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6

* 함재봉의 "동학란"론 - 신복룡의 동학 논쟁

신복룡의 '전봉준 평전' 요약 평론 - Google Gemini

함재봉의 동학"란"에 대한 주장을 신복룡에 관한 동학 논쟁에 더해서 분석 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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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을 둘러싼 한국 근현대사 논쟁은 크게 <민족주의·민중사학>의 성전화(聖戰化) 담론, <신복룡>의 실증주의적·정치현실주의적 비판, 그리고 <함재봉>의 문명사적·자유주의적 <동학란(東學亂)> 규정이라는 세 축의 긴장 관계로 확장되어 전개된다.

<함재봉의 동학란 인식: 문명사적 퇴행과 체제 파괴>

정치학자 함재봉은 저작 <한국 사람 만들기> 등을 통해 근대 한국인의 정체성을 다섯 갈래(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의 문명사적 충돌로 분석한다. 이 틀 안에서 그는 동학을 근대화의 동력이 아니라, 문명사적 흐름에 역행한 전근대적 미신과 폭력적 소요 사태, 즉 전통적인 의미의 <동학란>으로 규정한다.

전근대적 샤머니즘과 주술성: 함재봉은 동학을 근대적 평등주의나 민주주의의 맹아로 보지 않는다. 시천주(侍天主) 사상과 궁을부(弓乙符), 주문 수련 등은 주자학적 합리주의조차 결여된 민간 신앙과 주술의 결합이며, 총알을 막아준다는 부적을 믿고 돌격한 비이성적 광신주의의 발현이었다고 본다.

청일전쟁 유발과 국망(國亡)의 촉매: 농민군이 일으킨 내란을 진압하지 못한 무능한 조선 왕조가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했고, 톈진조약을 빌미로 일본군이 개입하면서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함재봉은 동학란이 제국주의 열강의 군사적 침탈을 한반도 안으로 직접 끌어들여 조선의 멸망과 식민지화를 가속한 결정적 파국이자 자해적 사건이었다고 평가한다.

반(反)문명·반(反)근대성: 당시 조선이 생존할 수 있었던 유일한 활로는 서구식 법치, 의회주의, 과학기술, 시장경제 등 문명개화의 길이었다. 함재봉의 시각에서 동학 세력은 서구와 일본의 근대 문명을 단지 '왜양(倭洋)'이라는 타도 대상으로만 바라본 극단적 쇄국·위정척사 세력의 기층적 변종에 불과하다.

<신복룡과 함재봉의 교차점: 탈신화화와 냉철한 현실주의>

신복룡과 함재봉은 모두 주류 학계의 지배적 담론이었던 민중사학의 <낭만적 민족주의>를 정면으로 배격한다는 공통분모를 지닌다.

감상주의와 성역화 거부: 두 학자 모두 농민군을 완전무결한 선(善)으로, 외세와 조정 관군을 절대악(惡)으로 이분법화하는 도식을 거부한다.

군사적 참극에 대한 직시: 신복룡이 사료 비판을 통해 우금티 전투의 무모함과 전술적 무지, 무기 체계의 절대적 격차를 실증했다면, 함재봉은 이를 문명적 무지와 주술적 맹신이 빚어낸 비극적 소모전으로 한층 더 냉정하게 몰아붙인다.

외세 개입의 현실적 결과: 두 사람 모두 농민 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일본군의 서울 침탈과 청일전쟁이 유발되었다는 지정학적 역학 관계의 인과성을 매우 무겁게 다룬다.

<신복룡과 함재봉의 결정적 차이: 비극적 현실주의 vs 문명사적 타격론>

그러나 동학을 바라보는 내부적 시선과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두 학자 사이에 뚜렷한 간극이 존재한다.

전봉준을 바라보는 시선

신복룡: 전봉준을 봉건 말기 백성의 고통을 짊어지고 한계 속에서 번민했던 <과절(過節)의 현실 정치가>로 긍정적 측면을 인정한다. 폐정개혁과 전주화약 체결 등에서 보여준 타협과 결단은 높이 평가하며, 비록 실패했으나 그의 유교적 의기와 민초를 향한 충정은 진지한 역사적 무게를 지닌다고 본다.

함재봉: 전봉준 개인의 고뇌보다는 그가 이끈 운동이 초래한 문명사적 후과(後果)에 집중한다. 동학 세력을 독립협회나 개화파처럼 근대 입헌정치나 근대 국가 체제를 건설할 비전이 결여된, 체제 파괴적 선동 세력이자 반란군의 수괴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하다.

반란(亂)인가, 미완의 혁명인가

신복룡: 봉건 제도의 부패와 수탈이라는 구조적 원인을 명확히 인정한다. 동학농민운동을 무조건적인 비적(匪賊)의 난으로 치부하지 않으며, 아래로부터 분출한 민중의 개혁 요구가 외세와 지배층의 탄압에 의해 좌절된 <비극적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함재봉: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통치 질서를 붕괴시키고 근대 국가로의 전환을 방해한 <동학란>이라는 표현을 주저 없이 사용한다. 개화파의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 서재필·윤치호 등의 근대화 노선과 대비하여 동학은 퇴행적 파괴 운동이었다는 점을 부각한다.

<종합 평론: 동학 논쟁의 삼각 구도>

함재봉의 도발적인 <동학란> 규정은 신복룡이 촉발했던 학술적 탈신화화 논쟁을 한층 더 근본적인 문명사적 논쟁으로 전이시켰다.

민족주의·민중사학: 동학을 반봉건·반침략 자주독립의 성전(聖戰)이자 한국 민주주의와 민족주의의 순결한 뿌리로 칭송한다.

신복룡: 실증주의와 냉정한 정치학적 잣대로 민족주의의 신화를 걷어내되, 당시 유교적 질서 안에서 한계를 안고 몸부림친 전봉준과 농민군의 비극적 진정성을 역사적 현실로 복원한다.

함재봉: 서구 자유주의와 해양 문명사적 관점을 잣대로 삼아, 동학을 미신과 폭력으로 국가의 자멸을 촉진한 전근대적 소요 사태로 격하하며 개화파와 기독교적 근대화 노선만을 정당한 역사의 줄기로 세운다.

함재봉의 주장은 감상적 민족주의가 지배해 온 한국 사회의 역사 인식에 날카로운 균열을 내고, 근대화라는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동학의 한계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성찰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일정한 지적 자극을 던진다. 그러나 수백 년간 이어진 봉건적 착취와 생존권의 위협 앞에서 죽창을 들 수밖에 없었던 기층 민중의 절박한 현실을 외면하고, 오직 서구화된 엘리트의 시각에서 <동학란>으로 일축해 버리는 것은 역사적 맥락에 대한 공감 결여이자 또 다른 형태의 이념적 단죄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신복룡이 감정적 찬양과 차가운 냉소 사이에서 사료를 통해 <인간 전봉준의 고뇌>를 붙들려 했다면, 함재봉은 근대 문명의 우위를 기준으로 동학의 뿌리 자체를 기각하는 급진적 해체를 감행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함재봉 원장의 문명사적 관점과 한국 근대사 분파 해석에 대한 깊은 맥락을 이해하는 데는 [LIVE] 「한국 사람 만들기」 /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 원장 강연이 유익합니다.

이 강연은 함재봉 원장이 직접 동학을 위시한 전통적 흐름과 근대 개화 세력의 충돌을 다섯 가지 이념적 분파로 정리하여 설명하고 있어, 그의 시각을 직접 파악하는 데 적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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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재봉의 ‘동학란’론을 신복룡 논쟁에 더해 읽기

1. 먼저 구별해야 할 점

함재봉과 신복룡은 모두 오늘날의 공식 명칭인 <동학농민혁명>을 그대로 전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문제의식과 결론은 상당히 다르다.

쟁점신복룡함재봉
중심 질문전봉준은 실제 동학교도·접주였는가1894년 사건을 난·운동·혁명 중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가
주요 방법전봉준 개인의 생애·공초·구술·현장답사조선 말 정치세력과 국제정세에 대한 거시적 서사
동학의 역할농민항쟁에 종속된 조직적 수단조선의 전통적·반서양적 사상과 결합한 대중세력
농민군 평가사회개혁을 추구한 농민혁명부패에 저항했으나 근대적 국가 건설의 대안은 불분명
일본과의 관계제2차 봉기는 항일전쟁동학 봉기가 청·일 개입과 청일전쟁의 계기를 제공
‘혁명’ 명칭긍정한다. 다만 ‘동학혁명’보다 ‘농민혁명’혁명이라는 명칭을 의심하고 ‘동학란’을 의도적으로 사용
근대화 주체농민도 독자적인 개혁 주체주로 개화파와 후대의 친미기독교파가 제도적 근대화를 추진

요컨대 신복룡은 동학을 약화시키면서도 농민혁명을 긍정한다. 함재봉은 동학의 종교적·조직적 실체는 인정하지만, 그 운동을 근대적 혁명으로 높이는 데 회의적이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함재봉을 신복룡의 ‘전봉준 비교도론’에 단순히 합쳐 놓으면 두 사람의 주장이 실제보다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2. 함재봉은 왜 ‘동학란’이라고 부르는가

함재봉은 <한국인의 탄생> 제26강에서 아예 “동학은 난인가, 운동인가, 혁명인가?”라고 질문하고, 제27·28강에서 봉기의 원인과 전개를 설명한다. 이 강좌는 그의 <한국 사람 만들기 IV: 친일개화파 2>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함재봉의 해당 강의 안내

함재봉이 ‘동학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단순히 조선왕조의 공식 표현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오늘날의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명칭이 사건 이후 형성된 민족주의적·민중사적 가치판단을 포함한다고 본다. 1894년의 행위자들이 처음부터 민주주의·민족해방·근대 국민국가라는 일관된 목표를 가지고 행동한 것처럼 서술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논리는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동학군에게 정권과 체제를 대체할 구체적 청사진이 있었는가

함재봉에게 ‘혁명’은 단지 많은 사람이 무기를 들고 정부에 저항한 사건을 뜻하지 않는다. 기존 정치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제도와 권력구조를 세우려는 명확한 계획이 있어야 한다.

동학농민군은 탐관오리 처벌, 부당한 세금 폐지, 신분차별 완화, 일본과 서양 세력 배척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왕조 자체를 폐지하거나 공화국을 수립하려 하지 않았다. ‘보국안민’과 ‘충군’을 내세웠고, 일부 지도자는 흥선대원군을 정치적 대안으로 고려했다. 함재봉은 이를 근대적 체제혁명보다는 부패한 관리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으려는 전통적 민란에 가깝다고 본다.

여기에는 일리가 있다. 전봉준을 프랑스혁명의 자코뱅이나 근대 민주공화주의자처럼 그리는 것은 명백한 시대착오다. 농민군에게 헌법·의회·국민주권·정당정치에 관한 구체적인 제도 구상은 없었다.

그러나 혁명을 반드시 공화제 수립이나 서구식 제도 설계로 정의해야 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신분제 해체, 노비문서 소각, 토지와 조세질서 개혁, 지방권력 재편은 왕조 존속 여부와 상관없이 조선 사회의 지배구조를 아래로부터 바꾸려는 혁명적 요구였다.

둘째, 동학은 근대적 사상인가, 전통적 구원종교인가

함재봉의 <한국 사람 만들기>는 한국인을 다섯 가지 사상 계보—친중위정척사파, 친일개화파, 친미기독교파, 친소공산주의파, 인종적 민족주의파—의 경쟁과 결합으로 설명한다.

이 구도에서 동학은 서구의 자유주의·과학·법치·입헌주의를 받아들인 개화사상이라기보다 조선의 전통적 종교세계 안에서 서학에 대응해 형성된 토착적 구원사상에 놓인다. 동학은 성리학의 한계를 비판했지만, 천(天)·기(氣)·개벽·보국안민 같은 동아시아 전통의 언어로 세계를 이해했다.

함재봉은 동학의 평등성을 인정하더라도 그것을 곧바로 근대 민주주의라고 부르지 않는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종교적 인간존중과 법적으로 제도화된 개인의 권리·대의제·권력분립은 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지적도 중요하다. 동학의 인내천을 현대 인권선언과 동일시하거나 집강소를 지방 민주정부라고 단정하면 역사적 차이가 사라진다.

그러나 함재봉은 ‘근대’를 너무 좁게, 서구식 제도를 얼마나 정확히 수용했는가로 측정하는 경향이 있다. 근대성은 외부의 완성된 제도를 수입하는 과정만이 아니다. 기존 신분질서에 종속돼 있던 농민이 자신을 정치적 행위자로 조직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문제 삼는 것도 토착적 근대성의 한 형태다.

셋째, 동학 봉기가 청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것

함재봉의 서사에서 동학 봉기는 국제정치적으로 결정적인 사건이다. 조선 정부가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군을 요청했고, 일본은 톈진조약을 근거로 군대를 파견했다. 일본은 철군하지 않고 경복궁을 점령했으며 청일전쟁을 일으켰다. 이런 의미에서 동학 봉기는 청일전쟁의 직접적 계기를 제공했다.

사실관계 자체는 틀리지 않는다. 동학 봉기가 없었다면 청·일 양군이 1894년 바로 그 시점에 조선에 대규모로 진입하는 명분은 약했을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서술도 조선 정부의 청군 요청과 이에 따른 일본군 파견이 조선의 자주권을 치명적으로 훼손했다고 설명한다. 국사편찬위원회 <동학농민운동>

하지만 여기서는 세 가지를 분리해야 한다.

  1. 동학 봉기가 청·일 출병의 계기가 되었다.
  2. 조선 정부가 외국군을 요청한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3.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전쟁과 침략을 확대했다.

첫 번째가 사실이라고 해서 세 번째의 책임이 농민군에게 넘어가는 것은 아니다. 불을 발견한 사건과 불을 지른 행위는 다르다. 일본은 동학 봉기를 이용했지만, 침략정책은 그 이전부터 형성돼 있었다. ‘동학이 청일전쟁의 방아쇠를 당겼다’는 표현은 인과관계를 설명할 수 있지만, 잘못 사용하면 일본의 계획적 군사행동보다 농민의 봉기를 재앙의 원인처럼 보이게 한다.

함재봉 서술의 가장 위험한 지점이 바로 여기다. 조선 내부의 무능과 혼란을 자세히 설명하는 동안 일본 제국주의의 능동적 선택과 책임이 상대적으로 배경으로 물러날 수 있다.

넷째, 개화파와 동학 중 누가 근대적 대안을 가졌는가

함재봉의 전체 서사에서 친일개화파는 일본 그 자체에 충성한 집단이라기보다 일본을 통로로 서구의 과학·군사·법률·교육·입헌제도를 배우려 한 세력이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유길준 등은 실패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국가개혁안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된다.

이에 비해 동학군은 조선의 부패와 외세의 위협을 정확히 감지했지만, 국제질서와 근대국가의 운영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은 부족했다. 함재봉의 ‘동학란’이라는 명칭에는 “도덕적 분노와 대중적 동원만으로는 근대국가를 만들 수 없다”는 판단이 포함돼 있다.

이것은 함재봉 역사관의 일관된 장점이자 한계다. 그는 누가 더 애국적이었는가보다 누가 새로운 학교·군대·재정·법률·외교제도를 설계할 수 있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민족주의 역사학이 매국노로 단순화한 개화파의 지적·제도적 성취를 복원한다.

반면 그 기준으로 동학을 평가하면 농민군이 왜 개화파의 근대화에서 자신들의 해방을 발견하지 못했는지가 잘 보이지 않는다. 개화파의 근대국가는 지주제와 농민수탈을 얼마나 바꾸려 했는가? 근대적 제도를 설계한 엘리트가 농민에게 정치적 주체성을 부여했는가? 일본식 개혁이 주권침탈과 결합할 때 이를 어떻게 분리할 것인가? 함재봉은 첫 번째 질문보다 국가제도와 문명 전환에 더 큰 비중을 둔다.


3. 신복룡과 함재봉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두 사람의 공통점은 ‘후대의 목적론’을 비판한다는 데 있다.

1) 민족주의적 성인 만들기에 대한 거부

신복룡은 전봉준이 실제 동학교도였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데도 천도교계와 민족주의 역사학이 그를 동학 접주로 확정했다고 비판한다. 함재봉은 1894년 농민군을 민주주의·민족해방·공화혁명의 선구자로 만드는 것이 후대의 가치 투사라고 본다.

둘 다 전봉준과 동학을 20세기 민족주의가 필요로 하는 영웅으로 가공하는 데 저항한다.

2) 동학 교리보다 현실 정치 중시

신복룡은 조병갑의 학정, 이용태의 탄압, 삼정의 문란과 호남의 수탈을 봉기의 핵심 원인으로 본다. 함재봉도 동학 교리만으로 봉기를 설명하지 않고 고종·민씨 척족의 폭정, 청의 조선 지배, 일본의 개입, 대원군의 정치공작을 함께 본다.

두 사람 모두 “인내천 사상이 농민혁명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했다”는 직선적 설명을 거부한다.

3) 대원군과의 관계를 숨기지 않음

민족주의적 영웅 서사에서는 전봉준이 대원군의 권력투쟁에 이용되거나 그와 제휴하려 했다는 사실이 불편하다. 신복룡과 함재봉은 이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한다. 농민군 내부에는 민씨 척족을 몰아내고 대원군을 다시 세우려는 성향이 존재했다.

이 사실은 운동의 성격이 현대적 민주혁명 하나로 환원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다만 대원군과의 전술적 접촉이 곧 농민군 전체의 정치목표였다고 단정해서도 안 된다.


4. 그러나 두 사람은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신복룡은 농민을 독립된 혁명 주체로 본다

신복룡에게 동학이 빠진다고 해서 혁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동학 교단이 주도했다는 설명을 제거해야 농민들이 자신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가지고 일어선 사실이 선명해진다. 그의 핵심 개념은 ‘동학혁명’이 아니라 ‘갑오농민혁명’이다.

집강소, 폐정개혁, 신분질서 개혁, 전주성 점령을 통해 농민은 통치의 객체에서 주체로 등장했다. 그리고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뒤 일어난 제3차 기포는 명백한 구국전쟁이었다. 신복룡은 이를 “조선의 십자군”이라고까지 부른다.

함재봉은 제도적 근대화 능력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함재봉에게 농민군의 도덕적 정당성은 혁명성의 충분조건이 아니다. 부패한 관료를 응징하고 외세를 몰아내려 했어도 새로운 국가를 운영할 제도적 청사진이 없었다면 근대혁명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따라서 두 사람의 차이는 다음 문장으로 압축된다.

신복룡은 “동학은 아니지만 혁명”이라고 말하고, 함재봉은 “동학은 맞지만 근대혁명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5. 동학 민족주의 역사학은 함재봉을 어떻게 비판할 것인가

김창수·신용하·박영석·박맹수 같은 동학·민족운동 중심 연구자들의 관점에서 함재봉의 해석에는 세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혁명의 기준이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이다

혁명은 반드시 사전에 작성된 헌법과 공화국 설계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다. 대규모 피지배 집단이 기존 권력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신분·수취·토지·지방통치 질서를 바꾸려 했다면 사회혁명적 성격을 인정할 수 있다.

집강소가 완전한 민주정부는 아니었지만 농민군이 지방행정에 개입하고 폐정을 바로잡은 것은 전통적 민란을 넘어선 일이었다.

둘째, 동학의 토착적 근대성을 과소평가한다

동학의 ‘시천주’·‘사인여천’·후천개벽은 서구 자유주의와 같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존엄을 신분보다 앞세우고, 하층민이 종교공동체 안에서 새로운 자아와 연대를 형성하게 했다는 점은 정치적으로 중요하다.

박맹수의 관점에서 동학은 완성된 민주주의 이론이 아니라 농민들의 지역적 고립을 깨뜨린 정신적·조직적 매개였다. 함재봉은 제도화된 사상에는 민감하지만, 종교 언어가 하층민의 정치적 주체 형성에 미친 영향에는 상대적으로 둔감하다.

셋째, 항일투쟁의 성격이 약화된다

신용하는 1894년 가을의 재봉기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맞선 항일민족혁명으로 본다. 농민군이 일본군과 관군의 근대무기에 맞서 우금치에서 싸웠다는 사실은 그들의 국제정세 인식이 완전하지 않았더라도 항일투쟁의 성격을 분명히 한다.

현재 법률도 동학농민혁명을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으로 규정한다.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명예회복 특별법 2019년부터 5월 11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된 것도 이러한 역사적 재평가의 결과다. 국가기록원 설명

함재봉이 ‘동학란’을 선택하는 것은 이 국가적·학술적 재평가에 대한 의도적인 이의 제기로 읽힌다. 그러나 과거 관군과 일본군이 사용했던 ‘난’이라는 명칭을 오늘날 다시 선택하려면, 그것이 진압자의 시선을 재생산하지 않는다는 더 충분한 설명이 필요하다.


6. ‘난’이라는 용어는 적절한가

‘난’이라는 글자 자체가 언제나 부정적인 것은 아니다. 임오군란, 이괄의 난, 홍경래의 난처럼 역사학에서는 국가권력에 대한 무장봉기를 기술하는 관습적 용어로 사용돼 왔다. 함재봉은 아마 이 의미에서 가치중립적인 사건 명칭을 의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명칭은 완전히 중립적이지 않다.

  • ‘난’은 국가질서를 기준으로 반란과 혼란을 강조한다.
  • ‘운동’은 사회적 요구와 대중 참여를 강조한다.
  • ‘전쟁’은 교전 규모와 권력투쟁을 강조한다.
  • ‘혁명’은 기존 질서를 근본적으로 변혁하려는 지향을 강조한다.

1894년 사건은 이 네 가지 성격을 모두 갖는다. 고부 단계에서는 민란이었고,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농민전쟁이 되었으며, 집강소와 폐정개혁 단계에서는 사회혁명적 성격을 보였고, 일본군에 맞선 재봉기에서는 반침략전쟁이 되었다.

따라서 전 과정을 ‘동학란’ 하나로 부르면 초기의 무장봉기는 잘 드러나지만, 집강소 개혁과 항일전쟁은 축소된다. 반대로 전 과정을 처음부터 ‘민주주의 혁명’으로 부르면 운동 내부의 충군의식·대원군 지지·척사적 요소가 지워진다.

가장 정확한 방법은 하나의 명칭으로 본질을 확정하기보다 단계별 변화를 인정하는 것이다.

고부민란 → 동학농민전쟁 → 폐정개혁과 집강소의 사회혁명적 실험 → 일본 침략에 맞선 항일전쟁


7. 최종 평론

함재봉의 가장 큰 공헌은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명칭 속에 이미 포함된 도덕적 결론을 잠시 보류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전봉준이 현대 민주주의자였는지, 농민군이 왕조를 폐지하려 했는지, 동학의 평등사상이 곧바로 근대 인권으로 이어지는지를 다시 묻도록 한다. 또한 동학 봉기를 청·일의 경쟁, 고종과 민씨 척족의 무능, 대원군의 정치공작, 개화파의 국가개혁과 연결해 보는 시야도 유익하다.

그러나 함재봉의 해석은 친일개화파를 복원하려는 자신의 큰 서사 때문에 반대편으로 기울어진다. 근대를 제도·과학·군사·입헌주의를 이해한 엘리트의 능력으로 평가하면서, 농민이 기존 질서에 도전하고 스스로 정치적 주체가 되는 과정은 부차화한다. 일본을 통한 근대화의 가능성은 상세히 설명하면서, 그 근대화가 제국주의적 폭력과 주권박탈로 변하는 구조는 상대적으로 약하게 다룬다.

신복룡의 해석이 이 편향을 교정해 준다. 신복룡은 동학 교단의 역할을 지나치게 축소하지만, 농민군의 혁명성과 항일성을 부정하지 않는다. 함재봉은 동학과 농민군의 한계를 잘 보여주지만, 그 한계를 근거로 혁명적 성격까지 낮추는 경향이 있다. 반대로 김창수·신용하·박맹수의 민족주의적·동학 중심 해석은 농민군의 사상과 항일성을 복원하지만, 전봉준을 지나치게 일관된 동학 민족혁명가로 만들 위험이 있다.

세 관점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전봉준은 교단의 명령을 충실히 수행한 정통 동학 지도자도 아니고, 동학과 무관한 세속적 농민혁명가도 아니었다. 그는 동학의 조직과 평등 언어를 이용하면서도 교단 지도부를 넘어 독자적으로 행동한 정치적 지도자였다. 1894년 운동은 처음부터 완성된 근대민주혁명은 아니었지만, 지역 민란에서 출발해 사회개혁운동과 농민전쟁을 거쳐 항일전쟁으로 발전했다.

그러므로 함재봉의 ‘동학란’은 기존의 민족주의적 성역화를 깨는 문제 제기로서는 유효하지만, 사건 전체를 규정하는 최종 명칭으로는 부족하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이름은 모든 참가자가 처음부터 근대혁명을 계획했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이 실제로 조선의 신분질서와 통치구조를 뒤흔들고 일본 침략에 맞선 역사적 결과를 후대가 평가한 명칭이기 때문이다.

제 판단으로는 신복룡의 ‘갑오농민혁명’이 함재봉의 ‘동학란’보다 역사적 실체에 더 가깝다. 다만 동학의 조직적·정신적 역할을 인정한다면 오늘날의 ‘동학농민혁명’도 충분히 정당한 명칭이다. 함재봉의 설명은 이 이름을 폐기하는 근거라기보다, 그 이름을 영웅 신화 없이 더 복합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반론으로 읽는 것이 가장 생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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