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쇼와 육군 - 제2차 세계대전을 주도한 일본 제국주의의 몸통
호사카 마사야스 (지은이),정선태 (옮긴이)글항아리2016-11-07 원제 : 昭和陸軍の硏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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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 페이지수 1136쪽
책소개
쇼와 천황이 재위하던 시대,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제국 육군을 다루고 있다. 거대한 '병리 현상'이라고밖에 달리 분석할 길이 없던 전쟁의 숱한 참상은 모두 '쇼와 육군'이라는 몸통을 관통해 벌어진 일이다. 그런 만큼 일본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무슨 까닭에 일본이 이처럼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가 철저히 일본 내부자의 시각에서, 그것도 오로지 육군만을 줄기 삼아 글을 쓴 이유다.
우선 건군建軍에서 시작해 육군의 전사戰史를 다루면서 그 최상위 지도부를 파헤친다.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대전에서 보였던 일본군의 병리적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이어붙여 나간다. 이런 역사가 쓰일 수 있었던 것은 A급 전범들과 장교,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참전인의 일기와 전후 증언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이 책이 처음 집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경. 그 시간대를 전후하여 수많은 관계자 인터뷰가 이뤄졌는데, 논픽션 작가답게, 호사카 마사야스는 메이지 말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 전후 켜켜이 쌓여온 시간들, 그리고 1990년경 일본 각지에서 참전 병사들이 남긴 회한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간의 격차와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전쟁을 기획한 인물들과 그것이 만들어낸 잔재들을 하나씩 끄집어내며, 그것이 어떻게 기억으로 퇴화되지 않고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참전한 이들은 쉬 열리지 않는 입을 열었다. 인터뷰 당시 이미 80~90세의 노인이었던 참전인들은 전쟁에서 저지르고 당했던 일만큼은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러한 증언들이 하나씩 모여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
목차
머리말
제1부 쇼와 육군의 전사: 건군에서 다이쇼 말기까지
제2부 쇼와 육군의 흥망
제1장 장쭤린 폭살 사건과 관동군의 음모
제2장 관동군 참모 이시와라 간지와 만주사변
제3장 만주국 건국과 육군의 착오
제4장 황도파와 통제파: 2·26 사건의 두 얼굴
제5장 2·26 사건 판결은 어떻게 유도되었는가
제6장 중국 국민당의 눈으로 본 ‘항일 전쟁’
제7장 팔로군에 가담한 일본 병사의 중일전쟁
제8장 일본 병사는 왜 만행으로 치달았는가
제9장 장고봉 사건과 일본인 포로의 인생
제10장 노몬한 사건, 어처구니없는 군사 행동
제11장 트라우트만 공작의 놀라운 이면
제12장 왕자오밍 추대 공작과 그 배경
제13장 일독이추축체제를 향한 무모한 길
제14장 위험한 도박, 남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주
제15장 미일 수뇌 회담은 왜 결렬되었는가
제16장 「헐 노트」가 도착한 날의 육군성
제17장 「쇼와 천황 독백록」에 나타난 도조 히데키
제18장 워싱턴 해군 주재무관의 회상
제19장 진주만 공격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제20장 싱가포르 공략과 그 뒤틀린 그림자
제21장 어느 사병이 체험한 전쟁의 내실
제22장 과달카날, 병사들의 통곡
제23장 과달카날 전투에 참가한 미일 병사들의 현재
제24장 선박포병 제2연대의 끝나지 않은 비극
제25장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전사와 육해군의 대립
제26장 정보 없는 전쟁 지도의 무책임 체제
제27장 레이센 조종사들의 싸움
제28장 제25군 적성국인 억류소의 나날
제29장 뉴기니 전선의 절망과 비극
제30장 참모본부 참모들의 체질과 그 결함
제31장 아직 기록되지 못한 전장 두 곳
제32장 육군대신이 참모총장까지 겸임하는 사태
제33장 사이판 함락과 병사들의 절규
제34장 임팔 작전, 고위급 지휘관과 생존 병사들의 분노
제35장 정보가 경시된 필리핀 결전의 내막
제36장 특공대원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제37장 오키나와 전투의 결전 태세와 그 의미
제38장 본토 결전과 최고전쟁지도회의
제39장 비밀리에 진행된 원자폭탄 개발 계획
제40장 시종무관의 일기가 들려주는 패전 전후
제41장 구소련의 자료가 말하는 ‘사실’의 내용
제42장 홋카이도 점령인가, 시베리아 억류인가
제43장 다이쇼 세대 예비역 장교의 눈에 비친 쇼와 육군
제44장 최후의 육군대신이 남긴 수기
제3부 쇼와 육군이 전후사회에 드리운 그림자
제45장 패전 시에 지도자는 어떻게 처신했는가
제46장 참모들의 쇼와 육군 재건 움직임
제47장 스가모 형무소의 군사 지도자들
제48장 전우회라는 조직과 쇼와 육군의 체질
제49장 이상한 군인은급 조작
제50장 시베리아 억류자 보상 요구의 단면
제51장 남겨진 ‘전후 보상’ 문제를 주시하며
후기
문고판 후기
참고문헌
취재 대상 명단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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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36 만주국이 건국되면서 쇼와 육군의 군인들은 군사력으로 새로운 국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그 착각을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이 메이지 시기의 군인들과는 근본부터 다른 심리를 낳았다. 결국 군사는 국가의 위신과 안녕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타국을 식민지화하는 유력한 무기라고 믿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대상으로 줄곧 중국을 선택했던 셈이다. 접기
P. 478 “마을을 불태운 다음 사살한 사람을 끌어내려고 할 때였습니다. 네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가 울면서 우리 쪽으로 달려왔습니다. 울면서 곧장 다가오더군요. 장교가 ‘처리하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그 여자아이를 처리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그런 일이 몇 번이나 있었습니다.”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대략 60년 전에 일어난 일을 지금도 꿈에서 보곤 한다. (…) 딸이 자식을 데리고 친정에 놀러 왔을 때 도저히 손자를 안을 수 없었다. 염주를 늘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기억이 되살아나면 전차 안에서도 염주를 쥐고 묵도를 하곤 했다.
“나의 유일한 구원은 전우회에 참석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곳이 전우회입니다. 한번은 장교가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엘리트입니다. 그에게 그때의 명령을 기억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일이 있었나요?’라고 하더군요. 나는 명령한 자는 잊어도 그것을 실행한 자는 평생 잊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접기
P. 1103~1104 하지만 일련의 전쟁을 치른 일본사회의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그 일본 병사와 싸운 중국 병사나 미국 병사 또는 러시아 병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많은 증언을 들어왔다. 어림잡아 1년에 4000명이 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한 번이라도 말을 나눈 사람까지 합치면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과 만나면서 나는 전쟁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어리석은 짓임에도 그런 정책을 추진한 것은 왜인가”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할 것인가” 등등의 질문이 꼬리를 물기도 했다. 병사들은 너나없이 마음속에 상처를 입고 괴로워했다. 그러나 대본영에서 호의호식하며 작전을 가지고 노는 참모들은 그들의 괴로움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전쟁에서 패한 것은 전장 장병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낙차는 전쟁이라는 정책을 선택하는 나라의 기본적인 모순이다. 접기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은 국제연합군과 공산군의 전투로 나아갔다. 그런데 국제연합군(실질적으로는 미군이 중심이었다)은 한반도와 압록강 근처 중국의 지도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지형도 잘 몰랐다. 어떤 작전이 효과적일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작전의 밑그림을 그린 이가 바로 이 지역을 잘 알고 있던 대본영의 옛 참모들이었다는 얘기다. 접기 - 송영섭
종족주의 - Sungjoo
저자 및 역자소개
호사카 마사야스 (保阪正康)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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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급 전범 등 일본 군부의 주요 인사 4000여 명을 독자적으로 취재하고 15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다치바나 다카시, 사노 신이치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논픽션 저널리스트로 꼽힌다. 일본 근대사, 특히 쇼와사昭和史의 실증적 연구에 뜻을 두고, 각종 사건에 관계된 이들을 취재하면서 역사 속에 묻힌 사건과 인물에 관한 르포르타주를 썼다. 1939년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서 태어나 도시샤대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편집자로 일하다가 33세 때 논픽션 작가로 홀로서기를 시도해 그의 출세작이 된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가 나오기까지 6년간 방송작가, 카피라이터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자성自省사관’이란 표현에서도 드러나듯, 그의 저작은 일본 사회의 치부를 정면으로 파고들어간다. 거의 해마다 되풀이되는 우익 세력의 군국주의적인 망언이 나올 때면 이를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철저히 비판하는 그의 코멘트가 유력 언론에 소개되는 등, 그는 일본 현대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개인 잡지『쇼와사 강좌』를 중심으로 한 일련의 쇼와사 연구로 기쿠치 간 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작으로『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지치부노미야』『요시다 시게루라는 역설』『쇼와사의 일곱 가지 수수께끼』『쇼와: 전쟁과 천황과 미시마 유키오』『저 전쟁은 무엇이었는가』『정치가와 회상록』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쇼와 육군>,<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 총 23종 (모두보기)
정선태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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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국민대학교 글로벌 인문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개화기 신문 논설의 서사 수용 양상》, 《심연을 탐사하는 고래의 눈: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과 그 외부》, 《근대의 어둠을 응시하는 고양이의 시선: 번역·문학·사상》,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 등이 있으며, 역서는 《동양적 근대의 창출: 루쉰과 소세키》, 《일본 문학의 근대와 반근대》, 《가네코 후미코: 식민지 조선을 사랑한 일본 제국의 아나키스트》, 《일본어의 근대》, 《도조 히데키와 천황의 시대》, 《기타 잇키》, 《쇼와 육군》, 《영속패전론》(공역), 《속국 민주주의론》 등이 있다. 접기
최근작 : <지배의 논리 경계의 사상>,<백석 번역시 선집>,<1898>1898> … 총 37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쇼와 연구의 일인자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연구 결정판
500여 명의 증언과 방대한 자료로 밝히는 전후사 연구의 집대성!
어째서 일본은 전 세계를 전화戰火로 몰아넣었는가?
“쇼와 육군은 결국 허술하게 쌓아올린 목재 더미였습니다.
그 광기에 이제까지 일본의 모든 역사와 제도가 함께 무너졌습니다.”
이 책은 쇼와 천황이 재위하던 시대, 즉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일본제국 육군을 다루고 있다. 거대한 ‘병리 현상’이라고밖에 달리 분석할 길이 없는 전쟁의 숱한 참상은 모두 ‘쇼와 육군’이라는 몸통을 관통해 벌어진 일이다. 그런 만큼 일본 육군을 연구하지 않으면 무슨 까닭에 일본이 이처럼 무모한 전쟁으로 치달았는지를 이해하기 힘들다. 이 책의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가 철저히 일본 내부자의 시각에서, 그것도 육군만을 줄기 삼아 글을 쓴 이유다. 우선 건군建軍에서부터 육군의 전사戰史를 다루면서 그 최상위 지도부를 파헤친다. 이것을 바탕으로 세계대전에서 보였던 일본군의 병리적 현상들을 구체적으로 이어붙여 나간다. 이런 역사가 쓰일 수 있었던 것은 저자가 일본 군부의 A급 전범들과 장교, 일반 병사뿐 아니라 중국과 대만의 군인, 외교관, 정치인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관계자의 증언과 일기, 기록 등을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이 책이 집필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경. 그때를 전후하여 수많은 관계자 인터뷰가 이뤄졌는데, 논픽션 작가답게, 호사카 마사야스는 메이지 말기에서부터 제2차 세계대전의 현장, 전후 쌓여온 시간들, 그리고 1990년경 일본 각지에서 참전 병사들이 남긴 회한에 이르기까지 숱한 시간 격차와 이질적인 공간 속에서 전쟁의 잔재를 하나씩 끄집어내며, 그것이 어떻게 기억으로 퇴화되지 않고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가를 드러낸다. 참전한 이들은 쉬 열리지 않는 입을 열었다. 인터뷰 당시 이미 70~80세의 노인이었던 참전인들은 전장에서 저지르고 당했던 일만큼은 또렷이 기억해냈다. 그리고 그러한 증언들이 하나씩 모여 이 책의 토대가 되었다.
쇼와 육군의 체질이라는 것
청년 장교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가 시베리아에서 5년간 포로생활, 중국으로 이송돼 전범재판을 받고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된 바 있는 우노 신타로. 전쟁 후 무역회사 회사원이 되어 처자식과 한가로운 생활을 하고 있는 그는 1945년 3월, 사사 신노스케 전 중장 휘하에서 후베이성 마을의 주민 90여 명을 살해하는 데 가담한 전력이 있다. 이들 부대는 또 난장 현 우안옌 부근에서는 부인, 어린이, 노인 등 20명을 잔혹하게 교살했다. 나아가 샹양 성 부근 왕자잉 촌에서는 주민 18명을 손바닥에 철사를 꿰어 줄줄이 묶은 다음 판청의 교회당 옆에서 한 사람도 남김없이 총검으로 찔러 죽였다. 샹양 시에서도 주민 30여 명을 철사로 묶은 다음 강으로 밀어넣었다. 그 가운데 후자오샹 등 5명은 물에서 빠져나왔지만, 저우광짜오 등 20여 명은 전부 익사했다. 더욱이 샹양 시에서는 부하가 부인을 강간하는 것을 방임하고 심지어는 윤간 끝에 죽임에 이르게 했다. 1990년 도쿄에서의 인터뷰를 하면서 이런 사실을 털어놓은 우노는 당시 자신이 중국에서 저지른 것은 학살이나 만행이 아니라 ‘나라를 위한’ 행위인 줄로만 알았다고 털어놓는다.
(저자) “일본군은 왜 중국 대륙에서 저런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까?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우노 신타로) “하나는 일본 육군의 제도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관학교 출신이 모든 것을 장악했고, 거기에 완벽할 정도로 위계질서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이 안에서 한 단계든 두 단계든 계급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눈에 띄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사관학교 출신은 정치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와 군사의 관계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체험에 입각해 말하자면, 신임 장교가 병사들 앞에서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중국인을 시험 삼아 베거나 고문을 가해 군인다운 게 뭔지를 보여줘야만 했습니다.”
쇼와 육군의 지도부에 속한 고위급 군인은 천황에 대한 충성심을 종종 ‘대선大善’과 ‘소선小善’으로 표현했다. 1882년 메이지 천황이 군에 하사한 「군인칙유」만 좇는 것은 ‘소선’이며, 천황을 위해서라 생각하고 계속해서 새로운 군사적 기정사실을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대선’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두서없는 논리에 감춰져 있는 독선적 주관주의로 지탱되었던 조직이 바로 쇼와 육군이다. 그리하여 부녀자와 노인, 소년, 유아를 반쯤은 장난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수단으로 살해할 만큼 망가졌던 쇼와 육군 지배하의 병사들 중 자신들의 퇴폐적인 경험을 고발하는 이가 많이 나오는 것은 “이 전쟁이 너무나 더러웠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육군 지도부에 속한 군인들은 대개 메이지 10년대(1877~1886) 중기부터 20년대 후기에 걸쳐 태어났다. 이들에겐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육군유년학교, 육군사관학교, 육군대학교 등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것이다. 정원이 50명인 육군대학의 졸업생이라는 것만 해도 이미 엘리트임을 인정받은 것인데, 그중 상위 10퍼센트는 군 지도부에 들어가 행정과 작전 계획을 담당했다. 문제는 성적지상주의의 기관들에서 우등생이었던 이들은 실전 체험이 드물었다. 더욱이 이 세대는 일본 육군 건군 이래의 양성 시스템, 정신적 규범, 전략·전술 지도가 낳은 군인이란 공통점도 가지고 있었다. 즉 근대 일본 부국강병 정책의 충실한 자식이었다. 여기서 태어난 인물들은 독창적인 식견이나 역사적인 선견지명을 지닌다기보다 주어진 틀 안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는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을 떠맡은 군사 지도자의 또 다른 공통점은 친독일, 반영미 사상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10년대에는 독일 육군이 일본에 초청되어 육군대학교에서 독일식 군사 교육과 정신 교육을 실시했다. 더욱이 육군유년학교에서는 독일어, 러시아어 등이 중심이 되고 영어 교육은 철저히 경시되었다. 나아가, 쇼와 육군의 군사 지도자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현저히 결여하고 있었다. 철학적·윤리적 측면에서 인간을 바라보지 않고 단지 전시 소모품으로만 간주하는 기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모토 군은 심신이 모두 불가사의할 정도로 유연하고 강인하며 굴신자재屈伸自在할 뿐만 아니라 결코 꺾이거나 부러지지 않는다. 지극히 소심하면서도 아주 대담하며, 세밀하게 생각하고 주도면밀하게 준비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 운운.”
이 글의 ‘아무렇지도 않게 단행한다’라는 표현에 쇼와 초년대 군인의 성격이 응축되어 있다. ‘대의(천황의 뜻)를 내세우면 무슨 짓을 해도 관계없다는 심정과 패턴이야말로 쇼와 육군과 그 후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것은 병사를 무기질無機質의 병기로 육성하는 데 결사적이었다는 것, 보급과 병참 사상을 가볍게 여기고 아무런 의미도 없이 병사들에게 옥쇄玉碎(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진다는 뜻으로, 충절이라는 명분 아래 죽음을 명령했던 것)를 명하고, 그것에 대한 자기반성도 없이 잇달아 그런 종류의 작전을 명한 것도 예로 들 수 있다.
특히 장교 중심으로 흘러간 것은 쇼와 육군의 체질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였다. 우노 신타로는 연대본부에 설치된 포로수용소의 소장을 겸한 바 있는데, 그는 이곳의 중국인 포로들이 죽어나갈 때 특별히 인간적인 감정은 들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만약 이러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영광스런 일본군 장교”가 아니라고까지 생각했다. 장교에게는 식사도 충분히 제공되었고 게다가 위안시설까지 있었다. 그곳에서 울적함을 풀었다. 반면 일반 병사에게는 조악한 식사에다 위안시설도 없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토벌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종종 농촌을 습격했다. 장교가 병사들의 강간을 묵인하고 약탈을 눈감아준 것도 그러한 일본군의 ‘장교 주도의 체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군 관료들은 하급 병사를 동원하는 데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했고, 오로지 서로를 감싸는 체질만을 드러냈다. 노몬한 사건을 지도하여 2만 명에 가까운 부하를 죽음으로 내몰고 전상자나 전병자로 만든 관동군 참모인 쓰지 마사노부나 주임참모 핫토리 다쿠시로는 얼마 지나지 않아 요직에 복귀했고, 태평양전쟁 개전 때에는 가장 과격한 개전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태평양전쟁 때도 과달카날에 과도한 병력을 투입하고 싱가포르에서 학살을 저지르는 등 그들은 어떠한 사태에 대해서든 책임을 지지 않고 전쟁의 과오를 계속해서 반복해갔다.
도조 히데키, 쇼와 육군 패망의 상징적 존재
쇼와 육군 붕괴의 원인이 된 태평양전쟁은 지도자의 체질이나 전략에 따라 수행되었다. 거기에는 붕괴하는 것이 당연한 조직 체계, 인간사상, 전쟁관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태평양전쟁이 벌어진 3년 9개월 중 2년 9개월 동안 수상, 육군상, 참모총장까지 겸하고서 전쟁을 지도한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는 이러한 공통점을 가장 잘 대표하고 있었다. 가령 저자 호사카 마사야스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의 법정을 묘사하며 당시 일본 지도부의 무능함을 독자들에게 알린다. 수석 검사 조지프 키넌은 「헐 노트」에 관한 일본의 입장을 확인하며 도조 히데키를 신문했다. 「헐 노트」는 1941년 11월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이 작성한, 일본의 제안에 대한 미국의 답변이었다. 사실상 일본이 중국과 인도차이나 등지를 점령하며 벌인 정치 공작을 중단할 것과 삼국동맹의 백지화를 주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아울러 「헐 노트」에는 교섭의 가능성도 포함하고 있었는데, 일본 측은 이를 묵인했다. 도리어 승산이 낮더라도 미국과의 전쟁에 돌입하여 메이지 시대 이래 육군 선배들이 중시해온 ‘의義’를 지켜야 한다는 강경 노선을 택하게 된다. 일본으로서는 「헐 노트」에 담긴 기본 방침을 무시하지 않고는 미국과 전쟁을 벌일 명분을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취재 중 입수한 ‘도조 일기’를 바탕으로 당시 일본을 움직인 도조 히데키의 생각을 최초로 공개한다. 도조는 “「헐 노트」가 전달되지 않았다면 전쟁에 돌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게 전부였다. 한마디로, 쇼와 육군은 미국에 대하여 처음부터 ‘객관적인 사실’을 분석한 것이 아니라 ‘주관적 관측’에 따라 대처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일본의 개전에 관해 쇼와 천황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당시 천황의 측근들은 구실을 만들어 천황의 면책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쇼와 천황 독백록」에 나타난 내용으로 미루어볼 때, 측근들은 도조를 비롯한 쇼와 육군의 지도자에게 전쟁의 책임을 모두 떠넘기려고 생각했던 듯하다. 재미난 것은 도조에 관한 양가적인 평가인데, 그 결과 ‘도조는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지만, 인사 관리나 헌병의 장악 등에서 서툴렀다’와 같은 표현이 등장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 가운데 하나로, 저자가 취재 과정에서 입수하여 처음 공개하는 ‘도조 일기’ 앞부분에 나타난 자계自戒를 꼽을 수 있다. 자계의 첫 번째 항은 “전쟁의 모든 책임 앞에 설 것. 특히 성상 폐하에게 책임을 돌리려는 데 대해서는 전력을 다하고, 또 다른 각료 및 다른 사람의 책임을 극력 경감하는 데 노력할 것”라고 쓰여 있다. 도조 히데키는 전후 도쿄전범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진다.
1억 명의 옥쇄
쇼와 육군의 ‘정신주의’에는 오직 천황을 위한 군대가 있었을 뿐으로, 일반 병사 개개인의 존재는 철저히 무시되었다.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 중 하나가 바로 전쟁 때 군대의 소모품이 되어버린 병사들의 실태(이는 일반 국민으로까지 확대된다), 그리고 그런 정책의 배후에 있던 육군의 ‘정신’을 다루는 것이다. 중국에서, 동남아시아에서, 오키나와에서 정치적 선택의 잘못된 지도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죽음’으로 내몰린 병사(국민)가 있다. 그 대척점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책임하고 비인도적인 작전을 펼친 군 관료의 실체가 있다. 그 대비되는 각각의 국면을 세밀히 살펴나가다보면 분노와 놀라움, 슬픔에 사로잡히게 된다. 특히 필사적으로 육탄 공격 작전을 펼치며, 가미카제 특공대뿐만 아니라 보병들에게 병기가 되어 스스로 산산이 부서지라고 명령했던 육군 지도부의 명령은 2차 대전 때 일본군 병사들을 거대한 참상 안으로 밀어넣었다.
가령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이 가장 끔찍하고 커다란 피해를 입었던 곳 중 하나인 과달카날 전투의 상황을 보자. 군사과장 사나다 조이치로는 전쟁 당시의 일들을 일기로 남겼는데, 그 기록을 보면 사나다는 이마무라 히토시 중장에게 “과달카날의 제17군을 마지막 한 사람까지 사라지도록 항전하게 한다는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고 있다. 이마무라는 “절대 반대”라고 말하고, ‘그런 것이 제일선에 알려지면 즉석에서 전원이 할복하고 말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화 내용을 보면 적어도 사나다의 마음속에는 과달카날 참전 병사들을 ‘옥쇄’시킬 방안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예는 수도 없이 이어진다.
미군은 대동아회의 전후부터 일본이 절대 국방권이라고 명명한 요충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43년 타라와에서는 일본군 4800명 가운데 20명을 제외하곤 전원 옥쇄했다. 도조가 참모총장에 취임한 뒤 작전참모에 의한 일본군의 작전은 더욱더 옥쇄형玉碎型으로 바뀌었다. 1944년 7월 5일 사이판 전투에서 제43사단 사령부는 “우리는 옥쇄함으로써 태평양의 방파제가 되고자 한다”는 내용의 전보를 대본영으로 보내고, 7월 7일 3000명의 생존 병사와 함께 옥쇄했다. 무기와 탄약은 남아 있지 않았고, 돌멩이를 갖고 싸운 병사도 있었다고 한다. 몇몇 병사는 산속에 틀어박혀 1945년 12월까지 게릴라전을 펼쳤다. 사이판 전투에서는 일본 병사 약 4만1000명이 전사했고, 2만5000명의 일본인 주민 가운데 1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이판 섬이 미군에 제압당함으로써 ‘절대국방권’은 무너졌고, 실제로 서태평양은 모두 미군의 손에 넘어갔다. 그 후 일본군은 일본 본토로 쫓기는데, 각지에서 사이판에서와 같은 옥쇄전이 벌어진다. 그것은 시체를 겹겹이 쌓아올려 본토 공격을 조금이라도 지연시키려는 것이었고, 군 관료들의 책임이 밝혀지는 날을 하루하루 미루는 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일본군이 오로지 전쟁 지도라는 길을 일직선으로 걸었기 때문이다.
이오 섬은 도쿄에서 남쪽으로 1250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섬이다. 보급도 끊어지고 장비도 부족했던 일본군은 우세한 물량을 앞세운 미군에 압도되어 2만1000명의 수비대가 고작 2천여 명을 남긴 채 궤멸하고 말았다. 약 한 달간 치러진 혹독한 전투로 인해 이오 섬은 그야말로 ‘옥쇄의 섬’으로서 태평양전쟁사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그 무렵 몸이 약했기 때문에 이오 섬으로 가는 멤버에서 제외되었습니다만, 옥쇄한 동료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생환한 사람들이 이오 섬으로 유골을 모으러 갔는데, 캄캄한 동굴에 유골이 딱 하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병사는 부대가 전멸하고 난 후 혼자 동굴에 틀어박혀 저항하고 있었던 듯합니다. 돌을 쌓아 방어벽을 만든 다음 그 뒤에 숨어 있다가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채 아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45년 3월 17일 전투의 막바지에는 전원이 옥쇄전법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살아남은 몇몇 병사에게 집합 장소와 시간이 통고되었다. 더 이상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병사는 청산가리가 든 주사를 맞고 죽어갔다. 굶어 죽은 병사 중에는 사망한 미군 병사의 군복을 입고 미군 속에 섞여서 식량을 얻으려 한 이도 있었다. 이오 섬의 전투는 그야말로 ‘지옥도’ 그 자체였다. 모든 부대가 “전원 적진으로 온몸을 던져 돌격을 결행하여 옥쇄”하거나 “총반격에 참가하여 옥쇄”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옥쇄는 물론 지구전을 도모하는 작전을 펼친다는 대본영의 명령을 충실하게 따른 결과였다.
그리하여 이오 섬 전투에서 살아남은 병사들은 좀처럼 당시 상황에 대해 입을 떼려 하지 않는다.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에 감춰져 있는 생각은 후세대에 속한 사람으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심연과도 같은 것이다.
1945년 8월에는 살아남은 1만여 명이 옥쇄 작전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을 때 종전 연락이 왔다. 남아 있는 무기는 기관총 몇 정, 소총 9500자루였고, 탄약은 총 한 자루당 20발 정도, 포는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들
일본군이 아시아 전역에서 벌인 전쟁 중의 야만스런 행위들은 아직 그 추산이 집계되기 어려울 만큼 광범위하게 자행된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사안들이다. 이 책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참상을 고백하고 있는 참전 장교나 사병들은 전쟁 당시에는 거리낌이 없었고, 전후에도 일상으로 돌아와 평범한 삶을 이어가다가, 은퇴 후 노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의 만행을 털어놓으며 죄책감에 시달리는 이들이 많다. 중일전쟁 때의 자기 경험을 털어놓은 우노 신타로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중국 대륙에 40만 규모의 대군대를 보냈다. 이때 파송된 병사 중에는 결혼하여 아내가 있는 자가 많았다. 우노의 말에 따르면, 아내가 있는 자들은 독신인 병사보다 성적 만행에 적극적이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이윽고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대륙의 정예 부대는 남방으로 파송되었고, 병사들의 질은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이와 함께 만행에 익숙해졌고 너나없이 즐기는 분위기였다.
병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고참병 중에는 살인의 프로, 도둑질의 프로, 방화의 프로를 자칭하는 자가 나타났고, 그것을 제지하는 군의 규율은 이미 기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들 만행은 평상시라면 광기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례가 많다.
예를 들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군의관이 다음 전임지가 결정되었다면서 제39사단 제232연대 연대본부의 포로수용소장 겸 정보장교인 우노에게 온다. “오늘밤 한잔할까요?”라며 유혹한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노는 알고 있다. 해골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이튿날 항일적 태도를 보인다는 이유로 포로 한 명이 참살된다. 머리를 자른다. 그것을 햇빛에 말린다. 중국인 포로에게 안면의 살을 벗겨내라고 한다. 물론 포로는 울면서 이 일을 한다. 그런 다음 며칠 동안 말렸다가 다시 포로에게 두골을 닦아 윤을 내라고 한다. 그 해골을 상자에 넣어 선물이라며 군의관의 짐 속에 넣는다. 이 해골은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 빛이 난다. 인燐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헤이세이 시대에 들어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우노는 당시 군의관이었던 사람과 45년 만에 만났다. “그것은 일본에 가지고 돌아와 어떻게 했습니까”라고 묻자, 그 군의관(이때는 개업의)은 “진료실에 진열되어 있지요”라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대답했다. 그런 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서도 45년 동안 의료활동을 이어오고 있다니, 우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이 책에 던지는 몇 가지 질문
이 책은 철저히 일본 제국 육군이 저지른 오류를 밝히기 위해 집필된 책이기 때문에 일본 내 우익 세력들로부터는 ‘자학사관’이라는 딱지가 붙기도 했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의 역사관을 ‘자성自省사관’이라 하며, 일본이 잘못된 역사를 직시해 다시는 되풀이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에서 드러내는 전국전우회연합회 소속 참전 병사들의 증언은 특히 참전인들의 고통도 묻어 있지만 그들의 자성이 묻어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들은 지금도 전장에서 사망한 동료 군인들의 돌아오지 못한 유골을 수습하기 위해 유골수집단을 꾸려 필리핀 등지로 떠나곤 한다. 만주사변 이후 패전까지 일본에서 전화로 사망한 사람은 5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당시 일본 국민 수 대비 6퍼센트가 넘는 수치다. 저자는 지역별 전사자 수, 부대별 생환자 수를 분석하면서 일본이 자국의 국민과 병사들을 끝까지 챙기지 않았음을 고발한다. 그리고 이후 치러진 전범 재판 과정을 공개하면서 전쟁을 망쳐놓은 고위급 군인들이 책임을 피하려 한 눈꼴사나운 언동을 그려간다. 게다가 패전 직후에는 옛 대본영 참모들이 모여 쇼와 육군을 재건할 움직임마저 보이기도 했다. 쇼와 육군이 소멸한 뒤, 그것을 지탱한 의식이나 행동의 핵심도 과연 진정으로 극복했는가? 호사카 마사야스는 『쇼와 육군』이라는 전사戰史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본영 참모의 자화자찬에 가까운 전쟁사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살아남은 병사들이 어렵사리 들려주는 괴로움의 목소리를 바탕으로 전사를 다시 쓸 것인가? 나는 이 물음에 답하는 것이 나에게 부여된 역할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듣고 쓰기’가 없었다면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교훈이다. 그러한 교훈을 얻고서 나는 정치적·사상적 측면에서 쇼와 전기 일련의 전쟁을 분석하는 것이 잘못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그러한 시점도 포함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밝혀두고 싶다.
이 책은 또한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좀 다른 대안을 내놓고자 한다. 다만 그러한 시각은 여전히 피해 당사국이나 피해 여성들의 입장과 일치하진 않는다. 이 현안이 단순히 현세대에서 다음 세대에게 빚지지 않기 위해 쉽게 화해하기 힘든 복합적인 면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접기
북플 bookple
이 책을 읽고 별 다섯개를 하지 않으면 저자에 대한 결례다. 내가 그 시대, 그 장소에 있었다면 나도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내자리는 버마 정글 어딘가..태평양 이오섬 어느 동굴의 백골로 세상과 이별했을것이다..그자리에 없었던 내가 얼마나 행운인지..간발의 차로 행운을 쥔나는 이 자리에서 안
군자란 2017-02-14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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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열심히 읽고 있는데 한국 근현대사와 쇼와육군이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알게 됐다.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필독서다.
파블로네루다 2016-09-27 공감 (6)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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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왜 쇼와육군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하는 이유를 느끼게 해준다.
꿈꾸는사나이 2016-09-16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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愛憎의 시각으로 책을 읽다
쌍화탕 2018-08-0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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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육군의 실체
1000페이지가 넘고 하드카피로 되어 있어 출,퇴근시 읽기가 불편한 이책을 고른 이유가 있다.
현재 한국군의 뿌리가 여기(쇼와육군)에 있기 때문이다.내 생각에 현재의 한국군의 80%는 일본육군의 모습이고,20%가 미군의 모습을 짬뽕해 놓았다 생각한다.나역시 높은분들이 그렇게나 신성(?)하다는 국방의 의무를 육군만기전역으로 다했고,다음달이면 최전방으로 입대하는 아들이 있기에 더더욱 현재 한국군의 원형이 된 "쇼와육군"이 관심을 끌었다.
한국현대사를 읽다보면 제주4,3항쟁,여순반란사건,지리산토벌,한국전쟁시 벌어졌던 무고한 양민학살등을 보며,어찌 자국군대가 자국국민에게 "빨갱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을 당연시 할수있단말인가?라고 기가찬 일이 있었다.심지어 여순반란사건때 백두산호랑이라 불린 김종원(대령)이란 놈은 일본도를 차고 포로들의 목을 치는걸 자랑삼아 했던 놈이고 군에서도 높이 추앙받던 놈이다.이놈은 만주 관동군에서 공비토벌(상당수 독립운동세력)이란 이름으로 마을을 불태우고 민간인 학살을 당연시 여겼던 일본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한것뿐이다.이렇게 일본군의 하급장교와 부사관들이 해방뒤 남한에서 육군의 중추세력이 되었기에 그동안 한국군의 고질적인 병폐가 병영문화에 그대로 남았던 것이다.
일본육군은 아시아에서 근대화를 가장 먼저 이룬후 청,일전쟁을 기점으로 군사력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후 서양세력마저 눌렀다는 자만심으로 거칠것이 없어졌다.엘리트위주의 군사교육으로 군사병기로만 키워져 일반상식이 결여된 군인들이 권력을 잡아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중국으로 동남아시아로 미국진주만으로 폭주해 나간것이다.
병사들을 하나의 전장의 소모품으로 여기는 장교엘리트주의,병참과 보급을 무시하고 정신력만을 강요하는 정신력 우선주의,현장의 의견을 제대로 참고하지 않고 대본영 책상머리에 앉아 전장의 구렁텅이로 수많은 젊음을 몰아넣은 탁상공론주의.전과를 부풀리고 사태의 진상을 제대로 알리지 않는 비밀주의..,"국뻥부"라 불리는 현재 한국군의 모습과 대부분 일치한다.
어렸을적(박정희시대에 초등학교 다님) "육탄십용사"니"특공대"니 하면 엄청 용감한 군인의 모습으로 알았다.이게 다 생명을 경시한 일본군의 습속에서 나온것을.무기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말도 안돼는 짓을 강요한것다.탱크에 수류탄을 들고 뛰어든다든지."옥쇄"라는 명목으로 적군을 향해 무조건 뛰어나가는 자살공격.고지를 탈환한다고 몸에 폭탄을 두르고 뛰어드는것이 당연하고 일상화된 군대는 정상이 아닌거다.적에게 "항복을 하느니 자살하라"는것도 말도 안돼는 명령이다.그리고 그렇게 죽어가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나? 하나의 소모품이 된것을..,.조작된 신화인 "천황"과 정치군인들의 전쟁놀음에 바쳐진 하나의 전쟁도구인것을..,
"군사쿠테타""하나회"와 같은 군내파벌들도 일본육군에서 있던 나쁜 병폐들이다.그것역시 한국군은 그대로 받아들였고 일본육군의 쿠테타를 모델로 군사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장기독재군사병영국가를 건설했었고,그 향수를 못잊어하던 아스팔트보수는 그딸까지도 대통령으로 추대했으나 "머저리"에 가까운 "공감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멍청이였다는것이 증명되고 있다.
일제에서 해방된지 70년이 지나도록 이사회에 남아있는 일제잔재들이 청산되지 못하고 있는 남한사회는 특히 "북한"이라는 가상적국을 빌미로 기생해온 한국군은 일본군대의 적폐와 병폐를 거울삼아 민주사회에 걸맞는 군대로 개혁되어야 한다.
이책의 저자는 전우회를 통해 2차세계대전당시 전쟁에 참여한 군인들을 인터뷰하고 진실을 알리기 우해 또한 후세들이 이런 참상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하기위해 기록을 남겼다.
과거의 역사를 통해 교훈을 얻고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고 준비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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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2017-02-11 공감(6)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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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쇼와 육군
구 황군시절 일본 육군의 모순점이 일본인 저자의 글로 속속들이 알 수 있었다. 저런 군대로 잘도 전쟁을 벌여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국가에서 문민통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할 수 있었다. 세삼 제복 군인들의 최종 커리어가 국방부 장관인 우리 나라의 현실이 우려되기도 하였다.
장님버드나무 2017-01-22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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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하라 료지
게이오대 경제학부 학생. 1943. 12월 입영, 1945. 5. 11. 육군특별공격대원으로서 오키나와 가데나만에서 미국 기동부대에 돌진. 전사 22세
출격하기 전 5. 10. 저녁 무렵 소감 출격 전야에 쓰다
나 역시 이러한 작전을 행하는 국가가 전쟁에서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이든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조직이 오래 지속될 리가 없다.....
내일은 자유주의자 한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그의 뒷모습은 쓸쓸하겠지만 마음은 만족감으로 가득합니다.
1945년 4월 우에하라는 제56신부대의특공조종사가 되었다. 그 사이에 어떤사연이 있었는지 유족도 지금까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제11연성비행대에 속한 조종사들이 강당에 모였을때 "특공작전 지원자는 일보 앞으로"라는 지휘관의 말을 들었던 듯하다. 겉으로는 지원에 의해 특공작전 조종사를 뽑는모양새였지만, 실제로 지원하지 않는 자는 비겁한 놈으로 취급받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우에하라는 그 후 어떤친구에게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고 울음을 삼키면서" 앞으로 나섰노라고 몰래 털어 놓았다..제56신부대는 11명의 학도병 조종사로 편성되었다. 주로 와세다대와 게이오대 그리고 동경대에 다니던 학도병들이었다고 한다.
우에하라가 남긴 노트에서 연습기를 사용하여 어느정도의 훈련을 했는지 누계
95연습기 42.09시간, 99공중연습기 1.35시간, 2식비행기 25.59시간, 99군사연습기30시간
3식연습기 6.19시간....
우에하라가 탄 특공기(3식 전투기)로는 고작 6시간 남짓 밖에 훈련을 받지 않았다...
연습은 오로지 이륙과 착륙뿐....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살아야하는지 하는 고민은 행복한 고민이다. 그럴수 있는 능력이 되니 그런 고민을 하지 않을까?
국가의 폭력앞에 누가 감히 아니라고 나설수 있을지....나 역시 30년전 해병의 기억이 눈에 선하다....두번다시 하고 싶지 않은 악몽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내가 너무 비겁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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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란 2017-02-15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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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국가 일본..
'전후'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일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본격적으로 '제국 일본'이 치러냈던 전쟁의 실체-전쟁의 구조, 그리고 실제 전쟁을 치러냈던 사람들의 경험-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딘가에 썼던 것처럼..
메이지 이래 일본이라는 국가는 매 10년마다 전쟁을 치르면서, 사회체제를 바꿔갔다는 점에서..
근대 일본의 정수를 이해하는 중요한 하나의 틀이 '전쟁국가'라는 점은 분명하다..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이 그런 틀을 만들어내는데 중요한 참고도서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런 책들이 계속해서 발간되고, 문고판까지 만들어지는 것이야말로..
일본적 교양주의가 아직 살아 있다는 뜻일텐데..
실제로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장르의 책인 것은 분명하다..
전문 역사가의 학문적 저작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사회에 유행하는 일련의 참을 수 없이 가벼운 '교양' 시리즈와는 격 자체가 다른..
굉장히 치밀하고 깊이 있는 논픽션, 르포 장르라고 해야 할 듯한데..
사실, 이런 장르의 책이 나오기 위해서는..
이런 책을 읽어낼 수 있는 일정 수의 독서대중..
그리고 이런 책을 기획하고 출판할 수 있는 견실한 출판자본이 존재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는 어느 것 하나 존재하지 않으니, 이런 책이 나오기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 같다..
하긴 일본 사회 역시 신간에서 이런 책들을 발견하는 건 점점 힘들어지고 있으니..
교양주의의 몰락은 공통적인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이 책의 장점은..
쇼와 욱군이라는 15년전쟁 혹은 아시아-태평양전쟁을 주도했던 한 집단의 내부를 최고 지휘층(작전참모를 포함하여)부터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인물들과 사건들을 통해 생생하게 입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있다..
특히 위로부터의 시점이 아닌, 실제 전장을 경험했던 일반 병사들의 시점에서,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왜 일본 사회가 그러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는가를 여러 사례들을 검토하면서 집요하게 되묻는 그의 자세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물론 아주 깊이 있는 이론적 분석이 제시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그것은 이 책의 성격에도 맞지 않고, 또 저자의 의도도 아니었을 것이다..마루야마 마사오가 무책임의 구조라고 한 큐에 정리해버릴 이야기를 저자는 계속해서 자신이 발굴해낸 여러 텍스트들, 그리고 여러 증언자들을 통해 검증해낸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마루야마와 같은 엘리트는 지나쳐버리는 당대 일본 사회의 많은 결들이 세세하게 복원된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그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이 시대에 정통한 독자라면, 굳이 처음부터 읽을 필요 없이, 관심이 가는 사건이나 인물부터 골라 읽어도 무방할 듯.. 모든 장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몇몇 장들은 논픽션의 정수를 보여줄 정도로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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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쥐스뜨 2019-02-0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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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육군, 승자의 기록에 편승한 가벼움을 되짚다.
#쇼와육군 #글항아리 #북스타그램 #책스타그램 #일본 #전쟁 #쇼와 #육군 #위안부 #박유하 #제국
저명한 르포르타주 작가이자 '자성사관'의 주창자인 저자는 일본 제국주의시대, 그중에서도 1931년 만주사변 이후 '태평양전쟁' 패전에 이르기까지 일본을 견인한 세력이 누구이며 어떤 관점과 목적을 갖고 있었는지에 천착한다. 그저 '일본이 나빴다'거나 도조히데키 개새기,라는 두루뭉술한 선언으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으며, 여전히 피가 흐르는 동시대사를 갈무리된 역사로 넘기기 위해서도 구체적이고 자세한 검증이 필요하단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일본의 정치와 전쟁을 줄곧 주도해온 세력을 육군, 그중에서도 대본영 육군부(참모본부)의 엘리트 군관료집단이라 본다. 군대에 대한 통수권이 국민에 대한 통치권보다 우위를 점한 채 전혀 간섭받거나 통제되지 않던 시대. 육군은 오로지 천황의 재가에 따라 움직이는 황군이라지만, 천황이 허울뿐인 총괄을 했다는 판단을 뒷받침하는 정변과 사건들이 풍부하게 등장한다.
이렇게 통제되지 않은 육군 엘리트들은 군대조직의 본능에 따라 계속해서 자존 자위를 말하며, 그에 따른 안보선은 넓어지기만 할 뿐이다. 내지를 보전하기 위한 중국 침략, 중국을 보전하기 위한 러시아 견제 혹은 동남아 침략, 급기야 미국에 대한 침략으로. 그렇지만 빈약한 정보와 준비되지 않은 병참, 무엇보다 국가총동원체제로 치뤄지는 전쟁에서의 절대적 열세를 극복하기엔 정신력과 충성심만으로는 중과부적.
책을 덮으며, 그간 우리는 승자의 기록에 손쉽게 편승하고 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해방이라는 혜택을 입은 이해당사자로서(얼마나 다행인가, 일본이 폭주하여 스스로 자멸했단 건!), 엄밀하고 냉정한 분석을 필요로 한 적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41년말 진주만폭격으로 시작된 미일전쟁, 그리고 그전의 독이일 삼국동맹과 연합국간 다툼을 두고 단순히 파시즘과 반파시즘의 대결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일본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나 제국주의 시대였고, 일본은 뒤늦게 시장쟁탈전쟁에 가담한 국가 중의 하나였을 뿐. 미국이 주창한 민족자결과 자유민주의 원칙들은 기실 타국의 대외정책을 견제하고 자국의 통상이익을 수호하는 국익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정의가 승리한다는 증거로 뒤늦게 제출되었지 않나.
책의 한계 하나, 저자는 대동아공영권이란 이데올로기가 허위적이고 가식적으로 쓰였음을 날카롭게 비판하지만, 그 가치 자체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거나 혹은 호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아시아와 서양을 대비시키며, 식민지 지배자와 해방자를 대비시키는 구도는 너무 단순하고 나이브하지 않나. 게다가 동남아 전선에 버려진 수천의 무명용사들이 각국의 해방전쟁에 자의로 가담했음을 근거로 대동아공영권의 가치가 살아있음을 말하는 건 비약이다. 그들의 의도와 맥락에 대한 분석없는 점프의 결과는 보편적인 인류애나 가치관이 아닌, 인종과 지역을 근거로 한 대동아공영권 아이디어 자체가 복권될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두번째 한계를 굳이 더하자면, 천백페이지에 이르는 이 책은 월간지에 연재된 원고를 근간으로 쓰여지다보니 압축적이지 못하다. 관련자에 대한 심층취재의 생생함을 더하려 했다 해도 겹치는 내용과 장면이 많아, 예컨대 위안부나 전후배상 문제에 대해 짧게 언급하고 넘어간 부분이 아쉽다. 전시는 평시와는 다른 가치관과 결정을 필요로 하며 또 당대는 지금과 다른 감각으로 위안부 정책 등이 수행되었다, 는 다소 논쟁적일 수 있는 부분들이 뭉뚱그려졌다. 저자 말대로 이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철저한 연구조사가 선행되어야 그에 따른 진정한 반성과 사죄가 가능한 부분일 텐데, 1991년에 씌여진 이 책의 문제의식은 이후 그다지 계승되지 못한 듯 하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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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tzsche 2018-03-21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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