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27

알라딘: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알라딘: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한상일 (지은이)까치2015-04-30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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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양장본460쪽160*232mm885gISBN : 9788972915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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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와 이토의 통감지배를 미화하고 병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는 기록들이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록의 역사임을 샅샅이 증명하는 책이다. 이토 히로부미의 전 생애를 낱낱이 해부하고, 그의 탄생에서 죽음에까지 이르는 시기 동안의 일본과 조선, 이후 대한제국과의 관계를 샅샅이 살펴본다.
목차
프롤로그
제1장 이토 히로부미와 권력
1. 권력의 바탕 : 인간적 매력과 노력|2. 성격과 행동|3. 권력의 파도 속에서

제1부 권력을 향해서
제2장 소년시대와 청년시대
1. 하기(萩)의 이토|2. 입신|3. 양행|4. 도막(倒幕)과 개국|5. 왕정복고

제3장 “순풍에 돛을 달고”
1. 지역정치에서 국가정치로|2. 이와쿠라 미션

제4장 정한론
1. 정한론의 폭풍 속에서|2. 정한론 : 권력투쟁의 산물인가, 병탄의 기점인가?|3. 정한론 이후의 폭풍|4. 서남전쟁(西南戰爭)

제5장 메이지의 ‘입법자’
1. 입헌제 도입 논의|2. 이토 체제의 시동과 정체 문제| 3. 1881년의 정변|4. 이토 체제의 확립 |
5. 헌법 조사를 위한 유럽행|6. 제도개혁과 초대 총리대신 취임|7. 헌법초안의 기초

제6장 제국의 확대 : 조선 문제
1. 강화도사건과 조일수호조약|2. 임오군란과 제물포조약|3. 갑신정변

제7장 청일전쟁 : 권력의 중심에서
1. 제2차 이토 내각의 출범|2. 조선에서의 사건|3. 전쟁을 향해서|4. 이노우에 가오루의 조선 보호국화 정략|5. 전쟁과 시모노세키 조약

제8장 러일전쟁 : 권력의 주변에서
1. 삼국간섭과 조선|2. “국가적 범죄” : 민비 시해|3. 대한제국의 성립|4. 이토와 정당 결성|
5. 이토의 러일협상

제2부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의 운명
제9장 이토 히로부미와 조선
1. 한일의정서 : 대한제국 종말의 시발점|2. 고종과 이토의 대화|3. 한일협정서 : 보호지배의 시작|4. 고종과 이토의 대결|5. 을사5조약

제10장 통감 이토 히로부미와 한국 지배의 원형
1. 통감 이토 히로부미|2. 통치 구상|3. 통감통치의 모델 : 영국의 이집트 지배|4. 일본 속의 ‘크로머’|5. 이토와 크로머

제11장 통감통치 : 특성과 메커니즘
1. 전기 시정개선|2. 통치의 메커니즘|3. 지배의 특성|4. 고종의 무력화|5. 전기 시정개선의 내용

제12장 대한제국의 해체
1. 내각 교체|2. 헤이그 밀사사건|3. 정미7조약| 4. 황태자 영친왕의 일본 유학

제13장 억압과 저항
1. 후기 시정개선─관제개혁|2. 의병과 항쟁|3. 순종의 지방순행

제14장 이토 히로부미의 통감 사임과 대한제국 병탄
1. 이토와 가쓰라의 회합|2. 이토와 병탄|3. 이토의 사임 결심과 병탄 지지

제15장 이토의 죽음과 대한제국의 폐멸
1. 이토의 죽음|2. 대한제국의 폐멸

에필로그 : 역사의 기록과 기록의 역사

후기

참고 문헌
이토 히로부미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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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 중앙일보 2015년 5월 2일자 '책 속으로'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5년 5월 8일자 '학술.지성 새책'
저자 및 역자소개
한상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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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클레어몬트대학원대학에서 일본정치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스탠퍼드대학교, 도검대학교,도시샤대학교,프린스턴대학교 등에서 연구 활동을 계속했다. 그동안 『일본제국주의의 한 연구: 대륙낭인과 대륙팽창』, 『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등 일본근현대정치사를 천착한 연구 저술이 있다. 정년을 맞을 때까지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서 강의했다.
최근작 : <일본공부 반세기의 회고>,<쇼와 유신>,<이토 히로부미와 대한제국> … 총 15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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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와 이토의 통감지배를 미화하고
병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는 기록들이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록의 역사임을 샅샅이 증명하는 책

이러한 기록들[일본정부의 공식 문서들]을 근거로 한 이토의 보호통치는 끝까지 한국병탄을 의도하지 않았고, 그가 통감으로 실시한 지배정책을 “자치육성정책”으로, 또는 그를 “문명의 사도”로 평가하고 있다. 이토는 보호통치를 통해서 “한국인의 문명도가 높아지고 자치능력을 구비하여 의회정치가 뿌리를 내리는 날에는 한국 재(再)독립의 길이 열려 진정으로 일한동맹이 구축될 것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이토가 최종적으로 병탄에 동의한 것은 한국인이 문명화와 식산흥업이라는 “보호”의 본질을 깨우치지 못하고 저항했기 때문에 초래한 불가피한 결단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고 안중근의 이토 암살은 병탄을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한반도 지배는 메이지 일본이 들어서면서부터 내세운 가장 중요한 “국시(國是)”의 하나였고, 두 번의 큰 전쟁을 치른 것도 결국 그 국시를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이토는 한국인의 “열복”과 열강의 지지를 받으면서 국시를 실현하기 위하여 보호통치의 명분으로 문명, 계몽, 식산흥업, 독립, 자치능력 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의 지배는 문명의 탈을 쓴 근대적 법과 제도, 군사력, 그리고 정보와 사법기관, 푸코의 표현을 빌리면 “기기(器機, apparatus)”와 “권력의 그물망(web of power)”에 의존한 비문명적이고 억압적인 지배였다. 그리고 물질적 황폐함은 물론이고 정신적 왜곡을 목적으로 한 식민지화의 기반을 닦는 것이었다.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와 이토의 통감지배를 미화하고 병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는 기록들은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록의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 “에필로그”에서

주요 내용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폐멸’을 주도했다. 그가 ‘한국[조선] 문제’에 직접으로 깊숙이 관여한 것은 1905년 러일전쟁 막바지부터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統監)의 직위에서 물러난 1909년에 이르기까지 4년이 채 안 된다. 그의 긴 정치와 관료 생활에서 본다면, 대단히 짧은 기간이었다. 그러나 이 짧은 기간에 이토는, 을사5조약과 일본의 대한제국 병탄 당시 총리대신이었던 가쓰라 다로가 인정했던 바와 같이, “유사(有史) 이래의 숙제이고 유신(維新) 이래의 현안”인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가능케 만든 인물이었다. 이토는 마지막 정치활동의 3년 반 동안에 대한제국을 지구상에서 소멸시키고, 한민족의 민족성과 언어와 역사를 지우고 일본민족에 동화시키려고 한, 35년 동안 지속된 식민지지배의 기틀을 마련했다.
하얼빈에서 이토의 죽음은 한국과 일본 두 나라의 근현대사와 한일 관계사에 짙고 긴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토의 죽음은 일본이 오랫동안 기다리면서 준비해온 대한제국 병탄의 명분과 기회를 제공했다. 일본제국은 이토가 하얼빈에서 쓰러진 지 열 달 만에 어렵지 않게 한반도를 병탄할 수 있었다. 병탄은 이토가 한국 초대 통감(統監)으로 3년 반 동안 준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후 이어진 35여 년의 시간은 한민족에게 긴 고통의 암흑시대였다.
이토의 죽음 이후 일본의 역사 또한 어둠의 길로 들어섰고, 그 근본 씨앗은 이토가 주도한 천황제(天皇制) 헌법 속에서 싹트고 있었다. 이토와 같이 군대와 관료를 한 손아귀에 틀어쥐고 통솔할 수 있었던 강력한 원로(元老) 집단이 국가경영을 담당했을 때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이토를 위시한 원로가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면서 천황의 권위에 가려져 있던 군부의 군통수권 독립을 정치가 통제할 수 없었다. 결국 일본은 군국주의의 길을 걸었고, 그것은 패망과 주권 상실로 이어졌다.
이토 히로부미를 떠나 근대 일본사를 생각할 수 없듯이 또한 이토 히로부미를 떠나 한일관계사를 논할 수 없다. 이 책은 시간적으로 이토의 출생에서부터 하얼빈에서의 죽음까지 전 생애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토는 메이지 국가건설에서 관여하지 않은 영역이 없기 때문에 방대한 자료를 남기고 있으나, 이 책은 이토가 정상의 위치로 올라가는 과정과 그 과정 속에서의 조선[한국] 문제, 그리고 대한제국 병탄을 위한 그의 구상과 역할에 국한하고 있다.
- “프롤로그”에서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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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의 설계자, 대한제국 병탄의 설계자,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새창으로 보기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 한국인들에게 일본제국의 초대 통감 (統監)으로 기억되는 일본의 정치가입니다.

또한 1909년 하얼빈 역전에서 안중근 (安重根)의사에게 저격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토를 저격한 안중근의사가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는 사실에 더 촛점이 가 있지 그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가 메이지 일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정도인지 사실 잘 인지하고 있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상상했던 것 이상의 거물 정치가로 메이지유신 (明治維新)의 원훈 (元勳, 임금이 신뢰하는 늙은 신하)으로서 일본의 근대적 정치 사법체계를 설계한 메이지 (明治)의 설계자입니다.

이책의 전반부는 이토 히로부미가 계급사회인 막부(幕府)시대 말에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어떻게 무사 (武士)로 계급의 한계를 뛰어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조슈번 (長州藩) 출신의 번벌(藩閥) 세력의 일원이 되어가는지에 촛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기에는 물론 메이지의 설계자로서 메이지 일본의 헌법, 사법제도,의회제도, 정당제도 그리고 외교가로서의 일본의 국제관계에 공헌하는 이토의 모습이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머지 후반부는 이토 히로부미가 어떻게 조선문제에 관여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초대 조선통감이 되어 메이지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기반을 다지는지를 설명합니다.

초대 조선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제국을 '보호통치'한다는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와 사실상의 내정을 장악하고 제도개혁을 하지 않았다면 이후 후임총독인 데라우치 마사다케 (寺内正毅)가 실질적으로 주도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병탄 (倂呑)은 불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책의 성격 자체가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가로서의 일생에 대한 전기 (Biography)의 성격을 띄면서 에도 막부 말부터 메이지 시대 정치사를 포괄하는 성격을 띱니다.



내용을 다 들여다 볼 수는 없고 중요한 몇가지만 짚고 가려고 합니다.



첫째, 일본의 사료, 특히 이토 히로부미가 남긴 기록을 토대로 한 이 글을 가해자의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연구가 될 수 밖에 없었는데, 특히 1904년 이토 히로부미의 첫 대한제국 방문 이후의 모든 기록이 일본 측 기록밖에 없고 대한제국 측의 기록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사료가 일본 측의 것 밖에 없어 생기는 역사의 관점의 문제입니다.

저자는 기록을 중요시한 이토 히로부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본이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하는데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 목적은 아래와 같습니다:



1. 한국인들은 스스로 독립을 지킬 수 없는 민족이다

2. 대한제국의 군주(고종)과 지배층은 시대정신과 국가관이 없었고 오직 자신들의 안위만 생각했다

3. 일본의 한반도 진출은 침략이 아니라 청나라와 러시아로부터 힌국의 독립을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다

4. 일본이 취한 한국의 보호조치는 한국인의 문명화와 식산흥업을 위한 것이었다

5. 이토 히로부미는 침략자가 아니라 문명의 사도였다

6. 의병은 세상물정 모르는 폭도였다

7. 대한제국은 식민지로 전락할 수 밖에 없었다.



셋째, 위의 이런 관점은 그 자체로 일본이 대한제국을 타자화시켜서 보는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까지 서구에서 비서구를 바라보는 문명/비문명, 우등/열등의 관점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넷째,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보호통치'라는 정치행위는 철저히 대한제국이 '일본화'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조선의 정신은 '미개하다'라는 이유로 철저히 무시되고 '일본화'될 것을 추구합니다. 소위 보호통치 시기에는 표면화되지 않았지만 이토의 통치 후반기인 헌병통치기간 더 노골화되고, 이후 대한제국의 병탄이후에는 일본 제국의 일부로서 조선의 '일본화'를 더 노골적으로 요구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고종의 아들 영친왕의 '일본유학'으로 조선황족의 '일본화'에 이토 히로부미가 매우 공을 들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위 '일본화'의 영향은 1910년 병탄이후 진행된 35년간의 식민통치를 통해 매우 긴 영향을 남겼습니다.



다섯째, 이런 관점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 보호통치의 원형을 영국의 이집트 지배모델에서 그대로 가져왔기 때문입니다.

 당시 '무관의 제왕'으로 불리던 이집트 영국영사 크로머경 (Lord Cromer)은 1882년부터 1907년까지 이집트를 식민통치 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통감으로 부임하기 전부터 크로머경의 식민통치 방식을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크로머 경에 대한 문헌을 보아야 다시 확인이 되겠지만 아무튼 이토는 거의 그의 통치방식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상이 제가 좀 더 눈여겨 본 사안들입니다.



흥미로운 몇가지를 좀 더 부가하자면, 메이지 초기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조슈(長州)와 사츠마(薩摩) 출신 인사들이 유럽,러시아 그리고 미국을 돌아본 이와쿠라 사절단 (岩倉使節團)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책의 주제와 관련하여 이토는 평생동지이던 이노우에 가오루 (井上馨)의 도움으로 이 사절단에 참여하여 메이지 초기의 실력자 이와쿠라 도모미 (岩倉具視)와 친분을 다지고 메이지 권력의 중심부에 더 접근하게되는 결정적 계기가 됩니다.

이 사절단 활동을 통해 이토는 또한명의 메이지 초기의 실력자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 利通)와도 인연을 맺게 되어 초기 조슈에서의 그의 주군이었던 기도 다카요시 (木戸孝允)와 정치적으로 소원해지는 관계가 됩니다. 기도 다카요시는 막말 이토 히로부미가 정계로 진출할 때 그의 배경이 되었던 조슈의 실질적 지배자였습니다.

하지만 권력지향적 성격을 가진 이토는 과거의 주군을 버리고 메이지 초기의 실력자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이와쿠라 사절단은 일본이 최초로 본격적으로 서구의 문명을 시찰한 사절이라는 의미에서 일본근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실제 이 사절단의 구미시찰이후 메이지 일본의 기본적인 실력양성방안이 설정되고 발전되었지만 정치사적 측면에서 그 이전 조연에 불과하던 이토 히로부미가 중앙의 거물 정치가로 떠오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는 사건입니다.



또하나, 이 책에는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에 대한 내용이 언급되기는 하지만 많이 내용이 부족합니다. 많이 아쉬운 부분입니다. 내용 자체가 책 한권에 담기는 무리이지만 아무튼 청일전쟁의 경우 이토 히로부미가 중심이 되어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과  일본의 중국 랴오둥 반도 점령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 열강 3국이 간섭한 삼국간섭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일본 정계는 최초로 제국주의적 활동을 대외적으로 시작한 청일전쟁에서 삼국간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열강들의 시각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되고 이후 언제나 미국 영국 러시아 중국등 한반도 주변 열강들과의 외교에 더욱 신중해지는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을 병탄하는 모든 과정에서 있어 언제나 열강들의 의견을 듣고 이를 확인하는 것을 철저하게 여겼습니다. 뒤탈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조선의 식민화를 실행시키는 치밀함을 보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한 하얼빈에서도 러시아의 실력자인 재무장관과의 회담을 위해 그곳을 찿았던 것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병탄정책을 실제로 집행하기 전 중국과 만주의 정세를 살피고 러시아의 동향을 파악하여 외교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하얼빈을 방문한 것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개인적 여행이라고 이야기했지만 러시아는 장춘에서 하얼빈까지 이토 히로부미를 영접하는 정성을 보였습니다.





일본의 극우세력들이 한국의 극우세력들과 연햡전선을 펴는 듯 보이고, 전범인 기시 노부스케 (岸信介) 전 총리의 손자인 아베  현 일본 총리가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을 만들기 위해 정치력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역사에 대한 기시감 (Dejavu)를 요즘처럼 느끼게 되는 경우가 흔치 않는 것 같습니다.



이책을 읽는 것은 매우 불편합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일본이 한국을 '미개한 나라'로 평가하고 있었다는 것이 말이죠. 과연 조선이 그렇게 미개한 나라였는지 기본적으로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조선 측 사료를 보아야 알 수는 있는 사안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아직도 일본을 너무 표면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의 일본을 이해하려면 메이지 일본을 이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한국은 직접적으로 서구문물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대부분 일본을 통해 일본의 시각으로 서구를 바라본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그 이전 서구와의 직접적인 접촉도 대부분 단절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 하기 이전 후기 조선의 '서학'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지 관심이 가게 됩니다. 일본의 프리즘을 통하지 않고 조선 고유의 시각으로 받아들인 서구문명이 서학속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어떤 경우든 상대방을 잘 알아야 어떤 전략이든 어떤 대화든 어떤 외교든 승리할 수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 이 시점에 일본의 과거를 다시 되집어 봐야 하는 이유이고 그들의 과거 결정사항을 복기해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책의 제일 끝에 나온 몇마디 구절을 소개합니다:



"일본의 대한제국 보호국화와 이통의 통감지배를 미화하고 병탄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는 기록들은 역사의 기록이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위한 기록의 역사임을 보여주고 있다"

-- 중략 ---



"일본 측은 기록에 반대되는 기록은 지워버렸거나 개찬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기록을 통해서 역사를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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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nnis Kim 2019-11-08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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