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9

동학은 왜 봉기했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27회 - YouTube

동학은 왜 봉기했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27회 - YouTube

동학은 왜 봉기했나? [함재봉의 ‘한국인의 탄생’] 27회
법률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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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한국 사람은 무엇일까?"
그 질문을 시작으로 오랜 시간 '한국 사람'에 대해 연구해 온 『한국 사람 만들기』의 저자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장!

법률방송에서 함재봉 원장과 함께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을 통한 한국 사람의 정체성을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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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수운 최제우가 순교한 이후, 동학이 어떻게 살아남았고, 또 어떻게 해서 전국으로 퍼져나갈 수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경상도에서 충청, 강원을 거쳐 전라도까지 퍼진 동학은 또 어떻게 해서 봉기하게 되었을까요? 당시 조선 사회는 어떠했는지, 또 동학은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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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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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한국인의 탄생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함재봉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저희가
어 동학을 우리가 혁명이라고 해야 되는지 운동이라고 해야 되는지
난이라고 불러야 되는지 어 그 개념상의 차이가 뭔가 그리고 역사적인
연원이 뭔가 그런 개념들의 연원이 뭔가를 한번 살펴보면서 저는 어 동학
나는 난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특히 그 당시 사람들이 난을 어
이해를 하는 그 방식이 있었고 역사는 어디까지나 당시
사람들이의 사고방식 당시 사람들이 알았던 세계를 복원하는 것이 어 저는
역사의 목적이지 어 우리의 지금 현재 어떤 시각이나 관점이나 가치관을
투영하는 것은 그건 사실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어 그 동학이 어떻게 해서 창시자의 순교
이후에 그 확산이 되기 시작을 하고 그리고 결국은 어 우리가 알고 있는
난으로 어 번지게 됐는지 그 과정에 대해서 좀 면밀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의 탄생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네. 수훈 어 최재운은 1863년에 체포돼서
1864년 4월 10 5일 음력 3월 10일 대구 감명에서 처형이 됩니다.
어 1864년은 고종이 지한 해입니다. 그 사실 고종이 처리한 최초의 사건
중에 하나가 바로 어 수훈 어 최재후의 처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
그때만 하더라도 어 동학의 심각성을 조정해서 감지하지 못했던 거
같습니다. 물론이 100년교도 놔두면은 100년교 같이도 될 수도 있다. 그러고 이제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빨리 처형을 해야 된다. 이제 그러한 기록들이 남아 있지만은 그래도
대구에서 그냥 처형을 해 버렸다라는 것은 사실은 서울에다 압해서 그
처형하거나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은 어 뭐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안
봤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수훈을 처형을함으로써 그리고 박해를
본격적으로 시작함으로써 사실은 완전히 경주 중심에 경주 사람들 많이 알고
있고 수훈한하고 가까운 사람들만 알고 있었던 그러한 종교가 박해를 받으면서
어쩔 수 없이 이제 경주를 떠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그러면서 동학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는 경상도를 벗어나서
퍼지기 시작하는 그러한 계기가 어 마련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점차 동학하고 바로 이때에 들어와서
활약을 하고 있었던 전교를 하고 있었던 천주교가 이제 정부의 입장에서 봐서는 조정의 입장에 봐서 이제
헷갈리게 됩니다. 섞이게 되는 거고 둘 다 밀교다, 둘 다 사교다, 이제 뭐 사입이다
이래 갖고 이제 그 저 탄압을 하기 시작하는데 그런데
그 당시에 카톨릭의 기록들을 보면은 그러니까 숨어서 어
열심히 그 전교를 하고 있든 선교를 하고 있던 카톨릭 사제들의 당시
기록들을 보면은 조정이 동학을 탄압한다 그러면서
천주교 서학을 탄압을 하고 천주교를 탄압한다 그러면서 동학도 탄압을 하고
그러면서 거의 구분을 두지 않고 그게 탄압하는 그런 모습이 이제
드러납니다. 1864년 8월 18일 어 베르네
주교가 본국 저 빠리 외방 선교에다 쓴 편지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정말로 괴롭힘을 받은 지역은 몇 해 전부터 많은 개종자를 낸 아악권 주교 즉
W교의 어 지역 경상도입니다. 서학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천주교인들과
구별되기 위해 동학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5년 전부터이 지방에 생겨난
종파를 찾아내라고 풀어 놓은 포절들이 돈을 마련하고 그들의 복수심을
만족시킬이 기회를 이용해서 동시에 아주 많은 신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카톨릭 신자들도 체포했다는 얘기죠. 다른 많은 신자는 집과 전답을 버리고 도망쳐 이로 인해 극도의 곤궁에
빠졌습니다. 멀리 떨어진이 도에서 요새 소식은 받지 못했으므로 사태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를 모릅니다라고 베르네 주교가 지금 경상도에 어 전교를 맡고 있는 그
W교가 굉장히 힘들어하고 있다라는 이제 그 보고서를 바리 외송 선교에
이제 보냈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듯이 경주는
조선의 종교의 총 집삼지입니다. 원산지이기도 하고 집산지입니다.
그러니까 불교, 유교 뭐 모든 것이 그리고 이제 지금 동학까지도 어
경주를 중심으로 이제 나오기 시작을 하는데 그때 이제 천지교에서도 거기가
사실은 굉장히 전교가 잘되는 지역이라서 성공적으로 가서 전교를 하고 있었는데 동학을 탄압을 한다
그러면서 이제 천주교까지 그냥 괜히 도매권으로 넘어가서 이제 같이 박해를 받는다.
이제 그런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러고 나니까 이러면서 이제 어 수훈을 따르던 그
제자들이 완전히 이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이경화라는
사람은 수훈함과 함께 어 체포가 되었다가 강원도 영월로 유배가
됩니다. 근데 거기 가서 이제 강원도에서 포기를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원주 이런 데에서 어 그
동학이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하고 이제 나중에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이필제라는 사람도 이때이 경화가
강원도에서 그 개정을 시킵니다. 그리고 이제 동부 중부 여러 산악
산악지대로 그니까 경상도를 떠나서 이제 숨어들기 시작을 하고 또 영해에 있었던 이인원은이라는 사람은 수훈이
순교했다는 것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어 지리산으로 피신해 갖고 거기서 7년간 운돈하다가 1870년에 또
다시 나와서 다른 동학 교도들하고 같이 교회를 재건하는 작업을 합니다.
그러니까는 어쨌든 밖에를 피해서 숨어 있으면서 그리고 누구는 수훈과 함께 체포가 됐다가 또 유배가 되면서
이러면서 이제 전국적으로 오히려 동학이 퍼지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순이 순결을
하고 나서 처형된 다음에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1895년에
겨울에 어 지금 경상북도 울진인 평해 황주일이라는 사람의 집에서 은거하면서
그 하다가 1866년에 어 가족과 함께 울진 강원도 영월 울진 이쪽이 어 그
동학의 이제 중심지가 되어 가기 시작을 합니다. 이곳에서
이곳에서 해월이 해월 최시형이 어 강수라는 제자 이런
사람들한테 용담유사하고 동경 대전을 구수를 해서
필사본을 만들게 합니다. 그 이게 무슨 말씀이냐면은 어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수훈은 최재우 본인은 이런 거를 글른 자기가 얘기한 그 수많은 것들 실제
자기의 손으로 글로남긴 것이 없습니다. 옆에서 필기를 했던 사람도 없는 받아본 사람도 없었던 거고 다
구두 구슬로 구전으로 전결을 했었던 거고 모든 얘기를 그렇게 했었던 거죠. 제자들한테이 해월
최시형이라는 정말 천재적인 사람이죠. 스승의 모든 말을 그거를 자기가 다
기억을 해 가지고 그거를 지금 용담유사
동경대전이라는 동학의 가장 중요한 경전들은 전부
다 해월 최시형이 다른 제자한테 구슬한
겁니다. 자기가 수훈한테서 선생한테서 들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구설을 한
겁니다. 이것이 이제 소크라테스는 말로만 한 사람이지
소크라테스는 그을 한 자도 적은게 없는데 그걸 옆에서 제자 플라톤이
스승 소크라테스의 글들을 남기는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방대한 플라톤의
대저작들이죠. 거기에 보면 전부 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로 나오는 거죠. 뭐 국가론이고 뭐 전부 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 예수도 예수도 예루살렘이라는 조금 조그만 그니까
로마 제국으로 보면은 조선의 경주보다도 더 시골이죠. 유다 유대
지방의 베들레헴이란 마을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서 거기서 잠깐 지역에서
잠깐 전교하다가 32에 처형된 어떠한 그
랍비 선생의 얘기를 그거를 제자들이 특히 그중에서도 예 바울 사도 바울은
실제로 예수를 만난 적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나중에
신자들한테 편지를 쓰기 시작하면서 그죠? 고린도전서, 고린도 후서, 뭐
디모데전서 후서 이런 로마서 이런 거를 쓰면서 거기에서 이제 교리를
갖다가 조하게 이제 나를 하기 시작하면서 그래서 심지어는 그거를 전문가들은 어
기독교를 퍼라인 기독교라고 합니다. 크리스천이 바울의 기독교라고 할
정도로 글로 다 남긴 건데 그게 이제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신약 성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건데 사실 그런 그런 비슷한 역할을 어 해월 최시형이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자기 스승의 책을 구수를 해서 그걸 경전으로
만들어서 만들기 시작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직을 정비를 합니다.
이거 역시 뭐냐면 교회라는게 그냥 스승이 있을 때는 가서 같이 얘기 듣고 같이 뭐
음식을 나누고 그러면서 하는 거지만은 스승이 돌아가고 난 다음부터 교회라는게 만들어지기 시작해서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은 경전이 있어야 되고 그리고 뭐가 있어야 됩니까? 조직이
있어야 됩니다. 그 조직이라는 것도 지금 어 해월 최시형이 전부 다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 단양, 정선, 상주 등에 흩어 흩어져 있었던 어 수훈의
가족들, 유족들까지도 어 모아서 다시 합류를 시키고 그리고 어 다른 그
흩어졌던 사람들이 아 전부 다 그걸로 모여들기 시작한 어 그런 어 일이
벌어집니다. 이게 이제 교회를 조직하는 모습입니다. 뭐냐면 순의 탄신일인 음력 10월 28일 그리고
순교일인 음력 3월 10일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교조를
기리는 정기적인 모임을 통해서이 동학도가 이제 결속하기 시작하고 조직을 만드는 거죠.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기독교에서 예수님이 탄생하신 12월 25일 이런게
중요하는 거죠. 그다음에 부활절 그 예수의 생애에서 중요한 날들을 만들어
놓고 그걸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미사를 드리듯이 지금 어 해월은 그
그거를 정확하게 알아요. 교회라는 건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래서 수훈의 어
그 탄신일과 순교일 이런 거를 이제 중요한 날로 어 정해 가지고 그리고
이제 제사를 어떻게 지내는 거냐 자기네 특유의 제사도 어 만들어내면서
점점 점점 조직을 다져 나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 그래도 해월에 탁월한 지도하에 그나마 이제 다시 교회가
재건이 돼 가고 있는데 1871년에 이필제의 난이라는 것이
일어나면서 그때 한번 통학이 다시 한번 큰 위기를 어 맡게 됩니다.
자이 필제가 누구냐면요. 1825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어 양반
출신이라고 하고요. 그리고 학문에도 뛰어난 걸로 알려졌지만 그 사실 뭐 몰락한 양반이었겠죠. 동학에 그
합류하는 대부분의 양반들이라는 사람들 다 이제 몰락한 양반들이었죠. 그리고
어 그를 선달이라고 불렀는데 선달이라 부른 것은 사실 무반 얘기거든요.
무과의 초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어 선달이라고이 선달이 선달 이랬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보면 문과는 치지 못했고 무과를 쳐서 어 거기에 초시에
합격했던 어 그런 사람입니다. 근데 이제 이필제라는 사람이 굉장히 재밌습니다.이 사람이 이제 정감록에 완전히 빠져 있었고요. 그리고 이제 북벌을 주장합니다. 여러분 북벌 기억나시죠? 효종 때에 청나라가
여진족이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대륙을 정복했다 그러면서 중화 사상이 없어졌다 그러면서 모든 소중화가
우리한테 왔는데 우리가 다 언젠가는 다시 북벌을 해서 오랑캐들을 쫓아내고 명을 다시 세워야 된다. 이제 이게
효종의 북벌론 아닙니까? 송시하고 같이 계획하는 그 북벌인데 그 북벌에
이제 이필제도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무반이고 똑똑했는데 굉장히
성격이 급했던 거 같습니다. 관했던 거 같습니다.이 사람이 뭐를 시작을 하냐면은 우리 스승이 뭐를
잘못하셨다고 나라에서이 사람을이 양반을 처형을 했느냐? 이거 가만히 있어서 안 된다. 그러면서 뭐를
시작하냐면 교주 신원 운동. 그러니까 우리 교주님의 억울하게 당한
그 명예 회복을 위한 운동을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1869년에
진천에서 진천 작변이라는 걸 일으킵니다. 뭐냐면 이제 진천에서 그
교조 신혼 운동을 하기 위해서 이제 무장 너무 억울하다. 그래서 이제 무장 본기를 어 그 계획을 했었는데
이때 이제 누가 밀고를 해 버리는 바람에 본인은 빠져나오고 부인과
아들은 오히려 어 체포를 나옵니다. 그런데 이제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음해 1870년 2월 28일에는
진주 작변을 일으킵니다. 진주에서 진주에는 병형을 습격을 어 그 하려고
무의를 하는데 이것도 이제 또 밀고로 어 실패를 합니다. 이때 이제 이필제가 이제 다른 동학 교도들한테 이런 그 글을 보냅니다. 내가 스승님의 원한을 씻어내고자 한 뜻이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옛 이르기를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면 오히려 재앙을 받게 된다고 하였으니 나 역시 천명을 받았습니다. 한 가지는 스승님의 욕을 씻어내자는 것이요. 또 한 가지는 백성 백성들의 재앙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뜻하는 바는 중국에서 창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이 땅에서 일을 일으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스승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쪽에서 받았으므로 그 도를 동학이라고 하였으니 동은 동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영해는 우리나라의 동해입니다. 이런 가닥에 동쪽에서 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스승님을 위하는 자가 어찌 따르려 하지 않는단 말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스승님께서 욕을 받으신 날이 3월 초여흘입니다.
그날로서 완전히 정하였으니 다른 다시 다른 말 하지 말고 나를 따르시오
그러면서 다시 또 이제 무장 본기를 어 하자고 그니까 두 번 실패했었는데
진천하고 진주에서 다 밀고 실패했는데 또 포기하지 않고 이번에 영원에서 제대로 된 거를 일으킵시다 그럽니다. 
그래서 이제 이런 거를 통문을 보내고 그러니까 동학 교도들 사 이제 해월
최시형의 입장에서는 경전을 만들고 조직을 만들고 예절을 예법을 만들고
이런 거를 지금 해야 된다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 입장에서선 갑자기 또 무장 봉기를 하자 그러니까 아 이거 도저히 안 될 거 같아서 막 어떻게 쓴지 타이를 열고 그럽니다. 그런데
역시 다른 그 동학 교도들이 입필제의 말을 따르자고 그럽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최시영이 이필제랑 같이 어수훈이 순교한 3월 10일 날 500명의 동학도를 모아서 영해
구성을 공격하여서 접수한 후 영해부사 이정을 처단을 해.
그 관을 습격해서 그런데 사실 500명 갖고 뭐 뭐 일이 제대로
도마가 되겠습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도저히 이거는 안 되겠다 해서
해산을 해 버립니다. 그래서이 필제는 또 이제 문경으로 또 가서 또 거사를
하는데 결국은 8월 3일 날 문경 음내에서 체포되어서 1871년 12월
24일 날이 필제는 능지 처참됩니다. 그리고 바로이 필제의 난 때문에
조종에서는 얼마나 놀랐습니까? 영의 영회가 합락이 되고 그러니까 이거 가만 놔두면 안 되겠다. 그래서 이때 경상도 관찰사 김세호가 영해부 안핵로 박재관을 임명하고 그리고 아예대
이번엔 본격조 제대로 뿌리를 뽑자 교주를 처형했는데 다 없어졌는지
알았는데이 71년에 이런 일을 버리니까 이건 가만놔도 안 된다. 그래 갖고 대세대적인 박해를
시작하면서 100명 이상의 교학 교도들이 처단이 되고 최시형은 또다시
영월정선 인재 등 산악 지대를 이제 전전 어 하게 되는 거죠. 그나마
조금 재건을 했다가 이필제의 난 때문에 이제 완전히 다시 무너져서 쫓겨다니는 그런 몸이 됩니다.
그런데도 또 포기하지 않고 1875년 그러니까 4년 후죠.
이필제의 난 일어난 4년 후에 또 이번에는 수회
탄신 향식을 이제 거행을 하고 8월에는 제사에 고기 등의 재물을
쓰지 않고 맑은 물 한 그릇만 넣고 제사를 지낸 다 모든 거를 다시 어
그 만들어 냅니다. 그래서 최재우의 단신일, 수형일의 기재사,
대도승통일인 4월 5일의 제사 등을 모두 주관하면서 교회력을 만들고
설법제, 구성제, 인등제 등을 시작을 합니다.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이
조조직력이 아마 현대 시대에 있었으면은 어떤 기업 하나 정도는 일으켰을 만한 사람인 거 같습니다.
야,이 이렇게 교회라는 거를 구성하는게 이런게 필요하다는 거를 저렇게 안다는 아, 천주교를 굉장히
잘 알았고 천주교의 그 모든 경전 미사보내 지내는 거이 모든 거 사제단
만들고 이런 거를 몇밀히 아마 공부를 하고 알았었던 거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79년 11월에는 어떤 교도의 집에 그 집에 도적 간행소 그러니까
자기네의 책을 간행하는 간행소를 아예 설치하고 동학의 역사를 정리해서 도원
기설을 편찬하고 1880년 5월에는 인재 어 갑둔이란
곳에서 각 판소 출판사를 만드는 거죠. 인쇄소를 만들어서
동경대전권을 가능합니다. 그러니까 66년에 자기가 구슬해서 남아 있었던
거 있죠. 필사본이 있었지 않겠습니까? 그거를 드디어 이제 100번을 인쇄를 해서 어 결국은
간행을 해서 동학의 경전이 제대로 이제 만들어져서 퍼지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1881년에는 그다음에는 또 여유 덕이란 교도의 집에서 또 간행소를 마련해서 이번에
용담 유사를 간행합니다. 그래서 교단의 역사와 경전이 모든 것을 이제
다 간행 사업을 마칩니다. 그리고 수훈 행록, 도원 기서 등 동학의
역사를 다른 책들도 출가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한 사람의 머리에서
이게 다 나온 겁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 모든 경전과 그 전기와
그렇죠. 예법과 조직과 모든 것이 다 어 나옵니다. 그런데 자 이러면서
한쪽에서는 이제 동학이 다시 해월 때문에 해월 덕분에 그 다시 재건이
되고 있었는데 문제는 뭐냐면 천주교하고 늘 헷갈려서 조정해서 이걸
동시 같은 걸로 생각을 하고 같이 탄압을 했었는데 천주교에 대한 탄압은
점점 점점 병인 박해 때 그게 달지만 1860년에 병인 박해 때 그게 달한
다음부터 사실은 급격하게 잦아들기 시작합니다. 그건 당연히 왜 그러냐면 서양하구의
교류가 늘어나기 시작하고 수결을 하기 시작하고 서양 국가들 프랑스, 영국,
미국 이런 데랑 수결을 하게 되면서 더 이상 천주교를 갖다가 그렇게까지 방 박해할 수 없게 되는 거죠.
그래서 1866년 병인 박해 때는 무려 8,명이 순결합니다. 천주교도가. 그런데 그때 이후로는
사실 조선 정부에서도 자기네는 천주교는 뿌리 뽑았다. 서학은 뿌리 뽑뽑았다고 생각해서 별로 박해를
대대적인 박해를 안 합니다. 그래서 1872년하고 1875년 사이에는
순교한 천주교도가 세 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강화도 조약을 맺는 1876년에 아예 한 명도
순교를 안 합니다. 그리고 77년에서 79년 49명이 숨겨하지만
1880년을 끝으로는 더 이상 천주교 순교자는
나오지를 않습니다. 천주교는 박해는 이제 뭐 조미수호
통상조약, 조용 통상조약, 조독 통상조약 그리고 아일랜드와도
1883년에 어 조약을 맺고 84년에 조로 수호통상 조약 86년에 조불
프랑스하고 이제 그 맺으면서 이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완전히 어 그
멈춥니다. 사실 그렇다고 포교의 자유까지 생긴 거는 전혀 아니었는데
뭐 아무데서나 이제 그 서양 선교사들이 포기하는 것을 조종 조선 조종은 더 이상 막을 방법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개양장에서만 선교를 허락한다 그랬지만 그거를 어기는 선해외 외국 선교사들을 막을 방법이 없어서 결국은 공개적으로 천주교에 대한 어
그 박해는 완전히 [음악] 없어집니다. 그러니까 이제 동학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면요. 동학의 입장에서는 아니 서학까지 서양 오랑캐들의 저 종교까지 저렇게 이제는 완전히 손을 뛰고 손을 놓고서 내버려
두고 있고 맘대로 전전국적으로 휘적고 다니면서 서양 선교사들이 전교하는
것은 안 막으면서 그러면 동학은 뭐냐? 우리도 그러면 우리도 교조가
억울하게 교주가 억울하게 죽은 거에 대해서 그걸 다시 명예 회복을 해 주고 우리도 좀
공개적으로 포교를 하게 해 달라. 이제 이런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죠. 동학 내에서는. 그러지 않아도 이필제 같은 사람이 벌써 1870년부터 그랬는데 이게 10년이 또 지났는데 이제 천주교에 대한 거는 완전히 밖에는 끝나면서 동학에 대한 산업은 계속되고 있으니까 거기에 대한 이제 불만들이 나오기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사실 박해 어 직후에는 이제 전부 다 숨어들어서 깊은 산속 또는
불교사찰 이런데 이제 그 숨어 갖고서는 그 조용히 신앙생활을 이어가고 있었고 그러면서 말씀드린
대로 해월에 재건을 통해서 결국은 1880년대쯤에 이르면은 이제 큰
나름대로 굉장히 은근히 어 많이 퍼지기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1890년대가 되면은 이제 경전이 본격적으로 보급이 되죠. 그리고
조직이 완성이 되면서 동학이 호남의 양반과 평민들 사이에 급속히
퍼집니다. 그러면서 이제 동학이 경주에 시작해서 강원도 충청도
이쪽으로 옮겨 갔다가 사실은 그 무게 중심이 이제 호남에서 급격 깊어지면서 호남이 동학의 어 중심이 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때부터 동학이 그 전까지만 했는 산속 깊이에서만
숨어서 종교 생활을 이어갔었는데 이젠 조령, 삼나, 보훈, 공주 이런 큰
마을에 아예 공공연하게 동학 교도들이 나와서 포교도 하고 자기 신앙생활을
공개적으로 이제 하기 시작을 합니다. 이때부터 새가 불어 불리면서이 필제가
시작했던 교주신원 운동을 본격 어 쪽으로 이제 요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교주의 억울한 순교를 그걸 나라에서 명예 회복해 달라. 그리고
우리도 서학같이 마음대로 포기할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러면서 이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조종에서는 서학과는 전혀 다르게 동학을 대하는 거죠. 1892년에 어 충청조 충청도 관찰사
조병식은 이거는 안 된다. 그러면서 동학을 사교로 어 규정을 하고 탄압을
시작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1892년입니다. 여러분 이제 여기에 대해서 청일 전쟁 2년 전입니다.
최시영은 전와 같이 실력 행사 같은 거 할다 그러면서 자꾸 막습니다. 그런데
역시 이번에도 또 이필제에 난 때와 같이 이번에 젊은 어 지도자들이 동학
내의 젊은 지도자들 서인주 서장옥이라고다는 서장옥 서병학 손천민
손병희 3대 교주를 하는 손병희 그죠 나중에 천도교로 동학계 이름을
천도교로 바꾸는 그 손병희 이런 젊은 어 지도자들이 전부 다 그 당시 경상도
상주에 있었던 최시형을 찾아가 갖고 교조시 신운동하고 동학 합법화
운동을 본격적으로 이제 공개적으로 집단 행동을 통해서 우리가
하자라고 최시형을 또 설득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어 10월 20일
날 1892년 10월 20일 날 전국 각제에서 동동학교도 전부 다 공주에
이제 모입니다. 그러면서 탄압을 시작한 충청 관찰사 조병식에게 단자,
그러니까 상소 같은 걸 올리는 거죠. 그러면서 11월 1일에는 전라도
관찰사 이경직에도 같은 글을 올립니다. 그 글 내용이 바로 이랬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엎드려
살피건데 우리 스승 용담 최선생은 상제의 얼굴을 뵙고 명을 받으사 천인
합일의 도로서 장차 덕을 천하에 펴고 창생을 이미 빠진 땅에서 건지고자
하시더니 불행이 사학의 무을 입으사 지난 갑자 3월 10일에 대구에서
원사하였으니 오호통이라 우리는 모두 최선생 문화 훈도의 사람이라 신원
일념이 상존의이 뜻을 어찌 십살이 해태하리요 이재를 가리켜 탐이라 하면
오히려 가하려니와 서교로서 천주교로서 우리 스승을 의심하면
우리가 비록 만 번의 주류을 입을지라도 맹색고 그 청백함을 밝힌 연회야 그칠지라. 우리가 원한을
마시며 아픔을 참은지 30여년에 지극히 원통함을 아직 펴지 못하여 대도를 아직 창명치 못하였음은 실로
우리의 불민 불성한 탓이라. 세속이이 이체의 여화를 알지 못하고 품문에
따라 입에 우르내려 이단으로서 지목하나 금세의 공학이 아니라도
공자양문 유교가 아니라도 도된 자가 하나 둘이 아니거늘 전혀 거론치
아니하고 오직 우리 동학에 이르러 공척하여 배척하여 배자하기를 마지
아니하여 심한즉 서악이라고까지 지침하나 우리 스승은 동에서 나아
동에서 배웠으니 동을 어찌 서라 하며 또 하늘에 배웠고 사람에 배웠 아니
어찌 하늘을 허물하여 우리 스승을 죄함이 가하리요 수제는 우리의 도를 서학
여파로 지목하여 세심이 조사하여 붙잡아 가매 전제를 토치하여 재산을
다 뺏어가고 사자상자 죽는 자와 부상당하는 자가 끊어지지 않고 향곡
코민의 소문을 따라 치막하여 집이 부서지고 재산을 빼앗김이 묵처
부류하니 오도가 유로서 이름한 자는 거기에 유리하여 머물 것이 없음이라
이러면서 어떻게 우리한테 이럴게이 이럴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서 1892년 11월
1일자 단자를 어 관찰사들한테 올립니다. 여기에 대해서 이제 전라도
관찰사이 경직이 3예 수천 명이 모여드니까 답신을 보냅니다. 그러면서
동학을 사교로서 규정한 건 조종해 한 것이다. 그러면서이 문제는 교조 신원
이런 거는 내가 결정할 수 없는 거고 조종에서 결정을 해야 되는 것이니 일단 조종한테 그럼 동학의 탄압은
잠깐 중지하라고 하는 내가 공문을 올릴테니까 여러분들도 해산하라.
그런데 어떻게 됩니까?이 이경직 약속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동학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니까 손병이 손천민 이런 젊은 지도자들이
다시 거사하자. 다시 모여들자. 이제 이렇게 합니다. 그러면서
그러면서 1893년이 되면은 사실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뭐냐면은 지방 관찰사한테 호소를 하고 이러고 이제
시위를 버리고 이러는 것이 아니라 최시형이 무슨 계획을 거사를 하냐면은
동학 교도들을 40명을 과거 시험을 치는 사람으로
변장을 시켜서 그래서 한양 도송에 잠입을 시킵니다. 그래서 과거를 치러
가는 선비들이다. 해놓고 그렇게 변장을 하고 도송에 들어가 갖고는 그다음에
군궐 앞에 엎드려서 군궐 앞에 가서 나을 동안
밤낮으로 규혼 그러니까 억울함을 포소한 임금께 직접 호소하는 주언을
합니다. 여러분 이거는요. 어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순이 참수당하는 것도 순교하는 것도 대구였었었고요. 그리고 지금 모든
일이 벌어지는 것이 경상도, 전라도의 작은에서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이었죠. 그러니까 그냥 관찰사들 통해서 하고 이렇게 해결을 하도록 하는 정도로 생각했었는데요.
이번엔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40명이 잠입을 도성에 잠입을
해서 군궐 대골 앞에서 타언을 공개적으로 하는
겁니다. 이거는 이제이 동학에 대한 조종의 위협 감도를 급격히 이제 높여
버리는 일이 돼 버립니다. 그래서 어 1893년 어 3월 25일 날
박광호, 선병희, 김연국, 손천민, 남홍원, 임호 이런 사람들이 4명이
과거에 응시하는 선비로 변장하고 어 그다음에 광화문 앞에서 어 상소문을
올리고 사흘 밤낮으로 어 교훈을 어 합니다. 자
이러면서 일이 이제 커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그때에 바로 이때에 있는 한양에 있는 서양
선교사들 집에 벽보가 붙기 시작을 합니다. 3월 31일 밤 정동
장로교 선교 부진에 있는 퍼드 학당 학교죠. 학교고 그 전교를 하는데
사용하는 그 건물에 퍼드 학당에 그리고 감리교 선교사 어 그 존스
목사 존스 목사의 숙서 정문에 벽보가 붙습니다. 서양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학교에 가서 공부하는 조선 학생들에게 보내는
경고문입니다. 그리고 게프드 목사 집에 붙은 경고문은 그 서양
선교사들한테 보낸 경거문입니다. 이때 게드와 존스 목사가 벽보드를 걷둬서
미국 공사 주조선 미국 공사 허드한테 전달하고 허드가 이거를 번역을 해서
미국 공무성에 버거를 한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를 이제 보면은 그 내용이
그걸 다시 우리가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이런 내용입니다. 존스 목사 숙수에 붙은 벽보의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조선의 학생들한테 보내는 경고문에 경고문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슬프다. 소인베드는
공경되의이 글을 받으라. 생각건데 우리 동망은 몇 천 년 동안 예의의 나라였으니 이러한 예의의 나라로
태어나이 예의를 행하기도 연념이 없거늘 항차 다른 종교에 대해서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서교의 글을
보고 그 학문을 살펴본 즉 저들이 소위 말하는 것은 비록 경천이나 그
실은 폐천이요 비록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나 그들이 혹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짓이라 천당 지옥은 또 무슨 말인가 세상 사람들이 서로
신선이 있다고 하나 그걸 본 사람이 누구이며 저들의 말인즉 천당이 있다고 하나 누가 그것을 보았단 말인가
슬프다. 어리석은 부맹한 자들은 그 헛됨에 빠져 황탄을 믿고 정대를
버리며 모든 것을 사랑하는 핑계로 조상의 제사를 버리고 터문이 없는
의식을 행하니 성령께서 말씀하신 무분 무군 아버지도 없고 임금도 없는 것
바로 이것을 가르킵니다. 지난날 열성조의 혈량한 재신들은 충선되게
보필하여 학과 교를 세우고 인위를 점차 닦아 동서가 함께 그 음덕을
입으니이 이것이 곧 치요 이제는 이도가 횡행하여 창생을 홍무하니
이것이 곧 나니라 그대는 충량 보필의 후회로 현절을 공개하였으니 오늘의
현실이 어찌 애석지 않으며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오도의 대우는 하늘에서 나서 하늘을 소소히 비추이니 감히 어찌이 도를 벗어나 능멸할 수 있겠는가 다스림의 도가 왕리 지문 가운데
있으니 어찌 두렵지 않으며 어찌를 지키지 않을 수 있으랴 슬프다 어린
소인배들은 대도를 함께하여 사람마다 양소를 불태우면 지극히 적그나마 만에
하나라도 자신의 삶을 가의 살 수 있으리라 명을 몰아내고 선왕의 법에
따르라이 내용을 보면요. 이게 과연 동학의 입장에서 쓴 건지
아니면 의정 척사파의 입장에서 쓴 건지 사실은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동학 교도들 40명이 놀래 잠입해서 한양에 잠입해서 규훈을
올리고 있는 바로 그때의 해피름은이 벽보들이 붙습니다. 그래서 이게 이제
동학이 한 것이다. 특히 동학이 외세 척결를 하기 위해서 붙인 것이다라는
이제 그런 이론들이 있는 거죠. 그러면서 이때부터 동학이 본격적으로 어 외세 배척 어 사상이 나왔다
그러면서 민족 사관 입장에서 민족주의적 사관 입장에서 동학이 우리 거를 지키고 서양거를 배척하 외세를 배척하는 어 그 종교였다라는 그런 얘기를 하는데 이게 대표적으로 인형이 되는 건데 글쎄 그 내용만으로 봐서는 딱히 동학을 믿으라는 거보다는 어떻게 보면 왜 유교를 버리고 이런 어처건이 없는 서양의 이단을 얘기를 하느냐라는 내용을 으로 충분히 읽힐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자, 기푸드의 벽보에 붙인 이번에는 선교사들을 향한 얘기도 어 한번 같이 보겠습니다. 서교의 두령들에게 효유하노니 그대들은 귀를 기울여 들으라. 기수는 기울고 세도는 날로 세퇴하여 종묘 사직은
오랑캐로 올룩지고 있다. 상관을 세우고 전교하는 일은 수호약에 허된 허락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연이어 들어와 명색으로는 상제께 경배한다고 하나 단지 기도로서
할 뿐이며 말로는 예수를 믿는다 하나만 찬송가를 부르는 것으로 법을 삼으며 정심성의로 가르치는 것은 전혀 없고 말을 실천하고 독행 지시를 보임이 거의 없다. 말로는 부모를 공경하되 살아서 부모를 공경하고 순수하는 도가 없고 죽어서는 곡하며 상례를 치르는 법이 없으니 이것이 어찌 법도를 지키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혼인의 풍습을 보면 처음에는 짐승처럼 합쳤다가 끝내는 개가를 하고서도 부끄러움 없이 헤어지는 폐해가 있으니 이러고도 어찌 부부의 도리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대들은 본시 거지의 무리로서 모임에서는 매매의 욕심을 부려 받는 돈으로는 먹고 사는 일에 사치스러움의 마음을 쏟는다. 애당초에는 영어를 익히고 한문을 가르친다고 하여 양가의 자재들을 끌어들이더니 끝내는 그대들의 종교에 밀어넣었다. 그대들은 학도들의 의식에 충당해야 할 돈을 지어짤 수밖에 없으니 어찌토록 비루할 수 있겠는가? 말로는 전도를 한다고 하지만 단지 유람하고 성서를 찍고
책을 파는 것을 제일에 어불어 삼으니 만약 영원한 지옥이 있다면 반드시 그대들이 먼저 떨어질 터인즉 어찌 두렵지 않은가? 이번에 감히 청례하여 밝히건데 우리의 수도한 학문으로서
모입에 있 그대들과 더불어 자리를 함께 하고 말씨름을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알리노니 그대들은 속히 장비를 꾸려 본국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마땅히 우리의 충성스러운 갑주와 인의 간호로서 다음 달 3월 초일에 죄를 성토하리니 이로서 그리 알지어다. 아무튼 그 서양에 대한 어
그 동학이든 아니든 어쨌든 중요한 것은 동학의 입장에서도 천주교에 대한
어 그 반항 반감은 대단했던 거 같습니다. 자기네는 이제 계속해서 탄압을 받는데 이제 천주교는 탄압도 받지 않고 있는 거고 마구 지금 열리고 나라가 열리기 시작하고 서양의 문물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대한 대부분 일반 조선 사람들의 그 반감 어이 그 묻어나는 어 그러한 그 벽보
어들이었습니다. 지금 동학이 있고 조종이 있고 천주교가 있는데 거기만 있는게 아니죠. 사실은 뭐가 있습니까?이 4대부들이 있습니다. 그럼 막상 그럼 4대부들은 도대체 동학을 어떻게 생각했는가? 정통 4대부들은 동학을 또 철저하게 배척을 했습니다. 4대부들의 그 동학 비판은 그 당시
4대부들이 고종한테 올렸던 수많은 상소에서 빨리 동학을 처단하라는 수많은 상소에서 우리가 또 엿볼 수가 있습니다. 어 고정 30년 2월 25일 날 올렸던 어 상소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아, 요즘 동학과 예수교가 여기저기에서 번성하여 양주, 무가, 노장, 불가의 무리가 백성에게 해를 끼친 정도만이 아닌데 세상에는 맹자나 한유 같은 사람이 없으니 매우 걱정됩니다. 저들이 우는 것은
학문이나 교리라고 논할 것이 못 되며 잇로 부르고 자기의 당파를 두둔하며
그 음흉한 속셈을 실현하는 것이 다른 것 같지만 본질은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괴의한 무리들이 방자의 골문을 두드림에 꺼리낌이 없었으니 살아 있는 사람 치고 누군들 통분해 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이 의지하고 믿는 것은 그 무리를 불러 모으고 제주를 부려서 현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친 병을 아 알는 어린아이가 앞뒤 없이 바락하는 것과 같은만큼 백성의 부모로서는 제지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니까이 주헌이라는 것이 4대부도 충격이었다는
거를 알 수가 있습니다. 어 상소가 계속 이어집니다. 속히 형조로 하여금
형신하여 실정을 알아내게 하고 괴수로서 글에 능하여 중 주장한 자를 즉시 서울과 지방에 신축하고 독적하여 일일이 잡아다가 의리로서 타 이르고 법으로서 책망하여 스스로 새롭게 하고
귀화하게 하소서. 신이삼과 생각건데 정당한 학문은 크게 쇠퇴하고
선비들의 추향이 바르지 않아 불순한 교리 불순한 교리가 행행하게 된 것이
이렇게 심하므로 식견이 있는 사람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신도 가슴을 두드리며 계속 한숨을 내쉬게 됩니다. 대체로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근원을 맑게 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 전화에게 달려 있으니 행동을 살피며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덕을 닦으며 자신이 솔선하여 인도하고 유학을
순상하며 학교를 일으키는 것이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당시
상황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그거를 우리가 명확하게 알고서이 역사를 접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말씀드린 대로 동학이 일어났습니다. 동학을 탄압하는 것은 조종입니다. 조종하고
이제 싸우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천주교가 있습니다. 천주교하고
헷갈리면서 천주교하고 결국은 천주교 때문에 피해도 많이 보게 되고 그리고이 천주교이 서양 사람들이
들어와서 마음대로 전교하는 거에 대해서 아주 극도의 분노를 반대를 또 동학은 표출을 하고 있고 천주교는 이제 거기에 대해서 동학에 대해서 또 반감이 있습니다. 나중에 어 얘기가
나오겠지만은 어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도 천주교로서 그 동학계 그 탄압의
진압에 나섰었다라는 그런 기록도 있고 그렇습니다. 근데 거기뿐만 아닙니다.
4대부들도 있습니다. 그럼 4대부는 뭡니까? 당연히 천주교 서학도 아니지만 동학도
또 아닙니다. 자, 이제 이런 상황이 지금 이제 전개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어 그 조종에서 어 양호 선무사를 어윤중을 보냅니다.
그러니까 지금 어윤중은 누굽니까, 여러분?

1882년에 신사율람 그때에 가서 북쿠사 기치를 만나고 그러면서 와서
갑신정변 실패 후에도 남아서 그죠 김홍집, 어윤중 이런 사람들 남아서
급진 개혁은 못 하겠지만 어느 정도의 개혁이라도 하려 그러고 있었던 바로 그 어윤 중이 이제 양호
선무사로 파견이 돼서 동학을 타 이런 일을 합니다. 그래서 어윤중이 가서
1893년 5월 11일 음력 3월 26일 어
가서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너희가 취당 그러니까 무리 무리를 불러
모아서 취당한 의도가 양의에 있다면 온 나라의 공공의 의를 갖고 어찌
독자적으로 한 깃발을 세운 것이냐 그러나 문장에서 위협은운한 것은 소문이 잘못된 것임을 이미 효유했다.
이러한 사연을 상세히 아뢰어 상달할 길을 마련하겠으니 너희들로 물러가서 편안히 생업에 종사할 것을 고하노라.
앞으로는 평안 무사하게 있으라. 그러면서 정부에서 최고층에서 드디어
직접적으로 동학하고 접촉을 하면서 좌중해라 해산하고 생업에 종사하라라고
하면서 조종하고 본격적으로 이제 맞닿기 시작합니다. 거기에 대해서
동학이 어 거부를 하기 시작하고 그러면서 고부에서 어 그 탐과 놀이에
저항하는 밀란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전국적인
사태로 터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니까 지방에서 모여들기 시작하고 어 그
관찰사 상대로 상소들을 올리기 시작하고 중앙에 들어와서 대골 앞에서
규원을 하고 그리고 뭐 확인된 말은 없지만 어쨌든 그 당시 분위기
속에서 기독교 선교사들, 기독교 학교들에 대한 협박을 하는 그런 어
벽보들이 붙기 시작을 하고 그러면서 조정에서는 이거는 더 이상 그냥
좌시할 일이 아니구나라고 뒤늦게 남아 정부가 본격적으로 이제 어 그 대응을
하기 시작하면서 동학난으로 급격히 발전을 하게 됩니다. 우선 여러분이
시대적 배경이 바로 이게 어
1894년으로 들어가면은 김옥균이 암살이 되고 그리고 이제 7월이 되면
청일 전쟁이 벌어지는 겁니다. 지금 그쪽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쪽에서는
김옥균이라는 인물이 일본의 10년째 망명을 갔다가 그 거대한 국제 관계 속에서 그리고
이제 고정이 보낸 2일의 그 밀정에서 홍종의에서 이제 암살이 되고 그
시신을 다시 조선에 넣 갖고 오는 것 때문에 이제 일본하고 중국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을 하고 이런 독제적인 측면이 이제 하나가 어 그 전개가
되고 있는 거고요. 그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지금 궁전히 국내적인 상황에서 저 경주라는 시골에서
만들어진 종교 때문에 그 종교가 정말 조선 조정의 입장에서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그렇죠. 서학이나 뭐 개신교 이런 거에 비해서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여러 번 탄압을 하고
자기네 따내는 뿌리를 뽑았다고 생각하는데 최시영 같은 그런
놀라운 조직할 줄 알고 교단을 만들 줄 아는 그런 놀라운 능력을 가진
사람이 나타남으로써 그것이 죽지 않고 영혼남에서 아주 대표적인 종교로 크고
결국은 조종에까지 와서 교훈을 하게 되는 공개적인 시위를 를 하게 되는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자, 그러면 여러분 이게 동학이 그렇게 커가는 것을
내용을 보시면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금 분명히 천주교 와 있어. 오래 전부터 오피터에서 있었고 그리고 유교
당연히 제일 오래된 뿌리고 그리고 불교
있었고 그런데 그 속에서 다 그 모습들을 조금씩 조금씩 따서 소위
유물선 이뭐 그다음에 기독교까지 천주교까지 다 합친 어떠한 거를
만들어 내 가지고 다른 종교들보다 그것이 민간에는 더 잘 퍼지기
시작하는 이 거대한 국제 관계 속에서 움직이는 일본, 중국,
러시아 조선하고의 그 국제 관계가 있는데 다른 한편으로는 국내에서는
동학이라는게 나와서 결국은 이것이 모든 것이
합쳐지면서 동학란이 폭발하는 동시에 그것이 청일
전쟁이라는이 지역의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역사라는 것이 정말로 경주 어디에서 정말 몰락한 선비에 그 사람의 교가
이렇게 커서 사실은 동아시아의 역사를 바꾸는
청쟁으로까지이이 연결되는 거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조선
19세기 말의 역사의 정말 묘미이고 이것을 우리가 복합적인 차원에서
이것을 다 같이 정확하게 어 아는 것이 우리의 역사를 어 아는 길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제 동학난으로 본격적으로 어 확산되는 그
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모여서 규원을 하고 또 어
지방 도시에들 모여서 실력 행사를 조금 보이는 정도였었지만 그거를
회유하고 조정이 계속해서 가서 해산하라 해산하라 그런데 이제 고부에서 사건이 터지면서 이것이 폭발
촉발제가 되면서 이제 어 동합 난으로 어 본격적으로 퍼지고 그것을
진압하는데 관군이 실패함으로써 천군이 개입을 하기 시작하고 일본군이 들어오
기 시작하면서 청일 전쟁으로 나가는 과정을 어 다음 시간에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고해 보는
한국인의 탄생. 오늘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니다.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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