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식 (지은이)휴머니스트201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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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32년 1월 8일, 대일본 제국의 중심부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누군가 천황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것. 이 사건의 주인공은 거사를 앞두고 찍은 사진에서 수류탄을 양손에 쥐고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그는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 저렇게 초연할 수 있었을까?
이봉창의 이 기묘한 사진은 독립운동사에서 유명한 대표적 이미지이다. 그렇지만 이 사진이 합성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언뜻 얼굴과 몸의 부조화만 봐도 의심이 들지만, 만들어진 사진이 '하나의 기억'으로 자리 잡고 의미를 쌓아가는 동안 당연해진 '사실'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기억과 사실의 차이, 이봉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이봉창 의거를 기획한 김구는 사건 직후 '동경작안의 진상'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의거의 전모와 이봉창이 어떤 사람인지를 밝힌 이 글은 이봉창의 사진과 맞물려 이봉창에 관한 공식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따르고 있는 김구의 이 글은 이봉창에 대한 부분적 진실만을 보여 줄 뿐이다.
대일본 제국의 모던 보이로 쾌락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이봉창이 어떤 이유로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로 변신했는지 이봉창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와 조응하며 변해간 역동적인 면모를 박제된 독립운동사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책은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의 공식 기억에 대한 도전이자 해체 작업으로 기획되었다. 국가의 공식 기억으로 박제된 독립운동사의 틀을 벗어나 인간의 역사로서 살아 있는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목차
- 프롤로그 | 두 장의 사진, 역사의 진실에 의문을 던지다
- 1932년 1월 8일, 운명의 그날
- 취중진담, “왜 천황을 죽이지 못하오?”
- 용산 도락가 이진구의 둘째 아들
- 식민지 청년에게 미래는 없다
- 일본행을 결심하다
- ‘신일본인’ 기노시타 쇼조
- 유치장에 갇혀 민족을 발견하다
- 나는 누구인가?
- 도쿄에도 희망은 없었다
- 상하이에서 천황 폭살을 결심하다
- 거사 준비
-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
- 영원한 작별
- 다시 일본으로
- 현장 답사
- 의혹과 진실
- 이봉창의 힘
- 왜 천황을 죽여야 하는가?
- 에필로그 | 박제된 독립운동사를 벗어나 이봉창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저자 및 역자소개
배경식 (지은이)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지금은 역사문제연구소 부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 일지》를 엮었으며, 지은 책으로는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어떻게 살았을까 1, 2, 3》(공저), 《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8》,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등이 있습니다.
최근작 :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1~8권 세트 - 전8권>,<마주 보는 한국사 교실 8> … 총 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 이 책은 2008년 10월 18일에 초판 발행된 《기노시타 쇼조, 천황에게 폭탄을 던지다》의 개정판입니다.
1932년 1월 8일, 대일본 제국의 중심부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벌어졌다. 누군가 천황의 행렬에 폭탄을 던진 것. 이 사건의 주인공은 거사를 앞두고 찍은 사진에서 수류탄을 양손에 쥐고 웃음까지 지어 보였다. 그는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 저렇게 초연할 수 있었을까?
이봉창의 이 기묘한 사진은 독립운동사에서 유명한 대표적 이미지이다. 그렇지만 이 사진이 합성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언뜻 얼굴과 몸의 부조화만 봐도 의심이 들지만, 만들어진 사진이 ‘하나의 기억’으로 자리 잡고 의미를 쌓아가는 동안 당연해진 ‘사실’에 의문을 던지는 사람은 없었다. 기억과 사실의 차이, 이봉창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인간과 영웅 사이, 박제된 독립운동사를 벗어나다
이봉창 의거를 기획한 김구는 사건 직후 〈동경작안의 진상〉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의거의 전모와 이봉창이 어떤 사람인지를 밝힌 이 글은 이봉창의 사진과 맞물려 이봉창에 관한 공식 기억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독립운동의 전형적인 영웅 서사를 따르고 있는 김구의 이 글은 이봉창에 대한 부분적 진실만을 보여 줄 뿐이다. 대일본 제국의 모던 보이로 쾌락적인 삶을 살고자 했던 이봉창이 어떤 이유로 천황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로 변신했는지 이봉창이라는 역사적 인물이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와 조응하며 변해간 역동적인 면모를 박제된 독립운동사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 책은 독립운동가 이봉창 의사의 공식 기억에 대한 도전이자 해체 작업으로 기획되었다. 국가의 공식 기억으로 박제된 독립운동사의 틀을 벗어나 인간의 역사로서 살아 있는 독립운동사를 복원하는 것이 이 책의 목표이다.
용산-오사카-도쿄-상하이, 동북아시아를 횡단한 식민지 청년 이주 노동자
이봉창은 보통의 독립운동가와 다른 삶을 살았다. 문창 보통 학교(지금의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상급 학교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과자 가게 점원, 약국 점원, 용산역 연결수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도항까지 결심하게 되는 그의 삶은 밥벌이와의 지난한 싸움이었다. 일본에서 보낸 5년간 오카다 상회 총무, 표구점 심부름, 부두 노역, 스미토모 신동소 인부, 비누 가게 점원, 요리점 점원, 해산물 도매상 점원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 나도 일본인으로 태어났으면 차별이나 학대를 받지 않고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그도 내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오히려 부탁하는 쪽이 나쁜 것이다. 유치한 것이다. 내가 조선인임을 생각하지 않고 보통 사람처럼 얼굴을 내미는 것이 잘못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가. 같은 인간인데도 똑같이 대접해 주지 않는다. 나도 일본인임에 틀림없을 터이다. 신일본인이다.
(…) 그때 내 삶이 가치 없다고 깨달았으며 이 세상이 얄궂다는 것을 았았다. 그러나 상대는 일본인이다. 나는 내가 조선인임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설혹 억울하게 내던져지고 차인다 하더라도 말없이 견뎌내지 않으면 안 된다. 체념할 수밖에 없다. 나도 일본으로 태어났으면 차별이나 학대를 받지 않고 살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조선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 이봉창의 옥중수기 <상신서> 중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당장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것이 고민인 청년에게 ‘민족’은 비집고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일제 강점기라는 모순에 가득 찬 시대를 온몸으로 경험하면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용산역에서 일할 때에는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진급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일본에서는 천황의 행차를 보러 갔다가 불심검문에 걸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열흘간 유치장에 갇혀 있어야 했다. 부두 노역을 하면서도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을 썼을 때와 이봉창이라는 한글 이름을 썼을 때 불과 하루 만에 임금이 달라지는 일도 있었다.
영화와 음악을 즐겼고 술 때문에 빚에 쪼들리면서도 카페와 유곽을 드나들며 근대 소비문화를 향유하던 모던 보이의 ‘신일본인’으로 살겠다는 꿈은 시대에 의해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분노와 체념을 홀로 머금고 있던 이봉창은 김구를 만나고 나서 비로소 육신의 쾌락이 아닌 조국의 독립이라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살 결심을 하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픽션으로 새로운 역사 읽기
술은 한량이 없고, 여색은 제한이 없었다. 더구나 일본 노래는 능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훙커우에 거주한 지 1년이 채 안 되어서 그의 친구가 된 왜인 남녀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심지어 왜 경찰까지 손아귀에 휘어 놓고 마음대로 현혹했고, ○○영사의 안마당에는 무상출입했다. 그가 상하이를 떠날 때에 그의 옷깃을 쥐고 눈물지은 아녀자도 적지 아니했지만 부두까지 나와 가는 길이 평안하기를 축하하는 친우 중에는 왜 경찰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 거짓 왜인 기노시타 쇼조가 왜황을 죽이려고 두 개의 작탄을 품고 가는 것은 그와 내가 알았을 뿐이다.
- 김구, 〈동경작안의 진상〉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는 극소수에 불과한 직업이었다. 이들은 가문으로 연결되거나 대를 이어 독립운동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독립운동을 위해 전문적 교육을 받은 직업적 혁명가들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일본인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이봉창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봉창의 의거는 김구가 비밀리에 추진한 거사였기에 의거 이후 이봉창이라는 이름을 처음 듣는 독립운동가들도 많았다. 위인전의 공식을 따르는 전형적 삶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이봉창의 삶은 오늘날 우리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이번 개정판의 목표는 식민지 청년 노동자의 삶과 일제 식민 통치 정책의 실패를 보여 주고, 이봉창의 삶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던지는 현재성의 문제를 발굴하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이봉창의 옥중수기인 〈상신서〉, 김구가 쓴 〈동경작안의 진상〉 등 1차 자료를 토대로 일제 강점기와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복원하려 했다. 다큐멘터리 픽션 형식으로 새롭게 집필된 원고는 한 장의 사진에 갇혀 있던 이봉창의 다양한 삶의 면모를 보다 친숙하게 느낄 수 있게 할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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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거의 이틀? 삼일만에 읽어 내려갔다. 요즘은 몰랐던 근대사 공부하는 재미가 있네. 학생때는 그저 시험보려고 외웠을 문제하나였기에 이렇게 다시 공부를 하게되는 악순환. ㅋㅋ
딱히 뭐라고 평하긴 애매하다. 청년 이봉창이자 주로썼던 가명 기노시타 쇼조는 어떻게 천황폭살 의거를 하게됐는가.. 에대해 적어놓고 있다. 일본인이 일본인이라 생각할정도의 조선인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계속되는 좌절끝에 진중하게 고려되지 않은, 까짓것 해보자 심보로 행해졌다는 사실이 다소 어이없기도 하고 실소를 자아내기도 하고... 마치 프롤로그의 조작된 사진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식민지조선에서의 조선인들의 삶이 지금과 오버랩되는 부분이 있다는게 좀.. 그랬다....(한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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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토낑 2017-05-06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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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청년 이봉창의 고백
이봉창 의사. 비록 거사에 안타깝게도 실패하긴 했으나 무려 일왕에게 그 시대에 폭탄을 던지려했던 엄청난 사내. 그런 그의 일대기를 다룬 역사서를 드디어 읽은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리라 생각해본다.
애국애족 가문에 태어나 교육을 받고 자연스레 독립 운동과 민족 의식에 젖어든 사람이 아닌...오히려 체재에 순응하고 열심히 살아보려던 평범한 사람. 그러나,그렇기에 더욱 그의 고뇌와 인간적인 모습이 절절히 다가오는 사람. 마침내 스스로 깨달아 (김구 선생의 가르침을 다소 받았다지만) 일본에서 그 나라 왕을 향해 대범하게 폭탄을 날리게 되기까지...
새삼스럽게 생각해본다. 이런 분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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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버드 2017-04-04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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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창의 고백
일왕을 폭사하려던 계획을 실패한 의사로 평가 절하했던 이봉창의사.
그런데 이봉창 의거가 있었기에 윤봉길 의거가 성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가 오기전에 길을 준비한 세례 요한처럼!
이 책은 이봉창이 직접 자서전을 쓴 듯한 느낌으로 세밀한 감정과 시대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장기]
1901년 서울 용산에서 이진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적은 경성부 금정(효창동) 118번지이고, 출생지는 경성부 원정2정목(원효로2가) 이다.
용산은 1894년 청일 전쟁 이전까지 사람이 살지 않는 벌판이었다. 청일 전쟁을 계기로 일본 군대가 주둔하며 병참부를 세우며 군사 도시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진구는 건축 청부업과 우차 운반업으로 상당한 재산을 모은 신흥 자본가로 운반업과 목재상을 운영하였다.
이봉창이 7, 8세 때 집에 소가 대여섯 마리나 될 만큼 부자여서 주변사람들이 "저 애가 이진구의 아이야!" 라는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대한 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된 이듬해인 1911년에 청엽정(용산구 청파동)에 있던 사립 문창학교에 입학했다. 이것이 이봉창의 유일한 정규 교육 학력이다.
일본의 식민지 교육은 일제에 순응하는 '충량한 국민을양성'할 것을 목표로 한 조선 교육령에 따라 일본어를 국어로, 일본 역사를 국사로 가르쳤다.
이봉창은 이러한 식민지 교육의 영향으로 조선인으로 태어났지만 조선 왕의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에 동화된 '신일본인'으로 성장했다.
이봉창이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이진구는 성공한 사업가 답게 본부인 손씨 말고도 첩을 둘이나 두고 있었다.
이런 방탕한 삶때문에 '당창'이라 불리는 매독에 걸려 3년 동안 바깥출입을 하지 않고 치료를 했지만 몸이 쇠약해지고 약값으로 재산을 탕진했다.
거기에 대홍수로 목재가 떠내려 가고, 집 등기를 갱신해 주겠다는 일본인 이마이에게 속아 살고 있는 집과 두명의 첩 집까지 몽땅 날려 버렸다.
이봉창이 문창학교에 입학하던 그해 이진구는 원정의 집을 팔고 산동네인 금정으로 이사했다. 그래도 얼마간의 재산이 있었지만 세집이 생활하기에는 버거웠다.
결국 이진구는 집을 하나 마련하여 소실과 그녀의 자식들만 데리고 딴 살림을 차리게 되어, 할머니를 비롯한 형 범태 부부와 조카 은임까지 여섯 명의 가족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된다. 어려운 가정형편에 상급 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1915년 봄에 원정2정목에 있는 '와다세이도'라는 일본인 과자 가게의 점원으로 취직했다.
과자점에서는 월7, 8원에 식사 제공을 조건이었지만 말라리아를 앓아 관절염이라는 후유증을 얻어 환절기에 통증으로 고생하게 된다.
과자점에서 1년쯤 지나 월 13, 14원을 받는 한강통(한강로) 16번지 '무라타 시게가쓰' 라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약국의 점원으로 이직하게 된다.
이봉창에게 능숙한 일본어 실력은 일본인이 주인인 식민지를 살아가는 가장 확실한 생존무기였다.
1919년 8월 용산역 조차계의 시용부(임시직)로 취직하여 1년 동안 빠르게 승진한다.
1920년 1월 역부가 되어 일당94전을 받았고, 2월에 전철수가 되어 한 달에 40~48원을 받았고, 10월에는 연결수로 승진하였다.
하지만 일본인 책임자의 조선인 차별에 따라 임금과 승진의 기회를 박탈과 멸시를 당하게 된다. 거기에 이봉창에게 배운 후임이 책임자가 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5년 동안 갖은 멸시와 차별을 받았지만 가난한 가정형편과 병든 어머니 때문에 쉽게 그만 둘 수 없었다.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으며 자포자기의 삶으로 술과 여자 도박에 손을 댔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며 외상이 4~5백원까지 늘어 퇴직금 80원으로 감당되지 않았다.
1924년 4월 14일 스물 네 살의 이봉창은 4년 8개월 간 근무했던 용산역을 사직했다.
[청년기]
용산역을 퇴직하고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이봉창은 지역 주민들의 삶에 깊이 관여하였다.
금정에 있는 관왕묘(관우 사당) 보존 운동에 참여하였고, 금정청년회 자치부 간사로 활동하였으며, 1925년 5월 25일 총독부령 제66호로 <간이 국세 조사에 관한 건>을 제정하여 10월 1일 국세 조사를 실시할 때 국세 조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 근대적인 인구 총조사였다.
용산역에서부터 알고 지내던 후지하타라는 일본인이 아이를 돌봐줄 여자아이를 구해달라는 부탁에 열일곱 살 조칸 은임을 소개하며 자신까지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이봉창은 희망 없는 현실과 샌존을 위해 조카 은임과 함께 1925년 11월 하순 부산항에서 관부 연락선을 타게 된다.
일자리를 찾아 오사카에 도착한 이봉창은 '조선인촌'이라고 불리는 조선인 합숙소에 들어갔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직업소개소를 찾았으나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고베 철도 우편국 열차계의 모집 포스터를 보고 직업소개소 직원에게 응모 방법을 물어 호적등본과 신원증명서를 받아 우편국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조선인이라 채용할 수 없다"는 대답을 듣고 좌절한다.
12월 초 오카다상회에서 발명품 외판원 모집에 응시하였지만 역시 거절당하지만, 경성에서 근무했던 총무의 도움으로 특별 채용되는 행운도 맞보게 된다.
첫 직장의 기쁨으로 한 달동안 열심히 일했지만 회사 경리가 자금을 도둑질해 도망가 회사가 파산하는 바람에 첫 월급의 꿈도 사라진채 실업자 신세가 된다.
1926년 2월 능숙한 일본어 실력으로 오사카 가스 회사 상용 인부로 취직하며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처음으로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을 썼다.
문창학교를 졸업한지 11년 만에 간사이 공업학교 야학부에 입학하여 학업과 일을 병행하지만 영양실조로 인한 각기병으로 넉달 만에 모두 중단해야 했다.
외국인이었던 이봉창은 생활 구호 담당자의 도움으로 히가시나리 구의 지케이 병원에 입원하여 석 달 정도 요양 했으나 별 차도가 없자, 12월에 효고 현 기노사키에서 표구점을 하는 고니시 쇼지로를 찾아가 도움을 받게 된다. 그곳에서 요양하며 다섯 달 동안 표구점 심부름을 하며 건강을 회복하고 1927년 5월 오사카로 돌아와 가스 회사에 복직했지만 친구 동생 병 간호 때문에 회사를 그만 두게 된다.
같은 하숙집의 조선인들을 따라 부두 에서 석탄 짐꾼을 하여 첫날 3엔 20센을 받았다. 시작한 지 사흘 만에 몸살이 나서 사오 일 쉬다 다시 부두 일을 시작했는데 그세 일당이 2엔 70센에서 2엔 50센으로 자꾸 줄어들었다. 임금 삭감의 이유는 '기노시타 쇼조'라는 일본 이름 때문에 일본인으로 알았다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임금을 깍았다고 한다.
1928년 2월 친구 김수천의 도움으로 '스미토모 신동소의 아마가사키 출장소'에 상용 인부로 취직했다. 이곳에서는 20~30명 중에 조선인은 이봉창 혼자였지만 차별 대우는 받지 않았다. 정식 직원은 되지 못했지만 모처럼 안정된 생활과 여유가 생기고 만족한 생활을 유지했다.
그해 11월 10일 교토 고쇼에서 천황 즉위식을 구경하기 위해 이봉창과 최순평 그리고 일본인 노동자 마에다 세이지와 함께 11월 7일 오사카로 출발한다.
이 때 이봉창의 심경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그 나라의 역사와 왕의 얼굴도 모르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란 것을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처음 깨달았다. 자신도 엄연한 '신일본인'이기 때문에 천황의 얼굴을 봐야만 진짜 일본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하루살이 가난한 노동자였지만 돈을 빌려서라도 반드시 천황의 얼굴을 보겟다고 다짐했다.
11월 8일 아침 세 세람은 미쓰비시 은행 앞에 말녀된 참관석에 자리했다. 이윽고 경찰이 참관객 몸수색이 시작됐고 이봉창의 양복 주머니에서 한글과 한문이 섞인 안부편지가 발견되었다. 일본 경찰은 이 편지를 암호문이나 되는 줄 알고 무작정 임시 경비 본부로 이봉창을 연행하였다. 그때까지도 이봉창은 천황 즉위식 행차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지만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9일 동안이나 감금당하게 된다. 이봉창은 유치장에서 큰 깨달음을 얻는다.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나는 별수 없는 조선인이다. 조선인인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일본인으로 착각하고 천황 폐하를 뵈려 한 죄로 벌을 받아 유치장에 갇힌 것이다."
1928년 11월 15일 무죄 석방으로 풀려나 오사카로 돌아온다. 한참 만에 돌아온 이봉창을 노동운동을 하는 '주의자'로 의심하며 따돌림이 시작되자
'조선인으로 떳떳하게 살 수 잇는 방법은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독립운동에 투신하겠다는 생각은 없이 그저 자포자기한 상태로 방탕한 생활을 시작했다.
1929년 2월 말 혼마 시게가스의 소개로 오사카 히가시나리 구에 있는 야마노 가노스케 비누 도매상에 취직하며 철저히 일본인으로 살아가기로 다짐한다.
이 당시 조카 이은임은 이석숭과 결혼하였지만 오사카에 살고 있는 조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지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조선인이라는것이 탄로가 났다.
이때부터 이봉창은 또 한 번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이봉창은 당당하게 본명을 쓰고 살려면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옛날과 같은 독립국으로 만드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것 또한 막연했다.
1929년 9월 수금한 100엔을 가지고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오사카에서 도쿄로 도망쳤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것은 세계대공황이었다.
이봉창은 오사카에서 쓰던 이름을 버리고 도쿄에서 '마쓰이 가즈오'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했다. 하지만 공황으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야쿠자 조직에 신세까지 질 정도로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내게 된다. 1930년 7월 구세군 소개소의 도움으로 혼조 구에 잇는 오오키 가방점 외판원으로 취직하였으나 출장 중에 수금한 회사 돈 50~60엔을 사용하고 다시 오사카로 도망쳤다.
오사카에 도착하여 일자리를 구하다 우연히 박태산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으나 그의 제의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상하이에 우리 조선 사람이 세운 임시 정부와 교민단이 있어 영국인이 운영하는 전차 회사에 검표원으로 취직시켜 준다" 고 한다.
떳떳하게 조선인으로 살 수 있다는 말에 이봉창은 망설이지 않고 바로 상하이로 가기로 결심했다.
1930년 12월 6일, 이봉창은 오사카 짓코에서 상하이로 가는 배를 탔다. 일본에 온 지 5년 만의 일이다.
[독립운동]
1914년 4월 출범한 상하이 임시 정부는 프랑스 조계의 중심인 하비로에 2층집을 임대해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승만이 대통령직에서 탄핵된 후부터 미국에서 보내오던 지원금이 뚝 끊기면서 심각한 재정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은 독립운동을 포기하거나 먹고살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더러는 변절자가 되어 국내로 돌아가기도 했다. 당시 임시정부 최고 지도자인 김구 역시 일정한 거처가 없이 동포들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다니는 실정이었다.
1931년 1월 어느 늦은 밤, 이봉창은 상하이 프랑스 조계 마랑로 보경리 4호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이봉창은 자기소개를 하며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였지만 조선말인지 일본말인지 분간하기 어려워밀정으로 의심하고 문 밖으로 쫓겨났다. 마침 2층 사무실에 있던 김구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내려왔지만 늦은 시간이라 다음날 다시 만날 것을 약속받았다. 다음날 임시 정부를 다시 찾았지만 영국인 전차 회사에 취직하려면 영어나 중국어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듣고 앞으로 살 길이 막막해졌다. 할수없이 이봉창은 상하이 일본 YMCA를 찾아가 일본인으로 속이고 일자리를 부탁하여 명화 철공소 대장장이로 취직했다.
철공소 주인은 이봉창을 일본인으로 알고 임금을 후하게 쳐 주어 일당 2엔을 받았다. 이는 혼자 생활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금액이었다.
며칠 뒤 다시 임시 정부를 찾아가 전차 검표원 일자리를 부탁하려 들렀다 김구를 만나 상하이의 교민단과 임시정부 이야기를 나누지만 별 소득 없이 헤어졌다.
이봉창은 임시정부 직원들과 친해지기 위해 술과 국수를 사가지고 임시정부 사무실을 방문했다.
1층 주방에서 조촐하게 술자리가 벌어져 취중 떠드는 소리가 2층 사무실까지 들렸다. 술이 거나해지자 이봉창이 목소리를 높여 따지듯이 물었다.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면서 지금까지 뭘 했소?"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어째서 아직까지 천황도 죽이지 못했소?"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이봉창을 비웃었다. 총독부 관리나 일본군 장교 하나 죽이는 것도 어려운데, 천황을 어떻게 그리 쉽게 죽이겠소?
비위가 뒤틀리는지 이봉창은 "내 보기에 일본 천황을 죽이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인 것 같은데......" "내가 도쿄에 있을 때 천황 행차를 구경한 적이 있소. 그때 만약 내 손에 총이나 폭탄만 있다면 천황을 처치하는 것은 쉬울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소."
"천황을 죽인다?" 주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에 김구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상하이로 망명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들어보지 못한 대담한 발언이었다. 이봉창의 계획대로 천황을 죽일 수만 있다면 조선인의 독립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는 절호의 기히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자 김구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다시 만난 것은 1931년 3월 무렵이었다. 김구는 이봉창이 어떤 인물인지 떠보기 위해 많은 질문을 했다.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가서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큰일을 한번 해 볼 생각은 없는가?"
순간 이봉창은 몇 년 전 교토에서 거행된 천황 즉위식과 유치장에 갇친 일이 떠올랐다. 그런가 하면 독립운동을 이끌어 줄 지도자가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한 기억도 되살아났다. "독립운동을 하는 단체에 들어가고 싶은데 연줄을 댈 수는 없을까요?" 이봉창은 김구의 마음을 열기 위해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선생님, 제가 상하이로 온 것은 일본인 행세를 하지 않고 떳떳한 조선인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으로서 나라를 되찾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폭탄이든 무엇이든적당한 무기만 손에 들어오면 일본으로 건너가서 사건을 일으키고 싶습니다." "선생님, 제 나이 이제 서른할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한들 과거 반생 동안 방랑 생활에서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서른한 해 동안 육신의 쾌락은 대강 맛보았습니다.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 독립 사업에 목숨을 바치고 싶습니다." "선생님,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큰일을 할 수 있도록 저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이렇게 김구와 이봉창은 대업을 위해 뜻을 모았다.
5월 말경 이봉창은 다시 임시 정부 사무실로 김구를 찾아왔다. 이봉창은 김구의 연락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보다 일단 어떤 단체든지 들어가서 활동하고 싶었했다. 천황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사건이 어떤 단체의 활동보다 중요하다는 김구의 설득과 폭탄이 구해지면 바로 거사를 진행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이봉창은 마음을 가라안쳤다. 이봉창은 가끔씩 술과 고기, 국수 등을 푸짐하게 사 가지고 임시정부를 방문하여 직원들과 어울려 놀았다. 심지어는 게다를 신고 일본인 행삭으로 임시정부를 찾아왔다가 중국인 경비원에게 쫓겨나기도 했다. 이런 행동때문에 김구는 이따금 이동녕 등 다른 국무 위원들로부터 꾸지람을 들었다.
8월 말쯤 이봉창은 다니던 철공소를 그만두고 일본인이 많이 사는 훙커우 지역에 있는 영창공사라는악기점 점원으로 취직했다.
김구와 만난지 반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폭탄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하고 장사라도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차라리 빨리 결판을 내고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싶었다. 9월 중순 무렵 이봉창은 김구를 방문하여 재차 폭탄에 대한 확답을 듣고나서 성능 실험을 해 보고 싶다고 의지를 밝혔다. 당연한 말이지만 남의 나라에서 폭탄 실험을 할 장소를 찾기 힘들 뿐 아니라 폭탄을 구하기도 힘든 시절이라 김구는 폭탄의 성능은 자신한다고 이봉창을 다독였다.
당시 중국 현지에선느 1931년 7월 완바오산 사건과 만주 사변이 일어나는 급변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김구는 폭탄과 자금을 준비해야 했다.
우선 폭탄 한개는 김홍일에게 부탁해 중국군 무기 공장에서, 다른 하나는 김현에게 부탁해 허난성의 류치 장군에게서 구했다. 하나는 천황 폭살용으로, 다른 하나는 자살용으로 쓸 계획이었다.
폭탄 확보 다음으로 중요한 거사 자금 확보가 문제였다. 만주나 일본에 많은 동포가 살고 있었으나 생활이 어려워 도움을 줄 형편이 못 되어 결국 미국, 하와이, 멕시코, 쿠바에 살고 잇는 동포들에게 재정 후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로 한다. 이렇게 보낸 편지는 대부분 답장이 없거나 반송되는게 대부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시카고의 김경이라는 사람이 200여 달러를 모금해 보내왔다. 또 하와이의 안창호(도산 안창호와 동명이인)와 임성우에게서 1천 달러의 자금이 왔다. 이렇게 김구는 천황 폭살을 위한 무기와 자금을 모두 확보했다. 이봉창을 만난 지 열 달 만이었다.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중국 정부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특수 공장을 감행할 비밀 조직을 설치하기로 결정하고 김구를 대장으로 사업의 계획과 실행 일체을 일임받았다. 이를 위해 비밀리에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1931년 12월 6일 김구는 임시정부 청사에서 열린 국무 회의에서 천황 폭살 계획을 보고했다. 갑작스러운 보고에 깜짝 놀라 반대하는 의견도 있었지만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보고에 따라 김구의 계획을 승인하였다.
12월 10일(혹은 11일)경에 이봉창은 하숙집 주인에게서 편지가 왔다는 전화를 받았다. 13일 저녁 7시 30분 교민단 사무실로 오라는 김구의 편지였다.
"준비가 다 되었는데 언제쯤 일본으로 떠날 수 있겠는가?"
"마침 12월 17일 오후 상하이에서 고베로 가는 우편선이 잇으니 그 배를 타고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김구는 허름한 옷 속에서 지폐 한 다발을 이봉창에게 내밀었다. 300달러, 웬만한 월급쟁이 석 달 월급에 해당되는 큰 돈이다. "저를 어떻게 믿고 이런 큰돈을 주시는 겁니가?"
"이런 일은 인격 문제이네, 순전히 자네를 믿고 주는 거네." 김구는 이봉창을 데리고 사진관 비슷한 곳으로 이동했다. 사진관 안은 어두었지만 탁자 위에는 수류탄 두개와 선서무 한 장이 놓여 있고, 맞은편 벽에는 사람의 키 높이 정도로 태극기가 세로로 걸려 있었다. 김구는 이봉창에게 선서문을 읽어 주었다.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야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대한민국 13년 12월 13일 선서인 이봉창, 한국애국단 앞
선서식이 끝나자 김구가 기념사진을 찍고 청진에 있는 형에게 보낼 기념사진을 한장 더 찍었다. 이로써 이봉창의 한인애국단 입단식이 끝났다. 김구가 말한대로, 이봉창은 한인애국단의 최선봉에 선, 한인애국단 제1호 단원이 되었다.
12월 15일 저녁 무렵부터 폭탄 사용법과 보관법을 김구에게 학습하기 시작했다. 차분하게 듣던 이봉창은 수류탄 성능을 시험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제의 했지만 이봉창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폭탄을 던질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도 상의하기 시작했지만 도쿄 지리에 어두운 김구는 거사 장소와 날자에 대해서 모두 이봉창에게 일임했다. 그리고 거사 자금이 부족하면 1~2백엔정도는 추가로 더 송금해 줄 수 있다고 약속해 주었다.
이봉창은 김구에게 조심스럽게 자신의 작은 소망 하나를 말했다.
"이번 일은 저의 목숨을 내놓고 하는 일이라서 다시는 임시정부 사람들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조촐하게 송별회라도 열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습니다."
이 또한 대의를 앞두고 밀정에게 누설될까 두려워 마지막 소원도 김구는 들어줄 수 없었다.
12월 16일 김구와 저녁 식사를 하고 8월 80전을 주고 이봉창에게 손목시계를 사 주었다. 김구는 선서문을 가슴에 달고 찍은 사진을 이봉창에게 건네주었다.
사진을 본 이봉창은 너무 희미해 얼굴과 선서문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어 실망하여 사진을 다시 찍자고 제의했다. 김구는 나중에 경시청에서 사진을 확대해서 알아볼 수 있도록 할테니 다시 찍을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이는 죽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봉창은 체포될 경우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김구는 경험을 토대로 주의사항을 세심하게 일러 주었다.
12월 17일 아침, 이봉창과 김구는 최우희 식사를 하고 마지막 축배를 들었다.
"다음 세상에서 다시 만납시다." "지금 떠나면 다시는 얼굴을 보지 못할 걸세. 이승에서는 이것이 마지막이지만 사진으로나마 다음 세상에서 함께하도록 하세."
김구는 이봉창의 손을 끌고 가까운 중국 사진관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은 나란히 사진기 앞에 앉아 사진을 찍었지만 애석하게도 사진은 남아 있지 않다.
12월 17일 오후 3시, 이봉창은 빨간 가죽 트렁크 한 개와 중국산 등나무 바스켓 한 개를 들고 고베로 가는 우편선 히카와마루에 올랐다. 선객 명부에는 '효고 현 기노사키에 사는 축음기 상인 기노시타 쇼조'라고 자신의 신분을 적었다.
1931년 12월 19일 밤8시 상하이로 떠난 지 1년 1개월 만에 일본으로 돌아왔다. 12월 22일 도쿄에 도착했지만 14엔 정도가 남아 23일에 김구에거 1백엔 송금을 요청하는 전보를 쳤다. 12월 25일 천황이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는 날이었지만 돈이 없는 데다가 결행하려는 기분도 들지 않아 거사 계획을 포기했다.
12월 27일 독촉 전보를 치고 손목시계를 저당잡히고 1엔 50센을 받았다. 돈이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어 근처 직업소개소를 찾아 기노시타 쇼조 명의로 일자리를 부탁했다.
12월 28일 "정금 1백엔 보냈다"는 전보를 받았고 아사히 신문을 통해 1932년 1월 8일 요요기 연병장에서 육군 시관병식에 천황이 참가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2월 29일 아사쿠사 우체국으로 가서 송금을 확인했지만 돈이 오지 않아 불안해 했다.
12월 30, 31일 기다리던 돈이 오지 않아 싸구려 여관방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1932년 1월 1, 2일 자신의 출생과 경력 등을 적은 수기를 썼다.
1월 3일 마치내 전보 칠 돈도 떨어졌다. 여름 옷과 속옷등을 근처 헌옷 가게에 팔아 1엔 30센을 받아 우체국에서 송금 독촉 전보를 치고 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1월 4일 중앙 우체국으로 가서 송금 상황을 확인했다. 상하이에서 일본 사이에는 전보 우편환을 보낼 수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 혹시 우체국이 아닌 은행으로 보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전보 첫머리에 적힌 '정금'을 '일본 돈'으로만 생각했는데, 일본 돈이 아니라 "정금은행"이었다. 전보와 별도로 정금은행으로 부쳤다는 편지를 여관으로 보냈지만 이봉창이 여관을 옮긴 뒤라 전달이 되지 않아 혼선을 빚은 것이다. 은행에서 돈을찾아 김구에게 전보를 쳤다.
"상품은 1월 8일에 꼭 팔릴 터이니 안심하시오."
1월 5일 거사를 앞두고 그 결과가 궁금해 센소사 앞에서 시험 삼아 오미쿠지를 뽑아 점을 쳐 보았다. 점괘는 '제35 길 吉'이라는 길조였다.
1월 6일 요요기 연병장으로 사전 답사를 했지만 초행이라 실수를 했다. 승합차를 타고 운전사에게 연병장 가는길을 묻자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 주며 관병식에 참관할 생각으로 헌병 명함을 받아 두었지만 근무로 갈 수 없다며 이봉창에게 건네 주었다. 거사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도쿄 시내 지도를 샀다.
1월 7일 관병식을 앞두고 도쿄 시내 경비가 삼엄하여 가와사키 시 다마키로 유곽으로 이동했다. 이곳은 검문을 피해 몸을 숨기기도 좋았지만 하라주쿠까지 가는 교통도 편했다.
1월 8일 오전 8시 유곽을 나서 8시 50분쯤 하라주쿠 역에 도착했다. 중국 식당에서 닭고기 계란덮밥으로 식사를 하고 수류탄을 싼 보자기를 들고 식당을 나왔다. 경비가 심한 요요기 연병장 입구 보다는 국철을 타고 근처의 요쓰야 역에서 거사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아카사카미쓰케 쪽으로 이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카사카미쓰케 역에서 환궁할 때 거사하기로 결심하였다. 근처 식당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관병식 중계를 듣고 있는데 관병식이 끝났다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봉창이 역에 도착했을 때 행열의 끝이 보이며 저 멀리 다마치의 길모퉁이를 막 돌아가고 있었다. 순간 허탈감에 몸을 주채할 수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로 인부에게 천황의 행차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물었다. "행령은 다메이케 쪽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지름길로 쫓아가면 볼 수 있을 겁니다" 이 말에 택시를 타고 국회 의사당 앞으로 이동하여 경시청 앞에서 내려 경시청 본관 북쪽 끝까지 달려 도착하였다. 수상히 여긴 경찰의 검문을 받았지만 승합차 운전수에게 받은 헌병 조장의 명함으로 무사히 통과하였다. 다시 뛰기 시작해 경시청 정문 현관 앞에 도착했다.
큰 길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고, 맨 앞에는 호위 경찰들이 늘어서 있었다. 다행히 아직 천황의 행렬이 지나가지 않았다.
이봉창은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두세 겹 앞으로 나아가자, 천황 행렬이 이봉창이 있는 사쿠라다 문 쪽으로 오는 것이 보였다.
이봉창은 사쿠라다 문 전차 정류장의 삼각형 안전지대 잔디밭 동남ㅉ고 인도의 거의 중앙 부분에 있었다.
이윽고 첫 번째 마차가 다가왔다. '천황이 탄 마차라면 황비까지 두 명이 있어야 한다' 고 생각한 이봉창은 천황이 아니라고 생각 했다.
첫 번째 마차가 지나가고 두 번째 마차가 나타났다. 두 번째 마차가 천황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마차까지는 어림잡아 10간(약 18미터), 수류탄을 던지기에는 거리가 조금 멀어 보였지만 어 앞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 마차를 겨냥해 약간 높게 던져 마차 뒤쪽의 마부가 서는 받침대 부근에 떨어졌다.
"꽝!" 폭발과 동시에 요란한 소리가 났다. 갑작스런운 폭발에 놀란 말이 날뛰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1932년 1월 8일 오전 11시 44, 45분경이었다. 요란한 폭발 소리를 듣고 이봉창은 거사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폭발 소리만 요란했지 수류탄의 위력은 약했다. 마차 밑바닥과 타이어가 파손되었을 뿐 다친 사람은 없었다. 혼란을 뒤로한 채 앞서 가던 천환의 마차는 5분 뒤에 궁성으로 들어갔다.
"실패했구나!" 이봉창은 당황했다. 순간 머리가 멍해져 어떻게 할지를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바로 그때 주위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혼다 쓰네요시라는 순사가 얼떨결에 이봉창 뒤쪽에 서 있던 반코트를 입은 쉰 살쯤의 남자를 체포했다. 이봉창은 자신도 모르게 "그 사람이 아니라 나다!"라고 외쳤다.
이봉창은 저항하지 않고 순순히 체포에 응했지만, 경찰의 거친 행동으로 입고 있던 코트의 단추들이 떨어져 나갔다. 현장에서 바로 경시청으로 연행되었다.
만약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이 성능이 좋아 재대로 폭발했다면 천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거사 당일 현장 검증에 따르면, 이봉창이 수류탄을 던졌을 때 천황의 행렬은 왼쪽의 경시청 건물을 끼고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경시청 앞의 사쿠라다 문 전차 정류장 안전지대를 지나고 있었다. 폭탄 투척 지점으로부터 남쪽으로 18간(약33미터) 떨어진 거리다. 김구가 말한 수류탄의 위력 범위인 6, 7간(약11~13미터)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수류탄이 제대로 터졌더라도 천황을 폭살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였다.
거사 당시 수류탄 두개를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던지고 나머지 하나는?
그에 대한 대답은 <제2회 신문조서>에서 예심 판사와 이봉창 사이에 오간 문답에 있다.
"그곳에서 바로 왼쪽 주머니에 넣어 둔 폭탄을 다시 던지려고 하지는 않았는가?"
"그때는 웬일인지 머리가 멍해져서 두 번째 폭탄을 던져야 한다는 것을 잊고 말았습니다."
이봉창은 상하이에서 폭탄 투척 연습을 한 적이 없는 아마추어 독립운동가이자 평범한 노동자였다.
일본 경찰은 경시청에 도착하 때까지도 이봉창의 호주머니 속에 또 하나의 수류탄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연행된 뒤에 이봉창이 스스로 주머니 속에서 수류탄을 꺼냈다고 공판조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봉창은 9월 16일의 구형 공판과 9월 30일의 선고 공판에서 모두 사형을 판결받았다. 사형 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동안 매일 염주를 만지면서 조용히 재판에 응했다. 이봉창은 사형 판결을 받은 지 불과 열흘 만인 10월 10일 도쿄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극비리에 사형되었다. 유해는 사이타마 현 우라와 시의 우라와 형무소 묘지에 묻혔다가 해방 후 김구의 주선으로 1946년 7월 초에 효창원에 안치되었다.
[이봉창의 힘]
이날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대신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내각 총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히로히토는 시국이 중대하다는 이류로 내각의 사직서를 반려했다.
이봉창 의거는 1931년 9월 만주 침략을 감해하여 오만해진 일본 제국주의가 신년 관병식을 통해 무력적 위엄을 과시하고자 한 '잔칫집'에 재를 뿌린 격이었다. 또한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받던 천황을 향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조서닌들이 일본의 식민 통치를 즐겨 받고 있다고 선전해 온 일본의 식민 정책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였다.
만주 사변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있던 상황에서 중국의 신문들은 연일 이봉창 의거를 머릿기사로 크게 보도했다. 중국의 우호적인 반응에 화가 난 일본의 거센 항의로 이봉창 의거를 호의적으로 보도한 중국의 신문사들이 폐쇄되었다. 일본은 이를 빌미로 20일 만에 갑자기 상하이를 침공했다.(상하이 사변)
비록 천황 폭살에는 실패했지만 이봉창 의거를 통해 김구와 임시정부는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했다. 한동안 임시정부에 냉담하던 미주 동포들이 뜨거운 성원을 보내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의 활동 반경이 넓어졌으며 중국 정부의 지원하에 윤봉길 의사의 의거 준비에 힘을 실어 줄 수 있게 되었다.
일본 경찰의 감시가 삼엄한 가운데 10월 15일 오전 6시 정각, 상하이 프랑스 조계 애다아로에 있는 모 사원의 집에서 남녀 유지 36명이 비밀리에 모여 이봉창 추도식을 거행했다. 이날 추도식은 교민단원 이유필 등이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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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준 2016-03-09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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