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대한 태도
이번학기엔 학생들과 "이노우에 히사시의 "아버지와 살았더니"(父と暮らせば)라는 작품을 원어로 읽었다. 대화가 히로시마 사투리라 처음엔 많이 어려워 하더니 중간고사 무렵엔 꽤 익숙해진 눈치였다. 젊음은 역시 세다.
이 작품은 도서관 사서를 하면서 살아가는 딸과 그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어느날 도서관을 방문한 젊은 대학조수를 좋아하게 되지만 딸은 그에게로 향하는마음을 억누르려 한다. 그런 딸을 아버지는 답답해 하면서 "사랑의 응원대장"역할을 자임한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두근거리는 네 가슴이 나의 심장을 만들었고, 뜨거운 네 한숨이 나의 몸통을 만들었고, 보일듯 말 듯 희미한 너의 바램이 나의 팔다리를 만들었단다.." 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실은 죽은 아버지의 혼백이였던 것.
그리고 히로시마 원폭때 무너진 지붕에 깔린 아버지를 미처 구하지 못하고, 도망치라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딸만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딸은 이후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때문에 자신이 행복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새로 찾아온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려 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러한 딸의 심리를 섬세하게 읽어내면서, 딸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그런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딸은 결국 사랑을 택하게 된다.
미군의 검열을 피해, 히로시마의 기억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고민하는 젊은이들도 이야기의 또 하나의 주축을 이루지만,그런 부녀간의 애틋한 사랑을 절묘한 언어유희를 섞어 다루고 있는, 꽤 감동적인 작품이다.
학생들은 다행히 이 작품을 즐겨 준 것 같았다."부녀간의 사랑"에 대해 특히 여학생들이 긍정적인 감상을 말했고, "히로시마 비극을 통한 반전작품"이라고
말해준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그중엔 "일본의 피해의식"이 드러난 작품이라면서 약간의 불편함을 표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굳이 나서기 전에 부녀지간사랑이나 반전을 읽어냈던학생들이 그런 학생들에게 반론을 펴기 시작했다.
"작가는 서문 부분에서 이미 일본의 가해사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피해체험인 건 사실 아닌가""미국의 인종차별도 히로시마원폭 투하와 관계없지 않다더라.""원폭을 떨어뜨리지 않아도 승전할 수 있었다더라."등.
똑같이 작품을 읽어도 이런 식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어쩌면 지식과 이론 이전의 "세상에 대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혹은 작가가 만들어낸 등장인물들의 목소리에 마음을 열고 귀기울이는 태도. 상대가(작가가 )과연 무엇을 지향하며 썼을지를 이해하려 하면서 읽는, "작가에 대한 존중".
즉 눈앞에 존재하는 대상에 대해 함부로 재단하면서 다 안 것처럼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를 아직 다 모르는 우주로 대하는 존중의 태도다.
나는 그런 감성을 "세상에 대한 태도"라고 부르고 싶다. 한 일본인페친이 한 얘기인데, "고추장 속 단맛"은 가만히 음미해야 알아낼 수 있다. 음미하려는 자세가 없으면 고추장은 그저 매운 것으로만 존재한다.
가만히 음미해 단맛을 감지해 내는 혀와, 매운 맛만을 느끼고 거부하는 혀 중 어느 쪽이 행복한 혀일지는 분명하다.
복잡한 결을 보는 일은 시간을 요한다.그러다 보니 대상을 단순화하려는 경향이 곧잘 일어난다.
하지만 분명한 건, 단 맛까지 알아내는 혀의 주인이, 자신은 물론, 타자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한권의 책에서 부녀간 사랑을 읽어내고 자신과 아버지와의 관계와 기억의 계승과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며 가슴을 데우는 사람과, 피해가 아니라 피해"의식"을 애써 읽어내며 차갑게 식은 가슴으로 책을 덮는 이들 중 누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지도 자명하다.
오바마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대해, "일본에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닌지, 그래서 "가해국에서 피해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지등 의심의 눈초리가 많다.
하지만 오바마대통령이 뭘 한들, 일본이 국가로서의 아시아가해국이자 그 때문에 수십만의 원폭 피해를 입은 유일한 국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정치가의 애도를 그저 정치적인 것으로 보려면, 독일의 빌리브란트의 사죄도 정치적인 것으로만 봐야 한다.
오바마를 향한 의심들이,오히려 우리 안의 사대주의를 보는 것 같아 민망하다. 애도는 애도일 뿐.
우연히 그 땅에서 희생당한 조선인은 물론, 순식간에 참혹하게 죽어간 사람들은 누구든 애도받을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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