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4

앤도 슈사쿠의 단편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ユリアとよぶ女, 1968)

遠藤周作「ユリアとよぶ女」

앤도 슈사쿠의 단편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ユリアとよぶ女, 1968)에 대한 요약과 평론이다. 요청한 조건에 맞춰 작성하였다.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 요약 및 평론
1. 작품 요약
앤도 슈사쿠의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는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대에 의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강제 연행된 한 조선인 여성이 겪은 파란만장한 삶과 신앙을 그린 단편 소설이다. 이 작품은 역사상 실존 인물인 '오타 쥬리아(ジュリアおたあ)'를 모델로 삼아, 가혹한 운명 속에서도 자신의 신앙과 주체성을 지켜낸 인간의 숭고함을 묘사한다.

조선에서 고아가 된 소녀는 일본으로 끌려와 고니시 유키나가 부부의 보살핌 속에서 성장하며 '유리아'라는 세례명을 받는다. 영리하고 아름답게 자란 유리아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고니시 가문이 몰락한 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눈에 띄어 에도 성 대오쿠(大奥)의 시녀로 들어가게 된다. 이에야스는 그녀의 총명함과 아름다움을 높이 사 자신의 측실(곁두리 아내)로 삼으려 한다. 그러나 당시 에도 막부는 기독교 금지령을 강화하던 시기였고, 이에야스는 유리아에게 측실이 되는 조건으로 기독교 신앙을 버릴 것을 강요한다.

유リア는 최고 권력자의 요구와 부귀영화라는 유혹 앞에서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배교를 단호히 거부한다. 분노한 이에야스는 그녀를 에도에서 추방하여 이즈 제도의 고즈시마(神津島)라는 절해의 고도로 유배를 보낸다. 소설은 유리아가 탄 작은 배가 거친 바다를 향해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주변 인물(요자에몬)의 시선을 통해, 지상에 고향을 두지 못하고 천상에 고향을 둔 한 인간의 쓸쓸하면서도 초연한 뒷모습을 비추며 마무리된다. 유리아는 유배지인 외딴섬에서 거친 노동과 고독 속에서도 평생 기도를 멈추지 않으며 삶을 마감한다.

2. 문학 평론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는 앤도 슈사쿠 문학의 핵심 주제인 '일본이라는 영적 풍토와 기독교의 충돌', 그리고 '약자의 신앙'이라는 주제가 변주되어 나타나는 수작이다. 앤도의 대표작 <침묵>이 박해 속에서 무너지는 신부의 고뇌와 배교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었다면, 이 단편은 오히려 가장 무력한 존재인 조선인 포로 여성이 거대한 권력에 맞서 거두는 영적 승리를 보여준다.

첫째, 배제된 자의 주체성과 신앙
작품 속 유리아는 이중의 소외를 겪는 인물이다. 그녀는 조선인 포로라는 민족적 약자이자, 남성 중심의 봉건 사회에서 도구화되기 쉬운 여성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절대 권력자는 그녀를 자신의 소유물로 삼으려 하지만, 유리아는 '배교 거부'라는 선택을 통해 권력의 지배를 거부한다. 유리아에게 기독교 신앙은 단순한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폭력적인 역사 속에서 자신의 인간적 존엄과 자아를 지킬 수 있었던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가혹한 운명에 수동적으로 끌려다니던 소녀가 스스로 유배를 선택하며 '女(여성)'로서 주체적인 인간으로 거듭나는 선박의 출발 장면은 이 소설의 백미이다.  
新潮社

둘째, '고향 상실'의 실존적 의미
앤도 슈사쿠는 유리아의 처지를 '지상에 고향이 없는 존재'로 묘사한다. 태어난 조선에서도 떨어져 나왔고, 자신을 거부한 일본에서도 쫓겨나 외딴섬으로 향하는 그녀의 여정은 인간의 실존적 고독을 상징한다. 그러나 저자는 유리아가 지상의 고향을 잃어버렸기에 역설적으로 영원한 영적 고향(천국)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진술한다. 거친 바다 위로 떠나는 배의 가냘픈 이미지는 세상의 눈에는 비참한 패배로 보이지만, 신앙의 눈에는 절대적인 구원을 향한 당당한 순례길로 승화된다.  
ブクログ

셋째, 앤도 문학 속 '동반자 예수'의 투영
이 작품에서 앤도 슈사쿠 특유의 '어머니 같은 하느님' 혹은 '고통받는 자와 함께하는 예수'의 이미지는 유리아라는 인물 그 자체에 투영된다. 장엄하고 군림하는 신이 아니라, 힘없고 소외된 조선인 시녀의 고독한 기도 속에서 신의 실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앤도는 강하고 승리하는 자들의 역사(이에야스의 막부 체제) 뒤에 숨겨진, 지워진 자들의 숭고한 역사(유리아의 순교적 삶)를 복원함으로써 종교의 참된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3. 총평
결론적으로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는 짧은 분량 속에서도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상상력을 정밀하게 결합하여 인간 존엄의 한계를 탐구한 걸작이다. 거대한 역사의 톱니바퀴에 짓눌린 한 여성의 삶을 비장하면서도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내어, 현대 독자들에게도 참된 자유와 가치가 무엇인지 깊은 울림을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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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 요약·평론

遠藤周作《ユリアとよぶ女》, 1968

1. 작품의 배경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는 엔도 슈사쿠가 1968년 발표한 역사 단편소설이다. 1968년 2월호 《문예춘추》에 처음 실렸으며, 이후 단편집과 《엔도 슈사쿠 문학전집》 제7권 등에 수록되었다. 작품의 모델은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여성 오타 줄리아, 곧 ‘줄리아 오타아’로 알려진 인물이다.

오타 줄리아에 관한 확실한 역사자료는 매우 적다. 당시 일본에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서신과 후대 기리시탄 전승이 주요 자료다. 일반적으로 그녀는 임진왜란 중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가 세례를 받고, 고니시 가문의 보호를 받다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시녀가 된 것으로 전해진다. 엔도는 이 희미한 역사적 흔적을 바탕으로 한 조선인 포로 여성의 신앙과 저항을 소설로 재구성한다.

2. 줄거리

소설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전쟁터에서 시작한다. 어린 조선인 소녀는 부모와 고향을 잃은 채 일본군에게 붙잡힌다. 그녀는 일본어도 모르고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전쟁은 영웅들의 전투가 아니라, 이름 없는 민간인의 삶을 파괴하고 인간을 물건처럼 이동시키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소녀는 기독교 신자인 일본 장수 고니시 유키나가 측에 거두어진다. 일본으로 끌려온 그녀는 세례를 받고 ‘유리아’라는 이름을 얻는다. 유리아는 기독교를 열정적인 교리나 지적 확신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자신과 함께 있어 주는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의지로 받아들인다. 고향과 가족과 언어를 잃은 그녀에게 데우스는 마지막으로 남은 관계이며,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내면의 피난처가 된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뒤에도 유리아의 얼굴에서는 기쁨이나 생기가 쉽게 나타나지 않는다. 그녀의 눈에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체념이 남아 있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명령에 따르고, 일본인들이 시키는 일을 묵묵히 수행한다. 주변 사람들은 유리아를 순종적이고 감정이 없는 여자라고 생각한다.

유리아를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인물 가운데 하나가 하급 무사 요자에몬 또는 작품의 판본과 해석에 따라 다르게 호명되는 남성 신자다. 그는 유리아에게 연민과 애정을 느낀다. 그러나 유리아는 자신의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관계는 통상적인 연애 관계로 발전하지 않는다. 남자는 유리아를 소유하려 하지 않고 보호하려 하며, 유리아에게서 자신과는 다른 종류의 신앙과 인간적 존엄을 발견한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섰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패배하고 처형된다. 고니시 가문이 몰락하면서 유리아의 삶도 다시 권력자들의 손으로 넘어간다. 그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지배 아래 들어가고, 마침내 슨푸성의 시녀가 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늙었지만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마음에 드는 시녀를 발견하면 거리낌 없이 잠자리로 부른다. 어느 날 정원에서 유리아를 본 이에야스는 일본 여성과 다른 그녀의 작고 흰 얼굴과 무표정한 모습에 관심을 갖는다. 유리아가 조선인이라는 말을 듣지만, 그 사실은 오히려 그의 호기심과 욕망을 자극한다.

이에야스는 유리아를 자신의 시녀로 승격시키고 밤시중을 들게 하려 한다. 주변 사람들은 최고 권력자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유리아 역시 지금까지는 대부분의 운명을 체념하듯 받아들여 왔다. 일본에 끌려온 일도, 주인이 바뀐 일도, 시녀가 된 일도 자신의 힘으로 막지 못했다.

그러나 이에야스가 자신을 가까이 불러 사실상 성적 복종을 요구하자 유리아는 처음으로 분명하게 거부한다. 이에야스가 함께 가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고개를 젓고, 데우스가 그런 일을 금한다고 말한다. 조용하고 연약해 보이던 조선인 하녀가 천하의 권력자에게 공개적으로 “아니오”라고 말하는 순간이다.

이에야스는 당장 분노를 드러내지 않는다. 웃는 얼굴로 자리를 떠나지만, 유리아의 거절은 권력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반항으로 간주된다. 더구나 당시 도쿠가와 정권은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있었다. 유리아는 신앙을 버리라는 명령도 거부한다.

결국 그녀는 이즈오시마로 유배된다. 섬에서 유리아는 작은 오두막에 살며 기도한다. 이에야스는 사람을 보내 기독교를 버리고 돌아오면 용서하겠다고 제안하지만, 유리아는 말없이 고개를 젓는다. 그녀는 다시 니지마로, 이어 고즈시마로 옮겨진다. 유배지가 바뀔 때마다 조건은 더욱 열악해진다.

고립된 섬에서 유리아는 처형된 고니시 유키나가와 박해를 견디지 못하고 배교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다. 그녀의 신앙은 영웅적 자기 과시가 아니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신앙을 넘어, 실패하고 배신한 사람들까지 품는 신앙으로 변한다.

마침내 한 어부가 오두막을 찾아갔을 때 유리아는 벽에 기대어 두 손을 모은 채 죽어 있다. 어부는 죽은 유리아의 얼굴이 놀랍도록 맑고 아름답다고 느낀다. 생애 내내 체념과 공허를 드러냈던 얼굴이 죽음에 이르러 처음으로 평화를 얻은 것이다.

3. 유리아의 체념은 어떻게 저항으로 변하는가

이 작품의 핵심은 처음부터 강한 여성이 권력에 맞서는 이야기가 아니다. 유리아는 처음에는 거의 모든 것에 체념한 인물이다. 그녀는 전쟁과 납치, 이주와 예속을 겪으면서 자신의 의지로 삶을 선택할 능력을 잃었다. 기독교 신앙을 얻은 뒤에도 표정은 여전히 공허하다.

그런데 이 체념 속에서 아주 작은 내면의 영역이 형성된다. 유리아는 자신의 몸과 신앙만큼은 권력자에게 내주지 않는다. 그녀에게 신앙은 세상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세상이 끝내 침범할 수 없는 마지막 장소다.

따라서 유리아의 거절은 정치적 구호나 공개적인 반란이 아니다. “데우스가 금하신다”는 짧은 대답일 뿐이다. 그러나 절대 권력이 한 인간의 몸과 영혼까지 소유하려 할 때, 이 짧은 거절은 가장 근본적인 저항이 된다.

유리아는 이에야스를 쓰러뜨리지 못한다. 기독교 탄압을 중단시키지도 못하며 유배를 피하지도 못한다. 외적으로 보면 그녀는 패배한다. 그러나 권력자는 그녀의 복종을 얻지 못한다. 엔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승리와 패배의 의미를 뒤집는다.

4. 이에야스와 유리아: 권력과 존엄의 대결

이에야스는 단순한 악당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노련하고 현실적이며 감정을 잘 통제한다. 유리아가 거절했을 때 즉석에서 칼을 휘두르지 않고 웃으며 물러난다. 그러나 이 침착함은 관용이 아니라 절대 권력의 자신감이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 누구든 굴복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이에야스가 가진 것은 군대, 국가, 법률, 유배 명령권이다. 유리아가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이름 없는 외국인 포로이며, 여성이고, 하녀이고, 금지된 종교의 신자다. 일본의 정치·사회·성별 질서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다.

그런데 이에야스가 유리아를 욕망하는 순간, 두 사람의 관계는 일본의 최고 권력자와 조선인 포로 여성 사이의 대결이 된다. 이에야스는 유리아를 인간이 아니라 소비할 수 있는 이국적 대상으로 바라본다. 작품은 그의 시선 속에 성적 지배와 식민적 타자화가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유리아는 이에야스에게 어떤 논리도 제시하지 않는다. 단지 거부한다. 이 거부로 인해 권력의 한계가 드러난다. 권력자는 인간의 몸을 추방하고 굶길 수 있지만, 동의까지 강제로 생산할 수는 없다.

5. 임진왜란을 바라보는 일본인의 시선

이 작품은 일본 문학이 임진왜란을 다루는 방식에서도 의미가 있다. 임진왜란은 일본의 전쟁 영웅이나 정치가의 관점이 아니라 조선인 포로 여성의 삶을 통해 묘사된다. 전쟁은 영토 확장이나 무장들의 명예로운 경쟁이 아니라, 한 어린아이에게서 가족과 고향과 언어를 빼앗은 재난이다.

박현옥은 유리아의 이미지가 고니시 유키나가와 일본인 하급 무사들의 시선을 매개로 형성되며, 그 과정에서 임진왜란에 대한 일본인의 비판적 관점이 드러난다고 평가한다. 동시에 유리아가 “일본 여성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존재로 묘사되면서 같은 동아시아인임에도 타자화된다고 지적한다.

이 비판은 중요하다. 엔도는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고 조선인 포로의 고통을 보여주지만, 유리아가 자기 언어로 전쟁과 일본을 말하도록 하지는 않는다. 그녀는 일본인 남성들이 관찰하고 해석하는 침묵하는 여성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6. 기독교적 ‘성녀’ 형상의 힘과 한계

엔도 슈사쿠의 작품에는 세상에서 버림받거나 무력해 보이지만 타인을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인물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내가 버린 여자》의 미쓰, 《침묵》의 가루페와 기치지로, 《바보》의 가스통도 이 계보에 놓인다. 유리아 역시 사회적 힘은 없으나 끝까지 타인을 미워하지 않는 인물이다.

유리아는 배교한 사람을 단죄하지 않고 그를 위해 기도한다. 이는 엔도 문학의 핵심인 ‘약한 자와 함께하는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신앙은 강자의 영광이나 순교자의 자기 확신보다, 실패한 자와 고통받는 자 곁에 머무는 사랑으로 나타난다. 한 연구는 이 작품이 신앙과 신의 존재뿐 아니라 사랑의 힘을 말하며, 이에야스의 권력과 평범한 인간의 사랑을 대조한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유리아가 지나치게 성녀화되었다는 한계도 있다. 그녀는 분노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일본인들에게 원망을 느끼는 구체적 인간이라기보다 침묵과 인내와 순결을 상징하는 존재로 변화한다. 조선인 전쟁포로 여성의 복잡한 현실이 일본인 가톨릭 작가의 순교 서사를 위해 단순화되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

특히 여성의 존엄이 성적 순결과 자기희생을 통해 증명된다는 구도는 오늘날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 유리아가 이에야스의 요구를 거부하는 행위는 분명 강력하지만, 여성의 가치를 순결과 고난 속에서만 발견하는 문학적 관습도 동시에 작동한다.

7.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허구

작품에서 유리아는 고즈시마의 오두막에서 홀로 죽는다. 그러나 실제 오타 줄리아의 말년은 확실하지 않다. 일부 자료에는 그녀가 유배지에서 생존했고 이후 오사카에서 보호받았다는 내용도 나타난다. 소설의 죽음 장면은 확정된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엔도가 만들어낸 문학적 결말에 가깝다.

엔도는 이 결말을 통해 유리아를 완성된 순교자로 만든다. 생전의 무표정한 얼굴이 죽음 속에서 맑고 아름답게 변한다는 장면은 신앙의 승리를 시각적으로 표현한다. 문학적으로는 강렬하지만, 역사적 인물의 삶을 순교 서사에 맞추어 닫아버린다는 문제도 있다.

실제 유리아가 살아남아 다른 신자들을 돌보며 살았다면, 그것은 순교보다 덜 극적이지만 또 다른 종류의 신앙일 수 있다. 고난 속에서 죽는 것뿐 아니라 살아남고 관계를 만들고 공동체를 돌보는 일도 신앙의 증언이다. 엔도의 결말은 죽음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대신 생존의 윤리를 충분히 탐구하지 않는다.

8. 작품의 문학적 가치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는 짧고 단순한 구조를 가진다. 등장인물의 심리도 복잡하게 해부되지 않으며 사건은 빠르게 진행된다. 문체는 절제되어 있고, 유리아의 표정과 고개를 젓는 작은 동작이 반복된다.

이 반복은 효과적이다. 유리아는 말이 적고 외형상 수동적이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고개를 젓는다. 말보다 몸짓이 그의 의지를 표현한다. 작품 초반의 무표정은 전쟁과 예속이 남긴 상처를 나타내지만, 후반의 무표정은 권력에 흔들리지 않는 내적 확신으로 바뀐다.

또한 작품은 거대한 역사와 작은 인간을 대비시킨다. 이에야스와 고니시 유키나가, 세키가하라 전투와 오사카 전투 같은 역사가 배경에 있지만, 작품이 끝내 바라보는 것은 이름 없는 여성의 얼굴이다. 역사책에서는 몇 줄로 지나갈 포로 여성이 소설에서는 역사의 윤리적 중심이 된다.

다만 유리아의 내면이 충분히 자기 목소리로 표현되지 않는 점은 뚜렷한 약점이다. 독자는 유리아가 조선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일본어와 일본인들을 어떻게 느끼는지, 고니시 가문의 기독교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거의 알 수 없다. 그녀는 깊은 침묵 속에 놓여 있고, 그 침묵은 때로 신비롭게 보이지만 때로는 작가가 조선인 여성의 내면에 접근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9. 종합 평가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는 엔도 슈사쿠의 대표 장편만큼 널리 알려진 작품은 아니지만, 그의 문학적 주제를 압축해 보여주는 중요한 단편이다. 이 작품에는 일본과 기독교의 충돌, 신앙과 권력의 대립, 약한 자의 존엄, 순교와 배교, 모성적이고 동반자적인 신의 이미지가 모두 들어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약한 인간은 어떻게 저항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유리아에게는 군대도 신분도 언어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권력자가 요구하는 마지막 복종을 거부한다. 그 거부는 역사를 바꾸지 못하지만, 권력이 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동시에 오늘날의 독자는 이 작품을 단순한 감동적인 순교담으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 유리아는 일본의 침략으로 고향에서 끌려간 조선인 여성이다. 그녀의 비극을 기독교 성녀의 아름다운 죽음으로만 정리한다면, 전쟁포로와 성적 지배라는 역사적 폭력이 희미해질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가장 좋은 독법은 유리아를 ‘일본 기독교의 성녀’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제국과 전쟁과 가부장적 권력이 한 여성의 몸을 소유하려 했으나 끝내 그녀의 동의까지는 얻지 못한 이야기로 읽는 것이다.

《유리아라고 부르는 여자》의 감동은 유리아가 죽었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평생 타인의 명령에 끌려다닌 여성이 마지막 순간에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아니오”라고 말했다는 데서 생긴다. 그 한마디가 이에야스의 거대한 권력보다 오래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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この潔さがX子にもあったなら - フェティッシュな「感想」戦(選)(エフ=宝泉薫) - カクヨム

遠藤周作「ユリアとよぶ女」この潔さがX子にもあったなら



遠藤龍之介。

といっても、ピンと来ない人もいるだろうが、あのフジテレビの会見で糾弾された5人のうちのひとりだ。

中居正広とX子の関係をめぐって「(彼は)女性とは異なる認識だった」と語り、記者から「中居氏は同意があったと思っていたということか」と質問されると「踏み込んで言うと、そういうことです」と答えた。

しかし、司会の広報局長が「先ほどの認識の違いですが、プライバシーの関係からお答えできませんということでお願いします」と軌道修正。

遠藤も「訂正します。私が踏み込み過ぎた発言でした」と日和ってしまった。

が、この件について「同意」をめぐる行き違いにすぎないのだろうと考えている人は少なくないはず。

おそらく、遠藤の見解が事実に近いのではないか。



ちなみに、遠藤の父は作家の遠藤周作。

「FRIDAY」が配信した『フジ・遠藤龍之介副会長“会見でポロリ…”のウラに父で大作家・遠藤周作に言われた「三つの教え」』という記事には、

「勉強しろ、と言われたことはない」

「6つ7つぐらいのときに三つだけ言われて『嘘をつくな』『卑怯なことをするな』『弱い人に寄り添え』と言われ、それを守らないと怒られた」

という思い出が紹介されている。

そこで同誌は、

「遠藤氏が“ポロリ”と踏み込んだ発言をしたウラには『嘘をつくな』という父の教えが根底にあったのかもしれない」

と、茶化しているわけだけど――。

それはさておき「勉強しろ、と言われたことはない」というのは本当だろう。

父・周作が自分の家庭をモデルにして書いた短編に、宿題をやれとかなんとか母親に小言ばかり言われている息子が出て来る。

そんな息子を父は「お前はお母さんに怒られるために生まれてきたみたいだな」と皮肉ったりするのだ。

でも、そんな父のセンスを受け継いだのか、遠藤龍之介は現場時代、けっこう面白いドラマをいくつもプロデュースした。

「どきんちょ!ネムリン」なんて他に類を見ない快作だ。



それもさておき――。

遠藤周作の小説で最愛の作品が「ユリアとよぶ女」という短篇である。

以前、論じた文章を引用してみ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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久々に読んでみた。

作者が意識してたかどうかはわからないが、これって、アンティゴネーの物語のバリエーションなんだな。



(ネタバレ、注意です)








時代は秀吉の朝鮮出兵から、家康による天下制圧までのほぼ20年間。

朝鮮人の孤児であった少女が、ユリアという洗礼名を与えられ、連れてこられた日本で成長後、家康の側女となることを拒んで、島流しにされ、そこで亡くなるまでを軸に描いている。

まずは、少女期の描写。



・・・・・・



肉感など呼びさましようのない幼々した顔である。

それなのにその幼い顔には既に人生にたいする諦めの色が浮んでいた。



・・・・・・



続いて、受洗後の描写。



・・・・・・



神の教えを信じているのならば、この顔にはもっと悦びと生気とがある筈なのに、こちらを見あげたその瞳は相変らず、うつろで諦めの色がひそんでいた。

どんな運命にも諦めをもって従い、運命に反抗する力を失った顔である。

朝鮮の陶器のように言いしれぬ哀しみの翳があるのに、白いその顔には自分の感情や意志があらわれたことはない。

そして庭で恐縮して身をかがめている婢たちの横を通りすぎた時、彼はそのなかに小石のように小さく色の白い女を見た。

「あの小娘は人形のようでござる。人形のように美しゅうござるが、また人形のようにどんな運命をも受け入れまする」



・・・・・・



そして、クライマックス。

家康の命令を断る場面と、島に流される途中、物語の副主人公である男が述懐する場面。



・・・・・・



何故じゃと家康が更に問うと、うつむいて小さな声で答えた。

「デウスさまが、そのようなことを、お禁じになります故。

わたくし切支丹にござりまする」



朝鮮から日本に、日本から南海の孤島にと連れていかれたこの女の人生は、ちょうど彼女の乗っている舟のように、憐れで、はかないものに与左衛門には思えた。

しかし彼には、この女の故郷がこの地上にあるのではないことが、わからなかったのである。



・・・・・・



ユリアの入信は、恩人の勧めという受動的なものだったが、感情を押し殺した日々のなかで、信仰を朝鮮白磁のように磨き上げ、地上にはない故郷を見出した、のだと思う。

そして、そのことが、権力者に召されるという現世での栄達を拒ませ、彼女にとっての故郷へと向かわせることに。



冒頭で、アンティゴネー云々と書いたが、そういう物語の系譜は日本でも古くから存在し、近代では、森鴎外の「最後の一句」などがある。

拒むこと、死をもって何かを主張すること。

その意味について考えるには、ふさわしい作品群といえ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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ユリアというヒロインの透徹した精神性、つららのように鋭くも強く儚い生き方が伝われば幸いだ。

遠藤周作は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を主人公にした長篇も書いているが、そこでの悲劇の王妃もまた、毅然とした最期を遂げることで、自らの信念を貫く姿が美しかった。

なにやら、ふたりとも、いま話題のX子なる女とは真逆のような気がする。

このふたりのような潔さが、X子なる女にもあったなら、と思わずにいられ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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