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오구라 기조)-도덕 지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 네이버 블로그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오구라 기조)-도덕 지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
yoology ・ 2019. 2. 18. 9:05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 괜찮은 책이다. 한국에서 8년 동안 유학하면서 보고 느낀 한국을 ‘리’와 ‘기’의 관점에서 깊고 진중하게 분석했다. 지은이 오구라 기조(小倉紀藏)는 현재 교토대 대학원 인간·환경학 연구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다른 나라와 구분되는 한국과 한국인들의 특성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지은이는 한국인은 조선 시대의 지배적인 이념인 성리학의 영향권 안에 있으며 따라서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리기론 관점에서 한국에 대해 해부를 가하면 유의미한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처음에는 다소 뜬 구름 잡는 말이라고 봤는데 줄친 부분을 중심으로 두서너번 정도 읽으니 접근 방법이 매우 참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리학의 특징은 리와 기라는 두 개념으로 인간과 사회 그리고 우주를 통일적으로 설명한다는 데 있다. 여기에서 리가 도덕과 이념을 의미한다면 기는 욕망과 현실을 나타낸다. 성리학에선 현실이 이념을 따르고 욕망이 도덕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고 본다. 종래에 한국을 분석하는 이른바 과학적인 방법들은 대개 서양의 사회과학 이론이나 철학적 담론과 같은 외부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현대 한국을 분석하는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이른바 서양에서 훈련받은 해외 유학파 출신들이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학을 전공하는 연구자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유학적 지식을 현대 한국을 분석하는 데에 사용하기보다는 조선 시대 유학을 설명하는 데에 주로 사용해 왔다. 한국의 원형을 잘 아는 사람들은 지금의 한국에 관심이 적고 지금의 한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국의 원형에 어두웠다고 해야 하나.
지은이는 단언한다. 한국인의 가장 큰 특징은 도덕 지향적이라고. 도덕적인 것이 아니고 도덕 지향적이다. 도덕을 매우 중시하고 그 잣대로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를 한다는 의미다. 이는 리 지향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바리새인들이 한국인의 특성을 가장 잘 구현했다고 해야 하나. 짧고 가벼운 이 책은 매우 유익하고 재밌다. 가볍게 읽어볼 만한데 마음에 남는 울림은 그다지 가볍진 않다.
오늘날 한국인의 도덕 지향성은 전통적인 리 지향성의 연장이다. 리는 보편의 운동이다. 이 보편을 격렬한 논쟁에 의해 거머쥔 자가 권력과 부를 독점한다. 즉 리는 진리이자 규범이자 돈과 범의 원천인 것이다. 모든 사람은 각자가 체현하는 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일원적으로 서열이 정해진다. 체현하는 리가 많으면 많을수록 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도덕 지형성 국가인 한국에서 도덕의 최고형태는 도덕이 권력, 부 등과 삼위일체가 된 상태라고 여겨지고 있다. 조선 시대에는 도덕을 쟁취하는 순간 권력과 부가 저절로 굴러 들어온다고 모두가 믿고 있었다. 그래서 조선에선 무력으로 투쟁하지 않고 이론으로 투쟁했다.
리는 형이상학적 원리이고 기는 형이하학적 재료이다. 따라서 인간도 리와 기가 합쳐져서 이뤄진다. 인간의 육체는 기이고 인간으로서의 도덕성은 리이다. 성리학은 성선설의 철학이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본래 하늘로부터 100%의 리를 부여받았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원래 100% 도덕적이고 선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왜 악한 인간이 있는 것일까. 성리학에선 그것을 기의 탓이라고 본다. 성리학에서 악이란 리가 기에 의해 흐려져서 발현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즉 악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과불급 즉 지나침과 모자람이 바로 악이 된다.
우선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 유교는 기본적으로 자기부정의 철학이 아니기 때문에 나에 대한 긍정은 두드러지게 강하다. 다음으로 ‘너’는 나와 대등한 관계에 있는 인간이다. 대등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상대는 이 사회에서 많지 않다. 학창 시절의 동창생 등이 전형적인 너가 된다. ‘님’이란 자신이 존경할 만한 윗사람을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주인, 임금, 사랑하는 사람 등을 의미한다. 한자로는 ‘주(主)’에 해당된다. ‘놈’이란 경멸한 만한 상대에게 사용하는 말이다. 한자로는 ‘노(努)’에 해당된다. 놈이란 탁한 기에 의해 리가 흐려져서 조금밖에 나타나지 않는 인간을 가르킨다. ‘우리’란 우리들이라는 의미이다. 화자가 누군가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는 대화하는 두 사람만으로 우리가 성립한다. 이것이 우리의 최소 단위다. 최대 단위는 오늘날 지구시민으로까지 확장될 수 있다. 한국에선 우리 속에 북한을 넣을지 말지를 둘러싸고 격렬하게 대립하는 중이다. 우리 공동체에선 예의가 중시된다. 우리 공동체의 밖, 즉 남에 대해선 ‘예의=질서’가 성립하지 않는다.
성선설은 상승 지향의 철학이다. 한국사회에서 사람의 일생이란 님이 되고자 하는 끊임없는 노력과 극기의 지속이다. 이것이 유교 사회의 내재적 원동력 가운데 하나다.
한국인의 깊고 깊은 정의 세계는 주로 기의 세계에서의 일이다. 그 배후에 지극히 준엄한 리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된다. 어떤 사람이든 리만의 사람이거나 기만의 사람은 없다. 반드시 양자를 다 가지고 있다. 사람들이 모이면 그 모임의 분위기를 민감하게 알아차려 자기 안의 리 부분과 기 부분을 절묘하게 안배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한다. 한국인과 잘 지내기 위해선 리기의 스위치를 적시에 켜고 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인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그것과 거리가 생겼을 때 소란을 피우며 괴로워한다. 원래는 자신이 저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여러 가지 장애로 저 자리에 있을 수 없다. 저 자리에 앉고 싶다는 동경, 앉을 수 없다는 고통, 그것이다 한이다.
성리학이 한국인으로 하여금 리를 선호하게 만든 것이 아니라 리를 선호하는 한국인의 성향이 성리학에 열광하게 만든 것이다. 여러 요인이 있지만 한반도가 항상 심각한 위기 상황에 있었던 것이 한국인의 리 신앙을 강화시켰다. 균열이 심할수록 사람들은 ‘질서=리’를 추구하게 된다. 도덕적으로 더 우위에 있는 자리를 추구하여 상승하기 때문에 한국의 리 공간에선 ‘하지 않으면 안된다’의 난타전이 끊이지 않는다. 나의 위치를 상승시키기 위해 자기의 도덕성을 주장하고 타인의 무질서성을 공격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 사회에선 놈을 가두기 위해 타자를 공격하는 욕이라는 비난의 말들이 현란하게 난무한다.
한국인의 질서 신앙의 증거의 하나로 몸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신앙을 들 수 있다. 인간의 몸은 기다. 그러나 몸에는 질서가 있다. 이 질서의 항상성을 유지하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한국인은 열광적일 정도로 노력한다. 한국인의 몸관의 유기체성은 그 국토관에도 광하게 드러난다. 즉 한반도라는 국토 자체가 살아 있는 하나의 완벽한 생명체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풍수지리란 땅의 기 자체가 아니라 기의 흐름과 힘의 질서, 즉 리를 말한다는 것을 잊지말아야 한다.
리의 세계는 완벽하고 훌륭하지만 너무 완벽해서 재미가 없다. 리의 정연한 질서로부터 일탈해 리의 견고함을 잠시 한쪽으로 치워놓는 순간에 멋은 요동치며 번득인다. 하지만 멋은 어디까지나 어긋남 혹은 일탈이다. 구속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실은 견고하게 리에 달라붙어 매달려 있는 것이 멋의 본질이다. 객관적인 대상을 나타내는 모노와 감정의 주체를 나나타내는 아와레가 일치하는데에서 생기는 조화로운 섬세한 미적 정취의 세계를 이념화한 ‘모노노아와레’와는 차이가 있다. 모노노아와레에선 리를 거짓으로 보고 있다. 한국에서 천재로 불리는 자들은 어떤 존재들인가. 기의 흐름을 기가 막히게 아는 존재들이다. 이를 신들렸다고 하는데 자유분방과 질서가 완전히 합일된 경지를 말한다. 자신의 기를 극한까지 맑게 함으로써 리의 전체를청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신같은 존재가 바로 한국 사회의 천재다. 구조나 세계관으로서의 기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기존 정리의 아름다운 질서와 완벽하게 합일될 수 있는 재능이다.
조선 시대 지식인 이미지 유형은 양반=도덕+권력+부, 사대부=도덕+권력, 선비=도덕 등이다. 유교에선 도덕과 권력과 부는 이상적으로 삼위일체여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삼위일체는 동시에 달성되기 쉽지 않다. 야당인 사대부는 여당인 양반의 도덕을 공격한다. 이 공격이 멋지게 성공하면 양반 세력을 전복되고 사대부가 정권의 중추에 오르게 된다. 사대부는 쉽게 귀족화·보수화된다. 사대부의 양반화라고 해야 하나. 여기에 다시 새롭게 등장한 사대부는 신양반(과거의 사대부)을 같은 이유로 공격한다. 유교 정치는 이것의 반복이다. 바로 여기에 유교 정치의 역동성이 있다. 선비는 항상 핵심 권력의 밖에 몸을 두고 양반과 사대부의 도덕을 싸잡아서 공격한다. 그들은 정권을 잡을 생각은 없다. 그래서 그 도덕이 상처가 없고 흠집이 없는 것이다. 일본의 식민지 사학이나 북한의 마르크스주의사관은 이 당쟁을 조선 시대 최대의 부정적인 유산이라고 규정했다. 조선을 정체시킨 주요 원인이라는 것이다. 확실히 근대라는 시점에서 보면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완전히 성리학화되지 않은 조선을 어떻게 하면 급진적으로 성리학화시킬 것인가를 둘러싼 철학적 정쟁이기도 했다.
1960년대 이래 한국의 민주화운동·반독재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들의 사대부 지향과 선비 지향이라는 두 측면의 산물이다. 전자는 군인 정권에 대항하는 문의 정치권력 지향이고 후자는 독재부패 정권에 대한 도덕적 결벽 지향이다. 또 한국에선 근대화, 경제발전 등과 함께 상공업과 같이 종래에는 천시된 활동에 도덕성을 부여하는 작업이 행해져 왔다. 그것은 근대국가 건설, 일본 이기기, 세계화라는 민족주의적 정당성 또는 정통성이라는 리이다. 이같은 도덕적 정당성과 정통성을 부여받은 경제 종사자들은 자기를 사대부 지향적 인간으로 인식하고 정당화하면서 양심의 가책 없이 일에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삼았을 때 조선은 그때서야 국제 질서의 대전환을 뼈저리게 자각하고 망연자실에 빠졌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고 이전까지의 리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새로운 리에 의해 이 사회를 변혁시키려고 했다. 대일본제국의 리는 근대화·일본화였다. 그러나 일본은 어디까지나 놈으로 리의 담지자로서의 자격을 갖고 있지 않았다. 열등 민족에 의한 리의 강요는 조선의 민족적 자존심을 심히 손상시켜 항일운동·반일감정은 극도로 고양됐다. 무력으로 아시아를 침략하고 광적인 질신교(천황제)와 열등한 다신교(애니미즘)을 동시에 신봉하는 일본이 보편적인 신앙으로서의 리 신앙을 대체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한국은 역사를 중시하는가. 한국인은 당연히 긍정할 것이다. 확실히 한국인은 역사에 집착하고 첨예한 역사의식으로 몸을 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과거를 흠잡을 데 없을 정도로 도덕 지향적으로 재구축하고 춘추 필법에 의해 훼예포폄(毁譽褒貶)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유교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중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거부는 식민지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일절 인정하지 않고 주자학의 동기주의와 도덕 지향성을 갖고 조선의 근대화 배경에는 일본의 이익 극대화 의도가 숨겨져 있다며 평가절하하기 일쑤다. 역사적 사실은 소홀히 되고 동기와 도덕만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 보면 일본인은 역사를 중시하지 않지만 일본에서 보면 한국인도 역시 역사를 중시하지 않는 것이다.
<요약>
1.한국인들은 매우 도덕 지향적인데 이는 질서와 명분에 대한 추구를 바탕으로 한다.
2. 이러한 성향은 조선시대 지배이념인 성리학의 영향으로 보이며 리와 기 두 가지 키워드로 한국에 대해 분석을 하면 많은 면에서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해낼 수 있다.
3. 양반, 사대부 그리고 선비를 중심으로 한 지배층 명분 싸움은 오늘날에도 종종 반복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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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오구라 기조)-도덕 지향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작성자 yo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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