- 이씨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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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케 창가 - 동학당의 난으로 노래
- 녹두꽃 - 이 투쟁을 기반으로 한 2019년 TV 드라마.
东学党起义
| 东学党起义 | ||||||||
|---|---|---|---|---|---|---|---|---|
| ||||||||
| 参战方 | ||||||||
| 指挥官与领导者 | ||||||||
| 兵力 | ||||||||
| 朝鮮軍:3,000人至50,000人 | 南接叛軍:15,000人至300,000人 北接叛軍:10,000人至300,000人 | 500人至3,000人 | ||||||
| 伤亡与损失 | ||||||||
| 6,000人陣亡 | 數萬人陣亡 | 200人陣亡 | ||||||
东学党起义,朝鲜称甲午农民战争(朝鮮語:갑오 농민 전쟁/甲午農民戰爭,羅馬化:Gabo Nongmin Jeonjaeng),韩国称东学农民革命(韓語: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东学革命(韓語:동학 혁명/東學革命,羅馬化:Donghak Hyeongmyeong)或东学农民运动(韓語:동학 농민 운동/東學農民運動,羅馬化:Donghak Nongmin Undong),是19世纪下半叶朝鲜东学党領導的一次反对两班贵族和日本等外国势力的農民武装起义运动,亦是中日甲午战争的導火線。
东学党起义以惩治贪官污吏、「斥倭斥洋」为目的,主要分为两个階段。第一次起义主要是反封建统治的斗争:1894年1月10日,东学党「南接派」代表人物全琫准在全罗道古阜率领当地农民起义。起义军攻克古阜后,大败朝鲜朝廷派来镇压的官兵,起义队伍不断扩大,很快控制朝鲜南方三道,并最终攻下全罗道首府全州。此后,农民起义在朝鲜全国范围内形成规模勢力。朝鲜官方一方面向清朝政府请求援兵,一方面与农民起义军议和。双方最终签署《全州和约》,各自停火撤军,并设立「执纲所」改革弊政。
第二次起义主要是反侵略的斗争:清軍援兵到达朝鲜后,蓄谋已久的日本借机以保护使馆和侨民安全为由向朝鲜增兵,最终导致中日甲午战争的爆发。为抵御日本侵略,全琫准带领农民军北上再次起义。由于武器装备落后,缺乏正规军事训练,农民起义军在忠清道公州的战役中失利,此后一蹶不振;全琫准后因叛徒出卖被捕,后被日本人和亲日政府处死。
背景
朝鲜开港后,原本闭关锁国的朝鲜遭到日本和欧美列强的侵略。清政府为维护自己在朝鲜的宗主国利益,也频繁干涉朝鲜内政、外交,先后派兵镇压朝鲜国内的壬午兵变、甲申政变。各国列强,尤其是日本在朝鲜大量搜刮财富,谋取经济利益。腐朽的朝鲜封建统治阶级面对内忧外患,依然横征暴敛,导致民不聊生,农民起义此起彼伏。[1]:479-483[2]:373-408
与此同时,以天主教为代表的西方文化(“西学”)冲击着朝鲜传统社会。1860年,庆州人崔济愚经数年修道感悟,开创与西学相抗衡的“东学”。崔济愚认为:“儒教拘于名节,未达玄妙;佛教入于寂灭,而绝伦常;道教悠悠自然,缺乏治平”,“古道衰弱,西教乘虚而入,因而国运危险。……西教是亡国家、灭百姓的邪教”。他声称:“天主突然降临他的草堂,授以不死仙药和咒文,命他代天主布教济民”。[3][4]
带有反洋教、反侵略性质的东学倡导人人生来平等的思想,信徒众多,势力不断扩大,引起朝鲜封建统治者的担忧。由于东学也信奉天主,东学和天主教都被朝鲜朝廷视为邪教,遭到镇压。1864年4月15日,崔济愚被庆尚道观察使徐宪淳以左道惑民之罪处死[3][4]。东学第二任教主崔时亨曾数次发起为教祖申冤、给东道教平反的请愿与起义,但无果而终。不过在控诉申冤运动中,以“讨倭斥夷”为旗帜的东学党开始形成[3]。1893年东学教解散后,朝鲜朝廷对东学教徒的镇压有增无减,最终导致东学党起义的爆发[4]。
经过
第一次起义:反封建斗争
古阜农民起义

1892年,贪官赵秉甲就任全罗道大米集散地古阜的郡守。赵秉甲对农民横征暴敛,同时将市场上低价买到的劣质大米上缴国库,从中牟取暴利。1893年12月,40多名愤愤不平的古阜农民前往衙门理论,被赵秉甲当作乱民打入牢中严刑拷打。次年1月,东学党古阜领袖全琫准的父亲全彰赫带领60多名农民前往郡衙要求赵秉甲改除弊政,再次被其关入大牢。年迈的全彰赫在狱中被打死。[5]:10-11[2]:408-409[4]
1894年1月10日(农历2月15日),全琫准带领古阜和泰安两郡数千农民起义。手持镰刀、铁锹、木棍的农民很快攻陷古阜郡衙,占领武器库。赵秉甲仓皇逃走。起义农民烧毁地契、卖身契,释放牢中无辜百姓,开仓放粮,并联系附近东学党接主一起“辅囯安民”。全罗监司指派更为凶恶的长兴府使李容泰率800名官兵赴古阜镇压起义。3月29日,全琫准率起义军攻克泰仁郡,后又很快攻下军事要地白山。起义农民以白山为基地,对现有和前来投奔的人员进行整编,形成13000人的起义军。整编后的起义军提出了“不杀人,不伤物;忠孝双全,济世安民;逐灭倭夷,澄清圣道,驱兵入京,尽灭权贵。”的行动纲领,打出“逐灭倭夷,尽灭权贵”的口号。[5]:12-14[1]:485-487[2]:410
古阜起义震惊朝鲜全国,朝鲜朝廷派两湖招讨使洪启薰率千余人装备美国新式武器的京城官兵从仁川经海路至群山浦,前往古阜镇压。与此同时,朝鲜朝廷又派全罗道观察使金文铉率由营兵和褓负商组成的千余人讨伐队,前去讨伐。4月6日,起义军在古阜郡黄土岘战役中声东击西大胜金文铉。讨伐队几乎全军覆没。金文铉带领少数残兵败将退至全州。4月7日,到达全州的洪启薰得知金文铉的惨败后,惧于起义军的声势,龟缩在城内向朝廷请求援兵,士兵逃跑甚多。[5]:15- 17[1]:485-487[2]:411-412
4月9日,起义军先后攻下兴德和高敞,次日又攻克茂长。在茂长,起义军发布文告,前来投奔起义军的人越来越多,“队伍长达三里”。4月18日,龟缩在全州的洪启薰得知朝廷援兵将至后,出城南下追杀全琫准,4月21日追至灵光。4月23日,全琫准率兵回师北上,大败洪启薰并缴获大量先进的武器弹药和三门大炮。起义军乘胜追击,先后攻克灵光、咸平、务安,很快控制南方三道。[5]:17- 20[1]:487-488[2]:412
全州和约
大败洪启薰之后,全琫准率兵向全罗道首府全州挺进,4月28日到达全州。洪启薰紧随其后。全琫准决定在洪启薰到达全州前立刻发动攻势。午时,起义军从城门发起猛烈攻击,城内百姓纷纷响应。全州判官闵泳升仓皇逃走,守城官兵四处逃窜。全州城很快就被全琫准的起义军攻克,城头飘扬起“辅囯安民”、“除暴安良”的旗帜。洪启薰率1500名京师赶到全州后,在全州城南的完山俯城炮轰起义军。但起义军固守城池,英勇抵抗,洪启薰无法攻克全州城。[5]:20- 22[1]:488[2]:412-414
全罗道首府全州是朝鲜太祖李成桂(全州李氏)的祖籍地。起义军攻克全州在朝鲜全境产生影响强烈。忠清道、庆尚道、京畿道、江原道、黄海道和南方各道纷纷爆发农民起义,形成星火燎原之势。全琫准原本联合忠清道起义农民北上直取汉城。但北上的计划遭到东学第二任道主崔时亨和其它领袖的坚决反对:“借道酿乱不义也。湖南全琫准和湖西徐璋玉皆为国家之罪人、师门之逆贼。吾辈当聚力而攻之。”为阻止起义军北上,惊恐的朝鲜封建统治者一方面向清政府告急,请求援兵,另一方面让洪启薰和新任全罗监司金鹤镇与起义军议和。他们称起义军与官兵交战必将使全州古城遗迹遭到毁灭性的破坏,而且会使外国势力趁乱入侵朝鲜。他们提议双方都撤出全州,并同意起义军提出的任何要求。由于起义军伤亡严重而且正值农忙时节,很多农民义军无心应战,全琫准最终同意与朝廷和解。双方在6月10日签署《全州和约》,停战、撤军。根据《和约》,朝廷同意起义军以下12条要求: [5]:25- 28[1]:488-489[2]:414-416
- 消除政府与教徒之间的宿怨,共同协力庶政
- 清查贪官污吏的罪行,从严惩处
- 严惩横暴富豪
- 严惩不良的儒林两班
- 烧毁奴婢文书
- 改善七种贱民待遇,不得强制白丁戴平壤笠
- 准许年轻寡妇改嫁
- 废除一切苛捐杂税
- 打破门阀任用官吏
- 严惩私通日本者
- 废止既往一切公私债务
- 平分土地
此外,双方还同意设置执行协议的执纲所。《全州和约》签署后,起义军撤出全州,退往顺昌、南原一带。全琫准等农民起义领袖的工作开始转向执纲所的建立。执纲所由一名执纲和书记、省察、执事等议事员组成。各级官吏必须协助执纲所改革弊政。全罗道有53个郡建立起了执纲所。首府全州还建立起更高一级的大都所。不过由于官吏的阻挠,起义农民的要求没能得到很好的落实。[5]:28- 29[1]:489[2]:418-420
第二次起义:反侵略斗争
中日战争的爆发

1894年6月8至10日,应朝鲜的请求,清政府派出的援兵进驻汉城南部的牙山。此时,朝鲜政府已与农民起义军和解。为避免与日军冲突,清军并没有入汉城,军舰也没有入仁川港。日本在得知朝鲜向清政府求援后就开始以保护使馆和侨民为借口向朝鲜增兵。6月13日,朝鲜政府致信袁世凯,要求清兵撤离以避免日本军事入侵。清政府旋即同意了朝鲜的撤兵请求,并向日本提出双方同时撤军。日本则提出“日中共同改革朝鲜内政”,遭到清政府的拒绝。[5]:30[1]:490[2]:420-421
此后,日本改为单方面向朝鲜施压,要求朝鲜“改革内政”,否则动用武力。7月20日,日本向朝鲜发出3天内废除与清政府一切条约的最后通牒。在3日期限到达的7月23日凌晨,日军攻占了朝鲜王宫,推翻闵妃集团,逼迫高宗将国家大权转交给兴宣大院君,并成立了以金弘集为首的亲日内阁。日本旋即唆使金弘集政府废除与清政府的一切条约,并委托日本驱出清军。[5]:31[1]:490-491[2]:421
1894年7月25日,日本对清不宣而战,炮轰停泊在朝鲜牙山湾豐島的清朝军舰,史称“丰岛海战”,从而挑起中日甲午战争,清军在战争中节节败退。9月初,日军将清军逐出朝鲜,战场由朝鲜半岛转移到中国。[5]:31[1]:491[2]:422
公州决战
清军被逐出朝鲜半岛后,金弘集亲日政府和日军开始将矛头转向农民起义军。1894年9月,全琫准在全罗道参礼邑与各地东学教接主商讨第二次起义。但以忠清道崔时亨为代表的北接派仍然反对全罗道南接派北上。但随着金弘集亲日政府和日军对东学教徒迫害的加剧,北接派最终也加入南接派北上讨伐日寇的队伍。10月15日,全琫准率各地汇集而来的起义军攻克忠清道南部的谷物集散地论山。次日,起义军发布檄文,怒斥日本侵略和亲日派卖国行为,号召全国人民与起义军一起“驱兵入京,尽灭权贵,澄清圣道,济世安民”。[5]:32-34[1]:491-492[2]:422-423
10月23日,起义军到达敬川,直逼忠清道首府公州。25日,起义军兵分三路发起攻势,因缺乏攻城大炮,久攻不克。由于伤亡甚多,起义军回退至论山。11月8日,起义军兵分两路再次发起进攻。但由于武器装备落后,缺乏正规军事训练,起义军再次败退至论山。日军乘胜追到论山。起义军与日军和朝鲜政府军血战11天后,论山失守。[5]:34-36[1]:491-492[2]:423-424
结局

论山失守后,全琫准的起义军继续南退。期间,曾数次与日军周旋但都没能挽回局面。在全罗道顺昌郡,全琫准将部队分散成几个小分队躲避,以期日后东山再起。此后,全罗道、忠清道、庆尚道等都被日军和亲日政府控制。参加起义的农民遭到当局血腥报复,连家属也不放过,约三、四十万人被屠杀。当局悬赏一千两白银捉拿全琫准。全琫准原本想在淳昌郡金敬天家中躲避。不料金敬天当时已经变节,将全琫准交给了朝廷,后被押往汉城。1895年4月23日(农历3月29日),全琫准被日本当局和朝鲜亲日政府处死。[5]:36-39
纪念
纪念物
- 韩国全罗北道井邑市建有东学农民革命纪念馆。[6]
- 韩国全罗北道高敞郡和忠清北道报恩郡建有东学农民革命纪念公园。[7]
- 1981年11月28日,位于韩国全罗北道井邑市梨平面的全琫准古宅遗址被指定为韩国历史遗迹第293号。[7]
- 韩国全罗南道灵光郡黄土岘建有纪念黄土岘战役的黄土岘纪念馆。[7]
- 韩国全罗北道全州韩屋村建有东学农民革命纪念馆
- 韩国全罗北道全州市多佳公园 建有东学农民军全州入城碑。[7]

邮票
- 1964年,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发行了甲午农民战争爆发七十周年纪念邮票。[9]
- 1994年,朝鲜民主主义人民共和国发行了甲午农民战争爆发一百周年纪念邮票。[9]
影视作品
参考资料
- 朱庭光. 《外国历史大事集*近代部分*第三分册》. 北京: 中国社会科学出版社. 2017年3月. ISBN 978-7-5161-9653-3.
- 朴真奭; 姜孟山; 朴文一; 金光洙; 高敬洙. 《朝鲜简史》. 延吉: 延边大学出版社. 1997年. ISBN 7-5634-0990-4.
- 邵雍. 朝鲜东学党反洋教原因初探. 《韩国研究论丛》. 1999年.
- 戚其章. 朝鲜东学道和东学党起义. 《历史教学》 03期. 1989年.
- 陈显泗; 杨昭全. 《朝鲜近代农民革命领袖全琫準》. 北京: 商务印书馆. 1985年.
- 東學農民革命紀念館. 韩国观光公社. [2020-04-11]. (原始内容存档于2021-08-04).
- 한국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 (PDF). 동학농민혁명. [2020-04-11]. (原始内容存档 (PDF)于2020-11-04).
- 杨雨蕾. 《韩国的历史与文化》. 广州: 中山大学出版社. 2011年6月. ISBN 978-7-306-03899-9.
- 张亚. 朝鲜发行过《甲午农民战争》纪念邮票. 《上海集邮》. 1997年.
参见
| 동학농민혁명 | ||||||||
|---|---|---|---|---|---|---|---|---|
| ||||||||
| 참여 당사자 | ||||||||
| 지휘관과 지도자들 | ||||||||
| 군대 | ||||||||
| 북한군: 3,000명~50,000명 | 반군과 접한 남부 국경 지역: 15,000명~300,000명; 반군과 접한 북부 국경 지역: 10,000명~300,000명. | 500명에서 3,000명 | ||||||
| 사상자 및 손실 | ||||||||
| 6,000명 사망 | 수만 명이 사망했습니다. | 200명 사망 | ||||||
북한에서는 갑오 농민 전쟁 /甲午蒲民战爭( 로마자 : Gabo Nongmin Jeonjaeng ) 으로 알려진 동학 농민봉기 , 남한에서는 동학농민혁명 (东school蒲民革命), 동학혁명 ( 동학 혁명 ) 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东school革命, 로마자 표기: Donghak Hyoungmyeong ), 또는 동학농민운동 ( 동학농민운동 /东school蒲min运动, 로마자 표기: Donghak Nongmin Undong). 동학농민혁명(1894~1895)은 19세기 후반 한국의 동학당이 주도하여 양반 귀족과 일본 등 외세에 맞서 일어난 농민 봉기 이다 . 이는 또한 중일 전쟁 의 도화선이 되기도 했습니다 .
부패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 일본과 외세에 대한 배격"을 목표로 한 동학농민혁명은 크게 두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봉건적 지배에 대한 저항이었다. 1894년 1월 10일, 동학농민혁명 남파 의 대표 인물인 전봉준이 전라남도 구부 에서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 . 구부를 함락한 반군은 진압을 위해 파견된 조선 정부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다. 반군은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 남부 3개 도를 빠르게 장악하고 마침내 전라남도의 수도인 전주까지 함락시켰다 . 이후 농민 봉기는 전국적인 대규모 운동으로 발전했다.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동시에 반군과 평화 협상을 벌였다. 양측은 결국 전주조약을 체결하여 휴전과 철수를 합의하고 부패 척결을 위한 "집행관"을 설치하기로 했다.
두 번째 항쟁은 주로 침략에 대한 저항이었다. 청나라의 증원군이 조선에 도착하자, 오랫동안 조선에 대한 야욕을 품어왔던 일본은 이를 틈타 자국 대사관과 자국민 보호를 구실로 조선 주둔 병력을 증강했고, 이는 결국 청일 전쟁 발발로 이어졌다 . 일본의 침략에 맞서 전봉준은 농민군을 이끌고 다시 한번 북진하여 항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낡은 무기와 제대로 된 군사 훈련의 부족으로 충청도 공주 전투에서 패배한 후 , 농민군 은 이후 회복하지 못했다. 전봉준은 결국 배신자로 체포되어 일본과 친일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배경
항구 개항 이후 , 원래 세계와 단절되어 있던 한국은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청나라는 한국에 대한 주권국으로서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한국의 내정과 외정에 빈번히 간섭했고, 잇모사(冬葉友) 와 갑신란(若神宗)을 진압하기 위해 잇달아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 외세, 특히 일본은 한국의 막대한 부를 약탈하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내외적인 혼란에 직면한 부패한 한국의 봉건 지배층은 계속해서 과중한 세금을 부과했고, 이는 백성들의 고통과 농민 봉기로 이어졌습니다. [ 1 ] : 479-483 [ 2 ] : 373-408
동시에 가톨릭교 (“ 서양학 ”) 로 대표되는 서양 문화는 한국의 전통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1860년 경주 출신 의 최제우는 오랜 수행 끝에 서양학에 대항하여 “ 동양학 ”을 창시했다 . 최제우는 “유교는 명예에 얽매여 심오한 경지에 이르지 못했고, 불교는 허무주의에 빠져 도덕을 버렸으며, 도교는 한가롭고 자연적이지만 통치와 평화가 부족하다”고 믿었다. “옛 도가 쇠퇴하고 서양학이 이를 틈타 득세하고 있으니 나라의 운명이 위태롭다. … 서양학은 나라와 백성을 파멸시킬 이단이다.” 그는 “갑자기 신이 그의 초가집에 내려와 불로장생약과 주문을 주시며 신을 대신하여 이 종교를 전파하고 백성을 도우라고 명하셨다”고 주장했다. [ 3 ] [ 4 ]
반외세, 반침략주의 성향의 동학 은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사상을 주창했다. 동학은 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면서 조선의 봉건 영주들의 우려를 샀다. 동학은 가톨릭 신앙 도 믿었기에, 조정에서는 동학이나 가톨릭을 이단으로 간주하여 탄압했다. 1864년 4월 15일, 최제우는 경상도 서헌순에 의해 이단 교리를 전파했다는 죄목으로 처형 되었다 . [ 3 ] [ 4 ] 동학의 2대 주역인 최시형은 창시자의 석방과 동학의 명예 회복을 위해 여러 차례 청원과 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 추구 운동 속에서 “일본을 응징하고 오랑캐를 몰아내자”를 기치로 내건 동학당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 [ 3 ] 1893년 동학이 해체된 후 조선 조정의 동학 신도 탄압이 심화되어 결국 동학당의 반란이 일어났다 . [ 4 ]
통과하다
제1차 봉기: 반봉건 투쟁
고대 푸 농민 봉기

1892년, 부패한 관리 조병가가 전라 성의 쌀 유통 중심지 인 구푸 의 현으로 부임했습니다 . 조병가는 농민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는 한편, 시장에서 싸게 사들인 질 낮은 쌀을 국고에 넘겨 막대한 이익을 챙겼습니다. 이에 분노한 구푸 농민 40여 명이 관청을 찾아 항의했으나, 조병가는 이들을 폭도로 몰아 투옥하고 가혹한 고문을 가했습니다. 이듬해 1월, 구푸 동학당의 지도자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은 농민 60여 명을 이끌고 조병가의 부패한 행태를 바로잡기 위해 관청을 찾았으나, 이들 역시 조병가에게 투옥되었습니다. 노인이 된 전창혁은 투옥된 후 매를 맞아 숨졌습니다. [ 5 ] : 10-11 [ 2 ] : 408-409 [ 4 ]
1894년 1월 10일(음력 2월 15일), 전봉준은 구부현과 태안현에서 수천 명의 농민을 이끌고 봉기를 일으켰다. 낫 , 삽 , 곤봉으로 무장한 농민들은 순식간에 구부현청을 점령하고 무기고를 탈취했다. 조병갑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다. 농민 반란군은 토지 등기 서류와 계약서를 불태우고, 무고한 사람들을 감옥에서 풀어주고, 곡식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눠주었으며, 인근 동학당 지도부에 연락하여 "나라를 돕고 백성을 진압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전라성은 더욱 강경한 장흥현 등신 이용태 와 800명의 병력을 구부 봉기 진압에 투입했다. 3월 29일, 전봉준은 반란군을 이끌고 태안군을 함락시킨 후, 전략적 요충지인 백산까지 빠르게 점령했다. 백산을 거점으로 삼아 농민 반란군은 기존 병력과 새로 합류한 병력을 재편성하여 13,000명의 반란군을 형성했다. 재편성된 반란군은 "살인하지 않고 재산을 해치지 않으며, 충효를 다하고 세상을 돕고 백성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며,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도를 바로잡고 수도를 점령하고 권력과 귀족을 섬멸한다"는 행동 강령을 내세우고 "일본 오랑캐를 몰아내고 권력과 귀족을 섬멸한다"는 구호를 외쳤다. [ 5 ] : 12-14 [ 1 ] : 485-487 [ 2 ] : 410
구푸의 난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조정은 양호평화부장 홍기훈 을 시켜 신형미국로 무장한 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인천에서군산포까지 해로로 구푸의 난을 진압하도록 했다. 동시에 전라도도천여 명의 병사와 짐꾼으로 구성된 진압군을 파견하여 난을 진압하도록 했다. 4월 6일, 난군은황토현 에서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김문현 의 진압군 을 크게 격파했다. 진압군은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김문현은 소수의 패주병을 이끌고 전주로 후퇴했다. 4월 7일, 전주에 도착한 홍기훈은 김문현의 참패 소식을 접하고, 난군의 기세를 두려워하여 성 안으로 후퇴해 조정에 증원을 요청했다. 그 사이많은병사들이 탈영했다. [ 5 ] : 15-17 [ 1 ] : 485-487 [ 2 ] : 411-412
4월 9일, 반란군은 연이어 싱더 와 가오창을 점령했고 , 다음 날에는 마오창을 점령했다. 마오창에서 반란군은 포고령을 발표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반란군에 합류하여 "전열이 3리(약 4.8km)에 달했다"고 한다. 4월 18일, 취안저우 에 숨어 있던 홍치쉰은 황군이 도시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취안 봉준을 추격하여 죽이려 했다. 4월 21일, 그는 취안봉준을 링광 까지 추격했다 . 4월 23일, 취안봉준은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돌아와 홍치쉰을 격파하고 많은 고급 무기와 탄약, 그리고 대포 세 문을 노획했다. 반란군은 이 승리를 발판 삼아 링광, 선평 , 무안을 차례로 점령하고 남부 3개 성을 빠르게 장악했다. [ 5 ] : 17-20 [ 1 ] : 487-488 [ 2 ] : 412
전주 평화 조약
전봉준은 홍기순을 격파한 후 전라 성의 수도인 전주 로 진군하여 4월 28일 전주에 도착했습니다. 홍기순도 그 뒤를 따랐습니다. 전봉준은 홍기순이 전주에 도착하기 직전에 공세를 시작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정오에 반군이 성문을 통해 맹렬한 공격을 가하자 성 안의 백성들이 속속 반격했습니다. 전주 사신 민영성은 공포에 질려 도망쳤고, 수비하던 장수와 병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전봉준의 반군은 순식간에 전주를 함락시키고 성벽에 "나라를 돕고 백성을 평정한다"와 "폭력을 없애고 선을 수호한다"라는 깃발을 올렸습니다. 이후 홍기순은 수도에서 1,5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주로 진군하여 전주 남쪽 완산에서 반군을 포격했습니다. 그러나 반란군은 도시를 굳건히 지키며 용감하게 저항했고, 홍치쉰은 전주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 5 ] : 20-22 [ 1 ] : 488 [ 2 ] : 412-414
전라남도의 수도였던 전주는 전주 이씨 의 태조 이성계의 본거지였다 . 반군이 전주를 함락시키자 조선 전역에 큰 파장이 일었다. 충청도 , 경상도 , 경기도 , 강원도 , 황해도 등 남부 여러 지방에서 농민 봉기가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전봉준은 원래 충청도 농민 반군과 연합하여 북진해 서울을 직접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동학의 제2대 주역 최시형을 비롯한 동학 지도자들은 전봉준 의 북진 계획에 강력히 반대하며 “이 길로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부당하다. 후난의 전봉준과 호서의 서장옥은 모두 반역자이며 스승을 배신한 자들이다. 우리는 연합하여 그들을 공격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반란군의 북진을 막기 위해 공포에 질린 조선의 봉건 영주들은 한편으로는 청나라 정부에 지원군을 요청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홍기훈과 새로 임명된 전라도 태수 김학진에게 반란군과 평화 협상을 하도록 명했다. 그들은 반란군과 정부군의 전투가 전주의 고대 유적에 심각한 피해를 입히고, 그 혼란을 틈타 외세가 조선을 침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양측이 전주에서 철수하고 반란군의 요구를 수용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반란군의 막대한 사상자와 농년이라는 시기적절하지 못한 상황으로 인해 많은 농민 반란군이 전투에 참여하기를 꺼렸고, 결국 전봉준은 조정과 화해하기로 결정했다. 양측은 6월 10일 전주평화를 체결하고 휴전 및 철수했다. 조약에 따르면 법원은 반란군의 다음 12가지 요구에 동의했습니다. [ 5 ] : 25-28 [ 1 ] : 488-489 [ 2 ] : 414-416
- 정부와 신도들 사이의 오랜 갈등을 해소하고, 협력하여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 부패한 공무원들의 범죄를 조사하고 엄중히 처벌해야 합니다.
- 폭압적인 재벌들을 엄벌하라
- 반항적인 유학자들을 엄벌하라.
- 노예 관련 문서를 불태우다
- 최하위 7개 계층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고, 일반 시민의 평양 모자 강제 착용을 금지해야 합니다.
- 젊은 과부들의 재혼을 허용하는 것
- 모든 과도한 세금과 부과금을 폐지하라
- 권력 있는 가문들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공직자를 임명하십시오.
- 일본과 결탁한 자들은 엄벌에 처해야 한다.
- 이로써 기존의 모든 공공 및 민간 부채는 소멸됩니다.
- 땅을 나누세요
또한 양측은 합의 이행을 위한 집행부를 설치하기로 합의했다. 전주 평화 조약 체결 후 반란군은 전주 에서 철수 하여 순창과 남원 지역으로 후퇴했다. 전봉준과 같은 농민 봉기 지도자들의 활동은 집행부 설치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집행부는 비서, 서기관, 도감, 기타 참의원으로 구성되었다. 각급 관리들은 부패 척결을 위해 집행부를 지원해야 했다. 전라 53개 군에 집행부가 설치되었고 , 수도인 전주에도 상위 기관인 수도 집행부가 설치되었다. 그러나 관리들의 방해로 농민 봉기의 요구는 제대로 이행되지 못했다. [ 5 ] : 28-29 [ 1 ] : 489 [ 2 ] : 418-420
제2차 봉기: 침략에 맞서는 투쟁
중일 전쟁 발발

1894년 6월 8일부터 10일까지, 한국의 요청에 따라 청나라 는 서울 남쪽 아산 에 증원군을 파견했다 . 당시 한국 정부는 농민 봉기군과 화해한 상태였다. 일본군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는 서울에 입항하지 않았고, 군함도 인천항에 정박하지 않았다 . 한국 이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는 소식을 접한 일본은 대사관과 화교 보호를 구실로 한국에 주둔하는 병력을 증강하기 시작했다. 6월 13일, 한국 정부는 위안스카이 에게 일본의 침략을 피하기 위해 청나라 군대의 철수를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청나라는 즉시 한국의 철수 요청에 동의하고 일본에 양측 동시 철수를 제안했다. 일본은 "일본과 중국이 함께 한국의 내정을 개혁하자"는 제안을 했으나, 청나라는 이를 거부했다. [ 5 ] : 30 [ 1 ] : 490 [ 2 ] : 420-421
그 후 일본은 한국에 일방적인 압박을 가하며 "내정 개혁"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할 경우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위협했다. 7월 20일, 일본은 한국에 3일 이내에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라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3일 시한이 된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은 한국 왕궁을 점령하고 민왕후 를 축출했으며, 고종에게 흥선대원군 에게 국권을 이양하도록 강요하고 김홍집을 수장으로 하는 친일 내각을 수립했다 . 일본은 즉시 김홍집 정부를 선동하여 청나라와의 모든 조약을 파기하도록 했고, 청나라 군대를 축출하는 임무를 맡겼다. [ 5 ] : 31 [ 1 ] : 490-491 [ 2 ] : 421
1894년 7월 25일, 일본은 한국의 아산만 풍도 에 정박 중이던 청나라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포격했습니다 . 풍도 해전 으로 알려진 이 사건은 청일전쟁의 도화선 이 되었습니다 . 청나라는 전쟁 기간 동안 여러 차례 패배를 겪었습니다. 9월 초, 일본군은 청나라를 한국에서 몰아냈고, 전장은 한반도 에서 중국 으로 옮겨갔습니다 . [ 5 ] : 31 [ 1 ] : 491 [ 2 ] : 422
공주결전
청나라 군대가 한반도에서 축출된 후, 김홍집의 친일 정부 와 일본군은 농민 봉기에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1894년 9월, 전봉준은 전라남도 삼계 읍 에서 동학파 지도자들과 제2차 봉기를 논의했습니다 . 그러나 충청도 출신의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파는 여전히 남파 의 전라남도 북진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김홍집의 친일 정부와 일본군의 동학파 신도 박해가 심화되자, 북파도 결국 남파와 합류하여 북진에 나서 일본 침략군과 싸웠습니다. 10월 15일, 전봉준은 각지에서 모인 봉기군을 이끌고 충청도 남부의 곡식 유통 중심지인 논산을 함락시켰습니다 . 다음 날, 봉기군은 일본의 침략과 친일파의 반역 행위를 규탄하는 포고령을 발표하고, 전국민에게 봉기군에 합류하여 "군대를 수도로 몰아내고, 권력과 부를 소탕하고, 신성한 도를 정화하고, 세상을 구하고 백성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자"고 촉구했다. [ 5 ] : 32-34 [ 1 ] : 491-492 [ 2 ] : 422-423
10월 23일, 반군은 경천에 도달하여 충청도 의 수도인 공주를 향해 직접 진격했다 . 25일, 반군은 삼방에서 공세를 펼쳤으나, 공성포 부족으로 오랜 포위 공격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막대한 사상자를 낸 반군은 논산 으로 후퇴했다 . 11월 8일, 반군은 다시 양방에서 공세를 펼쳤으나, 노후한 무기와 장비, 그리고 정규 군사 훈련 부족으로 또다시 패배하여 논산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이 기회를 틈타 반군을 추격하여 논산까지 진격했다. 반군과 일본군, 그리고 조선 정부군 간의 11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논산이 함락되었다. [ 5 ] : 34-36 [ 1 ] : 491-492 [ 2 ] : 423-424
종결

룬산 함락 후 , 전봉준 의 반란군은 남쪽으로 계속 후퇴했다. 이 기간 동안 일본군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지만 전세를 역전시키지는 못했다. 전라남도 순창군에서 전봉준은 부대를 여러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은신하며 장차 다시 전라남도에 복귀할 계획을 세웠다. 이후 전라남도 , 충청도 , 경상도 등은 일본군과 친일 정부의 지배하에 놓였다. 반란에 참여했던 농민들은 당국의 잔혹한 보복에 직면했고, 그들의 가족까지도 예외는 아니었다. 약 30만~40만 명이 학살당했다. 당국은 전봉준을 체포하는 사람에게 은화 1,000냥의 현상금을 걸었다. 전봉준은 원래 순창군에 있는 김경천의 집에 숨어 지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 뜻밖에도 김경천은 이미 탈북하여 전봉준을 조정에 넘겼다. 이후 전봉준은 서울 로 이송되었다 . 1895년 4월 23일(음력 3월 29일), 전봉준은 일본 당국과 친일 조선 정부에 의해 처형되었다. [ 5 ] : 36-39
기념하다
기념품
-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정읍 에 위치해 있다. [ 6 ]
-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고창군 과 충청북도 보은군 에 건립되었습니다. [ 7 ]
- 1981년 11월 28일, 대한민국 전라북도 정읍 이평에 있는 전봉준의 옛집터가 한국 사적 제293 호로 지정되었다. [ 7 ]
- 황토현 전투를 기념하는 황토현 기념관은 대한민국 전라남도 황토현 군 에 건립되었습니다 . [ 7 ]
-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 한옥마을 에 위치해 있습니다.
- 동학농민군의 전주 입성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전주시 다가공원에 표시되어 있다 . [ 7 ]

- 박정희 전 대한민국 대통령의 비문이 새겨진 동학혁명군 기념탑은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에 있습니다. [ 7 ]
- 동학혁명백산기념비는 대한민국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에 있습니다. [ 7 ]
- 1898년 동학혁명 기념탑은 대한민국 전라북도 부안군에 있다. [ 8 ] : 171
우표
- 196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청일농민전쟁 발발 7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우표를 발행했습니다. [ 9 ]
- 1994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청일농민전쟁 발발 100주년을 기념하여 기념우표를 발행했습니다. [ 9 ]
영화 및 텔레비전 작품
참고 자료
- 주팅광. 《외국사 주요 사건 모음집》, 근세, 제3권. 베이징: 중국사회과학출판사. 2017년 3월. ISBN 978-7-5161-9653-3 .
- 박진석; 강몽산; 박문일; 김광수; 고경수. 한국의 간략한 역사. 연길: 연변대학출판부. 1997. ISBN 7-5634-0990-4 .
- 샤오용. 한국에서 동학당이 외국 종교에 반대하는 이유에 대한 예비 연구. 한국학 저널. 1999.
- 치치장. 한국의 동학도와 동학당의 봉기. *역사교육*, 3호, 1989.
- Chen Xiansi; Yang Zhaoquan. Jeon Bongjun, a leader of the modern Korean peasant revolution. Beijing: The Commercial Press. 1985.
- 동학 농민 혁명 기념관 . 한국관광공사. [ 2020-04-11 ] . 2021-08-04에 원본에서 보존됨 .
- 한국의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 (PDF) . 동학농민혁명. [ 2020-04-11 ] .2020-11-04에원본 콘텐츠 보관 (PDF)) .
- 양율리. 한국의 역사와 문화. 광저우: 쑨얏센대학교 출판부. 2011년 6월. ISBN 978-7-306-03899-9 .
- 장야. 북한은 '중일전쟁' 기념우표를 발행했다. 상하이 우표 수집가 협회.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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