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3

김영한(사업가) - 나무위키 길상사 법정 스님

김영한(사업가) - 나무위키

김영한(사업가)

최근 수정 시각:       
이름
본명
김영한()
기명()
진향()
별칭
김자야(金)
길상화()
출생
사망
1999년 11월 14일 (향년 82세)
국적
직업
기생, 사업가
종교
학력
가족
양부 하규일, 1녀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대원각 운영2.3. 길상사 창건2.4. 사망
3. 백석과의 관계
3.1. 자야의 유래3.2. 백석과 동거와 이별
4. 과장된 이야기들
4.1. 송준의 증언4.2. 이동순 교수의 증언
5. 학력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사업가.

기생 출신으로 서울 3대 요릿집 중 하나인 대원각을 운영하여 큰 돈을 모았다. 후에 법정 스님무소유를 읽고 불교에 감화되어 당시 시가 1,000억 원대의 대원각을 대한불교조계종에 시주하여 화제가 되었다. 대원각은 길상사라는 로 탈바꿈하였기 때문에 길상사의 창건자로 여겨진다.

길상사 시주와 시인 백석의 연인이라고 주장하며 유명해진 기생이다. 하지만, 백석과 연인 관계였다는 것은 김영한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며, 백석 측은 이를 부인하였다.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나오는 자야가 바로 김영한으로, 김영한의 저서 <내사랑 백석>을 참고로 하여 만들어졌다. 이후 평생 결혼하지 않고, 서울 3대 요릿집 중의 하나인 대원각을 1950년대부터 운영하면서 백석을 기리며 생활했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유력 정치인의 애첩이었으며 딸(서모 씨)도 있다. 서씨는 길상사 시주와 관련해 대한불교조계종에 소송하여 승소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17세 때 여창명인() 김수정의 안내로 조선권번 정악전습소 학감을 지낸 금하 하규일 선생의 넷째 양녀로 들어갔다. 하규일 선생[2]으로부터 3년간 가무를 배웠다. 춤에도 소질이 두드러져 <무산향>, <검무>를 잘했으며, 특히 <춘앵무>는 그녀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잡지 『삼천리』에 수필을 발표하여 '문학 기생'으로도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주경야독으로 학업을 이어가던 중,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서둘러 귀국한다. 하지만 면회가 안 된다는 말을 듣고 함경남도 함흥 땅에 주저앉는다.

1936년 오로지 은인이던 해관 선생을 만나기 위해 '다시 기생이 되어 큰 연회 같은 곳에 나가 함흥 법조계의 유력한 인사들을 만나서 해관 선생님의 특별 면회를 신청할 수 있으리라'는 절박한 믿음으로 함흥권번으로 들어갔다.

2.2. 대원각 운영[편집]

6.25 전쟁이 끝난 직후, 자야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 산골짜기의 한식당 청암장이라는 별장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릿집을 지어 경영하기 시작했다. 대원각은 훗날 길상사가 된다.

그러나 자야 김영한이 별장을 사들여 대원각이라는 요릿집을 세웠다는 주장은 거짓임이 드러났다. 등기부에 따르면 자야가 길상사 땅을 취득하기 전 소유주는 ‘조봉희’라는 사람이었다. 조봉희는 박헌영의 이부누나이며,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 스님은 "실소유주는 우리 아버지이며, 6.25 전쟁의 혼란 이후 자야갸 꿀꺽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1953~1954년 나라가 몹시 혼란스러울 때 자야는 유력 정치인의 애첩이었고, 그 정치인으로부터 선물받은 별장을 대원각으로 개조하여 운영한 것이다.[3]

대원각은 군사정권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릿집으로 이름을 떨쳤다.

2.3. 길상사 창건[편집]

김영한은 1987년에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는 법정 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비롯한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며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을 짓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 시주 규모는 건물 40여 채와 대지 23,140㎡로, 당시 시가 1,000억 원이 넘었다.

처음에 법정 스님은 그 청을 사양하였다. 그러나 김영한은 근 10년 가까이 법정 스님을 찾아와 간곡히 부탁했고, 이에 법정 스님이 그 청을 받아들였다. 결국 법정 스님이 시주를 받아들이고, 1995년 ‘대법사’로 등록했다가 2년 동안 개·보수를 거쳐 지금의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로 이름을 바꾸어 재등록하였다.

법정 스님은 길상사의 창건 법회에서 불문에 귀의한 김영한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 주었으며, 당시 김영한은 수천 대중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길상사 건립 당시 '1,000억에 달하는 돈도 그 사람의 시 한 줄만 못하다', ('언제 백석이 가장 생각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따로 때가 어디 있나.'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99년 11월 사망했다. 김영한은 "나의 유해를 눈이 오는 날, 길상사 경내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화장을 치러 길상사 경내에 산골하였으며, 따로 묘지는 없다. 길상사 경내의 길상헌 뒤쪽 작은 언덕에는 김영한의 사당과 함께, 그의 공덕비와 백석의 시비()[4]가 세워졌으며, 극락전에 김영한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사망 이후, 유일한 혈육인 서모 씨가 자신의 상속분을 두고 카이스트와 소송전을 벌였다. 김영한은 자신의 재산 중 딸 서씨에게 현금과 부동산 등 31억 원 상당의 재산을 남기고 나머지 122억 원은 “우리나라 과학기술 발전에 써 달라”며 카이스트에 기증했다. 이에 서씨가 자신이 받은 상속액이 민법상 규정된 유류분보다 적다며 카이스트를 상대로 2000년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5] 3년여의 소송 끝에 2003년 카이스트가 서 씨의 유류분을 인정해 44억 원을 지급할 뜻을 밝히고, 서 씨 역시 카이스트 산하 장학재단에 이사로 취임하겠다는 의사를 보여 조정이 성립됐다.

이후 서씨는 조정된 상속분을 모두 어려운 이웃을 쓰기 위해 기부했다. 서씨는 소송 중이었던 2002년 3월에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공시지가 8억 5,000여만 원의 성북동 임야 480평을 환경운동연합에 기증하기도 했다.

3. 백석과의 관계[편집]

백석과의 관계는 100% 김영한의 주장이며, 객관적 근거는 전혀 없다. 다만, 시인 백석이나 기생 자야의 입장에서 당시 관계를 객관적 증거로 남길 만한 상황이었는지, 곤란한 처지는 아니었는지에 대한 판단 여지는 남아있다.

어디까지나 김영한의 말에 의한 것으로 1936년 가을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으로 나갔던 첫날, 시인 백석(당시 24세)과 김자야(당시 20세)는 처음 만났다고 한다. 기생과 손님으로 만났다는 것이다. 당시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였던 백석이 자기 옆에 와서 앉으라 했고, 자리가 파하고 헤어질 무렵 "오늘부터 당신은 이제 내 마누라요."라고 말했다고. 이 주장은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반영되었으며, 경상남도 통영 출신의 란(박경련)이라는 여성을 좋아했던 백석이 김영한을 보자마자 좋아한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

3.1. 자야의 유래[편집]

김영한은 "『당시() 선집』을 사왔을 때, 백석이 그 책을 읽고 '자야(子夜)'란 호를 지어주었다"고 주장했다. '자야'는 당나라 시인 이백의 「자야오가(子夜)」란 시 제목에서 따온 것으로, 이 시는 중국 동진()의 '자야'라는 여자가 변경으로 수자리하러 간 남편과의 생이별을 서러워하는 민요풍의 노래이다.

하지만 백석이 일본 아오야마학원에서 이백과 두보의 시를 배우며 심취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백석은 이에 관련해 시 <두보나 이백같이>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자신이 자야라고 주장하는 여인은 여인은 김영한 외에도 더 나왔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나타샤라고 주장하는 여자 역시 여럿이다. 나타샤는 '이국의 여인'을 뜻하는데도 말이다.

김영한의 주장을 담은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는 백석 시 「바다」,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이렇게 외면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을 가사로 만들며 자야와의 사랑을 담은 것으로 그렸으나, 이는 실제와 다르다. 「바다」만 해도 통영의 바다를 거닐며 쓴 시로, 백석이 사랑했던 박경련(란)을 생각하며 쓴 연가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역시, 자신의 친구와 결혼한 란에 대한 기억을 담고있다. 뮤지컬에 나오는 백석의 시와 서사는 서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김영한은 "백석이 '만주로 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제안했으나, 내가 백석의 앞길을 막게 될 것을 염려하여 거절했고,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 1938년 백석은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직을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게 된다.

3.2. 백석과 동거와 이별[편집]

김영한은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를 그만두고 <조선일보> 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의 11칸짜리 작은 집에서 살림을 차렸다"고 주장했으나, 증거 자료를 전혀 내놓지 못하였다. 백석이 최고급만을 걸치는 패셔니스타에 결벽증이 있을 만큼 깔끔한 성격이어서, 그런 데서 살림을 차려 자고 먹을 사람이 아니다. 당시는 편지로 연락하는 시대라서 백석의 지인들만 해도 백석에게 받은 편지가 많을 정도로 백석은 편지를 자주 썼는데, 연인에게 편지 1통도 남기지 않았다는 게 말이 되는지 알아서 생각하기 바란다.

백석은 1939년 1월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부잣집 딸과 혼례했다고 하고, 김영한은 중국베이징, 쑤저우, 항저우, 상하이 등지를 1달 동안 여행했다고 한다. 백석이 결벽에 가까운 성격이라 과연 기생을 사귀었을지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백석이 관계를 맺었던 여성들은 명문 여학교를 다닌 부유한 집안의 신여성들이었다. 첫사랑이었던 란은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 첫 아내 역시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다녔다고 알려져 있다. 2번째 아내 문경옥 역시 고등교육을 받은 부유한 집안의 딸이다. 그와 어울렸던 여류 문학가들 역시 모두 당대의 신여성들이었다.

김영한은 "백석이 홀로 만주 신징으로 떠났고, 해방 후 백석이 평안북도 신의주시에 잠시 거주 후 정주로 이동한 사이 6.25 전쟁이 발발해, 영영 만날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는데, 실제 그 기간 동안 백석은 북한의 유명 여성 음악가인 문경옥과 결혼해 2년간 살다가 이혼했으며, 해방 무렵 만난 3번째 아내 리윤희와는 이후 50년간 해로한다. 김영한은 "백석은 다섯 여인보다 나를 사랑했다"고 주장했다.

4. 과장된 이야기들[편집]

4.1. 송준의 증언[편집]

송준은 1990년대 초반부터 백석과 백석의 시가 끼친 영향과 관련해 책을 쓰기 시작한 백석 연구자이다. 송준은 "생전 김영한을 직접 인터뷰했는데, 그가 진짜 백석의 연인이었는지 매우 의구심이 든다"는 요지로 책에 적고 있다. 백석의 시에 대해 거의 모르고, 그렇게 많은 돈이 있으면서도 백석의 시집이나 관련 자료 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증거로 든다. 또 3년을 연애했다면서 편지 하나 가진 게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기생인 그녀가, 백석이 유명해지니 뭔가 있어 보이는 척(?)하려고 관계를 과장한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으로 짤막하게 맺는다.

국문학계에서도 자야가 <내사랑 백석>이라는 책에 거짓을 많이 썼다고 본다. 백석이 자신을 만나기 전에 쓴 시인데 자신한테 헌사했다는 둥. 요즘으로 치면 텐프로 언니가 유명인의 애인이었다고 하는 격이랄까, 백석이 직접 자야에 대해 언급한 문헌은 전혀 없다.

4.2. 이동순 교수의 증언[편집]

한국 최고의 백석 전문가 이동순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김영한에 대한 이야기들 중 길상사에 대한 내용은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동순 교수가 김영한으로부터 직접 들은 내용에 의하면 길상사는 일제강점기 친일파가 조선총독부에 헌납한 별장인데, 해방후 정부 고위 관리가 자신의 인 김영한에게 선물로 주었다. 그리고 김영한은 이 별장을 1970년대부터 요릿집으로 개조하여 영업하였는데 유지비가 많이 들고 경영이 부실하여 대학에 기증하려 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종교기관으로 바꿀 생각으로 법정 스님과 여러 차례 만났다. 이후 김영한은 수년간 주저하며 기증 의사를 번복하였지만, 끝내 기증으로 마음으로 굳히고 그다음날 이 사실이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된 것이라 한다.

5. 학력[편집]

1953년 김자야는 중앙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학과만학으로 졸업했다.
[1] 음력으로는 1916년 병진년() 12월 25일생[2] 가곡의 천재 박효관에게 사사한 구한말 남창명인(唱名人)이다.[3] 출처: 서울신문이동순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의 증언#[4]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로 시작하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다.[5] 다만 소송 대상에 김영한이 시주한 길상사는 제외됐다.====
==길상사유래[길상사 김영한/길상사 순애보/ 백석시인/요정 대원각] 2013. 12. 31. https://blog.naver.com/2009dongjin/20202238232
겨울을 재촉하는 12월 하순, 우리 일행은 서울시 삼각산 남쪽 기슭, 성북동에 자리한길상사를 찾았습니다. 산자락을 마주보며 흘러 내려온 산세는 조그마한 계곡을 만들었고 그 위로 단출하게 나무로 만든 다리가 보입니다.목교 건너편에는 경사지를 파내어 평평하게 터를 닦고 조경석을 쌓은 터 중앙에 아담한 석조 조형물이 보입니다. 조형물에는 “시주 길상화 공덕비”라고 씌어져 있었습니다.길상화라는 보살과 길상사라는 사찰과는 어떠한 연관이 있었을까?
<길상사 왼쪽 계곡에 위치한 조그마한 목교>공덕비의 옆에는 공덕주 길상화 보살에 대한 공덕비의 내력과 함께 백석(본명 백기행)의 시 “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라는 시가 적혀 있습니다. 공덕비의 내력 하단에 아무런 설명 없이 나타난 백석의 시는 후세에 무엇을 알리기 위함일까?“나타샤를 사랑하고 / 눈은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 눈이푹푹 쌓이는 밤 / 흰 당나귀를 타고 / 출출이(뱁새)가 우는 깊은 산골로 가서 / 마가리(오두막집)에서 살자.”서정적인 감성으로 남녀의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담은 시(詩)였다. 두 남녀사이에 사랑의 걸림돌이 너무 많았나 보다. 우리에게는 사랑이 있으니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서구애(拘礙) 받지 말고 오두막집에서 살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이 보인다.<목교를 건너면 조그마한 터에 아담하게 세워진 길상화 공덕비> <공덕비 안내문, 하단에 아무런 설명 없이 백석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1916년 일제 강점기시대였다. 집안이 어려워 15살 나이에 일찍시집을 갔으나 병약한 남편이 죽자 마지못해 진향(眞香)이라는 기명(妓名)을 가진 기생의 길을 택하게 된다. 암울한 시대에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기생으로 시작한 길, 제대로 가고 싶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웠다. 시와 그림에도 재능이 있었다. 미모를 겸비한 다재다능한 기녀로 변하여 가고 있었다. 23살 때는 잠시나마 일본 도쿄로 유학까지 다녀와 신지식 여성으로 되어 있었다.그러던 어느 날, 함흥 영생여고 회합자리에 나갔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얼굴, 거기에해박한 지식, 달변의 영어교사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한 눈에 반해 버렸다. 그녀의 가슴에 한 평생 간직하게 될 이름, “백석(白石)”과의 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백석(본명 백기행)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왔다. 아름다운 면모에 다재다능한 재능까지 겸비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자야(子夜)라고 하는 아명(雅名)을 지어 주었다. 백석은 사랑하는 여인과 꿈만 같은 동거생활을 하게 된다.그러나 백석의 집안은 완고했다. 기생과 같이 산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다. 백석은고뇌에 빠졌다. 만주로 같이 떠나자고 그녀를 설득했다. 동거생활 3년째 되던 해였다.그녀는 생각했다. 그 길은 백석의 앞길을 막는 일이라 생각했다. 거절하였다.백석은 만주로 떠났다.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나서지 못한 선택은 영원한 이별의 길이되고 말았다. 일제로부터 해방이 되었지만, 백석은 고향인 함흥으로, 그녀는 서울로,남북 38선의 등장, 6월25일 한국전쟁, 이러한 사건들이 둘의 만남을 방해하였다.그녀는 1953년 중앙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사랑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마음속의 허전함을 달래기 위해, 재산을 모으는데 전념하여 서울의 3대 요정중의 하나라고알려진 “대원각”의 주인이 되었다.
<현재 길상사의 극락전, 이전에 요정 대원각><단청을 하지 않은 길상사 건물의 일부>세월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녀는 백석을 잊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백석의 생일날 7월1일에는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머리가 희어지고 나이가 많아 질수록 그리움은 더해 갔다. 그렇지만, 이제 혼자 살아 온 인생을 정리할 때가 되었다.일평생 가슴에 묻어둔 백석과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흔적이나마 남기고 싶었다. 1997년2억 원을 출연하여 사랑하는 이의 “백석 문학상”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월간 창작과비평에 “백석, 내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라는 회고록을 출간하였다.”내 나이 어언 일흔셋 / 함께 살던 그 시절의 추억은 내 생애의 전부 / 내 가슴속의 그리움은 / 쏟으려 해도 쏟기지 않는 물병 / 서러움만이 저절로 쏟아져 나온다“보살이었던 그녀는 1천억 원대 대원각을 시주하고 사찰로 만들고 싶었다. 법정스님에게 뜻을 알렸다. 정중하게 거절당하였다. 10년에 걸친 간곡한 부탁에 법정스님은 끝내시주를 받아 들였다. 1997년 대원각이 길상사라고 하는 사찰로 재탄생하였다.그리고 2년 뒤, 1999년 11월 14일, 평생 일군 터의 길상헌(吉祥軒)에서 생애 마지막 밤을 보내며 눈을 감았다. 83세였다. 파란만장한 여인의 삶이 끝났다. 눈이 내려 세상이순백으로 변하던 날, 화장유골은 길상헌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졌다(길상사 자료)<길상사의 길상헌, 이곳에서 자야는 생애 마지막 밤을 보내고 눈을 감았다.>강너울 깊은숲속 심경산방에서 들려주는 이야기 이 블로그에서 검색댓글 8이야기의 주인공 그녀는 당대의 여걸 김영한(金英韓,1912~1999)이다. 기명은 진향(眞香), 아명은 자야(子夜)이다. 1997년 길상사가 탄생되던 날 김영한씨는 법정스님으로부터 염주 한 벌과 길상화(吉祥華)라는 불명(佛名)을 받았다. 길상사와 연관이 깊다.당시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 저기 보이는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길상사자료)죄 많은 여자라니? 음기(陰氣)로 부를 축적한 곡절 많은 그녀의 인생을 빗댄 말일까?하필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을 가리키며 그 곳에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이소원이라니? 가슴 깊은 곳에서 간절하게 올라오는 속마음을 이야기 하려는 것일까?<길상사의 범종각(梵鐘閣)>그녀의 인생은 행복한 삶이었을까? 부(富)를 축적하였고 그리고 재산을 뜻하는 곳에시주 하였다. 행복은 스스로 받아들이기 나름이라고 하지만 최소한 사랑한 사람을 일평생 가슴에 간직한 순애보는 어떻게 평가할까? 행복이라 해도 될까?앞서 소개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詩)를 다시 음미하여 본다. 백석이 사랑하는 여인( 본명金英韓, 아호子夜)을 위하여 쓰인 시라고 알려져 있다. “눈이 푹푹 쌓이는 밤, 우리 깊은 산골로 들어가 오두막집에서 살자” 사랑하는 사람끼리이글은 길상사자료, 각종 사전, 프레시안뉴스, 카페자료, 블로그자료를 참고하여 필자의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참고자료>백석은 북한체제하에서 시인으로 활동하였다. 남한에서는 재북시인이라고 해서 취급하지도 않았다. 1987년 월북 작가 해금조치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북한에서 결혼하  여 자식을 두었다. 대표적인 사랑의 서정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는 시(詩)에서과연 나타샤가 누구일까?나타샤 지칭 인물로 먼저 친구 결혼식장에서 본 이화여고 출신 “란(蘭)”을 꼽는다. 서울에서 경남 통영까지 “란”을 만나러 먼 거리를 몇 번씩 달려 왔지만 만나지 못한 여성이다. 통영에 가면 충렬사 건너편 쌈지공원에 백석의 시비(詩碑)가 있다.다음에 영생여고 회합자리에서 만나서 헤어지기까지 3년간이나 동거를 하였던 “자야(子夜)”가 있다. 길상사가 탄생되도록 대원각을 시주한 김영한(金英韓)이다. 그녀의 회고록에서 백석에게는 5인의 여성이 있었지만, 나타샤는 본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
==
==
==

No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