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7-17

김재준 자서전 [범용기 제1권](각주해설판) - 목차 본문

목회와 신학: [범용기 제1권](각주해설판) - 목차

[범용기 제1권](각주해설판) - 목차

〖 범용기 제1권 - 목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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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각주해설판)을 발행하며
첫머리

어릴 때 추억

경원 함양동 3년

회령에서 3년

웅기서 서울로

서울 3년

서울에서 고향에 돌아와

소학교 교사 3년
동경 3년

미국 3년

돌아와 보니

평양 3년 [33-36]

간도 3년

조선신학원 발족

편집후기

부록 :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및 휘호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 본 내용은 김경재 교수가 집필한 『김재준 평전』(2001)에 수록된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1901년 9월 26일

함북 경흥군 상하면 오봉동 창꼴마을에서 김호병 씨와 채성녀 씨의 2남 4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남

1905년 ~ 1910년

서당 훈장이셨던 부친으로부터 『천자문』, 『통감』,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읽고 몸에 익히면서 가풍을 따라 유교의 세계에서 소년 시기를 자람

1910년 ~ 1915년

9살 때 경원 향동소학교 3학년에 편입, 고건원보통학교를 마치고, 회령 간이농업학교를 졸업(13~16세)

1915년 ~ 1917년

회령군청 간접세과 고원으로 취업

1917년

18세 때 장석연 씨의 맏딸 장분여와 결혼. 이후 일생을 해로하면서 3남 3녀를 낳고 기름

1917년 ~ 1920년

회령군청에서 웅기 금융조합 직원으로 전직. 웅기에서 만주, 시베리아로 망명하는 애국 지사들을 수시로 보며 가냘픈 민족 의식이 싹트기 시작

1920년

웅상 출신 청년 전도사로 서울 남대문교회 송창근 전도사의 방문을 받고, 나라와 교회를 생각하고 뜻을 품음. 웅기금융조합 사직하고 서울로 유학을 떠남

1920년 ~ 1923년

중동학교 고등과에 편입. 서울 YMCA 영어 전수과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고, 이상재ㆍ윤치호ㆍ신흥우 등의 강연을 듣고 신문화 흡수에 전력함. 톨스토이와 성 프란시스 전기 등을 탐독하고 청빈 사상에 큰 영향을 받음

1924년

승동교회에서 열린 장로교 연합 사경부흥회 때,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믿기로 결심하고 회심을 경험함. 믿은 지 3년 후 승동교회 김영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음

1924년 ~ 1926년

함북 경흥에 귀향하여 용현소학교, 귀낙동소학교 신아산소학교에서 교사로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침

1926년 ~ 1928년 

일본 아오야마 학원 신학부에서 고학하면서 자유로운 학풍에서 신학 공부. 1928년 아오야마 신학부 졸업. 기독교 사상과 신앙을 주축으로 한 교육 사업에 일생을 바칠 것을 설계함. 졸업반 때 귀향하여 두만강 유역 교회를 순방 강연함

1928년 9월 ~ 1932년 5월

미국에 유학함. 1928년 9월 미국 프린스턴 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간 수업하고, 1929년 9월 미국 웨스턴 신학교에 편입학. 같은 학교에서 1932년 5월 신학사(S.T.B), 1932년 5월 신학석사(S.T.M) 학위를 받음. 미국 경제 공황에 직면하여 귀국함. 미국 유학 시절 송창근, 한경직과 특별한 신앙 동지로서의 우의를 굳건히 함


1933년 4월 ~ 1936년 4월

귀국 후 평양에서 3년을 지냄. 1933년 4월 숭인상업학교 교유에 취임하고, 평양 산정현교회 집사직으로 봉사하다가 1933년 8월 평양노회에서 강도사(講道師) 인허를 받음. 1936년 4월 신사 참배 문제와 민족 교육 금지 문제로 숭인상업학교 교유직을 사임함. 이 무렵 순교자 열전 연구에 몰두함. 평양 3년 머무는 기간 동안 송창근, 한경직, 김재준 등 젊은 소장 학자들은 평양신학교 신학 연구지 『신학지남』에 기고자로 관계를 맺게 되고, 유형기 박사의 『단권 성경 주석』 번역자로서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세 사람 연서로 성명서를 냄


1936년 8월 ~ 1939년 9월

간도 용정 은진중학교에 봉직하면서 3년을 간도에서 청년 교육에 힘씀. 1936년 8월, 은진중학교 교유에 취임. 1937년 동만노회에서 목사 안수받음. 1937년 5월부터 1938년 2월까지 월간 『십자군』을 발간함


1939년 9월

조선예수교장로회 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하고, 평양신학교가 폐쇄됨


1939년 9월 ~ 1940년 2월

서울 승동교회 김대현 장로의 재정을 기반으로, 조선신학원 설립 기성회가 발족(김대현, 송창근, 김영주, 차재명 중심) 설립 사무 실무 책임자로 김재준 목사가 간도 은진중학을 사임하고 설립 사무를 전담하여 추진


1940년 3월

조선신학원이 경기도 도지사 인가로서 승동교회에서 개교. 설립자 겸 원장에 김대현 장로, 이사장에 함태영 목사, 교수로서 윤인구, 김재준 임명


1941년 ~ 1944년

일제 말기 조선신학원 끝까지 지킴. 일제에 의한 관제 『조선 혁신 교단』 시절(1942)과 조선신학원과 감신의 『합동 강의』 기간 동안에도 조선신학교 교장으로서(1943~46) 학교를 지킴


1945년

해방의 기쁨과 함께 8월에 「기독교 건국 이념」 집필 발표. 9월에 천리교 본부 건물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 불하받아 동자동 교사 시대 교수로 일함. 12월에 경동교회를 설립함


1946년 3월

송창근 박사가 제4대 조선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고, 김재준은 한경직과 함께 교수가 됨. 6월 장로교 남부 총회에 의해 총회 직영 신학교로 지정


1950년 1월

『십자군』을 속간하여 1951년 8월까지 속간 30호 발간함


1950년 ~ 1951년

6ㆍ25 동란으로 같은 해 8월 송창근 학장 북으로 피랍. 1951년 3월 부산 피난 전시 대학 개강. 부산 항서교회당 및 남부민동 임시 천막 교사에서 수업.


1951년 4월

학교명을 한국신학대학으로 변경, 김재준 목사 학장 서리에 취임


1953년

장로교가 보수적 교권주의자들에 의해 분열. 장로회 37회 대구 총회에서 김재준 목사직 파면 선언, 한국신학대학 총회 인준 취소, 한신 출신 교회 취임 거부, 이미 위임된 한신 출신 목사들의 노회 재심 등을 불법적으로 결의. 대구 37차 총회의 불법성에 저항하여, 같은 해 6월 서울 동자동 한국신학대학 강당에서 장로회 38회 호헌총회를 개최. 기독교장로회 탄생


1953년 ~ 1957년

서울 환도 후 동자동 교사에서 학장 서리 겸 교수로서 봉직


1958년 ~ 1959년

1957년 12월, 수유리 한국신학대학 새 캠퍼스로 입주. 김재준 목사 제6대 학장으로 취임. 캐나다 연합교회 초청으로 순회 답방(1958.8~1959.9)


1959년 5월

밴쿠버에 소재한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립대학교 유니온 칼리지에서 명예신학박사 수여받음


1961년

5ㆍ16 군사정변으로 군사 정권에 의해 60세 정년제 강행으로 동년 9월 한국신학대학 학장직 및 교수직에서 강제 퇴임. 쌍문동 국민주택으로 이주함


1961년 8월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위원이 됨


1965년 4월

한국신학대학 명예학장으로 추대됨. 9월에 기독교장로회 총회 총회장으로 추대됨. 한신학원 제7대 이사장으로 피선(1966.9~1970.9)


1965년

한ㆍ일 굴욕 외교 반대 국민 운동을 한경직 목사와 주도하여 영락교회에서 대중 강연, 교회의 대사회 참여 운동 시작


1970년 9월

월간지 『제3일』 창간. 박형규, 현영학, 서광선, 이문영, 문익환, 문동환, 이우정 등이 동인으로 참여


1972년

국제엠네스티 한국위원장이 됨. 12월에 유신헌법이 발포됨


1973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장으로 추대됨. 민주수호국민협의회 공동의장(김재준, 함석헌, 천관우, 지학순, 이병린)


1974년 3월

캐나다로 출국. 11월에 북미주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의장직 수임(2회 연임)


1974년 10월

캐나다에서 『제3일』 속간. 1981년 6월호까지 속간 60호 발간


1975년

북미주한국인권수호협의회 명예회장으로 추대됨


1983년 9월

귀국


1983년 ~ 1985년

전국 국토 순례. 『재야 원로 모임』에 참여하여 민주화 운동과 평화 통일 운동을 지속함


1987년 1월

고문으로 살해당한 고 박종철 군 국민추도회 발기인이 됨. 함석헌과 함께 「새해 머리에 국민에게 드리는 글」을 유언으로 남김


1987년 1월 27일

서울 한양대학교 부속병원에서 87세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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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준 목사의 자서전 『범용기』(각주해설판)을 발행하며
첫머리
뉴욕 몽클리어 대학 사회학과 주임교수인 김병서 박사가 사회학 연구의 다원적인 재료수집 중 - 내적 인격적인 어떤 개인의 생활기록이 재료로 요구된다면서 내 생애의 이야기를 녹음한 일이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살아온 내 생애인데도 그것이 이런 분들의 요청에 응할 만큼 정돈되어 있지 않음을 절감했었다. 그래서 내가 나 자신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기 위해서라도 될 수 있는 대로 Comment 없는 내 삶의 기록을 관조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세상에 위인(偉人)들 전기는 많지만, 평범한 인간의 생애 기록이란 없지 않은가? 써 놓았자 시시할거고, 거의 모두가 그런 것들이니 『희소가치』도 없을 것이고 해서 애당초 쓰지들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못난 사람도 『인간』인데 아무 기록도 없으라는 법은 없지 않을까? 못난 사람에게도 무조건 사랑하는 자녀가 있고 못난 것이 좋다는 허물없는 친구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 애정 때문에 그 기록이 보고 싶을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적기 시작했다. 못난이의 기록이라 해서 『범용기』(凡庸記)라 이름했다.

나는 유교의 영향 아래서 소년시절을 지냈다. 그래서 제절로[1] 유교적인 마음이 품긴다.[2]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지금도 대가족제도 안에서의 독립 가정을 생각한다. 『핵가족』 시대라지만 혈연(血緣) 공동체를 경시하고 싶지 않다. 형제 자매 친척이 좀 더 『한 집안 의식』에서 자주 내왕하며 서로 나누며 사는 행복이 아쉬워진다.

내게 있어서는 아들, 딸, 사위, 며느리가 똑 같은 Status[3]로 느끼어진다. 모두가 내 혈육 하나에 딴 집 혈육 하나가 합하여 한 몸 된 Status기 때문이다. 따라서 며느리가 딸 같고, 사위가 아들 같다면 비슷한 표현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내 가족 아닌 다른 친구들이 내 가족들 이야기에 흥미로울 까닭은 없을 것이므로 그런 경우에는 다른 부분에로 넘겨 뛰어 주기를 바란다.

나의 『나라』 의식은 솔직히 말해서 해방 이후부터다. 일제시대에도 민족의식은 있었지만 『나라세우기』까지는 및어[4] 뜻하지 못했다.

나의 사회참여 의식은 『3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5] 때부터 강화되었다. 그 전에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짐』(Burden)이 되어 나를 누르는 정도는 아니었다. 통털어 말해서 나는 내 혈육공동체를 내 삶의 『핵』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사회관심에로 전개되고 교회와 국가와 민족에의 관심으로 응결된 것이다. 교회는 내게 있어서 혈육에서가 아닌 신적인 공동체이다. 『은혜』의 기관이다. 그러나 내 전체로서의 『삶』에서 분리되거나 제외된 것이 아니다. 그러길래, 내 삶의 기록에서는 내 집에서 자라나는 자녀들 이야기가 교회와 사회와 국가의 이야기 속에 자연스레 섞여 있다. 용서로 읽어주면 좋겠다. 이건 역시 유교적인 내음[6]인 것 같다.

내가 받은 기초교육이란 국민학교 4년, 간이농업학교 2년 합쳐 6년 밖에 없다. 그리고 내 고향이란, 두만강 국경지대 유폐된 산촌이었고 한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서울, 일본, 그리고 태평양 건너 여기까지 와서 80평생의 마감 고비를 『나라와 정의』에 『분향』한다는 엄청난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바울이 고백한 것과 같이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영어 번역에서는 『By the grace of God! I am What I am』(고전 15:10)이다.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다. 그러므로 『What I have』가 아니라 『What I am』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이란 놀라운 선물이다. 기억이 없으면 문화전승도 없다. 그런데 늙으면서 『기억』이 어디론가 증발한다. 어떤 것은 갑작스레 다시 돌아오기도 하지만, 아주 가 버리는 율이 더 많다. 그래서 『기록』으로 붙잡아 두자는 것이다. 그러는 것이 하나님이 내게 베프신[7] 『은혜』의 증언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다.

 『하느님이 기억하신다』고 하지만 장본인인 내가 잊어버리고 있다면 『핀트』가 맞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아들도 땅에 오셨고, 하나님 나라도 땅 위에 임한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도 이 땅 위의 하늘나라 씨앗을 심는 것이다. 내 삶이 범용 그대로일지라도 땅의 미래에 묻어 놓고 언젠가 싹트기를 기다려 보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망각』은 싫다. 기억을 위해, 기록은 역시 매혹적이다. 특히 『범용』한 인간에게 있어서 말이다.

기억나는 대로 대강 적어 놓고 다시 읽노라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각주]
1. 제절로 - ‘저절로’의 방언(강원, 경상, 전라, 충청) ↩
2. 품기다 – 품속이나 가슴에 대어 안기다 ↩
3. Status – 상태, 지위, 신분, 현상 ↩
4. 및다 - ‘미치다’의 준말 ↩
5. 삼선개헌반대투쟁 – 제3공화국 시기 여당과 정부 기관이 대통령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하자, 이에 반대한 야당과 학생 등이 1969년 6월부터 12월까지 지속한 개헌 저지ㆍ규탄 활동 ↩
6. 내음 – 코로 맡을 수 있는 향기로운 기운 ↩
7. 베프다 - ‘베풀다’의 옛말 ↩
어릴 때 추억
둘레가 40마일 쯤 되는 분지에 산맥이 둘러쌌으니 어디를 보나 『산』의 능선이 하늘을 만진다. 그 안에 여섯 부락이 있는데 송상동, 귀락동, 회암동, 농경동, 삼봉동, 그리고 오봉동이다. 지금은 『아오지로 통일됐다.』

내가 나서 자란 동네는 오봉동의 일부인 『창꼴』 즉 창동이다. 그래서 집 이름도 『창꼴집』으로 되 있다. 누가 일부러 지은 이름이 아니라, 집안에서 저절로 그렇게 불려진 것이다. 이조 때에 『비축미』 창고가 바로 우리 집 옆에 있었기에 그 동네를 창꼴이라 하고 우리 집은 『창꼴집』이라 했단다. 나는 『창고』를 본 일이 없다. 밭 가운데 두드러기처럼 불룩한 데가 보일 뿐 - 그것이 창고 터였다는 것이다.

우리 집은 『노성』 봉우리가 흘러내리다가 『아차, 너무 내려왔구나!』 하고 돌아 앉은, 집 한 채만을 위한 『명당』자리라고 한다. 동서남을 향했기에 햇빛은 남아돌아간다. 집 구조는 여기로 말한다면 똑 같은 크기의 침실 넷, 침실 둘만큼 큰 부억칸, 거기 이어 집새칸(소먹이 써는데) 방앗간(여인들이 발로 찧은 방아), 외양간 등등이 벽으로 가로 질린 한 채로 된 건물이다. 서재는 서쪽에 딴 건물로 됐는데 『봉계정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한 채로 된 기와집이지만 서재는 초가집이고 거기에도 부엌, 베 짜는 방, 널판지 두는 방, 곡식 저장소 등등이 붙어 있다.

집 앞면은 물푸레 가지나 싸리로 엮은 『바재』(울타리)로 둘렀고 농기구, 우차[1] 등속[2]을 넣는 고깐이 따로 『바재』 옆에 서 있다. 집에서 이십 핏(feet) 정도 산 밑에, 스무 자 깊이에서 솟는 샘물이 있어 우물이 맑다. 집터 주위에 자연스레 펼쳐진 『터 밭』이 만 평쯤 한 필로 되어 있고 그 가장자리는 절벽이 되었고 그 절벽 밑은 흰 돌, 푸른 돌이 되는대로 깔린 냇가, 시냇물이 맑게 흐른다. 그 시냇 벌판에는 개버들이 밀림을 이루어 여름철 꾀꼬리 노래가 시끄러울 정도다. 집 처마 끝에는 의례 제비둥이[3]가 있어 강남 갔던 제비가 다시 와 옛집을 수리하고 새끼를 길러 날린다. 고지낙한 밤이면 앞뒷산에서 접동새 울음이 구슬프다. 산비들기[4], 부엉이가 『뻬스』[5]라면 꿩은 『테너』랄까, 어쨌든 심심찮은 자연의 『향연』[6]이었다.

뒷산 꼭대기에는 『누성』(老城)이라는 한 옛날 『성채』(Citadel) 터가 있다. 앞면은 집덤이 같은 바위가 와락 무너져 길이 없고, 길을 낼 수도 없다. 그러나 주위는 넓은 초장이 무연하고 물기가 축축해서 동네 소들은 모두 거기서 한나절 풀을 핥으며 지낸다. 성채 및 가장자리에는 붓꽃이 수북하게 피었다. 뒷면에는 『성』에까지 오솔길이 늘여져 있다. 힘든달 것 없이 발을 옮기면 정상이다. 두리뭉수룩하고 샘터도 있고 성터도 약간 남아 있다. 거기에 노갑(老甲)이란 장군이 살았었고 앞면 바위들은 노갑 장군 부인이 치마자락에 담아다 팽개친 거라고 촌늙은이들이 전설을 일러주곤 했다.


두만강 가 여섯 고을은 땅 속이 온통 석탄이라니까 어느 태곳적에 어마어마한 지변(地變)이 있었던 것은 상상할 수 있겠다. 노성 주변 뙤밭에도 화석된 나무등거리가 널려 있다. 보기에는 나무토막 그대론데 들려며는 천근 무게다. 진짜 돌이다.

우리 집에서 정면으로 보이는 것은 『송상이』 즉 『송진산』[7]이다. 푸른 능선이 하늘을 스쳐 달린다. 제일 높은 봉우리가 가마솥 엎어 놓은 모습인데 거기에 두 뿔이 마주 서 있다. 서쪽에 경흥과 경원[8] 두 고을의 『진산』인 탑향산(속칭 탑고개)이 있다. 생김새는 송진산과 비슷하나 뿔이 없다. 둘 다 장중한 『포오즈』다.

산은 인간과 생명으로 통한다는 것이 『풍수』 신앙이다. 노성은 가까운 동네의 『성역』이어서 거기가 『명당』이라고 어느 족속이 『암장』 즉 조상의 뼈를 몰래 묻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큰일 난다. 장마나 가뭄이 심하다든가 무슨 재난이나 유행병이 생기면 어른들은 우선 『노성』부터 점검한다. 누가 『성역』을 더럽히지나 않았나 해서다. 창꼴집 옆 골짜기에 유난히 늙은 버드나무가 있다. 그것도 소위 『용왕나무』여서 『성목』이다. 『제액』을 위한 『방도』로 헝겁[9] 조각을 매달기 외에는 거의 『불가촉』이다. 건드리면 탈이 난다는 것이다. 송진산이나 탑향산은 『성역』이랄 것은 없으나 『영산』[10]이어서 감히 정복했다거나 정복하려고 했다는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신령한 푸른 능선을 바라보며 감탄하는 것으로 족해한다. 소낙비에 몸 씻는 맑은 푸르름, 흰구름이 신부의 면사포처럼 살짝 가리운 산기슭, 그리고 구름 위에 처든 머리의 드높음 - 이런 것이 내 어릴 때 몸에 밴, 과장 아닌, 산의 신비였다.


송진산이나 탑향산 기슭까지 드문드문 인가가 몇 호 있기는 하지만 『화전민』 신세를 면치 못했다. 집 형님은 한 해에 한 번씩 송진산 기슭에서 피나무 껍질을 벗겨다가 소고삐를 꼰다. 섬유가 질겨서 노한 황소도 끊기 힘들다. 소들은 열 발쯤 되는 이 고삐에 매여 왼 종일 뙤약볕에 쪼이며 물 한 모금 못 마시는 일도 있다. 저녁 때 고삐를 풀면 쏜살같이 뛰어 앞 시내에서 샘물에 주둥이를 박고 무한정 샘물을 들이킨다. 뚱뚱해진다. 풀 묶음을 몇 단 썰어 먹이면 그것으로 소들은 행복하다. 이튿날 다시 풀밭으로 끌려간다. 이것이 『소팔자』다. 그 대신 소는 못 고칠 병에라도 걸리지 않는 한, 잡아먹지는 않는다. 돼지와 닭만이 먹히기 위한 가축이다.



[각주]
1. 우차 - 소달구지 ↩
2. 등속(等屬) -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벌여 말할 때, 그 마지막 명사 뒤에 쓰여 그 명사들과 비슷한 부류의 것들을 묶어서 나타내는 말. ↩
3. 둥이 - ‘둥우리’의 방언(함남) ↩
4. 비들기 - ‘비둘기’의 비표준어 ↩
5. 베이스(Bass) - 여러 성부로 된 음악 중 가장 낮은 성부 ↩

6. 향연(饗宴) - 매우 성대하게 벌어지는 잔치 ↩
7. 송진산(松眞山) - 함경북도 나진시, 경흥군 아오지읍, 경원군 유덕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1,146m. 주변에는 망덕산(望德山)ㆍ백학산(白鶴山)ㆍ사기덕산(沙器德山) 등이 있고, 북쪽에는 탑향산(塔香山, 827m)이 줄기를 따라 멀리 솟아 있다. ↩
8. 경흥은 세종조에 김종서 장군의 여진 토벌과 더불어 두만강 유역에 개척한, 백두산 밑까지 걸친 육진(六鎭 : 경원, 경흥, 온성, 종성, 회령, 무산) 중 하나이고, 경원(慶源)이라는 도시 이름 자체가 “경사가 날 근원의 고장”이라는 의미인 것처럼, 이성계와 그의 조부, 증조부들이 살던 지역, 곧 큰 인물이 날 지세와 풍수를 갖추고 있던 지역이다. 김재준은 그런 자연 환경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김경재, 『김재준 평전』, 도서출판삼인, 2001, 12쪽 ↩
9. 헝겁 - ‘헝겊’의 방언 ↩
10. 영산(靈山) - 신령스러운 산 ↩
내 증조부님 함자는 『덕영』 씨다. 선조 대대로 적지 옆 홍의동에 살다가 『상리』로 옮겨 우리 『종가』집을 세우신 분이다. 땅 약 3만평쯤 개간해서 일약 『대농』축에 들었다. 그 때에는 개간만하면 제 땅이었단다. 그 분은 성격이 호탕하고 괄괄해서 『영웅』은 못 되도 『호걸』에는 가까웠다고 한다. 일화로서 흔히 『기사년』(己巳年) 때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사』년은 아버님이 여섯 살 때라니까 1869년쯤이었을 것이다. 『기사』년이라면 『飢死』(기사)를 연상하리만큼 곡식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흉년이었던 모양이다. 증조부님은 세월 되는 꼴을 보시고 전 가족과 친척을 동원하여 심산유곡을 삿삿히 누비며 무릇 먹을 수 있는 푸성귀나 산나물, 산열매, 칡뿌리, 칡넝꿀[1], 머루, 나리 등속[2]을 모조리 거둬다가 말리었다. 흉년든 원인이 여름내 비만 왔기 때문이었다니까 밭곡식 밖에 모르는 북관 농민들에게는 치명적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지의 자연은 아랑곳없이 제대로다. 오히려 더 잘 자랐을지 모른다. 그리고 증조부님은 피해가 덜한 인접 고을에 다니면서 소금을 콩으로 바꿔 고깐에 쌓았다. 따라서 우리 가까운 집안에서는 희생된 사람이 없었단다. 그 무렵 적지 옆 홍의동에 남아 있던 친척 몇이 『아사』 직전이라는 소문을 듣고 우차를 보내서 옮겨왔다. 그날 밤에 그들은 부엌에서 잤는데 아침에 보니 모두들 산더미 같은 배를 안고 정신없이 쓸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천정과 벽에 매단 메주를 기껏 먹었기 때문인데 그래도 영양실조로 앓거나 죽은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여러 부락 사람들이 가정을 흩어, 죽든 살든, 제 손으로 빌어먹게 했기 때문에 증조부님 댁은 걸식자로 포위됐다. 처음 얼마 동안은 죽 몇 술씩이라도 줘 보냈는데 차츰 감당할 수 없어 대문 비짱을 잠그고 농성했다. 아침에 대문 밖을 비스듬히 내다보면 뚱뚱 부어 늘어진 시체가 너저분했고 앞 시냇가에서는 어미가 자기 애기를 삶아 먹은 일도 있었다고 아버님이 말씀하셨다.

『그때 할아버지가 안 계셨더라면 우리 집안 꼴이 어떻게 됐겠느냐?』 하시며 아버님은 감개무량 하셨다.

증조부님은 무당이나 점장이 따위를 온전히 무시하셨다고 한다. 밭 가운데 억년 묵은 『용왕목』이 있어서 모두들 거기에 고사 지내고 헝겁 조각을 매달곤 했다. 사람들이 그 나무에 접근하지 못한 덕택으로 그 나무 밑에는 풀이 유난스레 자랐다. 증조부님은 그 풀을 싹 베어다 소먹이로 썼다. 사람들은 질겁했다. 『이제 큰 탈 날 텐데 저 영감 어쩌자고 저랬나!』

그날 밤, 자정 때쯤에 바깥 마당이 떠들썩한다.

『우리는 용왕목에 살던 도깨비다. 우리를 침범한 벌 받아라!』

증조부님은 분노가 치밀어 의복도 걸치락 말락 구석에 있는 홍두깨를 휘두르며 창문을 박차고 나갔다. 도깨비들은 혼비백산 달아난 뒤였다. 동네 청년들의 작난[3]이었는지, 증조부님 자신의 환상이었는지 그런 건 알바가 없다. 나는 아버님 말씀 그대로 적은 것뿐이다.


또 하나 - 아버님 결혼 날, 다시 말해서 우리 어머니 시집오던 날, 동네 개구쟁이 젊은이들이 큼직하게 『달아 먹는다』면서 황소를 끌어내 잡으려고 덤볐다는 것이다. 『울력성당』[4]해서 기세가 대단했단다. 증조부님은 노기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이 불한당 같은 놈들, 너희 하는 짓이 소고기커녕 개고기도 못 먹을 녀석들이다. 썩 물러가 주는 대로 먹고 가라!』

산울림 같은 호통바람에 모두 숙어들고 말았다.

이것은 그때 신부였던 어머니로부터 오랜 세월 후에 내가 들은 이야기다. 어머니는 불만스러웠던 모양이다. 『행화춘』이라는 몸종까지 붙여, 어마어마한 행차로 시집왔는데, 소 한 마리쯤 『옛다』 하고 던져줘야 사둔들 앞에서 위신이 설게 아니냐 하는 말씀이었다.

내 할아버지 함자는 『동욱』 씨다. 동생되시는 분이 『동숙』 씨인데 바로 옆집에 살으셔서 우리는 두 집에 분간 없이 드나들며 작난하고 먹고 자고 했다. 두 분 다 풍채 좋으시고 풍만한 몸집이 위압을 느끼게 했다. 할아버지는 거창한 『증조부님』 그늘에서 자랐기에 독자적인 일화는 별로 없다. 큰 아버님인, 내 백부께서 평생 서울 계셨기에 조부모님들은 늘 허전하셨던 것 같다. 큰집 사잇방 아랫목에 호랑이를 그려 짠 보료[5]를 깔고 머릿 맡에 문갑을 놓으시고 긴 장죽을 놋재털이에 땅땅 두둘기시며 종일 앉아 계신다. 손부가 진지상을 드리면 잡수시면서 무슨 야사 비슷한 이야기를 하신다. 『이런 연언이 있었느니라』 하신다.


나도 구석쟁이에서 밥먹기에 바빠 들은체 만체, 손부님도 들은척 만척, 그러나 혼자 말씀으로 족하다는 듯, 기분은 여전하셨다. 곁집[6] 손주들이 들려, 넙신 큰절을 하며는 아무 말씀 없이 때로는 빙그레 웃으신다. 할아버지에게 안긴다거나 그 앞에서 응석을 떤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할 끔찍한 일이었다.

할아버지는 『수구주의자』였다. 그래서 백부[7]님의 개화운동에는 아주 못마땅해 하셨다.

『벼슬이라도 하다가 때가 바뀌면 깨끗이 물러나 낙향할 것이지 『피발역복』(머리 깍고 양복 입은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하고 『양이』(서양 뙤놈)[8]를 따라야 한단 말이냐?』 하셨다. 특히 『단발』을 싫어하셔서 『승혈만항』(중의 피가 거리에 찬다)이란 예언이 있느니라』 하시며 노기를 띄기도 하셨다.



[각주]
1. 넝꿀 - ‘넝쿨’의 방언 ↩
2. 등속(等屬) - 두 개 이상의 사물을 벌여 말할 때, 그 마지막 명사 뒤에 쓰여 그 명사들과 비슷한 부류의 것들을 묶어서 나타내는 말. ↩

3. 작난 - 주로 어린아이들이 재미로 하는 짓. 또는 심심풀이 삼아 하는 짓. 규범 표기는 ‘장난’ ↩
4. 울력성당 – 여럿이 떼를 지어 으르고 협박함 ↩
5. 보료 - 솜이나 짐승의 털 따위로 두껍게 속을 넣고 헝겊으로 싸서 만든, 앉는 자리에 늘 깔아 두는 요 ↩
6. 곁집 - 옆으로 나란히 이웃하여 있는 집 ↩
7. 백부(伯父) - 아버지의 맏형을 가리키거나 부르는 말. 여기에 언급되는 김재준의 백부는 김주병(金㴤炳, 1860~1935)으로 일찍이 개화운동에 눈을 떴으며, 그가 기독교인이 된 동기와 연대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민족주의적 기독교인으로 교육계와 실업계에 종사하였으며 특히 그의 당질 김재준(金在俊)은 한국 신학계와 교계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
8. 뙤놈 - ‘되놈’의 비표준어, 되놈(중국인을 낮추어 이르는 말) ↩
아버님은 함자가 『호병』 씨로서 백부님과 함께 『글 하신 분』이고 특히 시문에 능하셨다. 5형제 중 둘째 분이신데 형제분들 함자는 셋째 분으로부터 『기병』, 『연병』, 『순병』 씨시다. 아래로 세분 다 글은 못하셨고 셋째 숙부님이 무과로 『선달』이란 칭호를 갖고 있었다. 넷째 숙부님은 뵈[1]장사로 자주 서울에 드나 드셨고, 다섯째 숙부님은 소장사로 황소 몇 마리씩 끌고 연해주 『우라지보스독』[2]에 거의 평생을 드나드셨다.

아버님은 글을 했으니까 과거 한번 보잖을 수 없대서 노수[3]도 없이 호랑이 제집처럼 드나든다는 강팔령을 넘어 숙식은 김사깟[4]처럼 가다가다 걸리는 민가에서 신세지고, 험하고 가파로운 마천령을 넘고 도적도 많다는 삼방골을 누비며 석 달을 걸어 서울에 간다. 그래서 어전에서 『과거』라고 보기는 했는데 낙방했단다. 어느 고을 원님도 차례 지지 않아서 겨우 함남 문천 책실로 부임했다. 『책실』이란 것은 지금의 비서실장 비슷한 직책이던 모양이다. 매관매직이 심했던 때라 그때 『원님』으로 문천에 부임한 사람은 일자무식의 『행운아』였다고 한다. 그래서 글 잘하는 책실이 반드시 옆에 있어야 했는데 아버님이 뽑혔던 것이란다. 송사가 들어오면 뒤에 숨은 『책실』이 판결문을 써서 슬그머니 원님 자리 밑에 밀어 넣으면 원님은 그것을 『호방』에게 주어 읽게 한다는 것이다.

그 무렵에 어머니는 갓 분가한 살림을 도맡아 몹시 어수선한데다가 첫 애기인 내 형님은 나면서부터 앓기만 했기 때문에 아버님은 가정책임상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단다. 그 후에도 한두 번 과거 볼 기회는 있었지만 아버님은 아예 단념하셨다. 가사도 가사였지만 국운은 걷잡을 수 없이 기울어지고 기강은 무너지고 출세가 도리어 욕이라고 말씀하셨단다.

그래서 그때부터 『창꼴』에 숨어 『도연명』[5]의 『귀거래사』[6]를 읊으며 풍월을 벗 삼아 흥이 나면 시를 쓰고, 안개 속에 약을 캐고 『형』을 도와 농사도 하시고, 아이들 모아 글도 가르치고 『유유자적』 여생을 지내셨다. 1940년 2월 12일 77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는 경원군 용계면 함향동 평강 채동순 씨 셋째 따님이시다. 향곡 선생의 사대손 쯤인 것으로 기억된다.

정약용과 함께 조선실학파의 최후를 장식한 『박제가』[7]가 까닭도 없이 함북 종성에 유배되어 3년 6개월을 귀양살이 했다는 기록[8]과 직접 관계된 것인지는 모르나 그때 회령, 종성, 경원에 걸쳐 회령의 최학암[9], 종성의 한봉암[10], 한치암[11], 남오룡재[12], 경원에 채향곡 등 실학파 석학들이 별 무더기처럼 배출했다. 학의 연원은 송우암[13]으로부터 왔단다. 어쨌든 어머니는 향곡 선생 직계 사대손(?)이니까 가문으로서는 자랑스러운 후예임에 틀림없겠다.


어느 어머니도 그렇겠지만 우리 어머니는 정말 인자하셨다. 제사나 환갑 같은 집안 큰일 치룰 때, 집안 어른으로서 수십 명 젊은 아낙네들을 각기 책임 주어 일 시키고 보살피시는 온유하면서도 위신어린 어머니 모습에는 내 어린 마음으로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형수님이 상 차리실 때 나는 꼬마라고 작고 예쁜 놋주발에 밥을 담아주곤 했었다. 어머니는 『큰 그릇에 담아줘라. 그래야 사람도 큰 구실을 한단다』 하셨다. 그래서 나는 어렸을 때부터 밥그릇만은 컸었다.

형님은 첫난이고 나는 막내나 다름없었기에 연령의 격차 때문에 『형제감』이 희박했었다. 형도 아버님과 꼭같이 근엄했기에 나는 무섭기만 했다. 묻는 말에나 겨우 대답할 정도였고 내 켠에서 먼저 말을 거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식사 때에는 더군다나 말이 없다. 『식불언』(食不言)[14]이라는 공자님 말씀대로였다.

어머니는 내 입에서 쌍스러운 말이 한 마디라도 나오기만 하면 결코 가만두지 않으셨다. 반드시 책망하시고 고쳐 주셨다. 언젠가 내가 못된 작난[15]을 하다가 어머니께 들켰다. 어머니는 사랑방에 나를 혼자 데리고 가셔서 머리칼을 빗질해 주시면서 책망하셨다. 나는 어머니 얼굴에 그런 위신이 감도는 것을 전에는 본 일이 없다. 『그렇게 못된 작난 하던 애가 후에 더 큰 인물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하더라만!』 하시며 한숨과 함께 내 어깨를 쓰다듬어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어머니를 『존경』하게 됐다.


아버지와 형님이 모두 내게는 압력 권위였기 때문에 나는 노상 억울하게 당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머니께 호소했고 어머니는 아버님 앞에서 당당하게 나를 변호해 주셨다.

아버님이나 형님이 나를 사랑했을 것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유교의 계층 윤리가 인간관계에 경화증을 일으켰다는 사실 때문에 그 사랑이 원활하게 전달 될 만큼 맥박이 순조롭지 못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중간 역할은 언제나 어머니가 맡으셨다. 내 나이 80을 넘으면서도, 지금은 없으신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그의 앞에서 영원한 어린애로 밖에 여겨지지 않는다. 어머니는(1862~1936) 1936년 8월 10일, 75세에 돌아가셨다.



[각주]
1. 뵈 - ‘삼베’의 방언 ↩
2. 블라디보스토크 - 일본어로 ウラジオストク(우라지오스토쿠)라고 읽는다. ↩
3. 노수 - 먼길을 오가는 데 드는 돈 ↩
4. 사깟 - ‘삿갓’의 방언 ↩
力士(역사)이야기
아버님 소년 시절에 친히 뵙고 따르시던 분이라니까 아마 조부님 시절에 사신 분이었을 것이다. 『김선달』로 불리우는 힘센 분이 우리 집안에 계셨다고 한다. 가히 『역발산』(力拔山)이랄 수 있는 분이었다고 아버님은 말씀하신다.

그는 아무 것도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 무렵에는 호랑이가 득실거렸는데 그는 호랑이 목덜미를 잡아 거꾸로 물항아리에 박아 죽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몹시 가난했다. 그런데 동네에 소위 『흉가』라고 딱지 붙은 큰 기와집이 헐값에 팔린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는 당장 샀다. 왜 『흉가』였나 하였더니 부뚜막 안에 뱀 굴이 있어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그는 뱀 구멍 가에 뱀 먹이를 소담지게 차려놓고 뱀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닌 게 아니라 꼬마 뱀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두들겨 잡는다. 차츰 큰 놈들이 나온다. 그 놈들도 도끼로 대가리를 까면 죽는다. 왕초가 나온다. 어미 뱀인 모양인데 길이가 두 발이나 되고 둘레가 서까래만한 놈이다. 그는 도끼로 머리를 때리고 밧줄로 올가미질해서 잡아 당겼지만 몹시 힘들여서야 빼냈다. 맨 나중에는 아비 뱀이 머리를 내민다. 대가리에 소고삐 올개미[1]를 걸어 당겼지만 움직도 않는다. 올개미 밧줄을 우차에 비끌어 매고 소를 메워 끌었다. 빠져나온 놈을 두들겨 잡았다. 큰 뱀, 작은 뱀, 한 짐 가득 우차에 실어 키들이 웅덩이에 묻고 『뱀무덤』이란 비석을 세워 주었다. 그래서 그 집 뱀이 소탕되고 살기 좋은 열간 기와집이 헐값에 생겼다는 것이다. 그는 새벽같이 김매러 간다. 부인이 아침 점심을 날라다 드린다. 보통 식기 두 곱쯤 되는 분량을 단번에 훌떡 삼켜버린다. 하루는 부인이 한 말 밥을 나무 함박에 담아다 드렸다. 앉은 자리에서 다 자시고 한잠 낮잠 자다 일어났다. 『난생 처음 배불리 먹었소』 하며 부인에게 치사했다. 『그 전에 것은 십 분지 일도 못 되는 분량이었는데 얼마나 시장하셨을까』 하고 부인이 눈물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 아이 때에도 우리 집안에 『무갑』이라는 이름의 『역사(力士)』가 있었는데 『단오』철이면 강가 여섯 고을 씨름판을 찾아다니며 간 데마다 소를 타다가 한 밑천 번다는 것이었다. 우리 집에도 자주 들리곤 했는데 몸이 장대하고 어깨가 짝 벌어지고 허리는 가늘고 엉덩이는 떡판 같이 크고 두 다리는 기둥처럼 굵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김선달』은 『무갑』 따위가 아니었다고 아버님은 말씀하셨다.역사

다섯 살 때 토막 기억
내 다섯 살 때 일로전쟁이 있었다. 러샤 패잔병들이 동네 장정들을 우리 집에 모여 놓고 무언가 공갈치고 있었다. 여자들은 윗방에 모여 서 있었는데 나는 어머니 가슴에 안겨 무섭지가 않았다. 후에 안 일이었지만 러샤 병정들은 동네 장정들을 징용하여 군수품을 운반시키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튿날 일본 군함이 웅기를 포격하고 해병대가 상륙하는 바람에 러샤 군대는 허둥지둥 강 건너로 도망치고 군수품 남은 것들은 동네 사람들이 많이 나누어 가졌다. 길다란 군인 외투 『삽개』[2], 『흘레발이』(빵), 『고삭개 술』, 군용탄재(블랭캣) 등속이 집집마다 감춰져 있었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깨끗하게 없었다.


며칠 후에 나는 아버님과 집 앞 언덕 위에 나란히 앉아 일본 군대가 줄지어 발마춰 행진하는 것을 보았다. 신기해서 오래 오래 보고 싶었다. 그때 일본 군대는 깔끔해서 어디서나 민폐끼치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들었다.

나는 다섯 살 때 아버님이 손수 붓글씨로서 써 주신 『천자』 또는 『백수문』을 외웠다. 읽었다기보다도 앵무새처럼 외운 것이다. 다 떼고서 『통강』까지 했다.

다음에는 『동몽선습』을 가르치신다. 『천자문』을 졸졸 외우는 게 귀여워서 자꾸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도 생각된다.



[각주]
1. 올개미 - ‘올가미’의 방언 ↩
2. 삽개 - ‘모자’의 방언 ↩
외증조부님은 우리 증조부님과 동시대 일뿐 아니라 그 성격과 업적도 비슷한 데가 있었다. 걸출이어서 자수성가하여 거부가 됐다. 자손들을 장원급제 시킨다고 함경감사에게, 또는 서울 가고 오는 예비 등속으로 엽전 실은 우차가 줄지어 떠나곤 했단다. 거대한 저택을 둘러 싼 엽전 고깐에서 엽전 썩는 냄새가 온 동네에 퍼져 사람들 눈살을 찌푸리게 했단다. 어쨌든 별채로 된 사랑방과 앞대문 뒷대문은 자랑스러울지 몰라도 볕 안드는 뒷 고깐, 뒷 뜨락의 곰팡이 냄새는 내게도 그리 향기롭지가 않았다.

내가 철들었을 무렵에는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모두 돌아가시고 칠순 넘으신 외삼촌댁, 다시 말해서 『큰 어머니』만 생존해 계셨다.

나를 한말 개화운동 켠으로 이끌어 내신 분은 채규표, 채규홍 - 내 외종형제분이셨다. 맏형님 규표 씨는 훤칠 크고 잘난 분으로서 오래 유경하시다가 주사(主事)로 법원 서기로 마감에는 전남 광주 감옥의 『전옥』으로 계셨다. 둘째 형님 규홍 씨는 자상하고 침착한 분이어서 거창한 두 집 살림과 자녀 교육과 인사관계 등등을 빈틈없이 처리하셨다. 큰 형님의 적자 『태석』은 의학박사로서 서울에서 개업하고 있다. 그리고 둘째 형님의 맏아들은 채관석 박사로서 경성제대 영문과 제1회 졸업생이다. 일제시대에는 경기중학에서 교편을 잡다가 해방 후에는 사범대학 총장, 고대 대학원장, 총장서리 등 요직에 있었고 지금은 정년퇴직하여 수유리 산기슭 자택에서 한가한 여생을 즐긴다.

일제 말기에 『공출』이니 『부역』이니 하는 농촌이 못 견디게 부디끼는[1] 바람에 두 분 다 가산을 정리해서 서울로 옮겨 새로 주택을 장만하고 중산층으로 여생을 지내다가 맏형님은 76세에, 둘째 형님은 84세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소년시절의 향동 외갓집을 맘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 거기에는 향곡선생 유허비가 있다. 춘추제향 드릴 때면 나도 참배했었고 추석 성묘 때면 형들을 따라 탑향산 꼭대기 조금 못 미쳐에 모셔진 향곡선생 선친 묘소와 향곡선생 자신의 묘소에 참배하기도 했다. 향곡선생은 선친 묘소 앞에서 삼년을 수묘했단다. 제자들도 따라가서 모시고 날마다 강의를 들었다는 것이다. 제자들이 기념으로 쌓았다는 자연 석탑이 여기 저기 지금도 그대로 있다. 거기가 『표고』로서는 그리 높은 축이랄 수 없으나 워낙 추운 지방이라 나무는 못 자라고 진귀한 화초인 고산 식물만으로 수 놓은 『쥬단』이 펼쳐졌다.

한참 내려와서야 가둑나무 숲이 북풍 한설과 악착같이 싸우며 살아남아, 앙당지고[2] 못 자라고 비틀어진 몸을 뻐치고 서 있다. 버림받은 백성 같으나 삶은 억세다.

선조들 제사 때면 너무 까다로웠다고 한다. 음식 차리는 부인네도 재계 목욕하고 떡치는 젊은이들도 침이 튈까봐 입에 『마스크』를 쓴다. 때가 갈수록 해이해지긴 했지만 우리 집안에서 보다 더 극성스레 형식적이었다. 서울에 이사하신 다음에도 제사는 지냈지만, 비좁은 대청마루에 젯상을 차려 놓으면 아낙네들 앉을 자리도 없고 밖앝 뜨락은 더 형편없이 작아서 남자들은 앉도 서도 못한다. 결국 남녀 다 같이 간단하게 한번 절하고 젯상을 물린다.


얼마 후에는 그것도 그만 둘 밖에 없었다. 유교의 생명인 『제례』도 이래서 소리 없이 증발되 버리는 것이 아닐까?

『종가』를 이은 서울의 채태석 박사가 지금 향곡선생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 마음가짐에 따라 향곡선생의 『형식』 아닌 『실학』이 후손에게 맥박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부디끼다 - ‘부대끼다’(서로 접촉하여 부딪치다)의 방언 ↩
2. 앙당하다 - 크기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작다 ↩
내가 어릴 때 『우리 집』은 대식구였다. 부모님이 계시고 형님 내외분, 누님 셋, 그리고 나, 후에 내 아래로 누이동생 하나가 막내로 났다. 거기에 농군 하나 두면 열 사람이다. 조카들은 후에 끼어들었지만, 누이들이 출가하는 것으로 교체된 셈이었다. 그러니 자작 자급하는 중농으로서 생계 걱정을 안할 수 없었다.

형은 『글을 했다』는 축에 들지는 못했지만 보통 정도의 글에는 자유로웠다. 원래 몸이 약한데다가 농사란 중노동에 시달려 삶의 절반은 짜증인 것 같았다. 아버님은 생계도 다소 도울 겸, 사랑방에 초학서당을 차렸다.

서당(書堂)이란 것은 온전히 자치여서 가까운 동네 약 열 가호쯤이 합의하여 학채를 분담한다. 학채란 선생에게 드리는 사례금이다.

서당에는 칠 팔세 꼬마에서 십 오륙 세 십대(Teenager), 그리고 몇 사람의 이십대 청년도 섞이는 일이 있다. 청년들은 시전, 서전, 주역 등을 제 손으로 읽어 내려가는 『문리』(文理)난 사람들이니만큼 선생 앞에서 한번 강론을 받고서는 집으로 돌아간다.

제일 개구쟁이는 십대 아이들이다. 그러나 선생이 앉아 있는 동안 그들은 『죄수』다. 왼 종일 공기구멍도 없는 골방에 꿇어 앉아, 재미도 없고 뜻도 모를 한문을 덮어놓고 외인다. 옆 아이와 몰래 손장난이라도 했다가는 당장 물푸레 채찍이 어깨를 갈긴다. 그 중 나이든 아이가 접장, 즉 반장이 된다. 그는 『보좌감독』이다. 소변본다는 것이 밖에 나갈 유일한 구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접장에게서 외출패를 받아야 한다. 그 낌에 나가 놀까봐 그러는 것이다.

어쩌다 선생이 『마스도리』 즉 마을에 볼 일이 있어 나갈라치면, 그 때에는 접장이고 뭐고 없다. 모두 뛰쳐나가 『앞갱면』[1]에서 씨름한다, 딩군다, 주먹질한다. 깨깨[2]거리며 날뛴다. 어떤 놈들은 뒷산에 올라가 돌배 딴다, 갬[3] 뜯는다, 야단법석이다. 숨바꼭질, 넓이뛰기, 높이뛰기도 한다. 그런 운동은 아이들이 저절로 아는 것이었다.

나도 언젠가 앞뜰에서 고임대[4]를 세우고 매끈한 싸리를 가로 질르고서 높이뛰기를 하다가 아버님께 들켰던 일이 있다. 『이놈 다리 부러지고 싶으니? 들어가 글이나 읽어!』 하고 노려보시던 바람에 혼이 나서 도망친 일이 있다. 그랬으니 운동신경이 발달될 짬이 어디 있었으랴 싶다.

서당 풍경 중 하나는 십대 개구쟁이들의 성(Sex)적 발동이다. 사춘기라서 선생만 없으면 서당은 음담패설의 시궁창이다. 대가리 큰 놈들은 자기보다 어린 것들을 끼어안고 동성연애를 건다. 밤에는 한 방에 합숙하며 글 읽은 경우가 태반인데 그런 경우에는 선(線)을 넘어 행동한다. 십 삼사세에 벌써 십 육칠세된 아가씨와 결혼한 소년들도 있다. 그런 애들에게는 성적 호기심에서 성 경험을 캐물으며 놀려댄다.


서당은 십대 음란의 소굴이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여자교제에 도움이 되거나 자유결혼의 길을 여는 것도 아니다. 『남녀칠세부동석』이라 여자교제는 어림도 없다. 같은 또래 여자와 길에서 마주치면 여자 쪽에서 길을 비켜 돌아섰다가 간다. 총각들도 어색하고 부끄러워 감히 처다보지 못한다.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친척 아닌 타성 아가씨들은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아버님 사랑방 서당에 모이는 십여 명 아이들은 아침에 와서 어제 배운 글을 강 바치고 새로 몇 줄 배우고, 낮에는 글씨 쓰고, 글 짓고 오후 늦게부터는 큰 소리로 글을 읽는다. 글 읽을 때에는 몸을 앞, 뒤 또는 좌, 우로 흔드는 것이 습성이다. 그 동안에 아버님은 밭에 나가 형의 농사일을 도우신다. 나도 서당 아이의 하나와 같이 다루셨지만, 글을 배우는 데는 둔하지 않아서 한두 번 음독하고 대강 새겨주면 곧잘 기억했었다. 그러나 아이들 중에는 대여섯 번 새겨줘도 모르는 둔재가 많았다. 그래서 아버님은 나를 그 애 옆에 앉아 『방청』하게 하고서 『모를 게 있거든 저 애에게 물어라』 하셨다. 그러니까 『꼬마 조수』격이었는데 아이들은 모두 순진해서 열댓 살 씩 먹은 큰 애들도 곧잘 물어오곤 했다.

그런데 형은 아버님께 너무 부담이 크다면서 서당 『직업』에 반대했다. 사실 초학 훈장이란 속이 썩는 일이라고 들었다. 가난한 농가에서 학채 낸다는 것도 보기 딱한 일이지만, 천생 가야 『글』과는 인연이 있는 것 같지도 않은 『돌대가리』 아이들과 일 년 열두 달 싸우는 것도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아버님도 『훈장』을 사퇴하셨다. 학부형들이 간청해서 학채도 더 드린다고 했지만 아버님은 고사하시고 정원을 가꾸고 풍월에 자적하는 여생을 지내셨다.


나도 서당 없어진 것을 무척 좋아했다. 아침에 아버님 앞에서 강(講)을 바치고 그날 글을 배우고, 글제나 하나 받아 놓으면 그만이다. 두세 번 읽는 것으로 암송 준비는 끝나는 것이나 나머지는 왼통 자유시간이다. 소먹이 풀베는 재미에 낫들고 종일 싸다니기도 한다. 『노성』에도 올라가고 소도 옮겨 매고 뒷산, 앞뜰, 가제골, 왼통 내 천지다. 언덕바지를 내리달릴 땐 다리에 날개 돋힌 것 같았다. 맨발로 다녀서 발바닥이 구두 같이 굳었다. 다섯째 숙부님과 함께 가재골에서 가재잡이도 했다. 거기 가재는 서증 즉 더위 먹은데 명약이라고 해서 약용으로 잡는 것이다.

아버님은 시상이 떠올라 맘에 드는 시라도 지으시면, 딴방에서 자는 꼬마(나)를 불러 자작시를 읊어 주셨다. 특히 초가을 입추에서 추석에 걸쳐 푸른 하늘, 밝은 달, 맑은 바람, 익어가는 곡식 등등의 계절이면 거의 매일 저녁 불려갔다. 그래서 아예 옆에서 자기로 했다. 그러노라니 나도 풍월을 알 것 같고 풍월의 감흥이 제법 느끼어지기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진짜 한시 짓는 재주는 없었다.

그럭저럭 나도 나이가 일곱 여덟 살 되어 갔다. 통감은 이권까지 밖에 읽지 않았고 직접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 소위 사서를 읽었다. 어린애가 그런 고전을 알고 읽었을 리가 없다. 그러나 아는 것 같은 기분이기는 했다. 당판으로 논어와 맹자는 각기 일곱 권씩이었는데 다 떼면 일곱 권을 묶어 선생 앞에 드리고 꿇어 앉아 첫 권부터 마지막 권까지 암송하는 것이었다. 막히는데 없이 물 흐르듯 내려가면 근엄한 아버님도 만족한 미소를 띠우곤 하셨다. 맹자는 아홉 살 때 통독했다. 그것은 왕도정치(王道政治)의 주장이었다.[5]


건장한 소년으로 열 살까지 집에 있었다. 쉬운 김도 매고, 땔 나무도 했다. 창꼴 막바지에 우리 산이 있어서 형은 거기서 하루에 한 수레씩 땔나무를 해 왔다. 아버님은 뒷동산에서 한 이년씩 자란 애숭이 가둑나무를 낫으로 베고 계셨다. 나도 아버님과 같이 그 일을 했다. 일이라기보다 장난삼아 재미로 한 것이다. 하루는 낫이 빗나가 내 발목에 걸린 것을 모르고 나무 베듯 잡아 당겼다. 그 결과는 뻔하다. 뼈까지 낫날이 들어갔지만 처음에는 아픈 줄 몰랐다. 놀라서 나는 앙앙 울었다. 아버님이 저 켠에서 달려 오셔서 적삼 고름을 채서 동여매고 부둥켜안고 비탈을 내려오셨다. 우리 집에서는 전에 한약국을 했었기에 그 때까지 천정과 벽에 한약 주머니가 배꾹 매달려 있었다. 곧 석번인가를 갈아 붙이고 싸맸다. 그러나 균이 들어 곪아서 여름내 나는 절며 다녔다. 초가을 청명한 공기 속에서야 새 살이 자라 아물었다. 지금도 흉터가 남아 있다. 내가 아버님께 안겨 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요 나중이었다.

형수님은 김 봉사 『내용』(衛鎔) 씨 따님이다. 김 봉사란 분은 글 잘하고 풍류와 멋이 몸에 밴 어른이었다. 처음에 어느 능참봉으로 계시다가 『봉사』로 승진했다. 말끔한 미남으로서 어느 좌석에서나 재담과 주흥과 시와 담론이 판을 치곤 하셨다. 형수님도 친아버님을 닮아서 살결이 말쑥한 드물게 보는 미인이었다. 성우에 못잖게 『말』 흉내 내셨고 재치있게 화제를 돌리곤 했다. 다산이셨지만 삼남 일녀 밖에 남기지 못하셨다. 내 큰 누님은 열여섯에 열 세 살짜리 총각 김인수한테 시집갔다. 서울 가서 훈련원 판관으로 있었다는 김 판관 손부가 된 것이다. 모두 아버님이 만든 운명이다. 둘째 누님은 박춘익이란 좀 머리가 모자라는 청년에게 주어졌는데 스물네 살 때 독감이 폐렴으로 번져 일찍 가셨다. 셋째 누님도 열일곱 살에 엄 씨네 꼬마(엄충섭)와 결혼이라고 했다. 모두 아버님의 독단이었다. 그러나 그 때에는 불평이 있을 수 없었다. 아무도 그런 구습에서 헤어날 힘이 없었고 헤어나려고도 하지 않았다. 빨리 장가들여 사내자식 많이 낳아, 일손이 늘면 팔자 고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 몇 해 후에 나는 향동학교를 졸업하고 신학문을 했다지만, 이런 사회관습에 도전할 용기는 없었다. 그래도 누님들은 내게 기대를 걸고 끔찍히 위해 주었다. 마치 내가 새벽을 불러올 단 하나의 샛별이나 되는 것 같이 드높여 주는 것이었다.


어머니들은 단오날 씨름판에 가서 사윗감을 고르고, 그네 뛰는 처녀들 보고 며누리[6]감을 선본다. 그리고서는 타성 집안에 출가한 친척 여인의 중매로 결혼이 상담된다. 그 다음에 남자의 가장이 아가씨집 가장을 예방하여 정중한 청혼을 한다. 승낙이 되면 그것이 약혼이다. 『우리 아이는 미거해서[7]……』 하면 그것이 거절이다.



[각주]
1. 갱면 - ‘개천’의 방언 ↩
2. 깨깨 - 어린아이가 매우 시끄럽게 자꾸 우는 소리를 나타내는 말 ↩
3. 갬 - ‘개암’의 방언 ↩
4. 고임대 - 물건이 기울어지거나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밑을 받쳐서 괴는 대 ↩
5. 김재준은, 20세기 전기에 출현한 한국 기독교 사상가들 중에서, 한문 문자에 담겨 전승된 동양 사상의 정신 세계에 자유자재 통달하고 동시에 서구의 철학ㆍ종교ㆍ신학 사상을 공부하여, 동서 정신 세계를 한 몸 안에서 대화시키고 통전시킬 수 있었던 몇 명 안 되는 지성인 중의 한 분이었다. 탁사(濯斯) 최병헌(崔炳憲),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신천 함석헌, 장공 김재준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김경재, 『김재준 평전』, 도서출판삼인, 2001, 16쪽. ↩

6. 며누리 - ‘며느리’의 방언 ↩
7. 미거하다 - 아직 철이 나지 않아 하는 짓이 미련하고 어리석다 ↩
경원 함양동 3년



회령에서 3년



웅기서 서울로


서울 3년







서울에서 고향에 돌아와

소학교 교사 3년



동경 3년














미국 3년


















돌아와 보니




평양 3년















간도 3년














조선신학원 발족


















편집후기

부록 : 장공 김재준 목사 연보 및 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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