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11

11 한석정 만주국 시기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

만주국 시기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

Ⅰ. 머리말

본 연구는 광복 당시 거의 200만 명에 육박했으나, 광복 후 그 존재가 억제 혹 은 과장된 1) 만주국 거주 조선인들의 지위를 살핀다. 동서양의 근대 식민국가 들은 토착인들을 대상으로 통합(화폐·지역·언어상의), 혹은 분리 2) 실험(의 약 분야의), 3) 조사와 분류 등을 행했다. 그리고 以夷制夷의 목적으로 일부 민 족을 보호, 그 정체성 형성을 도와주기도 했다. 예컨대 영국인의 해외 파병을

※ 투고일: 2011년 1월 9일, 심사일: 2011년 2월 7일, 게재 확정일: 2011년 2월 28일.
1) 한석정, 2008, 「만주의 기억」, 한일연대21 편, 『한일역사인식논쟁의 메타히스토리』, 뿌리와 이파리, 272~274쪽.
2) 예컨대 하우사랜드(Hausaland)를 오늘날 니제르(Niger)와 나이지리아(Nigeria)로 분할한 경우. William Miles, 1994, Hausaland Divided: Colonialism and Independence in Nigeria and Niger, Ithaca: Cornell University Press, pp. 42~46.
3) David Arnold, 1993, Colonizing the Body: State Medicine and Epidemic Disease in  Nineteenth-Century India,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p. 10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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돕기 위해 ‘용맹한’ 시크인들(Sikhs)이나 구르카인들(Gurkhas)이 만들어졌
다.  ) 재만 조선인들은 1920년대에 일본의 만주 침식을 위한 삼투적 팽창으로  ) 인식되어 만주 군벌의 박해를 겪었지만 만주국 건국 후 공식 이념인 오족협화 속에서 일본 지배자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조선인들의 이주와 사회적 지위에 관해서 근자에 중요 연구들이 나오고 있
으나,  ) 공통적으로 1940년까지의 분석에 그치고 있다.
그간 재만 조선인의 거주 추계는 다소 혼란스런 상태에 있었다. 우선, 신뢰
성이 떨어지는 자료의 인용이 있다. 예컨대 리하이옌의 경우, 1944년치 인구는 중국 둥베이[東北]의 항일 빨치산 지도자인 저우바오중[周保中]의 보고에 의 존한다. 그 결과, 1940년 재만 조선인 인구(1,309,053명)가 만주국 센서스의 것(1,450,384명)과 약 14만 6천 명의 차이가 난다.  )  두루 인용되는 만주국 공 식자료들도 신뢰할 만한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예컨대 Japan-Manchukuo Yearbook  )은 1940년 만주국 인구를 센서스의 것보다 100만 명이나 적은 42,233,000명으로 기재했다. 조선인에 대해 만주국의 유일정당 격인 協和會 가 펴낸 중앙본부의 자료도  ) 1940년 센서스나 1940년 통계연감을 언급하지 않는다. 공식자료는 일본 외무성 자료, 만주국 민정부의 『統計年報』, 총무청 통계처의 『滿洲帝國年報』 등 부처별로 따로 발간되었는데, 이것들의 차이가 많다. 예컨대 1933년 연보는 일본인 인구를 317,646명, 조선인 인구를 582,143명으로 추정, 일본 외무성의 것(각 333,912명, 673,794명)과 큰 차이 가 난다[滿洲國 國務院 總務廳(1934), 『滿洲帝國年報』(이하 『연보』), 52~53쪽]. 1940년 센서스도 만주국 총인구를 페이지에 따라 달리 발표한다.  ) 또한 지나친 의욕으로 정밀성이 희생된 경우들이 있다. 예컨대 방대한 만
주국 내 민족 분포의 추이를 만들고자 했던 미야가와 젠조[宮川善造]의 것에 흠결이 더러 발견된다. 예컨대 1918년 조선인의 전년도비 인구 증가분(24,311명) 이 이주인구(33,400명)보다 적다. 또한 1935~1936년 센서스를 무시, 1935년 신징[新京]의 조선인과 일본인 인구를 각 6,764명과 54,367명으로, 무려 두 배로 기재했다. 센서스에 따르면 각 3,807명과 22,129명이다.   ) 여러 일본 자 료를 통해 한국인 이민사를 다룬 현규환의 방대한 연구도 광복 직전 재만 조선 인을 2,163,115명으로(혹은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 추정했다. 또한 당시 만주국 인구를 3,500만 명으로 추정, 1940년 센서스의 수치(43,233,954명)와 무려 800만 명 이상 차이가 난다.  )
이런 자료들이 범람한 것은 오랫동안 만주에 관한 국외 원자료를 얻기 힘들 었던, 그 결과 발견되기만 하면 무조건 신뢰하게 된 여건에 기인한다 할 것이
다. 이제 중국, 일본의 일부 만주 자료들이 국내 학자들에게 드러나는 시점에 이르렀다. 이 글도 현존하는 총량적 자료만을 나열하는 기술적인(descriptive) 한계, 혹은 중간 점검의 성격을 띤다. 이 글은 그간 여과 없이 사용되었던 원자 료들에 대한 판정과 함께 제한적인 자료를 통해 만주국 후기까지로 넘어가보 고자 한다. 1940년까지는 만주국의 센서스 두 가지(1935~1936년 것과  ) 1940년 의 것14))를, 그 이후는 만주국 정부공보를15) 사용한다. 인구역동과 사회적 지위 와의 관계, 즉 조선인의 거주 양식이 어떻게 사회적 지위에 반영되었으며, 특 정 계기(중일전쟁) 이후 인구이동이 사회적 지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검 토할 것이다.   

Ⅱ. 재만 조선인의 거주 특성

먼저 중일전쟁 이전 재만 조선인을 재만 일본인과 비교하면 비적의 침입에서 보호장치가 없는 농촌 지향의 특성이 두드러진다. 다음 표 1은 단일기관의 조 사에 의한 재만 조선인과 일본인의 인구이다. 이것은 일본 외무성이 만주 영사 관의 조사를 취합한 것으로서 1910년에서 1936년까지 단일기관에 의한 것이라 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조선인, 일본인 양 민족의 거주 양식의 중요 차이는 후 자의 관동주[다롄(大連)과 그 주변], 만철부속지(만주국 내의 남만주철도 연변) (이 두 지역은 1937년까지 만주국의 치외법권 지역), 商埠地(자율적 개방지)의 인구비율이 꽤 높다는 것이다. 즉 일본 군경 보호하의 안전지역이라는 뜻이다. 省별 인구(표 1)에서도 일본인들은 가장 도회적인 펑티엔[奉天省]과 關東州에, 특히 쾌적한 항구 다롄과 신징[新京]을 16) 포함, 안전한 도시들에 밀집하고 있
다. 일본인들의 약 90%의 도회 집중률은 국제적인 비교에서 본다면, 예컨대 20세기 초 도시 거주율이 약 7할이었던 알제리의 유럽인들(pied noirs)에 비해 매우 높은 편이다. 17) 조선인들의 경우, 도회지역 거주는 매우 낮고, 지엔타오

14) 滿洲國 國務院 總務廳 統計處, 1942, 『康德7年 臨時國勢調査, 全國編』(이하 『1940년 센서스』)와 『康德7年 臨時國勢調査: 在滿洲國 日本人調査結果表, 全國篇』(이하 『1940년 센서스 일본인편』)을 이름.
15) 滿洲國 國務院 總務廳, 1940~1945, 『滿洲帝國政府公報』(이하 공보).
16) 1942년 신징의 공원녹지 비율은 12.2%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越澤明, 1988, 『滿洲國の首都計劃』, 東京: 日本經濟評論社, 142쪽.
17) Benjamin Stora (tr. by J. Todd), 2001, Algeria: 1830~2000, Ithaca: Cornell
<표 1>  중일전쟁 이전 재만 조선인, 일본인의 인구
연도 일본인 조선인
만주 전체 관동주 만주국 도회 비율
(%)* 만주 전체 관동주 만주국 도회 비율
(%) 지엔타오 지엔타
오 거주 비율(%)
1915 101,586 50,197 51,389 83.5 282,070 65 282,005 0.3 198,492 70.4
1920 160,062 73,896 86,166 97.3 459,427 396 459,031 3.4 281,766 61.3
1925 187,988 90,542 97,446 98.3 531,973 834 531,139 6.9 346,194 65.1
1930 228,784 116,052 112,732 98.7 607,119 1,794 605,325 8.6 394,937 65.1
1931 233,320 119,770 113,550 98.7 630,982 1,747 629,235 10.1 409,412 64.9
1932 268,982 125,935 143,047 97.0 596,373 2,002 594,571** 16.6 388,147 65.1
1933 333,912 139,016 194,896 93.6 673,794# 2,259 671,535 15.1 415,458 61.7
1934 407,884 149,492 258,392 89.9 761,593# 2,708 758,885 13.7# 461,775 60.6
1935 492,604 159,599 333,005 90.8 826,570# 3,251 823,319 15.3# 469,461 56.8
1936 551,937 166,369 385,568 87.4 888,181 4,025 884,156 12.6 476,072 53.6
* 만주국 내 만철부속지와 상부지 거주 인구 비율.
** 약 15만 명으로 추산되는 지엔타오 거주 조선인은 포함되지 않음.
# 특별시 인구 추가 출처:  日本 外務省 亞細亞局, 『滿洲國及中華民國在留本邦人及外國人統計表』; 木村健二·幸野保
典 解題(2004), 『戰前期中國在留日本人統計』, 東京: 不二出版, 1卷 5回 24·25쪽, 7回 34쪽, 2卷 11回 表1 3쪽, 17回 表1 26쪽, 表2 64·65쪽, 3卷 19回 표1 30쪽, 21回 表1 32쪽, 表3 80쪽, 4卷 23 回 表1 31쪽, 24回 表2 86쪽, 表3 90·91쪽, 5卷 26回 表4 110쪽, 6卷 29回 表9 1쪽, 7卷 28回 表1 1쪽, 表6 70쪽, 29回 表1 157쪽.18)
[間島], 혹은 농촌에 집중되었다.
또한 재만 조선인 像의 불확실성은 1930년대 대규모 만주행 이주 수치의
부정확성에 기인한다. 1930년대의 도만 인구에 대한 마쓰무라 다카오[松村高夫]의 연구(표 2)는 한국·일본 학계에서 자주 인용되는데, 1940년 센서스의

University Press, p. 22.
 18) 이 중 1930년대는 滿洲國 國務院 統計處, 『大同元年末現住戶口統計』(1933), 『第一次臨時人口調査報告書』(1937)를 수집한 것이다.
<표 2>  마쓰무라의 1930, 1940년대 조선인 해외 인구이동 추계
1931~1940 1941~1945 합계
일본행 249,916 363,327 613,243
만주행 255,991 64,887 320,878
중국행 66,491 13,027 79,518
합계 572,398 441,241 1,013,639
출처:  松村高夫, 1970, 「日本帝國主義下における滿洲への朝鮮人移動について」, 『 三田學會雜誌』
63卷 6號, 87쪽.
것(표 3 참조)과 무려 두 배의 차이가 난다.
1940년 센서스에 따르면 1930년대 도만 조선인은 약 70만 명에 이르며, 그 78%가 후반에 이루어져 당시 조선 사회를 강타했던 만주 붐을 실감나게 한다.
1940년 한 해에만 무려 약 17만 명이 만주로 갔다. 이 강력한 흐름은 만주국 후
<표 3>  1930년대 조선인과 일본인의 도만 인구
연도 조선인 일본인
1931 11,383 5,888
1932 16,876 19,122
1933 19,937 30,213
1934 49,145 37,071
1935 57,757 41,047
1936 66,497 37,478
1937 84,071 50,542
1938 87,718 106,850
1939 141,284 142,899
1940 169,726 193,025
1936~1940 합계 544,796 520,794
1931~1940 합계 699,894 654,135
출처: 『1940년 센서스 일본인편』, 422쪽.
<표 4>  1940년 조선인 도만자의 도착지
첫 도착 지역(省) 이민 숫자 비율(%)
지린 25,774 15.2
룽장 1,250 0.7
베이안[北安] 9,346 5.5
허이허 447 0.3
싼장 3,783 2.2
둥안[東安] 3,865 2.2
무단장[牧丹江] 18,839 11.1
빈장 9,879 9.8
지엔타오 35,045 21.3
퉁화[通化] 11,193 6.6
안둥 9,791 5.8
쓰핑[四平] 6,089 3.6
펑티엔 18,791 11.1
진조우 4,653 2.7
러허 438 0.3
씽안서 75 0.04
씽안남 4,321 2.5
씽안동 332 0.2
씽안북 289 02
출처: 『1940년 센서스 일본인편』, 422쪽.
기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 일본인들의 도만도 상 당한 규모(약 65만 명. 후반에 무려 약 80%)로 양국에 공통적인 만주 바람이 일었음을 알 수 있다.
1940년에 이르러 조선인들의 도만 경로도 다양해졌다(표 4 참조). 조선인 들이 첫발을 디딘 곳은 지엔타오성을 넘어 광범위한 곳이다. 지엔타오(21%), 지린성(15.2%), 펑티엔성(11.1%)에 이어 몽골 지역까지 펼쳐졌다.
<표 5>  만주국시대(1932~1945)의 조선인 인구
연도 인구 연도 인구
1930 602,495 1938 1,106,181
1931 623,048 1939 1,264,504
1932 650,072 1940 1,450,384
1933 680,898 1941 1,573,556
1934 745,116 1942 1,653,181
1935 818,566 1943 1,714,166
1936 901,152 1944 1,777,423
1937 1,002,021 1945 1,948,375
출처: 박경숙, 2009, 「식민지 시기 조선의 인구동태와 구조」, 『한국인구학』 32권 2호, 47쪽.
만주국 시대 조선인 인구도 정리할 시점에 왔다. 여러 연구 중에서  )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박경숙의 것이다. 그간 1945년 조선인 인구가 200만 명 을 상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녀는 전문적인 추계를 통해 이것을 200만 명 이하로 계산, 이 방면의 업적을 이루었다(표 5 참조). 동아시아 근대사 분야 에서 운위되었던 “광복 당시 재만 조선인 인구가 200만 명 이상”이라는 표현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다만 재만 조선인의 이동성, 즉 쉽고 잦은 귀환, 예컨대 1930년대 초의 정 치적 격변  ) 등을 고려, 단선적 인구 증가를 보정하는 것이 미래 과제가 될 것 이다. 펑티엔 등 대도시의 조선인들 중에는 일확천금을 꿈꾸며 목돈을 쥐면 귀
<표 6>  만주국 1940년 센서스 상의 민족구성
민족 인구 성비 젊은 인구(16~30세)
만인총수 40,858,473(95%) 123.8 24.7%
 한족 36,870,978(85.3%)
 만주 치런[旗人] 2,677,288
 몽골 1,065,792
 회교인 194,473
 기타 49,942
일본인 2,271,495
 내지인 819,614(1.9%) 142.1 45.0
 조선인 1,450,384(3.4%) 119.5 30.1
 기타 1,497
제3국인 3,732
무국적인 69,180
합계 43,202,880
출처: 『1940년 센서스』, 3~11쪽.
국한다는 생각을 가진 부랑자가 많았다.  ) 광복 전 일본제국은 경계의 붕괴를 초래, 조선인들의 일본, 만주행 이동과 귀환을 용이하게 만들었다.
만주국의 1940년 센서스는 불완전한 것이나 일본제국 전체에서 타이완
(1905), 일본(1920), 조선(1930년. 그 후 1935년, 1940년 후속조사)에 이은 네 번째의 본격 인구조사인데,  ) 조선인들의 기본 특징이 드러난다. 이들은 만주 국 전체 인구(세계 9위)의 3.4%를 차지하며(표 6), 만주국의 평균(도시 168.0, 농촌 119.8)과 비교해서 성비가 안정적이며, 젊은 인구가 많은 특징이 있다. 조선인들의 省별 분포(표 7 참조)는 1934년까지 60%대에, 1935년 56.8%
<표 7>  조선인의 省별 분포(1940)
지역 숫자 비율(%)
신징특별시 16,424 1.1
지린성 167,620 11.6
룽장 7,595 0.5
베이안 28,319 2.0
허이허 2,196 0.2
싼장 35,085 2.4
둥안 33,195 0.2
무단장 118,571 8.2
빈장 66,032 4.6
지엔타오 616,029 42.5
퉁화 95,433 6.6
안둥 66,422 4.6
쓰핑 45,391 3.1
펑티엔 115,536 8.0
진조우 22,864 1.6
러허 1,399 0.1
씽안서 781 0.05
씽안남 8,981 0.6
씽안동 1,692 0.1
씽안북 909 0.06
합계 1,450,384 100
출처: 『1940년 센서스』, 174~197쪽.
였던 지엔타오성 비율이 40%대로 감소했다. 조선인들은 씽안북성을 포함, 전 지역에 걸쳐 살았다. 19개 시(특별시 포함)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144,296명 (조선인의 9.9%), 10만 명 이상 14개 도시에는 99,966명(조선인의 6.9%)에 이 른다. 이것은 만주국 초기 9대도시의 조선인 거주 비율 3.5%와  ) 비교하면 장 족의 발전이다. 3대도시 거주에도 약간의 성장이 있었다. 1935년에 조선인의 2.3%가 이 도시들에 살았으나, 1940년 4%로 늘었다. 1940년 신징 인구의 조 선인 비율은 1935년 도시의 1.5%에서 1940년 3%로 늘었다(표 10a 참조).

Ⅲ. 조선인의 사회적 지위

조선인들의 사회적 지위는 단순하지 않다. 전·후반기 통틀어 인구상, 산업분 포상 소수자의 위치에 있었으나, 중일전쟁 발발 후 공적 분야와 일부 전문직, 나아가 전방위적인 진출이 있었던 점이 드러난다. 그간 만주국의 조선인이 일 본인 지배자와 한족 사이의 중간자적 소수자(middlemen minority)와 같은 존 재로 인식되었다. 중간자란 동남아시아의 화교같이 부를 갖춘 소수민족이다.   ) 나아가 일본-조선-만주국의 3자 관계가 유명한 월러스타인(Wallerstein)의 세계체계론의 비유(즉 핵심-반주변부-주변부의 지역체계로서의)를 받기도 했다. 25)
이런 인식의 근거로 조선인과 중국인 간에 임금과 양곡배급의 차등이 거론 되었다. 2등국민론은 어느 정도 타당할까? 우선, 윤휘탁이 논구했듯 식량의 비 유는 과장된 것으로서, 특히 만주국 말기에 양자는 공통적인 곤경을 겪었다.  )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서는 조선인이 중간적 특성이 있다(표 8 참조). 그러나 1930년대 말 여러 지역과 부문의 일일 평균임금에서 극명한 차이는 일본인과 기타 민족들의 것이다. 일본인 남녀 평균임금(2.56위안)은 만주인(0.7위안)과
<표 8>  만주국 노동자의 하루 임금(1939년 5월)(단위: 만주국 위안)

부문 만주인 일본인 조선인 전체평균

공업 0.9 0.5 3.51 1.61 1.45 0.65 1.62 1.51
광업 0.94 0.64 3.38 0.87 1.01 3.24
토건 1.27 4.16 2.43 2.5
운수 1.34 3.13 1.3 2.85
교통 1.38 0.89 2.74 1.7 0.85 2.62 0.7
평균 1.0 0.51 3.5 1.6 1.38 0.65 2.14 1.12
출처: 공보 1939. 9. 18.
조선인(1.05위안)의 두세 배를 상회한다. 또한 조선인 남성의 임금은 만주인 남성의 것보다 약 40% 많다(1.38 대 1.0). 그러나 20세기 초 아시아 사상 최대 의 이주인 중국 노동자의 만주행 홍수(1890년에서 1945년까지 2,500만 명, 1920년대에는 두 번씩 한 해 100만 명 이상)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만주국 건 국으로 약간 주춤했으나 공업화의 수요로 한 해 평균 76만 명(1932년에서 1942년까지)이 유입,  ) 노동시장의 덤핑을 초래했다.
그러나 총량적인 통계에서 조선인은 주변적인 위치에 있다. 한 자료에 따 르면, 만주국 초기(1935) 조선인들은 2·3차산업에 불과 11%가, 대신 1차산업 에 약 3분의 2가 몰려 있었다. 자유업과 官吏, 교육 부문에서 7%를 차지, 다소 약진한 편이다(표 9). 그런데 이것은 부인의 직업을 가장에 따라 계산, 무업 비 율이 낮다. 개인별로 직업을 물었던 1935~1936년 센서스와 1940년 센서스 등 과 비교 불가능한 단점이 있다.
<표 9>  만주국 세 민족의 산업구성(1935년 말)(%)

출처: 만주국 민정부, 1936, 『2차통계연보』(이하 『2차연보』), 46쪽.
다음은 1935~1936년 센서스, 1940년 센서스에 나타난 3대도시의 조선인
과 일본인의 산업구성이다(개인별로 직업을 물었으므로 표 9와 비교 불가능함).
<표 10a>  신징의 민족별 산업구성(1935년 말과 1940)(%)

출처: 『1935~1936년 센서스』(1차), 107쪽; 『1940년 센서스』, 55~65·110~120·143~153· 253~259·288~294·309~315쪽.


신징, 하얼빈, 펑티엔 등 3대도시에서 1935년 조선인은 세 민족, 즉 만주인 (중국인), 일본인, 조선인 중 1차산업 비율이 가장 높으며, 대신 2·3차산업에 서 거의 최하위에 있다. 무업도 가장 높다. 예외는 펑티엔인데 상업에 다수가 종사하고 있다. 1940년에는 1935년에 비해 조선인의 2·3차산업 종사자가 현 격하게 늘었다(펑티엔의 상업은 예외). 신징의 공무·자유업이 거의 두 배로 증가한 것은 조선인 관리들의 증가를 의미한다(표 10a 참조).
1935~1936년 센서스(인구 1만 명이 넘는, 만주국 전체 인구의 약 11%를 차 지하는 지역만 대상으로 함)(표 11)에 따르면 조선인은 1차산업 비율이 10% 이 하에, 상업·교통에 12%로 약진하고 있으나 무업 비율은 굉장히 높다.
<표 11>  만주국 1935~1936년 센서스(3대 도시 포함, 78개 지역), 두 민족의 산업구성
(1935년 말에서 1936년)

다음 표 12는 만주국 중기(1937)의 불완전한 조사이다. 2·3차산업, 공무,
자유업 분야에 조선인은 12%에 지나지 않고 1차산업에 대거 몰려 있다. 이 통 계는 JMY의 1941년판을 포함, 두루 유포되었으나 유업자의 배우자를 유업으 로 합산했으므로 1940년 센서스와 비교가 불가능한 한계가 있다.
<표 12>  만주국 중기 세 민족의 산업구성(1937년 말)(%)

출처: 만주국 국무원 총무청 통계처, 1940, 『만주제국 통계연감』, 25쪽.
드디어 1940년 센서스에 조선인과 일본인의 전반적인 산업구성이 파악되
었다(대상자에게 개별적으로 물어 전기의 어느 자료와도 비교가 불가능함)(표 13 참조). 이것에 따르면, 조선인 1차산업 종사자(조선인의 42%)는 만주국 전 체(약 38%)에 비해 다소, 일본인(약 5%)에 비해 매우 높다. 조선인 2차산업 종 사자(약 4%)는 만주국 전체(3.6%)에 비해 약간 높으나, 일본인(13.4%)과는 비 교가 되지 않는다. 2·3차산업 전체의 조선인 종사자(조선인의 9.5%)는 만주 국 전체 평균(10.1%)에 뒤진다.
특기할 만한 것은 조선인 공무·자유업 종사(조선인 전체의 1.4%)가 만주
국 평균(2.6%)과 일본인(9.5%)에 비해 낮지만, 약 1만 명의 관공리, 3,000명의 교사, 2,300명의 의사 등 화이트칼라, 혹은 전문직 조선인들이 존재했다는 점 이다. 비록 대부분이 일용직이나 촉탁 등 하급직이었지만, 조선인 관공리는 만 주국 전체 관리들 숫자(175,422명)의 5.9%에 이른다.  ) 일본인과 중국인들의 공무원 직위의 묵시적 비율(중앙관리들의 경우 대략 1 : 1)이 있었으므로, 조선 인 관공리들의 증가는 일본인 관리들의 배려(혹은 양보) 하에서, 혹은 중일전쟁
<표 13> 만주국 1940년 센서스 상의 일본인과 조선인의 산업분포(괄호 안은 %)

출처: 『1940년 센서스 일본인편』, 61~71·281~287쪽.
후 징집된 재만 일본인 관료들의 공백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중일전쟁 후 의 만주국은 특히 고학력 조선인들에게 실로 새로운 취업 공간이 되었다. 31) 만 주국 후반기에 재계에서 조선인들의 존재는 미미했으나, 관공리를 포함한 화이 트칼라와 전문인 계층이 막 성장하던 중에 만주국이 패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9) 山中峰央, 2005, 「滿洲國人口統計の推計」, 『東京經大學會誌』 245號, 186쪽.
30) 농업·목축·임업·어업 합계.
31) Carter Eckert, 1996, “Total War, Industrialization, and Social Change in Late
Colonial Korea,” in Peter Duus, Ramon Myers, and Mark Peattie(ed.), The
Japanese Wartime Empire, 1931~1945,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p. 33.

Ⅳ. 1940년대의 조선인 산업분포

만주국의 마지막 시기에 중일전쟁의 효과(즉 1940년 센서스에서 발견된 화이 트칼라 조선인들의 존재)의 추세를 추적하는 것은 지난한 작업이다. 제한적 자 료를 통해서 본다면,  ) 야심만만한 조선인 청년들이 관공리, 변호사, 의사, 교 사, 그리고 명문 국립교육기관들을 포함, 틈새 인가증까지 꾸준히 만주국의 문 을 두드린 사실이 드러난다. 조선인 화이트칼라와 교육기관 합격자들을 통해 서 보자.
조선인 고위관리로는 초기(1935)에 지엔타오성 민정청장 김병태, 학무과장 윤태동, 시학관 김춘학 정도이나, 후기(1940)에 이르러 지방법원 차장, 판사 2명, 총영사 2명(박석윤 포함), 중앙·지방부서 과장급 10명, 국장급 1명, 사무 관급 16명,  ) 기좌(技佐) 9명 등에 이른다.  )
1935년 지린성공서의 옌볜[延邊] 담당 직원 31명 중 조선인이 7명, 지엔타 오성공서 직원 169명 중 조선인 51명이 근무했다. 지엔타오성 전 기간(1933년~ 1942년 말)에 264명의 관리(천임관 이상)가 거쳐 갔는데, 이 중 조선인은 성장 이범익(1937년 11월~1940년 5월)과 차장 유홍순(후일 강원지사), 시학관 이인 기를  ) 포함, 29명 정도가 파악된다.  ) 그리고 협화회에 조선인 회원 약 6만 명이 가입했고, 펑티엔을 비롯한 6개 지역에 조선인보도분과위원회가 설치되 었다.  ) 조선인 간부도 약간 있었다. 1941년 협화회 인사에서 중앙본부에 최소
6명, 지역간부에 24명이 사령장을 받았다.   ) 그리고 중앙·지방 공무원 시험에도 다수 합격자를 배출했다(표 14). 이것
은 센서스 이후 만주국 공보에 발표된 중앙행정부의 민생부, 경제부, 사법부, 제사부, 치안부, 수도경찰, 문교부, 외교부, 총무청, 흥농부, 지적총국 행정과, 대동학원, 官需局 등의 위임관, 고등관, 기술관, 교관과 지방관서 위임관, 위 임기술관 등의 채용, 전형, 적격, 등격고시 등의 합격자를 이른다. 전체 합격자 수는 약 1만 9,000명인데 조선인은 289명으로 1.5%를 점한다.
<표 14>  1940년대 만주국 관리 합격자
1940 1941 1942 1943 1944 1945 합계
전체 3,255 5,387 4,880 3,000 2,525 74 19,121
조선인 79 6339) 73 70 4 289
출처: 공보 1940. 11. 27~1945. 2. 7.           
만주국에서 율사(변호사) 개업을 한 조선인은 적어도 4명이 파악된다(표 15).
<표 15>  만주국 율사 명부(괄호 안은 조선인)
1941 1942
10(2) 28(2)
출처: 공보 1941. 9. 3, 1942. 3. 12.
조선인 의사들에게도 만주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만주국 정부는 의사법
(1936), 국민의료법(1943), 의료단체법(1944) 등을 제정, 전시의 의료 통제를 강화했는데,  ) 이런 수요가 조선인 의사들을 불러들였다. 1938년 말, 1939년 초 조선인 의사 등록이 급증하는데(2,155명 중 255명으로 전체의 11.8%)(표 16 참조),  ) 이때가 거의 최초로 조선인 의사들을 받아들인 시점인 듯하다. 이 시 기의 미미한 중국인 의사(치과의사 포함) 시험 합격자 숫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 센서스 이후에도 조선인 의사들은 꾸준히 증가, 만주국 패망까지의 총합은 전체 2,064명 중 261명으로 약 13%에 이른다. 만주국 인구에서 차지하 는 조선인 인구비율(3.4%)과 비교한다면 매우 높은 비율이다. 이것은 미미한 조선인 한의사 등록자(전체 3,602명 중 4명)(1939~1944)와는 큰 대조를 이룬
다. 만주국 정부는 한의사 인가는 중국인에, 양의사 인가는 조선인에 배려한 듯하다.
<표 16>  만주국 의사 등록자(1938~1945)
1938~1940 센서스 1940~1945 센서스
전체등록자 조선인 조선인 비율(%) 전체 조선인 조선인 비율(%)
일반의사 3,589 293 8.2 1,669 243 14.6
치과 649 15 2.3
약사 105 5 4.8
수의사 64 5 7.8 395 18 4.6
합계 4,407 318 7.2 2,064 261 12.6
출처: 공보 1938. 9. 24~1945. 2. 24.
그리고 조선인 교사들도 다수 존재했다. 센서스 이후 패망까지 교사자격 합격자는 모두 약 2만 4,000명이며 그중 조선인은 316명(1.4%)이다. 1940년 말에서 1941년까지 초등교사 허가증 획득에 조선인들도 약간의 기회(0.7%)를 얻었다. 1945년 조선인 중등교사 자격증 획득자는 무려 18%에 이른다.
<표 17>  만주국 1940년대 교사 허가증
1940년 말~
1941 1942 1943 1944 1945 합계 조선인
비율(%)
초등 19,898(139) 19,898(139) 0.7
중등 1,663(55) ) 96(11) 368(26) 72(2) 444(80) 2,643(174) 6.6
직업교육 ) 50 3 4 5(1) 10(2) 72(3) 4.2
출처: 공보 1940. 12. 9~1945. 7. 7까지.       
센서스 이후 패망까지 만주국 유수의 정부직할 고등교육기관과 유학 인가 시험에도 조선인들이 지원, 약 155명 정도의 합격자를 냈다(표 18).  ) 이 중에 서 변경 개척지에 보낼 의사들을 속성으로 양성한 하얼빈, 치치하얼, 룽징[龍井] 의 개척의학원의 조선인 합격자(25명)는 전체 213명 중 무려 11.7%를 점한다.

<표 18>  만주국 1940년대 정부직할 고등교육기관과 유학 인가 합격자(괄호 안은 조선인)
1940. 12~ 1941 1942 1943 1944 1945 조선인 숫자
하얼빈의대 97 73(3) 107(2) 5
신징의대 51 43(3) 3
신징의대 약학과, 수의학과 103 34(2) 2
자무쓰[佳木斯]의대 5(1) 1
신징공대 58(4) 4
펑티엔공대 27(2) 150(7) 9
하얼빈공대 90(1) 50(2) 3
하얼빈농대 74(4) 66(10) 14
펑티엔농대 111(4) 4
신징법정대 195(11) 200(13) 24
중앙사도(師道)훈련소 88(5) 40(4) 60(1) 10
사도대학 164(6) 265(15) 150(11) 32
하얼빈개척의학원 20 24(1)
치치하얼[齊齊哈爾] 개척의학원 21 50(3) 23(2)
룽징개척의학원 52(17) 23(2)
도일유학인가 101(7) 87(6) 30(6)
출처: 공보 1940. 12. 20~1945. 1. 31.

일부 조선인은 다퉁[大同]학원, 지엔구어[建國]대학, 군관학교 등 만주국 
명문 교육기관을 졸업했다. 다퉁학원은 만주국 건국에서 패망까지 고급 공무
원을 선발, 훈련시킨 기관이다. 정규코스 1기(1932년 10월 졸업) 96명을 비롯, 
19기(1945년 8월 졸업) 졸업생 52명까지의 2,629명과, 연구소 1기(1944. 7), 2기 (1945. 8) 합계 66명, 중견지도자 코스 1기(1938. 7)에서 5기(1941. 9)까지의 합 계 241명, 총합 2,936명의 졸업자 중에서 조선인 졸업자는 신기석(9기), 이충 환(13기), 최규하, 서정귀, 조기준(이상 15기) 등 최소 28명이다.  ) 중일전쟁 후 창설된 만주국 최고의 국립대학인 지엔구어대학은 1기(1938년 입학) 145명 을 비롯, 8기(1945년 입학)까지 도합 1,068명의 졸업자를 배출했는데 이 중 조 선인은 강영훈, 민기식(3기)을 포함, 최소 50명이다.  ) 또한 만주국의 중앙육군훈련처(펑티엔군관학교)는 1932년 개교 이래 1938년 까지 매년 200~300명 정도를 뽑았는데 조선인은 정일권(5기)을 포함, 87명이  졸업했다. 1939년 출범한 본격적인 육군군관학교(신징군관학교)는 1945년까 지 일계 1,086명, 만계 1,590명을 내었는데 조선인 졸업자는 김동하, 박임항, 이주일(이상 1기), 박정희 전 대통령(2기) 등을 포함, 48명이 있었는데, 그중 24명은 1941년부터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지엔타오 지역의 항일유격대를 진압하는 용도로 1939년 창설되어 1945년 7기까지 모집된 지 엔타오특설대의 746명의 병력(일본 지휘관을 포함) 중 조선인은 690명을 차지 했다. 48)
중일전쟁 후 조선인 화이트칼라의 가시적 성장은 중국인들에게 불만거리
가 되어 중국인 사이에서 ‘조선인은 만주국의 2등공민’이라는 담론의 유포를 초래했을 것으로 보인다.  ) 이것에는 일본인들의 은근한 유포 가능성, 일부 조 선인들의 도취 등 여러 사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듯하다. 조선인 스스로 이런 인식을 소유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일부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호가호위적 태 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과 중국인들의 거주가 분리된 지역들(특 히 북만주)이 있었고,  ) 일부 조선인들은 일본인과 기타 민족집단 사이에서 후 자를 멸시, 폭력을 행사한 일화들이 발견된다.  )

Ⅴ. 맺음말

총량적인 지표에서 보면 만주국 시대 조선인들은 2등국민 담론과는 달리 전기 에 주로 지엔타오 지역과 농업에 집중한 주변적 위치에서 후기에 부지런히 2·3차산업에 다소 진출한, 그러나 전체 평균에 뒤지는 소수자였다. 무엇보다 이렇다 할 조선인 자본과 파워(사업가와 고관들)가 없었다. 국제적으로 괴뢰국 이라는 규탄을 받았으나 독립국적 제스처에 열중한 만주국의 지도자들은 이 ‘독립국’의 국민인 ‘만주국인’(대부분 중국인)의 존재를 의식해서 공직, 기업 분 야의 상당한 자리를 이들에게 할애했다.  ) 이런 사정에서 조선인은 애매한 존 재였다. 이들은 만주국의 공식이념인 오족협화와 조선총독부의 만선일여(1937년 이후 사용) 담론 사이에 끼어(즉 이들의 소속, 정체성이 만주국과 조선 사이에 서 일정치 않은) 거주지역에 따라 사용 언어와 교육체계가 달라지는 큰 불편함 을 겪게 되었고, 이들을 위한 국적법이 일제의 패망까지 제정되지 않았다.  ) 재만 조선인 중에는 만주국에 대한 협력자, 실업자, 아편밀매자 등 별별 종류 가 다 있었다.  )
그러나 중일전쟁 후 일본인들의 배려, 혹은 공백으로 인한 조선인들의 공 적 부문과 전문직의 성장, 遍在성을 간과할 수 없다. 조선인들은 만주국 막바 지에 공적 분야에 두루 志願했다.  ) 그 의미는 다수의 고학력 조선인들이 만주 국을 기회의 땅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만주국에서의 중하급직 관료, 군인, 노 무관리자, 기술자, 혹은 기업활동 등 실전 경험들은 후일 신생국 한국에서의 약진에 중요 자산이 되었다. 1947년 7월까지 재만 조선인들 약 80만 명이 귀국 했는데,  ) 이 중에서 식민주의가 초래한 근대와 현장 경영을 겪은 일부가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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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Social Status of Koreans in the Manchukuo Period
Han, Sukjung
Through the population dynamics, this paper approaches the social status of Koreans in Manchukuo while checking the validity of the previous data. Their status refuses simple categorization. The Koreans were peripheral minority who clustered around unsafe rural area and urban amusement quarters in the early period, and became partially represented  in the secondary and tertiary sectors in the late period. However, after the outbreak of the Sino-Japanese War, there arose a stratum of Koreans in white collar and public sector positions due to the consideration by or the vacuum of Japanese rulers who were conscripted for the final stage of the Sino-Japanese War and the Pacific War. Furthermore, Koreans were visible and omnipresent in almost all the posts and job opportunities in Manchukuo. This conspicuity had the seed of the persecution by Chinese right after the demise of Manchukuo.
keywords
Koreans in Manchukuo, demographic dynamics, social status, Sino-
Japanese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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