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3-30
그룹_05 > 자료실-공개자료실 > 춘원의 민족개조론
그룹_05 > 자료실-공개자료실 > 춘원의 민족개조론
춘원의 민족개조론
글쓴이 : 관리자 날짜 : 06-10-16 14:35 조회 : 3448
트랙백 주소 : http://ahnchangho.or.kr/site/bbs/tb.php/group_05_e02_02/5
춘원의 민족개조론
저 자 정용석
연 도 1996.5
춘원은 한국 문학사엔 신문학 개척의 선구자로 영롱히 빛나고 있으나 민족사에는 친일파로 얼룩져 있다. 춘원은 1892년 평안북도 定州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열살 되던 해 부모를 잃었다. 고아가 된 어린 춘원은 東學에 입교, 서기가 되었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12세 되던 해 한양으로 옮겼다. 춘원은 1905년 친일 단체 一進會의 추천으로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明治) 學院에 편입, 1910년 졸업하였다. 귀국 후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다시 도일하여 와세다(早稻田) 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1917년 1월부터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무정>을 <每日新報>에 연재하기 시작, 소설 문학의 신경지를 열었다. 1919년 2월 宋繼白, 白寬洙, 崔八鏞 등과 '抗日朝鮮靑年獨立團'을 결성하였고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하였다.
춘원은 모국의 기미년 3·1만세 선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도쿄 유학생의 2·8독립선언 기초 혐의로 일본 경찰의 추적을 받으며 上海로 건너가 한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여기서 그는 <獨立新聞>의 주필겸 임정 사료 편찬주임으로 활동하였고 1921년 4월 다시 귀국하였다. 그로부터 1년 1개월 만인 22년 5월 발표한 논문이 다름 아닌 <開闢>의 '민족개조론'이다.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그의 나이 30세에 쓰여진 것으로서 도쿄의 2·8독립선언과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신문 주필로 항일독립정신이 한창 들끓던 때 착상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춘원이 친일 언행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15년 후 였다. 그는 1923년 민족주의 정신을 일깨워 주던 <東亞日報>에 입사, 편집국장을 지냈다. 33년에는 <朝鮮日報> 부사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춘원은 '민족개조론'을 발표했던 바로 그 해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修養同盟會를 金允經 등과 조직, 항일 투혼을 불살랐다. 이 동맹회는 똑같은 이념으로 결성된 평양의 同友俱樂部와 통합하여 修養同友會로 1926년 재편되었다. 이어 1929년 수양동우회는 독립운동 단체인 興土團과 통합, 同友會로 개칭되었다. 동우회는 당시 국내 민족주의 지식인들로 구성되었고 기관지로서 <東光>을 발행, 항일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나섰다. 결국 수양 동우회의 반일 독립운동을 경계했던 일본 경찰은 춘원을 비롯 朱燿翰 등 관련자들을 무더기로 검거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 사건으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이듬해인 38년 신병으로 보석되었다. 이처럼 춘원은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일경에 의해 체포 구속된 데서 실증되었듯이 1937년도까지 열렬한 항일 독립운동가였으며 민족주의자였다. 그가 이 사건으로 15년전 上海의 독립신문 주필을 하던 중 귀국하여 쓴 '민족개조론'은 결코 친일논리일 수는 없고 명백히 민족개조의 진솔한 호소요, 외침이었다.
춘원이 친일언동으로 민족주의 노선을 일탈하기 시작한 것은 그가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풀려난 뒤부터였다. 1938년 무렵이었다. 따라서 그 이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도쿄 유학중 2·8독립선언문을 기초하였고 상해 임시정부로 도망쳐 독립신문의 주필로서 민족의 자주적 독립을 절규하던 중 귀국하여 집필한 '민족개조론'은 정녕 친일 논리가 아니오, 극일을 위해 토해 낸 한맺힌 민족반성의 절규였음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후에도 춘원은 15년간에 걸쳐 항일 민족주의 계몽으로 일관하던 중 끝내 1937년 체포 구속되었다는 데서 더욱 그렇다.
다음으로 춘원의 '민족개조론'이 극일을 위한 민족의 자아반성 촉구였고 의식개혁을 위한 민족적 호소였다는 사실은 이 글의 내용을 통해 역력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開闢> 5월호에 실린 것으로서 무려 54페이지 분량의 방대한 논문이다. 2백자 원고지 2백 50여 매에 해당된다.
'李春園'이란 필명으로 나온 '민족개조론'은 머릿말에서 '나는 많은 희망과 끓는 精誠으로, 이 글을 조선민족의 장래가 어찌할까, 어찌하면 이 민족을 현대의 쇠퇴에서 건져 행복과 번영의 장래에 인도할까, 하는 것을 생각하는 형제와 자매에게 들입니다'고 밝혔다. 그가 '민족개조론'을 집필하게 된 동기는 바로 이 대목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으로 보아 무방하다.
춘원은 이 논문에서 조선 민족의 쇠퇴 원인은 도덕적 타락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조선 민족을 도덕적으로 개조하고 민족적으로 개조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徐載弼, 安昌浩, 李承晩 등 당대에 독립정신을 외쳤던 선각자들을 민족개조운동의 '첫소리'였다고 강조하였다. 춘원이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등 항일 독립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들을 민족개조운동의 선구자로 표출시켰다는 것은 '민족개조론'이 극일을 위한 의식개혁 논리였음을 쉽게 인지케 한다.
특히 춘원은 일본인이 정의한 한민족 쇠퇴의 원인을 거부했다. 그는 '민족개조론'에서 일본인이 한민족 쇠퇴의 원인으로 '李朝의 약정'을 들고 있지만, 실은 조선인 모두의 도덕적 쇠퇴에 연유한다고 반론하면서 의식개혁의 절대성을 주장했다. 춘원은 민속 쇠퇴의 책임이 지도자들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오, 일반 민중에게도 적지 않다고 강조하였다. 일반 민중이 악정을 지켜보면서도 그것을 고치지 못한 연유는 세 가지라고 요약했다.
첫째는 일반 민중이 나태하여 실행할 정신이 없었고, 둘째는 비겁하여 감행할 용기가 없었으며, 셋째는 신의와 사회성의 결핍으로 동지의 견고한 단결을 얻어내지 못한데 기인했다는 것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민족의식 개조의 요체를 8개 조목으로 집약하였다. 의식개혁 8개 항목인 셈이다.
첫째는 거짓말과 속이는 행실이 없도록 개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空想과 空論을 버리고 옳다고 생각되는 것은 '의무'라고 간주, 즉각 실행해야 한다.
셋째는 '표리부동'함이 없이 의리를 지켜 가야 한다.
넷째는 '怯懦를 버리고 옳은 일, 작정한 일이거든 만 난을 무릅쓰고 나가는 자'가 되라고 하였다.
다섯째는 사회적 공공 의식과 봉사정신의 함양을 강조하였다.
여섯째는 1인1기의 전문기술 습득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일곱째는 근검절약 정신의 함양이다.
여덟째는 생활환경의 청결이었다.
저와 같은 춘원의 폐부를 찌르는 듯 들춰낸 한민족의 치부는 이 민족을 일본의 식민통치로 전락케 한 도덕적 타락상이었음에 틀림없다. 그의 지적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고 자학적이었다는 데서 그는 한민족의 열등성을 떠올려 일본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합리화했다는 비판도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춘원이 지적해 낸 한민족의 도덕적 타락상은 있는 그대로였고 그것들을 고치지 않는 한 떳떳한 민족으로서 살아갈 수 없는 진실 그것의 토로였을 뿐이다.
그로부터 74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러서는 '민족개조론'의 개조 대상들은 대부분 극복되지 않으면 안될 요목으로 상존하고 있다. 김영삼정부가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의식개혁운동'도 '민족개조론'의 연장선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처럼 춘원의 '민족개조론'은 한민족의 도덕성 회복과 의식개혁 없이 민족적 중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간절한 호소였고 절규였다.
거기에는 그가 1930년대 후반부터 드러내기 시작했던 친일적 색깔은 결코 덧씌워져 있지 않았다. 오직 한민족의 정신적 타락상에 분노를 터뜨리며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처방전을 제시한 옥고였을 따름이다.
Subscribe to:
Post Comments (Atom)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