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7

* 함재봉이 말하려고 하는 1890년대의 조선-청-일본 세 나라 간의 자국-타국 인식

ChatGPT - 동아시아의 평화와 화해

함재봉이 말하려고 하는 1890년대의 조선-청-일본 세 나라 간의 자국-타국 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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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이 강좌와 저술을 통해 규명하고자 한 1890년대 동아시아 3국(조선·청·일본)의 상호 인식과 자국관에 대한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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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 조선·청·일본의 상호 인식과 세계관의 충돌

함재봉은 1890년대를 단순히 외교적 갈등기가 아니라, 세 나라가 완전히 서로 다른 문명사적 문법과 좌표계 속에서 상대를 바라보며 충돌한 시기로 규정한다. 한자문화권이라는 외형적 유사성 아래, 세 나라의 내면적 자아인식과 타자인식은 화이론(華夷論)과 만국공법(서구 근대 국제법) 사이에서 격렬하게 갈라져 있었다.

1. 조선: 소중화(小中華)의 오만과 자폐적 속방(屬邦) 의식

조선 지배층(위정척사파 및 유학 관료들)의 세계관은 17세기 명나라 멸망 이후 굳어진 성리학적 '소중화주의'에 갇혀 있었다.

  • 자국 인식: 조선은 스스로를 오랑캐(만주족 청나라)에게 짓밟힌 명나라 문명을 계승한 '유일한 문명의 보루'이자 소중화로 여겼다. 이 도덕적 우월감은 내면적으로 매우 강고했으나, 대외 현실에서는 역설적으로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군신·조공 관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분열적 태도를 보였다.

  • 청나라에 대한 인식: 문화적으로는 오랑캐(호로, 胡虜)라 멸시하면서도, 정치·군사적으로는 250년간 평화를 보장해 준 종주국이자 위기 때마다 기댈 수 있는 절대적 보호자로 여겼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주저 없이 청군 파병을 요청한 것은 바로 이러한 오랜 '속방 의식'의 자연스러운 발로였다.

  • 일본에 대한 인식: 일본을 근대화된 강국으로 보지 않고, 여전히 바다 건너의 야만이자 왜구(倭寇)로 취급했다. 메이지 유신으로 양복을 입고 서양 제도를 도입한 일본을 보며 "금수(짐승)의 도를 따르는 변절자"로 경멸했다. 서구식 국제정치의 힘의 논리를 파악하지 못한 채, 유교적 명분론의 잣대로 일본을 얕보았다.

2. 청나라: 종주권의 자의적 왜곡과 문명 제국의 환상

아편전쟁과 양무운동을 거쳤음에도 청나라 지배층, 특히 북양대신 이홍장과 실권자들의 인식은 근대 주권국가 체제를 온전히 수용하지 못했다.

  • 자국 인식: 여전히 천하(天下)의 중심이자 주변 번국(藩國)을 거느리는 제국으로 자처했다. 서구 열강의 압박에 밀려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도, 전통적인 조공 질서와 서구식 만국공법을 자의적으로 섞어 쓰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 조선에 대한 인식: 조공 체제의 모호성("내정과 외교는 자치에 맡긴다")을 악용하여, 서양 열강이 조선에 침투할 때는 "조선은 자주국이니 책임이 없다"고 발을 빼고, 일본이나 서양이 조선을 온전히 독립국으로 대우하려 하면 "조선은 청의 오랜 속방"이라며 간섭했다. 특히 임오군란(1882) 이후 위안스카이(원세개)를 파견해 감국(監國)처럼 군림하며 조선을 실질적인 직할 식민지처럼 다루려 했다.

  • 일본에 대한 인식: 전통적 시각에서 일본은 동쪽 바다의 조공국에 불과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급성장하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양무운동으로 확보한 북양함대의 거함(정원·진원호)과 청나라의 거대한 체급만 믿고 일본의 군사적 결속력과 근대화 수준을 낮잡아 보았다.

3. 일본: 탈아입구(脫亞入歐)와 '만국공법'의 도구화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으로 대표되는 일본 엘리트들의 인식은 동아시아 3국 중 유일하게 서구식 근대 국가 체제로 완전히 전환되어 있었다.

  • 자국 인식: 아시아의 정체성을 벗어던지고 서구 열강과 대등한 문명국 대열에 합류해야 하는 근대 국민국가로 규정했다. 제국주의 열강이 아시아를 분할하는 약육강식의 국제 현실 속에서, 먹히지 않으려면 스스로 포식자가 되어야 한다는 냉혹한 사회진화론적 위기의식을 공유했다.

  • 청나라에 대한 인식: 청나라는 더 이상 동양의 위대한 문명 중심이 아니라, 낡고 부패하여 서양 열강에 뜯어먹히고 있는 '병든 거인(아시아의 병자)'에 불과했다. 청나라가 지배하는 낡은 조공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동아시아의 안정을 도모할 수 없으며, 일본의 안전과 이익선(조선) 확보를 위해 반드시 청의 영향력을 배제해야 할 적으로 보았다.

  • 조선에 대한 인식: 스스로를 지킬 힘도, 주권 의식도 없는 취약한 완충지대로 보았다. 조선이 청나라의 완고한 영향력 아래 머물러 있거나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손에 넘어간다면 일본의 안보(주권선)에 치명적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조선을 '문명화된 독립국'으로 강제 견인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선의 독립을 명목으로 청나라의 종주권을 단절시킨 뒤 일본의 배타적 세력권으로 흡수하려 했다.

함재봉은 이 세 나라의 상호 인식을 종합하며, 1890년대의 비극은 <조선은 도덕적 자폐에 빠져 있었고, 청나라는 제국의 환상 속에서 교활하게 기득권을 지키려 했으며, 일본은 냉혹한 현실주의와 제국주의적 야심으로 무장하고 있었다>는 거대한 불일치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동아시아 전통 질서의 허구성이 만국공법이라는 근대 서구의 규범과 무력을 만나 폭력적으로 해체되는 과정이 바로 이 세 나라의 어긋난 시선 속에 응축되어 있었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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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제가 보기에 함재봉의 29–38회를 제대로 이해하는 열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청일전쟁을 단순히 <청과 일본이 조선을 놓고 싸운 전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1890년대 조선·청·일이 <자기 나라와 상대방을 전혀 다른 언어와 위계질서 속에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 합니다.

한 문장으로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조선은 아직 중화질서의 세계를 상당 부분 살고 있었고, 청은 중화제국과 근대국가의 두 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은 이미 스스로를 서구식 근대국가로 재정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세 나라는 같은 지도를 놓고 서로 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각자 <다른 세계지도>를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함재봉이 강조하려는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강연과 저서에서도 전통적 화이질서에서 대등한 근대국가 질서로 넘어가는 것을 근대 동아시아의 핵심 전환으로 명시합니다.

1. 조선의 인식 — <우리는 문명국이고, 청은 상국이며, 일본은 아직 ‘왜’다>

가장 큰 인식착오는 조선에서 나타납니다.

함재봉의 조선은 자신을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의 ‘약소 독립국가’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오랫동안 중국 중심의 중화질서 속에서 살아왔고, 중국 황제를 섬기는 사대관계와 조선왕의 국내적 자율성이 반드시 모순된다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즉 조선의 관점에서는

<청에 조공한다 = 청의 식민지다>

라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자신을 독자적인 왕국으로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청 황제를 상위의 천하질서 속에 인정할 수 있었습니다. 함재봉도 근대적 의미의 ‘속국’ 개념과 전통적 사대관계가 충돌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다룹니다. 조미수교를 거치면서 비로소 조선이 다른 나라들과 직접 조약을 체결하는 경험을 통해 근대적 주권국가라는 새로운 자기인식을 배우기 시작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일본을 보는 시각은 더 흥미롭습니다.

조선 지배층의 오래된 관념 속에서 일본은 중국보다 아래였고, 적어도 조선보다 문화적으로 높은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임진왜란의 기억까지 있는 ‘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1868년 이후 불과 20여 년 만에 일본은 중앙집권 국가, 징병제 군대, 근대 해군, 철도, 전신, 근대 관료제와 외교제도를 갖추었습니다.

문제는 일본은 변했는데 <조선의 일본관은 그만큼 빨리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함재봉이 앞선 강의에서 1871년 청일수호조약을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청이 일본을 자신과 대등한 조약국가로 인정했는데도 조선은 그 변화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그는 강조합니다.

따라서 1894년의 비극적인 상황을 함재봉 식으로 표현한다면,

<조선은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던 일본이 이미 자신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국가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는 것입니다.


2. 청의 인식 — <중국은 여전히 중심이고 조선은 우리의 속방이다>

청의 자기인식은 조선보다 한 단계 더 복잡합니다.

청은 서양과 전쟁도 했고 근대조약도 체결했으며 서양식 군함과 무기도 사들였습니다. 따라서 조선보다 훨씬 더 국제정세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홍장 같은 인물은 일본의 변화를 상당히 정확하게 파악했습니다.

그런데 청은 조선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종주국 의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특히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이후에는 오히려 더 강해졌습니다.

원세개를 파견하고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깊이 개입하면서 청은

<조선은 독립된 대등국가가 아니라 중국의 속방이다>

라는 입장을 국제사회에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 2>에서도 이 부분을 매우 강하게 서술하며, 목차 자체가 <청의 신제국주의>, <속국에서 직할령으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청이 조선을 보는 시각은 어느 정도 ‘보호자’와 ‘주인’ 사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조선을 보호한다. 그러므로 조선의 외교와 내정에 우리가 발언할 권리가 있다.>

이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대한 청의 인식에는 또 다른 착오가 있었습니다.

청은 1871년 이미 일본과 대등한 근대조약을 맺었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는 일본을 평등한 국가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중국 내부에는 여전히 일본을 주변의 ‘외이’로 보는 오래된 문화적 우월감이 남아 있었습니다. 함재봉의 강의에서도 청의 보수파가 일본을 야만적인 외국으로 폄하했던 사례가 등장합니다.

청일전쟁은 이 자기인식을 산산조각 냅니다.

청은

<우리가 일본보다 문명적으로 우위이며, 군함도 많고 국토도 크고 인구도 많다>

고 생각했지만, 일본은 이미 국가의 재정·군대·수송·정보·지휘체계를 통합한 근대전쟁 국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함재봉에게 1894년의 패배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닙니다.

<중화제국의 자기인식이 현실과 충돌하여 붕괴한 사건>입니다.


3. 일본의 인식 — <우리는 이제 아시아의 주변국이 아니라 근대국가다>

세 나라 가운데 자기인식의 변화가 가장 급격했던 것이 일본입니다.

185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 역시 서양에게 강제로 개항당한 나라였습니다. 하지만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지도층은 자기 나라를 완전히 새롭게 규정합니다.

예전의

<천황–쇼군–다이묘–번>

의 일본에서

<하나의 국민, 하나의 중앙정부, 하나의 군대, 하나의 주권을 가진 국가>

로 바꾼 것입니다.

함재봉이 친일개화파의 일본 경험을 매우 중요하게 보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김옥균·박영효 등이 일본에서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은 서양식 옷이나 철도가 아니라 <세계는 독립된 주권국가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관념이었다고 그는 봅니다.

그 결과 일본이 청과 조선을 보는 눈도 변합니다.

일본이 청을 보는 눈

예전에는 중국은 문명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러나 메이지 일본은 점점 청을

<크지만 낡은 제국>

으로 보기 시작합니다.

중국 고전문화를 배우는 것과 청국의 정치체제를 존경하는 것이 분리됩니다.

<중국 문명은 위대하지만 청국이라는 국가는 후진적이다>

라는 인식이 가능해진 것입니다.

1894년 전쟁에서 일본군이 연속해서 승리하면서 이 인식은 더욱 확고해집니다. 청군의 허위보고와 일본군의 근대적 군사조직을 대비하는 함재봉의 34회 설명은 바로 이러한 문명적 역전을 보여주는 장치입니다.


4. 그런데 일본의 조선 인식이 가장 위험한 지점입니다

일본이 조선을 바라보는 인식은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합니다.

하나는 <조선은 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입니다.

다른 하나는 <조선은 스스로 근대화할 능력이 부족하므로 우리가 개혁시켜야 한다>입니다.

처음 문장은 ‘독립’의 논리입니다.

두 번째 문장은 곧 ‘간섭’과 ‘제국주의’의 논리가 됩니다.

이 둘이 1894년에 결합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매우 역설적인 말을 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은 독립국가이므로 청은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조선은 제대로 된 근대국가가 아니므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개혁할 권리가 있다.>

바로 이 모순이 갑오경장에서 나타납니다.

일본은 청을 몰아내면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합니다. 동시에 일본군이 경복궁을 장악한 상태에서 조선정부의 구조를 바꾸고 갑오개혁을 추진합니다.

그리고 홍범14조에서는 드디어

<청에 의존하지 않고 자주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는 원칙이 선언됩니다. 함재봉은 이를 조선이 근대적인 독립국가임을 명시하는 역사적 사건으로 매우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바로 이것이 함재봉을 읽으면서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해야 할 지점입니다.

<조선의 독립을 일본이 강제로 만들어준다>

는 것은 그 자체로 심각한 역설이기 때문입니다.


5. 그래서 세 나라의 상호인식을 표로 만들면 아주 명확해집니다

자기인식조선을 보는 눈청을 보는 눈일본을 보는 눈
조선유교적 문명국, 독자적 왕국상국·보호자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만주족 왕조라는 복잡한 감정전통적으로 ‘왜’, 문화적 주변국 → 변화를 과소평가
중화제국이면서 근대 열강이 되려는 국가속방·완충국·보호대상조약상 대등국이지만 여전히 주변국이라는 문화적 우월감
일본새롭게 탄생한 근대 주권국가청에서 독립시켜야 하지만 ‘개혁시켜야 하는’ 후진국낡은 제국·동아시아의 경쟁자

여기서 결정적인 것이 있습니다.

세 나라의 가장 큰 차이는 군사력보다 <시간감각>입니다.

조선은 상당 부분 과거의 동아시아에 살고 있습니다.

청은 한 발은 옛 중화제국에, 한 발은 근대 국제사회에 걸쳐 있습니다.

일본은 의식적으로 과거의 동아시아 질서에서 빠져나와 미래의 서구 국제질서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세 나라의 충돌은

<조선 대 청 대 일본>

의 단순한 국익 충돌이라기보다,

<전통적 중화질서 → 과도기적 제국질서 → 근대 국민국가질서>

라는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이 한반도에서 충돌한 사건이라는 것이 함재봉의 기본적인 이야기라고 봅니다.


6. 이 관점에서 보면 김옥균이 왜 함재봉에게 그렇게 중요한지도 이해됩니다

김옥균은 조선 사람이지만 <일본의 세계지도>를 먼저 본 사람입니다.

함재봉의 해석에서 김옥균의 가장 중요한 변화는 일본을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일본에서

<조선도 중국의 속방이 아니라 독립된 주권국가가 되어야 한다>

는 새로운 언어를 배웁니다.

그래서 김옥균에게는

조선 →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
청 → 더 이상 섬겨야 할 상국이 아니다.
일본 → 근대화의 모델이며 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동맹이다.

라는 인식이 생깁니다.

함재봉이 ‘친일개화파’를 단순한 친일파와 구별하려는 논리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친일개화파는 메이지 일본을 보면서 사대관계를 ‘당연한 국제질서’가 아니라 ‘근대적 관점에서는 종속’이라고 새롭게 인식했다는 것입니다.


7. 그러나 함재봉에게 한 가지를 더 물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함재봉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저는 한 가지 중요한 보충 질문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함재봉의 도식에서는 대체로

<조선 = 과거를 못 벗어남>
<청 = 어정쩡한 근대화>
<일본 = 근대국가 전환 성공>

이라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은 청일전쟁의 결과를 설명하는 데 상당히 강력합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보면 일본이 조선을 바라보던 시선 속에 이미 들어 있던 <제국주의적 우월의식>을 과소평가할 위험이 있습니다.

일본의 논리는 아주 빠른 속도로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

에서

<조선은 개혁되어야 한다>

로,

그리고 다시

<조선은 우리가 개혁해야 한다>

로,

결국에는

<조선은 스스로 국가를 운영할 수 없다>

로 이동하게 됩니다.

1894년에서 1910년까지의 16년은 바로 이 문장이 변해 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결론

함재봉의 1890년대 조선·청·일론을 가장 간명하게 정리하면 이것입니다.

<조선은 일본을 너무 낮게 보았고, 청은 일본을 너무 늦게 다시 보았으며, 일본은 조선과 청을 너무 빨리 ‘뒤떨어진 타자’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 서로 반대 방향의 두 가지 오인이 생겼습니다.

조선과 청에게는 <문화적 우월감 때문에 상대의 새로운 힘을 보지 못하는 오류>가 있었고,

일본에게는 <근대화의 성공을 문명적 우월성으로 바꾸어 타국을 개조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오류>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청일전쟁은 단순히 힘센 일본이 약한 청을 이긴 사건이 아닙니다.

<중국을 중심으로 조선과 일본이 위치하던 오래된 동아시아의 정신적 지도 자체가 뒤집어진 사건>입니다.

그리고 세진님이 최근 읽으신 나카츠카 아키라의 <동학농민전쟁과 일본>, <일본인의 메이지관을 바로잡는다>, 무쓰 무네미쓰의 <건건록>까지 연결하면 다음 질문이 훨씬 더 중요해집니다.

<일본은 언제부터 ‘우리가 먼저 근대화했다’는 사실을 ‘그러므로 우리가 조선을 지도할 권리가 있다’는 논리로 바꾸었는가?>

바로 이 지점이 함재봉과 나카츠카 아키라가 가장 흥미롭게 갈라지는 곳입니다. 다음에는 이 문제를 <함재봉 vs 나카츠카: 1894년 조선·청·일의 상호인식>이라는 형태로 비교하면 상당히 중요한 분석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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