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9

【全編配信】日本が81年隠してきた「戦争トラウマ」戦場のストレスで「幻覚」心を病んだ兵士は戦後、家族に虐待・性暴力 父親の“足跡”をたどる娘の思い|父は戦争を連れて帰った〈カンテレ・ドキュメンタリー〉 - YouTube

【全編配信】日本が81年隠してきた「戦争トラウマ」戦場のストレスで「幻覚」心を病んだ兵士は戦後、家族に虐待・性暴力 父親の“足跡”をたどる娘の思い|父は戦争を連れて帰った〈カンテレ・ドキュメンタリー〉 - YouTube


【全編配信】日本が81年隠してきた「戦争トラウマ」戦場のストレスで「幻覚」心を病んだ兵士は戦後、家族に虐待・性暴力 父親の“足跡”をたどる娘の思い|父は戦争を連れて帰った〈カンテレ・ドキュメンタリー〉
KTV NEWS
468,196 views  Aug 29, 2026
ザ・ドキュメント『父は戦争を連れて帰った』
カンテレ 2026年8月28日放送

[番組公式ページ]https://www.ktv.jp/docu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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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81年。戦争による傷病者の歴史を伝える国の施設で、新たな展示が始まった。テーマは、戦場で心に傷を負った日本兵と、その家族の苦しみ。これまで社会でほとんど顧みられることのなかった、戦争被害だ。

大阪市でカフェを営む藤岡美千代さん(67)は、9歳で亡くなった父親の写真を、今も直視することができない。父・古本石松さんは元日本兵。戦争の話を繰り返し、雨風の音に「軍隊の足音がする」と怯え、酒に溺れて家族に暴力を振るった。幼い藤岡さんたちを柱に投げつけ、時にはガス栓を開けて「みんなで死のう」と迫った。父が死んだと聞いた時、藤岡さんは「やった」と喜んだという。しかし成人後、父の死因が自殺だったと知り、「自分が父を追い詰めたのではないか」と自らを責め続けた。父の死後も、その傷が消えることはなかった。

そんな藤岡さんが3年前に出会ったのが、「PTSDの日本兵家族会」だった。そこには、日本兵だった父親の暴力やアルコール依存、自殺などに苦しんだ家族たちがいた。「自分だけではなかった」。藤岡さんの中で、それまで断片的だった自らの生い立ちが、父の戦争体験とつながっていった。

家族会代表の黒井秋夫さん(78)も、元陸軍兵の父親を「でくのぼう」と軽蔑して育った。しかし父の死後、遺品から満州で「匪賊討伐」に従事していたことを知る。同じ時期、同じ部隊にいた元兵士の手記には、人を殺すことを強いられ「人間の皮をかぶった獣に変わった」と記されていた。戦争は、人の心をどう変えるのか。精神科医は、戦場で受けた強烈なトラウマが、時を経ても「現在進行形」の記憶として蘇ると指摘する。一方、日本では兵士の心の傷が長く「個人の弱さ」とされ、十分に顧みられないまま、その苦しみは家庭に委ねられてきた。

藤岡さんは今、封印してきた記憶を書き残し、公の場で語り始めている。そして、父が戦場で何を経験したのかを知ろうと、軍歴を取り寄せた。21歳で海軍に召集された父は、千島列島の松輪島を経て、終戦後はシベリアに3年間抑留されていた。藤岡さんは、その足跡をたどる。憎しみしかなかった父に、少しずつ別の感情が芽生えていく。

戦争は、戦場だけで終わるのではない。兵士が抱えて帰った傷は、家庭に持ち込まれ、時に子どもたちの人生をも変えていく。戦後81年。父が連れて帰った戦争と向き合い続ける、一人の娘と家族たちの姿を追った。

語り:豊田康雄(カンテレアナウンサー)
ディレクター:竹下洋平
撮影:平田周次
編集:堀田浩司
プロデューサー:宮田輝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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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아버지는 전쟁을 데리고 돌아왔다(父は戦争を連れて帰った)>의 요약과 평론입니다.

<아버지는 전쟁을 데리고 돌아왔다> 요약

2026년 8월 칸사이 TV(カンテレ)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아버지는 전쟁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패전 후 81년 동안 일본 사회가 외면해 온 '일본병사의 전쟁 트라우마(PTSD)'와 그로 인해 대를 이어 고통받은 가족들의 삶을 조명한다.

오사카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후지오카 미치요(67)는 어린 시절 옛 일본군 출신 아버지(후루모토 이시마츠)의 심각한 가정폭력과 알코올 중독, 가스 배관을 열고 동반자살을 시도하던 광기 속에서 공포에 떨며 자랐다. 아버지는 바람 소리나 빗소리에도 군대가 쳐들어온다며 발작을 일으켰고, 결국 가족과 이혼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후지오카는 아버지가 죽었을 때 안도감을 느꼈지만, 훗날 자살 소식을 접하고는 '내가 아버지를 용서하지 않아 죽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해와 정서적 고통을 겪었다.

전후 50년 넘게 이를 개인 가정의 비극이자 수치로만 묻어두었던 그는, 3년 전 구로이 아키오(78)가 설립한 <PTSD 가족회 일본병사>를 만나며 비로소 자신의 비극이 아버지의 '전쟁 신경증(PTSD)'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는다. 전시 일본군은 정신 이상을 겪는 병사들을 '황군에 나약한 병자는 없다'며 수치스러운 존재로 취급해 기록을 은폐하거나 소각하려 했고, 전후 일본 정부 역시 이들의 정신적 외상을 공적으로 치유하지 않은 채 고스란히 가정의 몫으로 떠넘겼다.

가족회 대표인 구로이의 아버지 또한 만주에서 중국인 농민 등을 학살하는 '비적 토벌'에 동원되어 인간성을 파괴당한 채 귀환하여 평생 무기력과 침묵 속에 살았다. 구로이는 일본인 병사의 트라우마를 논하기에 앞서,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하고 짓밟힌 아시아 피해자들의 트라우마는 수배, 수십 배에 달한다는 가해와 피해의 인과관계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후지오카는 아버지의 군 복무 기록을 추적해 아버지가 쿠릴 열도(지시마 열도) 마쓰와섬 전투를 거쳐 종전 후 혹한의 시베리아에서 3년간 포로로 억류되어 동료들의 시신을 묻는 참상을 겪었음을 알게 된다. 과거의 폭력을 '용서'하는 단계는 아닐지라도, 가해자이자 전쟁의 희생자였던 아버지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마주하는 '다시 살아가기(生き直し)'의 여정을 밟는다. 가족의 치부를 드러낸다는 이유로 동생과 연락이 끊기는 아픔 속에서도, 그는 전쟁이 전장에서 끝나지 않고 가정과 다음 세대의 삶까지 파괴한다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얼굴과 실명을 밝히며 증언을 이어간다.

평론: 총성이 멈춘 자리, 가정으로 침투한 전장

<아버지는 전쟁을 데리고 돌아왔다>는 '패전'이라는 거시적 역사 담론 뒤에 가려져 있던 미시사적 비극, 즉 귀환병의 PTSD와 그 폭력이 가정 내 약자(여성과 아이들)에게 전가된 2차 전쟁의 참상을 정면으로 고발한다.

이 작품의 미덕은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국가적 폭력의 연쇄 고리를 명확히 짚어낸다는 점에 있다. 일본 제국주의는 침략 전쟁터에서 청년들에게 살인과 잔혹 행위를 강요해 '인간의 가죽을 쓴 짐승'으로 정신을 파괴했다. 그리고 패전 후에는 '황군의 불명예'라는 억압적 이데올로기 아래 병사들의 정신적 외상을 은폐하고, 치료와 보살핌의 책임을 오롯이 각 가정에 내던졌다. 귀환병들의 통제 불능 상태, 알코올 중독, 가정폭력, 아동학대, 자살은 단순한 개인의 나약함이나 인성의 파탄이 아니라 국가가 방치한 '전쟁의 외주화'였던 셈이다.

또한, 다큐멘터리는 자칫 빠지기 쉬운 '일본인 피해자 중심주의'의 함정을 엄격하게 경계한다. 가족회 대표 구로이 아키오의 입을 통해, 일본병사들이 겪은 정신적 붕괴의 기저에는 무고한 아시아 민중을 살상한 '가해의 기억'이 자리 잡고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 억압받고 살해당한 중국과 한반도 등 아시아 피해자들의 공포와 트라우마가 침략군 병사들보다 훨씬 거대했음을 상기시키는 대목은, 이 고발이 단순한 자기 연민에 머물지 않고 전쟁 범죄의 본질을 직시하도록 이끈다.

후지오카 미치요의 여정은 '손쉬운 화해나 용서'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깊은 울림을 준다. 그는 여전히 아버지의 사진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며, 아버지가 겪은 시베리아의 지옥을 확인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이것은 이해의 과정이지 용서의 과정은 아니다"라고 선을 긋는다. 용서할 수 없는 가해자이자 국가 폭력의 파괴된 희생양이라는 두 얼굴을 분리하지 않고 직시하려는 태도는 피해 생존자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주체적인 치유의 방식이다.

전쟁은 종전 선언이나 조약 체결로 끝나지 않는다. 국가가 침묵하고 사회가 외면한 전쟁의 독기는 식탁 위로, 아이들의 잠자리로 고스란히 흘러들어 대를 이어 삶을 파괴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국가가 주도한 전쟁이 개인의 내면과 가정을 어디까지 황폐화할 수 있는지를 처절하게 증명하며, 전후 8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평화와 역사 직시가 왜 절실한 과제인지를 묻고 있다. 세진님, 이번 다큐멘터리에서 다룬 전후 일본 사회의 어두운 이면과 관련하여 더 깊이 살펴보고 싶은 부분이 있으신가요?

  • 일본 내 전쟁 트라우마 연구 및 은폐의 역사: 구 일본군이 '전쟁 신경증' 환자들의 진료 기록을 왜 소각하려 했고 사회적으로 어떻게 금기시되었는지에 대한 배경

  • 타국의 비교 사례: 미국(베트남전·이라크전) 등 다른 국가들의 귀환병 PTSD 인정 과정 및 국가 차원의 보상·치유 체계와의 비교

  • 가해자성과 피해자성의 공존 문제: 침략 전쟁 가담자들의 내면적 붕괴와 식민지·피침략국 민중의 트라우마를 바라보는 한·일 학계의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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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は戦争を連れて帰った — 아버지는 전쟁을 데리고 돌아왔다>

2026년 8월 28일 간사이TV의 <ザ・ドキュメント>가 방영한 <父は戦争を連れて帰った>는 전쟁이 끝난 뒤에도 군인의 몸과 정신 속에 남아 가족에게 전달되는 ‘전후의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중심 인물은 오사카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67세의 후지오카 미치요(藤岡美千代)다. 그는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사진을 지금도 똑바로 바라보기 어렵다. 아버지는 귀환 후 술과 폭력에 의존했고, 어린 자녀를 기둥에 내던지거나 가스 밸브를 열어 “다 같이 죽자”고 위협했다.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린 후지오카가 처음 느낀 것은 슬픔이 아니라 “야った(잘됐다)”라는 안도였다. 그런데 그 한마디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죄책감이 되어 그를 따라다녔다.

이 작품이 묻는 핵심은 간단하면서도 무겁다.

“아버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는가, 아니면 전쟁이 아버지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1. 전쟁터에서 가정으로 이동한 폭력

후지오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비가 많이 내리거나 태풍이 불 때 특히 불안해졌다. 그는 집 안을 서성거리며 “병사들이 온다”, “적이 온다”는 식의 말을 했다. 어린 딸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훗날 아버지의 군 경력을 조사하면서 그러한 행동과 전쟁 경험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게 된다.

1943년 스무 살의 나이에 해군에 소집된 아버지는 일본 북방의 전쟁기지에 배치되어 미군의 반복적인 공격을 경험했다. 종전 뒤에는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약 3년 동안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다. 혹독한 추위와 강제노동, 식량 부족 속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귀환했다고 해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 지점에서 제목 <父は戦争を連れて帰った>, 즉 “아버지는 전쟁을 데리고 돌아왔다”의 의미가 분명해진다. 아버지만 돌아온 것이 아니라 공습의 공포, 죽음의 기억, 포로생활의 굶주림, 공격당할지 모른다는 긴장까지 함께 가정으로 들어왔다.

그 결과 전쟁터의 공포가 가족에게는 폭력으로 나타났다.

다큐멘터리는 이를 단순히 “난폭한 아버지”의 이야기로 처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폭력을 정당화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 균형이 이 작품의 중요한 장점이다. 피해를 입은 아이에게 “아버지도 피해자였으니 이해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대신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 역시 전쟁이라는 거대한 폭력체제에 의해 파괴된 사람이 아니었는가”라고 한 단계 더 깊은 질문을 던진다.

2.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 가족회의 발견

후지오카에게 전환점이 된 것은 약 3년 전 <PTSDの日本兵家族会>, 즉 ‘PTSD 일본군인 가족회’를 알게 된 일이었다.

그곳에는 아버지의 음주, 폭력, 자살, 극심한 분노와 침묵에 시달렸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후지오카가 처음 발견한 것은 의학지식이 아니라 “우리 집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가정폭력 속에서 성장한 아이는 흔히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내가 나쁜 아이였기 때문에 맞았다.”

후지오카 역시 그러한 감정을 수십 년 동안 가지고 살았다. 그런데 비슷한 경험을 한 가족들을 만나면서 개인의 수치와 죄책감이 역사적 질문으로 바뀐다.

“왜 그렇게 많은 전쟁 귀환병 가족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났는가?”

다큐멘터리는 여기서 개인 심리극에서 사회사로 이동한다.

3. 구로이 아키오의 아버지 — 피해자이면서 가해자가 된 병사

가족회의 대표 구로이 아키오(黒井秋夫)의 이야기는 작품을 더욱 복잡하게 만든다.

그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를 무능하고 무뚝뚝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다. 가족은 가난했고 아버지는 오랫동안 안정적인 직장을 얻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은 뒤 남겨진 자료를 조사하면서 그는 전혀 다른 아버지를 발견한다.

아버지는 만주에 파견된 일본군 병사였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중국인 포로를 살해하는 훈련에 참여했던 경험이다. 다큐멘터리에 소개되는 아버지의 증언에서 그는 처음 사람을 죽였을 때 자신이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쓴 짐승”

으로 변한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다.

이 대목은 작품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쟁 트라우마를 말할 때 흔히 ‘적의 공격을 받은 병사’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자신이 다른 사람을 죽인 경험, 즉 가해 경험 또한 인간의 정신을 파괴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전쟁은 병사를 피해자와 가해자로 깔끔하게 나누지 않는다. 한 병사가 동시에 국가폭력의 도구이면서 그 폭력에 의해 파괴된 존재가 될 수 있다.

구로이의 아버지는 중국인에게 폭력을 행사한 일본 제국의 군인이었으며 동시에 그 행위를 수행한 뒤 평생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이었다.

이 복합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다큐멘터리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건드린다.

4. 일본 사회가 오랫동안 외면했던 ‘병사의 마음의 상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당시 군 병원에는 ‘전쟁신경증’ 등의 증상으로 입원한 일본군 병사가 약 1만5천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군은 이들을 ‘정신적으로 나약한 사람’처럼 취급했고 관련 자료도 오랫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특히 작품은 전후 일본사회가 육체적 전상자는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정신적 상처는 ‘개인의 나약함’으로 처리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치료되지 않은 문제가 가족에게 넘어갔다.

알코올 의존,
폭력,
돌발적인 분노,
악몽,
사회생활의 실패,
자살.

그리고 다음 세대에는 공포, 분노, 죄책감, 가족에 대한 수치심이 남았다.

이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전쟁의 시간은 따라서 1945년 8월 15일에 끝나지 않는다.

“전쟁 → 병사 → 가족 → 자녀”

라는 경로를 따라 수십 년 동안 지속된다.

2018년 가족회가 만들어졌고 증언자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작품은 2024년도에 이르러서야 일본 정부가 일본군 병사들의 ‘마음의 상처’에 관한 실태를 처음 조사했다고 설명한다. 작품이 “전후 81년”이라는 표현을 반복하는 것도 바로 이 긴 침묵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5. 후지오카가 아버지를 ‘용서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후지오카가 갑자기 아버지를 용서했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맞았고, 죽음의 위협을 받았으며,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기뻐했다. 이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아버지의 군 기록을 찾아보고, 시베리아 억류 경험을 알고, 아버지와 비슷한 귀환병 가족을 만나면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선에 새로운 층위가 생긴다.

“나를 때린 아버지” 이전에

“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전쟁터로 끌려간 청년”

이 존재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에 아버지의 고향을 찾아가 옛집의 흔적을 확인하는 장면이 중요하다. 후지오카는 그곳에서 자신이 전혀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용서라기보다는 ‘재인식’에 가깝다.

“아버지가 한 일은 잘못이었다”와
“아버지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다”는 말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다.

작품은 바로 그 두 문장 사이에서 끝난다.

6. 이 다큐멘터리의 가장 큰 성취

나는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성취를 ‘전쟁사의 단위를 가족으로 바꾼 것’이라고 본다.

전쟁사를 흔히 군대, 전투, 사망자 수, 국가 간 관계로 서술한다. 그러나 <父は戦争を連れて帰った>가 보여주는 전쟁의 가장 작은 단위는 거실과 부엌과 어린아이의 기억이다.

아버지가 밤에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것,
비가 오면 불안해하는 것,
술을 마시는 것,
아이를 내던지는 것,
말없이 앉아 있는 것.

겉으로 보면 이것들은 모두 ‘가정사’다.

그러나 다큐멘터리는 그것들을 다시 전쟁사 속에 놓는다.

이러한 관점은 전쟁의 비용을 훨씬 길게 계산하도록 요구한다. 전사자와 부상자만 계산해서는 전쟁의 피해를 알 수 없다. 귀환자의 정신적 상처와 배우자·자녀가 받은 상처까지 포함한다면 전쟁의 피해 기간은 수십 년, 어떤 경우에는 세대를 넘어간다.

7. 동시에 조심해서 볼 부분

다만 이 작품이 모든 것을 PTSD 하나로 설명한다고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수십 년 전에 죽은 사람에게 오늘날의 진단기준을 적용해 “그는 확실히 PTSD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후지오카의 아버지에게 나타난 폭력에는 전쟁 경험뿐 아니라 알코올, 빈곤, 전후 사회환경, 가족관계 등 다른 요인도 작용했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의미는 사후적으로 정확한 정신과 진단을 내리는 데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그동안

“술주정뱅이 아버지”
“폭력적인 아버지”
“무능한 아버지”

라는 개인적 도덕평가로만 이해했던 사람들의 삶을 전쟁이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다시 바라보게 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여기에는 일본의 특수한 문제가 하나 더 존재한다.

일본 병사들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다 보면 자칫 일본군을 전쟁의 피해자로만 그릴 위험이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구로이 아버지의 중국인 살해 경험을 삽입함으로써 그 위험을 상당 부분 피한다. 일본군 병사는 전쟁의 희생자였지만 동시에 중국과 아시아 사람들에게 폭력을 행사한 제국군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나는 이 점이 이 작품의 윤리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맺음말 — ‘전쟁은 언제 끝나는가’

후지오카는 아버지가 죽은 뒤 거의 60년 동안 아버지를 미워하고 두려워했다. 그런데 60대가 된 뒤에야 아버지가 겪었던 전쟁을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과거 역시 달라지지 않는다.

달라지는 것은 과거를 바라보는 관계다.

“아버지가 나에게 왜 그랬을까?”

라는 질문이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라는 질문으로 바뀐다.

이 작은 변화가 <父は戦争を連れて帰った>가 도달하는 핵심이다.

이 작품은 ‘가해자를 용서하라’는 이야기도 아니며 ‘전쟁 피해자였으니 책임이 없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오히려 전쟁이 인간에게 무엇을 시키고, 그것을 행한 인간에게 무엇을 남기며, 그 상처가 어떻게 아무 관계도 없었던 아이들에게까지 전달되는지를 추적한다.

그래서 제목을 조금 확장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전쟁에서 돌아왔지만, 전쟁은 아버지에게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전쟁은 결국 가족 전체의 삶 속으로 들어왔다.>

이 다큐멘터리가 보여주는 ‘전후 81년’은 일본이 81년 전에 전쟁을 끝냈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어떤 가족들에게는 81년 동안 아직도 전쟁의 끝을 찾아가고 있다는 뜻에 더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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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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階段に飾られた家族写真。
1つだけ黄色い半カ地で覆われている。
私の知らない父なんですよ。このこの写真のあの海軍さんに行って
23 歳の時の写真なので、ま、ちょっと穏やかな顔してるんですけどその人が大魔人になって暴れてるわけですよ。
で、私の中にはもう踏みつけられたり、 あの、に投げられたり、柱に投げられた
りっていうようなことがやっぱり染みつい てるので、体の中にこの人をその
ちゃんと見るっていうことは とてもなんか恐ろしいですね。まだまだ
ちょっとあの見れないですね。
戦争[音楽]で心を蝕ばまれた兵士たち。
その狂器[音楽]は戦後 家族に向かった。
[音楽] 密かに続いた
もう1つの[音楽]戦争だった。
あ [音楽]
戦後81年となる今年。
戦争による商病者の歴史を伝える国の資料 館に新たな展示が加わった。
心の傷を追った兵士と[音楽]家族の 苦しみ。
81年間大やけにされてこなかった歴史 だった。
お待たせか こういうところ出したあかんかった。
さんとか言わそんな全部してくれた [笑い] Pが入ると
[笑い] 大阪市でカフェを営む藤岡さん職場にしたいとったのに
[笑い] 9 歳の時亡くなった父の写真を今も見ることができない
で母が亡くなってタンス を整理してたら、あの、これだけ出てきたんですね。なんか生々ましっていうかね、随分若い頃の写真ではあるんですけど、でもなんか見れないんです。
一瞬見た時ものすごいこう気持ち悪かった し怖かったので
私を星座させてお父はなトラックの運転し
ながらな敵のあの砲弾の中をあの救援物資
を運んだんやあって。で、そうかと思うと 、あの、雨がざーっとすごい降ると、もう
、あの、部屋のすみっこでガタガタ震え ながら、あいつが殺しに来る。
窓がガタガタガタガタっとなったりとか、 台風でこうヒューって風が鳴ったりすると
、ただもう兵隊が来る、兵態がザってく るって言ってすごいまた怯えるんですね。
終戦から14年後、藤岡さんは鳥取県で 生まれた。
父は叫びで定食にもつかず家で暴れて ばかりの存在だった。
私が3、4年生ぐらいになってくると、 もう夜中にこうガバっと父が起きて
起き出して、あの子供の寝ている布団を バーっとこう剥いで、もうそこにいる私と
か兄とかをもう目がね、行っちゃってるん ですよ。この子供を見る目じゃなくて、
もう敵をやっつけるぞっていう顔で、ま、 言うたら大魔人みたいに目がキュンって
釣り上がって、口がうーんってこうなんか うーんってこうなってて、でも私とか兄と
かはもう掴み上げられて柱に投げられたり とかあの踏みつけられたりとか私とあの兄
を切立させるんです。切りピシッとこうま 、軍隊みたいな感じですね。ちっとこう
立たせてギリって言うんですよ。で、私と 兄がこうピッてしてするとあの台所のあの
Lプロパンガスのあの線を開けてしって
こうガスが出るんです。で、それをすると もうお父ちゃんはあのみんなで死のう。
みんなで死ぬんだって言ってすごいこう、 ま、私の中では新獣ごっこってあの、ま、
ネーミングしてるんですけど、そしたら母 がもう反響欄になって死ぬんだったらお前
だけ死ねって言ってガスを止めに行くん ですね。
[音楽] やがて父は幻覚や現聴が激しくなり、家の
中で便を垂れ流してしまう。
藤岡さんが9歳の時両親は離婚。
しばらくして尋ねてきた父の言葉が
忘れられない。
珍しくまた父はま、来たんですけどお酒を 飲んでなかったんです。酒を飲んでない父
ってのは本当に久しぶりだったんで、私 すっごい記憶にあって、もうその父があの
、私と兄とを並べて道を許してくれ、許し てくれって言って泣いてるんですね。で、
私はその父に対して何の感情移入もないの でうーん。何、何許すって何って感じ
じゃった。
お父ちゃん病気で死んだでって聞いたから 。え、お父ちゃん死んだ?やったって。
もう私なんかもうもう喜んじゃって。もう お父ちゃん死んだな。お兄ちゃんばいって
。もう何ですかね。嬉しくて嬉しくてもう あんな人いないんやって。
おつやの時に散々ね、親戚な人とか父の 知り合いとかが来て、あんたのお父ちゃん
すごい人やでって。またその別の親戚が あんたのお父ちゃんな戦争から帰ってき
たらな、ものすごい人が変わってたんよ。
手足が痙攣する日本兵。[音楽]
手が震え、うまく字がかけない。
戦場での体験から精神に異常をきたす戦争 神剣症となった兵士たちだ。
軍の病院に入院した兵士だけでもその数は およそ1万人。
だが日本軍は心を壊した兵士をはずすべき 存在とみなし隠蔽した。
当時団病とも呼ばれていた戦争神経症
新聞には幸軍に放病は存在しないと記され
ている。
千葉県の病院には精神に異常をきたした 日本兵およそ8000人分のカルテが残さ
れている。 終戦前後軍は償却を命じたが委長が密かに
隠し保管していた。
これらの資料はすでに誰もが忘れ去って しまったものである。
また誰にも気づかれていなかったもので ある。
貴重なこの証を真実を残しておきたい。
三頭省にて両民6名[音楽]殺したること あり。
これが夢に出て[音楽]うされてならぬ。 特に幼児をも一緒に殺せ[音楽]しことは
自分にも同じような子供があったので予定 嫌な気がした。
何を質問するもすみませぬ。すみませぬ。
殺してくれという
敵が迫る声が聞こえるという。
戦争に行く前はいい人だったという藤岡 さんの父。
なぜその父から虐待されたのか。
父が亡くなってはいるんですけど、なんかまだこの頃はちょっとこう自分がもう嫌で嫌で
うん。 消しちゃってる。だから学校で集合写真とか撮られても端っこで目立たないようにっていう感じがすごく強かった。
[音楽]
お父ちゃん死んだのは自殺やったんかって 。それがね、なんか1ヶ月、2ヶ月、3
ヶ月経ってくるとね、それ私のせいじゃな いってすごい自分を覚めるようになったん
ですね。私がお父ちゃんが最後会いに来て くれた時に道を許してくれって言ったのを
許すって言わんかったからかなとかそこ からもうあの感情のコントロールができ
なくなって何回かリストカット仕事で嫌な ことがあったりとか人間関係でちょっと嫌
なこと言われたっつったらすごいこう死に たくなる。まあ、どうせ自殺した親の子や
からみたいな。ものすごいこうそれに 囚われてもうものすごい苦しかったですよ
。 これは自分の家族だけの問題。反世紀以上
思ってきた。 [音楽]でも父親の狂器を背負わされた
子供は自分だけではなかった。
ご苦労様です。貴重な証言 大阪市内で毎年開かれている証言集会がある。
後に色々ね、ご飯したりとか色々して 私のものこの回は日本ましには日本人のですねが実が
PS になりその父親たちが子供たちに暴力を振ったり自殺したり中になったりそういうことでもって苦しんだ千たちやその家族です。
流団で手を PTSDの日本兵家族会 反合でご飯を食べて
戦争によるトラウマと向き合う家族たちだ。 食べ物もも喉を通らなかったんですか?
藤岡さんは3年前とすると 偶然チラシをもらい 初めて参加したい。
皆さん大体似たような体験を話しされてで、ま、自分自身もいや、実は父がこうこうこうなんですと。
で、それまでなんとなく断片的にあの自分の立ちいと思ってたものがその父の
PTSD で全部こうピーンと繋がったんですね。
そこに白を 家族会の代表を務める誰も参加できそできる誰
元陸軍兵だった父の記憶を語り継いでいる進めていきますので是非皆さん参加してください。
おいおいおじいちゃんスしてくれ。早くしてくれよ。
早くピンスしてくれ。
孫から話しかけられても全く言葉を発しない男性。黒井さんの父次郎さんの晩年の映像だ。福印してから
77歳で亡くなるまでの40 年間。定職にもつかず家族は貧困にえだ。
そんな父を黒井さんはデクノと呼んでいた 。
デクノボっていうのは、ま、私は翻訳した んであって、周りの子供たちとかは6着親
しって呼んでたんですよ。180cmも ある大男っていう意味ですよね。で、それ
があだ名になるっていうのはすごい大男な んだけども何もできない。うどの大木とか
よく言うじゃないですか。も元にいるだけ だからそれが普通だったんでこう期待もし
ないしでもね見放すこともできないしあの 情けなだったんだからとにかくこういう
人間には絶対俺はならないとこういう男に はならないとあの一家を貧乏にさせるよう
なね別 すらしていた 父戦し父が亡くなってから異品を整理すると
つ満 これまで知らなかった顔が見えてきた。 で、それは同胞[鼻息]
まいい顔してるのよ。本鈴やか話すっきり。
刑次郎さんは1932年に招集され、中国 東北部満州の歩兵部隊に配属される。
[音楽] 時は満州自変の直後。[音楽]
日本軍は領土拡大や資源確保のため自ら 起こした鉄道爆破事件を中国側の反抗とし
て軍事行動を起こし海来政権満州国を建告
する 刑次郎さんの異品には抵抗する中国兵を
卑族と呼んで討伐したというメモも残され ていた。
[音楽] 戦争で刑次郎さんに何があったのか
[音楽] 手がかりは黒井さんの生まれ故郷に残され ていた。
主を残したのは元憲兵の土義おさん。
憲兵になる前、軽次郎さんとほぼ同じ時期 に満州の同じ部隊に所属していた。
[音楽] 間違いなく農民だと分かる中国人6人が
連れてこられた。[音楽] みんな後ろに縛られていた。
これから土胸をつける教育をする 場官の注意が言った。
何をするのだろう? そう思った瞬間、注意は中国人の首を切っ
た。 切られた首から千柱が立ちのっている。
天皇の軍隊はこんなひどいことをするのか 。 体が震えた。
その時土や前に出ろ。あれを突きさせ。
[音楽] 注意は中国人の1人を指差し、私に銃を
渡した。[音楽] 生きた人間を突き刺すのか。だが注意から
は目をかけてもらっている。 の命令はの命令である。
[音楽] 私は重権を構え、大声をあげながら中国
農民の胸を目がけて突進した。[音楽]
私は 人間の川をかぶった
獣に変わった。
[音楽] 土屋さんは手柄を立てるためイ田の中国人
を拷問にかけ殺したという
人間としての心が抹殺されてしまったこと で私たちは狂気してしまっていた。
私が殺害してしまったくさんの人たちが 寝ても冷めても見えてしまうのだ。
その人たちの必びが夢[音楽]にも 聞こえる。
皆さん考えてみてください。地は加害者 です。銃を突きつけてたくさんの人を殺し
ました。殺された側の人たちの苦しみは どうだったでしょうか?あの人たちはその
苦しみや恐怖からそのことがそれが トラウマになって心壊された人たちは
アジアの人たち中国人たち小鮮の人たちは 日本人の兵士や我々の何倍もいるっていう
風な想像力が私たちは必要だという風に私 は考えています。
長年沖縄線によるトラウマの治療にあたっ てきた精神会の有塚涼さん。
戦争での体験は生涯消えることのない トラウマを生じさせると指摘する。
不用できないような強烈なあのストレスで 自分がもうコントロール不能状態になる。
そういう体験なんですよ。[鼻息]あく 殺されそうになったとかあるいは目の前で
人が殺死ぬのを見たとかえだから被害だっ たり加害だったり色々とあるわけですね。
だが戦争神経症をはずべき存在としてきた 国はその実態について調査してこなかった
。 [音楽]
戦後トラウマを追った兵士たちを家族が 背負うことになる。[音楽]
軍人恩求の申請書類にはトラウマを追った 兵士たちを受け止めきれない家族の訴えが
綴られている。
本人の日常生活行動は常日頃正常を書き、
極端な軍隊式長で弾話中突然号令をかけ、
火材道具を次々に破損したり刃物を所持し
人に機害を加えるかのごとくそ亡な状態。
親としてはただただ途にくれるばかりで 家計のしるものがこのような状態では生活
も苦しく全く困窮をいたしております。
日本の戦後ってのはその兵隊のトラウマを 社会的にケアしないで全部家族に丸投げし
たと。だからこの家族の中でトラウマが あれ狂ってあの酒飲んで暴れたとかあの妻
をったとか子供を虐待したとかっていう風 になるわけでしょう。全部家庭にありがに
した。
[音楽] 戦後父が背負ったトラウマを埋もれさせ たくない。
黒井さんは2018年1人で家族会を設立 。
1人、また1人と証言者が増えていった。
[音楽] 2度と戦争しないとか本当に平和な日本を 目指すっていうことであれば俺たちが生き
ている間に調査したりしないとこれはもう 永遠にあの分からないことになっちゃう。
[音楽] 2024年度、戦後初めて国は日本兵の心
の傷に関する実態調査を行った。
死んだ人を調べてどなしまんねんと生きて 帰ってきたお父ちゃんに偉い目に負けてん
のは私らやでっていう。そういうそれが 変えて期間編の中のPTSDをきちんと
調べて欲しいと。それが日本の後の歴史と しても埋れてきてるわけだからそこのん
とこきちんと調べてほしい。
またせ。 あ、ありがとう。おお、サンキュー。よいしょ。
うう、いいね。すごい。 [笑い]
うん。いい。い、すり。 [鼻息]
元日本兵の父からの暴力を語ることにした藤岡さん。 冬でも冬でも
パートナーの之助さんと暮らして 30年になる作ったりして
この問題解決に向けて、え、一緒に歩める機会をもらえたみたいに受け止めてますね。うん。
涙ちょ切れるわ。 あ、そう。あ、そう。[笑い] うん。
家族会に加わってから藤岡さんは閉じ込め ていた父の記憶をノートに綴るようになっ
た。
[音楽]
[音楽]
うん。
[音楽]
[音楽]
ま、そういうもの全ての太 記憶をたり寄せると 父の狂器と戦争が繋がっていく。
で、あ、私が悪かったんだって、殴られる たびに思ってきました。私の兄が父親に
なんでお前はそんな暴れんねん子供の時に 聞いたらしいんです。そしたら父が死体を
見たからだってもう吐き捨てるように言っ たっていうのを兄が覚えてるんです。
藤岡さんの父、古本石松さん。[音楽] 1943年20歳で海軍に招集された。
[音楽] 終戦時には千島列島の中部にある松の航空
基地に配属されていた。
[音楽] 軍事の拠点だった松島には数千人の日本兵
が中屯。 アメリカ軍の攻撃を繰り返し受けたという
[音楽] 漢方射撃と誰かが叫んだ。
[音楽] 海岸線の防尾は全滅。各手法は全部使用
不能。 ただ肉団線あるのみです。[音楽]
古本さんは終戦後ソ連軍の捕虜となり3 年間シベリアに欲留される。
欲留された日本人は57万5000人。
このうち5万5000 人が極寒感の地で命を落とした。今年
100 歳で亡くなった音楽家の田中ゆ介さん。
シベリアで4 年間欲流された体験を亡くなるまで語り続けた。
上と寒と柔道でねえていくんですよね。
亡くなった人ばっかり集める弊車があるん ですよ。そこへ掘り込むんですよ。で、
カチカチになってね、もうこうってます から車まで運んで穴を掘って埋めるという
作業を刺されたですね。いうことで、
そういう限界のね、移植もない。本当に
もう 口では言いされないね。言いされないね。
うん。
ソ連からマイズルに入行した2000名の 元軍人軍族が帰ってきました。
過酷な欲流生活を経て 26 歳で福印したにいた祖国は今目の前にあります。
戦後家庭を気づくも戦争のトラウマを引きずったまま家族に見放され自ら命を立った。
心の中で父をこう、あの、抹消してしまっ てた自分に対するなんだろう、まあ、食材
というか、あの、もっと父のことを ちゃんと知るべきだったなっていう
藤岡さんはさんと共 に氏の引き上げ記念を訪れた。
マイズルに引き上げるまで 3 年間シベリアで父に何があったのか知りたかった。
これが弊社。
あ、ムーリー。ほら、父の空域なんですよ。ムーリーすごいな。ムーリーがあったわ。
体験室あるよ、こっち。 ん? 部屋の部屋の再現の体験。 え、そうなんや。
いや、なんだかちょっと怖いんだけどね。なんかね。あ、
うわあ。こんなとこにいたんかって思う。 そういうこと なあ。うわ、なんか
うあ。 ええ、よく生きてたな。そうね。ね、
極感やからマイナ30°とか40°ぐらいになるやろ。
俺がにしたことはしました。 いや、なんか、なんかわかんないけどか。
[息をのむ音]
[鼻息] [息をのむ音]
ああ、よく生きてたね。
ああ。
ああね。海の匂いが。いや、この景色見たんだなあ。
そう。まあ、この山の景色や雲の景色
8月24 日に帰ってきてるんだよ。ついこないだよね。
8月24日って昨日じゃん。 え、今日
私がお帰りって言ってあげるわ。 お父ちゃんお帰りって。
お父ちゃんお帰り。 お父ちゃんお帰り。[叫び声]
で、ま、こうい、 父のことを知るにつれて 新たな感情も芽えてきたの。お話を聞いたこともないし、名前は聞いたことあります。
もうお父ちゃんの嫌な思いでしかここに なかったものがあ、実はそれだけではな
いっていうようなことが思い出されて、 あの、今ちょっとこう父を、ま、見直す
まではいかないんですが、あの、なんか こうもう1回親子としてのこう行き直し
みたいな、あの、もう父はすでにいないん ですけど、生き直しみたいな形で、あの、
もしも父が生きていたらどうやって声かけ てあげようかとか、
あの出産 公けの場で語ることで失ったものもあるんですが、その後は近所のおばあちゃんがものすごい妹と仲が良かったんです。
このPTSDの活動するまではもう月に 12回ランチに行ったりとかもう年に
2 回ぐらいかな旅行に行ったりとかでなんかあったらいつも相談し合ってたんでところがこの
PTSD の会をやり出した途端音信普通になりました。なんでか父のことを全く覚えていない。
3 歳ぐらいの時に父は亡くなってるしほとんど関わりが薄かったんですね。
妹には父をいじめてるように見える。父を さらし物にしてるように見える。だから
あんたのお父ちゃんかもしれんけど私の お父ちゃんやでって怒るんです。
こうやって話をするということはあの みんなの問題になっていくんだ。私の父の
話は家の恥でも何でもないんだ。日本が やった戦争の結果こういうことになってる
んだ。100ぴょっと閉め 家族が抱えたトラウマを
顔と名前を明して語れる人はほとんど言いない。 私はもうその顔が恐ろしくて
でも父が連れて帰った戦争をなかったことにはできなかった。くじ火を切る。 [音楽]
私が今やることで、あの、気づいてくれ はったりとか、あ、うちもそうなんちゃう
かって考えてくれはったりとか、ま、そう いうきっかけになればやっていこうと思う
し、今はまあ、とりあえず私しかいないん だろうから
私がやび
よし。 はい。今日も行くよ。
よいしょ。
藤岡さんの故郷と鳥取りおばちゃんおです。古本の三道千です。道を覚えてないか?金子さんとこの娘。
あ、元気な。 うん。えよ。おばあちゃんも元気だよ。
かつて父暮らした家は 20年ほど前に取り壊されたままだった。
もう該当のない道をね、酒担保だけ持って 買いに行かされてた。
もうこの景色は一緒ですわ。ここで育った なって。18歳までここにいたので。
まあないってない。なんかちょっと心が 軽い。楽[笑い]。
いや、まだ家があった。
うわ、った、あった、あった。
故郷に父の墓はない。廃オになったこの家だけが父の痕跡を残している。
うん。うん。してあげる。だよ。
よく見ときよ。写真の父に故郷を見せた。
戦争に行くまではいい人だった父。
よいしょ。[ベル]
はい。帰ってきました。
よしきましょう。よいしょ。あ。あ、いらっしゃい。
でございます。ありがとうございます。うわ、なんか豪華や。え、太らと思っても
いつも豪華でしょ。 豪華ですね。[笑い] これな、あの、手作りヨーグルトね。
ありがとう ね。さすが、 さすがでございます。 さすがえて あの人より自己免疫力
終戦の日 何か特別にすることはない。
なんかこうぼヤーんとしていた古本石松 さんが今ちょっとずつなんか形のある
古本石松さんに今なりつつあって、ま、 まだ未完成なんだけどなんかそれきちんと
[音楽]掴みてのがあってね、 理解するっていう工程ではあるけれど、
許しの工程ではないなと思って ずっとそのハカちの中の父とこういうこう
心で会話を積み重ねていったら あのまみれる日が来るのかどうかわかん
ないけど今全然あの想像もつかない。価値
があるから父に語りかけられるっていうか 。
うん。まだそういう段階。 [音楽]
戦後81年 父が連れて帰った戦争と
向き合い続け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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