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8
정재정 (지은이)역사비평사2014-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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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8권. 일제의 한국강점, 8.15해방, 한일조약과 국교재개, 경쟁과 협력의 21세기로 나아가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직시해야 할 바로 그 역사. 현대 한일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지나온 백 년을 돌아본다.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보상 문제, 원폭 피해자를 위시한 전쟁 피해자들의 구제 문제, 재일한인을 비롯한 강제적 디아스포라들의 역사와 현실,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바로 지금 첨예한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현안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차분히 풀어냈다.
목차
발간사 ‘20세기 한국사’를 펴내며
책머리에 공생공영의 지혜, 역사에서 배운다
01 일본제국의 유산과 남북 분단국가
현대 한일관계의 원점, 일제의 ‘한국강점’
스페셜 테마 : 강점인가 병합인가? 불법인가 합법인가?
일제의 식민지 지배와 항일독립운동
해방과 분단국가 수립, 그리고 일제의 유산
02 한일조약의 체결과 국교재개
한일회담의 경과와 논쟁의 추이
한일회담 반대운동과 각국의 입장 차이
한일조약의 내용, 과제와 보완, 그리고 평가
국교의 전개, 유착과 갈등의 변주
스페셜 테마 : 김대중 납치사건과 박정희 저격사건―갈등과 유착의 단면
03 재일한인과 남·북·일관계
식민지 ‘신민臣民’의 삶과 고투
‘해방된 민족’의 생존과 모색
북송사업의 추진과 상흔
‘정주 외국인’의 긍지와 공생
스페셜 테마 : 일본인을 사로잡은 재일한인 스타들
04 경제발전과 상호의존
한일교역의 재개와 6·25전쟁의 특수효과
수출주도 경제개발과 수직적 분업구조의 형성
스페셜 테마 : 모방에서 극복으로―삼성과 일본
고도경제성장의 지속과 무역불균형의 심화
수평적 분업구조의 출현과 상호협력의 모색
05 인간왕래와 문화 교류
귀환, 그리고 왕래의 재개
문화협력과 교류 증진
대중문화, 금지와 개방 그리고 공유와 혼효
06 역사갈등과 평화공영
역사인식을 둘러싼 마찰과 조율
전후보상과 피해자 지원활동
스페셜 테마 : 그러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한국 원폭 2세 환우 김형률 씨 이야기
역사인식의 상호이해를 향한 모색과 연대
07 글을 맺으며_미래와 세계를 향한 한일관계의 재구축을 바라며
현대 한일관계의 단계별 특성
한일관계의 위상 변화와 내셔널리즘의 충돌
미래와 세계를 향한 한일관계의 새로운 비전
부록
주요사건일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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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 한겨레 신문 2014년 3월 10일자 교양 잠깐 독서
저자 및 역자소개
정재정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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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사, 한일관계사, 역사교육 전문가, 문학박사.
서울대학교와 도쿄대학에서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다. 서울시립대학교 인문대학장·대학원장,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 광주과학기술원 초빙석학교수 등을 역임했다. 한일 정부가 지원한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간사,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운영자문위원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위원, 서울역사박물관 운영자문위원장, 서울특별시 역사자문관 등을 지냈다.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명예교수, 서울학연구소 평양학연구센터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일제침략과 한국철도(1892~1945)』, 『한국의 논리-전환기의 역사교육과 일본인식』, 『일본의 논리-전환기의 역사교육과 한국인식』, 『서울과 교토의 1만 년』, 『한일교류의 역사』, 『서울 역사 2000년』,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한일의 역사갈등과 역사대화』, 『한일회담, 한일협정, 그 후의 한일관계』, 『철도와 근대 서울』, 『일제의 조선교통망 지배』가 있다. 주요 번역서로 『식민지통치의 허상과 실상』, 『한국병합사의 연구』, 『러일전쟁의 세기』, 『일본의 문화내셔널리즘』, 『일본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하여』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자료와 함께 읽는 현대 한일관계사>,<일제의 조선 교통망 지배>,<[큰글자책] 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 총 4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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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분야 : 역사 12위 (브랜드 지수 357,525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백 년 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던 한국은 끈질긴 독립운동 끝에 70년 전 해방을 이룩했고, 우여곡절 끝에 50년 전 일본과 국교를 재개했으며, 절치부심 끝에 현재 일본과 대등한 수평적·대칭적 파트너의 지위에 올라섰다. 이 기간 동안 한국과 일본은 변화무쌍한 국내외 정세의 변동 속에서 복잡다단하게 얽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관계를 맺어왔다. 한일관계의 과거와 현재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미래와 비전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갖는다면,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 등의 문제를 둘러싼 갈등과 대립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반목과 대립의 역사만큼이나 교류와 협력의 역사도 두텁고 길다. 양자를 균형 있는 관점으로 살펴봄으로써 위기에 처한 한일관계를 평화와 협력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진지한 모색을 시작해야 한다.”
일제의 한국강점, 8·15해방, 한일조약과 국교재개,
경쟁과 협력의 21세기로 나아가기 위해
한국과 일본이 직시해야 할 바로 그 역사
현대 한일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며 지나온 백 년을 돌아본다
현대 한일관계사 개설서 최초 출간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아우른 폭넓은 시야
한일관계사를 보면 한국 경제발전사가 보인다
한국과 일본은 수많은 정치적 격동기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헤쳐왔다. 그러는 동안 한국은 자금과 기술을 건네받는 입장이었다가 세계시장에서 선두권을 다투는 산업강국이 되어 일본과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었고, 문화적으로는 ‘한류’ 붐을 통해 일본사회에 큰 대중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도 하다. 양국이 맺고 있는 관계의 실상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떼놓고 하나만 들여다봐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총체이다. 지금까지 한일관계의 정치적 측면(특히 식민지 시기에 집중하여)이나 문화적 측면(‘한류’에 집중하여)을 단편적으로 다룬 성과는 드물지 않았지만, 이 모든 측면을 종합적으로 포괄하는 역사서는 없었다. 독자들은 이제 이 책을 통해 비로소 ‘한일관계사’라는 복합적인 다면체를 한눈에 살필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양국의 굵직한 정치적 변동이 양국 관계의 변화 및 양국 경제발전의 계기들과 맞물려 돌아가는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놀라운 깨달음과 함께 더 큰 역사공부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일본 수상은 왜 자꾸 야스쿠니신사에 갈까?
독도를 둘러싼 논쟁의 역사는 어디서 시작됐지?
한일관계의 첨예한 쟁점들을 역사적 시야로 풀어내다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보상 문제, 원폭 피해자를 위시한 전쟁 피해자들의 구제 문제, 재일한인을 비롯한 강제적 디아스포라들의 역사와 현실,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독도 영유권 문제… 일제강점기의 ‘과거사’ 청산과 역사적 화해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데서 비롯된 수많은 역사(인식) 문제들은 오늘날까지 한일 양국의 정부와 민간을 갈등과 대립으로 몰아가고 있다. 양국의 역사인식의 골이 깊고 크지만, 대화를 통해 이를 해결해 나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제대로 된 역사를 아는 일’이다. 바로 지금 첨예한 이슈로 부상하고 있는 현안들을 역사적 관점에서 차분히 풀어낸 이 책은 양국 국민들의 ‘역사 바로알기’와 ‘대화 시작하기’의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국교재개 50년, 그러나 가깝고도 먼 한국과 일본
역사인식의 깊은 골을 메워 나갈 첫 걸음
한국과 일본은 곧 국교재개 50주년을 맞이한다. 1910년 일제의 한국강점부터 1965년 한일조약 체결까지의 국교단절 기간과 엇비슷한 시간이 흐른 셈이다. ‘한일조약’의 한계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도 냉철하게 살피고 있지만, 국교재개 이후 50년 동안 한국과 일본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공유하면서 다른 어느 나라보다 밀접한 관계를 형성해온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베스트셀러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한국과 일본을 “쌍둥이 형제” 같다고 비유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지금 한일관계는 어떤가? 두 나라는 현재 정상회담을 열지 못할 정도로 불편한 최악의 관계에 놓여 있다. 두 나라 국민들 중에 서로를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다섯 명 중 한 명이 채 안 된다. 그렇다면 한일월드컵을 공동개최하고 ‘한류’ 붐을 통해 대중문화를 함께 즐긴 우호와 친선은 허상이었을까? 기술과 자본의 협력으로 포항제철을 건설하고, 학자와 시민의 연대로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을 바로잡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었을까?
이 책의 저자 정재정 교수는 지난 20여 년간 꾸준하게 한국과 일본의 역사대화를 추진해온 경험을 토대로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국민들은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현대 한일관계의 역사를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가? 모르는 것을 안다고, 틀린 것을 맞다고 확신하면서 목소리만 높여온 것은 아닌가?” 작금의 한일관계를 개선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장기적·종합적 관점에서 현대 한일관계의 역사를 균형감각을 가지고 거시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이 시급하다.
“이제 동아시아의 정치적 미래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오랜 유대를 성공적으로 재발견할 수 있는지 여부에 따라 크게 좌우될 것이다.” ― 재레드 다이아몬드
point lesson
현대 한일관계사의 시대별 특징
제1기(1945~1965) 한국과 일본이 식민지 지배로 야기된 ‘과거사’를 정리하고 국교를 재개하기 위해 노력한 시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틀 안에서 14년에 걸친 ‘한일회담’을 진행한 양국은 역사인식과 손해배상 등을 둘러싼 견해차이를 끝내 좁히지 못한 채 정치적 편의에 따른 제각각의 해석이 가능한 불완전한 ‘한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후 한일 역사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제2기(1966~1979) 한국과 일본이 수직적·비대칭적 관계를 맺은 시기. ‘한일조약’을 통해 청구권자금을 받게 된 한국은 일본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했고, 곧 아시아의 신흥공업국가로 부상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는 일본으로부터 소재와 설비를 수입함으로써 수직적 분업관계가 고착화되고,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만주인맥’을 중심으로 한 비공식적 유착관계가 자리 잡은 시기였다.
제3기(1980~1997) 한국과 일본이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상대적 수평화 단계로 진입한 시기. 자본과 기술 면에서 일본 의존도를 낮추고 세계시장에서 일본 기업과 선두를 다투는 한국 기업들이 늘어났다. 정치적으로는 국제냉전이 약화되면서 한일의 반공연대도 느슨해지고, 양국의 정치적 민주화와 사회적 다원화가 진전되었다. 일본의 국력은 답보하는 반면 중국 세력이 강대해져, 동아시아 국제정세가 크게 변화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제4기(1998~현재) 한국 기업이 세계시장에서 일본을 제치거나, 한일합작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스포츠와 예술, 대중문화의 협력과 경쟁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일본에서 자민당 독주의 보수정치가 강화되면서 역사인식과 영토 문제를 둘러싸고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이 노골적인 대립을 벌이는 상황이 점점 잦아지고 있다. 또한 미국이 동아시아를 중시하는 태도로 돌아서면서 중국과 경합 또는 마찰하는 정세가 조성되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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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의 거장인 저자가 자신의 연구업적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를 제시하고 있다. 한일관계를 제대로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에겐 필독서이렷다.
플레빌 2014-12-0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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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복해야할 이웃!!
가깝지만 먼 이웃 일본! 지구상에 있는 나라들 대부분이 이웃나라와는 사이가 좋지 않다고 한다. 중국과 베트남 사이, 영국과 프랑스 사이 등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이웃나라끼리는 사이가 좋지않다. 그 중에서 한국과 일본 만큼 상대국을 싫어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특히 광복 이후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더 없이 관계가 악화되고 있다. 갈등의 뿌리를 알아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한일관계는 언제부터 이렇게 뿌리 깊게 불신의 늪을 헤메고 있었을까?
20세기 한일관계의 실타래가 본격적으로 뒤엉퀴기 시작한 것은 식민지배였다. 일본인은 한국인을얕잡아 보게 되었으며, 한국인은 일본인에게 깊은 원한을 갖게 되었다. 일본이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과 식민지 노예교육은 한국인들에게 식민지 노예 근성을 만들어 놓았다.
"한국이 일본과 공식적으로 교전한 적이 없고, 독립 운동세력이 국제 사회의 정식 승인을 받으납도 없기 때문에 ... 일본은 배상할 의무가 없다."(60쪽)
이말은 보수당 국회의원 정00이 한 말이 아니다. 일본의 보수파들이 한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보수당 국회의원이 한 말과 너무도 비슷하지 않은가? 공주의 친일파 집안에서 자라난 정00의원은 식민사관의 세례를 충실하게 받았다. 식민지에서 벗어난지가 80여년이 되어가는데 우리는 식민지 노예 근성을 버리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재미있는 것은 이념과 체제면에서 남한은 일제시기와 단절적인 혁명을 거쳤다면, 북한은 정치, 경제의 근본에 관련된 이념이나 가치등에서 일제와 연속된 측면이 많다는 지적이다. 북한은 친일 청산을 했는데, 남한은 하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의 상식인데 '20세기 한일 관계사'의 저자 정재정은 인적 청산보다는 이념과 체제, 정치, 경제적 관점에서 신선한 지적을 한다. 남한과 일본은 일제 말기의 대척점에 있는 미군의 통치를 받은 반면, 북한은 일제 말기와 친연성이 강한 소련군의 통치를 받았다. 일제의 전체주의적 통치는 북한 공산정권에 의해서 전체주의 공산국가 시스템으로 이어졌다.
참으로 큰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북한은 6.25 전쟁 중에 일명 '모셔가기' 계획에 따라서 남한의 지식인들을 북으로 끌고갔다. 민족주의 역사학자를 끌고갔고, 그들의 학설이 북한의 정설이 된 경우가 많다. 악질 친일파를 청산하고 항일의 역사를 가진 그들이지만, 그들은 모든 역량을 전쟁에 쏟아 붓는 일제 말기의 통치 시스템을 지금도 구사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을 싫어하지만, 6.25전쟁을 일으켜 기아에 허덕이는 일본이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가장 반일적인 정권인 가장 친일적인 행동을 했다. 조선민족을 강조하는 그들이, 민족의 가슴에 총뿌리를 겨누며 증오의 마음을 불타게했다.
6.25 전쟁은 일본에 있는 재일동포에게도 상처를 주었다. 조련계통은 일본전쟁 개입 반대, 군수물자 생산 및 수송 협력 반대 투쟁을 하며 화염병을 투척하기도 했다. 그에 반해서 민단은 700명의 의용병을 모집하였다. 그들은 한국군에 편입되어 전투에 참가했다. 이러한 역사가 있었는지 우리는 몰랐다. 외국 군대가 공산주의 침략에 대항해서 군대를 파병했다는 사실은 알았을지라도, 재일동포가 의용병을 모집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몰랐다. 6.25전쟁으로 재일동포 사회가 다시한번 분열되었고, 그들이 의용병으로 참전했다는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지 않으므로서 재일동포에게 2번의 상처를 주었다.
식민지배로 시작한 20세기 한일관계는 광복후에 일본을 배워 일본을 따라잡으려는 피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적대 추월할 수 없을 것 같던 일본은 추월하기 시작한다. 삼성전자는 디지털로 전환하면서 소니를 추월했다. 반도체 분야에서는 웨이퍼 밑으로 파고도는 트랜치 방식을 구사하는 일본과는 달리, 쌓는 스택방식을 개발함으로써 일본 반도체를 추월해다. 식민지배를 받으며 일본보다 열등하다는 자괴감을 가지고 있었던 우리가, 이제는 일본을 추월하며 그들을 애처럽게 바라보고 있다. 이제 20세기 초엽의 한일관계는 역전되고 있다. 이후의 역사는 과거의 역사와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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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22-10-23 공감(2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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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일관계사
1.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관계에 대하여
독도는 우리땅이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배상을 해줘야 한다. 친일파에 대해 처벌을 해야 한다. 일본과 관련된 큰 문제에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정말 얇은 한 꺼풀만 벗겨내도 나의 생각은 뒷받침이 부족하다. 내가 만약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그에 따른 여러 증거를 들이미는 일본의 극우파를 만난다거나,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과거 박정희 시대에 대일청구권에 대한 한일 기본 조약으로 5억 달러로 이미 마무리 됐다고 말하는 일본인 대학생을 만난다거나, 친일파를 어느 기준으로 삼을 것이며 이제 와서 어떻게 처벌할 것이냐고 되묻는 어르신을 만나면? 솔직히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른다. 문과 학생으로서 국사와 근현대사를 배웠지만 수능 때 국사 4등급 이후로 사실상 역사 공부를 하지 않은 나의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6.25가 북침인지 남침인지도 모르는 개탄스러운 상태는 아니지만 아슬아슬하게 상식을 유지하는 선이었다. 그러던 중, 최근에 갑작스럽고 어처구니 없는 위안부 관련 협상. 오래도록 협상을 진행한 것도 아니었고, 국민에게 알린 것도 아니었고, 연말에 일본이 불시에 기습 방한하여 타결하고 돌아간 협상에 온 나라가 들썩이는 건 당연지사였다. 한쪽에서는 이제 보상을 받는다고 안도하고 한쪽에서는 이게 협상이 아니라 협박이 아니었냐며 분개하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 갑자기 일본과 우리나라의 악연에 대하여 궁금해졌다. 그래서 빌려보게 된 이 책을 통해 우리나라와 일본이 얼마나 질긴 악연으로 얽매어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정말 질기고도 질기다. 일제 강점기 시대야 말할 것도 없고, 독립 이후, 일본은 6.25전쟁으로 경제가 살아나고, 한국은 전쟁 이후 일본 따라가기만을 목표로 삼아 각종 기술을 배우고, 일본은 공산화의 확산을 막기 위해 그들에게 가치가 떨어지는 기술을 전수해주고… 침략국과 피해국가간의 사이가 이렇게 흘러가도 되냐 할 정도로 이상하게 잘 흘러갔다. 제 아무리 외교적 문제, 이를테면 독도 영유권 문제, 신사 참배 문제, 위안부 문제, 피폭 한인 문제에 대해 의견이 불일치 할 적에도 경제에 있어서 만큼은 밀월관계를 유지해오는 식으로 어떻게든 관계를 끊지는 않았다. 어느 정도 우리나라가 일본과 상생하는 관계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역사적으로 깊고도 깊은 관계인지 이번에 깨우쳤다. 박정희가 경제개발계획 당시 포항제철은 일본이 지은 것이나 다름 없고, 지금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일본과 경쟁하는 자동차, 조선, 반도체, 전자, 제철 이 모든 것들이 일본식 모델을 따른 것이고 일본의 기술을 전수 받은 것이다. 서로를 정말 지독히도 싫어하지만 정말 지독히도 닮은 두 나라. 마냥 일본을 싫어할 것만 아니라 우리의 어느 부분이 일본과 닮아있나를 파악한 뒤에 그것을 뛰어넘고자 해야함을 느낀다.
2. 위안부 관련 협상 타결안 전문
1. 안녕하십니까. 오늘 저는 기시다 외무대신과 회담을 갖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비롯한 양국간 현안 및 관심사에 대해 심도 있는 협의를 가졌습니다.
2. 먼저 연말 바쁘신 일정에도 불구하고 기시다 외무대신께서 오늘 이 회담을 위해 방한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3.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우리 정부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이하여 양국간 핵심 과거사 현안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의 조속한 해결을 위해 적극 노력해 왔습니다.
4. 특히, 지난 11.2 한·일 정상회담에서 박 대통령님과 아베 총리께서 “금년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라는 전환점에 해당되는 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가능한 조기에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타결하기 위한 협의를 가속화하자”는 정치적 결단을 내려주셔서, 이후 국장급 협의를 중심으로 이 문제에 대한 양국간 협의를 가속화해 왔습니다.
5. 어제 있었던 12차 국장급 협의를 포함하여 그간 양국간 다양한 채널을 통한 협의 결과를 토대로 오늘 기시다 외무대신과 전력을 다해 협의한 결과, 양국이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의 합의를 도출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 결과를 여러분들께 발표하고자 합니다.
6. 우선, 일본 정부를 대표해서 기시다 외무대신께서 오늘 합의사항에 대한 일본측의 입장을 밝히시고, 이어서 제가 한국 정부의 입장을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 기시다 대신 언급내용
먼저 일·한 국교정상화 50주년인 올해 연말에 서울을 방문하여 윤병세 장관과 매우 중요한 일·한 외상회담을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일․한간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양국 국장급 협의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협의해 왔습니다. 그 결과에 기초하여 일본 정부로서 이하를 표명합니다.
① 위안부 문제는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이러한 관점에서 일본 정부는 책임을 통감합니다.아베 내각총리대신은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으로서 다시 한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합니다.
②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본 문제에 진지하게 임해 왔으며, 그러한 경험에 기초하여 이번에 일본 정부의 예산에 의해 모든 前 위안부분들의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조치를 강구합니다.구체적으로는, 한국 정부가 前 위안부분들의 지원을 목적으로 하는 재단을 설립하고, 이에 일본 정부 예산으로 자금을 일괄 거출하고, 일한 양국 정부가 협력하여 모든 前 위안부분들의 명예와 존엄의 회복 및 마음의 상처 치유를 위한 사업을 행하기로 합니다.
③ 일본 정부는 이상을 표명함과 함께, 이상 말씀드린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동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합니다. 또한,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동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하는 것을 자제합니다.
또한 앞서 말씀드린 예산 조치에 대해서는 대략 10억엔 정도를 상정하고 있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것은 일·한 양 정상의 지시에 따라 협의를 진행해 온 결과이며, 이로 인해 일한관계가 신시대에 돌입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이상입니다.
7. 다음은 오늘 합의사항에 대한 우리 정부의 입장을 제가 발표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일간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양국 국장급협의 등을 통해 집중적으로 협의를 해 왔다. 그 결과에 기초하여 한국정부로서 아래를 표명한다.
①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의 표명과 이번 발표에 이르기까지의 조치를 평가하고, 일본 정부가 앞서 표명한 조치를 착실히 실시한다는 것을 전제로, 이번 발표를 통해 일본 정부와 함께 이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실시하는 조치에 협력한다.
②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의 소녀상에 대해 공관의 안녕‧위엄의 유지라는 관점에서 우려하고 있는 점을 인지하고, 한국 정부로서도 가능한 대응방향에 대해 관련 단체와의 협의 등을 통해 적절히 해결되도록 노력한다.
③ 한국 정부는 이번에 일본 정부가 표명한 조치가 착실히 실시된다는 것을 전제로, 일본 정부와 함께 향후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상호 비난·비판을 자제한다.
8. 이상으로 한국 정부 입장을 말씀드렸습니다.
9.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인 올해를 넘기기 전에 기시다 외무대신과 함께 그간의 지난했던 협상에 마침표를 찍고, 오늘 이 자리에서 협상 타결 선언을 하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10. 앞으로 금번 합의의 후속 조치들이 확실하게 이행되어, 모진 인고의 세월을 견뎌오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분들의 명예와 존엄이 회복되고 마음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11. 아울러 한·일 양국간 가장 어렵고 힘든 과거사 현안이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협상이 마무리되는 것을 계기로, 새해에는 한·일 양국이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한일 관계를 열어 나갈 수 있게 되기를 충심으로 기원합니다.
(2015.12.29, 외교부 공식 발송 이메일, 한일 외교장관회담 공동기자회견 발표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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윙헤드 2016-01-20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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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와 쟁점으로 읽는 20세기 한일관계사 / 정재정
1장 일본제국의 유산과 남북 분단국가
"일본 외무성 정무국장 구라치 데쓰키치가 보건대, 당시 한국과 일본에는 한국강점을 '일한 양국이 대등하게 합일'하는 것처럼 이해하여 '합방'이나 '합병'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자가 있었다. 이는 일본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한국인이 정말로 일본인과 동일한 대접을 해달라고 달려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으로서는 '한국이 완전히 폐멸로 돌아가 제국 영토의 일부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폐멸'이나 '식민지' 같은 노골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도 없었다. 한국이 일본에 대해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냐고 항의한다거나, 외국이 일본에 대해 한국을 침략하는 것 아니냐고 비판해도 곤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폐멸'이라는 실질적 의미를 포함하면서도 '그 어조가 너무 과격하지 않은 문자'를 선택하여 '병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 것이었다. '양두구육'이라는 고사성어가 딱 어울리는 작태였다."(35)
# 일제와 맺은 조약(한일의정서~한일병합조약)들의 유효성에 대한 한국의 입장
1. 강폭·협박에 의해 강제로 맺어졌다.
2. 조약 정본에 황제의 서명날인이 없다.
3. 조약에 대한 비준서가 없다.
따라서, 일본의 식민지배는 불법·부당한 강점(군사점령)이다.
# 한국(당시 대한제국)과 맺은 조약(한일의정서~한일병합조약)들의 유효성에 대한 일본의 입장
1. 강제행위가 있었더라도, 국가 대표자에 대한 협박인지, 국가 자체에 대한 협박인지 국제법상 판단 기준이 모호하다.
2. 조약서 정본에 기명 조인하는 사람은 국가원수가 아니라 특명전권대사, 공사 또는 외무대신인 경우가 통례이다.
3. 모든 국제협정에 비준서가 있는 것은 아니므로 비준서가 없다는 사실이 무효론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2장 한일조약 체결과 국교재개
# 한일조약과 부속협정
1. 기본조약 :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기본관계에 관한 조약
2. 부속조약 : 청구권협정, (재일한인의) 법적지위협정, 어업협정, 문화재협정
# 한일회담의 역사
1. 예비회담(1951. 10. 20~1952. 2) : 재일한인의 법적 지위와 어업 문제 해결 등을 요구했으나 일본이 거부함
2. 제1차 회담(1952. 2. 15~1952. 4. 21) : 일본이 한국의 대일 청구권과 연합국의 대일 배상청구를 상쇄할 목적에서 한국에 남겨놓은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구함
3. 제2차 회담(1953. 4. 15~1953. 7. 23) : 한국은 일본의 대한 청구권 철회를, 일본은 평화선 철폐를 요구함
4. 제3차 회담(1953. 10. 6~1953. 10. 2) :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타 간이치로가 식민지배가 정당했다는 망언을 하면서 무산됨
5. 제4차 회담(1958. 4. 15~1960. 4) : 기시 노부스케가 구보타 발언을 철회하고, 106점의 문화재를 반환하는 등 유화적 제스처를 취했으나 재일한인 '북송' 문제와 4·19 혁명으로 중단됨
6. 제5차 회담(1960. 10. 25~1961. 5. 15) : 5·16 군사정변으로 중단됨
7. 제6차 회담(1961. 10. 20~1964. 4) : 동아시아 안전보장을 위한 경제협력론이라는 전제 하에서 진행. 청구권을 경제 협력 방안의 하나로 다루는 선에서 합의함
8. 제7차 회담(1964. 12. 3~1965. 6. 22) : '기본조약' 내용을 최종 검토하고 문서를 작성함
"6차 한일회담에 임한 이케다 정부가 청구권 문제를 경제협력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 것은 한국 정부의 의중을 꿰뚫은 것이었다. 이케다 정부는 경제적 곤란과 개발자금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의 군사정부에 유상·무상으로 일본 역무役務를 제공함으로써 한국의 청구권 요구를 묵살하고 일본 기업의 한국 진출을 선도하겠다는 속셈이었다." "박정희 정부는 한일회담을 조기에 타결하기 위해 1962년 10월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일본에 파견하여 외무대신 오히라 마사요시와 담판 짓도록 했다. 이때 작성된 소위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청구권 문제 해결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일본이 한국에 제공할 금액은 무상원조 3억 달러, 유상원조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 이상이었다. 그렇지만 이 메모에는 자금의 명목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한국은 '청구권자금'으로, 일본은 '경제협력자금'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긴 것이다."(93-4)
"7차 회담에서 한국은 1910년 한국병합조약과 그 이전의 협약이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과거 조약이 일본의 패전 혹은 대한민국의 수립까지는 유효하며 합법적이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은 한반도 전역의 유일 합법정부임을 주장했고, 일본은 북한을 고려해 유엔 총회 결의에 명시된 범위의 합법정부라는 표현을 고집했다." "결국 구舊조약 무효 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무효이다'라는 문구를 삽입하고, 유일 합법성 문제는 '유엔 총회 결의 제195(3)호에 명시된 바와 같은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는 문구를 채택했다. 한국 정부는 '이미'라는 시점을 구舊조약을 체결한 때부터로, 일본 정부는 일본의 패전 이후로 해석했다. 한국의 관할권도 한국 정부는 한반도 전체를, 일본 정부는 38도선 이남을 상정하고 있었다. 이처럼 전후처리의 근본과 관련된 역사인식의 괴리를 메우지 못한 채 마무리된 '기본조약'은 두고두고 논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화근을 남겼다."(96)
"한일 간의 청구권 논의는 연합국과 일본 간의 전후처리 협상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의거하여 진행되었다. 곧 미국의 대일 강화 방침인 배상요구 포기 정책의 영향을 받았다. 일본은 이를 방패삼아 한국에 법적 근거에 입각한 청구권 문제 제기를 요구하고 경제협력 방식의 채택을 유도했다. 미국 주도의 전후 국제질서 속에서 경제개발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부심하고 있던 한국 정부는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청구권협정'에서 불거진 문제는 민간 차원의 보상 문제였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가 국가보상의 방법을 채택하도록 압박함으로써 청구권자금을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한국 정부는 국내에서 개인보상의 액수를 줄이고 시기를 늦추며 청구권자금을 경제개발에 집중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개인보상은 1974년에 관련법을 만들어 불충분하게나마 시행했다. 이로써 개인의 청구권과 재산권이 국익에 종속된 형태로 처리된 셈이다."(116-7)
# (청구권협정, 제2조) 양국과 그 국민의 재산·권리 및 이익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을 확인한다.
"한일조약의 부정적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총체적으로는 한국에 더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먼저 정치적·국제적 효과를 살펴보자. 1970년대 중반까지 일본에서는 공산당·사회당 등이 큰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좌파 지식인들의 영향력이 두드러졌다. 그들은 대체로 남북한 문제에서 음으로 양으로 북한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런 분위기는 집권 자민당 안에도 존재했다. 그렇기 때문에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에 작은 변화만 생겨도 일본 정부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이나 국교수립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때마다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게 북한에 접근하는 것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그 논거가 바로 '기본조약'에 규정되어 있는 '유일한 합법정부' 조항이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의 요청을 완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을지라도 결과적으로는 북한과의 정치적 교류를 자제하는 태도를 보였다."(121)
"다음은 경제적 기여의 측면이다. 한국 정부는 회담 초기에 '변제권'이라는 명목으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다가 막판에 '청구권'으로 선회함으로써 6억불 이상의 경제개발자금을 획득했다. 국내적으로는 청구권자금이라는 명분도 확보할 수 있었다. 반면 일본 정부는 청구권자금을 배상이 아닌 경제협력자금이라고 주장했다." "청구권자금은 당시 일본의 외환사정으로 볼 때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한국의 경제성장으로 일본 상품의 수출이 크게 증가할 것을 감안하면 일본 정부에게도 큰 부담은 아니었다. 더구나 한국이 자유 진영의 반공국가로 안정적으로 발전하여 일본의 안보방벽 역할을 했기 때문에 더욱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한일 간의 청구권 협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미국 정부도 한일 양국의 국교 정상화로 동북아시아에 한·미·일 협력 체제가 견고하게 구축되는 기반이 조성되었다고 환영했다."(122-3)
"한일회담은 애초부터 '과거사' 청산을 제기할 만한 구조적 기반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근거는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 정부는 '과거사' 청산에 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할 능력이 없었다.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상황에서 남북의 민족 간 대립은 한국 정부로 하여금 반공을 국가수호의 최우선 과제로 삼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고, 반공논리는 친일논리와 연결되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둘째, 일본 안에서 과거를 반성하는 세력은 한일회담 자체를 반대했다. 그러므로 일본 측에서 보더라도 한일회담이 '과거사'를 반성하는 형태로 진행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셋째, 한일회담의 법적 근거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반공논리에 기초하여 일본에게 배상책임을 지게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일회담에서도 '과거사'를 청산하는 조약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결국 한국은 '과거사' 청산이 불가능한 조건 아래서 한일회담을 추진한 셈이었다."(126)
"1965년 한일조약의 체결에는 한일 양측 모두 '만주인맥'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정일권 국무총리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이었고,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은 만주국 산업부 차장, 오히라 마사요시, 시나 애쓰사부로, 오노 반보쿠 등의 막전막후 인물들은 만주국 관리나 관동군 출신이었다. 전후 한일 인맥의 원류를 이룬 이들은 양국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의 중요성과 정당성을 내세워 공생했다. 정일권-김종락 라인, 고노-우노-시마모토 라인은 한일교섭에서 조정자 역할을 수행했다. 아울러 '독도밀약'이라는 공동전략을 수립하고, 기시-야쓰기 라인과 경쟁하면서 '파트너십'으로 발전해 나갔다. 이들은 비공식적 조정활동을 통해 한일회담 타결에 큰 역할을 하고, 한일조약 체결 이후에는 밀월시대를 구가했다." "만주인맥은 양국의 협력과 공조가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정책결정자 집단에 영향을 미치는 전문가 네트워크로 기능했다."(134)
3장 재일한인과 남·북·일 관계
"재일한인이 귀환을 망설인 주된 이유 중 하나는 미·소 점령하에 있던 한반도의 정황이 불안정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연합국 최고사령부 아래 일본 정부가 송환 정책을 마련하면서 귀환할 때의 소지금과 수하물을 제한한 것이었다. 재일한인이 현금 1,000엔, 화물 250파운드 이상을 가지고 귀국하는 것을 금했던 것이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활한 재일한인들에게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재일한인 중에서 한반도로 일단 귀환했다가 고향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생활이 불안정해지자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사례로 눈에 띄기 시작했다. 또 일본인과 결혼하여 일본인 가족과 함께 살기 위해 그냥 일본에 주저앉는 재일한인도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60만 명 가량의 재일한인이 일본에서 계속 생활하게 되었다. 재일한인의 대부분은 한반도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먹고사는 현실을 생각하면 당장은 일본에서 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166)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귀환의 물결이 한 고비를 넘긴 1946년에 접어들어서도 재일한인의 국적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반면에 일본 정부는 강화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재일한인은 일본 국적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 정부가 재일한인에게 일본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 정부는 1945년 말 선거법을 개정하여 대만인과 한국인의 참정권을 정지시켰다. 또 1947년 일본국헌법 발효 전날에는 마지막 칙령으로 '외국인등록령'을 시행하고, 재일한인을 '당분간 외국인으로 간주한다'고 선언했다. 재일한인에게도 외국인등록이나 강제퇴거 등의 규정을 적용한 것이었다. 이처럼 일본 정부는 재일한인을 일본 국적자로 규정하면서도 실제로는 외국인으로 관리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였다. 일본의 이해득실을 계산하여 그때그때 편의적으로 대했던 셈이다."(168)
"재일한인들은 한민족으로서 생활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 1945. 10~1949. 9)은 당시 재일한인 최대의 상호부조단체로서 이런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조련은 나중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 1955. 5~현재)로 계승되었다. 조련이 주력한 것은 민족교육이었다."(168-9) "재일한인들은 한반도 정세에 강한 관심을 보이며 반응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영·소·중에 의한 신탁통치 실시가 결정되자, 신탁통치 반대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민족단체로 '재일본조선거류민단'(민단, 1946. 10. 결성)을 조직했다. 민단은 1948년 8월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으로 조직명을 개칭했다. 민단은 강령 첫머리에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시國是를 준수한다"라는 조문을 두어 한국 국민이라는 주지主旨를 분명히 밝혔다. 민단은 1994년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으로 이름을 바꿔 현재에 이르고 있다."(171)
"1955년에 출범한 조총련은 재일조선인운동의 임무에 대해 논의를 거듭한 끝에 다음과 같은 활동방향을 결정했다. 첫째, 재일조선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재외공민이고, 본국 동포와 단결하여 조국통일과 민주적·민족적 권익을 옹호해야 한다. 둘째, 동시에 일본공산당과의 공동투쟁을 중지하고 일본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조총련이 이러한 주의주장을 실천에 옮긴 상징적 사업이 바로 재일한인 '귀국운동'이었다." "북한이 주거·교육·의료와 식량까지 무료로 지급한다, 실업이나 차별의 걱정은 전혀 없다, '귀국' 동포는 조국의 공민이 된다는 등의 장밋빛 선전은 빈곤과 차별 속에 허덕이던 재일한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차피 일본에서 고생할 거라면 조국건설에 이바지하며 고생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았다. 1956년 생활보호비 삭감 이래 체험한 궁핍한 생활과 북한에서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희망이 선명하게 대비되었다."(180-1)
# 북한이 북송을 추진한 의도
1. 중국 지원군의 귀국 공백을 메울 노동력 확보
2. 재일한인의 자본과 기술을 바탕으로 경제발전 성취
3. 한미일 관계에 균열을 가져오는 효과
4. 선전선동에서 남한을 제압하는 효과
"1965년에 한일 '기본조약'과 더불어 재일한인의 '법적지위협정'이 체결되자 일본 정부는 해방 전부터 일본에 살아온 한국 국적자와 그의 자손(2세)에 한해 일본영주권을 인정하게 되었다. 이 '협정영주자'에게는 강제퇴거명령의 적용을 완화하고, 국민건강보험 가입을 인정했다. 그리하여 한국 국적을 취득한 재일한인의 재류조건이 '조선' 국적을 가진 재일한인보다 조금 유리하게 개선되었다. 이런 연유도 있어서 그 후 한국 국적을 취득하는 재일한인의 수가 늘어나 '조선' 국적의 재일한인 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1970년의 외국인등록에 기입된 국적란을 보면, 한국이 약 33만 명(54%), 조선이 약 28만 명(46%)이었다." "그런데 '협정영주자'가 되어도 강제퇴거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은 아니었다. 그들조차 공적 사회보장제도의 틀 밖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었다. 또한 3세 이하 후손들의 영주권은 협정 발효 이후 25년 이내(1991년까지)에 다시 협의하도록 미뤄두었다."(190-1)
4장 경제발전과 상호의존
"한일 경제관계는 다음과 같이 몇 시기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① 한일교역의 재개부터 6·25전쟁을 거쳐 장면 정부가 붕괴된 1960년까지, ② 5·16쿠데타 이후 한일조약 체결을 거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979년까지, ③ 신군부 집권부터 민주화 과정을 지나 외환위기를 맞은 1997년까지, ④ 민주화 실현 이후 여야 정권교체를 경험하고 국제금융위기를 거친 2013년까지이다. 이 시기구분은 한국의 정치변동을 지표로 삼은 것처럼 보이지만, 각 시기마다 한일간의 경제관계에도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①의 6·25전쟁은 한국 경제가 다시 일본 경제와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고, ②의 한일조약은 경제관계의 밀월을 창출했으며, ③의 플라자합의(1985)는 3저호황의 배경이 되었고, ④의 외환위기는 일본의존에서 탈피하는 전기가 되었다. 각각의 시기마다 한국과 일본의 경제구조에 큰 변화가 일어났고, 그 변화는 한일 경제관계의 양적·질적 변화와도 깊이 결합되어 있었다."(210)
"패전 이후 곤경에 처해 있던 일본 경제를 단숨에 부흥시킨 것은 1950년 한국에서 벌어진 6·25전쟁이었다. 미국이 대량의 군수물자를 일본에 주문함으로써 일본 경제는 고도성장 궤도에 진입할 수 있었다. 이른바 '6·25전쟁 특수'였다."(213) "6·25전쟁의 특수수입으로 일본의 국제수지는 흑자로 돌아서고 외화보유고는 급증했다. 광공업 생산지수는 1950년 10월에 이미 아시아-태평양전쟁 전(1934~1936) 수준을 돌파했다. 1953년도에는 6·25전쟁 발발 이전보다 85%나 증가했다. 실질국민소득도 1951년도에 아시아-태평양전쟁 이전 수준을 넘었고, 1953년도에는 6·25전쟁 시작 이전보다 38% 상승했다." "그리하여 일본 국민은 일상생활에서 '3종의 신기神器'라 불린 세탁기, 텔레비전, 냉장고를 마음껏 사용하며 소비와 안락의 꿀맛을 즐기게 되었다. 6·25전쟁을 현장에서 겪은 한국과 한국인의 비참한 신세와는 너무나 다른 일본과 일본인의 처지였다."(215-6)
"박정희 정부(1961~1979)는 경제개발에 중점을 두고 근대화 정책을 저돌적으로 추진했다. 박정희는 만주경험 등의 배경을 살려 메이지유신의 부국강병 이념을 수용하고, 일본의 개발국가형 발전전략을 적극적으로 모방했다." "1960년대 이후 일본은 사양화된 섬유산업을 한국으로 이전했다. 한국은 일본의 하청생산과 가공무역을 통해 섬유산업을 발전시켰다. 일본에서 포화상태에 이른 섬유 이외에도 화학, 철강, 자동차, 전자산업 등이 하청, 설비이전, 기술이전, 합작, 직접투자 등 다양한 형태로 한국에 진출했다. 한국은 일본의 기술을 모방하거나 학습하여 물건을 생산했다. 핵심기술, 핵심부품 및 자본재 등은 대부분 일본으로부터 수입하거나 일본에 의존했다. 한국과 일본 사이의 이같은 기술 수준과 산업발전단계의 차이는 수출구조, 투자내용, 소득 수준 등 경제 전반에 수직적인 관계를 형성시켰다. 이른바 수직적 분업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220-2)
"한국 경제는 1980년대 중반 이후, 특히 1986년부터 1988년 사이에 '저달러, 저금리, 저유가'라는 이른바 '3저'에 힘입어 침체에서 벗어나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는 계기를 맞았다. '저달러'는 쌍둥이 적자(재정적자, 무역적자)에 시달려온 미국이 1985년 플라자합의를 통해 달러화의 평가절하를 용인한 데서 기인한다. 이로 인해 '엔고현상'이 나타난 해외시장에서 일본 제품에 대한 한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이 강화되었다." "각국은 제2차 오일쇼크 이후 침체에 빠진 경기를 부양시키려고 금리인하 정책을 펼쳤다. 플라자합의에 의한 달러화의 평가절하는 그 추세에 더 큰 힘을 실어주었다." "더욱 다행스럽게 1985년 12월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들이 고정유가제를 폐지하고 시장점유율 확대 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저유가' 현상이 나타났다." "(3저는 한국 경제에 수출 증대와 외채상환 부담 경감은 물론) 생산비 절감과 가격경쟁력 회복을 가져왔고, 그에 따라 무역수지와 경상수지도 흑자를 기록했다."(241-2)
"1980년대 이후 국제적으로 조성된 '3저'라는 호조건 속에서 한국의 중화학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한일 간의 수직적 분업구조에 약간의 변화가 나타났다. 한국은 일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기술도입 및 투자유치를 다각화했고, 일본은 부메랑 효과를 두려워하여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주저하기 시작했다. 이에 더하여 박정희 정부 붕괴 이후 기존 네트워크의 약화와 정치정세의 불안이 일본의 대한對韓 투자를 감소시켰다. 1986년 이후 일본의 대한 투자건수가 3~4년 동안 일시적으로 증가한 것은, 1985년 플라자합의 이후 엔화강세와 자본잉여로 일본 자본이 해외로 적극 진출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1990년대 들어서 직접투자의 핵심시장을 아시아의 신흥공업국, 동남아시아, 중국 등으로 전환했다. 그에 따라 대한 투자건수와 평균 투자금액도 점차 감소했다. 1992년 일본의 버블경제가 붕괴한 이후 일본 자본의 해외진출은 전반적으로 줄어드는 경향을 보였다."(245-6)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한국은 외국 자본 유치를 원활하게 하고자 규제를 완화하고 각종 개혁을 추진했다. 김대중 정부는 국제통화기금의 압력 하에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외국 자본의 투자지분 50% 상한선 철폐, 외국 자본에 의한 인수합병 자유화 등이 단행되었다. 일본에 대해서는 1970년대 이래 시행해온 수입 다변화제도를 해제함으로써(1999) 자동차 등을 포함한 일본 수입품이 한국 시장에 대거 몰려들었다. 김대중 정부는 2000년 12월 외국인투자촉진법을 개정하여 외국 자본이 부동산 및 주식시장에도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 이후 하향일로에 있던 외국인 투자가 다시 상승기조로 돌아섰다. 특히 일본은 한국의 부동산시장이나 금융시장의 수익률이 높아질 것을 예상하고 투자를 확대했다. 문화·오락사업에도 일본의 직접투자가 급증했다. 김대중 정부가 IT 및 문화산업을 두텁게 지원한 것이 일본 자본의 투자를 촉진했다."(249)
5장 인간왕래와 문화 교류
"1960년대 들어 한국은 공식적으로 일본과 문화 교류를 시작했다. 1965년의 한일 국교 정상화는 이에 박차를 가했다. 박정희 정부는 국가발전을 위해 일본의 지식과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열심이었다. 반면에 국민감정에 거부감을 주는 일본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데는 인색했다. 한국 유학생은 일본에 보내되, 일본 가수는 한국에 오지 못하게 했다. 한국의 필요에 맞게 선택적으로 일본 문화를 수용한 셈이다. 한국의 여론은 언제나 일본의 대중문화가 '저질', '퇴폐'라는 이유를 들어 유입을 금지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의 대중문화를 통해 공산주의나 반정부사상이 침투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리고 외국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 정책을 실시했다. 1961년 '반공법'에 기초하여 '공연법'을 만들었다. 그 골자는, 외국인이 상업적인 공연을 하거나 외국인이 출연하는 공연의 경우 정부허가를 받도록 한 것이었다."(277-8)
"1988년 서울올림픽은 문화개방 정책에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사실 한국 정부는 1980년대 말부터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자는 논의를 시작했다. 노태우 대통령 스스로 한국은 일본 음악이나 영화 등의 대중문화를 충분히 수용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문화부장관도 구 공산주의권 문화까지 수용하는 마당에 일본 대중문화만 금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외무부도 일본 대중문화 수입을 점진적으로 개방하는 게 좋다는 뜻을 밝혔다." "그런데 정부와 언론 일각은 여전히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수준이 낮다,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종속관계에 빠질 수 있다 등이 그 이유였다. 때마침 일본군 '위안부' 문제, '전후 50주년 결의' 문제 등이 부상하여 반일여론이 조성되자, 일본 대중문화 개방은 실행에서 멀어져갔다. 게다가 1997년 한국이 외환위기에 휩쓸리면서 한일 문화 교류는 시급한 우선과제가 될 수 없었다."(280-1)
"김대중 정부는 출범 직후인 1998년 4월 '한일문화교류정책자문위원회'를 구성하고 일본 대중문화의 단계적 개방 방침을 마련했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에 맞춰 그해 10월에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에 대한 제1차 개방(1998. 10. 20)은 영화, 비디오 소프트 분야는 '4대 국제영화제 수상작'에 한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일본어판 만화와 잡지는 모두 공식적인 수입과 판매를 허용했다." "제2차 개방(1999. 9. 10)은 영화, 비디오의 개방 기준이 되는 공인 국제영화제 수상작을 70개로 확대했다." "제3차 개방(2000. 6. 27)은 연극, 영화에 대해서는 성인용을 제외하고 전면 허락했고, 대중가요 공연은 전면개방되었다." "제4차 개방(2004. 1. 1) 때는 일본 영화 상영에 대한 모든 규제를 없앴다. 음악 CD, 게임소프트 분야도 완전 개방되었다. 방송에서는 오락 프로그램과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규제가 풀렸다."(281-3)
6장 역사갈등과 평화공영
"한국에서는 일본의 주요인사, 곧 고위관료나 유명 정치인이 한일관계의 역사에 대해 비뚤어진 언사를 늘어놓는 것을 '망언'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한국을 매도하기 위해 사실을 악의적으로 왜곡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한일 간에 불거지는 역사갈등은 대개 이 '망언'에서 비롯된다." "일본 요인의 '망언'에 담긴 역사인식의 요지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일본은 한국을 '강점'한 것이 아니라 합의에 따라 '합법적'으로 '합방'했다. ② '한일합방'은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다. ③ 일본은 '한일합방' 이후 한국의 발전과 한국인의 생활향상을 위해 노력했다. 따라서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 '수탈'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진실과 어긋난다. ④ '창씨개명', '일본어교육', '징병' 등은 한국인과 일본인을 똑같이 대우하려는 '일시동인', '내선일체'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조치였다. ⑤ '한일합방'과 그 후의 일본통치는 오늘날 한국의 발전에 도움을 주었다."(293-5)
"사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무라야마 도미이치 연립정부는 각의결정을 통해 '전후 50주년 종전기념일을 맞아서'라는 수상 담화를 발표했다(1995. 8. 15). 이른바 '무라야마 담화'이다." "'무라야마 담화'는 각의결정을 거쳤다는 점, 근대에 일본이 근린 제국을 침략하고 지배한 사실을 분명히 지적하고 통절한 반성과 사과를 표명했다는 점에서 종래 수상 개인의 소신 표명보다 내용과 형식이 크게 진일보한 것이었다. '종전 50년'을 맞아 전후 결산의 일환으로 발표된 '무라야마 담화'는 이후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을 규정하는 가이드라인이 되었다. 그런데 '무라야마 담화'에서는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대상이 분명하지 않았다. '근린 제국'이라고 뭉뚱그려 표시한 것이다. 이를 한국으로 특정하여 지칭한 것이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수상의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선언이었다(1998. 10. 8).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반성한) 오부치 수상의 발언은 '무라야마 담화'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298-9)
"그 후 일본의 역대 정부와 수상은 공식적으론 '무라야마 담화'에 담긴 역사인식을 존중하고 계승한다는 태도를 취했다." "일본 정부와 역대 수상의 역사인식에서 또 주목할 만한 것은 '한국병합 백 년'을 맞아 민주당의 간 나오토 수상이 발표한 담화(2012. 8)였다. 여기서 간 수상은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면서 "3·1운동 등의 심한 저항에서도 보였던 대로, 정치적·군사적 배경 아래 당시의 한국인들은 그 뜻에 반해 행해진 식민지 지배로 인해 나라와 문화를 빼앗기고 민족의 자긍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라고 말했다. '한국병합조약'의 강제성을 명시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식민지 지배가 한국인의 의사를 무시한 강제적 행위였음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다. 간 나오토 수상의 담화는 민주당 정부가 급격히 몰락함으로써 한일 양국에서 잊혀져버렸지만, 그 선진성만큼은 좀 더 높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299-300)
"일본 정부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한일조약에 의해 국가배상은 이미 종결되었다는 공식 견해를 견지했다. 전후 일본에서 분리된 한국은 일본과 전쟁을 벌인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배상 문제가 없을뿐더러, 분리에 따른 재산·청구권 문제는 한일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결되었다는 것이 일본 정부의 기본입장이다." "이에 대해 노무현 정부는 청구권 협정의 법적 효력범위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밝혔다(2005. 8. 26). 곧 일본군 '위안부' 등 일본 정부·군대 등 국가권력이 관여한 반인도적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청구권협정에 의해 해결된 것으로 볼 수 없고, 일본의 법적 책임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또 원폭 피해자, 사할린 잔류 한인 등의 문제도 청구권협정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종래와 다르게 별도의 보상조치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사안들은 한일회담 과정에서 의제로 등장하지 않았거나, 한일조약 체결 이후 새롭게 부각된 사안이라는 게 한국 정부의 주장이다."(318-9)
"최근 한국의 사법부는 일제하의 피해보상 문제에 대해 잇달아 엄중한 판결을 내려 소송운동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였다. 헌법재판소는 일본군 '위안부'와 원폭 피해자 문제를 한일청구권협정의 규정에 따라 해결하지 않은 한국 정부의 행위(이른바 부작위不作爲)가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2011. 8. 30). 곧 이 문제들이 한일청구권협정에 의해 법적으로 해결되었는지 아닌지에 대해 한일 사이에 해석상 분쟁이 발생하고 있는데도 한국 정부가 정해진 절차에 의거하여 분쟁해결을 시도하지 않는 행위가 헌법에 위반된다고 판시한 것이다. 그리고 대법원은 양국 정부 차원에서 이미 소멸되었다고 여겨져온 강제징용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이 민사사건 차원에서 살아 있다고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2012. 5. 24). 2013년 들어 고등법원은 대법원 판결에 의거하여, 피소된 일본 기업은 징용 피해자들에게 일정한 금액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잇달아 내렸다."(332)
7장 미래와 세계를 향한 한일관계의 재구축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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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20-03-09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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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한일관계의 원인과 형성과정을 확인할 때 하나의 길잡이가 되기를...
한일관계가 좋아질 기미가 잘 안 보이는 요즈음이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문제연구소에서 기획된 ‘20세기 한국사’ 시리즈의 하나로서, 동북아역사재단 이사장을 지내고 오랫동안 한일역사 공동연구에 참여해온 정재정 교수의 책이 반갑다. 정재정 교수는 책을 통해 장기적이고 종합적인 관점에서 현대 한일관계의 역사를 거시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한일관계 개선에 필요한 지혜를 제공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그동안 한일관계를 다루는 많은 책들이 특정 분야에 국한된 논의만을 다룬 경향에 비춰봤을 때, 여러 분야를 포괄하여 한일관계의 역사를 조망하고 있는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점에서 저자가 바라듯이(14쪽) 한일관계를 이해하는 데 ‘조그만 길잡이’ 내지는 ‘친근한 안내서’ 정도로는 충분히 성공하고 있지 않은가 한다. 이 책에서는 현대 한일관계의 발단으로서 일제의 ‘한국강점’ 문제와 남북 분단국가에 이르는 일본제국의 유산 문제, 한일회담 추이와 한일조약 체결 및 국교재개, ‘버려진’ 재일한인의 문제와 그를 통해본 남.북.일 관계, 경제발전 과정에서 양국의 관계, ‘한류’와 ‘일류’ 같은 문화 교류의 차원, 역사인식의 상호이해와 평화공영에 관련한 문제 등이 폭넓게 다뤄지고 있는 것이다.
책을 통해 여러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강점’인지 ‘합방’인지 한일 양측의 논리를 알 수 있다. 1965년 체결된 한일조약에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침략과 지배가 명시되지 않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고, 한국병합조약에 대한 ‘무효’ 문제라든가 한반도에서의 ‘유일한 합법정부’에 대한 양측의 입장 차이를 해소하지 못한 채 봉합한 한계가 존재한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이때의 조약 체결에서 덮어뒀던 문제들이 현재 한일관계에서의 역사인식 갈등이나 식민지배와 전쟁 과정에서의 배상문제, 북일 수교 교섭 등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 한편 국교 재개 과정에서 한일 사이의 비공식 채널의 가동과 밀사외교, 포항제철 건설 등 경제관계에서 한일 간 인맥이 작용한 매커니즘 등을 설명한 부분도 흥미롭다. 또한 한일 역사갈등의 연원이 무엇이고, 역사 교과서 문제라든가 야스쿠니산사 참배 갈등, 독도 영유권 논쟁, 전후배상 문제 등에 대한 배경을 이해하는 데도 이 책은 도움을 준다. 이처럼 이 책은 20세기 한일관계와 관련하여 기본적인 상식을 제공해준다. 이 책을 일독하면 매스컴에 보도되는 한일 관련 사안들이 어떤 논리와 배경에서 작동하는지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아쉬움은 서술상 균형에 관한 부분이다. 6장 역사갈등과 평화공영 부분에서는 일본 쪽의 역사 ‘망언’이라든가 일본의 역사인식에서의 특징 등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로 일본 쪽 역사인식의 문제 등을 서술하였고, 한국에서의 역사인식의 문제는 없는지 의문이다. 또한 ‘글을 맺으며’ 부분에서는 1990년대 이후 한일관계의 위상 변화를 설명하면서 한국은 민주화 이후 대체로 성장의 시각에서, 일본은 전반적인 보수화 국면에서 역사인식과 ‘과거사’ 처리에서 퇴행적인 모습이 보이는 시각으로 서술된 느낌이다(359~360쪽). 이런 부분들을 읽을 때면, 한국보다는 일본에서의 문제들을 지적하는 데 더 치우쳐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는다. 작년에 한국 내에서도 소위 ‘뉴라이트’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논란이 일었고, 여전히 논란은 수면 아래에 잠복중이다. 교육행정 당국과 일부 보수언론은 기존 교과서의 역사서술을 일방적으로 ‘좌편향’이라고 매도하면서 성장적.팽창적인 사관을 담아내고, 때로는 ‘친일’과 관련하여 논란이 되는 내용을 서술한 교과서를 의도적으로 옹호한 바 있다. 이런 점을 목도할 때 저자가 한일관계에서 한국에서의 한계와 문제점에도 서술을 할애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저자가 그랬다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방의 잘못만을 지적하고 나아가 규탄하는 방식은 결국 상대방으로부터의 또 다른 비난의 화살로 돌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그동안 한일관계에서 쳇바퀴 돌듯이 봐왔다. 이런 방식으로는 말 그대로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를 재구축하기 어렵다. 이와 함께 내셔널리즘 중심의 역사인식과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한국사회는 일본을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자세를 갖추고 있는지, 그런 분위기를 사회적으로 조성해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이 필요할지를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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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wmaha 2014-04-14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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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고도 가까운 한일, 어떤 관계를 지향할 것인가?
이 책은 한일 병합(대한제국 패멸)부터 최근의 한일 문화교류와 독도를 둘러싼 갈등까지 말 그대로 근현대 한일관계를 아우른 개설서이다. 좋건 싫건 일본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또 여러 면에서 닮은 이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말마따나 20세기 한일관계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서는 극히 부족하다. 식민지기를 전공한 역사학자가 저술한 이 책은 주제별로 학계의 연구성과를 충실히 반영하면서도 읽기 쉬운 대중 개설서를 지향했다. 때문에 책을 처음 접했을 때 그 자체로 기쁘고 반가웠다.
책은 크게 식민지기의 한일관계, 한일회담, 재일조선인(재일한인), 현대 한일 경제 및 문화 역사문제, 여섯 가지 주제를 포괄하고 있다. 주제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고 또한 역사적이면서도 시사적인 주제들이기도 하다. 근현대 굳이 구분을 하자면 근대보다는 해방 후의 현대 한일관계가 보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각각의 주제 또는 논쟁점들의 개요와 골자를 균형잡힌 시각에서 전달하고자 했다는 느낌이 든다. 식민지기 유산의 단절/계승/극복의 문제라든지 역사의식/경제적 측면에서 한일회담의 평가 여하, 한일 경제교류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 등을 골고루 언급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한일관계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물론 보다 학술적인 관심을 가진 독자를 위해서도 길잡이 역할을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현재 한일관계의 원점이 1965년에 체결된 한일협정이라고 한다면 한일협정(회담)에 대한 평가는 이후의 한일관계에 대한 평가는 물론 앞으로의 전망과도 연결되는 문제이다. 책에 서술되었듯이 한일회담은 과거사 인식의 측면에서는 부족함을 남겼지만, 한일관계 정상화를 통해 경제적 성장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볼 여지가 있다, 라는 정도가 일반적인 평가인 것 같다. 앞으로 이러한, 어떻게 보면 절충적이라고도 할 수 있을 이러한 시각을 넘어서는 게 가능할까? 이 책은 이런 의문 또한 독자에게 던져주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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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terfjj 2014-04-07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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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일본, 상호인식의 역사와 미래』



한국과 일본이 가져왔던 서로에 대한 인식의 역사적 변천을 잘 정리한 책이다.
그 특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책 46쪽 이하).
① '해바라기성 주변문화의 갈등양상'이다. 문화의 중심이 중국에 있었던 전근대시기에는 한국이 '소중화'로서 일본을 문화적으로 변방·야만시하고, 국제질서와 문화의 중심이 서양으로 옮겨지자 일본은 과감하게 아시아를 벗어나 그 새로운 관점에서 미개·야만시하였다. 이러한 변경의식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서로 상대방의 중심성을 인정하지 않고, 각자를 중국과 서구의 아류로 멸시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이다.
② 상대에 대한 인식이 우월감 속의 열등, 열등감 속의 우월이라는 분열적 양상을 띠고 있다. 양국 모두 열등감을 부자연스로운 자존자대(自尊自大)로 표현하였고, 그것을 통해 감정적인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경향을 드러냈다.
③ '근친증오' 현상이다. 양국은 크게 보면 대동소이하다고도 할 수 있는데, '대동'보다는 '소이'에 집착하는 '상호멸시관'을 가지고 있다. 특히 매스컴에 의해 상호인식상의 갈등이 악순환, 증폭되는 '거울효과'를 가진다.
④ '자민족중심주의'이다. 한국의 일본이적관, 일본의 조선번국관이 이어지고 있다.
일본이 과거사에 대하여 경제규모에 걸맞은 책임 있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 가장 필요하겠지만, 일본이 할 일이 있는 반면/동시에 우리가 할 일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1901년 러일전쟁을 침략전쟁으로 규정, 당국의 기만적인 선전을 비판한 일본 사회민주당의 사회주의자들(고도쿠 슈스이, 기노시타 나오에, 가타야마 센 등), 1907년 '대한결의(對韓決議)'를 표명하여 조선의 독립을 일본 정부에 촉구한 도쿄사회주의유지회, 일본의 탄압정책을 비판하면서 3·1 운동을 지지한 야나기 무네요시, 요시노 사쿠조, 이시바시 탄잔, 또 그에서 이어진 마키무라 히로시, 나카노 시게하루 등 일본 좌파와 양심적 지식인 무리가 소수파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애석할 따름이다(책 35-36쪽).
한일 교류사, 상호인식사 등 관련 분야 연구를 꾸준히 내고 계신다. 책에 나온 참고문헌들을 중심으로 정리했다.
























한일관계사학회에서 낸 책들이 여럿 있다. 올해 『일본관찰』이라는 책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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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향 2020-06-22 공감 (15)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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