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와 무속의 관계 _ 한승훈
바라보다
2021. 2. 8.
전근대 무속 담론과 민속종교에서의 유교와 무속의 관계
_ 한승훈 (한국예술종합학교 강사)
1. 머리말
2. 옛 무당과 요즘 무당
3. 영웅적 지방관의 무속 타파
4. 신과 망자에 대한 접근권
5. 맺음말
===
1. 머리말
종교사의 관점에서 조선의 유교화(儒敎化)는 유교 이외의 종교 현상에 대한 배제와 정복으로 묘사될
수 있다.
그 시도는 크게 두 전선을 무대로 하고 있었다. 하나는 ‘순수한’ 유교적 예학(禮學)에 따라 제도 및 국가
의례를 구성하기 위해 불교, 도교, 무속 등의 요소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이른바 교화(敎
化)의 차원으로, 제도적으로 선언된 식자층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기층문화에까지 전파하는 작업이었
다.
전자가 주로 제도사의 문제라면, 후자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역사민속학적인 관점을 도입할 필요가 있
다.
다소 일방적인 제도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었던 국가 의례에서와는 달리, 민속종교의 현장에는 토착적
인 신들 및 죽은 자의 영을 다루는 민간의 전문가인 무당과 그들을 지지하는 대중이 존재했다. 따라서
유자(儒者)는 자신이 의례적 주도권과 죽은 자에 대한 접근권에 있어 무당보다 우위에 있음을 보일 필
요가 있었다. 이 논문은 유자의 ‘무속 담론’과 여타 조선시대 문헌 자료에 나타난 민속 종교에서의 무속
과 유교 관계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1
chatelain님의 블로그
전근대 한국에서 유교와 무속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적지 않은 연구가 축적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최
종성은 ‘공식종교로서의 유교’와 ‘민속종교로서의 무속’을 “대등한 논의의 차원에서” 다루며, 조선 전기
와 조선 후기의 국면에서 나타난 관계유형의 변화를 다음과 같이 논한 바 있다.1)
조선전기의 유교와 무속, 공식종교와 민속종교, 엘리트의 전통과 대중의 전통은 갈등 속에서 부분적으
로 지배종교의 체제에 공존하였고, 그 공존의 논리는 비상시에 변통할 수 있는 권도의 문화론[↑]이었
다.
(...)조선후기의 유교와 무속, 공식 종교와 민속 종교, 엘리트의 전통과 대중의 전통은 이중적 병행에서
완전한 이분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한 이분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정통의식에 입각한 常道의 문화론
[↓]이었다. 이제 유·무의 관계유형은 권도로 뒷받침되는 갈등 속의 공존 상황에서 상도로 뒷받침되는
배제와 분리의 상황으로 전환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속의례는 국행의례에서 종식되고 내행의례로 존속
되었다. 아울러 공식종교와 민속종교의 상하 양극화가 문화적 완충을 상실한채 심화되어 나갔다.2)
이처럼 유교적 지식인은 기본적으로는 무속을 음사(淫祀)로 파악하여 배제하였지만, 사회적 위기의 상
황에서는 체제 외적인 무속을 체제 내의 국가의례 속으로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유교적
예전체계가 그러한 예외적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정비되는 조선 후기에 이르러 유교와 무속은 완전
히 이분화되었다.
그러나 이 논의는 국행의례와 같은 국가적 공론의 차원, 즉 ‘공식종교’ 내부에서의 무속 논의에 대해서
는 적절히 분석하고 있는 반면, 문화적 담론과 현장의 차원, 즉 ‘민속종교’ 내부에서의 유자와 무당의 관
계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 않다. 국행기우제나 여제(厲祭)와 같은 국가의례에서 유교식
예전이 무속의 개입을 완전히 배제하는 데 성공했다 해도, 그리고 국가가 왕도(王都) 주변에서 무당과
굿을 추방했다 해도, 유교는 여전히 대중의 종교적 수요를 완전히 채우지 못했다. 그것은 비단 하층민
만이 아니라 양반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왈라번(Walraven)이 적절하게 지적하고 있듯이, 유자는 신
과 귀신, 상징적 오염, 저주, 제사 받지 못한 귀신 등에 대한 관념을 무속의 세계관과 상당 부분 공유하
고 있었다.3)
이런 상황에서 유자는 무속이라는 현상을 설명하고 무당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기 위해 제도적인 차원
과는 다른 논리를 개발해야 했다.
이와 같은 문제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공식종교로서의 유교와 민속종교로서의 무속이라는 이분법
을 방법적으로 배제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대체하는 범주로 명시적, 제도적인 차원인 ‘공식종교
의 장’과 민간의 심성과 현장에서의 실천의 차원인 ‘민속종교의 장’을 제안한다. 유교, 무속, 불교 등 개
별전통의 요소는 양자 모두에 개입할 수 있으며, 각각의 장은 이들의 관계유형에 있어 독자적인 구조와
논리를 가진다. 민속종교의 장 속에서 유자와 무당은 적어도 종교적, 의례적 전문가라는 점에서는 동등
한 관계였으며, 신과 죽은 자의 세계에 대해서 유사한 믿음의 요소를 공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권력과 권위의 소유 정도에 있어서는 대등하지 않았다. 이 독특한 관계가 미시적이고 구체적인 상황에
서 유자와11무당 사이에 이루어진 다양한 형태의 만남, 특히 경쟁을 발생시킨 것이다.
chatelain님의 블로그
논의는 크게 세 단계로 이루어질 것이다. 첫째, 무속과 무당에 대한 유자의 발언을 통해 ‘전근대 무속 담
론’의 구조를 밝힐 것이다. 이 ‘담론’은 미신과 민족문화라는 양가성을 통해 무속을 바라보았던 근대 무
속 담론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구체적으로 파악될 수 있다. 둘째, 무당에 대한 유자의 우위가 주장되는
지방관의 무속 타파 사례들을 통해 이런 담론이 통치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실천되었는지를 논할 것
이다. 마지막 장에서는 그런 시도에 대항하여 무당의 독자성과 우위가 주장되었던 영역, 즉 신과 망자
에 대한 접근권을 둘러싼 경쟁을 다루겠다.
2. 옛 무당과 요즘 무당
‘무속전통’이란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주장이 1990년대 이후로 제기되어 왔다. 대표적으
로 김성례는 한국 문화의 기층 또는 기원에 위치하고 있는 문화적 원형으로서의 무속전통 개념을 비판
하며 식민지시대 이래 무속담론의 계보를 추적한 뒤, 무속의 ‘전통성’은 근대 이후에 창안된 것이라 주
장한 바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무속전통을 창출하는 1차적인 주체가 해당 전통의 당사자들인 무
당과 단골이 아니라 담론권력을 쥐고 있는 통치 권력 혹은 지식인집단이라는 것이다. 김성례가 언급하
고 있는 ‘식민 담론’, ‘민족 담론’, ‘전통 담론’, ‘민중문화 담론’ 등은 각각 상이한 전략을 통해 한국 문화
의 특정 요소를 무속과 동일시한 후, 이를 타자화하여 지배 이데올로기나 저항 이데올로기에 결합한 결
과였다.4)
이 관점에 의하면 한국무속 전통이란 철저히 근대적인 환경에서 창출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발명된 전통을 다루는 언어 속에서 과거의 무속은 선택적으로 호출된다. 근대적 무속담론의 특징은
무속을 (그것이 식민주체든, 저항주체든) ‘민족’ 개념과 연결시킨다는 데 있다. 무속이 한국 문화의 저변
에 깔린 원형적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무속의 고대적 원형으로 지목된 한국 고대종교의 신교
(神敎)가 재구성되었고, 전근대의 무당 관련 문헌은 그 원형이 지속되고 유지된 근거로서 제시되었다.
따라서 근대 이후 민족주의 담론의 입장에서 무속을 바라봤던 지식인들은 한 가지 모순을 해결해야 했
다. 이들의 관점에서 원칙적으로 무속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족의 전통이거나, 적어도 한국 문
화의 원형을 담고 있는 신앙이다. 그러나 이들 지식인이 현장에서마주하는 무속 현상은 그들이 보기에
많은 경우 조잡하고, 기복적이고, 비과학적이었다.5)
식민주의 담론에서 무속의 ‘미신적’ 요소는 식민주체에 미개함과 야만성을 부여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
이었다. 식민주의적 태도가 아니더라도 무속을 민족적 정체성과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이는 문명화에
장애가 되는 개조와 타파의 대상이 된다.
문제는 무속을 민족문화의 원형과 연결시키면서, 동시에 복합적인 현상인 현실의 무속과 만날 경우에
발생한다. 이는 초기 무속 연구자는 물론, 현대의 민속학자도 공유하는 갈등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구자가 택할 수 있는 전략 가운데 하나는 무속의 ‘기원’을 탐구하고, 이후의 역사적 쇠
퇴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이능화는 『조선무속고』의 첫 장을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
다.
11
chatelain님의 블로그
조선 민족은 상고시대의 신시(神市)가 있어 자신들의 종교로 삼았으며, 천왕환웅과 단군왕검을 하늘에
서 내려온 신, 혹은 신과 같은 인간이라 했다. 옛날에는 무당이 하늘에 제사하고 신을 섬겼으므로 사람
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 단군 신교의 유풍(流風)과 잔존 민속이 아닌 것이 없으며, 이것이 이른바
무속의 신사(神事)이다.
후세로 내려와 문화가 진화하고 유교·불교·도교가 연이어 수입되어, 유교에는 길흉의 예, 불교에는 분
수의 법, 도교에는 초제의 의식이 있었고, 이 외래의 종교들이 교유의 풍속과 뒤섞이게 되었다. (…) 고
유의 풍속은 사회의 배척을 받아, 외래 종교와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6)
유사한 관점은 최남선에게서도 보인다. 그는 이능화와 마찬가지로 무속이 단군에게서 나온 고대의 신
도(神道)에서 비롯한 것이라 믿었다. 이는 신라 “화랑(花郞) 국선(國仙)”으로 이어졌다가 “종교적 방면
은 차차 불교에게 눌리고, 교화적 방면은 유교에게 빼앗긴” 결과, 고려 시대에는 국가의 태평을 비는 의
식으로, 조선에 이르러서는 “그 유풍여운(流風餘韻)이 겨우 민속무습(民俗巫習)의 가운데”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7)
현존 무속을 고대의 단군신교 혹은 신도의 잔존 민속으로 파악하는 이와 같은 입장은 적어도 두 가지 함
의를 담고 있다.
첫째, 고대 한국문화를 지배했던 무속은 외래종교의 도입으로 인해 대체되어 쇠퇴하였으며, 민간에서
나 겨우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고대의 궁정에서 추방되어 민간 무당들의 손에 맡겨진 무속은 그 고전적 기원을 망각하고 타락할
수밖에 없다. 이런 관점은 현대 민속학이 무속을 대하는 표준적인 패러다임인 보존주의 및 복원주의로
이어졌다.
물론 이처럼 재구성된 ‘전통’으로서의 무속이 아닌 ‘현상’으로서의 무속은 결코 근대에 새롭게 나타난 것
이 아니다. 그리고 무속을 타자화하여 지배, 배제, 포섭하려 하는 체제와 지식인의 담론전략 또한 근대
만의 현상이 아니다. 전근대 상황에서 이런 담론주체는 신유교의 교육과 훈육을 받은 식자층인 유자(儒
者) 혹은 유생(儒生)이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근대 한국의 종교 문화에 있어 무속의 존재 양식을
밝히기 위해 유자의 저술을 활용할 수있다. 이 선택은 다소 강제적이며 공정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진
다. 왈라번이 지적하고 있듯이, 전근대 문헌자료는 절대 다수가 유자의 것이고 이들은 일반적으로 무당
에 대해 적대적이었기 때문이다.8)
이와 같은 편향된 자료의 문제에도, 우리는 전근대의 ‘무속 담론’에서 근대 지식인의 논의와 유사한 주
제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무속의 ‘고전적’ 기원과 ‘타락한’ 현재를 대
비시키는 전략이다. 그렇다면 아직 단군을 기원으로 하는 민족주의가 발달하지 않았던 전근대 상황에
서는 무속의 기원이 어떤 방식으로 설명되었는가?9)
이능화의 다음과 같은 서술은 이 문제에 대해 일정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
함허자(函虛子)가 말하기를 “기자(箕子)가 은나라의 부로(父老) 5천 명을 거느리고 동쪽 조선으로
11
chatelain님의 블로그
올 때 의사와 무당 및 점쟁이들이 함께 왔다”고 했다. 그러므로 한국의 무풍은 그 근원이 은나라 무속에
서 나온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나는 단군의 신교가 실로 우리 한국 무풍의 시초라고 생각한다. 또 요
나라 금나라 원나라 청나라의 무속이 우리와 비슷한데, 그것은 이 지역이 본래 한국의 옛 영토에 속했
기 때문이다.10)
여기에서 인용되고 있는 함허자의 『천운소통(天運紹統)』 기사에 의하면, 한국 무속의 기원은 기자와 함
께 조선에 온 은나라의 무당들이다. 땅과 혈통에 의해 규정되는 근대적 민족개념과는 달리, 전근대의
유교적 엘리트들은 자신의 ‘문화적’ 기원을 중시했다. 이능화가 무속의 은나라 기원론을 단군 기원론으
로 대체한 사실은, 기자의 동래(東來)를 단군의 개국으로 대체하고자 했던 20세기 초 민족주의 담론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표 1> 전근대 및 근대의 무속 기원 담론
전근대 유자 근대 지식인
문명 기원 기자의 동래 단군의 개국
무속 기원 은나라의 무당들 단군의 신교
기원의 성격 문화적 기원 민족적 기원
근대의 지식인과 전근대의 유자는 무속의 고전적 순수성과 현실적 비루함을 대비시켰다는 점에서는 일
치했다. 그러나 근대의 경우 그 고전적 모델이 단군 신교와 같은 상상된 ‘민족적’ 기원과 연결되었다면,
전근대의 모델은 상나라, 주나라와 같은 상상된 ‘문화적’ 기원과 연결되어 있었다. 유자에게 현실적으
로 존재하는 무당은 천하고 유교적 이상에 어긋나는 사술(邪術)을 행하는 탐욕스러운 존재로 인식되었
다. 그러나 그들의 경전에 의하면 무당은 고대적 기원을 가지고 있었고, 완전히 부정적인 존재도 아니
었다.
1734년(영조 10)에 있었던 경연에서의 다음과 같은 대화는 이와 같은 모순을 잘 드러내 준다.
11
chatelain님의 블로그
유건기(兪健基)가 말했다. “고독(蠱毒)과 저주(詛呪)는 같은 것입니다. 명나라의 유기(劉基)는 산앵두
(郁李)로 저주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무격(巫覡)들에게서도 그런 것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주상이 말했다. “그런 문헌이 어디에 있는가?”
유건기가 말했다. “『백가류취(百家類纂)』에 있습니다.”
정필녕(鄭必寧)이 말했다. “『주역(周易)』에 ‘사와 무를 써서 어지럽게 하다(用史巫紛若)’는 말이 있으
니, 무격은 삼대(三代) 때부터 있었던 것입니다.”
주상이 말했다. “『주례(周禮)』에도 나온다. 지금 성인(聖人)께서 다시 살아나신다고 해도 이런 부류의
사람을 모두 없앨 수 있겠는가?”
김약로(金若魯)가 말했다. “성인은 가르침을 펴고 신을 섬기니 누군들 교화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보니, 설령 성인을 다시 살아나시게 하더라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남김없이 교화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11)
영조가 언급한 『주례』의 내용은 아마도 다음 구절을 말하는 것일 터이다.
사무(司巫)는 여러 무당의 정령(政令)을 관장하며, 나라에 큰 가뭄이 들면 무당들을 거느리고 춤을
추면서 비를 빈다.12)
『주례』야말로 조선 전기까지 국가의례, 특히 기우제에 무당을 참여시키는 근거가 된 경전이었다. 유자
에게 있어 주례는 공자가 회복하고자 했던 이상적인 국가체제인 서주(西周)의 예법을 담고 있다고 믿어
졌다. 그러므로 『주례』는 국가의 의례체계를 운영하는 데 있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모델이었던 셈이
다. 또한 같은 장에는 상례(喪禮) 때에 무당이 강신하는 의례에 대한 언급도 있다.
이익(李瀷)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평한 바 있다.
「춘관」에, “사무(司巫)가 상사(喪事) 때에 무강(巫降)의 예를 맡았다.” 하였고 주에는, ‘강(降)은 내린다
[下]는 뜻이며, 무당이 신(神)을 내리게 하는 예는 지금 세상에서 사람이 죽어 염(斂)한 뒤에 무당을 불
러 길귀신(礻+ 傷↓)을 내리게 하는 것이 그 유례(遺禮)이다.’ 하였는데, 이는 성인의 뜻이 아닐 것이
다.
↑
11
chatelain님의 블로그
나는 시골 무당이 노래와 춤으로 혼을 불러 망혼(亡魂)의 말을 지어내 어리석은 속인을 유혹하여 재물
을 따내는 것을 보았다. 나라에서 법으로 금지하여 없애야 할 일인데, 어찌 오히려 경훈(經訓)에 나온
단 말인가? (…) 가끔 기도하고 제사하여 감응을 얻었다는 것도 모두 희마(戲魔)의 사기에 어리석은 백
성들이 속은 것이다. 밝고 지혜 있는 자는 스스로 알아야 한다.13)
(강조는 인용자)
이익처럼 경전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무당에 의한 의례를 인정하는 듯한 해석을 “성인의 뜻이 아니
다”라고까지 말하는 것은 매우 급진적인 태도에 속한다. 대부분의 유자들은 이렇게까지 대담한 주장을
펴는 대신, 무당이 “어리석은 속인들을 유혹하고 재물을 사취하는” 현실과 무당이 “경전에 보이는” 사
실 사이의 모순 속에 혼란을 겪고 있었다.
한편 무속을 민족적 기원과 연결시키지도 않았고, 나아가 근대적 민족 개념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조선시대에도 무속을 고대적 기원과 연결시키는 담론이 제시되곤 했다. 일례로 이규경은 「무격변증설
(巫覡辨證說)」에서 무당의 기원과 계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한 바있다. “무당은 비록 천하지만 그
기원을 찾아보면 상나라의 무함(巫咸)으로, 무함 이 사람이 바로 무격의 조상이다.”14) 이처럼 많은 유
자는 무당의 기원을 상(商)의 신무(神巫)였던 무함으로 보았다.15)
근대의 민족주의적 지식인이 단군시대의 무당에게서 한국무속의 기원을 찾았던 것처럼, 전근대의 유자
는 은나라의 무함을 무격의 시조로 보았던 것이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문학에서 무함은 하늘의 지혜를
알고 있는 신령한 존재로 그려졌다. 그렇다면 신령한 무당인 무함과 음사를 행하는 당대의 무당 사이의
현격한 차이는 어떤 방식으로 처리되었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무당에 대해 비판하는 유자들의 글 속
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고려 말 이규보(李奎報)의 「노무편(老巫篇)」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옛날 무함은 신령하고 기이하여
다투어 산초와 양식을 품고 서로 의심을 풀었건만
하늘에 오11른 후에 이은 자 누구인가
지금까지 막막한 천백 년이구나16)
익히 알려진 대로 이 글은 이규보가 무당을 비난하고 배격하기 위해 쓴 것이지만, 이 구절은 마치 무당
의 시조인 무함에게 보내는 찬사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늘로 올라간” 무함을 계승한 사람이 없이 오랜
세월이 흘렀다는 말은 오늘날의 무당들은 모두 거짓되고 신령하지 못하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이는 이
어지는 당시 고려의 무당에 대한 평가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해동은 이 풍속을 다 쓸어버리지 못해
여자는 격(覡)이라 하고 남자는 무(巫)라 하니
스스로 신이 이르러 내 몸에 내렸다 하나
나는 이를 듣고 웃고 탄식한다
굴속의 천년 묵은 쥐가 아니면
숲속의 아홉 꼬리 달린 여우이리라17)
고대의 ‘신령한’ 무당과 당대의 ‘어리석은’ 무당을 대비시키는 주장은 무당을 다루는 문헌에서 매우 널
리 나타난다. 일례로 15세기의 인물인 남효온(南孝溫)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과 사람은 하나의 체(體)이니, 무당이 만약 성실하여 거짓이 없는 것이 무함(巫咸)과 같다면, 어찌 신
명을 통하지 아니하랴? (…) 지금의 무당은 대개 좌도(左道)를 가지고서 백성들을 어리석게하는 것을
일삼는다. 이를테면 일월성신은 천자가 아니면 제사할 수 없는데 무당은 칠성(七星)의 신을 설위(設位)
한다. 명산대천은 제후가 아니면 제사할 수 없는데 무당은 산천의 신을 끌어들인다. 사람의 병은 모두
원기가 고르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것인데, 무당은 귀신이 들어서 그렇다고 말하며 억지로 근거 없는 말
을 만들어 쓸데없이 비용만을 허비한다. 사람의 화와 복이란 자기 행동의 선악에 달린 것인데 무당은 귀
신을 제사하면 복을 받고 귀신을 경홀히 하면 화를 입는다 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들을 숭배하고 신앙
하여 옷 입히고 밥 먹이니, 나라를 해롭게 하고 백성을 좀먹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18)
남효온 또한 무함을 이상적인 무당으로 제시하고 있으나, 무함과 당대의 무당들과의 사이에 이규보가
말하는 것과 같은 완전한 단절은 없다. 그러나 무당은 자신이 제사할 수 없는 신격을 모시며, 병이나 인
간의 화복을 귀신의 탓으로 돌린다는 점에서 거짓되고 해롭다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조선의 유자들은
은나라의 무함을 이상적인 무당의 기원으로 여기고, 주나라의 사무(司巫)를 무당이 국가의례에 참여
할 수 있는 전거로 삼았으나, 자신들이 실제로 관찰하는 무당은 그 고대의 모델에서 일탈한 해로운 존재
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는 이규경의 다음과 같은 서술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무당은 비록 천한 기예이지만 옛날 무당과 지금 무당의 우열을 논하자면, 형(荊), 초(楚), 오(吳), 월
(粵)의 무11당은 큰 무당[大巫]이고, 근세의 속된 무당[俚巫俗師]은 작은 무당[小巫]이다. 입술에 물동이
chatelain님의 블로그
를 붙이고 날카로운 칼 위에서 뛰는 것은 혹 귀신을 끼고 그 술법을 자랑하는 신이(神異)인 듯하다. 이
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미끼로 사람들로 하여금 그 술법에 빠지게 유혹하여 편벽한 믿음[偏信]에 빠지
게 하는 것이다. 아! 사람들이 귀신을 좋아하면서도 스스로 알지 못한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19)
‘실제로’ 신과 통했던 고대의 영험한 무당[大巫]과 ‘속임수’를 써서 백성들을 유혹하는 당대의 천한 무당
[小巫]을 대비시키는 전략은 조선시대의 유자가 경전과 고전에 등장하는 무당과 현실의 무당을 구분하
는 유용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한 가지 딜레마가 잠재되어 있었다. 만약 현실의 무당이 고대
의 무당과 같은 영험을 보인다면 그를 ‘큰 무당[大巫]’, ‘영험한 무당[靈巫]’ 혹은 ‘참된 무당[眞巫]’으로
인정해 주어야 하는가? 무당이 국
가의례나 지방의 공식의례에 동원된다는 사실은 무당의 고전적 영험함을 일정 부분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닌가? 바로 이런 의문이 민속종교의 장에서 유자가 무당에 대해 일방적인 우위를 주장할 수 없는 최
후의 장벽이 되었다.
3. 영웅적 지방관의 무속 타파
조선의 유자에게 있어 무속은 한편으로 음사를 일삼고 백성을 속이는 천박하고 미개한 현상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문화의 원형적 기원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완전히 무시하거
나 배제하기도 어려운 대상이었다.
조선중기 이후 유교적 이념과 예제의 확립은 이런 ‘꺼림칙한’ 마음을 제거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
을 것이다. 기우제 등 국가의례는 순수한 유교적 요소로만 구성되도록 재정비되었고, 한양 도성과 그
주변 지역에서 무당에 대한 금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중앙의 관료는 더 이상 공식적 의례에도 동원되지
않고, 도성 안에서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는 무당에 대해 고전전통과 빗대며 고민할 필요가 없어
졌다.
그러나 지방통치의 차원은 달랐다. 최종성의 주장대로, 조선후기에 이르러 유교는 무속을 배제하고 왕
도(王都)의 성역화를 상당 부분 이루어냈지만, “그것은 역으로 체제의 공식종교인 유교문화가 왕도를
벗어났을 때 현실적인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20)
그럼에도 조선후기의 통치세력은 무속을 포함한 지방의 민속문화를 통제해야 할 현실적인 필요가 있었
다. 서영대는 이를 조선중기 이후 집권세력인 사림(士林)과
지방의 토착세력인 향리의 대립과 연관 지어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그런 만큼 사림파는 자신들이 기반을 둔 향촌사회를 성리학적 질서로 재편성하고자 했는데, 이때 특히
무속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무속은 자신들의 지도이념인 성리학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자신과 경쟁
11
chatelain님의 블로그
관계에 있는 향리세력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권과 더불어 무속의
근절을 위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다.21)
결국 이 시기 지방에서의 무속 탄압은 ‘왕의 교화[王化]’라는 명분으로 강역 구석구석까지 정치적, 문화
적 통치권을 확장하려고 했던 조정의 의도와, 향촌사회에서 토착세력에 대해 우위를 점하려고 했던 지
방관 및 재지사족(在地士族)의 욕망이 결부된 결과였다. 한편으로 이는 식민지 상황에서 토착문화를
배제하여 통치를 용이하게 하려는 식민권력의 요구와, 과거의 문화를 부정하고 ‘근대화’, ‘문명화’를 이
루려 하는 식민지 지식인의 욕망이 공조하는 현상과도 닮았다. 그러나 근대의 미신 담론에서 무속을 배
제하는 데 동원되었던 이성 개념이나 위생관념 등이 아직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전근대의 통치자는
그와는 다른 논리를 개발해야 했다. 다시 말해, 향촌의 종교문화에서 무당을 배제하기 위해서는 단순
히 그들의 미개함을 지적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의례적 ‘무능함’을 증명해야 했다.
이 경우에도 문헌에 나타나는 고전문화는 좋은 범례가 되었다. 민속종교의 장에서 무당과 경합해야 했
던 지방관에게는 대단히 적합한 모델이 있었다.
전국시대의 지방관이었던 서문표(西門豹)의 일화가 그것이었다. 서문표는 위나라 문후(文侯) 때의 인
물로 부임지인 업현(鄴縣)에서 현지의 토착세력 및 무당들과 충돌한다. 그들은 하백(河伯)에게 아내를
바친다는 명목으로 백성에게 거금을 거두고 처녀를 산 제물로 바치고 있었다. 만약 이 의례를 하지 않으
면 하백이 홍수를 일으켜 백성들을 익사하게 할 것이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서문표는 지혜를 발휘해 하
백에게 아내를 바치는 현장에 자신도 참여하기로 했다.
그때에 이르러 서문표가 강가에서 그들을 만났다. 삼로와 아전, 유지들과 마을의 부로가 모두 모였고,
보러 온 백성이 모두 이삼천 명이었다. 무당은 늙은 여자로 나이가 이미 일흔이었고, 여제자 10여 명이
따르며 모두 비단으로 만든 예복을 입고 큰 무당의 뒤에 섰다. 서문표가 말했다.
“하백의 아내를 불러오라. 예쁜지 추한지 보자.” 곧 여자가 장막을 나와서 서문표 앞에 이르렀다.
서문표가 그를 보고는 삼로와 무당과 부로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 여자는 예쁘지 않다. 수고스럽지만
큰 무당 할멈은 들어가서 다시 예쁜 여자를 구해 뒷날에 보내겠다고 하백에게 고하라.” 곧 아전과 군사
를 시켜 큰 무당 할멈을 안아서 물속에 던지게 하고는 조금 있다가 말했다. “무당 할멈이 어찌 이토록 오
래 있는가? 제자가 가서 재촉하라.” 다시 제자 한 사람을 물속에 던지고는 조금 있다가 말했다. '제자도
어찌 이토록 오래 있는가? 다시 한 사람을 보내어 재촉하라.' 또 한 제자를 물속에 던졌다. 이렇게 모두
제자 세 명을 던졌다.22)
서문표는 마찬가지 방법으로 향리의 우두머리인 삼로(三老)를 물속에 던져버리고, 두려움에 떠는 향리
를 굴복시킨다. 이것은 후대의 지방관에 의한 무속 타파 실천을 설명하기 위한 몇 가지 모델을 제시해
주는 사례다.
첫째, 무당은 토착적 지배층(조선의 경우 향리)들과 결탁해 있으며 이들은 군주가 파견한 지방관의 권
위를 거부11하는 존재다.
chatelain님의 블로그
둘째, 백성은 그들 때문에 고통을 받다가 지방관의 파격적인 행위로 인해 해방된다.
셋째, 무속을 타파하는 지방관의 행위로 인해 일종의 성상파괴(iconoclasm)가 일어나지만, 지방관은
이로 인한 재앙을 받지 않는다.
이 가운데 마지막 것은 특히 중요하다. 지방관이 신성한 대상인 무당이나 성소를 공격하고도 귀신의 보
복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무당의 영적인 힘이 허구라는 것, 또는 적어도 지방관의 권위보다는 열등하다
는 것을 폭로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이래 서문표 모델은 무속에 적대적인 지방관에 의해서 반복적으로 재현되었다.
그 가운데 이규보가 「노무편」에서 직접 서문표와 비교하고 있는 12세기의 인물 함유일(咸有一)의 사례
는 그런 시도가 때로는 비극적인 결과를 낳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함유일은 한국 종교사상 거의 최초의
무속타파 운동가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 신유교도 도입되지 않았고,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무속에
친화적인 상황에서 그의 시도는 계속하여 좌절되었다.
함유일은 그 전부터 혹독하게 무당을 배척하였는데 그 까닭은 인간과 귀신이 함께 뒤섞이어 있으면 인
간에게 재변이 많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도감이 된 후 서울에 있는 무당이 모두 교외로
이사하였다. 그는 민가에 있는 음사(淫祀)를 모조리 없애고 불에 태워 버렸다. 그리고 각 처의 산신당
(山神祠)도 특이한 증험이 없는 것은 역시 파괴하여 버렸다. 구룡산(九龍山) 산신이 가장 영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산신당으로 가서 귀신의 화상을 활로 쏘았더니 갑자기 선풍이 일어나고 두 짝 문이 닫히면
서 화살을 막아 냈다. 또 한 번은 용수산 산신당에 가서 영험을 시험한 결과 신통치 않으므로 불태워 버
렸더니 그 날 밤에 왕의 꿈에 신이 나타나 구원을 청하였으므로 이튿날 유사(有司)를 보내 산신당을 다
시 세웠다. 감찰어사(監察御史)로 옮겨갔다가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나갔을 때에는 속군(屬郡)인
봉주(鳳州)에 휴류암(鵂鶹岩)에 연못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영추(靈湫)라고 불렀다. 고을 사람을 모아
더러운 것으로 메우자 갑자기 구름이 일더니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과 번개가 크게 쳐서 사람들이 모두
놀라 엎드렸다. 잠시 후 하늘이 개이고 보니 더러운 것이 모두 나와 먼 언덕 위에 쌓여 있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제사 지내게 하고는 비로소 사전(祀典)에 싣게 하였다. 또 한 번은
삭방도 감창사(朔方道監倉使)로 있을 때 등주 성황신(登州城隍神)이 여러 번 무당에게 내려 국가의 길
흉과 화복을 신통히 알아맞추었다. 함유일이 성황당으로 가서 국제(國祭)를 지낼 때 읍(揖)만 하고 절
하지 않았더니 유사가 왕의 칭찬이나 받을까 생각하고 탄핵하였으므로 그는 파면당하였다.23)
함유일의 실천에는 고려후기 이후의 유자에게서 보이는 명분론이나 도덕론이 발견되지 않는다. 문제
가 되고 있는 것은 인간과 귀신이 섞여 있으면 인간에게 재앙이 생긴다는 개인적 신념, 그리고 각각의
신이 실제로 영험이 있는가의 여부이다. 독특한 점은 그의 활동에 제동을 거는 것이 언제나 왕이었다는
것이다. 왕은 꿈에 신의 요청을 받고 신당에 활을 쏘고 불태우는 함유일을 제지한다. 그리고 함유일이
파괴를 시도한 “영추의 신”이 영험을 보이자 도리어 사전에 기재하는가 하면, 심지어 성황신이 내린 무
당에게 절하지 않은 지방관인 함유일을 파면하기까지 한다. 엘리트 집단 내에서도 민속종교에 대한 비
11
chatelain님의 블로그
판적 관점이 공유되지 않은 고려 전기에 이와 같은 실천은 성상파괴라기보다는 반달리즘(vandalism)
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지방관에 의해 이루어지는 민속종교에 대한 공격이 엘리트문화 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 것은
역시 신유교의 도입 이후로 보아야 할 것이다. 한국 신유교의 시초로 평가되는 안향(安珦)은 상주(尙
州)의 지방관을 맡았을 때 공창(空唱)을 하는 무당을 처벌했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지방관이 지역의 호
족과 결탁한 무당을 굴복시키고, 그 속임수를 폭로하고, 귀신의 보복도 받지 않았다는 ‘서문표 모델’이
전형적으로 재현된다.
충렬왕 원년에는 상주(尙州) 판관으로 파견되었는데 당시 여자 무당 세 사람이 있어서 요망한 신을 받
들고 여러 사람을 유혹하고 있었다. 그들은 합주(陜州)로부터 여러 군과 현을 돌아다니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공중에서 사람이 부르는 소리를 지어 내었고 그 소리가 은은하게 울려오는 것이 마치 길을 비키
라고 호령하는 것[喝道] 같았다. 그리하여 듣는 사람이 서로 뒤질세라 분주히 제사를 지내었는데 수령
마저도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자가 있었다. 그들이 상주에 오자 안향은 그들을 붙잡아서 곤장을 치고
칼을 씌워 놓았더니 무당들이 귀신의 말이라고 하면서 화복(禍福)으로 위협하였으므로 상주 사람이 모
두 겁을 내었으나 안향은 동요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서 무당들이 용서해 달라고 빌기에 그제야 놓아
주었더니 그 요망한 일이 드디어 없어졌다.24)
더 이상 정치권력의 비호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탄압받는 무당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을 해치면
화를 입을 것이라는 협박 정도였다. 그러나 무당을 공격한 유자가 아무런 해도 입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
당과 그들이 모시는 신의 무능함을 입증하는 결과가 되어버린다.
실제로 지방의 음사를 성공적으로 제압한 영웅적인 지방관에 대한 조선 후기의 서사는 그들이 무당의
신을 훼손했음에도 신의 빌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언급으로 끝나곤 한다.
섬 백성은 더욱 음사(淫祠)를 숭상한다. 제주(濟州) 같은 곳은 사당이 없는 마을이 없다. 이를 지키는
자는 이익이 많아 관세(官稅)도 많았다. 참의(參議) 이형상(李衡祥)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있을 때
에 모두 불태워 버렸더니 백성은 모두 놀랐다. 그가 돌아갈 때에는 모두들 물에 빠져 죽을 것이라고 생
각했는데, 그가 바다를 무사히 건너게 되자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한다.25) (강조는 인용
자)
이정악(李挺岳)이 연안 부사(延安府使)가 되었는데, 그 고을에는 본래부터 묵은 폐단이 많았다.
부임하는 즉시 모두 개혁하니 며칠이 안 되어 깨끗이 없어졌다. 예로부터 음사가 있어 기도하는 백성이
모여 날마다 재물을 허비하고 있었는데 공이 즉시 헐어버리고 이렇게 말했다. “저 음사의 신이 빌미가
될 수 있다면 내 몸에 가해질 것이다.” 읍민이 크게 깨닫고 서로 말했다. “전에는 우리가 어리석어 몰랐
구나.”26) (강조는 인용자)
결국 지방관이 무속을 타파하는 방법은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논의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제도적인 논
의의 장에서 무속을 다루는 일반적인 방식은 경전의 전거와 과거의 전례를 통한 정도(正道)와 권도(權
道) 사이의 저울질이었다. 그러나 지방관이 지역민을 설득하는 상황에서는 이런 식의 이론적, 예학적
인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두드러지는 것은 힘의 과시다. 무속의 타파는 대담하고 신속하고
폭력적일수록 성공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그런 신성모독을 일으킨 관리가 귀신의 보복을 받지 않
는다는 것은 그들의 권능이 무당의 귀신보
다 우위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가 되었다.
그러나 만약 무당의 신당을 공격한 유자가 신의 빌미를 입어 해를 당했다면 이런 식의 실천은 정당성을
크게 잃어버린다. 지금까지 다룬 자료는 지방관의 공덕을 다룬 글들로 그런 ‘실패’ 사례는 크게 두드러
지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의 공적 권위를 뒤에 업은 지방관이 아닌 일반 유자가 섣불리 신을 모독할 경
우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두려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일례로 15세기의 인물인 길창부원군(吉昌府院君) 권람(權擥)의 사례가 있다. 권람이 병 때문에 감악
산(紺岳山)에서 기도를 하는데 비바람이 일었다. 그는 감악산신이 당나라 때의 장수인 설인귀(薛仁貴)
라는 말을 듣고, 자신은 일국의 재상인데 왜 자신을 박대하느냐고 신에게 따졌다. 그러자 기도를 주재
하던 무당은 산신의 말을 빌려 그에게 “그대가 감히 나와 맞서니 돌아가면 병이 날 것”이라고 호통을 쳤
다.
이 에피소드를 소개하는 실록의 어조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그때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권람
이 부처를 좋아하지 않고 집을 예(禮)로써 다스리면서도 신을 이렇게 모독하니,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
겼다.”27)
이와 같은 조선 전기 사람의 인식은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당이 동원된 감악산 기도는 ‘불
(佛)’과는 대립되는 한편, 오히려 ‘예(禮)’, 즉 유교에 가까운 범주로 취급되고 있기 때문이다.
야담 기록에서 모욕당한 신의 복수는 더욱 직접적이고 잔혹하다. 『천예록(天倪錄)』에 기록된 일화에 따
르면, 16-17세기의 인물인 권필(權鞸)은 백악산(白岳山) 정상의 사당에 있는 정녀부인(貞女夫人)의
화상을 훼손했다가 화를 입었다. 그가 사람들이 여신상에 기도를 올리는 것에 분개하여 영정을 찢어버
리자, 꿈에 여신이 나타나 자신의 내력과 정체를 밝히고 복수를 다짐한다. 이후 권필은 역사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왕의 노여움을 사 귀양을 가게 되는데, 도중에 여신이 직접 그의 앞에 나타나 그를 살해한
다.28) 국왕의 대리인인 지방관이 음사를 타파하고 왕의 교화를 전파하고 있다는 승리의 서사 이면에
는, 자격이 없는 유자가 정당하고 강력한 신을 모욕했다가 보복을 당했다는 음울한 패배의 서사 역시 공
존했던 것이다.
마지막 장에서 다룰 내용은 이런 종류의 야담(野談)에서 유자와 무당의 ‘경쟁’이 어떤 방식으로 묘사되
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4. 신과 망11자에 대한 접근권
chatelain님의 블로그
국왕이든 지방관이든 통치자의 언어 속에서 유교와 무속의 관계는 대체로 일방적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민속종교의 장에서 이 관계는 좀 더 유동적이고 역동적이었다. 개인의 문집이나 야담 자료에는
유자인 ‘선비’가 주술적 권능이나 의례적 주도권을 놓고 무당과 경쟁관계에 처하는 사례들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유자가 주술적 실천의 주체로서 무당과 대등하게 경합했다는 말은 조선시대의 유교에 대한
우리의 선입견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야사나 필기류에 나타나는 민속종교 현장에서의 선
비는 결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 자들이 아니었다.
일례로 강상순은 『용재총화(慵齋叢話)』,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 등의 조선전기 필기류에 기록된 사
대부의 축귀담에 주목하였다. 이는 민중 사이에서 전승되어 온 무속적, 주술적 귀신 관념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생성된 이야기라는 것이다. 이런 논의에 따르면, 유자의 기록은 결코 민속적인 귀신담
을 탈신비화하거나 부정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유자는 “오히려 그와 같은 기괴한 귀신의 존재를 실체
로 인정하면서 다만 그것의 우열관계를 뒤집고만 있을 뿐이다.”
이런 서사 속에서 유자는 민속종교의 주술적 세계관을 공유하면서, 그 체계 내에서 가장 강력한 능력을
발휘하는 전문가로 묘사되곤 한다. 다시 말해, “단지 더 큰 주술적 힘을 지닌 주체만 바뀌었을 뿐 그러
한 주술이 횡행하는 세계 자체는 변한 게 없는 것이다."29)
유자가 무당과 동등한 세계관 내에서 도덕적, 영적 우위를 주장했다는 증거는 이런 축귀담만이 아니
다. 종종 유자는 자신이 무당보다 신과 더 가까이 있으며 더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주장하곤
했다.
이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문헌이 허균(許筠)이 지은 「견가림신(譴加林神)」이다.30) 그는 자신이 유배지
인 함산(咸山)의 성황사에서 무당을 만난 일을 환상적인 서사로 서술하고 있다. 허균은 비바람이 거세
게 부는 날 사당에 들어와 반복적으로 신상(神像)을 단장하는 무당을 만났다.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
자 무당은 이렇게 답했다.
“함신(咸神)은 남편이고, 임신(林神)은 아내입니다. 함신이 첩[媵]에 빠져 아내를 못생겼다고 하였습니
다. 아내가 첩에게 화가 나 찾아와서는 닥치는 대로 짓밟고, 비바람을 몰고 와서는 비 뿌리며, 욕설을 퍼
붓고, 남편 저고리를 잡아 찢고, 첩의 머리털을 뽑았습니다. 갔다가는 또 곧 돌아오는 게 밤낮도 없습니
다. 무당의 영(巫靈)이 영험하지 못해 힘으로 싸움을 말리기 어렵기에 갓이며 옷이나 고쳐주면서 토우
(土偶)를 꾸며주고 있는 겁니다.”31)
즉, 무당은 비바람이 부는 원인을 신들 사이의 치정 싸움으로 지목하고, 신상을 꾸며주며 달래고 있었
다. 이 이야기를 들은 허균은 유자로서 부부싸움을 하느라 제 할 일을 다 하지않는 신을 고발하고 처벌
해야 한다고 마음먹는다. 그는 즉시 향을 사르고 제문을 낭독하였다. 무당과는 달리 그는 부부 성황신
을 달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권위를 초월하는 천신인 “후황(后皇)”과 “북두(北斗)”에게 직접 호소한
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허균 자신의 “혀에 명하여”, “뇌사(雷師)”와 “팔위(八威)”와 같은 신을 보내
성황신을11벌하고 그들의 “눈을 파 버리고 목을 잘라” 버리라고 요청한다.
chatelain님의 블로그
그러자 잠시 후 붉은 옷을 입은 신장(神將)이 허균 앞에 나타난다. 신장은 두 신은 모두 남자고, 신이 신
을 공격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모든 것은 무당의 거짓말이라고 폭로한다. 그러면서 신장은
이 재앙의 원인은 백성이 무당을 믿어 음사를 하고, 이기적인 마음으로 제사를 지내는 등 신을 노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무당은 반성하지 않고 신들이 부부싸움을 하고 있다고 사람을 속이니
신이 더욱 노하여 비바람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풍자적인 글에는 당시의 무속에 대한 허균의 비판적인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이것은 유자의 의례적
권위가 지역신인 성황을 초월해 있으며, 보다 보편적인 상위 범주의 천신과 직접 소통할 수 있음을 과시
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영적인 권능은 도덕적인 위민(爲民) 의식과도 연결되어 있다. 즉, 무당은
신이 내리는 재앙 앞에서 그저 신을 달랠 뿐이지만, 유자는 백성을 위하여 하늘에 직접 호소하여 신을
탄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유자가 무당보다 더욱 직접적이고 올바르게 신과 만날 수 있음을 주장하는 이야기는 이외에도 있다.
16세기의 인물인 김효원(金孝元)은 삼척(三陟)의 무당이 모시는 신성한 비녀인 오금잠(烏金簪)을 파
괴하고 이를 위패로 대체한 것으로 유명하다.32) 이 사건에 대한 조식(曺植)의 기록에 의하면, 김효원
은 백성이 성황에 오금잠을 모시고 신명(神明)처럼 받드는 것에 분개하여, “좋은 날을 골라 제물을 갖추
고”, “비녀를 깨부수고 불에 던졌다.” 지역민은 이런 행위가 화를 불러오지 않을까 두려워하지만, 김효
원이 성황의 위판을 설치하고 제사지내자 이에 탄복하였다.33)
이것은 전형적인 ‘서문표 모델’, 즉 지방관이 토착적인 음사를 폐지하고도 화를 입지 않음으로써 권위
를 보였다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김효원과 동시대 인물인 유몽인(柳夢寅)은 이 사건에 대한 흥미로운
뒷얘기를 기록하고 있다. 오금잠을 파괴하기 전날 꿈에 김효원은 꿈에 삼척의 성황신을 만났다는 것이
다.
“나는 이 고을의 성황신입니다. 이 고을이 생기면서부터 내 위판(位版)을 설치하고 산사(山祠)에서 제
향을 해 왔습니다. 그런데 중년(中年)에 신라 왕의 삼녀(三女)라고 하는 요괴한 무당 귀신이 소백산에
서 내려와 백성을 현혹하며 괴이한 일을 하니, 간혹 징험됨이 있어 백성이 미혹되었습니다. 이에 나를
배척하고 사당을 빼앗아 그의 제사를 받들고, 나의 위판을 철거해서 관청 안 시렁 위에 걸어 두었으니
욕됨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원께서 속히 그 신을 내치시고 나를 옛 사당에 돌아오게 해 주시면 이
보다 더한 다행이 없을 것입니다.”34)
이 이야기에서 무당이 모시는 지역신은 원래의 올바른 신인 성황신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참칭하고 있
는 악신으로 묘사된다. 물론 이것은 유교적 예제, 보다 정확히는 토착적인 신상(神像)이나 신물(神物)
대신 표준화된 성황신의 위패를 모실 것을 권장하는 홍무예제(洪武禮制)의 도입과 관련이 있는 사례
다.35) 그런데 이 이야기 속에서는 그 선후관계가 역전되어,
오금잠을 제거하고 위패를 설치하는 것이 원래의 성황사를 ‘복원’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나타난다. 이것
은 단순히 지방관이 ‘부정한’ 민속종교를 위패를 사용하는 공식적인 유교식 의례로 대체하였다는 이야
기가 아니11라, 유자가 무당보다 더 올바르게 신을 접하고 모실 수 있다는 주장이기도 한 것이다.
무당이 신을 접하고 모시듯이, 유자도 꿈을 통해 신과 접촉할 수 있으며, 나아가 더욱 ‘올바르게’ 할 수
있다는 사고는 파격적으로 보인다. 이 문제에 대해 17세기의 인물인 이식(李植)은 다소 독특한 주장을
펴고 있다. 그는 무당이 귀신을 불러오는 현상 자체의 실제성을 인정한다. 『주례』, 『주역』 등의 경전에
무당이 등장하며, 시동(尸童)을 쓰는 고대의 예법 또한 무당이 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여기
서 다시 등장하는 것이 고대의 무당과 당대의 무당 사이의 차이에 대한 담론이다. 시동을 쓰는 예법이
사라지면서 무당은 공식적인 제사에서 배제되었다. 그러자 이제는 무당이 직접 음사(淫祠)를 짓고, “정
당하지 못한 귀신에게 기도하게[禱非其鬼]”되었다. 이 때문에 무당의 제사는 재앙만 가져오고 복은 내
려 주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당이 재계하고 복장을 갖추어 북 치고 춤을 추면서 귀신을
부르면 분명 “감응하는 이치[感應之理]”가 있으니, 무당이 귀신과 접할 수 있다는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무당이 귀신이 부르는 것이 예법이 될 수 없는 음사(淫祀)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식은 정당한
제사가 아닌 무당의 의례조차도 “혼령을 느끼게” 할 수 있는데, 자손된 자가 정신을 집중하고 몸을 정결
하게 하는 등 정성을 다 바쳐서 선조의 혼령을 구한다면 마찬가지로 징험이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즉, 무당이 귀신을 부르는 행위를 허망한 행위로 취급할 게 아니라, 유자가 그에 못지않게 정성을 들여
서 신과 접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무당이 영적인 행위의 전문가라고 하여 그에게 의존한다면, 무당에게 붙어 있는 사귀(邪鬼)가 집
안에 해를 끼치게 될 것이며, 선조의 신령도 그 귀신에게 더러워지게 될 것이니 무당을 멀리하라는 경계
다.
이식은 기본적으로 무당이 귀신을 불러와 감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대의 무당과 당대의 무당을 대비시키며, 무당의 행위는 예법에도 맞지 않고 불러오는 귀신도 사귀(邪
鬼)라 복이 없다는 표준적인 논리를 제시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무당이 영적인 존재와 접촉하는 능력에서 실제로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다는 사실
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조의 혼령을 바르게 모실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자손이다. 그러
므로 유자는 마치 무당이 귀신을 부를 때처럼 “정신을 집중하고 몸을 정결하게 하여 정성을 다 바쳐서
구해야[專意致潔盡誠以求之]”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손들이 무당의 힘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무
당의 역할을 대체해야 조상의 신령이 무당의 사귀에게 더럽혀지는 일 없이 편안할 수 있고, 집안 역시
재앙을 피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36)
이 관점에 의하면, 무당은 귀신과 접하는 능력 자체는 유자보다 뛰어나지만, 그들이 부르는 신은 올바
른
신이 아니므로 복을 가져다줄 수 없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의례 시행자, 대상, 방법이 모두 정당하게
이루어지는 유교식 제사만이 효과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야담 자료에서는 이와는 대조되는 또 다른 논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은 조상신이 유교식 제
사보다는 무당의 굿을 더 선호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11
chatelain님의 블로그
『천예록』에는 꿈에서 죽은 어머니를 만나 대화를 나눈 한 “승지(承旨)”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어머
니는 용산 강가에 살고 있는 자기 노비가 마련한 굿에 흠향하러 가는 길이었다. 아들은 집에서도 기신제
(忌辰祭), 시제(時祭), 차례와 같은 유교식 제사를 올리고 있는데 왜 노비의 집에서 하는 굿판에 가느냐
고 물었다. 어머니의 답은 다음과 같았다.
“제사가 있다 해도 신도(神道: 망자의 귀신)들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무당의 굿[神祀]만
중요하게 여긴다. 굿이 아니면 혼령이 어떻게 한바탕 배불리 먹을 수 있겠느냐?”37)
이 이야기에서 망자인 어머니는 유자인 아들의 제사(祭祀)를 거절하고 무당의 굿[神祀]을 선택한다. 앞
서 허균과 김효원의 일화는 국가의례에 포섭된 ‘성황신’에 대해 유자가 도덕적, 영적 우위를 행사했다
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조상’인 망자에 대해서는 이 권력관계가 역전된다. 유교는 가례체제를 정비
하면서 조상의 영에 대해 독점적인 접근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무당이 묘사하는 망자는 혼백(魂魄)의 기로 흩어지는 비인격적인 존재가 아니라, 개체성을 가
지고 있으며 의례에 대한 요구와 욕망을 가진 자율적인 존재다. 그런 점에서 무당을 통한 조상의례는 예
학적 정통론이 아니라 효(孝)의 도덕률 속에서 재평가된다. 즉, 조상이 제사보다 굿을 선호한다면 유자
는 무당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이외에도 조선후기의 야담 및 필기류의 서사에서는 무당이 유자에 대해 우위를 점하는 영역이 종종 묘
사된다. 그들 대다수는 망자와 죽음의 세계를 다루는 경우이다. 물론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신유교의 표준적인 이론은 혼백론이었다. 그러나 이런 지적인 논의는 망자가 개체적인 인격을 유
지하며 귀신이 된다는 좀 더 직관적인 민속적 인식과 상시적으로 경합해야 했다. 그리고 이는 이례적인
사건들, 즉 사람이 죽었다가 깨어나는 ‘임사체험’의 상황에서 죽음에 대한 무당의 해석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다.
『어우야담(於于野談)』에는 두 건의 임사체험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그 주인공은 실존인물인 고경명
(高敬命)과 명원군(明原君) 이호(李灝)다. 이들은 모두 한 번 죽었다가 깨어났는데, 둘 다 죽어 있는 사
이에 굿을 하는 곳에 가서 무당에게 대접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38)
이런 이야기가 실제 해당 인물의 진술을 어느 정도나 반영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이런 체험담
은 그 주인공이 실존하는 양반, 왕족 등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유교적 지식인에 의해 수집, 기록된 야담
집에 실려 있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선언되는 이념적 교의와는 달리, 상당수 유자는 세계관이나 영혼관
을 상당 부분 무속과 공유하고 있었으며 무당의 전문영역에 대해 의외로 많은 부분을 인정하고 있었으
리라 판단할 수 있다.
다음 사례는 『천예록』에 실린 송상인(宋象仁)에 얽힌 이야기이다. 이것은 유자와 무당의 경쟁 양상에
대해 지금까지 다룬 주제 세 가지가 모두 연관되어 있으면서, 유자에 대한 무당의 승리가 선언되는 흔
치 않은 자료다. 17세기 초에 활동한 송상인은 남원부사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는데, 『천예록』에 의하
면 그는 남원에 부임하자마자 관내에서 무당의 활동을 금지했다고 한다. 남원에서 무당이 발각되면 당
장 죽여 버11리겠다는 특명도 내려졌다.
chatelain님의 블로그
이 조치가 역사적으로 실제 이루어진 일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조선후기 지방
관에게 있어 무속 타파는 중요한 책무였다. 송상인의 명령에 의해 남원의 무당이 모두 다른 고을로 옮겨
갔다는 서술도 있다. 표준적인 서사를 따른다면, 이것은 음사를 타파한 영웅적인 지방관의 이야기로 마
무리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송상인은 남원의 광한루에서 당당하게 무당의 행색을 하고
말을 탄 미인을 만난다. 송상인은 자신이 무당을 금지하는 영을 내렸는데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었
다. 그러자 그는 무당에도 ‘가짜’와 ‘진짜’가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은 ‘진짜 무당[眞巫]’이므로 금지의 대
상이 아니라고 답했다. 무당은 자신이 실제로 귀신을 부를 수 있는 ‘진짜 무당’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
해, 최근에 죽은 송상인의 친구를 자기 몸에 내리게 한다. 무당은 둘 사이의 내밀한 이야기를 낱낱이 늘
어놓아 송상인을 통곡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일이 있은 후 강직한 유자였던 송상인은 “이제야 무당
도 진짜가 있음을” 알았다고 하면서 그 무당에게 많은 상을 내리고 무당을 배척하는 일을 그만두게 되
었다는 것이다.39)
‘진짜 무당’과 ‘가짜 무당’의 대비는 고대의 영험한 무당과 당대의 요사한 무당을 분리시켰던 유자의 무
속 논의가 필연적으로 처하게 된 딜레마와 연관되어 있다. 현재의 무당이 문제가 되는 것은 사특한 귀신
을 끼고 요사한 술수를 부리거나, 혹은 귀신을 부린다고 주장하면서 사람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무당이 실제로 귀신을 불러올 수 있다고 믿어지고, 그 귀신이 부정적 범주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무당은
유자에게도 그 영험함을 인정받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이 경우 가장 이상적인 대상이 바로 ‘친근한
망자의 영혼’이었다.
원한에 차서 살아있는 자에게 해를 끼치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와 친근한 관계에 있었던 부모
나 친구의 영이라면 유자도 이를 사귀(邪鬼)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무당은 개체성을 유지하고
있는 망자에 대한 독점적인 접근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것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성리학적 세계관
을 표명해야 했던 유자가 쉽게 관여할 수 없는, 무당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활동 공간이었다.
5. 맺음말
근대 이후 무속 담론은 한편으로 민족문화의 원형을 담고 있는 잔존 민속, 다른 한편으로 타파되어야
할 미신적 유물이라는 긴장 속에서 전개되어 왔다. 그리고 전근대의 유교적 지식인 또한 근대의 지식인
만큼이나 무속 현상을 설명하고, 타자화하고, 통제하고자 했다.
지금까지 무속에 대한 유자의 담론으로 흔히 지적되어 온 것은 음사론이다. 그러나 미시적인 차원에서
는 그보다 더욱 다양하고 정교한 전략들이 존재하였다. 근현대의 무속 연구자가 무속을 민족적 원형을
담고 있다고 믿은 반면, 전근대의 유자는 무속이 삼대의 문화적 기원과 이어져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무속의 원형을 보호하거나 복원해야 할 동기는 없었다. 오히려 하나의 원형적 범례
로서 반복되어야 할 실천은 왕화(王化)를 확산시키기 위해 무속을 타파하는, ‘서문표 모델’과 같은 영웅
적 행위였다.
11
chatelain님의 블로그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유자들이 백성을 교화하고 설득하기 위해서 동원한 수단은 예학적 논
의나 도학적 명분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유자와 무당, 그리고 대중은 초자연적 사실에 대한 유사한
믿음의 체계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민속종교의 장’은 제도와 정통을 논의하는 ‘공식종교의 장’과는 다
른 언어와 논리가 작동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우리는 공식종교로서의 유교, 민속종교로서의 무속이라
는 틀을 대체, 확장하는 다음의 도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국가의례의 예제를 다루는 공식종교의 장에서 무속은 유교의례의 빈자리를 보완하고 비상시에 동원되
는 권도(權道)의 재료였다. 따라서 공식종교의 장에서는 정통행(orthopraxy)으로서의 ‘유교’와 제한적
으로 도입될 수 있는 ‘무속’이 공존하며 경합하고 있었다.
이 장에서 통용되는 언어는 경전과 의례실행에 대한 전례(前例)다. 이른바 조선후기 유교의 의례적 ‘순
수화’는 바로 이 영역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민속종교의 장에서 경합하는 행위자는 전통 자체가 아니라 그 전통을 체화하여 실천하는 종교
전문인인 ‘무당’과 ‘유자’였다. 이 장에서는 신과 죽은 자의 세계에 대해 느슨하게 공유되는 상징체계가
작동한다. 각각의 행위자는 이 체계 내에서 자신의 의례적, 영적 권위가 상대보다 강력하고 우월하다
는 것을 대중을 상대로 설득해야 했다. 특히 신이나 망자에 대한 접근은 무당과 유자 모두가 스스로의
전문성을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이 영역이 양자가 경쟁하는 주된 접점이 되었다.
<표 2> 공식종교와 민속종교의 장에서의 儒·巫의 경쟁 양상
11
chatelain님의 블로그
<표2>에서 각 행위자가 위치한 수직축은 각각의 장 내에서의 권력관계, 사각형에 일치하는 정도는 행
위자의 실천과 해당 장에서 통용되는 체계와의 적합성을 의미한다. 공식종교의 장에서 유교와 무속이
공존 혹은 병행했다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정통적인 실천은 유교적인 것이었다.
이 영역에서 무속의 도입은 제한적, 한시적인 것이었고 조선후기 유교예제의 정비와 함께 무속적 요소
는 점차 추방되어 갔다. 같은 시기 민속종교의 장에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다. 지방관을 포함한 유자
는 민속종교의 상징체계에서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던 무당의 영역에 침투하고, 주로 지역의례와 가정
의례의 현장에서 그들을 대체하려 하였다. 어느 장에서나 정치적 권위는 비대칭적이었으나, 무당은 토
착적인 문화적 질서에 대해 친화성을 가지는 실천을 통해 민속종교의 장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상당 부
분 유지할 수 있었다.
민속종교의 장 안에서는 유자도 무당도 의례의 주도권과 영적 권위를 놓고 경합하는 각각의 종교전문
인일 뿐이었다. 이 조건 속에서 유자는 사회적 지위와 권위에 있어 우위에 있었고, 무당은 광범위한 민
중의 종교적 심성과 수요를 만족시키기에 더욱 익숙하고 적합한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국
가의례체제에 포섭되어 있었던 성황, 산신 등 지역신에 대한 접근권에서는 유자가, 망자의 영과 죽음
11
chatelain님의 블로그
의 세계에 대한 접근권에서는 무당이 우위를 차지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결국 이 민속 종교의 장에
서 조선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유교화’를 완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출처
<민속학연구>
2020, vol., no.46, pp. 57-85 (29 pages)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
Bean.artiId=ART002602087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