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28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 권은선 - 교보문고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 권은선 - 교보문고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민족주의와 망언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
페미니스트 크리틱 3
김은실 엮음 · 권은선 , 김신현경 , 김은경 , 김주희 , 박정애 , 야마시타 영애 , 이지은 , 이혜령 , 정희진 , 허윤 저자(글)
더보기
휴머니스트 · 2024년 08월 12일







책 소개


이 책이 속한 분야국내도서 > 정치/사회 > 사회학 > 사회사상 > 민족주의



수상내역/미디어추천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경향신문 > 2024년 8월 2주 선정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매일경제 > 2024년 8월 2주 선정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한겨레신문 > 2024년 8월 3주 선정
미디어 추천도서 > 주요일간지소개도서 > 한국일보 > 2024년 8월 2주 선정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운동과 연구에서
놓치고 있던 것은 무엇인가

‘위안부’에 대한 최신의 탈식민 페미니즘 연구서

페미니스트, ‘위안부’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패러다임을 논하다
1991년 8월 14일 고(故) 김학순이 스스로 ‘위안부’임을 밝히고 피해를 공개 증언한 지 30년이 넘었다. 그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던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했고, 지금도 여전히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고 있다. 한편 ‘위안부’ 문제는 국경을 넘어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로 인식되었고, 홀로코스트 희생자와 같은 ‘글로벌 희생자’로 위치 지워지면서 지역을 넘은 초국적 텍스트로 논의되는 상황을 맞이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가운데 그간 ‘위안부’ 문제에 대해 탈식민 페미니즘 관점의 연구가 너무 적었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2014년부터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논문을 쓰고 쟁점을 토론하기 시작했다. 10여 년의 숙고와 토론의 결과가 바로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민족주의와 망언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이다. ‘위안부’ 문제는 여성을 향한 폭력의 잔혹성을 드러냄으로써 이를 막아야 할 필요성을 전 세계에 촉구했다. 하지만 그동안의 ‘위안부’ 운동은 국민의 지지를 얻는 과정에서 오랜 반일 감정과 민족주의에 의지했고, ‘강제로 끌려간 순결한 피해자’라는 상에 집중해왔다. 그 결과 ‘자발 대 강제’라는 이분법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온 망언의 정치에 대해 또다시 민족주의에 의지해 대응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지은이들은 ‘위안부’ 운동이 그동안 이뤘던 것과 하지 못했던 것을 함께 들여다보고, ‘위안부’ 문제를 국가/민족의 문제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여성의 문제임을 강조하는 ‘위안부’ 연구의 현황을 살펴본다. ‘위안부’ 문제를 탈식민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성찰하는 이 책은 민족주의와 망언이 서로를 강화하는 현실을 넘어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정한 회복과 지구적 정의를 실현하는 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


이 책의 총서 (3)
전체선택
전체목록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
장바구니

작가정보

엮음 김은실
인물정보
대학/대학원 교수


이화여대 여성학과 명예교수. 한국 사회에서의 지식 생산과 문화 권력,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정치와 사회 변화에 대한 관심을 업으로 하는 페미니스트 학자다. 민족 담론, 몸의 정치, 지식 권력과 여성 지식인의 등장, 국가폭력,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화정치, 페미니스트 평화학, 생태학 등이 주요한 관심 분야다. 동료 페미니스트들과 토론하고 글을 쓰고, 즐겁게 살고자 한다. 《여성의 몸, 몸의 문화정치학》(2001), 《코로나 시대의 페미니즘》(2020, 공저), 《더 나은 논쟁을 할 권리》(2018, 공저), 《글로컬 시대 아시아여성학과 여성운동의 쟁점》(2016, 공저) 등을 썼다.
펼치기

저자(글) 권은선
인물정보
대학/대학원 교수 영화평론가/칼럼니스트


중부대 연극영화학전공 교수. 영화평론가.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했으며 현재는 집행위원이다. 〈증언, 트라우마, 서사: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의 일본군 ‘위안부’ 영화〉(2019), 〈신자유주의 시대의 문화상품: 1990년대를 재현하는 향수/복고 영화와 드라마〉(2014) 등의 글을 썼다.
펼치기




더보기

목차

들어가며

서문 | 전시 성폭력을 다시 질문하다_김은실

1부.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 대한 성찰

1. 야마시타와 영애 사이에서: 틈새의 시점에서 본 일본군 ‘위안부’ 운동_야마시타 영애

2.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화한다는 것의 의미: 영화 〈귀향〉의 성/폭력 재현을 중심으로_권은선

3. ‘우리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물화되는가: 일본군 ‘위안부’ 표상과 시민다움의 정치학_허윤

4. 어째서 공창과 ‘위안부’를 비교하는가: 정쟁이 된 역사, 지속되는 폭력_박정애

5. 배봉기의 잊힌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 포스트식민 냉전 체제 속의 ‘위안부’ 문제_김신현경

2부. 일본군 ‘위안부’ 연구를 역사화하기

6. ‘위안부’ 망언은 어떻게 갱신되는가: 신자유주의 역사 해석으로 결속하는 수정주의 네트워크_김주희

7. ‘인정’ 이후 글로벌 지식장: 영어권의 일본군 ‘위안부’ 연구의 동향과 과제_김은경

8. 유동하는 ‘위안부’ 표상과 번역된 민족주의: 1991년 이전 김일면, 임종국의 ‘위안부’ 텍스트를 중심으로_이지은

9. 일본군 ‘위안부’는 셀 수 있는가: ‘숫자의 정치학’에서 벗어나 ‘바다의 기억’으로 나아가기_이혜령

10. 군 위안부 논의에서의 강제성 쟁점: 여성주의와 민족주의는 대립하지 않았다_정희진
펼치기

책 속으로



그동안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전장에 필요한 물자로서의 여성 동원이라는 차원보다 제국에 의한 식민지 여성의 강제 동원이라는 측면이 더 크게 다뤄져왔다. 비록 한국에서의 ‘위안부’ 논의가 두 측면을 어느 정도 포괄하고 있기는 하지만, 식민주의 청산이라는 인식 틀이 더 강하게 운동을 추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오랫동안 일본 정부와 싸워왔던 ‘위안부’ 운동이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를 일본군의 전쟁범죄에서 제외시킨 연합군의 잘못 또한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한 싸움의 의제로 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서문_전시 성폭력을 다시 질문하다〉, 37쪽

‘위안부’ 생존자들뿐만 아니라 활동가들도 식민 지배로 인해 민족적 피해를 겪었던 트라우마를 안고 있기 때문에, 짐작건대 국민기금과의 투쟁은 민족적 피해에 대한 분노로 표출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본 정부에 이 모든 책임을 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나,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든 하지 않든(고노 담화에서 한 번 인정했다) 피해자로서 받은 고통을 스스로 완화시켜가는 노력이 향후 전개될 운동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그렇다면 생존자와 활동가 들 간에 한층 돈독한 관계를 구축하고 서로 또 다른 상처를 내는 일 없이 문제 해결과 피해 치유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운동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이상이 내가 생각한 바였다.
- 〈1. 야마시타와 영애 사이에서: 틈새의 시점에서 본 일본군 ‘위안부’ 운동〉, 85~86쪽

중요한 것은 필름에 담는 세계, 그리고 대상과의 관계에서 취하는 태도일 것이다. 〈귀향〉은 일종의 국민 이벤트로서 일본군 ‘위안부’의 재현에 대한 시민들의 욕망이 응집된 영화다. 일본군 ‘위안부’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7만 5,000여 명의 소망이 투사된 영화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귀향〉은 무엇보다 국내 관객에게 보이기 위해 제작된 영화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일련의 질문이 발생한다. 도대체 이러한 의미를 가진 영화에서, 가해자의 시선으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성/폭력을 재현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관객에게 가해자의 시점으로, 가해자의 입장에서 영화적 디제시스에 참여하도록 추동한다는 것은 어떤 함의를 갖고 있는가.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한 이야기에서 왜 남성 가해자의 시선을 경유해야 하는가. 강간 피해 경험에 대한 증언은 왜 가해자의 시선으로 전도되었을까.
- 〈2.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화한다는 것의 의미: 영화 〈귀향〉의 성/폭력 재현을 중심으로〉, 121~122쪽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진 선량한 소비자들은 소녀상을 만들고 일본군 ‘위안부’ 관련 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운동에 참여하고 목소리를 낸다는 자기 효용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조선의 소녀’가 아닌 일본군 ‘위안부’, 중년의 일본군 ‘위안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한국인이라면’ 모두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나 피해자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구체적인 형상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무엇을’ 기억할지 목적어가 소거되어도 충분히 의미가 통용될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기억할 것인가를 묻지 않음으로써 단일한 ‘우리’라는 판타지가 생산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 〈3. ‘우리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물화되는가: 일본군 ‘위안부’ 표상과 시민다움의 정치학〉, 166~167쪽

‘공창과 ‘위안부’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우리가 질문을 던져야 할 쪽은 ‘성적 위안 시설’에 배치된 여성들이 아니라 ‘국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성 관리 체제를 유지했던 국가권력이다. 국가가 어떠한 인식과 목적에서 여성의 성을 남성에게 파는 것을 제도화하고, ‘위안 시설’이라는 명명으로 전쟁터의 병사에게 여성의 성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만들었으며, 이러한 제도에 대한 국내외 비판에 어떠한 논리로 대응해갔는지 등에 대해서 말이다.
- 〈4. 어째서 공창과 ‘위안부’를 비교하는가: 정쟁이 된 역사, 지속되는 폭력〉, 211쪽

민단은 배봉기 친척의 바람을 빌려 그녀를 ‘제국 신민’으로서 살았던 식민지기의 고향인 충청남도 신례원, 꿈에서는 자주 가지만 ‘집’도 ‘아는 사람’도 없을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 사람으로 재현하고 대변하고자 했다. 반면 조총련은 배봉기가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분단된 한반도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재현하고 대변하고자 했다. 양쪽 다 배봉기의 생애사에서 특정한 부분만을 단일하게 재현하고 대신 말함으로써, 그녀가 오키나와에서 사망했다는 데서 비롯하는 다양하고도 풍부한 의미를 삭제하고 남북한 체제 대결을 재상연한 것이다. 식민주의와 냉전, 국가 및 남성에 의한 여성 폭력을 하나의 육체에 응축한 채로 평생 국가 간 틈바구니에서 살았던 배봉기라는 존재, 그러한 존재의 복합성과 그가 귀향에 대해 가질 수밖에 없는 복잡다단한 감정의 결을 재현하고자 하는 시도가 우선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유골을 어느 일방의 소유로 결론 내리기보다 오키나와의 이웃들과 고향의 사람들이 함께 망자를 애도하는 방식을 고안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 〈5. 배봉기의 잊힌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 포스트식민 냉전 체제 속의 ‘위안부’ 문제〉, 258~259쪽

망언이 지속될수록 피해자의 말은 망언의 프레임에 갇힐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망언은 피해자를 속박하고 검열해 2차 피해를 만들어낸다. “피해자들에게 가장 심각한 고통을 초래하는 비난과 소문 문제는 법적 조치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권김현영은 일찍이 성폭력 2차 피해의 사회적 공모 성격에 주목했다. 그러므로 피해 부정과 모델 피해자상에 잠식된 망언의 관성을 넘어 ‘위안부’ 문제에 대한 페미니스트 공유 지식의 지대를 확대하고자 하는 노력은 여성이 경험한 폭력을 새로운 지식으로 만들어내고자 하는 사회적 연대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안부’ 망언을 사유함에 있어 망언의 발신지와 수신지에서 누가 피해자다운 피해자로 승인되고 있는지, 그것이 어떻게 여성들의 삶에 대한 이해 불가능성을 만들어내고 있는지를 우선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 〈6. ‘위안부’ 망언은 어떻게 갱신되는가: 신자유주의 역사 해석으로 결속하는 수정주의 네트워크〉, 301~302쪽

영어권 학계는 국제사회의 오랜 논의에 기초해 다양한 쟁점을 생산해왔다. ‘위안부’ 실태를 규명하려 했던 초기 단계를 넘어 전시 성폭력이나 구조적 성폭력을 중시하는 연구, 국제적으로 공인된 성 노예론을 재확인하고 지식의 생산 과정을 탐색하는 연구와 그를 비판하는 연구 등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그렇다면 초국적 역사로서 ‘위안부’ 연구의 향후 과제는 무엇일까? 그 무엇보다, 그동안 보편적 가치로 여기던 ‘초국적 이상’을 심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초국적 이상’이 강조되는 가운데 지역성이 삭제되고 소수자가 주변화되는 타자화가 재생될 수 있기 때문이다.
- 〈7. ‘인정’ 이후 글로벌 지식장: 영어권의 일본군 ‘위안부’ 연구의 동향과 과제〉, 348~349쪽

종주국 하급 병사가 자국 여성에 대한 배신감을 조선인 ‘위안부’를 통해 해소하고 있다면, 민족의 남성은 ‘인기가 더 좋은’ 조선인 ‘위안부’에게서 민족적 우월감을 찾으려 한다. 이들은 ‘위안부’를 완전히 성애화된 타자로서 인식한 후, 제국 내부의 남성 권력 관계 또는 제국-식민지 남성의 권력 관계를 조선인/일본인 ‘위안부’ 관계에 투사하고 있다. 김일면-임종국이 보인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도 불구하고 병사의 증언과 이들의 서술이 위화감 없이 뒤섞일 수 있는 것은 양자의 시각이 제국으로부터 피식민 민족으로만 이동할 뿐, 근저에 깔린 여성 인식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결국 김일면-임종국은 제국 병사의 시선을 오직 민족적 적대선 저쪽에서 이쪽으로 번역하는 결과를 낳았다.
- 〈8. 유동하는 ‘위안부’ 표상과 번역된 민족주의: 1991년 이전 김일면, 임종국의 ‘위안부’ 텍스트를 중심으로〉, 369쪽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한 상황은 현재 한계에 다다랐다. 우선 신고와 등록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승인받는 권위적일 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형식이다. 국민기금부터 근래의 정의기억연대 논란에 이르기까지, 법적 등록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사회적 맥락에 따른 다양한 입장의 표현을 억누르고 단일한 대응을 강제하는 물적 토대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또한 이는 ‘위안부’ 운동의 대중화를 자극했던 문학/영화 텍스트의 서사 양식을 지배하는 형식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커밍아웃이 꼭 정부에 등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면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에 국적이라는 경계를 부여해 고통과 의미의 경중을 달리하는 인식의 형성에 부지중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 〈9. 일본군 ‘위안부’는 셀 수 있는가: ‘숫자의 정치’에서 벗어나 ‘바다의 기억’으로 나아가기〉, 418~419쪽

한일 양국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또한 이른바 ‘외국 전문가들’이 수행하는 망언의 정치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발은 위안부가 매춘 여성이 아니라는 주장을 뼈대로 삼은 민족주의를 작동시킨다. 이와 같은 논의가 반복되는 상황에서는 끊임없이 순결하고 수동적인 피해자상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 민족주의는 한국의 여성운동이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동력이 되었지만, 여성운동 스스로 선택한 아킬레스건이기도 했다. 군 위안부가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남성 공동체의 소유 인식, 민족주의의 상처로 기억되는 한 군 위안부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는 묵살되기 쉽다.
- 〈10. 군 위안부 논의에서의 강제성 쟁점: 여성주의와 민족주의는 대립하지 않았다〉, 464쪽
접기

출판사 서평


1. ‘위안부’, 제국주의 전쟁과 여성의 문제
- ‘위안부’ 공론화의 시작점은 1991년이 아니라 1946년 도쿄전범재판이었다
-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연합군도 ‘위안부’ 문제에 책임이 있다

《‘위안부’, 더 많은 논쟁을 할 책임》을 기획하고 엮은 여성학자 김은실은 탈식민 페미니즘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여성 문제를 조명해왔다. 그는 이 책의 서문인 〈전시 성폭력을 다시 질문하다〉에서 생존자들이 자신들의 피해 경험을 끊임없이 증언하고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당사자 운동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물음으로써 책의 문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한국의 ‘위안부’ 운동은 한국인 ‘위안부’를 강제된 피해자로, 일본인 ‘위안부’를 자발적 참여자로 구별함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곤경에 처하고 있다. 한국인 ‘위안부’가 전형적인 피해자상에서 벗어나 보일 때마다 강제된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선택한 것이라는 공격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안부’ 운동이 억압받은 민족의 여성이라는 틀 안에서 움직이는 한, ‘위안부’ 문제를 보편적 여성 인권의 문제로 바라볼 여지도 줄어든다.

여기서 김은실은 ‘위안부’ 문제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난 뒤 연합국이 일본의 전쟁범죄를 명확하게 밝히지 못한 데서 비롯했다고 본다. 일본 제국이 저지른 전쟁범죄를 심판하기 위해 1946년에 열린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전범재판)에서 ‘위안부’ 문제는 전쟁범죄 항목에 포함되지 못했다. 국제형사재판소의 조사관들은 ‘위안부’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고 관련 자료를 수집해놓았다. 여성주의적 시각이 부족한 시대였다고 하더라도, ‘비인도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들여다보면 여성을 군수물자이자 성 노예로 동원한 전쟁범죄임이 명확하게 드러날 터였다. 잘못 끼워진 단추는 1991년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벌어진 집단 성폭력에 대해 페미니스트들이 연대하면서 조금씩 바꿔 달 수 있었다. 페미니스트들은 전범재판에서 집단 성폭력이 전쟁범죄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데 원칙적으로 동의했고, 성폭력을 국제형사법의 문제로 등록시킬 수 있었다. 그렇지만 여성에 대한 폭력을 예방하는 문제는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민족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이 갖는 다층적인 함의가 납작해졌고 집단 성폭력은 민족 간 갈등이라는 틀에서만 법적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은실은 ‘위안부’ 문제 공론화의 시작점을 1991년(김학순의 공개 증언)보다 이른 1946년(도쿄전범재판)으로 돌림으로써 ‘위안부’에 대한 민족적/국가적 관점에서 벗어날 것을 요청한다. ‘위안부’를 제국주의 전쟁과 여성의 문제로 조명해야 문제의 본질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국제 연대를 만들어갈 수 있다는 엮은이의 주장은 ‘위안부’ 문제의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유용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전장에 필요한 물자로서의 여성 동원이라는 차원보다 제국에 의한 식민지 여성의 강제 동원이라는 측면이 더 크게 다뤄져왔다. 비록 한국에서의 ‘위안부’ 논의가 두 측면을 어느 정도 포괄하고 있기는 하지만, 식민주의 청산이라는 인식 틀이 더 강하게 운동을 추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오랫동안 일본 정부와 싸워왔던 ‘위안부’ 운동이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 ‘위안부’ 문제를 일본군의 전쟁범죄에서 제외시킨 연합군의 잘못 또한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한 싸움의 의제로 제기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 〈서문_전시 성폭력을 다시 질문하다〉, 37쪽


2.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 대한 성찰
- 식민 지배에 상처 입은 지식인 활동가들의 투쟁은 아니었던가
- 성/폭력을 ‘사실적으로’ 재현하겠다는 욕망은 어디서 비롯하는가
- ‘소녀상’에 대한 윤리적 소비로 운동을 대신할 수 있는가
- 누가 왜 공창과 ‘위안부’를 비교하는가
- 1975년 최초의 ‘위안부’ 증언자 배봉기는 어째서 잊혔는가

이 책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뉜다. 〈1부. 일본군 ‘위안부’ 운동에 대한 성찰〉은 지난 30년 동안 한국의 ‘위안부’ 운동이 무엇을 해왔고 어떤 한계가 있었는지를 운동 내부의 긴장과 활동가의 고민, 영화에서 성/폭력 재현의 문제, ‘소녀상’을 둘러싼 해석, ‘위안부’ 운동에서 배제된 공창제(公娼制) 문제, 민족의 시선에서 벗어난 ‘위안부’라는 주제로 살펴본다.

1부를 여는 〈1. 야마시타와 영애 사이에서: 틈새의 시점에서 본 일본군 ‘위안부’ 운동〉을 쓴 야마시타 영애는 ‘위안부’ 운동에서 한일 간 가교 역할을 했던 경험을 찬찬히 풀어낸다. 자이니치(在日) 2세로서 정체성을 고민하던 야마시타 영애는 한국에서 여성학을 공부하고 ‘위안부’ 운동에 초창기부터 함께하면서 여성 문제에 대한 시야를 넓혀갔다. 하지만 한국의 ‘위안부’ 운동이 식민 지배에 대한 상처를 회복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여성 인권을 위한 국제 연대가 차츰 무너져간 것이 아닐까 돌아본다. 이어서 권은선은 〈2. ‘용납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화한다는 것의 의미: 영화 〈귀향〉의 성/폭력 재현을 중심으로〉에서 2016년 개봉 후 35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귀향〉을 면밀하게 비평한다. 〈귀향〉의 문제는 고통을 적나라하게 재현하는 방식이 여성의 고통 자체가 아니라 민족/남성의 죄책감과 수치심만을 두드러지게 하는 데 있다. 스펙터클은 고통을 재현하는 데 실패하고 ‘위안부’를 신성한 존재로 대상화하고 만다. 허윤의 〈3. ‘우리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어떻게 물화되는가: 일본군 ‘위안부’ 표상과 시민다움의 정치학〉은 마찬가지로 ‘위안부’가 ‘순결한 희생자’라는 이미지에 고착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지 보여준다. 현재 ‘위안부’의 대표적인 형상은 ‘소녀상’이다. “친구처럼 편안한”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를 대중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이와 관련된 ‘윤리적 소비’는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납작하게 만들고 논의의 진전을 가로막는다.

‘위안부’ 운동이 어떤 식으로 국제 연대의 가능성을 좁혀왔는지는 박정애의 〈4. 어째서 공창과 ‘위안부’를 비교하는가: 정쟁이 된 역사, 지속되는 폭력〉에서도 잘 드러난다. ‘위안부’가 공창이냐 아니냐는 한국 민족주의 진영과 일본 우익 진영 사이의 주된 논쟁점이었다. 우익의 역사 부정론에 대항하기 위해 순결한 피해자라는 상에 의지하는 순간, 여성의 주체성과 자율성은 훼손되며 당사자의 목소리도 사라지고 만다. 김신현경의 〈5. 배봉기의 잊힌 삶 그리고 주검을 둘러싼 경합: 포스트식민 냉전 체제 속의 ‘위안부’ 문제〉 역시 ‘위안부’ 운동이 무엇을 배제해왔고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가 관건임을 알려주는 글이다. 1975년 고 배봉기의 증언은 현재까지 알려진 최초의 ‘위안부’ 증언이다. 종전 후 오키나와에 체류하던 배봉기의 삶은 남북한 냉전 구도와 더불어 미군정에서 일본 정부로 행정권이 이양된 오키나와의 역사와 맞물려 있었다. 공개 증언에 대한 일본과 남한의 반응은 정반대였고, 배봉기의 삶과 죽음이 갖는 의미는 민단과 조총련 사이의 분쟁으로 축소되었다. 배봉기의 사례는 국경을 넘어선 관점을 통해서만 보이는 것이 있음을 알려준다.

독자들은 민족/국가의 안팎을 넘나드는 고민이 운동의 안팎에 대한 고민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다양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면서 ‘위안부’ 운동이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3. 일본군 ‘위안부’ 연구를 역사화하기
- ‘위안부’는 합리적인 섹스 계약의 당사자라는 주장이 망언인 이유는 무엇인가
- ‘위안부’ 문제는 어떻게 영어권 학술계의 핵심적인 쟁점이 되었는가
- 전쟁문학을 통해 재현된 ‘위안부’ 서사는 어떻게 제국의 시선과 공모하는가
- ‘위안부’ 피해자들을 숫자로 셈할 때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 ‘위안부’ 문제에서 여성주의와 민족주의는 실제로 대립했는가

〈2부. 일본군 ‘위안부’ 연구를 역사화하기〉는 ‘위안부’ 문제가 보편적 여성 인권과 지구적 정의라는 의제로 부상하면서 벌어진 논쟁을 망언의 국제 네트워크, 영어권 학술계의 ‘위안부’ 연구 동향, 탈식민 남성의 언어로 번역된 ‘위안부’ 서사, ‘숫자의 정치’에 매몰된 ‘위안부’의 현실, 여성주의와 민족주의의 허구적 대립이라는 관점으로 톺아본다.

김주희의 〈6. ‘위안부’ 망언은 어떻게 갱신되는가: 신자유주의 역사 해석으로 결속하는 수정주의 네트워크〉는 ‘위안부’들이 강제로 동원된 피해자가 아니라 노동 계약의 당사자라고 주장한 존 마크 램지어의 ‘망언’을 논파하고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역사 부정론 네트워크를 집중 조명한다. 램지어는 게임이론에 근거해 ‘위안부’ 문제를 ‘합리적으로’ 분석했다고 주장하지만, ‘경제적 인간’이라는 틀은 여성들이 처한 현실을 왜곡하고 부정론자들의 주장을 정당화할 뿐이다. 부정론자들의 네트워크에 대항하려면 현장의 여성주의와 페미니스트 공유 지식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논점이다. 한편 김은경의 〈7. ‘인정’ 이후 글로벌 지식장: 영어권의 일본군 ‘위안부’ 연구의 동향과 과제〉는 ‘위안부’ 문제가 글로벌 지식장의 의제에 오른 뒤 영어권 학술계에서 ‘위안부’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또 얼마나 생산해왔는지 분석한다. 페미니스트들은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성폭력을 전시에 국한해야 하는지, ‘위안부’를 성 노예로 간주하는 것이 적합한지를 두고 논쟁을 벌였다. ‘위안부’에 대한 담론을 조명하는 또 다른 시도는 이지은의 〈8. 유동하는 ‘위안부’ 표상과 번역된 민족주의: 1991년 이전 김일면, 임종국의 ‘위안부’ 텍스트를 중심으로〉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피해자들의 증언이 있기 이전, ‘위안부’와 전시 성폭력에 대한 기억은 참전군인의 체험담 같은 전쟁문학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났다. 자이니치 학자 김일면의 책 《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와 문학평론가 임종국이 이를 번역한 《정신대실록》은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 병사의 시선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탈식민 남성의 문제의식이 여성에 대한 비인격화와 공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민족주의 담론이 제국주의 담론과 단순히 대립하고 있지 않음을 보이는 이 글은 당사자의 증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반증한다.

이어서 이혜령의 〈9. 일본군 ‘위안부’는 셀 수 있는가: ‘숫자의 정치’에서 벗어나 ‘바다의 기억’으로 나아가기〉는 당사자의 증언을 동력으로 삼는 ‘위안부’ 운동과 연구가 ‘숫자의 정치’에 얽매인 현실을 차분하게 들여다본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두 고령인 까닭에 시간이 지날수록 ‘위안부’들의 숫자는 줄어간다. 그런데 피해자들이 용기 내어 증언한 데는 전쟁과 죽음의 공포가 바닥에 깔려있고, 이는 숫자로 셈해질 수 없는 것이다. 이혜령은 ‘위안부’ 피해자들이 더 낫게 생활하도록 돕는 과정에서 숫자의 정치를 피할 수 없지만, ‘위안부’를 법적 대상으로 등록하는 것을 넘어서는 인식론이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마지막으로 정희진은 〈10. 군 위안부 논의에서의 강제성 쟁점: 여성주의와 민족주의는 대립하지 않았다〉에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집약하고, 강제와 자발의 이분법이 유지되는 한 여성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의 대립이라는 구도가 허구적임을 짚어낸다. 한국의 ‘위안부’ 운동은 일본인 ‘위안부’를 운동에서 배제함으로써 강제와 자발의 이분법에 발목을 잡혔다. 국경 밖에서는 일본인 ‘위안부’와, 국경 안에서는 기지촌 여성들과 연대하지 못한 ‘위안부’ 운동이 사실상 “여성의 이름으로 민족(국가)의 피해를 대변해왔다.”는 지적이 아프게 다가온다.

정희진은 글을 맺으며 여성의 피해가 국적에 따라 다르다는 입장, 그리고 전시 성폭력과 평시 성 산업을 분리하는 입장 모두에서 벗어나 피해자를 보살피는 회복적 정의라는 관점으로 ‘위안부’ 문제를 살펴보자고 제안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민족주의와 망언의 적대적 공존을 넘어 ‘위안부’ 피해자들의 진정한 회복과 지구적 정의를 실현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접기

기본정보

ISBN 9791170872290
발행(출시)일자 2024년 08월 12일
쪽수 472쪽

==

     
위안부 운동에 대한 성찰과 연구방향에 대하여 새창으로 보기 구매
'위안부' 문제는 그것이 발생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얼마나 피해자들의 증언이 정확한가, 당시의 법이나 규칙에 얼마나 부합하거나 위반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겪은 현실을 다른 맥락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맥락 혹은 질문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이다.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 운동과 담론에 대한 쟁점을 들여다보고 위안부 문제를 탈식민주의적 관점으로 바라본다.  



저자는 '위안부 연구'와 관하여 이브 세즈윅의 '편집증적 읽기와 회복적 읽기'를 가져와 제시한다. 편집증적 읽기는 글을 읽기 전에 이미 텍스트에 대한 의심을 전제하며 그것을 문제제기하는 의심의 방법론이다. 반면 회복적 읽기는 자신이 알고 있는 앎의 한계에 부딪치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단정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선언적 지식에서 벗어나는 앎의 형태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는 의미에서 편집증적 읽기보다 열려있는 관점이다. 당연히 저자는 후자의 읽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간단하게는 책을 읽는 방식이지만 사회적으로 다양한 상황의 복잡한 문제에서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주목한 점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정대협의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인식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조선인 위안부와 일본인 위안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민족주의, 보편주의 관점에서.

두 번째,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은 없었는가? 램지어가 주장하는 대로 계약에 따른 경제적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것인가.

세 번째, 소녀상에 설정된 고정 이미지는 어떻게 볼 것인가. 위안부 관련 판매 굿즈에 돈을 내는 사람들의 심리는? 

네 번째, 영화 귀향에서처럼 피해자를 두둔하는 방식이 결국 가해자들의 방식대로 재현된다면 이는 또 하나의 폭력 방식이 되는 것이 아닌가.



1. 정대협은 1990년대 초 위안부 피해자들의 대책 마련과 후원을 위해서 탄생한 민간 단체다. 몇 년전 정대협 기금 논란이 터진 이후에는 그 성격이 . 고노 담화 이후 정대협은 자신들이 위안부 문제를 바라보는 문제를 노출시켰는데 정대협이 발표한 내용은 조선인 위안부는 강제로 끌려갔기 때문에 성 노예적 성격을 부여할 수 있으나 일본인 위안부는 공창 출신이 많았기에 동일한 성격을 부여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일본인 학자 야마시타 영애는 이는 잘못된 인식이라고 이야기한다. 정대협의 관점은 민족주의적 인식이 농후한 인식이었다 생각된다. 

야마시타 영에는 또 위안부 피해 보상에 대한 국민기금 정책에서도 일본 정부가 책임을 지지 않고 국민기금에서 피해자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것은 책임을 피하기 위함이라 하여 거절한 것에 대해 불편을 느꼈다고 한다. 정작 피해 당사자들의 의견은 반영된 것인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이 문제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같은 피해자라고 해서 다 같은 대응을 원하는 것은 아닐 것 같다.



2. 박유하가 한참 논란이 될 때가 있었는데 램지어의 논문 발표 이후에는 그 파장도 그렇고 논란이 저물 줄을 모른다는 생각이다. 램지어는 <태평양전쟁기 섹스 계약> 논문에서 '모든 인간은 합리적 경제인'이라는 경제적 이유를 들어 위안부 여성들이 합리적 계약에 의한 선택이라는 논리를 편다. 그러나 합리적 인간으로서의 경제인이라는 생각에 계층 간 권력 관계는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모든 이들에게 적용될 수도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돈이면 다 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기존의 패권적 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결과가 초래될 수 있다. 그의 논문은 식민 지배를 옹호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성 매매 산업조차도 옹호하고 있는 것이 문제적으로 보인다. 여전히 '반일'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회 정치적 상황에서 그의 주장은 민족주의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좌초시킬 소지가 다분하다. 



3. 소녀상은 늘 정형화된 모습이다. 단발 머리에 한복을 입고 두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댄 모습. 이런 소녀상의 모습이 위안부가 할머니에서 소녀로 이미지화되는 데 한몫을 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소녀상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면 마치 피해자의 신체가 훼손된 것처럼 대응하는 경우도 있으니 말이다. 해외 각국에 전시 성폭력 문제의 해결 촉구를 위해 소녀상이 세워지고 있다. 이를 철거하려는 일이 발생할 때마다 현지에서도 그렇고 국내 정치로도 끊임없이 논란이 된다. 소녀상은 어느새 소비되는 물체처럼 되어 버렸다. 

과거 나는 위안부를 상징하는 나비, 할머니들이 그린 그림이 담긴 에코백이나 노트 등 여러 굿즈 물품을 산 이력이 있다. 내 생각은 그랬다. 직접 위안부 할머니를 대하지는 못하지만 내가 산 물품이 그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내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무언가를 했고,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식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은 것은 아니었는지 반성을 하게 되었다. 사실은 이 문제 자체에 대한 본질에 대해서 진지한 고민은 없이 말이다. 



4. 영화 <귀향>은 역사적 사건, 폭력을 어떤 방식으로 재현해야 하는가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으나 책에서 언급하는 장면의 내용, 카메라 워크 등을 떠올리는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힘겨웠다. 재현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을 비단 현재에 노출시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영화의 내용과 구성에는 주관적인 입장이 들어가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취하고 뺄 것인가에 따라 영화의 내용은 달라진다. 하물며 같은 내용을 조감도로 보느냐 투시도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비춰지기도 한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감독 및 스탭진이 여러 개의 장치를 두었으리라 짐작할 만하지만 거기에 과연 피해자들의 입장은 고려되었는가 하는 것은 의문점이 있다. 주체성이 부정되고 무기력한 모습을 보는 일은 현재도 역시나 불편하다. 위안부 여성들이 겪은 성폭력을 포르노그래피적으로 표현한 설정은 문제적이라 할 수밖에 없다. 



5. 일본 제국주의와 위안부 문제는 한국과 일본의 대응으로 인해 이슈가 세계적으로 뻗어나갔다. 이로써 위안부는 글로벌화된 피해자 또는 희생자가 되어 보편 인권의 문제에서 다루어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인권과 보편성 측면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것에 부족함은 없는가 생각해보게 된다. 어느 제국주의든 전시 성폭력에 노출된 피해자들이 있었다. 다만 상황은 지역적으로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를 보편적으로 정리가 가능하냐 하는 문제다. 반대로 지역과 맥락을 고려하면 보편 인권과 폭력에 대한 피해의 문제에 대한 고민을 모으지 못한다는 단점이 생긴다. 글로벌 보편적 관점은 좋으나 차별되고 배제되는 소수자에 대한 고려가 있어야 할 것이라는 필진의 말에 공감했다. 



향후 위안부 담론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까. 이제 정말 다양한 시각에서 고민해볼 때가 되었다.  



1991년 이전 ‘위안부‘ 담론은 당사자가 드러나지 않은채 주로 재현/표상(re-presentation)으로만 존재했다. 익히 알려져 있듯, 재현/표상은 어떤 실재를 다시 (re, 再) 앞에 존재하게(presentation, 現)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표상은 문체, 수사적 표현법, 설명의 기교, 관습, 제도 등 역사적·사회적 여러 조건에 기반을 둔 표상 체계를 통해 생산되고 인식 주체의 위치성과 이데올로기에 연루되기 때문에, 언제나 있는 그대로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변형된 것으로 나타난다.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변형된 것‘으로서의 표상이 실재하는 대상을 배제하고 표상 기술에 의존해 하나의 존재로 인식된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피해자가 공식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던 ‘위안부‘ 문제야말로 표상이 존재를 대체한 가장 명시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참전 군인의 회고 속에 등장한 ‘위안부‘나 이를 민족 수난사의 상징으로 번역한 ‘위안부‘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재현 주체의 욕망과 당대 사회의 성차별적 표상 체계에 연루된 것이며, 그러한 욕망에 따라 계속해서 변형 · 증식되어 왔다. - P388~389




미학자 자크 랑시에르(Jacques Rencière)는 끔찍한 일을 이미지로 만든다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비인간성, 즉 인간성이 부정되는 과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미지는 한 표현을 다른 표현으로 대체함으로써 ‘본래의‘ 말이 할 수 있는 것보다 사건의 감각적 직조를 더욱 강렬하게 체험하게 만드는 형상이다. 따라서 형상화된 것은 사건의 ‘있는 그대로의 현존‘일 수없다. 그러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의 재현에 대한 질문을 바꿔야 한다. 가장 중요하게 다뤄야 할 점은 ‘가시적인 것을 분배하는 방식 내에 희생자를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절대 홀로 작동하지 않으며, 가시성의 장치(apparatus of visuality)에 속한다. 이미지로 재현된 신체의 지위와 그 신체가 받아야 하는 주의) 유형은 그것을 규제하는 가시성의 장치 속에서 만들어진다. - P108

일본군 ‘위안부‘ 운동 단체에 후원금을 보내거나 후원 물품을 구매하는 데에는 ‘돕는다‘는 술어가 사용된다. 사회적 약자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에게 금전적·정서적 지원을 한다는 의미다. 이처럼 ‘선한 의도‘는 소녀상을 방문하거나 일본군 ‘위안부‘ 관련 굿즈를 구매하는 시민들에게서도 발견된다. 자신의 작은 일상적 행동이 ‘우리 할머니‘들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시민됨과 주체성을 확인하는 데 따른 효용감을 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단체가 생활 지원 외에 다른 사업을 하고 있다든가 1993년 일본군 ‘위안부‘ 특별법이 제정되어 정부 차원의 생활 지원이 제공되고 있다는 것보다, ‘우리 할머니‘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우선한다. - P168

램지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계약이라는 합리적 경제행위에 참여한다는 주장을 게임이론을 도입함으로써 사실로 전제하고 있다. 그는 게임이론이라는 이론적 틀을 표방하고 있을 뿐, 논문에서 어떤 수학적 계산도 내놓지 않는다. 그가 표방하는 게임이론은 업소와 여성 간 "신뢰할 수 있는 약속(credible commitment)"에 기반한 게임적 상황을 전제하는 도구로 소환된다. 이러한 경제 논리는 게임의 규칙과 질서를 지정하고 공유한 자들이 만들어낸 이데올로기적 가상에 의존하고 있다. 합리적 인간으로서의 경제인이라는 모형을 통해 사회적 현실을 분석할 때 현실과 동떨어진 지식이 생산될뿐 아니라, 지배적 권력관계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기존의 패권적 경제 질서를 옹호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무엇보다 이러한 모델은 인간의 본성을 동질화하고 일반화하려는 본질주의적 보편주의에 근거해 사람들 간의 차이를 배제와 차별의 이유로 자연화하고 정당화하는 원리로 사용된다. - P286

리지웨이에 따르면, 성에 대한 공통된 문화적 믿음으로서의 성별 고정관념은 사회에서 성별 관계의 물질적 구조를 만들어내는 암묵적인 문화적 규칙, 다시 말해 공유 지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공유 지식이 다시금 사회적 관계와 게임적 규칙을 만들어내는 원리로 작동하면서 성별 불평등을 강화하고 있다는것이 그의 주장이다.
마이클 최에 따르면, "공유 지식은 집단적 조정을 도울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적 정체성, ‘상상된 공동체(imaginedcommunity)‘를 창출할 수도 있다." 램지어 논문의 주장은 일본 우익뿐 아니라 한국과 미국의 역사 수정주의 집단과 결합하고 강화"되어 자신들의 입장을 집단화하고 있다. - P296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법적 등록의 대상으로 범주화하고 거기에 안착한 상황은 현재 한계에 다다랐다. 우선 신고와 등록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임을 승인받는 권위적일뿐만 아니라 배타적인 형식이다. 국민기금부터 근래의 정의기억연대 논란에 이르기까지, 법적 등록이 ‘위안부‘ 피해 생존자들의 사회적 맥락에 따른 다양한 입장의 표현을 억누르고 단일한 대응을 강제하는 물적 토대로 작용했음을 부인할수 없다." 또한 이는 ‘위안부‘ 운동의 대중화를 자극했던 문학/영화 텍스트의 서사 양식을 지배하는 형식이 되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커밍아웃이 꼭 정부에 등록하는 방식으로 전개되지 않았다면 일본군 ‘위안부‘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를 상상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무엇보다 일본군 ‘위안부‘에 국적이라는 경계를 부여해 고통과 의미의 경중을 달리하는 인식의 형성에 부지중에 기여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 P418

민족주의와 젠더가 맺는 관계는 상황적이다. 그것은 로컬의 역사적 맥락과 해당 공동체 구성원의 행위성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 P462

일본군 ‘위안부‘의 역사는 이제 관련 당사자나 ‘귀속국‘을 떠나 국제적인 지평에서 논의되고 있다. 캐럴 글럭은 ‘이동하는 비유‘로서 글로벌 기억 경관에 등장한 일본군 ‘위안부‘에 주목했다. 그는 ‘위안부‘가 홀로코스트 희생자처럼 ‘상징 권력‘을 가진 ‘글로벌 희생자‘로 보편화되는 순간, 그것은 일본이나 아시아인의 손을 떠난 문제가 된다고 했다. 또한 미국에서 ‘위안부‘ 연구를 이끈 마거릿 스테츠는 미국 대학에서 초국적 텍스트로셔 ‘위안부‘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와 필요성을 제기하며 ‘위안부‘학의 가능성을 전망했다. 이것은 ‘위안부‘ 역사가 국제사회의 인정 체계 안으로 편입돼 글로벌 기억 장소로 이동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 P315

- 접기
거리의화가 2024-09-24 공감(16) 댓글(1)
Thanks to
 
공감

No comments: