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3

19 일본의 죄악사 조찬선,최영 - 박충구 서평


일본의 죄악사
조찬선,최영 (지은이)풀잎향기2018-03-31





409쪽
152*223mm (A5신)
573g
ISBN : 9788996752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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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장 왜 일본은 침략과 전쟁을 좋아 하는가?
제2장 역사 조작과 왜곡의 나라
제3장 한국의 뿌리 말살을 시도
제4장 3백만 명을 죽인 임진왜란
제5장 끌려간 노예들
제6장 일본군에 짓밟힌 조선 소녀들
제7장 정복 야욕이 만든 일본의 죄악상
제8장 강제징용과 지옥의 섬 하시마
제9장 일본의 산업혁명과 조선인 강제노동
제10장 죽어서도 당한 명성황후
제11장 폭력의 정치와 약탈
제12장 사진 속 일본의 악령들
제13장 날강도를 만난 독도
제14장 총탄에 불탄 제암리교회
제15장 일본의 죄 76가지
제16장 일본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제17장 일본을 꾸짖는 세계여론
제18장 조선이 끝나고, 일본이 망하던 날
제19장 목에 건 주홍글씨
제20장 무궁화와 사꾸라가 함께 피는 날
제21장 협상도 용서도 원치 않는 일본
제22장 악의 침묵은 악의 편이다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조찬선 (지은이)


1917년 평남에서 출생해 일본 동경신학대학과 미국 애즈베리 신학대학(M.Div), 보스톤 대학(STM)에서 공부하고 퍼시픽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목원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18년 동안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및 대학교회 담임목사와 전국 기독교학교 교목회장 등을 역임했다. 미국에서는 밸리연합감리교회 초대 담임목사와 유인대학교(Yuin University) 부총장을 지냈고, 연합감리교(UMC)에서 코커스 회장으로 활동했다.


최근작 : <일본의 죄악사>,<기독교 죄악사 (하)>,<기독교 죄악사 (상)> … 총 5종 (모두보기)

최영 (지은이)

미국 Wisconsin 거주
감신대/연세대연합신대원
Garrett/Chicago Theological Seminary D.Min
보스톤대학교 박사과정 수료
Louisiana Baptist University, Ph. D
이화여대 외래교수
서울 중앙 YMCA 대학생부
목원대/협성대/배재대 외래교수: 강남대 초빙교수
시사영어학원, 강사
기독교대한감리회 '정직운동' 제안
한국실존상담연구소 초빙교수
Global Leadership Academy of Wisconsin, 교수, 현재
미국 연합감리교회 정회원, 현재


최근작 : <일본의 죄악사>,<한국이 세계를 경영한다>,<자기를 다스리면 결혼이 보인다> … 총 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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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만행에 대한 총제적인 진단… '일본의 죄악사'
조찬선·최영 지음…"죽기전 일제 범죄 증언 위해 집필"
(서울=뉴스1) 이기림 기자 | 2019-11-06 16:43 송고


올 하반기 한국은 일본과 총성 없는 전쟁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7월부터 대(對)한국 수출 규제를 행했다.

한국인들은 원래 가지고 있던 반일감정에 날을 세웠다. 노재팬(No Japan) 노아베(No Abe)를 외치며 일본여행을 가지 않고 일본제품을 사지 않았다.


한일갈등은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등이 쓴 책 '반일 종족주의'가 인기를 끌면서 더 악화됐다.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정대협 등의 주장이 옳지 않다는 등의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통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올해 102세의 조찬선 목사는 '반일 종족주의'와는 상반된 시각으로 일제강점기 시대를 바라본다.

조 목사와 함께 신학자로 활동한 최영 교수는 함께 쓴 책 '일본의 죄악사'를 통해 윤리와 도덕, 양심과 정의, 신학·사회학적 시선으로 일본의 만행을 진단하고 있다.

두 저자는 과거 일본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여러 사건들을 제시하며 비판하고 있다. 책에는 임진왜란과 명성황후 시해, 강제징용, 제암리 교회사건 등 과거사를 비롯해 역사 왜곡과 위안부 문제 등 현안이 담겼다.

두 저자는 "일본이 조선인을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하면서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감행했다"라며 "죽기 전에 일본인들이 저지른 범죄를 증언하기 위해 집필했다"고 밝혔다.

◇ 일본의 죄악사 / 조찬선·최영 공저 / 풀잎향기 / 1만6500원





[책과 영성] 일본의 죄악사
조찬선·최영 지음/풀잎향기
입력 2018-08-17 00:03




일본이 저지른 과거 사건에 대해 신랄한 비판과 질책을 가한 책이다. 저자들은 모두 재미 신학자이자 목회자로 오늘의 상황에서 윤리와 도덕, 양심과 정의, 신학·사회학적 시선으로 일본의 만행을 진단했다. 저자 중 한 명으로 올해 101세인 조찬선 목사는 “죽기 전에 자신들의 범죄 사실을 일본인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집필했다고 밝혔다. 책은 임진왜란과 명성황후 시해, 강제 징용, 제암리 교회 사건 등 과거사를 비롯해 역사 왜곡과 위안부 문제 등 현안을 총 22장에 담았다. 저자들은 ‘악의 침묵은 악의 편’이라는 독일 신학자 본회퍼의 말로 결론을 맺는다.

신상목 기자



“일본의 만행을 모르면 미래는 없다”
댓글 2018-05-08 (화) 유정원 종교전문 기자

▶ 밸리연합감리교 초대담임, 101세 조찬선 원로목사

▶ 신간 ‘일본의 죄악사’ 출간


조찬선 목사와 조진순 사모가 신간 ‘일본의 죄악사’를 들고 사진을 찍었다.“가끔 미국 사람들도 제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물어봐요. 제가 ‘101번 프리웨이를 운전 중이요’라고 영어로 대답하죠. 그러면 웃으며 인사를 나눕니다. 이 나이에도 차를 몰고 다니는 걸 보고 놀라워 합니다.”

원로 조찬선 목사가 101세에 신간을 냈다. 책 제목은 ‘일본의 죄악사’다. 빽빽한 글자로 차 있는데 한눈에 봐도 두터운 분량이다. 백수를 훌쩍 넘긴 고령에 고도의 집중력과 상당한 체력을 요구하는 저술활동을 이어간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노익장이라고 칭송하기에도 부족할 판이다. 조 목사는 남가주 로랜하이츠에 위치한 연합감리교 은퇴목사 마을인 ‘베이커 홈’에서 조진순 사모와 함께 평온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조 목사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기독교 죄악사’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미 80세를 넘긴 나이에 저술한 ‘기독교 죄악사’는 지금까지 기독교계는 물론 교계 밖에서도 읽히는 스테디셀러 책이다. 이번에 쓴 ‘일본의 죄악사’는 최성 교수(T리더십 대표)와 공저로 한국에서 출판돼 운송 중이다. 출판기념회는 오는 6월 쯤에 열릴 예정이다.


조 목사는 동경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대학교에서 석사(STM), 퍼시픽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이후 이화여대 교목실장과 해군사관학교 군목실장, 감신대 교수를 역임했다. 이민교계에 남긴 족적도 크다. 이민 초기 밸리연합감리교의 초대 담임목사를 지냈고 연합감리교 코커스 회장으로도 활동했다.

“나치 독일이 학살한 유대인이 얼마나 되는 지 아십니까? 약 600만 명입니다. 그런데 일본이 죽인 한국 사람은 몇 명인지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임진왜란부터 800만 명이 넘습니다. 일본군 위안부나 징용과 징병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웃나라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사실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조 목사는 일본이 지금도 주장하는 식민지 공헌 주장을 조목조목 근거를 대며 반박했다. 물론 ‘일본의 죄악사’에 그대로 담긴 내용이다.

“조선인을 먹여 살렸다고 하지만 공출미를 빼돌린 건 다 아는 일이죠. 학교를 지어 교육시켰다는 것도 거짓입니다. 선각자들이 돈을 모아 학교를 세워가자 40만원이던 비용을 70만원으로 올려버렸어요. 철도 건설도 만주 정복이라는 목적을 위해 한 거죠. 그나마도 비용의 3분의 2는 우리가 부담한 겁니다.”

이제 와서 100세를 넘긴 나이에 일본의 죄악을 기록해 펴낸 이유는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다. 과거를 제대로 챙기지 않는 민족에게 정당하고 풍요로운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은 성자입니까 아니면 바보입니까. 독일은 지금도 유대인들에게 사과하고 또 사과합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도록 하려면 똑바로 역사를 알고 따져야 합니다. 이런 내용은 교과서에도 실어 모든 국민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조찬선 목사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목소리에 힘이 넘친다. 발음도 정확하고 논리가 정연하다. 조진순 사모는 “아직도 수영장 물에 들어가 제자리 걸음을 하며 운동을 빼먹지 않는다”고 전했다. 얼마전 DMV는 조 목사에게 5년짜리 운전면허증을 발급했다. 고령의 노인에게는 일반적으로 2년이 전부다. 조 목사는 “아직도 운전면허가 4년이 남았다”며 파안대소했다.

<유정원 종교전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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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직할 수 없는 일본인

박충구
승인 2019.07.19 


춘천에 계신 벗 김성호 목사께서 보내준 “일본의 죄악사”라는 책을 읽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일본인을 일러 “조선인을 괴롭히려 태어난 족속”처럼 여긴다. 자료를 찾아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확신이 들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내 마음에 든 생각은 ”내게도 깊은 마음의 상처”가 생겼다는 것이다. 나의 일천한 경험에서도 일본사람과의 만남은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2005/6년 퀘이커 공동체 펜들힐의 초청으로 그곳에 머물고 있었을 때 일본인 부부를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예의가 바르고 언제나 상냥했지만, 어느 날 그들과 나는 많은 이들 앞에서 견해가 갈렸다. 그들은 일본인이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며, 세계에 유례가 없는 평화헌법을 가진 유일한 국가라는 것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여 나는 그런 이해는 일종의 “생략의 죄”를 짓는 일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은 감추고 고백하지 않는다. 그들은 2차 세계 대전 전범 국가라는 사실은 축소하거나 감추고, 미국의 원폭 피해자라는 사실만 드러낸다. 지난 2000년 일본으로 교수 퇴수회를 간 적이 있었다. 당시 가장 끔찍했던 것은 교토 히가시야마구에서 세계에 유례가 없는 조선인들의 “코 무덤”이 세워져 있는 현장을 가 본 일이다. 거기에는 18만 5738명의 조선인 코가 잘려가 묻혀있었다. 거기엔 명나라 사람 2914명의 잘린 코도 함께 묻혀있다. 어느 나라가 제 자식들에게 남의 나라 사람들의 코를 잘라다 묻어놓은 것을 자랑삼아 무덤을 만들어 놓을 수 있을까?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군사들에게 그들이 죽인 조선인의 코를 베어오라고 명령을 했고, 일인들은 그 짓을 했다. 조선 사람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서 사람을 죽인 업적을 증명하고 자랑하려 본토로 가져간 사람들이 일본인이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삼아 코 무덤(실제로는 코 무덤이 너무 끔찍하다고 하여 귀 무덤이라고 이라고 써 놓았다) 만들어 놓았다. 조선인 근 이십만 명의 코를 묻은 그 무덤을 바라보며 일본인들의 자식들은 한국인에 대하여 존중의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코가 베어져 버려진 조선인의 시신들에 대한 이야기와 코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퀘이커들에게 해 주었을 때 좌중은 조용해졌었다.

나가사끼에 가면 원폭이 투하되었던 현장이 있다. 그곳을 일본인은 평화공원이라고 이름을 붙여 놓았다. 나는 그 현장을 둘러보면서 원폭에 의하여 증발하고, 죽어간 사람들이 겪었을 그 아비규환의 역사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었다. 그러나 당시 나가사키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일본으로 반강제 이주했던 상당수의 한국인도 살고 있었고, 그들도 죽임을 당했다. 원폭 피해자임을 주장하면서 일본인들은 조선인 피해의 역사를 드러내지 않는다.

나 역시 원자폭탄의 가공할 위력과 그 폭탄을 사용한 백인들의 비정함에 분노했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일본의 죄악사”를 읽으며 일본인들이 감추어 놓은 역사를 읽게 되었다. 현재, 나가사키 평화공원은 임진왜란 때 조선인들이 잡혀가서 노예로 팔려 가던 조선 노예 장터였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인 노예시장의 비참한 정황에 대한 기록은 일본인 승려 게이넨의 “조선일기”, 갈레치의 “동서인도항해기”에 근거한 것이다. 백인들이 아프리카 해안에서 흑인들을 잡아다 노예로 팔았던 악행과 유사한 일을 일인들이 조선사람에게 했던 것이다.

그들은 20세기에도 조선의 젊은이들을 전쟁의 총알받이로, 일본군 성욕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여기고서도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할 줄 모른다. 일본의 죄악사를 읽으면, 일본인들이 수백 년 동안 조선인을 멸시, 살상, 착취해온 사실을 알게 되고, 도대체 어쩌다 이웃 나라를 대대로 괴롭히는 이런 인간 집단이 있느냐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물론 일본인 중에는 정직한 이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문제는 일본인들이 지금도 역사 교과서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을 감추고, 역사를 왜곡하는 짓을 버젓이 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역사를 배운 지식인과 지난 역사에 대하여 토론하다 보면 얼굴이 벌게지면서 그 근거를 가져오라고 주장한다. 동북아역사재단이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일본 교과서에는 126가지나 역사를 축소하거나, 적반하장으로 역사를 왜곡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역사의식에 있어서 정직할 수 없는 일본인이 과연 좋은 교양인이 될 수 있을까?

일본의 평화헌법은 일본인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다. 1947년 당시 점령군이자 연합군의 지휘관이었던 맥아더에 의하여 강요된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본의 무장 포기, 전쟁포기, 전쟁행위를 영구히 포기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그러나 일본은 자위대를 만들어 그 정신을 이미 훼손했고, 일본의 역대 보수 정권들은 평화헌법을 수정하여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여기저기서 보여주곤 했다. 일본 위기론을 만들어야 그들의 의도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 아베가 벌이고 있는 경제 전쟁도 잔인한 “일본인다움”의 연장인지도 모른다. 일본 지식인의 역사 왜곡으로 인하여 그들의 부정직한 피는 오늘의 일본인들 속에서도 여전히 흐르고 있는 셈이다.

언젠가 오사카의 한 호텔에서 새벽잠을 자는 데 갑자기 요란한 확성기 소리가 들려와 잠을 설친 적이 있다. 창문을 열어보니 극우 세력의 민간인 군대가 새벽부터 거리를 마치 군대처럼 열을 지어 천천히 행진하고 있었다. 일본이 무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새벽부터 차도를 점령한 채 고성능 확성기로 외쳐대고 있었다. 일본에는 자위대만이 아니라 극우적인 민간인으로 구성된 군대도 존재한다. 그들의 한인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는 혐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경멸 수준이다. 이런 집단을 아직도 재생산하고 있는 정말 이상하고도 위험한 나라다.

“일본의 죄악사”, 일본을 제대로 알기 위하여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굳이 그들을 미워하거나 배척할 이유는 없지만, 왜 저들이 우리가 이해하기 퍽 어려운 짓을 집단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역사를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일부 정확한 정보나 분석이. 결여되어 있어 아쉽지만, 이 책을 읽으면 평화헌법을 버리려고 애쓰고 있는 아베의 눈빛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역사를 모르는 한국인,정직한 역사를 배우지 못하는 일본인 - 이런 현실이 오늘의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충구 교수 / 전 감신대 기독교윤리학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22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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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osted by 크리스천 위클리 06/13/18


101세에 신간 ‘일본의 죄악사’출간한 조찬선 목사
“일본인들에게 일본 죄악상 알려주고 싶어 98세에 저술 시작”

일본의 죄악사를 출간한 조찬선 목사


금년 101세에 신간 ‘일본의 죄악사’를 출간한 조찬선 목사는 지금도 운전을 하고 다닌다. 아직도 운전면허 유효기간이 4년이나 남았다. 백수를 넘겼다면 대개 스스로 건강을 돌보는 일도 버거울 것 같은데 이번에는 책까지 출간한 것이다. 그만큼 기억력도 또렷하고 듣기와 말하기는 아직도 청춘이다. 컴퓨터와는 거리가 멀지만 지금도 누군가를 만나면 깨알 같은 글씨로 메모를 남긴다.

조 목사는 동경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보스턴대학교에서 석사(STM), 퍼시픽컬럼비아대학교에서 박사(Ph. D)학위를 받았다. 이후 이화여대 교목실장과 해군사관학교 군목실장, 감신대 교수를 지냈다. 그가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처음 개척한 교회가 밸리연합감리교회다. 이대 교목실장을 지냈던 연고로 개척당시 이대출신이 많이 모이는 교회로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은퇴한 후에 조 목사가 출간한 책 ‘기독교 죄악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지금도 한국 책방에서 꾸준하게 팔리고 있는 스테디셀러라고 한다. 그 기독교 죄악사에 이어 이번에 나온 책은 일본의 죄악사다. 이 책은 감리교 신학대학교 동문인 최성 교수와 공저로 ‘풀잎향기’ 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조 목사는 “원수인지 친구인지 가깝고도 먼 나라, 700년 가까이 악연이 얽힌 나라 일본, 스스로 목에 건 주홍글씨를 내려놓는 날 두 나라는 긴 악연의 쇠사슬에서 해방될 것”이라고 말하고 “내 생명이 멈출 때까지 일본의 죄악상을 일본인들에게 알려주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삶의 사정으로 이러한 결심을 실현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감사하게도 같은 생각을 가진 최 영 박사를 만나게 되면서 드디어 98세에 저술을 시작하여 101세에 책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다”고 말했다.

조 목사는 현재 남가주 로랜하이츠에 위치한 연합감리교 은퇴목사 마을인 ‘베이커 홈’에서 조진순 사모와 함께 평온한 여생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일본의 죄악사 출판기념회는 오는 6월 27일(수) 오전 11시 윌셔연합감리교회서 열린다. 참가비는 없고 준비위원들이 준비한 점심이 제공된다. 이 자리에서 책은 15달러에 구입할 수 있다.

한편 지난 12일 로렌하이츠에 있는 데니스 식당에선 출판기념회를 위한 준비위원회가 모임을 가졌는데 이창순 목사가 준비위원장을 맡고 정지한, 이용택, 신상만 목사, 그리고 이인숙 사모와 정충자 사모가 준비위원으로 수고하기로 했다.














출판기념회 준비위원들. 왼쪽부터 신상만, 이용택, 조찬선, 정지한, 이창순 목사, 이인숙 사모와 정충자 사모

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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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끼리


일본의 력사교과서외곡책동과 그 위험성
박사, 부교수 지승철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하시였다.

《다른 민족의 력사를 외곡하는것은 본질에 있어서 그 민족의 자주권을 침해하는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우리 민족과 우리 나라 력사를 외곡하는것을 절대로 허용할수 없습니다.》

일본반동들은 과거 식민지통치시기 우리 나라 력사를 심히 외곡날조한 범죄에 대하여 성근하게 반성하고 사죄하며 그것을 바로 잡을대신 오늘까지도 조선력사에 대한 외곡행위를 집요하게 계속 일삼고있다.

이것은 일제의 악독한 식민지통치로 가슴아픈 상처를 안고있는 우리 인민에 대한 참을수 없는 모독이고 또다시 범죄적인 침략력사를 되풀이하겠다는 재침야망의 발현이며 동시에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일제의 침략과 략탈, 천인공노할 만행의 력사를 옳바르게 가르칠것을 요구하는 세계여론에 대한 공공연한 도전이다.

2006년부터 도입하도록 일본 문부과학성이 공식승인한 새로운 중학교용 력사교과서에는 2001년의 력사교과서외곡에 뒤이어 또다시 조선고대로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나라 력사를 혹심하게 외곡말살하였다.

일본의 력사외곡행위는 어제 오늘에 시작된것이 아니다.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기전부터 우리 나라 력사를 심히 외곡날조하였으며 특히 식민지강점 전기간 조선력사를 무참히 유린말살하였다. 일본의 력사외곡행위는 패망후 군국주의부활과 호흡을 같이하면서 계속되였으며 새 세기에 들어선 오늘에 와서 더욱 무모한 지경에 이르고있다.

이 글에서는 과거 일본이 감행한 력사외곡책동가운데서 특히 20세기말부터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로골화되는 일본반동들의 력사교과서외곡책동과 그 위험성에 대하여 서술하려고 한다.

일본의 력사외곡책동이 새로운 양상을 띠고 본격화된것은 1990년대부터였다.

랭전종식후 새로운 국제정치정세와 국내에서의 극우익보수세력의 급속한 장성을 배경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정치적반동화가 촉진되고 그에 따라 군국주의부활책동이 더욱 강화되게 되였다.

일본은 군국주의부활책동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자기를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한 그럴듯한 명분과 사회적분위기가 필요하였으며 그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 다름아닌 력사외곡이였다. 이로부터 일본의 우익정치계는 학계의 어용사가들을 동원하여 1990년대 중엽이후 본격적인 력사교과서외곡책동에 나섰다.

일본의 우익정치세력은 력사교과서외곡을 주도해나갈 정치집단을 결성하였다.

집권당인 자민당은 1993년 8월 자민당내에 105명의 《유명인》들로 구성된 《력사검토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력사검토위원회》는 설치되자마자 력사학자들을 련이어 불러다놓고 20여차의 《토론회》를 벌려놓은 끝에 패전 50년이 되는 1995년 8월 15일 침략전쟁을 전면부정하는 《대동아전쟁의 총괄》이라는 도서를 간행하였다.

이밖에도 패전 50년을 전후하여 자민당을 비롯한 보수정당에서는 《전후 50년 국회의원련맹》, 《옳바른 력사를 전하는 국회의원련맹》, 《밝은 일본국회의원련맹》 등이 결성되여 기존력사교과서가 《자학사관》에 빠져있다고 비판하면서 이에 대한 개정을 요구하는 《성명서》, 《결의안》을 련달아 발표하여 력사교과서개정의 분위기를 고취하였다. 여기에 발맞추어 우익학자들이 중심이 된 《자유주의사관연구회》(1995. 7)와 《새로운 력사교과서 만드는 모임》(1996. 12)이 결성되였다.

특히 자민당의 보수세력이 력사교과서외곡자들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들이였다. 이전 수상 모리 요시로를 비롯하여 내각각료의 6명이 《력사검토위원회》 성원이였다. 자민당은 《력사검토위원회》를 설치한 후 1995년 2월까지 19명의 강사를 《초빙》하여 20차례나 되는 회의를 열었고 국회에서의 질의와 답변을 통해서도 《새로운 력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을 지지후원하였다. 이전 문부과학상 마찌무라 노부다까는 1998년 6월 국회에서 《현행력사교과서가 균형을 잃고있다》는 취지의 답변을 하면서 《새로운 력사교과서 만드는 모임》을 지지하는 동시에 기존교과서들에 대한 압력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정부 및 보수우익세력의 맹렬한 후원밑에 《새로운 력사교과서 만드는 모임》은 1996년 12월 기자회견을 가지고 창립을 선포하고 1997년 1월에 창립총회를 가지였으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설립취지와 관련한 문건을 통해 《전후 력사교육은 일본인이 계승해야 할 문화와 전통을 잃어버리고 일본인의 긍지를 빼앗아왔다. 특히 근현대사를 일본인 자자손손이 사죄만 해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죄인처럼 취급했다》고 주장하면서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일본의 어린이들을 위해 새로운 력사교과서를 만들어 력사교육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겠다》고 밝히였다. 결국 《완전히 새로운 력사교과서》를 만들어 일본인의 《긍지》를 높이겠다고 선언하였던것이다.

이 단체가 학문적성과를 토대로 교과서를 만들었다고 하면 별로 문제시될것이 없다. 그러나 《새로운 력사교과서 만드는 모임》은 아예 처음부터 외곡된 력사교과서조작을 목표로 출발했다는것이 특징적이라고 할수 있다.

최근 시기 력사외곡에서 주목되는것은 무엇보다먼저 일본의 조선침략과 지배를 력사적으로 합리화하기 위한 책동이다.

개악된 교과서들에서 초기조일관계를 극심하게 외곡하면서 이미 파산된지 오랜 《미마나미야께》설을 공공연히 되풀이하고있는것이 그 대표적인 실례이다.

널리 알려진것처럼 《미마나미야께》설이란 일본이 4세기이후 수백년동안 조선의 남부지역에 통치기구를 설치하고 식민지지배를 하였다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주장이다.

이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력사외곡자들은 4세기 기내야마또정권을 통일정권으로 묘사하면서 이 정권이 조선에 출병하여 남부지역을 지배하였다고 하였으며 특히 광개토왕릉비에 비문을 자의대로 해석하면서 4~5세기 야마또정권의 군사력이 조선남부에서 종횡무진한것처럼 력사를 외곡날조하였다.

력사적사실은 이 모든 사건들이 반대로 조선의 남부지역이 아니라 일본의 기비지방(오까야마현일대)에 형성된 조선계통 소국들과 기내야마또정권사이에 벌어진 일이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일본서기》에 나오는 《미마나미야께》란 사실 6세기경에 기비가 야소국에 설치된 야마또정권의 림시행정기관이였으며 4세기 당시 통일적인 야마또정권은 왜나라에 존재하지도 않았다.

서부일본을 통합하지 못한 한갖 지방정권이 다른 나라에 와서 백제와 신라를 굴복시키고 그곳에 식민지를 설치하였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지난날 일제어용사가들은 일제의 조선침략과 지배를 력사적으로 합리화하려는 목적밑에 일본에서 벌어진 이 사건의 무대를 조선으로 옮겨놓았던것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미마나미야께》설을 또다시 들고나온것은 자라나는 새 세대들에게 야마또민족이 천수백년전부터 조선에 식민지를 두고 통치해온 《우월한 민족》이며 옛적에도 그러했던것처럼 근대일본의 조선지배 역시 력사적타당성을 가진다는것을 인위적으로 고취하려는데 그 진의도가 있는것이다.

최근 시기 력사외곡에서 주목되는것은 다음으로 침략과 전쟁을 미화분식하기 위한 책동이다.

일본의 중세, 근대의 력사는 해외침략과 전쟁으로 엮어진 피의 력사였다.

중세 왜구들은 조선과 중국의 넓은 지역에 침입하여 살인과 략탈, 방화를 일삼았으며 임진년(1592년)에는 근 20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조선의 거의 전 령토를 유린하였다. 근대이후에는 청일전쟁, 로일전쟁을 도발하여 조선을 강점하고 독점적지배권을 수립하였다.

력사교과서는 엄연한 이 사실을 외면하고 침략과 전쟁을 미화분식하고 저들의 범죄를 극력 외면, 은페하였다.

《임진왜란》은 중세 조선인민에게 커다란 불행과 재난을 들씌운 략탈적인 침략전쟁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과서들에서는 《임진왜란》을 아시아의 전 대륙을 지배하려는 《거대한 꿈》으로, 《의기왕성》해진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무훈으로 묘사하였고 《조선이 일본군의 통행허가를 거절》하였기때문에 일어난듯이 진실을 외곡하였으며 전쟁에서 조선인민에게 감행한 범죄적만행에 대해서도 《조선의 국토와 사람들의 생활이 현저히 황페화되였다》는 한마디 말로 굼때였다.

《임진왜란》이 조선인민에게 들씌운 재난과 불행은 결코 인민들의 생활이 령락되고 령토가 황페화된 정도가 아니였다. 일본사무라이들은 조선에 침략의 발을 들여놓은 순간부터 조선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랍치해갔으며 조상전래의 수많은 문화재들을 파괴략탈하였다. 오늘도 교또와 오까야마에는 조선사람의 코를 베여다 만든 《코무덤》, 《귀무덤》이 있어 일본사무라이들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만천하에 고발하고있다.

침략과 전쟁을 합리화하고 저들의 범죄를 가리우려는 교활한 술책은 청일전쟁과 로일전쟁에 대한 서술에서도 나타나고있다.

청일전쟁과 로일전쟁은 조선에 세력을 뻗치고있던 청나라와 짜리로씨야세력을 몰아내고 조선에 대한 독점적지배권을 수립하기 위하여 일제가 도발한 침략전쟁였으나 교과서는 이것을 전도하여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들며 일본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일으킨 전쟁, 《양육강식의 가혹한 세계》속에서 《일본의 생존을 걸고》 진행하지 않으면 안된 《장대한 국민전쟁》이라고 묘사함으로써 그 침략성을 은페하고 정당화하였으며 로일전쟁에서의 승리를 《세계를 변화시킨 일본의 승리》로 묘사하고 《세계의 억압 민족들에게 독립에 대한 끝없는 희망》과 《용기》를 안겨준데 그 의의가 있는것처럼 사실을 전도하여 서술하였다.

침략과 전쟁에 대한 미화분식은 곧 과거 범죄적인 죄악사를 되풀이하겠다는 재침의지의 선언으로밖에 달리 해석할수 없는것이다.

일본의 력사외곡에서 가장 엄중한것은 근대일본의 조선강점정책과 식민지통치죄악을 외곡, 은페한것이다.

교과서에서는 일제의 비법적인 조선강점에 대하여 《한일합병은 일부 조선인들이 수용》했다는 식으로 날조하였으며 《창씨개명》은 조선사람의 희망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강제《징용》, 《징병》을 《조선에로의 확대적용》으로 외곡하였다. 뿐만아니라 일제의 식민지통치를 《조선의 근대화를 도운 일본》이라고 미화하였으며 일본군《위안부》와 관련되는 내용들을 모조리 뽑아버렸다.

일제가 1910년 8월 비법적인 《한일합병조약》을 날조하고 조선을 군사적으로 강점하였다는것은 론의할 여지조차 없는 력사적사실이다. 하기에 변호사 도쯔까 에쯔로는 일제의 조선식민지지배에 관한 국제토론회에서 《한일합병조약》이 국제법상 위법이라는데 대하여 1905년에 날조한 《조약은 ...당시 관습국제법에 비추어볼 때 체결할 때부터 효력을 발생하지 않았으며 효력을 나타내지 못하는 <조약>을 전제로 조작한 1910년의 <일한합병조약>외의 주조<조약>들도 모두 위법》이라고 지적하였다.

력사에는 아직 일제와 같이 아무런 법적효력도 발생할수 없는 가짜조약을 만들어가지고 40여년동안이나 남의 나라, 민족에게 식민지노예의 멍에를 들씌워 불행과 고통을 강요한 실례는 아직 알지 못한다.

《조선인의 희망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하는 《창씨개명》도 사실은 일제가 조선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감행한 반인륜적범죄이다.

《창씨개명》은 일본식의 씨명으로 조선식의 성과 이름을 바꾸는것이다.

식민지민족에게 성과 이름까지 바꾸도록 강요한 나라는 이 세상에 오직 일본밖에 없다.

조선민족을 예로부터 자기의 고유한 성과 이름을 지녀왔다. 이러한 민족고유의 이름을 일본식으로 고치게 한것은 본질에 있어서 민족말살을 노린 반인륜적범죄였다.

일제는 1937년 4월 《사법법규정조사위원회》를 조작하고 《창씨개명》과 관련한 모의를 벌렸으며 1939년 11월 10일 《개정조선민사령》을 통해 《창씨개명》을 강요하였으며 이에 응하지 않는 사람을 탄압할수 있는 법적담보와 통치체계를 세워놓았다.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로부터 도청, 군청, 면사무소, 경찰서, 주재소, 학교에 이르는 광범한 통치기구들과 각종 친일단체들은 《창씨개명》의 시행을 위해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이자들은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고 위협하였으며 그렇지 않으면 《비국민》, 《불온한 사람》으로 몰아 박해하면서 《징용》과 《보국대》의 첫째가는 선발대상으로 삼았다.

공부하는 자식을 퇴학시키겠다는 위협을 받고 《창씨개명》을 한 아버지가 조상에게 진 《죄》를 벗을 길이 없어 돌을 안고 우물에 빠져죽은것도 일제가 빚어낸 《창씨개명》의 재난이 가져다준 한토막의 이야기이다.

이러한 《창씨개명》은 조선인민에게 강요된 가장 잔인하고 참혹한 정신적고문이였으며 극악한 인권유린범죄였다.

또한 교과서에서는 반일의병투쟁과 3. 1인민봉기참가자들을 비롯한 반일독립운동에 참가한 조선의 애국자들을 중세기적인 방법으로 탄압학살한 문제 등 일제가 40여년간 조선을 강점하고 야만적인 식민지통치를 실시함으로써 조선인민이 당한 불행과 고통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특히 정부와 군부에 의하여 조직적으로 감행된 일본군《위안부》문제를 고의적으로 빼버린것이다.

20만명의 조선녀성들을 《사냥》하며 성노예로 만든 일제침략군의 범죄는 이미 력사적사실로 명백히 밝혀졌으며 일본정부도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엄중한 반인륜적범죄를 고의적으로 숨기며 력사의 흑막속에 덮어버리려고 한것은 인륜도덕과 정의에 대한 로골적인 도전이며 추호도 용서못할 범죄이다.

일본의 력사교과서외곡책동의 위험성은 한마디로 말하여 그것이 군국주의부활책동의 한고리이며 조선에 대한 재침책동의 전주곡이라는데 있다.

력사적으로 일본의 조선력사외곡은 언제나 조선침략의 전주곡이였으며 그것은 조선에 대한 잔악한 침략으로 이어졌다. 우리 나라의 력대문헌들에 기록된 왜구들의 헤아릴수 없는 강도적인 중소규모의 침입을 내놓고라도 조선에 대한 가장 큰 침략이였던 1592년 일본사무라이들의 대규모침입과 19세기말~20세기초에 걸친 강도적인 조선침략은 다같이 그전에 례외없이 조선력사에 대한 광란적인 외곡소동을 동반하군 하였다.

우선 임진조국전쟁시기 침략괴수 도요또미는 《고사기》, 《일본서기》이래로 외곡된 조선력사를 주입시켜 그것을 통해 조선에 대한 침략을 실현하려고 획책하였다.

일본이 《신의 나라》이고 조선은 《신공황후이래 일본에 복속된 나라》이며 일본은 조선을 치고 명나라를 정복함으로써 《세계우에 군림하는 천황제국가》라는 침략사상으로 골수에 꽉 들어찬 악당들이라야 가장 철저하게 침략전쟁을 《수행》할수 있는것이였다.

도요또미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직전에 《신공황후정벌》을 고취하였던 사실은 조선침략을 눈앞에 둔 1592년 3월에 도요또미의 우필(서기관)이였던 야마나까 다찌바노우찌로 하여금 찌구젠 시가노시마 깃쇼지에서 전해져내려오는 《신공황후 이국퇴치연기》를 수하병종들에게 널리 주입시키도록 하였던데서 찾아볼수 있다. 거기에는 《신공황후가 신라를 쳐서 <복속>시키고 신라로 하여금 매해 공물을 바치게 하였으며 고구려의 수도의 바위에 <고려의 왕은 일본의 개>라고 써넣었다》는 내용이 들어있었다.

이러한 내용의 글을 침략전쟁직전에 포고하였던 리유는 바로 조선이 《신공황후》이래 일본에 《복속》된 나라로서 도요또미 히데요시의 조선침략이 《신공황후》의 《력사적위업》을 《완수》하는것이라고 그 침략적본질을 《합리화》하기 위한데 있는것이였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기사로 골수에 찬 왜구들은 침략의 발길이 닿는곳마다에서 말과 글로는 다 표현할수 없는 귀축같은 살인만행과 략탈행위를 일삼았으며 조선을 무참히 황페화시켰다.

또한 《명치유신》후 일제가 조선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동시에 조선력사를 란폭하게 외곡하였다.

일제는 당시 조선에 대한 침략론의를 본격화하면서 《정한론》을 강하게 들고나왔다.

《정한론》은 일본에서 이미 《명치유신》이전부터 대두하기 시작하여 유신후 조선강점가지 국시로 되였던 가장 호전적인 침략사상이였다.

일본반동들이 《정한》의 《력사적근거》를 《해명》하는데서 들고나온것의 하나가 《스사노 오노미꼬또》의 《조선정벌》이라는것이였다. 당시 반동정부의 외무경이였던 사와노 부유시는 《조선에는 상고에 스사노 오노미꼬또가 친히 정벌한 령험한 자취가 있다》고 떠벌이며 《정한》을 제창하였다.

일본반동들이 념불처럼 외운 《스사노 오노미꼬또》의 《조선정벌》이란 있어본적이 없는 날조이다. 이른바 《스사노 오노미꼬또》에 관한 기사는 《고사기》상권에 실려있다. 여기에는 《조선정벌》에 대한 말이 없다.

그러나 반동지배층은 조선을 정복하여야 한다는 《정한론》을 떠들자니 이와 같은 허황한 《력사적근거》를 만들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정한》의 다른 하나의 《력사적근거》는 《야마또왕정》의 《미마나미야께》설치에 관한 억지주장이였다.

사다 하꾸보는 《조선은 응신천황의 삼한정벌이래 우리의 부속국이다. 마땅히 우리 나라(일본)는 상고의 력사에 비추어 유신중흥의 세력으로 조선의 무례함을 징벌하여 우리 판도에 되돌려야 한다》고 지껄였으며 1873년 마에바라 잇세이는 《정한》의 명분에 대하여 《신공황후가 삼한을 치고 도요또미가 정한역(1592년-1598년)을 일으킨것은 모두 그 부정함을 질책함에 있었다. ...6년 정한론(1873년의 <정한론>자들의 반란)도 또한 상고의 신성한 의도를 이어 국가의 대계를 정하려는데 있었다.》고 지껄이였다(《현양사》 1917년 107~108페지).

이자들이 줴친 《상고의 신성한 력사》라고 하는 《미마나미야께》설치에 관한 이야기는 철저한 날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자들은 조선침략의 《합법성》을 운운할 때마다 《미마나미야께》의 남부조선설치라는 《력사적사건》을 반드시 입에 올리군 하였다. 따라서 조선에는 그 이전의 고대의 력사도 없었고 오직 《야마또왕정》의 남부조선설치때부터 《예속의 력사》로서의 조선의 력사만이 있다는것이다.

《명치유신후》 반동정부의 조선침략이 력사외곡과 가장 밀접히 련관되였던 사실은 일본에서의 력사연구에 대한 근대적연구방법이 출현한 이후 조선사에 대한 《연구》를 처음으로 맡아 진행한것이 다름아닌 조선에 대한 군사적인 침략계획을 작성하였던 륙군참보본부였고 또 조선력사외곡의 기본방침이 여기서 세워졌다는것이다.

당시 참모본부의 주요임무의 하나가 《군사사 수집》으로 규정되여있어 력사연구가 맹렬히 진행되였다. 1873년에는 6국으로 개칭되여 그 임무도 그해 11월에 규정한 《막료참모본부강령》에 따라 《밀정을 파견하여 장래 전장으로 될 지역의 력사를 연구》하게 되여있었다. 즉 군사적모략이나 침공작전의 게획을 담당하는 참모본부(참모국의 후신)는 이미 1872년 3월부터 현역군인들을 조선에 잠입시키는 한편 조선의 력사나 지리 특히 고대조일관계의 《연구》에 필요한 자료수집에 주목하였다. 1874년에는 또다시 참모국으로 개칭되면서 병사과를 비롯한 7개 과를 설치하고 다른 과와 동등한 자격을 가지고 《력사연구》를 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1880년에는 군인교육의 목적으로 편찬한 《황조병사》가 출판되였는데 여기에는 《신공황후 삼한정벌, 응신, 인덕천황 신라정벌》이라는 소제목을 두고 《일본서기》의 기록을 근거로 이미 《응신》때부터 조선을 《종속》시키였고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 《국위》를 해외에 떨친 최초의 일이였다고 초기조일관계사를 심히 날조하였다. 또한 1882년 7월 경성(서울)의 일본공사관이 조선의 군인폭동자들에 의하여 습격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일본에서는 즉시에 조선을 반대하는 소책자 10여종이 참모본부의 지시에 따라 간행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참모본부 편찬과가 《임나고고》를 작성하여 《미마나미야께》라는 력사외곡의 서막을 올리였다.

《참모본부》에서의 《력사연구》의 목적을 다른데 있는것이 아니며 그것은 저들의 조선침략을 《정당화》하고 또 그것을 가장 철저하게 실현하기 위한데 있었다. 때문에 참모본부에서 작성한 외곡된 력사관으로 《무장된》 사무라이후예들은 《천황의 자손》으로서 자기의 《임무》를 조선침략과정에 가장 완벽하게 《수행》하였던것이였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의 조선력사외곡은 언제나 조선에 대한 침략과 밀접히 결부되여있었다.

오늘날 일본에서 감행되고있는 력사외곡책동의 목적도 다른데 있는것이 아니다.

개정된 력사교과서에서 가장 교활하고 악랄하게 진행된 20세기초의 조선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화를 《합법적》인것으로 묘사하고있으며 동남아시아나라들에 대한 침략을 《해방전쟁》으로 묘사하고있는 밑바탕에는 그러한 제2의 《합법적》인 《해방전쟁》을 또다시 감행하겠다는 흑심이 깔려있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일본은 지금껏 기회가 있을 때마다 조선침략에 대한 망발을 늘여놓으면서 그 실현을 위해 책동하여왔다.

1946년 4월 국회의원선거때 후보자로 나섰던 가메다는 선거전연설에서 《조선과 만주는 마땅히 일본의 위임통치를 해야 한다.》고 하였다(《경성신문》 1947. 6.29). 《조선총독부》 경무총감이였던 다나까는 《평화적대륙진출》을 도모한다는 구실밑에 《동화회》라는 침략적인 단체를 조작하고 여기에 《조선총독부》관리였던자들을 비롯하여 침략열에 들뜬자들을 망라시키고 《조선과 중국 등지에 자유로운 이주를 시켜달라》고 하였다.

또한 해방직후 일본언론에서도 《일본은 절대로 현재 령토안에서 전주민의 생존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현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일본타임스》 1947. 7. 2)고 하면서 해외침략의 필요성을 들고나오기 시작하였다. 더우기 일본정부의 수상이였던 가다야마는 《련합국이 일본국내의 과잉인구를 고려할것을 정부는 기대하고있다》고 하면서 미국에 해외에로의 침략을 내놓고 간청하였다(《경성신문》 1947. 6. 29).

이러한 침략적망언들은 일부 개별적인 군국주의광신자들의 잡소리가 아니며 이것은 반동정부의 력대 수상들이 하나와 같이 떠벌인 망언을 통해서도 잘 알수 있다.

1960년에 수상 기시 노부스께는 중의원 본회의에서 《일본의 자위권이 남조선과 대만까지 확장되여야 한다》고 하면서 미일공동작전구역이 《38°선이북까지 포괄될수 있다》고 망언하였다. 1961년에 수상 이께다는 《일본은 조선, 대만, 만주에 많은 자금을 밀어넣었는데 적극적으로 선배들의 본을 받을 때가 왔다》고 하였으며 1969년 11월에 수상 사또 에이사꾸는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강건너 불보듯 할수 없다》고 하면서 《일본이 선제공격하는것은 자위권에 속한다》고 하며 조선전쟁에 적극 가담할 침략의지를 로골적으로 드러내놓았다. 1971년 6월 방위청장관 나까소네는 도꾜를 중심으로 반경 1 000mile이 일본의 《방위권》안에 들어간다고 하면서 조선을 《자위대》의 첫번째 작전지역으로 공식선포하였다. 이러한 침략적망언들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와 더욱 로골화되였는데 1987년 히로시마시회 자유민주당출신의원 니시무라는 조선에 대한 일제의 강점을 정당화하면서 《장차 또 다른 한일합병이 이루어질수만 있다면 이거야말로 만만세》이라고 떠벌이였다.

이와 같은 망발들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였으나 우리 나라와 아시아대륙에 대한 재침야망을 한순간도 버리지 않았다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일본의 력사외곡책동은 조선에 대한 재침책동이 실천단계에 들어섰다는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있다.

일본군국주의의 력사외곡책동과 발을 맞춰 《자위대》의 조선침략준비가 그 어느때보다 광란적으로 벌어지고있다.

일본방위청은 륙상《자위대》를 기후와 지형조건이 우리 나라와 비슷한 혹가이도에서 산악전, 내한전, 야간전을 훈련시키면서 조선에서의 《실전정황》에 익숙시키고있으며 각급 군사학교들에서 조선어를 배워주고있다. 이것은 일본에서 본격화되는 군사비지출과 그 공격적성격이 높아가는 사실과 대비해볼 때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수가 없다.

일본은 1980년대에 비해 근 2배나 되는 방대한 군사비를 기록함으로써 군사비지출에서 세계적으로 미국 다음가는 제2위의 자리를 차지하게되였으며 옹근 한차례의 세계전쟁을 치를수 있는 군사력을 소유하였다.

2001년 7월 6일에 발표한 《신증기방위력정비계획》에 의하면 2001년부터 2005년도의 군사비는 25조 1 600억¥으로서 1995-2000년보다 9 300억¥이 더 늘어났다. 여기서 군사무기구입 및 제작에 드는 비용은 4조¥이나 된다.

특히 장비조달계획의 구체적인 분담안을 보면 일본《자위대》무력의 공격적성격 즉 침략성이 보다 강화되여가고있다.

일본은 중공급유기와 항공모함 등의 대수를 늘이고 유사시에 침략무력으로 전환시키려고 책동하고있다. 뿐만아니라 《유사시법제정》놀음을 벌려 《자위대》의 해외침략에로의 길을 하나하나 닦아놓고있다.

제반 력사적사실은 일본의 력사외곡책동이 본질에 있어서 침략과 전쟁을 미화분식하고 일제의 과거 범죄적인 침략력사를 정당화함으로써 군국주의사상을 고취하자는데 주되는 목적이 있다는것을 보여준다. 바로 여기에 일본의 력사외곡책동의 위험성이 있고 그것이 군국주의부활과 조선에 대한 재침책동의 한고리로 되는 중요한 근거가 있는것이다.

우리는 력사외곡책동의 침략적본질과 위험성을 똑똑히 인식하고 일본의 군국주의부활과 재침기도에 경각성을 가지고 대하며 우리 인민의 백년숙적인 일본군국주의와는 반드시 싸워야 한다는 철저한 반제의식을 더욱 높여나가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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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일본의 죄악사를 알고 싶다면



◇일본의 죄악사/ 조찬선·최영 공저/ 풀잎향기/ 1만6500원.

일본과의 경제전쟁이 한창이다. 뜨거운 여름에 시작된 안 가고, 안 쓴다는 'NO 재팬'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일본 식민시대를 재평가해야 한다는 움직임도 있다. '많은 한국인 노무자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에 갔고, 징병 역시 합법적이었다'는 내용을 담은<반일종족주의>가 큰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여기에<반일종족주의>와 상반된 시각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한 비도덕성을 증언한 책이 있다.<일본의 죄악사>의 저자(조찬선 목사·최영 교수)들은 윤리와 도덕, 양심과 정의, 신학·사회학적 시선으로 일본의 만행을 진단했다.

올해 102세로 일제시대를 몸소 경험했던 조찬선 목사는<기독교 죄악사>의 저자로 이화여대 교목실장과 해군사관학교 군목실장, 감신대 교수를 역임했다. 공저자 최영 시카고 미드노스 신학대학원 교수는 이화여대, 배제대 등에서 외래교수를 역임했다.

두 저자는 "일본이 조선인을 짐승보다 못하게 취급하면서 야만적이고 반인륜적인 범죄를 감행했다"며 "죽기 전에 일본인들이 저지른 범죄를 증언하기 위해 집필했다"고 밝혔다.

이 책은 명성황후 시해, 강제징용, 제암리 교회 사건 등 과거사를 비롯해 역사 왜곡과 위안부 문제 등 현안을 총 22장에 담았다.

많은 명사들이 이 책의 가치를 인정하고 추천사를 남겼다.

"독일과 달리 일본은 단 한 번도 그들의 만행을 뉘우치고 사죄한 적이 없다.<일본의 죄악사>는 일본 제국주주 잔혹사를 이해하고 군국주의 잔혹사를 반복하려는 일본의 야욕을 막는데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한완상 전 부총리, 서울대 교수)

"우리에게는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의 잔혹한 역사, 그 중에서도 특히 전쟁으로 인하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된 여성의 인권에 대하여 이보다 더 설득력 있게 방대한 자료 중심으로 쓰여진 책은 아직 없다."(김현숙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이 책은 일본이 저지른 숨겨진 범죄 역사의 과정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그동안 알고 있었던 일본의 한민족에 대한 범죄가 역사의 어느 시점에만 일어났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 중인 '현재의 사건'임을 깨닫게 한다."(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우경희 기자 cheeru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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