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26

한국 고대사 노중국 교수 - 삼국을 구성한 핵심 종족은 예맥족과 한족?

“삼국사 가장 큰 교훈은 유능한 인재 등용과 실리 외교”



“삼국사 가장 큰 교훈은 유능한 인재 등용과 실리 외교”
강성만기자수정 2026-07-04 01:47펼침

[짬] 한국 고대사 ‘맞수’ 2권째 펴낸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

노중국 교수가 대구의 자택 서재에서 인터뷰 사진을 찍고 있다. 노중국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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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중국(76)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백제사 연구의 개척자이다.

그의 서울대 대학원 석사(1977년)와 박사(1986) 논문은 해방 후 우리나라 연구자가 쓴 첫 백제사 관련 논문이다. 박사 논문을 보완해 1988년 낸 저술 ‘백제정치사 연구’(일조각·2018년 개정증보판)는 해방 이후 백제사를 다룬 ‘1호 전문 서적’이다.

2011년 편집위원장을 맡아 백제문화사대계(전 25권) 연구총서를 발간했고 1년 뒤에는 공주·부여·익산 백제역사유적지구 세계유산등재 추진위원장을 맡아 3년의 노력 끝에 결실을 보았다. 경북 울진이 고향인 그는 영남 지역 한국 고대사 전공 교수들과 함께 1987년 한국고대사학회를 창립해 초대부터 4대까지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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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2014년 대학 퇴임 뒤 힘을 쏟는 일이 있다. 고대사 인물로 한국사를 짚는 저술 작업이다. 5년 전 ‘역사의 맞수-백제 성왕과 신라 진흥왕’(지식산업사)을 낸 그는 지난달 고구려 고국원왕(?~371)과 백제 근초고왕(?~375)을 라이벌로 다룬 ‘역사의 맞수’ 두 번째 책을 냈다.

지난달 31일 이메일로 노 교수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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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맞수’ 2권 표지.

그는 현재 집필 중인 대가야 역사 책이 마무리되면 그 뒤로 고구려 연개소문과 신라의 김유신, 백제 성충이 주인공인 역사의 맞수 시리즈 3탄을 쓸 생각이다.

“세 사람을 두고 일본의 중대형황자(中大兄皇子, 후일 천지천왕)는 ‘한 나라를 지켜 만 리에 이름을 떨쳤고, 그 나라의 준걸’이라 평했죠.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실권을 장악했으나 그가 죽자 고구려는 곧 멸망의 길로 들어섰고, 김유신은 무열대왕과 문무대왕의 깊은 신뢰를 받아 삼국 통일 업적을 남겼어요. 성충은 의자왕에게 간언하다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요. 셋의 삶은 달랐지만 한 나라를 이끌어간 호걸이었죠. 이들을 중심으로 7세기 후반까지 물고 물리는 삼국의 각축을 정리하고 싶어요.”


왜 인물 중심의 책이냐고 하자 그는 “역사는 일정한 공간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이뤄진 인간의 활동에 관한 연구”라고 답했다. 그는 “초등생 때 읽었던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무수한 인물들의 삶의 모습을 보며 그때 받았던 인상이 매우 강해 역사적 사건은 사람을 중심에 두고 봐야 한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며 “제 책으로 독자들이 역사적 사건에 얽힌 인물들의 삶과 고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길 바란다”고 했다.

‘맞수 2권’은 백제 근초고왕과 고구려 고국원왕이 평양성에서 371년 맞서 싸운 전투를 비중 있게 다뤘다. 남진과 북진을 각각 꾀하던 고구려와 백제가 충돌한 이 전투는 두 나라 최고통치자가 왕도를 떠나 전장에서 직접 맞붙어 싸운 유일한 사례다. 고구려는 이 전투 패배로 남진에 제동이 걸렸고 고국원왕은 전사했다.

통치 기간 백제 최대 영토를 확보한 근초고왕은 백제연맹체를 이탈한 영산강 유역 신미국을 ‘남만’(남쪽 오랑캐)으로 부르고, 군 열병식 때 중앙을 상징하는 황색 깃발을 사용하는 등 백제 중심의 독자적 천하관을 과시했단다. 고국원왕도 통치조직인 관등제를 정비해 중앙집권체제를 뒷받침했고, ‘연수’ 연호를 채택해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을 확립했다고 저자는 설명했다.

개방적인 인재 등용도 두 맞수의 공통점이다. 고국원왕은 선진적인 정치 경험과 학식이 있는 중국계 인재를, 근초고왕은 고흥이나 왕인 등 중국계 관료를 등용했단다.

‘맞수 1권’은 관산성 전투에서 백제 성왕을 죽이고 대승을 거둔 신라 진흥왕이 자국 이익을 최우선에 두고 백제·고구려와 선택적 협력을 하며 국력을 키운 과정을 보여준다.

한국 고대사 전문가인 저자에게 먼저 오늘날 우리가 고대사에서 가장 배워야 할 게 뭔지 물었다. 그는 유능한 인재 등용과 실리 외교를 꼽았다. “국정 운영의 요체는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믿고 쓰는 것입니다. ‘인사(人事)가 만사(萬事)’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요. 고구려 고국천왕은 을파소를 등용해 국정을 안정시켰고 백제 근초고왕은 중국계 고흥을 등용해 왕권을 강화했어요. 신라 진흥왕은 거칠부를 등용해 한강유역을 차지했죠. 국제관계는 자국 이익이 우선입니다. 자국 이익 앞에서는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아요. 진흥왕이 처음에는 백제와 손잡고 고구려를 공격해 남한강 유역 일대를 장악한 뒤 곧바로 백제와의 관계를 끊고 고구려와 손잡은 뒤 한강 하류 지역까지 점령해 대중국 바닷길을 확보한 게 대표적이지요. 진흥왕의 외교는 전형적인 자국 중심의 ‘실리 외교’ 전략이었습니다.”

삼국은 자국 이해관계에 따라 주변 강국인 중국 왕조에 대해 때론 신하의 예를 취했고 때론 맞섰다. 오늘날 한국을 둘러싼 국제 관계도 다르지 않다. 어떻게 해야 할까? “예나 지금이나 국제관계를 관통하는 원리는 자국의 존립과 이익 추구 그리고 힘의 균형입니다. 삼국이 정립하고 있을 때 중국은 남북조시대라는 분열의 시대였어요. 이는 한반도를 둘러싸고 미·일과 중·러가 대립하는 오늘날과도 매우 유사해요. 삼국은 국제 상황을 냉철히 인식하고 세력균형을 모색하면서 자국 이익을 추구했어요. 접근할 때와 돌아설 때를 잘 파악해 외교 전략을 폈습니다.”

국내 1호 백제사 연구 석사·박사
88년엔 첫 백제사 전문서적 출간
퇴직 뒤 삼국 인물 이야기 책으로
신라 진흥왕과 백제 근초고왕 등
연개소문과 김유신 등 후속편 구상

“백제는 개방성과 진취성의 나라
서울 백제 유산도 유네스코 등재를”

그는 책 ‘백제정치사’에서 ‘삼국사기’와 ‘삼국지’ 동이전, ‘일본서기’ 등 한·중·일 사서를 보완적으로 활용해 백제의 국가 발전 단계를 읍락-국-국연맹-부체제-중앙집권국가 순으로 정리했다. 이 과정에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의 분해론’과 ‘삼국지 동이전의 단계화론’을 제시해 두 사서를 종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이론적 근거를 제시했다.

한국사에서 백제라는 나라의 특질을 말한다면 뭐냐고 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백제는 지정학적으로 강과 바다의 나라입니다. 국호에도 ‘백가제해(百家濟海·백 가구가 바다를 건너다)’라는 뜻이 담겼어요. 이는 백제를 개방성과 진취성의 나라로 만들었죠. 백제는 중국의 남북조와 수·당 그리고 왜는 물론 심지어 부남(베트남)과 인도와도 교류했어요. 이를 통해 개성이 있는 문화를 만들었고 이 우수한 문화를 주변국에 전파해 주었죠.”

오늘날 한국인이 백제에 대해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은 뭘까? “618년의 백제 역사에서 ‘서울’은 493년 동안 수도였어요. 그런데도 백제 하면 떠오르는 도시를 물으면 대부분 공주, 부여라고 해요. 서울이라는 답은 매우 드뭅니다. 1994년 서울시가 백제의 수도 500년간을 빼고 ‘한양정도(漢陽定都) 600주년 기념행사’를 한 것도 이러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다행히 서울시는 2012년 한성백제박물관을 개관해 서울이 백제의 수도였음을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15년 공주‧부여‧익산의 ‘백제역사유적지구’가 세계유산으로 등재될 때 서울의 백제 유산이 빠졌어요. 하루빨리 서울의 유산도 확장 등재되길 바랍니다.”

고대사 연구의 가장 큰 난관은 사료 부족이다. 그가 용기를 내어 백제사 연구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마침 1971년 무령왕릉 발굴로 ‘무령왕릉 묘지석’이 나온 게 컸단다. 그는 앞으로 한국 고대의 질병사 연구에도 도전하고 싶다면서 덧붙였다. “그나마 남아 있는 고대사 자료의 대다수는 정치사, 외교사, 전쟁사와 관련한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정치와 외교, 전쟁이 전부가 아닙니다. 고대인의 일상적인 삶을 정리하는 것도 필요해요. 특히 질병은 개인과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큽니다. 얼마 전 코로나 사태가 이를 잘 보여주었죠.”

70대 중반 노학자의 연구 희망 목록은 이어졌다. “제 고향인 울진 성류굴에는 화랑이 남긴 금석문이 있어요. 이를 중심으로 ‘신라사 속의 울진’도 정리하고 싶고, 여력이 있으면 쌀 생산의 일등 공신인 한국 고대의 수리시설에 관해서도 정리하고 싶어요.”

그는 요즘 말로 ‘흙수저’ 출신이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고교에 진학할 수 없어 검정고시를 거쳐 대구 계명대 사학과에 들어갔고 연구자의 길에 들어선 뒤에도 지방대 출신의 불리를 딛고 학자로서 입지를 다졌다.

어려운 여건에도 학문적 성취를 쌓은 원동력이 뭔지 궁금해하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아시다시피 학창 시절은 인격 형성에 매우 중요한 시기입니다. 저는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 과정을 거치지 못해 인격 형성에도 부족함이 많았습니다. 이런 약점과 한계성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결과적으로 저의 학문 연구에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군 복무를 위해 공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배운 지휘, 통솔 방법과 상황에 대한 판단 그리고 책임감 등은 역사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울진의 벽지에서 대구의 계명대에 입학하고, 서울대 대학원으로 진학한 경험은 중앙과 지방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출발점이 되었죠.”

‘역사의 맞수’ 1권 표지.

롤모델로 생각하는 선배 학자가 있는지도 묻자 그는 대학원 지도교수였던 고 김철준 교수를 먼저 말한 뒤 이어 원효와 신채호를 들었다.

“고 김철준 교수님은 ‘지방문화가 발전해야 나라 전체의 문화수준이 높아진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화두는 제 평생 학문 활동의 방향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대구를 중심으로 하는 영남지역 한국 고대사 전공 교수와 함께 한국고대사학회를 창립하여 지방의 학문 수준을 높이는 데 저 나름의 힘을 쏟았습니다. 학부 시절 은사 최승희 교수님은 탁본이 무엇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후 저는 계명대 사학과에 부임하여 탁본반을 만들고 전국 각지의 고대 금석문을 탁본했습니다. 이 탁본들은 정년 퇴임 뒤 계명대 박물관에 기증했죠. 이병휴 교수님은 사료를 꼼꼼하게 읽고 분석하고 종합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길러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단에서 가르치는 일은 원효 스님을, 현실을 살아가는 지성인의 삶의 자세는 단재 선생을 롤모델로 생각하고 살아가려고 하였습니다. 원효 스님은 배운 자들에게는 고담준론으로, 배우지 못한 촌부와 여염 아낙네들에게는 춤과 노래를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는 등 대상에 따라 다양한 방법으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역사학은 단순히 옛것을 좋아하는 호고(好古)의 학문이 아니라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깊은 고민과 성찰의 학문인데 단재 선생님은 시대적 과제인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부림치는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두 분을 롤모델로 하려고 한 것은 꿈에 불과하였을 뿐 제가 따라가기에는 너무나 넓고 높은 분들이었습니다.”

노 교수 연배의 학자들을 보면 민족주의에 대한 열정이 역사 연구의 동력이 된 경우가 많다.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사에서 한민족·한국가 관념이 본격화한 시기가 언제인지 물었다.

“삼국을 구성한 핵심 종족은 예맥족과 한족입니다. 예맥족은 주로 만주와 함경도, 동해안 일대에 분포하면서 부여, 고구려, 백제, 옥저, 동예 등의 국가를 만들었어요. 한족은 주로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일대에 분포하면서 삼한을 형성하였고, 이 삼한에서 신라와 가야의 여러 나라가 나왔습니다. 신라의 삼국 통일은 예맥족과 한족을 하나로 결합하는 1차 계기가 되었고, 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발해 유민의 흡수는 통합의 2차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려가 30여 년에 걸쳐 대몽항쟁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자각한 ‘역사문화공동체 의식’에 의해 부분적으로 남아있던 삼국 분립 의식이 극복되어 단군을 시조로 하는 민족공동체 의식이 형성될 수 있었다고 봅니다.”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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