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5

삼국통일전쟁사 - 노태돈 2009

삼국통일전쟁사 - 교보문고




저자(글)
·2009년 02월 25일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 연구총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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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이 책을 내면서
머리말

제1부 삼국통일전쟁사 연구 서설: '신라 삼국통일론'에 관한 이론적 검토
Ⅰ. '삼국통일'이란 개념은 성립하는가?
Ⅱ. 삼국통일전쟁기의 설정 무네

제2부 삼국통일전쟁의 전개
Ⅰ. 전쟁의 서막
Ⅱ. 백제의 멸망과 백제부흥전쟁
Ⅲ. 고구려의 멸망
Ⅳ. 신·당 전쟁과 일본, 토번
Ⅴ. 전쟁의 여진: 676년 이후 신라의 대외관계

맺음말: 삼국통일전쟁의 역사적 의의

삼국통일전쟁사 연표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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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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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그런가 하면 일각에서는 삼국시대에는 아직 민족 관념이 형성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민족 관념으로 삼국 사이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문제 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고, 당시 삼국의 지배층 사이에는 계급도덕과 국가도덕은 있었지만 민족도덕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삼국 간 항쟁의 동인은 결국 왕실과 귀족의 권력욕과 물질적 욕망이라고 보고 김춘추의 외교를 높이 평가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20) 접기 - 不二
이로써 모처럼 열린 신라와 고구려의 실세들 간의 담판이 무위로 끝나버렸다. 이는 그 뒤의 역사 전개에 엄청난 영향을 미쳐 고구려의 명운에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다. 한반도에서 나라가 나뉜 상황에서 서로간의 항쟁은 외부 세력에 대한 대응력을 크게 약화시킴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당의 침공이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연개소문이 김춘추의 평화 제의를 거부한 것은 참으로 운명적인 결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후 신라는 고립에서 벗어나려고 당에 더 매달리고, 그 결과 신라와 당의 군사적 동맹으로 이어졌다. 그에 따라 고구려는 남과 북 양 방면에서 적을 맞이하는 치명적인 전략적 열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77) 접기 - 不二
이제 동북아시아의 국제 관계의 구도는 명확해졌다. 즉 당-신라 동맹 대 고-백-왜의 연계의 대치가 그것이다. 그런데도 왜의 조정은 이런 구도와 그것이 내포한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채 659년 7월에도 당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659년 말 왜의 견당사 일행이 귀국하려 하자 당 조정은 다음 해에 있을 대백제전 기밀이 누설될 것을 우려하여 이를 막고 이들을 장안에 억류했다. 백제 또한 659년에도 신라의 변경을 공격하는 등 국력을 낭비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제 전쟁의 폭풍이 전면적으로 한반도를 휘감아 몰아치려 한다. (146) 접기 - 不二
그 주에 ˝신라의 춘추지는 고구려의 내신 개금에게 청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당에 사신으로 가서 자기나라 풍속의 의관을 버리고 천자에게 야유하여 따를 것을 청하고, 이웃나라에 화를 끼치고 그 의도하는 바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153) - 不二
이전 7세기 전반에 신라나 백제에 왜국을 대국으로 여기는 의식이 있었다. 당시 왜국은 객관적으로 신라나 백제보다 큰 나라였다. 그리고 백제와 신라가 상쟁하던 상황에서 서로 왜의 지원을 받으려는, 또는 왜를 자국에 비적대적인 세력으로 묶어놓으려는 시도를 하면서 왜를 대국으로 예우하였을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왜국도 백제나 신라에 비해 자국을 대국으로 여기는 의식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형화된 의례와 의식에 따라 규정된 형태는 아니었다. 왕보다 상위의 칭호로서 천황이란 호가 사용된 것은 7세기 후반, 덴무(673-686)조 이후로 여겨진다. 왜의 대국의식은 660년 이후의 역사적 상황에서 더 강화된 것 같다. (291)
......
한편 신라와 일본의 관계에서, 상대를 각각 인국과 번국으로 여기는 인식은 그 뒤의 시기를 통해 양국 지배층 의식의 기저를 관류하였고, 그것은 때에 따라 표면에 부상하여 격렬한 마찰을 야기하였다. (296) 접기 - 不二
그런데 삼국통일전쟁의 결과 신라의 영역이 대동강 선 이남에 그침에 따라 유목집단들과의 연결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물론 발해가 등장하여 돌궐과 연결하는 등 고구려의 대외정책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불가능하게 된 신라는 중국왕조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이런 면은 그 뒤에도 한반도의 왕조들에서 이어져 작용하였다. 북방 유목민 집단 및 그를 통한 중앙아시아 국가들과의 교류는 비단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도 중국 문명 외의 다른 문명과 접촉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그것은 균형 잡힌 대외의식과 문명의식을 지니게 하는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인의 천하관이나 대외정책은 그런 면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것이 차단됨에 따라 중국에 일방적으로 기울어지는 양상이 불가피하게 나타났다. 신라인에게는 이제 당이나 일본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대외관계의 기본 과제가 되었다. (301) 접기 - 不二
그런데 삼국통일전쟁의 결과 신라의 영역이 대동강 선 이남에 그침에 따라 유목집단들과의 연결이 현실적으로 어려워졌다. 물론 발해가 등장하여 돌궐과 연결하는 등 고구려의 대외정책을 이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불가능하게 된 신라는 중국왕조와의 관계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었고, 이런 면은 그 뒤에도 한반도... 더보기 - 不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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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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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노태돈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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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경남 창녕 출생. 서울대학교 문리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에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계명대학교 사학과 조교수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서울대 역사연구소 소장,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원장을 지냈으며, 한국사연구회 회장, 한국고대사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하버드대학 옌칭연구소 방문학자,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 한국학 연구소 방문 교수, 연변대 겸임교수, 국사편찬위원,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2020년 현 서울대 명예교수이다.
저서로는 《한국사를 통해 본 우리와 세계에 대한 인식》, 《고구려사연구》, 《단군과 고조선사》, 《예빈도에 보인 고구려》, 《한국고대사의 이론과 쟁점》, 《삼국통일전쟁사》, 《한국고대사》가 있으며, 공저로는 《시민을 위한 한국역사》, 《한반도와 만주의 역사 문화》, 《12시간의 통일 이야기》가 있다. 접기

최근작 : <고구려 발해사 연구>,<한국고대사>,<12시간의 통일 이야기> … 총 13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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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본 삼국 통일 전쟁은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뿐만 아니라 당 제국, 왜, 설연타 등이 뒤엉켜 싸운 고대판 세계 대전이었다.
解明 2017-05-13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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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체제론과 특히 고구려사 연구에 빛나는 고대사 레전드 노태돈 교수님이 특유의 치밀한 문체로 삼국통일전쟁사를 서술한 역작! 예나 지금이나 황제나 왕이 가장 두려워 한 건 배후에서 통수 치는 거였다.
hunter 2022-03-1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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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삼국통일전쟁사

사실 이 책은 `노태돈`이라는 이름만 보고 산 책이다. 그는 현재 한국고대사 분야의 최고권위자라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나의 욕구를 총족시키기에 아쉬움이 컸다. 어쩌면 이 책이 문제라기보다 애초에 나의 선택이 잘못되어었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삼국통일 과정 중 전쟁 분야를 학문적으로 잘 정리한 책이다. 정말 교과서적이다. 한국사 교과서의 대학교 버전이라고나 할까? 내가 원한 것은 삼국통일에 대한 저자의 날카로운 해석과 새로운 정보의 습득이었는데 이 책을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이 책을 선택한 내 잘못이 크다. 아쉽다. 언젠가 다시 읽을 날이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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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16-05-06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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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은 성립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이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전쟁을 꼽으라면, 1950년 6월 25일에 있었던 한국전쟁을 꼽을 것이다. 하지만 더 소급해서 살펴보면, 역시 신라의 삼국통일까지 올라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개념에 반하는 주장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개중 가장 감정적이고 일반 대중에 태반인 것이, 영토의 불완전성을 지적한다. 즉, 호방한 기세를 가진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루었어야 한다는 영토민족주의를 자극하는 것이다. 나 역시도 고등학교 시절까지는 그런 생각했었다. 아마 이런 생각은 조선의 역사서에서도 보이는데, 지금 현재 그런 생각들은 불과 100여년 전의 타민족에게 이 땅을 강점당하는 시련을 겪으면서 더욱 더 강해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를 되돌릴 수는 없다. 신라가 삼국을 멸망하고 통일을 이룬 것은 바뀌지 않을 사실이다(정확히는 나당연합군). 지금 필요한 것은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미를 해석하고 평가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건, 역시 영토의 불완전성으로 인한 통일신라의 부정이다. 일단 백제의 전지역은 신라가 접수하였지만, 고구려의 영토와 주민은 일부분에 불과 하기때문에 삼국통일은 성립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런 주장에 대해 저자는 삼국이 항쟁을 하면서 지역의 변동은 항상 가변적이었으므로, 그렇게 쉽게 재단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두 번째 통일신라를 부정하는 견해로 신라로서는 (삼국을 통일/병합할)의지도, 그럴 능력도 없었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백제통합전쟁론을 들 수가 있겠다. 이 주장의 결정적인 주장은 문무왕이 671년에 설인귀에게 보낸 서한에서 언급된 내용에 근거를 둔다고 한다. 그 내용은 이세민이 당을 방뭉한 김춘추와 깊이 논한 뒤에 "내가 고구려와 백제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 백제 토지는 모두 신라에 주어 길이 평안하도록 하겠다"라고 약속했는데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공박 하였는데, 이로 인해 백제통합만을 목표로 삼았다고 보는 견해이다. 하지만 저자는 백제만 병합하려고 해도 그러지 못할 형편이었고,당시 신라 지배층으로서는 자국의 안녕을 위해 고구려와 백제 양국을 멸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능력이 수반되는 가는 별도의 문제지만, 분명히 삼국통일전쟁이 실은 백제의 병합만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 번째는 통일이라는 개념이 흩어져있던 동일한 것이 다시 합쳐지는 것을 의미하는데, 삼국의 주민을 서로를 이질적으로 보았으므로, 통일전쟁이라는 개념은 성립되지 않는 다는 견해인데, 이에 대해서는 삼국을 일찍부터 접촉해왔다고 서로를 익숙하게 였을 것이며, 비록 동족의식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삼국 전쟁이 격화 되면서 서로의 주민 이주 영역의 변동, 문화교류 따른 동질성이 생겼으며, 가장 보수성을 띄는 묘제 양식에 있어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석실봉토분으로 귀일되는 측면이 있었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왕조의 역사서에도 이들은 삼한이라 칭하면서 하나의 범주로 보았다는 면에서, 어느정도 동질성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중국고구려사론을 들 수가 있는데, 이것은 기본적으로 정치적은 의도가 다분히 개입된 것으로, 이전의 중국 왕조에게는 고구려 또는 발해의 계승의식이 있다는 것을 볼 수가 없고, 수-당대인들은 고구려,백제,신라를 삼한으로 하나의 범주로 보았다는 것을 들어 그런 개념이 결코 성립될 수 없음을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하는 입장에 서있는 이 책을 즐겁게 봤지만, 이 책에서 답하는 신라의 삼국통일 성립한다는 주장에는 약간의 의문을 가진다. 결국은 고구려의 전지역을 통합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식을 가진 발해의 건국은 통일신라의 균열을 가할 수 있다. 이 저서의 발해의 내용을 논하는 것은 아니지만, 삼국이 통합된 이후의 신라를 통일신라라고 하기 보다는 후기신라로 칭하는 것이 맞지 하는가 하는 것이 지금의 내 나름대로의 결론이다. 하지만 신라의 삼국통일의 의의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7세기 이후의 한민족 형성에 기틀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비록 삼국 유민의식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지만, 적극적으로 신라의 지배층은 일통삼한의식을 가지고 전파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 하나 느낀 것은 정말 해양세력인 일본 섬나라는 삼국통일전쟁기나 최종적으로 통일전쟁이 마무리 되는 나-당전쟁때까지 싸움구경이나 하며 자신의 실익을 찾았다는 점이다. 50년대의 한국전쟁을 통해서 발전한 것처럼. 새삼 한반도의 국가들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가진다. 항상 그렇긴 하지만.... 그 블랙홀 같은 황하문명에 빨려들어가지 않고 버텨서 지금의 한민족 의식을 가지게 했다는 것 자체에 자긍심을 가질만 하지 않을까?



삼국통일론에 대한 내용을 정리 하느라 책의 전체에 대한 평을 많이 적지를 못했는데, 당시 삼국의 지배층의 정책 결정을 제법 중요하게 보며, 그들의 움직임을 서술하는데, 이건 마치 소설을 보는 듯한 느낌으로 흥미진진했다. 일종의 학술서에 포함되는데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읽혔다. 생각보다는 남들에게 더 쉽게 추천할 수 있을만한 서적이다. 다음에 다시 읽으면서 정리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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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3-10-0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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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사의 관점에서 본 삼국 통일 전쟁

폭풍 전야.




641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보다 적절한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641년은 많은 변화를 예고한 해였습니다.




당(唐) 제국이 비단길에 자리 잡은 고창국을 멸망시켰다는 소식이 닿은 그해, 고구려는 뒤숭숭한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당 태종(太宗, 재위 626~649)은 천하를 손에 넣겠다는 야심에 찬 황제답게 숙적 고구려를 치겠다는 의지를 신하들 앞에서 공공연히 드러냈는데, 고구려도 눈과 귀가 있으니 당 태종의 야망을 까맣게 모를 리 없었습니다. 위기감이 커진 고구려 조정은 20여 년 만에 다시 현실로 다가온 통일 중국 왕조와의 전쟁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으나, 내부에서 불거진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습니다. 동부대인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이 위험인물로 떠올랐기 때문이지요. 왕과 대신들은 연개소문을 제거해 화근을 미리 없애려고 했지만, 그러한 움직임을 눈치챈 연개소문은 반격할 기회를 엿봤습니다.




한편 같은 해에 백제의 무왕(武王)이 세상을 떠나고 태자 부여의자(扶餘義慈, 재위 641~660)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백제는 새 시대를 맞았습니다. 부왕처럼 호전적인 성향을 지닌 부여의자, 즉 의자왕(義慈王)은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는 평가대로 즉위하자마자 친위 쿠데타로 권력을 강화하였고(관련 자료), 신라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췄습니다.




이듬해인 642년, 의자왕은 신라를 공격해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합니다. 곧이어 낙동강의 요충지인 대야성도 빼앗았습니다. 신라로서는 뼈아픈 패배였습니다. 뒷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재위 654~661)이 되는 김춘추(金春秋, 602~661)는 대야성의 성주이자 사위인 품석(品釋)과 딸 고타소랑(古陁炤娘)을 한꺼번에 잃는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마음속에 칼을 품은 김춘추는 백제에 복수하고자 고구려로 들어갑니다. 마침 대야성이 함락되고서 얼마 뒤에 고구려에서 정변이 일어났는데, 김춘추는 이것을 고구려와 협상할 기회로 여겼습니다. 김춘추는 신라가 연개소문 정권을 지지하는 대신에 고구려의 군사를 빌리겠다는 속셈으로 고구려행을 자원한 듯합니다.








삼실총에 그려진 공성도(문화콘텐츠닷컴)




하지만 정변을 일으켜 왕과 대신들을 죽이고 권력을 거머쥔 연개소문은 김춘추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연개소문은 몸소 병력을 이끌고 신라를 공격하며, 신라와 뜻을 같이할 마음이 없음을 확실히 합니다. 고구려와 손잡고 백제를 고립시키려던 신라는 되레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으로 곤경에 빠졌고, 협상에 실패한 김춘추도 곤혹스러운 처지가 됩니다.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했습니다.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이 뜻밖에도 요동의 작은 성인 안시성에 가로막혀 실패하면서 각국의 정세는 숨 가쁘게 돌아갑니다. 고구려, 백제, 왜의 연계에 맞서려면 신라는 당과 동맹을 맺어야 했고, 고구려를 무너뜨리려면 제2 전선을 구축해야 함을 절감한 당도 신라의 존재를 새삼 주목하였습니다. 648년,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간 김춘추는 당 태종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신라와 당의 이해관계가 일치함을 확인합니다. 이제 전쟁은 전에 볼 수 없는 양상으로 바뀝니다.




"삼국통일전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삼국의 사회적 변화와 국가적 발전의 귀결인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전의 면모를 띠었던 전쟁이었다. 삼국 외에 당과 왜가 직접 참전하였으며, 돌궐(突厥), 철륵(鐵勒), 해(奚) 등 북아시아 유목종족들이 당군의 일원으로 동원되어 참전하였다. 거란족과 말갈족은 일부는 고구려에 일부는 당에 가담하여 전투하였다. 그리고 몽골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설연타는 직접 개입하여 한반도나 만주지역에서 전투를 벌이지 않았지만, 고구려와 연결하여 당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해 오르도스 방면에서 당과 전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직접 군대를 파견하여 개입하지는 않았지만 토번(티베트)의 발흥은 이 전쟁의 추이에 바로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노태돈 교수의 『삼국통일전쟁사』는 제목 그대로 삼국 통일 전쟁의 전후사를 다룬 책입니다. 이 책에서 노 교수는 고구려, 백제, 신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여러 국가와 종족이 얽혀 수십 년 동안 이어진 삼국 통일 전쟁을 담담한 필치로 그렸습니다. 고대 동아시아 세계 대전이라고 불러도 좋을 삼국 통일 전쟁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전투 못지않게 그 배후에서 벌어진 외교전도 치열한 전쟁이었습니다. 예컨대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관련 기사)가 암시하듯 고구려는 당을 견제할 만한 세력을 찾아 머나먼 중앙아시아까지 사람을 보냈습니다.








<당염립본왕회도>에 그려진 고구려, 백제, 신라, 왜 사신들의 모습(문화일보)




고구려, 백제보다 뒤처졌었던 약소국 신라는 돋보이는 외교 성과를 거두며 최후의 승자가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습니다. 김춘추는 고구려, 왜, 당 등을 돌아다니며 신라가 불리한 상황을 뒤집으려 애썼고, 그 노력은 열매를 맺어 마침내 백제와 고구려를 잇달아 꺾었습니다.




신라의 기민한 외교 전략은 670년에 발발한 나당 전쟁에서도 빛을 발합니다. 이미 고구려의 평양성이 무너지기 직전부터 왜에 사신을 파견해 왜와 화해하고 머지않아 일어날 당 제국과의 전쟁에 대비하던 신라는 조공·책봉 관계를 역이용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 갑니다. 당군의 공세가 거세다 싶으면 당에 '사죄'한다고 하여서 적의 발을 묶고, 그 틈에 전열을 가다듬어 반격하기를 되풀이하며 전력의 열세를 극복했지요. 초강대국인 당 제국도 신라의 능구렁이 같은 양면 전술엔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결국, 한반도에서 당군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을 이룬 신라는 이후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립니다. 그것은 수십 년에 걸친 전쟁으로 커다란 피해와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삼국의 백성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보상이었습니다.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사람들은 신라가 외세인 당을 끌어들여 동족의 나라인 고구려와 백제를 쳤다고 비판하며 신라의 삼국 통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삼국 통일이나 통일 신라라는 용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이 생기지 않은 전근대를 외세와 동족이라는 구도로 바라볼 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중국인들의 눈에 고구려와 백제 그리고 신라는 풍속이 비슷한 '삼한의 백성'으로 보였다지만, 정작 신라의 입장에선 고구려와 백제도 당과 마찬가지로 '외세'였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지요. 오히려 노태돈 교수는 오히려 한민족의 기본 틀을 형성한 것이 삼국 통일 전쟁의 역사적 의의라고 설명합니다. 전쟁을 치르면서 삼국의 주민들이 동질성을 자각했고, 통일은 동질성을 강화했다는 것입니다. 전쟁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까요?




또 노 교수는 삼국 통일 전쟁이 대외 관계 측면에서도 큰 영향을 남겼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나 7세기 말 8세기 초 발해가 등장하고 당과 관계가 개선되자 신라는 일본과의 관계 재정립을 시도하였다. 신라로선 대일관계는 대당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당과의 안정적인 조공·책봉관계를 맺게 된 신라로선 이제 현실적으로 안보를 위해 일본의 동향에 더 이상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다. 일본은 인국으로서 같은 당의 조공국이니, 당연히 양국은 대등한 인국으로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 점에 일본이 반발하니 양국은 점차 불편한 관계가 되었다. 신라의 대외정책은 당과는 사대관계로, 일본과는 교린관계로 설정하였다. 이런 대외정책의 기조는 그 뒤 고려 조선을 거치면서 한국 왕조의 대외 정책의 기본 틀이 되었다."




이러한 삼국 통일 전쟁의 유산은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알게 모르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삼국 통일 전쟁이 한국 전쟁과 아울러 "한국사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전쟁"이라는 평가는 지나치지 않습니다.


- 2016년 12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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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돈의 《삼국통일전쟁사》 서평

프로필

2014. 3. 6. 22:36

이웃추가
섬네일
삼국통일전쟁사
작가
노태돈
출판
서울대학교출판부
발매
2009.02.25
리뷰보기

 

 

지금까지 삼국통일을 주제로 쓰여진 학술서나 역사소설은 몇차례 읽은 적이 있으나, 삼국통일에 대하여 학술적인 내용도 풍부하고 읽기도 쉬운 것으로는 노태돈 교수가 저술한 이 책이 단연 최고라고 봅니다. 이 책을 처음 접했던 때가 생각나는데, 그 당시에만 해도 삼국통일전쟁에 대해서는 막연하게 백제와 고구려의 협공에 밀린 신라가 당과 손을 잡고 적국을 차례로 멸망시킨 후에 최종적으로는 한반도를 집어삼키려 드는 당과 싸워 이를 무찌른 전쟁 정도로만 알 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이런 견해를 많이 고치게 되었습니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재미있고 인상적으로 읽어던 부분은 사실 삼국 간의 치열한 항쟁이나 고구려-당 전쟁 부분이 아닌 '외교전' 부분이었습니다. 처음에 이 책을 접했을때만 해도 전쟁사 위주로 책을 읽게 될 줄 알았으나, 삼국통일전쟁의 이면에는 삼국 뿐 아니라 중국 대륙의 당나라나 일본 열도의 왜국, 그리고 돌궐이나 설연타 등의 유목민족, 고창국 등의 서역 중앙아시아의 나라들 등 동아시아의 각종 세력들의 이해가 얽혀있는 복잡한 외교전이 있었다는 것이 무척 신선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학식이 미천하지만 책을 읽을 당시에만 해도 그 도가 더했던지라 이런 논지에 충격을 받고, 때문에 책을 더욱 탐독하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특히 백제가 왜와 교류가 많은 줄은 알고 있었으나, 신라가 왜와 통교를 시도했던 부분은 의외의 사실인지라 더욱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한편 이 책에서는 그동한 소홀히 공부했던 백제부흥운동사에 대해서 다시 고찰해 볼 수 있어서 굉장히 즐거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간 백제 부흥운동사에 대해서도 대략적인 내용만 알고, 복신이 무왕의 조카였다거나 혹은 백제가 어떻게 멸망했으며 일본으로 건너간 잔여 세력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점도 별 생각없이 <삼국사기>의 기사를 수용하고 있었는데, 이 책을 읽고나서 느낀 바가 많았습니다. 일전에 읽었던 노중국 교수의 <백제부흥운동사>를 다시 완독해보고 이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예정입니다.

 

 비슷한 주제로는 서영교 교수가 국방일보에 연재하고 있는 <고대 동아시아 세계대전>이 있는데, 이 책을 재미있게 읽으셨거나 혹은 삼국통일전쟁에 대해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적극 추천드립니다. 서영교 교수는 한국 고대사를 전쟁사 위주로 파악하고 있는 흔치 않은 연구자들중 한 명이라 굉장히 흥미롭고 참신한 주제의 논저를 많이 발표한 바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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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전쟁은 동아시아 국제전"
송고2009-03-26 18:00

송고 2009년03월26일 18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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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전쟁은 동아시아 국제전"노태돈 교수 '삼국통일전쟁사'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신민족주의 계열의 역사학자이자 민속학자인 손진태는 1948년 발간한 '조선민족사개설'에서 "고구려에 의한 민족통일이 성취되지 못하고 신라에 의하여 민족과 영토의 반분적 통일이 수행된 것이 민족적으로 커다란 불행"이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같은 책에서 "여하간, 신라의 통일에 의해 조선민족은 이에 결정되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고구려 옛 영토를 신라가 수중에 넣지 못한 일이 아쉽기는 하지만, 조선민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의식 혹은 집단은 바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이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물론 이런 '타협적'인 시각이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단재 신채호나 지금의 북한학계에서 용납될 리는 만무하다.

그들에게는 신라에 의한 한반도 통일은 시종일관 외세를 끌어들인 '동족상잔'일 뿐이며, 고구려 땅과 인민을 완전히 수용하지 못했으므로 결코 '통일'일 수 없으며, 더구나 발해가 등장하고 멸망하기까지는 '남북국시대'일 뿐이다.


이에 더해 최근에는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전쟁'이라는 개념 자체도 성립할 수 없다는 지적까지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한국학 연구총서 중 하나로 선보인 단행본 '삼국통일전쟁사'(서울대출판부)에서 우선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개념 자체가 성립할 수 있음을 논증하려 한다.

노 교수 또한 "개괄적으로 볼 때 이른시기부터 삼국인이 동일한 문화를 지녔다는 상정은 선험적인 이념일 뿐"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신라, 고구려, 백제를 한 데 아우르는 삼한(三韓)이라는 의식이 분명히 있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노 교수는 "이렇듯 객관적으로 동질적이던 세 나라와 그 주민을 합친 것은 '통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면서 특히 "7세기 후반, 전쟁의 종반부에서 당과 대결을 벌이면서 삼국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존재양태의 동질성을 자각하기 시작"했으며, 그것이 구체화한 형태가 바로 '삼한통일의식'이라고 부연한다.

물론 삼한을 하나로 통일했다는 의식을 확고하게, 그리고 가장 먼저 강화한 주체가 신라인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새삼스런 사실은 아니지만, 신라에 의한 삼한통일전쟁은 한반도 3국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당이 개입했으며, 왜(일본) 또한 하나의 축을 담당했고, 돌궐, 철륵, 해(奚) 등 북아시아 유목종족들도 당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들이 직접 당사자라면, 몽골고원 유목국가 설연타와 토번 또한 이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당과 대립과 군사충돌을 반복했다.

이런 점에서 노 교수는 삼국통일전쟁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삼국의 사회적 변화와 국가적 발전의 귀결인 동시에 동아시아 국제전의 면모를 띠었던 전쟁"이라고 강조한다.

이 전쟁이 직ㆍ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범위는 "가히 파미르고원 이동(以東) 지역 대다수의 나라와 종족들"이었다고 한다.

요컨대 삼국통일전쟁은 당시 동아시아 세계의 '세계대전'인 셈이다.

그 외에 이 전쟁이 한민족 형성의 기본 틀을 형성했으며, 국가발달사에서는 중앙집권적 영역국가 체제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대외관계사에서는 '사대교린'의 틀을 마련한 데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노 교수는 덧붙였다. 326쪽. 1만7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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