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6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38권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한국문화사

한국 문화사 간행사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를 내면서
1 무속의 역사적 전개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3 무당의 생활과 유형
4 무당굿놀이의 유형과 변화의 흐름
5 서구인 굿을 보다
[필자] 이태진, 허용호, 서영대, 이용범, 이경엽, 홍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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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요약 및 평론
―― 기능의 변천과 의례의 흐름을 중심으로 ――

1. 서론: 무속을 바라보는 입체적·통시적 관점

한국 역사와 문화의 기저에서 가장 오랫동안 호흡해 온 종교적 전통을 꼽으라면 단연 무속(巫俗)을 들 수 있다. 국사편찬위원회가 기획하고 서영대, 이경엽, 이용범, 허용호, 홍태한 등 학계의 중견 연구자들이 공동 집필한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는 그동안 미신이나 음사(淫祀)로 치부되며 도외시되었던 무속의 역사를 한국문화사의 당당한 주류 역사의 장으로 끌어올린 기념비적 노작이다. 본 고에서는 이 책의 제1장 ‘무속의 역사적 전개’와 제2장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를 중심으로 무속의 기능적 변천 단계와 의례의 통시적 흐름을 요약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 무속이 지닌 문화사적 위상과 한계를 비판적으로 평론하고자 한다.
2. 본론: 무속의 역사적 전개와 의례의 유형 변천
1) 한국 무속사의 3단계 시대구분과 기능적 전개

제1장의 필자 서영대는 한국 무속사를 잡다한 사실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무속이 지닌 세 가지 기능인 ‘정치적 기능’, ‘사회적 기능’, ‘개인적 기능’의 상실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통시적으로 체계화했다.

고대(선사시대 ~ 7세기 삼국시대 말): 정치·사회·개인적 기능의 공존 신석기 및 청동기 시대의 토제·골제 인형, 청동의기(방울, 거울), 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복골(復骨) 유물 등은 이미 이 시기에 직업적 종교전문가로서 무격(巫覡)이 존재했음을 증명한다. 고대의 지배자는 단순한 세속적 군주가 아니라 초자연적 세계와 소통하는 ‘무왕(Shaman-king)’이었다. 단군왕검이라는 명칭 자체가 종교적 지도자(단군)와 정치적 지배자(왕검)의 결합을 뜻하며, 부여의 영고나 고구려의 동맹 등 제천의례는 국가 통합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삼국시대 철기 문화의 발달과 전쟁의 빈번함으로 군사적 리더십이 강조되면서 무왕적 성격은 점차 퇴색했으나, 신라의 ‘차차웅’ 호칭이나 벌휴왕·선덕여왕의 예언 능력 등에서 그 잔존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4세기 이후 불교의 수용과 반도 통일을 거치며 무속은 사상의 체계성과 선진성에서 밀려나 정치적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기층 사회로 침전되기 시작했다.


중세(통일신라 ~ 16세기 조선 중기): 사회·개인적 기능의 유지 이 시기 무속은 국가 권력의 정당화라는 정치적 기능은 잃었으나, 지방 세력(향리)의 권위 유지와 지역민의 결속을 돕는 사회적 기능과 개인의 길흉화복을 다스리는 개인적 기능을 유지했다. 고려시대에는 국가 조직에서 무격이 배제되고 일관(日官)과 분리되었으며, 국가적 기우제에 동원되더라도 땡볕에 무당을 학대하여 하늘의 자비를 구하는 ‘폭무기우(曝巫祈雨)’의 형태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향리 계층이 주도한 산신제와 성황제(城隍祭)는 지역 공동체의 정체성 확인과 사회적 통합의 정신적 기초가 되었다. 나주 금성산신이나 광주 무등산신의 봉작을 둘러싼 지역 간의 경쟁은 향토의식의 발로였다. 왕실과 지배층 역시 정기적인 ‘별기은(別祈恩)’이나 치병, 유감주술적 저주, 조상의 혼령을 무격의 집에 모시는 ‘위호(衛護)’ 풍습 등을 통해 무속에 깊이 의존했다. 조선 초에는 성리학적 질서로 향촌을 재편하고 민속신앙을 흡수하기 위해 중국식 예제인 ‘이사제(里社制)’를 추진했으나 향촌의 무속적 전통이 너무 강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근세 이후(16세기 사림파 집권 ~ 현대): 개인적 기능으로의 축소 16세기 향촌사회를 성리학적 질서로 재편하려 한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향리 중심의 무속적 traditions에 대한 본격적인 탄압이 자행되었다. 남효온과 김시습 등은 성리학적 귀신론(음양이기의 운동)을 바탕으로 무속의 존립 근거를 논리적으로 비판했다. 관리에 부임한 사림들은 관아 내의 부근당(府君堂)을 철폐하고 무속적 동제(洞祭)를 유교식으로 변모시켰으며, 이에 따라 무속은 사회적 기능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을 통해 도성 내 야제 금지와 무격 거주 제한이 법제화되었고, 동서활인서 배치나 무세(巫稅) 징수 등의 간접적 억압책이 동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속은 ‘현세이익적·생존 지향적’ 성격 때문에 끝내 근절되지 않았다. 성리학은 우주 원리는 설명하지만 길흉화복의 조절이나 사후 세계의 정서적 해답을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왕실(명성황후의 별기은과 진령군 총애, 빈궁의 무고 사건)에서 기층 민중에 이르기까지 개인적 차원의 피흉추길(避凶追吉)은 조선 말기까지 지속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중국 전래의 관우신앙이 무속의 장군신과 융합되어 보급되었고 사회 불안을 반영한 천년왕국운동에 무격들이 동원되기도 했다.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의 유형과 형식적 고착

제2장의 필자 이용범은 무속의례를 ‘점복(占卜)’, ‘기양(祈禳)의례’, ‘기복(祈福)의례’로 유형화하여 각 시대별 실천 주체와 사회문화적 위상을 고찰했다.

고려 이전의 의례: 점복과 위기 대처 문헌상 확인되는 고려 이전의 무속의례는 점복과 기양의례(치병, 죽은 자와의 소통)에 한정된다. 고구려 차대왕 때의 흰 여우 해석이나 백제 멸망 전의 거북 등 글귀 해석 등 초기에는 정치적 자문 역할을 했으나 점차 일자(日者)나 일관에게 역할을 넘겨주었다. 유리왕의 탁리·사비 원혼 치병이나 태후 우씨의 혼령 소통 등 사귀(邪鬼)를 물리치고 죽은 자의 혼을 달래는 신내림(降神) 메커니즘은 이 시기부터 무속의 핵심 소통 방식으로 작용했다.


고려시대의 의례: 다종교 사회 속 굿 형식의 성립 고려시대에는 불교·도교와 교섭하며 오늘날과 같은 구체적인 ‘굿’ 형식이 성립되었다. 이규보의 <노무편>은 12세기 말 개경 민간 굿의 실상을 생생히 전하는데, 무당의 집 신당에 불교의 제석신(帝釋神) 감실과 도교의 칠성(七星)·구요일 무신도를 그려 붙이고 장구(와고) 반주에 맞춰 춤과 노래, 공수(신의 말)를 내리는 형태였다. 이는 현재의 경기 이북 지방 굿과 형식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의례 유형으로는 국가 차원의 대규모 무속 기우제(토룡기우, 폭무기우)가 정착되었고, 명산대천과 성황사를 중심으로 왕실과 민간의 포괄적 복을 비는 ‘기은’ 및 ‘별기은’이 성행했다.


조선시대의 의례: 통과의례의 확충과 오늘날 굿의 확립 조선시대에는 유교식 사전체계의 정립으로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었으나, 삶의 전 영역으로 의례가 확충되었다. 특히 천연두 치유를 위한 ‘마마배송굿’과 같은 위기의례와, 출산(기자의례)·결혼(여탐굿)·죽음 관련 통과의례가 기록상 비로소 확인된다. 초상 시 시신을 즐겁게 하던 ‘오시(娛尸)’나 밤새 노래하고 범패와 춤이 섞이던 ‘야제(野祭)’, 조상의 혼을 지전이나 무신도 형태로 무당집에 맡기던 ‘위호(衛護)’ 등은 유교 상장례 속에 무속이 깊숙이 개입했음을 보여준다. 신윤복의 <무녀신무>, 가집 <청구영언>에 수록된 시조 등을 통해 18세기 초반 이미 화랑(남무), 기대(장구 전담), 전악(삼현육각 악사)이 주체가 되어 밤에 시작하는 서울 ‘새남굿’의 형식이 확립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쌀점, 작두타기, 놋동이 물기 등 현재의 주요 영험 연행 양식 역시 조선시대 문헌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3. 결론: 한국 무속의 문화사적 위상과 현대적 의의에 대한 평론

본 서가 거둔 가장 큰 학술적 성과는 무속을 고조선부터 현대까지 단절 없이 이어져 온 ‘현재 진행형의 역사적 실체’로 규명했다는 점이다. 특히 조선시대 호적 자료(단성호적)를 바탕으로 무당이 무조건 천민 출신이 아니라 양인(良人) 층에서도 꾸준히 배출되었다는 실증적 분석은, 지배권력의 배척 정책이 낳은 ‘차별의 관행’과 ‘천민 관념’을 실상과 엄격히 분리해 낸 탁월한 성과다. 또한 무당들이 단순히 종교 의례를 집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판수와 악사, 광대들과 결합하여 판조리, 산조, 줄타기 등 한국 전통 예술의 핵심 연희자들을 배출한 경제적·사회적 기반(당골제도)이었다는 서술은 무속이 한국 민속예술의 젖줄이었음을 웅변한다.

그러나 본 서의 시대구분론과 기능주의적 접근에는 몇 가지 비판적 성찰의 지점이 존재한다. 첫째, 16세기 사림파 집권 이후부터 현재까지를 하나의 ‘근세~현대’ 단계로 묶어 무속에 오직 ‘개인적 기능’만 남았다고 단정 지은 점은 다소 거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비록 서구식 합리주의와 식민지 탄압, 근대화 과정에서 공동체 중심의 고을굿과 마을굿(대동굿, 별신굿 등)이 현저히 약화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완전히 탈각된 것은 아니다. 마을굿은 의례적 기능을 넘어 현대에도 지역 축제나 무형문화재라는 새로운 ‘문화 인프라와 콘텐츠’의 형태로 지역 공동체의 연대감과 문화적 정체성을 지탱하는 사회적 기능을 엄연히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개화기 헐버트나 비숍 등 서구인들이 남긴 기록에 대한 평가에서, 그들의 기독교 중심적·제국주의적 왜곡과 한계를 명확히 짚어낸 것은 타당하나, 서구의 인문과학적 태도만을 취사선택하자는 결론은 다소 방어적이다. 오늘날 한국인들 스스로가 우리 문화를 미신으로 비하하고 훼손하는 현실에 대한 개탄은 깊이 공감 가지만, 현대 사회에서 무속이 직면한 진짜 위기는 외부의 시선이 아니라 내부의 ‘상업화’와 ‘정신성 상실’에 있다.

무속이 도덕적 완성이나 내세의 구원이 아닌 ‘현세에서의 고통 없는 삶과 생존’을 추구하는 현세 긍정적 종교라는 본 서의 지적은 강력한 생명력의 원천인 동시에, 현대의 물질만능주의 및 기복주의와 결탁했을 때 자칫 맹목적인 사리추구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는 치명적인 취약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현대 무속이 소외된 이들을 위로하던 ‘바리데기’의 치유 정신과 굿판의 신명 나는 공동체성을 어떻게 현대적·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킬 것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대안 모색이 보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의 심층 심리와 삶의 궤적을 이토록 입체적이고 통시적으로 조망하여 무속을 바라보던 해묵은 색안경을 벗겨내고자 한 이 책의 희망과 학술적 완성도는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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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 1,000단어 요약·평론

국사편찬위원회가 편찬한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는 한국 무속을 단순한 미신이나 고대 종교의 잔재로 보지 않고, 한국인의 역사와 생활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온 종교문화로 설명하는 책이다. 서영대·이경엽·이용범·허용호·홍태한이 공동 집필했으며, 무속의 역사적 전개, 무속의례, 무당의 생활과 유형, 무당굿놀이, 서구인이 바라본 굿이라는 다섯 영역을 통해 무속을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1. 무속의 역사적 전개

책의 첫 장은 한국 무속의 역사를 정치적·사회적·개인적 기능이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나눈다. 고대에는 무속이 세 기능을 모두 수행했다. 왕이나 지배자는 정치권력자이면서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종교적 지도자였다. 단군왕검이라는 명칭도 종교적 지도자와 정치적 지배자의 결합을 보여준다. 신라 왕의 칭호인 차차웅이 무당을 뜻했다는 기록이나 왕에게 예언 능력이 강조된 것도 고대 왕권의 무격적 성격을 드러낸다.

그러나 불교가 수용되고 국가 종교로 발전하면서 무속은 정치적 기능을 잃기 시작했다. 국가의 공식 의례와 정치적 정당성을 제공하는 역할은 불교와 유교가 차지했고, 무속은 지역사회와 개인의 생활 영역으로 내려갔다. 통일신라부터 조선 전기까지 무속은 지역의 산신·성황신 신앙과 결합해 마을의 정체성과 결속을 유지했다. 고려시대 지방 세력이 성황제와 산신제를 주관하고, 지역민들이 자기 고장의 신에게 국가적 작위를 내려달라고 요구한 사례는 무속이 지역 권력과 공동체 의식을 뒷받침했음을 보여준다.

16세기 사림파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다시 달라졌다. 사림은 향촌사회를 성리학적 질서로 재편하기 위해 무속을 적극적으로 배척했다. 무속은 사회적 기능까지 잃고 개인의 길흉화복을 담당하는 종교로 축소되었다. 그러나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무속은 내세의 구원이나 도덕적 완성보다 질병, 출산, 죽음, 재산, 가족관계처럼 당장 닥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집중했기 때문이다. 책은 무속을 ‘생존의 종교’라고 규정한다.

이 시대구분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틀이지만 지나치게 단선적이라는 한계도 있다. 조선 후기에도 마을굿과 공동체 제의가 지속되었고, 국가가 가뭄이나 전염병 같은 위기 때 무당을 동원한 사례도 있었다. 정치·사회적 기능이 완전히 사라졌다기보다 공식 제도 밖으로 밀려났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2. 역사에 나타난 무속의례

두 번째 장은 무속의례를 점복, 기양의례, 기복의례로 나눈다. 점복은 미래와 불확실한 사건의 의미를 알아내는 행위이고, 기양의례는 질병·가뭄·죽음·재난 같은 위기를 해결하는 의례이며, 기복의례는 가정과 공동체의 평안과 풍요를 정기적으로 비는 의례이다.

삼국시대 문헌에서 무당은 흉조를 해석하고 미래를 예언하며 질병의 원인을 밝히고 죽은 자의 말을 산 사람에게 전달한다. 고구려 왕의 병이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원혼 때문이라고 밝히거나, 죽은 왕의 말을 전달하는 사례는 무당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세계를 잇는 중개자였음을 보여준다.

고려시대에는 오늘날과 유사한 굿 형식이 형성되고 제석·칠성 같은 불교와 도교의 신들이 무속에 들어왔다. 무속은 불교·도교·유교와 경쟁하면서도 이들 종교의 신과 의례를 흡수했다. 고려와 조선은 공식적으로 무속을 억제했지만 왕실과 사대부들도 질병과 출산, 저주와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무당을 찾았다. 조선시대에는 통과의례, 마마배송굿, 망자천도굿 등 의례가 더욱 다양해졌다.

이 부분의 중요한 통찰은 한국 종교사가 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완전히 대체하는 역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무속·불교·유교는 서로 충돌하면서도 기능을 나누고 의례와 신격을 교환했다. 한국인의 종교생활은 교리적 배타성보다는 상황에 따른 복수적 실천에 가까웠다.
 
3. 무당의 생활과 사회적 위치

세 번째 장은 무당을 사제·예언자·치료사·예술가로 설명한다. 무당은 강신을 통해 무업에 들어가는 강신무와 집안의 무업을 이어받는 세습무로 나뉜다. 지역에 따라 만신, 당골, 심방, 법사, 판수 등 다양한 명칭과 유형이 존재한다.

책은 무당이 언제나 천민이었다는 통념을 비판한다. 조선시대 호적 자료를 보면 천인뿐 아니라 양인 가운데서도 많은 무당이 나왔다. 무당이 천시된 것은 신분 그 자체보다 유교적 지배질서가 무속을 음사와 미신으로 규정한 결과였다.

무당의 경제적 기반으로는 당골제도와 단골 관계가 중요했다. 무당은 특정 지역과 가정의 의례를 지속적으로 담당하며 안정적인 고객 관계를 형성했다. 서울지역에서도 무당과 주민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 관계를 이어간 사례가 확인된다. 이 같은 제도는 무당을 떠돌아다니며 사람을 속이는 존재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인정받은 종교전문가로 보게 한다.

무당 집단은 전통예술의 발전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무부와 악사들은 관청 행사에 참여했고, 무당 집안에서 판소리 명창, 산조 연주자, 줄타기 광대가 배출되었다. 굿은 음악·춤·연극·재담이 결합된 종합예술이었으며, 한국 전통공연예술의 중요한 기반이었다.
 
4. 무당굿놀이의 의미

네 번째 장은 굿 안에 포함된 놀이와 연극적 장면을 분석한다. 굿은 엄숙한 종교의례만이 아니다. 신을 희화화하고, 관객이 참여하며, 성적 농담과 세속적 이야기를 펼치는 축제이기도 하다.

무당굿놀이는 풍요 기원, 제액축귀, 재미 추구라는 세 유형으로 나뉜다. 농사와 고기잡이, 출산을 흉내 내며 풍요를 기원하기도 하고, 악귀를 쫓는 장면을 연극적으로 재현하기도 하며, 일상생활과 인간관계를 풍자해 웃음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굿에서는 신성함과 세속성, 두려움과 웃음, 의례와 놀이가 공존한다. 이는 종교를 엄숙한 교리체계로만 이해하는 서구적 관점과 크게 다르다. 굿의 웃음과 풍자는 고통을 공동체적으로 견디고 현실의 권위를 잠시 뒤집는 기능을 했다.
 
5. 서구인의 시선과 그 한계

마지막 장은 개화기 조선을 방문한 서구인들이 남긴 무속 기록을 분석한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호머 헐버트, 새비지 랜도어 등은 병굿과 황해도굿을 관찰하고 글과 사진을 남겼다. 이 기록들은 당시 굿의 실제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대부분 기독교 중심의 관점에서 무속을 귀신숭배와 미신으로 규정했다. 조선인을 무지하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묘사하며 기독교 선교를 문명화의 사명으로 정당화했다. 이들의 기록은 관찰 자료로서는 가치가 있지만, 제국주의와 선교주의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다만 책은 서구인의 시선을 비판하는 데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서구인의 관찰을 모두 왜곡이나 호기심으로만 환원하면 그들이 발견한 실제 문제, 예컨대 무당의 상업성, 과도한 의례비용, 질병 치료의 한계 등을 충분히 검토하기 어렵다. 외부의 시선이 식민주의적이었다는 사실과 무속 내부에 비판할 문제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동시에 인정할 수 있다.

종합평론

<무속, 신과 인간을 잇다>의 가장 큰 장점은 무속을 고정된 고대신앙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기능과 형태를 바꾸어 온 살아 있는 문화로 설명한다는 점이다. 무속은 국가종교의 자리에서 밀려났지만 가족의 질병과 죽음, 여성의 고통, 공동체의 불안, 억울한 죽음처럼 공식 종교와 제도가 해결하지 못한 영역을 맡았다.

특히 무당을 미신의 생산자가 아니라 신과 인간, 산 자와 죽은 자, 개인과 공동체를 연결하는 중개자로 해석한 점이 중요하다. 굿은 초자연적 문제를 해결하는 의식인 동시에 억눌린 감정을 표현하고 공동체가 고통을 함께 처리하는 사회적 장치였다.

그러나 책은 무속의 긍정적 기능을 강조한 나머지 공포를 이용한 금전 요구, 성별 권력관계, 무당 내부의 위계와 경쟁, 현대 무속의 상업화 문제를 충분히 다루지 않는다. 또한 근대 이후의 무속, 특히 일제강점기의 미신타파운동, 해방 이후 새마을운동과 종교정책, 텔레비전과 인터넷 시대의 점술문화는 거의 다루지 않아 제목에 비해 현대사가 약하다.

그럼에도 이 책은 무속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이 아니다. 무속을 무조건 부정하기 전에 그것이 왜 오랫동안 지속되었으며 한국인의 불안과 고통을 어떻게 다루어왔는지를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결국 무속은 한국인이 신과 인간, 삶과 죽음, 두려움과 희망 사이의 관계를 조직해 온 하나의 오래된 문화 언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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