ジュリアおたあ
| ジュリア おたあ | |
|---|---|
| 教派 | カトリック教会 |
| 洗礼名 | ジュリア(ユリア) |
| 受洗日 | 1590年代? |
| 誕生日 | 不明 |
| 帰天日 | 不明 |
ジュリア おたあ(宣祖13年(1580年生) - 没年不詳[1])は、安土桃山時代の朝鮮人女性。文禄の役(朝鮮出兵)の際に日本に連行され、のちにキリスト教に改宗して、現代に伝わる洗礼名「ジュリア」を得て、日本名「たあ」と合わせて「ジュリアおたあ」と呼ばれる[1][注 1]。
残されたジュリアおたあの書状によると、父親は朝鮮王朝の済運大軍節度使で年寄衆5人のうちの1人、金世王温と言い、母親は洪氏。兄弟姉妹は5人居て、ジュリアおたあが長女で村田安政は次男であったとされる。文禄の役発生時に13歳であったと記述しており、それに従えば1580年頃の生まれと推測される(弟の安政は1587年頃生まれ)[3]。
彼女を猶子とした小西行長が関ヶ原の戦い(1600年)に敗れて刑死した後、勝者である徳川家康の侍女となったが、禁教令が出てもキリシタンとしての信仰を捨てず、家康の側室への抜擢に難色を示したため、伊豆諸島へ流刑となった[1]。その後大阪で暮らしたのち晩年は長崎へ渡った。
生涯
出自は人質として捕虜となった李氏朝鮮の両班の娘とされる。没年や実名、家系などの仔細は不明であるが、生き別れた弟が、朝鮮出兵に参加した毛利家の家臣として村田安政(うんなき)として一家を立て、長州藩士を経て現代まで家系が存続しており、おたあが送った書状3通、安政が家康に拝謁した際に下賜されたと思われる三つ葉葵(徳川家家紋)入り小袖が萩博物館に寄贈されて現存している[1][4]。キリシタン史研究家の浅見雅一(慶応義塾大学教授)は書状の分析から、貴族階級の出身と推定している[1]。
文禄の役において、朝鮮征伐軍により平壌近郊で保護されたのち、キリシタン大名の小西行長に身柄を引き渡され、小西夫妻のもとで育てられる。保護された際、名を聞かれ「オプタ(없다 無い)」と答えたのが転じて「おたあ」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説がある[5]。行長夫人のもとでキリシタンの洗礼を受け、ジュリアの名がついた[6]。行長夫人の教育のもと、とりわけ小西家の元来の家業と関わりの深い薬草の知識に造詣を深めたといわれる。
慶長5年(1600年)の関ヶ原の戦いにて敗れた行長が処刑され小西家が没落すると、美しく聡明なジュリアの評判を聞いた徳川家康が大奥に召し上げ[7]、伏見城で御物仕(正室の食事係)となった[7]。昼に一日の仕事を終えてから夜に祈祷しキリスト教の教理書を読み、他の侍女たちをキリスト教信仰に導いたとされる。伏見教会のロドリゲス・ジラン神父は、1605年『イエズス会年報』の中で、高麗(李氏の前の王朝で、朝鮮半島を指しても使われる)生まれでキリシタンの侍女、ジュリアについて報告し、熱心な信者としての様子を「茨の中の薔薇」と評した[8]。
慶長11年(1606年)春、家康は江戸城にジュリアを伴った[9]。家康の許可を得て江戸城下につくられたフランシスコ会の天主堂(教会)の神父アルフォンソ・ムニョスは、1607年2月、スペイン領フィリピンの中心であるマニラの管区長への報告書の中で、天主堂のミサに通う侍女のジュリアについて触れている[9]。
慶長12年(1607年)春、家康は駿府城で隠居する際にジュリアを伴った[10]。駿府城では「阿瀧(おたあ)」と呼ばれた[10]。スペインのセバスティアン・ビスカイノは、慶長16年(1611年)に駿府城で家康と会見した際、ジュリアが同席していたことを『金銀島探検報告』に記載している[10]。
家康は岡本大八事件を機にキリシタンを排除するようになり[11]、慶長17年(1612年)にキリシタン禁教令を出した[12]。ジュリアはキリシタン棄教の要求を拒否した上、69歳の家康の側室への抜擢に難色を示したため駿府より追放され、伊豆大島在島30日で新島に、さらに15日後に神津島へと流された[13]。どの地においても熱心に信仰生活を守り、見捨てられた弱者や病人の保護や、自暴自棄になった若い流人への感化など、島民の日常生活に献身的に尽くしたとされる(おたあはその教化で島民からキリシタン信仰を獲得したとも言われるが定かではない)。また、3度も遠島処分にされたのは、そのつど赦免と引換えに家康への恭順の求めを断り続けたこと、新島で駿府時代の侍女仲間と再会して、一種の修道生活に入ったことなどが言及されている。セバスチャン・ヴィエラ神父の1613年『年度報告』、1619年度『イエズス会年報』のロドリゲス・ジラン神父の報告書には、ジュリアの消息が記載されている[14]。
1622年2月15日付『日本発信』のフランシスコ・パチェコ神父の書簡に、おたあは神津島を出て大坂に移住して神父の援助を受けている旨の文書がある[15]。「ジュリアという名の女性は、神津島に流された後も信仰を捨てることなく、我々の仲間の支援を受けて大坂へと移った。彼女はその地で信仰生活を続け、後に長崎へと赴いた。彼女の忍耐と敬虔さは、我々宣教師にとっても模範であり、信徒たちの励みとなっている。」
没後
1950年代に神津島の郷土史家山下彦一郎が、島にある由来不明の供養塔がおたあの墓であると主張したことから、神津島で没したとする説が出た。以来同島では毎年5月に、日韓のクリスチャンを中心として、おたあの慰霊祭が行なわれ、1972年には韓国のカトリック殉教地の切頭山に神津島の村長と村議会議員らが、おたあの墓の土を埋葬し、石碑を建てた。しかしその後、上述の『日本発信』が発見されたため石碑は撤去され、真相が完全に明らかになるまで切頭山の殉教博物館内で保管されることになった。
1967年から1968年ごろ、上智大学教授のフーベルト・チースリクがローマのイエズス会記録所やロンドンの大英博物館などからジュリアに関する複数の資料を発見した[16]。
1975年、神津島村長がジュリアの殉教を報告し、教皇の代理が神津島へ礼拝に訪れ、ジュリアを聖人と認めた[16]。

徳川家康の側室説
おたあジュリアについては、徳川家康の側室であった可能性がしばしば指摘されている。こうした見解は、彼女が家康に近侍していたこと、また弟とされる村田安政が家康に謁見を許され、刀・馬・小袖を拝領するなど厚遇されたことに由来する[17]。また、一部のキリシタン関係史料には、家康と特別な関係にあったかのように受け取れる記述も見られる[18]。
一方で、イエズス会側の史料は、この側室説を繰り返し否定している。たとえば、ヴァレンティン・カルヴァーリョは、ジュリアが家康の側室であったという記述を「事実でない」としたうえで、彼女は他の侍女たちと同様に宮廷で奉仕していたにすぎないと反論している[19]。また、ルイズ・デ・メディナも、彼女が家康の側室であった可能性を否定している[20]。
このため、近年の研究では、ジュリアが家康に近い立場で仕えていたこと自体は認められるものの、側室であったと断定できる史料は確認できないとする見解が有力である[21]。むしろ、教会側には彼女を側室とみなされたくない事情が存在した可能性が指摘されている[22]。
その背景としては、カトリック教会が婚姻の単一性、すなわち一夫一婦制を重視していたことが挙げられる。側室や妾の存在は、洗礼や司牧の可否に深く関わる教会法上の問題であり、当時の宣教師たちにとっても容易に整理できない課題であった[23]。そのため、おたあジュリアの側室説は、史料上まったく根拠がないわけではないものの、確証を欠く仮説にとどまるとするのが慎重な整理である[24]。
登場作品
- 音楽
- 『夢に消えたジュリア』(2004年発売・サザンオールスターズ)
- 作詞作曲をした桑田佳祐はこの曲を作ってから、ジュリアおたあ伝説を知り、楽曲の内容も伝説に似ている。
- 小説
- 『サラン 哀しみを越えて』(荒山徹、文藝春秋、単行本版 2005年5月刊 ISBN 4163239405)
- 同社より文庫化の際に『サラン・故郷忘じたく候』と改題。文庫版 2008年6月刊 ISBN 4167717859
- 映画
- ミュージカル
- 『ジュリアおたあ』(2015年、わらび座)- 日韓国交正常化50周年を記念した公演で、幼少時代から駿府城で棄教を迫られるまでを描く[25]。
- 漫画
『信長を殺した男〜日輪のデマルカシオン〜』(2023、藤堂裕、明智憲三郎、秋田書店)
- 『春霞の乱』(1990年、河村恵利、秋田書店 プリンセスコミックス『枕草子』に同時収録。1990年8月刊 ISBN 4253074006)
脚注
注釈
- ジュリアについては、日本管区長フランシスコ・パシェコの1622年2月15日付書簡追伸に「Vota Julia」と記載されている。パシェコ神父は「おたあ」を「ヴォタ」と聞き誤って「Vota」と表記したと考えられ、漢字の「太田」を宛てることは難しい[2]。
出典
- 「家康の侍女 流刑の朝鮮人キリシタン:ジュリアおたあ直筆書状/山口・萩博物館 出自裏付け 捕らえられた体験記す」『朝日新聞』夕刊2023年4月19日(社会・総合面)2023年5月17日閲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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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city.hagi.lg.jp/hagihaku/event/202403_otaa/index.html 萩博物館開館20周年特別展示シリーズ その1 学芸員イチオシの逸品 ジュリアおたあの書状
- “萩藩士宅に家康の小袖 背景に秀吉の朝鮮出兵 山口で特別公開”. 毎日新聞 (2023年4月27日). 2023年4月28日閲覧。
- 盧 2020, p.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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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G.ルイズデメディナ『遥かなる高麗 16世紀韓国開教と日本イエスス会』近藤出版社、1988年、271頁。ISBN 4-7725-04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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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ホアン・G・ルイズデメディナ『遥かなる高麗――十六世紀韓国開教と日本イエズス会』近藤出版社、1988年。
- 安廷苑「おたあジュリアの事例にみるカトリック教会の婚姻問題」。
- 同上。
- 安廷苑『キリシタン時代の婚姻問題』教文館、2012年。
- 安廷苑「おたあジュリアの事例にみるカトリック教会の婚姻問題」。
- “ミュージカル「ジュリアおたあ」 信仰守り希望与えた純真さ描く”. キリスト新聞 (2015年9月12日). 2022年12月29日閲覧。
参考文献
- 五野井隆史『キリシタン信仰史の研究』(吉川弘文館、2017年)305-308頁。ISBN 9784642034791 。
- 盧桂順『朝鮮女性史 歴史の同伴者である女性たち』東京図書出版、リフレ出版、2020年4月、210-224頁。ISBN 978-4-86641-298-6。
- 崔書勉 著「壬辰・丁酉七年戦役の被虜たち」、金正柱 編『韓来文化の後栄』 中巻、韓国資料研究所、1962年、174-191頁。全国書誌番号:50003851。
関連文献
- 谷真介『ジュリア・おたあ あらしの時代に生きたキリシタン』女子パウロ会、2015年10月。ISBN 9784789607612。
関連項目
줄리아 오타아
| 줄리아 오타아 | |
|---|---|
| 교파 | 가톨릭 교회 |
| 세례명 | 줄리아 (유리아) |
| 수세일 | 1590년대? |
| 생일 | 알 수 없음 |
| 귀천일 | 알 수 없음 |
줄리아 오타아 (선조 13년( 1580 년생 ) - 몰년 불상 [ 1 ] )은, 안도 모모야마 시대 의 조선인 여성. 문록의 역 (조선출병) 때에 일본에 연행되어 나중에 기독교 로 개종 하여 현대에 전해지는 세례명 '줄리아'를 얻고, 일본명 '타아'와 함께 '줄리아오타아'로 불린다 [ 1 ] [ 주1 ] .
남겨진 줄리아 오타 그 서장에 따르면, 아버지는 조선왕조 의 제운대군절도사로 연기중 5명 중 1명, 김세왕온 이라고 말해, 어머니는 홍씨. 형제 자매는 5명 있어, 줄리아 오타아가 장녀로 무라타 야스마사는 차남이었다고 한다. 문록의 역 발생시 13세였다고 기술하고 있으며, 그에 따르면 1580년경의 태생이라고 추측된다(동생의 안정은 1587년경 태생) [ 3 ] .
그녀를 유자 로 한 코니시 행장이 세키 가하라의 싸움 (1600년)에 패해 형사한 후, 승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시녀가 되었지만, 금교령이 나오더라도 기독교인 으로서의 신앙 을 버리지 않고, 이에야스 의 측실로의 발탁에 난색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 이즈 제도 에 . 그 후 오사카에서 살았던 후 만년은 나가사키로 건너갔다.
평생
출자는 인질로서 포로가 된 이씨 조선 의 양반 의 딸로 여겨진다. 몰년이나 실명, 가계 등의 자세는 불분명하지만, 살아남은 동생이 조선 출병에 참가한 모리가 의 가신으로서 무라타 야스마사(うんなき)로서 일가를 세워, 조슈 번사 를 거쳐 현대까지 가계가 존속하고 있어, 오타아가 보낸 서장 3통, 야스마사가 이에야스에게 배모했을 때에 하사되었다고 생각되는 3개엽 아오이 (도쿠가와 가문 ) 들이 소매가 하기 박물관 에 기증되어 현존하고 있다 1 ] [ 4 ] . 키리시탄 역사 연구가의 아사미 마사이치 ( 게이오 대학교 교수)는 서장 분석에서 귀족계급의 출신으로 추정하고 있다 [ 1 ] .
문록의 역 에 있어서 조선 정벌군에 의해 평양 근교에서 보호된 후, 키리시탄 다이묘 의 고니시 행장에게 신품을 인도되어, 코니시 부부 아래에서 자란다. 보호를 받았을 때 이름을 듣고 ‘옵타(없다 없음)’라고 대답한 것이 돌아가서 ‘오타아’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 5 ] . 행장 부인 아래에서 그리스도인의 세례를 받고 줄리아의 이름이 붙었다 [ 6 ] . 행장 부인의 교육 아래, 특히 코니시가 의 원래의 가업과 관계가 깊은 약초 의 지식에 조예를 깊게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게이쵸 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싸움에서 패한 행장이 처형되어 코니시가가 몰락하면, 아름답고 사소한 줄리아의 평판을 들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오쿠 에게 부르고 [ 7 ] , 후시미성 에서 어물(정실의 식당)이 되었다 [ 7 ] . 낮에 하루 일을 마치고 나서 밤에 기도하고 기독교 교리서를 읽고 다른 시녀들을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후시미 교회의 로드리게스 지란 신부는 1605년 '예수회 연보' 속에서 고려 (이씨 앞의 왕조에서 한반도를 가리켜도 사용된다) 태어나 그리스도인의 시녀, 줄리아에 대해 보고하고 열심한 신자로서의 모습을 ' 이 바라 속의 장미 ' .
게이쵸 11년( 1606년 ) 봄, 이에야스는 에도 성에 줄리아를 동반했다 [ 9 ] . 이에야스의 허가를 얻어 에도성하에 만들어진 프란시스코회의 천주당 (교회) 의 신부 알폰소 무뇨스는 1607년 2월, 스페인령 필리핀 의 중심인 마닐라 의 관 구장에의 보고서 속에서, 천주당의 미사 에 다니는 시녀의 줄리아 에 대해 언급했다 .
게이쵸 12년( 1607년 ) 봄, 이에야스는 슨푸성 에서 은거할 때 줄리아를 동반했다 [ 10 ] . 스루후성에서는 「아타(오타아)」라고 불렸다 [ 10 ] . 스페인 세바스티안 비스카이 노는 게이쵸 16년( 1611년 )에 슨푸성에서 이에야스와 회견했을 때 줄리아가 동석하고 있던 것을 ' 김은도 탐험보고 '에 기재하고 있다 [ 10 ] .
이에야스는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을 계기로 키리시탄을 배제하게 되고 [ 11 ] , 게이쵸 17년( 1612년 )에 키리시탄 금교령 을 내놓았다 [ 12 ] . 줄리아는 키리시탄 기교의 요구를 거부한 뒤 69세의 이에야스의 측실 로의 발탁에 난색을 보였기 때문에 스루 후에서 추방되어 이즈오시마 재도 30일에 신지 마에, 한층 더 15일 후에 카즈시 마로 흘렀다 [ 13 ] . 어느 곳에서도 열심히 신앙생활을 지키고, 버림받은 약자나 병인의 보호나, 자폭자기가 된 젊은 유인 에 대한 감화 등, 섬민의 일상생활에 헌신적으로 다했다고 한다(너는 그 교화로 섬민으로부터 키리시탄 신앙을 획득했다고도 말할 수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또, 3번이나 토지마 처분으로 된 것은, 그때마다 사면과 교환에 이에야스에의 협순의 요구를 계속 거절한 것, 신지마에서 슨푸 시대의 시녀 동료와 재회해, 일종의 수도 생활에 들어간 것 등이 언급되고 있다. 세바스찬 비에라 신부의 1613년 '연도보고', 1619년도 '예수회 연보'의 로드리게스 지란 신부의 보고서에는 줄리아의 소식이 기재되어 있다 [ 14 ] .
1622년 2월 15 일자 『일본 발신』의 프란시스코·파체코 신부의 서한에, 오타아는 카즈지마를 나와 오사카 에 이주해 신부의 원조를 받고 있다는 취지의 문서가 있다 [ 15 ] . “줄리아라는 이름의 여성은 간즈시마에 흘러간 뒤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고 우리 동료의 지원을 받아 오사카로 옮겼다. 그녀는 그 땅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나중에 나가사키 로 향했다.
몰후
1950년대 에 칸즈시마의 향토사 가 야마시타 히코이치로 가 섬에 있는 유래 불명의 공양탑이 대략의 무덤이라고 주장한 것으로부터, 칸즈시마에서 몰렸다고 하는 설이 나왔다. 이후 이 섬에서는 매년 5월에 한일의 그리스도인을 중심으로 오타아의 위령제가 행해졌고, 1972년 에는 한국 의 가톨릭 순교지 의 절두산 에 카즈시마의 촌장과 마을 의회 의원들이 오타 그 무덤의 흙을 매장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이후 위의 '일본 발신'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비석은 철거되어 진상이 완전히 밝혀질 때까지 절두산 순교박물관 내에 보관되게 되었다.
1967년 부터 1968년경 , 상지대학 교수의 푸베르트 치슬리크 가 로마 의 예수회 기록 소나 런던 의 대영박물관 등에서 줄리아에 관한 여러 자료를 발견했다 [ 16 ] .
1975년 , 진진도 촌장이 줄리아의 순교를 보고하고, 교황 의 대리가 간진도에 예배에 방문하여 줄리아를 성인 으로 인정했다 [ 16 ] .

스루후 시대에는 등반을 만들어 명상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키리시탄 등편」은 현재는 호다이인 으로 옮겨지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설
오타아 줄리아에 대해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의 측실이었을 가능성이 종종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그녀가 이에야스에 가까이 있던 것, 또 동생으로 여겨지는 무라타 야스마사 가 이에야스에게 속견을 허락되어, 칼·말·소소매를 배령하는 등 후우된 것에 유래한다 [ 17 ] . 또한 일부 크리시탄 관계사료에는 이에야스와 특별한 관계에 있던 것처럼 받을 수 있는 기술도 볼 수 있다 [ 18 ] .
한편, 예수회 측의 사료는 이 측실설을 반복해서 부정하고 있다. 예를 들어, 발렌틴 칼바요 는 줄리아가 이에야스의 측실이었다는 설명을 '사실이 아니다'라고 했고, 그녀는 다른 사무라이들과 마찬가지로 궁정에서 봉사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반론하고 있다 [ 19 ] . 또한 루이즈 데 메디나 도 그녀가 이에야스의 측실이었을 가능성을 부정했다 [ 20 ] .
이 때문에, 최근의 연구에서는, 줄리아가 이에야스에 가까운 입장에서 섬기고 있었던 것 자체는 인정되지만, 측실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사료는 확인할 수 없다고 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 21 ] . 오히려 교회 측에는 그녀를 측실로 간주되고 싶지 않은 사정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 22 ] .
그 배경으로는 가톨릭 교회 가 혼인의 단일성, 즉 일부 부부제를 중시하고 있던 것을 들 수 있다. 측실이나 녀석의 존재는 세례나 사목의 여부에 깊이 관여하는 교회법상의 문제이며, 당시 선교사들에게도 쉽게 정리할 수 없는 과제였다 [ 23 ] . 그러므로 오타아 줄리아의 측실설은 사료상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확증이 부족한 가설에 머무르는 것이 신중한 정리이다 [ 24 ] .
등장 작품
- 음악
- 『꿈에 사라진 줄리아』(2004년 발매・서던 올스타즈)
- 작사 작곡을 한 쿠와타 카유 는 이 곡을 만든 후 줄리아 오타아 전설을 알고 악곡의 내용도 전설과 비슷하다.
- 소설
- 『사랑 슬픔을 넘어』( 아라야마 토오루 , 문예춘추 , 단행본판 2005년 5월 간 ISBN 4163239405 )
- 동사보다 문고화시에 「사랑·고향 잊고 싶은 후」라고 개제. 문고판 2008년 6월 간 ISBN 4167717859
- 영화
- 「사나다 유키무라의 모략」( 1979년 , 나카지마 사다오 감독, 연: 아키노 아키코 )
- 뮤지컬
- '줄리아 오타아'( 2015년 , 와라비자 )- 일한국교정상화 50주년 을 기념한 공연으로, 어린 시절부터 슨푸성에서 기교를 다가올 때까지를 그린다 [ 25 ] .
- 만화
「노부나가를 죽인 남자~일륜의 데마르카시온~」(2023, 후지토 유, 아케치 헌사부로, 아키타 서점)
- 『하루카스미의 난』( 1990년 , 카와무라 에리 , 아키타서점 프린세스 코믹스 『베쿠사코』에 동시 수록. 1990년 8월간 ISBN 4253074006 )
각주
주석
- 줄리아에 대해서는, 일본관 구장 프란시스코·파셰코의 1622년 2월 15일자 서간 추신에 「Vota Julia」라고 기재되어 있다. 파세코 신부는 「오타아」를 「보타」라고 잘못 듣고 「Vota」라고 표기했다고 생각되어, 한자의 「오타」를 향하는 것은 어렵다 [ 2 ] .
출처
- “ 이에야스의 사무라이 유형의 조선인 키리시탄: 줄리아 오타아 직필 서장/야마구치·하기 박물관 출자 뒷받침 잡힌 체험 기록 ” “ 아사히 신문 ” 석간 2023년 4월 19일(사회·종합면) 2023년 5월 17일 열람
- 고노이 2017, p.307
- https://www.city.hagi.lg.jp/hagihaku/event/202403_otaa/index.html하기 하기 박물관 개관 20주년 특별 전시 시리즈 그 1 학예원 강추의 일품 줄리아 오타 그 서장
- “ 하기번사 집에 이에야스의 소매 배경에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야마구치에서 특별 공개 ”. 매일 신문 (2023년 4월 27일). 2023년 4월 28일 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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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뮤지컬 “줄리아 오타아” 신앙 지키고 희망 준 순진함 그리기 ”. 그리스도 신문 (2015년 9월 12일). 2022년 12월 29일 열람.
참고문헌
- 고노이 타카시「키리시탄 신앙사의 연구」( 요시카와 히로후미칸 , 2017년) 305-308쪽. ISBN 9784642034791.
- 노계순 「조선 여성사 역사의 동반자인 여성들」도쿄 도서 출판, 리후레 출판, 2020년 4월, 210-224쪽. ISBN 978-4-86641-298-6.
- 최서 공부 '임진·정유 7년 전역의 피로들', 김정주 편 '한래문화의 후영' 나카마키, 한국자료연구소, 1962년, 174-191쪽. 전국 서지 번호 : 50003851 .
관련 문헌
- 타니 마스케 『 줄리아 오타아 아라시의 시대에 살았던 그리스도인』여자 바울회 , 2015년 10월. ISBN 9784789607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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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ia Ota
Julia Ota (Japanese: ジュリアおたあ, Hepburn: Juria Otaa; Korean: 오타 주리아) was a 17th-century Korean Christian woman who became a lady-in-waiting of the Japanese shōgun Tokugawa Ieyasu, but was later exiled for her faith.
Biography
Born in Korea to an aristocratic family, Julia Ota was brought to Japan at the age of 14 during the Japanese invasions of Korea (1592–98) by the leading Japanese general Konishi Yukinaga.[1] Yukinaga was a devout Christian, and he raised her as his own in his Christian household where she lived with Yukinaga's wife. She was baptised by the Jesuit father Pedro Morejon in 1596 in Uto.[2] Thus "Julia" was her baptismal name while "Ota" (阿瀧) was the Japanese name given to her—her original Korean name was not recorded.[3]

After the downfall of Konishi Yukinaga at the Battle of Sekigahara in 1600, Julia Ota was made to serve Yukinaga's vanquisher Tokugawa Ieyasu as a lady-in-waiting in his household (奥方ノ御物仕). In this role she kept in contact with the missionaries of Fushimi Castle and Sunpu Castle and continued practicing her faith, while also influencing other servants of Ieyasu's household to convert to Christianity.[4] However, she grew restless as rumours of religious persecution in Edo reached her ears, and she made arrangements to distribute her money and belongings to the poverty-stricken Christians.[2] Around 1609, Julia Ota heard news that a retainer of the Mōri clan by the name Murata Unnaki (村田安政) had the same birthmarks as her younger brother who was separated from her in Korea when she was 13 and he was 6. She wrote to Murata to confirm if he actually had those birthmarks. The two apparently reunited at Sunpu Castle, and Ieyasu bestowed Murata a kosode for the occasion. The kosode and Julia's letters were discovered in April 2023 and are now part of the collection of the Hagi Museum.[1][5]
The Okamoto Daihachi incident came to light in 1612, which made Ieyasu suspicious of Christianity's influence on his subjects. He was thus quite alarmed to find many of his own servants were Christians, chief among them Julia Ota.[6] She refused to recant her faith when presented with an ultimatum and would rather shave her head to renounce her attachments to the world.[2] So Ieyasu banished her and other like-minded servants from his household and exiled her to the Izu Islands. Julia Ota was first sent to Izu Ōshima, then Nii-jima, and finally Kōzu-shima.[4] Wherever she went, she became admired for her charity and evangelism, and she was revered as divinity on the islands up after her death up to the 20th century.[7][8]
In 1619, she left Kōzu-shima and took refuge in Nagasaki, apparently having received a pardon around the time Ieyasu died. There, despite orders from the Nagasaki bugyō, she did not cease her evangelical activities and was driven out of her home multiple times.[9] According to a letter by the Jesuit priest Francisco Pacheco dated February 15, 1622, Julia Ota was receiving financial support from Pacheco in Osaka. This was the last known record of Ota.[4]
Commemoration

Despite evidence to the contrary, there remains a number of gravesites on the Izu Islands purporting to be that of Julia Ota. On Izu Ōshima, a shrine was raised upon her alleged grave, making it a rare case of a Shinto shrine being raised over a Christian grave, and where a Christian soul was revered as a kami.[11] Another purported grave site on Kōzu-shima was commemorated by a large crucifix erected on the island in 1958 by Japanese and Korean Christians, and a festival is held in her honour in May each year on the island.[4] In 1972, earth from her alleged grave on Kōzu-shima was brought to Seoul's Jeoldu-san, a memorial shrine for Korean Christians, as a symbolic homecoming.[12]
Ota was beatified along with 188 Japanese Martyrs in 2008.[13]
References
Citations
- "Letters by tragic 17th century Korean Christian causing a buzz". The Asahi Shimbun. Retrieved 2023-08-04.
- Ruiz de Medina 1988, p. 60.
- Ruiz de Medina 1988, p. 58 note 14.
- Gonoi, Takashi. "ジュリアおたあ (Julia Ota)". Asahi Nihon Rekishi Jinbutsu Jiten (in Japanese). The Asahi Shimbun Publications. Retrieved 29 October 2017.
- "VOX POPULI: Letter by Korean taken to Japan in 1500s sheds light on her tragic life". The Asahi Shimbun. Retrieved 2023-08-04.
- Boxer 1951, p. 315.
- "Pilgrims revere Korean-born woman expelled from Tokyo for her faith". ucanews.com. Italy. 5 June 1985. Retrieved 30 October 2017.
- Boxer 1951, p. 492.
- Ruiz de Medina 1988, p. 61.
- "宝台院(静岡市)". www.sizutabi.com. Retrieved 2023-08-04.
- Turnbull 2013, p. 113.
- Roney, Stephen K. (19 January 2001). "Seoul shrine honors Korea's 'Helen'". Korea Herald.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4 February 2001. Retrieved 29 October 2017.
- "Beatification of 188 Japanese Martyrs". Catholic Archdiocese of Tokyo. Retrieved 2026-06-28.
Sources
- Boxer, C. R. (1951). The Christian Century in Japan: 1549–1650.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GGKEY:BPN6N93KBJ7.
- Turnbull, Stephen (2013) [First published 1998]. The Kakure Kirishitan of Japan: A Study of Their Development, Beliefs and Rituals to the Present Day. Routledge. ISBN 9781136751592.
- Ruiz de Medina, Juan G. (1988). "History and Fiction of Ota Julia" 韓国人キリシタン大田ジュリアをめぐって. Kirisutokyo-shigaku (in Japanese). 42. ISSN 0453-9389.
- 17th-century Japanese women
- Japanese Roman Catholics
- Japanese ladies-in-waiting
- Japanese people of Korean descent
- Korean Roman Catholics
- Korean emigrants to Japan
- Koreans enslaved during the Imjin War
- Korean ladies-in-waiting
- 17th-century Korean women
- Women of the Sengoku period
- 17th-century ladies-in-waiting
- 17th-century slaves
- 16th-century slaves
- Slaves in Japan
- 16th-century ladies-in-waiting
오타 주리아
오타 주리아 おたあジュリア | |
|---|---|
| 출생 | 1580년 이후 추정 평양 부근 추정 |
| 성별 | 여성 |
| 국적 | 조선 |
| 경력 |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녀 |
| 직업 | 시녀 |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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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 주리아(일본어: おたあジュリア, 라틴어: Julia Ota)[1] 또는 성녀 줄리아(聖女 - , 영어: Saintess Julia)는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일본으로 납치된 조선인 기리시탄이다. 생몰년도는 뚜렷하지 않다. 다만 임진왜란 무렵 어린이였으므로 1580년 이후 출생으로 추측된다.
생애
임진왜란 당시 평양 부근에서 일본군에게 납치되었으며, 부모는 전투 중 사망·살해 또는 자살한 것으로 보인다. 또 인질로 잡힌 양반의 딸이라는 설도 있으나, 실명이나 가계 등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줄리아는 천주교회 세례명이며, 조선인으로서의 본명은 전해지지 않는다.
기독교를 믿는 다이묘로서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맡겨져 양녀로 입양된다. 고니시 부인의 지극한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약초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당시 절세미인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양부인 고니시가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으로 참전하여 패배, 이시다 미쓰나리와 더불어 교토 로쿠죠가와라에서 참수당한 뒤에 오타아의 미모와 재능을 알아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 성의 대전으로 불러들여 이에야스의 총애를 받는 시녀가 되었다. 밤에는 매일 기도를 하고, 성서를 가까이 하여 다른 시녀들과 가신들에게 신앙을 전파했다고 한다.
막부의 기독교 탄압 정책에 따라 배교를 강요받았으나, 이를 거부하고 정식 측실이 되라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고에도 난색을 표하여 1612년(일본 연호 게이초 17년) 금교령에 따라 슨푸에서 쫓겨나 이즈오오시마, 하치조 섬, 니이지마 섬, 고즈지마 섬 등을 옮겨다니며 유배 생활을 했다. 가는 곳마다 기독교를 전파하고 병자를 간호하고 다른 유형수들을 격려하는 등 사회선교를 하였다고 한다. 3번씩 유배 처분을 받은 뒤 죄를 사면해 주는 조건으로 이에야스의 수청을 제의받으나 다시 거절하였으며, 니지마섬에서는 슨푸 시대의 동료 시녀들인 루치아와 클라라 등과 다시 만나 일종의 수도생활에 들어갔다고 한다.
오타의 말년 행적에 대한 기록은 뚜렷하지 않지만, 1950년 고즈 섬의 향토사학자인 야마시타 겐이치로라는 사람이 고즈 섬에 있는 유래 불명의 공양탑을 오타아의 묘라고 주장하면서부터 매년 5월 한·일양국의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들을 중심으로 오타아의 위령제가 열리면서 일종의 관광지가 되었다. 하지만 예수회 선교사인 프란시스코 파체코 신부가 1622년 2월 15일[모호한 표현]에 쓴 편지에 따르면, 오타아는 코즈지마 섬을 빠져나와 오사카로 옮겨가 프란체스코 신부의 도움을 받았으며, 그 후 오사카에서 다시 나가사키로 이주했다는 내용이 발견되면서 줄리아 고즈 섬 사망설은 부정되었다. 슨푸 시대에는 등롱(일본식 조명등)을 만들게 하여 명상을 했다고 전해지며, 오타아가 쓴 등롱은 기리시탄 등롱으로 불린다. 이 등롱은 현재 시즈오카시에 있는 정토종계 사찰인 호다이인(宝台院)에 보관되어 있다.
문학작품
오타에 대한 평전으로는 《성녀 줄리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원제:三彩의 女人,모리 노리코 저)가 있는데, 1984년 홍성사에서 번역하여 펴냈다.
같이 보기
-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 - 대한민국에서 제작된 이성구 감독의 1973년 영화
- 빈센트 권
-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
-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 안토니오 코레아(안토니오 꼬레아)
- 일본 로마가톨릭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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