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2

알라딘: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김정렴

알라딘: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 한국 경제정책 30년사 
김정렴 (지은이)랜덤하우스코리아2006-08-01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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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장본557쪽

책소개
박정희 정권에서 9월 3개월동안 최장수 대통령 비서실장 재직 기록을 세우며 34년간 한국의 중앙은행과 행정부의 공직에서 일한 김정렴의 회고록이다. 당시 한국의 경제정책을 이끌어나가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인물로, 1950년부터 1980년까지 30여년에 걸쳐 한국의 산업화·경제 발전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1990년 출간되었던 책을 대폭 수정, 증보하여 정리한 한국 경제정책의 살아있는 역사서인 셈이다.

신풍종 개발을 통한 쌀 자급자족 달성, 새마을운동, 고속도로 건설 등 우리가 기억하는 한국 경제 발전의 대표적인 사건들을 직접 수행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세계은행과 덩샤오핑의 평가, 지은이가 가까이에서 본 박정희의 이모저모 등을 꼼꼼한 기록과 수많은 정책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하여 1차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목차
증보 개정판을 내면서

1부 朴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세계은행과 덩샤오핑의 평가
세계은행의 '동아시로부터의 교훈'이라는 간담회
朴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관심과 덩샤오핑(鄧小平)의 평가

2부 일본유학, 징병 제1기로 일본군 입대 그리고 원자폭탄

3부 국제금융계에 날개를 펴며
새로운 중앙은행 설립에 참여
제1차 통화개혁

4부 인생의 기로에 서다
격동기의 재무부 이재국장
재무부 차관 시절
상공부 차관 시절
재무부 장관 시절
상공부 장관 시절

5부 대통령비서실장 시절^6
뜻밖의 임명: 경제는 실장이 대신 잘 챙겨다오
신풍종 개발 7년만에 쌀 자급자족 달성

6부 새마을 운동
청산에 살으리랏다: 산림녹화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동맥
사채 동결로 금융위기 극복
부가가치세: 정계의 먹구름을 헤치고
의료복지제도의 기틀 마련
안보의 긴박성과 산업정책

7부 공업교육의 혁신과 기능공 양성

8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전문연구기관 설립 및 대덕연구단지 건설

9부 위급을 고하는 안보경제

10부 비정치인의 청와대 수업

11부 비서실의 신축적 운영

12부 가까이에서 모신 朴대통령의 이모저모

연보
부록: 朴대통령 친일파 논란에 대해 /유양수


 
책속에서

우리나라 수출 진흥을 가장 강력하고 유효하게 뒷받침한 수출진흥책은 1965년부터 朴대통령이 직접 주재하는 월례 수출진흥확대회의였다. 통상에 관계되는 장관·업계대표·금융계 등 유관기관 대표들이 참석하는 회의로, 월별·품목별·지역별 수출 동향을 점검하며 수출 증대를 위한 모든 시책과 업계의 애로 타개를 논하고 유공자에 대한 격려와 시상도 하는 회의였다. 이 회의에서는 수출진흥시책과 애로 타개 등도 매월 그 추진 상황이 점검·보고되므로 수출 진흥을 위한 시책과 제도가 하나하나 제도화 및 토착화돼 갔다. '수출은 국력의 총화'라고 갈파한 朴대통령의 수출입국에 대한 굳은 신념과 박충훈 상공부 장관의 '수출제일주의' 기치 아래 정부와 지원 유관기관의 모든 관련 인원이 일치단결해 지속적으로 분발함으로써 세계에서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는 고도 수출신장의 원동력이 마련됐다. - 본문 171쪽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김정렴 (지은이)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9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서 입행한 후 80년 주일대사를 사임할 때까지 약 2년간의 공백을 빼고 34년간 우리나라 중앙은행과 행정부에서 공직을 맡았다. 재무부와 상공부 장관,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으로 경제개발 정책 수립과 그 집행 과정에 참여하여 '한국경제정책의 산파' 역할을 담당했다. 역대 최장수 비서실장(9년 3개월)을 거쳐 말년에는 주일대사로 근무한 후 공직에서 물러났다.

최근작 :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아 박정희> … 총 2종 (모두보기)



책소개
1990년 중앙일보에서 펴냈던 『한국경제정책30년사-김정렴 회고록』을 대폭 수정, 증보하여 정리한 '한국 경제정책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책. 꼼꼼한 기록과 수많은 정책자료를 바탕으로 한 1차 자료의 성격을 가지며, 동시에 한국의 산업화 과정에 참여하고 지켜본 당사자로서의 회고록이기도 하다.

책의 일부 내용을 미리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미리보기

목차

1부 朴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세계은행과 덩샤오핑의 평가
세계은행의 '동아시로부터의 교훈'이라는 간담회
朴대통령의 경제개발정책에 대한 관심과 덩샤오핑(鄧小平)의 평가

2부 일본유학, 징병 제1기로 일본군 입대 그리고 원자폭탄

3부 국제금융계에 날개를 펴며
새로운 중앙은행 설립에 참여
제1차 통화개혁

4부 인생의 기로에 서다
격동기의 재무부 이재국장
재무부 차관 시절
상공부 차관 시절
재무부 장관 시절
상공부 장관 시절

5부 대통령비서실장 시절
뜻밖의 임명: 경제는 실장이 대신 잘 챙겨다오
신풍종 개발 7년만에 쌀 자급자족 달성

6부 새마을 운동
청산에 살으리랏다: 산림녹화
고속도로는 조국 근대화의 동맥
사채 동결로 금융위기 극복
부가가치세: 정계의 먹구름을 헤치고
의료복지제도의 기틀 마련
안보의 긴박성과 산업정책

7부 공업교육의 혁신과 기능공 양성

8부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전문연구기관 설립 및 대덕연구단지 건설

9부 위급을 고하는 안보경제

10부 비정치인의 청와대 수업

11부 비서실의 신축적 운영

12부 가까이에서 모신 朴대통령의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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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경제정책을 알기에 꼭 필요한 책중 하나
내용 평점4점   편집/디자인 평점4점 | 아* | 2009-02-16

한국의 경제정책을 다룬 책으로 이 책은 꼭 읽어볼만한 책이다.

 

김정렴씨는 주로 박정희 정권의 초창기 경제정책의 중요한 맥락을 많이 다루었고,

 

김용환씨의 임자, 자네가 사령관 아닌가는 박정희 정권의 후기를 많이 다루었다.

 

이장규저자의 주로 전두환정권의 김재익씨를 다룬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는

 

5공화국의 경제정책을 기자의 눈으로 잘 정리를 한 책이다.

 

아쉬운 점은 6공화국을 다룬 저서는 못 찾았다는 점이다. 하나 힌트를 얻고 싶은

 

것이 박철언씨의 책이었는데, 어느날보니 모두 사라져버렸다. 도서관에서나 구할

 

수 있을지 매우 아쉽다.

 

그리고, 경제정책을 다룬 책들이 대부분 자기가 잘한 점을 언급한 것이 많기에

 

아무래도 여러권의 책을 읽는 것이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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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렴

최근 수정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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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렴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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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상징
산업통상자원부장관








































































정부상징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장관
































































































정부상징(1949-2016)




대한민국 제4대 대통령비서실장
김정렴
金正廉 | Kim Chung-yum
김정렴 장관
출생
사망
2020년 4월 25일 (향년 96세)
본관
우명(又明)
재임기간
제15대 재무부 차관
제19대 상공부 차관
제20대 재무부 장관
제23대 상공부 장관
제4대 대통령비서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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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2.1. 박정희 정부2.2. 박정희 정부 이후
3. 가족4. 기타5. 주요 저서6. 미디어에서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군인, 경제관료, 정치인외교관으로 대한민국 최장 재임 대통령비서실장[2]으로 유명하다.

2. 일생[편집]

김교철 가족사진
조흥은행장을 지낸 김교철과 최안자 부부. 오른쪽 뒤는 장남 김정호로 한일은행장을 지냈으며, 오른쪽 앞이 3남 김정렴이다.

1924년 경성부(현 서울특별시)에서 김교철과 최안자의 3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논산으로 내려가 강경상업학교와 일본 오이타(大分)경제전문학교를 나와 19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입행하였다.

하지만 입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징병되어 1944년 규슈현 구마모토의 육군예비사관학교에 입교, 9개월만에 히로시마 소재 군관부 사령부에 배속되고 일제 패망 때까지 그 곳에 있었다.[3]

해방 후 치료를 받다가 귀국해 1949년 육군 준위로 임관하여 1952년 준위로 예편하였다. 한국은행 시절이던 1953년에는 29세의 나이로 1차 통화개혁을 전문(全文) 기안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으며, 1956년 한국은행 조사부 차장에 올랐다.

2.1. 박정희 정부[편집]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1966년 1월 21대 재무부(현 기획재정부) 장관으로 취임하였으나, 동년 5월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이 터지고 이에 대한 반발로 9월 22일 김두한의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똥물을 맞았고 이후 정일권 국무총리 이하 내각이 총사퇴하면서 퇴임하였다. 곧바로 다음해인 1967년 10월 23대 상공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으로 취임해서 1969년 10월까지 재직하였다.

이후 제갈조조 이후락의 뒤를 이어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무려 9년 2개월 동안 대통령비서실장으로 일하였다. 비서실장 임명과 관련해 김정렴 장관은 자신의 회고록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에서 본인이 청와대로 불려가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모릅니다. 비서실장 만은 제 적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하자,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고 경제가 잘돼야 정치·국방도 튼튼하게 할 수 있다"면서 설득했다고 회고했다.

취임 직후 '청와대가 작아야 경제정책이 원활히 돌아간다'는 신념에 따라 가장 먼저 비서실을 축소하였고, 차관 이하 인사는 청와대가 하지 않고 장관들에게 위임했다. 그러면서도 장관급 인사들은 본인이 직접 챙겼다.

그리고 비서실장 재임 중 많은 일들에 관여했다. 수출입국·공업화 정책 수립, 중화학공업 건설, 방위산업 육성 등 산업 고도화 정책 수립과 실행을 주도했으며, 농업개발·산림녹화·새마을운동과 고속도로 건설, 의료보장제도의 추진에도 관여했다.  자급자족 달성, 8.3 사채 동결 조치부가가치세 도입,[4]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와 대덕연구개발특구 등을 주도해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하기도 했다. # 이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으면서 이승만 대통령부터 2021년 현재까지 역대 최장수 재임기간을 달성한 비서실장이 되었다.

1978년 건강문제를 이유로 비서실장직을 사임하고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정확한 사유는 이렇다. 당시 시기 상으로 1977년 부가가치세를 도입 하였는데 이듬해 연말의 제10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부가세 철폐를 내세운 신민당과 무소속의 득표가 민주공화당을 앞서게 되어, 공화당은 이를 주도한 경제팀에 책임이 있다며 청와대에 건의하고 박정희 대통령은 이를 주도한 경제팀을 대거 교체하는 개각을 단행하였다. 제1참모로서 이에 따른 정치적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비서실장 사임 직후 곧바로 주일대사에 임명되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후임 비서실장은 주 대만 대사[5]였던 김계원.

공교롭게도 김정렴이 청와대를 떠난지 10개월 만에 10.26 사태로 박정희 대통령이 피살당했다. 이 때문에 만일 김정렴이 계속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남았거나, 최소한 10.26의 현장에 있었다면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6] 실제로 10.26 사태 당시 주 일본 대사로 일본에 나가 있던 김정렴이 급거 귀국했을 때, 그의 주위 지인들과 청와대 시절 동료들은 "당신이 청와대에 계속 남아 계셨다면 각하께서 이렇게 어이없이 돌아가시는 일은 없었을텐데..."[7]라며 애통해 했다고 한다.

화폐개혁새마을운동산림 녹화사업에도 참여하는 등 주요 정책의 시행 및 사회 공헌에도 힘썼다.

2.2. 박정희 정부 이후[편집]

1999년부터는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 2007년부터 사업회 회장을 맡아왔다. #

2016년 11월 동아일보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비서실장 시절부터 최태민 일가의 문제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증언하여 안타까움을 밝혔다

2020년 4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6세. 역시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 아래 중화학 공업, 방위산업 건설에 매진했던 기술관료 출신의 오원철 전 청와대 경제 제2수석이 타계한 지 1년만의 일이다. 이로써 박정희 시대의 건설기를 함께 했던 산증인들이 대부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3. 가족[편집]

부친부터 대대로 금융계에 몸담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아버지 김교철은 조흥은행장, 형 김정호는 한일은행장을 지냈으며 둘째 형은 식산은행(현 산업은행)에 다니다 6.25 전쟁 때 작고했다. 장남 김두경은 전 은행연합회 상무이사, 차남 김승경은 전 메트라이프생명 상무 및 전 새마을금고 연합회 신용공제 대표이사, 3남 김준경은 대통령실 금융비서관을 거쳐 2013~2017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을 역임했다. 사위는 전 현대증권 회장 김중웅이다.

형 김정호의 사위, 즉 조카사위가 김종인 전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다.

4. 기타[편집]

  • 통치 말년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하야하겠다는 의사를 자신에게 밝혔다고 증언한다. 헌법을 개정해 김종필을 대통령 후보 및 후계자로 내세워 제대로된 간선제로 변경해 김영삼, 김대중과 붙여본다며... 대통령 비서실장계의 ‘살아 있는 전설’ 金正濂
  • 경호실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지위고하를 안가리고 오만불손 하게 굴었던 차지철도 쩔쩔매던 인물 중 하나가 김정렴이었다. 경호실 하기식에 오라고 해도 절대로 가지 않을정도로 대쪽같은 성격이었으며, 박정희가 총애하던 관료였기 때문에 차지철도 감히 함부로 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비서실장 사직으로부터 불과 1년만에 10.26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그의 빈 자리가 얼마나 큰 비극으로 이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 국회 오물 투척 사건의 피해자들 중 가장 장수했다.

5. 주요 저서[편집]

  • <한국경제정책 30년사>(중앙일보), 정치 회고록 <아, 박정희>(중앙일보),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랜덤 하우스 코리아)(한국경제정책 30년사를 대폭 수정 증보 정리한 책)가 있다. 이 책들은 개발연대를 탐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로 여겨지며,여러 한국현대사 및 경제사 연구에서 자주 인용되는 저서들이다. 

6. 미디어에서[편집]

제3공화국에서는 배우 최상훈이, 제4공화국에서는 배우 신충식이, 코리아게이트에서는 배우 이묵원[8]이 그를 연기하였다.

[1] 현재의 오이타대학[2] 무려 9년 2개월이다정일권 총리와 마찬가지로 아주 특수한 상황이나 개헌 없이는 사실상 깨지지 않을 기록이다.[3] 즉 원자폭탄을 맞고 돌아온 사람이다. 자세한 내용은 김정렴의 저서 '최빈국에서 선진국 문턱까지 참고'[4] 다만 부가세는 그가 물러나게 된 원인이 된다.[5] 중앙정보부장 자리에서 물러나고서 곧바로 주 대만 대사로 부임했다.[6] 김계원은 당시 중정부장 시절에 박 대통령의 신임을 잃고 비교적 한직인 주 대만 대사로 보직이동 되었다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추천으로 복귀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보니, 김계원은 김재규의 영향력 밑에 있었던 사람이다. 실제로 호형호제 할 정도로 김재규와 김계원의 친분은 컸기도 했고.[7] 차지철 항목에도 있지만 김정렴은 차지철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 인물이기도 했다.[8] 배우 강부자의 남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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