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09

* 津田左右吉の思想史的研究: 家永三郎: 1972, 2019

Amazon.co.jp: 津田左右吉の思想史的研究: 岩波オンデマンドブックス : 家永三郎: Japanese Books

津田左右吉の思想史的研究: 岩波オンデマンドブックス
by 家永三郎 (Author)  Format: Paperb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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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田は大正デモクラシーの精神を学問的にもっともみごとに代表する思想家・研究家であった.その思想を,青年時代の形成過程から戦時中の筆禍事件を経て戦後に至るまで,統一的に把握することを試みた労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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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나가 사부로의 1972년 저작 <쓰다 소키치의 사상사적 연구>에 대한 요약과 평론입니다.

쓰다 소키치의 사상사적 연구: 학문적 저항과 내재적 한계의 이중주

<쓰다 소키치의 사상사적 연구>(1972)는 일본 전후 역사학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이자 교과서 검정 소송의 주역인 이에나가 사부로가, 근대 일본의 독보적 동양학자이자 실증사학자인 쓰다 소키치(1873~1961)의 학문과 사상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한 평전적 사상사 연구서다.

전전(戰前) 군국주의 일본에서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신화적 허구성을 문헌비판학으로 폭로하여 필화를 겪었던 쓰다 소키치는 흔히 '천황제 국가 권력에 맞선 합리주의 학자'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이에나가는 이 책을 통해 쓰다의 합리주의적 문헌 비판이 지닌 빛과, 그의 아시아 인식 및 황실관에 내재했던 짙은 그림자를 함께 파헤쳤다.

저작 요약

1. 실증주의 문헌비판학과 고대사 해체 쓰다 소키치는 방대한 문헌에 대한 엄밀한 언어학적·사료비판적 검증을 거쳐, 일본 황실의 기원 신화와 초기 천황들의 통치 기록이 6세기 이후 야마토 조정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후대의 산물임을 입증했다. 신공황후의 삼한정벌이나 초기 천황의 비현실적 치세 등 국가신도의 성역을 철저한 합리주의 시각에서 학문적으로 해체한 것이다.

1940년 군국주의가 극단화되던 시기, 그의 주저 4권은 발매 금지 처분을 받았고 쓰다는 와세다 대학 교수직에서 사임당했으며 출판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집행유예)을 받았다. 이에나가는 이 시기 쓰다의 태도를 학문적 양심과 근대적 합리성을 수호한 영웅적 지적 저항으로 정당하게 평가한다.

2. 지나사(중국사) 연구와 독자적 문명론 쓰다는 일본 문화를 중국 문화의 아류로 보지 않았으며, 동시에 일본 문화의 독자성을 강조하기 위해 중국 사상과 문화를 철저히 분석했다. 그는 유교와 도교 등 중국 고대 사상이 민중의 구체적 삶과 괴리된 관념적 지배 이데올로기라고 보았고, 중국의 역사를 권력 쟁탈의 연속으로 규정했다. 반면 일본 문화는 소박하고 실천적인 정서에 기반하여 형성되었다고 주장했다.

3. 전후 천황관과 황실 옹호 전후 쓰다는 평화헌법 체제 아래에서 상징천황제를 적극 옹호했다. 그는 일본 황실이 정치 권력의 정점에 서서 민중을 탄압한 지배자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민중의 문화적·정서적 통합의 구심점이었다고 강변했다. 쓰다는 전쟁의 책임을 군벌과 정치 모험가들에게 돌렸을 뿐, 천황이나 황실 자체의 구조적 책임은 전면 부인했다.

비판적 평론

이에나가 사부로의 이 연구는 쓰다 소키치라는 거인을 우상화하거나 반대로 단순한 반동으로 단죄하지 않고, 근대 일본 지식인이 지닌 내재적 굴절을 투시했다는 점에서 사상사적 의의가 크다.

합리주의의 역설과 아시아관의 결핍 이에나가가 가장 날카롭게 파고든 지점은 쓰다의 '비판적 합리주의'가 오직 일본 고대 신화의 해체에만 머물렀다는 사실이다. 쓰다는 일본 황실 신화를 해체하면서도, 정작 근대 일본 제국주의가 아시아를 침략하고 지배하는 현실 권력에 대해서는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지 않았다.

쓰다의 중국관은 실증을 표방했으나 결과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일본 사회에 만연했던 멸시적 중국관과 궤를 같이했다. 중국 문명을 정체되고 위선적인 것으로 격하하고 일본의 주체성을 과도하게 순화시키는 그의 시각은, 근대 일본의 대아시아 침략 이데올로기를 간접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적 토양으로 작동했다. 실증주의가 국가주의와 결별하지 못하고 오히려 국가주의적 자민족 중심주의를 뒷받침한 셈이다.

'상징천황제'의 온정주의적 미화 이에나가는 쓰다가 전후에 전개한 황실 옹호론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쓰다는 천황제를 권력 투쟁을 초월한 '문화적 평화의 상징'으로 재구성하려 했으나, 이는 근대 천황제가 자행한 전쟁 범죄와 억압의 역사를 탈색시키는 온정주의적 환상에 불과했다. 이에나가는 쓰다의 이러한 태도가 전전의 필화 사건에도 불구하고 그가 근본적으로는 체제 내적 보수주의자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짚어낸다.

맺음말

이에나가 사부로의 <쓰다 소키치의 사상사적 연구>는 1970년대 일본 사상계에 서늘한 경종을 울렸다. 한 지식인이 아무리 탁월한 방법론과 학문적 용기로 국가 권력의 억압에 맞섰다 하더라도, 그 비판 의식이 자민족 중심주의의 벽을 넘어서 타자에 대한 공감과 보편적 반제국주의로 확장되지 못할 때 어떤 지적 함정에 빠지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저작은 쓰다 소키치 개인에 대한 해부이자, 제국주의 시대를 건너온 일본 근대 자유주의 지식인 전체가 안고 있던 한계에 대한 준엄한 총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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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나가 사부로의 문제의식을 중심으로 읽으면, 이 책은 최근 함께 읽으신 쓰다의 <중국사상과 일본사상>을 한 단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책입니다. 특히 “중국을 비판한 쓰다는 군국주의에 맞선 자유주의자인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일본 국민주의자인가?”라는 질문에 중요한 답을 줍니다.

<津田左右吉の思想史的研究>
家永三郎(이에나가 사부로), 岩波書店, 1972
<쓰다 소키치의 사상사적 연구>

이에나가 사부로(家永三郎, 1913–2002)가 1972년에 출판한 <津田左右吉の思想史的研究>은 단순한 학자 전기가 아니다. 610쪽에 달하는 이 책은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의 방대한 학문을 통해 근대 일본 지식인이 어떻게 합리주의와 국민주의, 학문의 자유와 천황에 대한 충성, 중국 비판과 일본의 독자성이라는 서로 긴장하는 요소들을 동시에 지닐 수 있었는지를 추적한다. 국립국회도서관은 이 책을 1972년 이와나미쇼텐 발행, 610쪽의 쓰다 소키치 연구서로 기록하고 있다.

<1. 이 책을 쓴 직접적인 이유: 교과서 재판>

이 책의 성립 배경부터 흥미롭다. 이에나가는 1965년부터 일본 정부의 교과서 검정제도를 상대로 유명한 ‘이에나가 교과서 재판’을 벌이고 있었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기묘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나가가 교과서에 쓴 일본 고대사 서술 가운데 일부는 바로 전전(戰前) 쓰다의 실증적 연구성과에 근거한 것이었는데, 문부성은 그것을 검정 불합격으로 만들면서 오히려 전후의 쓰다가 쓴 글들을 증거로 제출했다.

이에나가는 바로 이 모순 때문에 쓰다를 다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문에서 “전전의 쓰다와 전후의 쓰다를 통일적으로 재인식”할 필요가 생겼다고 설명한다. 즉 이 책의 중심 질문은 처음부터 명확하다.

“어째서 국가주의의 압력 때문에 탄압받았던 쓰다가 전후에는 국가가 이용할 수 있는 사상가처럼 보이게 되었는가?”

이 질문이 600쪽 전체를 관통한다.

<2. 쓰다의 위대함: 신화를 역사에서 분리하다>

이에나가는 쓰다의 학문적 업적 자체를 매우 높이 평가한다.

쓰다의 가장 혁명적인 업적은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신성한 민족의 기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만들어진 텍스트로 취급한 데 있었다. 그는 신대(神代)의 이야기와 초기 천황들의 전승 상당 부분을 실제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라기보다 후대 사람들이 특정한 정치적·사상적 목적에서 구성한 이야기로 분석했다.

오늘날에는 당연하게 들리지만 당시에는 위험한 주장이었다. 일본 국가의 정통성이 천손강림, 진무천황, 만세일계 같은 신화적 역사와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쓰다의 주요 고대사 연구서 네 권은 1940년 발매금지되었으며, 쓰다와 출판인 이와나미 시게오가 기소되었다. 1942년 1심에서 쓰다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사건은 1944년 면소로 끝났다.

따라서 쓰다는 분명 ‘황국사관의 희생자’였다.

그러나 이에나가의 중요한 주장은 여기서 시작한다.

황국사관의 희생자였다는 사실이 곧 쓰다가 천황제나 일본 국민주의를 부정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3. 쓰다에게는 두 개의 얼굴이 있었던 것이 아니다>

쓰다를 가장 간단하게 설명하면 흔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전전의 쓰다 = 합리주의적·비판적 역사학자
전후의 쓰다 = 보수적 천황제 옹호자

이에나가는 이러한 단순한 ‘전향론’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가 찾아내려는 것은 오히려 양자를 연결하는 사상적 구조이다.

쓰다는 국가가 만들어 놓은 신화를 역사적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일본이라는 역사적·문화적 공동체에 매우 강한 애착을 지니고 있었다. 천황의 신성한 기원을 믿지 않더라도 역사적으로 형성된 황실과 일본 국민 사이의 관계는 존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쓰다에게는

“천황은 태양신의 자손이므로 정당하다”

라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지만,

“황실은 오랜 일본 국민생활 속에서 역사적으로 형성된 존재이므로 의미가 있다”

라는 논리는 충분히 성립할 수 있었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쓰다는 ‘신화적 천황제’를 파괴했지만 반드시 ‘역사적 천황제’를 파괴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4. 그래서 1945년 이후 쓰다가 이상하게 보인다>

패전 후 상황이 역전되었다.

전전에는 위험사상으로 탄압받았던 쓰다가 오히려 천황제 폐지론에 반대하는 위치에 서게 된다. 특히 1946년 <世界>에 발표한 「建国の事情と万世一系の思想」(<건국의 사정과 만세일계의 사상>)은 큰 논란을 일으켰다. 쓰다는 신화를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황실의 오랜 역사적 연속성을 강조했다. 전후 쓰다가 보수적인 황실 옹호론과 시평을 활발하게 발표했다는 것은 일본의 표준적인 쓰다 연구에서도 지적된다.

이에나가에게는 바로 이 부분이 가장 불편했다.

왜냐하면 자신이 교과서에서 쓰다의 ‘과학적 고대사 연구’를 계승했는데, 문부성이 바로 그 쓰다의 전후 발언을 이용해 자신을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나가는 그래서 전후 쓰다의 일부 발언을 쓰다 자신이 평생 해온 비판적 연구의 의미를 후퇴시키는 것으로 평가한다. 후대 연구가 인용하는 이에나가의 표현에 따르면, 전후 쓰다의 일부 역사교육론은 그가 평생 <기기> 연구에 쏟아부은 작업의 의의와 모순될 정도였다고 보았다.

<5. 그러나 쓰다의 더 깊은 일관성: ‘국민’>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결국 ‘국민(国民)’이라고 할 수 있다.

쓰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가 <文学に現はれたる我が国民思想の研究>, 즉 <문학에 나타난 우리 국민사상의 연구>라는 제목을 가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쓰다에게 역사는 단순한 왕조와 제도의 역사가 아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표현했는가를 추적하는 ‘국민생활’의 역사였다.

이것은 당시 국가주의 역사학과 비교하면 매우 진보적인 면을 가진다. 쓰다는 국가가 위에서 강요하는 이념보다 실제 인간의 생활과 감정, 문학과 사고를 중시했다.

그러나 바로 그 ‘국민’이 동시에 그의 한계가 된다.

쓰다는 세계사를 계급이나 보편적 사회법칙으로 설명하기보다 각각의 국민이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형성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후대 연구자들은 이에나가가 쓰다의 학문을 메이지 계몽주의와 서구의 실증적 연구방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했다고 정리한다.

따라서 쓰다에게 ‘일본 국민’은 분석 대상이면서 동시에 정서적으로 귀속되는 공동체였다.

이 점을 이해해야 그의 중국관도 이해할 수 있다.

<6. <중국사상과 일본사상>을 다시 읽게 만드는 부분>

여기서 우리가 앞서 본 쓰다의 <支那思想と日本>(한국어판 <중국사상과 일본사상>)이 중요해진다.

쓰다는 일본 사상을 중국 사상의 일본판으로 보는 설명을 강력하게 거부했다. 중국·인도·일본 문화를 모두 하나의 ‘동양문화’로 묶는 것도 부정했다. 일본 문화는 일본인의 역사적 생활 속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당시 일본의 대아시아주의가 ‘동양’을 하나의 문명공동체로 주장하던 상황에서 이것은 제국주의적 범아시아주의에 대한 상당히 날카로운 비판이 될 수 있었다. 쓰다가 1938년 <支那思想と日本>에서 단일한 ‘동양문화’의 존재를 부정한 점은 지금도 그의 중요한 통찰로 평가된다.

그런데 이에나가식으로 읽으면 여기에는 다른 문제가 보인다.

쓰다는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문화론을 해체하면서 일본을 해방시키지만, 그 결과 일본을 중국과 분리된 독립적인 ‘국민문화’로 더욱 강하게 구성한다.

즉,

중국 숭배 → 비판
동양일체론 → 비판
중국문화의 일본 지배론 → 비판

까지는 매우 비판적이다.

하지만 그 다음에 등장하는 것은 보편주의가 아니라

‘독자적인 일본 국민문화’

이다.

바로 여기에서 쓰다의 실증주의와 일본 국민주의가 결합한다.

<7. 이에나가가 쓰다에게 내리는 판정>

따라서 이에나가의 쓰다 평가는 단순한 찬양도 단순한 비난도 아니다.

쓰다는 황국사관과 싸운 위대한 비판적 역사학자였다. 국가권력의 신화를 학문적으로 해체했다는 점에서 그의 공헌은 결정적이다.

그러나 쓰다는 근대적 국민국가 자체를 넘어서지는 못했다.

천황신화를 비판했지만 황실에 대한 역사적·정서적 애착은 남아 있었다.

군국주의적 국가주의를 비판했지만 일본 국민이라는 단위 자체를 근본적으로 상대화하지는 않았다.

중국문화를 비판적으로 연구했지만 중국과 일본을 동등하게 놓은 보편적 동아시아사의 관점에까지 이른 것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반국가주의적 쓰다’와 ‘전후 천황제 옹호자 쓰다’가 동일 인물 안에서 공존할 수 있었다.

이에나가에게 이것은 개인의 변덕보다 메이지 이후 일본 자유주의 지식인의 구조적 한계였다.

<8. 그러나 이에나가 자신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서 이 책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후대의 쓰다 연구는 이에나가가 전전과 전후 사이의 ‘변모’를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치노세 요코(一瀬陽子)는 쓰다가 스스로 자신의 전전·전후 학설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으며, 이에나가가 ‘과학적 역사학’을 옹호하려는 입장에서 전전 쓰다를 높이고 전후 쓰다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 비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오히려 쓰다의 전전과 전후 사이에는 ‘변절’보다 일관성이 더 컸다고 볼 수도 있다.

그는 전전에도 천황제 폐지론자가 아니었다. 일본 국민문화에 대한 애착도 이미 강했다. 따라서 1945년 이후 갑자기 보수주의자가 되었다기보다, 전전에는 군국주의 국가가 그의 ‘신화 비판’을 적대시했고, 전후에는 민주주의적 지식인들이 그의 ‘황실 옹호’를 문제 삼았다고 보는 편이 정확하다.

정치적 환경이 바뀌면서 동일한 쓰다 사상의 다른 측면이 전면으로 나온 것이다.

<평론: 쓰다는 ‘자유주의자냐 국가주의자냐’라는 양자택일로는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의 가장 큰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쓰다 소키치는 ‘군국주의에 맞선 진보적 역사가’라고만 해도 틀리고, ‘일본 중심주의적 보수주의자’라고만 해도 틀린다.

그의 내부에는 세 가지 요소가 동시에 존재했다.

실증주의적 문헌비판
개인의 자유와 지적 독립을 중시하는 근대적 합리주의
일본 국민공동체에 대한 매우 강한 문화적 애착

첫 번째와 두 번째가 황국사관과 충돌했고, 세 번째가 전후 급진적 천황제 비판과 충돌했다.

나는 이 점에서 이에나가의 책이 쓰다 자신이 쓴 책보다 오히려 오늘날 쓰다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고 본다. <중국사상과 일본사상>만 읽으면 쓰다가 중국 중심주의와 ‘동양문화’라는 허구를 깨뜨리는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인 사상가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나가를 거쳐 다시 읽으면 질문이 달라진다.

“쓰다는 중국 중심주의를 해체한 뒤 무엇을 그 자리에 세웠는가?”

그 답은 상당 부분 ‘일본 국민’이었다.

따라서 쓰다의 중국 비판에는 두 층이 있다. 하나는 중국 고전을 성역화하지 않는 뛰어난 문헌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으로부터 일본의 문화적 독립성을 끊임없이 증명하려는 근대 일본 국민주의이다. 이 둘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보아야 한다.

<종합 평가>

<津田左右吉の思想史的研究>은 결국 쓰다 개인에 관한 책인 동시에 일본 근대 자유주의의 자기모순에 관한 책이다.

‘신화는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할 자유를 위해 싸우면서도
‘일본이라는 국민공동체’ 자체는 의심하지 않았던 사람.

천황의 신성성을 부정하면서도
천황과 국민의 역사적 관계에는 애착을 품었던 사람.

중국문화를 철저하게 비판하면서도
그 비판의 최종 기준에서 일본 국민의 독자성을 놓지 않았던 사람.

이 세 가지 모습이 모두 쓰다 소키치였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난 뒤 쓰다를 한 문장으로 평가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쓰다 소키치는 황국사관을 무너뜨린 역사가였지만, 국민국가의 인식틀까지 무너뜨린 역사가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에나가의 진정한 공헌은 이 모순을 ‘쓰다의 변절’이라는 도덕적 비난으로 처리하지 않고, 메이지에서 전후 일본으로 이어지는 일본 근대 지식인의 역사적 구조로 분석하려 했다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72년의 이 책은 지금도 쓰다를 읽는 데 필요한 일종의 ‘두 번째 렌즈’이다. 특히 <중국사상과 일본사상>에서 느껴지는 중국에 대한 냉담함과 일본 문화의 독자성에 대한 확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이해하려 한다면, 이에나가의 이 책은 쓰다 자신의 저작 못지않게 중요하다.

다음 단계로는 이 책을 최근 읽으신 <중국사상과 일본사상> 및 「A Stinking Tradition: Tsuda Sokichi’s View of China」와 연결해, <쓰다 소키치의 중국관은 학문적 실증주의인가, 일본 국민주의인가>라는 주제로 세 자료를 삼각 비교하면 상당히 흥미로운 결론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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