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 감정이 유지되는 이유들(박노자)...권용득 반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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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Tikhonov, 13 June 2020[반일 감정이 유지되는 이유들]
저는 이런 질문을, 제 학생들에게 비교적 자주 받습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일제의 식민 지배 기간도 예컨대 영국의 인도 지배보다 약 7배나 짧고, 해방 시기도 세계사적으로 보면 비교적 이르고 (아프리카의 많은 식민지들은 1960년대에 접어들어 해방됐습니다), 해방의 방식도 원한을 크게 남기는 독립 전쟁이 아닌 제3자들의 '개입'이었는데, 한국의 반일 감정들이 왜 인도나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그 어느 옛 식민지의 옛 식민 모국에 대한 감정보다 더 나쁘냐는 질문입니다. 비슷한 일제 식민지 경험을 가진 대만 학생들은 특히 이와 같은 질문을 자주 던지고, 영국의 식민지를 경험한 싱가포르 학생들에게도 이 부분은 궁금증을 많이 유발시키는 것 같습니다.
이런 질문을 자꾸 받아보니 제가 '옛 식민 모국에 대한 옛 식민지의 부정적인 집단 정서"의 유발 요인들을 한 번 정리해봤습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대체로는:
1.
1) 과거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리', 그리고 식민지 시대 토착 엘리트의 '교체'가 잘 이루어질 수록
2) 옛 식민 모국에서 옛 식민지 출신에 대한 사회 통합이 잘 될 수록
3) 옛 식민지 시절에 식민 모국이 차별을 완화시켜 사회 통합 정책을 많이 진행할 수록
4) 식민 지배 종식 이후 또 어떤 다른 외부 집단의 폭력을 많이 체험할 수록
식민지 시절에 대한 기억의 지형은 비교적 '덜 나쁜' 쪽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도나 인도네시아, 베트남의 경우에는 결국 식민지 시절의 토착민 관료들이 아닌 독립 운동가들이 정권을 잡았는가 하면 (1),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인도 출신들이 이민 와서 한 때에 비교적 쉽게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영국은 향항의 주민들에게도 이민 와서 영주권, 그리고 궁극적으로 시민권 획득으로의 길을 제시하기도 하지요 (2). 우즈베키스탄 같은 구쏘련 후계 사회로 가면 구쏘련에 대한 감정들이 비교적 좋은 편인데, 역시 구쏘련 시절에 러시아인과의 '차별'을 적어도 '정책' 차원에서 느낄 필요가 없었으며 복지 정책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 크게 작용된 것 같습니다 (3). 그리고 대만 같은 경우에는 일제 식민 시절이 끝난 뒤에 후퇴하는 국민당의 당군에 사실상 점령을 당하고, 그 후로는 대륙 출신의 '외성인'들의 "제2 식민 지배"를 받아온 탓에 일제 식민 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상대화된 부분은 있습니다 (4). 그러나 이 네 가지 항목 중에서는 대한민국에 적용되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탈식민화 이후 제1공화국의 대부분의 장관과 제3공화국의 대통령까지 다 식민지 토착 관료 출신들이었으며, 일본에서는 재일 조선인들이 시회 통합이 아닌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됐습니다. 식민지 시절에는 조선인에 대한 노골적인 임금 차별 등이 끝까지 계속 자행됐으며, 식민 지배 종식 이후 남한에 들어온 미국은 적어도 직접 지배 아닌 간접 지배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일본'에 대한 기억의 지형은 대체로 부정 일변도로 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2) 옛 식민 모국에서 옛 식민지 출신에 대한 사회 통합이 잘 될 수록
3) 옛 식민지 시절에 식민 모국이 차별을 완화시켜 사회 통합 정책을 많이 진행할 수록
4) 식민 지배 종식 이후 또 어떤 다른 외부 집단의 폭력을 많이 체험할 수록
식민지 시절에 대한 기억의 지형은 비교적 '덜 나쁜' 쪽으로 형성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인도나 인도네시아, 베트남의 경우에는 결국 식민지 시절의 토착민 관료들이 아닌 독립 운동가들이 정권을 잡았는가 하면 (1),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인도 출신들이 이민 와서 한 때에 비교적 쉽게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영국은 향항의 주민들에게도 이민 와서 영주권, 그리고 궁극적으로 시민권 획득으로의 길을 제시하기도 하지요 (2). 우즈베키스탄 같은 구쏘련 후계 사회로 가면 구쏘련에 대한 감정들이 비교적 좋은 편인데, 역시 구쏘련 시절에 러시아인과의 '차별'을 적어도 '정책' 차원에서 느낄 필요가 없었으며 복지 정책의 대상이 됐다는 점이 크게 작용된 것 같습니다 (3). 그리고 대만 같은 경우에는 일제 식민 시절이 끝난 뒤에 후퇴하는 국민당의 당군에 사실상 점령을 당하고, 그 후로는 대륙 출신의 '외성인'들의 "제2 식민 지배"를 받아온 탓에 일제 식민 시절에 대한 기억들이 상대화된 부분은 있습니다 (4). 그러나 이 네 가지 항목 중에서는 대한민국에 적용되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탈식민화 이후 제1공화국의 대부분의 장관과 제3공화국의 대통령까지 다 식민지 토착 관료 출신들이었으며, 일본에서는 재일 조선인들이 시회 통합이 아닌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 됐습니다. 식민지 시절에는 조선인에 대한 노골적인 임금 차별 등이 끝까지 계속 자행됐으며, 식민 지배 종식 이후 남한에 들어온 미국은 적어도 직접 지배 아닌 간접 지배의 방식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의 '일본'에 대한 기억의 지형은 대체로 부정 일변도로 잡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2
1) 피식민자들에게 애당초에 식민지배세력에 의해 '망국'을 폭력적으로 당한 근대형 국가가 있었다면
2) 계속해서 피식민자들의 독립 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해야 했다면
보통 탈식민 이후의 기억의 지형은 부정적으로 형성되게 돼 있습니다. 예컨대 싱가포르의 경우에는 영국에 의한 식민화 이전에는 말라까의 술탄을 정점으로 하는 왕조 국가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식민지와 그 후 주민들의 대부분을 구성한 화교들은 그 국가와 무관했습니다. 그리고 싱가포르를 기지로 하여 무역 등에 종사했던 화교 신흥 부르주아 집단은, '항영 투쟁'한다기보다는 식민 권력과의 일종의 블럭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좌파적 화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의 주된 저항 형태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후원금 송금이었고요....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대한제국은 비록 절대 왕권 국가이었지만, 분명히 '근대 국가'를 지향했으며, 이미 1900년대에 근대적 민족주의를 배태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에 대한 민심이 하도 좋지 않아 '명분'의 차원에서라도 온건 부르주아 세력마저도 현실적으로 가능했을 때에 적어도 항일 투쟁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1920년대의 좌파가 <동아일보>를 타협적 민족주의로 분류했는데, <동아일보>가 가장 크게 선전하는 '영웅' ('성웅')은 김성수와 한 번 편지 교환까지 한 인도의 간디이었습니다.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본심이야 어떻든간에 '운동'을 떠나서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데가 바로 그 당시 조선 사회이었습니다. 그 운동에 대한 탄압이 어땠는지 굳이 다시금 이야기할 필요도 없지요. 일제 때에 익힌 고문의 기술을 한국 보안 경찰들이 그나마 접은 것은 김대중 정권 때쯤의 일입니다. 1990년대 초반 사노맹 사건까지만 해도, 일제 시절과 비슷한 방식의 고문이 자행됐죠. 그러니 기억의 지형은 어떻게 됐겠어요?
2) 계속해서 피식민자들의 독립 운동을 폭력적으로 탄압해야 했다면
보통 탈식민 이후의 기억의 지형은 부정적으로 형성되게 돼 있습니다. 예컨대 싱가포르의 경우에는 영국에 의한 식민화 이전에는 말라까의 술탄을 정점으로 하는 왕조 국가가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식민지와 그 후 주민들의 대부분을 구성한 화교들은 그 국가와 무관했습니다. 그리고 싱가포르를 기지로 하여 무역 등에 종사했던 화교 신흥 부르주아 집단은, '항영 투쟁'한다기보다는 식민 권력과의 일종의 블럭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좌파적 화교들도 적지 않았지만 그들의 주된 저항 형태는 중국 공산당에 대한 후원금 송금이었고요....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대한제국은 비록 절대 왕권 국가이었지만, 분명히 '근대 국가'를 지향했으며, 이미 1900년대에 근대적 민족주의를 배태했습니다. 그리고 일제에 대한 민심이 하도 좋지 않아 '명분'의 차원에서라도 온건 부르주아 세력마저도 현실적으로 가능했을 때에 적어도 항일 투쟁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습니다. 1920년대의 좌파가 <동아일보>를 타협적 민족주의로 분류했는데, <동아일보>가 가장 크게 선전하는 '영웅' ('성웅')은 김성수와 한 번 편지 교환까지 한 인도의 간디이었습니다.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본심이야 어떻든간에 '운동'을 떠나서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데가 바로 그 당시 조선 사회이었습니다. 그 운동에 대한 탄압이 어땠는지 굳이 다시금 이야기할 필요도 없지요. 일제 때에 익힌 고문의 기술을 한국 보안 경찰들이 그나마 접은 것은 김대중 정권 때쯤의 일입니다. 1990년대 초반 사노맹 사건까지만 해도, 일제 시절과 비슷한 방식의 고문이 자행됐죠. 그러니 기억의 지형은 어떻게 됐겠어요?
사실상 뉴라이트와 엇비슷한 입장에 서 있는 세종대 박유하 교수 등은 일찍이 2000년대에 '대일 화해' 담론을 꺼내기 시작했는데, 덮어놓고 "없던 일로 하자. 화해!"라고, 피해 당사자들의 편에 서지도 않은 고급 '지식인'은 외쳐봐야 화해가 이루어질 리가 만무합니다. 사실 진정한 의미의 화해를 위해 가장 많이 노력한 데는 금일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는 정대협/정의연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일본 내의 진보적 시민 사회와 협조해왔기 때문이죠. 한국인들의 대중 의식 속에서 '일제'와 '일본'이 각각 다른 층위를 차지하게 하자면, '일제'와 질적으로 다른 사고를 지니며 '일제'의 유산을 청산하고자하는 "또 하나의 일본", "색다른 일본"의 존재가 더 가시화돼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예컨대 세종대 호사카 유지 교수의 사회적 담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은 많지만 (기본적으로는 호사카 교수는 아무래도 온건 자유주의자인 것 같습니다), 그의 가시적 존재가 진정한 의미의 '한일 화해'에 뉴라이트들의 궤변들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도움이 된다고, 나름 고맙게 생각합니다. 일본의 극우적 지배자들과 다른 편에 서는 일본 출신들의 존재는 '화해'로 가는 길을 터주는 역할을 크게 하지요. 저는 지금도 후지이 다케시 선생님의 칼럼을 다 챙겨도 꼼꼼히 읽고 있지만, 앞으로도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기고를 한국 신문에서 자주 볼 수 있었으면 대단히 좋겠습니다. 이런 교류야말로 탈식민 '치유'에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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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순
박노자선생님 정의연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갖은 사람들에게 윤미향 사수의 의미로 글(?)을 올리셨다는데 전 못 보았습니다. 어디서 볼수 있나요? 건강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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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
14 June 2020 ·
반일 감정이 유지되는 이유들(박노자)
https://www.facebook.com/vladimir.tikhonov.5/posts/10223324250717224
위에 공유한 박노자 선생 글 두 번 읽었다. ‘학술적 글쓰기’ 내공이 워낙 깊으신 분이라 가방끈 짧은 나는 도무지 따라가기 힘든 얘기였다. 그럼에도 감히 내 방식으로 박노자 선생 글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자면...
1) 조선 해방은 다른 식민지 해방 사례와 비교하기 어려운 특수한 경우임
2) 일제는 사회 통합을 위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고, 조선인은 차별 대상에 불과했고, 해방 후 제3공화국까지 주류 교체가 안 된 상태에서 식민지 토착 관료 출신들이 계속 한자리 해먹었고, 그 배경에는 해방 후 미국의 간접 지배가 있었고, 전후 일본사회에서 재일조선인은 배제와 차별의 대상이었고, 그러므로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은 해방 후에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음
3) 식민지 조선부터 90년대 초반 사노맹 사건까지 운동에 대한 탄압은 계속됐고, 그게 다 일제의 악랄한 고문 기술이 식민지 조선에 뿌리내린 탓임
4) 갑자기 급한 볼일이라도 생기셨는지 휙 건너뛰더니 “사실상 뉴라이트와 엇비슷한 입장에 서 있는 세종대 박유하 교수 등은 일찍이 2000년대에 ‘대일 화해’ 담론을 꺼내기 시작했는데, 덮어놓고 ‘없던 일로 하자. 화해!’라고, 피해 당사자들의 편에 서지도 않은 고급 ‘지식인’은 외쳐봐야 화해가 이루어질 리가 만무합니다”라며 글의 제목인 ‘반일 감정이 유지되는 이유들’의 원인으로 박유하를 에둘러 지목함
5) 그러면서 “사실 진정한 의미의 화해를 위해 가장 많이 노력한 데는 금일 마녀사냥을 당하고 있는 정대협-정의연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계속해서 일본 내의 진보적 시민 사회와 협조해왔기 때문이죠”라며 정대협-정의연을 치켜세움
6) 호사카 유지는 나랑 정치적 노선 좀 달라도 진정한 의미의 한일 화해에 도움이 되고 박유하보다 훨씬 나음
7) 호사카 유지뿐만 아니라 후지이 다케시처럼 일본 진보 지식인의 칼럼을 한국 신문에서 더 자주 보면 좋겠고, 이런 교류야 말로 ‘탈식민 치유’에 도움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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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박노자 선생 글에 대한 내 어쭙잖은 소감...
일단 박노자 선생의 한국 근현대사 해석은 전반적으로 몹시 시혜적이다. 너네 참 힘들었겠다, 그치? 선량한 너네는 일찌감치 자립할 의지도 있었는데 못돼 처먹은 일제의 영향으로 나쁜 물들어서 고생한 거쟈나, 토닥토닥... 뭐 이런 느낌이랄까. 이런 식으로 기승전...일제 식민 지배 탓인 얘기들, 이건 뭐랄까 ‘아베 개새끼’의 ‘고급 버전’ 같달까. 이와 같은 얘기를 소위 양심적 일본 지식인들도 곧잘 따라하던데, 한국사회가 그렇게 만만한가 싶다. 수차례 얘기했다시피 한국사회는 외부의 영향 없이도 알아서 썩을 때로 썩을 만큼 충분히 성장했다고 본다.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일제 식민 지배 탓으로 돌리는 한 내부의 문제로부터 외부로 눈을 돌리게 만들 뿐이고, 그건 엉뚱한 싸움을 하게 하는 선동이나 다름없다.
심지어 박노자 선생은 이 와중에 ‘공공의 적’ 삼을 만한 표적을 제시하기도 한다. 박유하 교수의 화해론을 ‘고급 지식인’의 배부른 소리쯤으로 취급하며 ‘덮어놓고 없던 일로 하자’로 일축하면서 비꼬아 놓았는데(이런 것도 학술적 글쓰기인가?), 박유하 교수는 과연 그런 얘기를 했을까? 아래는 박유하 교수의 최근 인터뷰 중 한 대목.
“내가 우선적으로 시도한 건 체험을 드러내 말하지 못한, 잊힌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알리는 거였다. 그런 할머니들 목소리만 진짜라고 말하려 한 게 아니라 당사자를 제쳐놓고 일이 진행되는 건 문제이며, 만약 당사자들 간에 생각이 다르다면 주변 사람들도 함께 고민해 보자, 오로지 그런 취지였다. 그러면서 기존 연구 담론과는 다른 접근법을 시도하려 했다. 전쟁 범죄로만 다뤄지던 것을 제국주의 문제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 위안부는 식민 지배가 야기한 문제인데 일본은 그 부분을 제대로 인식한 적이 없다는 것, 이를 명확히 한 뒤 그것을 기반으로 한 사죄와 보상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인터뷰 전문: https://shindonga.donga.com/3/all/13/2089701/1)
박유하 교수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집필 의도를 아무리 해명해봤자 ‘내가 그렇게 읽었어! 내가 그렇게 읽었다고!’ 하시는 박노자 선생에게는 가닿을 리 만무하다.
그보다 정대협-정의연이 일본 내 진보적 시민 사회와 협조해왔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화해를 위해 노력해온 조직이라니, 이것도 일종의 역사왜곡 아닌가 싶다.
위안부 문제가 가시화되기 전부터 일본 정부의 전후 보상 책임을 촉구하며 징용·위안부 피해자들의 소송을 도왔던 활동가 우스키 게이코 씨의 입국 금지를 신청한 것은 정대협이었다. ‘총선은 한일전’이란 슬로건을 동원해서 반일 감정을 무기 삼은 쪽은 윤미향 씨와 여당이었다. 윤미향 씨와 정의연을 향해 문제 제기를 한 건 피해당사자이자 운동의 중심이었던 이용수 선생이었다. 그리고 윤미향 씨와 정의연은 이용수 선생을 향한 2차 가해를 상당 시간 방치했다. 과거 운동의 중심부와 갈등했던 피해당사자들은 기림비에서 이름이 삭제되기도 했다. 그들의 이름을 고의로 누락시킨 것은 정의연이었다. 운동이 그동안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고, 또한 전시 성폭력 문제를 국제 사회에 얼마나 환기시켰든, 앞서 열거한 문제들은 당사자중심주의도 아니고 진정한 의미의 화해를 위한 노력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정보를 왜곡해 한국인 입맛에 맞는 소리를 늘어놓는 편인데*, 박노자 선생은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한국인이여, ‘내 귀에 캔디’ 하면서 불편한 진실은 끝내 외면하고 달콤한 소리나 귀담아들으라는 건가.
무엇보다 박노자 선생 글에서는 진영이 확실히 구분된다. 박노자 선생에게 우리 편은 누구인지, 적은 누구인지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얘기다. 이 지긋지긋한 피아식별과 진영논리, 이런 것도 학술적 글쓰기인가. 대체 왜 내 눈에는 박노자 선생의 학술적 글쓰기가 반공이 시대정신이던 시절의 ‘삐라’ 같을까. 이게 다 내 가방끈이 짧아서겠지?
*호사카 유지 교수는 ‘신친일파’론을 주장하면서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이 도요타 재단의 연구 지원금을 받은 적 있고, 그들의 배후에 일본 극우 기업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도요타 재단의 연구 지원금을 받은 것은 <반일종족주의> 저자들뿐만 아니다. <반일종족주의> 저자들과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는 김부자, 한홍구, 정진성 교수(정대협 전 공동대표) 등도 받았다. 아래는 도요타 재단 연구 지원금 둘러싼 음모론을 반박하는 이승엽 선생의 포스팅이다.
https://www.facebook.com/sungyup.lee.7/posts/2428924807194851
**학술적 글쓰기에 ‘식민 모국’이 웬 말인가? 굳이 이런 데까지 여성성 동원해야 하나? 박노자 선생은 ‘성인지 감수성’ 모르나?
***박노자 선생은 ‘반일 감정이 유지되는 이유들’이라며 한국사회가 해방 후 과거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아 반일 감정으로부터 불가항력적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동안 반일 감정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던 사람들을 슬그머니 지우고, ‘사실상 뉴라이트와 엇비슷한 입장에 서 있는 세종대 박유하 교수’를 과녁처럼 내세웁니다. 저는 이와 같은 글쓰기가 학술적인지는 모르겠으나, 이것 또한 박노자 선생이 그토록 반대하던 ‘마녀사냥’과 다름없는 것 같아서 반박 차원으로 한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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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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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분 말마따나
포스트트루스 시대죠ᆢ
권용득
Vladimir Tikhonov 박노자 선생님, 아까 선생님 포스팅에 경우 없이 댓글 너무 많이 달아서 미처 못 물어본 얘기는 따로 정리해서 포스팅했습니다. 독후감쯤으로 여겨주시고, 시간될 때는 지도 편달도 좀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만...
Chee-Kwan Kim
반일감정이 유지되는 이유 중 하나에 반일장사치는 어용학자들이 있다는 걸 빠트리셨네요.
임요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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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득샘이 수고 많으십니다. 박노자 교수님이 이글을 꼭 읽으셨으면 좋겠네요.
Park Yuha
‘“갑자기 급한 볼일이라도 생기셨는지”에 아침을 웃음으로 시작. 고마워요.^^
Soon Ae Choi
'화해'의 폭력 이라고 했던 재일 서경식 선생님 글도 이렇게 풀어서 포스팅해 주시길 감히
바랍니다.부탁해요.
Kilt 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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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귀화하려다 거부당하고 남한에 온 이유가 있지요. 북한애들이 보기에도 전혀 쓸모가 없으니..그런 걸 귀화하게 해주는 남한은 뭔지...
강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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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근데 4)와 같은 주장은 진짜 근거 있나요?ㅋㅋㅋㅋㅋ 제가 제국의 위안부에 대해 최고조로 적대적일 때도 그건 절대 아닌 것 같았는데. 근본적으로 국가의 강한 힘을 추종하는 뉴라이트들의 주장이랑 어찌되었든 "국가의 책임"을 언급하는 박유하 교수의 주장이랑 같은 선상에 세운다는 것은 완전 무리수인데요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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