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8, 문명의 전환 - 대한민국 기원의 시공간
전인권,정선태,이승원 (지은이)이학사2011-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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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325쪽
152*223mm (A5신)
455g
ISBN : 978896147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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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2011년 8월 전인권의 6주기를 맞아 전인권, 정선태, 이승원은 전인권의 구상에 정선태, 이승원의 생각을 담아 세 사람이 함께 공부하면서 고민했던 사유의 편린들을 갈무리하여 이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에서 말하는 1898년은 반드시 1898년 한 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1876년 개항부터 1910년 조선의 패망까지의 시기를 말할 수도 있으며, 1896년부터 1898년 사이의 3년을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 기간은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독립신문'이 발행되었으며 독립협회가 설립되고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던 시공간일 수도 있다.
더 넓게 말하자면 이 땅에 서구 문명이 알려지고 이에 관한 토론이 본격화된 19세기 초부터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까지를 지칭할 수도 있다. 1898년을 전후한 시기가 중요한 것은 이때 바로 ‘문명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문명 전환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민중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그 바탕이 된 아관파천, '독립신문' 그리고 문명의 새로운 양식들을 통해 밝힌다.
목차
책을 내면서
서문
1장 프롤로그, 1898년의 새로운 의미
2장 문명의 전환, 진리의 나라에서 세속의 나라로
3장 『독립신문』의 재해석과 한국의 사회과학
4장 교육입국론과 ‘국민’ 생산 기획: 『독립신문』의 교육론
5장 ‘국어’의 독립과 국가의 독립: 『독립신문』의 국문론
6장 만민공동회, 한국 근대 정치의 원형
7장 만민공동회, 근대적 정치 학습의 현장
8장 문명의 새로운 양식들, 행동하기와 말하기의 근대
9장 문명인 양성소의 탄생, 학교·학생·얼개화꾼의 표상
부록: 전인권 유언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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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중앙일보(조인스닷컴) 2011년 9월 03일 '200자 읽기'
저자 및 역자소개
전인권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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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박정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고, 상지대학 연구교수를 지냈으며, 신춘문예에 미술평론이 당선되어 미술평론가로도 활동했다. 정치학자이자 미술평론가, 저술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던 중 2005년 8월 1일 암으로 갑자기 타계했다. 지은 책으로는『김대중을 계산하자』(새날, 1997),『편견 없는 김대중 이야기』(무당미디어, 1997), 2005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한국을 대표하는 100권의 책으로 선정된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문학과지성사, 2000),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선정한 2003년 “올해의 책” 수상작인 『남자의 탄생』(푸른숲, 2003), 『독립신문 다시읽기』(공편, 푸른역사, 2004), 유고 평론집으로 『전인권이 읽은 사람과 세상』(이학사, 2006)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1898>1898>,<전인권이 읽은 사람과 세상>,<박정희 평전> … 총 10종 (모두보기)
정선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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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글로벌 인문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개화기 신문 논설의 서사 수용 양상》, 《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그 외부》,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 번역·문학·사상》,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이 있으며, 역서는 《동양적 근대의 창출: 루쉰과 소세키》, 《일본 문학의 근대와 반근대》, 《가네코 후미코: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일본어의 근대》, 《도조 히데키와 천... 더보기
최근작 :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백석 번역시 선집>,<1898>1898> … 총 37종 (모두보기)
이승원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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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고, 나무를 다듬고, 가죽을 꿰매고, 글을 쓰는 사람. 저서로 『나에겐 국경을 넘을 권리가 있다: 시 읽는 여행자』 『저잣거리의 목소리들』 『사라진 직업의 역사』 『학교의 탄생』 『세계로 떠난 조선의 지식인들』 『소리가 만들어낸 근대의 풍경』 등이 있다.
최근작 : <공방 예찬>,<조선신보, 제국과 식민의 교차로>,<나에겐 국경을 넘을 권리가 있다> … 총 25종 (모두보기)
출판사 소개
이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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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열린 공동체를 꿈꾸며>,<도덕철학사 강의>,<암시된 거미>등 총 198종
대표분야 : 철학 일반 9위 (브랜드 지수 50,818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세상에 없는 한 사람과 남은 두 사람이 함께 책을 쓰다
2005년 8월, 활발하게 활동하던 젊은 정치학자 전인권은 병마와 싸우다 끝내 이 세상을 떠난다. 『아름다운 사람 이중섭』을 쓴 미술평론가이자 『남자의 탄생』을 쓴 작가이기도 했던 전인권은 그해 봄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그가 오랫동안 구상하며 초고를 일부 쓰기도 한 『1898, 문명의 전환: 대한민국 기원의 시공간』을 함께 『독립신문』 등을 읽으며 한국 근대화기를 공부했던 정선태(국민대 교수)와 이승원(국문학 박사)에게 마무리지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글을 쓸 힘이 없어 녹음테이프로 남긴 긴 유언(이 책의 부록 「전인권 유언」 참조)에서 전인권은 책 전체를 관통하는 ‘문명의 전환’이라는 생각과, 그가 구상한 책의 차례와 써놓은 원고 내용을 설명하고, 아직 쓰지 못한 각 장의 주제와 주요 내용을 정선태와 이승원에게 자세히 얘기하며 두 사람이 함께 힘을 합쳐 책을 잘 마무리해주기를 간곡하게 부탁한다.
남은 두 사람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생명의 끈을 놓기 전, 가쁜 숨을 몰아쉬며 펼쳐놓은 전인권의 생각을 온전히 살리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두 사람은 전인권이 남긴 글을 정리하여 꿰맞추고 빈 공백들을 채워나가며 그의 구상을 채우고자 노력하였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이에 6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2011년 8월 전인권의 6주기를 맞아 전인권, 정선태, 이승원은 전인권의 구상에 정선태, 이승원의 생각을 담아 세 사람이 함께 공부하면서 고민했던 사유의 편린들을 갈무리하여 이 세상에 내놓는다.
1898년의 의미
이 책에서 말하는 1898년은 반드시 1898년 한 해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1876년 개항부터 1910년 조선의 패망까지의 시기를 말할 수도 있으며, 1896년부터 1898년 사이의 3년을 말할 수도 있다. 또한 이 기간은 아관파천이 단행되고 『독립신문』이 발행되었으며 독립협회가 설립되고 만민공동회가 개최되었던 시공간일 수도 있다. 더 넓게 말하자면 이 땅에 서구 문명이 알려지고 이에 관한 토론이 본격화된 19세기 초부터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까지를 지칭할 수도 있다.
1898년을 전후한 시기가 중요한 것은 이때 바로 ‘문명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정치학자 김영수 교수(영남대 정외과)는 그의 책 『건국의 정치』(2003)에서 “한국 역사에서 가장 큰 문명 전환이 일어났던 시기는 14세기 말과 19세기 말이다. 14세기 말의 변혁은 오늘날 한국인의 전통적 정체성의 기원이며, 19세기 말의 변혁은 근대적 정체성의 뿌리”라고 말한다. 즉 한국사를 문명사적 시각에서 보면 두 번의 커다란 문명 전환이 있었는데, 그 처음은 여말선초이고 두 번째는 19세기 말이라는 것이다. 전자는 고려 때까지 한반도를 지배하던 불교에 기반을 둔 문명이 성리학에 기반을 둔 유교 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이고, 후자는 유교 문명이 오늘날 우리의 삶의 기원이 된 근대 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1898년을 전후한 ‘문명의 전환’ 시기를 대한민국의 근대 문명이 시작된 기원의 시공간으로 보고 탐구한 것이다.
‘문명의 전환’, ‘진리의 나라’에서 ‘세속의 나라’로
문명사적 관점에서 볼 때 조선은 ‘진리의 나라’였다. 조선은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믿음이 존재한 사회였다. 그 진리 체계가 바로 ‘성리학’이었다. 조선은 우주와 자연, 자연과 인간, 인간과 사회를 설명하는 통합적이면서도 유일한 진리 체계인 성리학을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 성리학적 세계는 사회제도의 관점에서 보면 신분제도를 핵심으로 한다.
그런데 19세기 말에 개항이 되고 제국주의의 열강이 한반도로 몰려들어오면서 조선 500년을 지탱해온 이 성리학적 진리와 신분제 사회가 붕괴하는 것이다. 바로 소중화의 조선 문명이 서구 문명으로, 성리학적 세계라는 ‘진리의 나라’가 개화 문명이라고 하는 ‘세속의 나라’로 급속하게 바뀌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일제강점기를 통해 근대적인 문물과 제도 및 정치적 관념이 대중화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여러 가지 자료를 분석해보면 근대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개념은 1896년(『독립신문』이 창간되는 해) 이후 수년간에 걸쳐 급속하게 정착하게 된다. 물론 이 시기의 근대적 문물은 아직 혼란스러운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역사적 과정을 통해 충분한 숙성의 과정을 거친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대한제국의 탄생을 전후한 시기에 인간과 우주,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개인과 국가 등에 대한 기본 개념들뿐만 아니라 위생, 결혼, 가족, 직업과 산업, 신분, 육아, 음식, 패션, 교통, 에티켓, 매너 등 우리의 삶의 양식이 급격하게 변화하며 근대적 사유가 본격화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문명 전환을 한국 최초의 근대적 민중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 만민공동회를 중심으로 그 바탕이 된 아관파천, 『독립신문』 그리고 문명의 새로운 양식들을 통해 밝힌다.
아관파천, 새로운 개혁의 가능성
1896년 2월 11일에 일어난 아관파천은 한 나라의 국왕과 태자가 외국 공관에 몸을 의탁한 사건이란 점에서 난처하고 기이했지만, ‘새로운 개혁의 가능성’을 열었다는 점에서 문명의 전환의 밑거름이 된 중요한 사건이었다.
먼저 아관파천은 국제적 힘의 균형(러일 간 힘의 균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조선의 활동 공간을 넓혔던 적극적인 노력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리고 아관파천이 중요한 것은 근대적 개혁을 위한 활동 공간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아관파천은 일본의 영향력이 하루아침에 상실되도록 만들었다. 아관파천이 단행되어 개혁의 공간이 열림으로써 『독립신문』이 발행되고, 독립협회가 만들어지고, 토론과 연설의 공론의 장이 열리고, 또 의회 개설을 목표로 했던 만민공동회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독립신문』, 국어와 국민과 국가의 발견 그리고 독립
아관파천을 통해 근대적 개혁을 위한 활동 공간이 열리자 서재필은 곧 『독립신문』을 창간한다.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을 주장하며 말과 글을 통해 공론장을 형성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독립신문』이 한글(국문)을 채택한 것은 상하 귀천을 막론하고 민중이 읽기 쉬운 신문을 만들어 민중을 계몽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립신문』의 한글 전용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조선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인민 또는 백성이란 하나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는 관념을 대중적으로 유포시켰다. 이것은 그 이전에 남녀가 유별하고, 반상의 구별이 엄격하며,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는 천민들이 존재하던 세상과 아주 다른 것이었다.
또한 『독립신문』은 ‘야만의 언어’로 전락한 한자를 버리고 ‘문명의 언어’인 국문(한글)을 전용함으로써 ‘문명’을 현실화하고자 하는 열망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이것은 한자가 양반과 기득권층의 언어이기 때문에, 모든 인민이 주인인 문명국가에는 모든 국민이 소통할 수 있는 하나의 언어가 존재해야 한다는 근대적인 국민국가 사상을 바탕으로 한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신문』이 국어를 발견한 것은 마르틴 루터가 귀족이나 성직자의 고급 언어였던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일반 평민들의 저속한 언어였던 독일어로 번역한 것과 똑같은 의미를 갖는다(독일어의 발견은 종교개혁과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즉 『독립신문』의 한글 채택 역시 ‘국어의 발견’, ‘국민의 발견’ 나아가 ‘근대 국가의 발견’이라고 할 만큼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국민국가를 바탕으로 하는 근대국가의 건설이 국어의 발견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독립신문』은 정치와 개혁의 주체는 양반과 정치인들이 아니라 민중(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철폐한 위에 존재하는 인민)이라는 인식을 분명히 했다. 바로 여기에 당시의 상식과 정치의식을 완전히 뒤집는 획기적인 사상의 전환이 존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독립신문』은 한반도에서 본격적인 근대사회가 출현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독립신문』이 미친 또 다른 결정적 영향은 ‘근대적 공론장의 형성과 민주주의의 도입’이다. 『독립신문』은 말과 글, 그리고 대중에 의한 정치적 의사의 형성이라는 새로운 유형의 공론장을 만들었다. 『독립신문』의 발간으로 인해 “국민들은 미몽에서” 벗어나 “사회의 진상”을 알게 되었고, “관리의 악정”과 “재판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여론”을 일으킬 수 있게 되었으며, “합리적인 교육”과 “정당한 개혁”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정치 공동체에 대한 열망을 낳았고, 국가를 구성하는 인적 원리에 대해 혁명적 변화를 초래했다. 『독립신문』은 대중 운동과 결합된 공론장을 통해 민권 개념들을 대중적으로 유포시켰으며, 새로운 정치적 경험과 근대적 체험을 확산시켰다.
만민공동회, 한국 근대 정치의 원형이자 근대적 정치 학습의 현장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부터 12월까지 크게 세 차례 열렸다.
제1차 만민공동회는 1898년 2월 21일 구국 선언 상소를 올리는 것에서 단초가 마련되었다. 3월 10일에는 약 1만 명의 성인 남성들이 종로에 모여 만민공동회를 개최하고, 3월 12일에는 서울 남촌에 사는 평민 수만 명이 다시 한 번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러시아의 절영도(현재의 부산 영도) 저탄소 조차租借를 반대·규탄하고, 전년 8월부터 문제가 되었던 군사교관과 재정 고문의 철수 및 노한은행의 철거를 요구했다. 이 사건은 정부 관료들과 외교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고 대한제국 정부는 절영도 조차를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러시아는 3월 17일에는 군사교관과 재정 고문의 철수를 통고했으며 노한은행도 철폐하였다. 제1차 만민공동회와 관련된 사건들은 각국 정부로 하여금 한반도 상황을 재평가하도록 했으며, 한반도에서 제국주의 열강이 힘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하는 데 주체적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이때 마련된 국제균형은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날 때까지 6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자주독립의 마지막 기회를 마련한 셈이었다. 『독립신문』은 이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실을 보도하고 만민공동회를 적극 지지하는 논지를 전개하였다.
제2차 만민공동회는 1989년 10월 ‘김홍륙 독차 사건’ 관련자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침해를 규탄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가 친러 수구파 정권의 퇴진과 개혁파 정부의 수립을 요구하는 운동으로 발전했다. 이때 만민공동회는 10월 1일부터 12일까지 종로에서 12일 동안 장작불을 피워놓고 철야 집회를 하며 연좌법과 노륙법(연좌제의 일종으로 죄인의 아들에게 사형을 내리는 제도)을 부활시키려는 수구 친러 정부를 퇴진시키는 운동에 들어갔다. 만민공동회는 임금을 독살하려 한 범인들이라도 법률에 의해서만 처벌되어야 하며 고문이란 있을 수 없다는 천부인권의 관점에서, 지금 보아도 획기적인 주장을 펼쳐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고종 황제는 점점 늘어나는 시위 군중과 영향력에 눌려 10월 12일 마침내 독립협회가 신임하는 박정양을 정부 수반으로 삼고 개혁파 정부를 탄생시켰다.
제3차 만민공동회는 그때까지 여러 차례 고종에게 상소를 올리며 추진되던 ‘의회설립운동’을 대중투쟁의 형태로 본격화한 것이었다. 의회설립운동은 1898년 10월 27~29일 정부 대신과 서울 시민 등 4,000여 명이 참가한 관민공동회에서 결의되어, 그해 11월 5일 50명의 위원을 선출하면 완성될 일이었다. 그 의회는 임금을 견제하는 의결 기구이며, 선거 절차를 통해 위원을 선출하는 귀족원 형태의 상원이었다. 그러나 당시 집권 세력인 친러 수구파는 11월 4일 밤부터 11월 5일 새벽, 상원 개설이 임금을 밀어내고 “대통령 박정양, 부통령 윤치호, 내부대신 이상재” 등을 주축으로 하는 공화제 건설 음모라는 ‘익명서匿名書 조작 사건’을 일으켜 일종의 ‘가짜 쿠데타 상황’을 조성한 후, 고종에게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는 등 실제의 계엄 상태를 조성하도록 했다. 그러나 서울 시민들은 아침이 밝자 이미 20차례 이상 그렇게 모였던 것처럼 만민공동회를 열고, 11월 5일부터 23일까지 무려 19일 동안 지도자 석방과 의회설립운동을 위해 철야로 투쟁했다. 바로 이때 종로에는 2차 만민공동회 때 그랬듯이 더 추워진 날씨 속에 매일 밤 장작불이 타올랐다. 물론 늦가을 찬비가 내리면 장작불은 꺼지고 모인 사람들의 옷은 젖었지만, 회중은 찬비를 맞으면서도 동요하지 않았다.
당시 서울 인구는 17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1~2만 명이 모이는 것은 보통이었으며, 종로의 상인들도 가게 문을 닫고 시위에 참여했다. 밥장사는 장국밥을 300그릇, 500그릇 날라 오고, 술장사는 가게에 있던 모든 술을 가져오고, 어떤 부자는 집 판 돈 500원을 모두 기부하고, 심지어 거지조차 닷 푼의 기부금을 내놓는 등 일종의 운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서대문, 자하문 밖은 물론 과천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나무꾼들이 기부한 장작은 밤하늘을 훤하게 비추었고, 구경꾼까지 포함하여 사람들이 산처럼 모이자 조병식 등 수구파는 두려워하였다. 이 당시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였으며, 이들의 투쟁은 단기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와 같은 만민공동회의 출현은 새로운 사고, 새로운 방법, 새로운 가치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가 태동되고 있으며, 근대적 민중이 출현했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또한 만민공동회는 조선이 더 이상 군주 국가에 머물 수 없으며, 민중과 권력 엘리트가 공정한 게임을 하기 위한 ‘사회계약’을 필요로 하는 근대사회에 진입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만민공동회는 한국의 민주주의 역사에서 전형성과 총체성을 동시에 갖춘 최초의 근대적 대중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한국 민주주의는 만민공동회 이래 ‘직접민주주의의 방식’으로 사회계약의 수준을 한 걸음씩 진전시켜왔다. 100년이 넘는 긴 역사를 통해 보면 만민공동회를 기점으로 한국 사회의 민주화운동이 일정 부분 성공과 실패를 반복하면서 운동 역량과 전통을 축적해왔다고 할 수 있으며, 바로 그러한 역량과 전통이 1987년 6월 민주화운동과 그 이후의 다양한 촛불시위를 낳아 한국 민주주의를 확립하고 실질적 민주주의를 공공화해가고 있는 것이다.
만민공동회는 근대적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정치운동이었다. 만민공동회는 정치 공동체의 구성원이 스스로의 정치적 입장을 적극적으로 표명했다는 점에서 한국 근대사의 초입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에너지를 발산한 정치적 운동의 장이자 근대적 공론의 형성 과정을 볼 수 있는 텍스트라 할 수 있다. 특히 근대적 신문들이 이 운동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신문이라는 근대적 미디어를 통하여 이 운동이 서울을 벗어나 전국으로 전파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신문이 하나의 ‘운동 교재’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시위 현장뿐만 아니라 장터와 거리에서 토론과 연설이 광범위하게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또 하나 만민공동회가 중요한 것은 정치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 정치운동을 통해 스스로가 ‘국민’의 일원임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빈부귀천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충군애국이라는 깃발 아래 하나의 ‘국민’임을 확인하는 장으로 만민공동회를 경험했다. 그 과정에서 민중들은 그들이 단순히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통치의 방식이나 틀을 결정할 수도 있는 권리를 지녔다는 사실을 몸소 학습했을 터이다. 요컨대 만민공동회는 정치적 관심을 환기하는 계몽의 장이었고, 민중들이 스스로를 정치적 주체로 세울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정치적 훈련의 시공간이었다.
문명의 새로운 양식
이제 조선 사람들은 서구화=문명화라고 인식하기 시작하고, ‘조선적’ 전통에서 벗어나 서구가 만들어낸 근대적 삶의 질서 속으로 편입되기 시작한다. 오늘 여기 ‘대한민국’의 삶 속에 깊숙이 침윤되어 있는 삶의 양식이 1898년을 전후한 문명의 전환기에 구성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근대 미디어인 신문과 잡지가 모든 것을 ‘야만’과 ‘문명’의 이분법의 시선으로, 조선의 구시대적 문화는 ‘나쁜 것’이자 ‘야만’의 것으로 서구의 생활양식으로부터 파생된 것들은 ‘좋은 것’이자 ‘문명’의 것으로 부각시키며 연일 서구의 문화와 양식을 알리는 데 앞장섰다. 특히 계몽 지식인들은 서구인들의 생활양식이 왜 좋으며, 이러한 방식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왜 지금의 예법보다 더 나은지에 대한 친절하고도 구체적인 설명을 누락한 채 서구의 생활양식을 번역하여 보급하는 데 바빴다.
생활양식이라고 하는 습속은 가장 늦게야 동화되는 요소다. 근대 전환기의 계몽 담론의 목표였던 조선 사람들의 ‘근대 문명인 만들기 프로젝트’는 한편으로는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들의 반발에 부딪혀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근대 전환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실험된 다양한 문명의 양식들은 100여 년이 지난 ‘지금-여기’ 우리의 삶에 이미 견고하게 달라붙어 있다. 근대 전환기는 구시대를 상징하는 조선식 양식과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서구식 양식이 대결하고 충돌하면서 생성된 조선 문명사의 터닝 포인트, 즉 ‘문명의 전환’기였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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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인권의 유작이라 기쁜 마음으로 보다가 민중 예찬론(오직 민중만이 역사를 움직인다)에 다소 실망
madwife 2018-03-0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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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만들어진 과정 자체가 감동. 신민에서 국민으로 탄생하는 만민공동회의 의미!
무지개 2011-10-1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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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협회 공부에 필요한 책
크네히트 2013-03-30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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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짠한 연구서
1. 이 책은 ‘공동저작’이자 유고집이다. 이미 고인이 된 저자의 못 다 이룬 작업을, 그의 학문적 동지들이 뜻을 모아 펴낸 것이다. 저자 사후 6년이란 시간이 걸린 뒤에야 책이 나오게 된 것도 이 같은 사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말미에 수록된 유언(육성 녹음을 풀어 기록한 것이라 한다)을 읽어보면, 하고 싶은 공부를 다 하지 못하고, 쌓아온 생각들을 정리하지 못하고 떠나는 자의 안타까움, 아쉬움과 이를 동료들에게 맡기는 덤덤함(간절한 부탁이면서도, ‘안 해도 그만이고’라는 말이 남아 있는 것은, ‘떠나는 자의 말’임을 실감케 한다)이 오버랩되어, 가슴이 짠하다. ‘안녕히 계셔요’라는 마지막 말이 이렇게 절절하게 다가오는 책은 흔치 않은 듯.
2. 책의 내용 자체도, 내가 이 쪽의 문외한이라 그렇겠지만, 흥미로운 문제제기가 많다.
그 중에서도,
-만민공동회의 ‘횃불집회’에서 ‘촛불집회’를 읽어내는 시각,
-독립신문의 ‘띄어쓰기’가 영어의 ‘문명 언어’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지적.
등이 기억에 남는다.
역사학의 역사가 아닌, 다른 분야(정치학, 문학)의 역사를 읽는 재미는 이런 것인지.
그렇기에 더더욱, 이 책이 미완성이라는 사실이 아쉬울 뿐이다.
물론, 저자가 남겨놓은 큰 틀 속에서 그의 동료들이 빈 칸을 메워주곤 있지만,
만민공동회의 실패 이후의 상황(사회진화론과 민족주의만이 남게 되는)까지가 정리가 되었어야 완결성이 있는 작업이 되었을 것 같다.
공동저작의 조율이 원활하지 않은 것인지, 고인의 글과의 연계성이 강하게 의식되어서 인지, 중복되는 서술이 상당히 있다는 점도 아쉽다(비슷한 내용의 서술이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인용되는 자료마저도 똑 같은 것은, 독자 입장으로서 달갑지는 않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치학적 역사 서술은 어딘가 위화감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내가 생각하는) 역사학과의 근본적인 시각차이가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문제의식이 ‘현재’로 수렴되기 때문인 건지, 과거의 이야기를 하는 데도 과거의 이야기 같지가 않다. 역사학이라면, 과거의 인물을 현재로 ‘끌어 오기’ 전에, 자신이 과거로 ‘들어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역사학의 의의는, ‘현재’ 자신이 알고,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결코 ‘원래부터’ 그러하지는 않았다는, 스스로가 ‘역사적’ 인간임을 깨닫는데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흠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이 책에서 그러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인상이 그러하다'라고 밖에 대답하지는 못하겠지만;;;;
여튼, 내가 역사를 공부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커다란 ‘담론’보다, 이른바 역사학의 ‘精緻美’에 아주 조금은 매료되었었기 때문인지, 책을 읽고나니 ‘흠… 재밌지만, 이런 건 역사책이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래서 사회과학대학의 어느 선생님이 ‘역사학자들이랑 대화가 안 통해’라고 말씀하셨던 건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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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guk92 2013-11-22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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