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정신대, 그 기억과 진실
박광준 (지은이)뿌리와이파리2022-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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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일제식민지하인 1943년 봄부터 해방 때까지 약 2년 반 동안 일본 군수공장으로 노무동원되었던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 관한 책. 여자정신대의 결성과 동원 과정, 일본 군수공장에서의 생활과 노동, 귀국과정에 관한 전반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명확히 하고, 그에 관련된 의문들을 풀어내고자 했다.
한국정부와 연구자들이 수집 작성해온 정신대원들의 구술자료, 그리고 정신대 소송에 제출된 진술서를 가장 중요한 사료로 삼아 가능한 한 세밀하게 기술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그 시절 여자정신대와 관련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또 그들의 구술 내용은 왜 그렇게 되어 있는가를 규명했다.
목차
서문
제1장 | 여자정신대에 대한 접근방법과 관련 사료
1. 여자정신대란 무엇인가?
2. 선행연구와 사료
3. 정신대 문제에 대한 접근
4. 증언이라는 사료에 관해
제2장 | 식민지통치구조와 노동자 이동
1. 식민통치구조와 행정조직•64
2. 식민지 조선의 빈곤과 조선 거주 일본인
3. 조선의 산업화와 공장법 논의
4. 조선 여공의 탄생
5. 조선 노동자의 일본 이동
6. 노무동원 이전의 노동자 이동과 그 규모
제3장 | 조선인 노무동원과 여자노무자원
1. 15년전쟁과 노동력 부족
2. 조선여자노무자원의 특성
3. 여자노무동원의 준비와 이념전략
4. 노무동원의 전형적 방법들
5. 노무동원과 관련된 고질적 문제
제4장 | 여자정신대의 편성과 동원
1. 여자정신근로령의 성립
2. 여자정신근로령의 내용
3. 총독부의 선전전략과 여자정신대의 유인
4. 1943년 자주적 여자정신대 동원
5. 정신대 편성 경로: 학교와 지역
6. 정신대 출귀국과 인솔자
제5장 | 여자정신대의 현지생활, 노동 및 임금
1. 여자정신대를 받아들인 기업들
2. 일본 중공업분야의 여성노동과 교학
3. 여자정신대의 문화충격과 일상
4. 배고픔의 고통
5. 노동과 작업환경
6. 임금문제에 관해
제6장 | 그리고 돌아오지 못한 대원들
1. 정신대와 사회계층
2. 귀국 못한 대원들
3. 사망자 및 산재 등에 대한 보상
4. 정신대원이 (군)위안부가 된 경우
5. 이탈 후, 돌아오거나 돌아오지 못하거나
제7장 | 여자정신대에 관한 학술적 쟁점들
1. 여자정신대에 관한 학술적 논의
2. 정신대령 ‘시행’과 ‘발동’에 관한 쟁점
3. 정신대령은 조선에서 시행되고 발동되었다
4. 황민화 교육, 강제성 그리고 동원 규모
에필로그
감사의 말
참고문헌
[참고자료1] 노동자모집취체규칙(요약)
[참고자료2] 조선인내지이입 알선요강(부분)
[참고자료3] 여자정신대제도 강화방책요강
[참고자료4] 여자정신근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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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7 한국사회에서 정신대 문제는 해방 후 오랫동안 매스컴이나 문학예술 작품 등을 통해 다루어지고 알려졌다. 정신대 문제가 학술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1990년대 초부터인데, 그 이후 논의는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과학적 논의였는데 안타깝게도 확산되지 못했다. 다른 하나의 갈래는, 정신대와 관련하여 해방 이후 간간히 제기되어오던 불분명한 근거의 정보들을 매스컴과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조차도 무분별하게 답습하고 재생산한 논의다. 후자는 정신대에 관한 오해를 급격히 확산시켰다. 거기에 감정적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일부 상업화된 문화예술과 문학 등이 가담했다. 그러한 영향으로 오늘날 많은 한국인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는 정신대에 관한 집단적 기억은 그 역사적 사실에서 매우 멀어진 것이 되고 말았다. 접기
P. 64 조선 노동자의 일본 진출에 대해서는 조선총독부와 일본내각이 입장을 달리했다. 일본내각은 조선인의 유입이 일본 내 실업률 상승이나 조선인-일본인 주민 사이의 분쟁, 조선인 사이의 경쟁격화, 정국불안 등을 야기할 것이라는 이유로 1940년 전후까지 일관되게 유입 억제정책을 견지했다. 그러나 심각한 농촌 빈곤 해소라는 현실적 과제를 가진 조선총독부는 노동자 일본 진출에 적극적이었다. 직업 알선의 경우 고질적인 문제로 조선 내 알선이건 일본 취업이건 간에 당초부터 불법조직이나 불법행위로 인하여 많은 조선인에게 피해가 발생했다. 접기
P. 101 조선 여공의 탄생은 조선 노동자 탄생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노동자의 대다수를 차지했다. 조선에 진출한 일본 방적자본이 일본 방식을 그대로 조선에 이식했다고 하더라도, 조선 여공들에게는 심각한 폐해가 발생했을 것이다. 노동강도가 높았고 게다가 조선사회는 자본주의적 노동 방식이나 사고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물며 공장법이 시행되지 않았으므로 조선에서의 여공 처우가 일본보다 더 나았을 리가 없다. 일본 방적공장의 풍토는 혹사노동을 당연시하는 것이었는데, 그에 더하여 조선사회의 여자 멸시 문화는 여공의 삶을 더더욱 가혹하게 만들었다. 공장관리의 말단인 반장이나 조장은 조선인 남자였는데, 방적자본의 하수인인 그들에게 여공의 인격존중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에 무리일 것이다. 가혹한 노동조건과 처우에 여공들은 반발했고 회사는 폭력적으로 대응했으며 그로 인하여 파업 등이 발생하는 등 큰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접기
P. 110 김찬정의 저술 내용을 보면, 10명 이상의 노동자를 모집하는 경우, 일본 회사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여공을 모집하면 1인당 35엔 정도, 아는 이를 통해 모집하면 1인당 25엔 정도가 들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모집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수입은 모집된 여공 인원에 따라 정해졌으므로 그들은 빈곤가정을 돌며 온갖 감언이설로 여공을 모집했다. 하루 3엔의 임금이라거나 3년 일하면 300엔을 모을 수 있다거나 하는 식의 과대선전이었다. 사실 일본 내의 여공 모집에서도 모집인의 거짓말은 큰 문제가 되었고 『여공애사』라는 책에서도 모집인을 ‘거짓말에서 탄생한 인간’이라고 악평하고 있다. 노동자를 모집하면서 숙련공 최고임금 수준을 선전하는 행태는 1940년대 광부 모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접기
P. 115~116 커밍스(김주환 역, 1986)의 연구에 기초하여 당시의 조선 노동인구 이동상황을 보자. 조선인이 산업노동자가 되는 경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초까지 토지조사와 토지소유 집중에 의해 경작농지를 잃은 농민의 농지이탈이다. 1930년대에 일본이나 만주로 떠난 사람들의 대부분이 이러한 유형이었다. 예를 들면 고베시神戶市의 조사에 의하면 고베 거주 조선인의 약 90퍼센트는 농민출신이었다. 또 하나의 경로는 1937년 중일전쟁, 1938년 국가총동원령 이후 다양한 노무동원과 징용 등에 의해 이루어진 인구이동으로 여성과 아동을 포함한 대규모 인구가 일본으로 이주하게 된다. 1945년 시점에서 전 노동력의 32퍼센트가 조선인 노동력이었다. 1941년 통계에 의하면 당시 일본 거주 조선인은 140만 명이었는데, 그중 노동자가 77만 명(공사현장 22만 명, 공장노동 20.8만 명, 광산노동 9.4만 명), 나머지는 농업과 어업에 종사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5년간 다시 50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일본으로 이동했는데, 그 절반 이상은 탄광노동자였다. 당시의 갱도노동자의 60~70퍼센트가 조선인이었다고 한다. 1944년에 조선 총인구의 11.6퍼센트가 국외에 거주하고 있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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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박광준 (지은이)
1958년 통영에서 출생했다.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붓쿄佛教대학에서 페이비안사회주의사상 연구로 사회학박사 학위(1990)를 받았다. 12년간 신라대학교(전 부산여자대학교) 교수를 거쳐 2002년 이후 붓쿄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중국사회과학원 방문학자, (중국)시베이西北대학 객좌교수, (중국)옌볜延邊대학 대학원 객원교수, 그리고 동국대학교(서울) 객원교수를 역임했다.
영국을 중심으로 한 복지사상사를 연구했으나 2000년경부터 주로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사회정책(역사) 비교연구, 그리고 불교사상, 유교와 법가 등 동양사상을 복지사상과 접목시키는 연구를 주된 관심사로 삼고 있다.
지금의 연구과제는 개항 이후 대한민국 건국까지의 빈곤정책 역사인데, 특히 빈곤과 실업으로 인한 대규모 인구이동에 관심이 많고, 이 책도 그 일환이다.
취미는 사진, 바둑 등이며 특히 동아시아의 노거수老巨樹를 찾아보고 사진에 담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은퇴 후에는 제주도에서 살려고 한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취미는 사진, 바둑 등이며 특히 동아시아의 노거수老巨樹를 찾아보고 사진에 담는 일을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은퇴 후에는 제주도에서 살려고 한다.
대표적인 저술로는,
『사회복지의 사상과 역사』(양서원, 2002),
『붓다의 삶과 사회복지』(한길사, 2010. 청호불교문화상학술상. 문화관광부 우수학술도서),
『한국사회복지역사론』(양서원, 2013),
『조선왕조의 빈곤정책: 중국‧일본과 어떻게 달랐나?』(문사철, 2018. 2019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초기불교: 붓다의 근본가르침과 네 가지 쟁점』(민족사, 2020. 2021년 세종도서) 등이 있다.
일본에서 출간된 것으로는
『社会福祉の思想と歴史: 魔女裁判から福祉国家の成立まで』(ミネルヴァ書房, 2004),
『老いる東アジアへの取り組み』(九州大学出版会, 2006. 共著),
『ブッダの福祉思想』(法蔵館, 2013. 붓쿄대학학술상),
『朝鮮王朝の貧困政策: 日中韓比較研究に視点から』(明石書店, 2020. 사회정책학회학술상)이 있다.
중국에서 출간된 것으로는
『東亜:人口少子高齢化与経済社会可持続発展』(社会科学文献出版社, 北京, 2012. 共著),
『中日韓人口老齢化与老年人問題』(社会科学文献出版社, 北京, 2014. 共著),
「東亜地区社会保障比較研究的意義和課題: 有関養老保険的問題」(『社会保障研究』 2005. 12.
中国人民大学),
「公共年金制度建立的国家間学習: 以東亜為例」(『社会保障研究』 2009. 3. 中国人民大学)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여자정신대, 그 기억과 진실>,<초기불교>,<조선왕조의 빈곤정책> … 총 1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후지코시에 동원되었던 전라북도대 100명은 1945년 10월 16일 도야마 공장을 출발하여 하카타를 거쳐 1945년 10월 24일 군산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에 진주한 연합군의 사진집에 하카타항에서 귀국선을 타기 전 대원들의 얼굴과 ‘귀환 전라북도여자근로정신대’라는 깃발이 뚜렷이 담겨 있다. 후지코시 원고 S씨는 사진 속에 자신이 나와 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과거사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여자정신대에 관한 우리 사회의 오해부터 이를 둘러싼 학술적인 논쟁까지―
정신대는 군위안부가 아니며,
정신대 모집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동원 규모는 약 2000명, 최대 4000명 정도였다
조선여자정신대의 오해와 진실
1945년 이른 봄에 12세의 나이로 여자정신대로서는 마지막으로 일본에 동원된 사람이 지금 생존해 있다면 88세가 된다. 이들이 여자정신대 최저연령이므로, 대원 중 많은 분들은 고령 등으로 이미 사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적지 않은 정신대원들이 생존해 있다.
여자정신대원들의 증언은 어느 하나 가볍게 여겨질 수 없다. ‘휴일에는 도야마 시내에 나가서 죽을 사먹기도 했다’는 어느 대원의 증언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해방 직전에는 배급제가 철저히 시행되고 있었고 식당영업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시기였다. 그런데 당시 도야마현 경찰기록을 검토해보면 그 증언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도야마현의 배급량이 겨우 아사를 면할 수준까지 내려갔을 때, 노동자에 한해 최소한의 영양을 보충시키려고 죽을 만들어 염가로 판매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1944년 7월부터 시작된 사업이었다. 죽의 기준은 ‘쌀 0.3홉에 물과 야채를 넣고 끓여서 2.5홉으로 불린 다음, 그 중간에 나무막대를 꽂아서 막대가 넘어지지 않을 정도가 된 상태.’ 조선정신대원 중에는 1944년 7월부터 약 1년 동안, 휴일이 되면 도야마 시내로 나가 그 죽 한 그릇으로 그동안 주렸던 배를 채우는 소녀들이 있었던 것이다.
저자 박광준은 동아시아 비교사회정책 혹은 비교사회정책사를 연구해왔다. 일제통치하의 빈곤문제와 빈곤정책을 규명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법에 의한 동원정책이 시작된 1939년을 전후로 한 디아스포라 경험자의 구술자료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정신대 증언에 대해 우리 사회에 알릴 필요를 느꼈다. 특히 후지코시 소송 자료를 검토하면서 원고 측이 피해보상 요구의 근거로서 제시한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 항목 리스트’를 접하면서 그 요구사항들이 예컨대 정부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구술자료에 나타난 여자정신대의 실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육성을 어떤 형태로든 연구자로서 ‘설명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책은 시작되었다.
기억의 정치화, ‘만들어진’ 역사
오해 1. 정신대란 곧 군위안부다?
진실 1. 연구자에 관한 한,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난폭한 논의 문화가 정작 당사자인 그들을 침묵시키고 있다.
오해 2. 정신대 모집이 군위안부 동원의 수단이었다?
진실 2. 정신대로 동원되었다가 그 후 위안부가 되었다는 피해자 증언이 4명 있다. 이를 근거로 ‘(관이) 군위안부를 동원할 때 여자정신대라고 선전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민간업자나 인신매매 관계자가 군위안부 모집을 여자정신대 모집이라고 속여서 동원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해 3. 조선여성 강제동원 20만 명설로 보건대, 여자정신대 동원 규모가 그러하다?
진실 3. 정신대와 군위안부를 혼동함으로써 생긴 오해다. 동원 규모는 약 2000명, 최대 4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 책의 주제는 일제식민지하인 1943년 봄부터 해방 때까지 약 2년 반 동안 일본 군수공장으로 노무동원되었던 ‘조선여자근로정신대’다. 여자정신대의 결성과 동원 과정, 일본 군수공장에서의 생활과 노동, 귀국과정에 관한 전반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명확히 하고, 그에 관련된 의문들을 풀어내고자 했다. 한국정부와 연구자들이 수집 작성해온 정신대원들의 구술자료, 그리고 정신대 소송에 제출된 진술서를 가장 중요한 사료로 삼아 가능한 한 세밀하게 기술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그 시절 여자정신대와 관련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또 그들의 구술 내용은 왜 그렇게 되어 있는가를 규명했다. 따로 제7장에서는 여자정신대가 시행된 근거, 총독부의 행정행위로서 시행되었는가, 아니면 정신대령이라는 칙령에 근거하여 시행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학문적 논점들을 짚었다.
‘식민지를 도외시한 식민지 논의’를 거듭해온 결과, 구술자료에 나타난 실태와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강고한 ‘상식’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정신대에 관한 우리 사회의 ‘만들어진’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조각조각의 수많은 사료와 당사자들의 소중한 목소리에 숨을 불어넣어 역사에 등장시키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여자정신대에 관한 이해가 깊어지고, 나아가 일제하 노무동원 전반에 관한 시야가 보다 입체적이 되기를 기대한다.
여자정신대와 노무동원 전반에 대한 입체적 조망
역사적 사실은 그 시대를 체험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과 다를 수 있으며, 널리 공유된 집합적 기억collective memory도 진실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 기억들이 집적되어 체계화된 집합적 기억도 존재하며 그것이 다음세대로 전수된다. 정신대에 관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집합적 기억도 마찬가지다. 특기할 점은 정신대 문제에 관한 한국사회의 집합적 기억은, 그것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왔다고 하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확산되어왔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정부조사자료집에 실려 있는 23명의 구술자료를 비롯하여 개인 연구자들의 저술, 그리고 조선정신대가 일본정부 혹은 기업을 상대로 일본재판소에 제소한 4건의 소송에서 각 원고들이 제출한 진술서 등등 60여 건에 달하는 증언을 가능한 한 모두 활용했다. 또한 여자정신대 동원에 관여했던 당시 조선인 교사 1명과 일본인 교사 수 명의 증언, 그리고 정신대가 일했던 일본 사업장 내 청년학교의 관계자나 교사, 기숙사 관계자 등의 증언도 있다. 일본여자정신대 혹은 일본학도대가 남긴 문집 속의 조선정신대에 관한 내용도 활용했다. 정신대령을 비롯한 중요한 법령자료, 정신대를 받아들인 기업에 대한 노무관리지침, 일본 공장법의 여자노동자 보호규정, 총동원법 노무동원자에 대한 원호사업 요강, 그리고 각 기업의 사사, 해당 지역 경찰서사 등도 포함했다.
일찍이 니체는 사물을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 이 세 가지를 바르게 가르치며 그 실천 사례를 몸소 보여주는 교육자야말로 사회의 존재이유라고 역설했다. 보는 법을 배우기 위한 출발점은 관찰 대상을 오랫동안 응시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 그때야말로 ‘깊은 의구심’을 가지게 되고, 즉각적 반응을 억제할 수 있게 된다. 여자정신대라는 주제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만큼 저자 박광준은 가능한 한 사료의 출처를 명확히 밝힌 세세한 자료 제공과 함께 꼼꼼한 해석과 신중한 관찰로 여자정신대 문제와 관련된 당시 조선과 일본의 사회제도와 사회문화를 좀더 정확하고 다각도로 전하고자 했다. 접기
최근작 : <여자정신대, 그 기억과 진실>,<초기불교>,<조선왕조의 빈곤정책> … 총 11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후지코시에 동원되었던 전라북도대 100명은 1945년 10월 16일 도야마 공장을 출발하여 하카타를 거쳐 1945년 10월 24일 군산에 도착했다. 당시 일본에 진주한 연합군의 사진집에 하카타항에서 귀국선을 타기 전 대원들의 얼굴과 ‘귀환 전라북도여자근로정신대’라는 깃발이 뚜렷이 담겨 있다. 후지코시 원고 S씨는 사진 속에 자신이 나와 있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과거사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여자정신대에 관한 우리 사회의 오해부터 이를 둘러싼 학술적인 논쟁까지―
정신대는 군위안부가 아니며,
정신대 모집은 공개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동원 규모는 약 2000명, 최대 4000명 정도였다
조선여자정신대의 오해와 진실
1945년 이른 봄에 12세의 나이로 여자정신대로서는 마지막으로 일본에 동원된 사람이 지금 생존해 있다면 88세가 된다. 이들이 여자정신대 최저연령이므로, 대원 중 많은 분들은 고령 등으로 이미 사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또한 적지 않은 정신대원들이 생존해 있다.
여자정신대원들의 증언은 어느 하나 가볍게 여겨질 수 없다. ‘휴일에는 도야마 시내에 나가서 죽을 사먹기도 했다’는 어느 대원의 증언은 어떻게 읽어야 할까. 해방 직전에는 배급제가 철저히 시행되고 있었고 식당영업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시기였다. 그런데 당시 도야마현 경찰기록을 검토해보면 그 증언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도야마현의 배급량이 겨우 아사를 면할 수준까지 내려갔을 때, 노동자에 한해 최소한의 영양을 보충시키려고 죽을 만들어 염가로 판매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1944년 7월부터 시작된 사업이었다. 죽의 기준은 ‘쌀 0.3홉에 물과 야채를 넣고 끓여서 2.5홉으로 불린 다음, 그 중간에 나무막대를 꽂아서 막대가 넘어지지 않을 정도가 된 상태.’ 조선정신대원 중에는 1944년 7월부터 약 1년 동안, 휴일이 되면 도야마 시내로 나가 그 죽 한 그릇으로 그동안 주렸던 배를 채우는 소녀들이 있었던 것이다.
저자 박광준은 동아시아 비교사회정책 혹은 비교사회정책사를 연구해왔다. 일제통치하의 빈곤문제와 빈곤정책을 규명하기 위해 국가총동원법에 의한 동원정책이 시작된 1939년을 전후로 한 디아스포라 경험자의 구술자료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면서 정신대 증언에 대해 우리 사회에 알릴 필요를 느꼈다. 특히 후지코시 소송 자료를 검토하면서 원고 측이 피해보상 요구의 근거로서 제시한 ‘강제동원으로 인한 피해 항목 리스트’를 접하면서 그 요구사항들이 예컨대 정부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구술자료에 나타난 여자정신대의 실상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의 육성을 어떤 형태로든 연구자로서 ‘설명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 책은 시작되었다.
기억의 정치화, ‘만들어진’ 역사
오해 1. 정신대란 곧 군위안부다?
진실 1. 연구자에 관한 한, 이렇게 오해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난폭한 논의 문화가 정작 당사자인 그들을 침묵시키고 있다.
오해 2. 정신대 모집이 군위안부 동원의 수단이었다?
진실 2. 정신대로 동원되었다가 그 후 위안부가 되었다는 피해자 증언이 4명 있다. 이를 근거로 ‘(관이) 군위안부를 동원할 때 여자정신대라고 선전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 민간업자나 인신매매 관계자가 군위안부 모집을 여자정신대 모집이라고 속여서 동원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해 3. 조선여성 강제동원 20만 명설로 보건대, 여자정신대 동원 규모가 그러하다?
진실 3. 정신대와 군위안부를 혼동함으로써 생긴 오해다. 동원 규모는 약 2000명, 최대 4000명 정도로 추정된다.
이 책의 주제는 일제식민지하인 1943년 봄부터 해방 때까지 약 2년 반 동안 일본 군수공장으로 노무동원되었던 ‘조선여자근로정신대’다. 여자정신대의 결성과 동원 과정, 일본 군수공장에서의 생활과 노동, 귀국과정에 관한 전반적인 역사적 사실들을 명확히 하고, 그에 관련된 의문들을 풀어내고자 했다. 한국정부와 연구자들이 수집 작성해온 정신대원들의 구술자료, 그리고 정신대 소송에 제출된 진술서를 가장 중요한 사료로 삼아 가능한 한 세밀하게 기술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었다. 또한 그 시절 여자정신대와 관련하여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또 그들의 구술 내용은 왜 그렇게 되어 있는가를 규명했다. 따로 제7장에서는 여자정신대가 시행된 근거, 총독부의 행정행위로서 시행되었는가, 아니면 정신대령이라는 칙령에 근거하여 시행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싼 학문적 논점들을 짚었다.
‘식민지를 도외시한 식민지 논의’를 거듭해온 결과, 구술자료에 나타난 실태와 우리 사회에 퍼져 있는 강고한 ‘상식’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있다. 정신대에 관한 우리 사회의 ‘만들어진’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조각조각의 수많은 사료와 당사자들의 소중한 목소리에 숨을 불어넣어 역사에 등장시키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이 책으로 인해 여자정신대에 관한 이해가 깊어지고, 나아가 일제하 노무동원 전반에 관한 시야가 보다 입체적이 되기를 기대한다.
여자정신대와 노무동원 전반에 대한 입체적 조망
역사적 사실은 그 시대를 체험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억과 다를 수 있으며, 널리 공유된 집합적 기억collective memory도 진실이 아닐 수 있다. 하지만 개인적 기억들이 집적되어 체계화된 집합적 기억도 존재하며 그것이 다음세대로 전수된다. 정신대에 관한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집합적 기억도 마찬가지다. 특기할 점은 정신대 문제에 관한 한국사회의 집합적 기억은, 그것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왔다고 하기보다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져 확산되어왔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는 정부조사자료집에 실려 있는 23명의 구술자료를 비롯하여 개인 연구자들의 저술, 그리고 조선정신대가 일본정부 혹은 기업을 상대로 일본재판소에 제소한 4건의 소송에서 각 원고들이 제출한 진술서 등등 60여 건에 달하는 증언을 가능한 한 모두 활용했다. 또한 여자정신대 동원에 관여했던 당시 조선인 교사 1명과 일본인 교사 수 명의 증언, 그리고 정신대가 일했던 일본 사업장 내 청년학교의 관계자나 교사, 기숙사 관계자 등의 증언도 있다. 일본여자정신대 혹은 일본학도대가 남긴 문집 속의 조선정신대에 관한 내용도 활용했다. 정신대령을 비롯한 중요한 법령자료, 정신대를 받아들인 기업에 대한 노무관리지침, 일본 공장법의 여자노동자 보호규정, 총동원법 노무동원자에 대한 원호사업 요강, 그리고 각 기업의 사사, 해당 지역 경찰서사 등도 포함했다.
일찍이 니체는 사물을 보는 법, 생각하는 법, 말하고 쓰는 법, 이 세 가지를 바르게 가르치며 그 실천 사례를 몸소 보여주는 교육자야말로 사회의 존재이유라고 역설했다. 보는 법을 배우기 위한 출발점은 관찰 대상을 오랫동안 응시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 그때야말로 ‘깊은 의구심’을 가지게 되고, 즉각적 반응을 억제할 수 있게 된다. 여자정신대라는 주제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만큼 저자 박광준은 가능한 한 사료의 출처를 명확히 밝힌 세세한 자료 제공과 함께 꼼꼼한 해석과 신중한 관찰로 여자정신대 문제와 관련된 당시 조선과 일본의 사회제도와 사회문화를 좀더 정확하고 다각도로 전하고자 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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