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쓰 무네미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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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쓰 무네미쓰 | |
|---|---|
무쓰 무네미쓰 | |
| 출생 | 1844년 8월 20일 일본 기이국 |
| 사망 | 1897년 8월 24일(53세) 일본 도쿄 기타구 |
| 성별 | 남성 |
| 국적 | |
| 학력 | 고베 해군 훈련소 |
| 직업 | 외교관, 정치인 |
| 경력 | 외무 장관 |
| 배우자 | 무쓰 료코 |
| 무쓰 무네미쓰 | |
|---|---|
| 일본어식 한자 표기 | 陸奥 宗光 |
| 가나 표기 | むつ むねみつ |
|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 | 무쓰 무네미쓰 |
| 로마자 | Mutsu Munemitsu |
무쓰 무네미쓰(일본어: 陸奥 宗光, 1844년 8월 20일 ~ 1897년 8월 24일)는 기슈 번사, 일본 제국의 정치인, 외교관이다. 외무대신으로서 불평등 조약 개정에 활발히 참여했다. 막말까지의 통칭은 요노스케(陽之助).
경력
성장 과정
1844년 8월 20일 기슈 번사 다테 지히로의 6남으로 태어난다. 아명은 우시마로(牛麿). 생가는 다테 소동으로 알려진 다테 마사무네의 막내아들 무네카쓰의 후손으로 전해지지만, 실제는 오래전에 무쓰 다테 가(陸奥伊達家)에서 분가한 스루가 다테 가(駿河伊達家)의 자손. 다테 고지로(伊達小次郎), 무쓰 요노스케(陸奥陽之助)라고도 부른다. 국학자, 역사가로 알려진 아버지의 영향으로 존황양이사상을 가지게 된다. 아버지는 기슈 번을 섬겨 재정을 재건한 중신이었지만, 무네미쓰가 8살이었던 1852년 당시 번 내의 정치 다툼으로 인해 실각, 일가는 궁핍한 생활을 하였다.

막말
1858년(안세이 5년) 에도로 나와 야스이 솟켄, 미즈모토 세이비에게 배워, 도사번의 사카모토 료마, 조슈번의 가쓰라 고고로, 이토 슌스케 등의 지사와 교류를 쌓게된다.
1863년(분큐 3년)가쓰 가이슈의 고베 해군 조련소에 들어가, 1867년(게이오 3년]])에는 사카모토 료마의 가이엔타이에 참가하는 등 시종 사카모토와 행동을 같이하였다. 가쓰 가이슈와 사카모토에게서 인정받은 무쓰는, 그 재간을 발휘하여, 사카모토로부터 “(칼을) 두 자루 차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나와 무쓰뿐이다.”라고 말할 정도라 한다.
료마가 암살된 후, 기슈 번 무사 미우라 야스시를 암살사건의 배후라 생각하여, 가이엔타이의 동지 15명과 같이 그의 체재하고 있는 덴마야를 습격하는 사건(덴마야 사건)을 일으켰다.
유신 후
메이지 유신후에는 외국 사무국 어용계(御用係)[1](1868년), 효고현지사(1869년), 가나가와현령(1871년), 지세(地租) 개정 국장(1872년) 등을 역임하지만, 삿초 파벌 정부의 현 상태에 분노, 관직을 사퇴한다. 이 사이 1872년(메이지 5년) 부인이 죽고, 다음 해에 료코와 결혼하였다. 오사카 회의(1875년)에서 정부와 민권파가 타협하여, 그 일환으로 설치된 원로원 의관이 된다.
투옥과 유럽 유학
1877년의 세이난 전쟁 당시, 도사(土佐) 릿시 사의 하야시 유조, 오에 다쿠등이 정부전복[2]을 꾀했고, 무쓰는 도사파와 연락[3]을 하고 있었다. 다음해에 이 일이 발각되어, 금고 5년 형을 받아, 투옥되었다.
야마가타 감옥에 수용된 무쓰는, 아내 료코에게 편지를 쓰는 한편, 저서를 저술,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러미 벤담 저작의 번역에도 몰두하였다. 출옥한 뒤인 1883년에 제러미 벤담의 《도덕 및 입법의 여러 원리》(Principles of Moral and Legislation)는 리가쿠 마사무네(利学正宗)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야마가타 감옥이 화재가 났을 당시, 무쓰가 타죽었다는 오보가 퍼졌지만, 오보라는 사실을 알자, 1878년 이토 히로부미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당시 시설이 더욱더 잘 갖춰진 궁성 감옥으로 이동시켰다.
1883년 1월 특사에 의해 출옥, 이토 히로부미의 권유로 유럽으로 유학을 간다. 1884년 런던에 도착한 무쓰는 서양 근대사회의 구조를 알기 위해 맹렬히 공부하였다. 런던에서 무쓰가 쓴 노트가 지금도 7권이 남아있다. 내각제도의 구조는 어떤 것인지, 회의는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민주정치의 선진국인 영국이, 오랜 세월을 걸쳐 창출해낸 여러 지식과 지혜를 흡수하였다. 또한, 빈에서는 로렌츠 폰 슈타인의 국가학을 배웠다.
정계로의 복귀
1886년 2월에 귀국, 10월에는 일본 외무성에 출사하였다. 1888년, 미국 주재 공사가 되어, 같은 해, 주미 공사겸 주멕시코 공사로써, 멕시코와의 사이에서 일본 최초의 평등 조약인 일본 멕시코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는 데 성공한다.
귀국 후, 야마가타 아리토모내각의 농상무성 대신에 취임. 1890년, 대신에 재임 중에 제 1회 중의원 의회 총선거에서 와카야마 현 제 1구에 출마, 당선하여 1기를 역임했다. 무쓰의 입각은 농상무성 대신보다는 오히려 제 1회 제국회의의 원활한 진행이 기대되었다. 실제로 초대 중의원 의장 나카지마 노부유키는 가이엔타이 시절부터 친구였으며, 또한 예전에 부하였던 자유당의 실력자 호시 도오루와는 친교가 두터웠기 때문에, 회의 대책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또한, 이때 농상무 대신 비서가 심복 하라 다카시이다.
1891년에 아시오 광독 사건을 둘러싼 제국 회의에서 다나카 쇼조에게서 질문 주의서(質問主意書)를 받지만, 질문의 취지를 이해할 수 없다고 회답한다.[4] 같은 해 5월 성립된 마쓰카타 마사요시내각에 유임, 내각규약을 제안, 스스로 정무 부장이 되었지만 사쓰마 파와의 충돌로 인해 사임하였다. 11월, 고토 쇼지로나 오에 다쿠, 오카자키 구니스케의 협력으로 일간 신문『寸鉄』를 간행, 본인이 참여하고 있는 마쓰카타 내각을 비판, 1892년 3월, 사직하여 추밀원고문관이 된다.
외무대신 시대
그 후, 제2차 이토 내각을 맞이하여 외무대신으로 취임한다.[5]
막말 이래의 불평등조약인 치외법권 철폐에 성공한다. 이후 미국과도 같은 조약에 조인,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등과도 마찬가지로 조약을 개정하였다. 무쓰가 외무대신으로 있던 시대에,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던 15개국 모두와의 조약 개정(치외법권 철폐)을 이루었다.
한편, 같은 해 5월에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시작되면 청나라의 출병에 대한 대항으로 파병, 7월 23일 조선의 궁을 점거하여 친일정권을 수립, 25일에는 풍도 해전으로 청일 전쟁이 개시, 영국, 러시아의 중립화에도 성공하였다. 이 개전 외교는 영국과의 협조를 유지한 채, 청에 대해 강경 노선을 진행시킨 가와카미 소로쿠참모 차장의 전략과, 서로 공모한 점에서 ‘무쓰 외교’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전승 후에는 이토 히로부미와 같이[7]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을 조인, 전쟁을 일본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종결지었다. 하지만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 간섭으로 인해 랴오둥반도를 청나라에게 돌려주게 된다.
전부터 무쓰는 폐결핵을 앓고 있어, 삼국 간섭이 도래할 때, 이 난제를 둘러싸고 각의가 행해진 때, 무쓰는 병상에 있었다. 1896년, 외무대신을 사퇴, 오이소(大磯)별저[8], 하와이에서 요양생활을 보낸다. 이 사이, 잡지『世界之日本』를 간행하였다.
1897년 8월 24일, 폐결핵으로 인해 니시가하라 본저택(옛 후루카와 정원)에서 향년 54세로 사망하였다[9].
저서, 서한
각주
- 이 때, 당시에 이 직으로 임명한 것은 조슈 출신의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 사쓰마 출신 고다이 도모아쓰, 데라시마 무네노리, 나카이 히로시였다. 여기서 그는 영국 공사 해리 팍스(Sir Harry Smith Parkes)의 조난 사건 등 대외 사건을 처리한다.
- 후에 무쓰는 이 일을 ‘거칠게 신세를 망친 30년’『山形繋獄』이라고 시를 썼다.
- 『일본 및 일본인』에 게재된 ‘雲間寸観’에 의하면, 하야시, 오에는 암살할 인물의 비밀문서를 만들었다. 그 중에는 오쿠바 시게노부의 이름도 있었지만, 무쓰는 이것을 보고, 한 명 중요한 인간이 빠졌다고 하며, 스스로 붓을 들어 이토 히로부미의 이름을 추가했다고 한다. 하야시와 오에는, 무쓰는 평소 이토와 친하기 때문에, 뜻을 이뤘을 경우에는 이토를 추천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쓰가 이토의 이름을 추가한 걸 보고, 은근히 놀랐다고 한다.
- 무쓰의 2남 준키치(潤吉)는 아시오 동산(銅山)의 경영자, 후루카와 이치베의 양자로 들어갔다.
- 시험 채용에 의한 직업 외교관 제도가 성립된 것은 무쓰의 시대였다.
- 불평등 조약 개정에 반대했던 영국이 태도가 누그러진 배경에는 러시아의 극동진출에 대한 염려였다. 영국의 조약개정 교섭에는 ‘개정 후에도 하코다테를 무역항으로 사용을 허가할 것’이라고 하는 교섭조건이 제시되었다. 무쓰는, 하코다테 조건마저 받아들이면 조약 개정에 받아들이는 것과 똑같다고 판단, 런던 아오키 공사앞으로 ‘필요하다면, 조약 개정 후에도, 하코다테를 무역항으로 인정해도 될 것이다.’라고 전보를 쳤다. 답전은 영국이 조약개정 교섭에 응하겠다는 것이었다.
- 다카다 사나에에 의하면, 무쓰가 이토에게 대하는 태도가 대단히 공손하며, 마치 하급 관리가 장관에게 의견을 전하는 듯 하였다라고 한다.(『半峯昔ばなし』)또한, 이홍장과 담판할 당시, 무쓰의 딸이 큰 병이 나서 위독한 상태였지만 무쓰는 ‘담판이 끝날 때까지는 집에 관한 얘기는 하지 마라.’라고 말해두었지만, 무쓰의 안색이 안좋은 것을 보고 이토가 이상하게 여겨 질문하였더니 사실을 이야기하였다. 이토는 놀라, ‘뒤는 내가 맡을테니 어서 돌아가라’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무쓰는 돌아왔지만 다행히도 딸은 살아났다고 하지만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고 한다.(『平沼騏一郎回顧録』)
- 현재는 후루카와 전기 공업이 소장, 관리.
- 무쓰의 최후 당시, 문병했던 친우 나카지마 노부유키에게 ‘나는 처자와 헤어지는 것은 슬프지 않고, 집안일 또한 염두에 두고 있지 않지만, 단지 정치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감이다.’라고 말하였다.
외부 링크
- 근대 일본인의 초상 (일본어)
陸奥宗光
| 陸奥 宗光 むつ むねみつ | |
|---|---|
| 生年月日 | 1844年8月20日 (天保15年7月7日) |
| 出生地 | |
| 没年月日 | 1897年8月24日(53歳没) |
| 死没地 | |
| 出身校 | 神戸海軍操練所 |
| 前職 | 武士(紀州藩士) 外交官 |
| 称号 | 正二位 伯爵 |
| 配偶者 | 陸奥蓮子(前妻) 陸奥亮子(後妻) |
| 子女 | 陸奥広吉(長男) 古河潤吉(次男) 陸奥清子(長女) 陸奥冬子(次女) |
| 親族 | 伊達宗広(父) 岡崎邦輔(従弟) 中島信行(義弟) |
| 内閣 | 第2次伊藤内閣 |
| 在任期間 | 1892年8月8日 - 1896年5月30日 |
| 天皇 | 明治天皇 |
| 内閣 | 第1次山縣内閣 第1次松方内閣 |
| 在任期間 | 1890年5月17日 - 1892年3月14日 |
| 天皇 | 明治天皇 |
| 在任期間 | 1892年3月14日 - 1892年8月8日 |
| 天皇 | 明治天皇 |
| 選挙区 | 和歌山県第1区 |
| 当選回数 | 1回 |
| 在任期間 | 1890年7月1日 - 1891年12月25日 |
その他の職歴 | |
(1888年2月10日 - 1890年5月17日) | |
(1875年4月25日 - 1875年11月28日) | |
(1875年11月28日 - 1878年6月10日) | |
(1871年10月5日 - 1872年8月17日) | |
(1869年7月28日 - 1869年8月24日) | |
陸奥 宗光(むつ むねみつ、天保15年7月7日〈1844年8月20日〉- 明治30年〈1897年〉8月24日)は、日本の外交官、政治家[1]。「カミソリ大臣」とも呼ばれた。
版籍奉還、廃藩置県、徴兵令、地租改正、議会の先駆けである元老院の設立に多大な影響を与え、第1次山縣有朋内閣では農商務大臣として第1回帝国議会を成功させる支柱となった。外務大臣としては幕末期以降に結ばれていた全15か国の不平等条約(領事裁判権の撤廃、関税自主権の一部を回復)改正に成功した。日清戦争において陸奥外交と呼ばれる外交を行い、戦中・戦後処理に尽力し、三国干渉を日本の有利な形で収まるように立ち回った。
生涯
生い立ち
天保15年(1844年)8月20日、紀伊国和歌山(現在の和歌山県和歌山市吹上3丁目)の紀州藩士・伊達宗広と政子(徳川治宝の側用人渥美勝都の長女)の六男として生まれる。幼名は牛麿(うしまろ)。
生家は伊達騒動で知られる伊達兵部宗勝(伊達政宗の末子)の後裔と伝えられるが、実際は12世紀に陸奥伊達氏から分岐して駿河国に土着した駿河伊達氏(の分家紀州伊達家)の子孫である。
父・宗広は紀州藩に仕えながら本居大平の門に入り、国学者・歴史家としても知られ、史論『大勢三転考』を著した。父の影響で、尊王攘夷思想を持つようになる。父は藩主治宝に引き立てられ財政再建をなした重臣(勘定奉行)であったが、宗光が8歳のとき(1852年)治宝の死により失脚したため[2]、一家には困苦と窮乏の生活が訪れた。和歌山城下を追われ、数年の間紀ノ川上流で何度か居所を変え、伊都郡入郷村(現在の九度山町)に落ち着き、高野山の荘官である岡左仲の世話になる。五條の儒者森鉄之助に学び、宇智郡の豪農北厚治や五條の書肆松屋(本城)久吉などの支援を受ける。
幕末期

安政5年(1858年)、高野山江戸在番所の寺男として江戸に出る。困窮し、筆耕等により口を糊すること三年、安井息軒に師事し、又水本成美の塾に入る。後に長州藩の桂小五郎(木戸孝允)・井上聞多(井上馨)・高杉晋作・山縣狂介(山縣有朋)・村田蔵六(大村益次郎)や薩摩藩の西郷吉之助(西郷隆盛)などの志士と交友を持つようになる。当時幕府の講武所に勤めていた蔵六のつながりから、福沢諭吉や前島密らとも面識を持つようになる。
文久3年(1863年)に勝海舟の神戸海軍操練所(海軍塾)に入り、塾頭の坂本龍馬に私淑、また、広瀬元恭の時習堂にも出入りする。弁舌が立つ才子で、勝によれば、同輩の評判は甚だ悪く、「嘘つきの小次郎」と言われていた。
元治元年(1864年)、操練所の解散後、慶応元年(1865年)4月大坂から坂本や小松帯刀、西郷隆盛とともに鹿児島に向かう。その後亀山社中に加わるが、この時期は錦戸広樹の変名で薩摩の小松帯刀に抱えられており、長崎の何礼之の英語塾の門人となる。錦戸太郎という変名も使った。また、長崎亀山に滞在中、一外国人宣教師の家に住み込み、その夫人から英語を教授されたと伝えられている[4]。
慶応2年(1866年)2月、長崎での近藤長次郎自裁の報を京都に伝え、翌月鹿児島に向かう坂本と同乗し長崎に帰る。同年5月寺島宗則が上海から阿久根まで乗った帆船に船員として乗船していた。同年後半から頭角を顕し、土佐グループの主要メンバーとなる。慶応3年(1867年)には坂本龍馬の海援隊に加わり意見書「商方之愚案」を提出、坂本に認められ、商事部門を任され外国商人からの武器買付などを行う[5]。勝と坂本の知遇を得た陸奥は、その才幹を発揮し、坂本をして「(刀を)二本差さなくても食っていけるのは、俺と陸奥だけだ」と言わしめたという。陸奥もまた龍馬を「その融通変化の才に富める彼の右に出るものあらざりき。自由自在な人物、大空を翔る奔馬だ」と絶賛している。
龍馬暗殺後、紀州藩士三浦休太郎を暗殺の黒幕と主張し、海援隊の同志15人と共に彼の滞在する天満屋を襲撃する事件を起こした(天満屋事件)。
維新後
鳥羽伏見の戦いに先立つ慶応3年12月23日(1868年1月1日)、大坂のイギリス公使館にアーネスト・サトウを訪ね、新政府の承認問題について意見交換を行った。陸奥は皇族の一人が大坂城内で外国公使と会見し、王政復古の布告を宣言することを提案、サトウの賛成を得ると、これに基づく意見書を議定岩倉具視に提出。慶応4年1月、岩倉の推挙により、外国事務局御用掛に任命される[注 2](1868年)。
戊辰戦争に際し、局外中立を盾に引き渡しを拒否していたアメリカと交渉し、甲鉄艦として知られるストーンウォール号の引き渡し交渉に成功、その際、未払金十万両があったが財政基盤の脆弱だった新政府には支払えなかった。会計官権判事を兼任した陸奥は大阪の商人らに交渉し、一晩で借り受けることに成功、新政府の首脳陣に深い感銘を与える。
6月、大阪府権判事となる。岩倉と共に政府へと陸奥を引き入れた木戸孝允は、当時江戸と京都や大坂を行き来することが多く、陸奥は幕末期から親交のある木戸のもとへ度々訪ね版籍奉還、廃藩置県などを論じ、より親密な関係を結んだ。この間佐幕派の疑いを掛けられ、藩主茂承が京都にとどめ置かれるなど窮地にあった紀州藩のために尽力。
11月、紀州藩執政となって上京していた津田出を訪ね、郡県制、士族廃止と徴兵令について教示を受ける。その内容を岩倉に伝えると、大いに喜ばれ諸藩の手本になる雛形として津田による藩政改革の実施を依頼され、12月に藩主の帰国が許可される。
1869年1月、摂津県知事、6月、兵庫県知事[6]となる。何礼之から英語教師として星亨を紹介される。8月兵庫県知事免職となり、大坂の紀州藩屋敷に逗留し、藩政改革を支援。星も英学助教授として大坂の紀州藩蔵屋敷で教える。
1870年3月刑部省小判事に任ぜられるが、和歌山藩欧州執事として渡欧することが決定していたため、即日依願免職の手続きを取り、土佐時代からの知遇、参議・刑部大輔佐々木高行の不興を買う。9月和歌山藩欧州執事として渡欧し、藩軍事顧問ケッペンの依頼により、プロイセンから軍事教官数名を招聘する契約を交わす。
1871年5月アメリカ経由で帰国。和歌山藩戍兵都督心得、権大参事に任命。その後、廃藩置県を受け、8月神奈川県令として再度出仕、地租改正局長(1872年)、大蔵少輔(1873年6月)などを歴任する。
大久保利通の主導する薩長土肥による藩閥政府の現状に不満を抱き、木戸孝允との連携を強めて、大久保勢力の一角に楔を打ち込もうとする。1873年9月、木戸に対し自らの上司である大蔵省事務総裁大隈重信を「経済に通ぜず、吏務を解せず」として罷免を求める。しかし、大蔵省に政府の権限を集中させていた大久保が大隈を庇護していたために人事異動は叶わず、10月の征韓論争を経て大久保体制が確立した。大久保は独裁体制を強固にするために、反木戸派に走った伊藤博文を工部卿、大隈を大蔵卿、寺島宗則を外務卿に就任させた。陸奥は1874年1月、大久保体制に賛同する者達による政権の独占を批判した「日本人」を木戸に呈し、官を辞した。
大阪会議(1875年)で大久保と民権派が妥協し、政府に復帰した木戸の推挙により元老院の設立に奔走した。陸奥は元老院議官、その後幹事となるが、独裁体制を崩したくない大久保の無理解と、急進的過ぎる板垣の暴走によって、元老院の実権は徐々に削られた。それでも陸奥の努力により、明治9年9月に元老院は憲法起草の勅語を受けるに至った。陸奥は中島信行など数名の信頼できる人々と最初の憲法草案を起草している[7]。
この間、明治元年にかつて難波新地の芸妓であった蓮子夫人と結婚、長男広吉、次男潤吉を儲けるが、明治5年(1872年)には蓮子夫人が亡くなり、翌明治6年(1873年)に亮子と再婚した。
投獄と欧州留学
明治10年(1877年)の西南戦争の際、陸奥は元老院仮副議長であったが、和歌山からの募兵を募ることを献策、岩倉から依頼され4月大阪に向かう。これは増援部隊として派遣されることによる戦後の陸奥の発言権強化と、状況によっては板垣退助の主導による土佐立志社の反乱軍を陸奥の指揮する部隊によって鎮圧できるようにする為の戦略であった。立志社の林有造・大江卓らは武力蜂起と暗殺による政府転覆[注 3]を謀っていたが、陸奥は土佐派と連絡[注 4]を取り合っていた。しかし大久保、伊藤は陸奥に和歌山募兵を担当させることの危険を知る参謀局長鳥尾小弥太の建言に基づき、陸奥の到着に先立ち旧藩主茂承を出馬させ、三浦安を中心に募兵計画を進行させていた。
4月12日、伊藤らの動きを知った大江、岩神昂は、即時挙兵と暗殺計画を画策する。しかし、4月15日、熊本城連絡路が開かれ政府軍の優位が明確になり、立志社の挙兵計画も遅滞したため、29日に陸奥は即座に大阪を立ち、東京で大江に計画の中止を説く。実際に板垣は私学校党の蜂起に勢いを得て「最早兵を挙ぐるの時機なり」と述べており、「年来の志である民権拡張の時が来た。このような時機において民権を拡張し、革新することは、外国の歴史にもあることだ」と持論を披露している。その際に「民権運動家が戦闘に参加するのは国の進歩のためになる」と言った板垣の言葉に、同席の土佐人は全員が賛同した。このような西南戦争という戦時に乗じて、西郷が政府を斃した後に民権家として戦闘に参加した板垣らが政府を作り主導していこうという話を陸奥は耳にしており、そのストッパー役として陸奥は土佐派に潜り込んでいた[7]。
8月に政府転覆計画が露見して林と岩神が逮捕、陸奥も翌年6月に検挙され、除族のうえ禁錮5年の刑を受け投獄された。山形監獄に収容された陸奥は、妻亮子に手紙を書く一方、自著を著し、イギリスから帰国した星亨の勧めと島田三郎訳『立法論綱』(1878年)の影響により、イギリスの功利主義哲学者ジェレミ・ベンサムの著作の翻訳にも打ち込んだ。出獄後の明治16年(1883年)にベンサムの An Intro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 and Legislation(道徳および立法の諸原理序説)を『利学正宗』と題して翻訳刊行した。なお、山形監獄の火災時に陸奥焼死の報が伝えられたが、誤報であることがわかると、明治11年(1878年)に井上馨の尽力により当時最も施設の整っていた宮城監獄に移された。
明治16年(1883年)1月、特赦によって出獄を許され、井上馨の勧めもあってヨーロッパに留学。明治17年(1884年)にロンドンに到着した陸奥は、西洋近代社会の仕組みを知るために猛勉強した。ロンドンで陸奥が書いたノートは7冊現存されている。内閣制度の仕組みや議会の運営方法等について、民主政治の先進国イギリスが長い年月をかけて生み出した知識と知恵の数々を盛んに吸収し、ウィーンではローレンツ・フォン・シュタインの国家学を学んだ。
政界への復帰
明治19年(1886年)2月に帰国し、10月には外務省に出仕。明治21年(1888年)駐米公使となり、同年駐米公使兼駐メキシコ合衆国公使として、メキシコとの間に日本最初の平等条約である日墨修好通商条約を締結することに成功する。帰国後、第1次山縣内閣の農商務大臣に就任する。
明治23年(1890年)、大臣在任中に第1回衆議院議員総選挙に和歌山県第1区から出馬し、初当選[8]を果たし、1期を務めた。閣僚中唯一の衆議院議員であり、かつ日本の議会史上初めてとなる衆議院議員の閣僚となった。陸奥の入閣には農商務大臣としてより、むしろ第1回帝国議会の円滑な進行(今でいう国会対策)が期待された。実際に初代衆議院議長の中島信行は海援隊以来の親友であり、またかつて部下であった自由党の実力者星亨とは終生親交が厚く、このつながりが議会対策に役立っている。なお、このとき農商務大臣秘書であったのが腹心原敬である。陸奥の死後、同志であった西園寺公望・星・原が井上馨の支援を受け、立憲政友会を旗揚げすることになる。
明治24年(1891年)に足尾銅山鉱毒事件をめぐり、帝国議会で田中正造から質問主意書を受けるが、質問の趣旨がわからないと回答を出す(二男潤吉は足尾銅山の経営者、古河市兵衛の養子であった)。同年5月成立した第1次松方内閣に留任し、内閣規約を提案、自ら政務部長となったが薩摩派との衝突で辞任した。11月、後藤象二郎や大江卓、岡崎邦輔の協力を得て日刊新聞『寸鉄』を発刊し、自らも列する松方内閣を批判、明治25年(1892年)3月、辞職して枢密顧問官となる。
外相時代

その後、第2次伊藤内閣にて外務大臣に就任[注 5]し、明治27年(1894年)、イギリスとの間に日英通商航海条約を締結[注 6]。幕末以来の不平等条約である領事裁判権の撤廃に成功する。以後、アメリカ合衆国とも同様の条約に調印、ドイツ帝国、イタリア王国、フランスなどとも同様に条約を改正した。陸奥が外務大臣時代に、不平等条約を結んでいた15ヶ国すべてとの間で条約改正(領事裁判権の撤廃、関税自主権は一部回復)を成し遂げた。同年8月、子爵を叙爵する。
一方、同年5月に朝鮮半島で甲午農民戦争が始まると清の出兵に対抗して派兵。7月23日に朝鮮王宮占拠による親日政権の樹立、25日には豊島沖海戦により日清戦争を開始。イギリス、ロシアの中立化にも成功した。この開戦外交はイギリスとの協調を維持しつつ、対清強硬路線をすすめる参謀次長川上操六中将の戦略と気脈を通じたもので「陸奥外交」の名を生んだ。
戦勝後は伊藤博文とともに[注 7]全権として明治28年(1895年)、下関条約を調印し、戦争を日本にとって有利な条件で終結させた。しかし、ロシア、ドイツ、フランスの三国干渉に関しては、遼東半島を清に返還するもやむを得ないとの立場に立たされたが、井上馨・山縣有朋と協力して、領地返還には応じるが、代わりに賠償金にて戦後処理を終わらせるという和平交渉で難を切り抜けた。
日清戦争の功により、伯爵に陞爵する。これ以前より陸奥は肺結核を患っており、三国干渉が到来したとき、この難題をめぐって閣議が行われたのは、既に兵庫県舞子で療養生活に入っていた陸奥の病床においてであった。
明治29年(1896年)、外務大臣を辞し、大磯別邸(聴漁荘)[注 8]やハワイにて療養生活を送る。この間、雑誌『世界之日本』を発刊。
明治30年(1897年)8月24日、肺結核のため西ヶ原の陸奥邸で死去[注 9]。享年54(満53歳没)。
墓所は大阪市天王寺区夕陽丘町にあったが、昭和28年(1953年)に鎌倉市扇ガ谷の寿福寺に改葬された。
明治40年(1907年)、条約改正や日清戦争の難局打開に関する功績を讃えて、外務省に陸奥の像が建立された。戦時中に金属回収により供出されたが、昭和41年(1966年)に再建された。
栄典
- 位階
- 明治5年(旧暦)
- 1875年(明治8年)11月28日 - 従四位[9]
- 1878年(明治11年)8月19日 - 位記被褫[9]
- 1887年(明治20年)3月25日 - 従四位[9][10]
- 1890年(明治23年)
- 1897年(明治30年)8月21日 - 正二位[12]
- 爵位
- 勲章等
| 受章年 | 略綬 | 勲章名 | 備考 |
|---|---|---|---|
| 1888年(明治21年)5月8日 | 勲三等旭日中綬章[9][15] | ||
| 1889年(明治22年)9月11日 | 勲二等瑞宝章[9][16] | ||
| 1890年(明治23年)10月21日 | 銀牌一個・七宝白鷺図花瓶一封[9] | ||
| 1893年(明治26年)10月30日 | 勲一等瑞宝章[17] | ||
| 1895年(明治28年)8月20日 | 旭日大綬章[14] |
- 外国勲章佩用允許
| 受章年 | 国籍 | 略綬 | 勲章名 | 備考 |
|---|---|---|---|---|
| 1893年(明治26年)8月24日 | 鉄冠第一等勲章[18] | |||
| 1894年(明治27年)3月7日 | 美治慈恵第一等勲章[19] | |||
| 1894年(明治27年)3月30日 | レジオンドヌール勲章グラントフィシエ[20] | |||
| 1894年(明治27年)8月8日 | 白象第一等勲章[21] | |||
| 1895年(明治28年)2月20日 | 聖ミカエル勲章グロースクロイツ[22] | |||
| 1895年(明治28年)10月3日 | タコヴォ十字第一等勲章[23] | |||
| 1896年(明治29年)3月6日 | 聖マウリッツィオ・ラザロ第一等勲章[24] | |||
| 1896年(明治29年)3月17日 | 白鷲大綬章[25] | |||
| 1896年(明治29年)10月26日 | カルロス3世第一等勲章[26] | |||
| 1897年(明治30年)4月27日 | ダンネブロ勲章グランクロワ[27] |
家族


- 妻
- 息子
- 娘
- 孫
- 陸奥イアン陽之助(1907-2002) - 広吉とエセルの長男。
宗光の4人の子のうち、広吉を除く3人は未婚のまま没したため、広吉の子の陽之助が宗光の唯一の孫。鎌倉の寿福寺に陸奥家の墓所がある。
著作・書翰
評価
- 勝海舟 「あれも一世の人豪だ。しかし陸奥は、人の部下について、その幕僚となるに適した人物で、幕僚に長としてこれを統率するには不適当であった。あの男は、統御もしその人を得たら、十分才を揮うけれども、その人を得なければ、不平の親玉になって、眼下に統領を踏みつける人物だ。あれがもし大久保(利通)の下に属したら、十分才を揮い得たであろう」[34]
- 渋沢栄一
- 「外務大臣をなされたことのある陸奥宗光伯は、平岡円四郎と殆ど全く同型の人で、一を聞いて十を知る機敏な頭脳を持つて居られたかのやうに思はれる。兎角一を聞いて十を知る質の人は、余りにさき廻りをするので、他人に厭やがれる[厭やがられる]傾きのあるものだが、陸奥伯には爾んな傾向がなく至つて交際ひ易い人であつた。随つて平岡円四郎のやうに非業の最期をも遂げず、畳の上で死ぬことが出来たのである。」[35]
- 「伯も平岡円四郎のやうに、一寸したことを聞いた丈けでそれからそれへと考へを進めて往き、事を未然に察知するまでの才智のあつた人だが、孰らかと謂へば金銭と権勢とに動かされ易く、一身の利達を謀らんが為めには形勢を察して金銭と権勢とのあるところに就くを辞さなかつたらしく、大丈夫の志が無かつた人のやうに思へる。それから妙に他人を凌ぐやうな傾向があつて、談話などでも自分の才智に任せて対手を圧迫して来る如き気味合を示したものである。之が為め、多少他人から厭がれた[厭がられた]こともあらうが、交際は至つて如才のなかつた方である。」[35]
- 「陸奥宗光伯も、前条に談話した通りで、御自身には優れた才識のあらせられた人で、権勢と金力とのあるところを見て之に就く事にかけては誠に敏捷であつたが、人物を鑑別する力に於ては、余り優れた方であつたとは申上げかねるやうに思へる。随つて、陸奥伯の交はられた人や用ひられた人は、必ずしも善良誠実の人ばかりであつたやうにも思へぬ。」[36]
- 関直彦
- 「龍馬の薫陶によって陸奥も彼だけの人物になったと言っても可い位で、平生、龍馬は陸奥を評して『彼は非常な才物である。外の者は大小を取り上げれば殆ど食うにも困る者ばかりだが、陸奥だけは上手に世渡りをして行ける』と言っていた」
- 「剃刀大臣といわれしだけありて、機略縦横、電光石火の立回りに妙を得た人であった上にも、また弁舌の雄として世に認められたる人である。」[37]
- 鳥谷部春汀 「大隈伯は政治においてデモクラシーを主張すると同時に、その趣味においてもデモクラチツクなり。これに反して陸奥伯は政治の原則としては亦均くデモクラシーを信ずと雖も、その趣味は全くアリストクラチツク(貴族的)なり。彼は凡俗を好まず、又凡俗の好む所を好む能わず。彼は凡俗と天才との間には踰ゆべからざるの鴻溝あるを信じ、滔々たる凡俗は、到底天才者の頭脳を了解する能わずと思惟せり。」[39]
- 西園寺公望 「才子で敏感すぎるから、一時失脚したのだね。西南役の折、もしかすると西郷が勝つかも知れんから、幾分その場合に処する用意をしておこうとした」と述べている。[40]佐々木雄一は陸奥は大々的に武装反乱を起こそうとしたのではなく、才子で敏感すぎ、不遇感があるなかで、何かあった場合に処する用意をしておこう、機に乗じよう、と考えたのだという。[41]
- 萩原延寿は陸奥を自由民権という理念と藩閥勢力の権力の間で「分裂した魂の所有者」とするが、佐々木雄一は陸奥の考えは「議会政治やデモクラシーというのは理念や理想ではなく、現実に生じている世の趨勢であり、政府側にはその現実に対応していくための政治のアートやスキルがかつてなく必要となっており、そのスキルを備えた自分の力が必要となるはずだ」というものであったという。[42]
エピソード
- 若かりし頃の陸奥は、浅草で雑踏の中を他人とぶつかることなくすり抜けることを稽古し、ついに隼のごとく飛び抜けるようになった。友人にそんな真似をして何の役に立つのだと聞かれ、「僕は非力で喧嘩すれば負けるに決まっている。身を保つには何としても早く逃げることが第一義だからその稽古をしているのだ。一つ俺と喧嘩して見んか、素晴らしく逃げてみせるぞ」と答えたといわれている。[44]
- 若い頃は胆力を頼む志士たちから軽薄な口舌の徒と目され、「嘘つきの小次郎」とあだ名されるなど、同輩の評判は悪かった。勝海舟も「小利巧な小才子」と評し、坂本龍馬も、「弁舌が鋭利に過ぎて浪士に憎まれて不慮の禍に遭うかもしれない」としている[45]。
- 後妻の陸奥亮子は「鹿鳴館の華」「在米公使館の華」と呼ばれた美貌の女性である。
- 陸奥宗光が、藩閥打倒、議会制民主主義の未達成を嘆きつつ死んだ時、西園寺公望は「陸奥もとうとう冥土に往ってしまった。藩閥のやつらは、たたいても死にそうもないやつばかりだが…」と言って、周囲の見る目も痛わしいほど落胆したという。
- 「そもそも政治は術(アート)なり、学(サイエンス)にあらず。故に政治を行うの人に巧拙(スキール)の別あり。巧みに政治を行い、巧みに人心を収攬するは、実学実才ありて広く世務に熟練する人に存し、決して、白面書生机上の談の比にあらざるべし。また立憲政治は専制政治の如く簡易なる能わず。故に其政治家に必要するところの巧且熟なる者も、一層の度を増加すべし」と井上馨宛に書いた[46]。また、自著『蹇々録』の中でも語っている。
- 坂本龍馬が船中八策を西郷隆盛に提示した際、「わしは世界の海援隊をやります」と発言した場に同席し非常な感銘を受け、後世ことあるごとに回想を語ったとされている。
- 海援隊時代の経験を買われ、横浜の生糸貿易の総元締となっている。
- 宮城監獄入獄中の明治13年、獄中からの失火の消火に尽力し成功。司法省から内閣に慣例によって2年の減刑が上申されたが、尋常の国事犯にあらずとして明治天皇の宸断を仰いだところ、「重職に居ながら政府を顛覆せんことを謀れる者、常人の例を以て之を宥むべきにあらず」との叡慮を以て許されなかった[47]。
- 星亨との関係 - 陸奥は星を引き立てた恩人であり、陸奥との関係なくして星の行動は語れない。星の自由党入党は弁護士として成功していた当時の星にとって積極的な動機はなく、獄中にあった陸奥の出獄後の地ならしであったというのが有力である。出獄後外遊した陸奥をよそに私財を投じ、板垣の我儘に耐え、自由党を維持したのも陸奥の選択肢を確保するためであった。それだけに明治19年2月、帰国した陸奥が、10月に政府の無任所弁理公使となった時は失望し怒りを隠せなかった。陸奥にとっては自由党と藩閥政府の二者択一ではなく二者拮抗する状態こそが自らにとって最も望ましかった。第三議会に当たり議長としては河野広中が有望視されていたが、陸奥の意を汲んだ岡崎邦輔の奔走により星の衆議院議長が実現した。星は陸奥の指示により、松方内閣と厳しく対決、内閣弾劾決議案を可決、軍艦建造費ほかの新事業費は全額削除となり、松方内閣は崩壊した。藩閥政府は星の主導する自由党を抑えるには明治天皇から忌避されていた陸奥の力を借りるしかないと悟る。陸奥が外相として入閣した第二次伊藤内閣に対しては星は自由党内を強引に方向転換させ、「和協の詔勅」の受諾でまとめた。しかし、この過程で星は自由党内のみならず、改進党や吏党からの憎悪を一身に受け、衆議院議長辞職を余儀なくされた。星は原敬と違い陸奥に心服してはいなかったが、恩義は感じ比較的愚直に服しており、リアリスト陸奥に利用されていたとも言える。[48]
- 徹底したリアリストであり、神奈川県令時代のマリア・ルス号事件のような人道的な問題には関心がなく、自らはこの件に関わることを固辞し、県参事だった大江卓に対応を任せ、県令を辞任して地租改正問題に専念した。また、伊藤や井上馨と異なり朝鮮の近代化には全く関心がなく、朝鮮への投資に見合う担保を気に掛けていた。[49]
- 大津事件の時、後藤象二郎とともに伊藤博文のもとを訪れ、刺客を雇って犯人の津田を暗殺し、病死ということにすれば良いと述べ、そのような無法な処置は許されないと伊藤に叱責された。[50]
- 現存する陸奥の居宅としては死去した旧古河庭園のほか、東京根岸にコロニアル様式の洋館が残る。地元の歴史を研究する「根岸子規会」が、旧陸奥邸であることを示す案内板を2017年3月に設置した[51]。外壁が白いため、地元の子供たちには「ホワイトハウス」と呼ばれてきた[52]。
関連作品
- 映画
- 『幕末青春グラフィティ Ronin 坂本竜馬』(1986年1月25日公開、東宝、演者:堀広道)監督:河合義隆 [53]
- TVドラマ
- 『竜馬がゆく』(1968年、NHK大河ドラマ、演者:東野孝彦)
- 『竜馬がゆく』(1982年、テレビ東京、演者:岡本富士太)
- 『竜馬がゆく』(2004年、テレビ東京新春ワイド時代劇、演者:大柴邦彦)
- 『坂の上の雲』(2009年、NHK、演者:大杉漣)
- 『龍馬伝』(2010年、NHK大河ドラマ、演者:平岡祐太)
- 『歴史秘話ヒストリア』 最強交渉人、世界に挑む カミソリ大臣 陸奥宗光(2019年6月26日、NHK、演者:岩永徹也)など [54]
- 小説
- 中津文彦『闇の龍馬』(1992年3月31日、光文社)ISBN 9784334029715
- 中津文彦『闇の龍馬』(1995年6月20日、光文社 光文社文庫)ISBN 9784334720698
- 津本陽『荒ぶる波濤 幕末の快男児・陸奥陽之助』(2010年6月11日、PHP研究所)ISBN 9784569775043
- 津本陽『荒ぶる波濤 坂本龍馬と陸奥宗光の青春』(2013年11月12日、PHP研究所 PHP文芸文庫)ISBN 9784569679372
- 津本陽『叛骨(上) 陸奥宗光の生涯』(2016年9月5日、潮出版社)ISBN 9784267020612
- 津本陽『叛骨(下) 陸奥宗光の生涯』(2016年9月5日、潮出版社)ISBN 9784267020629
- 津本陽『叛骨 陸奥宗光の生涯(上)』(2020年3月5日、潮出版社 潮文庫)ISBN 9784267022166
- 津本陽『叛骨 陸奥宗光の生涯(下)』(2020年3月5日、潮出版社 潮文庫)ISBN 9784267022173
- 葉室麟『暁天の星』(2019年5月24日、PHP研究所)ISBN 9784569842912
- 葉室麟『暁天の星』(2022年7月7日、PHP研究所 PHP文芸文庫)ISBN 9784569902319
- 朝井まかて『朝星夜星』(2023年2月14日、PHP研究所)ISBN 9784569854038
- 辻原登『陥穽 陸奥宗光の青春』(2024年7月19日、日経BP)ISBN 9784296120161
- 舞台劇
- 漫画
脚注
注釈
- このほか、陸奥小次郎、伊達小次郎、中村小次郎、陸奥陽之助、伊達陽之助、源二郎、元二郎などとも称している(陸奥宗光外務大臣の功績を教育に活かす実行委員会 『陸奥宗光伯の略年譜』)。
- このとき、同時にこの職に任命されたのは長州出身の伊藤博文、井上馨、薩摩出身の五代友厚、寺島宗則、中井弘の5人であった。ここで陸奥はイギリス公使パークスの暗殺未遂事件などの対外事件を処理している。
- のちに陸奥はこのことを「粗豪にして身を誤ること三十年」(『山形繋獄』)と詩に詠んでいる。
- 『日本及日本人』所載「雲間寸観」によれば、林・大江は暗殺すべき人物として秘簿をつくった。そのなかには大隈重信の名もあったが、陸奥はこれを一見して、一人重要な人間が抜けていると言い、自ら筆をとって伊藤博文の名を加えた。林は大江は、陸奥は平生より伊藤と親しいから、志成った場合は伊藤を推してもよいだろうと考えていたので、陸奥が伊藤の名を加えたのを見て、ひそかに驚いたという。
- 試験採用による職業外交官の制度が確立したのは陸奥の外相時代である。
- 不平等条約改正に最も反対していたイギリスが態度を軟化させた背景にはロシア帝国の極東進出に対する懸念があった。イギリスの条約改正交渉には「改正後も函館の貿易港としての使用を認めること」という交渉条件が付けられていた。陸奥は、函館の条件さえ呑めば条約改正に応じるに違いないと判断し、ロンドンの青木公使宛に「必要あらば、条約改正後も、函館を貿易港と定めても苦しからず」と打電する。返電はイギリスが条約改正交渉に応じるというものだった。
- 高田早苗によれば、陸奥の伊藤に対する態度がいかにも恭しく、あたかも属僚が長官に対して意見を申し述べる風だったという(『半峯昔ばなし』)。また、李鴻章との談判のとき、陸奥の娘が大病で危篤状態だったが陸奥は「談判の済むまでは家のことはいってよこすな」と言い置いて来たが、陸奥の顔色の冴えないのを伊藤が怪しんで問いただしたので事実を語った。伊藤は驚いて、「あとは俺が引き受けたから君は帰り給え」といった。それで陸奥は帰ったが幸いにして娘は命を取りとめた。しかし、それから間もなく亡くなったという(『平沼騏一郎回顧録』)。
- 宗光の死後、二男潤吉が養子入りした古河家の所有となり、現在は古河電気工業が管理している。
- 陸奥の最後の枕頭を見舞った親友中島信行に「僕は妻子に別るるもあえて悲しまず、家事また念頭になし、ただ政治より脱することを遺憾とす」と述べた。心底からの政治好きだったのである。
出典
-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陸奥宗光」
- 母方の渥美勝都も治宝派排斥により失脚している。
- 「陸奥宗光」『新訂 政治家人名事典 明治~昭和』
- 帆足 図南次「変革期の知識人としての陸奥宗光」『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集』第1969巻第1号、英学史研究、1969年、36-44頁、ISSN 1883-9282。
- 陸奥宗光(むつ・むねみつ 1844-1897)関西大学 東西学術研究所 2020年6月17日閲覧
- 『大日本維新史料稿本』第四部 コマ856「豊崎縣知事陸奥宗光陽之助ヲ兵庫縣知事ト為ス」
- 『陸奥宗光(上巻)』岡崎久彦 PHP研究所。
- 衆議院議員之証(陸奥宗光関係文書108-66)
- 「陸奥宗光」 アジア歴史資料センター Ref.A06051166200
- 『官報』第1119号「叙任及辞令」1887年3月28日。
- 『官報』第2086号「叙任及辞令」1890年6月14日。
- 『官報』第4246号「叙任及辞令」1897年8月26日。
- 『官報』第3352号「叙任及辞令」1894年8月30日。
- 『官報』第3644号「叙任及辞令」1895年8月21日。
- 『官報』第1456号「叙任及辞令」1888年5月10日。
- 『官報』第1927号「叙任及辞令」1889年11月29日。
- 『官報』第3103号「叙任及辞令」1893年10月31日。
- 『官報』第3052号「辞令」1893年8月30日。
- 『官報』第3207号「叙任及辞令」1894年3月12日。
- 『官報』第3223号「叙任及辞令」1894年3月31日。
- 『官報』第3336号「叙任及辞令」1894年8月11日。
- 『官報』第3498号「叙任及辞令」1895年3月1日。
- 『官報』第3683号「叙任及辞令」1895年10月7日。
- 『官報』第3804号「叙任及辞令」1896年3月7日。
- 『官報』第3815号「叙任及辞令」1896年3月21日。
- 『官報』第4005号「叙任及辞令」1896年11月2日。
- 『官報』第4147号「叙任及辞令」1897年5月3日。
- 『陸奥宗光. 正編』伊藤痴遊 著 (東亜堂, 1912)
- 『明治大臣の夫人』岩崎徂堂著 (大学館, 1903)
- 陸奥宗光未亡人没す新聞集成明治編年史第11卷、林泉社、1936-1940
- 『官報』1897年9月14日「叙任及辞令」。
- 下重暁子『純愛 エセルと陸奥廣吉』講談社、1994年12月1日。ISBN 9784062073561。
- 『文藝春秋』第77巻、第3号、p83
- 『海舟全集』第十巻
- 3. 陸奥伯に丈夫の志無し
- 7.井上侯の人物鑑別眼
- 関直彦『七十七年の回顧』三省堂、1933年、pp.242-243
- 『兆民文集』
- 『春汀全集』
- 『西園寺公望自伝』
- 佐々木雄一「陸奥宗光」82頁
- 佐々木雄一「陸奥宗光」109,131頁
- 萩原延寿「陸奥宗光」13頁
- 『陸奥宗光』萩原延寿 上 135頁
- 『陸奥宗光』佐々木雄一 20〜21頁
- 『陸奥宗光』佐々木雄一130頁
- 『陸奥宗光』萩原延寿 下 222頁
- 『星亨』有泉貞夫
- 佐々木雄一「陸奥宗光」65-67,236頁
- 佐々木雄一「陸奥宗光」147頁
- 読売新聞朝刊2017年3月30日都民版「旧陸奥宗光邸の歴史 案内板/根岸祷民ら設置 建物の特徴や写真掲載」
- “【11位】旧陸奥宗光邸(鶯谷)”. テレビ東京「出没!アド街ック天国」2016年5月14日放映. 2017年4月9日閲覧。
- 幕末青春グラフィティ Ronin 坂本竜馬 - allcinema 2025年11月2日閲覧
- 最強交渉人、世界に挑む カミソリ大臣 陸奥宗光 - NHKアーカイブス 2019年6月26日
参考文献
- 岡崎久彦『陸奥宗光』(上・下)(PHP研究所、1987-88年)、のちPHP文庫
- 岡崎久彦『陸奥宗光とその時代』「外交官とその時代 第1巻」 PHP研究所、1999年、新版2009年、のちPHP文庫
- 萩原延壽責任編集・解説「陸奥宗光紀行」、『日本の名著(35) 陸奥宗光』(中央公論社、1973年)、新版・中公バックス
評伝
関連項目
外部リンク
- 国立国会図書館 憲政資料室 陸奥宗光関係文書
- 小説より奇なる生涯の陸奥宗光 - 徳富猪一郎(徳富蘇峰)『我が交遊録』、1939年
- 維新史料綱要データベース(東京大学史料編纂所)
- 『大日本維新史料稿本』(維新史料編纂事務局編)
- デジタル版「実験論語処世談」(渋沢栄一記念財団)
| 公職 | ||
|---|---|---|
| 先代 岩村通俊 | 第6代:1890年5月17日 - 1892年3月14日 | 次代 河野敏鎌 |
| 先代 榎本武揚 | 第5代:1892年8月8日 - 1896年5月30日 | 次代 西園寺公望 |
| 先代 伊藤博文(→欠員) | 1872年 - 1874年 | 次代 松方正義 |
| 日本の爵位 | ||
| 先代 陞爵 | 伯爵 陸奥家初代 1895年 - 1897年 | 次代 陸奥廣吉 |
| 先代 叙爵 | 子爵 陸奥家初代 1894年 - 1895年 | 次代 陞爵 |
Mutsu Munemit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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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tsu Munemitsu | |
|---|---|
陸奥 宗光 | |
Count Mutsu Munemitsu | |
| Minister for Foreign Affairs | |
| In office 8 August 1892 – 30 May 1896 | |
| Prime Minister | Itō Hirobumi |
| Preceded by | Enomoto Takeaki |
| Succeeded by | Saionji Kinmochi |
| Minister of Agriculture and Commerce | |
| In office 17 May 1890 – 14 March 1892 | |
| Prime Minister | Yamagata Aritomo Matsukata Masayoshi |
| Preceded by | Iwamura Michitoshi |
| Succeeded by | Kōno Togama |
| Memb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 |
| In office 1 July 1890 – 25 December 1891 | |
| Preceded by | Constituency established |
| Succeeded by | Okazaki Kunisuke |
| Constituency | Wakayama 1st |
| Member of the Genrōin | |
| In office 25 April 1875 – 28 November 1875 | |
| Governor of Kanagawa Prefecture | |
| In office 5 October 1871 – 17 August 1872 | |
| Monarch | Meiji |
| Preceded by | Terashima Munenori |
| Succeeded by | Ōe Taku |
| Governor of Hyōgo Prefecture | |
| In office 28 July 1869 – 24 August 1869 | |
| Monarch | Meiji |
| Preceded by | Nakajima Masutane |
| Succeeded by | Saisho Atsushi |
| Personal details | |
| Born | 20 August 1844 |
| Died | 24 August 1897 (aged 53) |
| Spouse | Mutsu Ryōko |
| Children | Mutsu Hirokichi |
| Parent |
|
| Relatives | Okazaki Kunisuke (cousin) |
| Education | Kobe Naval Training Center |
| Occupation | Diplomat, Cabinet Minister |
| Nickname | Mutsu Yonosuke |
Count Mutsu Munemitsu (陸奥 宗光; August 20, 1844 – August 24, 1897) was a Japanese diplomat and politician. He became Minister of Foreign Affairs in 1890 and worked to revise unequal treaties. He served as plenipotentiary at the peace conference in Shimonoseki after the First Sino-Japanese War.
Early life
Mutsu Munemitsu was born in Wakayama domain, Kii Province as the sixth son of Date Munehiro, a samurai retainer of the Kii Tokugawa Clan. His father was active in the Sonnō jōi movement, and Mutsu Munemitsu joined forces with Sakamoto Ryōma and Itō Hirobumi in the movement to overthrow the Tokugawa shogunate.[citation needed]
Career

After the Meiji Restoration, Mutsu held a number of posts in the new Meiji government, including that of governor of Hyōgo Prefecture and later governor of Kanagawa Prefecture, both of which were host to foreign settlements. He was head of the Land Tax Reform of 1873–1881, and served on the Genrōin. He conspired to assist Saigō Takamori in the Satsuma Rebellion and was imprisoned from 1878 until 1883. While in prison he translated Jeremy Bentham's Utilitarianism into Japanese.
After he left prison, he rejoined the government as an official of the Foreign Ministry, and in 1884 was sent to Europe for studies. Later he became Japanese Minister to Washington D.C. (1888–1890), during which time he established formal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Japan and Mexico, and partially revised the unequal treaties between Japan and the United States.
On his return to Japan in 1890, he became Minister of Agriculture and Commerce. He was also elected to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of Japan from the 1st Wakayama District for a single term in the 1890 General Election. In 1892, he became Foreign Minister in the Itō Hirobumi cabinet. In 1894, he concluded the Anglo-Japanese Treaty of Commerce and Navigation of 1894, which finally ended the unequal treaty status between Japan and Great Britain.
Mutsu was the lead Japanese negotiator in the Treaty of Shimonoseki, which ended the First Sino-Japanese War (1894–1895). In the wake of an attempt on the life of the Chinese leading negotiator Li Hongzhang by a Japanese fanatic, the Japanese government voluntarily reduced the size of the indemnity it planned to claim from China, and Mutsu famously remarked, 'Li's misfortune is the good fortune of the Great Ch'ing Empire'.[1] The Triple Intervention by France, Germany and Russia reversed the gains that Mutsu had negotiated from China in the Treaty of Shimonoseki, and the Japanese public blamed Mutsu for the national humiliation. He resigned all government posts in May 1896 and moved to Ōiso, Kanagawa, where he wrote his personal diplomatic memoirs Kenkenroku [ja] (蹇々録) after the treaty was signed to explain his views and actions. However, his memoirs could not be published until 1923 due to the diplomatic secrets they contained.
Mutsu lived in what is now Kyu-Furukawa Gardens. Mutsu died of tuberculosis in Takinogawa, Tokyo Prefecture in 1897.
Mutsu was ennobled with the title of hakushaku (count) under the kazoku peerage system at the end of the Sino-Japanese War.
Honors
Grand Cordon of the Order of the Rising Sun (1895)- Senior Second Rank (1897)
Family tree
| Count Mutsu Munemitsu | Countess Mutsu Ryōko | ||||||||||||||||||||||||||
| Countess Iso Mutsu | Count Mutsu Hirokichi | ||||||||||||||||||||||||||
| Ian Mutsu | |||||||||||||||||||||||||||
Notes
References
- Cortazzi, Hugh. Britain & Japan: Biographical Portraits, Volume V. Global Oriental (2004) ISBN 1-901903-48-6
- Mutsu, Munemitsu. (1982). Kenkenroku (trans. Gordon Mark Berger). Tokyo: University of Tokyo Press. ISBN 9780860083061; OCLC 252084846
- Perez, Louis. Japan Comes of Age: Mutsu Munemitsu and the Revision of the Unequal Treaties.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 Press (1999). ISBN 0-8386-3804-X
- Perez, Louis. Mutsu Munemitsu and Identity Formation of the Individual and the State in Modern Japan. Edwin Mellen Press (2001). ISBN 0-7734-7366-1
Further reading
- Okazaki, Hisahiko (2018). Mutsu Munemitsu and His Time. Tokyo: Japan Publishing Industry Foundation for Culture. Archived from the original on 2019-05-27. Retrieved 2019-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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