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5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 김윤식 | 알라딘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 김윤식 | 알라딘


이광수와 그의 시대 1
김윤식 (지은이)솔출판사1999-



목차


1. 고아의 길
2. 배움의 길
3. 교사의 길
4. 방랑의 길


추천글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장정일 (소설가, 시인)
- <장정일의 독서일기 6> (범우사 刊)



저자 및 역자소개
김윤식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1936년 경남 진영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현대문학』을 통해 비평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1979년 10월부터 2001년 8월까지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2001년 11월부터 명예교수를 지냈다. 2018년 10월 작고하였다.
지은 책으로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한국문학사』(공저) 『한국근대문학사상비판』 『한국근대문학사상사』 『한국 현대 현실주의 소설 연구』 『한국소설사』(공저) 『일제 말기 한국 작가의 일본어 글쓰기론』 『해방공간 한국 작가의 민족문학 글쓰기론』 『일제말기 한국인 학병세대의 체험적 글쓰기론』 『문학사의 새 영역』 등의 문학사 및 문학이론 연구서와 『이광수와 그의 시대』(전 3권) 『김동인 연구』 『이상 연구』 『임화 연구』 『김동리와 그의 시대』 『백철 연구』 등의 개별 작가론, 『오늘의 작가, 오늘의 작품』 『비평가의 사계』 『현장에서 읽은 우리 소설』 등의 현장비평서와 『김윤식 선집』(전 7권) 등이 있다. 1973년 현대문학 신인상(평론 부문), 1987년 한국문학 작가상과 대한민국문학상(평론 부문), 1990년 김환태평론문학상, 1991년 팔봉비평문학상, 1994년 요산문학상, 2002년 대산문학상(평론 부문), 2003년 만해대상(학술 부문), 2008년 청마문학상, 2011년 수당상(인문사회 부문), 2014년 이승휴문화상(문학 부문)과 민세상(학술연구 부문) 등을 수상했다. 접기

수상 : 2008년 청마문학상(통영시문학상), 1994년 요산김정한문학상, 1993년 편운문학상, 1991년 팔봉비평문학상
최근작 :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한국문학사의 두 공간, 세 가지 글쓰기>,<김동인 작품집> … 총 222종 (모두보기)




이광수이기도 하고, 김윤식이기도 한.. 작가론적 비평의 교과서
스미스 2008-10-07 공감 (1) 댓글 (0)



응원 댓글

이광수와 그의 시대 twoshotㅣ 2023-05-09
이광수와 그의 시대 - 우리시대에 더욱 필요한 책 para0077ㅣ 2023-05-04
읽고 싶은데 품절이라서 슬퍼요 피아졸라ㅣ 2023-04-28
근현대 문학사에 꼭 필요한 책입니다. 두몽ㅣ 2023-04-11
제발 iro0316ㅣ 2023-04-09


더보기


마이페이퍼
전체 (10)


김윤식과 그의 시대

엊저녁에 국문학자이자 문학평른가 김윤식 선생(1936-2018)의 부고를 접했다. 위중한 상태라는 소식은 들은 바 있어서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대학에 처음 입학하던 해 ‘한국근대문학의 이해‘라는 강의를 들은 이후 30년간 선생의 많은 책을 읽었고 많이 배웠다. 러시아문학뿐 아니라 세계문학에서 근대와 근대성이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 질문을 던지고 강의하고 있는 현재의 일상도 선생의 강의와 책에서 계발된 바 크다. 공저를 포함해 250권이 넘는 저작은 앞으로도 후학들에게 추월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질에 있어서도 <이광수와 그의 시대>를 필두로 한 선생의 한국근대문학사 탐구와 비평은 후학들이 뛰어넘어야 할 산맥이다.

올해 한국문학계는 황현산 선생(1946-2018), 허수경 시 인(1964-2018)에 이어서 소중한 경륜과 자산을 잃었다. 애석한 마음과 함께 감사를 표하고 싶다. 선생의 명복을 빈다...










- 접기
로쟈 2018-10-26 공감 (52) 댓글 (2)
Thanks to
공감
찜하기


나는 '쓰다'의 주어다



오늘자 한국일보(06. 06. 14)의 연재물,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의 <김윤식 서문집>을 다루고 있다. 제목은 "나는 '쓰다'의 주어다". 본문에서도 언급되지만, 서문이란 대표적인 '곁다리텍스트'이며, '곁다리텍스트'는 이 카테고리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반가운 마음에 옮겨놓는다.













-<김윤식 서문집>(2001, 사회평론)은 놀라운 책이다. 그 놀라움을 낳는 것은 텍스트의 내용이라기보다 형식이다. 아니, 텍스트 너머에 어른거리는 긴 세월의 고된 글 노동에 대한 상상이다. 이 책은 국문학자 김윤식(70)이 1973년부터 2001년까지 낸 책들의 서문을 모아놓은 것이다(*물론 이후에도 그는 많은 책, 많은 서문을 썼다). 어느 프랑스 비평가는 한 책을 이루는 여러 물질적 요소 가운데 본문을 뺀 나머지(서문이나 발문, 헌사, 판권 난, 저자 소개, 표제, 부제, 제사, 차례 따위)를 곁다리텍스트(파라텍스트)라 부른 바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서문집’의 텍스트는 곁다리텍스트만으로 이뤄진 텍스트다.(*나의 '곁다리텍스트를 위하여' 참조)



-도대체 한 저자가 제 책의 서문만으로 또 한 권의 책을 만들자면 얼마나 많은 책을 써야 할까? 서문의 길이도 천차만별이고 책의 두께도 그럴 테니 섣불리 일반화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김윤식 서문집>을 기준으로 어림짐작해보자면 100권 안팎이 아닐까 싶다. 이 책에는 저자가 낸 책 95권의 서문이 묶였다. 그 모두가 순수한 저서는 아니다. 책 끝머리에 모인 7편의 서문은 역서와 편서의 서문이고, 나머지 서문 88편에도 아주 드물게 같은 책의 개정 증보판 서문이 끼여들긴 했다. 그러나 그것들을 빼도 이 책에 제 서문을 빌려준 김윤식 저서는 80권이 넘는다.

-그것만해도 보통 저자라면 엄두도 못 낼 양이다. 그런데 김윤식은 2001년 이후에도 기운차게 책을 내고 있다. 그러니까, 2001년까지의 저서 가운데 ‘김윤식 서문집’에 그 이름이 빠진 책이 없다 쳐도, 김윤식이 지금까지 쓴 책은 100권에 바짝 다가간다. 거기에 편서와 역서를 보태면 김윤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온 책은 100권이 훌쩍 넘는다. 이 책들 대다수가 가벼운 읽을거리가 아니라 학문이나 비평의 영역에 속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놀라움은 더욱 커진다.

















-<김윤식 서문집>의 서문, 다시 말해 서문들의 서문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을 모으면서’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그러니까 김윤식 생각에 책의 서문이란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이다. 물론 이 표현은 겸양에서 나온 것이겠으나, 서문을 곁다리텍스트로 여긴 프랑스 비평가의 생각과 통하는 데가 있다.



-이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 앞에 다시 ‘말하지 않아도 되는 말’을 붙이면서, 저자는 1962년 ‘현대문학’ 8월호에 실린 자신의 ‘천료(추천 완료) 소감’을 옮겨놓고 있다. 문학청년의 치기가 묻어나는 그 소감에는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라는 문장이 보인다. 그의 지난 반세기 글 노동을 지탱한 것이 바로 ‘눈에 불을 켜야만 살 수 있는’ 운명이었을 테다.



















-이렇게 많은 글을 쓴 저자가 글쓰기 자체에 대한 성찰을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혼자 하는 작업이다. 한밤중 원고지 앞에 앉아 있노라면, 그것이 우주만큼 넓고 아득하여 절망한다. 그렇다고 어디로 도망칠 곳도 없다. 우주가 나를 가두었던 것. 이 속에서의 작업은 일종의 게임인데, 상대는 누구이겠는가. 운명이란 이름의 나 자신이었던 것”(<김윤식 평론 문학선>, 1981, 서문).

















-김윤식은 말하자면 자신을 상대로 한 그 외로운 게임의 중독자였다. 요즘 젊은 세대 말로 글쓰기 ‘폐인’이었다.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쓰다’의 주어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문학사가이자 문학비평가다. 다시 말해 그의 방대한 텍스트들은 다른 텍스트들을 분류하고 배열하고 논평하는 텍스트들이다. 그러니, 김윤식이라는 이름은 동사 ‘읽다’의 주어를 겸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읽기는 20세기 이후 한국에서 ‘근대’의 표지를 지닌 채 발설된 모든 문학 텍스트를 향했다. 임화와 이상과 김동리가 보여준 이념의 엇갈림도, 이광수에서 신경숙에 이르는 세대의 엇갈림도 김윤식이 보기엔 근대성 안의 엇갈림일 뿐이었다.



















-‘쓰다’와 ‘읽다’의 붙박이 주어 김윤식에게 소위 ‘명문(名文)’이라는 것은 어떤 뜻을 지녔을까? “명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가져본 적이 없다. 다만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문장이기를 바랐을 따름이다”(<문학사와 비평>, 1975, 서문). 이것이 겸양에서 나온 말인지는 또렷하지 않다. 자신이 엮은 <애수의 미, 퇴폐의 미- 재북 월북 문인 해금 수필 61편 선집>(1989)의 서문에서 그가 ‘명문’에 대한 경멸을 거리낌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것에 대해서는 조금 말해볼 수는 있습니다. 곧 명문이란 없다는 점. 설사 그런 것이 있더라도 대수로운 것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을 임화의 ‘수필론’과 서인식의 ‘애수와 퇴폐의 미’가 조금 말해놓고 있지 않습니까. 뜻을 전달하기 위해 말이 있다는 점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갖는 일이 그것이지요. 말을 바꾸면, 되지도 않는 자기 감정을 질펀하게 노출시켜 남을 감동시키고자 덤비거나 대단치 않은 스스로의 주제를 돌보지 않고 흡사 무슨 도사의 표정을 짓는 짓 따위에서 벗어나, 자기 분석을 겨냥하는 일이 그것이지요. 자기 성찰과 자기 도취의 형식이 얼마나 다른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도 수필이라는 이름의 산문 형식이 필요하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진술은, 소설문학에 대한 그의 다른 발언, 곧 “(문학작품에 대한) 절대적 평가기준이란 무엇인가. ‘언어’가 그 정답이다. 언어의 밀도가 작품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김윤식의 소설 현장 비평>, 1997, 서문)는 말과 통한다.

-이 기준들은 보기에 따라 꽤 엄격하다. 김윤식의 문장은 이 기준들을 넉넉히 채우고 있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아니라는 쪽에 걸겠다. 문제는 명문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중기 이후 텍스트에서 사뭇 가시기는 했으나, 김윤식 텍스트는 ‘문법에서 벗어나는’ 문장들을 너무 많이 품고 있다. 그의 웅장한 학문적 성채의 적잖은 부분은 읽어내기 힘들만큼 조악한 한국어를 벽돌로 삼아 세워졌다.











-한 세대에 걸쳐 김윤식이 가장 영향력 있는 한국문학 교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문법에 대한 그의 이 대범함은 그냥 보아 넘길 수 없는 직업적 나태였다 할 만하다.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문장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란 무엇이겠는가’, ‘~가 아닐 것인가’ 같은 표현은 그가 경멸해 마지않는 ‘자기 도취에 빠진 도사의 표정’에서 얼마나 멀까? ‘언어의 밀도’를 잃어버린 ‘명문’의 허세에서는 또 얼마나 멀까?

-김윤식이 ‘쓰다’의 주어일 뿐만 아니라 ‘읽다’의 주어이기도 하다는 점을 기억하자. 그의 글쓰기 무게중심이 중기 이후 ‘연구자의 논리’(근대문학 연구)에서 ‘표현자의 사상’(현장 비평)으로 조금씩 옮아가면서, 그 읽기 대상도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당대 소설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겨갔다. “‘표현’과 ‘인식’의 완전한 일치”(<작은 생각의 집짓기들>, 1985, 서문)라 스스로 정의한 비평에서 이 원로 비평가는 성실했는가? 아니 그 비평의 전제인 읽기에서 그는 성실했는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고희의 나이에도 이어지고 있는 월평들은 김윤식이 이 시대의 가장 열정적인 소설 독자(가운데 한 사람)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문단 한편에서 들추듯, 그의 비평은 해석의 타당성을 떠나 작품의 줄거리 자체를 그릇 잡아내는 일이 드물지 않다. 너무 많이 읽는 탓에 읽기의 ‘밀도’가 낮아졌는지도 모른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의 최고 권위자가 건네는 눈길은 아직 이름을 세우지 못한 작가들의 가슴을 한껏 설레게 하는 격려가 될 테다. 그러나 이 원로의 독서가 날림으로 이뤄지고 있다면? 그는 권위라는 자산을 너무 함부로 쓰고 있는 것 아닐까?

-그러나 이런 트집이 무슨 소용이랴? 20세기 한국문학 텍스트를 김윤식만큼 많이 읽은 사람은 없다. 20세기 한국문학에 대해 김윤식만큼 많이 쓴 사람도 없다. 그가 아니었으면 도서관 한 구석에 처박혀 세월을 보내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텍스트들이, 그리고 그 텍스트들의 저자들이, 김윤식의 손을 거쳐 한국문학사에서 제 자리를 얻었다. <김윤식 서문집>은 그의 이 끝없는 읽기-쓰기의 그림자다. 한국문학은 이 불세출의 독자-저자에게 큰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짐작에 그의 저작을 30-40권쯤 갖고 있는 나 또한 그에게, 혹은 한 '주어'에게 경의를 표해 마땅하다.)

06. 06. 14.

P.S. 고종석이 '또다른 다산(多産) 저자들'로 꼽고 있는 고은과 강준만에 대한 군말도 마저 옮겨온다.

-다산성에서 김윤식과 겨룰 만한 저자가 한국에 있을까? 있다. 얼른 생각나는 사람이 시인 고은(73)과 언론학자 강준만(50)이다. 고은 저서의 저자 소개에 ‘저서 1백여 권’이라는 표현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은 1990년 무렵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확인할 길은 없다. 고은 자신이 이미 그 무렵부터 저서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해온 데다, <김윤식 서문집> 같은 ‘물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인보>나 <백두산> 같은 서사시들의 낱권을 각각 한 종으로 친다면, 고은의 저서가 1백 종이 넘는 것은 확실하다. 저서의 다수가 시집인 터라, 글자수로 따져서 고은이 김윤식과 겨루기는 어렵겠지만.













-고은의 산문은 한 시절 수많은 독자들의 심금을 울렸지만, 김윤식이 ‘명문’과 관련해 빈정거린 ‘도사의 표정’과 ‘자기도취의 형식’을 짙게 지니고 있었다. 또 청년 김윤식의 글보다 훨씬 더 문법에 대범했다. 그러나 이 약점들은 고은 특유의 주정적(主情的) 문체 속에서 서로를 지워내며 기이한 매력을 만들어냈다. 말하자면 일종의 강점이 되었다.











-강준만은 그 저서 수에서 이미 김윤식을 앞지른 듯하다. 강준만 저서의 적잖은 부분은 자료의 가공/재구성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 점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는 눈길도 있지만, 그것은 강준만이 김윤식에 뒤지지 않는 ‘읽다’의 주어이자 실증주의자라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 강준만이 사실과 현실에 바짝 붙어서 (미시)이론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가 여느 이론가와 달리 대중의 언어를 쓰는 데 대해서도 탐탁지 않은 눈길이 있지만, 그것 역시 이론을 학자들의 닫힌 담론 공간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는 건강한 욕망과 결부시킬 수 있겠다.

-고은 같은 탐미 취향은 없으나, 강준만은 그 대신 ‘문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문장’을 구사한다. 이것은 그 같은 다산 저자에게 드문 강점이다. 강준만의 글은 김윤식이 강조한,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 말이 있다는 점에 많은 관심을 갖는” ‘자기 성찰’의 글에 가까워 보인다.











-문법적으로 단정할 뿐만 아니라, 심미적으로도 반들반들 닦인 글을 쓰는 다산 저자는 없을까? 있다. 고은처럼 시와 산문을 넘나드는 김정환(52)이 그다. 그러나 그의 저술 양이 고은이나 강준만에 미치지 못하는 걸 보면, 아름답게 쓰면서 많이 쓰기는 어려운 모양이다.
- 접기
로쟈 2006-06-14 공감 (48) 댓글 (1)
Thanks to
공감
찜하기


3월의 사회적 독서



새해 들어 내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유일한 (반)강제는 매달 '사회적 독서'의 목록을 올리고 취지에 공감하는 몇몇 이들의 책읽기를 꼬드기는 것이다. 물론 거기에 나 자신이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부담은 있지만 매달 같이 책을 읽거나 적어도 책을 서가에 꽂아두는 분이 몇 분 계시기 때문에(땡스투 추천으로 보자면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는 된다) 아주 헛일은 아니다 싶다.

지난 2월에 꼽은 네 권의 책들 가운데 나는 케빈 스미스의 <순결한 할리우드>를 마지막으로 손에 들었고 '톰 크루즈와의 인터뷰' 같은 몇몇 꼭지를 전철에서 읽었다. "이 책으로 인해 성경은 인류 사상 두번째 위대한 책으로 밀려났다"는 밴 애플렉의 허풍에는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건질 만한 대목이 없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머지 책들, 니스벳의 <보수주의>와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은 책장을 많이 넘기진 못했으나 언제나 사정거리 안에 두고 있다. 그리고 남재일의 <그러나 개인은 진화한다>도 여러 꼭지를 읽었으니 과락은 면할 만하다.

내 경우 자랑할 만한 습관은 아니지만 한두 권의 책을 완독해가면서 보통 20여 권의 책을 같이 뒤적이기 때문에 막상 '실적'으로 남는 책은 많지 않다. 최근에 완독한 책은 박이문의 <예술철학>(재판 2006) 정도이다(별첨으로 덧붙여진 번역논문 '양상론적 예술의 정의'는 부분적인 오역에다 오타 등으로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나머지 책들은 모두 부분적으로 읽거나 참조하는 식이다(그렇게 건드리는 책들이 한달에 50권은 훌쩍 넘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여러 종류의 강의를 해야 하고 한편으론 원고/논문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남독의 습관도 딴은 강제된 것이라고 해야겠다. '사회적 독서'의 목록에 올려놓는 책들은 그런 가운데에서 매달 좀더 신경을 쓰기로 작정한 책들이다. 나름대로 '특혜'를 부여하는 셈이다. 이유는 함께 읽어봅시다, 라는 것이고.











3월에 읽을 첫번째 책은 '한국문학 읽기'로 올해 발표 90주년을 맞는 이광수의 <무정>(1917)이다. 나로선 20년만에 다시 읽게 되는 작품인데, 사실 <바로 잡은 '무정'>(문학동네, 2003)이라고 새로운 '정본'이 나온 게 불과 몇년 전이다(<'국민'이라는 노예>(삼인, 2005)에도 편자의 후기 등이 재수록돼 있다). 편자인 김철 교수가 다시 책임편집을 맡아서 낸 <무정>(문학과지성사, 2005)도 불과 재작년에 나왔을 뿐이고. 그러니까 20년의 세월이라고는 하지만 다시 읽을 만한 분위기가 조성된 건 비교적 최근이라는 얘기이다.

물론 이광수를 읽을 때 옆에 두고서 필독해야 하는, 김윤식 교수의 평전 <이광수와 그의 시대1,2>(솔출판사, 1999)의 재판이 나온 건 좀 오래 됐다. 내가 처음 그 책을 읽은 건 아마도 80년대 후반쯤이었을 걸 같고, 그때 판본은 <이광수와 그의 시대1,2,3>(한길사, 1986)이었다(나는 2/3쯤 읽은 기억이 있다). 그때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고는 나중에 절판되고 나서 구입해두지 않은 걸 후회했었는데, 솔출판사판의 재판이 나왔을 때도 그냥 무심하게 지나쳤다. 그리고 이번에도 다시 읽어보기 위해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보관해둘 만한 장소가 여의치 않은 탓이다(이러다 또 절판되는 게 아닐까 걱정된다).

도서관에서 같이 대출한 책은 젊은 이광수 연구자 최주한 박사의 <제국 권력에의 야망과 반감 사이에서>(소명출판, 2005). 학위논문을 손질한 것이기도 한데 이광수 연구서들 가운데서는 '드물게도' 재미있다(주로 다루는 건 <무정>이 아니라 <유정>이지만). 그밖에도 여러 권의 참고문헌을 꼽을 수 있지만 사설을 여기까지만. 참고로, 절판된 책들 가운데 가장 유익한 건 김현 편, <이광수>(문학과지성사, 1977). 김동인의 '<무정> 분석' 등이 포함된 유익한 자료집이다.





















두번째 책은 '한국사회 읽기'란 핑계로, 얼마전에 출간된 고종석의 <바리에떼>(개마고원, 2007)을 꼽는다. 책은 이미 구입해두었는데, 사실 '잡다함'이란 뜻의 프랑스어 '바리에떼'를 제목으로 삼은 건 내 취향이 아니다(내가 저자인가?). 기억에는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이 <프랑스문학을 찾아서>의 한 부에 그런 제목을 붙였고, 연원을 따지자면 프랑스 시인 발레리가 그런 책인가 에세이 묶음을 또 썼다(발레리만 그런 제목을 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해서 '발레리 따라하기'를 거쳐서 '김현 따라하기'의 연장이 아닌가도 싶다(얼마전 연재를 끝낸 '말들의 풍경'이 알다시피 김현 평론집의 제목을 훔쳐온 것이었다). '따라하기'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바리데기'도 아닌) '바리에떼'란 말이 우리말에 아무런 소속을 갖고 있지 않은 '겉멋'이란 생각이 들어서이다.

'잡다함'을 빙지한 그런 '겉멋부림'에도 불구하고(사실 저자가 프랑스 포도주 마니아라고 하니까 '바리에떼' 정도의 멋을 부리는 건 이해할 만하다) 책은 여느 고종석의 책들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재미있다(목차를 보니 내가 이미 읽어본 글들도 여럿된다. 잡지에 실린 에세이나 단행본에 실린 발문들이 그런 종류이다). '군소리'라고 붙여놓은 서문을 보면 그가 이 책에서 제일 자신하는 글은 복거일의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알음, 2003)를 다룬 '식민주의적 상상력'이다.

"비판의 대상이 된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의 저자로부터 별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진 못했으나, 식민지 시기의 역사적 복권을 통해 민주주의 운동의 정통성을 흔들려는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이 글이 비교적 정교하게 움켜쥐었다고 나는 판단한다." 이런 '자화자찬'이 본래 고종석스러운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아는 고종석은 허튼 소리를 할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 '온갖 경제론들의 급소'를 같이 움켜쥐어보도록 하자.

덧붙이자면 '1970년대를 사는 백수의 잡감'이란 부제를 단 그의 자기세대론 '우리 세대를 위하여' 같은 글을 읽으면 저자와 포도주라도 같이 한잔 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왜 포도주인가는 읽어보면 안다). 고종석도 거의 '아줌마' 다 됐다는 걸 확실하게 입증해준다.

안쪽 책갈피에는 '저자의 다른 책들'이라고 16권의 책 목록이 적혀 있는데, 훑어보니 내가 안 갖고 있는 건 <히스토리아>(마음산책, 2003)과 <신성동맹과 함께 살기>(개마고원, 2006), 그리고 <고종석의 영어이야기>(마음산책, 2006) 세 권이다. 앞의 두 권은 주로 신문의 칼럼들을 모은 것이고 짐작엔 그 대부분을 나는 지면에서 읽었다. 그리고 기억에 고종석의 '영어공부' 책은 그 한권이 아니지만 나는 모두 안 갖고 있다. 그런 책들은 그가 '코리아타임스'의 기자였다는 전력을 떠올리게 해주지만 내가 좋아하는 고종석은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에 대한 애정과 아는 체를 늘어놓는 고종석이다. 그 영어책을 사둘 만한 여력이 된다면 그보다 먼저 <기자로 산다는 것>(호미, 2007)을 사서 읽고 싶다. 사실은 이 책을 '3월의 책'으로 올리려고도 했지만 그건 나중 생각이었다. 뭐 결과적으론 엎어치나 메치나 두 권 모두를 꼽아놓은 셈이 되는군.











세번째 책은 '미국을 알자'는 취지로 좀 '뒤늦은' 화두이면서 아직 진행중인 사안인 한미 FTA 관련서들을 목록에 올려둔다. <한미FTA 폭주를 멈춰라>(녹색평론사, 2006)를 먼저 꼽아두긴 했는데 관련서들은 더 많이 나와있으며 적절히 참조하면 되겠다. 협상마감 시한인 4월을 코앞에 두고 있는지라 도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으며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더 늦기 전에 알아둘 필요가 있지 않을까? 눈뜨고 코 베이는 일을 당하기 전에 말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론을 읽자' 범주에서 꼽은 책은 지젝의 신간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도서출판b, 2007)이다. 번역본 상으론 450여쪽에 이르니까(원저는 280여쪽 분량이다) 다소 부담스럽긴 한데, 대신에 맨마지막 6장 '당신의 민족을 당신 자신처럼 즐겨라'를 먼저 읽을 예정이다. 지젝의 '민주주의론'을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계획한 것이고, <삐딱하게 보기>와 <혁명의 다가온다>를 다시 참조할 생각이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박종철출판사, 1999)와 위너 본펠드의 <무엇을 할 것인가>(갈무리, 2004)를 옆에 나란히 놓아두고서. 더불어 같이 읽기 위해 엊그제 꺼내놓은 책은 네그리의 <혁명의 시간>(갈무리, 2004). 요약하면 '민주주의'와 '레닌'이 3월의 이론적 화두가 될 듯하다.

언제나 그렇듯이 목표는 목표이다. 일정으로 보아 몇 페이지 건드리지도 못하고 3월 한달이 후딱 지나갈 가능성이 농후하지만(벌써 봄이라니!) '사회적 독서'의 의의라는 게 따로 있겠는가. 읽다가 다 못 읽으면 옆에서 이어서 읽어주고 뒤에서 마저 읽어주는 게 사회적 독서다. 당신이 그 옆사람, 뒷사람이 되어주면 좋지 아니한가!..

07. 03. 01.
- 접기
로쟈 2007-03-01 공감 (43) 댓글 (6)

이광수와 톨스토이





최근에 책이 새로 나온 김에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관한 논문을 쓰려 했다. 책도 다 구입했다. 이 참에 연구비 받던 '벨 에포크'에 주문해둔 톨-이 연구서도 처리할 겸. 그런데 <닥터 지바고> 일정에 맞추다 보니 그 논문을 먼저 쓰고 <전.평.>은 내년으로 미룬다. 여사여사 자료를 뒤지던 중 이광수가 이른바 '조선의 톨-이'를 자처했음을, 그 정도로까지 그를 좋아했음을 알게 되었다. 언젠가 이 부분을 좀 더 다루어 봐도 좋겠다. 비단 이광수뿐만 아니라 이 무렵 우리 지식인들이 사랑한 톨-이는 무엇보다도 <부활>의 작가였다. 정확히 <부활>도 아닌, <해당화: 가주사 애화>(중국어에서 번역했다고 한다)의 작가. 당시 각종 '애화'(대략 창부화된 여자들의 슬픈 이야기, 신파)가 무척 유행했는데 그 원조라고. 그리고 확인된 바는 아니지만 <부활>의 한국어 완역(일본어에서) 역시 이광수(혹은 허영숙)에 의한 것일 수 있다는 추정도 있을 정도라고. 아, 이광수는 러시아어도 구사했다고 한다.









겸사겸사 사족. 박형규 선생님 덕분에 <부활>을, 또 그밖의 많은 러시아 작품들을 훌륭한 우리말 버전으로 읽어왔지만(특히, 볼쇼이판 <전.평.>) 아, 이제는 세대교체가 절실하다고 여겨진다. 이게 번역 및 번역가의 숙명임을 우리는 꼭 알아야 한다. 번역가는 결코 작가가 아니다. 언제가 모 번역가 선생님의 말을 빌어 썼지만 번역가는 '그림자', 작가와 작품 뒤에 붙은 쓸쓸한 그림자이다. 모든 일, 모든 직업에는 '연령 제한' 있다. 학문이나 번역, 창작이라고 예외일 리 없다. 당장 눈이 어두워 내가 번역하는(혹은 쓰는) 텍스트도 제대로 못 보는 마당에..ㅠ.ㅠ 물론 그걸 뛰어 넘는 드문 천재들이 있긴 하지만, 역시나 '그럼에도'이다. 내 번역의 유효기간도 길지 않음을 또한 명심해야 한다.(그럼 뭐 먹고 살지?) 아무튼.



톨-이를 무척 사랑한 이광수의 소설 중 그의 흔적, 특히 <부활>의 영향이 아주 큰 작품이 <유정>이라고 한다. 헐, 기억 창고를 아무리 뒤져봐도 안 읽은 것이다, 님아 ㅠ.ㅠ 안빈, 석순옥(맞나?) 어쩌고 하는 무슨 사랑 얘기는 <유정>이 아니고 <사랑>이었나 보다. 그리하여, 이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고 밑바닥으로 다 파야하게 생겼다.










<유정>이야 노골적이고, 이 주제와 비교적 무관하다는 <무정> 역시 이형식의 박영채를 계몽하려는(나아가, 네흘류도프가 카츄사에게 그랬듯, '구원'하려는) 그 심리적, 정신적, 도덕적 흐름에 있어 기본적으로 <부활>을 밑에 깔고 있다. - 고 하는데, 아주 공감된다. 덧붙여, 이 경우에도 우리가 꼭 넘고 가야 할 산은 이 분의 이 책.








이광수를 좋아한 적은 없다. 그러나 웃긴 신파나 그 못지 않게 웃긴 도덕소설(계몽~)이나 썼다고 여겨진 그가 왠지, 소설을 참 잘 쓴 염상섭보다 더 인간적으로(?!) 여겨지는 아이러니를 경험한다. 보다 더 정감이 간다고 할지. 언젠가 강의실에서 김윤식 선생님이 열심히 이광수를 '씹던' 기억이 난다. 그의 고아콤플렉스, 또한 '조선/인'에 대한 총체적 열등감, '잘난 것', '높은 것'을 향한 열망, 그가 결국 친일로 간 것은 내적 필연이었던 것, 그의 지적 흐름상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 (평론가 최재서던가, 그에 대해서도 비슷한 얘기를 들었던 듯하다.) 허영숙과의 로맨스, 결혼 생활 역시 그러하다. 아이들을 많이 낳았던데, 참, 천생 연분이었던 듯하다. 그러게 '사랑의 문법'이 곧 '소설의 문법'으로 이어진다.(이상, 염상섭, 이광수).










*
우리가 학창시절부터 보아온 이광수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지고 지나치게 둥근(동그란) 알의 안경을 끼고 한복을 입은 할아버지(기껏해야 늙은 아저씨) 이광수이다. 나이가 들어보니 우리의 얼굴과 몸이 양질전화한다는 것을 알겠다. 정확히 그 결절점을 찾기는 힘들겠으나, 아무튼 우리는 나비나 다른 곤충의 변태 못지않은 과격한 변화를 겪는다. 어쩌다 젊은 날의 이광수 사진을 봤는데, 헐, 윤동주 뺨치는 얼굴이었구나. 과연 청년 이광수는 지식인에 작가에 혁명가에(그리고 열정적인 연인에), 그 무렵에는 뭐든지, 누구든지 될 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말년(중년)에 이런 얼굴이 된 것이다. 음, 호위호식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 역시, 출세지향적이던, 야망 많던 그가 원하던 대로.







겸사겸사, 톨-이의 역설은 늙어서 더 볼 만하다는 것. 그는 외모 콤플렉스가 무척 강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톨-이 원하는 톨-이의 모습에 가까워진다.







못 생겼다기보다는 못 됐게(!) 생긴 얼굴인데, 바로 이 대목 '악'을 누르고 '선'을 극대화하는 것이 톨-이의 일생일대의 과제였다. 그리고 말년엔 보다시피, 우리가 익히는, 또 많은 화가들이 사랑한 얼굴.(그리고 그런, 정정한 할아버지의 몸.) 저 수북한 털. 사실 머리카락도 꽤 오랫동안 무성했다. 그러니 그 '육'(=악)을 감당하기가 그렇게 힘들었겠지만, 실은 그것이야말로 창작(=삶)의 원동력이었던 것이니, 부러울 수밖에. 그게 없었다면 톨-이는 소설을 쓰지 않았을 터이다. 마음 착한 지주 귀족 할아버지가 돼서 여러 사회 사업, 자선 사업 하시고 아이들한테 민화 읽어주시고 그러셨을 터. 가끔씩 동네 처녀 총각 주례 서주시고 (믿거나 말거나 많은 사생아를 만드는 대신) 늙은 마누라랑 알콩달콩, 티격태격 잘 살고.



결국 사람은 자신이 원하던, 그래서 걸어가던 그 길의 끝에 이르게 된다. 약간의 차이야 있겠지만.




- 접기
푸른괭이 2018-12-09 공감 (13) 댓글 (1)


한국문학 공부하기

공부는 즐겁지만 어렵고 또 어렵지만 즐겁다.

오래 전, 그러니까 학부 시절이니 20여년 전에 읽었던 문학사 책을 펼쳐본다. 그때 읽었던 것도 있고 읽으려 했다가 놓친 것도 있고 아마 읽었으나 그 사실 자체를 까먹은 책도 있고 반대로 안 읽고서도 읽었다고 착각하는 책도 있고 뭐 그럴 것이다. 도서관(새로 정리된 서고가 익숙치 않아, '길치'인 나로서는, 정말 짜증난다오 ㅠ.ㅠ) 한 번 돈 다음 꼭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되는 책은 주문해서 보는 중이다.


















전부 다(!) 하면 좋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 현대문학사, 그 중에서도 소설 부분에만 집중한다. 권영민 선생은 정녕 교과서의 대마왕(^^)임을 보여준다. 내용의 알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세 줄 넘어가는 문장도 없이 무척 간결하고 정확하게 서술되어 있다. 최대한 정독 중. 조동일 선생의 저 유명한 저서는 앞 부분은 딱 자르고 5권만 주문. 조만간 읽기 시작할 터. 하지만 아무래도 '소설' 관련 그의 역작은 이것일 터. 언젠가 재미있게 읽은 듯하다.











한편, 이 참에 꼼꼼하게 읽어야지 다짐했다가 어마어마한 분량과 (익히 아는!) 너무도 진지한(ㅠ.ㅠ) 문체에 짓눌려 지레 포기한 역작은 이것. 하지만 경제 사정이 회복되는(과연 언제?ㅠ.ㅠ) 대로, 바라건대 겨울 방학 쯤엔 사서 볼 수 있길 바란다. (지난 여름, 정말로 우연찮게(!!) 아이의 유치원 근처에서 이 책의 필자를 만났다, 헐. 우리 아이한테 만원 주셨다...^^;;)














그 다음, 우리의 현대 문학 연구에서 결코 빼먹을 수 있는 그, 그의 그 많은 책들. 김윤식 선생이 김현 선생과 쓴 <한국 문학사>는 작년인가, 김유정에 관한 글을 쓰면서 비교적 정독한 바 있어, 다른 책을 더 주문했다.










사실 그는 각종 문학사도 많이 썼지만, 작가론-저서도 많아서 좇아가기가 힘들 정도다. 다시 읽고 싶은 책으론 아무래도 이광수 연구, 염상섭 연구, 그리고 좀 뜬금없지만, 임화 연구이다.(이상 연구는 비교적 최근에 다시 읽고 여전히 감동(!) 받았다.)








물론 문학 연구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인바, 어떤 훌륭한 연구서도 연구되는 대상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즉, 해당 작품을 읽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사실 그럴 시간이 없으니 연구서를 읽는 것이다. 문학사를 뒤적이며 꼭 (다시) 읽고 싶은 몇몇 소설을 뽑아본다.










물론 일순위는 춘원 이광수. 내게 그는 아무래도 연애소설 작가처럼 남아 있는데, <무정>도 그렇고 <사랑>인가, <유정>인가 아무튼 고등학교 읽은 무슨 장편소설 한 편이 정녕 순애보처럼 기억되어 있어서 그렇다. <흙>, <단종애사>, 이런 걸 읽은 뒤의 느낌도 그렇다.







염상섭은 교과서에 실렸던 <삼대>를 비롯하여 대학 시절에 읽은 다른 소설까지, 단 한 번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 소설가이다. 그를 다시 읽으려는 것은 역시나 공부(^^;;), 즉 의무감에서이다. 모르겠다, 지금 다시 읽으면 그의 진가가 보일지도.










그밖에 언젠가 읽었던 이런 소설도 꼽아본다.

잘 썼다, 못 썼다, 를 떠나 너무도 강렬했던 소설인 최서해의 <탈출기>, <기아와 살육>, <홍염>(?) 뭐 이런 것도 다시 읽으면 어떨까, 궁금하다. 그 다음, 처음 읽는 순간부터 너무 좋았던 김동인. 그는 단편을 잘 썼지만, <운현궁의 봄>, <젊은 그들> 같은 장편도 어릴 때는 재미있게 읽었다.









시간을 어디까지 낼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아무튼 열심히 읽어보자, 다짐해 본다. 공부는 적절한 강제가 필요하니 강의 커리큘럼도 여기에 맞추어 조금씩 변경한다. 읽을 작품의 목록은 계속 추가될 것이다.

'추석'의 '추'가 '가을'을 의미함을 증명하듯,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 추석 날 오후부터 하루 반을 앓아누웠다. 꽉 막힌 코를 풀어가며, 까마득한 옛날(ㅠ.ㅠ)에 초고를 잡아둔 러시아문학 연구서를 다듬으며, 음, 반성해 본다. 국문학자들은 아무리 게을러도 외국문학자들에 비하면 반타작은 족히 하는 듯하다. 어지간하면 다 연구서 몇 권. 반면, 외국문학자는 (과연 외국어 배우는 데 시간을 너무 많이 투자해서??ㅠ.ㅠ) 평생 퇴직할 때까지 연구서 한 두 권 없는 교수가 태반이다. 아, 물론, 평생 '퇴'할 '직'도 얻지 못하기 일쑤지만, 이것이 게으름을 정당화해주는 못한다. 그럴수록 더더욱 공부가 답이다.^^

- 접기
푸른괭이 2016-09-17 공감 (12) 댓글 (0)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