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5

한국문학사 | 김윤식, 김현 1996

한국문학사 | 김윤식, 김현 | 알라딘


한국문학사
김윤식,김현 (지은이)민음사1996




목차


1장 방법론 비판
2장 근대의식의 성장
3장 계몽주의와 민족주의의 시대
4장 개인과 민족의 발견
5장 민족의 재편성과 국가의 발견


책속에서


이 책은 과거의 문학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지만, 이 책이 충격하기를 요망하는 것은 오히려 오늘날의 문학이다. 문학에 대한 경멸과 白手에 대한 조소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어져 가고 있어 보이는 지금, 인간 정신의 가장 치열한 작업장인 문학을 지킨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더할 수 없이 귀중한 각성의 몸부림이다. 문학이 없는 시대는 정신이 죽은 시대이다. 문학은 한 민족이 그곳을 통해 그들의 아픔을 재확인하는, 언제나 터져 있는 상처와도 같은 것이다.-8쪽 접기 - mizuaki
도대체 문학사란 무엇일까?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장 낮은 차원의 기반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주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문학사란 과거의 집적물에 대한 사적 기록이다. 물론 이때의 집적물이란 문학적 집적물을 의미한다. 과거의 문학적 집적물의 사적 기록이라는 문학사의 정의는, 그렇지만 몇 항목의 유보 사항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맨 처음 주의해야 할 것은 문학사는 역사와는 엄연히 다른 감정적 차원에서 서술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역사는 감동의 세계를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사실을 체계적으로 서술한다. 그러나 문학적 집적물은 반드시 감동과 향유라는 정서적 반응을 요구한다. 정서적 차원이 배제된 문학사란 문서 기록이나 고증의 차원으로 떨어져 버린다. 그것은 박사 학위 취득자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수는 있지만 문학사가의 흥미를 끌 수는 없다. 문학적 집적물은 그것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타인에게 행하는 담론의 형태를 띠며, 그것은 반드시 상대방의 정서적 반응을 요구한다. (아래에 계속)-14-15쪽 접기 - mizuaki
(위에서 계속) 물론 역사적 사실도 기호론적인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정서적 반응이 요구되는 기호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지만 담론의 형태로 주어지는 역사적 사실이란 집단적 행위의 소산이다. 헤겔에게서 절대 정신의 구현이라는 정서적 반응을 얻은 프랑스 대혁명도 일종의 집단적 행위이다.
문학적 집적물이 정서적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진술은 동시에 그것이 개인적 산물이라는 전제를 갖고 있다. 문학 작품에 개인의 서명이 붙게 된 이후의 문학과 그 이전의 문학의 차이는 그 개인성에 있다. 그러나 그 개인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한 시대의 의미를 어떤 방식으로든지 드러내고 있는 대표자로서의 개인un individu comme le représentant d'un époque이다. 문학사가 역사와 다르게 예외적 개인l'individu exceptionnel에 많은 관심을 쏟는 것도 이 이유에서이다.
-김현-14-15쪽 접기 - mizuaki
조선 사회를 급진적인 이념에 의해서이든, 주자주의적 이념에 의해서이든, 어떠한 형태로든지 개혁하려고 한 노력이 외세, 특히 일본의 개입에 의해 무참하게 실패해 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갑오경장(1894) 이후 사회적 개혁은 꾸준히 계속된다. 정치적 경제적 개혁이 일본 군국주의의 침투를 더욱 평이하게 하기 위해서 조직적으로 행해진 것 때문에 사회적 개혁 역시 대중의 광범위한 반발을 사게 되는 것이지만, 1894년의 신분 제도 철폐와 사회적 악습 혁파는 제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띤다. 제도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띤다는 진술은 그것이 정치, 군사적 개혁과는 다르게 일제 치하에서도 계속되었고, 그것이 이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개혁 중에서 중요한 것은 인신 매매를 금한 것, 고문이나 연좌법을 폐지한 것, 남녀의 조혼을 금한 것, 과부의 재가를 개인 의사에 맡긴 것 등이다. 그것들은 조선조 후기에서 그 흔적을 드러낸 가족 제도의 모순점들이 1894년에 제도적으로 극복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뜻한다. (아래에 계속)-116-117쪽 접기 - mizuaki
(위에서 계속) 그 가족 제도의 붕괴를 과부의 재가와 조혼 금지 외에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단발령(1895)이다. 단발령에 대한 유림의 완고한 항거는 일제에 대한 항거 이상의 의미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존립을 가능케 한 이념, 즉 주자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타격으로 유림들에게 이해된 것이다.
-김현-116-117쪽 접기 - mizuaki
개화기 문체는 결국 국한문체로 확립되어 갔는데, 그 중요한 이유가 일본 문체의 영향이다.
-김윤식-143쪽 - mizuaki
다만 형식의 특색은 영어를 많이 섞고 서양 유명한 사람의 이름과 말을 이용하여 무슨 뜻인지 잘 알지도 못할 말을 길게 함이었다. 형식의 연설이나 글은 서양 것을 직역한 것 같았다. 형식의 말을 덛건대 이러한 말이나 글이 아니고는 깊고 자세한 사상을 발표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자기의 의견을 쫓지 아니함은 그네가 자기의 사상을 깨달을 힘이 없음이라 하여 혼자 분개하여 한다.

이 부분은 초기 이광수의 언어관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그는 여기에서 언어란 그것이 표현하려고 하는 것과 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진술한다. 그의 새 생각은 새 표현을 요규한다. 그 표현은 구투로 행해질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문장은 단순한 언문주종이 아니라, 서양 언어의 직역투의 문장이다. 그 직역투의 생경한 문장은 그의 개화 의식의 생경함에 적절하게 대응한다. 그의 직역투의 문장과 반주자주의적 이념은 표리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아래에 계속)-206-207쪽 접기 - mizuaki
(위에서 계속) 그의 직역투의 문장에서 얻어진 문장상의 효과는 무엇일까. 제일 두드러진 것은 사고하는 주체의 객관화이다. 주체가 객관화된다는 것은 반성적 사고가 행해진다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의문을 가능케 하며 추론을 가능케 한다. 「무정」중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박진력 있게 제시되는 대목은 물론 이러한 반성이 행해지는 대목들이다. 그 외에 사건만을 제시하거나, 작가가 개입하거나, 공상을 할 때에는 예의 구투 문장이 그대로 드러난다.
-김윤식-206-207쪽 접기 - mizuaki
그(인용자주-염상섭)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은 주제의 빈곤인데, 그것은 그가 지나치게 평범한 소재를 다루고 있어서 소위 드라마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일종의 피상적 단견이다. 그의 작품 속에 그가 아무런 해석도 가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평범하게 내보여 주고 있는 일상적 인물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인물들이 평범하고 지루한 인물들이 아니라 한국 당대의 상황을 가장 실감 있게 살고 있는 인물들이라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그의 인물들의 드라마는 초기의 몇 개의 작품을 빼면 대부분 돈과의 격투라는 가장 근대적인 드라마이다. 돈을 에워싼 여러 종류의 인물들의 애환을 그림으로써 그는 식민지 치하에서부터 한국 전쟁에 이르는 기간의 한국 사회를 그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묘사하여 형상화해 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아래에 계속)-251-252쪽 접기 - mizuaki
(위에서 계속) 그의 소설은 주제의 빈곤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어떤 작가의 어떤 소설들보다도 강렬하게 일관된 하나의 주제, 돈과 인간과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어 그것을 통해 독자들이 인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욕망이라는 괴물과 그 괴물의 분장을 돕는 상황을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의 문학은 그런 의미에서 부르주아지의 문학이라고 지칭될 수 있다.
-김윤식-251-252쪽 접기 - mizuaki



저자 및 역자소개
김윤식 (지은이)


1936년 경남 진영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부터 2001년 8월까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2001년 11월부터 명예교수를 지냈다. 2018년 10월 작고하였다.
지은 책으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한국문학사』(공저) 『한국근대문학사상비판』 『한국근대문학사상사』 『한국 현대 현실주의 소설 연구』 『한국소설사』(공저) 『일제 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더보기

수상 : 2008년 청마문학상(통영시문학상), 1994년 요산김정한문학상, 1993년 편운문학상, 1991년 팔봉비평문학상
최근작 :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한국문학사의 두 공간, 세 가지 글쓰기>,<김동인 작품집> … 총 222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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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학문적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책인 것 같습니다. 한국근대문학사나 한국근현대문학사라고 하지 않고 그냥 <한국문학사>라고 한 점도 도특합니다.
소수정예 2018-10-03 공감 (2) 댓글 (0)

마이리뷰


새로운 한국근대문학사의 정초



개정판이 나오기 전의 판본이라 새까맣게 한문으로 뒤덮혀있는 책을 아직도 가지고 있다. 73년에 나온 초판을 수십 년째 그대로 찍어내다가 그나마 96년에 한글개정판으로 바꿨다니 늦은 감이 있으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한국문학사'가 한문으로 뒤덮혀있는 것을 중국인들이 보면 뭐라고 할런지, 아마 73년의 양김씨는 고민해보지 않았을 줄로 믿는다.

어쨌거나 한국 근현대(특히 근대)문학을 당시로서는 상당히 새로운 시각으로 다룬 이 책은 국문학과 학생들에게는 거의 필독서로 자리잡고 있다. 그 내용과 시각의 효용성에 앞서 하나의 고전으로 자리잡고 있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문학을 사회와 반드시 연관시켜 설명하는 방식(매 장의 첫 번째 절은 항상 당시 사회상을 설명하는 데 할애되고 있다. 이것이 끝나고 나서야 그 시대의 문학에 대한 서술이 이어진다), 한국 근대문학을 17세기까지 끌어올리고 있는 관점, 당시로서는 대담하게도 일제시대의 좌익계 문인들을 다루고 있는 점 등은 그 자체로 새로운 문학사 서술 방법론으로 많은 파장을 일으켰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상식이 된 이러한 면면들을 상식이 되게끔 만든 일등공신이 바로 이 책이라고 하면 과장일까?

지금에 와서 보자면 30여년 전의 이 책은 전공자의 기초연구자료로서는 확실히 부족하다. 근대 이전의 문학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있지 않거니와(제목을 '한국문학사'라고 한 것은 큰 실수였다고 본다. 왜 '통사'라고 해야 비로소 고중세사가 포함되는 것인가?), 70년대 초반 이후의 문학에 대해서도 물론 일언반구가 있을 리 없다. 한문을 한글로 바꾼 것 외에는 이후 30년여년간 문학계의 흐름도, 연구성과가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다. 좌익계 문인, 월북문인은 물론 납북문인과 원래 고향이 북한이어서 북한에 남은 재북문인들에 대한 연구는 80년대 중반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건만. 여러 모로 이 책은 '과거의 명저, 전환점을 마련한 역저'로 평가되어야지, 지금도 변함없이 떠받들어야 할 기초자료로 오판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을 짚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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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2004-04-19 공감(18) 댓글(0)



나의 독서습관[2010/12/06]

나는 病的으로 冊을 읽는 것 같다..그리고 병적으로 책을 사는 것 같다.. 도대체..읽지도 않을 책을 우선 마음에 든다고하여..가격불문하고 구입한다..한 권의 든든한 책을 구입하면..이 세상의 귀한 보물을 가만히 얻은 것 같아..기분이 퍽 고무된고..행복에 겨워..하루저녁동안은 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된 기분으로 행복감을 만끽한다..방안에는 온통..주워오거나..서점에서 사 온 책으로 즐비하다..



창고처럼..방바닥에서 부터..천정까지..책의 전시장인 양 온통 책들이 온 방을 차지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책을 수입하지 말아야지하고..마음을 먹어보지만..하루가 멀다하고..기회만 오면 또 서점을로 슬그머니 찾아간다..서점..책방에 들리었다하면..나올 때는 작은 책 한두권이 쥐어져 있다..참으로 병적이다..어찌할 수 없는 나의 습벽이여.......!!

중국의 고전을 읽다가..무지막지 감동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 되다가..겨우 살아 돌아오면 또다시 인도의 불경을 들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음미하며 향기에 취하며..현실을 잊고 숲 속을 방랑하며 즐거운 산책을 한다..감미롭기도 하고..청정하기도 하다..며칠 간 불경의 세계를 헤매다가 지치면..이젠..현실세계로 돌아 온다..전쟁과 역사 그리고 투쟁과 경쟁..사랑과 증오의 세계에서 무수한 총소리와 권모술수를 만끽한다. 등골이 싸늘하다..



법과 사회와 경제의 밑바닥에서 헤엄쳐서 철학의 언덕으로 올라간다.. 깊고 아득하고..포근한 세계가 저 멀리 지평선 위로 무지개처럼..존재와 가치에 대한 형이상학이 떠 오른다..이해하고 몰두하기엔 너무 어렵다..내 머리로는 더이상..깊이 파고들 수가 없다..물끄러미 바라보다..이젠..싫증이 돋아..쉽고 재미있고 간편한 문학의 마을에 들어선다..


요즘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생애와 사상 그의 작품에 심취되어 있다.

이론서보다는 단 한편의 소설이라도 그 작가의 작품을 읽는 것이

그 작가를 사랑하는 지름길인 것 같다. 한 때는 아침 저녁의 짜투리

시간을 온통 지혜의 책인 동서 성인의 경전의 진미에 넋을 잃었다..

고전의 향기에, 책 속의 진미에 나의 인생이 녹아드는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흘러가면 무엇이 남을 것인가..

과연 나의 머리속엔 무엇이 남아있을 것인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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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산방 2010-12-17 공감(10) 댓글(1)


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mizuaki 2010-09-18 공감(1)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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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의 흐름

한국문학사

내용요약 :
1. 1930년대 작가들의 상반된 계보와 채만식과 이상 작품의 바탕을 이루는 세계관을 각각 서술하시오.
1930년대 작가들의 동향은 인간의 진보와 역사의 합목적성을 믿는 개방주의적 낙관주의와 인간에 대한 신뢰가 없으나 인간의 실존을 승인할 수 밖에 없는 폐쇄적 비관주의로 나타납니다. 식민지하에서 비순응적주의에 근간을 이루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개방주의적 낙관주의는 식민지 시대 속에서 역시 역사라는 것은 변화, 발전할 것이고 그러면 현재의 모순이 극복될 거라고 보고 폐쇄적 비관주의는 지금 현재 암울한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내면의 심리갈등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둘 다 식민지에 대한 편입은 아니고 극복, 부정적·소극적 저항을 갖고 있습니다.
채만식의 작품에서는 부정적 인물에 의해 긍정적 인물이 조롱의 대상이 된다. 표면적으로는 부정적 인물을 긍정하는 소리로 들리지만 그 내면엔 그 부정적 인물 자신을 비판하고 조소하고 있습니다. 그의 문장의 아이러니는 그가 부정적인 인간을 역설적으로 긍정적으로 보여주려고 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생겨납니다. 그의 아이러니는 강력한 비판 정신의 소산입니다.
가장 힘들여 비판하고 있는 것은 식민지 교육의 모순과 고리대금업·도박 같은 비정상적 자본이동의 현상입니다. 염상섭이 세대론적 입장에서 수직적으로 식민지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그는 수평적으로 그것을 비판합니다.
식민지 교육의 모순은 「탁류」, 「태평천하」,「레디 메이드 인생」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당시의 교육은 식민사회에 순응할 수 있는 기능공만을 길러내는 우민교육화입니다. 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정당하게 이해하고 그것의 해소를 위해 노력하는 思考인을 만드는 대신에 식민지 교육은 생각하지 않고 실기에만 전념하는 기능인들만을 만들어 냅니다. 「탁류」의

목차:
1. 1930년대 작가들의 상반된 계보와 채만식과 이상 작품의 바탕을 이루는 세계관을 각각 서술하시오.
2. 식민지 후기 시조부흥론과 정지용, 윤동주의 시적 특성을 개관하시오

3. 해방과 한국전쟁을 통한 민족 이동 및 문단 재편성의 과정을 서술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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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배우며 2009-12-27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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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한국시에 대하여



한 교외강좌에서 3주 연속으로 한국 현대시에 대한 강의를 맡게 됐다. 오늘이 첫날이었는데, 대략 '한국 현대시 개관'이란 제하의 강의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강좌이기 때문에(모두 여성이고 대부분이 주부) 가급적 평이해야 한다는 게 제1원칙이고, 웬만큼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게 제2원칙이다(요즘은 대학강의에서도 이런 원칙들이 요구되는 듯해서 유감스럽지만). 모두가 경청해주신 건 아니지만 고개를 끄덕이시는 분들이 더러 계셔서 보람이 없지는 않았다(요즘은 대학에서도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은 드물게 만난다).

강의자료로 쓴 것 중 일부는 이미 6년전에 써두고 강의했던 것이어서 이번이 말하자면 '재탕'이었는데, 그간에 늘어난 건 시에 대한 이해가 아니라 이래저래 순발력을 발휘하는 '능청'이 아닌가 싶다. 이전에 '기형도 시에 대한 편집증적 읽기, 분열증적 읽기'에 포함돼 있었던 간략한 현대시사를 조금 보충해가며 다시 올려놓는다. 이 또한 '재탕'일 텐데, '이미지-버전'이란 핑계가 없지는 않다(능청과 핑계가 어쩌면 나의 왼팔과 오른팔인가?). 읽기에/보기에 편하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대신에 군더더기말들을 더러 집어넣었다.

강의는 시 일반론에 대한 얘기로 시작해서 20세기 초반부터 최근에 이르는 한국시의 대표적 시인들을 거명하는 식이었는데, 여기서는 20세기 시사에 대한 간략한 리뷰만을 정리해둔다.















<황무지>(1922)의 시인이자, 아마도 가장 유명한 20세기 시인, T. S. 엘리엇은 시뿐만 아니라 시론에서도 정력적이었는데, 그가 유달리 강조한 것은 전통과 역사의식이었다(러시아에서 '토마스 엘리어트'의 두툼한 비평적 에세이 선집이 작년에 나왔었는데, 나는 그가 '티. 에스. 엘리엇'이란 걸 뒤늦게야 알았다. '토마스'란 이름이 너무 낯설었기에! 거기에 러시아어로 번역된 평문 '전통과 개인의 재능' 등이 포함돼 있었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책을 구입할 여유가 내겐 없었다. 참고로, 엘리엇은 우리 시단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외국 시인의 한 사람이다. 비록 요즘은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est month)'이란 <황무지>의 시구를 읊조리는 중고생들을 만나기가 아주 힘들 뿐더러 젊은 시인들조차도 '열심히' 읽는 것 같지 않지만).











모름지기 25세 이후에도 시를 쓰려는 자는 역사에 대한 '감'을 먼저 연마해야 한다는 것. 그가 말하는 역사는 단순한 시사(詩史)를 넘어서 종교사, 종교적/상징적 상상력의 역사에 걸쳐 있지만, 하여간에 시란 것이 젊은 날의 겉멋이나 치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줄곧 강조하였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김춘수는 (25세 이후에도?) 시론(詩論)을 갖고 있지 않은 시인은 천재이거나 아마추어라고 평했는데(<시의 위상>), 시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 혹은 관념(idea)이 없다면 일찌감치 시는 그만두는 것이 좋다는 뜻을 그의 주장은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참고로, 시작법이 아니라 작시법이 거의 부재하는 한국 현대시에서 '천재'가 나오기는 매우 힘들다. 그것이 우리의 '언어적 조건'이다. 그러니 '치기'나 '도취'로 시를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시론은 필수적이다. 새삼 확인해두자면, '시론'이란 시에 대한 로고스, 즉 논리를 갖추는 걸 말한다).

그런데, 시론이란 것이 모국어에 대한 감각과 시사(詩史)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 없이 가능하지 않다고 할 때, 모름지기 시인이라면 시의 전통과 역사적 전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에 대한 부단한 의식 속에서, 그것과 맞서며 아주 조금씩 전진해나갈 따름이다. 시에 대한 이러한 태도를 편집증적이라 부를 수 있을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인은 그 이전에 씌어진 모든 시를 다 읽고 나서야 거기에 한 문장, 혹은 한 글자 덧붙일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한 시의 역사를 재구성할 때, 20세기 한국시란 무엇이었나?(한국 현대시의 세 가지 원천으로 나는 민요, 한시, 그리고 번역시를 꼽는다. 김소월과 이육사는 각각 민요적 전통과 한시적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는 시인들이다. 이상은 많이 밝혀진 바이지만, '한국어'라는 자연어가 아닌 '기호'로 시를 썼던, 보다 정확하게는 문학행위를 했던 시인/작가이다) 20세기 초에 한국시의 기초를 이룬 시인들의 이름으로 김소월(혼의 시), 이육사(정신의 시), 이상(기교의 시) 등등의 계보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김윤식의 분류이다).





























하지만, 20세기를 통틀어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을 꼽으라면, 단연 시업(詩業) 60년을 넘긴 미당 서정주를 들 것이다(물론 미당에 버금가는 시인으로 백석을 꼽을 수 있겠지만, 그의 시업은 상대적으로 너무 짧았다. 때문에 백석은 '제도로서의 문학'과는 거의 무관한 시인이다. 물론 그의 계보를 따르는 시인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가령, <외롭고 높고 쓸쓸한>의 시인 안도현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의 정치적 과오 때문에 폄하되기도 하지만 그가 우리 부족시의 족장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이 '부족시'는 상대적으로 '국가'나 '민족'과는 무관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현역’을 자임하던 그의 시를 보라.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어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어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승달같이/ 아내 손톱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시를 못쓰날에 할망구 손톱 발톱 깎어주며 마음 달래는 일도 '이뿌게' 시로 만드는 그의 솜씨는 대가급이다. 그러나 서정주의 시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되어 있는, 체념적 달관 혹은 달관적 체념의 세계(비평가 김현은 서정주의 정신주의에 대해서 “그의 정신주의는 그가 그의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지 않는 데서 기인하는 태도의 희극”이라고 적은 바 있다. 김윤식/김현의 <한국문학사> 참조)는 이념(idea), 혹은 형이상(形而上)을 배제한 세계이다(“西으로 가는 달 같이는/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추천사(鞦韆詞)>는 구절에는 그의 체념적 달관이 집약되어 있다(참고로, 요즘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는 '친일파' 미당의 시들이 거의 빠져 있다고 한다. 문학 교과서에서 경우 명맥을 유지할 정도라고. 대개 학생들은 교과서에 실린 시들을 '부정적으로' 인지하곤 하므로, 역설적이지만 미당 시의 독자들에겐 유감스러운 일이 아니겠다. 학생들에게 미당의 시를 안 읽히는 방법은 교과서에서 빼는 게 아니라 너무 많이 집어넣어서 '물리도록' 혹은 '신물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이념-이후에 그는 “가난이란 한낱 襤樓에 지나지 않는다/.../ 靑山이 그 무릎 아래 芝蘭을 기르듯/ 우리는 우리 새끼들을 기를 수밖엔 없다”(<無等을 부며>)는 사실에 만족한다. 그것이 또한 달관적 체념의 세계이다). 참고로, 한국시에 형이상학적 깊이가 결여돼 있다는 비판은 김우창 교수의 평문 '한국시와 형이상'을 참조할 수 있다(<궁핍한 시대의 시인> 혹은 <김우창 전집1> 참조. 나는 이 절판된 전집에 재출간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기이하며 유감스럽다. 더불어 유감스러운 건 김화영 교수의 <미당 서정주의 시에 대하여>(민음사, 1984)도 절판된 채로 다시 구해보기 어렵게 된 것. 본격적인 시인론이자 시분석론인데 당시로서는 드문 시도였다).




















‘시인부락’의 동인으로 같이 활동했던('부락'은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천민집단'을 뜻하는 걸로 안다) 청마 유치환은 서정주와 달리 이념적 ‘깃발’을 표나게 내세운 바 있으나, 언어적 조탁에 있어서 그에 미치지 못했고, 한자어투로 이루어진 그의 남성적 어조는 계보를 얻지 못했다(청마를 가까이 한 이에 김춘수가 있지만, 김춘수의 여성적 세계는 유치환의 남성적 세계와 대조적이다. 김춘수 자신이 시인하는 바이지만, 그의 초기시는 서정주의 계보에 속한다). 그리고 그의 시업(詩業) 또한 너무 일찍 한국시사에서 단절되었다. 그리하여 멀리는 40년대부터, 한국시단은 미당과 그 일가(一家)에 의해 접수된다(이른바, '미당스 패밀리' 되시겠다. 문단 용어로는 '미당 사관학교'라 하고).



















한편으로, 한국시사에서 지나치게 과대평가된 사례인 ‘청록파’의 경우, 박두진의 몇몇 시편들을 제외하면 비이념적 정관적(靜觀的) 세계관에 침윤되어 있다. 박목월의 경우가 대표적이지만, “구름에 달가듯”한 세계엔 이념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림(=풍경)만 남고 목소리가 빠진 시는 왜소하다(지난주 고종석도 자신의 연재 '시인공화국의 풍경들'에서 지적한 것이지만, 이러한 '과대평가'에 한몫한 것은 이 세 시인이 모두 훌륭한 인격으로 후배 시인들이나 학인들에게 존경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덕분에, 이들과 다른 경향의 시(인)들이 문학사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하여 여기에 유사-오디푸스 콤플렉스가 개입한다. 미당 이후의 시인은 하여간에 시인으로서 자신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미당과 싸워야 했다(김현의 어투이다). 그를 넘어서거나 그와 다른 세계로 질주해야만 했던 것이다. 5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이 잠시 시림(詩林)을 떠들썩하게 했지만(박인환, 김수영 등이 참여한 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곧 빈수레였다는 것이 들통난다. 그들은 木馬를 타고간 소녀의 옷자락 얘기만 잠시 늘어놓았을 뿐이었다. ‘언어(말부림)’를 가지고 미당에 맞서 그보다 윗길로 나설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고은 정도가 서정주의 어법을 가지고도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남은 희귀한 사례이다. 그의 시업이 60년을 넘길 수 있을는지? 한편, 미당학교의 '장학생'이었던 박재삼 등도 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미당을 넘어설 수 있는 가능한 대안이라는 것은 미당의 이념적 ‘퇴행’을 걸고 넘어질 수 있는 이념이어야 했다. 60년대 김수영과 김춘수는 이 점에서 제각각의 방식이긴 하지만, 뚜렷하다. 60년대 한국사회를 지배했던 이념적 화두가 ‘자유’였다는 점에서 김수영은 60년대를 대표하는 시인으로 손색이 없다. “달나라의 장난” 같은 그의 시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노래, 아니 절규한 것이 바로 자유였기 때문이다. 산문적인 그의 시의 어법 또한 미당과는 전혀 종류를 달리하였다. 4.19 이후에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그 방을 생각하며>)고 그는 적고 있는데, 조금 다른 맥락에서, 김수영은 미당의 그늘 아래 놓인 해방 이후 한국시사에서 자신의 ‘방’을 마련한 드문 예에 속한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김춘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미당의 빈 자리를 물고 늘어진다. 그는 언어의 이념(이라기보다는 관념)을 자신의 탐구 대상으로 삼는다. 이 또한 의미(=역사)로부터의 도피, 혹은 퇴행이라는 혐의를 지우기 힘든 경우지만, 어쨌거나 언어의 가지 끝에 매달리는 데는 성공한다. 이념의 부재로 미당의 시를 특징지울 수 있다면, 김춘수의 시는 한술 더 떠서 의미의 부재를 지향한다. 언어적 자의식을 대표하는 그에게 시는 “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고 “얼굴을 가리운 나의 新婦”이다. 그것은 말부림의 세계가 아니라, 말 비우기의 세계, 의미의 빈 그릇의 세계이다. 그리하여 어쨌거나 김수영과 김춘수에 와서 한국시는 미당시에서 탈색된 근대성(=시대성)을 다시 획득한다. 그러나 그것은 김수영의 이른 죽음을 대가로 치른 것이었다. 그리고 맞은 70년대에도 미당시는 여전히 도전/극복의 대상이다.






















젊은 전사들의 이름으로 평론가 김현은 황동규, 정현종, 오규원 등을 지목하고 있는데,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즐거운 편지>)의 황동규는 “물 빛 라일락의 빛과 香”을 가진 미당의 '永遠' 대신에 비극적 세계인식의 '자세'를 대립시키고, “...女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女子, 눈물 같은 女子, 슬픔 같은 女子, 병신 같은 女子, 시집 같은 女子...”(<한 잎의 女子>)의 오규원은 대상과 언어와의 관계를 의혹이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연기(緣起)론 세계인식에 딴지를 건다. 거기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의 시인 정현종의 '숨통'과 '걸음걸이'가 미당의 행보를 뒤쫓는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분명하게 70년대를 증언할 수 있는 시인은 70년대의 포문을 연 <오적(五賊)>(1970)의 김지하이다. 그는 대뜸 이렇게 시작하지 않았던가. “詩를 쓰되 좀스럽게 쓰지 말고 똑 이렇게 쓰럇다” 이 황토(黃土)의 땅에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외치는 일에 비하면, 조곤조곤한 시들은 좀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가 70년대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낸 것 또한 그의 ‘대표성’을 수긍하게 한다. 시 또한 감옥에 들어가 있어야 마땅했을 시기가 아니었던가.

























80년대 한국시는 80년 광주에서 시작된다. 그보다 조금 먼저 등단한 이성복은 이 “정든 유곽”의 땅에서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진단서를 제출한 바 있지만, 가장 명료하게 80년대를 규정한 이는 황지우이다. “여기는 초토입니다/ 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에프킬라를 뿌리며>) 여기서 황지우의 '초토'는 김지하의 '황토'에 견줄 만하다. 80년대는 죽음의 연대였고, 시인들은 네크로필리야(necrophilia)에 들린 파리떼처럼 몰려들어 그 죽음을 파헤치고 음미하였다. 죽음에 분노하였고, 그 부채의식에 통곡하였다. 간혹 미치기도 하였다. “아싸라비야, 도로아미타불”이나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일찍이 나는>)고 한 최승자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이성복의 어법을 빌리자면, “모두 죽었는데, 아무도 죽은 줄 몰랐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죽음의 기운이 조금씩 떨쳐지는 것은 87년 이후이다. 그 이후 한국사회는 개량적․형식적 민주화의 길로 접어든다. 그리고 이어진 90년대에 80년대는 이미 '과거'가 돼 버리고, '후일담'이 횡행한다(한국사회는 가끔 (나쁜 쪽으로) 정신분열증적이다. 과거-망각(청산이 아니다!)에 있어서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을 듯하다. 정신분열증적인 포스트-모던사회에서의 선전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이 '시대의 우울'을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을까? "서른, 잔치는 끝났다, 이 돼지들아!"

















90년대적인 시(현상)으로 장정일과 유하의 경우를 들고 싶다(비록 그들이 등장한 건 80년대 말이지만). <햄버거에 대한 명상>(1987)의 장정일과 <무림일기>(198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유하는 키치적인 상상력과 패러디적인 기법으로 무장하고 “진지한 시”의 전통에 냉소를 퍼붓는다(이미지가 지원되지 않는군. 이게 언제적 유하인가?).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곱게 다졌으면,/ 이번에는 양파 1개를 곱게 다져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 넣고/ 노릇노릇할 때까지 식혀놓는다/ 소리내며 튀는 기름과 기분 좋은 양파 향기는/ 가벼운 흥분으로 당신의 맥박을 빠르게 할 것이다...”; “그 무렵 하남 땅에서 민초들의 항쟁이 있었다/ 아, 이름하여 하남의 대혈겁(大血劫)/ 광두일귀는 공수무극파천장(空輸無極破天掌)을 퍼부어 무림잡배의 폭동을/ 무사히 제압했다고 공표, 무림의 안녕을 거듭 확인했다”













이들의 “가벼운 흥분”과 재미의 세계는 80년대적인 무거움과 극적이면서 단호하게 결별한다. 이는 새로운 시이면서, 시의 끝(=종말)이다. 근황? 장정일은 일찍이 시를 그만 두었고(소설을 쓰다가 급기야는 <삼국지>까지 옮기고 방송진행자까지 되었다. 오래 살고 볼일이다!), 유하는 영화계 주변을 맴돌다가 다시 시의 초심(初心)으로 되돌가겠다며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를 발표하고 욕을 먹는다. 하지만, 다시 영화를 만들고 이번엔 성공한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생각만큼 미친짓은 아니다. 특히 요즘은.





















그리고 기형도. 그의 시가 자리하는 건 80년대 말이다. 이 글은 전체가 사실 기형도론의 서론으로 씌어진 것이기도 했다. 물론 100년의 한국시사가 두 쪽 분량으로 요약될 리는 만무하지만, 적어도 (편집증적인 시읽기에 있어서) 시의 전사(前史)를 모르고 한 시인에 대해 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전공작이 필요하다고 당시엔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해선 얼마전에도 몇 자 적어둔 바 있다. 언젠가 제대로 된 규모의 글을 쓴다면, 아마도 이 전사(前史) 또한 제대로 된 규모로 재구성되어야 하리라. 제대로 읽는다는 건 제대로 사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힘든 일이다...



05.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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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12-28 공감 (87)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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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쓴 한국 근현대문학사



지난해부터 한국문학 강의도 세계문학 강의와 병행하고 있는데, 근대문학의 주요 작가들을 한두 차례씩 다루었고 현대문학도 주요작이나 화제작 중심으로 훑어보고 있다. 다시 읽은 작품도 있고, 묵혀 두었던 걸 비로소 읽은 경우도 있다. 강의를 위해서 관련 논문과 연구서는 물론 여러 종의 문학사도 참고하는데, 장석주의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전5권, 시공사)도 그러한 참고도서의 하나였다(한권이 절판된 탓에 중고로 구한 기억이 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장석주가 새로 쓴 한국 근현대문학사>(학교도서관저널, 2017)은 그 압축 개정판이다.







단권인 까닭에 <나는 문학이다>(나무이야기, 2011)의 개정판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저자가 서문에서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이 모태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번 책의 부제가 '이광수에서 한강까지 한국문학 100년의 탐험'인 것은 이 때문인 듯싶다. 저자의 또다른 문학사 관련서로는 <이상과 모던뽀이들>(현암사, 2011)도 있다.









분량이 700쪽에 이르지만 문학사 100년을, 그것도 모든 시, 소설, 희곡을 망라하여 주요 작가들 위주로 다루다 보니 말 그대로 '압축판'이다. 시대별 흐름에 대한 개요가 장별로 포함되어 있지만 분량상으로는 '작가사전'으로 활용하는 게 가장 알맞은 책이다. 다시, <나는 문학이다>가 떠오르는군.







'한국문학 100년의 탐험'이라고 했지만, 정확하게는 100년이 넘는 시기를 다룬다. 근대문학의 첫 장이 1894년부터 시작된 걸로 보았기 때문이다(작가는 이광수부터다). 그리고 마지막 장은 2000년까지인데, 그런 면에서는 1896년에서 2000년까지를 다룬 권영민의 <한국현대문학사>(민음사)와 겹쳐 읽을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작가로는 편혜영과 백가흠을 간략하게 언급했다.







나도 근현대 소설가들을 다루다 보니 이들 문학사 외에 몇 권의 소설사도 기본 공구서로 갖춰놓고 있다. 문학사에 대한 책을 쓰기는 어렵겠지만 주요 작가나 작품론 성격의 책을 내려고 기획중이다. 빠르면 아마 내년쯤에는 책이 나올 수 있다. 인생의 사계에 견주면 이제 10-15년은 수확의 계절이라 바짝 부지런을 떨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고 보니 <장석주가 새로 쓴 한국 근현대문학사>도 저자에게는 그런 의미를 갖는 책이겠다.



덧붙여, 유발 하라리의 책을 연이어 읽은 탓인지 100년이란 시간이 그닥 길어 보이지 않는다. 그 100년 이전에는 근현대문학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뜻이니까. 하기에 올해가 <무정>이 발표된 지 100년이다. <무정>에 관한 강의를 여러 곳에서 진행하다 보니 더 가깝게도 느껴진다. 하물며 진화사에 견주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사나 문화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엄청난 변화의 세기이기도 했다. 한국 근현대문학은 그 변화의 기록이자 증언으로서 의미가 있다...



17.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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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17-08-20 공감 (3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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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사를 다시 읽으며

주말 지방강의가 연기된 덕분에 휴식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모자랐던 수면을 보충하고 관심 주제의 논문을 몇 편 읽었다. 말 그대로 ‘여러 가지‘ 주제로 관심이 뻗어나가 있기는 한데 최근 <로쟈의 한국현대문학 수업>(추수밭)을 낸 걸 계기로 해서(나름대로는 정식 ‘입장권‘이라고 생각한다) 한국현대문학 100년에 관해 생각을 모으는 중이다(군사적 용어를 쓰자면 병력을 증강배치하고 있다).

물론 이 분야의 난점은 너무 많은 책이 나와 있다는 것이다. 초점을 좁히고 선별할 수밖에 없는데 나로선 익숙하면서 믿음직한 길잡이의 손을 다시 잡게 된다. 바로 재작년에 타계한 비평가 김윤식 선생이 그에 해당한다. 대학에 입학하여 두번째 학기에 ‘한국근대문학의 이해‘라는 선생의 강의를 수강하고 그 이후에도 여러 강의를 들었다(국문과 대학원에서의 강의까지). 도서관에서는 1970-80년대에 출간한 여러 논저들을 그래도 꽤 읽었다고 기억한다. 30여 년이 지나서 다시금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는데 차이라면 이제는 내가 그때 선생의 나이가 되었다는 것.

나의 문학수업기에 대해서는(편집부에서 정한 이번 책의 제목에는 ‘강의‘ 대신에 ‘수업‘이 들어가 있는데 나로선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가끔씩 털어놓으려고 하는데 오늘 생각이 미친 건 1930년대생 비평가들과의 만남이다. 내게 중요한 이들은 다섯 명이다. 생년순으로 하면 이렇다.

이어령(1934)
유종호(1935)
김윤식(1936)
김우창(1937)
백낙청(1938)

이 가운데 직접 강의를 들은 비평가는 김윤식이 유일하고 다른 이들과는 책으로 만났다. 그러니까 독자와 저자로서. 한 세대의 연배차를 갖고 있지만 그래도 50년 이상 살아온 시간대가 겹치니 동시대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이들의 데뷔작은 이렇다.

이어령, 저항의 문학(1959)
유종호, 비순수의 선언(1962)
김윤식, 한국근대문예비평사 연구(1973)
김우창, 궁핍한 시대의 시인(1977)
백낙청, 민족문학과 세계문학(1978)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겠지만 20대의 나의 생각으로 한국에서 비평을 한다는 것은 이런 책들을 읽고 이와 비슷한 책을 쓴다는 것을 뜻했다. 여기에 김윤식과 김현(1942-1990)이 공저한 <한국문학사>(1973)가 추가되어야겠다. 곧 한국문학과 문학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들 저자들로부터 배우고 또 그들과 씨름한다는 뜻이었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많이 읽고 배운 비평가가 김현과 김윤식이어서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에서 그들의 생각과 말을 흉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30여 년이 지나서 나는 많은 부분에서 생각이 달라졌다는 사실도 확인한다. 가령 최근에 현대시 강의와 관련하여 읽은 유종호, 김윤식, 김현의 평론들에서 한수 배우기도 했지도 이견도 제시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대로는 지난 30년의 공부 성과다. 물론 이 분들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가론과 작품론에 해당하는 강의는 매일같이 하고 있지만 문학평론이나 비평가에 대한 강의는 해보지 않았다(지젝 강의가 예외라면 한국 비평가로 한정하겠다). 다작의 저자들이라 이들의 전모를 강의에서 다루기는 어렵겠지만 대표 평론서나 평론을 대상으로 한 강의는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오래전에 주로 도서관에서 읽었던(구입한 책도 꽤 된다) 김윤식 선생의 책들을 중고로 상당수 구입했다. 주로 1970-1980년대 저작들인데 어디까지 다시 읽을 것인지 조만간 견적을 내보려 한다. 더 나아가서는 한국근대문학에 대해서 내가 어디까지 강의하고 어떤 새로운 해석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가늠해봐야겠다. 30여년 전에 들었던 강의에 대한 보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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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20-02-08 공감 (3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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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교육과 필독 도서 목록



<문학사>

한국문학통사 1~6

조동일 선생님의 <한국문학통사>는 국어교육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섭렵해 두어야 할 책이다. 각 시대별로 체계적이며 핵심을 찌르는 문학사 서술은 가히 조동일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업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문학사에 대한 충분하고 폭넓은 이해는 국어교육 전공자로서 필수이다. 참고로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사람의 졸업장에는 전공이 '문학사'임을 밝혀둔다. 1~2학년 방학때 큰 맘 먹고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문학사

김윤식 교수와 김현 교수의 업적이다. 한국 현대문학사가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현대문학사의 정론이라 할 수 있다. 반드시 읽어야할 책임에 틀림없다.





한국소설사

한국현대소설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책.







한국현대시문학사

젊은 비평가들의 업적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로 현대시문학사를 쉽게 정리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의 말이 정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기 때문이다.





<문학 일반>



한국문학의 이해

우리나라 문학에 대해 장르별 접근으로, 간략한 설명들이 들어있다. 기본서로서 한국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한국 구비문학의 이해

구비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과 쉬운 설명, 구체적인 자료제시 등이 돋보인다.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이 함께 이루어낸 업적이다.







문학이론입문

다소 어렵지만 꼭 한번은 읽어두어야 할 책이다. 현대문학이론들이 이만큼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책이 거의 없다.







문학비평용어사전

문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4

둘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 나아가 세계의 문화를 읽고 내는 것은 국어교육만이 아니라 지성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할 것들이다. 다소 딱딱하고 지루한 내용일 수 있지만,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충분히 빠져들 수 있는 유익한 책이다.





<국어학>



국어학개설

국어학의 가장 기본적 입문서. 국어학 전반에 대한 개괄적 설명이 그리 어렵지 않게 서술되어 있음. 저자 이익섭 선생의 이 책은 현대 국어학의 정설이라고 할만 함.







학교문법론

이 책은 교육문법, 즉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법[학교문법]에 대한 체계적으로 분석 기술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에 대한 저자의 견해와 비판이 담겨 있다. 국어교육 전공자로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 단 학교 문법의 내용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가 된 상태에서 이 책을 보는 것이 효과적.





국어의 역사

국어사에 대해 이해가 쉽게 설명되어 있으나, 비판적인 읽기가 필요.







표준중세국어문법론

중세국어 문법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 돋보임. 현재 간행된 중세문법서 중 단연 최고의 정설이라할 수 있음. 독파하기에 다소 난해하고, 고문 등에 대한 어느 정도 이해가 필요함.







문법교육의 이론과 실제

현행 학교 문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문제점과 보완 설명이 친절히 기술되어 있음. 그 구성체계가 다소 빈약한 점이 있으나, <학교문법론>과 함께 읽으면 보다 효과적.













<국어교육학>



국어교육학 원론

국어교육학 이론의 엑기스를 모아놓은 책이다. 국어교과학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이론들, 7차 교육과정에 반영된 이론적 배경들을 실어놓고 있다. 다만, 우리 국어교육학의 이론 정립이 모자라 다양한 외국의 자국어 교육 이론을 도입하고 있어 다소 어수선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권의 책으로 묶으려다보니, 각각의 이론들을 맛보기 식으로만 간략히 나열하고 있고, 편집체계가 조잡하고, 많은 오탈자 등이 보여 계속된 수정 보완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만한 개론서가 없다는 것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라도 이 책을 보게되는 이유가 된다.





국어과 교수 학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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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기세덱 2005-12-20 공감 (57)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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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쓰다'의 주어다



오늘자 한국일보(06. 06. 14)의 연재물,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김윤식 서문집>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나는 '쓰다'의 주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서문이란 대표적인 '곁다리텍스트'이며, '곁다리텍스트'는 이 카테고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김윤식 서문집>(2001, 사회평론)은 놀라운 책이다. 그 놀라움을 낳는 것은 텍스트의 내용이라기보다 형식이다. 아니, 텍스트 너머에 어른거리는 긴 세월의 고된 글 노동에 대한 상상이다. 이 책은 국문학자 김윤식(70)이 1973년부터 2001년까지 낸 책들의 서문을 모아놓은 것이다(*물론 이후에도 그는 많은 책, 많은 서문을 썼다). 어느 프랑스 비평가는 한 책을 이루는 여러 물질적 요소 가운데 본문을 뺀 나머지(서문이나 발문, 헌사, 판권 난, 저자 소개, 표제, 부제, 제사, 차례 따위)를 곁다리텍스트(파라텍스트)라 부른 바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서문집’의 텍스트는 곁다리텍스트만으로 이뤄진 텍스트다.(*나의 '곁다리텍스트를 위하여' 참조)



-도대체 한 저자가 제 책의 서문만으로 또 한 권의 책을 만들자면 얼마나 많은 책을 써야 할까? 서문의 길이도 천차만별이고 책의 두께도 그럴 테니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김윤식 서문집>을 기준으로 어림짐작해보자면 100권 안팎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저자가 낸 책 95권의 서문이 묶였다. 그 모두가 순수한 저서는 아니다. 책 끝머리에 모인 7편의 서문은 역서와 편서의 서문이고, 나머지 서문 88편에도 아주 드물게 같은 책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끼여들긴 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빼도 이 책에 제 서문을 빌려준 김윤식 저서는 80권이 넘는다.

-그것만해도 보통 저자라면 엄두도 못 낼 양이다. 그런데 김윤식은 2001년 이후에도 기운차게 책을 내고 있다. 그러니까, 2001년까지의 저서 가운데 ‘김윤식 서문집’에 그 이름이 빠진 책이 없다 쳐도, 김윤식이 지금까지 쓴 책은 100권에 바짝 다가간다. 거기에 편서와 역서를 보태면 김윤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책은 100권이 훌쩍 넘는다. 이 책들 대다수가 가벼운 읽을거리가 아니라 학문이나 비평의 영역에 속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김윤식 서문집>의 서문, 다시 말해 서문들의 서문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모으면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생각에 책의 서문이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물론 이 표현은 겸양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서문을 곁다리텍스트로 여긴 프랑스 비평가의 생각과 통하는 데가 있다.



-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 앞에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붙이면서, 저자는 1962년 ‘현대문학’ 8월호에 실린 자신의 ‘천료(추천 완료) 소감’을 옮겨놓고 있다. 문학청년의 치기가 묻어나는 그 소감에는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그의 지난 반세기 글 노동을 지탱한 것이 바로 ‘눈에 불을 켜야만 살 수 있는’ 운명이었을 테다.



















-이렇게 많은 글을 쓴 저자가 글쓰기 자체에 대한 성찰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혼자 하는 작업이다. 한밤중 원고지 앞에 앉아 있노라면, 그것이 우주만큼 넓고 아득하여 절망한다.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다. 우주가 나를 가두었던 것. 이 속에서의 작업은 일종의 게임인데, 상대는 누구이겠는가. 운명이란 이름의 나 자신이었던 것”(<김윤식 평론 문학선>, 1981, 서문).

















-김윤식은 말하자면 자신을 상대로 한 그 외로운 게임의 중독자였다. 요즘 젊은 세대 말로 글쓰기 ‘폐인’이었다.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쓰다’의 주어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문학사가이자 문학비평가다. 다시 말해 그의 방대한 텍스트들은 다른 텍스트들을 분류하고 배열하고 논평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니,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읽다’의 주어를 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읽기는 20세기 이후 한국에서 ‘근대’의 표지를 지닌 채 발설된 모든 문학 텍스트를 향했다. 임화와 이상과 김동리가 보여준 이념의 엇갈림도, 이광수에서 신경숙에 이르는 세대의 엇갈림도 김윤식이 보기엔 근대성 안의 엇갈림일 뿐이었다.



















-‘쓰다’와 ‘읽다’의 붙박이 주어 김윤식에게 소위 ‘명문(名文)’이라는 것은 어떤 뜻을 지녔을까? “명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가져본 적이 없다. 다만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문장이기를 바랐을 따름이다”(<문학사와 비평>, 1975, 서문). 이것이 겸양에서 나온 말인지는 또렷하지 않다. 자신이 엮은 <애수의 미, 퇴폐의 미- 재북 월북 문인 해금 수필 61편 선집>(1989)의 서문에서 그가 ‘명문’에 대한 경멸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 말해볼 수는 있습니다. 곧 명문이란 없다는 점. 설사 그런 것이 있더라도 대수로운 것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을 임화의 ‘수필론’과 서인식의 ‘애수와 퇴폐의 미’가 조금 말해놓고 있지 않습니까.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말이 있다는 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일이 그것이지요. 말을 바꾸면, 되지도 않는 자기 감정을 질펀하게 노출시켜 남을 감동시키고자 덤비거나 대단치 않은 스스로의 주제를 돌보지 않고 흡사 무슨 도사의 표정을 짓는 짓 따위에서 벗어나, 자기 분석을 겨냥하는 일이 그것이지요. 자기 성찰과 자기 도취의 형식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수필이라는 이름의 산문 형식이 필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진술은, 소설문학에 대한 그의 다른 발언, 곧 “(문학작품에 대한) 절대적 평가기준이란 무엇인가. ‘언어’가 그 정답이다. 언어의 밀도가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김윤식의 소설 현장 비평>, 1997, 서문)는 말과 통한다.

-이 기준들은 보기에 따라 꽤 엄격하다. 김윤식의 문장은 이 기준들을 넉넉히 채우고 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문제는 명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기 이후 텍스트에서 사뭇 가시기는 했으나, 김윤식 텍스트는 ‘문법에서 벗어나는’ 문장들을 너무 많이 품고 있다. 그의 웅장한 학문적 성채의 적잖은 부분은 읽어내기 힘들만큼 조악한 한국어를 벽돌로 삼아 세워졌다.











-한 세대에 걸쳐 김윤식이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문학 교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문법에 대한 그의 이 대범함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직업적 나태였다 할 만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문장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란 무엇이겠는가’, ‘~가 아닐 것인가’ 같은 표현은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자기 도취에 빠진 도사의 표정’에서 얼마나 멀까? ‘언어의 밀도’를 잃어버린 ‘명문’의 허세에서는 또 얼마나 멀까?

-김윤식이 ‘쓰다’의 주어일 뿐만 아니라 ‘읽다’의 주어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의 글쓰기 무게중심이 중기 이후 ‘연구자의 논리’(근대문학 연구)에서 ‘표현자의 사상’(현장 비평)으로 조금씩 옮아가면서, 그 읽기 대상도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당대 소설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갔다. “‘표현’과 ‘인식’의 완전한 일치”(<작은 생각의 집짓기들>, 1985, 서문)라 스스로 정의한 비평에서 이 원로 비평가는 성실했는가? 아니 그 비평의 전제인 읽기에서 그는 성실했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고희의 나이에도 이어지고 있는 월평들은 김윤식이 이 시대의 가장 열정적인 소설 독자(가운데 한 사람)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문단 한편에서 들추듯, 그의 비평은 해석의 타당성을 떠나 작품의 줄거리 자체를 그릇 잡아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너무 많이 읽는 탓에 읽기의 ‘밀도’가 낮아졌는지도 모른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건네는 눈길은 아직 이름을 세우지 못한 작가들의 가슴을 한껏 설레게 하는 격려가 될 테다. 그러나 이 원로의 독서가 날림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그는 권위라는 자산을 너무 함부로 쓰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런 트집이 무슨 소용이랴? 20세기 한국문학 텍스트를 김윤식만큼 많이 읽은 사람은 없다. 20세기 한국문학에 대해 김윤식만큼 많이 쓴 사람도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도서관 한 구석에 처박혀 세월을 보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텍스트들이, 그리고 그 텍스트들의 저자들이, 김윤식의 손을 거쳐 한국문학사에서 제 자리를 얻었다. <김윤식 서문집>은 그의 이 끝없는 읽기-쓰기의 그림자다. 한국문학은 이 불세출의 독자-저자에게 큰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짐작에 그의 저작을 30-40권쯤 갖고 있는 나 또한 그에게, 혹은 한 '주어'에게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

06. 06. 14.

P.S. 고종석이 '또다른 다산(多産) 저자들'로 꼽고 있는 고은과 강준만에 대한 군말도 마저 옮겨온다.

-다산성에서 김윤식과 겨룰 만한 저자가 한국에 있을까? 있다.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시인 고은(73)과 언론학자 강준만(50)이다. 고은 저서의 저자 소개에 ‘저서 1백여 권’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무렵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고은 자신이 이미 그 무렵부터 저서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해온 데다, <김윤식 서문집> 같은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인보>나 <백두산> 같은 서사시들의 낱권을 각각 한 종으로 친다면, 고은의 저서가 1백 종이 넘는 것은 확실하다. 저서의 다수가 시집인 터라, 글자수로 따져서 고은이 김윤식과 겨루기는 어렵겠지만.













-고은의 산문은 한 시절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김윤식이 ‘명문’과 관련해 빈정거린 ‘도사의 표정’과 ‘자기도취의 형식’을 짙게 지니고 있었다. 또 청년 김윤식의 글보다 훨씬 더 문법에 대범했다. 그러나 이 약점들은 고은 특유의 주정적(主情的) 문체 속에서 서로를 지워내며 기이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강점이 되었다.











-강준만은 그 저서 수에서 이미 김윤식을 앞지른 듯하다. 강준만 저서의 적잖은 부분은 자료의 가공/재구성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점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눈길도 있지만, 그것은 강준만이 김윤식에 뒤지지 않는 ‘읽다’의 주어이자 실증주의자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강준만이 사실과 현실에 바짝 붙어서 (미시)이론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여느 이론가와 달리 대중의 언어를 쓰는 데 대해서도 탐탁지 않은 눈길이 있지만, 그것 역시 이론을 학자들의 닫힌 담론 공간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건강한 욕망과 결부시킬 수 있겠다.

-고은 같은 탐미 취향은 없으나, 강준만은 그 대신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문장’을 구사한다. 이것은 그 같은 다산 저자에게 드문 강점이다. 강준만의 글은 김윤식이 강조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 있다는 점에 많은 관심을 갖는” ‘자기 성찰’의 글에 가까워 보인다.











-문법적으로 단정할 뿐만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반들반들 닦인 글을 쓰는 다산 저자는 없을까? 있다. 고은처럼 시와 산문을 넘나드는 김정환(52)이 그다. 그러나 그의 저술 양이 고은이나 강준만에 미치지 못하는 걸 보면, 아름답게 쓰면서 많이 쓰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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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6-14 공감 (48)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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