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나 위대한 기독교의 빛을 보았었다.
“신앙의 극히 교묘한 옹호론자들이
실은 신앙의 큰 적이다.”
‘희망’이란 사자후를 울린 목사님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인 1972년, 박정희가 갑자기 헌법을 파기하고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그때 나는 이 사건을 충격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대부분 선생님들은 일본의 유신이 이러 저러 하다며 그 당위성을 억지 엉터리로 설명하느라 땀을 뻘뻘 흘리셨다.
교련 시간에 한 짓궂은 친구가 질문을 했다. ‘천재지변이 있어야 헌법을 개정할 수 있는 것 아닙미꺼?’ 교련 선생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야 임마, 있다보만 곧 천재지변이 있을끼다!’ 천재지변이 있어서가 아니라 천재지변을 만들기 위해 유신헌법을 선포했다는 이 말을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니 유신의 속성이 궤변임을, 물론 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지만, 이보다 더 날카롭게 꼬집은 현답을 들은 적이 없다.
1975년 봄에, 나는 꿈에 부푼 대학 신입생이 되었다. 학교 분위기는 어수선 했다. 그해 4월 9일 인혁당 인사 8명을 대법원 판결 20시간 만에 처형한 박정희의 사법 살인이 있었고, 유신에 저항하는 대학생을 빨갱이로 모는 민청학련사건이 있었지만, 박정희가 언론을 왜곡하고 철저히 탄압했기에 그 당시 나는 그러한 사태가 있는 지도 몰랐다. 다만 그때는 백골단이나 전경 같은 무장 폭력 진압대가 없는 시절이라, 데모가 그 뒤에 비하면 사뭇 낭만적이었다. 나는 대학생의 데모를 필수 교양 과목쯤으로 생각하고 의식도 없이 노는 재미로 참가했다. 즐기는 듯한 자유로운 데모는 1975년 그해 봄이 마지막이었다. 곧이어 긴급조치가 발동하면서 데모는 졸지에 저항 전투 양상을 띠었다.
연세대학에서 기독교 개론은 필수 교양 과목이었다. 우리 과의 강의 시간은 점심시간 직후인 5교시였다. 더구나 목사인 교수님은 지긋하시고 인자한 분이셨다. 학생 출석에 개의치 않으시고 나지막한 소리로 강의를 하셨다. 막 점심을 먹은 직후라 춘곤증에 자장가처럼 들리는 조용한 교수님 강의 목소리, 마지못해 듣는 과목, 그야말로 낮잠 자기 그만이었다. 아예 책상에 엎드려 잠에 푹 빠졌다.
4월 하순 어느 날, 갑자기 칠판에 분필을 쾅 두드리는 큰 소리가 울려 잠에서 후다닥 깼다. 눈 비비고 칠판을 보니 ‘희망’이란 두 글자만 칠판을 가득 메우고 있다.
교수님은 목청을 한껏 높이셨다. “우리는 ‘희망’이 있기에 투쟁을 합니다.” 전혀 교수님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차분하게 말씀을 이으셨다.
“얼마 전 몰트만 교수가 우리 학교에 왔어요. 제가 조교들을 시켜서 강의 안내문을 학교 게시판 곳곳에 붙이라 했어요. 그런데 2시간이 안 돼 형사들이 찾아와 게시물을 다 떼어내라고 합디다. 어디 이럴 수가 있습니까? 나는 희망이 있기에 투쟁할 것입니다.” 이런 요지로 몇 말씀 더하시고 강의를 마쳤다. 교수님의 마지막 수업이었고 교수님을 학교에서 다시 뵙지 못했다.
바로 얼마 뒤인 4월 30일, 베트남은 민족해방통일을 이루었다. 다음날 신문들은 ‘월남 패망’이란 기사로 도배질을 했다. 우리의 젊은 피를 대가로 극도로 부패한 월남 독재정권을 도와 돈을 번 박정희는 그런 혈맹 집단의 패망에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지금 그 당시를 생각하면 북한이 경제를 비롯해 여러모로 남한을 앞서고 있었기에 박정희의 조급성을 촉발하게 했을 것이다. 박정희는 승리자 북베트남의 있지도 않은 악랄성을 국민에게 선전·세뇌하기에 땀을 뻘뻘 흘렸다. 북베트남=북한이라는 공식을 만들었다.
북베트남이 주도한 베트남통일을 빌미로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했다. 헌법을 비방하는 행위 금지, 학생 집회와 시위 금지를 비롯한 민주주의의 근본 기본권을 박탈하였다.
유신 헌법의 아주 사소한 불합리라도 지적할 수 없게 하기 위해 ‘헌법’이란 말을 입 밖에 내서는 안 되었고, 인쇄물에도 찬양 이외 어떤 말도 쓸 수 없게 강제했다. 허름한 선술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다 취중에 넋두리도 꼬투리 잡히면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이런 걸 발악이라고 할까, 박정희는 유신의 종말을 위한 발걸음을 내디딘 셈이었다. 베트남의 민족해방통일이 한국 민주주의에 가혹한 시련을 안겨 주었다.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자마자 학생들의 저항을 막기 위해 박정희는 휴교령을 내렸다. 철없던 때라 휴교령을 얼씨구 반기며 대구 집에 내려가 미팅을 즐기며 갓 배운 술에 허송세월을 했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 ‘희망이 있기에 투쟁을 할 것!’이라는 노교수님 말씀이 진한 여운으로 마음속 한 구석에 남아 있었다.
긴급조치 9호 발동 후 포악한 유신은 추악한 본색을 노골화 했다. 나는 학생운동으로 제적당했다가 복학한 한 선배를 만난 뒤 어느덧 이른바 ‘의식’의 소중함을 서서히 깨달았다. 이영희 교수가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다룬 ‘전환시대의 논리’는 우리 세대 젊은이 의식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 <나는 고발한다.>는 그 유명한 책에서, 드레퓌스 사건을 파헤친 에밀 졸라의 진실을 향한 행진에서, 지식인과 지성인을 선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혜안을 얻었다. 책을 의무적으로 이것저것 읽었다.
그렇게 책을 읽는 가운데 당시 유행하던 해방신학에 관한 책을 우연히 접하면서 ‘희망의 신학’이라는 것을 보았다.
희망! 가슴에 진한 여운을 남긴 글귀다. ‘희망의 신학’이란 책을 펴낸이가 독일의 세계적 신학자 몰트만이었다. 노교수님께 얼핏 들은, 교수님이 초청하려 했던 그 분이었다. 관심이 생겨서 더 들어가 보니 몰트만의 정신적 스승은 본 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였다.
본 회퍼를 찾아보았다. 놀라웠다. 본 회퍼는 21세에 베를린 신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수들은 새파란 청년을 ‘천재적 신학 청년’이라고 절찬했고, 이 청년이 쓴 논문을 ‘신학적 기적’이라고 평가했다. 본 회퍼는 미국에서 신학공부를 더 한 뒤 베를린 대학에서 교목을 하며 강의를 했다. 히틀러의 파시즘이 막 기승을 부릴 때였다. 나치는 기독교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나찌하의 독일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복종하는 교회가 아니라 히틀러의 말을 듣고 그 앞잡이 교회를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다.
히틀러는 겉으로는 ‘기독교는 독일의 민족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가장 중요한 종교다. 나는 교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고 기만적인 꼼수를 썼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히틀러의 독일은 교회를 부른다. 교회는 이 부름에 응해야 한다.’는 기치 아래 결집했다. 그런 목사들은 히틀러의 지극한 충견이었다.
우리 독재 시대 청와대에 들어가 ‘조찬기도회’를 연 우리 목사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본 회퍼는 위선에 둘러싸인 시대의 참모습을 보았다. 신학자인 동시에 올곧은 지성인이었으니 당연히 반나치 운동에 뛰어 들었다. 본 훼퍼는 나치에게 요주의 인물로 찍혔다. 나치의 공포정치가 절정이던 1939년 6월에 미국 신학교의 초청으로 안전한 미국에 갔다. 본 회퍼는 ‘자신이 미국에 온 것은 결국 실수였다’고 깨닫고 고통 받는 독일 민중을 생각하며 7월 즉시 귀국하였다. 편히 갈 수 있는 길을 일부러 회피했다.
아, 이 대목에서 받은 내 젊은 날의 충격은 얼마나 컸든가, 그것이 나를 이만큼이라도 이끈 힘이었다.
나치의 엄중한 감시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암살 모의에 가담했다가 1943년 4월 체포당했다. 나치가 망하기 며칠 전인 1945년 4월 9일 포로수용소에서 사형 당했다. 본회퍼의 단두대 처형을 지켜본 피셔 훌슈츠룽 박사는 "본회퍼가 죄수복을 벗기 전에 열정적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단두대에 오르는 모습은 매우 대담했고 침착해 보였다"고 당시를 회고하면서, "내 50평생에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본회퍼 같은 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회고했다.
평화를 위해 저항한 신학자 본 회퍼는 2차 대전 이후 각종 신학의 흐름에 출발점이 되는 통찰력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았다. ‘비종교적 해석’ ‘성숙한 세계’ 같은 개념은 현대 신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사상 못지않게 위대한 ‘행동’은 많은 지성인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본 회퍼의 영향을 받은 독일의 몰트만은 ‘희망의 신학’,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해방 신학’, 우리나라에서는 서남동과 안병무의 ‘민중 신학’을 낳았다.
나른한 봄날 오후, ‘희망이 있기에 투쟁을 할 것이라’는 사자후를 통해 조는 나를 깨운 교수님이 바로 본 회퍼의 정신적 계승자인 서남동 교수셨다. 서남동 교수는 1960년대 본 회퍼의 세속화 신학을 비롯한 현대신학의 조류를 국내로 들여오는데 온 힘을 다하셨다.
1970년대에 들어서 국내 신학자들과 함께 발표한 '한국 그리스도인 선언'을 계기로 활발하게 사회참여 운동을 했다. ‘해방’·‘희망’·‘민중’ 같은 관념을 박정희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지성인은 독재자에게 손에 가시가 되는 게 역사의 당위가 아닌가. 서남동 교수는 우리에게 마지막 강의를 한 뒤에 곧바로 해직당하셨다. 1976년 함석헌·문익환 선생과 함께 '3·1민주구국선언'에 서명하여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고난은 전두환 시대까지 지속하다가 1984년 유명을 달리 하였다.
서남동 교수를 만나지 못했다면 무종교인 나는 결코 본 회퍼를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내 가슴을 뜨겁게 달군 본회퍼의 말은 신학자로서 히틀러를 처단하려는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만약 미치광이가 차를 몰고 인도로 돌입하려 한다면…
목사인 나는 단지 그 미치광이에게 치어 죽을 사람들을 위해 장례 준비하고 기도해야 하는가?
아니면 차에 올라 미치광이에게서 핸들을 뺏어야 하는가?“
나는 아직까지 기독교뿐만 아니라 아무 종교와도 인연을 맺지 않았다. 그러니 기독교를 대하는 종교로서 애증은 없다. 그러나 나는 1980년대 내내 광주민중 학살범인 전두환을 위해 조찬기도회를 열고 아부하여 출세한 목사들을 기독교 용어로 사탄으로 질시하고 있으며, 아직도 이들이 기독교 사회의 지도자란 현실에 분노하고 있다. 이들에게 미워하기보다 불교식 자비를 베푸는 성숙한 사람이 되고자 내 자신 힘껏 수양하면 좋겠지만 아무래도 안 될 것 같다.
본 회퍼는 체포된 1943년 4월부터 1945년 4월 9일 처형까지 약 2년간 각처의 강제수용소를 전전하면서 가족과 친구 베게트에 편지를 썼다. 베게트는 옥중 편지들을 편집하여 1951년 ‘반항과 복종’이라 제목으로 출간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1967년 「옥중서간」으로 번역되었다. 국가의 권력과 신앙인의 양심이 충돌했을 때, 과감히 목숨을 걸고 돌파한 자유 투사의 의지를 절절이 담았다. 암울한 유신과 전두환 시절에 내 용기를 북돋워 주는 빛과 소금 구실을 한 글들이 주옥같이 빛났다.
“크리스찬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본 회퍼의 고백을 우리의 광주 시인 김남주 식으로 바꾸면 이럴 것이다.
“애국자는 고난 속에서 민중과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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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남동 교수님과 2달도 채 안 된 짧은 인연이었지만 기독교 진리의 빛이 태양보다 찬란하다는 걸 체험했다. (이런 걸 어디에서 간증해야 하나?)
거의 다 꺼진 연탄재의 보일 듯 말 듯한 빛보다 더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새로운 세계’를 운운하고 있다. 그런 인간들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이 땅 기독교의 90%에 가까운 인간들을 보면 교회 근처에는 얼씬거리기 싫다.
특히 대형 교회나 성당에는 알레르기가 돋는다. 대형 사찰도 물론이고.
물론 10% 아니 그 보다 더 극소수의 기독교인에게는 무한히 존경을 하고 있다.
‘고난 속에 하나님과 함께 하는’ 내가 아는 서울 향린교회 출신의 신자들, 대구의 조그만 교회 목사님들과 신자들 ...
‘고난 속에 붓다와 함께 하는’ 스님과 불자들에게도 당연히 무한한 존경을 보내고 있다.
나는 서남동이란 찬란한 기독교 빛을 보았다.
하잘 것 없는 불들은 쳐다보기 싫으니 다 꺼져라!
뭐 새로운 세계라고, 새롭게 창궐한 천한 바이러스 세계가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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