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 평전
신복룡 (지은이)글을읽다2024-09-25


책소개
한국인이라면 ‘전봉준’이란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거기에 이 『전봉준 평전』을 읽으면 더욱 처연한 심정이 든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가 1982년에 처음 출간한 이래 판을 거듭하면서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이 이번에 개정 4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지금까지 60여 권의 저서를 펴낸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의 저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다. 일찍이 동학 연구를 시작해, 이 책에는 다른 전봉준 연구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 자료가 들어있다. 저자는 자신이 “시대적으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몸소 겪었거나 전봉준을 만났던 인물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라며, 1961년부터 동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호남과 충남지역에는 동학군에 참여한 경험이 있거나 어린 시절 전봉준을 만난 적이 있는 80대의 노인들이 살아 있었고 그들 덕택에 다른 연구서와는 큰 변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전봉준의 외손녀, 전봉준의 동지인 나사일의 손자로서 전봉준을 곁에서 본 나홍균, 김덕명의 손자, 김개남의 손자, 손화중의 손자, 옹택규의 손자, 청류암의 신도 등이 그들이다. 20년간 자료와 관련 인물을 찾아 5천여 킬로미터를 달렸고 전봉준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다 거쳐간 “모든 곳과 모든 길”을 찾아다녔다. 따라서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전봉준을 쓸 때 나를 밟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이보다 더 세밀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전봉준을 ‘영웅’이라는 측면에서보다 ‘사람 냄새 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고자 했다. “전봉준은 조국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지배층도 아닌 한낱 시골 서생에 지나지 않았으나 춘추대의를 위해 죽었다. 나는 그의 삶을 증언하고 그 이야기를 후대에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은 인문학적 요소와 저널리스트적인 현장감이 들어있어 읽기 시작하면 바로 빠져드는 흡입력이 있다.
목차
서장(緖章)에 대신하여
다시 쓰는 3판 서문
글머리에
I. 난세(亂世)
1. 삶의 어려움
2. 사상의 피폐
3. 당시의 국제 정세
4. 호남의 한(恨)
5. 메시아를 기다리는 사람들
Ⅱ. 태어남
1. 출생지
2. 가계(家系)와 가문(家門)
3. 수학 시절
4. 유랑의 세월
Ⅲ. 만남
1. 아버지와 아내
2. 동지들
3. 조병갑
Ⅳ. 횃불
1. 항변
2. 고부민란 : 1차 기포(起包)
3. 귀소(歸巢)
Ⅴ. 2차 기포(起包)
1. 박해
2. 무장(茂長)에서 황룡촌(黃龍村)까지
3. 전주성
4. 집강소
Ⅵ. 음모
1. 일본 천우협(天佑俠)과의 관계
2. 대원군(大院君)과의 관계
3. 북접(北接)과의 갈등
Ⅶ. 전봉준은 과연 동학도였을까?
1. 왜 이 문제가 거론되어야 하는가?
2. 종래의 주장과 논쟁의 시말
3. 교도에 관한 논쟁
4. 접주(接主)에 관한 논쟁
5. 맺는 말
Ⅷ. 조선의 십자군 : 3차 기포(起包)
1. 청일전쟁과 일본의 대응
2. 번민
3. 북진
4. 우금고개에서
5. 혁명인가, 전쟁인가?
Ⅸ. 떨어지는 별
1. 패주의 길
2. 황금에 눈이 먼 사람들
3. 공판과 처형
4. 유족(遺族)
부록
전봉준 공초(供草)
전봉준 유적지 답사기
참고문헌
면담자
찾아보기
접기
책속에서
호남이 원통함[寃]을 품게 된 세 번째 원인은 이곳이 곡창지대라는 역설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풍성하다는 것은 수탈의 깊이가 그만큼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민란이 일어나는 지역의 토지는 비옥했다. 민란의 주역인 농민들은 ‘애당초부터’ 굶주렸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풍요를 맛본 적이 있었으나 어떤 기회에 가치를 박탈당한 사람들이다. 접기
“전봉준은 몸이 작지만 얼굴이 희고 눈빛은 형형하여 사람을 쏘는 듯하다. 평소 집에 머물 때는 동네의 소년들을 모아 『동몽선습』을 읽어주거나 『천자문』을 가르쳐 주었다. 동네의 어른들이 찾아오면 고현(古賢)의 사적(史蹟)을 들어 얘기할 뿐 세간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을 때면 종일토록 묵묵히 앉았다 드러누웠다 하였으며, 부모를 봉양함에 그 효성이 지극했다.” 접기
“발통문은 두 개의 봉투 가운데 한 봉투에 동학 대접주 임명장과 같이 들어있었다. 나는 국한문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살고있는 이 집터와 집은 고부면 신중리 대뫼 562번지로 갑오농민혁명 전 (부친이)이곳에 살다가 혁명 뒤 모의자로 지목되어 피신하였기 때문에 집은 관군에 의해 소각당했다. 이 집은 돌아와 다시 지은 것으로 부친이 이곳에 살다가 세상을 떠나고 그 뒤 계속해서 나는 여기에 살고 있다.” 접기
“갑오년, 내 나이 16세가 되던 해의 정월 초팔일은 말목 장날이었다. 석양에 동네 사람들이 쑤군쑤군하더니 조금 있다가 통문이 왔다. 저녁을 먹은 후에 여러 동네에서 징소리며, 나팔소리, 고함소리로 천지가 뒤끓더니 몇천 명의 군중이 내 동네 앞길로 몰려오며 고부군수 탐관오리 조병갑이를 죽인다고 민요(民擾)가 났다. 수만 군중이 사방으로 포위하고 몰려갈 제 군수 조병갑은 정읍으로 망명 도주하여 서울로 도망하였다.” 접기
“군중들이 해산하고 10일도 못 되어 안핵사 이용태는 역졸 800명을 거느리고 고부에 들이닥쳐 새로 부임한 군수 박원명에게 민란의 주모자들을 찾아내라고 위협하며 역졸을 고부 군내에 풀어 마을을 뒤지고 다니며 부녀자들을 강음하고 재산을 약탈하며, 백성들을 마구 구타하고 굴비 꿰듯 사람을 엮어갔다.”
고부민란이 혁명으로 변신하는 과정을 보노라면 우리는 역사가 반드시 거창한 법칙에 따라 예정되고 조화되어 흘러가는 것이 아니요,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것이 그렇게 된 데에는 지극히 미소한 인자가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를테면 이용태의 어리석음과 같은 것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고 하겠다.
전봉준은 접주이기는커녕 동학교도조차도 아니었다. 그는 후세 사가들의 곡필로 동학도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전봉준이 동학도였다거나 아니면 그가 고부의 접주였다는 주장은 그가 동학을 주요한 변수로 하여 전개되었던 혁명을 주도한 지도자라는 사실을 지나치게 의식한 선입견에서 온 성급한 단정이거나, 아니면 영웅과 자신의 동일시를 통해 위광효과를 얻으려는 동학교단 측과 학문적 수련이 철저하지 못한 몇몇 학자들의 일방적인 해석에 지나지 않는다. 접기
여기에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농민군의 주력부대인 김개남 부대와 손화중 부대가 북진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손화중과 최경선은 일본군이 해안으로 상륙한다는 소문이 있어 광주(光州)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북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김개남은 청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이들이 빠진 전봉준 부대는 농민군 가운데서도 가장 취약했으며, 전투 의지의 면에서도 다소는 낭만적이었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신복룡 (지은이)
저자파일
신간알림 신청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졸업(정치학 박사), 건국대학교 교수/석좌교수, 미국 조지타운대학 객원교수, 보훈부 독립유공자서훈심사위원(장).
저서/역서 : <한국정치사>, <한국분단사 연구 : 1943-1953>, <한국정치사상사>, <잘못 배운 한국사>, <해방 정국의 풍경>, <入唐求法巡禮行記>(역), <갑신정변 회고록>, <한말 외국인 기록>(전23권, 역).
최근작 : <한국정치사상사 - 하>,<한국정치사상사 - 상>,<한국분단사 자료집 세트 - 전6권> … 총 112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50년간의 스테디셀러이자 동학혁명 연구자들의 필독서
한국인이라면 ‘전봉준’이란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먹먹해질 것이다. 거기에 이 『전봉준 평전』을 읽으면 더욱 처연한 심정이 든다.
동학 연구의 권위자인 저자가 1982년에 처음 출간한 이래 판을 거듭하면서 독자의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이 이번에 개정 4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지금까지 60여 권의 저서를 펴낸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의 저자’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한다. 일찍이 동학 연구를 시작해, 이 책에는 다른 전봉준 연구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 자료가 들어있다. 저자는 자신이 “시대적으로 갑오동학농민혁명을 몸소 겪었거나 전봉준을 만났던 인물의 증언을 들은 마지막 세대”라며, 1961년부터 동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호남과 충남지역에는 동학군에 참여한 경험이 있거나 어린 시절 전봉준을 만난 적이 있는 80대의 노인들이 살아 있었고 그들 덕택에 다른 연구서와는 큰 변별력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전봉준의 외손녀, 전봉준의 동지인 나사일의 손자로서 전봉준을 곁에서 본 나홍균, 김덕명의 손자, 김개남의 손자, 손화중의 손자, 옹택규의 손자, 청류암의 신도 등이 그들이다. 20년간 자료와 관련 인물을 찾아 5천여 킬로미터를 달렸고 전봉준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살다 거쳐간 “모든 곳과 모든 길”을 찾아다녔다. 따라서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전봉준을 쓸 때 나를 밟고 넘어가지 않고서는 이보다 더 세밀한 글을 쓰기는 어려울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전봉준을 ‘영웅’이라는 측면에서보다 ‘사람 냄새 나는’ 인간의 모습으로 그리고자 했다. “전봉준은 조국의 운명을 책임져야 할 지배층도 아닌 한낱 시골 서생에 지나지 않았으나 춘추대의를 위해 죽었다. 나는 그의 삶을 증언하고 그 이야기를 후대에 들려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 책은 인문학적 요소와 저널리스트적인 현장감이 들어있어 읽기 시작하면 바로 빠져드는 흡입력이 있다.
이 책에는 초판 서문을 비롯해, 3판, 4판의 서문이 나란히 들어있어 책의 역사성을 보여 주고 있다. 본문은 난세, 태어남, 만남, 횃불, 2차 기포(起包), 음모, 전봉준은 과연 동학도였을까?, 조선의 십자군 : 3차 기포, 떨어지는 별 등 모두 9장으로 구성돼 있고 부록으로는 전봉준이 취조를 받았던 공초(供草)의 원문과 번역, 그리고 저자의 전봉준 유적지 답사기가 수록돼 있다.
이 책에서 눈에 띄는 대목을 몇 가지만 짚어보면, 그 하나는 호남 차별의 역사성을 짚어내고 있는 지점이다. 곡창지대가 수탈의 장소가 되었고 또 역사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왕건의 훈요십조에서 호남 차별이 시작되어 미륵신앙을 통해 원통함을 풀고 있던 민중들에게 전봉준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봉준이 ‘동학교도’라는 사실에 의문을 표시하여 천도교와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킨 것이다. 저자는 전봉준이 동학에 입교했음을 보여 주는 어떠한 사료도 없으며, 그가 접주였다는 주장은 최시형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기정사실화한 것이었을 뿐이라고 말한다. “요컨대 전봉준은 접주이기는커녕 동학교도조차도 아니었다. 그는 후세 사가들의 곡필로 동학도로 규정되었을 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전봉준의 출생지가 정읍이 아닌 고창군 덕정면 죽림리 당촌마을이라는 것. 저자는 이기화 고창문화원장이 오랜 추적 끝에 이러한 사실을 밝혀냈다며 당촌 일대의 구전, 전봉준의 족보, 그리고 선대와 형제의 묘소를 추적하면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다고 말한다. 한편 전봉준 유적지 답사기에서 저자는 마지막으로 전봉준이 머물렀던 백양사 청류암에서 전봉준이 남긴 글씨를 찾아 책에 수록했다.
저자는 서문에서 전봉준이 처음 고부민란을 일으킨 1894년 1월이 동학혁명기념일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 2차 기포가 있었던 1894년 5월에 맞춰 기려지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5공 시절 성역화 사업을 한다며 막대한 보조금을 내려보내는 과정에서 고창과 정읍 사이의 주도권 싸움이 벌어져 이런 역사왜곡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금이라도 여기에 동원된 학자와 정치인들이 정도(正道)로 나가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곡진하게 말했다. 접기
===
신복룡, <전봉준 평전> — 1,000단어 요약·평론
신복룡의 <전봉준 평전>은 전봉준을 완성된 민족 영웅으로 기념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후대의 민족주의적·종교적 전승이 전봉준에게 덧씌운 이미지를 하나씩 걷어내고, 제한된 사료와 현장 조사를 통해 그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복원하려는 비판적 평전이다. 저자는 1961년부터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하면서 호남과 충청 지역을 답사했고, 동학농민군에 참여했거나 어린 시절 전봉준을 보았던 사람들 및 그 후손을 면담했다. 그래서 이 책은 문헌 연구와 구술사, 지리적 답사를 결합한 초기 전봉준 연구라는 독특한 가치를 지닌다. 초판은 1982년에 나왔으며, 1996년 재판과 2019년 개정 3판을 거쳐 2024년 개정 4판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최신판에는 전봉준의 공초와 저자의 답사 기록도 수록되어 있다. 개정판 소개와 구성
1. 몰락하는 조선과 호남의 농민사회
신복룡은 전봉준의 생애를 개인적 영웅담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먼저 19세기 말 조선이 처한 구조적 위기를 제시한다. 왕권은 약화되고 세도정치와 지방관의 수탈은 일상화되었다. 삼정의 문란, 토지 집중, 환곡과 군포의 폐해는 농민의 생존을 위협했다. 특히 호남은 조선의 곡창이었으므로 풍요로운 지역인 동시에 가장 집중적으로 수탈당하는 지역이었다.
저자는 여기에 호남 차별의 역사적 기억과 미륵신앙 같은 민중적 구원관을 결합한다. 억압받던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은 제도적 개혁만으로 상상되지 않았다. 그것은 세상이 뒤집히고 억울함이 풀리는 종교적·도덕적 전환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조건에서 전봉준은 처음부터 메시아였던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집단적 열망이 집중되면서 구원자의 형상을 얻게 된 인물이었다.
전봉준의 출생지와 가계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여러 설이 대립했다. 저자는 족보나 후대의 기념비적 설명을 그대로 믿지 않고 현지 증언과 생활공간을 추적한다. 그가 복원하는 전봉준은 명문가 출신도, 완전히 무학한 빈농도 아니다. 몰락한 양반 또는 향촌 지식인에 가까운 인물로서 한문을 읽고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약재를 다루고 풍수에도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그려진다. 사회적 신분은 애매했지만 바로 그 경계적 위치 때문에 농민의 고통을 이해하면서도 관청에 문서를 제출하고 지도자들과 교섭할 능력을 가질 수 있었다.
2. 조병갑의 학정과 고부봉기
전봉준을 혁명가로 만든 직접적인 계기는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이었다. 조병갑은 이미 있던 저수지를 두고 만석보를 새로 쌓게 한 뒤 농민들에게 물세를 거두고, 각종 명목으로 재물을 착취했다. 전봉준의 아버지가 조병갑에게 항의하다가 곤장을 맞고 사망했다는 전승도 있다. 신복룡은 이러한 이야기를 무비판적으로 영웅의 탄생 신화로 만들지는 않지만, 가족의 고통과 지역 공동체의 분노가 전봉준의 행동을 촉진했다고 본다.
1893년 말 농민 지도자들은 사발통문을 돌려 봉기를 준비했고, 1894년 1월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전봉준은 개인적 복수에 머물지 않았다. 무기고를 열고 곡식을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무분별한 살육과 약탈을 억제하려 했다. 이 점에서 저자가 그리는 전봉준의 지도력은 카리스마보다는 절제와 현실 판단에 가까웠다.
새로 부임한 안핵사 이용태가 봉기 참가자들을 동학교도로 몰아 가혹하게 탄압하자 사태는 지역 민란을 넘어섰다. 전봉준은 무장으로 이동해 손화중·김개남 등과 연합했고, 1894년 3월 다시 봉기했다.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촌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탐관오리 제거, 신분 차별 철폐, 부당한 토지와 세금 제도의 시정이라는 요구가 분명해졌다.
3. 전주화약과 집강소
조정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이를 구실로 일본군도 조선에 들어왔다. 외국군의 개입을 우려한 농민군과 정부는 전주화약을 맺었다. 농민군은 전주성에서 물러났고, 전라도 각지에는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집강소는 이 책에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농민군이 단순히 분노를 폭발시킨 폭도가 아니라, 스스로 지방질서를 운영하고 폐정을 개혁할 능력을 지닌 정치세력이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노비문서 소각, 천인 차별 개선, 토지와 부채 문제의 시정, 탐관오리 응징 등의 요구는 조선왕조의 사회질서를 아래로부터 바꾸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신복룡은 집강소를 근대 민주주의의 완성된 제도로 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앙권력을 대체하는 국가기구도 아니었고, 지역별 운영 방식도 달랐다. 그럼에도 백성이 통치의 객체에서 주체로 나서려 했다는 점에서 한국 정치사에 드문 자치 실험이었다.
4. 전봉준은 정말 동학교도였는가
이 책에서 가장 논쟁적인 부분은 “전봉준은 과연 동학도였을까?”라는 질문이다. 일반적인 역사 서술은 전봉준이 35세 무렵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 접주가 되었다고 설명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일반적 서술 그러나 신복룡은 전봉준이 정식 동학교도나 접주였다는 동시대의 확실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봉준이 동학 조직과 언어를 활용하고 동학교도들과 함께 싸운 사실과, 그가 교단에 소속된 신앙인이었다는 주장을 구별한다. 전봉준의 행동을 이끈 핵심 동력은 교조신원운동이나 종교 포교보다 탐관오리 제거, 민생 안정, 국권 수호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에게 1894년의 운동은 종교운동이 확대된 사건이라기보다 농민의 사회혁명에 동학 조직이 결합한 사건에 가깝다.
이 주장은 천도교계와 기존 학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 의미는 동학의 역할을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 사건의 명칭이 역사 해석을 미리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에 있다. 다만 접주였다는 기록과 동학 조직 내부의 전승도 존재하므로, 전봉준의 동학 신앙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 역시 단정적이다. 가장 합리적인 해석은 그가 교리 중심의 종교 지도자라기보다 동학의 평등사상과 조직망을 현실 정치의 언어로 전환한 농민 지도자였다는 것이다.
5. 일본 침략과 제3차 봉기
전주화약 이후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조선 조정을 장악했으며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때부터 농민군의 투쟁은 국내 개혁운동을 넘어 일본의 군사적 침략에 맞서는 전쟁으로 변했다. 저자가 제3차 봉기를 “조선의 십자군”이라고 부르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농민들은 승산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알면서도 나라를 구한다는 도덕적 확신으로 북상했다.
그러나 남접과 북접 사이에는 오랜 불신이 있었다.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 지도부는 급진적 봉기가 교단을 파괴할 것을 우려했고, 전봉준의 남접 세력은 북접의 소극성을 비판했다. 양측은 일본군에 맞서 뒤늦게 연합했지만 통일된 지휘체계를 이루지 못했다.
우금치 전투의 패배는 정신력의 부족 때문이 아니었다. 일본군과 관군은 근대식 소총과 조직적 지휘체계를 갖췄지만 농민군은 화승총·창·농기구에 의존했다. 수만 명의 농민이 참가했어도 화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었다. 이 패배는 조선 농민의 실패라기보다 근대 제국주의 군대와 전근대적 농민군 사이의 압도적인 군사기술 격차를 보여준다.
패전 후 전봉준은 순창 피노리에서 옛 부하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었다. 일본군은 그를 서울로 압송했고 조선 법정은 사형을 선고했다. 공초에서 전봉준은 봉기의 목적을 탐관오리를 제거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일본과 내통했다거나 왕이 되려 했다는 혐의를 부인했고 동료에게 책임을 떠넘기지도 않았다. 그는 1895년 4월 처형되었다.
6. 평론—영웅을 해체하면서 더 큰 인물로 만들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전봉준을 신화에서 역사로 되돌려 놓았다는 점이다. 저자는 출생지, 가계, 동학 입교, 일본 우익단체 천우협과의 관계, 대원군과의 연결 등 논쟁적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전봉준을 흠 없는 민족 영웅으로 만들기보다 망설이고 연합하며 때로는 오판했던 정치적 인간으로 그린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 때문에 전봉준의 용기와 도덕성이 더욱 뚜렷해진다.
구술 증언과 현장 답사는 이 책의 독보적인 자산인 동시에 약점이기도 하다. 사건 발생 후 60여 년이 지난 뒤 수집된 기억에는 착오와 지역 전설, 후대의 영웅화가 섞일 수 있다. 저자가 여러 증언을 비교하지만, 문헌으로 확인되지 않는 이야기를 생생한 서사로 연결하는 대목에서는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또한 전봉준 개인에게 초점이 집중되면서 이름 없는 농민들, 여성 참가자, 집강소의 일상적 운영은 상대적으로 희미해진다.
신복룡의 전봉준은 왕조를 전복하려는 이념적 혁명가라기보다 무너진 국가의 도덕성을 백성의 힘으로 회복하려 한 실천가다. 그러나 운동의 실제 요구—신분질서 개혁, 토지 문제 시정, 지방권력 재편—는 그 의도보다 훨씬 혁명적이었다. 전봉준은 근대적 공화주의자는 아니었지만 “백성은 통치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원리를 행동으로 드러냈다.
동학농민혁명은 결국 패배했다. 개혁 요구의 일부는 갑오개혁에 흡수되었지만 농민은 그 개혁의 주체에서 배제되었고, 일본은 조선의 내란을 침략의 기회로 이용했다. 이런 의미에서 전봉준의 죽음은 조선 내부 개혁 가능성의 좌절이자 식민지로 향하는 길목의 비극이다. 신복룡의 <전봉준 평전>은 그 비극을 감상적인 순교 이야기로 소비하지 않는다. 이 책이 남기는 핵심 질문은 분명하다. 국가가 백성의 고통을 외면할 때 누가 질서를 무너뜨린 것인가. 봉기한 농민인가, 아니면 먼저 정의를 파괴한 지배층인가.
이 질문 때문에 전봉준은 1894년에 머물지 않는다. 그는 평화를 원했으나 불의한 질서에 순응하지 않았고, 외세를 배척했으나 폐쇄적 왕조의 복원만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의 실패는 개혁을 거부한 국가가 결국 주권까지 잃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책에서 전봉준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영웅적 죽음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개혁을 억누른 사회는 더 큰 폭력과 외세의 지배를 불러온다는 역사적 경고라고 평가할 수 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