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광복 후의 지질학계
(1) 학회의 창립 과정과 학회 활동
해방 당시에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인 지질학자로는 단지 10명에 지나지않으나, 이들은 후에 우리나라 지질학계의 선구자로서 대학, 지질조사소와 광업회사에서 많은 공헌을 하게 된다. 1946년에 국내 최초로 서울대학교에 지질학과가설립되면서, 손치무가 유일한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었으나, 1946년에 최유구와 홍만섭이 강사로, 11월에 김옥준이 전임강사로 임명되었다. 조선총독부 지질조사소는 해방 후에 미군정청에서 1945년 11월에 상무부 산하의 지질광산연구소로 재편하여 박동길이 초대 소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정창희 지질과장과 주수달 광상과장의 주도하에 지질조사, 광상조사와 탄전 조사가 수행되었다. 김한태, 최유구, 홍만섭과 정병존은 광산회사에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지질학자들이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가운데 지질학회를 창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학계의 가장 원로인 박동길 지질광산연구소장이 1946년 9월에 발기인 총회를 소집하여 지질학회의 창립을 협의하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학자들로는 박동길 소장을 비롯하여, 김한태, 최유구, 김종원, 손치무,
홍만섭, 김옥준, 정병존과 정창희이며, 학생 회원으로는 당시에 지질학과 3학년 학생이었던 정봉일, 이흥원과 노수원이 참석하였다. 이 모임에서 지질학회를 창립하기로 하고, 그 명칭을 대한지질학회로 정하였으며, 박동길 소장을 초대 회장으로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발기인 총회의 합의에 따라서, 경성대학 교수들을 중심으로 하여 학회 창립을위한 준비 작업이 진행되어 오다가, 1947년 4월 10일에 창립총회를 하게 되었다.
창립총회에서는 학회의 회칙을 채택하고, 회칙에 따라 회장에 박동길, 부회장에김한태, 간사에 정창희를 선출하였으며, 봄과 가을의 년 2회의 총회를 개최하여학회 발전과 장래의 계획에 대해 협의하기로 결정하였다. 총회에 참석한 회원은박동길, 김종원, 김한태, 최유구, 손치무, 홍만섭, 김옥준, 전병존과 정창희이며, 학생회원으로는 당시에 경성대학 지질학과에 재학 중이던 정봉일, 이흥원, 노수원,
안재학, 이정환, 이대성, 이상만, 최승일과 구춘회 등 9명이다.
대한지질학회가 창립된 1947년 4월부터 한국동란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학회의초창기에는 정회원의 수가 9명에 지나지 않아 학술발표회나 학회지 발간을 하지못하였으며, 1년에 두 번, 봄과 가을에 야외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회원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학회 발전에 대한 협의를 하였다. 제 2회 총회는 1947년 9월에, 제3
회 총회는 1949년 3월에 야외에서 가졌으며, 1950년 초 까지 7회에 걸쳐서 총회가개최되었으나 임원의 개선은 없었다.
지질학회 창립 이후의 초기의 학회 활동은 광복 후의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혼란한 사회상과 학회 회원의 수의 빈곤으로 인하여 괄목할 만한 활동은 없었다.
그러나 지질학회에서는 이러한 어수선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일반 대중을 위한계몽강연회를 계획하고, 또한 학회 모임이 있을 때 마다 학회지 발간의 필요성이논의되었지만, 당시의 주변 환경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지 질 과 학 13
(2) 교육기관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에 남한은 미군정치하에 있었으며,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으로 개명하고 교수진도 한국 사람으로 구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경성제국대학의 김종원(金鍾遠) 교수와 함께 새로이 손치무(孫致武)가 조교수로 임명되었다(1945. 11). 김종원 교수는 1944년 말, 즉 해방되기 직전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임명되어 지질학과의 설립을 준비하다가 해방을 맞이하여 경성대학 이공학부 교수로 이공학부 학생들에게 지질학을 강의하였다. 김종원 교수는 1947년 1월에 동두천 부근의 탄광을 조사하고 서울로 돌아온 후에 발병을 하여 3일 만에 세상을떠나셨다. 그토록 생전에 지질학과의 설립을 위하여 노력한 결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에 지질학과가 설립되었지만, 그는 지질학과 교수로의 임명 수속 중에작고한 것이다. 광복 후부터 1950년 한국동란 전까지 사이에 경성대학을 졸업한신병우(申炳雨)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노수원(盧守源), 정봉일(鄭鳳日)이 전임강사로 임명되었다. 전임강사로 재직 중이던 김옥준(金玉準)은 1948년에 조교수로승진하였으며, 1949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1953년에 의원면직 되었다.
지질학과는 교과과정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시간 강사의 도움이필요하게 되었으며, 1950년 한국동란 이전에는 북해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광업진흥공사 상무이사로 근무하던 최유구(崔裕久)와 동북제국대학을 졸업하고 삼한공사에 근무하던 홍만섭(洪萬燮)이 층서학과 암석학 강사로 수고를 하였다.
지질학과의 설립 후 초창기 (1946년-1948년)의 학생들로는 일본의 제국대학 지질학과 재학생 1명, 광산전문학교 채광과 졸업생 5명, 농림전문학교 졸업생 3명,
문리대 예과 출신 입학자 약간명과 기타 2명 (이흥원과 노수원)이다. 서울대학교에 지질학과가 신설된 1946년의 첫 번째 학생으로는 이흥원, 정봉일과 노수원이3
학년에 편입하였다. 같은 해에 평양대동공업전문학교 채광야금학과를 졸업한 후에 만주에서 활동하던 이정환,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졸업한 이대성, 수원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한 이상만, 최승일, 구춘회가 2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48년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전문부 채광학과를 졸업한 김원조와 김윤덕이 2학년으로, 문리과대학 예과를 수료한 이인건, 최이순, 문일산, 김서운, 이국용 등이 1학년으로 입학하였다. 이와 같이 1948년이 되어서야 지질학과는 처음으로 전 학년에 학생이재학하게 된다.
이 기간 중에는 교수, 시간 강사들과 학생들 모두가 새로이 학과를 출범하는
기쁨과 사명감에서 합심하여 학과의 발전에 진력하였다. 학과 내에는 광물, 암석과 화석의 표품들이 없어서 남산에 있는 국립과학관에 가서 암석과 광물의 표품으로 공부를 하였으며, 한강에 가서 자갈을 깨어 암석의 공부와 박편 제작을 하여 현미경 관찰도 하였다. 또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야외 지질 답사를 갔으며,
야외에서 표품들을 채집하고 수집하여 표본실을 만드는데 주력하였다. 손치무 교수는 학생들의 야외 조사 시에 지질경계선에 대한 철저한 추적 조사를 강조하였다. 특히 손치무 교수의 지도를 받은 학생들은 지금도 “百聞而不如一見 百見而不如一打”라는 야외조사 시의 좌우명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손치무 교수는학생들의 졸업논문을 지도하기 위하여 1949년에 문경탄전 지역으로 출장을 가서저녁 식사 시간에 광산 내의 숙소를 비운 사이에 공비들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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