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10-09

김철수 (1893년) - 위키백과 나무위키









김철수 (18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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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
金綴洙
본명김철수
출생1893년 5월 25일
전북 부안 백산
사망1986년 3월 16일
부안 백산
성별남성
국적대한민국
학력와세다대학 정치학과
경력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
직업독립운동가, 사회주의운동가
소속열지동맹, 곡귀단, 신아동맹단

김철수(金綴洙, 1893년 5월 25일 ~ 1986년 3월 16일)는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이다. 조선공산당 3차 집행부 책임비서로 활동했으며, 줄곧 반(反)박헌영 계열에서 활동했었다. 호는 지운(芝雲 혹은 遲耘)이다.

지운 김철수는 전북 부안 백산에서 태어난 뒤 1912년 젊은이들의 유학을 독려하는 독립지사 성우 이명직 선생이 돌린 사발통문을 보고 감화되어 일본 와세다대학 정치학과에 유학하였고 1915년 9월 7일 이명직 선생이 일제에 독살 당한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투신 1915년 '열지동맹(裂指同盟)' 1916년 '곡귀단(哭鬼團)'과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조직하였다[1]. 우범선의 아들 우장춘에게 한국을 선택하도록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의식화 시킨 장본인 이다[2]. 일본과 러시아 중국을 오가며 독립운동과 코민테른 등 사회주의활동을 벌였다.

그는 한국 초창기 사회주의 운동을 이끌었고 해방공간에서 좌익과 우익의 가교역할을 자임했고 이승만-박헌영 회담을 추진하는 등 사회주의 통일 정부 수립을 추진한 사회주의계열 원로였다.

1947년에는 극심한 좌우익 세력다툼에 환멸을 느끼고 부안 백산으로 낙향하여 움막을 짖고 칩거하다 생을 마쳤다.

사후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같이 보기

각주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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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수(1893)

최근 수정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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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김동재(金銅再, 金東宰)·김초봉(金初峯)
김창률(金昌律)·김창근(金昌根)
호
초봉(初峰)·지운(芝雲, 遲耘)
출생
사망
1986년 3월 16일 (향년 92세)
본관
학력
금호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학 / 졸업)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516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1. 개요2. 생애3. 여담4.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본관은 광산. 이복동생 김창수는 자유당 소속으로 제3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대한민국 사회주의 독립운동사에서 이동휘, 여운형과 어깨를 나란히 견줄 정도의 1세대 독립운동가였다.[3]

2. 생애[편집]

1893년 5월 25일 전라도 고부군 백산면 원천리(現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의 소지주 양반가에서 아버지 김영구(金永九)와 어머니 신안 주씨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부령면 외하리(현 부안읍 외하리)로 이주해 거주하기도 했다. 아버지 김영구는 소지주로 전라북도 옥구부(현 군산시)에서 쌀 위탁 판매업에 종사했는데 재력이 대단했다고 하며, 부안군에서 가까운 이웃 동네인 고창군의 인촌 김성수 집안의 재력과 견줄 정도로 부잣집이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대한제국 때 구례군수를 지낸 한학자 서택환(徐宅煥)[4]의 문하에서 공부하면서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족주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1907년 태인군 용산면 화호리(현 정읍시 신태인읍 화호리)에 있던 사립 용문학교[5]에 입학했다가 이듬해인 1908년 아버지의 가게가 있던 옥구부 금호학교(金湖學校)[6]에 전학했다.

금호학교 졸업 후 그는 금호학교 선배 김성수가 그의 부모를 설득해 준 덕에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과로 유학을 갈 수 있었고, 여기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유학 생활 중이던 1915년 봄 윤현진(尹顯振), 장덕수, 김철수(金喆壽), 전익지(全翼之), 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도쿄 인근의 타마가와(多摩川)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손가락을 베어 피를 돌려 마심으로써 열지동맹(裂指同盟)을 맺었다. 이들은 이 동맹을 통해 장차 상하이, 싱가포르, 만주, 시베리아 등지로 흩어져 서로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할 것을 결의했다.

이어 1916년 봄에는 열지동맹원들을 비롯해 조선인 유학생 김명식(金明植)·김양수(金良洙)·최익준(崔益俊)·하상연(河相衍)·정노식(鄭魯湜), 중국인 유학생 황각(黃覺)·나활(羅豁)·등결민(鄧潔民)·사부아(謝扶雅), 대만인 유학생 팽화영(彭華榮) 등 40여 명과 더불어 '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새 아시아를 세우자'는 목적 아래 비밀결사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조직하고,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던 같은 처지의 인도 및 베트남 출신 유학생들을 가입시키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집회 연설, 각종 단체 조직, 독립운동 자금 모금 및 『한국통사』 등 반일서적 배포 등의 활동을 하며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했다.

일본 유학 시절에 우장춘과 교류하며 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하였다. 1916년 도쿄제국대학 농과대학 실과에 입학한 우장춘은 조선의 도지사가 방일하여 조선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친일연설을 하는 강당에서 유학생 김철수가 단상에 뛰어올라 그 도지사의 멱살을 잡고 항의하는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당시 신입생이던 우장춘은 이 사건을 계기로 김철수를 수시로 만나게 된다. 김철수는 우장춘에게 '너의 부친 우범선이 매국한 것에 대해 속죄하려면 조선의 독립과 조선을 위해 네가 배운 바로 봉사해야 하고, 절대로 너의 조선인의 성을 갈아서는 안 된다'는 민족주의 의식을 심어준다. 이후 김철수와 우장춘 박사는 서로가 죽을 때까지 오랜 우정을 유지하고 지냈다고 한다.

1916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국내에서 3.1 운동을 겪은 뒤 1920년 6월 장덕수·최팔용(崔八鏞) 등과 함께 신아동맹당을 사회혁명당으로 개칭했고, 1921년 중국 상하이로 가서 이동휘·안병찬(安秉讚) 등의 한인사회당과 조직적으로 결합해 고려공산당 상하이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에는 고려공산당 통합 대회에서 간부회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 시기 김철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도 직간접적으로 활동하였으나, 국제공산당 자금사건에서 발생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의 내분을 목격했고, 특히 1923년 국민대표회의에서 개조파의 일원으로 생계위원 및 비서에 선출되어 재직하면서 이때 일어난 창조파와의 심각한 파벌 대립에 크게 실망했고, 결국 곧 국내로 귀국했다. 이 시기 김철수는 '이게 무슨 독립운동이냐?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로 무기력감에 빠졌다.

국내로 귀국하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검거되어 1년간 거주 제한령을 받기도 했으며, 1924년 전라북도 민중운동자동맹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1925년 12월 조선공산당에 가입해 조직부장에 선임되었다. 1926년 2월에는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원, 조직부 위원 등에 선임되었고, 6.10 만세 운동 이후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이 일어나 주요 간부진이 검거되자 그해 9월 제3차 조선공산당, 즉 ML당을 결성하고 책임비서에 취임해 12월까지 활동했다. 1926년 12월 코민테른에 파견할 대표자에 선임되었고, 이듬해인 1927년 5월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공산당 제2차 대회 승인을 받고 귀국했다.

한편, 그는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와 가까운 사이였고 주위 사람들도 두 사람의 결혼을 권유한 적이 있었으나, 김철수에게는 고향에 이미 본처가 있던 관계로 혼인이 이어지지는 못했다. 당시에는 가문에서 억지로 맺어주는 중매 결혼을 하는 구시대 풍습과 자유 연애를 통한 결혼을 하는 새로운 풍습이 공존하는 과도기여서 지식인들 중에는 고향에는 가문에서 맺어준 본처가, 그리고 활동하는 도시에는 자유 연애를 통해 결혼한 새로운 처를 두는 사례도 있었다.

1928년 제3차 및 제4차 조선공산당 조직이 와해될 조짐이 보이자 만주로 망명했고, 1929년 3월, 중화민국 길림성 돈화현(敦化縣)[7]에서 윤자영(尹滋瑛)·김영만(金榮萬)·김영식(金泳植) 등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준비위원회 조직에 참여하여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해 12월 강문수(姜文秀)·박원진(朴元鎭) 등과 함께 다시 국내로 잠입해 조선공산당 재건 활동을 하다가 1930년 2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갖은 고초를 겪다가 1931년 10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이 사건을 맡았던 김병로 변호사는 1심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자 그에게 공소할 것을 권유했지만, 그는 "나는 포로일 뿐, 일본 제국주의 법률을 인정할 수 없다"며 공소를 거부했다.

그 뒤 약 8년간 옥고를 치르고 1938년 10월 출옥해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40년 여름 '시국대응 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이라는 친일 전향자 단체 가입을 거부해 또다시 서대문 예방구금소에 투옥되었다. 그리고 공주형무소에 이감되어 8.15 광복을 맞을 때까지 옥고를 치러야 했다.

1945년 8월 17일 출옥해 과거 서울청년회 정파 동지였던 리영(李英)[8]과 함께 경기도 경성부 종로2정목 서울YMCA 빌딩 바로 옆의 장안빌딩에서 조선공산당을 결성하는데, 이를 '장안파 조선공산당'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했다. 이들의 문제점은 강령과 규약 및 당면 활동 목표를 제시하지 못했고, 중앙당 기구 이외에는 일정한 수의 당원 및 하부조직을 갖추지 못했으며, 1920년대 해체된 조선공산당과의 계승 관계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결국 8월 20일, 박헌영의 주도로 결성된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이 '장안파는 일개 파벌집단에 불과하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하고 해체를 요구했고, 결성한 지 10여 일 만에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해체되고 만다. 그래서 장안파 조선공산당은 '15일당'이라 불리기도 한다. 김철수는 일제강점기부터 박헌영과 사이가 최악이었는데 이때는 김철수도 조선공산당 재건을 오래 염원해 왔기 때문에 별 거리낌없이 재건파에 합류했다. 그 후 계속 박헌영 지지자들과 갈등했지만 대회파가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김철수도 재건파로 분류된다.

김철수는 박헌영하고 사이가 대단히 안 좋았는데, 박헌영의 독선적이고 교조주의적인 노선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박헌영의 독선적인 방식을 대놓고 성토하는 글을 발표했다는 이유로 조선공산당 내에서 당원자격의 무기한 정지처분을 받기까지 했을 정도다. 김철수와 같이 당 대회를 열라는 주장을 펴다 제명당한 사람들을 조선공산당 대회파라고 부른다.

김철수는 광복 후 좌익과 우익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에 동조하며 통일정부 구상을 위해 노력하였다. 사회노동당을 주도적으로 창당한 것이 김철수를 비롯한 조선공산당 대회파이다. 1947년 초 좌우합작 운동이 실패가 가시화된 이후 결국 정치에 환멸을 가지게 되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여운형이 7월 19일 암살당하자 더더욱 정치와 선을 긋고 자연인으로서의 삶을 지향하였다. 다만 김철수는 여운형과 광복 후 좌우합작이라는 노선이 같았을 뿐 여운형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여운형은 박헌영과 평생 친했고 일제강점기에 이르쿠츠크파로 노선을 같이하다가 말년에만 갈라선 것인데, 김철수는 상해파이고 일제강점기부터 박헌영과 더불어 이르쿠츠크파인 여운형과도 사이가 안 좋았다.


이승만 정부가 김성수와 윤치영를 통해 노동부 장관 제의를 했지만 김철수는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동생 김창수를 통해서도 농림부 장관 제의를 받았는데 김철수가 거절하라고 했다고 한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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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김철수(1984년 2월 9일 촬영)
왼쪽에서 부터 임흥순, 김철수, 방원 이성찬

이후 고향인 전라북도 부안군 백산면 원천리로 낙향해 농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은둔 생활을 하다가 1986년 3월 16일 사망했다. 본인이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조용히 산 것도 있지만 광복 후, 6.25 전쟁 후 좌익 전력이 있는 사람들은 남한에 잔류하면서 엄청난 고초를 겪고 살아야 한 것은 기본이고, 6.25 전이라고는 하지만 공산당 재건에 가담했고 6.25 이후에는 이러한 전력이 특급 빨갱이 취급을 받던 시절이라 감히 정계에서 얼씬거렸다가는 분명히 정부에 의해서 제거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더욱 더 은둔할 수밖에 없었다.

김철수가 자신의 "비문 앞에는 <공산당원 김철수>라고 적으면 된다."라고 말해 주위 사람이 "'애국지사' 또는 '독립투사 '이런 것 앞에 붙이셔야지요" 라고 하니 "공산당원이란 이름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은 없다"라고 했다고 한다.출처: 김철수 기념사업회 운영자의 블로그 반공이 대한민국의 이념이 된 이후에 태어난 국민들에겐 낯선, 조선공산당이 얼마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이 염원하던 독립운동 단체였는가를 알려주는 인상적인 말이다.

2005년 광복절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당초 부안군 백산면 하청리 123-23번지에 안장되었다가 2012년 5월 15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편집]

  •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다.
    • 장녀 김금남은 일본 메이지대학을 다니다가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나자 대학을 중퇴하고 귀국해 이에 호응해 활동했다. 광복 후 여수·순천 10.19 사건에 남편과 같이 관여하다가 남편이 총살당했고, 본인은 이때 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통받다가 1960년대 초 병사했다.# 사후 2019년 그녀가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가한 공적을 인정하여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하지만 일찍 사망한 나머지 추서한 지 5년이 지난 2024년이 되어서야 그녀의 후손에게 훈장을 전수할 수 있게 되었다. #
    • 차녀 김용화(1919 ~ 2018)는 부안군 계화면 의복리 돈지마을에서 삼성약방을 운영하며 독신으로 김철수를 부양하다가 2018년 2월 사망했다.
    • 장남 김용선은 전라북도 정읍시에서 농업에 종사했다.
    • 차남 김용일은 월북했다.
    • 3남 김용덕은 광복 후 소련으로 유학 갔다가 행방불명되었다.
  • 유력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였음에도 불구하고 반공주의가 강한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인사였는데 이는 이승만과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 이 얘기에 따르면, 김철수가 중국 상하이에 있을 때, 이승만이 독립운동 자금의 횡령 혐의로 살해 위협을 받을 당시 김철수는 코민테른으로부터 받은 자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대납해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정계에서 은퇴해 낙향한다는 조건으로 김철수를 건드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목숨만 건진 것에 불과한지라, 이후에도 그와 가족들은 경찰에게 린치를 당하는 등 잦은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6.25 전쟁 때는 집이 불태워졌고, 빨갱이로 몰려 사형장까지 끌려갔던 수모를 겪기도 했다. 다행히 현장 지휘관이 그를 알아보고 사지에서 구해줬지만, 집이 불타며 평소 틈틈이 써 오던 항일운동 수기를 비롯한 모든 것을 잃었다고 한다.[10][11]

    다만 김철수는 사회주의 사상에 대해서 어디까지나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지, 구체적으로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 스탈린주의 등은 깊이 신봉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1930년 일본 경찰에 체포당한 후 재판 과정에서 예심판사가 '누구를 사숙했냐'[12]고 묻자, 김철수 자신은 유학자인 서택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재판정에 모인 사람들이 서택환이 누구냐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서택환의 이름을 굳이 언급할 정도면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대해 그다지 깊이 신봉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당장에 우장춘 박사와의 일화라든지, 내내 갈등관계인 여운형의 어릴 적 일화를 생각하면 어느 대체역사소설에서 나오는 근왕파 공산당에 가까운 실제 인물이기도 하다.
  • 92세까지 생존해 1세대 사회주의자, 독립운동가 중 손에 꼽히게 장수하던 인물이었다. 그가 사망한 1986년에는 공산주의자들이 모두 사라진 남한에서 자생적 마르크스-레닌주의 운동권 조직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세워질 무렵이었으니 그가 얼마나 장수했는지 알 만한 부분.
  • 부안군 백산면 대수리에는 그가 노년에 오랫동안 기거하던 토담집 이안실(易安室)이 남아 있다.
  • 성격은 외모에서도 보이듯 그린 듯한 고매한 선비였다. 언제나 향을 피워 그가 있는 곳에서는 향기가 났다고 한다. 서예 작품을 많이 남겼다. 오래 살아서 그에 대한 증언자가 많기 때문에 여러 블로그 등 인터넷에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쉽게 접할 수 있다.
  • 그의 후손들 중에 공무원과 변호사가 많다고 한다.

4. 둘러보기[편집]

독립장 부장


호주 국기


영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영국 국기


튀르키예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미국 국기


영국 국기











































































미국 국기


대만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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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국기


캐나다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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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자치령 국기








캐나다 자치령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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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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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기




필리핀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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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자치령 국기




















미국 국기
[A] 허위 공적으로 인해 서훈 취소
[B] 친일 행적으로 인해 서훈 취소
■ : 독립유공자 ■ : 기타 공훈

[1] 1931년 10월 28일 수형인명부에는 金哲洙로 등재되어 있다.[2] 37세 수(洙) 항렬.[3] 김철수는 중국에 건너갔을 때, 무려 중국공산당의 지도자인 마오쩌둥과 직접 만나 그와 친구가 된 인물이었다. #[4] 1894년 궁내부 주사(主事), 1895년 궁내부 내사과 주사(內事課 主事) 3등, 궁내부 관제조사위원(官制調査委員), 1896년 봉상사 주사(奉常司主事), 상의사 주사(尙衣司主事), 내사과 주사, 1897년 구례군수 등을 역임했으나 부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르기 위해 사직하고, 고향 고부군 답내면 마항리(현 정읍시 이평면 마항리)에 은거하며 서당을 세우고 후학 양성에만 전념했다. 1901년 품계가 정3품에까지 올랐다.[5] 이후 화호초등학교로 개편되었다가 2000년 학생 수 부족으로 신태인초등학교에 통폐합되었다.[6] 1910년 폐교되었다.[7] 현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돈화시.[8]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이 와해된 뒤 월북했다.[9] 김철수가 거절하여 대신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였다.[10] 하지만 보도연맹 학살 사건 때 사회주의 계열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군인과 경찰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일에 비하면 그나마 살아남은 것도 운이 좋았다고 봐야 한다. 당장 이승만부터 6.25 전쟁이 터진 후에 '공산주의자라면 부모형제라도 용서 없이 모두 처단해야 한다'고 외칠 정도의 극단적인 반공 노선으로 갈아탔기 때문이다.[11] 이승만은 기본적으로는 우익이지만, 자신의 정치권력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하고도 손잡을 수 있다는 모습을 자주 보여줬다. 때문에 1945년 미국에서 귀국한 직후에는 조선공산당의 세력이 강력한 것을 보고는 '나의 경제정책은 공산당과 비슷한 것이 많다'는 지금 기준으로 보면 기겁할 만한 발언을 공개적으로 하면서 좌익세력과 손을 잡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1947년 미군정이 공산당 탄압으로 돌아서자 곧바로 반공 노선으로 갈아타 버렸다. 하지만 이후에도 중도좌파 조봉암을 농림부 장관으로 기용해서 토지개혁을 추진하고, 조선공산당 출신인 김철수한테 노동부, 농림부 장관을 제의하는 등 꽤 스펙트럼이 넒은 정치를 보여줬다. 이승만이 지금 기억되는 극단적인 반공 노선으로 돌아선 것은 6.25 전쟁 이후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기 위한 방편이었다.[12] 누구의 영향을 받았냐, 내지 누구의 학풍을 따르고 있냐의 의미로 그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는다는 뜻인 사사(師事)하다와는 다르다.====
김철수기념사업회
지운 김철수 선생 역사자료실 이안실
기념사업회 소개

김철수(독립기념관 역사자료실)

최동칠
사료
2026-04-06
조회수 79


김철수
이 명
호 : 지운(芝雲, 遲耘), 초봉(初峰), 이명 : 김원백(金元白), 김창수(金昌洙), 김동재(金銅再, 金東宰),
 김창률(金昌律), 김창근(金昌根), 김상근(金相根)


출신지
전북 부안(扶安)
생년월일
1893. 5. 25 ~ 1986. 3. 16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곡귀단, 열지동맹, 신아동맹단, 사회혁명당, 고려공산당, 조선공산당, 조선공산당재건설위원회

관련 사건
조선공산당재건설위원회 사건

포상훈격(연도)
독립장(2005)

주요활동
항일비밀결사 열지동맹 결성, 사회혁명당 조직, 고려공산당(상해파) 주요 간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조선공산당재건설위원회 활동

본문
1893년 5월 25일 전라북도 부안군(扶安郡) 백산면(白山面) 원천리(元川里)에서 300두락의 농사를 짓는 소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유학(儒學)을 공부한 서당의 훈장으로 구례 군수를 지낸 서택환(徐宅換)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다. 서택환은 지운(芝雲)이라는 호를 지어주기도 했다. 말년을 가까이 지냈던 허백련 화백은 “나이 들어 늦게 김매 먹고 산다”며 ‘더딜 지(遲)’자와 ‘김맬 운(耘)’, ‘지운(遲耘)’이라 바꿔 말년의 호로 삼았다. 일본 유학시절 친우들은 ‘늘 먼저 나서 선두에 선다’며 ‘초봉(初峰)’이라 불렀고, 김원백(金元白)·김창수(金昌洙)·김동재(金銅再, 金東宰)·김창률(金昌律)·김창근(金昌根)·김상근(金相根)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서당을 끝낸 후 화호보통학교와 군산의 금호학교(金湖學校)에서 공부하고, 191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하여 1916년 졸업했다. 도쿄(東京)의 조선유학생학우회 기관지 『학지광(學之光)』 발간에도 참여하였으며, 노동문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였다. 1911년 반역사건으로 처형된 일본 무정부의자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樹)의 저서를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였다.

1914년에 “죽은 귀신이 되어서라도 조선독립을 위해 울어야 한다”며 곡귀단(哭鬼團)을 조직하였고, 1915년에는 보다 엄숙한 정치적 비밀결사 열지동맹(裂指同盟)을 결성하였다. 윤현진(尹顯振)·정노식(鄭魯湜)·장덕수(張德秀)·김효석(金孝錫)·김철수(金喆壽)·김익지(金益知) 등과 ‘도원결의(桃園結義)’ 하듯이 함께 목욕하고 손가락을 갈라 피를 합하여 마셨다.

1915년 가을 중국인들과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표로 한 비밀결사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하였다. 이 결사에는 열지동맹에 참가했던 윤현진·정노식·장덕수를 비롯하여 최익준(崔益俊)·하상연(河相衍)·김명식(金明植)·김양수(金良洙) 그리고 중국인으로 황개민(黃介民)(또는 (黃覺))·등결민(鄧潔民)·나활(羅豁) 등과 대만인 팽화영(彭華榮) 등 모두 30여 명이 참여했다.

1920년 가을, 장덕수·최팔용(崔八鏞)·이봉수(李鳳洙)·주종건(朱鍾健)·이증림(李增林)·도용호(都容浩)·김종철(金鍾喆)·최혁(崔爀)·홍도(洪濤)·엄주천(嚴柱天) 등과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을 조직하였다. 일본제국주의를 축출하고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목적을 가진 비밀결사였다.

사회혁명당은 해외를 왕래했던 당원 홍도와 허헌(許憲)을 통하여 이동휘(李東輝)의 측근인 김립(金立)과 연결되어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당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때 대표 8명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 1921년 4월 국내를 떠나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가는 도중에 베이징에서 이승만의 위임통치청원 성토문에 서명하였다. 1921년 5월 20일부터 23일까지 한인사회당, 사회혁명당 그리고 기타 공산단체, 노동단체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상하이에서 ‘제3회 한인사회당 대표회’가 개최되었다. 17명으로 구성된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재무담당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립의 지시로 1921년 9월 상순 국내로 들어와 1만원을 상해파 국내간부인 최팔용에게 전달하고 상하이로 귀환하기도 하였다. 1922년 2월 10일 아침 김립이 김구 세력인 오면직(吳冕稙)·노종균(盧鍾均)에 의하여 상하이에서 저격당해 즉사할 당시 김하구(金河球)·유진희(兪鎭熙) 등 고려공산당 간부들과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 김립 암살사건에 분노한 상해파 계열의 ‘모험파’들인 최동욱(崔東旭)·최계립(崔溪立)·이호반(李鎬班)·한광우(韓光宇) 등이 상하이로 와서 복수로 대응할 것을 촉구했지만, “우리의 투쟁대상이 일본제국주의자이지 동족상잔은 절대불가”라며 말렸다.

김립 피살이후 이동휘를 뒤이은 사실상의 상해파 고려공산당 상해파 제2인자로 활약하게 된다. 이동휘·박진순(朴鎭順)·홍도로 구성된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모스크바 파견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국제공산당을 상대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상해파 이르쿠츠크파의 주장을 검토한 국제공산당 집행위원회는 「제3국제공산당 검사위원회 결정(1921. 11. 15)」을 작성하여 고려공산당의 분쟁과 ‘자유시참변(또는 흑하사변)’ 등에 관한 결의를 내렸다. 이에 따라 연합고려공산당 창립 대회를 소집하게 될 8인의 연합중앙간부가 구성된 바, 이동휘·홍도·이봉수와 함께 상해파 측의 연합중앙간부에 선임되었다.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128명의 대표들이 참가한 가운데 개최된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참가하여 대회 집행부 간부로 활약하였다. 대회에서 윤자영(尹滋瑛)과 함께 상해파를 대표하여 의장단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대회가 국제공산당에 의하여 승인되지 않음으로써 연합에 실패하였다.

1923년 1월 중순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전라도대표로 참가하여 개조파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개조파는 “임시정부의 전통을 인정하고 이를 개조해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하자”고 주장했고,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으로 인정한다면 (러시아에서 조직한) 국민의회도 동시에 최고기관이었음을 인정하라”고 주장하였다. 두 주장이 맞서면서 국민대표회의 역시 단일한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을 건설하는데 실패하였다. 국민대표회의의 파국이 예상된 1923년 5월말 결국 상하이를 떠나 친우 이규홍(李圭弘)과 항저우(杭州)로 갔다가 7월경 귀국하였는데 해외로 나간 지 약 2년 3개월만의 일이었다. 친우 장현식(張鉉植)을 찾았다가 조선총독부 경무국 고등정탐 최탁에게 걸려들어 붙잡힌 후 거주제한 1년 6월을 받았다.

1925년 봄에 이르러 양대 공산주의운동 세력인 화요파(火曜派)와 서울파는 각각의 세 과시에 나섰다. 독자적인 조선공산당 창건을 도모했던 화요파는 전조선기자대회(4월 15~17일)와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4월 20~21일)의 개최를 결정하였고, 이에 맞서 서울파는 4월 5일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반대단체 전국연합대회를 개최할 것을 결정하였다. 결국 화요파는 북풍회(北風會), 조선노동당, 무산자동맹과 연합하여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을 창당하였다. 조선공산당에는 상해파의 주종건과 유진희가 참가하였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이동휘 등 상해파 간부들은 당초 화요파의 조선공산당 승인에 부정적이었다. 국제공산당은 조선공산당의 승인문제에 대한 상해파 지도자인 이동휘에게 승인여부를 물었다. 이동휘는 상해파 국내간부들의 의견을 타진하고자 1925년 12월초 박응칠(朴應七)에게 밀서를 주어 국내로 파견하였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신의주사건(조선공산당 제1차 검거 사건)’으로 간부들이 대거 검거되고 있었던 상황이었고, 주종건과 유진희 역시 체포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이러한 조선공산당의 위기상황에서 주종건의 연락을 받고 11월 상경한 후 이봉수와 함께 당에 가입했고 중앙간부 후보로 선임되었다. 박응칠을 통해 이동휘에게 보낸 답장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공산당을 살려야 되겠다. 공산주의자라면 파당을 초월해서 당을 지켜야 하겠으니 국제당에 찬성 전보치고 장래일은 이봉수와 나에게 맡겨 달라”, “생명을 내걸고 잘해 보겠다”고 답장하였다. 이에 따라 이동휘는 국제공산당에 찬성 전보를 보냈고, 결국 1926년 3월 조선공산당은 승인되었다.

1926년 2월 강달영(姜達永)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중앙간부진에 선임되어 선전부 위원이 되었다. 이어 3월 15일에 개최된 중앙집행위원회에서 강달영을 책임비서로 하는 새로운 중앙간부진을 구성하였고 선전부 책임을 맡았다. 조선공산당에 참여한 상해파 간부들은 화요파 중심의 조선공산당과 서울청년회측과의 합동을 위한 3차례의 협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서울파의 지도자 김사국(金思國)을 여러 차례 만나 협상을 했으나, “합작조건으로 모든 권리를 자기에게 다 주어야 한다”며 합동을 거부하였다.

1926년 5월 8일 김사국이 사망하자 이봉수와 함께 강달영 등 조선공산당 다수파인 화요파계열 당간부들을 설득하여 김사국의 장례를 사회단체장으로 관철시켰다. 당 조직과 운영에서도 각파연합에 의한 당통일 방침을 관철시키고자 노력하였다.

1926년 6월 만세운동으로 당 간부들인 강달영·김남수(金南洙)·이봉수·이준태(李準泰) 등이 붙잡혔고 홍남표(洪南杓)와 구연흠(具然欽) 등이 해외로 망명하였다. 1926년 6월초부터 7월말에 걸쳐 이른바 ‘조선공산당 제2차 검거 사건’의 결과 당 중앙에 혼자 남게 된 상황에서 체포 직전의 강달영으로부터 책임비서직을 넘겨받았다. 1926년 9월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어 당을 재정비하였다. 도쿄에서 귀국한 일월회 회원들과 서울청년회측 인물들을 당에 끌어들이고자 노력하였다. 일월회 핵심인물인 안광천(安光泉)에 이어 엠엘ML그룹의 리더 양명(梁明)이 입당하였다. 안광천과 양명은 중앙간부가 되었으며, 이어 서울파의 김준연(金俊淵)과 권태석(權泰錫)도 입당하였다. 1926년 12월 6일 서울 아현동에서 2차 당대회를 개최하고 안광천을 책임비서로 하는 이른바 ‘통일공산당’의 정식 중안간부를 선출하였다. 당대회 이전까지 임시책임비서로서 14차례의 중앙간부회를 이끌었고 국제공산당 경성 주재원을 통해 16회에 걸쳐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대회의 결의에 따라 당대표로서 공청(共靑)대표 겸 통역으로 김강(金剛)을 대동하고 1926년 12월 중순 서울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다음해 2월말에서 3월초 사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화요파 김단야(金丹冶)의 거짓 통역과 조동호(趙東祜)의 집요한 반대활동을 극복하며 국제공산당의 당 승인을 받아냈다. 1927년 5월 모스크바에 동행했던 김영만(金榮萬)·윤자영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고 7월 김영만과 함께 국내로 귀국하였다.

국제공산당의 승인을 받고 귀국했으나 ‘당중당’인 엠엘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안광천을 비롯하여, 양명·김준연, 그리고 공청책임자로서 모스크바에 먼저 파견되었던 고광수(高光洙) 등이 엠엘파 소속이었다. 엠엘파는 일월회, 서울청년회 신파, 재만주공청이 연합된 세력으로 ‘파벌박멸’을 내세웠지만 새로운 파벌을 구축한 셈이었다. 새로운 파벌의 존재와 함께 많은 스파이들이 당에 침투해 있었다. 엠엘파로부터 파쟁분자라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엠엘파의 협박과 체포의 위험을 피해 1927년 10월 국내를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이후 서울파와 상해파의 합동세력은 1927년 12월 21일 당대회를 열고 별도의 조선공산당을 결성하고, 국제공산당 파견대표로 김영만을, 주외대표(駐外代表)로 이동휘를 각각 선임하였다. 서울상해파 조선공산당 대표 김영만과 모스크바로 가서 1928년 2월말 국제공산당 정치서기국에 자파의 승인을 요청하였다. 엠엘당이 비합법적인 ‘당중당’을 만들어 당을 당 대중으로부터 소외시켜 당의 위기와 분열을 초래했다고 비판하였다. 이들 서울상해파 조선공산당의 외교 노력은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국제공산당은 1928년 2월 27~28일에 개최된 당대회에서 재조직된 엠엘당을 두둔하였고, 이들을 원동으로 추방하였다. 이동휘와 김규열(金圭烈)이 재차 국제공산당 제6차 대회에 파견되어 엠엘당 부인과 서울상해파 당대회 승인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서울상해파, 화요파, 엠엘파 각 대표들이 모스크바에서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지만, 결국 1928년 「12월테제」에 의하여 조선공산당은 해소되었으며 당 재건 결정이 내려졌다. 서울상해파의 대표로 모스크바에 갔던 이동휘와 김규열이 1928년 12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서 「12월테제」와 국제공산당의 입장을 설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윤자영·김영만·이운혁(李雲赫) 등과 회합을 갖고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착수하기로 하였다. 3월 하순 윤자영·김영만 등과 함께 만주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으로 가서 조선공산당재건설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30년 1월 국내에 잠입하여 청진, 함흥, 원산, 철원을 거쳐 서울에서 동지들을 만났고, 부산과 제주를 거쳐 양산(梁山)에 갔다가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 전주경찰서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았다.

제1심 재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0년을 받았다. 김병로와 이인 두 변호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우리가 포로이지 저들의 법률을 시인하고 들어갈 것이 아니라”며 항소하지 않았다. 경성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시달렸다. 옥중 투쟁에 빠지지 않았던 탓에 사상범으로서 혹독한 처우를 받았다. 친구들의 노력으로 병감(病監)으로 옮겨졌으나 망가질 대로 망가져 생명이 위독하여 장녀 김금남이 날마다 ‘송장을 찾아가려고’ 대기하기도 했다. 경성형무소에서 김동삼(金東三)과 교류하며 동지애를 나누었다.

경성형무소에서 처우개선 투쟁이 일어나 간수들이 사상범 4명을 고문 기구로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항의하여 1,200명 가운데 1,000여 명의 수감자들이 소리를 지르고 만세를 부르며 기물을 파괴하는 등 형무소 당국에 항의하였다. 이 일로 밤낮으로 팔을 등 뒤로하고 수갑이 채워진 채 무릎을 꿇고 지냈고, 한때는 벽에 고개를 쳐 박고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난 일도 있었다. 김동삼과 함께 형무소 측과 협상하였고, 결국 고문했던 계호계(戒護係) 소속 간수 8명이 징역에 처해졌다. 이 사건 후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간도 5.30사건’ 주도자인 김근(金槿) 등 10여 명의 인사들과 교류하였다. 8년 8개월만인 1938년 10월 28일 대전형무소에서 풀려났다.

1940년 여름 또 다시 서대문형무소에 신설된 예방구금소에 수감되었다. 당시 함흥경찰부에서 대전형무소 출옥자들이 태평양전쟁과 관련하여 ‘비밀음모’를 했다고 하여 10여 명을 다시 체포, 고문하여 유죄판결을 내렸다. ‘공산당재건계획’사건으로도 알려진 이 사건에 당시 대전형무소의 간수였던 이홍래(李弘來)가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홍래는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의 ‘옥중동지’들이 주고받던 편지를 전달해주던 사람이었는데 고문으로 사망했다. 대전형무소에 있던 김근, 강진(姜進) 등은 이 사건으로 형량이 추가되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함흥으로 끌려가 징역 4년을 받았고, 공주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45년 8월 17일 풀려난 직후 서울로 올라오다 조치원에서 일행과 헤어져 고향인 부안으로 내려갔다. 석방 당시 일제의 지독한 고문으로 자기 발로 버스에 오르지도 못할 정도였다. 20여 일 후 대전형무소 시절의 동지였던 ‘간도5.30사건’의 주도자 김근과 김현수(金玹洙)가 찾아와 상경을 종용하자 이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자신을 중심으로 공산당을 조직하자는 동지들의 주장을 일축하였다. 마찬가지로 이영 등 일제강점기 서울상해파를 중심으로 한 이른바 장안파(長安派)의 당 조직 운동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결국 상경 얼마 후 박헌영(朴憲永)의 재건파 조선공산당 가입을 선언하고 박헌영과 면담하였다. “미군점령하이니 미군과의 충돌을 피해가면서 우리의 조직과 선전을 공개적으로 해야 하며 민족주의자들과 온화하게 접촉을 잘해서 통일정부를 빨리 세우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조언하였다. 그러나 박헌영 등 재건파 조선공산당 지도부는 1945년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과 중앙인민위원회를 급조해 발표하였다. 이때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그리고 조선인민공화국의 체신부장 대리에 선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인민공화국과 인민위원회가 미군정에 의하여 부인되었다.

1945년 10월 25일 이승만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구성할 때 독촉중앙위원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 7명에 포함되어 공산당을 대표하였다. 하지만 이승만과 박헌영은 1945년 12월에 이르러 공개적으로 상호 비난함으로써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46년 여름에 이르러 조선공산당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으로 개편하는 문제가 대두되면서 당의 분열이 공개적으로 표면화되었다.

결국 1946년 8월 8일 반 박헌영파인 이정윤(李廷允)이 당에서 제명되었고, 무기정권 처분을 받았다. 그 해 여름, 인민당의 여운형(呂運亨), 신민당의 백남운(白南雲)과 연락을 갖고 사회노동당 결성에 나섰다. 공산당의 대회파, 인민당의 31파, 신민당의 반간부파가 1946년 10월 16일 대회를 열고 사회노동당 결성을 선포했으나 ‘뭔가 잘못 되고 있다’고 판단에서 이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결국 1947년 2월 27일 사로당 대의원대회에서 해체결의가 나왔다. 이후에는 일체의 정치적 활동을 중단하고 낙향하여 칩거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반병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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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독립기념관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 searchWord =&reSearchWord=&index=&id=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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